다메섹님의 말씀에 모두 공감합니다. 죄에 대해서, 성경은 "행위에서 마음의 죄로 죄의 범위를 넓혔다."라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구원의 기준인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니까요. 다만, 죄에 대해서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을 하자면. 죄의 개념이 '나쁜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떨어지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욕을 품는 나쁜 마음(윤리적인 의미)이 아닐지라도. 어떠한 건전한 마음(윤리적인 의미) 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떨어져서 내가 주인이 될 때에 기인한 것이라면 '죄'가 되죠. 창세기와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은 계속하여 하나님보다 자신을 우위에 두려는 모습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 되려하죠." 그것이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인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하나님도 버릴 수 있는 권한(자유의지)이 주어진 엄청난 권위'를 부여받고 창조된 존재이고요. 그러기에 그런 "죄"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 "죄"를 해결하여 주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그만큼 고귀하고 수준 높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 또 감사하네요.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게 하고,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 씨앗이 전 원죄라고 봅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완벽히 역사적으로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그 아담이라는 상징이 부족으로 존재했든, 아니면 유인원 상태의 인간들 중에서 단 한 명을 아담으로 지정하셨든, 아니면 정말로 최초의 인간이었든 간에, 분명히 최초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인간의 대표적 주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건이 존재했다고 보고, 그것이 원죄라고 봅니다. 이는 아담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옮겨가고요. 이 원죄란 혈육을 통해 내려오는 dna 안의 무언가가 아니라 정신에서 정신으로, 마치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임하실 수 있는 그 마음이 존재하듯이, 아주 다른 차원의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비유더라도, 단순한 교훈 즉 우리 모두는 죄를 짓는다 따위의 교훈을 위한 비유는 아니라고 봅니다.
원죄를 굳이 다른차원의 무언가일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굳이 따지면 하나님이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만한 존재로 만들었는데 아담이 특별히 특이해서 죄를짓고 그거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라고 해야하는건데 그런식으로 해석할수도 있겠지만 전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죄를 안짓는존재로 만드시진 않으신거 같습니다.
창세기가 시적 내용이라는 것은 팩트가 아니라 하나의 설일뿐입니다 창세기 묘사를 보면 족보 같은 디테일성을 지니고 있고 뿐만 아니라 사건 묘사도 보면 심리적인 진행이나 상황적인것과 지리적인 디테일까지 담고 있어서 의미를 위한 상징성 같은 그런 류의 글로 보기엔 어렵습니다 시적 내용으로 보는 것은 내용 묘사를 볼때 억지에 가깝습니다 창세기를 볼때 1장은 그냥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라는 것을 알리는 목적으로 그냥 만물이 창조되어지는 일에 포커스를 맞추어 시간적 순서로 사건을 묘사하였고 2장 부터는 아담과 하와의 일을 중점적으로 다루기 위해 그 두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고 다른 것은 배경으로 두고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 듯 하고 또 창세기는 미래에서 지나온 과거를 말하는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서 가지고 있었던 신념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서로 한몸이 되는 이치를 과거 창세기 이야기에서 발견하여 삽입해놓은 것도 있습니다 마카베오스에는 창세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그대로 보고 있고 시적 내용으로 보고 있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예수님과 이혼에 대하여 하나님이 짝지어 준 대목에서 남자의 갈빗대에서 여자를 탄생시킨 그 내용 그대로를 믿고 있음을 엿볼수 있고 고린도서에서도 바울이 성별의 질서를 말할때 남자에게서 여자가 탠생했다고 하며 창세기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고 계시록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은 자의 누리는 상으로 생명나무의 낙원을 소개하고 있는 데 생명나무가 사실이라면 선악과도 사실이죠 또 아담처럼 죄 짓지 않는 자도 그 에게 죄의 댓가인 사망이 왕노릇 했다고 바울이 말하니 그냥 죄지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죄성을 유전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죄의 댓가인 사망이 왕노릇하는 지배에 갖히는 죄인임을 알수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무지),거기에 대해서 묻지 않고, 개념조차 잡히지 않은, 자기 감정대로 생각대로 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기가 남보다 잘나보이고 싶은 감정인데 궁극적으로는 악한거죠. 선한 욕심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인 듯 합니다. 자기발전을 통해 남을 돕는다는 것 또한 자기만족일 수 있고, 결국에는 자기발전이 없다면 남을 도울 수 없다는 편협적인 생각에 빠지기 때문에 남는 것은 자기욕심일 뿐인 거죠. 정말 대단한 사람은 본인이 가난해도 남을 돕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거짓말이라고 판명난다해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하셨음을 믿고 십자가사건이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을 성경말씀으로만 믿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테지만 이 세상의 증거로 믿기에는 이 세상은 믿지 못할 만큼 타락했으니까요.
저번에 셀프이단재판소 하실 때 질문하려고 대기하고 있다가 예비2번에서 끊긴 사람인데요 질문하고 싶은 내용의 영상이 올라와서 댓글에 남겨 봅니다. 다메섹님의 신앙에 대해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하고 있지만 아담과 하와, 그리고 인간의 타락 사건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비유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부터 노아까지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라면 누가 누굴 낳고 몇 세를 살고 죽고 이런 내용이 나올 수 있을까요? 창세기 10-11장에 보면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족보가 나오죠. 그렇다면 성경은 아담부터 예수님까지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아담이 허구의 인물이라면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부터 실재하는 인물인가요? 아담이 실재하는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중요한 부분이죠. 창세기 1-3장을 시문학으로 본다고 하여도 비사실에 기반한 문학과 사실에 근거한 문학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혼합장르(사실을 기반으로한 문학적 표현)로 보더라도 이성적 이해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팀켈러 목사님은 1-3장을 시문학으로 보지만 아담과 하와 스토리는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보더군요. 저도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려는 이유는 님께서 말하시는 것과 같이 아담 스토리를 비유로 본다면 복음서의 족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첫 사람 아담에 대한 신약의 관점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할때 난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독교 변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명백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변화 시키는 원동력은 성령님의 일하심임을 꼭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오늘도 댓글 속에 많은 찬반의견을 만드는 영상이네요. 항상 활기있고 다이나믹한 다마스커스채널 너무 보기 좋습니다. 영상과 댓글을 보다 저도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많은 수의 댓글을 통해서, (제가 파악하기에) 질문자님의 주된 포인트였던,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인간을 원죄(또는 원죄의 결과)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다"라는 명제가 아담의 역사성을 받아들이면 증명된다고 보시는 분들이 많으신것, 아니 전부인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아담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고, 아담의 죄가 모든 인간에게 전해진다는 원죄는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를 원죄의 결과(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다"라는 식의 생각을 너무 많은 분들이 너무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다메섹님의 주된 포인트는,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원죄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때문이다. 따라서, 아담과 원죄의 역사성은 예수님이 오신 이유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저도 다메섹님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고요. 그러나, 제 입장에서 조금 이상한 점은, 아담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다메섹님과 완전히 동의하는 저와같은 생각을 가지신 분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아담의 역사성이 설령 완전한 사실로 밝혀진다 할지라도, 원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게 된다고 전혀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유아의 사망"이라는 인간의 가장 실존적 고통의 경험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원죄론에 대한 많은 의문을 낳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원죄때문에 가장 선량하고 죄없다고 여겨지는 영유아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은 아무리 죽음에 대해 현대인들보다 무딘 감각을 가졌던 고대인들도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당시에도 믿는 가정의 영유아의 죽음으로 촉발된 유아세례의 문제는 굉장한 핫이슈였던것 같습니다. 물론, 자타공인 신학천재 어거스틴이 유아세례에 대한 교리를 확립함으로써 이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적어도 제게는) 해결이라기 보다는 어거스틴의 약점 (고대인으로서의 한계)만 드러낸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 생각에는 "인간은 원죄때문에 지옥에 간다"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위와같은 인간의 직접적이고 실존적인 경험들에서 오는 진짜 문제들을, 단순한 교리의 보충으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째든, 아담의 역사성을 믿는 사람이라고 전부다 인간이 원죄때문에 지옥에 간다라고 생각지는 않는다는 제 생각도 나누고 싶고, 원죄와 유아세례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메섹님께서는 생각해 보신적이 있으신지 궁금하기도 해서, 글을 써 봤습니다.
우선 영상에서도 보여졌듯, 저도 루이스 클럽님께서 느끼신 당혹성에 공감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와 자범죄를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건, 제가 배워온 신앙과 신학의 경험으로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부분입니다. 둘째로, 당연히 아담의 역사성을 유지하면서도 성육신과 십자가의 궁극적 이유를 원죄에 두지 않으실 수 있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저 또한 어거스틴적인 원죄교리는 굉장히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영유아 문제를 포함해 실제 우리의 경험에는 거의 맞지 않을 뿐더러, 여러가지 실존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 원죄와 직접적인 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하신 말씀 ㅡ 내가 너의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 점이 생각나게 합니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어지듯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도 그 뿌리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뜻인데 아담이라는 뿌리에 원죄가 있었고 그 뒤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죄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무수한 유혹을 받습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분명 우리의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실 때 원죄를 씻어주시는 것인지 나의 삶 중의 죄를 씻어주시는 것인지를 분별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도 하늘 천사의 삼분의 일은 반역했다고 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이야기의 뜻은 아담과 하와가 있기 전 천사의 스토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이야기를 기독교인들이 고집하고 선호하는 까닭입니다. 또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주님의 성품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사역은 거기서 부터 시작됩니다. 원죄라는 것도 사실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인가?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의문이 함축되고 있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러한 신분으로써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고 살아가라고 하신 명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생명의 한자 뜻은 살아갈 생, 명령 명 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는 금수저, 누구는 흑수저 이렇게 판단되고 있지만 주님께선 그러한 조건에서 살아가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불합리한 측면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 토기장이가 그릇과 컵, 주전자, 항아리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면 모두 자신만의 역할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되지 않는 부분은 주님께 기도로 의뢰하여야 할 것은 욥기에서의 주님을 더욱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찌 창조주의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요셉 모세요셉님께서 원죄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잘 들었습니다. 결국, '인간이 죄를 짓고 죄인이 되는 이유는 원죄때문이다'라는 말씀을 해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고, 영적세계를 이해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더해 주시는 것으로 보이고요. 그러나, 제가 다멕섹님과 나눈 대화의 핵심이, 바로 모세요셉님이 말씀해주신 그런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경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가 우선이겠지요. 결론만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모세요셉님은 인간이 죄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원죄(하나님의 정하심)때문이라는 말씀이고, 제가 생각하기에는 인간이 죄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유의지(자신이 정함)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차이인 것같습니다. 그리고, 모세요셉님의 성경해석을 저같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영유아의 사망과 같은 인간의 실존적 경험들이, 인간이 원죄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생각은 주님의 성품을 이해하게 한다기 보단, 오해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째든 생각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LewisClub 네 저두 성의 있는 답변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장이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이 존재합니다. 성경은 6천년의 시대를 축약하여 우리에게 증명하였고 마지막 세대로 보이는 우리는 현재 너무 많은 거짓에 유혹되어 거짓에 속아 넘어가는 추세로 과학은 진화론으로 하나님이 어디 있냐 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교육시키면서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때가 다르다고 보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지 않을까요? 우린 조선 시대때만 해도 하나님을 모르던 족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질의도 쏟아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이순신은 천국에 갔을까요? 저는 이 세상이 생각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밀착해 계시는데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미미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도 멸망의 위기에서 참신한 목회자와 성도들의 기도로 간신히 살아났고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교회가 이리도 많이 생겨났지만 그 많은 교회 중에서도 솔직히 위기의 역사임에도 까맣게 잊고 자유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이 태반이고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의로운 목사와 성도는 눈에 띄게 적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다고 보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때 시절은 성경이 없었고 그나마 명심보감과 같은 책을 보며 효와 의를 실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기적을 기억하시나요? 주님께선 이순신이라는 지도자를 세우시고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나라를 굳건히 지켜냈습니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그러한 능력을 받는 것조차 우리는 불만에 가득하여야 하는 걸까요? 마음 중심을 보시고 고난속에서 우리를 키워주시는 주님의 뜻은 늘 한결 같습니다. 요즘처럼 드센 민족도 없습니다. 가까운 조선시대때도 하늘님 부처님 하면서 심지어 빈그릇에 물을 떠서 비나이다비나이다 하면서 신은 존재한다 하면서 종교를 무의식적으로 깨닫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진화론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이 어디 있냐 하면서 마음껏 죄를 짓고 있으면서 착각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대처럼 기도하지 않는 민족이 어디 있을까 생각될 뿐입니다. 또 제가 당신께 질문하겠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시간이 몇년입니까?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적어주시고 우리 함께 토론해 봅시다.
질문자분도 다메섹님도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다메섹님의 영상은 항상 긴글을 쓰게 만듭니다:) 참된 크리스천의 시작은 나의 연약함과 죄인임을 절실히 깨달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도 그랬고, 그 마음은 교회만 다닌다고 저절로 생기는것도 아니고 그런 깨달음,인정이 오기까지 한 7-8년은 걸렸던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죠.. 이 잘못, 죄라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닌분들에게는 어려운 개념일수있다고 봅니다. 죄/잘못 이라는 기준이 크리스천과 넌크리스천이 다르고 또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서요. 크리스천인 저는 (죄를 한단어나 문장으로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또 죄는 행위로도 마음으로도 모두 지을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넌크리스천인분들은 도덕적인 잘못도 안하고 법도 잘지키는데 내가 무슨 죄인이야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해서 죄를 안 짓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냥 매일 노력하는것뿐이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고 그걸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시지 않을까 믿으며 나아갑니다. 단지 처음과 끝 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과거의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인간이기에 가질수밖에 없는 악한마음, 제가 잘못한것, 앞으로 실수할 부분까지 용서해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죄인인것을 깨달는것이 왜 중요하냐면 하나님이 어떻게, 어떤방법으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시는지를 알게 될 수 있어서 입니다. 죄인인 내가 예수님을 통해 칭의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삶을 살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믿지말지에 대한 자유까지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크기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원죄가 중요한게 원죄때문에 우리가 지옥가잖아 ! 는 아니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범하는 죄들의 이유가 원죄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나요. 그러니까 애초에 원죄때문에 우리 안에 죄성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죄성 때문에 뭐 그것이 본능이나 유전적인 느낌같은 것으로서 우리가 현실에서 저지르는 죄에 원료가 워죄때문이라고 생각해서 개인적으로 좀 부조리하다고 느꼇습니다. 만일 그 원죄가 없다면 즉 그 죄성에 우리 몸에 애초에 뿌리 박히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악한 마음이나 행동들도 없었을테니까요. 그래서 선악과 사건을 예비하신 하나님이 잘 납득가지 않았던 기억이 있네요
저도 원죄때문이라고 배웠어요 그래서 살인자나 생각만한자나 똑같은 죄인이라고요 상담자처럼 생각하는 자들 많을텐데.. 우리가 지은 죄때문이라하면 행위랑 연관지어지는 것도 맞고, 죄의 경중을 따지려는 생각도 들것같고.. 충분히 납득이 가는 질문인데 교회에서 하는 답변은 결국 원죄다 이러시더라구요 ( 저는 저의교만 욕심 이런것들이 큰 죄라 생각합니다)
조금 이단성 논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원죄 때문에 인간의 이기적 삶이 시작된 겁니다. 생물을 먹어야만 생존하는,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고, 현재의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온 겁니다. 원죄 때문에 파생된 것이 인간의 이기심, 이기심으로 부터 모든 악행이 시작된 겁니다. 고로 앞으로 개개인이 지을 죄는 어차피 원죄에서 파생된 결과물인 것이고 그걸 해결하신게 예수님입니다.
법이 왜 필요한가 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선한 인간과 사회를 더 선한 방향으로 발전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악이란 것이 인간과 그 사회를 더 망가뜨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존재하잖아요! 법은 우리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그 전제가 무엇인가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라는 인류 보편의 공통적 이해인 것이고, 이건 꼭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철학과 사상에서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 죄라는 것이 얼마나 실재적이고 파괴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 우리의 그런 본성이 드러날 기회가 많지 않아서이지, 80년 전 홀로코스트의 현장이었던 아우슈비츠로 돌아가 그 현장에 지금 서 있다면 아마 그 어두운 면을 생생하게 경험해 볼 수 있겠지요!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인 동시에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경험하게 되겠지요.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 여기에 있는 거 아닐까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걸 어떻게 사람이 이성과 이해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예수를 믿는 것은 정말 기적이지요!
보다가 궁금한게 생겼어요! 인간은 죄를 지었고, 죄의 삯으로 사망하게 됐다. 까지 이해가 가요. 근데 예수를 통해 죄사함을 받았는데 왜 육신이 죽나요? 그러니까, 죄의 삯으로 예수님은 영적 죽음이 아니라 육체적 죽음을 지불하셨다고 보이는데 인간은 육신이 죽는건 기본이고, 믿음이 없으면 영까지 죽게되나요?
원죄는 죄의 시작일 뿐이고, 결국 우리 모두는 하와와 아담처럼 선악과를 따 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죠. 왜냐면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죠. 아담과 하와가 지금 상황을 봤다면 과연 선악과를 따 먹었을까요? 인간은 무지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죠. 무지 또한 큰 죄구요.겸손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말씀(예언)하신 거죠. 따 먹을 것을 알았기에. 하와가 따 먹고 아담이 따 먹지 않았다면 하와는 병들고 늙고 죽었겠지만 아담은 영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와를 너무 사랑했기에 모른 척할 수 없었고 죄를 자기가 뒤집어 쓴 거죠. 선악과를 먹고난 후 죄가 들어온 후 마음은 달라졌지만요. 우리 모두는 원죄,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선악과사건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일 뿐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십니다.
개인적인 생각에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것은 선을 나누는 일인것 같아요. 죄인과 의인으로 나누던 큰죄인 작은죄인으로 나누던. 예수님께선 그런거 없고 너희는 다 죄인이다라고 하시는거죠. 제가 성경을 봤을때 예수께서도 죄의 경중의 관점이 없으신것 같지는 않지만 구원의 대상이라는 관점, 그리고 존재론적인 관점에서는 죄의 경중이 의미가 없는것 같습니다. 내가 만약 어떤사람과 똑같은 dna, 똑같은 환경, 정확히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내가 같은 수준의 죄를 짓지 않았을거라고 장담하기 어렵기도 하구요. 물론 누군가가 죄를 짓는다면 그 행위에 대해서는 경계가 필요하겠지만 큰죄인 작은죄인으로 선을 나누는것은 교만하고 불필요한 일 같습니다.
@@활쏨씨 죄짓는 인간을 만드셨다기에 그에 대한 답변을 해드린거죠. 물론 제 생각이구요. 죄짓는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인간, 하나님께서 인간과 동행하시고자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을 말씀드린거예요. 어떤 물체가 있다면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그 물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각기 사용법이 있을 거잖아요. 사용법을 따르지 않고 사용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기에 우리는 사용법을 따라 그것을 사용해야 하구요. 인간은 도구로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지 말지에 대한 주권을 주셨고 인간은 따르지 않았던 거죠. 인간 스스로 자기자신을 도구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용법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구요.
저도 궁금한게있는데요~ 창세기 역사성은 배제하고서 생각할때, 모든 인간에게 죄의 경향성이있고 실제로 죄를 짓고 살고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죄를 짓게끔 창조하셨는지요. 궁금증이 해소가되질 않네요 ㅠ 창세기의 역사성을 인정하면, “그건 과거 그런 사건이 있었기에 인간이 현재 그런 상태에 놓인거야” 라고 편하게 설명할수있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성을 배제하면, 위에 제가 고민하는 “하나님은 왜 인간을 죄의 경향성을 가진채로 창조하셨는가”에 대한 물음이 떠오르게되네요..
@@DamascusLiveTV 답글 감사합니다. 자유의지를 생각해봐도 여전히 궁금증이남네요.. ㅜ 왜냐면 악을 행할 자유의지도있지만, 선을 행할 자유의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에따라 악을행하고 죄에빠졌기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면, 자유의지에따라 선을 행한다면 구원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아닐까요?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수있다면, 예수님의 대속이 필요한 존재가 아닐겁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 단순히 행함이 아니라 내적동기까지도 동일한 죄의 범주로 본다면 그것까지 자유의지로 막는것은 인간의 경험상 불가능합니다. 자유의지를 생각해봤을때도 궁금한 것이 바로 이 부분부터 시작되는데요. 내면에서 일어나는 동기를 인간스스로 어쩔수 없다면, 결국 인간은 죄의 경향성을 강하게지니고 선의 가능성이 없는채로 창조됐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런 존재로 창조하셨나?? 는 다시 원점의 궁금증으로 회귀하게되네요ㅜㅜ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더라도 선악의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역사성이 옳고 그름을 떠나, 자유의지를 행하는 선악의 밸런스가 무너진건 선악과 사건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는데요. 선악과 사건이 사실이 아니라고했을때, 인간의 자유의지는 왜 악을 지향하는가에대한 철학적 물음이 남게되네요…(저 개인적으로는 창세기 1-3장은 역사성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궁금증이 드네여) 그래서 오히려 펠라기우스의 주장처럼 자유의지에 따라 선을 행할수 있고,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답변을 주시면 정말 감사할것 같아요..ㅜ 그러나 혹 바쁘시다면 제가 보고 도움이 될만한 책을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밤하늘별하나-i4u 영상을 보며, 다메섹님의 결론에 격하게 동의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밤하늘별하나님의 질문에 다메섹님은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 저도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보다는 많이 바쁘신 것같습니다. 다메섹님의 대답을 기다리다 생긴 조급증을 견디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게 되어 죄송합니다. 다메섹님의 다메섹님의 답변처럼 잘 정리되고 준비된 그런 대답은 아닐 수 있겠지만, 다메섹님과 같은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니 나도 다메섹님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염치 무릅쓰고 대화에 살짝 끼어봅니다. 너그럽게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선, 저도 영상의 다루는 주제가, 어거스틴과 펠리기우스의 논쟁과 연결되어 있다는데 깊이 동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해하는 어거스틴과 펠리기우스의 논쟁의 핵심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펠리기우스는 자유라는 말의 의미를, 선과 악 중에 선택하고 행할 능력이 똑같은 상태로 정의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자유에 대한 정의를 전제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악을 행하고 심판받을 가능성과 선을 행하고 구원받을 가능성이 반드시 모두 주어져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만약 펠리기우스의 자유에 대한 정의가 유일한 것이라면, 또 다른 논리적 결론은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자유가 없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만 선택하고 행하실 수 있지, 악은 선택도 행하실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자유를 어떤 존재가 자신의 본성을 따라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다시 정의하고, 그런 정의로 볼 때,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사랑과 선)을 따라 완벽하게 선택하고 행하실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할 수 있으며, 타락과 구원의 개념의 이해는 여기에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인간 역시 자신의 본성을 따라 선택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타락의 사건으로 인해서 본성 자체가 죄성이 되었기에, 스스로의 선택과 행위로는 그것이 아무리 자유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 생각은 정치적, 교리적으로는 논쟁을 종식기켰지만, 철학적, 논리적으로는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펠리기우스를 따를는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설득시킬 수 없었을 뿐아니라, 어거스틴을 따르는 사람들 조차 어거스틴의 결론에 대한 해석이 둘로 나위어졌기 때문입니다. 한그룹은 어거스틴은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포함한 기독교를 지켜낸 사람으로 해석했고, 다른 한 그룹은 어거스틴도 결국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즉, 마지막 그룹도 인간에게 자유란 펠리기우스적 자유밖에는 있을 수 없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요. 제가보기에,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마지막 그룹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환경때문인지, 밤하늘별하나님의 질문도, 결국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란 펠리기우스적 자유라고 볼 수 밖에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질문을 하고 계신것 같고요. 그런면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신학적, 철학적 질문의 핵심은 오히려,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할 때, 발견하는 가장 쉽고 단순한 대답이 펠리기우스의 대답이고요. 그러나, 깊은 질문에 대한 단순한 대답은 틀린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저는 어거스틴의 답이, 펠리기우스의 답보다 인간의 자유의 본질을 무한히 더 가깝게 설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마치,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뭔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워보이는 소크라테스의 이해가, 쉽게 이해되는 트라시마쿠스의 이해보다 훨씬 더 정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듯이요. 소크라테스는 누구보다도 정의를 깊이 이해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분명히 정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거스틴도 인간의 자유를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분명히 정의하고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고요. 분명히 어거스틴의 설명에는 실수와 한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분명한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쿠스의 정의는 강자의 편의일 뿐이라는 마키아벨리적, 나찌즘적인 정의론의 단순성과 위험성을 단번에 알아차렸듯이, 어거스틴도 펠리기우스적 자유가 보여주는 단순성과 위험성을 단번에 알아차린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실제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동시에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펠리기우스적 자유의 개념을 가지고, 어거스틴을 극단적 예정론자로 해석하는 경우가 오히려 훨씬 소수였구요. 이런식의 역사적 판단들이, 적어도 저에게는, "우리는 원죄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라는 말보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자유의 의미를 동시에 인정하고, 구원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길로 나아가게하는 길잡이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논쟁을 신학적, 철학적면에서 한번에 종식시켜주는 그런 능력자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같고요.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과 자유, 인간과 하나님의 본성, 그리고 구원과 심판의 의미들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통한 신학적, 철학적 대화 뿐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경험을 포함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 점점더 분명하게 점진적으로 이해해가는 면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논쟁을 종식기켜줄 책을 찾기보다는, 어거스틴의 책을 다시 짚어 그의 의도를 새로운 각도로 읽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제안드려봅니다. 뜬금없는 설레발이지만, 좋은 의도로 전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LewisClub 댓글 한글자 한글자 정독하며 읽었습니다. 세심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남겨주신 어거스틴의 의견처럼 ‘자신의 본성을 선택하고 행할수 있는 능력’ 이것이 자유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성경이 말하고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을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과 로마서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고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우리가 지은죄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존재’ 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어거스틴이 정의한 자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선을 행하고싶지만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리적 차원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타락이라는 사건으로 그 원인을 설명할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교리적 차원을 벗어나 생각한다면, 즉 타락사건이 없다고 전제한다면,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는가? 선을 행하고 선택할 능력이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마땅한 원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저 스스로도 현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중이거든요. 만약 ‘인간이 원래 그러한 존재다. 악의 경향성에 더 쉽게 물드는 존재다.’ 라고 한다면 그 설명은 결국 인간에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다는 의미이지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6일 창조든, 유신진화이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에대한 질문은 자연스레 창조에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왜 인간은 그렇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또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악에 쉽게물드는 자유의지를 본성에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창조된 피조물을 매우 엄격한 공의로 심판하는 창조주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죄를 짓게 만들고, 죄를 짓는다고 심판하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겠지요. 사실 저는 답을 알수 없는 질문을 하고 있는건데여… ㅎㅎ; 펠라기우스라면 이 질문에 ‘인간의 자유는 타락의 사건으로 훼손된적이없고, 여전히 선을 행할 수있는 능력이 있다.’ 라고 말하겠지요. 저는 이러한 관점이 제 궁금증 해소에 일부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결국 선을 선택하고 행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구원이 필요 없는 존재이며,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이 아니어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펠라기우스도 실제로 이런 주장을 했고요. 교리적으로는 잘못됐다고 말할수 있겠지만, 타락의 사건을 은유로 이해하는 현대에와서 과연 이러한 펠라기우스적 이해가 잘못됐다라고 할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사실 펠라기우스를 자세히 알고서 그 생각에 동의한건 아닙니다. 저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신학적, 철학적 질문으로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는데요. 자료 서칭중에 발견한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제가 생각한 논리 흐름과 비슷하여, 세심하게 살펴보았다는 정도겠네요. 사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고요..
@@밤하늘별하나-i4u 보잘것없는 댓글, 꼼꼼히 읽어주셨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도 마치 정말 대화를 하는 것같아, 너무 기분이 좋고, 써주신 답변 어떤 의도와 무엇을 찾고 계신지 더 주의를 기울여 듣게 되네요. 제가 듣게되는 밤하늘별하나님의 질문 중 하나는, "인간이 어떤 본성으로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을 진정한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게되겠는가?" 를 묻고 계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통의 경우 주어진 옵션 두가지를 놓고 비교해 보면,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본성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면, 성경의 이야기들과 조화를 이루기 쉽지만, 하나님을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기는 어렵게되고,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본성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담보할 수는 있겠지만, (타락사건을 제외하고라도) 성경의 전체 가르침과 조화를 전혀 이루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드리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으로 들립니다. 전자는 성경적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하나님, 후자는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도저히 성경적이지 않은 하나님이라고 느끼시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가진 옵션이 그 두가지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진 생각을 말씀드려보면, 저도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그림자, 똑같지는 않지만 정말 비슷한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존재의 활동적 본성으로서의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면은 쉽게 떠올리지만, 존재의 구조적 본성으로서의 삼위일체(세분의 본성이 하나이심)를 닮은 존재라는 생각은 잘 떠올리지 못하는데 창조, 자유 그리고 타락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림자로서 선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그림자로서 우리 모두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면서(individuality) 동시에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연결되어있는(solidarity) 존재, 즉 삼위일체를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개별자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연결된 하나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삼위일체의 속성에 참여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의 본성안에 있는 선을 선택할 가능성과 하나님과 영원히 연결된 존재로 있을 가능성이 현실화되지 못한 상태를 아담의 선택으로 겪고 있다고 봅니다. 아담과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삼위일체의 속성을 닮은 존재이기에 겪는 결과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자유가 없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자유의 가능성과 함께 하나님과의 영원한 존재적 연결성(삼위일체의 본성에 포함되어짐)의 가능성을 부여받은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현실화되지 못하는 상황으로 우리모두가 빠진 사건, 즉 하나님의 닮은 속성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 사건이, 타락의 사건의 본질 중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어거스틴이 인간의 존재적 연결성이 가져다 주는 결과를 단순히 원죄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큰 잘못이라고 봅니다. 실제 원죄를 설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로마서의 내용도, 아담으로 인해서 생긴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의 영원한 연결이 현실화 되지 못한것을, 삼위중 한분이 인간이 되서 오심으로 새로운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결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뜻으로 저에게는 읽힘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을 그 자체로도 삼위일체의 본성을 닮은 존재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삼위일체의 신의 속성을 닮은, 즉 영원히 신의 속성(삼위일체의 본성)속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닮은 인간 즉, 개별자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모두가 연결되어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결속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중 한분이 직접 인간이 되어 오셔서, 즉 개별성과 연대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의 존재 양태 속으로 오셔서, 하나님과 영원히 연결되는, 인간이 신의 속성에 참여하게 되는 길을 새로 여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도, 우리의 자유로 떠났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새로운 기회를 갖게되는 것도 우리의 자유에 달려있다." 라고 제 삼의 옵션을 약간은 무미건조하게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논리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생각할 때도, '세분이 하나의 본성으로 묶여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하고, 인간의 존재 양식을 생각할 때도, 분명하게 보여지는 인간의 개별성 뿐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성경의 스토리와 전통적 신학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연대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어거스틴과 같은 고대인 보다는 오히려 현대인에게 훨씬 개연성있는 관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cs루이스의 책 '고통의 문제' 5장 인간의 타락편에서 읽었습니다. 혹시 도움이 되실까 해서 글을 남겨봅니다.
아담과 하와가 비유라니 참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비유라면 창세기 모든것이 다 신화이고 허구라는 소리랑 매한가지인데 결국 예수님도 비유이거나 허구라는 소리로 이어진다는것을 왜 모를까요?? 성경을 믿는 사람이라면 명백히 비유구절이 아닌 이상 다 현실에 일어난 일이고 진리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았기에 전적으로 성경말씀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믿음이구요. 지금도 센세이션한 일인데 1세기때에야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고 그것을 문자로 남겼다는 자체는 정말 일어난 사실이라고밖에 생각이 안 듭니다.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보존되지도 않았을 거구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고서는 결코 인간의 힘으로는 성경말씀이 전파되지 못 했을 것입니다.
@ㅇㅇㅇㅇㅇ 성경말씀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은 단순한 사실에 근거해서 믿는다기보다 성경안의 신념과 말씀을 근거로 믿는답니다. 님은 단군왕검을 믿으시나요? 고조선도 신화로만 여겨졌다가 여러 유물들의 출토로 인해 역사로 받아들여졌죠. 구약은 특히 지금의 이스라엘의 역사서로 통하구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고 이집트 등의 나라가 지금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ㅇㅇㅇㅇㅇ 근거를 드린다고 믿으시겠나요? 팩트와 사실도 물론 중요하나 중요한 것은 님의 현재 마음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믿지 못하실 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기억해주세요. 역사적근거가 부족하니 믿지 않겠다는 님의 마음 또한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합리성을 뛰어넘은 그 무엇인가구요. 님은 지금 무엇을 근거로 성경내용이 틀렸다는 말씀이신가요?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믿는다는 얘기구요. 지구 평평설은 성경과는 아무 관계없고 대홍수설과 출애굽설은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죄라는 개념을 법적, 도덕적으로, 그리고 세상적인 시각에서 부정적인 부분만으로 조금 편협하게 이해하고 계신듯 하네요. 욕망을 통한 스스로의 발전도 하나님의 방향과 다르다면 죄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내가 발전이라고 생각하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그런듯 합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니, 앞으로도 계속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가기를 응원합니다.
신전티비와의 토론때도 그렇고 의외로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증요한 근거 중 하나가 원죄의 유무인 것 같네요. 원죄라는 개념 자체를 연좌제라고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저도 이에 대한 논리적인 혹은 사회과학적인 답이라고 느낀 것은 르네지라르의 희생양 매커니즘 뿐이긴 합니다. 정말 원죄라는게 있다면 보편적으로, 또 오랜 역사에 걸쳐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그런 행태를 보였다는 걸 제시해야 하고 저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그에 대한 충분히 납득할 만한 답을 제시한다고 보는 입장이거든요. 성경 외의 것에서 원죄를 정의하는게 좀 거시기 하긴 합니다만 여긴 원래 빨간맛이니깐.. 아 그리고 지라르도 언급했지만 십게명의 마지막 계명이 네 이웃의 것을(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것도 참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원죄라는 것에 대해 변증할 때 중요한 근거라고 생각해요.
나이들이 아직 어려서인가 아니면 성경을 제대로 정확히 안배워서인가 왜그렇게 성경을 어렵게만 생각을 할까? 하느님 여호와께서 첫사람 아담과 하와를 완벽하게 지으셨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 완벽한 인간들이 여호와의 법을 어겼다 그리고 규칙을 세워놓은 법대로 그들을 사형시켰다. 그러므로 이세상에는 완벽한 인간들이 없다 왜냐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난 후에 쌔끼들을 까놓고 죽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인간들을 영원히 살수없게 고대로 놔둔다면 예수를 이땅에 보낼 필요가 없었을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여호와께서 인간들에게 영원히 살수있는 기회를 다시 주시기 위해서 은혜를 계획하여 요 3:16 독생자 영자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완벽한 인간 둘째 아담으로 이세상에 보냈다 즉 완벽한 인간들이 지은죄를 불완전한 인간들이 씻을수는 없는 일이니까 . 예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이말의뜻은 음욕을 품고 그여자를 자꾸 생각에 잠기다보면 벌써 자신도 모르게 그여자에게 달려가고 있을수가 있기때문이다. 다윗도 밧세바를 보고 계속 음흉한 생각을 하지않고 금방 지워버렸다면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을것이다. 어쨋든 성경의 하느님 여호와를 예수를 통하여 믿고 영생을 희망한다면 예수께서 영생의 비법을 알려준대로 하라고 하는것은 하고 하지말라고 하는것은 하지 않으면 되는것이다.
@@원기옥-d5f 그럼 창세기 초반 이후는 시가 아니란것이고... 여리고 사건은 실제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육체로 부활하고, 바위를 열어 버리고(또는 벽을 뚫어버리고),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는 우주속으로 날아가 버리고(지금도 날아가고 있으려라???)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는 것은 문자적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성경의 앞부분이 구라일수 있지만, 뒷 부분은 사실이다" 모순스런 주장 같습니다.
와... 좋은 채널을 찾았네요 그런데 우리가 아담에 대한 이야기와 구약의 기록물들을 보고서 사실 믿기지 않는 신비한 일들로 인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선 성경만 고집하여 읽는 것보다는 아담의 증언, 솔로몬의 증언, 야살의 책, 에녹서, 미드라쉬 등등 외경들을 살피면서 분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 기독교인들의 최대 이슈는 평평지구냐? 우주 속 둥근 지구냐? 사실 음모론도 어느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 NASA라는 단어도 SATAN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에도 세상사람들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조롱하기만 합니다. 우주는 없습니다. 성경에 우주에 관한 정보가 기록되어있지 않고 하늘의 해, 달, 별은 우리가 발을 디딜 수 있는 행성이 아니라 발광체 ㅡ 즉 조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진화론을 대입하여 과학을 접붙혀 논쟁하는 실태인데 우리는 신본주의적 신앙관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 인본으로 가서는 위험 합니다. 대한민국은 1948년에 기독교 국가로 세워졌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같은 해에 거진 2천년간 나라 없이 떠돌아 다니던 이스라엘 국가도 같이 세워진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신사참배의 위기 속에서 세워졌기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3차 중동 전쟁의 위기를 겪으면서 6일 전쟁을 무리없이 잘 소화해 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도 주님께서 도우심을 믿었습니다. 아담의 이야기도 동화 같아서 사실이 아닌 것 같지만 아담의 족보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상태에선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 났을 때 하와와 함께 지내던 나날들과 우리 신체의 장기가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인지에 대한 글들을 소화해내지 못하고선 이해 하지 못합니다. 첫 살인이 일어 났을 때의 상황과 셋의 족보로 므두셀라와 노아의 홍수까지 이야기들을 모두 이해하려면 천사가 우리들에게 지식을 가르쳐 주는 형식을 이해 해야만 합니다.
@@TrueAndTree 제 생각이 뭐 중요한가요 공부 많이 한 학자들, 특히 보수적인 쪽 진보적인 쪽 모두,이 쓴 최신책 읽어보셔요 정답은 안 나온 상태지만 여러 지성들이 모여 많은 흥미로운 가설들이 나온 상태입니다. 그런거 읽어보시고 어느쪽이 더 설득력이 있게 느껴지는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yslee7692 네 뭐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소설이면 그 바로 전 내용인 창조도 소설이겠네요. 벌써부터 좋은 이론이란 생각이 들진 않는군요. 창세기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소설이면 이야기의 연속성 때문에 많은 내용이 영향을 받을 텐데요. 예를 들면 아담과 하와가 소설속 내용이면 당연히 가인과 아벨도 소설속 인물이겠죠.
다메섹님의 말씀에 모두 공감합니다.
죄에 대해서, 성경은 "행위에서 마음의 죄로 죄의 범위를 넓혔다."라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구원의 기준인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니까요.
다만, 죄에 대해서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을 하자면. 죄의 개념이 '나쁜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떨어지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욕을 품는 나쁜 마음(윤리적인 의미)이 아닐지라도. 어떠한 건전한 마음(윤리적인 의미) 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떨어져서 내가 주인이 될 때에 기인한 것이라면 '죄'가 되죠.
창세기와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은 계속하여 하나님보다 자신을 우위에 두려는 모습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 되려하죠."
그것이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인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하나님도 버릴 수 있는 권한(자유의지)이 주어진 엄청난 권위'를 부여받고 창조된 존재이고요.
그러기에 그런 "죄"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 "죄"를 해결하여 주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그만큼 고귀하고 수준 높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 또 감사하네요.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게 하고,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 씨앗이 전 원죄라고 봅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완벽히 역사적으로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그 아담이라는 상징이 부족으로 존재했든, 아니면 유인원 상태의 인간들 중에서 단 한 명을 아담으로 지정하셨든, 아니면 정말로 최초의 인간이었든 간에, 분명히 최초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인간의 대표적 주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건이 존재했다고 보고, 그것이 원죄라고 봅니다. 이는 아담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옮겨가고요. 이 원죄란 혈육을 통해 내려오는 dna 안의 무언가가 아니라 정신에서 정신으로, 마치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임하실 수 있는 그 마음이 존재하듯이, 아주 다른 차원의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비유더라도, 단순한 교훈 즉 우리 모두는 죄를 짓는다 따위의 교훈을 위한 비유는 아니라고 봅니다.
원죄를 굳이 다른차원의 무언가일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굳이 따지면 하나님이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만한 존재로 만들었는데 아담이 특별히 특이해서 죄를짓고 그거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라고 해야하는건데
그런식으로 해석할수도 있겠지만 전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죄를 안짓는존재로 만드시진 않으신거 같습니다.
와 다마섹님 진짜 힘드실거 같네요 댓글질문까지도 있고 .
그래도 답해주시면서 저처럼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 보면서 다마섹님이 깨달은 것들을 배워갈 수 있어서 좋네요
저도 앞으로 자의적으로 더 성경공부하고 주님과 교제해가고 싶어졌습니다
창세기가 시적 내용이라는 것은 팩트가 아니라 하나의 설일뿐입니다 창세기 묘사를 보면 족보 같은 디테일성을 지니고 있고 뿐만 아니라 사건 묘사도 보면 심리적인 진행이나 상황적인것과 지리적인 디테일까지 담고 있어서 의미를 위한 상징성 같은 그런 류의 글로 보기엔 어렵습니다 시적 내용으로 보는 것은 내용 묘사를 볼때 억지에 가깝습니다 창세기를 볼때 1장은 그냥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라는 것을 알리는 목적으로 그냥 만물이 창조되어지는 일에 포커스를 맞추어 시간적 순서로 사건을 묘사하였고 2장 부터는 아담과 하와의 일을 중점적으로 다루기 위해 그 두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고 다른 것은 배경으로 두고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 듯 하고 또 창세기는 미래에서 지나온 과거를 말하는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서 가지고 있었던 신념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서로 한몸이 되는 이치를 과거 창세기 이야기에서 발견하여 삽입해놓은 것도 있습니다
마카베오스에는 창세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그대로 보고 있고 시적 내용으로 보고 있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예수님과 이혼에 대하여 하나님이 짝지어 준 대목에서 남자의 갈빗대에서 여자를 탄생시킨 그 내용 그대로를 믿고 있음을 엿볼수 있고 고린도서에서도 바울이 성별의 질서를 말할때 남자에게서 여자가 탠생했다고 하며 창세기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고 계시록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은 자의 누리는 상으로 생명나무의 낙원을 소개하고 있는 데 생명나무가 사실이라면 선악과도 사실이죠 또 아담처럼 죄 짓지 않는 자도 그 에게 죄의 댓가인 사망이 왕노릇 했다고 바울이 말하니 그냥 죄지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죄성을 유전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죄의 댓가인 사망이 왕노릇하는 지배에 갖히는 죄인임을 알수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모르던 사람이 무인도에서 신약 성서만 발견하고 읽으며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신선한 질문입니다. 과학과 구약을 보는 관점에 대하여 깔끔한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볼만한 질답 감사드립니다!
네 ㅎㅎ
성경에서 죄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무지),거기에 대해서 묻지 않고, 개념조차 잡히지 않은, 자기 감정대로 생각대로 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기가 남보다 잘나보이고 싶은 감정인데 궁극적으로는 악한거죠. 선한 욕심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인 듯 합니다. 자기발전을 통해 남을 돕는다는 것 또한 자기만족일 수 있고, 결국에는 자기발전이 없다면 남을 도울 수 없다는 편협적인 생각에 빠지기 때문에 남는 것은 자기욕심일 뿐인 거죠. 정말 대단한 사람은 본인이 가난해도 남을 돕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거짓말이라고 판명난다해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하셨음을 믿고 십자가사건이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을 성경말씀으로만 믿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테지만 이 세상의 증거로 믿기에는 이 세상은 믿지 못할 만큼 타락했으니까요.
저번에 셀프이단재판소 하실 때 질문하려고 대기하고 있다가 예비2번에서 끊긴 사람인데요
질문하고 싶은 내용의 영상이 올라와서 댓글에 남겨 봅니다.
다메섹님의 신앙에 대해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하고 있지만
아담과 하와, 그리고 인간의 타락 사건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비유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부터 노아까지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라면 누가 누굴 낳고 몇 세를 살고 죽고 이런 내용이 나올 수 있을까요?
창세기 10-11장에 보면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족보가 나오죠.
그렇다면 성경은 아담부터 예수님까지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아담이 허구의 인물이라면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부터 실재하는 인물인가요?
아담이 실재하는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중요한 부분이죠. 창세기 1-3장을 시문학으로 본다고 하여도 비사실에 기반한 문학과 사실에 근거한 문학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혼합장르(사실을 기반으로한 문학적 표현)로 보더라도 이성적 이해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팀켈러 목사님은 1-3장을 시문학으로 보지만 아담과 하와 스토리는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보더군요. 저도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려는 이유는 님께서 말하시는 것과 같이 아담 스토리를 비유로 본다면 복음서의 족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첫 사람 아담에 대한 신약의 관점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할때 난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독교 변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명백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변화 시키는 원동력은 성령님의 일하심임을 꼭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mbtssn378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고민이 많았는데 감사합니다.
Damascus TV任 Thanks a lot. 인내력'감탄 ~ !
수고 많으십니다 축복합니다~ 🙏
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오늘도 댓글 속에 많은 찬반의견을 만드는 영상이네요.
항상 활기있고 다이나믹한 다마스커스채널 너무 보기 좋습니다.
영상과 댓글을 보다 저도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많은 수의 댓글을 통해서, (제가 파악하기에) 질문자님의 주된 포인트였던,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인간을 원죄(또는 원죄의 결과)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다"라는 명제가 아담의 역사성을 받아들이면 증명된다고 보시는 분들이 많으신것, 아니 전부인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아담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고, 아담의 죄가 모든 인간에게 전해진다는 원죄는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를 원죄의 결과(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다"라는 식의 생각을 너무 많은 분들이 너무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다메섹님의 주된 포인트는,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원죄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때문이다.
따라서, 아담과 원죄의 역사성은 예수님이 오신 이유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저도 다메섹님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고요.
그러나, 제 입장에서 조금 이상한 점은, 아담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다메섹님과 완전히 동의하는 저와같은 생각을 가지신 분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아담의 역사성이 설령 완전한 사실로 밝혀진다 할지라도, 원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게 된다고 전혀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유아의 사망"이라는 인간의 가장 실존적 고통의 경험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원죄론에 대한 많은 의문을 낳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원죄때문에 가장 선량하고 죄없다고 여겨지는 영유아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은 아무리 죽음에 대해 현대인들보다 무딘 감각을 가졌던 고대인들도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당시에도 믿는 가정의 영유아의 죽음으로 촉발된 유아세례의 문제는 굉장한 핫이슈였던것 같습니다.
물론, 자타공인 신학천재 어거스틴이 유아세례에 대한 교리를 확립함으로써 이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적어도 제게는) 해결이라기 보다는 어거스틴의 약점 (고대인으로서의 한계)만 드러낸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 생각에는 "인간은 원죄때문에 지옥에 간다"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위와같은 인간의 직접적이고 실존적인 경험들에서 오는 진짜 문제들을, 단순한 교리의 보충으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째든, 아담의 역사성을 믿는 사람이라고 전부다 인간이 원죄때문에 지옥에 간다라고 생각지는 않는다는 제 생각도 나누고 싶고, 원죄와 유아세례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메섹님께서는 생각해 보신적이 있으신지 궁금하기도 해서, 글을 써 봤습니다.
우선 영상에서도 보여졌듯, 저도 루이스 클럽님께서 느끼신 당혹성에 공감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와 자범죄를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건, 제가 배워온 신앙과 신학의 경험으로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부분입니다.
둘째로, 당연히 아담의 역사성을 유지하면서도 성육신과 십자가의 궁극적 이유를 원죄에 두지 않으실 수 있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저 또한 어거스틴적인 원죄교리는 굉장히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영유아 문제를 포함해 실제 우리의 경험에는 거의 맞지 않을 뿐더러, 여러가지 실존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봅니다.
@@DamascusLiveTV 생각나눠주시고 또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명쾌하고 잘 정리된 생각들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도 건강도 더하시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원죄와 직접적인 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하신 말씀 ㅡ
내가 너의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 점이
생각나게 합니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어지듯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도 그 뿌리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뜻인데
아담이라는 뿌리에 원죄가 있었고 그 뒤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죄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무수한 유혹을 받습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분명 우리의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실 때 원죄를 씻어주시는 것인지
나의 삶 중의 죄를 씻어주시는 것인지를 분별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도 하늘 천사의 삼분의 일은 반역했다고 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이야기의 뜻은 아담과 하와가 있기 전 천사의 스토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이야기를 기독교인들이 고집하고 선호하는 까닭입니다.
또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주님의 성품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사역은 거기서 부터 시작됩니다.
원죄라는 것도 사실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인가?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의문이 함축되고 있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러한 신분으로써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고
살아가라고 하신 명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생명의 한자 뜻은 살아갈 생, 명령 명 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는 금수저, 누구는 흑수저
이렇게 판단되고 있지만 주님께선 그러한 조건에서 살아가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불합리한 측면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 토기장이가 그릇과 컵, 주전자, 항아리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면 모두 자신만의 역할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되지 않는 부분은 주님께 기도로 의뢰하여야 할 것은
욥기에서의 주님을 더욱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찌 창조주의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요셉
모세요셉님께서 원죄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잘 들었습니다.
결국, '인간이 죄를 짓고 죄인이 되는 이유는 원죄때문이다'라는 말씀을 해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고, 영적세계를 이해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더해 주시는 것으로 보이고요.
그러나, 제가 다멕섹님과 나눈 대화의 핵심이, 바로 모세요셉님이 말씀해주신 그런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경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가 우선이겠지요.
결론만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모세요셉님은 인간이 죄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원죄(하나님의 정하심)때문이라는 말씀이고, 제가 생각하기에는 인간이 죄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유의지(자신이 정함)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차이인 것같습니다.
그리고, 모세요셉님의 성경해석을 저같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영유아의 사망과 같은 인간의 실존적 경험들이, 인간이 원죄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생각은 주님의 성품을 이해하게 한다기 보단, 오해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째든 생각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LewisClub
네 저두 성의 있는 답변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장이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이 존재합니다.
성경은 6천년의 시대를 축약하여 우리에게 증명하였고
마지막 세대로 보이는 우리는 현재 너무 많은 거짓에 유혹되어
거짓에 속아 넘어가는 추세로
과학은 진화론으로 하나님이 어디 있냐 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교육시키면서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때가 다르다고 보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지 않을까요?
우린 조선 시대때만 해도 하나님을 모르던 족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질의도 쏟아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이순신은 천국에 갔을까요?
저는 이 세상이 생각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밀착해 계시는데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미미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도 멸망의 위기에서 참신한 목회자와 성도들의 기도로 간신히
살아났고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교회가 이리도 많이 생겨났지만
그 많은 교회 중에서도 솔직히 위기의 역사임에도 까맣게 잊고 자유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이 태반이고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의로운 목사와 성도는 눈에 띄게 적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다고 보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때 시절은 성경이 없었고 그나마 명심보감과 같은 책을 보며 효와 의를
실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기적을 기억하시나요? 주님께선 이순신이라는 지도자를 세우시고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나라를 굳건히 지켜냈습니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그러한 능력을 받는 것조차 우리는 불만에 가득하여야 하는 걸까요? 마음 중심을 보시고 고난속에서 우리를 키워주시는 주님의 뜻은 늘 한결 같습니다.
요즘처럼 드센 민족도 없습니다.
가까운 조선시대때도 하늘님 부처님 하면서 심지어 빈그릇에 물을 떠서 비나이다비나이다 하면서 신은 존재한다 하면서 종교를 무의식적으로 깨닫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진화론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이 어디 있냐 하면서 마음껏 죄를 짓고 있으면서 착각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대처럼 기도하지 않는 민족이 어디 있을까 생각될 뿐입니다.
또 제가 당신께 질문하겠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시간이 몇년입니까?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적어주시고 우리 함께 토론해 봅시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며 죄가 없다면 죽지 않는것으로 죄가 없음를 증명해야할것입니다. 그럴수 없다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할것입니다.
원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의미라고 봐야합니다.
질문자분도 다메섹님도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다메섹님의 영상은 항상 긴글을 쓰게 만듭니다:)
참된 크리스천의 시작은 나의 연약함과 죄인임을 절실히 깨달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도 그랬고, 그 마음은 교회만 다닌다고 저절로 생기는것도 아니고 그런 깨달음,인정이 오기까지 한 7-8년은 걸렸던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죠..
이 잘못, 죄라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닌분들에게는 어려운 개념일수있다고 봅니다. 죄/잘못 이라는 기준이 크리스천과 넌크리스천이 다르고 또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서요.
크리스천인 저는 (죄를 한단어나 문장으로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또 죄는 행위로도 마음으로도 모두 지을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넌크리스천인분들은 도덕적인 잘못도 안하고 법도 잘지키는데 내가 무슨 죄인이야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해서 죄를 안 짓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냥 매일 노력하는것뿐이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고 그걸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시지 않을까 믿으며 나아갑니다.
단지 처음과 끝 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과거의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인간이기에 가질수밖에 없는 악한마음, 제가 잘못한것, 앞으로 실수할 부분까지 용서해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죄인인것을 깨달는것이 왜 중요하냐면 하나님이 어떻게, 어떤방법으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시는지를 알게 될 수 있어서 입니다.
죄인인 내가 예수님을 통해 칭의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삶을 살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믿지말지에 대한 자유까지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크기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원죄가 중요한게 원죄때문에 우리가 지옥가잖아 ! 는 아니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범하는 죄들의 이유가 원죄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나요. 그러니까 애초에 원죄때문에 우리 안에 죄성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죄성 때문에 뭐 그것이 본능이나 유전적인 느낌같은 것으로서 우리가 현실에서 저지르는 죄에 원료가 워죄때문이라고 생각해서 개인적으로 좀 부조리하다고 느꼇습니다. 만일 그 원죄가 없다면 즉 그 죄성에 우리 몸에 애초에 뿌리 박히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악한 마음이나 행동들도 없었을테니까요. 그래서 선악과 사건을 예비하신 하나님이 잘 납득가지 않았던 기억이 있네요
저도 원죄때문이라고 배웠어요
그래서 살인자나 생각만한자나 똑같은 죄인이라고요
상담자처럼 생각하는 자들 많을텐데..
우리가 지은 죄때문이라하면 행위랑 연관지어지는 것도 맞고, 죄의 경중을 따지려는 생각도 들것같고.. 충분히 납득이 가는 질문인데 교회에서 하는 답변은 결국 원죄다 이러시더라구요
( 저는 저의교만 욕심 이런것들이 큰 죄라 생각합니다)
천국에서는 발전이 필요없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주시는 곳인데...
조금 이단성 논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원죄 때문에 인간의 이기적 삶이 시작된 겁니다. 생물을 먹어야만 생존하는,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고, 현재의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온 겁니다. 원죄 때문에 파생된 것이 인간의 이기심, 이기심으로 부터 모든 악행이 시작된 겁니다. 고로 앞으로 개개인이 지을 죄는 어차피 원죄에서 파생된 결과물인 것이고 그걸 해결하신게 예수님입니다.
법이 왜 필요한가 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선한 인간과 사회를 더 선한 방향으로 발전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악이란 것이 인간과 그 사회를 더 망가뜨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존재하잖아요! 법은 우리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그 전제가 무엇인가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라는 인류 보편의 공통적 이해인 것이고, 이건 꼭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철학과 사상에서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 죄라는 것이 얼마나 실재적이고 파괴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 우리의 그런 본성이 드러날 기회가 많지 않아서이지, 80년 전 홀로코스트의 현장이었던 아우슈비츠로 돌아가 그 현장에 지금 서 있다면 아마 그 어두운 면을 생생하게 경험해 볼 수 있겠지요!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인 동시에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경험하게 되겠지요.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 여기에 있는 거 아닐까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걸 어떻게 사람이 이성과 이해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예수를 믿는 것은 정말 기적이지요!
보다가 궁금한게 생겼어요!
인간은 죄를 지었고, 죄의 삯으로 사망하게 됐다. 까지 이해가 가요.
근데 예수를 통해 죄사함을 받았는데 왜 육신이 죽나요?
그러니까, 죄의 삯으로 예수님은 영적 죽음이 아니라 육체적 죽음을 지불하셨다고 보이는데
인간은 육신이 죽는건 기본이고, 믿음이 없으면 영까지 죽게되나요?
원죄는 죄의 시작일 뿐이고, 결국 우리 모두는 하와와 아담처럼 선악과를 따 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죠. 왜냐면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죠. 아담과 하와가 지금 상황을 봤다면 과연 선악과를 따 먹었을까요? 인간은 무지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죠. 무지 또한 큰 죄구요.겸손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말씀(예언)하신 거죠. 따 먹을 것을 알았기에. 하와가 따 먹고 아담이 따 먹지 않았다면 하와는 병들고 늙고 죽었겠지만 아담은 영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와를 너무 사랑했기에 모른 척할 수 없었고 죄를 자기가 뒤집어 쓴 거죠. 선악과를 먹고난 후 죄가 들어온 후 마음은 달라졌지만요. 우리 모두는 원죄,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선악과사건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일 뿐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십니다.
8:34
"호에...?!!" 하는게 느껴짐ㅋㅋㅋㅋㅋㅋ
하나님을 믿지않는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에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것은 선을 나누는 일인것 같아요. 죄인과 의인으로 나누던 큰죄인 작은죄인으로 나누던. 예수님께선 그런거 없고 너희는 다 죄인이다라고 하시는거죠. 제가 성경을 봤을때 예수께서도 죄의 경중의 관점이 없으신것 같지는 않지만 구원의 대상이라는 관점, 그리고 존재론적인 관점에서는 죄의 경중이 의미가 없는것 같습니다. 내가 만약 어떤사람과 똑같은 dna, 똑같은 환경, 정확히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내가 같은 수준의 죄를 짓지 않았을거라고 장담하기 어렵기도 하구요. 물론 누군가가 죄를 짓는다면 그 행위에 대해서는 경계가 필요하겠지만 큰죄인 작은죄인으로 선을 나누는것은 교만하고 불필요한 일 같습니다.
근데 다메섹님의 여리고성이나 출애굽에대한 최근 의견도 궁금하네요 물론 예수님이 핵심코어지만 출애굽은 창세기처럼 시적문학도 아니기에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 궁금합니다
@ㅇㅇㅇㅇㅇ 앵기지마라
@ㅇㅇㅇㅇㅇ 친구 없냐 밖에서 좀 놀아 나야 지금 코로나 의심이라 갇혀있는건데 넌 아니지않냐?
@ㅇㅇㅇㅇㅇ 나무위키에서 봤는데 너같은 애들은 친구 없다더라 ㅋㅋ
개웃긴게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도대체 왜? 죄를 짓는 인간을 왜 만든거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실패작 맞는거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내재되어 있는 죄성이 드러난 것뿐이죠. 완전하고 절대적인 존재가 자신과 똑같은 절대적인 존재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말도 안 되는 거죠. 절대적인 하나의 존재가 둘 이상인 상대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니까요.
@@fallinlove7888 지금 답글 내용이 하나님이 말씀 한거에요? 인간 생각이에요?
@@활쏨씨 여쭤보시는 의도가 뭔가요?
@@활쏨씨 죄짓는 인간을 만드셨다기에 그에 대한 답변을 해드린거죠. 물론 제 생각이구요. 죄짓는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인간, 하나님께서 인간과 동행하시고자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을 말씀드린거예요. 어떤 물체가 있다면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그 물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각기 사용법이 있을 거잖아요. 사용법을 따르지 않고 사용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기에 우리는 사용법을 따라 그것을 사용해야 하구요. 인간은 도구로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지 말지에 대한 주권을 주셨고 인간은 따르지 않았던 거죠. 인간 스스로 자기자신을 도구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용법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구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세상에 두지 마세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으시고 따르신다면 결코 세상의 성공이 성공으로 보이지 않으실 거예요. 이 세상은 유한하고 영원하지 않으니까요.
팩트보다도 의미 전달로 봐야하지 않은까요?
1세기때의 구전과 제자들의 설교에서 여러 사람들이 쓰여진 거라면
저도 궁금한게있는데요~ 창세기 역사성은 배제하고서 생각할때, 모든 인간에게 죄의 경향성이있고 실제로 죄를 짓고 살고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죄를 짓게끔 창조하셨는지요. 궁금증이 해소가되질 않네요 ㅠ
창세기의 역사성을 인정하면, “그건 과거 그런 사건이 있었기에 인간이 현재 그런 상태에 놓인거야” 라고 편하게 설명할수있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성을 배제하면, 위에 제가 고민하는 “하나님은 왜 인간을 죄의 경향성을 가진채로 창조하셨는가”에 대한 물음이 떠오르게되네요..
타락이라는 단 하나의 단일사건이 없더라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점차 하나님께 반하는 방향으로 갔을거라 생각합니다. 왜 죄의 가능성을 허락하셨는가에 대해선 자유의지 논증이 잘 설명한다고 봅니다.
@@DamascusLiveTV 답글 감사합니다.
자유의지를 생각해봐도 여전히 궁금증이남네요.. ㅜ 왜냐면 악을 행할 자유의지도있지만, 선을 행할 자유의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에따라 악을행하고 죄에빠졌기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면, 자유의지에따라 선을 행한다면 구원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아닐까요?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수있다면, 예수님의 대속이 필요한 존재가 아닐겁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 단순히 행함이 아니라 내적동기까지도 동일한 죄의 범주로 본다면 그것까지 자유의지로 막는것은 인간의 경험상 불가능합니다.
자유의지를 생각해봤을때도 궁금한 것이 바로 이 부분부터 시작되는데요.
내면에서 일어나는 동기를 인간스스로 어쩔수 없다면, 결국 인간은 죄의 경향성을 강하게지니고 선의 가능성이 없는채로 창조됐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런 존재로 창조하셨나?? 는 다시 원점의 궁금증으로 회귀하게되네요ㅜㅜ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더라도 선악의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역사성이 옳고 그름을 떠나, 자유의지를 행하는 선악의 밸런스가 무너진건 선악과 사건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는데요. 선악과 사건이 사실이 아니라고했을때, 인간의 자유의지는 왜 악을 지향하는가에대한 철학적 물음이 남게되네요…(저 개인적으로는 창세기 1-3장은 역사성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궁금증이 드네여)
그래서 오히려 펠라기우스의 주장처럼 자유의지에 따라 선을 행할수 있고,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답변을 주시면 정말 감사할것 같아요..ㅜ 그러나 혹 바쁘시다면 제가 보고 도움이 될만한 책을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밤하늘별하나-i4u 영상을 보며, 다메섹님의 결론에 격하게 동의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밤하늘별하나님의 질문에 다메섹님은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 저도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보다는 많이 바쁘신 것같습니다.
다메섹님의 대답을 기다리다 생긴 조급증을 견디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게 되어 죄송합니다.
다메섹님의 다메섹님의 답변처럼 잘 정리되고 준비된 그런 대답은 아닐 수 있겠지만, 다메섹님과 같은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니 나도 다메섹님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염치 무릅쓰고 대화에 살짝 끼어봅니다. 너그럽게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선, 저도 영상의 다루는 주제가, 어거스틴과 펠리기우스의 논쟁과 연결되어 있다는데 깊이 동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해하는 어거스틴과 펠리기우스의 논쟁의 핵심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펠리기우스는 자유라는 말의 의미를, 선과 악 중에 선택하고 행할 능력이 똑같은 상태로 정의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자유에 대한 정의를 전제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악을 행하고 심판받을 가능성과 선을 행하고 구원받을 가능성이 반드시 모두 주어져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만약 펠리기우스의 자유에 대한 정의가 유일한 것이라면, 또 다른 논리적 결론은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자유가 없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만 선택하고 행하실 수 있지, 악은 선택도 행하실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자유를 어떤 존재가 자신의 본성을 따라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다시 정의하고, 그런 정의로 볼 때,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사랑과 선)을 따라 완벽하게 선택하고 행하실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할 수 있으며, 타락과 구원의 개념의 이해는 여기에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인간 역시 자신의 본성을 따라 선택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타락의 사건으로 인해서 본성 자체가 죄성이 되었기에, 스스로의 선택과 행위로는 그것이 아무리 자유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 생각은 정치적, 교리적으로는 논쟁을 종식기켰지만, 철학적, 논리적으로는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펠리기우스를 따를는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설득시킬 수 없었을 뿐아니라, 어거스틴을 따르는 사람들 조차 어거스틴의 결론에 대한 해석이 둘로 나위어졌기 때문입니다.
한그룹은 어거스틴은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포함한 기독교를 지켜낸 사람으로 해석했고, 다른 한 그룹은 어거스틴도 결국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즉, 마지막 그룹도 인간에게 자유란 펠리기우스적 자유밖에는 있을 수 없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요.
제가보기에,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마지막 그룹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환경때문인지, 밤하늘별하나님의 질문도, 결국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란 펠리기우스적 자유라고 볼 수 밖에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질문을 하고 계신것 같고요.
그런면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신학적, 철학적 질문의 핵심은 오히려,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할 때, 발견하는 가장 쉽고 단순한 대답이 펠리기우스의 대답이고요.
그러나, 깊은 질문에 대한 단순한 대답은 틀린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저는 어거스틴의 답이, 펠리기우스의 답보다 인간의 자유의 본질을 무한히 더 가깝게 설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마치,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뭔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워보이는 소크라테스의 이해가, 쉽게 이해되는 트라시마쿠스의 이해보다 훨씬 더 정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듯이요.
소크라테스는 누구보다도 정의를 깊이 이해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분명히 정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거스틴도 인간의 자유를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분명히 정의하고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고요.
분명히 어거스틴의 설명에는 실수와 한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분명한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쿠스의 정의는 강자의 편의일 뿐이라는 마키아벨리적, 나찌즘적인 정의론의 단순성과 위험성을 단번에 알아차렸듯이, 어거스틴도 펠리기우스적 자유가 보여주는 단순성과 위험성을 단번에 알아차린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실제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동시에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펠리기우스적 자유의 개념을 가지고, 어거스틴을 극단적 예정론자로 해석하는 경우가 오히려 훨씬 소수였구요.
이런식의 역사적 판단들이, 적어도 저에게는, "우리는 원죄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라는 말보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자유의 의미를 동시에 인정하고, 구원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길로 나아가게하는 길잡이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논쟁을 신학적, 철학적면에서 한번에 종식시켜주는 그런 능력자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같고요.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과 자유, 인간과 하나님의 본성, 그리고 구원과 심판의 의미들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통한 신학적, 철학적 대화 뿐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경험을 포함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 점점더 분명하게 점진적으로 이해해가는 면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논쟁을 종식기켜줄 책을 찾기보다는, 어거스틴의 책을 다시 짚어 그의 의도를 새로운 각도로 읽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제안드려봅니다.
뜬금없는 설레발이지만, 좋은 의도로 전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LewisClub 댓글 한글자 한글자 정독하며 읽었습니다.
세심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남겨주신 어거스틴의 의견처럼 ‘자신의 본성을 선택하고 행할수 있는 능력’ 이것이 자유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성경이 말하고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을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과 로마서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고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우리가 지은죄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존재’ 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어거스틴이 정의한 자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선을 행하고싶지만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리적 차원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타락이라는 사건으로 그 원인을 설명할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교리적 차원을 벗어나 생각한다면, 즉 타락사건이 없다고 전제한다면,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는가? 선을 행하고 선택할 능력이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마땅한 원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저 스스로도 현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중이거든요.
만약 ‘인간이 원래 그러한 존재다. 악의 경향성에 더 쉽게 물드는 존재다.’ 라고 한다면 그 설명은 결국 인간에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다는 의미이지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6일 창조든, 유신진화이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에대한 질문은 자연스레 창조에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왜 인간은 그렇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또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악에 쉽게물드는 자유의지를 본성에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창조된 피조물을 매우 엄격한 공의로 심판하는 창조주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죄를 짓게 만들고, 죄를 짓는다고 심판하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겠지요.
사실 저는 답을 알수 없는 질문을 하고 있는건데여… ㅎㅎ;
펠라기우스라면 이 질문에 ‘인간의 자유는 타락의 사건으로 훼손된적이없고, 여전히 선을 행할 수있는 능력이 있다.’ 라고 말하겠지요.
저는 이러한 관점이 제 궁금증 해소에 일부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결국 선을 선택하고 행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구원이 필요 없는 존재이며,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이 아니어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펠라기우스도 실제로 이런 주장을 했고요.
교리적으로는 잘못됐다고 말할수 있겠지만, 타락의 사건을 은유로 이해하는 현대에와서 과연 이러한 펠라기우스적 이해가 잘못됐다라고 할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사실 펠라기우스를 자세히 알고서 그 생각에 동의한건 아닙니다. 저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신학적, 철학적 질문으로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는데요. 자료 서칭중에 발견한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제가 생각한 논리 흐름과 비슷하여, 세심하게 살펴보았다는 정도겠네요. 사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고요..
@@밤하늘별하나-i4u 보잘것없는 댓글, 꼼꼼히 읽어주셨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도 마치 정말 대화를 하는 것같아, 너무 기분이 좋고, 써주신 답변 어떤 의도와 무엇을 찾고 계신지 더 주의를 기울여 듣게 되네요.
제가 듣게되는 밤하늘별하나님의 질문 중 하나는,
"인간이 어떤 본성으로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을 진정한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게되겠는가?"
를 묻고 계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통의 경우 주어진 옵션 두가지를 놓고 비교해 보면,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본성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면, 성경의 이야기들과 조화를 이루기 쉽지만, 하나님을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기는 어렵게되고,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본성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담보할 수는 있겠지만, (타락사건을 제외하고라도) 성경의 전체 가르침과 조화를 전혀 이루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드리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으로 들립니다.
전자는 성경적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하나님,
후자는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도저히 성경적이지 않은 하나님이라고 느끼시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가진 옵션이 그 두가지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진 생각을 말씀드려보면,
저도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그림자, 똑같지는 않지만 정말 비슷한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존재의 활동적 본성으로서의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면은 쉽게 떠올리지만,
존재의 구조적 본성으로서의 삼위일체(세분의 본성이 하나이심)를 닮은 존재라는 생각은 잘 떠올리지 못하는데 창조, 자유 그리고 타락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림자로서 선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그림자로서 우리 모두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면서(individuality) 동시에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연결되어있는(solidarity) 존재, 즉 삼위일체를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개별자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연결된 하나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삼위일체의 속성에 참여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의 본성안에 있는 선을 선택할 가능성과 하나님과 영원히 연결된 존재로 있을 가능성이 현실화되지 못한 상태를 아담의 선택으로 겪고 있다고 봅니다.
아담과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삼위일체의 속성을 닮은 존재이기에 겪는 결과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자유가 없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자유의 가능성과 함께 하나님과의 영원한 존재적 연결성(삼위일체의 본성에 포함되어짐)의 가능성을 부여받은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현실화되지 못하는 상황으로 우리모두가 빠진 사건, 즉 하나님의 닮은 속성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 사건이, 타락의 사건의 본질 중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어거스틴이 인간의 존재적 연결성이 가져다 주는 결과를 단순히 원죄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큰 잘못이라고 봅니다.
실제 원죄를 설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로마서의 내용도, 아담으로 인해서 생긴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의 영원한 연결이 현실화 되지 못한것을, 삼위중 한분이 인간이 되서 오심으로 새로운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결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뜻으로 저에게는 읽힘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을 그 자체로도 삼위일체의 본성을 닮은 존재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삼위일체의 신의 속성을 닮은,
즉 영원히 신의 속성(삼위일체의 본성)속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닮은 인간 즉, 개별자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모두가 연결되어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결속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중 한분이 직접 인간이 되어 오셔서,
즉 개별성과 연대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의 존재 양태 속으로 오셔서, 하나님과 영원히 연결되는, 인간이 신의 속성에 참여하게 되는 길을 새로 여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도, 우리의 자유로 떠났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새로운 기회를 갖게되는 것도 우리의 자유에 달려있다."
라고 제 삼의 옵션을 약간은 무미건조하게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논리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생각할 때도, '세분이 하나의 본성으로 묶여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하고, 인간의 존재 양식을 생각할 때도, 분명하게 보여지는 인간의 개별성 뿐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성경의 스토리와 전통적 신학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연대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어거스틴과 같은 고대인 보다는 오히려 현대인에게 훨씬 개연성있는 관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cs루이스의 책 '고통의 문제' 5장 인간의 타락편에서 읽었습니다.
혹시 도움이 되실까 해서 글을 남겨봅니다.
질문자의 의도가 아닌 단어에 초점두어진 답으로 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비유라니 참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비유라면 창세기 모든것이 다 신화이고 허구라는 소리랑 매한가지인데
결국 예수님도 비유이거나 허구라는 소리로 이어진다는것을 왜 모를까요?? 성경을 믿는 사람이라면 명백히 비유구절이 아닌 이상 다 현실에 일어난 일이고 진리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았기에 전적으로 성경말씀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믿음이구요. 지금도 센세이션한 일인데 1세기때에야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고 그것을 문자로 남겼다는 자체는 정말 일어난 사실이라고밖에 생각이 안 듭니다.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보존되지도 않았을 거구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고서는 결코 인간의 힘으로는 성경말씀이 전파되지 못 했을 것입니다.
@ㅇㅇㅇㅇㅇ 문서로 남겨졌다고 해서 다 진실은 아니죠. 문서로 남겼기 때문에 진실이라는 게 아니라 예수님 부활이 그저그런 아무 것도 아닌 거짓이었다면 목숨을 지키면서까지 전도하고 성경사본을 지킬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ㅇㅇㅇㅇㅇ 성경말씀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은 단순한 사실에 근거해서 믿는다기보다 성경안의 신념과 말씀을 근거로 믿는답니다. 님은 단군왕검을 믿으시나요? 고조선도 신화로만 여겨졌다가 여러 유물들의 출토로 인해 역사로 받아들여졌죠. 구약은 특히 지금의 이스라엘의 역사서로 통하구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고 이집트 등의 나라가 지금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ㅇㅇㅇㅇㅇ 근거를 드린다고 믿으시겠나요? 팩트와 사실도 물론 중요하나 중요한 것은 님의 현재 마음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믿지 못하실 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기억해주세요. 역사적근거가 부족하니 믿지 않겠다는 님의 마음 또한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합리성을 뛰어넘은 그 무엇인가구요. 님은 지금 무엇을 근거로 성경내용이 틀렸다는 말씀이신가요?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믿는다는 얘기구요. 지구 평평설은 성경과는 아무 관계없고 대홍수설과 출애굽설은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ㅇㅇㅇㅇㅇ 창세기1장에 그런 내용이 어디 있나요? 천동설을 주장하는 성경구절 근거를 대보세요
@ㅇㅇㅇㅇㅇ그렇다면 타 문명권의 대홍수설화는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타 문명권과 대홍수시기가 같을 거라는 전제를 두고 말씀하시는데 그 근거는 뭔가요?
죄라는 개념을 법적, 도덕적으로, 그리고 세상적인 시각에서 부정적인 부분만으로 조금 편협하게 이해하고 계신듯 하네요.
욕망을 통한 스스로의 발전도 하나님의 방향과 다르다면 죄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내가 발전이라고 생각하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그런듯 합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니, 앞으로도 계속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가기를 응원합니다.
그냥 단순하게 이해되도록 설명한 거지 하나하나 다 따지면 얘기를 못합니다.
신전티비와의 토론때도 그렇고 의외로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증요한 근거 중 하나가 원죄의 유무인 것 같네요.
원죄라는 개념 자체를 연좌제라고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저도 이에 대한 논리적인 혹은 사회과학적인 답이라고 느낀 것은 르네지라르의 희생양 매커니즘 뿐이긴 합니다.
정말 원죄라는게 있다면 보편적으로, 또 오랜 역사에 걸쳐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그런 행태를 보였다는 걸 제시해야 하고 저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그에 대한 충분히 납득할 만한 답을 제시한다고 보는 입장이거든요.
성경 외의 것에서 원죄를 정의하는게 좀 거시기 하긴 합니다만 여긴 원래 빨간맛이니깐..
아 그리고 지라르도 언급했지만 십게명의 마지막 계명이 네 이웃의 것을(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것도 참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원죄라는 것에 대해 변증할 때 중요한 근거라고 생각해요.
지라르의 통찰은 정말 훌륭하죠. 다만 전체를 이해시키려면 빌드업이 많이 필요한게 유일한 단점인듯 합니다.
@@DamascusLiveTV 축구나 지라르나 언제나 빌드업이 문제군요..
나이들이 아직 어려서인가 아니면 성경을 제대로 정확히 안배워서인가 왜그렇게
성경을 어렵게만 생각을 할까?
하느님 여호와께서 첫사람 아담과 하와를 완벽하게 지으셨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 완벽한 인간들이 여호와의 법을 어겼다 그리고 규칙을 세워놓은 법대로 그들을
사형시켰다.
그러므로 이세상에는 완벽한 인간들이 없다 왜냐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난 후에
쌔끼들을 까놓고 죽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인간들을 영원히 살수없게 고대로 놔둔다면 예수를 이땅에 보낼 필요가
없었을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여호와께서 인간들에게 영원히 살수있는 기회를
다시 주시기 위해서 은혜를 계획하여 요 3:16 독생자 영자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완벽한
인간 둘째 아담으로 이세상에 보냈다 즉 완벽한 인간들이 지은죄를 불완전한 인간들이
씻을수는 없는 일이니까 .
예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이말의뜻은 음욕을 품고 그여자를 자꾸 생각에 잠기다보면 벌써 자신도 모르게
그여자에게 달려가고 있을수가 있기때문이다.
다윗도 밧세바를 보고 계속 음흉한 생각을 하지않고 금방 지워버렸다면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을것이다.
어쨋든
성경의 하느님 여호와를 예수를 통하여 믿고 영생을 희망한다면 예수께서 영생의
비법을 알려준대로 하라고 하는것은 하고 하지말라고 하는것은 하지 않으면 되는것이다.
10: 49 ㅋㅋㅋㅋㅋ
'聖經 = 거울' 自身을 자세히 보면 ~ ! ¿
복음서도 시 일 수 있죠. 창세기가 시일 수 있다면.. 복음서도 시일 수 있죠.
창세기 극초반부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시의 특징이 없는데 어떻게 시인가요? 혹시 시=허구 라는 생각으로 댓글을 주시는건지 궁금하네요. 시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장르의 하나일 뿐입니다. 복음서의 장르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으나 시라는 의견은 없죠.
@@DamascusLiveTV 복음서를 마치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 처럼 말씀하시네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모습은 복음서 마다 각기 다릅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창작물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 또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장르라는 차원에서 시라고 한 것입니다.
@@김정선-p8w 장르이야기일 뿐입니다 그걸로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게 아니에요. 복음서는 굳이 따져서 수필이라고 본다면 사실관계를 따져볼법한 책이라는거죠
그러나 창세기 초반의 시로 이루어진 부분은 시이기 때문에 사실관계를 따질 필요가 없는 책이다 라는거구요
@@원기옥-d5f 복음서를 굳이 따져서 수필로 본다면, 창세기 초반도 굳이 따져서 시인 것이고... 수필이나 시나 문학입니다. 수필이나 시나 사실관계가 아니라 의미를 찾는 것이구요.
@@원기옥-d5f 그럼 창세기 초반 이후는 시가 아니란것이고... 여리고 사건은 실제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육체로 부활하고, 바위를 열어 버리고(또는 벽을 뚫어버리고),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는 우주속으로 날아가 버리고(지금도 날아가고 있으려라???)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는 것은 문자적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성경의 앞부분이 구라일수 있지만, 뒷 부분은 사실이다" 모순스런 주장 같습니다.
핵심?을 알아야한다,성경66권의 모든말씀은 쫒아내셨지만, 다시데려가신다이다, 알곡들만,,,선악과를먹으면,반드시 죽는다,,하나님의 엄중한말씀을 버리고 인간은 뱀의말을 더 솔깃하게듣고, 영이죽은것이고, ,혼,과,육,만남아, 죄를지을수밖에없는, 인간버러지가된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의공로로, 죄를씻고, 깨끗한영으로 되살리신것이다, 깨끗한몸으로 거듭났으면 하나님의법을알고, 신앙의절개를 굳건히, 끝까지 지키고, 자기십자가를지고 인내하며 견디는자는 알곡이되어, 천년왕국, 예수님이통치하실 천년왕국으로 들어가는것이다, 생명의 면류관을 잃지않도록 힘써지키는자가 되어야한다
그래도~! 희망 = 有 ~ ! ~ כאמונתך
구약 없이 신약이 없죠.고고학자들이 뭘 얼마나 알까요?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되고 나의 죄를 알게 되죠.
그리고 천국,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죠.
하필 ㅈ날두…
열심히도 했지만 메시 음해도 한 범죄두ㅋㅋㅋㅋㅋ
와... 좋은 채널을 찾았네요 그런데 우리가 아담에 대한 이야기와 구약의 기록물들을 보고서
사실 믿기지 않는 신비한 일들로 인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선 성경만 고집하여 읽는 것보다는 아담의 증언, 솔로몬의 증언, 야살의 책, 에녹서, 미드라쉬 등등 외경들을 살피면서 분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 기독교인들의 최대 이슈는 평평지구냐? 우주 속 둥근 지구냐?
사실 음모론도 어느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 NASA라는 단어도 SATAN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에도 세상사람들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조롱하기만 합니다.
우주는 없습니다.
성경에 우주에 관한 정보가 기록되어있지 않고 하늘의 해, 달, 별은 우리가 발을 디딜 수 있는 행성이 아니라 발광체 ㅡ 즉 조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진화론을 대입하여 과학을 접붙혀 논쟁하는 실태인데
우리는 신본주의적 신앙관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 인본으로 가서는 위험 합니다.
대한민국은 1948년에 기독교 국가로 세워졌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같은 해에 거진 2천년간 나라 없이 떠돌아 다니던 이스라엘 국가도
같이 세워진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신사참배의 위기 속에서 세워졌기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3차 중동 전쟁의 위기를 겪으면서 6일 전쟁을 무리없이 잘 소화해 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도 주님께서 도우심을 믿었습니다.
아담의 이야기도 동화 같아서 사실이 아닌 것 같지만 아담의 족보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상태에선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 났을 때 하와와 함께 지내던 나날들과 우리 신체의 장기가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인지에 대한 글들을 소화해내지 못하고선 이해 하지 못합니다.
첫 살인이 일어 났을 때의 상황과 셋의 족보로 므두셀라와 노아의 홍수까지 이야기들을 모두 이해하려면 천사가 우리들에게 지식을 가르쳐 주는 형식을 이해 해야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비유라는 건 신천지들이 내세우는 교리죠. 아담이 첫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웃긴 애들이죠.
많은 신학자들도 비유나 알레고리, 혹은 이스라엘의 원형이 담긴 이야기라고 주장하는데요..
님이 뭘 믿는지는 상관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모든이들이 신천지라고 오해받을 수 있는 발언은 삼가주세요 기독교는 예수와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것이지 그 외의
것이 아닙니다
@@yslee7692 뭐 그럼 정확히 어떤 내용까지 비유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디부터가 비유 또는 이스라엘 원형을 담은? 소설이고 어디부터 진실이죠?
@@TrueAndTree 제 생각이 뭐 중요한가요 공부 많이 한 학자들, 특히 보수적인 쪽 진보적인 쪽 모두,이 쓴 최신책 읽어보셔요 정답은 안 나온 상태지만 여러 지성들이 모여 많은 흥미로운 가설들이 나온 상태입니다. 그런거 읽어보시고 어느쪽이 더 설득력이 있게 느껴지는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yslee7692 네 뭐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소설이면 그 바로 전 내용인 창조도 소설이겠네요. 벌써부터 좋은 이론이란 생각이 들진 않는군요. 창세기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소설이면 이야기의 연속성 때문에 많은 내용이 영향을 받을 텐데요. 예를 들면 아담과 하와가 소설속 내용이면 당연히 가인과 아벨도 소설속 인물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