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나 그 이전 시대나 국민의 평균 수명이 짧은 것은 맞지만 그건 사실 통계의 착시 때문이에요. 그 당시는 태어나 1살도 못 살고 죽는 영아 사망률이 워낙 높아 그것이 전체 평균을 확 낮춰 그렇지 일단 죽지 않고 잘 버텨 넘기면 그때부턴 현재 우리와 별반 차이 없이 천수 누리며 잘 살다 갑니다.
@@baejoonhan 맞는 말씀이신데 지금 만큼은 못살았죠. 당시 평민이든 천민이든 고희 그러니깐 만70이 되면 나라에서 정3품 벼슬을 명예직으로 주고 녹봉도 일정 부분 챙겨줄 정도로 기념해준 걸 보면 70이라는 나이가 엄청 고령으로 간주되는 것 같습니다. 정3품관이 영감이라는 호칭을 받으니 고희를 넘긴 할아버지들을 영감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영감이라는 표현이 지금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을 부르는 걸로 굳어진 것 같습니다.
@@이마니-h9i 아들 박취문의 경우 1644년 12월10일 울산에서 출발하는데 출발 다음날부터 좌수댁 노비와 동침을 한다. 이어 12월15일 노비 분이와 동침하고 12월16일에는 술집 여인 춘일이와 동침한다. 17일에도 술집 여자 옥춘이와 자고 12월19일에도 여자 노비와 잔 것 같고, 22일 술집 여인 향환과 자고, 26일 삼척 동문밖 술집 여인 예현과 동침하고 12월30일에는 강릉 기생 연향과 동침하며, 다음해 1월2일에는 강릉 명기 건리개와 동침한다.
하나 둘 돌아가는 노복들도 역시나 최대 80일 이상 가야할텐데, 1. 그 여비는 또 어찌 해결하는지, 2. 예전에 산적, 호랑이 같은거 만나면 돈, 목숨이 위태로웠을텐데 그런 불상사는 없었는지, 3. 돌아가는 길에 노복이 도망가는 일은 없었는지... 4. 마지막까지 함께한 노복은 총 왕복 180일을 길 위에서 보내야하는건데, 180일 뒤에 집으로 돌아간 노비가 있긴 한건지... 궁금하네요.
1. 그거 다 고려해서짐 꾸려가지고 온거겠지. 2. 호랑이랑 도적은 산 넘을때 무리지어서 통과한다고 했음. 3. 조선시대 제법 사는 양반가 노복이면 현재 중견기업 회사원이랑 다를게 없음. 추노들은 주인들이 제대로 안맥이고 졸라 핍박할때나 벌어지는 일이지, 실제론 노비되면 먹고살 걱정도 줄어들고 흉년와도 비교적 안전해서 나쁘지 않았음. 4. 당연히 돌아갔겠지. 못돌아간애들도 당연히 있었을 테고
@@박세정-k8c 효종때는 왕이 앞장서서 되도않는 북벌을 한다고 사기를 치고 자빠졌는데 분위기 잡는답시고 무과 급제자의 수를 1만명까지 늘리는 바람에 이때 합격자의 대부분은 평생 보직을 받지못하고 늙어 죽는 바람에 무과 급제증명서를 변소휴지 내지는 집안의 장식품으로 활용했습니다
거리도 거리지만 저때는 한반도에 늑대, 표범, 곰, 호랑이 등 맹수들이 우글우글거릴때... 흐미... 호랑이가 문을 뚫고 들어가 일가족을 몰살시킨 기록도 있음 ㄷㄷㄷ 지금이야 가뿐한 마음으로 산책 빨러 다니지만 저때는 먼길을 나설 때 유서를 쓰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함 ㅜ
"이땅에 그 많던 말과 마차들이 다 어디갔나? " 고려멸망,이조선개국 3년후 평양과 한양을 방문한 송나라 학자가 한 말입니다. "이땅에 그 많던 말과 마차들이 다 어디갔나? " 송사 궁월록에 기록된 학자 평한림의 이조선 방문기입니다. 단 30년도 아니고 단 3년만에 사라진 말과 마차들이 거리에 붐비던 고려시대 도성의 모습을 연상할수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평한림은 맨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모든 상인들이 개나리봇짐을 등매고 걸어서만 조선팔도를 다닌다 왜 말이나 마차를 안타고다니냐고 물어보니 나라에서 금지시켰다한다. 말을 타면 4일만에 다녀오던 길을 조선인들은 걸어서3개월동안 다닌다. 이건 아니지 않나"? " 집집마다 말이 있던 고려는 사라지고 마차는 가마로,말대신 도보시대가 되었다 아 ~ 비오듯하던 고려의 말문화가 사라졌다~며 아쉬워하던 대목.... 고려인이나 조선인이 쓴 방문기가 아니라 외국인 방문자가 쓴 기록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있는 고려와 조선은 완전히 달랐다는 역사적 증거가 됩니다. 국내 유일의 바른역사 연구회 참역사 펌: 참
존경하는 kbs실험실님 안녕하세요~저는 40년째 국내외 역사를 연구하고있으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동북공정이란 단어를 언급한 사람입니다.그만큼 국내사학계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한사람이죠.동북공정이란 중화사상 즉,중국중심의 역사개념이고 우리역사에서의 동북공정 핵심은,중국이나 일본이 아니라,놀랍게도 바로 조선왕조라는 팩트입니다.아시겠지만 조선왕조는 중국지방왕조로 오백년 중국식으로 통치했고 대표적 제도는 식민제도로써 상놈신분제도(노예,노비,백정,관기제도/전국민96%)특히 관기제도는 세금으로 모든고위공직자위한 음주섹스제도)등이죠.이조선오백년으로 인해 현재 우리는 무의식적인 중국인 최면상태입니다.예를들어 국사의 기본이 중국이죠.중국글(조선한자)이 아니면 전혀 인정못합니다.(예를들어 독일고고학논문(가야이주론),일본서기(천황은 고려계),원,청기록은 물론 터키교과서(중2 같은 몽골계열),프랑스,네덜란드(고려제국기),심지어 교황청(만주의고려영역)등의 모든 국제적 기록까지도 절대 인정안합니다.인정안한다기보다 못한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리라 보입니다만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식도 아닌 완전히 중국계이씨왕족만을위한 소중화지상낙원을 만들어 오백년넘게 통치한 사실은 분명합니다. 대표적으로 현재 나라이름(대한韓민국)국기(태극기/주역그림 복제판)뿐아니라,현재 국민거의 중국한자석자이름을 남이 지어주는 중국식민픙숩으로 내공된 내면 지식(뇌해킹된상태)라고 말하기에 충분 합니다.조선때 고려지명(예:고려지명 완산주(중국지명 전주로 개명)외,강릉 양평등등)까지 중국지명으로 바꾼상태입니다.(서울,동울(강릉)등) 모두가 남이 써논거(주로 이조선때 지들중심으로 멋대로 그럴듯하게 마구조작해쓴내용)을 마치 종교계 성경암기하듯 외우고 시험보고 가짜논문 학위로 졸업하는 현실(전국 대졸자99%가짜학위)생각성자체를 말살된채 정작,진실은모른채 옛것이 무조건 진실,정의인양 인식하고 암기한 지식(죽은지식)한번도 그 진위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볼수없도록,검증자체가 죄악시된 뇌색용 교육으로 현재 사학자중 단 한명도 검정못한채 지식이라며 떠드는 세습상태 한국사학계 모습,풍습...결론은 우리국민은 천민,죄인(상놈)무뇌이고 오직 이세종,이순신이 위대하다는 식의 비상식적인 상태 바로,철저히 노예화된 뇌상태 아닐까요? 아무튼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생활하고있는 상태의 진행중인 현실 즉,전국민 무의석적인 반중국인상태인 내면적 실체을 깊이 생각해주시길바랍니다.조선왕조 즉 중국계 이왕조는 고려말 원나라에서 망명,귀화한 오리지널 화하족 이자춘(전주이씨 시조)가족이고 자식대 신분세탁후 쿠데타로 왕족된 사실,이후 오백년간 중국식 식민통치로 지네 이씨들만 급번식(현재 650만/이완용계)한,전관예우=황금만능/남욕남탓/내로남불 정신병 퍠헤 현실이라는 점 알려드립니다. 우리는 본래 고려인이고 고려가 바로 우리자신이란점! 님이 중국계이씨가 아니시라면 절대 이조선왕조를 칭찬,찬양,우상하시면 절대 안되겠습니다.만약,그런다면 이씨들 개돼지가 되기때문입니다.또하나,고려사상으로는,당신이 이세종 이순신보다 더 훌륭한 분이십니다.그러나 조선사상으로는 우리는 천하고 상놈이기에.절대로 이세종이나 이순신이 될수없죠.좀더 우리역사의 진실을 알고싶다면 참역사 카페 논문방을 참고 바랍니다.항상,건강하시기바랍니다~펌:참
@@vksvlfls7555 답답하시네요 평현림일기는 송나라 출신으로 명대사람입니다. 갱상도나 전라도 출신 사람이란 뜻입니다.님의 생각과같이 현재 韓국사개념은 암기만으로 생각되기때문에 질문과같이 내용에 생각성이 없죠. 최면현상이란 겁니다...ㅠㅠ..그래서 가짜논문99% 백년째 무노벨상 교육계 현실인거죠~
근데 중간에 돌아가는 노비는 어떻게 잘 돌아갔는지 궁금... 주인이 집 돌아가는 길이라는 서찰을 쥐어주긴 했겠지만, 노비 거느리고 가는 양반도 대접 제대로 받지 못한 시대에 노비들은 집 가는 동안 어디서 숙식을 해결하고 했을지... 지금으로 치면 말하는 소나 말이 집 돌아가는 길인데 중간에 누가 잡아가 자기 노비로 쓰진 않았을지 궁금 ?
사기꾼 국사학자들의 농간에 전국민이 놀아나는데 박취문이 쓴 부북일기(이책의 번역본이 전국 방방곡곡 어지간한 도서관에 있음)에 보면 부임길에 3일에 한번꼴로 방방곡곡에 있는 유명한 기생들과 빠구리를 실컷하고 부임후에는 관찰사로부터 직방기생이라는 근무기간동안 나라에서 빠구리용으로 정해주는 기생을 배정받아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군복무를 합니다 심지어 중간에 근무지가 바뀌면서 새로 배정된 직방기생은 남편이 있는 몸이라 수청을 거부하자 말발이 안서서 열받은 관찰사가 그 기생의 어머니와 오빠를 불러서 공갈용으로 곤장 한대씩을 때리자 놀란 기생이 하는수없이 빠구리를 허용했다는 일기의 기록도 있습니다
이 영상에서 주의 할 점이 있다. 저 당시 관아가 숙식 제공에 어려움을 격을 만하다는 것이다. 부방 길에 오른 박계숙이 집에서 출발 한 시기가 1605년 10월 17일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1598년 12월 16일에 끝났다. 즉, 임진왜란이 끝난지 겨우 6년 10개월 된 시점이다. 임진왜란이 얼마나 큰 전쟁이고 조선의 물적 인적 자원이 모두 소진된 전쟁임을 생각하면, 저 시기 상황이 꼭 조선 전체의 상황으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를 한 가지만 보고 판단하면 오판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가지를 살펴 보고 확인과 검증을 거쳐야 한다. 이 영상은 임진왜란 직후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한 가지 더 추가하려고 수정을 했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장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그래서, 세금을 적게 걷고 대신 직접적인 노동력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이 농업 중심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율이 매우 낮은 국가이고 대부분의 경우 노역으로 대체한다는 점을 생각 할 필요도 있다. 쉬운 예로 조선의 세율은 10%대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를 점령하고 함경도민이 스스로 항복하자 기분이 좋아서 세율을 낮춰 준 게 50%였다. 전국시대 일본에서 세율 50%는 보기도 힘든 수준의 낮은 세율이였다. 심한 경우 70%는 그냥 넘었다. 즉, 당신이 농부이면 농사 지은 쌀의 70%를 정부가 가져간다. 조선은 적게 걷는 대신 국민들 스스로가 대부분 자율적으로 노역을 하고 정부의 의무에 사비를 쓰도록 하는 방식 이였다. 조선 말기 이런 방식이 부패와 연관되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만, 조선은 500년이나 지속된 나라다. 조선 말기 부패에 얼룩진 기간보다 정상적인 행정을 시행했던 시기가 더 길다. 당장 우리가 흔히 조선의 전성기라 부르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 시대만 해도 근200년이다. (1398년~1592년)
조선시대건 그 이전이건 남자들에게 지조란 없지요. 차라리 요즘 남자들이 예전과 달리 그런쪽으로 억압?을 받는달까. . .ㅋㅋ. 지가 내키는대로 힘이 닿는 범위내에서 지맘에 드는 여자를 얼마든지 취할 수 있으니까요. . . 능력만 되면. 굳이 그런 기회를 마다할리가 ㅋㅋ 그리고 그런 여자들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봐야 지자식으로 인정하건 말건 그건 지맘이니 (종모법이란게 있으니 지~인짜 얼마나 편리한 법입니까? 요새같이 피임방법이 발달한것도 아니고 임신중절도 맘대로 못해서 생기면 그냥 낳는거 외엔 방법이 없던 시절인데 자식때문에 골치아플일 없이 맘껏 즐길수 있게 만든 아주 신박한 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걱정할 것도 없고. 본인 맘에 흡족한 좋은 혈통의 정식 자식이야 본부인이 알아서 죽자사자 키울테니
조선은 농경국가라서 근본적으로 농업에만 치중을 하고 상공업을 천시하고 제한했기 때문에 후기로 갈수록 국부가 줄어들어 재정이 취약해졌습니다 때문에 관료들의 녹봉도 매우 박했고 정승급들도 매월 쌀 몇말 콩 몇말 정도의 녹봉만 받았는데 노비를 수백명씩 거느린 집안에서 이정도라면 몇사람의 식량으로 밖에 충당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조선의 관료는 녹봉으로 사는게 아니라 집안의 경제력으로 호구를 했습니다 대부분 관료들은 집안에 크고 작은 농장과 상당수의 노비들을 거느리는데 아무리 큰집안이라해도 집안일을 하는 노비는 40인 정도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외거노비라 하여 자유롭게 생업을 하게하고 대신 매년 신공이라 하여 베 두필(현재가치로 약8백만원)정도의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한 양반이 20명의 외거노비를 거느린다해도 꽤 짭짤한 신공수입을 받는거지요 대부분의 양반관료들이 그런식으로 먹고 살았고 오히려 안동대 사학과 정진영 교수의 저서 조선시대 향촌사회사에 실린 경남 산청 양반 김인섭의 일기를 보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에서 몇년간 근무하고 참판(차관급)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봉급이 부족해서 이기간동안 집안의 재물을 갖다 쓰는 바람에 집안의 부가 오히려 상당히 축났다고 쓰고 있습니다 벼슬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손해를 봤다는 것이지요 돈이 많은 양반들은 벼슬은 그냥 명예직으로만 생각했던게 사실입니다
@@비오리-f9v 조선시대에도 지도는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길목마다 이정표가 있고 주막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도보여행자들이라서 오며가며 만나는 여행자들끼리 서로 길을 물어가며 여행을 했습니다 특히 나라에서 운영하는 원이라는 주막이 있었습니다 안양의 인덕원 경기도의 장호원 충남의 조치원 등이 바로 그런 원이 있던 곳으로 그대로 지명이 된것입니다 그리고 출장가는 관원들에게는 중간에 말을 빌려주고 갈아타는 역이 있었습니다
사기꾼 국사학자들의 농간에 전국민이 놀아나는데 조선은 문무반을 불문하고 양반들에게는 지상천국 같은 나라였습니다 박취문이 쓴 부북일기(이책의 번역본이 전국 방방곡곡 어지간한 도서관에 있음)에 보면 부임길에 3일에 한번꼴로 방방곡곡에 있는 유명한 기생들과 빠구리를 실컷하고 부임후에는 관찰사로부터 직방기생이라는 근무기간동안 나라에서 빠구리용으로 정해주는 기생을 배정받아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군복무를 합니다 심지어 중간에 근무지가 바뀌면서 새로 배정된 직방기생은 남편이 있는 몸이라 수청을 거부하자 말발이 안서서 열받은 관찰사가 그 기생의 어머니와 오빠를 불러서 공갈용으로 곤장 한대씩을 때리자 놀란 기생이 하는수없이 빠구리를 허용했다는 일기의 기록도 있습니다
@@조금더김숙희-t7y 아니지요 집안의 노비들도 회령에 있는 주인을 모시러 오고가는 동안에는(약160일) 집안의 온갖 힘든일에서 해방되는 시간이고 여행도 하면서 산천도 구경하며 유유자적 하는거죠 물론 아마도 주인의 짐을 바리바리 싸서 지게로 져야하니까 그것은 좀 괴로웠겠지만
저때 부임지까지 노복들을 많이 데리고 가는것은 부임지까지 가는 주인의 기본적인 짐에다가 저때만 해도 화폐경제가 발전하지 않아 물물교환 경제였기 때문에 밥값 여관비 등을 모두 실물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주로 식량 아니면 무명 비단 등) 그짐이 엄청났을 것입니다 박취문의 부북일기에 보면 회령으로 가는길에 강릉에서 예쁜 기생과 빠구리를 하고 그 사흘후 또다른 기생과 빠구리를 했는데 앞서 빠구리한 기생이 매독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뒤 빠구리 기생이 자기에게 전염될것을 우려해 엉엉 대성통곡을 하자 박취문이 미안한 마음에 약값으로 하라며 무명 두필을 주자 기생이 사양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게 물물교환 경제여서 화폐대용으로 지불할 물품이 엄청났겠지만 그걸 노비들이 나눠서 지게에 지고 주인을 따라갔다가 부임지가 가까워 올수록 점점 짐의 양이 줄어들자 노비들을 차례대로 돌려보낸것입니다
근데 조선시대가 암울한거임요 고려시대까치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주로 말이나 마차로 이동을 했어요 군 보급품도 더 빨리 수송할수있었구요 실제로 고려시대때는 대군을 동원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금나라 성종이 쳐들어왔을때 강조가 30만 대군을 일으켜서 맞서 싸웠고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을 할때도 19만 이였음요 윤관이 여진정벌 할때도 17만 대군이였구요 반면 조선은 폐쇠적인 전략으로 적이 침략을 하지 못하게 멀쩡한 길을 파괴하고 이동을 불편하게 만들었죠 오히려 이게 악재가 되어서 보급이동이 어려워 지고 마차와 말보다 가마 나 그냥 걷는걸로 대체 되었죠ㅋㅋ 따라서 군보급도 늦어지고 대군을 일으킬수도 없어서 조선시대에 5만 이상 거병한 경우가 거의 없음요ㅋㅋ
@김현중김현중 모르시는건 님이구요ㅋㅋ 고려는 말이 중앙집권왕조 이지 실상은 봉건국가 나 마찬가지고 호족들이 사병을 가지고 있었어요ㅋㅋ 대호족들은 수천의 사병을 소유하고 있었고 보통 수백의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전국 호족들의 사병을 모으면 5만~8만 사이였어요ㅋㅋㅋㅋ 거기다가 수도를 방위하는 군사가 3만이였구요ㅋㅋㅋㅋ 국경요새를 지키는 군사도 1~2만정도였어요 이것만 합쳐도 10만이 넘구요 강조가 30만 대군을 동원할때 백성들을 동원했죠ㅎㅎ 사병+정규군+동원된 백성 조합이였니다ㅋㅋ 여튼 군사적으로는 조선보다 월등했습니다ㅋㅋ
@김현중김현중 님이야 말로 제말을 이해를 못하는군요ㅋㅋ 누가 봉건제가 중앙집권제보다 발단한 체계라고 했습니까? 봉건제가 덜 발달된건 당연한거 아닌가?ㅋㅋ 고대 중국왕조도 다 봉건제였는데ㅋㅋ 주나라 와 한나라가 봉건제 였던거 누가 모름?? 내말의 요지는 군사적 의미로 봤을때는 암울했던 조선시대 보다 낫다고 한거지 누가 봉건제가 중앙집권제보다 발달한 체계라고 했음?ㅋㅋ 그리고 헌종 이야기 했는데 님 말대로 도망다니다가 다시 권력 회복 할수있었던 계기가 먼줄암?? 바로 본인의 직속영지 였던 나주의 세력 때문임ㅋㅋㅋ 그건 알고 있남?ㅋㅋㅋ 그리고 세조때 100만?ㅋㅋㅋ 세조 때 조사한 실제 기록이 있고 전국팔도의 군사가 19만이라고 기재 되어있었는데 먼 개소리임?? 이것도 실제 병력이 아니라 병적에 이름 올라와있는 백성들을 포함한 숫자임ㅋㅋ 당시의 실제 기록이 적혀있는 서책이 있는데 무슨 개소리를 함???ㅋㅋㅋ 님아 책 좀 보고 이상한 유튜브 나 넷상 글보고 현혹 되지 마시고 저보고 공부 못한 티 낸다고 했는데 댁보다 학벌 좋다고 확신함ㅋㅋㅋ 아! 그리고 실업계 이야기 하는데 나 한국학교 안다녔음ㅋㅋ 호주에서 살다가 대학교는 영국대학 다녔음ㅋㅋ
노비들 그냥 두기만 해도 알아서 지들끼리 번식해서 불어나는구만 굳이 왜 파냐 ㅋㅋㅋㅋㅋ 그리고 씹유교카르텔 조선인데 가족 생이별시키게 노비 함부로 팔겠냐 게다가 상업 천시하는 양반들이 무관되어서 상대하는게 오랑캐 여진족인데 잘도 여진족 상대로 밀무역하겠다 ㅋㅋㅋㅋㅋㅋ 애당초 지주층이라 노비들 대리고 가면서 먹일 재력 충분히 되니까 양반하는거지 그리고 함경도면 노비 거느릴만한 양반층도 거의 없고 인구밀도도 적은데 노비를 열명 이상 씩이나 누구한테 어디서 사서 데려올수가 있냐
@@oyc2220 모르면 아닥하고 무식하면 입을 닫아라 노비자체가 양반들의 훌륭한 재테크수단이었고 조선제일의 노비재테크 전문가가 퇴계이황으로 집안에 최소한 기록상으로도 500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다 조선양반들은 인정이 너무나 많아서 노비를 수시로 사고 팔았는데 당시 노비의 거래가격은 말 한마리값보다 낮았다고 한다 그리고 10명이나 되는 노비 일가족을 각각 따로 떼어 파는 바람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이산가족이 된 노비가족들도 수두룩했다 노비가 늙어 병들고 노동력이 상실되면 그냥 산채로 버려져서 아사시킨 경우가 많았지요
@@이통영-y9v 배웠다고 자부하는 분이 자기보다 모자라 보이는 사람한테 아가리 다물라니 참으로 격조 있네요 선생님^^ 잘 모르거나 질문하면 아가리 다물라고 하는 선생이랑 부모한테 배웠나보죠? 노비 증식과 매매가 조선 시대 양반들 재태크 수단인건 맞는데 이동하는 중에 짐꾼을, 그것도 시장바닥도 아니고 양반들 간의 사적 거래로 매매되던 노비를 그렇게 손쉽게 팔아버린다는게 말이 안된다는거지. 글의 맥락이란 말 모르세요? 노비 막 대하는거야 법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유교적 윤리관에서 볼때 절대 바람직한 일은 아닐텐데? 이황은 노비들이랑 같이 자기 세금은 자기가 지고 날랐고 가작지나 작개지 방치해도 사적으로 벌하나 주지 않고, 부인이 장애인이어도 다 이해하고 하나하나 다 챙겨주던 사람인데 과연 아무렇지 않게 이산가족 양산했을까? 지금으로 치면 애완동물 새끼 낳으면 분양이란 이름으로 이산가족 만들고 심지어는 버려도 불법이 아니기에 매년 버려지는 동물만 몇만마리지만 도덕적으론 손가락질받는거랑 같은거아님? 내가 위에 사람 비꼰거야 완전 소설을 진짜마냥 써놨으니 그런거지, 내 위에 댓글 단 사람한테는 아가리 다물라고 안하냐 노친네야? 그렇게 아는거 많으면 다 다물라고 해보지 그러냐 배운값 나이값 대접받고 싶으면 좀 그 값을 언행이든 행동이든 실천해라
18분이 정말 짧게 느껴졌다... 진짜 여타 유튜브 채널이랑은 몰입도가 장난아니게 다르네 .ㅋㅋ 재밌다
저 시대 평균 수명도 짧은데 울산 회령 왕복하면 반년이네 ㅎㄷㄷ
조선시대나 그 이전 시대나 국민의 평균 수명이 짧은 것은 맞지만 그건 사실 통계의 착시 때문이에요. 그 당시는 태어나 1살도 못 살고 죽는 영아 사망률이 워낙 높아 그것이 전체 평균을 확 낮춰 그렇지 일단 죽지 않고 잘 버텨 넘기면 그때부턴 현재 우리와 별반 차이 없이 천수 누리며 잘 살다 갑니다.
@@baejoonhan 맞는 말씀이신데 지금 만큼은 못살았죠. 당시 평민이든 천민이든 고희 그러니깐 만70이 되면 나라에서 정3품 벼슬을 명예직으로 주고 녹봉도 일정 부분 챙겨줄 정도로 기념해준 걸 보면 70이라는 나이가 엄청 고령으로 간주되는 것 같습니다. 정3품관이 영감이라는 호칭을 받으니 고희를 넘긴 할아버지들을 영감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영감이라는 표현이 지금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을 부르는 걸로 굳어진 것 같습니다.
@@user_sdkdbijqlketg 솔직히 60세만 되어도 장수한다라고 했음. 환갑을 괜히 지낸게 아님
그래도 환갑잔치 유래 같은거 보면 60살 정도되면 오래살은거 같에요 저 당시에도 인간의 한계수명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지만 그래두 의학의 발전 차이가 크니까요
지금처럼 오래사는건 당연히 가능한데 평균은 떨어질수밖에 없겠죠 의학기술이 떨어지니
부북일기...부방길에 어디서 자고 어느 여인하고 잤는지까지 노골적으로 적혀있는 자료라 들었습니다. 조선시대는 기록의 시대인듯 하네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왘ㅋㅋㅋㅋㅋㅋㅋ 떡친거까지 ㅋㅋ
안마방 조선시대 버전 이런거도 있으려나
맞아요 조선시대 기록 문서화의나라
그래서 기록이보존이잘되어
역사를 알게되죠
@@햅폭탄과유도탕 ㅇㅇ 관기랑 하고 그랬다함
기록보면 가는 길에 겁나게 하고 댕김 특히 아들이 레전드ㅋㅋㅋㅋ
@@햅폭탄과유도탕 이순신 장군님도 본인 일기에 기생이랑 잠자리 한거 기록해놓고 그러시지 않았나?
설명 끝나면 방청객들 '아~~' 소리 나오는거 진짜 오랫만에 듣네 ㅋㅋㅋㅋ
부임길에 들르는 부방지마다
관기들 대리고 잔 이야기도 저 기록에 많이 있습니다.
나중에 저집 아들도 부방을 하는데
잠자리한 날짜와 상대 여자 이름까지 다 있어요
조선 무관의 부임길과 성생활에 관한 기록
희안하네 정말인가요 거짓이면 삭제 하세요
@@이마니-h9i 뭔 거짓타령.. 무식하면 가만히있으면 중간은감
@@이마니-h9i 아들 박취문의 경우 1644년 12월10일 울산에서 출발하는데 출발 다음날부터 좌수댁 노비와 동침을 한다. 이어 12월15일 노비 분이와 동침하고 12월16일에는 술집 여인 춘일이와 동침한다. 17일에도 술집 여자 옥춘이와 자고 12월19일에도 여자 노비와 잔 것 같고, 22일 술집 여인 향환과 자고, 26일 삼척 동문밖 술집 여인 예현과 동침하고 12월30일에는 강릉 기생 연향과 동침하며, 다음해 1월2일에는 강릉 명기 건리개와 동침한다.
@@여비-o5n 개부럽노
@@여비-o5n 매일같이 한거보면 여비가 꽤 많은듯
아주 유익한 컨텐츠네요
과거를 알수 있는 귀중한자료
감사히 잘봅니다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하나 둘 돌아가는 노복들도 역시나 최대 80일 이상 가야할텐데,
1. 그 여비는 또 어찌 해결하는지,
2. 예전에 산적, 호랑이 같은거 만나면 돈, 목숨이 위태로웠을텐데 그런 불상사는 없었는지,
3. 돌아가는 길에 노복이 도망가는 일은 없었는지...
4. 마지막까지 함께한 노복은 총 왕복 180일을 길 위에서 보내야하는건데, 180일 뒤에 집으로 돌아간 노비가 있긴 한건지... 궁금하네요.
노복이 제일 불상하네요
이거 나만 궁금했던게 아니였네 ㅋㅋㅋ 아니 그냥 데려간 김에 그쪽에서 같이 살게해야지 기껏 함경도까지 왔더니 짐줄었다고 그냥 돌아가라고?멘탈 나갔을듯요
노복이 튀면 어디로 튑니까 ㅋㅋ 주인님 집이 젤 편하죠. 직장인디 ㅋㅋ
1. 그거 다 고려해서짐 꾸려가지고 온거겠지.
2. 호랑이랑 도적은 산 넘을때 무리지어서 통과한다고 했음.
3. 조선시대 제법 사는 양반가 노복이면 현재 중견기업 회사원이랑 다를게 없음. 추노들은 주인들이 제대로 안맥이고 졸라 핍박할때나 벌어지는 일이지, 실제론 노비되면 먹고살 걱정도 줄어들고 흉년와도 비교적 안전해서 나쁘지 않았음.
4. 당연히 돌아갔겠지. 못돌아간애들도 당연히 있었을 테고
그럼 다시 부방이 끝나고 복귀할 때는 노복이 귀향길 모시러 다시 가야하지 않나요?
그 복귀날은 어떻게 알고 잘 맞춰서 복무지까지 갔을까요?
말로만듣던 삼천리행군이네ㄷㄷ
그것도 완전군장
술 먹고 갔지요
코가 삐뚤어지게 술마시고 직방기생이라고 나라에서 배정해주는 군복무기간 동안 빠구리용 기생을 데리고 부임길에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하느라 임지에 도착할 무렵이면 거의 진이 다 빠져 있었지요
@@IandeSongfransisco 술먹고 완전군장하고 삼천리행군하면
\사람 죽어요
@@이거보면행운대박 말 타고 감. 혼가 가는 것 아님 종놈 여럿 데려감. 구글 검색하면 부북일기 한글로 번역된 것 나옴.
@@second.. 길 잘뚫려있고 여객 시설이 잘 되어있어야 그것도 소풍이지
저시대에 좋지도 않은 길에 식당도 딱히 없는 지역에서 무슨 소풍? 먼길 가는것 자체가 생존 게임임
백두대간길을 옛날엔 어떻게 걸어 갔을까
등산하는 사람 입장에서 대단하심
문경에서 선비들이 한양까지 34일을
걸어서 과거 시험 봤다고 합니다
프리랜서 네비게이션 기술자이셨던 김정호 선생은 무려 두번이나 백두산을 오르심.
길잘못들면 시험못보는거네 개빡시다
다음날 호랑이똥으로 나오겠다
술 먹고 갔제
드라마못봄?
가다가 주막에서 국밥한그릇에 막걸리 말아먹고 때론 숙박하며 갔지~
진짜 저때 사람들은 실전 생존러들이네…
요즘처럼 최신 장비와 의류가 있는것도 아니고
산속에는 맹수들과 산적이 우글댔을텐데 참 대단하다
뭐 지금도 소말리아나 카르텔이 우글거리는 도시에도 사람은 살아감
산넘을때는 여러사람들이 같이가지
@@권학수-w2n 여러사람가도 호랑이 만나면 도망갈듯
무장한 노비선에서 호랑이 정리됨
@@yeezy-k6o무장해도 못이김 막상 호랑이 만나면 도망감
중간 중간에 아~~ 아~~소리가
참 웃기네요!
ㅋㅋㅋ
그래서 임진왜란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무과시험 급제하자마자 변방에 해당되는 함경도지방의 녹둔도라는 곳에서 부임받아 군생활을 했군요
첫 군생활은 권지 훈련원봉사로 훈련원에서 일하다가 두번째 이르러 동구비보 권관(분대장ㅡ하사)로 갑니다.
함경도 삼수군에 있습니다.
급제하고 몇년걸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는
@@선비-j4b 권관은 오늘날의 소위에 해당하는 계급입니다
@@박세정-k8c 효종때는 왕이 앞장서서 되도않는 북벌을 한다고 사기를 치고 자빠졌는데 분위기 잡는답시고 무과 급제자의 수를 1만명까지 늘리는 바람에 이때 합격자의 대부분은 평생 보직을 받지못하고 늙어 죽는 바람에 무과 급제증명서를 변소휴지 내지는 집안의 장식품으로 활용했습니다
공부가 되는 프로그램. 감사합니다 !
45
김인호 교수님ㅋㅋㅋㅋ와 16년전이라니 색다르네요
국군 수송 사령부가 저래서 고마운거구나.... 옛날 같았으면 열흘 정도 걸렸을 대전에서 최전방 철원까지 가는길을 고작 반나절 만에 특급열차로 데려다주었으니....
철도가 국방의 중핵이 된 근대 이후로 철도의 물자 및 인원수송이 중요해졌고 그래서 TMO가 존재하는건데 얼마전에 그것도 모르고 왜 민간인한텐 서비스 제공 안해주냐 난리친 여대생이 잠깐 이슈가 된적이 있었지
@@dubu999 그 여대생 개새끼네요 ㅋㅋㅋ
그런애들 군대 다녀와봐야 정신차리는데
에휴 진짜 님 말 들으니까 여자도 군대 의무로 다녀와야한다는 말이 너무 공감
@@dubu999 현역시절 제 밑에 있었더라면 음... 여기까지 할께요 화가납니다. 정말.
@@IHK-jq2mb 그 년 순천향대학교랍니다. 1호선 라인에 위치한 꼴통 대학교들 중에서 겨우 학교 구실하는 마지노선과도 같죠. 그 곳은 학교 행사를 체육학과가 맡을 정도로 폭압적이라고 합니다. 순천향대는 의대 빼면 사실 병신대.
@@이종석-v6j 나때는 경기도로 핵겨 못가는 애덜 1차 유배지 ㅡ.ㅡ
와 잼나네요
참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았는데 요새는 유투브에서만 볼수있다니..
임진왜란 후 병자호란 전이네요..가장 힘든시기인데..무관으로 고생 많았겠네요
중간에 돌려보낸 노비들은 무사히 울산까지 갈 수 있을까? 가지고 가던 쌀도 죄다 주막에 줘 버리고 막걸리 바꿔 먹는데 무슨 수로 울산까지 가나? 혼자 가다가 호랑이 밥되기 딱 좋겠네
나도 그생각
가는동안 먹고자고 어케함?
노비는 재산이라서 손실방지를 위해 노잣돈을 따로 빼놓지 않았을까?
고딩때 여름여행가 놀다가 귀가노자 없어 인근 농촌 찾아 이틀 일해 노자돈 벌어 귀가했는데, 노비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노비들이 전부 지리에 뛰어난것도 아니고 길 잃어버리고 집에 못돌아간 사람도 많을듯..
@@바캉스-o3y 당연히 그런일도있겠지만 저렇게 먼 길을 가는데 아무 노비나 대리고 가지는 않았겠져......
많은 공부와 탐문 그리고 기타 여러 트레이닝이 있었을겁니다.
참 격세지감 입니다. 지금이 너무 행복하죠.
소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확실히 조선시대 양반들은 기록 덕후들 같아요 뭐든지 전부 기록하고 책으로 만들어서 남긴 기록물이 엄청나게 많아서 웬만한 양반들 치고 개인적으로 만든 책이 없으면 제대로된 양반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정도죠
백성은 우수한데 국정은 엉망이네요
@@진짜보수 국정이 엉망이었으면 애초에 나라가 500년동안 지속될 수가 없죠
@@hhhurgh9973 북한도 맘만 먹으면 500년 갈듯. 우민화정책과 자비없는 연좌제까지 적용하면 정권유지는 가능하지 시민들만 고통받을뿐
저때는 어떻게 길을 찾아서 가지?
지도도 네비도 나침판도 없을텐데
난 집 앞만 나가도 동서남북 구분이 안가는데,,,
말이 80일이지 80일동안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사회자 신불출 나왔네 ㅋㅋ
지금은 절반밖게 갈수가없지
휴전선막혀서 중공넘들만아니였다면 저길 그대로 제연가능한데
중국에 사신단으로가면 몇배나 멀었을텐데. 대단하네요.
술 먹는 이야기 안 빠짐 저거 읽어 봤음
엉덩이 욕창 났을듯
@@IandeSongfransisco 읽기는 퍽도 ㅋㅋ
유튜브에서 방송봤겠지 ㅋㅋㅋ
조선때도 숙식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한 무관들이 고생 많네요 에휴! 우리 최전방 군인들 잘 해 줍시다
늘 감사합니다........
거리도 거리지만 저때는 한반도에 늑대, 표범, 곰, 호랑이 등 맹수들이 우글우글거릴때... 흐미...
호랑이가 문을 뚫고 들어가 일가족을 몰살시킨 기록도 있음 ㄷㄷㄷ
지금이야 가뿐한 마음으로 산책 빨러 다니지만 저때는 먼길을 나설 때 유서를 쓰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함 ㅜ
노복들 완전군장 1300km 미친ㅋㅋㅋㅋㅋㅋ 차라리 죽여라....
노복들은 심지어 다시 1,300km 걸어서 집에 복귀해야함ㅠㅠ
@@pepe9479자동 다이어트네요 ㅋㅋㅋ
가다 호랑이나 산적만나면...
그것도 짚신 신고ㅋㅋㅋ 눈물나네
사람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운동으로 다져진 사람들과 ... 글방 쇤님들 체력은 달라요~
이때에도 브이로그 장난 없었네
군대있을때 썻던 일기랑 사진 몇장 보안검사라고 다 뺏겼다.
정작 기밀사항은 장교들이 줄줄 흘리고 다면서, 사병들한테만 FM보안,.
이걸 보고 그게 떠오른다고? ㅋㅋㅋ참..ㅋㅋㅋ
09군번인데 ㄹㅇ ㅋㅋㅋ 후문 경계 근무 서고 있는데 치킨 배달 아저씨가 연대 훈련일정 다 알고 있음 ㅋㅋㅋ
간부들이 다 알려줘서 ㅅㅂ ㅋㅋㅋㅋㅋ
간부란 것들도 개녀ㅁ없는것들 처ㄴ지지
전쟁나면 간부들 때문에 다털림 ㄹㅇ
쑈지 병사들이 기밀알아봐야 뭘알겠어 훈련때 카톡쓰는 놈들이 무슨 ㅋㅋㅋㅋ
비행기타고 가면 1시간이야 75일 ㅋㅋ 기술이좋긴 좋구나
지금은 제주도 가는 비행기
타는 기분일텐데
전투기로는 20분이면 가능
임란 끝난지 6년 밖에 안되던 해였지 않음? 나라 복구하고 정치권도 수습하던 때여서 복지에 크게 신경 못썼을 듯 한데..
ㄹㅇ말만 복지고 안지켜진경우가 대부분이었을듯
"이땅에 그 많던 말과 마차들이 다 어디갔나? "
고려멸망,이조선개국 3년후 평양과 한양을 방문한 송나라 학자가 한 말입니다.
"이땅에 그 많던 말과 마차들이 다 어디갔나? "
송사 궁월록에 기록된 학자 평한림의 이조선 방문기입니다.
단 30년도 아니고 단 3년만에 사라진 말과 마차들이 거리에 붐비던
고려시대 도성의 모습을 연상할수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평한림은 맨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모든 상인들이 개나리봇짐을 등매고 걸어서만 조선팔도를 다닌다
왜 말이나 마차를 안타고다니냐고 물어보니 나라에서 금지시켰다한다.
말을 타면 4일만에 다녀오던 길을 조선인들은 걸어서3개월동안 다닌다.
이건 아니지 않나"? "
집집마다 말이 있던 고려는 사라지고
마차는 가마로,말대신 도보시대가 되었다
아 ~ 비오듯하던 고려의 말문화가 사라졌다~며 아쉬워하던 대목....
고려인이나 조선인이 쓴 방문기가 아니라 외국인 방문자가 쓴 기록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있는 고려와 조선은 완전히 달랐다는 역사적 증거가 됩니다.
국내 유일의 바른역사 연구회 참역사 펌: 참
존경하는 kbs실험실님 안녕하세요~저는 40년째 국내외 역사를 연구하고있으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동북공정이란 단어를 언급한 사람입니다.그만큼 국내사학계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한사람이죠.동북공정이란 중화사상 즉,중국중심의 역사개념이고 우리역사에서의 동북공정 핵심은,중국이나 일본이 아니라,놀랍게도 바로 조선왕조라는 팩트입니다.아시겠지만 조선왕조는 중국지방왕조로 오백년 중국식으로 통치했고 대표적 제도는 식민제도로써 상놈신분제도(노예,노비,백정,관기제도/전국민96%)특히 관기제도는 세금으로 모든고위공직자위한 음주섹스제도)등이죠.이조선오백년으로 인해 현재 우리는 무의식적인 중국인 최면상태입니다.예를들어 국사의 기본이 중국이죠.중국글(조선한자)이 아니면 전혀 인정못합니다.(예를들어 독일고고학논문(가야이주론),일본서기(천황은 고려계),원,청기록은 물론 터키교과서(중2 같은 몽골계열),프랑스,네덜란드(고려제국기),심지어 교황청(만주의고려영역)등의 모든 국제적 기록까지도 절대 인정안합니다.인정안한다기보다 못한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리라 보입니다만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식도 아닌 완전히 중국계이씨왕족만을위한 소중화지상낙원을 만들어 오백년넘게 통치한 사실은 분명합니다. 대표적으로 현재 나라이름(대한韓민국)국기(태극기/주역그림 복제판)뿐아니라,현재 국민거의 중국한자석자이름을 남이 지어주는 중국식민픙숩으로 내공된 내면 지식(뇌해킹된상태)라고 말하기에 충분 합니다.조선때 고려지명(예:고려지명 완산주(중국지명 전주로 개명)외,강릉 양평등등)까지 중국지명으로 바꾼상태입니다.(서울,동울(강릉)등)
모두가 남이 써논거(주로 이조선때 지들중심으로 멋대로 그럴듯하게 마구조작해쓴내용)을 마치 종교계 성경암기하듯 외우고 시험보고 가짜논문 학위로 졸업하는 현실(전국 대졸자99%가짜학위)생각성자체를 말살된채 정작,진실은모른채 옛것이 무조건 진실,정의인양 인식하고 암기한 지식(죽은지식)한번도 그 진위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볼수없도록,검증자체가 죄악시된 뇌색용 교육으로 현재 사학자중 단 한명도 검정못한채 지식이라며 떠드는 세습상태 한국사학계 모습,풍습...결론은 우리국민은 천민,죄인(상놈)무뇌이고 오직 이세종,이순신이 위대하다는 식의 비상식적인 상태 바로,철저히 노예화된 뇌상태 아닐까요?
아무튼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생활하고있는 상태의 진행중인 현실 즉,전국민 무의석적인 반중국인상태인 내면적 실체을 깊이 생각해주시길바랍니다.조선왕조 즉 중국계 이왕조는 고려말 원나라에서 망명,귀화한 오리지널 화하족 이자춘(전주이씨 시조)가족이고 자식대 신분세탁후 쿠데타로 왕족된 사실,이후 오백년간 중국식 식민통치로 지네 이씨들만 급번식(현재 650만/이완용계)한,전관예우=황금만능/남욕남탓/내로남불 정신병 퍠헤 현실이라는 점 알려드립니다.
우리는 본래 고려인이고 고려가 바로 우리자신이란점! 님이 중국계이씨가 아니시라면 절대 이조선왕조를 칭찬,찬양,우상하시면 절대 안되겠습니다.만약,그런다면 이씨들 개돼지가 되기때문입니다.또하나,고려사상으로는,당신이 이세종 이순신보다 더 훌륭한 분이십니다.그러나 조선사상으로는 우리는 천하고 상놈이기에.절대로 이세종이나 이순신이 될수없죠.좀더 우리역사의 진실을 알고싶다면 참역사 카페 논문방을 참고 바랍니다.항상,건강하시기바랍니다~펌:참
@뺑덕어멈다롱 잘모르면서 반대위한 댓글같네요
아니라면
집에 자가용있나요?똑같은 필요와 관리 개념으로 보시면 됩니다.
조선개국했을땐 명때입니다. 송은 원한테 먹힌지 몇백년 지났구요. 원은 나중에 명한테 먹혔구요
@@vksvlfls7555 답답하시네요 평현림일기는 송나라 출신으로 명대사람입니다. 갱상도나 전라도 출신 사람이란 뜻입니다.님의 생각과같이 현재 韓국사개념은 암기만으로 생각되기때문에 질문과같이 내용에 생각성이 없죠. 최면현상이란 겁니다...ㅠㅠ..그래서 가짜논문99% 백년째 무노벨상 교육계 현실인거죠~
@@khankorea3938 이세종 ㅇㅈㄹ ㅋㅋ
근데 중간에 돌아가는 노비는 어떻게 잘 돌아갔는지 궁금... 주인이 집 돌아가는 길이라는 서찰을 쥐어주긴 했겠지만, 노비 거느리고 가는 양반도 대접 제대로 받지 못한 시대에 노비들은 집 가는 동안 어디서 숙식을 해결하고 했을지... 지금으로 치면 말하는 소나 말이 집 돌아가는 길인데 중간에 누가 잡아가 자기 노비로 쓰진 않았을지 궁금 ?
노비가 길을 갈때는 노비라고 얼굴에 써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모르는 사람들이 그사람이 노비인지 양민인지 어떻게 알고 잡아갑니까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하는군요
주인에게 되돌아가는 경비요소를 받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한번 왔던 길이니 안전한길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님말대로 누가 와서 소를 뺏어갈수도있겠죠 그런일은 그냥 어쩔수없는 시대였죠 그런건 재수없다고 생각했겠죠
그냥 데리고갈 여건이안되니 너비 한명 골라서 죽으라는거 아님?
소나 말은 중간에 다 팔아먹고 산적에 빼겼다고 구라친다 노비들이
진짜 조상님들은 대단한거 같습니다. 길도 안 좋았을텐데 짚신을 신고 거기다 짐까지 매고 먼길을 다녔으니 그 힘이 상상력을 넘겼을거라 생각되네요.
사기꾼 국사학자들의 농간에 전국민이 놀아나는데 박취문이 쓴 부북일기(이책의 번역본이 전국 방방곡곡 어지간한 도서관에 있음)에 보면 부임길에 3일에 한번꼴로 방방곡곡에 있는 유명한 기생들과 빠구리를 실컷하고 부임후에는 관찰사로부터 직방기생이라는 근무기간동안 나라에서 빠구리용으로 정해주는 기생을 배정받아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군복무를 합니다 심지어 중간에 근무지가 바뀌면서 새로 배정된 직방기생은 남편이 있는 몸이라 수청을 거부하자 말발이 안서서 열받은 관찰사가 그 기생의 어머니와 오빠를 불러서 공갈용으로 곤장 한대씩을 때리자 놀란 기생이 하는수없이 빠구리를 허용했다는 일기의 기록도 있습니다
@@이통영-y9v 맞죠 ㅋ 이게진실인데 ㅋ 멍청한 분들이 넘 많아요
@@이통영-y9v 지방에 일개무과급제자가 어찌 전국방방곡곡기생들과
빠구리를3일에한번꼴로
할수가있는지?
조선시대는 무과출신들은같은양반이라도 문과급제자들에
비해 대우가좋치않은걸로아는데...
그럼 이새끼들무과급제해서
오로시 빠구리만 하면서
살았구만 ㅋㅋ
문과급제자가 무과급제자를 아주무시했던 시대일텐데
선택여지가 없는 현실이니까,한국인의
강한 정신력으로 이겨 나가셨음이라
싶네요🇰🇷💙
그래서 춘향이가 변사또의 빠구리 수청을 거절하다가 몰매를 맞게된다는 ㅠ
돈 많은 무관들은 배 타고 강,연안으로 다녔습니다.
돈 써서 꿀보직으로 빠지고요
기생을 현지처로 고용하고 군부대 밖에서 살았죠
그건 돈이 많고 적고를떠나 스티브유 스타일인가 아닌가 차이 아님? 꿀보직으로 빠지는건?
@@망치가방 스티브유였으면 그냥 튀었겠지 꿀보직도 안하고 ㅋㅋㅋ
@@turksaie1550 청나라로 튀었겠으니 유쉥쥰
@@망치가방 징병노예가 아니라 직업군인 귀족들임. 양반이 문반에 더해서 무반을 가리키는 말인걸 보면 알수있듯이.
@@망치가방
저건 직업군인인 상급 무관들임.
과거를 거쳐 등용된 무관들이라 양반들이 대다수였음.
그래도 부방군관은 착한 케이스네요. 사정사정 하며 접대하고 자신이 직접 돈을 내면서까지 긴 거리를 가야 하는데 잘 챙겨주지도 않네요. 잘해줘야 합니다. 나중에 그 고을 부임되면 어쩔려고... 지금 군인들은 그때처럼아니겠지만 나라에서 잘 챙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요.
일단 군인이라고하면 유사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건데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무관이 고을 사또가 되지는 않죠.
우리 대한민국은 조선보다야 낫지 싶네요. 물론 앞으로도 더 잘해주길 바랍니다
@@MrSinusu 무관이 고을 사또 됩니다. 이순신 장군도 정읍현감 하심.
최고입니다!
이 영상에서 주의 할 점이 있다.
저 당시 관아가 숙식 제공에 어려움을 격을 만하다는 것이다.
부방 길에 오른 박계숙이 집에서 출발 한 시기가 1605년 10월 17일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1598년 12월 16일에 끝났다.
즉, 임진왜란이 끝난지 겨우 6년 10개월 된 시점이다.
임진왜란이 얼마나 큰 전쟁이고 조선의 물적 인적 자원이 모두 소진된 전쟁임을 생각하면, 저 시기 상황이 꼭 조선 전체의 상황으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를 한 가지만 보고 판단하면 오판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가지를 살펴 보고 확인과 검증을 거쳐야 한다.
이 영상은 임진왜란 직후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한 가지 더 추가하려고 수정을 했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장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그래서, 세금을 적게 걷고 대신 직접적인 노동력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이 농업 중심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율이 매우 낮은 국가이고 대부분의 경우 노역으로 대체한다는 점을 생각 할 필요도 있다.
쉬운 예로 조선의 세율은 10%대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를 점령하고 함경도민이 스스로 항복하자 기분이 좋아서 세율을 낮춰 준 게 50%였다.
전국시대 일본에서 세율 50%는 보기도 힘든 수준의 낮은 세율이였다.
심한 경우 70%는 그냥 넘었다.
즉, 당신이 농부이면 농사 지은 쌀의 70%를 정부가 가져간다.
조선은 적게 걷는 대신 국민들 스스로가 대부분 자율적으로 노역을 하고 정부의 의무에 사비를 쓰도록 하는 방식 이였다.
조선 말기 이런 방식이 부패와 연관되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만, 조선은 500년이나 지속된 나라다.
조선 말기 부패에 얼룩진 기간보다 정상적인 행정을 시행했던 시기가 더 길다. 당장 우리가 흔히 조선의 전성기라 부르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 시대만 해도 근200년이다. (1398년~1592년)
명목 세율이 낮은데 여러가지 잡다한게 많아서 ㅈ된거아님? 공납은 ㄹㅇ씨발이고 ㅋㅋㅋ
딱북조선이네 명목세금없이 징발
차라리 한놈(나라)에서 대놓고 다 해먹었음 큰 토목공사를 하던 강병을 육성하던 하지..
그놈의 모순된 성리학질서에 자잘한 비리가 더 생겨버린거 같은데..
조선시대 아전들이 정식 봉급을 받지 못하니 스스로 부패해서 백성들 등처먹었다하던데..
그건 공식적인 거구 지방 아전밑 사또가 온갖 핑계로 뜯어낸거 보면
우리도 70년대 까지만해도 남의 논(畓) 부쳐 먹을라면 소출의 50빠센트를 지주에게 줬어야 하는 지방도 있었다
0:27 시위를 당기는 손의 쥐는 법이 너무 고증 오류입니다 쥠손은 상삼지인데
너무 멋진 컨텐츠다...
12:42 와! 서울에서 회령까지 거리 봐라~~~ 우리나라도 꽤 길구나! 통일되면 외국처럼 오리엔트 특급 열차 만들어도 되겠다!
시가 참 멋있네요! 영상 감사히 잘 봤습니다
화면에 점 찍힌거 내 모니터에 생긴 불량화소인줄 알고 확인 해보신분 손!! 1:43 코부분에 엄청 잘 보임
나도 ;ㄷㄷㄷ
부산 울산 마산 장정들을 논산에 모아 훈련 시키고 최전방 배치 시킨거나 비슷한데...
저 옛날에는 지도도 정확하지 않은데 회령까지 걸어서 찾아 갔다는게 대단합니다.
방송에는 안 나오는데 칼과 활을 가지고 가면서 사냥도 해서 잡아 먹고 갔을수도 있겠내요
예전에는 길이 복잡하지 않고 마을도 많지 않아서 동서남북만 구분해도 지도랑 지나가는 사람들 한테 물어보는것만으로 찾아갈수 있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ㅎㅎ
병보다는 장교니까..
@@ezryder5150 저도 이 말이 맞다고봄 밤에는 깜깜해서 안보여도 낮에는 허허벌판이라 잘보일듯 아무리 산이 많아도 중앙아시아나 남아메리카처럼 높고 험난한 산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
그냥 길이 거의 정해져있었을듯.
호랑이 피하랴, 늑대 피하랴, 산적 피하랴, 풍토병 위험하랴 말타고 가도 종니 멀고 재수없음 걸어야하고 개고생길.. 그거 수발드는 노비는 더 개고생
@@user-mh2gh2feafd ㅂㅅ
사기꾼 국사학자들의 농간에 전국민이 놀아나는데 조선은 문무반을 불문하고 양반들에게는 지상천국 같은 나라였습니다 박취문이 쓴 부북일기(이책의 번역본이 전국 방방곡곡 어지간한 도서관에 있음)에 보면 부임길에 3일에 한번꼴로 방방곡곡에 있는 유명한 기생들과 빠구리를 실컷하고 부임후에는 함경도 병마절도사로부터 직방기생이라는 근무기간동안 나라에서 빠구리용으로 정해주는 기생을 배정받아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군복무를 합니다 심지어 중간에 근무지가 바뀌면서 새로 배정된 직방기생은 수절하는 과부의 몸이라 수청을 거부하자 말발이 안서서 열받은 절도사가 그 기생의 어머니와 오빠를 불러서 공갈용으로 곤장 한대씩을 때리자 놀란 기생이 하는수없이 빠구리를 허용했다는 일기의 기록도 있습니다
@@이통영-y9v 고구려,신라,백제 ,고려 역사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지만 조선은 극소수의 양반이 다수의 백성을 노비로 착취하면서 중국에 사대하면서 자기들 안위를 챙긴 쓰래기 역사임. 조선은 망해도 싼 나라임
@@jjc2873 조선왕조는 몽고족 후손 이성계가 고려를 쳐부수고 세운 나라입니다
변방길 올랐다가 호랑이 한테 물려죽은 사람 많습니다.
현재도 공뭔들 직급별로 대우가 다르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관직에 나가는 사람들은 기를 쓰고 높은 직급에 오르려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무과급제자들은 대우가좋치못했어요
문과급제한사대부만
위한나라였지요
5급부터 좋쵸
전세계 어느나라 어느회사나 다 그렇죠
16:55 무과 글씨 수준 ㄷㄷㄷ
양반걱정은 안되는데 노비걱정이되네요..400키로행군3박으로햇는데... ㅜㅜ
이순신 장군님도 함경도에서 전라도까지 근무를 하셨죠 굉장하신 분들이다 정말
확실히 무관에 대한 조선의 대우가 느껴지네.. 아니 나랏일한다고 몇달을 가는데.. 제대로된 보급도 안해주고ㅋㅋㅋ
정말 옜날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위해 목숨걸고 헌신하는 군인들에 대한 처우개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은 조선을 계승안했는데
@@딱뚝-g4r 옜날은 옜날이고 지금이 더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talih3610 옜날이 아니라 옛날임;;
옜 쉬프트 누르고 있지말라고 아오~~
@@딱뚝-g4r 사상이 불순한데?
확실히 유행을 안타는 사극장면과, 마지막 mc들의 현대모습을 보니, 옛스러운 느낌이 팍 드네..ㅋ
돌아가는 노복들은 뭐 먹엇나요?
예전엔 잼나면서 시청자들을 교육하는 프로그램들이 꽤나 있었네
알고리즘 타고와서 멍떄리고 보는데 볼만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13 근데 이런 종이쪼가리에 수기로 몇자 적어놓았다고 증명이 되는건데(직인도 있었겠지만)
충분히 위조 할만 한데 그런 짓 하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을까요
저당시 문서위조는 사형이였음
서울에서 목포까지 350키로 운전하는것도 지긋지긋한데...대단하다
🐎은 그렇다해도
걸어서 가는 노비들은 극한직업
걸어다녀보니..400km정도는 다닐만 합디다.
신발 밑창 다 나감^^
14:10 인문채널휴의 김인호 교수님 아니신가??
저땐 풍성하셨네요
@@ggdheud 너어는 진짜....
ㄷㄷㄷ
부방 여정길을 자세하고 상세히 기록한 책을통해 그시대를 생생히 보는듯 하다
13:13 신불출 동지!!
부북일기는 조선시대의 부방과 성생활에 대해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방송이라 부방만 소개가 되는군요. 부방길에 많은 여인들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내용도 기록이 되어있다네요.
조선시대건 그 이전이건 남자들에게 지조란 없지요. 차라리 요즘 남자들이 예전과 달리 그런쪽으로 억압?을 받는달까. . .ㅋㅋ.
지가 내키는대로 힘이 닿는 범위내에서 지맘에 드는 여자를 얼마든지 취할 수 있으니까요. . . 능력만 되면. 굳이 그런 기회를 마다할리가 ㅋㅋ 그리고 그런 여자들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봐야 지자식으로 인정하건 말건 그건 지맘이니 (종모법이란게 있으니 지~인짜 얼마나 편리한 법입니까? 요새같이 피임방법이 발달한것도 아니고 임신중절도 맘대로 못해서 생기면 그냥 낳는거 외엔 방법이 없던 시절인데 자식때문에 골치아플일 없이 맘껏 즐길수 있게 만든 아주 신박한 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걱정할 것도 없고. 본인 맘에 흡족한 좋은 혈통의 정식 자식이야 본부인이 알아서 죽자사자 키울테니
@@알서퍼 원래 남자란 그런거임. 어데 여자가 그것을 논하노 콱
@@알서퍼 종모법이 무슨뜻인가요?
@@백산-g3t 논하는게 뭔지나 알고 하는 소리임? 말하는거 보니 여럿 거느릴 능력도 안돼보이는데 ㅋㅋ
@@서승안-d1z 자식은 그 어미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 뭐 그런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어머니가 종이면 그자식은 신분이 종이지요. 좋은예가 홍길동이지요
전국 곳곳에 산적들이 깔려있고 산적보다 더 위험한 호랭이들도 천지에 깔려있던 조선에서 어떻게 저리 살았을지 정말 대단하다
호랭이 봤어요?
대단하지 못한 사람들은 저렇게 가는중에 실종됬겠지
술 먹고 갔제
여럿이 모이면 같이 산을 넘었다고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인데 ㅋㅋㅋㅋ
김인호 교수님은 16년이 지나도 하나도 안늙으셨네 ㅎㅎ
와 ㅋㅋ 진짜다
요즘 기준으로 생각하면...
현대인들의 걱정거리인 비만은 걱정이 없겠습니다.
70여일을 걸어서 가야하니...
배가 등허리에 달라 붙지 않았을까???
먹을것도 부족한 상황하에서 그 먼길을 가야 했으니..
이때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않아서
부산에서 한양갔다가 집에오면 애가하나씩생겨있지 이애가내애냐고하면
이이가정신이있는거야없는거야하면서
타박하고 또 한양갔다오면 애가하나씩생겨있어서
한번은 한양에안가고 부산남포동에숨어있다가
집에기습했더니 마누라 애인이5명이나됐는데
한양가면 2년만에집에오니까 그사이낳고낳고해서
배가불른지도 출산한지도몰랐던시대이다
13:45 어디서 많이 보던 교수님인데
예전 어지간히 큰 고을은 현제 소도시 군단위 도시가 많네....
개발하려고 하면 빈땅이 좋잖음.ㅋ 공주 이런 곳도 반대가 심해서 대전이 개발됨.ㅋ
울산으로 돌아가는 노복은 얼마주나요?
마차나 우차 같은 수레도 드물고 수레가 다닐 길도 없었던 조선.....어찌 이것이 나라인가?? 이때 서구는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아메리카는 서구의 식민지였고 동인도회사겉은 회사가 있었습니다.
시조 지으면서 나오는 OST먼가요?
진짜 .자동차는 문명의 최고 발명품중 하나인듯..
도로가 우선 아닐까용
@@산제성 맞음
@@산제성 그런 논리면 시멘트 나 아스팔트가 최고 발명임
@@산제성 고대 로마시대때도 마차전용 포장도로도 있었음.
도로만 깔렸어도 마차 탔을 듯. 한국은 신기하게 도로를 깔려고 하질 않았음.
9:55 안변이 현재는 강원도(이북지역)으로 원산 밑이네요
울산에서 회령이면 차라리 무역배 타고 가면 더 빠르지 않았을까??
지도에 보시다시피 길이 한정적이고 동해안 배도 존재 안했고 있었다고해도 배타고 내려서 육지로 이동할수 있는 길이 없었을것같네요
바다가 더 오래 걸릴듯
01:10 이 브금아시는분있나요? 진짜 알고싶은 브금인데...
부인이 엄청 좋아함 ㅋㅋ
엌!!ㅋㅋ
마님은 왜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는가
??
설명해주시는분 김인호 교수님이죠?
와 부임하러 가는것만으로도 지치겠다
강원도 산골만해도 추운데 함경도 끝자락이면 ㅋㅋ
배로 이동하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물길을 염두해두지 않은 바보스로운 생각이긴 한데..... 육지이동보다는 시간. 비용 측면에서 휠씬 낫을것 같은데 ......
9:32 이 좋은 영상에
묶다(x) -> 묵다(o)
초딩도 안 틀릴 걸 잘못 쓰셨네;;
문득 그시대의
함길도관찰사를
지내신 저희 백촌할아버지생각이남니다
변방까지 3천리길.
걸어서 한달은 걸렷겟죠..
중국땅 변방이니..
도진무와 관찰사.
이조판서와 한양방어사
도승지까지 지내시다
단종복위역모에
가담하셔
집안은 쑥밭이되고.
야밤에 어린애기업고
김제까지 도망간
종돌쇠의덕에
대가 끊기지않앗죠..
@@김구글-m3w
구질구질 집안얘기한거 그렇지 않아도 괜히 개소리 주절거렸네 했다 찾게 해줘서 고마워
충의공 할아버님 말씀이시군요. 호남쪽에도 종친분들 많이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충청도에 사는 28대손 입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함니다
저는 백촌의 26대손임니다.
저희손녀가
28대손이구요.ㅎ..
어릴때 족보만드시는
종친할아버님이 1년에
한번식오셔서 부모님과 애기하신걸
들엇구.저희형님과
부모님이 족보를
뒤적이며 사륙신애기와 한자로기록된 내용울
말슴하신게 생각남니다
그리고 운좋게 중1.어느봄날
부모님과 종친들 시제모신걸
같이 가보앗구
백촌의막내아드님.
할아버지의 묘소와
고색창연한 웅장한비석도 보앗음니다
그리고 90년대초
63빌딩서 근무시에
코앞애잇는 조그마한동산공원이
사륙신공원인걸알고
한번 찾아가봣엇고.
애석하게 4칠신으로
신위가 모셔져잇더군요..
죄송함니다
가문애기올려서.
욕하지마시고
지우새요.
설마 백촌의후손은
참고가되엇겟쥬 잉..
요즘은 유트브치면
상세하게 나나옴니다.
감사함니다.
한가지.ㅡ
임진난때 태안의의병장.
김후진장군은
백촌의 4세손이며
현직때 정3품어모장군이엿음니다. ㅎ
욕해도 괜챦아유..
틀딱
이거 초반에 나온 피아노곡 제목 아시는분???
궁금증요~~~~ 그렇게 먼길을 군생활 하러갔으면 가족이있는 집으로 월급같은거를 어떻게 보냈는지요? 요즘같이 온라인뱅킹이 있는것도 아니고.. 가족은 생활을 해랴하자나요...
조선은 농경국가라서 근본적으로 농업에만 치중을 하고 상공업을 천시하고 제한했기 때문에 후기로 갈수록 국부가 줄어들어 재정이 취약해졌습니다 때문에 관료들의 녹봉도 매우 박했고 정승급들도 매월 쌀 몇말 콩 몇말 정도의 녹봉만 받았는데 노비를 수백명씩 거느린 집안에서 이정도라면 몇사람의 식량으로 밖에 충당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조선의 관료는 녹봉으로 사는게 아니라 집안의 경제력으로 호구를 했습니다 대부분 관료들은 집안에 크고 작은 농장과 상당수의 노비들을 거느리는데 아무리 큰집안이라해도 집안일을 하는 노비는 40인 정도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외거노비라 하여 자유롭게 생업을 하게하고 대신 매년 신공이라 하여 베 두필(현재가치로 약8백만원)정도의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한 양반이 20명의 외거노비를 거느린다해도 꽤 짭짤한 신공수입을 받는거지요 대부분의 양반관료들이 그런식으로 먹고 살았고 오히려 안동대 사학과 정진영 교수의 저서 조선시대 향촌사회사에 실린 경남 산청 양반 김인섭의 일기를 보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에서 몇년간 근무하고 참판(차관급)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봉급이 부족해서 이기간동안 집안의 재물을 갖다 쓰는 바람에 집안의 부가 오히려 상당히 축났다고 쓰고 있습니다 벼슬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손해를 봤다는 것이지요 돈이 많은 양반들은 벼슬은 그냥 명예직으로만 생각했던게 사실입니다
군인 가족들 생계 책임지는 주민들이 따로 있었어요..
네비도 없이 우째 그먼길을 찾아같지
@@비오리-f9v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갑니다.
@@비오리-f9v 조선시대에도 지도는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길목마다 이정표가 있고 주막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도보여행자들이라서
오며가며 만나는 여행자들끼리 서로 길을 물어가며 여행을 했습니다
특히 나라에서 운영하는 원이라는 주막이 있었습니다 안양의 인덕원 경기도의 장호원 충남의 조치원 등이 바로 그런 원이 있던 곳으로 그대로 지명이 된것입니다
그리고 출장가는 관원들에게는 중간에 말을 빌려주고 갈아타는 역이 있었습니다
이런 좋은 프로가 있었군요. 그나저나 헬조선이네요.
사기꾼 국사학자들의 농간에 전국민이 놀아나는데 조선은 문무반을 불문하고 양반들에게는 지상천국 같은 나라였습니다 박취문이 쓴 부북일기(이책의 번역본이 전국 방방곡곡 어지간한 도서관에 있음)에 보면 부임길에 3일에 한번꼴로 방방곡곡에 있는 유명한 기생들과 빠구리를 실컷하고 부임후에는 관찰사로부터 직방기생이라는 근무기간동안 나라에서 빠구리용으로 정해주는 기생을 배정받아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군복무를 합니다 심지어 중간에 근무지가 바뀌면서 새로 배정된 직방기생은 남편이 있는 몸이라 수청을 거부하자 말발이 안서서 열받은 관찰사가 그 기생의 어머니와 오빠를 불러서 공갈용으로 곤장 한대씩을 때리자 놀란 기생이 하는수없이 빠구리를 허용했다는 일기의 기록도 있습니다
목적지가 다가오면 노복들을 하나하나 다보내면....
부방이 긑나고 집에 갈때는?.....어떻게 하지?...
회령지역에 반년은 지냈다가 울산에 편지를 보내서 다시 노복들이 회령으로 모시고 오는 형태입니다.
노복들도.. 힘들었겠네
@@조금더김숙희-t7y 아니지요 집안의 노비들도 회령에 있는 주인을 모시러 오고가는 동안에는(약160일) 집안의 온갖 힘든일에서 해방되는 시간이고 여행도 하면서 산천도 구경하며 유유자적 하는거죠 물론 아마도 주인의 짐을 바리바리 싸서 지게로 져야하니까 그것은 좀 괴로웠겠지만
저때 부임지까지 노복들을 많이 데리고 가는것은 부임지까지 가는 주인의 기본적인 짐에다가 저때만 해도 화폐경제가 발전하지 않아 물물교환 경제였기 때문에 밥값 여관비 등을 모두 실물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주로 식량 아니면 무명 비단 등) 그짐이 엄청났을 것입니다
박취문의 부북일기에 보면 회령으로 가는길에 강릉에서 예쁜 기생과 빠구리를 하고 그 사흘후 또다른 기생과 빠구리를 했는데 앞서 빠구리한 기생이 매독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뒤 빠구리 기생이 자기에게 전염될것을 우려해 엉엉 대성통곡을 하자 박취문이 미안한 마음에 약값으로 하라며 무명 두필을 주자 기생이 사양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게 물물교환 경제여서 화폐대용으로 지불할 물품이 엄청났겠지만 그걸 노비들이 나눠서 지게에 지고 주인을 따라갔다가 부임지가 가까워 올수록 점점 짐의 양이 줄어들자 노비들을 차례대로 돌려보낸것입니다
@@이통영-y9v 형 설명은 고마운데..노비들 입장에서는 저때 호랑이도 있는 시절인데.. 저거 생명을..내놓는거지
회령이...동북이 아니라 서북이라하는 이유가 뭔가요?
옛날 문반 무반은 지금으로 치면 재벌들임. 저때는 ceo나 전문직이 없었음. 식년시 정기시로 4년에 1번 문반 33명 무반 24명 뽑음.
지금의 행시나 육사급이 절대 아님 붙으면 ㄹㅇ가문의 영광.
와..3천리..
가다가 병, 산적, 수많음 짐승들, 재해..
돌아올수있을까
노복들..와..
그 힘든시기에 글을 써 기록하니..
박계숙님의 문과 무, 대단함이 정말 존경스럽다.
완전군장에 박격포탄 여분으로 휴대하고 4시간 산길행군하며 갖던곳을 헬기타니 20분만에 도착했던 기억이 나는데, 저분들도 오늘날 같았으면 반나절이면 도착했을듯.
그쵸. KTX타고 가믄 되죠. 울산에서 서울역 까지 두시간?두시간 반?정도인데. 그거 두배 생각하면. 한 4시간 5시간타고 가믄 회령 갈 수 있을듯?분단 안된 상태라면
12:"38 저기 세트장 어디지 가고싶넹.
선조들의 노고에 감사하게되네.
교수님 머리숱이 풍부 하실때.
근데 조선시대가 암울한거임요
고려시대까치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주로 말이나 마차로 이동을 했어요
군 보급품도 더 빨리 수송할수있었구요
실제로 고려시대때는 대군을 동원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금나라 성종이 쳐들어왔을때 강조가 30만 대군을 일으켜서 맞서 싸웠고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을 할때도 19만 이였음요
윤관이 여진정벌 할때도 17만 대군이였구요
반면 조선은 폐쇠적인 전략으로 적이 침략을 하지 못하게 멀쩡한 길을 파괴하고 이동을 불편하게 만들었죠
오히려 이게 악재가 되어서 보급이동이 어려워 지고 마차와 말보다 가마 나 그냥 걷는걸로 대체 되었죠ㅋㅋ
따라서 군보급도 늦어지고 대군을 일으킬수도 없어서 조선시대에 5만 이상 거병한 경우가 거의 없음요ㅋㅋ
고려는 경기도-황해도 의 거의 전부가 병사들을 위한 영지였다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만 이상은 거뜬히 거병했죠.
대신 그만큼 병사들 카르텔이 강해서 무신정권이 일어났던거고.
조선은 그야말로 얇고 길게의 정석인 것 같습니다. 딱 현북한의 모습
@@honolulucookie8272 그러니깐요ㅎ
그래서 진짜 강국은 문과 무과 적절히 조화된 나라가 강국인것 같아요ㅎ
@김현중김현중 모르시는건 님이구요ㅋㅋ
고려는 말이 중앙집권왕조 이지 실상은 봉건국가 나 마찬가지고 호족들이 사병을 가지고 있었어요ㅋㅋ
대호족들은 수천의 사병을 소유하고 있었고 보통 수백의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전국 호족들의 사병을 모으면 5만~8만 사이였어요ㅋㅋㅋㅋ
거기다가 수도를 방위하는 군사가 3만이였구요ㅋㅋㅋㅋ
국경요새를 지키는 군사도 1~2만정도였어요
이것만 합쳐도 10만이 넘구요
강조가 30만 대군을 동원할때 백성들을 동원했죠ㅎㅎ
사병+정규군+동원된 백성 조합이였니다ㅋㅋ
여튼 군사적으로는 조선보다 월등했습니다ㅋㅋ
@김현중김현중 님이야 말로 제말을 이해를 못하는군요ㅋㅋ
누가 봉건제가 중앙집권제보다 발단한 체계라고 했습니까?
봉건제가 덜 발달된건 당연한거 아닌가?ㅋㅋ
고대 중국왕조도 다 봉건제였는데ㅋㅋ
주나라 와 한나라가 봉건제 였던거 누가 모름??
내말의 요지는 군사적 의미로 봤을때는 암울했던 조선시대 보다 낫다고 한거지 누가 봉건제가 중앙집권제보다 발달한 체계라고 했음?ㅋㅋ
그리고 헌종 이야기 했는데 님 말대로 도망다니다가 다시 권력 회복 할수있었던 계기가 먼줄암??
바로 본인의 직속영지 였던 나주의 세력 때문임ㅋㅋㅋ
그건 알고 있남?ㅋㅋㅋ
그리고 세조때 100만?ㅋㅋㅋ
세조 때 조사한 실제 기록이 있고 전국팔도의 군사가 19만이라고 기재 되어있었는데 먼 개소리임??
이것도 실제 병력이 아니라 병적에 이름 올라와있는 백성들을 포함한 숫자임ㅋㅋ
당시의 실제 기록이 적혀있는 서책이 있는데 무슨 개소리를 함???ㅋㅋㅋ
님아 책 좀 보고 이상한 유튜브 나 넷상 글보고 현혹 되지 마시고 저보고 공부 못한 티 낸다고 했는데 댁보다 학벌 좋다고 확신함ㅋㅋㅋ
아! 그리고 실업계 이야기 하는데 나 한국학교 안다녔음ㅋㅋ
호주에서 살다가 대학교는 영국대학 다녔음ㅋㅋ
@김현중김현중 님 세조때 동원 병력 백만이라는 기록은 어디에서 볼수 있나요 ?
똥개도 자기집 마당에서는 한수 먹고 들어간다고, 무관들은 출신지역에 배정을 해야 지리적,위치적 잇점을 이용해서 방어와 공격을 효율적으로 하지.
생판모르는 저런 곳으로 보내다니...
분명 가면서 퇴직 수십번은 생각했을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제로 한 사람 있을거같기도.. 근데 노비들은..ㅅㅂㅋ
갑자기 김인호 교수님 나타나셔서 놀랍고 반갑습니다 ㅋㅋ여기 출연하셨었군요
저 노비들은 올라가면서 팔려 여비로 일부 사용하고 나머지 몫돈으로 물건들을 구입하여 여진족들과 밀무역등을 하여 일년 부임하여 귀향할때에는 노비 열명이상을 데리고 올수 있어요
진짜요,
?
소설쓰시느라 고생많습니다. 귀한 노비를 왜팝니까 남쪽노비는 북쪽 노비보다 비쌌을까요? 오히려 북쪽 노비가 더 비쌌을텐데 ㅋㅋㅋ
노비들 그냥 두기만 해도 알아서 지들끼리 번식해서 불어나는구만 굳이 왜 파냐 ㅋㅋㅋㅋㅋ
그리고 씹유교카르텔 조선인데 가족 생이별시키게 노비 함부로 팔겠냐
게다가 상업 천시하는 양반들이 무관되어서 상대하는게 오랑캐 여진족인데 잘도 여진족 상대로 밀무역하겠다 ㅋㅋㅋㅋㅋㅋ
애당초 지주층이라 노비들 대리고 가면서 먹일 재력 충분히 되니까 양반하는거지
그리고 함경도면 노비 거느릴만한 양반층도 거의 없고 인구밀도도 적은데 노비를 열명 이상 씩이나 누구한테 어디서 사서 데려올수가 있냐
@@oyc2220 모르면 아닥하고 무식하면 입을 닫아라 노비자체가 양반들의 훌륭한 재테크수단이었고 조선제일의 노비재테크 전문가가 퇴계이황으로 집안에 최소한 기록상으로도 500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다 조선양반들은 인정이 너무나 많아서 노비를 수시로 사고 팔았는데 당시 노비의 거래가격은 말 한마리값보다 낮았다고 한다 그리고 10명이나 되는 노비 일가족을 각각 따로 떼어 파는 바람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이산가족이 된 노비가족들도 수두룩했다 노비가 늙어 병들고 노동력이 상실되면 그냥 산채로 버려져서 아사시킨 경우가 많았지요
@@이통영-y9v 배웠다고 자부하는 분이 자기보다 모자라 보이는 사람한테 아가리 다물라니 참으로 격조 있네요 선생님^^
잘 모르거나 질문하면 아가리 다물라고 하는 선생이랑 부모한테 배웠나보죠?
노비 증식과 매매가 조선 시대 양반들 재태크 수단인건 맞는데 이동하는 중에 짐꾼을, 그것도 시장바닥도 아니고 양반들 간의 사적 거래로 매매되던 노비를 그렇게 손쉽게 팔아버린다는게 말이 안된다는거지. 글의 맥락이란 말 모르세요?
노비 막 대하는거야 법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유교적 윤리관에서 볼때 절대 바람직한 일은 아닐텐데? 이황은 노비들이랑 같이 자기 세금은 자기가 지고 날랐고 가작지나 작개지 방치해도 사적으로 벌하나 주지 않고, 부인이 장애인이어도 다 이해하고 하나하나 다 챙겨주던 사람인데 과연 아무렇지 않게 이산가족 양산했을까?
지금으로 치면 애완동물 새끼 낳으면 분양이란 이름으로 이산가족 만들고 심지어는 버려도 불법이 아니기에 매년 버려지는 동물만 몇만마리지만 도덕적으론 손가락질받는거랑 같은거아님?
내가 위에 사람 비꼰거야 완전 소설을 진짜마냥 써놨으니 그런거지, 내 위에 댓글 단 사람한테는 아가리 다물라고 안하냐 노친네야? 그렇게 아는거 많으면 다 다물라고 해보지 그러냐
배운값 나이값 대접받고 싶으면 좀 그 값을 언행이든 행동이든 실천해라
으이그!
지금군대와비교가됄까요?
아줌마 주제에 니가 뭐 알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