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좋은 강의, 저도 1960년대에 결혼 잘하려고 피아노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며 좋은 시절 보내다 결혼해서 10년을 암흑시대로 보내다, 헤어지고 그러나 멋있는 딸과 아들을 얻었지요, 다시 결혼 또 힘들게 지내다 얼마전 부터 마음편하게 독립심으로 생각을 바꾸어 잘 지내나 많이 늙었네요. 요즘 좀 힘든곡도 연습하고 싶어 쳐보는데 기초실력이 너무 없어요. Dr. Doctoring 조언으로 힘도 얻고 더욱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Thanks lot
지하다방의 뿌연 담배연기속에서 스모키(Smokie)노래를 들으며 젊은날의 추억을 떠올리네ㅡ세월은 가고 사람은 남아 옛일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이 또한 젊은이의 양지이리라.. 그런 세월을 몇고개나 넘었던가? 이제는 쉰목소리가 허공속에 사라지고..나 또한 그림자되어 벽화로 남으리..
@@Dr.JungFrench 박 사님. 전 완전 흠뻑 박사님 강의에 빠져 버렸어요. 며칠 사이에 벌써 30강 이상 보았어요. 어쩜 말씀 을 그렇게 아름답고도 유머스럽게 구사하시는지요? 무엇보다 빛나는 눈동자 와 radiant 광채 나는 스킨 이 정말 돋보였어요. 코로나로 여행 하기도 힘든 시기에 가만히 안방에 앉아서 상세한, 교양있는 음악 역사, 미술 역사, 등의 가이드 받으면서 프랑스, 이집트, 요르단 여행을 했다는거 아닙니까? !!! 지난번 퀴즈 10개에 제가 10개 다 맞췄습니다. 음치 라고 구박 받던 제가요 박사님 덕분에 음악천재 라는 소리 를 태어나서 처음 들었어요. 제게는 너무나 자신감을 심어주는 엄청난 사건 이었답니다. 박사님의 인터뷰 도 2부 까지 다 시청했습니다. 너무너무 자랑스럽구요~~ 존경합니다. 배울점이 무지 무지 많아서 앞으로도 정말 기대하며, 설레임으로 계속 강의를 보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새해에도 좋은 강의 계속 해 주세요. 참고로 저는 한국이 아니라 뉴욕 에 살고 있습니다.
Amazing~^^ No word to expree your dramatic lectures. Thank you~^^😃 클래식 괸심 가진 지 얼마 언돼서요. 다른 작곡가들의 작음은 일관성이 느껴지는데, 베토벤의 음악은 여러 형태로 느껴졌고 고민이 되었었는데, 그분의 작품특색을 3기로 구분해서 설명햐 주셔서, 단번에 의문점이 날라갔어요. 오늘 처음 몇 개 강의 들었는데,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도토리 벅사님.😃
인연 / 파리에도 집이 있고 목포에도 집이 있는 최화백..프랑스 한인화가협회장을 하고 있으며 고향 목포에서 남농미술관같은 명품미술관을 오픈하려고 한국과 프랑스를 바쁘게 오가는 최화백ㅡ 간간히 서울대와 지방국립대에서 창작미술을 강의하고 작품활동을 한답니다ㅡ 목포 해상 케이블카는 프랑스 기술자들이 와서 완성한건데, 최화백이 통역을 담당햇다고..부인은 프랑스 여자. 목포출신 여배우 윤정희와 피아니스트 백건호와도 파리시내에서 자주만나 식사도 한다고..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유명화가들과 친한데ㅡ물방울 화가 김창렬도 그렇고.. 내가 추사어른 자손임을 알고 귀한 분이라고 치켜세운다네ㅡ추사 할아버지 후광이 이땅의 예술가들에게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랏어라~ 우리는 미술과 음악, 예술에 관하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엇지..내가 일하는 목포해양대학 현장에 찾아와 서로 깔깔대고 파안대소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웟다네ㅡ 예술가들이 만나면 술이 빠질수가 없는데ㅡ내가 기저질환으로 술을 끊엇다고 말하니, 아쉽게 생각하더라구.. 2023. 11. 2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난 겨울부터 언제나 멀찌감치서 바라만 봤던 클래식을 직접 느껴보고자ㅎㅎ 피아노를 즐겁게 배우고 있는 학생입니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 채널이 얼마나 소중한 지 몰라요ㅜㅜ 사실 인상파 음악 편을 먼저 보고왔는데, 미술 문학 등 동시대의 예술을 함께 엮어서 정말 재밌게 스토리텔링 해주시는 모습에 분명 어릴 때 학교에서 조금씩 다뤘던 내용들 같은데 그 때 이렇게 좋은 선생님께 많은 이야길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이라도 만나뵙게 되어서 너어무 기뻐요! 그리구 말씀하시는 모습과 더불어 스타일이 진짜 멋있으셔서..✨✨바로 구독 눌러버렸어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화 안 시(和顔施) / 재물로는 남을 돕지 못하지만 항상 얼굴에 따뜻한 마음을 띄우며 만나는 사람마다 온화한 미소로 대하는 것을 화안시라 한다. 즉 불가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보시(布施)이다. 그러나 물에 물감이 풀리듯 화안시는 그냥 나오는게 아니다. 일상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모질고 아픈 마음을 넘어서 달관한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비로소 얼골로 우러난다. 인간이란, 날씨가 추운데다 햇빛을 장시간 보지 못하면 다들 마음속까지 우울해 진다. 그래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않고 정신과 마음을 바로잡아 넉넉함으로 사람을 대하면 그 온화함은 행복의 씨앗이 되어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자기 마음이 아프다고 해서 상을 찡그리고 다니면 그 누구도 그런 사람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런가?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사람에게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대하기는 쉽지 않을 게다. 하지만 자기 마음 안뜰은 어둡고 정신은 침침해도 만나는 사람마다 너그럽고 온화한 넉넉함을 베푼다면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한결 밝게 만든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인지라 누구든 타인의 수고로 덕을 입고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은 세상이 귀찮아지고 염증이 날 때도 있을 법하다. 인간의 존재란 사회성에 반하는 혼자만의 고독과 외로움을 같이 타고 나는 까닭이다. 그렇다 해도 사회 시스템을 떠난 자기만의 삶이란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대도 그 삶은 무가치하다. 로빈슨 크로소우가 절해고도 무인도에서 무한한 자유를 느끼며 행복했을까? 일시적으로 그러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 가끔 TV를 보면 다니던 직장을 접고 가솔을 이끌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단촐한 삶과 주어진 자연을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들은 행복해 한다. 이것이 참인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ㅡ사람도 죽으면 한 줌의 흙,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리보면 이런 삶을 선택한 사람의 일상도 그리 나쁠건 없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인간으로서 보편적인 삶과 넓은 이웃이란, 외연을 가진 행복은 베풀지도 못하고 자기안에 갇혀 자족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다큐를 보면 얼굴을 돌린다. 그들은 21세기에서 태어난 도시의 화전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운명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자연속에서 살아가야할 팔자라면 머리를 끄덕일 수가 있다. 극심한 경쟁이 가로 놓인 현실에서 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건이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살아가는 것이 보다 인간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의 화전민은 어찌해도 이해가 불능이다. 그럼에도 이런 삶을 그리며 과감하게 화전민이 되고자하는 사람중엔 의외로 생각이 깊은 여인들도 있어서 가끔 놀란다. 싫다는 남편을 꼬드겨 깊은 산중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다. 곰배령이란 강원도 심심 산골에 산장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있는 여인이 있다. 명문 이화여대를 나오고 잠깐 사회생활을 하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서 이곳으로 들어 온 것이다. 여인은 자연의 산속 삶이 만족스러웠고 일상이 충만했으나 남자는 끝내 여인곁을 떠나고 없었다. 하지만 나라도 남자의 길을 갔을 것이다. 어찌 인생을 산속에 묻고 말 것인가! 어쨌든 산이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하는 순간 남자는 질식했으리라ㅡ밝게 떠 있는 달은 두개의 뿔이 달리고 안광을 쏘며 험한 얼굴로 자는 남자를 옥죄었을 것이다. 무서워서 벽장에도 숨고 마루밑으로도 들어갔겠지..식은 땀을 흘리며 베개를 흥건히 적시다 어느날 이런 저런 말도 없이 그길로 곰배령 산속에서 도시로 줄행랑을 쳤다. 인간은 모듬살이를 해야만 고독과 외로움에 갇힌 자기를 꺼내어 이웃을 넓히고 풍요로운 삶의 내면을 갖게 된다.
리스트의 Un Sospiro 한숨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워 제가 이곡을 칠때마다 옆집개가 울었답니다 ㅎㅎㅎ 제가 직접 연주했으며 영상 #19에 연주 넣었습니다. Pomona College 에서 연주 한 것이며 편집 안된 live 연주며 미비해도 이쁘게 봐주세요 🙏 영상 #18 리스트의 30 년 사랑 강의 보시고 들으시면 휠씬 더 마음에 닿으실거에요.
ㅋㅋ 독일 인간들 ㅋㅋ 오랫동안 렛슨을 하면서 발견한 것인데 남자들이 여자보다 음악 감정이 더 풍부하고 창의적이며 즉흥적 연주도 뛰어났어요.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한정된 언어로 남성의 아티스틱한 능력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클래식을 하는 여자들이 더 많지만 세계 명 연주자들은 거의 남자들이죠. ㅎㅎ 제 영상의 진가를 알아보시는 에녹님 감사합니다.
@@Dr.JungFrench 정말 그런것 같아요..다수의 능력자들은 여자가 월등히 많은데..정작 그것을 직업으로 삼아 오랜기간 하는 사람은 거의 남자들이 많더라구요..메이크업과 여성속옷 업계도 남자들이 장악을 하다시피 하니까요..하하하 그런면에서 박사님은 상업성과 질적수준 두가지다를 갖인 미국 클래식계의 여신 이십니다! 진짜 재미있는 클래식을 따분한 음악으로 외곡시키는 인간들이 세상엔 너무나 넘처나요...재즈는 더심하고요..
앜!!!!!!근데...독일인간 이라고한것에대해 화장실에서 이빨닦다 갑자기 생각나서 급히 글올립니다. 박사님 남편분께서 독일분이신데..제가 너무나 무례한 발언을 한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제가 너무 어릴적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나찌와 러시아공산당 영화를 너무나 많이 보고 자라서.. 저도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독일 러시아 공산주에 대한 역사공부까지 받으며 악의무리라 배워 온것이 잘못된 편견으로 자리 잡은것 같습니다.................다시한번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 〔〕 ⸽⋆⁞⸽💜 Dr. dotori 💜⸽⁞⋆⸽ 〔〕 ︾︾︾︾︾︾︾︾😍〔〕 아름다운 음악선생님. 재미있고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만13세가 지났어요. 아까 봤는데 댓글을 지금달아요. 행복한 주말되세요~❤💛💚💙💜 +천천히 다시 한번 더 볼게요ㅎㅎ
저도 어릴때 교장 이셨던 아버지가 바른 말씀하시고 갑자기 공산당 누명을 써, 가족이 모든 것을 잃은 후 7 살부터 성년까지 레슨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고, 오랫동안 Self study로 음악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빈손으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 개척을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답니다. 😉🎶 강한 정신만 있다면 분명 뭔가가 이뤄 진다고 봅니다. 😀 화이팅!
선화초등 후배 혜은이도 대전 호수돈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낙지골목 무교동에서 노래를 불렀다. 혜은이가 이렇게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것도 과거 제주도에서 영어선생을 하던 아버지가 어떤 계기로 낙랑악극단장을 하면서 전국순회공연을 다녔고 한국 연예계에서 마당발이었기에 무명가수였지만 어렵지않게 밤무대를 밟을수가 있었다. ㅡ1975년에 처음 내가 본 혜은이는 여기저기 흔히 볼 수 있는 자그마한, 눈에 띄지않는 그런 소녀의 모습이었다. 노래는 가냘프고 얼굴은 까무잡잡해서 도저히 스타성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한가지 가능성이라 함은, 무언가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하는 혹은 본능적으로 그대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될것 같은 그러한 느낌을 주는 소녀였다ㅡ☆길옥윤씨의 회고였다. 혜은이가 길옥윤씨에게서 처음 받은 곡은 였다. 이 곡을 취입하였으나 대중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적막한 세월속에 혜은이도 자기가 음반을 냈다는 사실을 잊고 밤무대에서 한달에 5만원을 받고 무대 오픈전 대기시간에, 무대끝나고 술집 웨이터들이 테이블을 정리할때 마지막 타임에 노래를 불러야 했다. 어느날 일이 끝나고 심야에 택시를 탔는데ㅡ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레코드로 취입했으나 잊고 있었던 가 아닌가! 아가씨ㅡ저 노래 아슈? 거ㅡ왜, 요즘 한창 뜨는 노래인데요?~기사가 말을 붙이며 흘끔흘끔 백미러로 훔쳐보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혜은이는 깜찍하고 애상적인, 가녀린 순수미로 열화같은 인기를 등에 업고 화려한 국민여동생으로 등극하였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 제주미인인 혜은이는 본래 집안이 대대로 부잣집으로 유복하게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역시 그 당시 중학교 선생으로 교편을 잡고 있었으니, 제주에서는 나름 인텔리였다. 특히 혜은이 엄마의 미모가 대단해서 멀리까지 미인이라는 소문이 났으므로 사람들이 일부러 엄마를 보러왔다. 훗날 혜은이는 그런 엄마가 비비안 리와 많이 닮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우리의 오 영감 아들은 혜은이 만한 빽도 없었고 단지 가수가 되어 인기도 많이 얻고 돈도 많이 벌고 싶었던 벌거벗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無産階級)였다. 주위에서는 돌 일이라도 배워야 나중에 호구지책을 하지 않겠느냐면서 목소리를 높여 성토를 해대니, 무명가수의 세월이 피곤하였다. 어느땐가 그를 다방에서 만났는데 내 앞에서 만원짜리 고액권 한 다발을 잠바에서 꺼내어 세어보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 돈이 어디에서 나온건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그 돈을 가지고 곡을 받아 음반취입이라도 할 꿈을 꾸었는지 모린다. 그렇다해도 수백만원으로 어찌 작곡가를 만나고 음반을 취입한단 말인가? 적어도 집 한채값은 있어야 했다. 걸출한 작곡가로, 뛰어난 섹스폰 연주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길옥윤(崔致禎, 1927년 2월 22일~1995년 3월 17일, 향년 68세)씨는 원래 치과의사였다. 서울치대를 나오고 경희대에서 치의학석사를 했다. 1950년 초 도쿄로 건너가 오자와 히데오(小澤秀夫)에게서 재즈 음악과 색소폰 연주법을 배웠고 1952년 일본에서 주일미군 캠프촌을 순회하는 악단을 조직하야 본격적인 재즈맨이 되었다. 이 때 일본 문인들의 이름을 차용하야 요시야 쥰(吉屋潤, 길옥윤)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사람에게는 숙명이 있고 운명이란게 있다. 길옥윤씨가 치과의사인 것은 숙명이라고 하면 역마살(驛馬煞)이 끼어 딴따라가 된 것은 그의 운명이었다. 참으로 인생길이란 희한하지 않겠는가? 하긴 서울대 나온 치과의사로 대배우인 신영균씨가 있다. 이 또한 역마살이 끼다보니 본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거다. 이러한 운명은 본인의 의지로만 억제할 수가 없다. 혜은이가 처음에는 시골 무지렁이로 데뷰했지만 노래가 뜨고 인기가 붙으면서 몰라보게 달라졌다. 여자의 변신은 경탄할 만 한 것이다. 내가 군산미공군 부대에서 근무할 때, 미군부대 정문앞에는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인근 전라도 처자들이 흑형이라도 만나려고 긴 줄을 섰다. 간혹 운이 좋으면 부대에서 일자리를 얻을수가 있었다. 그러면 백인이라도 만나 로맨스를 가질수가 있었고 미국으로 들어가 팔자를 고칠수가 있었다. 한국사람들이란 이해못할 문화가 있는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양놈이라면 백인을 엄청 선호한다. 야ㅡ깜둥이가 목욕하문 백인이 되느냐? ㅋㅋ..이렇게 흑형과 결혼한 여자를 천시하였다. 나는 이러한 것도 우리의 문화인만큼 비난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시굴 때꾸러기가 부대에 들어오고 석달이면 세련된 백만불짜리 여인으로 변모한다. 야ㅡ이럴수가! 경탄할 따름이다. 세기적인 오페라 디바이고, 불세출의 프리 마돈나인 마리아 칼라스(1923년 12월 2일~1977년 9월 16일, 향년 53세)는 어려서 아주 빈한하게 컸다. 그러나 노래가 좋았고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배출한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도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받침으로 4살때 부터 피아노를 쳤고 수석으로 서울음대로 진학했으며 나중에는 달랑 300불을 들고 이태리로 건너간 의지의 한국여인이다. 글문 오또케 그 돈으로 공부를 하얐으며 먹고 살았나요? 아ㅡ넵!ㅡ이태리에서 열리는 전국적인 성악 경연대회에 나가 일등을 하야 그 상금으로 먹고 살았어요..상금으로 서너달은 방구석에서 뒹굴수 있었지요ㅡ 어쨌든 지독한 헝그리정신으로 승부수를 띄워 살아남은 악바리가 조수미이다. 누가 뭐래도 될 사람은 된다!ㅡ단순명쾌한 조수미의 생활신조이다. 이탈리아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본격적으로 성악가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 오페라단원이 베네치아로 관광을 떠나게 되었다ㅡ그러나 마리아 칼라스는 갈 수가 없었다. 입고 갈 의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훌쩍이고 있을 때 오페라 후원회장이 그 사정을 알고 혼쾌히 의상을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세계적인 해운왕 그리스의 오나시스와 사실혼 관계였던 마리아 칼라스ㅡ그녀의 화려한 성공의 삶 이면에 드리웠던 짙은 가난의 그림자를 상상할 수 있겠나! 다방에서 오 영감 아들을 본지 몇년 후, 그가 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르긴해도 오 영감이 올매나 아들을 들들 볶았겠나? 도시 먹고 살 방도를 세우지않고 허구헌날 가수의 꿈에 부풀어 무위도식하고 있으니 왕소곰 오 영감으로서는 그 꼴이 얼마나 가증스러웠겠나ㅡ눈만 뜨면 부자가 서로 으르렁거렸을 터인즉 그 참상이 눈에 선하다. 일이야 오찌 되었든 죽은 무명가수의 명복을 빌 뿐이다. 다음 생에는 오 영감 아들도 무명가수를 벗어나 너~훈아로 거듭 태어나길 바란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 무슨 재민겨? 젊어서는 나 잘되기만을 바랐지만, 나이들수록 사회공동체와 국가발전을 위하야 진력하는것이 사람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임을 절절히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사회주의처럼 집단사고방식을 강제하는 체제는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과 개인의 창의력를 속박하는 것이므로 이런 제도는 극력반대한다. 나는 나라가 못살아도 개인의 자유와 창의적인 발전을 보장하는 그런 국가와 공동체의 널널한 체제와 푸근한 인심을 동경한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곳이 있다ㅡ바로 목포다! 목포는 광주와 같이 의식화된 공동체가 아니라 서편제 소리의 애수와 한국적인 인심이 짙게 깔린 아름다운 고장이다.
일본사에서 걸출했던 두 영웅..도꾸가와 이에야스ㅡ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 1616) 1535년 이에야스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는 1549년 24살의 나이로 오카자키 성 안에서 자객 이와마쓰 하치야에게 살해당했다. 히로타다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수많은 절명의 고비를 넘기면서 이후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불타는 혼노지에서 최후를 마친 천하제일인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한 히데요시를 모셨다. 히데요시 사후 아들 히데요리측과 세키가하라 혈투를 벌려 그들을 멸망시키고 에도에 도쿠가와 막부를 세웠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내고 265년간 평화를 실현시켰다. ...嬉やと 再び覚めて 一眠り 浮世の夢は 暁の空... ...기뻐하다가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든다. 덧없는 세상 꿈은 새벽 하늘과 같구나... 새벽하늘, 그것이 인생사! 날이 밝으면 맑은 해가 솟을지, 아니면 흐리고 바람이 불지? 풍파가 자심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근심이 아닐수가 없었다..왜 우리 정치인들은 이렇게 멋들어진 말을 못했을까? 오늘 날 많이 쓰이는 선수를 치다..라는 말은 이에야스의 조부 기요야스가 다스리는 미카와를 마키노 가문에서 침공하고자 획책하고 있을때 기요야스가 과감하게 한발앞서 군사를 일으켜 쳤다ㅡ기요야스는 뜻이크고 배포가 큰데다 지략이 출중하야 가신들로 부터 큰 신망을 받았는데 허무하게 가신인 아베 마사토요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나이 25세 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무장이다. 미천한 신분으로 젊어서는 전국을 떠돌며 장터에서 바늘을 팔았다. 이때의 바늘은 오늘날 반도체에 준했다. 중국장인이 만든 바늘이 귀한 수입품으로 조선과 일본에서 대량 유통되었는데, 가죽을 뚫어도 휘거나 부러지지 않았고 귀가 야물었다. 바늘장수 히데요시는 사무라이가 되고싶어 군대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자 하였다. 일개 병졸이었지만 개인의 역량과 실력을 누구보다 중시한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띄이면서 자신의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승승장구했다. 부하였던 미쓰히데의 반역으로 혼노지에서 사망한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미쓰히데의 난을 진압하고 대권을 이어받아 간바쿠(關白), 다이코(太閤)가 되어 일본의 정국을 주도했다. 조선을 2차에 걸쳐 침략하였고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조선인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浪速, 오사카)의 영화도 꿈속의 꿈이련가.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히데요시가 자랑했던 난공불락 오사카성에 가면 키가 다섯자에 불과한 무장 히데요시의 동상이 서 있다. 일본 원숭이 만한 보잘것이 없는 작달만한 키에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사내가 조선에게 명나라를 칠 것이니 길을 비켜달라고 간교한 수를 쓰며 대군을 몰아 조선을 침공하였다. 우리에게는 끔찍한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업보때문이었을까ㅡ노년에 가까스로 얻은 한점 혈육 히데요리에게 오사카성과 일본을 통치할 수 있는 대권을 물려주었으나 세상을 모르고 온실에서 큰 히데요리는 백년묵은 능구렁이 이에야스에게 패망하야 모친 요도기미와 함께 불타는 오사카성에서 최후를 마쳤다.
외국이 좋다? 사람마다 개성이 천차만별이어서 각자의 인생관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다. 그런즉 자기가 살고있는 나라와 고향이 제일 좋다며 여행가는것 자체를 탐탁해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있다. 반대로 살고있는 나라에서 외국으로 나가고자 막연히 기회를 엿보는 사람도 많다. 나는 어느쪽 인가? 그렇다ㅡ육신이 흙이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그럴지언정 한반도, 대한민국인이다. 늘 밥상에 오르는 숙성된 맛난 젖갈과 일상화된 빨리빨리 정신..그럼에도 느긋하고 구수한 사색적인 커피와 가을하늘처럼 향기로운 꼬냑이 인생의 맛이라고 영혼이 속삭인다. 나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막걸리와 소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배부른 탁배기와 왁자지껄한 소주의 대중성 자체가 싫다. 차라리 담백하고 깊은맛을 지닌 사케(さけ)가 훨씬 더 내 취향이다. 스페인 라만차의 시골귀족 돈키호테가 좋아했던 갖은 양념으로 자글자글 중불로 볶는 쇠고기 전골요리보다 육즙이 흐르는 큼지막한 스테이크가 너모나 좋다. 여기에 따끈따끈한 데미그라스 소스나 A1소스, 핫 소스를 쳐서 먹으문 금상첨화가 아닌가? 스페인의 고풍스런 옛수도 톨레도에서 먹은 양고기 스테이크와 곁들인 레드와인은 잊을 수 없는 중후한 영혼의 맛이었다. 이러한 고급스럽고 찰진 깊은맛을 고무로 된 혓바닥을 가진 엽전과 된장녀가 어찌 알겠느냐? 이들에게는 경부고속도로 칠곡휴게소에서 파는 갱상도 돼지국밥이 제격일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동석한 사람을 위하야 이런 것을 먹기도하지만 사실 천한 음식을 먹는 천한것들은 당연히 천대를 받아야 옳다. 우째 이런것들이 나와같은 동포일 것인가? 아마도 칠십을 넘긴 나이가 되도록 먹은 라면은 몇개가 안될 것이다. 이상하게 라면을 먹으문 뱃속이 끓는다. 기실 체질적인 것이겠지만 정말 불쾌하다ㅡ또한 땀을 뻘뻘흘리며 부대찌개를 정신없이 먹고있는 엽전들을 보면 토가 나올만큼 경멸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는 담백하고 찰진 도미찜이나 쫀득쫀득한 살이 푸짐한 가오리찜이다. 어려서 먹었던 맛이란 일생을 좌우하는 것이니 이런 음식을 늘 그리워한다. 조기가 이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ㅡ아니다! 내가 경멸하는 생선이 고등어인데, 이 걸 미식가인 마누라가 좋아하니까 짜증이다. 하지만 동해명태는 아주 좋아한다. 고춧가루를 듬뿍넣고 얼큰하게 탕을 만들면 맛이 죽여준다. 그런데도 명태를 먹는 나라가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나는 아무것이나 잘 먹는 식성을 가진 사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음식마다 맛이 천차만별이거늘 우째 돼지처럼 구유에다 대가리를 처박고 이것저것 맛나게 먹을수가 있겠느냐? 생각만해도 극혐이다. 이런 나이기에 노가다현장에서 대량으로 먹는 함바집 식사에는 쉬이 적응을 못하고 반드시 시내식당으로 나가서 밥을 해결한다. 어느땐 어쩔수없이 보름간 함바집 밥을 먹었는데 속에서 메슥거리고 역하여 극심한 콘디숀 난조를 보인적이 있었다ㅡ악몽이었다! 나는 돈을 준다고 해도 낙타와 사막이 있는 중동을 빼면 중국이나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가난한 동유럽에는 피치못할 일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문화자산이 별 볼이 없는 궁벽한 후진국이나 3세계를 가서 무엇을 보고 배우겠나? 경치? 내게는 일 없다ㅡ그런 나라로 여행가는 것 자체가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세대는 가난속에서 없이도 살았는데, 그 트라우마 때문인가?..잘 알수는 없어도 나 같은 경우에는 타고난 체질도 한몫하리라ㅡ 그럼에도 우리의 문화, 우리음식의 깊은맛과 푸짐한 식생활이 내 체질임을 어찌 숨길수가 있으리오! 그래서일까ㅡ나이를 먹을수록 의사가 있는 병원보다 한의원이 좋다. 천장에는 각종 약초를 담은 약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려있고 이름모를 약재냄새가 코를 찌른다. 제길! 이 따위 풀뿌리가 무슨 약이라고? 화를 내는 양놈들이겠으나 나는 이들에게 전혀 동의하지 않으니 끄덕없다. 이들은 우리의 숙성문화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한방도 그 범주에 있으니 말이다.
못난 사내 / 사내가 되어서 다른건 몰라도 먹을것 가지고 시시콜콜 따진다면 이 또한 천골(賤骨)이다. 더우기 여인도 아니고 사내가 말이다. 우리동네에 있는 컴퓨터수리점 사장이 연기가 사십은 되어보이는데 말간 대머리다. 처음에는 아재인줄 알았는데 몇번 들르다보니 아즉 장가안간 곰삭은 총각임을 알았다. 아니ㅡ언제까지 혼자서 후줄근하게 살 거요? 컴퓨터 수리점 사장님인즉, 아무리 궁해도 처자식은 먹여살릴것이 아임네? 그렇죠? 아ㅡ예~수입이야 일정치는 않아도 그럭저럭 남에게 아쉬운 소리안하고 먹고 살 만은 합니다. 그런데요? 왜 따라지인게요? 사내는 미간의 주름을 한껏 모으더니,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처럼 혼자 살문,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살면 세상 편하다 아입니껴? 헌디 내가 장가를 간다? 글면 여자를 먹여살려야 할 것이 아닙네까? 당연하지요ㅡ 그렇게되문 가장으로서 올매나 큰 책임감이 되것습니껴ㅡ한 인간을 들여와 내 벌이를 꼬박꼬박 둘로 나눠야 하니께요. 아니ㅡ그거야 당연한 일이지요~그럼 그만한 책임감도 없어서야 우찌 사내라 할 것이겠수? 앙? 그러자 사내는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곱씹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저 건너 한라 비발디 아파트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뎁쇼~그래서 점슨은 꼬박 꼬박 집으로 가서 어머니와 함께 밥을 먹슴다. 나는 이렇게 사는거이 좋습네다. 전혀 불만이 없으요~ 에이~이보슈ㅡ어머니는 어머니고 마눌은 마눌이지요! 사십이 되어가지구 우째 여자의 쓰임새를 분별하지 못합니까? 그러구도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소!.. 하긴 니는 평생가도 여자 지분냄새도 못맡고 죽을 위인이여~쩝쩝.. 알고보니, 당신 꼴통이구만..연구대상이야!ㅡ속으로 내뱉고 노트북을 들고 휑하니 집으로 발걸음을 하였다. 세상에나! 저런 인간이면 세상은 망할것이다..지독한 고린자비 녀석 같으니라구..끄응~ 이와같은 인간은 또 있었다ㅡ보령시 웅천면에 사는 복덕방쟁이 오 영감이 그러하였다. 오 영감은 시내에 방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묵힌 방을 알선하고 소개료를 받았다. 소개료라야 쌀 됫박을 챙기는게 다 이지만 골목골목을 누비며 걷다보면 한 여름날 콧궁기에 땀이 송글 송글 맺혔다. 야ㅡ남의 돈 먹기가 쉬운게 아녀라~탄식해보지만 이거라도 어디냐? 재수좋은 날에는 너댓건만 걸려도 전대가 묵직혔다. 오 영감은 젖방살이하는 사람에게 방소개만 하는게 아니라 타지로 이사가면서 집을 송두리째 내놓을 때는 꽤 묵직한 뭉칫돈이 오갔다. 일을 성사시키는 요령은 오 영감의 발품과 말재간이었다. 그런즉 웅천시내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신상파악과 자잘한 소문까지 미주알 고주알 챙겨야 했다. 부동산은 자고로 정보력이다ㅡ하여 달팽이처럼 두 뿔을 세워 촉을 살려야 했다. 이럴 땐 쌀 독을 가득채울 만큼 집안이 기름졌다. 담배도 최고급 신탄진 한보루를 옆구리에 끼고 한손에 고등어를 몇손 들고 들어오면 개선장군처럼 득의만만 하였다. 오 영감이 아츰에 일어나면 괭이발걸음으로 살곰거리며 쌀독에서 조심스럽게 쌀한줌을 퍼서 마누라에게 건네주면 마누라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고 바가지에 쌀을 일어 구공탄불에 찌그러진 양은냄비를 올려 놓았다. 마누라가 영감이 사온 고등어를 적쇠에 굽기시작하면 기름진 연기가 코를 찔렀다. 매캐하고 고소한 연기는 오 영감이 사는 판잣집 지붕틈으로 숭글숭글 새어나와 시장통으로 번졌다. 이런 날이면 주변에 사는 아낙들은 입을 삐죽이며 한마디씩 했다. 저 여편네 말여ㅡ고등어를 구우면 몸통은 제것으로 따로 찬장에 넣고 꼬리는 영감, 머리는 아들준다니께ㅡ오매ㅡ별 일도 다 있구먼~오찌 살림하는 아낙이 지 입만 챙긴다냐? 저런 여자 만나문 사내가 얻어먹지 못할껴ㅡ숭해라~대체로 이와 같았다. 한편 오 영감은 밤잠을 안자고 쌀통이 있는 구석으로 가서 뚜껑을 여닫았다. 낮에 쌀을 가득붓고 흡족한 마음으로 얼골로 쌀 위에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문 쌀독이 사람손을 탔는지 아닌지를 대뜸 알수 있었다. 사람의 노파심이란 해를 넘길수록 잔망스러지는 법이다. 그리하야 오 영감은 잠을 설치면서도 수시로 일어나 쌀독을 확인하였다. 그런 오 영감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은 가수가 소원이었는데, 그의 노래실력은 나도 모린다ㅡ그러나 나를 볼 때 마다 이태 전 서산극장에서 막간을 이용하야 노래실력을 뽐냈고 앵콜도 적잖이 받았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가수, 그것도 대중가수란 직업 자체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기에 그런 그가 희한할 따름이었다. 야ㅡ이런 생뚱맞은 인간도 있구나! 그런 정도였다. 그러나 이름있는 작곡자의 곡을 받고 음반취입까지 그 과정은 절대로 녹록치 아니한듯 싶었다. 시골 백일장, 군수앞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기고만장하야 가수의 꿈을 달고 서울로 상경.. 갖은 고생을 하면서 시골의 논밭을 팔아 음반을 내고 드디어 빛을 보아 꿈을 이룬 가수도 있는게 현실이지만 사실 실력있는 가수 지망생 백명이 이렇게 피를 쏟아가며 음반을 내도 대중의 인기를 얻는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당시 시골 아이들은 먹을것이 없어 소나무껍질을 벗겨먹고 송진으로 껌을 만들어먹던 때였다. 송진을 씹으며 구레용을 잘라 같이 씹으문 색깔든 껌이 만들어졌다ㅡ이 정도 만들려면 하루는 족히 턱주리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씹어야 했다. 그리하야 여학생들은 고군분투하야 만든 껌을 책상다리에 붙여놓고 다음 날 다시 떼어 씹었다. 이걸 짝짝짝~질릴 때까지 씹었으니 말이다. 어른들은 먹지못하야 얼골이 누렇게 부었는데 이것을 황달이라고 했다.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당시의 꿀꿀이죽이나 수구레는 요즘으로 치문 회장님의 호텔 만찬이었다. 그 다음은 술지게미다. 술지게미는 비지라고도 하는데ㅡ청주나 막걸리를 빚고 남은 곡식이다. 일본에서는 가축사료로 쓰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양조장에서 헐값으로 사와 밥대신 먹었다. 현대건설 사장을 거쳐 회장을 지냈고 샐러리맨 출신으로 대통령까지 꿰어찬 신화적인물이었던 이명박은 어릴때 술지게미로 배를 채웠는데, 학교에 가서 책상앞에 앉으면 벌겋게 취했다. 그래도 늘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니 머리는 비상한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다른 건 탓할게 없으나 쉰막걸리와 같은 그의 탁한 목소리는 집권시절 늘 들어야했으니 고역이었다. 이후로 꿀꿀이죽은 번듯한 식당의 부대찌개로 진화하여 오늘날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지만 나는 지금도 유독 부대찌개만은 먹지 않는다. 고놈의 유래를 잘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궁해도 명동백작은, 한 병의 와인과 기름이 졸졸 튀는 따끈한 스테이크를 즐겨야 한다. 자고로 총각이 죽으문 몽달귀신이 되었는데 장이 파한후에 해가 어슬피 기울면 저자거리에서 방망이가 뛰어다니며 여인네 치마를 들추고 희롱했다. 그려도 장간못간 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야 여인들은 모질게 몽달귀신을 대하지않고 나름 인정을 베풀었다. 즉 몽달귀신 앞에서 츠마를 열고 고쟁이를 보여주면서 몽달이를 달랬다. 그러면 아낙들이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순산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여염집 아낙이 아들을 낳으면 젖퉁이를 내놓고 다녔다. 자기의 자궁으로 한 집안의 대를 이었으니 여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공로가 없을 것이다. 장날에 앞섶을 풀어제친 아낙이 젖퉁이를 흔들며 팔자걸음으로 발걸음을 떼면 길가던 주변 사람들이 군말없이 길을 열어주었다. 이것이 우리네 조상님들이 살았던 방식이다. 또한 아들을 낳아 대를 이은 여인에게 세상이 부여한 훈장이기도 하였다. 총각무우로 총각김치를 담근다음 검정콩밥에 잘 익은 총각김치를 한 입에 걸처먹으면 그대로 꿀맛이다. 얼큰하고 매운 고춧가루로 젓갈을 넣어 발갛게 양념한 총각김치! 총각무우는 단단하게 발기된 생김새 만으로도 아낙들에게 대환영이다. 비아그라가 터럭만큼도 안들어간 천연산이기에 언제나 풀이죽어 늘어진 꼰대들 양물과는 차원이 다른 기운이 생동했다. 그러나 처녀귀신은 이런 몽달이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홍성에서 대천방향 국도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오른쪽으로 귀신집이 있다. 언뜻 보기에 양달이 드는 언덕아래에 잘 지어놓은 기와집인데 이곳 택시기사들은 이 집을 끔찍히도 두려워한다. 어느 날 밤, 홍성택시 기사가 광천까지 손님을 태우고 홍성으로 급히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헤드라이트 너머로 소복한 여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가는 길이고 빈차이니 손님을 태우면 기름값이라도 빠지겠지? 끼이익~택시를 세우자 여인이 뒷자리에 탔다. 손님, 어디까지 가슈? 그러자 낮은 목소리로 홍성들어가는 국도변 길목 기와집에서 내린다는 것이다ㅡ이상하다? 어째 목소리에 조곰도 온기가 없다는 말인가? 마치 찬바람이 스치는것 같았다. 자ㅡ다왓슈ㅡ여기 맞지요? 그리고 기사가 실내 백미러로 뒷자리를 쳐다본즉 아무도 없었다. 어라? 이상하다! 이럴수가..다시 보아도 뒷좌석에 사람이 없는것은 여전하였다. 너모나 괴이하야 얼골을 돌려 뒷좌석을 보니 어느듯 소복한 여인이 연기처럼 좌석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기사에게 이르기를, 내가 집으로 들어가 돈을 가져올 것이니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이르고 사뿐사뿐 기와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니ㅡ어떻게 된 게야?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말이야! 빌어먹을 내가 내려가봐야 하겠고나..쩝쩝 여보슈ㅡ아무도 없소? 대문을 두드리자 삐거덕 문이 열리며 노인이 나왔다. 아ㅡ나는 택시기사인데, 오다가 여인을 태웠소..그리고 여기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 돈을 주겠다고 했으나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기척이 없기로 내가 온거요ㅡ도대체 이 집으로 들어간 여인은 누구요? 아ㅡ이런..이런! 그건 내 딸이 맞소이다..오늘로 딸이 죽은지 일년되는 해로 제삿날이외다ㅡ오ㅡ딸이 왔구나! 말을 끝내자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뭐욧! 소복입은 손님이 죽은 딸이라구욧? 기사는 까무러칠듯 놀라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ㅡ잠시후에 정신을 가다듬은 기사는 걸음아ㅡ날 살려라ㅡ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백이 나간 상태로 오찌 집으로 왔는지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하였다. 이 사건으로 택시기사는 꼼짝을 못하고 한달여를 앓아누웠다. 그 이후로는 이 집이 귀신집으로 소문이 났다. 이런 집이 어느 날 한정식 간판을 달고 한식집으로 탈바꿈하였는데, 내가 중고 화물차를 사면서 매도자와 함께 밤중에 이 집으로 와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여주인은 살갑게 다가서며 식사를 하는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식당을 연지 2년째이고 여자 혼자 몸으로 꾸려간다는 것이다. 아니ㅡ아저씨는 뭣하는데요? 그게ㅡ몇해전에 세상을 떳지요.. 아저씨를 새벽에 깨워 밥을지어 먹인 후에 아저씨가 차를 몰고 나갔는데, 아침이 되자 경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저씨가 교통사고를 당하야 급히 대학병원 응급실로 데려갔으나 절명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지요..그 힘든 상처를 극복하기가 너모나 힘들었어요. 여주인은 그윽히 나를 바라보면서 풍체가 아름답고 늠름하다면서 칭찬하였다. 결국 귀신집은 아푼 사연이 있는 여인이 주인이 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은즉, 이 또한 인연이었다. 그날 여주인으로 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언젠가는 이 집을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아즉도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날은 나 또한 어찌하야 대천시내에 있는 허다한 식당을 멀리하고 하필 밤중에 홍성 귀신집을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아즉도 여주인은 그 집에서 살까? 많은 세월이 지났으니 지금은 아닐수도 있으리라 생각해본다ㅡ 세상을 살아보니 한번 스친 인연일지라도 오래도록 마음에 자리잡는 사람이 있고 눈뜨고 수없이 얼골을 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기억에 남지 않는 사람도 있다. 더구나 인연은 고사하고 만남 자체가 혐오스럽고 끔찍했던 사람도 있었다. 인간사, 만난다고 다 인연은 아니다. 그래서일까?ㅡ생전에 쌓인게 많아 한이 깊었던 여인들이 죽으면 귀신이되어 이승을 벗어나지 못하는 괴로움을 하소연할 것이다. 그런즉 귀신을 보면 푸닥거리를 해서라도 저승으로 보내야 한다.
0:01 : Gabriel Faure's Pavane OP.50
1:38 : Tchaikovsky's Barcarlle (뱃노래)
3:00 : Offenbach's Barcarolle
4:45 : Beethoven's Symphony No. 5, 2nd movement
8:45 : Chopin's Polonaise
9:25 : Chopin's Sonata B flat minor 1st movement
9:48 : Schubert's Serenade
10: 57 : Liszt's Unsospino
12:45 : Mendelssohn's Elegy
15:12 : Chopin's Etude Op. 25 No. 1
15:47 : Gabriel Faure's Pavane (Middle selction)
19: 05: Chopin's Nocturne in E minor
선생님 정말 아름답습니다 🌹
낭만파 음악의 특징 문학 음악 예술 모두 적용 되는 대하여 잘 알고 갑니다
영상도 너무 멋집니다
선생님 덕분에 이삿갓 많은것을 배우고 갑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한국은 겨울일텐데 감기, 코로나 모두 조심하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너무 좋은 강의, 저도 1960년대에 결혼 잘하려고 피아노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며 좋은 시절 보내다 결혼해서 10년을 암흑시대로 보내다, 헤어지고 그러나 멋있는 딸과 아들을 얻었지요, 다시 결혼 또 힘들게 지내다 얼마전 부터 마음편하게 독립심으로 생각을 바꾸어 잘 지내나 많이 늙었네요. 요즘 좀 힘든곡도 연습하고 싶어 쳐보는데 기초실력이 너무 없어요. Dr. Doctoring 조언으로 힘도 얻고 더욱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Thanks lot
댓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 영상 중 인터뷰 1, 2 가 있는데 열심히 살아오신 선생님에게 더욱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연습을 많이 하다보면 저절로 요령과 기초가 생기는게 피아노랍니다. 연습을 많이 하면 reading 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너무 재미있게 듣고 있어요. 정주행중^^ 감사해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영상 전부 보시고 나면 철학, 예술, 문화, 학문, 년대별 정치적 변화, 역사, 음악에 최고의 지식인이 되실겁니다. 꾸벅 꾸벅
열정적인 classic 해설과 인절미 같은 음색과 표현에 재미있고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야기의 달인이십니다~~~!!!
'인절미 같은 음색' 최고의 멋진 표현입니다. ㅎㅎ 깊이 감사드리며 행복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고전시대는 감정을 누르며 규칙적으로 살고. 낭만시대는 자기표현을 다 살리도록 표현했군요.전세계를 움직는것은 바로 음악이네요.피아노가최고의 역사를 만들었네요.낭만파는 곧 사랑이네요.
박사님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고전파 음악과 낭만파 음악이 매우 다르고 형식도 다른 것이죠. 감사합니다
Romantic 영화 주인공같이 아름다운 Dr. French,
Tu sei romantica!❤
매우 감사합니다. 항상 노력하며 퀄리티있는 강의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
音樂과낭만파
해설 이 너무귀에 감미롭다
박식은누구나배우며는되지만
재취있는 언어구사 흔치안은
매력과미모을겸하신것같습니다.
우리는체육만하다보니
다름돼로力動的哲學
을갖고있지만음악은自然
속에서 나오겠지요
文學과영감일진돼
크라식 보다 나이가드니단순한 음악쪽으로 치우칩니다
해설자목소리가 너무감이롭고매혹적감각을 타고
나신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목
소리잘들었답니다
건강하세요
Soo~^^♡
하하 과분한 칭찬에 힘입어 더욱 좋은 방송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즐겁고 재밌고 엔돌핀이 생기게 하시는 사랑하게 만드는 아름다운분이여요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행복하네요♡♡
멋진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선생님 해박한 해설 책자로 출판 하셨는지요?
구해서 공부하고 싶어요
닥터 도토리 전
행복합니다. 한국의 여성 박학다식과 그 인문을 푸는 모습
음성과 미소를 만나는 감흥이 과히 표현이 어렵지요
자랑스럽네요
한국의 위대한 인품의 격이 넘침니다.
자랑스런 강의 한 방마다 시처럼 음악처럼 넘치네요.
저는 음악 무뢰한이나 이 시간을 기다립니다
긍정적인 멋진 댓글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한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닥터정 탁월한 해설
저서좀 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어쩜 한마디도 못놓치겠노라
명강의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래요.
와 선생님 정말 항상 느끼는 거지만 사람 머리 속에 얼마나 들어있어야 이렇게 술술 나올 수 있는 건지 정말.... 와! 입니다 그냥...
공부시간에 안 졸면 됩니다 ㅎㅎ 그 댓가로 눈이 다 망가졌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음악에 얽힌 여러이야기들이 너무 재미있어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영님, 새로운 주, 행복한 시간과 함께 멋지게 보내세요. 감기도 조심하시고요.
안녕하세요 훈이네 하우스 입니다
즐거운 하루 입니다
요즘 영상 잘보고 있습니다
자주 소통하면서 지내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좋아요 꾹~😣😣
감사합니다. 방문하겠으며, 항상 건강하세요.
음악같은 유친님의 목소리로 오늘도 출발합니다.🎉🎉🎉🎉🎉🎉🎉🎉🎉
매우 감사드리며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클래식 문외한이 클래식을 좀 알아보고자 검색해서 들어오게 됐는데, 5분 10분만 들어도 설명하시는 내용이 수준높은 걸 알겠네요. 분량도 많고 당장읕 다 못봐도 두고두고 봐야겠습니다. 좋은 내용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초보자부터 박사까지 이해하도록 재미있고 싶게 풀이해 강의하고 있으며 시대별로 정치, 사회, 문화, 철학, 예술 뿐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종합 지식을 가져가는 채널이랍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13세 미만 시청 불가~~ 너무 좋은 서두와 함께 낭만파 음악의 특징, 괴짜들이 많은 낭만파 영상 많은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쌤, 감사드립니다. 계속 낭만파에 관한 영상이 나갈 것이며 전부 13세 미만 시청 불가 입니다. ㅎㅎ 좋은 휴일 보내세요.
영원히 움직이는 대양의 해면
밀려오는 제멋의 흥겨움
쓰다듬는 손길
어째서 바람이 오는지 알겠네
저 입술의 잔잔한 음성을 닮으려네
오월의 여왕이 향기를 닮으려네
귀로 드는 향기
멋진 댓글에 깊이 감사드리며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
Dr. Dotori 폭포수 부서지는 포말이 비말한다 승화의 구름이 하얗게 떠가네요 오늘도 그 목소리의 격이 두둘긴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며 행복하세요 🙏🎶
오래도록 궁금하여 너무 알고 싶어 했던 내용을 박사님께서 잘 설명하며 정리하여 주셔서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리며 170 개 강의 천천히 시간 나실때 마다 들으시고 음악 박사 되시길 바랍니다. 모든 강의는 가장 쉽게 풀이 했으며 , 많은 지식과 정보를 짧은 시간내 얻으시리라 봅니다. 행복한 시간 되세요.🙏
박사님~~
멋진 자연풍경과함께 듣는 음악이야기 최고입니다.
낭만파 음악이야기에대해 잘 배우고갑니다~^^
반가와요. 독일 라인강을 찍을때 손이 흔들려 깨끗이 못 찍었습니다. 낭만파 음악역사가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며, 또 가장 광범위한 것이라 계속 방영 할 생각입니다. 멋진 주말 되세요.
낭만파에 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도가 무척 빠른 우수한 학생이십니다. ㅎㅎㅎ 늘 감사드리며 좋은 시간 되세요.
너무나 멋진프로입니다
교수님의 매력은 저의
희망이 될듯함니다
하하 재미있는 댓글에 감사드리며 저보다 휠씬 멋진 분이 될 것입니다.
서양의고전음악에대한 열정, 해박한지식,정감넘치는해설,덕분에 종합예술공부중!!
하하 고맙습니다. 그리고 멋지십니다.👍🎶
@@Dr.JungFrench 유튜브 '밀라논나'운영자와 비슷한 분위기네요!!
선생님 영상 잘 보고
많이 배웁니다
재미있게 하시는 강의에 잘 챙겨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멋진 휴일 되세요.
요즘 도토리 박사님 유튭체널에 푹 빠저사네요. 너무. 재미있어요.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음악공부 열심히 하셔서 왠만한 교수들보다 더 많이 아실것 같아요.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세요.
재미있는 낭만파 음악스토리~ 지난번에 이어서 두번보니 머리속에 조금 남는것 같아요. 좋은영상입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축복받는 12 월과 함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너무나
유익한영상입니다
아주
매력적인분이십니다
다재다능하시고
해설이 최고입니다
선생님의 모든영상을
찾아 시청하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꾸벅 꾸벅~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지하다방의 뿌연 담배연기속에서 스모키(Smokie)노래를 들으며 젊은날의 추억을 떠올리네ㅡ세월은 가고 사람은 남아 옛일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이 또한 젊은이의 양지이리라..
그런 세월을 몇고개나 넘었던가? 이제는 쉰목소리가 허공속에 사라지고..나 또한 그림자되어 벽화로 남으리..
이런강의 들으니 너무좋습니다.
공부더해서 질문도 드리겠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귀한 강의 넘^^~~감사합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시간되세요.
이런곳도 있었군요.. 지금이라도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너무 재밌습니다. 삶이 풍부하게 될 것 같습니다.
대환영하며 모든 강의는 독립되어 있어 순서없이 마구잡이로 보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Hi dear friends. I m here enjoy watching your content. Keep safe and success for your channel. See you again
Thank you so much 🤗 I will do my best. Have a wonderful day!
박사님 멋진 강의에
정신을 잃고 빠져드네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하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시간들 보내시길 바랍니다.
와우 ! 짱짱짱 짱짱짱 짱이예요 ❤
하하하 매우 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박사님이 가지고 계신 의지와 능력 베품 모든거 존경하며 건강하시여 오랫동안 강의 해 주셔요 💜 💜 💜 💜 사랑해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스, 이스라엘에 이집트 여행 중이며 이용숙님과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당연히 돌아가서 많은 것을 함께 쉐어하겠습니다 🙏
낭만파 음악에 대해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독 ♥좋아요는 기본이고! "알람설정까지" 하라고 하셔야 새로운 영상이 뜨면 바로 오게 된답니다.
박사님 감사합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행복한 휴일 보내세요.
너무 너무 좋아요,
덕분에 음악적 지식도 아주 풍부해 졌어요.
재미있게, 그리고 알기 쉽게 강의 해 주셔서
머리에 쏙 쏙 들어 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유익한 시간 이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영상 122개 전부 보시면 아마 한국에서 음악박사도 못 따라갈겁니다. ㅎㅎ 새해는 더욱 건강하시고 원하시는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되길 기원합니다.
@@Dr.JungFrench
박 사님. 전 완전 흠뻑 박사님 강의에 빠져 버렸어요. 며칠 사이에 벌써 30강 이상 보았어요. 어쩜 말씀 을 그렇게 아름답고도 유머스럽게 구사하시는지요? 무엇보다 빛나는 눈동자 와 radiant 광채 나는 스킨 이 정말 돋보였어요. 코로나로 여행 하기도 힘든 시기에 가만히 안방에 앉아서 상세한, 교양있는 음악 역사, 미술 역사, 등의 가이드 받으면서 프랑스, 이집트, 요르단 여행을 했다는거 아닙니까? !!! 지난번 퀴즈 10개에
제가 10개 다 맞췄습니다.
음치 라고 구박 받던 제가요 박사님 덕분에 음악천재 라는 소리 를 태어나서 처음 들었어요. 제게는 너무나 자신감을 심어주는 엄청난 사건 이었답니다.
박사님의 인터뷰 도 2부 까지 다 시청했습니다. 너무너무 자랑스럽구요~~ 존경합니다.
배울점이 무지 무지 많아서
앞으로도 정말 기대하며, 설레임으로 계속 강의를 보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새해에도 좋은 강의 계속 해 주세요. 참고로 저는 한국이 아니라 뉴욕 에 살고 있습니다.
Dr.Dotori TV님! 안녕하세요 ~
요즘 로맥틱웨딩메이크업스타일을강의해서인지
낭만주의 음악특징영상이 귀에 쏙 쏙 쏙
이웃맺고 향기남기고갑니다.
수리 !수리 !마수리~ 뿅! 뿅! 뿅!
좋은 이웃되기를 갈망하면서
응원합니다😍👸💌🎁💘💃👍
시청 감사합니다. 방문하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Dr.JungFrench
수리! 수리! 마수리~ 뿅! 뿅! 뿅!
응원합니다🎁
Amazing~^^ No word to expree your dramatic lectures. Thank you~^^😃
클래식 괸심 가진 지 얼마 언돼서요. 다른 작곡가들의 작음은 일관성이 느껴지는데, 베토벤의 음악은 여러 형태로 느껴졌고 고민이 되었었는데, 그분의 작품특색을 3기로 구분해서 설명햐 주셔서, 단번에 의문점이 날라갔어요. 오늘 처음 몇 개 강의 들었는데,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도토리 벅사님.😃
감사합니다. 제 강의 전부 들으시면 음악 박사가 되실거에요.😉 천천히 하루에 1-2 개 들으시길 추천합니다. 좋은시간 되세요🙏☕️
며칠 만의 공부다~~~ 13세 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첨으로 한국에서 경찰서 유치장 갔던 나이인데 ㅋㅋㅋ 독일 2주간 갔다왔지만 정말 사람들도 친절하고 최고였어요~
힘든 경험을 하셨기에 두려움없이 영국에서 4,000명 앞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다 봅니다. 코로나 조심하시고 12월 마무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런던한량 하이팅
인연 /
파리에도 집이 있고 목포에도 집이 있는 최화백..프랑스 한인화가협회장을 하고 있으며 고향 목포에서 남농미술관같은 명품미술관을 오픈하려고 한국과 프랑스를 바쁘게 오가는 최화백ㅡ
간간히 서울대와 지방국립대에서 창작미술을 강의하고 작품활동을 한답니다ㅡ
목포 해상 케이블카는 프랑스 기술자들이 와서 완성한건데, 최화백이 통역을 담당햇다고..부인은 프랑스 여자.
목포출신 여배우 윤정희와 피아니스트 백건호와도 파리시내에서 자주만나 식사도 한다고..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유명화가들과 친한데ㅡ물방울 화가 김창렬도 그렇고..
내가 추사어른 자손임을 알고 귀한 분이라고 치켜세운다네ㅡ추사 할아버지 후광이 이땅의 예술가들에게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랏어라~
우리는 미술과 음악, 예술에 관하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엇지..내가 일하는 목포해양대학 현장에 찾아와 서로 깔깔대고 파안대소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웟다네ㅡ
예술가들이 만나면 술이 빠질수가 없는데ㅡ내가 기저질환으로 술을 끊엇다고 말하니, 아쉽게 생각하더라구..
2023. 11. 2
플룻선율로 듣던 포레의 파반느를 🎹 피아노로 들이니 나름 신선하고 새롭네요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
너무 잼나게 이야기해주셔서ᆞ시간여행 할수있음 낭만파시대 가보고싶네요ᆞ한명만 만나고올수있으면 누굴만나고 와야할지 저는 더 공부해야 할거같아요ㆍ박사님은 누구를 만나고 오고싶으실까요 ㅎㅎ 항상 우아한 영상 감사합니다 ᆞ
감사합니다. 너무 재미있는 상상을 하셨네요. 1명만 만나야 한다면 ......음악역사를 아주 용감하게 뒤집어 놓은 베토벤을 만나, 딱 한곡만 쳐달라고 하겠어요. ㅎㅎ
드디어 오셨군요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앉아 있는 자세도 고급 져요 선생님 ㅎㅎㅎ
하하 고맙습니다. 클라식음악 열심히 공부하셔서 감사드립니다.
평소 잘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뱃노래 설명이 최고 입니다. 그동안 궁금했거던요. 왜 전부 뱃노래를 작곡했지? 전부 베니스 다녀 왔는가? 곤돌라 타고왔나? 쇼팽은 베니스 안 가봤을텐데 ? 하는 의문이 있었거던요! 고맙습니다
하하 전부 베니스 곤돌라 탔나? 🤣 재미있는 댓글 감사드리며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바랍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난 겨울부터 언제나 멀찌감치서 바라만 봤던 클래식을 직접 느껴보고자ㅎㅎ 피아노를 즐겁게 배우고 있는 학생입니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 채널이 얼마나 소중한 지 몰라요ㅜㅜ 사실 인상파 음악 편을 먼저 보고왔는데, 미술 문학 등 동시대의 예술을 함께 엮어서 정말 재밌게 스토리텔링 해주시는 모습에 분명 어릴 때 학교에서 조금씩 다뤘던 내용들 같은데 그 때 이렇게 좋은 선생님께 많은 이야길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이라도 만나뵙게 되어서 너어무 기뻐요! 그리구 말씀하시는 모습과 더불어 스타일이 진짜 멋있으셔서..✨✨바로 구독 눌러버렸어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멋진 댓글 감사합니다. 어느나라든 음대에서도 너무 재미없게 가르쳐 많은 학생들이 음악역사를 가장 싫어합니다. 사실, 가장 재미있는 필드이죠. 행복한 휴일 되세요.
좋은 해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 되시고 환절기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보트데이트 낭만적일거같아요ᆞ 저도 해보고싶네요ᆞ
코로나 바이러스 염려 안 해도 되고 안전할 것 같아요. 꼭 해보세요. 멋진 주말 되시길 바래요.
화 안 시(和顔施) /
재물로는 남을 돕지 못하지만 항상 얼굴에 따뜻한 마음을 띄우며 만나는 사람마다 온화한 미소로 대하는 것을 화안시라 한다. 즉 불가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보시(布施)이다. 그러나 물에 물감이 풀리듯 화안시는 그냥 나오는게 아니다. 일상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모질고 아픈 마음을 넘어서 달관한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비로소 얼골로 우러난다. 인간이란, 날씨가 추운데다 햇빛을 장시간 보지 못하면 다들 마음속까지 우울해 진다. 그래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않고 정신과 마음을 바로잡아 넉넉함으로 사람을 대하면 그 온화함은 행복의 씨앗이 되어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자기 마음이 아프다고 해서 상을 찡그리고 다니면 그 누구도 그런 사람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런가?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사람에게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대하기는 쉽지 않을 게다. 하지만 자기 마음 안뜰은 어둡고 정신은 침침해도 만나는 사람마다 너그럽고 온화한 넉넉함을 베푼다면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한결 밝게 만든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인지라 누구든 타인의 수고로 덕을 입고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은 세상이 귀찮아지고 염증이 날 때도 있을 법하다. 인간의 존재란 사회성에 반하는 혼자만의 고독과 외로움을 같이 타고 나는 까닭이다. 그렇다 해도 사회 시스템을 떠난 자기만의 삶이란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대도 그 삶은 무가치하다. 로빈슨 크로소우가 절해고도 무인도에서 무한한 자유를 느끼며 행복했을까? 일시적으로 그러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
가끔 TV를 보면 다니던 직장을 접고 가솔을 이끌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단촐한 삶과 주어진 자연을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들은 행복해 한다. 이것이 참인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ㅡ사람도 죽으면 한 줌의 흙,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리보면 이런 삶을 선택한 사람의 일상도 그리 나쁠건 없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인간으로서 보편적인 삶과 넓은 이웃이란, 외연을 가진 행복은 베풀지도 못하고 자기안에 갇혀 자족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다큐를 보면 얼굴을 돌린다. 그들은 21세기에서 태어난 도시의 화전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운명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자연속에서 살아가야할 팔자라면 머리를 끄덕일 수가 있다. 극심한 경쟁이 가로 놓인 현실에서 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건이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살아가는 것이 보다 인간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의 화전민은 어찌해도 이해가 불능이다. 그럼에도 이런 삶을 그리며 과감하게 화전민이 되고자하는 사람중엔 의외로 생각이 깊은 여인들도 있어서 가끔 놀란다. 싫다는 남편을 꼬드겨 깊은 산중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다.
곰배령이란 강원도 심심 산골에 산장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있는 여인이 있다. 명문 이화여대를 나오고 잠깐 사회생활을 하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서 이곳으로 들어 온 것이다. 여인은 자연의 산속 삶이 만족스러웠고 일상이 충만했으나 남자는 끝내 여인곁을 떠나고 없었다. 하지만 나라도 남자의 길을 갔을 것이다. 어찌 인생을 산속에 묻고 말 것인가! 어쨌든 산이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하는 순간 남자는 질식했으리라ㅡ밝게 떠 있는 달은 두개의 뿔이 달리고 안광을 쏘며 험한 얼굴로 자는 남자를 옥죄었을 것이다. 무서워서 벽장에도 숨고 마루밑으로도 들어갔겠지..식은 땀을 흘리며 베개를 흥건히 적시다 어느날 이런 저런 말도 없이 그길로 곰배령 산속에서 도시로 줄행랑을 쳤다. 인간은 모듬살이를 해야만 고독과 외로움에 갇힌 자기를 꺼내어 이웃을 넓히고 풍요로운 삶의 내면을 갖게 된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온 가족 모두 건강하시며 행복한 시간 되세요.
박사님 쇼팽의 인생과 러브스토리 다시 들으려는데 안나옵니다ᆞwhy???
하하, 피아노 치면서 잡음이 심해, 다시 녹음해 넣느라 겆어들였습니다. 곧 나오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토리 박사님, 열정적이고 재밌게 하신 강의, 짬짬이 역주행 하며 보고있는 새 구독자입니다.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특히 11:24 분경 툭툭 던져지는 멜로디,,,
느므느므 아름다워요. 곡명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튠이 하루종일 저의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 Ear warm, 선생님 강의에서 배운 것임요.ㅎㅎ)
P.S. 박사님의 멋짐은 저의 모토 입니당 ~~😊❤
리스트의 Un Sospiro 한숨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워 제가 이곡을 칠때마다 옆집개가 울었답니다 ㅎㅎㅎ 제가 직접 연주했으며 영상 #19에 연주 넣었습니다. Pomona College 에서 연주 한 것이며 편집 안된 live 연주며 미비해도 이쁘게 봐주세요 🙏 영상 #18 리스트의 30 년 사랑 강의 보시고 들으시면 휠씬 더 마음에 닿으실거에요.
빠른 답변 감사드립니다. 당분간 이 곡을 많이 들을 것 같네요.
바쁘실텐데, 모든 분들의 댓글에 일일이 답장 써 주시는 세심한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
아... ..... 독일............. 전미국이 좋아요.. .. .. 나찌! 스윙키드라는 영화생각 나네요..ㅎㅎ
그러고보니 마르크스도 독일인간이네요! 박사님 영상은 3번 반복해서 봐야 진정한 진가를 알수있는 영상 입니다.
여러번 반복해서 봐도 재미있네요. 베토벤이 독일을 살렸네요..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하...그레서 유난히 클래식은 피아노가 여자가 많군요..
피아노도 여자들을...미국의 담배 마케팅하고 비슷하네요.. 그때 피알이란 말이생겨 났다하던데..
ㅋㅋ 독일 인간들 ㅋㅋ 오랫동안 렛슨을 하면서 발견한 것인데 남자들이 여자보다 음악 감정이 더 풍부하고 창의적이며 즉흥적 연주도 뛰어났어요.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한정된 언어로 남성의 아티스틱한 능력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클래식을 하는 여자들이 더 많지만 세계 명 연주자들은 거의 남자들이죠. ㅎㅎ 제 영상의 진가를 알아보시는 에녹님 감사합니다.
@@Dr.JungFrench 정말 그런것 같아요..다수의 능력자들은 여자가 월등히 많은데..정작 그것을 직업으로 삼아 오랜기간 하는 사람은 거의 남자들이 많더라구요..메이크업과 여성속옷 업계도 남자들이 장악을 하다시피 하니까요..하하하 그런면에서 박사님은 상업성과 질적수준 두가지다를 갖인 미국 클래식계의 여신 이십니다!
진짜 재미있는 클래식을 따분한 음악으로 외곡시키는 인간들이 세상엔 너무나 넘처나요...재즈는 더심하고요..
앜!!!!!!근데...독일인간 이라고한것에대해 화장실에서 이빨닦다 갑자기 생각나서 급히 글올립니다.
박사님 남편분께서 독일분이신데..제가 너무나 무례한 발언을 한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제가 너무 어릴적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나찌와 러시아공산당 영화를 너무나 많이 보고 자라서..
저도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독일 러시아 공산주에 대한 역사공부까지 받으며 악의무리라 배워 온것이 잘못된 편견으로 자리 잡은것 같습니다.................다시한번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enochsakae8840 ㅎㅎㅎ 걱정 마세요. 남편도 나찌들 치를 떨며 경멸합니다. 나찌들때문에 프란츠에서 프렌치로 가문 성까지 바꿔야 했으니까요 ㅎㅎ 에녹님 양치질 하시다 놀랬다고 하니 옆에서 남편이 막 웃습니다 ㅎㅎㅎㅎㅎㅎ
@@Dr.JungFrench 아이구야...감사합니다..박사님영상중 독일인이 프랑스인처럼 된것 다시 시청해 봐야겠습니다...너그러운 남편분께도 저의 실례되는 표현을 재미있게 받아주신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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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 doto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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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음악선생님.
재미있고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만13세가 지났어요.
아까 봤는데 댓글을 지금달아요.
행복한 주말되세요~❤💛💚💙💜
+천천히 다시 한번 더 볼게요ㅎㅎ
진주님 감사합니다. 남을 아름답게 보는 분이 더 아름답습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요즘 음악가들도 많은 음악을 내놓고있겠죠?
그렇죠. 그런데 베토벤, 모짜르트나 낭만파 시대때 작곡가 같은 사람은 아직 안 나타났답니다. 어려운 환경속에 영웅들이 탄생하는 것 같아요. 주말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박사님 통하여 클라식의. 흐름이 어렴프시 잡히는 것 같습니다.
비전공자로 kbs FM에서. 해설은듣ㄱㆍ있지만 음악은 멜ㄹㅗ디만
감사합니다. 클랙식을 제대로 공부하면 많은 필드의 지식도 함께 쌓게 된다고 봅니다.🙏
지금도 예체능은 경제적여유 없으면 입장불가/공부가제일 저렴한 분야!!
저도 어릴때 교장 이셨던 아버지가 바른 말씀하시고 갑자기 공산당 누명을 써, 가족이 모든 것을 잃은 후 7 살부터 성년까지 레슨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고, 오랫동안 Self study로 음악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빈손으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 개척을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답니다. 😉🎶 강한 정신만 있다면 분명 뭔가가 이뤄 진다고 봅니다. 😀 화이팅!
도토리 선생님 반갑습니다
언제나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해가 되길 바랍니다.
선화초등 후배 혜은이도 대전 호수돈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낙지골목 무교동에서 노래를 불렀다. 혜은이가 이렇게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것도 과거 제주도에서 영어선생을 하던 아버지가 어떤 계기로 낙랑악극단장을 하면서 전국순회공연을 다녔고 한국 연예계에서 마당발이었기에 무명가수였지만 어렵지않게 밤무대를 밟을수가 있었다.
ㅡ1975년에 처음 내가 본 혜은이는 여기저기 흔히 볼 수 있는 자그마한, 눈에 띄지않는 그런 소녀의 모습이었다. 노래는 가냘프고 얼굴은 까무잡잡해서 도저히 스타성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한가지 가능성이라 함은, 무언가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하는 혹은 본능적으로 그대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될것 같은 그러한 느낌을 주는 소녀였다ㅡ☆길옥윤씨의 회고였다.
혜은이가 길옥윤씨에게서 처음 받은 곡은 였다. 이 곡을 취입하였으나 대중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적막한 세월속에 혜은이도 자기가 음반을 냈다는 사실을 잊고 밤무대에서 한달에 5만원을 받고 무대 오픈전 대기시간에, 무대끝나고 술집 웨이터들이 테이블을 정리할때 마지막 타임에 노래를 불러야 했다.
어느날 일이 끝나고 심야에 택시를 탔는데ㅡ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레코드로 취입했으나 잊고 있었던 가 아닌가! 아가씨ㅡ저 노래 아슈? 거ㅡ왜, 요즘 한창 뜨는 노래인데요?~기사가 말을 붙이며 흘끔흘끔 백미러로 훔쳐보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혜은이는 깜찍하고 애상적인, 가녀린 순수미로 열화같은 인기를 등에 업고 화려한 국민여동생으로 등극하였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 제주미인인 혜은이는 본래 집안이 대대로 부잣집으로 유복하게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역시 그 당시 중학교 선생으로 교편을 잡고 있었으니, 제주에서는 나름 인텔리였다.
특히 혜은이 엄마의 미모가 대단해서 멀리까지 미인이라는 소문이 났으므로 사람들이 일부러 엄마를 보러왔다. 훗날 혜은이는 그런 엄마가 비비안 리와 많이 닮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우리의 오 영감 아들은 혜은이 만한 빽도 없었고 단지 가수가 되어 인기도 많이 얻고 돈도 많이 벌고 싶었던 벌거벗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無産階級)였다.
주위에서는 돌 일이라도 배워야 나중에 호구지책을 하지 않겠느냐면서 목소리를 높여 성토를 해대니, 무명가수의 세월이 피곤하였다. 어느땐가 그를 다방에서 만났는데 내 앞에서 만원짜리 고액권 한 다발을 잠바에서 꺼내어 세어보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 돈이 어디에서 나온건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그 돈을 가지고 곡을 받아 음반취입이라도 할 꿈을 꾸었는지 모린다. 그렇다해도 수백만원으로 어찌 작곡가를 만나고 음반을 취입한단 말인가? 적어도 집 한채값은 있어야 했다.
걸출한 작곡가로, 뛰어난 섹스폰 연주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길옥윤(崔致禎, 1927년 2월 22일~1995년 3월 17일, 향년 68세)씨는 원래 치과의사였다. 서울치대를 나오고 경희대에서 치의학석사를 했다.
1950년 초 도쿄로 건너가 오자와 히데오(小澤秀夫)에게서 재즈 음악과 색소폰 연주법을 배웠고 1952년 일본에서 주일미군 캠프촌을 순회하는 악단을 조직하야 본격적인 재즈맨이 되었다. 이 때 일본 문인들의 이름을 차용하야 요시야 쥰(吉屋潤, 길옥윤)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사람에게는 숙명이 있고 운명이란게 있다. 길옥윤씨가 치과의사인 것은 숙명이라고 하면 역마살(驛馬煞)이 끼어 딴따라가 된 것은 그의 운명이었다. 참으로 인생길이란 희한하지 않겠는가? 하긴 서울대 나온 치과의사로 대배우인 신영균씨가 있다. 이 또한 역마살이 끼다보니 본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거다. 이러한 운명은 본인의 의지로만 억제할 수가 없다.
혜은이가 처음에는 시골 무지렁이로 데뷰했지만 노래가 뜨고 인기가 붙으면서 몰라보게 달라졌다. 여자의 변신은 경탄할 만 한 것이다. 내가 군산미공군 부대에서 근무할 때, 미군부대 정문앞에는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인근 전라도 처자들이 흑형이라도 만나려고 긴 줄을 섰다. 간혹 운이 좋으면 부대에서 일자리를 얻을수가 있었다. 그러면 백인이라도 만나 로맨스를 가질수가 있었고 미국으로 들어가 팔자를 고칠수가 있었다.
한국사람들이란 이해못할 문화가 있는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양놈이라면 백인을 엄청 선호한다. 야ㅡ깜둥이가 목욕하문 백인이 되느냐? ㅋㅋ..이렇게 흑형과 결혼한 여자를 천시하였다. 나는 이러한 것도 우리의 문화인만큼 비난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시굴 때꾸러기가 부대에 들어오고 석달이면 세련된 백만불짜리 여인으로 변모한다. 야ㅡ이럴수가! 경탄할 따름이다.
세기적인 오페라 디바이고, 불세출의 프리 마돈나인 마리아 칼라스(1923년 12월 2일~1977년 9월 16일, 향년 53세)는 어려서 아주 빈한하게 컸다. 그러나 노래가 좋았고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배출한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도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받침으로 4살때 부터 피아노를 쳤고 수석으로 서울음대로 진학했으며 나중에는 달랑 300불을 들고 이태리로 건너간 의지의 한국여인이다. 글문 오또케 그 돈으로 공부를 하얐으며 먹고 살았나요? 아ㅡ넵!ㅡ이태리에서 열리는 전국적인 성악 경연대회에 나가 일등을 하야 그 상금으로 먹고 살았어요..상금으로 서너달은 방구석에서 뒹굴수 있었지요ㅡ
어쨌든 지독한 헝그리정신으로 승부수를 띄워 살아남은 악바리가 조수미이다. 누가 뭐래도 될 사람은 된다!ㅡ단순명쾌한 조수미의 생활신조이다.
이탈리아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본격적으로 성악가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 오페라단원이 베네치아로 관광을 떠나게 되었다ㅡ그러나 마리아 칼라스는 갈 수가 없었다. 입고 갈 의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훌쩍이고 있을 때 오페라 후원회장이 그 사정을 알고 혼쾌히 의상을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세계적인 해운왕 그리스의 오나시스와 사실혼 관계였던 마리아 칼라스ㅡ그녀의 화려한 성공의 삶 이면에 드리웠던 짙은 가난의 그림자를 상상할 수 있겠나!
다방에서 오 영감 아들을 본지 몇년 후, 그가 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르긴해도 오 영감이 올매나 아들을 들들 볶았겠나? 도시 먹고 살 방도를 세우지않고 허구헌날 가수의 꿈에 부풀어 무위도식하고 있으니 왕소곰 오 영감으로서는 그 꼴이 얼마나 가증스러웠겠나ㅡ눈만 뜨면 부자가 서로 으르렁거렸을 터인즉 그 참상이 눈에 선하다. 일이야 오찌 되었든 죽은 무명가수의 명복을 빌 뿐이다. 다음 생에는 오 영감 아들도 무명가수를 벗어나 너~훈아로 거듭 태어나길 바란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 무슨 재민겨?
젊어서는 나 잘되기만을 바랐지만, 나이들수록 사회공동체와 국가발전을 위하야 진력하는것이 사람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임을 절절히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사회주의처럼 집단사고방식을 강제하는 체제는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과 개인의 창의력를 속박하는 것이므로 이런 제도는 극력반대한다.
나는 나라가 못살아도 개인의 자유와 창의적인 발전을 보장하는 그런 국가와 공동체의 널널한 체제와 푸근한 인심을 동경한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곳이 있다ㅡ바로 목포다! 목포는 광주와 같이 의식화된 공동체가 아니라 서편제 소리의 애수와 한국적인 인심이 짙게 깔린 아름다운 고장이다.
일본사에서 걸출했던 두 영웅..도꾸가와 이에야스ㅡ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 1616)
1535년 이에야스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는 1549년 24살의 나이로 오카자키 성 안에서 자객 이와마쓰 하치야에게 살해당했다.
히로타다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수많은 절명의 고비를 넘기면서 이후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불타는 혼노지에서 최후를 마친 천하제일인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한 히데요시를 모셨다. 히데요시 사후 아들 히데요리측과 세키가하라 혈투를 벌려 그들을 멸망시키고 에도에 도쿠가와 막부를 세웠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내고 265년간 평화를 실현시켰다.
...嬉やと 再び覚めて 一眠り 浮世の夢は 暁の空...
...기뻐하다가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든다. 덧없는 세상 꿈은 새벽 하늘과 같구나...
새벽하늘, 그것이 인생사! 날이 밝으면 맑은 해가 솟을지, 아니면 흐리고 바람이 불지? 풍파가 자심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근심이 아닐수가 없었다..왜 우리 정치인들은 이렇게 멋들어진 말을 못했을까?
오늘 날 많이 쓰이는 선수를 치다..라는 말은 이에야스의 조부 기요야스가 다스리는 미카와를 마키노 가문에서 침공하고자 획책하고 있을때 기요야스가 과감하게 한발앞서 군사를 일으켜 쳤다ㅡ기요야스는 뜻이크고 배포가 큰데다 지략이 출중하야 가신들로 부터 큰 신망을 받았는데 허무하게 가신인 아베 마사토요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나이 25세 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무장이다. 미천한 신분으로 젊어서는 전국을 떠돌며 장터에서 바늘을 팔았다. 이때의 바늘은 오늘날 반도체에 준했다. 중국장인이 만든 바늘이 귀한 수입품으로 조선과 일본에서 대량 유통되었는데, 가죽을 뚫어도 휘거나 부러지지 않았고 귀가 야물었다. 바늘장수 히데요시는 사무라이가 되고싶어 군대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자 하였다. 일개 병졸이었지만 개인의 역량과 실력을 누구보다 중시한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띄이면서 자신의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승승장구했다. 부하였던 미쓰히데의 반역으로 혼노지에서 사망한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미쓰히데의 난을 진압하고 대권을 이어받아 간바쿠(關白), 다이코(太閤)가 되어 일본의 정국을 주도했다. 조선을 2차에 걸쳐 침략하였고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조선인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浪速, 오사카)의 영화도 꿈속의 꿈이련가.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히데요시가 자랑했던 난공불락 오사카성에 가면 키가 다섯자에 불과한 무장 히데요시의 동상이 서 있다. 일본 원숭이 만한 보잘것이 없는 작달만한 키에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사내가 조선에게 명나라를 칠 것이니 길을 비켜달라고 간교한 수를 쓰며 대군을 몰아 조선을 침공하였다. 우리에게는 끔찍한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업보때문이었을까ㅡ노년에 가까스로 얻은 한점 혈육 히데요리에게 오사카성과 일본을 통치할 수 있는 대권을 물려주었으나 세상을 모르고 온실에서 큰 히데요리는 백년묵은 능구렁이 이에야스에게 패망하야 모친 요도기미와 함께 불타는 오사카성에서 최후를 마쳤다.
외국이 좋다?
사람마다 개성이 천차만별이어서 각자의 인생관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다. 그런즉 자기가 살고있는 나라와 고향이 제일 좋다며 여행가는것 자체를 탐탁해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있다. 반대로 살고있는 나라에서 외국으로 나가고자 막연히 기회를 엿보는 사람도 많다.
나는 어느쪽 인가? 그렇다ㅡ육신이 흙이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그럴지언정 한반도, 대한민국인이다. 늘 밥상에 오르는 숙성된 맛난 젖갈과 일상화된 빨리빨리 정신..그럼에도 느긋하고 구수한 사색적인 커피와 가을하늘처럼 향기로운 꼬냑이 인생의 맛이라고 영혼이 속삭인다. 나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막걸리와 소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배부른 탁배기와 왁자지껄한 소주의 대중성 자체가 싫다. 차라리 담백하고 깊은맛을 지닌 사케(さけ)가 훨씬 더 내 취향이다.
스페인 라만차의 시골귀족 돈키호테가 좋아했던 갖은 양념으로 자글자글 중불로 볶는 쇠고기 전골요리보다 육즙이 흐르는 큼지막한 스테이크가 너모나 좋다. 여기에 따끈따끈한 데미그라스 소스나 A1소스, 핫 소스를 쳐서 먹으문 금상첨화가 아닌가? 스페인의 고풍스런 옛수도 톨레도에서 먹은 양고기 스테이크와 곁들인 레드와인은 잊을 수 없는 중후한 영혼의 맛이었다. 이러한 고급스럽고 찰진 깊은맛을 고무로 된 혓바닥을 가진 엽전과 된장녀가 어찌 알겠느냐? 이들에게는 경부고속도로 칠곡휴게소에서 파는 갱상도 돼지국밥이 제격일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동석한 사람을 위하야 이런 것을 먹기도하지만 사실 천한 음식을 먹는 천한것들은 당연히 천대를 받아야 옳다. 우째 이런것들이 나와같은 동포일 것인가? 아마도 칠십을 넘긴 나이가 되도록 먹은 라면은 몇개가 안될 것이다. 이상하게 라면을 먹으문 뱃속이 끓는다. 기실 체질적인 것이겠지만 정말 불쾌하다ㅡ또한 땀을 뻘뻘흘리며 부대찌개를 정신없이 먹고있는 엽전들을 보면 토가 나올만큼 경멸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는 담백하고 찰진 도미찜이나 쫀득쫀득한 살이 푸짐한 가오리찜이다. 어려서 먹었던 맛이란 일생을 좌우하는 것이니 이런 음식을 늘 그리워한다. 조기가 이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ㅡ아니다! 내가 경멸하는 생선이 고등어인데, 이 걸 미식가인 마누라가 좋아하니까 짜증이다. 하지만 동해명태는 아주 좋아한다. 고춧가루를 듬뿍넣고 얼큰하게 탕을 만들면 맛이 죽여준다. 그런데도 명태를 먹는 나라가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나는 아무것이나 잘 먹는 식성을 가진 사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음식마다 맛이 천차만별이거늘 우째 돼지처럼 구유에다 대가리를 처박고 이것저것 맛나게 먹을수가 있겠느냐? 생각만해도 극혐이다.
이런 나이기에 노가다현장에서 대량으로 먹는 함바집 식사에는 쉬이 적응을 못하고 반드시 시내식당으로 나가서 밥을 해결한다. 어느땐 어쩔수없이 보름간 함바집 밥을 먹었는데 속에서 메슥거리고 역하여 극심한 콘디숀 난조를 보인적이 있었다ㅡ악몽이었다!
나는 돈을 준다고 해도 낙타와 사막이 있는 중동을 빼면 중국이나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가난한 동유럽에는 피치못할 일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문화자산이 별 볼이 없는 궁벽한 후진국이나 3세계를 가서 무엇을 보고 배우겠나? 경치? 내게는 일 없다ㅡ그런 나라로 여행가는 것 자체가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세대는 가난속에서 없이도 살았는데, 그 트라우마 때문인가?..잘 알수는 없어도 나 같은 경우에는 타고난 체질도 한몫하리라ㅡ
그럼에도 우리의 문화, 우리음식의 깊은맛과 푸짐한 식생활이 내 체질임을 어찌 숨길수가 있으리오! 그래서일까ㅡ나이를 먹을수록 의사가 있는 병원보다 한의원이 좋다. 천장에는 각종 약초를 담은 약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려있고 이름모를 약재냄새가 코를 찌른다. 제길! 이 따위 풀뿌리가 무슨 약이라고? 화를 내는 양놈들이겠으나 나는 이들에게 전혀 동의하지 않으니 끄덕없다. 이들은 우리의 숙성문화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한방도 그 범주에 있으니 말이다.
도입부 음악은 제목이 뭔가요?
댓글 가장 위에 모든 제목 넣었으며 시간 누르시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 모든 강의마다 음악 제목, 시간 넣겠습니다. 감사드리며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Dr.JungFrench 정성담긴 답변 고맙습니다
못난 사내 /
사내가 되어서 다른건 몰라도 먹을것 가지고 시시콜콜 따진다면 이 또한 천골(賤骨)이다. 더우기 여인도 아니고 사내가 말이다.
우리동네에 있는 컴퓨터수리점 사장이 연기가 사십은 되어보이는데 말간 대머리다. 처음에는 아재인줄 알았는데 몇번 들르다보니 아즉 장가안간 곰삭은 총각임을 알았다. 아니ㅡ언제까지 혼자서 후줄근하게 살 거요? 컴퓨터 수리점 사장님인즉, 아무리 궁해도 처자식은 먹여살릴것이 아임네? 그렇죠?
아ㅡ예~수입이야 일정치는 않아도 그럭저럭 남에게 아쉬운 소리안하고 먹고 살 만은 합니다. 그런데요? 왜 따라지인게요?
사내는 미간의 주름을 한껏 모으더니,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처럼 혼자 살문,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살면 세상 편하다 아입니껴? 헌디 내가 장가를 간다? 글면 여자를 먹여살려야 할 것이 아닙네까? 당연하지요ㅡ
그렇게되문 가장으로서 올매나 큰 책임감이 되것습니껴ㅡ한 인간을 들여와 내 벌이를 꼬박꼬박 둘로 나눠야 하니께요. 아니ㅡ그거야 당연한 일이지요~그럼 그만한 책임감도 없어서야 우찌 사내라 할 것이겠수? 앙?
그러자 사내는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곱씹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저 건너 한라 비발디 아파트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뎁쇼~그래서 점슨은 꼬박 꼬박 집으로 가서 어머니와 함께 밥을 먹슴다. 나는 이렇게 사는거이 좋습네다. 전혀 불만이 없으요~
에이~이보슈ㅡ어머니는 어머니고 마눌은 마눌이지요! 사십이 되어가지구 우째 여자의 쓰임새를 분별하지 못합니까? 그러구도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소!.. 하긴 니는 평생가도 여자 지분냄새도 못맡고 죽을 위인이여~쩝쩝..
알고보니, 당신 꼴통이구만..연구대상이야!ㅡ속으로 내뱉고 노트북을 들고 휑하니 집으로 발걸음을 하였다. 세상에나! 저런 인간이면 세상은 망할것이다..지독한 고린자비 녀석 같으니라구..끄응~
이와같은 인간은 또 있었다ㅡ보령시 웅천면에 사는 복덕방쟁이 오 영감이 그러하였다. 오 영감은 시내에 방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묵힌 방을 알선하고 소개료를 받았다. 소개료라야 쌀 됫박을 챙기는게 다 이지만 골목골목을 누비며 걷다보면 한 여름날 콧궁기에 땀이 송글 송글 맺혔다. 야ㅡ남의 돈 먹기가 쉬운게 아녀라~탄식해보지만 이거라도 어디냐? 재수좋은 날에는 너댓건만 걸려도 전대가 묵직혔다.
오 영감은 젖방살이하는 사람에게 방소개만 하는게 아니라 타지로 이사가면서 집을 송두리째 내놓을 때는 꽤 묵직한 뭉칫돈이 오갔다. 일을 성사시키는 요령은 오 영감의 발품과 말재간이었다. 그런즉 웅천시내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신상파악과 자잘한 소문까지 미주알 고주알 챙겨야 했다. 부동산은 자고로 정보력이다ㅡ하여 달팽이처럼 두 뿔을 세워 촉을 살려야 했다.
이럴 땐 쌀 독을 가득채울 만큼 집안이 기름졌다. 담배도 최고급 신탄진 한보루를 옆구리에 끼고 한손에 고등어를 몇손 들고 들어오면 개선장군처럼 득의만만 하였다.
오 영감이 아츰에 일어나면 괭이발걸음으로 살곰거리며 쌀독에서 조심스럽게 쌀한줌을 퍼서 마누라에게 건네주면 마누라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고 바가지에 쌀을 일어 구공탄불에 찌그러진 양은냄비를 올려 놓았다.
마누라가 영감이 사온 고등어를 적쇠에 굽기시작하면 기름진 연기가 코를 찔렀다. 매캐하고 고소한 연기는 오 영감이 사는 판잣집 지붕틈으로 숭글숭글 새어나와 시장통으로 번졌다. 이런 날이면 주변에 사는 아낙들은 입을 삐죽이며 한마디씩 했다.
저 여편네 말여ㅡ고등어를 구우면 몸통은 제것으로 따로 찬장에 넣고 꼬리는 영감, 머리는 아들준다니께ㅡ오매ㅡ별 일도 다 있구먼~오찌 살림하는 아낙이 지 입만 챙긴다냐? 저런 여자 만나문 사내가 얻어먹지 못할껴ㅡ숭해라~대체로 이와 같았다.
한편 오 영감은 밤잠을 안자고 쌀통이 있는 구석으로 가서 뚜껑을 여닫았다. 낮에 쌀을 가득붓고 흡족한 마음으로 얼골로 쌀 위에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문 쌀독이 사람손을 탔는지 아닌지를 대뜸 알수 있었다. 사람의 노파심이란 해를 넘길수록 잔망스러지는 법이다. 그리하야 오 영감은 잠을 설치면서도 수시로 일어나 쌀독을 확인하였다.
그런 오 영감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은 가수가 소원이었는데, 그의 노래실력은 나도 모린다ㅡ그러나 나를 볼 때 마다 이태 전 서산극장에서 막간을 이용하야 노래실력을 뽐냈고 앵콜도 적잖이 받았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가수, 그것도 대중가수란 직업 자체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기에 그런 그가 희한할 따름이었다.
야ㅡ이런 생뚱맞은 인간도 있구나! 그런 정도였다. 그러나 이름있는 작곡자의 곡을 받고 음반취입까지 그 과정은 절대로 녹록치 아니한듯 싶었다. 시골 백일장, 군수앞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기고만장하야 가수의 꿈을 달고 서울로 상경.. 갖은 고생을 하면서 시골의 논밭을 팔아 음반을 내고 드디어 빛을 보아 꿈을 이룬 가수도 있는게 현실이지만 사실 실력있는 가수 지망생 백명이 이렇게 피를 쏟아가며 음반을 내도 대중의 인기를 얻는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 🇰🇷 🤝 🇰🇵 2030
그 당시 시골 아이들은 먹을것이 없어 소나무껍질을 벗겨먹고 송진으로 껌을 만들어먹던 때였다. 송진을 씹으며 구레용을 잘라 같이 씹으문 색깔든 껌이 만들어졌다ㅡ이 정도 만들려면 하루는 족히 턱주리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씹어야 했다. 그리하야 여학생들은 고군분투하야 만든 껌을 책상다리에 붙여놓고 다음 날 다시 떼어 씹었다. 이걸 짝짝짝~질릴 때까지 씹었으니 말이다. 어른들은 먹지못하야 얼골이 누렇게 부었는데 이것을 황달이라고 했다.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당시의 꿀꿀이죽이나 수구레는 요즘으로 치문 회장님의 호텔 만찬이었다.
그 다음은 술지게미다. 술지게미는 비지라고도 하는데ㅡ청주나 막걸리를 빚고 남은 곡식이다. 일본에서는 가축사료로 쓰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양조장에서 헐값으로 사와 밥대신 먹었다. 현대건설 사장을 거쳐 회장을 지냈고 샐러리맨 출신으로 대통령까지 꿰어찬 신화적인물이었던 이명박은 어릴때 술지게미로 배를 채웠는데, 학교에 가서 책상앞에 앉으면 벌겋게 취했다. 그래도 늘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니 머리는 비상한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다른 건 탓할게 없으나 쉰막걸리와 같은 그의 탁한 목소리는 집권시절 늘 들어야했으니 고역이었다.
이후로 꿀꿀이죽은 번듯한 식당의 부대찌개로 진화하여 오늘날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지만 나는 지금도 유독 부대찌개만은 먹지 않는다. 고놈의 유래를 잘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궁해도 명동백작은, 한 병의 와인과 기름이 졸졸 튀는 따끈한 스테이크를 즐겨야 한다.
자고로 총각이 죽으문 몽달귀신이 되었는데 장이 파한후에 해가 어슬피 기울면 저자거리에서 방망이가 뛰어다니며 여인네 치마를 들추고 희롱했다. 그려도 장간못간 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야 여인들은 모질게 몽달귀신을 대하지않고 나름 인정을 베풀었다. 즉 몽달귀신 앞에서 츠마를 열고 고쟁이를 보여주면서 몽달이를 달랬다. 그러면 아낙들이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순산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여염집 아낙이 아들을 낳으면 젖퉁이를 내놓고 다녔다. 자기의 자궁으로 한 집안의 대를 이었으니 여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공로가 없을 것이다. 장날에 앞섶을 풀어제친 아낙이 젖퉁이를 흔들며 팔자걸음으로 발걸음을 떼면 길가던 주변 사람들이 군말없이 길을 열어주었다. 이것이 우리네 조상님들이 살았던 방식이다. 또한 아들을 낳아 대를 이은 여인에게 세상이 부여한 훈장이기도 하였다.
총각무우로 총각김치를 담근다음 검정콩밥에 잘 익은 총각김치를 한 입에 걸처먹으면 그대로 꿀맛이다. 얼큰하고 매운 고춧가루로 젓갈을 넣어 발갛게 양념한 총각김치! 총각무우는 단단하게 발기된 생김새 만으로도 아낙들에게 대환영이다. 비아그라가 터럭만큼도 안들어간 천연산이기에 언제나 풀이죽어 늘어진 꼰대들 양물과는 차원이 다른 기운이 생동했다.
그러나 처녀귀신은 이런 몽달이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홍성에서 대천방향 국도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오른쪽으로 귀신집이 있다. 언뜻 보기에 양달이 드는 언덕아래에 잘 지어놓은 기와집인데 이곳 택시기사들은 이 집을 끔찍히도 두려워한다.
어느 날 밤, 홍성택시 기사가 광천까지 손님을 태우고 홍성으로 급히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헤드라이트 너머로 소복한 여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가는 길이고 빈차이니 손님을 태우면 기름값이라도 빠지겠지? 끼이익~택시를 세우자 여인이 뒷자리에 탔다. 손님, 어디까지 가슈? 그러자 낮은 목소리로 홍성들어가는 국도변 길목 기와집에서 내린다는 것이다ㅡ이상하다? 어째 목소리에 조곰도 온기가 없다는 말인가? 마치 찬바람이 스치는것 같았다.
자ㅡ다왓슈ㅡ여기 맞지요? 그리고 기사가 실내 백미러로 뒷자리를 쳐다본즉 아무도 없었다. 어라? 이상하다! 이럴수가..다시 보아도 뒷좌석에 사람이 없는것은 여전하였다. 너모나 괴이하야 얼골을 돌려 뒷좌석을 보니 어느듯 소복한 여인이 연기처럼 좌석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기사에게 이르기를, 내가 집으로 들어가 돈을 가져올 것이니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이르고 사뿐사뿐 기와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니ㅡ어떻게 된 게야?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말이야! 빌어먹을 내가 내려가봐야 하겠고나..쩝쩝
여보슈ㅡ아무도 없소? 대문을 두드리자 삐거덕 문이 열리며 노인이 나왔다. 아ㅡ나는 택시기사인데, 오다가 여인을 태웠소..그리고 여기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 돈을 주겠다고 했으나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기척이 없기로 내가 온거요ㅡ도대체 이 집으로 들어간 여인은 누구요?
아ㅡ이런..이런! 그건 내 딸이 맞소이다..오늘로 딸이 죽은지 일년되는 해로 제삿날이외다ㅡ오ㅡ딸이 왔구나! 말을 끝내자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뭐욧! 소복입은 손님이 죽은 딸이라구욧? 기사는 까무러칠듯 놀라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ㅡ잠시후에 정신을 가다듬은 기사는 걸음아ㅡ날 살려라ㅡ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백이 나간 상태로 오찌 집으로 왔는지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하였다.
이 사건으로 택시기사는 꼼짝을 못하고 한달여를 앓아누웠다. 그 이후로는 이 집이 귀신집으로 소문이 났다.
이런 집이 어느 날 한정식 간판을 달고 한식집으로 탈바꿈하였는데, 내가 중고 화물차를 사면서 매도자와 함께 밤중에 이 집으로 와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여주인은 살갑게 다가서며 식사를 하는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식당을 연지 2년째이고 여자 혼자 몸으로 꾸려간다는 것이다. 아니ㅡ아저씨는 뭣하는데요? 그게ㅡ몇해전에 세상을 떳지요..
아저씨를 새벽에 깨워 밥을지어 먹인 후에 아저씨가 차를 몰고 나갔는데, 아침이 되자 경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저씨가 교통사고를 당하야 급히 대학병원 응급실로 데려갔으나 절명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지요..그 힘든 상처를 극복하기가 너모나 힘들었어요. 여주인은 그윽히 나를 바라보면서 풍체가 아름답고 늠름하다면서 칭찬하였다.
결국 귀신집은 아푼 사연이 있는 여인이 주인이 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은즉, 이 또한 인연이었다. 그날 여주인으로 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언젠가는 이 집을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아즉도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날은 나 또한 어찌하야 대천시내에 있는 허다한 식당을 멀리하고 하필 밤중에 홍성 귀신집을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아즉도 여주인은 그 집에서 살까? 많은 세월이 지났으니 지금은 아닐수도 있으리라 생각해본다ㅡ
세상을 살아보니 한번 스친 인연일지라도 오래도록 마음에 자리잡는 사람이 있고 눈뜨고 수없이 얼골을 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기억에 남지 않는 사람도 있다. 더구나 인연은 고사하고 만남 자체가 혐오스럽고 끔찍했던 사람도 있었다. 인간사, 만난다고 다 인연은 아니다. 그래서일까?ㅡ생전에 쌓인게 많아 한이 깊었던 여인들이 죽으면 귀신이되어 이승을 벗어나지 못하는 괴로움을 하소연할 것이다. 그런즉 귀신을 보면 푸닥거리를 해서라도 저승으로 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