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에 ‘神’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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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21 มิ.ย.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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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역』에 ‘神’이 없다
    김승국(철학박사)
    * 이 글의 주제인 ‘神이 없다’는, 기독교처럼 神을 절대유일한 존재로 絶對化하는 神觀이 없다는 뜻이지, 神[神에 관한 관념]의 존재 有無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럼에도 神의 有無에 관한 신학 논쟁으로 빠질 염려가 있으므로,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주역은 神을 요청한다’는 중재안을 내놓는다:
    『繫辭傳계사전』 (上) 5장의 “一陰一陽之謂道”(한 번 陰인 것이 한 번은 陽이 되는 氣의 理를 道라고 말한다)”와 “陰陽不測之謂神”(음양을 헤아리거나 추측할 수 없음을 神이라고 말한다) 사이에 神의 요청이 있다. 한 번 陰하고 한 번 陽하며 변하는 氣의 理에 주목한 周敦頤주돈이의 『太極圖說태극도설』에서 ‘太極而無極’라는 명제를 내세우며, ‘一陰一陽之謂道’에 관하여 치열하게 사유했지만, 太極을 주관하는 者를 내오지는 못했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영향을 받은 朱熹주희 역시 ‘太極=理’라고 말하였지만, 太極을 움직이는 者를 설명하지 못했다. 현상계의 物이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는 理는 밝혔으나, 物을 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一者, 즉 物[陰陽의 변화] 自體자체는 증명하지 못했다. 物 자체를 증명하지 못하므로 ‘음양을 헤아리거나 추측할 수 없다’고 했다. 헤아리거나 추측할 수 없으니 神[陰•陽이라는 氣의 변화에 참여하면서 변화를 이끌어가는 神]이 요청된다고 고백했다. 마치 칸트(Kant)가 ‘物 자체(Ding an sich)’를 규명하지 못하는 aporia(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神을 요청(Postulat) 했듯이, 주역의 物 자체를 釋明석명하기 위해 神이 요청된다.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명제가 ‘陰陽不測之謂神’이다. 다시 말하면, 太極을 내세워 현상계의 배후에 있는 변화의 본질을 설명했으나, 현상계를 주관하는 者(一者)는 알 수 없다. 주역의 편찬자는 길흉화복을 언급했으나 현상을 일으키는 物 자체를 규명하지 못했다.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현상계를 주관•지배하는 神이 요청된다. Ding an sich의 aporia를 해소하기 위하여 칸트가 神을 요청했듯이……(필자 주)
    Ⅰ. 들어가는 말
    중국 고대의 神은 사람과 더불어 존재한다. 사람과 소통하는 神이지 사람 위에 군림하며 명령하는 神[기독교의 神 등]이 아니다. 『周易』의 卦辭⦁爻辭에 ‘神’이 없다.[‘鬼神’•‘神道’는 있으나 ‘神’은 없음] 그래서 ‘주역은 無神’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卦辭⦁爻辭를 해석하는 맥락에 따라 神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周易』의 첫 말씀[乾괘의 卦辭]인 “元亨利貞”부터 神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의리학파처럼 ‘元•亨•利•貞’라는 四德에 윤리의 옷을 입혀 ‘元’을 仁, ‘亨’을 禮, ‘利’를 義, ‘貞’을 智로 人倫化(인륜화)하면 神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나 高亨•屈萬里•彭馬田•丁若鏞처럼 ‘元亨’과 ‘利貞’의 두 묶음으로 나누면 神이 다가온다. 특히 ‘亨’•‘貞’에 神을 불러오는 힘이 있다. 高亨•屈萬里는 亨을 ‘享’으로 읽어 ‘祭享•享祭[희생양을 바치며 제사 지냄]’로 해독한다.(황준연 『실사구시로 읽는 주역』 100쪽.) 黃玉順은 亨을 ‘人神相通(인간과 神이 서로 통함)’으로 풀이한다.(黃玉順 『易經古歌考釋』 36쪽.) 그리고 ‘貞’을 ‘問於神(神에게 묻다)’• ‘卜問(占을 묻다)’로 해석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사 지낼 때 神을 불러내며, 占을 칠 때 天命을 묻는다. 따라서 제사를 지내는 인간과 神이 소통[人神相通]하며, 점칠 때의 물음에 天命•神이 응한다.
    이렇게 『周易』의 卦辭⦁爻辭을 해석할 때 묻어나오는 神은, 인간(제사 지내는 인간 등)과 소통하는 神이지, 서양 기독교의 유일신처럼 인간이 원하지 않아도 내리먹이는 ‘강림하는 神’이 아니다.
    사람과 神이 서로 소통[人神相通]하려는 수단이 占이고, 占의 결과•내용을 갑골에 새긴 것이 甲骨卜辭갑골복사이다. 卜辭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人口인구에 膾炙회자되는 가운데 卦辭⦁爻辭로 정립되었다. 주역의 문을 여는 乾괘의 괘사인 “元亨利貞”은 人神相通의 念염을 담은 말씀이며, 특히 ‘亨’은 제사와 관련된 人神相通의 結語결어이다. ‘人神相通’에서 人과 神은 상호 수평적인 존재 占•주역은 물음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上帝에게 나[I]•우리[We]•공동체[국가공동체 등]의 운명[길흉]을 묻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물을 때 인간과 上帝는 수평적인 관계이다. 다만 上帝의 대답에 권위가 실려 있으므로, 이 권위를 占치는 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관건이다. 권위에 맹종하면 神의 개입을 불러오므로, 물을 때의 수평적인 관계가 깨진다. 이러한 긴장된 균형이 占辭에 남아 있으며, 이것이 주역의 原型(원형)이다.
    이므로, 주역의 卦⦁爻辭에 특별히 “神”을 부각시킬 이유가 없었다.
    이렇듯 사람이 있기 때문에 神이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이를 인간중심으로 보면, 사람이 神觀신관의 主體⦁主人이다. 그러므로 神은 사람[民]을 主人으로 모시는 존재이다.[神의 ‘侍人(시인)’, 神의 ‘侍民(시민)’] 神이 民을 모시는 侍民이므로, 民[民衆]이 神의 주인이다. 神觀의 主人인 民이 神으로부터 侍[모심]를 받으므로, 民도 당연히 神을 모셔야 한다. 崔濟愚가 강조하듯이 ‘侍天主시천주’가 된다.
    『春秋左傳』 桓公 6년條에서 季梁이 말하듯이 “무릇 民衆은 神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聖王이 먼저 民을 고르게 살게 한 뒤에, 神에게 치성을 드린다.”(夫民 神之主也. 是以聖王先成民 而後致力於神) 이 民을 대표하는 聖王(聖人)이 먼저 民을 고르게 잘 살게 한 뒤에[民의 잘사는 평화를 이룩한 뒤에], 神에게 치성을 드리는 것을 祭祀제사라고 부르며, 제사의 대상을 ‘上帝’라고 호칭했다. 이 제사를 통하여 神과 사람[人⦁民]이 侍[모심]를 주고 받으므로, 서양의 기독교처럼 일방적이 아닌 쌍방통행이다. 이 제사를 통하여 사람[人⦁民]이 심리적인 거리를 두고 神을 侍[모심]하기도 하고,[遠神] 가까이에서 극진히 侍[모심]하며 공경한다.[敬神]
    Ⅱ.『周易』의 無神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소지하고 있는 『周易』의 卦辭⦁爻辭에 ‘神’이 흔적조차 없다. 중국 易에서 神을 거론하는 것은 금기 가운데 금기이다. (김상일 『철학의 수학소』 196쪽.)
    卦辭를 지은 文王과 爻辭를 지은 周公이 보기에,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神’을 굳이 『周易』에 넣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周易』은 無神[神이 없음]이다. 얼마나 철저한 無神이었는지 중국인들이 神의 개념으로 상정하는 ‘上帝’도 『周易』의 卦辭⦁爻辭에는 없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공자가 지었다는 ‘十翼’ 등의) 『易傳[易經이 아닌 易傳]』에 이르러 ‘神’이 등장하지만, 그것마저 ‘鬼神’ 기독교의 神(God)에 대한 선입견이 강한 현대인들이 동양고전[주역 등]의 ‘鬼神’을 神의 일종이거나 ‘鬼한 神’으로 추정하며, 神의 실체가 있거나 종교 관념 속의 초자연적인 신비물로 여기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鬼神을 ‘신묘한 작용•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흔적•인간-자연 조화의 객관규율•음양이라는 두 氣의 良能’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이지 ‘神’이 홀로 등장하지 않는다.[觀괘 彖傳의 ‘觀天之神道 而四時不忒 聖人以神道設教’만 예외] ‘上帝’ 역시 『易傳』에 외롭게 두군데만 등장한다.[豫괘 大象傳의 ‘殷薦之上帝’와 鼎괘 彖傳의 ‘聖人亨以享上帝’]
    『周易』은 왜 이렇게 철저한 無神인가? 이 질문에 기세춘 선생은, ‘고대 중국인의 死生觀, (死生觀과 연계된) 時間觀과 관련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答한다:
    “주역은 생명살림[生生]⦁살림살이[生活]를 말할 뿐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주역은 천당이나 극락이나 지옥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과 삶은 맞닿아있으니까,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이나 무릉도원을 사후세계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이승의 다른 삶을 기원함이지 저승 삶을 치장함이 아니다. 왜 이처럼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가? 나의 생각으로는 이처럼 눈길이 다른 것은 時間에 대한 관념의 차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시간관념이 다르면 神에 대한 생각도 다르기 마련이다.”
    1. 朱伯崑⦁張垈年
    朱伯崑⦁張垈年의 저서 주백곤 지음, 김학권 외 옮김 『역학철학사』 1권, 229, 235~238쪽./ 張垈年 지음, 최형식 옮김 『중국 유물 사상사』 38쪽에서 언급하는 ‘神’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사물 변화법칙 가운데 陰인지 陽인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을 神이라고 한다./ 음양의 교호작용은 대단히 복잡하여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神이라고 부른다./ 神은 변화의 복잡미묘함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즉, 일음일양(一陰一陽)의 교호작용은 무궁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게 되며, 이것이 神인 것이다./ 筮法의 변화하는 성질을 神이라고 한다./ 神은 실체를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라 변화의 속성을 가리킨다./ 筮法과 사물의 변화에는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법칙을 ‘道’라고 불렀으며, 다시 그 변화의 과정은 한 가지 격식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이 그로부터 발생하는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성질을 ‘神’이라고 불렀다./ 기미를 아는 것이 신묘함이다. 변화의 조짐을 알게 되면 미래를 추단할 수 있으니 이것이 곧 ‘신묘함으로 다가올 일을 아는 것’이다./ 道를 드러내고 덕행을 신묘하게 한다./ 神은 일정한 方所가 없다./ 만물의 미묘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神이라는 글자를 거론하게 되었다./ 神이라고 한 것은 종교적 신앙으로서의 神이 아니며, 단지 변화의 복잡미묘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 이처럼 ‘종교적 신앙으로서의 神’이 아닌 ‘萬物 변화의 복잡미묘한 기미를 나타내며 신묘함을 드러내는 神’에 관하여 언급하는 易傳은, ① 神의 존재 유무를 따지지 않고[無神論무신론에 가까움], ② 하느님(God)의 降臨강림을 기원하지 않으므로, ③ 天國천국이 따로 없고[現世현세가 중요함], ④ 기독교의 唯一神유일신과 같은 ‘절대적인 救世主구세주’를 추구하지 않으며, ⑤ 來世내세[神에 依託의탁하면 永生영생을 보장 받음]에도 무관심하고, ⑥ 神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예수 같은 분을 내세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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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ser-kq4up5ix2x
    @user-kq4up5ix2x 13 วันที่ผ่านมา

    6분55초 이후에는 검은 화면입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