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편찬 당시의 중국은 지금에 비해서 작은 영역일 뿐이였습니다. 중원을 주변 강대국이 지배하면서 생긴 구조의 지역개념을 중국이라고 하는게 맞으며 결국 주변 강대국중 제일 쎈 나라가 들어와서 지배하던 구조의 나라라는 겁니다. 수,당나라도 고구려와 경쟁관계였던 동이족 선비족이 지배층이 였고 진시황도 한족이 아니였으며, 한족이 지배했던 시기는, 송,명 등 몇개 안됩니다. 오,월,원,청등 대부분 그냥 다른 인종, 민족,나라들이 지배하던 구조입니다. 지금 공산당이 이 모든걸 하나로 합치기 위해 한족이라는 허황된 민족과 통일된 나라로 근대사에 잘못된 역사 인식을 주입하고 통합시켜 결국 패권주의, 자국이기주의, 또다른 제국으로 거듭날려고 하고 있는거죠. . 나라만 커졌지, 시대만 흘렀지 하는 행동과 의식은 소국이라고 보여집니다. 진정한 대국은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지 보여주는 중국이 되길 희망합니다.
조선이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에 뒀다면, 조선이 중국으로 귀화를 했겠죠. 제가 볼땐, 일본식민지 시절, 지배를 정당화하고,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조선인은 역사적으로 항상 2등국민이었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퍼뜨린 학설인것 같습니다. 외국학자는 그리 보기 보다는 조선의 중국에 대한 자세는...우리와 중국은 다르다. 다만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인다. 이것이 기본자세였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에 뒀다면, 한글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대부의 한글편지가 지금 남아있지도 않을것이고, 민간의 한글소설도 퍼지지 않았겠죠. 정체성이 중국인데, 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겠습니까. 더불어, 조선시대에는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왕조에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와있다고 합니다. 조선은 자신의 정체성을 절대 중국에 두지를 않았습니다.
@@lyongduc9361 조선후기는 속국처럼 행동한게 아니라.. 속국 맞습니다 삼전도의 굴욕 안 배웠음? 명나라때는 자의적 속국 청나라때는 타의적 속국 애초에 조선 건국 자체부터가 사대주의였음 세계 어느 나라가 자기 국명을 남한테 지어달라고 함? 조선이라는 국명을 명나라 주원장이 골라준거 부터가 문제임 우리민족 여러 왕조 중 최악의 사대주의 왕조가 조선임
@@lyongduc9361 명나라의 고려천자, 만력제가 왜와 전쟁에 파병과 그후 조선에 지원해준 면면을 보면 만동묘까지 세우며 떠받든게 당연 이해가 됨... 그런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고도 명이 어려웠을때 광해군의 안면몰수는 당시 성리학을 숭상하는 자들에게는 용납이 될 수 없는 일.... (6.25때 참전했던 외국의 참전용사에 감사해하고 그분들에게 보은을 하고있는 현재의 우리의 입장에서 봐도 용인될 수 없는 정도의 배은망덕한 일)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과도한 사대로 보일 수 밖에 없지만 그러한 사대가 나름의 개연성이 있었다는 정도의 인지는 필요해보임..
@@박경서-l4r 사대가 뭔지를 모르시는 것 같음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굴욕적이겠지만.. 그 당시의 사대는 일종의 외교전략에 하나임 예를 들어 조공을 보자면.. 조공이 모욕적이고 침탈적이라면 조선이 모든 수단과 방벙을 동원해서 한번이라도 덜 보낼려고 했겠지만 실상은 일년 내내 보냈음 봄,여름,가을,겨울등 계절이 바뀔때, 황제, 황후, 황태자, 세자등등의 생일등.. 건수만 있으면... 오죽했으면 명에서 왜 이리 자주 오냐면서 '일년에 한번만 와라' 라고 요구를 했을 정도 그럼 조선은 왜 그렇게 명에 조공을 보냈을까?....... 조선이 100억원어치 물품을 보내면 명은 큰나라로서의 체면때문에 2~300억원어치 물품을 내줬으니.. 기를 쓰고 보낼 수밖에,, 학교 댕길때 배웠겠지만 .... '조공무역'이라고...
확실히 여진족 기병대가 전쟁무기로 사용하던 신월도가 진짜 간지나고 멋있게 생긴 도검인듯 하네요. 그나저나 확실히 청제국 팔기군이 엄청나게 군사력이 막강한 정예기병이라는게 느껴지는게 갑옷의 색깔까지 각 군대별로 체계화되있는데다가 그 갑옷의 색깔에 맞춰서 군기가 설정되있는걸보니 엄청나게 기병대로서의 강점을 극대화시킨것같음. 안그래도 기병대로서 세계에서 가장 전투력이 막강했던게 당대 여진족 기병대였는데...
@@halalkorea2012 특히 당시 조선군 파병병력의 상당수가 조총부대로 이루어졌을 정도니까요. 특히 당시 갑옷을 입은 청의 중장기병을 막기엔 근접에서의 막강한 조총화력이 필요했을겁니다. 결론은 사용한 무기는 주로 조총이었습니다. 또한 거마작이라고, 장창을 엮어 땅에 설치해 기병의 접근을 막는 물건도 자주 사용했습니다. 즉 거마작으로 기병접근 저지 -> 조총 발포 -> 재장전하는사이 활로 시간벌기 -> 다시 조총발포. 이러한 순서였습니다. 운이 안좋게 갑작스런 모래바람 역풍으로 인해 재장전을 못하게 되어 팔기군에게 짓밟히긴 했지만요.
자기 전공외에는 무지한게 학자들의 특징이라지만... 교수님.... 서양 판금갑옷 그렇게까지 무겁지 않았습니다. 물론 교수님이 학부에서 공부하실때야 그렇게 알려져 있었겠지만 최근 20년 정도 사이에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서 퍼레이드용/실전용 갑주/무기 구분이 되었고 실전용 판금갑옷의 무게는 20kg 중반대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맨몸에 판금갑옷만 떨렁 입는게 아니라 셔츠/겜비슨 등등 갖춰입고 무기까지 풀세트로 갖추면 30kg을 훌쩍 넘게 되지만 그래도 현대의 완전군장정도 무게입니다. 이렇게 입고 뛰거나 할 수 없었다는건 말이 안되죠. 완전군장에 M60들고도 사람은 고지를 올라가고 들판을 뛰어다닐 수 있습니다. 반면 퍼레이드용/마상창술시합용 갑주의 경우 절대적인 방어력/장식성을 위해서 크고 불룩하게 만들다보니 무게가 많이 나갔지만, 그렇다고 해도 70kg이 넘는 무게가 나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최대 60kg 정도라고 알려져있죠. 퍼레이드용 도검도 3kg 훌쩍 넘는 중후장대한 유물이 많지만 실전용 도검의 경우 보통 1.2~1.3kg대고 많이 무거운 유물이 1.4kg대입니다. 물론 칼집/소드밸트까지 하면 보통 3kg 가까이, 장식성이 강한것은 3kg을 훌쩍 넘지만 이걸 손에 들고 휘두르는건 아니니깐요. 정보 업데이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30KG을 추가로 몸에 장착하고 사람이 뛰어 다닌다고? 헐~ 무슨 초 슈퍼맨인가? 군대에서 30키로 군장 매고 군인들이 뛰어 다닐 수 있다고 봅니까? 요새 군장은 얼마나 나가는지 모르겠는데. 30키로 군장 매고 사람 막 못 뛰어 다녀요... 게다가 완전군장에 M60까지 들고 막 뛰어다닌다고요? M60이 뭔지 알고 하는 얘기에요? 아무것도 안 걸치고 M60하나만 들고 뛰어 다니라고 해도 안될건게....진짜 헐~ 이네요... 군장매고 총 들고 어느 정도 속도를 내서 움직이는 건 가능하겠으나. 그 무게를 갖추고 칼들고 휘들러 대면서 피하기도 하고 찌르기도 하고 그런 움직임을 한다구요? 누가? 대체 누가?
@@3p400 영상에서 "서양갑옷은 70kg이라서 입고 뛸수없다", "넘어지면 일어나지도 못한다" 라고 했고, 만주족 갑옷은 "40kg이라서 뛰어다닐수 있다"라고 해서 쓴 댓글입니다. 영상 보고 댓글 다세요. 06년 군번입니다. 제가 현역일때 완전군장 무게 24~28kg이었습니다. M60 사수는 아니지만 들어봤구요, 들고 각개전투교장 꼭대기까지 뛰어간 적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와, 이거 거의 10kg은 되겠는데? 한 9kg 나가나봐"라고 생각 했는데 나중에 제원을 보니 12kg 이더군요.
고대 로마제국의 근간은 군단으로 백인-대대-군단으로 체계적인 훈련과 편제로 세계를 정복하지 않았나요? 그당시 중국은 한나라 우리는 고조선시대입니다. 여기의 후금(여진)은 팔기군으로 발전하였네요. 명도 그나름대로 편제를 유지했지만 조선은? 기 것해야 삼수군(조총, 활, 창)으로 대비했다지만 훈련이나 제대로 했을까? 로마군은 비나 눈이 오더라도 천막을 치고 훈련을 했다고 하네요. 후금의 팔기군 8천으로 명의 10만을 격퇴시켰으니 후금의 전투력은 대단하네요. 정말 소수정예로 보이네요. 그넓은 만주지역을 제대로 한번 지배해보지고 못하고 (고구려시대를 제외하면) 그냥 한반도에만 쳐박혀있으니 답답하네요. 영토가 작으니 항상 약소민족으로 취급받았고 이제는 반토막이니 . . . 적어도 한반도는 통일이 되고 만주까지는 먹어야 그나마 세계시장에 명암을 내밀지 않나?
솔직히 말해서 나라가 망했어도 그 땅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여진족이 있는 땅은 수백년 동안 고구려가 지배하던 땅이라는 사실을 감안 한다면; 여진족은 고구려의 후예라고 봐도 이상한 곳이 아닙니다. 즉, 여진족도 한국인들. 왜냐하면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땅에 계속 살던 주민들의 후손이 여진족이라고 생각할수 있지않나? 고구려가 망했다고 그 지역에 살던 모든 주민이 한반도로 이주하지 않고 계속 살았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에. 다만 수백년이 지나면서 문화가 변해서 저 당시에는 여진족이 된것.
임용한 박사님이 최근 내신 책에 이때 분산한 이유를 추측하신게 있는데 1개 군으로 길게 가는게 기동성 있는 기병 상대로 허리가 잘리고 교란작전에 휘말릴 수 있고 분산하면 일단 상대는 1군단을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 군이 포위할 수 있거나 거점 먹을 수 있고 피해도 정면 충돌보다 분산할 수있으며 상대가 분산한다면 상대 전력이 약해진 상태를 노려 승부 볼 수 있거나 비어있는 다른 한 군단이 퇴로 차단 견제도 가능해지는 발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셨더군요 결론은 양호가 했던 이 가정 전부가 상대에 대해 잘못 판단한 것이었고 패배한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도 이상해서 찾아보니..투구 무게 빼고 중세 서양 전신 갑옷 20-40kg이라네요 보통 26kg 근방이 많이 쓰인듯.. 동양식의 두정갑은 안에 철판이 들어가 있어서 20kg 정도 무게 나간다네요 갑옷 무게 70kg에서 방교수님 말이 신뢰감 확 하락하네요 그 정도면 움직임 자체가 안될텐데,,
@@yahoojy 사실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여서 뭐라 할맘은 없긴한데 확실히 두분다 군사쪽이지 역사 전문가가 아니다보니까 오류가 좀 있는거 같네요;; 그래도 명청교체기는 우리나라랑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 인터넷만 찾아도 어느정도 수준의 자료를 찾을수있는데 좀 아쉽기는합니다
20:07 부녀자를 포함한 뜻이 7500 명은 오류임. 팔기제도는 당시 후금의 사회제도로 성립되어, 모든 여진족은 팔기에 소속되야 했고, 이 체제는 청말까지계속되었음. 팔기하나가 7500명의 전사(부녀자제외)라는 말이 맞는것임. 기세찬씨 얘기대로 하면, 사르후전투에 동원된 팔기군수가 8천이라는 소리가 되고, 프로그램에서도 그렇게 주장하지만, 사르후전투에 동원된 8기군 전사 수는 대략 6만으로 기록되있음. 기세찬씨주장대로 하면 후금의 인구가 6만이라는 얘기가되나, 당시 후금인구는 50만정도로 추산됨. 출처 한명기 교수.
If the king of Joseon could have allowed Nurhachi to lead troops into Korea to defend against the Japanese in 1592. Maybe it will consume the strength of these Jurchens. It may not have been possible that the subsequent rise of Manchuria would have threatened all of Northeast Asia.
윤뚱아! 기름인상으로 대박난 정유사 횡재세 도입하자. 4조 이상 추가 이득이 발생한다고 하던데. 세금환수해서 기름값을 더 내리자. 횡재세는 은행권도 금리를 인상하면서 수조억원 이득을 보고 있고, 우리집 앞 주유소도 기름값인상으로 매상이득이 확연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바, 추가로 횡재세를 입법화 해서 세금으로 환수하기위해 입법화 서둘러 주세요
1. 예산은 많지만 해먹는게 많다 2.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군사제도는 방어용에 가깝고 공격용은 아니었다. 3. 수많은 나라안에 반란에 있었죠 대표적인게 이자성의 난입니다 이것때매 황제가 죽게되죠 북경함락으로 4. 원숭환의 죽음 5. 파벌싸움 등 여러 요인이 있죠 6. 후금의 강함정도가있겠지요
조선과 청이 중원 대륙을 공동 경영했다는 사실을, 당시 ( 16 ~ 17세기) 대륙에서 선교 생활을 했던 스페인 신부들이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스페인 발렌시아 대학에서 출간한 책인 Viajeros en China y libros de viajes a oriente를 참고 바랍니다.
왼쪽 강의하신 교수님? 성함모르겠고, 차분하게 핵심만 쏙쏙 귀에 잘 들어오네요
괜시리 농담같은 군더더기없어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이분 자주 초청부탁드립니다~~^^
흥미진진합니다.
패널 두 분의 전문성이 느껴집니다.
이미 토전사에서 전부 다뤘던 내용인데도 허준씨는 마치 차음 듣는 것처럼 리액션하시네요 ㅎㅎ 역시 방송인
국방TV의 선례를 따르지 않고 오래해줬으면 좋겠어요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제작진분들
무슨 일 있었나요?
@@YDH32잘나가던 토전사 갑자기 없애버림 문정권에서 압박넣음
뉴전사 좀 늘어지는 느낌이라 최근 안봤는데 오늘 보니까 속도감 좋고 리듬감도 느껴지고 아주 끝내주는 느낌으로 바뀌었네요
토전사에서 사르흐 전투를 다뤘는데 뉴전사가 자료가 상세한 게 좋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어려울때일수록 백성들을 잘 살펴야합니다.~.~
기세찬 교수님 명강의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국이 중국의 일부라고 인정하는 건가요 물론 윤당선인도 인정했지만 ㅋㅋ
@@춘원이광수-y9s 뭔개같은소리여ㅋㅋ 좌파빡통같은 소리하지마
22:04 잘못된 설명입니다.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베기입니다. 칼이 박힐 경우 말 속도에 의해 낙마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내리치지 않고 베어버립니다.
8천명은 너무 적지 않나?라고 생각했는데 하나하나가 중무장한 기사급이었군요
중무장은 아니었음 전방돌격대만 중무장
8천명도 전병력이 아니고 1기에 불과하고 한번의 전투에 8천정도에서 2만정도 투입이 된걸로 아는데
그당시 후금의 총병력은 10만은 넘었음
기병은 6만정도
그러니깐 적은병력은 아니었음
@@griffithbalt9632팔기는 중무장한 중갑기병으로 아는디..? 몽골 경기병이랑 차원이다름
사마천의 사기 편찬 당시의 중국은 지금에 비해서 작은 영역일 뿐이였습니다. 중원을 주변 강대국이 지배하면서 생긴 구조의 지역개념을 중국이라고 하는게 맞으며 결국 주변 강대국중 제일 쎈 나라가 들어와서 지배하던 구조의 나라라는 겁니다. 수,당나라도 고구려와 경쟁관계였던 동이족 선비족이 지배층이 였고 진시황도 한족이 아니였으며, 한족이 지배했던 시기는, 송,명 등 몇개 안됩니다. 오,월,원,청등 대부분 그냥 다른 인종, 민족,나라들이 지배하던 구조입니다. 지금 공산당이 이 모든걸 하나로 합치기 위해 한족이라는 허황된 민족과 통일된 나라로 근대사에 잘못된 역사 인식을 주입하고 통합시켜 결국 패권주의, 자국이기주의, 또다른 제국으로 거듭날려고 하고 있는거죠. . 나라만 커졌지, 시대만 흘렀지 하는 행동과 의식은 소국이라고 보여집니다. 진정한 대국은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지 보여주는 중국이 되길 희망합니다.
하아 한심
불쌍하네 역사의 반복인가
완전 정신 나갔네 니가 막 나가면 기정사실이 되냐
又开始歪曲历史了,共产党没韩国财阀历害,想让哪个女孩跟他回家就让哪个女孩去哈哈哈哈哈哈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영토는 1960년대 모택동의 문화혁명 당시 급조된 영토이죠. 중국내 역사학자들도 한족은 중원에 진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원은 북방민족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북경 또한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이 건설하였습니다.
좋은 강의 듣고 있습니다 ㅡ
유익한 프로입니다 ㅡ
감사합니다
다음주에 기대된다
9분14초쯤에 나온 배경그림은 북송시대에 그려진 매사냥하는 거란족 인물도입니다. 거란족은 옆머리만 남기고 나머지 머리털은 모두 깎았습니다. 그에 반해 여진족은 뒷머리만 남겼습니다. 혹시나 다음에 다시 여진족에 대해 다루신다면, 이 점을 고려해주시길 바랍니다.
여진족 머리는 뒷대가리 동전만큼 남겨놓은거만 길러따고 나머진 빡빡이. 위생적으론 조선보다 나앗을듯.
그 사진 거란족 맞습니다
이 분 은근히 예리하시네!
kbs 역사그날과 비교해 최고라 할수있다 .... 역사그날 패널들은 국뽕을 자극하는 수준의 위인전 읽기 수준이라면 이 방송은 초정밀 펙트를 날리는 방송이다 감탄!!!
역전다방하고 차이가 엄청나죠 토크멘터리도 마찬가지고
여진이 참 잘싸워
여진 해적도 있었고
여진 기병도 강하고
강민지리나민채님 정말 아름다우세요.
조선이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에 뒀다면, 조선이 중국으로 귀화를 했겠죠.
제가 볼땐, 일본식민지 시절, 지배를 정당화하고,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조선인은 역사적으로 항상 2등국민이었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퍼뜨린 학설인것 같습니다.
외국학자는 그리 보기 보다는 조선의 중국에 대한 자세는...우리와 중국은 다르다. 다만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인다. 이것이 기본자세였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에 뒀다면, 한글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대부의 한글편지가 지금 남아있지도 않을것이고, 민간의 한글소설도 퍼지지 않았겠죠. 정체성이 중국인데, 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겠습니까.
더불어, 조선시대에는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왕조에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와있다고 합니다. 조선은 자신의 정체성을 절대 중국에 두지를 않았습니다.
정체성을 중국에 두지는 안았으나 조선후기에는 사대가 심하여 속국처럼 행동했다는게 문제임 자신의왕을 제후정도로 인정하고 황제는오직명나라 황제만 황제고 명나라가 망해 없어졌는대도 명나라만 인정하는 웃기는일이
@@lyongduc9361 조선후기는 속국처럼 행동한게 아니라..
속국 맞습니다 삼전도의 굴욕 안 배웠음?
명나라때는 자의적 속국 청나라때는 타의적 속국
애초에 조선 건국 자체부터가 사대주의였음
세계 어느 나라가 자기 국명을 남한테 지어달라고 함?
조선이라는 국명을 명나라 주원장이 골라준거 부터가 문제임
우리민족 여러 왕조 중 최악의 사대주의 왕조가 조선임
@@lyongduc9361 명나라의 고려천자, 만력제가 왜와 전쟁에 파병과 그후 조선에 지원해준 면면을 보면 만동묘까지 세우며 떠받든게 당연 이해가 됨...
그런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고도 명이 어려웠을때 광해군의 안면몰수는 당시 성리학을 숭상하는 자들에게는 용납이 될 수 없는 일.... (6.25때 참전했던 외국의 참전용사에 감사해하고 그분들에게 보은을 하고있는 현재의 우리의 입장에서 봐도 용인될 수 없는 정도의 배은망덕한 일)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과도한 사대로 보일 수 밖에 없지만 그러한 사대가 나름의 개연성이 있었다는 정도의 인지는 필요해보임..
@@박경서-l4r 사대가 뭔지를 모르시는 것 같음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굴욕적이겠지만.. 그 당시의 사대는 일종의 외교전략에 하나임
예를 들어 조공을 보자면..
조공이 모욕적이고 침탈적이라면 조선이 모든 수단과 방벙을 동원해서 한번이라도 덜 보낼려고 했겠지만
실상은 일년 내내 보냈음
봄,여름,가을,겨울등 계절이 바뀔때, 황제, 황후, 황태자, 세자등등의 생일등.. 건수만 있으면...
오죽했으면 명에서 왜 이리 자주 오냐면서 '일년에 한번만 와라' 라고 요구를 했을 정도
그럼 조선은 왜 그렇게 명에 조공을 보냈을까?.......
조선이 100억원어치 물품을 보내면 명은 큰나라로서의 체면때문에 2~300억원어치 물품을 내줬으니..
기를 쓰고 보낼 수밖에,,
학교 댕길때 배웠겠지만 .... '조공무역'이라고...
그때 조선의 상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은 직후였고 신흥강국인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과 전통강국인 명나라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였습니다. 단순 사대라고 인식할수 있으나 약소국 입장여서 보면 선택을 강요받아 전통의 강국인 명을 선택한 것이죠.
신립 . 치고 빠지는 지리적 잇점을 활용 못한 그리고 배수의진을 채택하고 몰빵한장군 초장에 누란의 위기를 자초. 전술이 부족한 양반 장군 평민과 노비에겐 서릿발 호랑이.
이거보니까 생각나네 나중에 영원성 전투하고 원숭환에 대해 한번 해주세요.
확실히 여진족 기병대가 전쟁무기로 사용하던 신월도가 진짜 간지나고 멋있게 생긴 도검인듯 하네요.
그나저나 확실히 청제국 팔기군이 엄청나게 군사력이 막강한 정예기병이라는게 느껴지는게 갑옷의 색깔까지 각 군대별로 체계화되있는데다가 그 갑옷의 색깔에 맞춰서 군기가 설정되있는걸보니 엄청나게 기병대로서의 강점을 극대화시킨것같음. 안그래도 기병대로서 세계에서 가장 전투력이 막강했던게 당대 여진족 기병대였는데...
당나라도 갑옷색으로 구분했습니다. 백제가 황칠을 한 황금색 갑옷을 당나라에 조공한 기록이 남겨져있습니다.
중국 대표 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 후금과 대청제국은 신라와 발해인들이 건국한 동이민족의 역사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 사학자들은 한자가 한족이 발명한 문자가 아닌 동이민족이 창제한 문자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용한 무기들도 소개해주면 좀 더 좋을 것 같네요.
도끼랑 낫 이겠지
@@halalkorea2012 예를들어 명이 사용했던 홍이포를 소개한다던가 청나라 팔기군이 사용한 장비들 팔기군 두정갑이라던가 편곤 같은걸 말하는 겁니다. 단순하게 칼,도끼 이런느낌이 아니라.ㅎ
@@halalkorea2012 글쎄요 오히려 조선군은 청의 팔기군을 제압하기 위해 화약무기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halalkorea2012 특히 당시 조선군 파병병력의 상당수가 조총부대로 이루어졌을 정도니까요. 특히 당시 갑옷을 입은 청의 중장기병을 막기엔 근접에서의 막강한 조총화력이 필요했을겁니다. 결론은 사용한 무기는 주로 조총이었습니다. 또한 거마작이라고, 장창을 엮어 땅에 설치해 기병의 접근을 막는 물건도 자주 사용했습니다. 즉 거마작으로 기병접근 저지 -> 조총 발포 -> 재장전하는사이 활로 시간벌기 -> 다시 조총발포. 이러한 순서였습니다. 운이 안좋게 갑작스런 모래바람 역풍으로 인해 재장전을 못하게 되어 팔기군에게 짓밟히긴 했지만요.
저런 팔기군이 나중에 전열보병에 깨졌다는게 신기방기
사례를 구체적으로 부탁드려요
그렇게따지자면 모든군대가 다 그렇죠 그럼 몽골기병은 평생 영원한가요 불과 삼백년안에 초기화됐어요
@@militarygearjunkie2522 이후 200년 뒤 아편전쟁 팔리교전투입니다.
@@mangwonfish 나폴레옹 전쟁 이후 부터는 기병이 몰락한 수순이라 그렇긴 하네요
19세기 들어서 팔기군은 더 이상 정예군이 아니고 그냥 부패한 귀족집단에 불과했으니 사실 군대라고 하기도 힘들었죠
국방TV에서 코크멘타리인가 생각나내요 재미있겠봤는대 구독했어요 화이팅~!
👍👍👍👍👍
2:31 부타 나오는 배경음악 아시는분 계신가요?
허준 엠씨 사르후전투 토전사에서도 했었는데 여기서도 또하네요 ㅋㅋ
👍
웹툰 칼부림 4부까지 보고 와서인지 이해가 쏙쏙 되네요 ㅎㅎ니루 잘란 버일러
참 슬프다
스토리뷰에서 목소리가 조금 달라진거 같아요
임용한교수님이 출연하시지 않으니 안보게 되네요.. 이게 다 토전사 때문이다.
자기 전공외에는 무지한게 학자들의 특징이라지만... 교수님.... 서양 판금갑옷 그렇게까지 무겁지 않았습니다. 물론 교수님이 학부에서 공부하실때야 그렇게 알려져 있었겠지만 최근 20년 정도 사이에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서 퍼레이드용/실전용 갑주/무기 구분이 되었고 실전용 판금갑옷의 무게는 20kg 중반대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맨몸에 판금갑옷만 떨렁 입는게 아니라 셔츠/겜비슨 등등 갖춰입고 무기까지 풀세트로 갖추면 30kg을 훌쩍 넘게 되지만 그래도 현대의 완전군장정도 무게입니다. 이렇게 입고 뛰거나 할 수 없었다는건 말이 안되죠. 완전군장에 M60들고도 사람은 고지를 올라가고 들판을 뛰어다닐 수 있습니다.
반면 퍼레이드용/마상창술시합용 갑주의 경우 절대적인 방어력/장식성을 위해서 크고 불룩하게 만들다보니 무게가 많이 나갔지만, 그렇다고 해도 70kg이 넘는 무게가 나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최대 60kg 정도라고 알려져있죠. 퍼레이드용 도검도 3kg 훌쩍 넘는 중후장대한 유물이 많지만 실전용 도검의 경우 보통 1.2~1.3kg대고 많이 무거운 유물이 1.4kg대입니다. 물론 칼집/소드밸트까지 하면 보통 3kg 가까이, 장식성이 강한것은 3kg을 훌쩍 넘지만 이걸 손에 들고 휘두르는건 아니니깐요.
정보 업데이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30KG을 추가로 몸에 장착하고 사람이 뛰어 다닌다고? 헐~ 무슨 초 슈퍼맨인가? 군대에서 30키로 군장 매고 군인들이 뛰어 다닐 수 있다고 봅니까? 요새 군장은 얼마나 나가는지 모르겠는데. 30키로 군장 매고 사람 막 못 뛰어 다녀요... 게다가 완전군장에 M60까지 들고 막 뛰어다닌다고요? M60이 뭔지 알고 하는 얘기에요? 아무것도 안 걸치고 M60하나만 들고 뛰어 다니라고 해도 안될건게....진짜 헐~ 이네요... 군장매고 총 들고 어느 정도 속도를 내서 움직이는 건 가능하겠으나. 그 무게를 갖추고 칼들고 휘들러 대면서 피하기도 하고 찌르기도 하고 그런 움직임을 한다구요? 누가? 대체 누가?
@@3p400 영상에서 "서양갑옷은 70kg이라서 입고 뛸수없다", "넘어지면 일어나지도 못한다" 라고 했고, 만주족 갑옷은 "40kg이라서 뛰어다닐수 있다"라고 해서 쓴 댓글입니다. 영상 보고 댓글 다세요.
06년 군번입니다. 제가 현역일때 완전군장 무게 24~28kg이었습니다. M60 사수는 아니지만 들어봤구요, 들고 각개전투교장 꼭대기까지 뛰어간 적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와, 이거 거의 10kg은 되겠는데? 한 9kg 나가나봐"라고 생각 했는데 나중에 제원을 보니 12kg 이더군요.
@@3p400 역으로 묻겠습니다. 님이 30kg 군장 매고 M60 들고 뛰는게 불가능하다고 하신 근거는 무엇인가요?
@@elvenisar 등이나 어깨에만 30키로 매는거면 모르겠는데 갑옷은 온몸에 분산되는거라 전혀 다릅니다 사실 군화나 그리브나 무게가 엉청 차이나지는 않아요 그냥 그정도 무게감입니다
@@남호양-m5z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40kg짜리 만주족 갑옷은 입고 뛰어다닐수 있고 30kg짜리 플레이트 메일은 입고 뛰어다니는게 불가능하단말은 성립하지 않잖아요
당사 조선은 명과 청 사이에서 줄타기을 잘 못 해, 인조가 곤욕을 치뤄고 .. 광해 폐위가 가장 큰 잘못 이라고 생각 합니다.
명나라와 동맹인데 배신이 가능한가?
줄타기 할 상황이 아닌데 자꾸 줄타기 했어야 한다고 말함?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은 폐지된지 오래고 지금은 명나라와 그대로 동맹 유지하고 싸운 것은 맞는 수순인데 이겨야할 전쟁을 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고 있음
오잉 임용한 박사님이 아니네
13:18
13:59 몽골 타타르족 위치
고대 로마제국의 근간은 군단으로 백인-대대-군단으로 체계적인 훈련과 편제로 세계를 정복하지 않았나요? 그당시 중국은 한나라 우리는 고조선시대입니다. 여기의 후금(여진)은 팔기군으로 발전하였네요. 명도 그나름대로 편제를 유지했지만 조선은? 기
것해야 삼수군(조총, 활, 창)으로 대비했다지만 훈련이나 제대로 했을까? 로마군은 비나 눈이 오더라도 천막을 치고 훈련을 했다고 하네요. 후금의 팔기군 8천으로 명의 10만을 격퇴시켰으니 후금의 전투력은 대단하네요. 정말 소수정예로 보이네요.
그넓은 만주지역을 제대로 한번 지배해보지고 못하고 (고구려시대를 제외하면) 그냥 한반도에만 쳐박혀있으니 답답하네요. 영토가 작으니 항상 약소민족으로 취급받았고 이제는 반토막이니 . . . 적어도 한반도는 통일이 되고 만주까지는 먹어야 그나마 세계시장에 명암을 내밀지 않나?
4:25 농경민족이 근접전에 강했다는 해석은 첨듣네요. 유목민이 강했던 이유는 사냥을 통한 기마전투에 특화된 민족이고 농경민족은 체계에 있어서 유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근접전을 수성에 강하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듯합니다
기병은 제자리서 충돌해서 육박전을 치르는 게 아니라 기동성으로 보병을 치고 공간을 만들면서 싸우는데 유리하지. 진형을 유지하고 근접형태 전투면 보병이 불리하지
않죠
근접전과 기마전 중 무엇을 더 잘 했는가로 비교해 보자면 그나머 근접전이라는 의미겠지요.
간단히 쪽수가많으면 붙어서개싸움이 유리하고 쪽수딸리면 원거리서 기동하며 싸우는게 유리함 ㅋㅋ
농경민족이 주로 쓰는 도구들이 뭔지 생각해 보면 쉬울텐데요 . 도끼 장도리 낫 이런거 평생 쓰는데 반대로 활을 잘 못쓰죠 ㅋㅋㅋㅋ 사냥을 할때 활을 쏘니깐요. 기사를 생각하시나본데 동아시아의 유목민 병졸은 대부분 경기병에 활을 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라가 망했어도 그 땅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여진족이 있는 땅은 수백년 동안 고구려가 지배하던 땅이라는 사실을 감안 한다면; 여진족은 고구려의 후예라고 봐도 이상한 곳이 아닙니다. 즉, 여진족도 한국인들. 왜냐하면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땅에 계속 살던 주민들의 후손이 여진족이라고 생각할수 있지않나? 고구려가 망했다고 그 지역에 살던 모든 주민이 한반도로 이주하지 않고 계속 살았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에. 다만 수백년이 지나면서 문화가 변해서 저 당시에는 여진족이 된것.
그리 따지면 전 인류의 역사는 아프리카의 역사죠....
이렇게 역사를 보면 위험합니다. 영토와 피를 기준으로 민족을 구분하는 행태 때문에 지금의 러-우 전쟁 같은 일이 일어나는거에요
샤르흐 전투 패배 원인은 군대를 3개로 나눠서 그런것 같음.. 물론 저런 돌격 기병에 맞서는 진형이 발전 못한것도 컸지만... 오히려 유럽 중세시대때 저런 기병에 맞서는 보병 진형이 많이 발달됨..
유럽하고 비교를 말자.
임용한 박사님이 최근 내신 책에 이때 분산한 이유를 추측하신게 있는데
1개 군으로 길게 가는게 기동성 있는 기병 상대로 허리가 잘리고 교란작전에 휘말릴 수 있고
분산하면 일단 상대는 1군단을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 군이 포위할 수 있거나 거점 먹을 수 있고 피해도 정면 충돌보다 분산할 수있으며
상대가 분산한다면 상대 전력이 약해진 상태를 노려 승부 볼 수 있거나 비어있는 다른 한 군단이 퇴로 차단 견제도 가능해지는 발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셨더군요
결론은 양호가 했던 이 가정 전부가 상대에 대해 잘못 판단한 것이었고 패배한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유럽 보병진형을 개쳐바른게 몽골군이잖음
이미 허접한 보병진형으로는 상대가 안되었음
그당시 명나라 조선 유럽 전부 전투력이 약한 나라가 아니었음
그런데 왜 쳐발렸냐고??
ㅋㅋㅋ
이걸 이해못하면 북방기마병에 대해서 1프로도 이해못하는것인데
@@griffithbalt9632 그때는 냉병기 시절이고 열병기시절되면 몽골군 유럽군한테 개쳐발리고 도망감
@@유정덕-u4x 전혀 모르고있네
유럽기병이 몰락한것은 총이 아님 ㅋㅋ
물론 그이후에도 기병은 주요전략이지만
몰락의 시작은 총이 아니었고
보병도 아니었음
보병과 기병은 몽골한테 그냥 개박살나버렸고 그이후에는 제대로 붙은적이 없음
여진족은 우리 동이족으로같은 민족인데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먼 나라의 외계인 처럼 보고 이야기 하는걸 보니 참 슬프네!
식민사관은 무슨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졌는데 뭐가 같죠?
개소리
기후가 점점 따뜻해지니깐 풀도 자라고,말도 먹을 양식이 풍부해지고? 다 맞물려지면서 통일을 하게되죠.(몽골이후로~)
명나라 주원장(회족 이슬람교) 청나라 여진족 ...한족은 2000년 노예 !
여진족 후예라는 사람들 보니까 거의 효도르급임
갑옷이 70kg이라는건 말이 안되는데
저도 이상해서 찾아보니..투구 무게 빼고 중세 서양 전신 갑옷 20-40kg이라네요 보통 26kg 근방이 많이 쓰인듯.. 동양식의 두정갑은 안에 철판이 들어가 있어서 20kg 정도 무게 나간다네요 갑옷 무게 70kg에서 방교수님 말이 신뢰감 확 하락하네요 그 정도면 움직임 자체가 안될텐데,,
@@yahoojy 마갑포함해서 말씀하신거일수도 ㅋㅋ
누르하치가 맏이고 무르가치 슈르하치 야르하치 순서 아닌가요?? 4번째아들인가? 아버지 탁시나 할아버지 기오창가때가 맏이가 아니였던거고
爱新觉罗·努尔哈赤(清太祖 )
多罗诚毅勇壮贝勒爱新觉罗·穆尔哈齐,母为塔克世之妾李佳氏,异母弟,追封多罗诚毅勇壮贝勒。
和硕庄亲王爱新觉罗·舒尔哈齐,母为宣皇后喜塔喇氏,同母弟,追封和硕庄亲王。
多罗通达郡王爱新觉罗·雅尔哈齐,母为宣皇后喜塔喇氏,同母弟,追封多罗通达郡王。
多罗笃义刚果贝勒爱新觉罗·巴雅喇,母为继妃哈达纳喇氏,异母弟,追封多罗笃义刚果贝勒
바이두 백과에서도 장남은 누르하치가 맞다고 나오고
爱新觉罗·塔克世(穆麟德:taksi;?-1583年),又称“他失”“塔石”“塔失”,女真族。 [1] 明朝后期女真建州左卫领袖。塔克世是努尔哈赤的父亲,觉昌安第四子。万历十一年,同其父觉昌安试图赴古埒城劝降叛明的内弟阿台,不料尼堪外兰同李成梁破城后纵兵屠城,父子均在混乱之中丧生。顺治五年(1648年),追尊为显祖宣皇帝,努尔哈赤生母喜塔喇氏亦同时尊为宣皇后。
아이신기오르 탁시(누르하치 아버지)가 아이신기오르 기오창가의 4번째아들이라고 나오는데....
@@남호양-m5z 저도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갑옷 무게 부터해서 오류가 좀 있네요
@@yahoojy 사실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여서 뭐라 할맘은 없긴한데 확실히 두분다 군사쪽이지 역사 전문가가 아니다보니까 오류가 좀 있는거 같네요;; 그래도 명청교체기는 우리나라랑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 인터넷만 찾아도 어느정도 수준의 자료를 찾을수있는데 좀 아쉽기는합니다
동감입니다 아쉽지만 이해해야죠
사르후 전투가 조선의 운명을 바꿔놓았죠
나 저 전투가 이루어진 지역에서 사는데 바람이 졸라붐. 특히 3,4월에.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죠......금나라는 금을 숭배인가요?
저때 여진기병은 몽고 기병까지 다 깨고다닌 기병인데 어떻게 조명이 공격해서 이길 생각을하냐.
금나라의 정통성을 주장한 여진은 해서여진이 아니라 건주여진입니다.
이성량 이여송은 조선계입니다 참고로.
몽고족 끝까지 괴롭힌건 송나라 아닌가 금나라는 정주화 되면서 원나라한테 한방에 썰려나갔는데 만주지역은 반농반목생활 하면서 살던 나라들이 대부분이고 고구려도발해도부여도
그렇게 말이야 ....
꼬투리 오지고 지리고
@@militarygearjunkie2522 양양성에서 송과 원이 결전을 수천척 함대로 한 사실은 배우셧나 ㅋㅋ
은근히 송나라 얕잡아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원나라가 신경쓴건 송나라와의 결전이지 요동이나 한반도쪽이 아님 ㅋㅋ양양성 전투를 예시로 들자면 양쪽에서 수천척 함대끼리 소모전을 벌인 곳임, 여기가 함락되면서 송이 무너짐
@@ArtJoHistory 그걸 누가 모르냐? 으휴 설명충
해서여진은 부여,건주여진은 고구려, 야인여진은 발해. 후예들이네.
여진 땅이 죄다 고구려땅이고 부여땅이고 고조선땅인데 우리나라와 뿌리가 같은 역사인가요?
아뇨
고구려 의 후예라고 볼수도 있고 그러네요 후금이
20:07 부녀자를 포함한 뜻이 7500 명은 오류임. 팔기제도는 당시 후금의 사회제도로 성립되어, 모든 여진족은 팔기에 소속되야 했고, 이 체제는 청말까지계속되었음. 팔기하나가 7500명의 전사(부녀자제외)라는 말이 맞는것임. 기세찬씨 얘기대로 하면, 사르후전투에 동원된 팔기군수가 8천이라는 소리가 되고, 프로그램에서도 그렇게 주장하지만, 사르후전투에 동원된 8기군 전사 수는 대략 6만으로 기록되있음. 기세찬씨주장대로 하면 후금의 인구가 6만이라는 얘기가되나, 당시 후금인구는 50만정도로 추산됨. 출처 한명기 교수.
전체인구가 50만이고 팔기는 6만, 전투에 실제 투입된건 8천 그얘기아님?
@@militarygearjunkie2522 실제 투입된 군사수가 6만임. 8천이 안만 강한 팔기라할지라도 대포와 화기로 무장한 10 만을 상대했다는것은 어불성설임.
@@historylover7394 그냥 뇌피셜이라 하면됨
@@historylover7394 필명이 정말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궁금증 해결해줘서 고마워요.
@@militarygearjunkie2522 팔기에 노예들도 배속되어있는거라(전투병으로 참전도 가능한 계층이라 무시못함) 이들을 포함하면 전사 7500명정도가 합당하다 봅니다
给你们补充一点萨尔浒之战的材料。
(万历四十六年六月甲寅)辽东全镇额兵不过六万,除城堡、驿站差拔外,实在仅两万余,又各有防守之责。今合蓟镇援兵仅三万余,选调宣大、山西、延宁、甘固七镇兵马一万六千,蓟镇各营路兵丁数千,辽镇召募新兵二万,通共未满八万。三月初杨镐发回北京的奏疏中说“昨之主客出口者者仅七万余”
明实际发出的兵力只有7万,李如柏手上有三万余人未加入战斗。
后金老档记载发十万往征明。除了后金老档、杨镐奏报,熊廷弼和三朝辽事都记载后金十万兵。
우크라이나 가 수도 키이우로 분진합격으로 쳐들어 왔던 러시아 군대를 각개 격파로 깨부순거랑 똑같네요
여진족은 고대에 산림 수렵민족이며 농경민족임.
병자호란은 임용한 박사님 전문분야인데, 그 분을 불렀어야지..
부르려고 했겠죠. 모르는 분도 아닌데. 아마 토전사에서 했던 내용이라 고사하신듯
기세찬 교수는 사르후 전투로 논문 쓴 사람입니다. 주제와 부합한 전문가라 생각해 불렀겠죠
썸네일에 나온건 금나라 철기병인데?
사르후는 명나라와우리의 국경이였던곳이였구나 철원 ( 철령) 까지가 조선땅이였으니
명 황제의 무능
한명은 발음이 좋아 잘들어오고 한명은 뱐음 안좋아서 집중안된다....
고구려 반농반목 이죠.
여진족의 조상은 누굽니까?
이런 장군들이 나라를 지키고 잇으니 ㅋㅋㅋ든든 ㅋㅋㅋㅋ
저 당시 청군은 세계 최강의 군대였음
명나라말기 ... 징집병 훈련도 제대로 안시키고 머릿수만 불려서 ... 3살때 부터 말타고 다니는 유목민족과 전쟁이 되냐구...에이구.. 철릭에 연발쇠뇌도 없이 어떻게 이기겠수
정말 명청한 중국 ㅋㅋ
고구려 민족아님?
역사에 잘알려지지않은 역사를 다뤄좋네요. 우리국민특성상 패배한 전투는 잘 안다루니까요
한국에서 사르후가 다뤄지는건 우리 병사때문인데 원정간 우리 군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고 명과 누루하치얘기 뿐이네
강민지 아나운서 참 단아하게 나왔다 이름이 다 예뻐서 민채든 민지님이든😄
명vs 청전쟁
토전사에비해서 집중이잘안되긴하네
지도상으로 건주여진이 압록강너머에도 살았다고? 중국놈들이 들으면 정말 좋아하겠군. 사실도 아닌것을... 생각좀 하고 살아라.
오디오가 왜케 싸구려음질 느낌이 나냐
삼한의 민족인 여에 명이 노예되는 역사
석궁부대가 있엇어야 해
28:00
그때 좀만 잘햇음 삼전도치욕은 안당햇을텐데
한반도 지도에 보면
간도와 녹둔도는 어디에도 없어요
이제라도 꼭 추가하세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당연히 그때는 우리나라가 더 넓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 땅을 좁히면 문제가 있다.
이거 일 까요 저거 일까요
선택 하세요?
하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 꼰데 질문 이런
사람 가려서 게스트로 초대좀 해주세요ㅈ
If the king of Joseon could have allowed Nurhachi to lead troops into Korea to defend against the Japanese in 1592. Maybe it will consume the strength of these Jurchens. It may not have been possible that the subsequent rise of Manchuria would have threatened all of Northeast Asia.
명나라가 임진왜란때 우리를 도왔는데 당연히 우리도 도와야 하는 거 아닌가??
실리외교 말은 좋지 하지만 상대도 바보는 아닌데 우리만 실리를 외치면 누가 외교를 하려고 하나??
윤뚱아!
기름인상으로 대박난 정유사 횡재세 도입하자. 4조 이상 추가 이득이 발생한다고 하던데. 세금환수해서 기름값을 더 내리자. 횡재세는 은행권도 금리를 인상하면서 수조억원 이득을 보고 있고, 우리집 앞 주유소도 기름값인상으로 매상이득이 확연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바, 추가로 횡재세를 입법화 해서 세금으로 환수하기위해 입법화 서둘러 주세요
고려 쪼그맣게 그려났네.
조선사 편수회 역사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대한민국.
이런 방송 패널 초청하려면 하지마라.
여진족은 신라를 추앙한 민족이야
ㄷㅅㄷ아
명나라가 멸망한 이유가 뭘까 🤔?!
원숭환 처형 해서....
1. 예산은 많지만 해먹는게 많다
2.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군사제도는 방어용에 가깝고 공격용은 아니었다.
3. 수많은 나라안에 반란에 있었죠 대표적인게 이자성의 난입니다 이것때매 황제가 죽게되죠 북경함락으로
4. 원숭환의 죽음
5. 파벌싸움 등 여러 요인이 있죠
6. 후금의 강함정도가있겠지요
명나라가 멸망한 제일큰원인은 사대부들이 소유한 농경지 무세금정책입니다.
스패머
방구석에서 하루종일 유튜브 쳐보면서 관심 끌고 싶어서 이딴 댓글 남기는 백수 용삼이한테 관심 가져주지 마세요
여진은 고구려의 일부였습니다. 예맥족과 여진족이 고구려를 이루는 중추였지요. 그러므로 청은 고구려의 후예이기도 합니다.
여진이 고구려의 일부라면, 고구려가 여진의 일부라고 할수도 있는겁니다. 과거에 민족,지역성을 구분하는게 무슨의미가있나요
조선과 청이 중원 대륙을 공동 경영했다는 사실을,
당시 ( 16 ~ 17세기) 대륙에서 선교 생활을 했던
스페인 신부들이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스페인 발렌시아 대학에서 출간한 책인
Viajeros en China y libros de viajes a oriente를
참고 바랍니다.
#종전선언
엉터리 지도는 무슨저의냐?
역사를 제대로 알고 씨부려라
사르후 전투 사실 말도 안되는 상황인데
하늘이 후금 청나라를 패자로 만들려고 했다고 밖에 할수 없음.
😱😱😱😱😱😱😱😱😱😱
이런거 보면 분명 중국은 한 나라가 아닌게 맞음
이민족이 지배한 나라 서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