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조하셔요! 베르그송의 은 헤겔의 이나 하이데거의 처럼 깊고 넓은 사유를 요구한다. 그것은 단순한 도식화로 요약될 수 없다. 기억의 창조적 차이화를 수행하는 정신과 의식이 마치 동물과 인간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정신의 주인은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히 제3장에는 인간이나 동물 외에도 염산, 흑, 식물, 아메바 등도 우주의 생명운동에 실천적 관심을 갖고 행동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범우주적 생명운동은 로 가면 더욱 심화된다. - 예도
아름다운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2% 부족함을 느끼는 부분을 꽉채워주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물이 채우는 우주가 아니라, 왜 이 사물인가라는 질문속에 압축된 힘과 깊이에, 누워서 듣다가 깜짝놀라 밤새 요약하며 들었네요. 이 중요한 사상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이야수의 상관주의적 비판에 '살짝' 떨어져있다는 평가에서 예도선생님의 클라스가 느껴지네요 화이트헤드'만'이 선조성을 충실히 반영하는 구도를 가졌다고 믿어왔는데,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특히 이미지라는 단순 용어하나로, 그리고 기억을 지속과 연동시키는 부분은 엄청나게 박진감을 주네요. 내일 당장 읽어봐야겠습니다. 한편의 잘 짜여진 서스펜스 스릴러를 보는듯한 명강의 너무 감사합니다. 생명이라는 부드러운 용어가 암석과 아메바를 거쳐 우주에 퍼지는 상상은 특히 무섭고 숭고한감정을 주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혹시 가능하시면 미국식 철학적 아마추어리즘이 배였으나 동일한 구도를 지닌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과 '라일라'를 시간이 허락하신다면 평론부탁드려도 될까요?
들뢰즈 강의에서 언급 많이 되어서 너무 궁금했는데, 예도님께서 베르그송도 다뤄주셨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베르그송 책도 주문했습니다. 유튜브 기능 중에 후원하기 라는 기능이 있는걸로 압니다. 그걸 예도님께서 설정하시면 구독자 분들이 한 번의 후원으로 매 월 자동으로 지정금액이 후원되게 할 수 있는 걸로 알아요. 설정해두신다면 얼마 안 되는 금액이라도 매 월 후원하고 싶습니다~
노자도덕경에 면면약존綿綿若存 용지불근用之不勤(끊임 없이 이어져서 마치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다)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우주의 창조적인 생성의 연속성을 솜에서 실을 뽑을 때 끊어질듯 하면서도 계속 이어져 나오는 모습에 빗댄 것이라 하는데, 이러한 시적인 표현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순수지속을 파악하는 직관의 세계를 잘 묘사해 놓은 것 같습니다. 우주를 유동적인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지성에 의한 고착화는 실용성은 있지만 상호침투 하는 실재적 지속을 살해하는 것으로 본 베르그송의 통찰은 제행무상의 불교 논리와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이러한 결론이 자기의식을 내적으로 들여다보고 이끌어낸 것이라는 점이 흥미를 끕니다. 그렇지만 지성이 유동적인 우주를 공간화된 범주로 이해하는 것을 전적인 오류라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바슐라르처럼 불연속적인 순간을 시간의 심층으로 간주한다면 지성이 직관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베르그송에게는 사물이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인 본성의 차이를 만들기 위한 실천적 관심을 가지고 우주 전체 속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생명 운동에 참여한다면(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화이트 헤드에게는 현실적 존재들이 타자들과의 물리적 만남 이후 정신적 극을 통해 이를 일자로 통합하는 합생에서 만족을 얻고 다시 다자 중의 일자가 되는 것에서, 다시 말해 창조적 전진의 근원적 목적?에 차이가 있는 걸까요 즉 전자는 자신의 존재적 차이를 향하여 다른 사물들이 아니고 왜 그 사물인가가 계속되는 지속의 핵심이라면 후자는 다소 우연적?일 수 있는 다자의 현실적 존재에 대한 영향, 신이 목적인에 개입하여 합생에 관여하며 합생을 완성한 후 다시 영원한 객체로서 관계 속 현실적 존재들과의 조화를 이루며 끝없이 창조적 진화를 만들어간다는 게 차이일까요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참조하셔요!
베르그송의 은 헤겔의 이나 하이데거의 처럼 깊고 넓은 사유를 요구한다. 그것은 단순한 도식화로 요약될 수 없다. 기억의 창조적 차이화를 수행하는 정신과 의식이 마치 동물과 인간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정신의 주인은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히 제3장에는 인간이나 동물 외에도 염산, 흑, 식물, 아메바 등도 우주의 생명운동에 실천적 관심을 갖고 행동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범우주적 생명운동은 로 가면 더욱 심화된다. - 예도
와우! 감동입니다. 후원하고 싶습니다^^
오~ 방금 수업료 들어왔어요.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선희님^^
@@TV-uw9lz 선생님 물질과 기억은 어느 출판사가 도움이 될까요?
제가 한글로 읽지 않아서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선희님^^ 건강한 하루 보내셔요!
@@TV-uw9lz 네 하지만 괜찮아요. 어떤 것이든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읽혀질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매달 10만원씩 후원하겠습니다 매 순간 매 강의가 감동입니다^^
강의를 보면 중간중간애 베르그송이 꾀 나오더라구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군에서도 늘 예도TV와 함께 해주시네요. 그리고 늘 사막의 철학을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태주님^^
아름다운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2% 부족함을 느끼는 부분을 꽉채워주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물이 채우는 우주가 아니라, 왜 이 사물인가라는 질문속에 압축된 힘과 깊이에, 누워서 듣다가 깜짝놀라 밤새 요약하며 들었네요.
이 중요한 사상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이야수의 상관주의적 비판에 '살짝' 떨어져있다는 평가에서 예도선생님의 클라스가 느껴지네요
화이트헤드'만'이 선조성을 충실히 반영하는 구도를 가졌다고 믿어왔는데,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특히 이미지라는 단순 용어하나로, 그리고 기억을 지속과 연동시키는 부분은 엄청나게 박진감을 주네요.
내일 당장 읽어봐야겠습니다.
한편의 잘 짜여진 서스펜스 스릴러를 보는듯한 명강의 너무 감사합니다.
생명이라는 부드러운 용어가 암석과 아메바를 거쳐 우주에 퍼지는 상상은 특히 무섭고 숭고한감정을 주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혹시 가능하시면 미국식 철학적 아마추어리즘이 배였으나 동일한 구도를 지닌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과 '라일라'를 시간이 허락하신다면 평론부탁드려도 될까요?
처음 뵙네요. 방갑습니다. 스티븐님^^ 참고하겠습니다. 건강한 주말 보내셔요!
한동안 정신없어서 오랜만에 들었는데 너무 감동했습니다~ 전율이 일어나네요! 감사합니다^^*
카나다에서의 소식이군요. 오랜만에 뵈니 저도 더 방갑네요. 소을님^^ 건강한 겨울 보내셔요!
신비로운 지속으로서의 시간! 감동입니다!^^
네, 방갑습니다. 파토스님^^ 평안한 밤 맞이하셔요!
만시지탄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방갑습니다. 김쌤^^ 늘 예도TV를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철학 초보자인 저에게도 선생님 강의는 생각의 지평이 조금씩 넓어 지는걸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네, 도움이 되신다고 하시니 저도 기쁘네요.^^
오랫만에 선생님 강의를 듣습니다. 역시 👍 최고십니다!
네, 오랜만에 뵙네요. 방갑습니다. 의원님^^ 그리고 늘 예도TV를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날씨가 추워졌어요. 늘 건강 유의하셔요!
들뢰즈 강의에서 언급 많이 되어서 너무 궁금했는데, 예도님께서 베르그송도 다뤄주셨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베르그송 책도 주문했습니다.
유튜브 기능 중에 후원하기 라는 기능이 있는걸로 압니다. 그걸 예도님께서 설정하시면 구독자 분들이 한 번의 후원으로 매 월 자동으로 지정금액이 후원되게 할 수 있는 걸로 알아요.
설정해두신다면 얼마 안 되는 금액이라도 매 월 후원하고 싶습니다~
네, 계속 정진하시길 응원합니다! 좋은 날 되시구요!
노자도덕경에 면면약존綿綿若存 용지불근用之不勤(끊임 없이 이어져서 마치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다)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우주의 창조적인 생성의 연속성을 솜에서 실을 뽑을 때 끊어질듯 하면서도 계속 이어져 나오는 모습에 빗댄 것이라 하는데, 이러한 시적인 표현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순수지속을 파악하는 직관의 세계를 잘 묘사해 놓은 것 같습니다.
우주를 유동적인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지성에 의한 고착화는 실용성은 있지만 상호침투 하는 실재적 지속을 살해하는 것으로 본 베르그송의 통찰은 제행무상의 불교 논리와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이러한 결론이 자기의식을 내적으로 들여다보고 이끌어낸 것이라는 점이 흥미를 끕니다.
그렇지만 지성이 유동적인 우주를 공간화된 범주로 이해하는 것을 전적인 오류라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바슐라르처럼 불연속적인 순간을 시간의 심층으로 간주한다면 지성이 직관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건강한 하루 보내셔요!
"그러니까 지각과 사물은 별 차이가 없는거다"
잘 들었습니다.
이 강의를 듣고 있으니 만다라의 철학적 설명을 하시는 듯한 느낌입니다.
굿모닝입니다! 다라쌤^^ 오늘도 건강한 하루 보내셔요!
최고의강연입니다!
네, 처음 뵙네요. 방갑습니다. 영선님^^
'광물의 기억' 쇼킹하네요.
방갑습니다. 민상군^^ 건강한 저녁 맞이하셔요! 베르그송이 에서 직접 광물의 기억을 말하지는 않지만 "실천적 참여"를 한다는 것은 우주적 생명체의 지속에 동참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이것은 에서 더욱 확고해 집니다.
@@TV-uw9lz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강의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베르그손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칸트와 헤겔을 통합젹인 안목으로 접근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
계속 반복해서 듣는데 화이트헤드와의 뚜렷한 차이를 파악하는 게 어렵습니다ㅜㅜ
베르그송에게는 사물이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인 본성의 차이를 만들기 위한 실천적 관심을 가지고 우주 전체 속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생명 운동에 참여한다면(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화이트 헤드에게는 현실적 존재들이 타자들과의 물리적 만남 이후 정신적 극을 통해 이를 일자로 통합하는 합생에서 만족을 얻고 다시 다자 중의 일자가 되는 것에서, 다시 말해 창조적 전진의 근원적 목적?에 차이가 있는 걸까요
즉 전자는 자신의 존재적 차이를 향하여 다른 사물들이 아니고 왜 그 사물인가가 계속되는 지속의 핵심이라면
후자는 다소 우연적?일 수 있는 다자의 현실적 존재에 대한 영향, 신이 목적인에 개입하여 합생에 관여하며 합생을 완성한 후 다시 영원한 객체로서 관계 속 현실적 존재들과의 조화를 이루며 끝없이 창조적 진화를 만들어간다는 게 차이일까요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선생님 문득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독일어로 들뢰즈를 읽는 것과 프랑스어로 니체를 읽는 것에 많은 차이가 있을까요 ..?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상당히 한계를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아니면 영어 번역은 어떠한지도 여쭙고 싶습니다..)
차이가 있지요. 영어가 되시면 한글역본과 비교하면서 사유하시면 훨씬 유리할 겁니다. 밍키님^^
어려워요ᆢ
사유하면서 노력하셔요.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다락방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