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공주는 원나라 공주 출신이긴 해도 친정이 갑질할 만한 집안은 안됐던 게 가장 커요. 남편 공민왕도 이전 왕들과 달리 개혁 의지가 강하고 반원자주 정책을 편 사람이라 물론 노국공주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진 않았지만 어차피 공주가 위세를 부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제국대장공주의 삶이 안타깝네요. 물론 영상에서 보시듯 그녀도 성격이 강하고 아주 인품이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한데 그녀가 이렇게 되어 버린 데는 전 그녀가 원래 성격이 강하다는 점도 물론 있지만 남편 충렬왕 때문이 컸다고 봐요. 충렬왕이 1236년생입니다. 제국대장공주가 1259년생이에요. 둘의 나이 차이가 23살이에요.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만약 제가 유학파라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아도 23살 나이 차이 나는 남편 하나 바라보고 미국에 가서 살으라고 하면 정말 싫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영어를 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ㅋㅋ) 심지어 뜨겁게 연애해서 그 남편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도 아니고 만난지 얼마 안 된 정략 결혼한 사이에요. 부인이 여러 명 있는 거야 일부다처제가 합법인 시대에 남편이 왕이니 그렇다 쳐도, 심지어 그 남편에게는 애틋한 조강지처까지 있어서 그 조강지처에게 각별하고 나는 뒷전이에요. 공주가 아들을 낳은 후 열린 연회 때 화를 내고 가 버렸다는데 전 이건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요... 내가 아들을 낳아서 열린 연회인데 남편이 제2비인 정화궁주랑 동격으로 앉히면 누가 좋아합니까? 심지어 남편은 날 위해주며 축하해주기보다는 제2비가 마음 상해하지 않을지만 신경 쓰고 있네요? 거기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줄줄이 요절하고... 저라면 우울증 왔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다지 마음 안 가는 여인이었어도 충렬왕이 스무살이나 어린 부인에게, 그것도 자기 하나 바라보고 이역만리 타국에까지 온 부인에게 조금만 더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이었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면 제국대장공주도 좀 더 고려에 마음 붙이기 쉬웠을 텐데요... 그런데 그 남편은 다른 여인에게만 마음 가 있고 정치는 뒷전에 사냥과 주색에만 빠져 있고... 나중에 마음 다잡은 공주가 충렬왕에게 직언도 많이 했다는데 오히려 그래서 부부 사이는 더 멀어졌겠죠. 자기에게 옳은 소리하는 거긴 하지만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서 하고 앉아있다고... 마지막 작약꽃 일화가 참 슬프네요...
몽고귀족이나 황족도 아니고 쿠빌라이 칸의 딸이면 엄청 잘해줘야 했을텐데 ㅉㅉ 암튼 정화궁주도 불쌍하네요. 원래라면 그녀가 정비가 될테지만 원나라 황제의 딸이니 차비로 밀려났고 그래도 무릎까지 꿇고 술잔을 올리고 그랬는데 눈치없는 충렬왕은 긁어부스럼이나 만들고 ㅉㅉ 애초에 동격으로 대우하지만 않았으면 정화궁주가 무릎꿇는 일이 없었을덴데 말이죠. 일부다처제는 예나 지금이나 만악의 근원이네요
@@pele2434 딴지를 걸자면 일부다처제는 남자들 좋으라고 생겼닥보다는 오히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법이에요. 만악의 근원이 아니라요. 전쟁과 사냥이 있던 시절에는 남성 사망률이 너무 높아 남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야 결혼 안 하고 여자가 혼자 살아도 되지만 이 시대에 여인이 혼인을 못한다는 건 들짐승에 먹혀 죽거나 동네 남자들에게 끌려가 윤간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어요. 짐승을 잡아 먹어야 하는데 여자가 사냥을 할 수도 없고, 농경 시대 도래 이후에도 힘쓰는 일은 남자 없이는 못하고 여자는 보조하는 일 정도밖에는 못하고요.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부다처제가 생겨났고 여러 여인 거느릴 수 있는 남자는 재력과 권력을 지닌 남자가 된 거죠. 지금은 막장으로 보이는 형사취수제나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여인을 모두 승계하는 제도도 그래서 생겨난 거에요. 이 시대에 여인에게 남자 없이 살으라는 건,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궁녀들도 직접적인 승은을 입은 것은 아니어도 왕의 여인으로 모두 간주된 걸로 생각해 볼 때 남자가 있기에 살 수 있었던 거죠. 조선은 재혼 금지였다고는 하는데 그건 법도 따지는 양반가에서나 그런 거고 실제 백성들은 재혼을 많이 한 것으로 여기고 있어요. 남자들도 이 시대엔 평균 수명이 짧아 부인이랑 사별한 경우도 많고 여자 없이 살기도 힘들고, 여자들은 더더욱 남자 없이 살지는 못하고 하니...
@@winni6520 여성의 재혼 이야기는 결국 남자 없이는 못 사니 사별한 여성들도 다시 남자를 찾아 살았다는 의미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삼국 시대에는 기록이 자세히 전하지 않아 세세히는 알 수 없으나 이 시대에도 일부다처제는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일부다처제를 시행해도 여러 여인 거느릴 수 있는 남자는 왕과 왕족, 귀족층에 국한되는 문제였고요.
고려가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원세조 쿠빌라이가 고려와 혼인동맹을 맺은 것은 고려에게는 천운과 같은 것이었습니다.당시 몽골군의 학살이 엄청났고 당시 없어진 민족도 꽤 있고 오늘날 역사기록에만 남아있는 민족도 있어요.중국도 인구 1억중 5천만이상이 학살당했는데 칭기즈칸은 중국인을 모조리 죽이고 목장을 만들자고 고집했는데 신하들 가운데 말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도중에 관뒀다 합니다.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정말 큰일날 뻔한 일이었지요.오고타이와 수부타이의 유럽원정중 황제가 죽는 바람에 이들이 권력투쟁에 참가하기위해 원정을 중단했는데 유럽인들은 몽골군이 유럽인을 모두 죽이지않을까 무서워하고 있었다고합니다.그 이야기는 유럽인들사이에 지금도 전해옵니다.그 때 전유럽이 목장이 될 뻔 했다고.이에 비하면 고려는 거의 천국수준이었다고 보면 됩니다.몽골의 유일한 부마국이 되었던 덕분에.몽골황실은 타민족과 결혼을 금했지만 유일하게 고려인들과는 결혼을 했더군요.
고려 태자가 몽골에게 항복할때 에릭베케에게 가지않고 대도에 있는 쿠빌라이를 찾아가 투항하게되죠.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여리나 되는 나라다. 당태종의 100만대군도 꺾지못했는데 나에게 항복하는것은 하늘의 뜻이다”라며 고려를 높이샀습니다. 덕분에 몽골에게 저항한 대부분의 나라가 멸문지족을 당할때 고려만이 의관과 풍습을 유지하는 사면을 받게됩니다. 이 약속(세조구제)로 인해 고려는 멸망당하지 않았으며 부마국으로서 원나라에서 한족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죠. 고려에게 행한 일이 몽골에게 있어서 얼마나 특이한 일인지 ‘너희에게 행한 일이 얼마나 특별한것인지 아느냐’고 묻기도 했고 본인의 약속에 대해 ‘스스로 믿어 의심치 마라’며 굳게 확인시켜주기도 했다네요.
"제국대장공주"에서 제국(齊國)은 공주의 봉호(封號), 즉 책봉명이고 대장공주(大長公主)는 왕의 어머니 혹은 이모에게 주어지는 명칭입니다. 아마 충선왕때 추존된 시호나 존호인 것 같습니다. 사실 몽골의 여인들이 고려에와서 힘들어했지만, 고려에 우호적이었다고 합니다. 덕녕공주와 노국공주도 고려인을 사랑한 몽골인이라 합니다. 고려를 압박한 몽골의 남성들과는 달리 고려를 품어준 몽골의 여인들이 아닌가 합니다.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폐비 윤씨가 명나라 공주였다면 그런 기행을 벌였어도 폐비시키지 못하고 조선 왕실에서 어떻게든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겁니다. 다만 무인정권으로 인해 왕권이 미약했던 고려랑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던 조선이랑은 상황이 다르긴 하죠. 무엇보다 명나라 입장에서도 몽골 항쟁 같은 조선과의 전쟁이 있던 것도 아니고, 이미 대국으로 자신들을 섬기고 있는 조선을 굳이 침략해서 전쟁을 벌일 필요도 없고 귀한 자신의 딸들을 변방국에 시집 보내 고생 시키며 부마국으로 삼을 필요도 없었던 거죠. 만약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략했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드네요. ㅋㅋ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가기까지 했음에도 그들에게 청나라 황실 여인과의 혼인을 강요하지는 않았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으론 원나라 시절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지만 별 재미를 못 봐 실효성이 없다고 생각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또 아무리 약소국이라도 왕실에 시집 보내려면 방계일지라도 황족 여인은 적어도 보내야 하는데 조선에 시집 가고 싶어하는 황족 여인도 없어서 황족들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선발해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던 것 같고요.
@@꽃말-y6l 명나라 사신 황엄이 왔을때 한 신하가 새자(양녕대군)를 명나라 황녀랑 결혼시키면 좋지 않갰냐는 재안을 했습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태종 이방원이 황엄한태 말했고 황엄은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황엄이 다시 사신으로 왔을때 새자와 황녀의 혼인애 대해서 얘기 안한걸 보면 황재한태 말했는대 황재가 새자와 황녀가 결혼하는걸 안좋개 생각한거 같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괜한 소리를 해서 나라의 위신이 우습개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대 태종 이방원이 다시 생각해보니 새자를 황녀와 결혼시키는개 좋지않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며느리랑 말이 안통할 거고 친딸이 아닐수도 있으니 말이죠 실재로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충목왕 충정왕은 어려서 아내가 없으니 재외) 황재의 딸은 재국대장공주 뿐이었으니 친딸이어도 문재인개 명나라를 등애 업고 건방지개 굴면 재어할수 없죠 기철처럼 오빠들이 조선으로 와서 벼슬을 하고 여동생을 등애 업고 온갖 만행을 저질러도 재어할수 없죠 태종 이방원은 나중애 딴소리 못하개 새자를 김한로의 딸한태 장가를 보냈습니다
원나라가 나라가 참 크고 전성기 때는 몽골 땅에서 아성을 떨치기는 했지만 국가 자체가 일찍 망해요. 100년도 못 가고 망하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이가 안 좋아서인지 당시 높은 영유아 사망률 때문인지 원나라 출신 여인들 소생 중 성인이 된 왕도 생각보다 별로 없어요. 한데 한참 때는 몽골 피가 진한 고려 왕이 나타나기는 하죠. 한데 문제는 혈통도 혈통이지만 죄다 아주 어릴 때부터 원나라에 볼모&교육을 위해 가 있었고 당시 국력이 원나라와 고려가 비교도 안 되게 크다 보니 고려인이라는 의식보다는 자신을 원나라 황족으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거죠. 오늘날에도 미국이나 캐나다에는 이민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 많고, 특히 아예 연고가 없던 사람들보다 조기 유학이나 주재원 자녀로 미국이나 캐나다에 있었던 사람들은 안 돌아오는 경향이 강하잖아요. 그리고 1.5세대들도 한국인이라는 의식이 희미해지는데 2세, 3세로 가면 겉만 동양인이고 속은 완전 미국인이 되죠. 심지어 "충"자 돌림 왕들은 황족으로 기득권 대우까지 받을 수 있었으니 약소국의 왕보다는 원나라의 황족으로 있고 싶어했던 것도 "개인"으로 놓고보면 이해는 갑니다. 충렬왕은 혈통은 고려인이었습니다. 원종과 순경태후 사이의 맏이였어요. 문제는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서 자란 것도 아닌데도 원나라 물을 먹더니 영상에서 보시듯 몽골식 변발에 몽골식 의상, 심지어 이걸 신하들에게 강요까지 할 정도로 본인을 원나라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영상에서 잠깐 이야기하는 충선왕이 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의 아들입니다. 1/2이네요. 어릴 때 이미 원나라에 보내졌죠. 거기다 이 사람이 오늘날처럼 화상 회의나 인터넷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원나라에 머물며 원격 통치를 했던 것으로 유명한 그 사람입니다-_-;;; 오늘날의 학자들은 충선왕은 고려어를 구사하지도 못했고 본인을 고려인이라고 생각치도 않았을 거라 추정하고 있죠. 그 다음 왕이 충숙왕인데 이 사람은 할아버지(충렬왕)가 고려인인 것 빼면 사실상 몽골인입니다. 할머니(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 공주, 아버지가 그 사이에 태어난 혼혈, 어머니가 황족 출신은 아니지만 몽골인 출신 후궁인 의비.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의외로 자기 아버지보다도 고려인이라는 의식이 있었고 어떻게든 원나라 간섭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습니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기력했지만요. 다만 충숙왕의 원나라 출신 부인들은 아이를 못 낳았거나 낳았어도 요절해서 이후 즉위하는 그의 아들들, 충혜왕이랑 공민왕은 어머니가 고려인입니다. 그러니 다시 고려의 피가 진해짐. 막장 충혜왕의 아들은 원나라 황족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충목왕이고... 충목왕 요절 후 뒤를 이은 이복 동생 충정왕은 충혜왕이 고려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충정왕이 너무 어려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폐위되고 옹립된 숙부 공민왕도 어머니가 고려 여인입니다. 공민왕 이후 충자 돌림이 아닌 시호가 붙은 것은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서 그렇습니다. 공민왕은 원나라 황족 여인인 노국대장공주랑 정략결혼했죠. 한데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인지 신돈의 아들인지 설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어머니가 고려인이고 창왕도 우왕과 고려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마지막 왕 공양왕도 그냥 고려 혈통의 고려 왕족이었죠.
동영상에 나오는 충렬왕 아들인 충선왕은 완전 몽고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자기자신도 원나라 사람이라고 칭하고 다녔습니다. 16세 이후 원나라로 넘어간 뒤로 고려로 돌아오지 않았고 원나라에서 교지로만 고려를 다스리는 그 유명한 교지통치를 하게 됩니다. 고려로 가라는 명이 있어도 끝까지 거부합니다. 원황실내에서는 나름 서열이 높아서 심양(요동)왕과 고려왕이라는 두개의 왕작을 받았지만 후에 티벳까지 유배가서 죽습니다.
왜 몽골공주가 최악의 왕비인지 이해가 안감. 애초에 당시 고려 왕 자체가 하나같이 노답이었는데. (원나라 공주 강간한 왕도 있었을 정도... 미친거 아닌가ㄷㄷㄷ) 그나마 개념커플이던 공민왕과 노국공주도 공주 사망 이후 멘탈 나간 공민왕이 자폭하면서 고려왕조 = 개노답 이 된거잖아.
@@정재웅-b8u 송지효 역할은 노국공주는 아니고 노국공주 사후 왕비가 된 여인이 모티브라고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쌍화점의 모티브가 공민왕인 것은 맞고요. 노국대장공주와 혼인 중에는 공민왕은 명석하고 동성애에 빠지지도 않았었죠. 그런데 노국대장공주가 산고로 사망하자 막장으로 치달아 버린 거죠. 남색에 빠지고요. 쌍화점의 건룡위가 공민왕의 자제위를 모티브로 한 거. 이것도 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이 만든 거죠. 그리고 그 자제위랑 자신의 부인들이 관계를 갖도록 강요했고요;;;
@@이도형-x9x 하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긴 해요. 위에 우왕의 출생에 대해 쓰신 댓글 보고 찾아보니 말씀하시듯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설은 우왕 재위 시기엔 나타나지도 않다가 나이 어린 창왕이 즉위한 후 나타나기 시작하는 기록이라네요. 현대 학자들은 말씀하시듯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는 데 회의적이고 이런 설이 나올 정도로 당시 고려 왕권이 얼마나 미약했는지, 민심을 잃었었는지, 그리고 이후 이성계 일파가 어떻게든 고려 왕조를 깎아내리려고 했는지에 대한 증거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저럴수밖에 없지 같은 원나라 사람과 결혼할수도 있었지만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시집왔는데 이미 본처에 아들도 있고 시집온 후에도 남편은 첩만 끼고 노니 성격 버릴만 하지
인정,,
맞습니다
참고로 재국대장궁주가 고려 인삼을 유렵에 많이 수출해 고려 라는 나라를 세계에 많이 알렸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초재벌집 따님이 허울만 있는 부잣집에 시집 와서 속 썪는 내용입니다
비유 보고 뿜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혹시 서울대생이세요?
세계 최강 제국의 공주인 내가 허울 뿐인 나라의 왕비가 되어버린 건에 관하여
@@꽃말-y6l 4441
갑자기 원나라 공주가 불쌍해집니다
제국대장 공주 만행은 고려 드라마에서 나옴 ㅋㅋㅋ 지팡이로 충렬왕 막 패는데 대신들은 감히 말릴 엄두 조차 못내고 ㅋㅋ 충렬왕한테 욕하고 떄리고 ㅋㅋㅋ 자기 마음에 안들면 대신들도 패고 다녔다고 ㅋㅋ 제국대장 공주 아버지 원나라 왕도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는 ㅋㅋㅋ
왕 아니고 황재
@@정재웅-b8u 황재 아니고 황제
@@웅이아버지-f8n 황제로 수정 ㄱㄱ
노국공주는 고려에 갑질은 안했는데 노국공주가 착했네
노국공주는 원나라 공주 출신이긴 해도 친정이 갑질할 만한 집안은 안됐던 게 가장 커요. 남편 공민왕도 이전 왕들과 달리 개혁 의지가 강하고 반원자주 정책을 편 사람이라 물론 노국공주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진 않았지만 어차피 공주가 위세를 부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제국대장공주의 삶이 안타깝네요. 물론 영상에서 보시듯 그녀도 성격이 강하고 아주 인품이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한데 그녀가 이렇게 되어 버린 데는 전 그녀가 원래 성격이 강하다는 점도 물론 있지만 남편 충렬왕 때문이 컸다고 봐요.
충렬왕이 1236년생입니다. 제국대장공주가 1259년생이에요. 둘의 나이 차이가 23살이에요.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만약 제가 유학파라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아도 23살 나이 차이 나는 남편 하나 바라보고 미국에 가서 살으라고 하면 정말 싫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영어를 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ㅋㅋ) 심지어 뜨겁게 연애해서 그 남편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도 아니고 만난지 얼마 안 된 정략 결혼한 사이에요.
부인이 여러 명 있는 거야 일부다처제가 합법인 시대에 남편이 왕이니 그렇다 쳐도, 심지어 그 남편에게는 애틋한 조강지처까지 있어서 그 조강지처에게 각별하고 나는 뒷전이에요. 공주가 아들을 낳은 후 열린 연회 때 화를 내고 가 버렸다는데 전 이건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요... 내가 아들을 낳아서 열린 연회인데 남편이 제2비인 정화궁주랑 동격으로 앉히면 누가 좋아합니까? 심지어 남편은 날 위해주며 축하해주기보다는 제2비가 마음 상해하지 않을지만 신경 쓰고 있네요? 거기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줄줄이 요절하고... 저라면 우울증 왔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다지 마음 안 가는 여인이었어도 충렬왕이 스무살이나 어린 부인에게, 그것도 자기 하나 바라보고 이역만리 타국에까지 온 부인에게 조금만 더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이었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면 제국대장공주도 좀 더 고려에 마음 붙이기 쉬웠을 텐데요... 그런데 그 남편은 다른 여인에게만 마음 가 있고 정치는 뒷전에 사냥과 주색에만 빠져 있고... 나중에 마음 다잡은 공주가 충렬왕에게 직언도 많이 했다는데 오히려 그래서 부부 사이는 더 멀어졌겠죠. 자기에게 옳은 소리하는 거긴 하지만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서 하고 앉아있다고...
마지막 작약꽃 일화가 참 슬프네요...
결국 여러 가지로 왕이 처신을 똑바로 못했던 거고 이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병을 얻은 것 같아요ㅠ충분히 이해가 가네요..그나저나 항상 자세한 부연 설명을 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드려요..덕분에 역사가 더 재밌어졌답니다.👍
몽고귀족이나 황족도 아니고 쿠빌라이 칸의 딸이면 엄청 잘해줘야 했을텐데 ㅉㅉ 암튼 정화궁주도 불쌍하네요. 원래라면 그녀가 정비가 될테지만 원나라 황제의 딸이니 차비로 밀려났고 그래도 무릎까지 꿇고 술잔을 올리고 그랬는데 눈치없는 충렬왕은 긁어부스럼이나 만들고 ㅉㅉ 애초에 동격으로 대우하지만 않았으면 정화궁주가 무릎꿇는 일이 없었을덴데 말이죠. 일부다처제는 예나 지금이나 만악의 근원이네요
@@pele2434 딴지를 걸자면 일부다처제는 남자들 좋으라고 생겼닥보다는 오히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법이에요. 만악의 근원이 아니라요.
전쟁과 사냥이 있던 시절에는 남성 사망률이 너무 높아 남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야 결혼 안 하고 여자가 혼자 살아도 되지만 이 시대에 여인이 혼인을 못한다는 건 들짐승에 먹혀 죽거나 동네 남자들에게 끌려가 윤간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어요. 짐승을 잡아 먹어야 하는데 여자가 사냥을 할 수도 없고, 농경 시대 도래 이후에도 힘쓰는 일은 남자 없이는 못하고 여자는 보조하는 일 정도밖에는 못하고요.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부다처제가 생겨났고 여러 여인 거느릴 수 있는 남자는 재력과 권력을 지닌 남자가 된 거죠. 지금은 막장으로 보이는 형사취수제나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여인을 모두 승계하는 제도도 그래서 생겨난 거에요. 이 시대에 여인에게 남자 없이 살으라는 건,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궁녀들도 직접적인 승은을 입은 것은 아니어도 왕의 여인으로 모두 간주된 걸로 생각해 볼 때 남자가 있기에 살 수 있었던 거죠. 조선은 재혼 금지였다고는 하는데 그건 법도 따지는 양반가에서나 그런 거고 실제 백성들은 재혼을 많이 한 것으로 여기고 있어요. 남자들도 이 시대엔 평균 수명이 짧아 부인이랑 사별한 경우도 많고 여자 없이 살기도 힘들고, 여자들은 더더욱 남자 없이 살지는 못하고 하니...
@@winni6520 여성의 재혼 이야기는 결국 남자 없이는 못 사니 사별한 여성들도 다시 남자를 찾아 살았다는 의미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삼국 시대에는 기록이 자세히 전하지 않아 세세히는 알 수 없으나 이 시대에도 일부다처제는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일부다처제를 시행해도 여러 여인 거느릴 수 있는 남자는 왕과 왕족, 귀족층에 국한되는 문제였고요.
@@winni6520 조선은 일부일처제입니다 첩이 법적 범위에 들어왔다 정도죠
고려가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원세조 쿠빌라이가 고려와 혼인동맹을 맺은 것은 고려에게는 천운과 같은 것이었습니다.당시 몽골군의 학살이 엄청났고 당시 없어진 민족도 꽤 있고 오늘날 역사기록에만 남아있는 민족도 있어요.중국도 인구 1억중 5천만이상이 학살당했는데 칭기즈칸은 중국인을 모조리 죽이고 목장을 만들자고 고집했는데 신하들 가운데 말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도중에 관뒀다 합니다.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정말 큰일날 뻔한 일이었지요.오고타이와 수부타이의 유럽원정중 황제가 죽는 바람에 이들이 권력투쟁에 참가하기위해 원정을 중단했는데 유럽인들은 몽골군이 유럽인을 모두 죽이지않을까 무서워하고 있었다고합니다.그 이야기는 유럽인들사이에 지금도 전해옵니다.그 때 전유럽이 목장이 될 뻔 했다고.이에 비하면 고려는 거의 천국수준이었다고 보면 됩니다.몽골의 유일한 부마국이 되었던 덕분에.몽골황실은 타민족과 결혼을 금했지만 유일하게 고려인들과는 결혼을 했더군요.
고려 태자가 몽골에게 항복할때 에릭베케에게 가지않고 대도에 있는 쿠빌라이를 찾아가 투항하게되죠.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여리나 되는 나라다. 당태종의 100만대군도 꺾지못했는데 나에게 항복하는것은 하늘의 뜻이다”라며 고려를 높이샀습니다. 덕분에 몽골에게 저항한 대부분의 나라가 멸문지족을 당할때 고려만이 의관과 풍습을 유지하는 사면을 받게됩니다. 이 약속(세조구제)로 인해 고려는 멸망당하지 않았으며 부마국으로서 원나라에서 한족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죠. 고려에게 행한 일이 몽골에게 있어서 얼마나 특이한 일인지 ‘너희에게 행한 일이 얼마나 특별한것인지 아느냐’고 묻기도 했고 본인의 약속에 대해 ‘스스로 믿어 의심치 마라’며 굳게 확인시켜주기도 했다네요.
아깝다 그때 중국놈들을 모조리 없앨수있었는데
그건 겉 이유고 단지 권력투쟁중이라 정통성에서 딸리는 쿠빌라이가 고려를 치켜세워주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인거죠 시기가 아주 좋았던것
@@아픈허리 정작 진짜 계승의지를 밝힌 직계후예인 요나라 금나라한테는 개빡세게 했으면서
그때 중국인 몰살 되었느면 세상이 더 좋아졌겠죠?
오 고려 이야기도 너무 재미나네요~~항상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복 받으실거예요~~
그녀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며 무례하고 난폭한 면이 있었지만 정치적 감각도 살짝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후에 왕비다운 면모를 보여준 걸 보면요..오늘도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우리는단일민족이아니네요
@@여최은영-x8v 걸러 올라가면 다 섞였죠
@@여최은영-x8v 저도 잘은 모르지만 혈통을 놓고 본다면 AndrewYang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민족도 다 섞여있는 게 맞는 거 같고요..동일한 언어와 역사 문화를 공유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단일민족이라고 정의를 내려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여최은영-x8v 유전자가 몽골이랑 많이 섞였는데 그걸로 따지면 안섞인 나라가 없음ㅡㅡㅋㅋ
부인 복국공주를 때려죽인 충숙왕도 있고 아버지의 왕비 경화공주, 수비를 겁탈한 충혜왕도 있습니다. 둘다 몽골에 의해 폐위된 적이 있습니다. 고려 왕조는 지금의 관점으로 보아도 패륜, 막장극이네요.
참고로 충선왕은 원나라 랭킹6위였다고 합니다.
외증조 할아버지가 칭기스칸 칸이니까요..
외조부가 쿠빌라이 칸이니 진짜 직계죠 당연히
1:48 고려는 이후 대외적인 황제국에서 대내적인 외왕내제의 국가를 칭해
안으로는 황제라는 호칭을 통하여 사용했거나
왕의 호칭을 쓰되 폐하 짐 태자 등의 제국 예법을 따랐습니다
와 윾머 본인이네
@@peridot507 아니라고 씨발
근데 몽고 황녀가 고려왕보다 위임 때리면 맞아야지
고려국왕은
원 황위계승으로는 원 황자들중 적장자와 맞먹고
국가 행사에서의 서열로는 초고위 관직자들과 대등하고
정부에서는 태자와 동등한 서열임
그것도 제국대장공주 덕분이죠.
제국대장공주가 원 황제 쿠빌라이의 막내딸이라 원 황제 사위 자격으로 충렬왕이 높았고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인 충선왕도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라 서열 높았던 겁니다.
@@스즈-v4h 그게 다 원종 덕분임 일단 항복대상으로 쿠빌라이칸을 선택했고 두번째론 제국대장공주도 고려로 시집가기 싫고 쿠빌라이칸도 자기딸을 고려로 시집보내는게 싫었는데 원종의 엄청난 로비로 결국 혼인이 성사됨
"제국대장공주"에서 제국(齊國)은 공주의 봉호(封號), 즉 책봉명이고 대장공주(大長公主)는 왕의 어머니 혹은 이모에게 주어지는 명칭입니다. 아마 충선왕때 추존된 시호나 존호인 것 같습니다. 사실 몽골의 여인들이 고려에와서 힘들어했지만, 고려에 우호적이었다고 합니다. 덕녕공주와 노국공주도 고려인을 사랑한 몽골인이라 합니다. 고려를 압박한 몽골의 남성들과는 달리 고려를 품어준 몽골의 여인들이 아닌가 합니다.
사후에조카인 성종테무르가
안평공주로 이후 다른조카인 무종이
대장공주(왕의 고모)로추존함
고려자체로는 원성왕후였고
충선왕이 그래서 원황조 계승순위에 있었죠
거기다 원황위다툼에 직접 개입해서
원의 엄청난 실권자가 되죠
그래서 고려에 오는거 별로 안좋아했음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채널는 10만 넘어 100만 가즈아~!!
고려가 엄청난 저항을 해서 부마국이 된 쿠빌라이가 나이차도 많은데 시집 보냈으니 뭐
꽃같이귀한 공주를 20살도 넘게많은 늙은 남자에게 시집보내다니
칭키즈 칸이 증조 할아버지라니..ㄷ대단하다
그러니 대한의 고려 충렬왕이 23살이나 어린 칭키즈칸의 증손녀에게 찍소리도 못하며 살았지.
조선시대애는 폐비 윤씨가 성종 싸대기를 때렸는대 재국공주는 충렬왕을 지팡이로 때렸내요 원나라 사람이라 화내지도 못하고 폐비하지도 못하고 그래도 나아져서 다행이내요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폐비 윤씨가 명나라 공주였다면 그런 기행을 벌였어도 폐비시키지 못하고 조선 왕실에서 어떻게든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겁니다.
다만 무인정권으로 인해 왕권이 미약했던 고려랑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던 조선이랑은 상황이 다르긴 하죠. 무엇보다 명나라 입장에서도 몽골 항쟁 같은 조선과의 전쟁이 있던 것도 아니고, 이미 대국으로 자신들을 섬기고 있는 조선을 굳이 침략해서 전쟁을 벌일 필요도 없고 귀한 자신의 딸들을 변방국에 시집 보내 고생 시키며 부마국으로 삼을 필요도 없었던 거죠.
만약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략했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드네요. ㅋㅋ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가기까지 했음에도 그들에게 청나라 황실 여인과의 혼인을 강요하지는 않았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으론 원나라 시절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지만 별 재미를 못 봐 실효성이 없다고 생각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또 아무리 약소국이라도 왕실에 시집 보내려면 방계일지라도 황족 여인은 적어도 보내야 하는데 조선에 시집 가고 싶어하는 황족 여인도 없어서 황족들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선발해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던 것 같고요.
@@꽃말-y6l 명나라 사신 황엄이 왔을때 한 신하가 새자(양녕대군)를 명나라 황녀랑 결혼시키면 좋지 않갰냐는 재안을 했습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태종 이방원이 황엄한태 말했고 황엄은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황엄이 다시 사신으로 왔을때 새자와 황녀의 혼인애 대해서 얘기 안한걸 보면 황재한태 말했는대 황재가 새자와 황녀가 결혼하는걸 안좋개 생각한거 같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괜한 소리를 해서 나라의 위신이 우습개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대 태종 이방원이 다시 생각해보니 새자를 황녀와 결혼시키는개 좋지않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며느리랑 말이 안통할 거고 친딸이 아닐수도 있으니 말이죠 실재로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충목왕 충정왕은 어려서 아내가 없으니 재외) 황재의 딸은 재국대장공주 뿐이었으니 친딸이어도 문재인개 명나라를 등애 업고 건방지개 굴면 재어할수 없죠 기철처럼 오빠들이 조선으로 와서 벼슬을 하고 여동생을 등애 업고 온갖 만행을 저질러도 재어할수 없죠 태종 이방원은 나중애 딴소리 못하개 새자를 김한로의 딸한태 장가를 보냈습니다
@@정재웅-b8u 머라는건 아닌데 왜 모든 단어를 ㅔ가아닌ㅐ로쓰세요?
윤씨가 성종 얼굴에 상처를 내었다는 것은 야사의 기록입니다. 드라마에서 자주 나와 이를 진실로 아는 분이 많습니다. 윤씨는 중전으로서 체통이 없는 짓을 하여 폐위된 것입니다.
@@고양이대마왕님만세 그렇개 쓰는개 좋아서요
그러면 그 뒤로 왕위를 이어 받은 사람들은 고려사람이라기보단 원나라 사람이네요 계속 원나라와 혼인하여 피가 섞였으니
반은 고려사람이고 반은 원나라 사람이죠
반은 고려사람이고 반은 원나라 사람이었어도 그 자식이 또 원나라 사람과 결혼했으니 원나라 핏줄 비율이 더 늘어가서 혈통으로는 원나라 사람에 가까워졌겠네요
원나라가 나라가 참 크고 전성기 때는 몽골 땅에서 아성을 떨치기는 했지만 국가 자체가 일찍 망해요. 100년도 못 가고 망하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이가 안 좋아서인지 당시 높은 영유아 사망률 때문인지 원나라 출신 여인들 소생 중 성인이 된 왕도 생각보다 별로 없어요. 한데 한참 때는 몽골 피가 진한 고려 왕이 나타나기는 하죠.
한데 문제는 혈통도 혈통이지만 죄다 아주 어릴 때부터 원나라에 볼모&교육을 위해 가 있었고 당시 국력이 원나라와 고려가 비교도 안 되게 크다 보니 고려인이라는 의식보다는 자신을 원나라 황족으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거죠. 오늘날에도 미국이나 캐나다에는 이민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 많고, 특히 아예 연고가 없던 사람들보다 조기 유학이나 주재원 자녀로 미국이나 캐나다에 있었던 사람들은 안 돌아오는 경향이 강하잖아요. 그리고 1.5세대들도 한국인이라는 의식이 희미해지는데 2세, 3세로 가면 겉만 동양인이고 속은 완전 미국인이 되죠. 심지어 "충"자 돌림 왕들은 황족으로 기득권 대우까지 받을 수 있었으니 약소국의 왕보다는 원나라의 황족으로 있고 싶어했던 것도 "개인"으로 놓고보면 이해는 갑니다.
충렬왕은 혈통은 고려인이었습니다. 원종과 순경태후 사이의 맏이였어요. 문제는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서 자란 것도 아닌데도 원나라 물을 먹더니 영상에서 보시듯 몽골식 변발에 몽골식 의상, 심지어 이걸 신하들에게 강요까지 할 정도로 본인을 원나라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영상에서 잠깐 이야기하는 충선왕이 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의 아들입니다. 1/2이네요. 어릴 때 이미 원나라에 보내졌죠. 거기다 이 사람이 오늘날처럼 화상 회의나 인터넷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원나라에 머물며 원격 통치를 했던 것으로 유명한 그 사람입니다-_-;;; 오늘날의 학자들은 충선왕은 고려어를 구사하지도 못했고 본인을 고려인이라고 생각치도 않았을 거라 추정하고 있죠.
그 다음 왕이 충숙왕인데 이 사람은 할아버지(충렬왕)가 고려인인 것 빼면 사실상 몽골인입니다. 할머니(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 공주, 아버지가 그 사이에 태어난 혼혈, 어머니가 황족 출신은 아니지만 몽골인 출신 후궁인 의비.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의외로 자기 아버지보다도 고려인이라는 의식이 있었고 어떻게든 원나라 간섭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습니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기력했지만요. 다만 충숙왕의 원나라 출신 부인들은 아이를 못 낳았거나 낳았어도 요절해서 이후 즉위하는 그의 아들들, 충혜왕이랑 공민왕은 어머니가 고려인입니다. 그러니 다시 고려의 피가 진해짐.
막장 충혜왕의 아들은 원나라 황족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충목왕이고... 충목왕 요절 후 뒤를 이은 이복 동생 충정왕은 충혜왕이 고려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충정왕이 너무 어려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폐위되고 옹립된 숙부 공민왕도 어머니가 고려 여인입니다. 공민왕 이후 충자 돌림이 아닌 시호가 붙은 것은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서 그렇습니다. 공민왕은 원나라 황족 여인인 노국대장공주랑 정략결혼했죠.
한데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인지 신돈의 아들인지 설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어머니가 고려인이고 창왕도 우왕과 고려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마지막 왕 공양왕도 그냥 고려 혈통의 고려 왕족이었죠.
동영상에 나오는 충렬왕 아들인 충선왕은 완전 몽고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자기자신도 원나라 사람이라고 칭하고 다녔습니다. 16세 이후 원나라로 넘어간 뒤로 고려로 돌아오지 않았고 원나라에서 교지로만 고려를 다스리는 그 유명한 교지통치를 하게 됩니다. 고려로 가라는 명이 있어도 끝까지 거부합니다. 원황실내에서는 나름 서열이 높아서 심양(요동)왕과 고려왕이라는 두개의 왕작을 받았지만 후에 티벳까지 유배가서 죽습니다.
@@꽃말-y6l 우왕에 대해서는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입니다. 다만 학계에서 간간이 나오는 설은 엄마가 반야냐 궁인 한씨냐 정도의 논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윗쪽 땅좀 큰나라는
별로 변함이 없어 느자구없는 것은
변치않는군 음~~~~
재밌게 보겠습니다~
강종 고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썸네일보고 노국대장공주인줄 신의 드라마 자료화면이네요
English subtitles please..
충렬왕이 최악의 왕이었죠.
진짜 최악의 왕은 충혜왕이죠. 역사 모르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연산군보다도 더한 희대의 폭군이자 막장이었습니다. 충혜왕이 죽었을 때 나라가 다시 살아날 거라고 백성들이 기뻐서 울었다죠;;;
@@꽃말-y6l 맞습니다 사실 연산군은 신하들과. 트러불에 문제가 있어서 이지 나쁜 왕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해됩니다~~
유익한 채널입니다.
책보다 이런 영상이 훨 공부가 됩니다.^^
감사해요.
이거 뭔가 기황후 시대 배경같은데,..?
기황후때는 원나라 국력이 다해가던 시기였음 원나라 마지막 황제 왕비 기황후
고려의 "충" 들어가는 왕들은 모두 원나라 공주들과 결혼했으면 근친상간인 셈인가요?????
왕조국가는 혈족혼이흔했음.
유럽왕실도 빅토리아여왕후손끼리
결혼했음다 얼마전 서거한 영국의
필립공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7촌임
이전 고려왕들이 부계 족내혼으로 왕씨 종친 중에서 성만 바꿔(가끔은 성도 그대로 유지해) 결혼했다면 충선왕 이후 고려왕들은 모계 족내혼을 해서 외가 쪽이라 성씨가 다르니 족외혼이긴 하지만 사실상 이쪽도 근친혼이긴 합니다.
쿠빌라이는 툴루이의 차남 아닌가요? 장남 몽케 차남쿠빌라이 삼남 훌라구 4남 아리커부케
빙고!
왜 몽골공주가 최악의 왕비인지 이해가 안감.
애초에 당시 고려 왕 자체가 하나같이 노답이었는데.
(원나라 공주 강간한 왕도 있었을 정도... 미친거 아닌가ㄷㄷㄷ)
그나마 개념커플이던 공민왕과 노국공주도 공주 사망 이후 멘탈 나간 공민왕이 자폭하면서 고려왕조 = 개노답 이 된거잖아.
일단 권위가 남편인 왕보다높음
오늘날전해지는고려사는
조선시대기록임
(그전기록은 이성계가없앴음)
조선은 유교의나라
왕보다 권위높은왕비가
곱게보였을까요?
더구나 제국공주경우는
쿠빌라이의 친딸.
당시막강하던 몽고의 직계황녀인데
(계국공주부터는방계 종실일뿐
엄밀히는 황제의 직계황녀아님)
나이차감안하면
남편인충렬왕과 자주충돌이
있었을것이고(자존심강했다고함)
여필종부 외치던 조선입장에선
안좋게 보이는건당연
좋게보는게이상한거지
쿠빌라이 외손자인 충선왕
일화만보더라도
아버지인충렬왕보다
지위가높으니 왕권두고다투는데
원나라라 그런지 기황후 장면이 많이 들어가있네요 ㅎㅎ
기황후가 아니라 왕은 사랑한다 입니다
@@여의군 기황후도 있어요
@@여의군 기황후 맞아여..
@@몸커지고싶다 기황후 장면이 어디 나오는지 잘 모르겠네요
@@여의군 그건 찾아보세요
나 어제 제국대장공주 책(why)읽었었는데 거기선 이미지 엄첨 좋았음
Bgm좀 알려주세요..!
맞어도 싸다 더 맞어야지
오마이걸의 아린 같아
쌍화점에 나오는 고려왕과 그 부인이야기인가욧!?
쌍화점은 공민왕과 노국공주고 동영상은 충렬왕과 재국공주입니다
@@정재웅-b8u 송지효 역할은 노국공주는 아니고 노국공주 사후 왕비가 된 여인이 모티브라고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쌍화점의 모티브가 공민왕인 것은 맞고요.
노국대장공주와 혼인 중에는 공민왕은 명석하고 동성애에 빠지지도 않았었죠. 그런데 노국대장공주가 산고로 사망하자 막장으로 치달아 버린 거죠. 남색에 빠지고요. 쌍화점의 건룡위가 공민왕의 자제위를 모티브로 한 거. 이것도 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이 만든 거죠. 그리고 그 자제위랑 자신의 부인들이 관계를 갖도록 강요했고요;;;
@@꽃말-y6l 자제위를 시켜 공민왕비를 강간하게 한 것은 조선왕조의 왜곡이라 여겨집니다. 아마 자제위와 공민왕비 중 한 명이 바람이 난 것을 그리 왜곡했다 여겨집니다
공민왕의 동성애도 그런 식으로 왜곡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도형-x9x 하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긴 해요. 위에 우왕의 출생에 대해 쓰신 댓글 보고 찾아보니 말씀하시듯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설은 우왕 재위 시기엔 나타나지도 않다가 나이 어린 창왕이 즉위한 후 나타나기 시작하는 기록이라네요.
현대 학자들은 말씀하시듯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는 데 회의적이고 이런 설이 나올 정도로 당시 고려 왕권이 얼마나 미약했는지, 민심을 잃었었는지, 그리고 이후 이성계 일파가 어떻게든 고려 왕조를 깎아내리려고 했는지에 대한 증거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꽃말-y6l 자기 아들 진시황재를 임신한 아내를 장양왕애개 바친 여불위처럼 신돈도 자기 아들을 임신한 반야를 공민왕한태 바쳤을수도 있죠 하지만 우왕 신돈 자식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지죠
본처 쫒아내고, 본처 자리에 앉아도 조강지처가 아닌 이상, 첩 맞죠.. 아무리 지위로 힘으로 밀어붙이더라도...... 후궁 딸이라고했으니 서녀, 첩 컴플렉스있었을지도...... 아무리 대국의 공주이고 권력이있대도...
다 떠나서 이역만리로 시집 왔는데 남편만 날 위해주고 아껴주었더라면...
그런 생각안했을듯요..
골목대장공주
원나라 일진 대장 공주
충렬왕이 최악임
충혜왕이 더 최악임
@@정재웅-b8u 인정 타의추종을불허하죠
증조 할애비가 테무친인데 변경의 고려추장국 대장놈 지팡이로 때린게 뭐 어때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증조할아버지가 칭기즈칸인 건 ㄹㅇ 개부러워 미치겠네
정화공주가 제국제국동주의 딸입니까ㅡ
영상 내용이 엉망이네
요즘으로 따지면, 중국 한족 부잣집 딸이 한국에 시집 온건데... 외로웠겠네.
🇲🇳 몽골입니다 중국 아니고요
@@YoTuul 답답함. 자꾸 원나라 몽골을 차이나라고 동북공정에 일조하는 인간들 있어서.
@@용가리-x3l중국이 맞아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지
힘없으면 찌그러지는건 지금도 마찬가지....미국이 탄저균을 대충들여와 가지고 놀아도 되는.... 부마국같은 그때와 다르지 않은 처지...
안으로는 토착 친일독재족이 분탕질하고..비슷하다
중국 우한시에서 들여온 코로나19도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거 왜 이야기 안하세요?
여개또추
제발좀 일본만욕하지말고 대한민국 부동산 사들이는 중국이 더나쁘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의적은 중국이다
니가 중국사람 아니면 중국도 욕해봐
일본은 망해야하는거 맞고
중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되고
네다짱? 센족이
세계인 머리털수염 길어지면 중간등수 한국이 세계통일 세계황제국가 됩니다♡♡
일본 왕실은 한국혈족이 ? 한국 왕실은 중국혈족?
중국이 아니라 몽골..
원나라를 중국이라 인정하게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고려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수작에 더 쉽게 넘어갈거예요.
원 나라는 몽골의 역사로 봐야 합니다.
중국 역사는 이민족의 역사입니다 원나라 청나라 모두 한족이 아닌 다른민족의 지배를받은 중국역사입니다 즉 몽고족 만주족요
조선족은 끄지고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