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 23장 34절) 예수의 이 말은 인간이 처해있는 어두움의 본질, 붓다가 말하기도 했던 번뇌의 근본인 무명(無明)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모르는가? 자기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가 양심의 부름이라 지칭하고 있는 것은 단지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위한 내면의 도덕적 명령을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바로 그 고유한 자기를 알아차리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기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에 무지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갈구했던 양무제는 자기가 기대했던 대답을 하지 않는 달마대사에게 마침내 묻습니다. "짐을 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입니까?" 달마의 답은 간단합니다. "모릅니다.(不識)" 언뜻 성의 없어 보이는 이 대답은 그러나 하이데거가 "양심은 현존재의 자기를 '그들' 속에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불러세운다. 부름받은 자기는 그의 무엇임에서는 규정되어 있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다. 현존재는 우선 대개 배려되고 있는 것에서부터 해석될 때에는 자기를 무엇으로서 이해하는데, 이것이 부름에서는 간과된다."고 말한 바로 그 양심의 소리에 대한 더 없이 정확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세간의 규정을 통해 자기를 이해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갑니다. 나의 이름은 무엇이며, 나의 부모는 누구이며, 내가 사는 곳은 어디이고,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다 등등. 우리는 이름, 신분, 출신, 외관 등으로 자기를 규정하고 있지만,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도 무방한 이러한 세속적인 자기규정을 달마(達磨)의 대답은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그대들이 규정하고 있는 그런 규정을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내가 알고 있었던 그런 자기 규정조차 거부한채 다시 묻는다. 진정 나는 누구인가? "모른다." 그러나 이 대답은 우리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의 자잘함에 빠져 있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주변의 모든 익숙한 것들이 붕괴되는 불안(Angst)에 당당히 직면하는 정신적 자살을 감행해야 겨우 일별 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기 때문입니다. 무상한 것들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우리의 허약한 안정감을 통째로 앗아가 버립니다. 그리하여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삶의 관성에서 빠져 나와서 양심의 부름에 응하는 일은 우리를 불안으로 인도합니다. "섬뜩함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개별화 된, 무 속으로 내던져진 자기보다 더 낯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이데거가 묘사한, 바로 그러한 낯섬으로서의 자기를 만나고서야 달마의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나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나도 모른다고 아는 자기에 대한 자각입니다. 보조지눌은 《수심결》에서 "다만 모르는 줄 알면 곧바로 본성을 보는 것이다.(但知不會, 是卽見性)"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달리 보이는 불안 속에서 우리는 새로워진 사물의 경이를 만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탐구하는 자들은 발견할 때까지 멈추지 말라. 발견하면 불안해질 것이며, 불안해질 때에 그들은 경탄할 것이며, 모든 것 위에서 다스리게 되리라. 다스린 후에 그들은 안식하리라."(도마복음 2장) 바울은 탄식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며 오히려 원치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로마서 7장19절) 깊은 울림을 주는 이 탄식에 대하여 자기의 실존에 충실한 하이데거적인 양심으로 되돌려 묻는다면 이런 물음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정녕 선을 원했고 악을 원치 아니했는가?" 자기의 실존에 책임을 지는 인간은 자기가 하는 짓으로부터 자기를 소외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유체이탈 화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가 하는 짓을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엄청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간 존재.. 며칠 세인의 기준에만 빠져서 기력이 다 떨어졌었는데 새벽에 강의 들으며 본래적 실존에 대해 고민해보았습니다 과정으로서의 존재이기에 무와 존재의 사이를 오가며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하이데거 역시 배려 심려의 안에서 염려를 생각하고 있고 그들과의 관계 변화에 양심의 소리와 죽음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낭시가 지적했던 되찾아야 할 자신만의 실존은 아닌 것 같은데요 ㅎㅎ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존재의 압도적인 공포앞에 들려오는 자기의 소리를 들어라 역시 하이데거네요 근데 통찰과는 별개로 너무 간단한 결론인 점이 아쉽네요 훨씬 복잡한 것이 존재인데... 진정한 자기자신 본래적 비본래적 이런 용어들의 속임수를 조심해야될 것 같네요 애초에 하이데거 본인의 존재개념과 모순되는 것도 같고 본래적인 게 어딨습니까 맞춰가고 만들어가는 거지 자아이상을 따를 필요 없다 하면 이해는 되겠네요
니체가 양심에 대하여 설명하지만 저는 양심은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양심이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만요 따지고 보면 종교라는 것은 폭력과 생존 양심과 자기위로의 인간이 자체 제작한 허구인 것 같아요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를 심겠다.조선시대 열녀설화가 임금에 대한 충성도.러브스토리도. 그것이 만약 조금 이라도 아름답고 감동한다면 양심을 지키려는 의지 아닐까요.양심은 태생하는 시점부터 존재하는 생물학적이고 생존과 함께 하는 것같아요 니체가 그렇게 말하죠 프로이트도요. 강의 듣게습니다.윤석열 대통령님도 잘못 뽑은것 같아요 일방통행에 용감하고 추진력 좋으나 종합적 사고 결여같아요 노통이 그립네요.좋은 밤 되세요 예도 교수님
요즈음 들어 불안이 부쩍 늘면서 피해망상이 늘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다른 유투브채녈의 영상들, 가족, 친구, 주변 사람들의 말이며, 타겟이 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섣불리 글을 쓴다는 것 역시도 불안을 자극합니다. 어디론가 도망쳐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신학과 수업 듣던 시절에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 중 인상적인 것이 "제가 믿는 예수님은 산을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앞뒤 맥락을 몽땅 잃어버린 채 기억나는 저 한마디는 어떤 무리의 중심에 서 있지 아니하고, 어떤 권력과 명예를 쫓지 않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득도 이 후 실천가적인 뉘앙스를 풍기기도 합니다.) 돌아와서, 이러한 피해망상 역시도 어떤 불안감에 대해서 공통점들을 찾아내는 성질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뒤집어 불안과 피해의식이 아닌 욕망과 환대적인 공통점찾기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타자의 불안까지도 감당해야 하는 삶은 퍽 서러운 듯 보입니다. 그렇기에 떠나는 것이 상책인데, 도무지 그럴 수 없는 것은 책임 없는 타자에게마저 휘둘려버리는 인간의 나약함인 듯 보입니다.. 양심의 소리...폭주하는 욕망의 질주를 멈춰세우는 제동장치... 너는 네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느냐? 네 말은 정녕 네가 원하는 바와 일치하느냐? 이러한 의미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이반의 분신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에게 있어 그의 사유에 대한 실재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보 천치의 아들이자 욕정가의 아들인 스메르쟈코프는 인간 본성의 양극성을 한 몸에 받아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반이 외면한 바,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에서 밀어내려 애쓰던 어떤 실재... 이반을 파멸로 몰아가버린 실재는 그에게 있어 참 가혹한 존재인 듯 보입니다.. 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n, dass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 23장 34절)
예수의 이 말은 인간이 처해있는 어두움의 본질, 붓다가 말하기도 했던 번뇌의 근본인 무명(無明)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모르는가? 자기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가 양심의 부름이라 지칭하고 있는 것은 단지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위한 내면의 도덕적 명령을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바로 그 고유한 자기를 알아차리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기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에 무지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갈구했던 양무제는 자기가 기대했던 대답을 하지 않는 달마대사에게 마침내 묻습니다. "짐을 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입니까?" 달마의 답은 간단합니다. "모릅니다.(不識)" 언뜻 성의 없어 보이는 이 대답은 그러나 하이데거가 "양심은 현존재의 자기를 '그들' 속에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불러세운다. 부름받은 자기는 그의 무엇임에서는 규정되어 있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다. 현존재는 우선 대개 배려되고 있는 것에서부터 해석될 때에는 자기를 무엇으로서 이해하는데, 이것이 부름에서는 간과된다."고 말한 바로 그 양심의 소리에 대한 더 없이 정확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세간의 규정을 통해 자기를 이해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갑니다. 나의 이름은 무엇이며, 나의 부모는 누구이며, 내가 사는 곳은 어디이고,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다 등등. 우리는 이름, 신분, 출신, 외관 등으로 자기를 규정하고 있지만,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도 무방한 이러한 세속적인 자기규정을 달마(達磨)의 대답은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그대들이 규정하고 있는 그런 규정을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내가 알고 있었던 그런 자기 규정조차 거부한채 다시 묻는다. 진정 나는 누구인가? "모른다." 그러나 이 대답은 우리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의 자잘함에 빠져 있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주변의 모든 익숙한 것들이 붕괴되는 불안(Angst)에 당당히 직면하는 정신적 자살을 감행해야 겨우 일별 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기 때문입니다. 무상한 것들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우리의 허약한 안정감을 통째로 앗아가 버립니다.
그리하여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삶의 관성에서 빠져 나와서 양심의 부름에 응하는 일은 우리를 불안으로 인도합니다. "섬뜩함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개별화 된, 무 속으로 내던져진 자기보다 더 낯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이데거가 묘사한, 바로 그러한 낯섬으로서의 자기를 만나고서야 달마의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나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나도 모른다고 아는 자기에 대한 자각입니다. 보조지눌은 《수심결》에서 "다만 모르는 줄 알면 곧바로 본성을 보는 것이다.(但知不會, 是卽見性)"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달리 보이는 불안 속에서 우리는 새로워진 사물의 경이를 만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탐구하는 자들은 발견할 때까지 멈추지 말라. 발견하면 불안해질 것이며, 불안해질 때에 그들은 경탄할 것이며, 모든 것 위에서 다스리게 되리라. 다스린 후에 그들은 안식하리라."(도마복음 2장)
바울은 탄식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며 오히려 원치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로마서 7장19절) 깊은 울림을 주는 이 탄식에 대하여 자기의 실존에 충실한 하이데거적인 양심으로 되돌려 묻는다면 이런 물음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정녕 선을 원했고 악을 원치 아니했는가?" 자기의 실존에 책임을 지는 인간은 자기가 하는 짓으로부터 자기를 소외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유체이탈 화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가 하는 짓을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좋습니다. 무양님^^
책을 읽고 또 읽어도 잘 잡히지 않던 부분들을 조금이나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훌륭한 강의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이데거 양심의 소리. 감사드립니다.
겨울을 앞둔
가을 계절과 조화로운 것 같아요.
낙엽을 향해
단풍이 익어가는 걸 보며.....
문득 매달려 있는 나를 느끼죠.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방갑습니다.^^ 영곤님도 활기찬 주말 저녁 맞이하셔요!
저번 강의에 이어서 이번강의까지,
이어서 보니, 예도쌤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네요!
방갑습니다. 성환님^^ 건강한 주말 보내셔요!
앞서 있음으로써의 존재. 지금의 나라는 존재의 양태와 언제나 함께있는 앞서 존재하는 무를 사유하는 또다른 모습의 나. 이 두 방향성이 동시적으로 공존한다는 것이 참 오묘하네요. 채우면서 비운다. 감사합니다.^^
최고입니다.!
좋은 날씨네요.^^ 영선님만의 꽉찬 의미 있는 하루 보내셔요!
하이데거 너무 반갑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침묵과 결단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굿모닝~ 포포님^^ 일주일 지난거 같은데 오랜만에 뵙는거 같아요. 방갑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셔요. 늘 고맙습니다.
니체와는 또다른 의미로 눈물이 나오는 하이데거 그리고 강의. "나는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신이 망각한 빈 공간이다"(Fernando Pessoa)
13:51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네, 방갑습니다.^^
엄청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간 존재..
며칠 세인의 기준에만 빠져서 기력이 다 떨어졌었는데 새벽에 강의 들으며 본래적 실존에 대해 고민해보았습니다
과정으로서의 존재이기에 무와 존재의 사이를 오가며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하이데거 역시 배려 심려의 안에서 염려를 생각하고 있고 그들과의 관계 변화에 양심의 소리와 죽음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낭시가 지적했던 되찾아야 할 자신만의 실존은 아닌 것 같은데요
ㅎㅎ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굿모닝~ 다솔작가님^^ 방갑습니다. 우리 인간이 모두 다 그렇지요!ㅎㅎ 날씨가 좋네요. 즐거운 하루 보내셔요!
마음씀의 부름
현존재의 존재의 부름
👍
방갑습니다. 다라쌤^^ 멋진 로고로 바꾸셨네요! 상쾌한 가을 공기 마시며 감기 들지 마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셔요!
@@TV-uw9lz
Danke ❤
존재의 압도적인 공포앞에 들려오는 자기의 소리를 들어라 역시 하이데거네요 근데 통찰과는 별개로 너무 간단한 결론인 점이 아쉽네요 훨씬 복잡한 것이 존재인데... 진정한 자기자신 본래적 비본래적 이런 용어들의 속임수를 조심해야될 것 같네요 애초에 하이데거 본인의 존재개념과 모순되는 것도 같고 본래적인 게 어딨습니까 맞춰가고 만들어가는 거지 자아이상을 따를 필요 없다 하면 이해는 되겠네요
오랜만에 뵙네요. 우형님^^ 방갑습니다. 좋은 날들 되시길요!
헐... 지우려고 들어왔는데 항상 감사드립니다 예도선생님!😊
존재와 시간은 41편까지 하셨는데 나머지는 언제 강의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 기다려집니다.
니체가 양심에 대하여 설명하지만 저는 양심은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양심이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만요 따지고 보면 종교라는 것은 폭력과 생존 양심과 자기위로의 인간이 자체 제작한 허구인 것 같아요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를 심겠다.조선시대 열녀설화가 임금에 대한 충성도.러브스토리도. 그것이 만약 조금 이라도 아름답고 감동한다면 양심을 지키려는 의지 아닐까요.양심은 태생하는 시점부터 존재하는 생물학적이고 생존과 함께 하는 것같아요 니체가 그렇게 말하죠 프로이트도요. 강의 듣게습니다.윤석열 대통령님도 잘못 뽑은것 같아요 일방통행에 용감하고 추진력 좋으나 종합적 사고 결여같아요 노통이 그립네요.좋은 밤 되세요 예도 교수님
오~ 용식님, 방갑습니다.^^ 장수마을의 구수한 된장냄새와 아름다운 자연이 그립네요.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셔요!
요즈음 들어 불안이 부쩍 늘면서 피해망상이 늘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다른 유투브채녈의 영상들, 가족, 친구, 주변 사람들의 말이며,
타겟이 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섣불리 글을 쓴다는 것 역시도 불안을 자극합니다.
어디론가 도망쳐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신학과 수업 듣던 시절에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 중 인상적인 것이
"제가 믿는 예수님은 산을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앞뒤 맥락을 몽땅 잃어버린 채 기억나는 저 한마디는
어떤 무리의 중심에 서 있지 아니하고,
어떤 권력과 명예를 쫓지 않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득도 이 후 실천가적인 뉘앙스를 풍기기도 합니다.)
돌아와서, 이러한 피해망상 역시도
어떤 불안감에 대해서
공통점들을 찾아내는 성질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뒤집어
불안과 피해의식이 아닌
욕망과 환대적인 공통점찾기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타자의 불안까지도 감당해야 하는 삶은 퍽 서러운 듯 보입니다.
그렇기에 떠나는 것이 상책인데, 도무지 그럴 수 없는 것은
책임 없는 타자에게마저 휘둘려버리는 인간의 나약함인 듯 보입니다..
양심의 소리...폭주하는 욕망의 질주를 멈춰세우는 제동장치...
너는 네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느냐?
네 말은 정녕 네가 원하는 바와 일치하느냐?
이러한 의미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이반의 분신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에게 있어 그의 사유에 대한 실재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보 천치의 아들이자 욕정가의 아들인 스메르쟈코프는 인간 본성의 양극성을
한 몸에 받아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반이 외면한 바,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에서 밀어내려 애쓰던 어떤 실재...
이반을 파멸로 몰아가버린 실재는 그에게 있어 참 가혹한 존재인 듯 보입니다..
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n, dass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오~ 주여, 은총을..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TV-uw9lz 늘 신세지고 있습니다!
꽃피는 3월에도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삶의 시련기를 지나고 계신 것 같은데 존재의 사막으로 수업료를 보내주셨네요.^^ 제 생각에 바들님이 은총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