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미니우스가 오랫동안 로마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다는건 사실이 아닙니다 어렸을때부터 동생과 함께 로마에서 풀브라이트 장학제도처럼 대접받으며 공부하고 컷었던 사람이고 실제로는 바루스가 합당한 작위와 대접을 안해줘서 마음을 바꾼게 정설이에요 남동생은 형이 배신하고도 로마군에 남아 형이랑 양군이 보는앞에서 입배틀까지 합니다 또한 유해현장 이미 다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저시기에 벌써 로마군의 로리카 세그멘타타 갑옷이 발견되서 이게 뭐지 다들싶어하기도 했고요
게르마니쿠스에 앞서 티베리우스도 있었음.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후임인 황제였는데 게르마니쿠스는 감성적이고 풍부한 사람이었지만 티베리우스는 그의 통치기간에서 평가처럼 냉정하고 이성과 논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음. 게르마니아 정복이 실익이 없다 판단해서 전쟁을 접어버린거. 대신 외교적인 노선을 전쟁과 병행시켜 아르미니우스가 만든 게르만족 동맹을 와해시키고 가족을 인질로 잡아버리며 아르미니우스를 고립시켜버림. 그 와중에 아르미니우스는 내부 배신으로 죽임을 당해 화평의 대가로 로마제국에게 바쳐 결과적으로 복수는 성공했지요. 그리고 게르마니아와 제국의 경계로 장벽을 만들고 게르만족과 항시 싸울 군단기지를 확립해서 주둔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팽창정책은 도나우강 유역과 동방 파르티아와의 패권경쟁으로 넘어가죠. 티베리우스 즉위 당시만 해도 속주와 동맹국이 혼재된 형태였으나 결국 게르마니아 전쟁 마무리되고 티베리우스와 그 후임황제들부터 서서히 동방 전체가 속주로 편입되고 오현제를 여는 트라야누스때는 유프라테스강 페르시아만 까지 최대판도로 확장되게 됩니다. 그 이후로는 진짜 팽창정책은 멈추게되고 수성전으로 바뀌지만요.
그렇습니다. 사실 테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많이 과장 되고 변형되어 전해졌는데,그전에 이미 로마제국은 게르마니아를 완전히 평정한 후였고,로마가 점령지에 으례히 그렇듯이 도시를 세우고 로마 민간인들을 이주 시키기 시작하는 그 첫단계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겨울을 나기 위해 부모님 아들 딸 손자 등 민간인들 줄줄이 데리고 겨울 정착지로 이동중에 기습 당한것임. 전투병력은 2개군단이 못됐고 바루스는 전투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람입니다. 즉! 도시 장착지 건설을 위한 인물이었슴 후에 로마는 게르마니아를 침공해서 확실하게 밞아 놓지만 황제가 정치적 불안감을 느껴,게르마니쿠스를 견제하기 위해,더이상의 공격을 금지시킵니다
@@BondurantBrothers-kx4hn 관련 저서 읽어봤는데 그 게르마니쿠스를 막은 사람이라는 후임황제 티베리우스는 정치적 불안감을 느낄 사람이 아닙니다. 클라우디우스라는 공화정시대부터 명문 귀족가문 출생으로써 꿀릴게 전혀 없던 사람이었죠. 단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애초에 이 명문귀족을 황제의 친족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아우구스투스 왕조로써 제국(..) 후계자가 계속 이어서 지배하길 원했기에 그 초기 제국 체계를 잡을 중간관리자(?)로 활용하려고 했음. 티베리우스는 귀족적인 자존심은 상했지만 쨌든 공화정에서 벗어나 로마가 제국으로 가야된다는 전제는 어느정도 동의하고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주변 파르티아나 예전 페르시아같은 전제왕권으로 쏠리는건 그당시 원로원부터가 경계하고 있었기에 무리한 대외원정보다 외교등 사후관리를 통해 제국 외부를 안정시키고 내부는 체계화시켜서 내실있게 원로원과 황제권의 관계를 설정하고 체제정비를 하길원했기에 게르마니쿠스가 혈기왕성함으로 전쟁을 원했지만 전쟁을 접은것이죠.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뿌린 황제정이라는 씨앗을, 아우구스투스가 싹틔우고 황제정을 구체화시켜 제국 시대를 열었는데, 티베리우스가 재위 게르마니쿠스 사건 피소 재판등 여러가지 사건들로 당시에는 악명높은 황제로 평가받았지만 후세에 역사가들은 티베리우스를 크게 호평할 정도로 체계를 완성시켰습니다. 제가봐도 그 뒤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유명한 칼리굴라와 네로가 갖은 깽판을 치고 그 네로 이후에 혼란기를 겪었음에도 티베리우스가 확립한 제국 시스템이 어느정도 작동해줬기에 버텨낼수 있었고 결국 추후에 베스파시아누스 군인 황제 이후로 다시 오현제까지 제국이 계속 강성해질수 있던 원인이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흐름보니 그렇게 보이네요.
영상 재미있게 보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아르미니우스가 오랫동안 로마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다는건 사실이
아닙니다 어렸을때부터 동생과 함께
로마에서 풀브라이트 장학제도처럼
대접받으며 공부하고 컷었던 사람이고
실제로는 바루스가 합당한 작위와 대접을
안해줘서 마음을 바꾼게 정설이에요
남동생은 형이 배신하고도 로마군에 남아
형이랑 양군이 보는앞에서 입배틀까지
합니다
또한 유해현장 이미 다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저시기에 벌써 로마군의
로리카 세그멘타타 갑옷이 발견되서
이게 뭐지 다들싶어하기도 했고요
너무 재밌어요..! 병사들 유해가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게 제일 소름;;; 구독하고 갑니다~~
흥미롭네요 ㅎㅎ 양질의 정보 감사합니다~!
넘 재밌어서 구독하고 갑니당
와 나 그리스로마신화 환장하게 좋아하는데 ㅜㅜ
모든 신화를 다 다뤄주시길 기대하며 구독하고 갑니다~!!!!🧚🏻♂️
로마가 복수를 위해 게르마니쿠스 파견을 하여 여러 차례 정벌전 벌여 게르만족에 승리를 거두며 복수를 합니다....그러나 더 이상은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팽창 정책이 여기서 서서히 마무리 됩니다.......
게르마니쿠스에 앞서 티베리우스도 있었음.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후임인 황제였는데 게르마니쿠스는 감성적이고 풍부한 사람이었지만 티베리우스는 그의 통치기간에서 평가처럼 냉정하고 이성과 논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음.
게르마니아 정복이 실익이 없다 판단해서 전쟁을 접어버린거. 대신 외교적인 노선을 전쟁과 병행시켜 아르미니우스가 만든 게르만족 동맹을 와해시키고 가족을 인질로 잡아버리며 아르미니우스를 고립시켜버림. 그 와중에 아르미니우스는 내부 배신으로 죽임을 당해 화평의 대가로 로마제국에게 바쳐 결과적으로 복수는 성공했지요. 그리고 게르마니아와 제국의 경계로 장벽을 만들고 게르만족과 항시 싸울 군단기지를 확립해서 주둔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팽창정책은 도나우강 유역과 동방 파르티아와의 패권경쟁으로 넘어가죠. 티베리우스 즉위 당시만 해도 속주와 동맹국이 혼재된 형태였으나 결국 게르마니아 전쟁 마무리되고 티베리우스와 그 후임황제들부터 서서히 동방 전체가 속주로 편입되고 오현제를 여는 트라야누스때는 유프라테스강 페르시아만 까지 최대판도로 확장되게 됩니다. 그 이후로는 진짜 팽창정책은 멈추게되고 수성전으로 바뀌지만요.
그렇습니다.
사실 테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많이 과장 되고 변형되어 전해졌는데,그전에 이미 로마제국은 게르마니아를 완전히 평정한 후였고,로마가 점령지에 으례히 그렇듯이 도시를 세우고 로마 민간인들을 이주 시키기 시작하는 그 첫단계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겨울을 나기 위해 부모님 아들 딸 손자 등 민간인들 줄줄이 데리고 겨울 정착지로 이동중에 기습 당한것임.
전투병력은 2개군단이 못됐고 바루스는 전투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람입니다.
즉! 도시 장착지 건설을 위한 인물이었슴
후에 로마는 게르마니아를 침공해서 확실하게 밞아 놓지만 황제가 정치적 불안감을 느껴,게르마니쿠스를 견제하기 위해,더이상의 공격을 금지시킵니다
@@BondurantBrothers-kx4hn 관련 저서 읽어봤는데 그 게르마니쿠스를 막은 사람이라는 후임황제 티베리우스는 정치적 불안감을 느낄 사람이 아닙니다. 클라우디우스라는 공화정시대부터 명문 귀족가문 출생으로써 꿀릴게 전혀 없던 사람이었죠.
단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애초에 이 명문귀족을 황제의 친족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아우구스투스 왕조로써 제국(..) 후계자가 계속 이어서 지배하길 원했기에 그 초기 제국 체계를 잡을 중간관리자(?)로 활용하려고 했음.
티베리우스는 귀족적인 자존심은 상했지만 쨌든 공화정에서 벗어나 로마가 제국으로 가야된다는 전제는 어느정도 동의하고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주변 파르티아나 예전 페르시아같은 전제왕권으로 쏠리는건 그당시 원로원부터가 경계하고 있었기에
무리한 대외원정보다 외교등 사후관리를 통해 제국 외부를 안정시키고 내부는 체계화시켜서 내실있게 원로원과 황제권의 관계를 설정하고 체제정비를 하길원했기에 게르마니쿠스가 혈기왕성함으로 전쟁을 원했지만 전쟁을 접은것이죠.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뿌린 황제정이라는 씨앗을,
아우구스투스가 싹틔우고 황제정을 구체화시켜 제국 시대를 열었는데,
티베리우스가 재위 게르마니쿠스 사건 피소 재판등 여러가지 사건들로 당시에는 악명높은 황제로 평가받았지만 후세에 역사가들은 티베리우스를 크게 호평할 정도로 체계를 완성시켰습니다.
제가봐도 그 뒤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유명한 칼리굴라와 네로가 갖은 깽판을 치고 그 네로 이후에 혼란기를 겪었음에도 티베리우스가 확립한 제국 시스템이 어느정도 작동해줬기에 버텨낼수 있었고 결국 추후에 베스파시아누스 군인 황제 이후로 다시 오현제까지 제국이 계속 강성해질수 있던 원인이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흐름보니 그렇게 보이네요.
역시 독일.. ㄷㄷㄷ 이때 이겼으면 어떻게 됐을까? 게르만족도 따로 풀면 좋을거같아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만이 아니라 제 9군단의 실종이 섞여서 제작된듯...
저래서 내부의 적(간첩)이 외부의 적보다 수만배 위험한 것임 ...
전형적인 책상 물림 장군으로 안정적인 지역 총독에 유능한 장군임...비루스....
자세한 전투 내용은 없으나 얼마후에 게르마니쿠스가 둘러 본 기록을 보면 제대로 전투를 못하고 계략에 빠져서 진거 같다고 나옴....
진영등이 제대로 설치되다 말았다고...
테우토부르크가 아니라 토이토부르크.
간첩 하나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네
바보같은 정책
왜 인질들을 교육시키고 전술을 가리켜서
강력한 적으로 만드냐
인질들은 개 돼지처럼 처먹게만
놔둬야한다
다른 괴담 유튜브 채널에는 엄청난 숫자의 군대가 유럽 늪지대에서 발견됐다고 나옴. 기묘한 밤인가?
늪지대가 아니었을까요..?
안개와 추위로 오늘의 벨기에 또는 네덜란드 바스토뉴 숲이라는 썰이 저기를 통과하면 독일 남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