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수록된 '설씨의 딸과 가실총각' 설화는 많은 생각꺼리를 남겼나 봅니다. 춘원 이광수와 김동인의 경쟁의식으로, 이 가실이 설화는 이광수의 '가실'과 김동인의 '언약'으로 작품화되어 한국문학의 골곡진 역사를 가히 대변하는 작품으로도 재탄생되기도 했지요^^ 설씨녀 &가실 설화가 삼국사기에 수록된 '역사적 배경'과 김부식 등 삼국사기 필진의 '집필의도' 내지 정치적 목적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흥미롭기 그지 없거든요^^ 가실 설화 자체만 놓고본다면, 3국 통일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의 신라 입장에서 창작된 전쟁포로 설화라서, "전쟁 포로가 되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오라"는, 요즘 식으로 '정훈(정신훈련) 교육용' 설화가 아니었을까 싶구요^^ 춘원이 '가실' 작품을 쓸 무렵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강행한 후 '귀국의 변'으로 발표한 작품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즉 1921~2년경, 3.1 운동 직후 번득이는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춘원이 나름 '다른 방법으로' 독립운동 즉 계몽운동을 펴는 포부를 외친 것으로도 볼 수도 있겠지만, 애인 허영숙이 상하이까지 찾아와 귀국하게 되던 당시 춘원은 자신을 '변호' 하기 위해 쓴 작품이라 추정되기도 합니다. 가실이 조건 좋은 고구려 생활을 뿌리치고 고국 신라와 정혼녀에게 돌아온 것을 빗대어 춘원 자신의 귀국을 합리화하려는 '지성의 함정'에 빠진 모습도 꽤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라 보이구요. '지성의 함정'이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서나 변명을 위해서 등의 목적으로 좋은 머리를 쓰는 흔히 머리 좋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에디슨이 자신의 조수 테스라의 의견을 항상 무시하고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는가 하면 심지어 사형수 처리용 전기의자를 발명하는 등 그 좋은 머리를 엉뚱한 데 쓰는 걸 예로 들 수 있다고 하네요. 물론 요즘 대선 후보들 등 정치인들이 국가대계보다는 정파 또는 개인의 정치생명을 우선하여 기발한 왜곡논리를 계발하는 것도 지성의 함정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지금 언론도 "기레기"란 말이 회자되고 있을 정도이니 '지성의 함정'을 춘원에게만 탓 할 바도 아니겠죠?^^ 역사학자들은 "고구려ㆍ백제 백성들 사이엔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겠지만(최근 연구에선 백제도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엔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언어가 달랐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고구려.신라, 신라.백제 백성들 사이엔 일상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고구려. 백제는 퉁구스계, 신라는 투르크계, 가야는 드라비다어계였다는 연구 발표도 있다고 합니다)^^ 3국은 서로 '외국'이었을 뿐 아니라, 언어도 달라 일상 대화가 불가능했다고 보는 게 주류이더군요. 영화 황산벌에선 '사투리' 때문에 들통나는 장면이 나오지만, '거시기'의 뜻이 128,000가지나 된다고 암호 풀이 하는 장면이 당시 현실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 저는 추정합니다^^ 실제 DNA 조사 결과, 백제가 멸망할 무렵 즈음에야 통치권이 미쳤던 전남. 영산강 유역 주민들과 일본 큐슈 주민들의 혈연적 친연도가, 99.9%로 같은 한국인, 같은 일본인들보다 훨씬 가깝다는 조사결과도 있답니다ㆍ 굳이 조금 언급하자면, 삼국사기가 차고 넘치는 삼국시대 설화 중에서 '가실' 설화를 발굴해 정사인 삼국사기에 장황히 수록한 김부식의 집필의도도 꽤 흥미롭게 여겨집니다. 삼국사기 집필의 신라 편향이 엿보이는 대목이지요.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나서 향후 서경파의 득세를 억누르려는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린 편집으로, 저는 추정됩니다 ^^ 신라와 고구려 간의 전쟁이란 배경설정이 요즘 식으론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편집으로 보이거든요^^ 춘원이 이런 역사적 배경까지 고려하여 이 작품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런 춘원의 작품 경향이 계몽주의적 목적으로 집필했을 뿐이더라도 조선시대 519년간 행해진 고질적인 서북차별을 노골화한 결과로 이어지는 '나비효과'도 일으켰을 터 본의 아니게 수십년뒤 남북분단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됩니다~ 김동인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이 가실 설화를 소재로 '언약' 작품을 발표하면서 설씨녀가 다른 곳으로 시집가라는 아버지를 '금수'라 표현하여 이광수의 친일 행적을 "금수 같은 행동들"이었다고 대놓고 욕을 퍼부어댔다고 평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김동인과 이광수가 죽음 직전에서야 화해했다는 설도 있으나, 작금의 국내 상황을 보면 이런 역사는 계속 반복되는 거 같아 안타깝지만, 인위적으로 되는 일도 아니어서 최소한 5,000년 이상을 내다보는 '하늘의 뜻'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결과론적이지만 조선(대한'제'국)이 망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듯이, "지구촌이 한민족"이 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우리가 서 있는 건 아닐까요?^^ 💞😍🌺
잘봤어요 신라 선덕여왕이 다스리는 당시에 신라인들을 선덕여왕을 왕이라고 생각했었던듯 합니다 남녀차별을 두지 않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황룡사 담벽 바로 옆에 분황사가 있었어요
삼국사기에 수록된 '설씨의 딸과 가실총각' 설화는 많은 생각꺼리를 남겼나 봅니다.
춘원 이광수와 김동인의 경쟁의식으로, 이 가실이 설화는 이광수의 '가실'과 김동인의 '언약'으로 작품화되어 한국문학의 골곡진 역사를 가히 대변하는 작품으로도 재탄생되기도 했지요^^
설씨녀 &가실 설화가 삼국사기에 수록된 '역사적 배경'과 김부식 등 삼국사기 필진의 '집필의도' 내지 정치적 목적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흥미롭기 그지 없거든요^^ 가실 설화 자체만 놓고본다면, 3국 통일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의 신라 입장에서 창작된 전쟁포로 설화라서, "전쟁 포로가 되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오라"는, 요즘 식으로 '정훈(정신훈련) 교육용' 설화가 아니었을까 싶구요^^
춘원이 '가실' 작품을 쓸 무렵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강행한 후 '귀국의 변'으로 발표한 작품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즉 1921~2년경, 3.1 운동 직후 번득이는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춘원이 나름 '다른 방법으로' 독립운동 즉 계몽운동을 펴는 포부를 외친 것으로도 볼 수도 있겠지만, 애인 허영숙이 상하이까지 찾아와 귀국하게 되던 당시 춘원은 자신을 '변호' 하기 위해 쓴 작품이라 추정되기도 합니다.
가실이 조건 좋은 고구려 생활을 뿌리치고 고국 신라와 정혼녀에게 돌아온 것을 빗대어 춘원 자신의 귀국을 합리화하려는 '지성의 함정'에 빠진 모습도 꽤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라 보이구요.
'지성의 함정'이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서나 변명을 위해서 등의 목적으로 좋은 머리를 쓰는 흔히 머리 좋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에디슨이 자신의 조수 테스라의 의견을 항상 무시하고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는가 하면 심지어 사형수 처리용 전기의자를 발명하는 등 그 좋은 머리를 엉뚱한 데 쓰는 걸 예로 들 수 있다고 하네요. 물론 요즘 대선 후보들 등 정치인들이 국가대계보다는 정파 또는 개인의 정치생명을 우선하여 기발한 왜곡논리를 계발하는 것도 지성의 함정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지금 언론도 "기레기"란 말이 회자되고 있을 정도이니 '지성의 함정'을 춘원에게만 탓 할 바도 아니겠죠?^^
역사학자들은 "고구려ㆍ백제 백성들 사이엔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겠지만(최근 연구에선 백제도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엔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언어가 달랐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고구려.신라, 신라.백제 백성들 사이엔 일상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고구려. 백제는 퉁구스계, 신라는 투르크계, 가야는 드라비다어계였다는 연구 발표도 있다고 합니다)^^ 3국은 서로 '외국'이었을 뿐 아니라, 언어도 달라 일상 대화가 불가능했다고 보는 게 주류이더군요. 영화 황산벌에선 '사투리' 때문에 들통나는 장면이 나오지만, '거시기'의 뜻이 128,000가지나 된다고 암호 풀이 하는 장면이 당시 현실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 저는 추정합니다^^
실제 DNA 조사 결과, 백제가 멸망할 무렵 즈음에야 통치권이 미쳤던 전남. 영산강 유역 주민들과 일본 큐슈 주민들의 혈연적 친연도가, 99.9%로 같은 한국인, 같은 일본인들보다 훨씬 가깝다는 조사결과도 있답니다ㆍ
굳이 조금 언급하자면, 삼국사기가 차고 넘치는 삼국시대 설화 중에서 '가실' 설화를 발굴해 정사인 삼국사기에 장황히 수록한 김부식의 집필의도도 꽤 흥미롭게 여겨집니다.
삼국사기 집필의 신라 편향이 엿보이는 대목이지요.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나서 향후 서경파의 득세를 억누르려는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린 편집으로, 저는 추정됩니다 ^^
신라와 고구려 간의 전쟁이란 배경설정이 요즘 식으론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편집으로 보이거든요^^ 춘원이 이런 역사적 배경까지 고려하여 이 작품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런 춘원의 작품 경향이 계몽주의적 목적으로 집필했을 뿐이더라도 조선시대 519년간 행해진 고질적인 서북차별을 노골화한 결과로 이어지는 '나비효과'도 일으켰을 터 본의 아니게 수십년뒤 남북분단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됩니다~
김동인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이 가실 설화를 소재로 '언약' 작품을 발표하면서 설씨녀가 다른 곳으로 시집가라는 아버지를 '금수'라 표현하여 이광수의 친일 행적을 "금수 같은 행동들"이었다고 대놓고 욕을 퍼부어댔다고 평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김동인과 이광수가 죽음 직전에서야 화해했다는 설도 있으나, 작금의 국내 상황을 보면 이런 역사는 계속 반복되는 거 같아 안타깝지만, 인위적으로 되는 일도 아니어서 최소한 5,000년 이상을 내다보는 '하늘의 뜻'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결과론적이지만 조선(대한'제'국)이 망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듯이, "지구촌이 한민족"이 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우리가 서 있는 건 아닐까요?^^ 💞😍🌺
힘차게 힘차게 힘차게
[청정심 박치우]
"한겨레역사힘차게"
: 자주적 한겨레 역사관 , 한겨레의 역사 외 세계사 포함 , 국수주의 배격
선덕여왕이다
춘원과김동인 사이 화해 안했다.김동리는 누구일까 춘원 이광수
설총
이광수 김동인
춘원 이광수
춘원 이광수와도산 안창호
이세민이 너 이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