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말고 현재 우파역사채널만 제대로 가동할 수있도록 정부가 간접지원해주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국민이 너무 이 역사패널을 보지 않아요. 겨우 사극 정도에나 관심을 갖고 이따끔씩 들쳐보죠.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해 봅니다. 하나의 역사프로를 방영하고나서 맨뒤에 퀴즈문제를 넣고 당첨자에겐 (당첨자가 많으면 제비를 뽑아서 결정) 소정의 상품을 지급하는... 이런 상품지원을 바로 국가가 담당하는 형식을 취하면 되지요.
고례 개경에서.. 청자로 기와지붕을 얹었다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런데 드라마에서 이를 재현한걸 본적이 있다.. 다른 이미지라도... 왜 멋진 엄연한 사실도 고증하질 않는걸까... 대만 박물관에 고려때의 왕관이 있는걸로 안다...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고 기존 왕관과 색다른.... 그 역시 고증된바 없다.... 문화재청은 무슨 일을 하는거지,...
문화재청의 임무가 무엇입니까.대만과 세계 여러나라에 대한민국 유물이있는 것을 왜 못 찾아옵니까.그리고 대만이 우리조상의 문화재가 그곳에 있나요.세계평화 더불어사는 세상에서 남의나라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순 심보입니까?우리나라도 남의나라 문화재 있으면 다 돌려주세요.만약 돈주고사왔으면 그나라가 지들 조상 역사물 팔아먹은 것이니 그것은 줄필요 없고 현재 대한민국 옛조상들이 만든것들 찾아오세요.돈으로 사와야 한다면 온 국민들이 7천원씩 보태면 나뿐놈의 나라 아니면 다 사올수있습니다.조상의 얼과 작품과 기술의역사도 찾아오지못하는 나라가 무순놈의 선진국가 입니까.이런것도 뻥입니까.선진국들은 없는 역사도 거짖말로 만들고 있는대 사실를 사실대로 찻는 것도 뻥이고 진실이 아닌가요.
그 목욕 문화가 일본으로도 전해져 남녀혼탕과 남묘호랑지교에서 하는 폭포수 수련 목욕이 존재하지요. 뭐 십수년전만 하여도 서울 삼청동에 가면 계곡 폭포에서 목욕하던 장소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전통으로 목욕하는 풍속이 있어서 나체 목욕한다며 뉴스에 나오기도 할 정도였죠. 2006년도에 학생들 데리고 야외 수업 하러 가다보면 목욕터에서 나체 아저씨들은 물론 속옷 입은 아줌마들 목욕 모습에 눈 두기도 뭐했었습니다. 하여튼, 우리가 역사를 너무 많이 왜곡되어 가르친 것들이 많습니다. 하다못해 숙종 시절까지만 하여도 어전 회의에 들어가는 양반들이 서로 부를 과시하기 위해 엄청 큰 귀걸이를 하고 들어가곤 하였으니까요... 조선이 고려사를 엄청 왜곡축소시켰듯이 조선 후기에는 조선 중기시절 까지 남았던 전통 역사를 왜곡 축소시키기도 하였죠.
@@바다무-x3i 책보고는 돌팔이 사기꾼입니다. 진짜로 정사들을 근거로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사이트도 있습니다. 고려의 수도는 지금의 개성이 맞습니다. 고려의 서경은 지금의 중국 요양입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은 처음에 지금의 북경 근처였다가 나당군의 공격으로 지금의 중국 요양으로 옮겨갔고 그 곳이 고려의 서경이 되었습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송나라는 몽골한테 멸망당해서 ㅋ 중국 처녀들은 전부 결혼 전에 초야권으로 몽골군인들 한테 겁탈당했잔아 ㅋㅋㅋㅋㅋㅋ 오죽 못났으면 몽골 통치 시기 고려인들 아래 3등 국민이 한족들 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가축이랑 같은 취급 당했잔아 ㅋㅋㅋ 지금도 당 간부들이 가축 노예로 취급하는 중이잖아 ㅋㅋ 반박좀 해보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송나라는 몽골한테 멸망당해서 ㅋ 중국 처녀들은 전부 결혼 전에 초야권으로 몽골군인들 한테 겁탈당했잔아 ㅋㅋㅋㅋㅋㅋ 오죽 못났으면 몽골 통치 시기 고려인들 아래 3등 국민이 한족들 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가축이랑 같은 취급 당했잔아 ㅋㅋㅋ 지금도 당 간부들이 가축 노예로 취급하는 중이잖아 ㅋㅋ 반박좀 해보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가 고구려라 부르는 고려도 사실은 고려고 발해라 부르는 고려도 고려고 왕건의 고려도 고려고 영어로 코리아라 부르는 말도 고려고 한민족의 전체 역사에서 조선도 있고 신라도 있고 백제도 있고 가야도 있지만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할때 가장 자주적이고 강력한 나라를 운용했던거 같아서 결국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름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유태인은 어디서 태어나도 유태인이 거처럼 우리 민족을 이제 고려인으로 정의하는 것도 괜찮을듯싶은데
@동해안오징어 고려 = 코리아 가 포인트가 아니구요 우리가 교과서에서 잘못배워서 부르는 나라들이 다 고려였다는게 포인트 입니다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불렀나가 아니라 우리가 한자와 중국기록 사대주의 일본제국시대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우리의 선조들이 불렀던 나라이름에 대해서요
@동해안오징어 … 고구려라고 부르지만 장수왕때 그당시 사람들은 일단 정확한 발음이 같지는 않지만 고려라고 했습니다 웹에서 검색해보세요 나와요 발해도 중국기록이고 스스로를 고려왕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고요 고려라 배운 왕건이 세운 고려는 당연히 고려구요 근데 교과서에선 고구려, 발해로만 가르치잖아요 요즘은 모르겠지만 저때는 그랬어요 지금도 그냥 보편적으로 고구려라고 부르고 발해라고 부르잖아요 고구려를 좀더 연구하신 분들 이야기중에 고려가 아니라 고리라 발음되었던게 맞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당시 발음과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고 대부분 한자를 보고 소리를 유추하는거니까요 암튼 고려였다구요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선조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이름이
@@qwer4k4096 동해안 오징어라고 하잖아요~ 이해하세요. 북한에서 남북이 교류하고 통일되면 그때가서 발굴 모색해야한다면서 발굴을 미뤄둔 고려 유적들이 흙속에 많이 묻혀 있습니다. 건물 지을 때에도 성터 건드리지말고 건물 짓게 김일성이 명하고,,, 앞으로 개성은 남북 교류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 나올 도시입니다.
예전에 고려도경을 도서관에서 잠깐 읽은 적이 있는데 서긍은 개성에 들어가기 전 서해 섬을 거쳐서 들어갔습니다,추정한다면, 소정방 당군대와 맥아더 유엔군이 주둔한 덕적도는 교통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서긍도 덕적도에 하루 머문 후에 송경에 들어갔을 겁니다,,그리고 내용중 선인문은 양주,전주,나주로 통하고 안정문은 경주,경기 광주,청주로 통하고 북창문은 한성으로 통한다고 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다는데,저 지명이 지금 지명과 같은지 의문이 든다,양주,전주,나주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같이 묶일 수 있는 건가?박창화 강역고에서 본 적 있는데 상주,나주,청주,전주, 이런 지명은 원래 모두 한강 유역에 있었다고 했다,왕건이 후백제와 싸울 때 바다를 돌아 나주 상륙작전을 하는데 좀 이상하단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나주가 지금 위치 아니라면 이상한 게 아니다,또 왕건이 나주 호족 딸과 결혼하는데 훈요십조에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인을 쓰지마란 훈요를 남긴 게 이상하지않나?우리 역사의 미스터리는 지명의 혼란때문인데 학계의 지명연구는 좀 부족한 거 같다,,
역성 반란하려는 이성계하고 역시 동족이나 다름없는 사타족으로서 홍건적하다 공민왕때 개경을 침입한 주원장을 포함한 홍건적을 개경을 되찾는 진공작전에 처음 투입된 젊은 장수이자 여러 성문중 첫 성문을 연 이성계가 다른 홍건적 리더들은 나중에 잡혀서 다 목을 베였는데 전라도에서 이성계와 주원장 둘다 아버지들 묘자리 찾다 만난적있는 안면으로 주원장만 빼내준 적 있는 것에 대한 보답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때 주원장과 그 아들 후일의 영락제와 이성계와 이방원이 만나서 둘다 한민족과 같으니 나이많은 주원장이 대륙 먹고 이성계가 연산파절에서 공험진,선춘령까지 만주와 반도를 먹기로 하고 역성혁명이 가능하게 되도 않는 명이 왕을 정할 권한이 있는 황제국인양 보이게 우리국민을 현혹해온 것임. 여기나 책보고 고려도경 2024.3.2 영상보니 본래 고려가 왕을 정할 권한있던 황제국이었네.
반란자 이성계와 사타족 주원장 둘다 우리민족 계열이라 우리가 화하족에 빼앗긴게 아니고 우리끼리의 담합이었음. 청은 명을 계승하였기에 명의 영토으 계승자이고 청도 우리 친척 북방의 말갈족이지만 청을 계승하지않은 신해혁명 동조자들 청의 영토와 청이 개척한 땅에 대한 권한이 없음. 청의 땅은 같은 북방민족이자 친척인 우리가 대신 되찾을 자격이 있음. 그 땅에 여진 즉 말갈족과 거란족등 친척 북방민족은 살 자격있음.
송나라가 당대 고려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며 조화를 꽤한부분도 인상깊지만 무엇보다 글공부하는거, 조상들이 글읽지못하는걸 부끄럽게여겨 애고 병졸이고 모두 글공부를 하였다고 최고로 극찬했다는점을보면 우리나라가 청나라에 갔을때 또 임란후 일본에가서 각 국가의 실정과 파악한모습을 보며 똥덩이조차도 효율적으로 관리하던 청의 모습, 일찍이 개방해서 조총등을 들이고 여러 재원들을 타국과 교역하며모은 어마어마한 은으로 국방력과 내수를 전성기로 끌어올려100년의 전국시대의 바로다음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부유했던 당대 일본의 모습을 애써눈가리고 비판, 비난만했던모습과 대비되네요.. 대국,강국이 되는건 다 이런 사소한 마음가짐에서 시작되죠.. 이건 못났네 이걸뭐하러해 가 아닌 아 이 점은 인상깊다 아 이건 잘한다 부러운모습이다 이 나라는 왜 이걸 하려했나? 한족들은 왜 만주족에게 굴복하였는가? 일본의 부유함의 근원이 어디서 시작됬는가?이런식의 열하일기를 썼던 박지원같은 모습이 우리가 지금 가져야할 덕목이 아닌가 생각케 합니다.
@폭행몬스터 제가 언어적으로 인정했다는 말로 혼란을 드려서그런지 공격적으로 반응하시는거같네요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기록은 없겠죠. 다만 고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썼던것, 조공국을 두고 조공제도를 유지하던점 그 기록으로써 조공국,속국이라는 개념으로써 해당 지역이나 국가을 기록한점 제후국왕을주고 식읍과 작위를 하사한점, 팔관회같은 큰 행사를 독자적으로 열고 온갖사신들과 연회를 열던점, 똑 풍입송조같은시에서 해동"천자"하며 금석문들의 기록과 같이 고려인 스스로도 자국 최고지도자를 황제로써 칭한점, 원구단같은 황제국이나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개소를 설치하여 제사를지낸점, 제후국을 자처하고 중화에 사대함으로써 나라의 근간을 뒀던 조선과달리 6부 정치체계를 정비하여 운용했던점, 결정적으로 송 또한 고려사신을 맞이하며 조공국이아닌 동등한 국신사의 대우로 고려사신을 맞이한점등 고려가 고구려의 기백을이어 당대 독자적인 천하관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국으로써 뽐내며 송이나 여타 국가들이 그에 제동을걸거나 마찰을 가진것이 없다는점은 충분히 싫든 좋든 송이 고려를 명실상부 황제국으로 칭하던말던 놔뒀던거랑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정했다는 말씀을드린건데 공식문서기록이없으니 말실수라면실수입니다 아시겠지만, 중원의 통일국가는 중원이 중심으로 돌아가는 중화사상에 주변국을 제후국으로써 두고조공제도로써 운용하겠다는게 근간사상입니다 송은 그러지못했죠 그 사실자체만으로도 고려가 황제국으로써 거칠게없었고 송도 그런의지가없었다는건 명실상부 고려가황제국이었다는걸 의미하는것이고 이러한 증거와 기록, 정황들이 당시 주변국들에게 고려가 황제국으로써 인정받은거라고 지금 여기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제말이 틀렸습니까?
조선도 나쁘지는 않아보여요 조선이란 지금의 미국 usa처럼 고대사에 연방국가라는 개념이었으니까요 지금도 카자흐스탄은 조선의 음차인 주스시스템 오르타주스 크스주스 울루주스 3주스쓰고있으니까요 우리도 그연방중에 일원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니까요 그렇다고 다 우리꺼 이건아니고 조선 (주스)이라는 큰카테고리안에 한 일원이었으니까요
벽란도 강화도에가 본 사람은 알죠 개경이 개성이면 절대 나무배타고 가기 쉽지 않습니다 일단 조수간만의 차가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해변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많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리고 조류가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지역인데 거기로 해상무역을 했다고 생각하는건 어불성설입니다 중국 베이징동남쪽에 벽란이란 지역이 있으며 그곳은 바다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베이징엔 고려영 즉 고려의 군사기지란 지명이 남아있죠 개경은 베이징이었습니다 고려보다 수백년뒤의 해상강국이라던 일본이 임진왜란때도 먼바다로 못가고 굳이 명량에 들어가 어떤 일을 겪는지 역사를 이해못하고 당시 항해술을 이해 못하는겁니다
고려가 정말 교과서만큼 작은 나라였다면 수도가 서경 개경 남경이라 굳이 수도를 3개로 나눌 이유도 없을 뿐더러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당시 철령위를 설치한다는데 개성에서 동북방향인 철령으로 가는것이 아니고 압록강을 건넌것도 모순입니다 개경은 이름이 비슷한 개성이다 라고 비정하는것일뿐 그 어떤 증거도 없으며 이것은 이명박을 김명박 최명박 강명박을 모두 같은 사람으로 인지하는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다. 인천항의 그것이 약 9m에 이를 정도니, 인천보다 약 60km 북쪽에 있는 벽란도도 10m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에서 온 무역선들이 벽란도에 어떻게 접안을 했을까? 문헌자료에 의하면,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수심이 깊다는 언급만 있을 뿐 부두시설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추측하건대, 외해(外海) 쪽에 묘박지(錨泊地)를 두고 밀물 때에 접안을 하여 하역과 선적을 했던 것 같다 또한 여러 선박들이 동시에 접안을 하려면 기다란 잔교(棧橋) 시설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도경’에 묘사된 화려한 입항 장면으로도 능히 상상이 된다. 잔교 설치를 위해서는 우선 연안의 물 속에다 일정 간격으로 말뚝을 박고, 그 위에 가교(架橋)를 가설하면 된다. 비슷한 사례로 해상왕 장보고의 청해진(완도) 유적에는 지금도 해안에 가지런히 박혀있는 말뚝들을 볼 수 있다. [출처] 벽란도(碧瀾渡), 고려의 국제항은 얼마나 붐볐을까|작성자 박하
고려의 원래 발음을 "코리" 혹은 "고리" 로 보기도 합니다. 옛날의 권위있는 자전을 보면 '고울 려'자가 지역 이름으로 쓰일 때는 '리'라고 발음된다고 적혀 있기도 하고, 원제국 시대의 이슬람 학자가 쓴 글에는 고려를 '코리' 또는 '카울리'로 적고 있습니다. 만약에 '고려'가 아닌 '고리' 로 불렸다면 매우 자연스럽게 '코리아'가 됩니다. 이슬람 학자가 쓴 원나라 역사서에 나오는 '카울리'에 '아'를 붙여도 빠르게 발음할 때는 '카울리아'가 '코리아'가 됩니다..
최영이 철령위를 공격하러 갈 때 그 지역에는 정주도 있다 했습니다. 정주는 고려사에서 말하기를 옛 귀주의 개명이라 했습니다. 강감찬이 거란을 패퇴시킨 곳입니다. 지금 심양 북쪽의 철령박물관에는 과거 그 곳이 거란과 고려의 국경지역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주원장이 철령위를 새로 옮기려 한 지역은 심양 남쪽의 奉集堡 입니다. 지금도 그곳에 표지석이 있습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송나라는 몽골한테 멸망당해서 ㅋ 중국 처녀들은 전부 결혼 전에 초야권으로 몽골군인들 한테 겁탈당했잔아 ㅋㅋㅋㅋㅋㅋ 오죽 못났으면 몽골 통치 시기 고려인들 아래 3등 국민이 한족들 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가축이랑 같은 취급 당했잔아 ㅋㅋㅋ 지금도 당 간부들이 가축 노예로 취급하는 중이잖아 ㅋㅋ 반박좀 해보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
고려는 유교보다는 불교중심 국가였으니까 문화적인 부분에서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여성의 지위도 그렇고 외국이랑 교역도 많이해서 꽤 국제적이었을 듯해요 조선시대가 없었다면 이라고 역사엔 가정이 불가능하다지만 만약 고려가 망하고 비슷한 왕조가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궁금합니다
고려가 조선보다 훨씬 부강한 나라였음은 분명합니다. 다만 서민이나 천민에게 얼마나 가혹했던 나라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백성에게 있어 더 나은 시대가 언제였을 거라곤 확신하지 못하겠네요. 다만 자주적 ㆍ 개방적이었던 그 기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면 한국의 국력과 국제적 지위는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청과의 관계에 있어선 거란에게 그랬던 것처럼 굴하지 않고 한 판 붙었을 것 같긴 해요. 애초에 농경민족의 정서로는 북방민족을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요. 조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충돌의 대외적 근거. 바보처럼 명나라를 숭상하는 교리를 내세워 청을 배척하진 않았겠죠. 그리고 승리했다면 여요전쟁과 같은 대박이고 단숨에 국제적 갑의 자리에 올라섰겠죠. 패배했다면 당연히 신하국으로 전락했겠지만 청과 서역의 발전된 문물을 거부하지 않고 부강해질 방법을 찾았을 거고요. 근대에 들어선 많이 다른 한국이 되었겠죠.
홍건적이 무엇하려 개성까지 왔을까요. 배고프면, 광활한 황하평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중요한 그림, 중요한 부분의 내용, 항상 중요한 부분만 안보이니 왜일까요. 남제서도 그렇고 중요한 부분은 삭제되고 별볼일 없는 부분만 남는군요. 삼국사의 현장에서 활동한 최치원의 상대사시중장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것은 그나마 기적에 가깝습니다. 언젠가는 그나마 사라지겠지만.........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송나라는 몽골한테 멸망당해서 ㅋ 중국 처녀들은 전부 결혼 전에 초야권으로 몽골군인들 한테 겁탈당했잔아 ㅋㅋㅋㅋㅋㅋ 오죽 못났으면 몽골 통치 시기 고려인들 아래 3등 국민이 한족들 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가축이랑 같은 취급 당했잔아 ㅋㅋㅋ 지금도 당 간부들이 가축 노예로 취급하는 중이잖아 ㅋㅋ 반박좀 해보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
고려의 원래 발음을 "코리" 혹은 "고리" 로 보기도 합니다. 옛날의 권위있는 자전을 보면 '고울 려'자가 지역 이름으로 쓰일 때는 '리'라고 발음된다고 적혀 있기도 하고, 원제국 시대의 이슬람 학자가 쓴 글에는 고려를 '코리' 또는 '카울리'로 적고 있습니다. 만약에 '고려'가 아닌 '고리' 로 불렸다면 매우 자연스럽게 '코리아'가 됩니다. 이슬람 학자가 쓴 원나라 역사서에 나오는 '카울리'에 '아'를 붙여도 빠르게 발음할 때는 '카울리아'가 '코리아'가 됩니다..
영어에서나 코리아 입니다. 원래 코리 입니다. " 고리 " 나 " 코리 " 또는 "가리" 로 불렸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우리 민족의 한 갈래인 '훈족' 도 같은 나라이름 ' 고리' 를 썼습니다.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을 해서 나라이름 ' 훈고리 -> 헝가리' 로 변한 이유입니다.
@@userkoreakorea 조공 온 하국의 사절단을 환대하느라 국가 경제에도 영향을 주다는 항소가 올라 갔었던거군요 제가 대학때 교양시간에 배웠던기억에는 조공으ㅣ 의미가 원 나라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고 배웠던거 같네요 그때는 고려와 송나라가 국력이 달랐던게 아닐까요?
Since there was ancient civilization North of North Korea with Stonehenge and waved sword only mostly found in Korea and North region, there as a culture that had religion, language, culture, metallurgy. If that is the indication, the recent discovery of the red mountain including the Godness statue wearing a Bear necklace (Bear is symbolic for women in Korean culture at that time there was Bear nation and Tiger nation and Bird nation(the root of ancient Korea has bird at top of their totem poles) and most likely Bird nation took Bear nation's princess(VIP woman) as Bride) -- that dates back 7000 BC. Fast forward to about 700 AD, After writing was more prevalent, the numerous books scripted by "GongJa"(Confucius) words by his followers from China indicated "GongJa" say he learned everything from 'north' civilization. Thus, most historical documents indicate China's civilization was derived from this civilization. The Chinese books indicate 'north' civilization just 'north civilization' without a name. However, Korean calls in "GoChoSen" which means ancient (go) Cho (bird) sen (nation) of the old Korea. This first civilization of east Asia was so large that its people moved out to both east and westwards. The same or exact same artifacts are being discovered in North Italy to Ireland and Finland, to east all the way to Mexico, and along the traveling route, same or similar artifacts and languages are found. By the way, the next nation was called "Gogyro" which means hook which the ying-yang symbol came from, it means 'order or harmony via governing' set by GoChoSen. And following after GoChosen was the nation name of "Go (old) gyro (hook)' the 'hook' part 'gyro' became 'Korea' in the present day. It's interesting to find "Mississippi" "Michigan", etc and its meanings are the same as Korean! "Mi" - means in Korea is 'freshwater or river'; "chi or ci (si)" - means in Korea 'fish' - sippi and gan - means in Korea 'place (home or house), Again only in old GoChoSen languages. Note that in linguistics, it's very hard to not only match the sound but also the meaning. If I follow the logic, unless there was a large population and civilization with the resource and advancement of culture only can have the means to explore in the motivation of necessity or curiosity. And the people from such civilizations can only expand and overlap o ver further expansions It may be worth studying the "yo-dong" civilization and first nation of Eas Asia (or maybe the human Sapien Sapien) "GochoSen" more in-depth. It can bring together the puzzles of where nations come from and why there was a road before the silk road that was well-traveled with premium horses and carts with carts at least 5000 BC before the silk road.
고려 전성기 때 국제위상에 대해서도 꼭 다뤄주세요. 송사에는 이런 기록까지 남아있습니다. 1. 송나라가 고려 사신을 위해 운하까지 파버리자 이를 반대하다 파직 당한 손부와 허한의 일화. "고려가 조공하러 들어오자 백성을 동원하여 운하를 파느라 민간이 시끄러웠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손부(孫傅)가 고려가 나라에 도움이 없다고 하면서 큰 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니, 손부는 죄를 받아 파직되었다. 허한이 손부의 파직은 부당하고 말하니, 당시의 재상이 화가 나서 〈허한도〉 파직하고 강주태평관(江州太平觀)을 맡게 하였다."『宋史』卷363 列傳122 許翰 宋 徽宗 宣和 7年 2. 고려 사신에게 홀로 절을 하지 않아 중국의 자존심을 지킨 호순지 일화 "호순지(胡順之)가 청주(靑州)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고려가 사신을 보내오자 환관이 끼고는 중요하다고 여겨서는 청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성(城) 밖의 교(郊)에서 〈고려 사신〉을 맞이하게 하였다. 호순지가 “청주는 큰 군진(軍鎭)이다. 당나라 때에 신라(新羅)와 발해(渤海)를 맡았는데, 어찌 이 같이 비굴한가?”라고 말하고는 홀로 〈고려 사신에게〉 절하지 않았다."『宋史』卷303 列傳62 胡順之 宋 眞宗 天禧 4年 4月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송나라는 몽골한테 멸망당해서 ㅋ 중국 처녀들은 전부 결혼 전에 초야권으로 몽골군인들 한테 겁탈당했잔아 ㅋㅋㅋㅋㅋㅋ 오죽 못났으면 몽골 통치 시기 고려인들 아래 3등 국민이 한족들 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가축이랑 같은 취급 당했잔아 ㅋㅋㅋ 지금도 당 간부들이 가축 노예로 취급하는 중이잖아 ㅋㅋ 반박좀 해보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
고려땅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북쪽, 즉 북쪽의 천리장성까지 이어졌을 확률이 높고, 지금은 왜 한반도 밖에 안되냐... 고려가 원에 줘 터졌을 때와 조선이 여러번 이민족에 침입 받아 굴욕을 당했는데 땅을 북방 땅을 그대로 유지 했다는건 말이 안됨. 조금씩 실효 지배에서 밀리면서 한반도 안으로 축소된 것으로 보임.
고려는 불교를 사상기반으로하여 건국된 상업을 중시한 나라였다. 상인들은 이익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는 사람들이니 고려는 당연히 외국 상인들이 모여들었을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활력이 넘치고 사람들은 부유하게 살았다. 고대로부터도 불교 지지세력은 상인들 이었다. 상업이 발달하면 불교가 성했고 상업이 쇠퇴하면 불교도 영향력이 약해졌다. 활기가 넘치던 상업국가 고려. 그러나 그런 고려를 이은 나라는 유교와 농업을 근본으로한 조선이었다. 이는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종의 퇴행이었다. 이후 수백년간 사회는 침체되고 나라는 자주성조차 잃으면서 거지로 변해갔다. 백성들은 항상 가난했다. 조선의 건국은 한민족의 재앙이었다. 백성들의 불만은 성리학적 이념을 백성들에게 주입해 세뇌 시킴으로써 막았다. 그리하여 자체 개혁을 할수 없었던 조선은 그사이 힘을 키운 일본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다.
그건 아니고요 이거 하나면 님 주장이 틀리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화폐경제가 활성화 되었나요? 답은 아니조 상업이 발달하면 화폐경제로 나갈 수 밖게 없습니다 그런데 화폐는 있었지만 물품화폐를 주로 사용했지 그 다음 단계라 볼 수 있는 금속화폐 혹은 계수화폐 신용화폐로 넘어가지 못 했조 고려가 조선보다는 좀 낫지만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품위있는녀석 조선보다 강성했어요. 아무리 국력이 기울었더도..특히나 공민왕을 엄청 왜곡시켰는데 공민왕이 원나라의 힘이 약해진 사이에 지금의 만주지역까지 국토를 넓혔습니다. 명나라가 흥해지자 그에 줄대어 쿠데타를 일으킨 이성계가 가장 큰 원흉중에 하나입니다. 이 성계는 전두환과 동급으로 보시면 됩니다.
@@mooyook2 공민왕 요동정벌군의 주축중 하나가 이성계 동북면 사병집단입니다. 고려말 왜구침입에 개박살 나던 때 살려놓은 게 이성계 군벌입니다. 조선보다 강한 고려가 일개 사병집단의 쿠데타로 무너졌다는 게 뭔 논리입니까? 참고로 조선건국 초기 정도전이 정계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까지도 명나라와 사이 안좋던 게 조선입니다. 오죽하면 정도전이 요동정벌 소리까지 했겠습니까? 태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친명노선으로 갈아탄거라 이성계 쿠데타는 명나라에 줄댄거와 무관합니다.
@@품위있는녀석 그건 고려가 강성하고 부유한 나라였다고 시인한 조선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 조선시대 사람들이 바라본 고려 ->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 고려 전성기에 동서 여진(女眞)의 무리와 거란(契丹)·발해(渤海)의 인민들이 계속 투항 귀순해 온 것은 모두가 위엄과 덕망(威德)의 소치였으며, 역대의 군왕도 그 성의를 권장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히 양계(兩界)의 땅을 확장시키고 나아가서는 옛날 숙신(肅愼)의 봉강(封疆)까지 회복하였던 것입니다.『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6월 19일 계미 2번째기사』 "임금이 말하기를... 해주(海州)는 여러 해 연거푸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의 사망율이 대개 5분의 1이나 되온즉, 그런 일(인육을 먹은 일)이 비록 사실이 아닐지라도... 고려(高麗) 5백 년 동안에 진실로 이러한 일이 없었는데... 마음에 심히 부끄럽다..."『세종실록 119권, 세종 30년 1월 16일 계묘 1번째기사』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高麗) 때에는 밥을 먹이는 중[僧]이 3만 명이었으니, 당시에[고려]는 나라가 부유(富裕)해서 그렇게 했던가? 지금이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성종실록 67권, 성종 7년 5월 12일 갑인 5번째기사』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첫번째 기사』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일을 망칠 것이다"『광해군일기[중초본] 166권, 광해 13년 6월 6일 병자 4번째기사』 "이양이 상소하기를... 고려(高麗)의 군제(軍制)는 6위(六衛)와 8령(八領)으로 되어 있었는데, 1령이 각각 1천 인이니, 도하(서울)의 군대만 모두 합쳐 4만 8천 명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훈국(訓局)을 새로 설치한 뒤로 5영(五營)의 군대를 제외하면 곧 오합지졸(烏合之卒)이니, 이것으로 적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1월 2일 경자 5번째기사』 "생각해보면 고려에서 나라를 세운 이래 물력의 풍부함은 우리 조선이 거의 미치지 못할 바이다. 석물을 세운 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다[고려]를 보고 나면 다른 물[조선]은 시시하게 보인다더니 정릉의 석물을 보고 나니 길가의 소소한 석물들을 마주칠 때마다 저게 무슨 애들 장난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흠영, 조선 후기 선비 유만주의 일기』 "고려는 송악에 도읍하여 거의 5백 년이 지나서 망하였다. 그런데 [고려의]그 전성 시대에는 군신이 서로 화합하여 태평 성대를 이룩하였으니, 비단 성지나 궁궐, 누대가 그 위엄을 중하게 드러내 보이고 유람의 장소를 풍부히 제공했던 것뿐만이 아니었다. 공경대부(높은 벼슬아치)나 호민부상(세력이 있고 부유한 상인)들의 정원과 저택들은 자하동을 에워싸고 남산을 임하여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게다가 승사와 탑묘들이 기려함을 서로 다투어 금벽색의 고운 단청이 서로 휘황찬란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태조(이성계)가 일어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자, 수년도 안 되어서 왕씨들의 겹겹으로 경영해 놓은 높은 대사와 깊은 오지들이 쓸어버린 듯이 다 없어져서, 동으로 만든 낙타상이 가시덤불 속에 묻히고 서리가 눈에 그득한 것이 지금까지 80여 년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유민으로서 그 당시에 어렸던 사람들은 이제 늙어 꼬부라졌고, 당시에 장성했던 사람들은 벌써 묘목이 한 아름이 되었으니, 또 누구에게서 그 지난날의 번화했던 시절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 부귀영화를 쌓는 데는 500년도 모자랐으나, 모든 것이 허물어질 적에는 하루도 안 걸렸으니, 아아! 왕씨의 도읍은 바로 오늘날의 ‘은감’이 라고 할 만하도다!"『점필재집 제2권』
축소된 영토로 설명하면 앞뒤가 맞지않다 고려의 강역은 최소 동서가2000리 남북이 1500리이다 그후에는 그것보다 더욱 넓은 강토가 사실이다 중국대륙에 있었던 고려 개경 서경 동경 동경이 한반도에있었고 개경은 지금의 베이징에 있었다 이것이 진실된 사실이며 고려사와 송사에도 나온일이다
고려시대가 무역과 상업이 훨씬 번성했고 서양 문명(당시 아라비아 기준)에 관심도 높았으며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과 지위도 조선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역성혁명으로 세워진 조선은 전왕조를 없앴다는 명분으로 고려의 무역과 개방적인 사회분위기도 전부 없애버렸다. 망할 헬조선 처음부터 건국되지 말았어야
선화봉사고려도경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 성읍(城邑) 영토[封境] ㅡㅡ대륙고려 북경 고려위치 ㅡㅡㅡ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로 막히고, ₩₩₩₩₩₩₩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와 맞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옛 거란 지역과 접경하였고, 동쪽으로는 금[大金]과 맞닿아있다. 육로ㅡ고려는 우리 송(宋) 수도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를 거친 다음 요수(遼水)를 건너[陸走渡遼] 동쪽 해로 ㅡ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는 항상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서 먼바다[絶海]로 길을 잡아 ㅡㅡㅡ북쪽으로₩₩₩ㅡㅡㅡ 나아갔다. 배를 탈 때는 언제나 하지(夏至) 다음의 남풍(南風)을 탔으니 ₩₩₩₩바람이 순조로우면₩₩₩₩₩₩ 닷새도 안 돼 해안에 도착할 수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 성읍(城邑) 영토[封境] ㅡ 영토[封境]ㅡㅡㅡ요수는 영정하 ㅡ압록강은 원문에 압록 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로 막히고, ₩₩₩₩₩₩₩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와 맞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옛 거란 지역과 접경하였고, 동쪽으로는 금[大金]과 맞닿아있다. 그리고 일본(日本)·유구(流求)·담라(聃羅)·흑수(黑水)·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개의 어금니[犬牙]처럼 서로 맞물려있다. 저 신라와 백제가 자신들의 영토[圉]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병합이 되었으니 현재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여기에 해당된다. 고려는 우리 송(宋) 수도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를 거친 다음 요수(遼水)를 건너[陸走渡遼] 동쪽으로 고려 국경까지 가는데 모두 3,790리(里)이다 . 해도(海道)로는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淮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 등이 있는데 모두 왕래가 가능하다. 지금 세워진 나라는[今所建國] 등주(登州)·내주(萊州)·빈주(濱州)·체주(棣州)와 정확하게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 원풍(元豐)註 001 연간 이래 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는 항상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서 먼바다[絶海]로 길을 잡아 ㅡㅡㅡ북쪽으로₩₩₩ㅡㅡㅡ 나아갔다. 배를 탈 때는 언제나 하지(夏至) 다음의 남풍(南風)을 탔으니 ₩₩₩₩바람이 순조로우면 ₩₩₩닷새도 안 돼 해안에 도착할 수 있다. 옛날에는 그 영토가 동서(東西)로는 2,000여리, 남북(南北)으로는 1,500여리였는데 현재는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동북쪽이 약간 넓어졌고 서북쪽은 거란과 접해 있다. 전에는 요[大遼]와 경계를 이루었는데 나중에 침범을 당하게 되자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견고하게 〈방어토록〉 하였다. 아울러 압록강을 의지하여 요새로 삼으려 하였다. 말갈에서 발원하는 압록강[鴨綠水]은 그 물빛이 오리 머릿빛[鴨頭]과 같아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요동(遼東)과는 500리 떨어져 있는데 국내성(國內城)을註 002 거치면서 다시 서쪽으로 한 강물과 합류하여 흐르는데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註 003 이 두 강물이 합쳐서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註 004 고려에서는 이것이 가장 큰 강이다. 물결은 맑고[淸澈] 지나치는 나루터[津濟]에는 큰 배를 댈 수 있다. 고려에서는 이 곳을 천혜의 요충지[天塹]로 여기는데 폭이 300보에 이를 정도로 넓다 . 평양성(平壤城)에서는 서북쪽으로 450리이며 요수(遼水)의 동남쪽으로는 480리에 있다. 요(遼)의 동쪽은 곧 옛날 거란에 속했던 지역인데 현재는 사람들[虜衆]이 이미 흩어진 상태이다. 금[大金]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여서 다시 성을 세워 수비하지 않고 다만 오가는 길목으로 삼았을 뿐이다. 압록의 서쪽으로는 백랑수(白浪水)와 황암수(黃嵓水)라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몇 리(里)를 흐른 곳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니 이것이 바로 요수(遼水)이다 ==========%%%%₩₩₩₩₩₩₩₩₩ .註 005 당 정관(貞觀)註 006 연간에 이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를 크게 격파하고 물을 건널 때 그 물이 얕고 좁은 것이 괴이하여 물으니 이곳이 요수(遼水)의 수원(水源)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註 007 이로써 옛날에는 요수를 견고하다고 믿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려가 압록강의 동쪽으로 물러나 국경을 지키고 있는 이유이다
거란고려국경에 대한ㅡ 한국최초로 안문 압강 이라는 역사적 지리적 과학적 근거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세종대왕은 고려사 지리 서문에 고려는 우리역사 최대 영토ㅡ고조선ㅡ 고구려보다 큰 고려영토 ㅡ 고려거란전쟁ㅡㅡ 고려국경 ㅡㅡ 명사 고려사에서 찾았습니다 ㅡ틀리면 의견주시면 고맙겠습나다 안문(압록) 압강 하공진 국경 근무지ㅡ 통주 강조의 30만 대군 ㅡ흥화진 양규전쟁영웅ㅡ 귀주강감찬 명사 ㅡ상건하의 하류가 남쪽으로 고려장을 지나다ㅡㅡ 압강 상건하(桑乾河)는 노구(盧溝)의 상원(上源)이다.ㅡㅡ 태원(太原)의 천지(天池)에서 발원하여 복류해서ㅡㅡ 삭주(朔州) 마읍(馬邑) 뇌산(雷山)의 남쪽에 이르는데, 금룡지(金龍池)라는 곳에서 솟아나서 넘쳐 흐르니 이것이 상건이다. 동쪽으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대동(大同)의 고정교(古定橋)로 흐르며 선부(宣府) 보안주(保安州)에 이르러ㅡㅡㅡ 안문(雁門)·응주(應州)·운중(雲中)의 여러 물길이 모두 모인다. 서산(西山)을 가로지르고 완평(宛平)의 경계로 들어온다. 동남쪽으로 간주구(看舟口)에 이르러 둘로 나뉜다. 그 하나는 동쪽으로ㅡㅡㅡ 통주(通州) 고려장(高麗莊)을 거쳐 백하(白河)로 들어간다. 그 하나는 남쪽으로 패주(霸州)로 흘러 역수(易水)와 합류하고 남쪽으로 천진(天津) 정자고(丁字沽)에 이르러 조하(漕河)로 들어가니 노구하(盧溝河)라고도 하고 또는 혼하(渾河)라고도 한다 고려사ㅡㅡ 거란주(契丹主)가 분노하여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흥화(興化)·통주(通州)·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귀주(龜州) 등 6개 성을 빼앗으라고 하였다 .안문 ㅡㅡ하공잔 국경 근무지ㅡㅡ 압록은 안문에ㅡ 하공진(河拱辰)을 안문(鴈門)에 파견하여 ___압록(鴨綠)에서 구당사(勾當使)가 되도록 하고, 낮에는 나가서 동쪽 강변을 감시하고 밤에는 내성(內城)으로 들어와 머물게 하였습니다 통주 ㅡㅡ강조의 30만 대군ㅡ병사 30만 명을 통솔하여 ㅡ통주(通州)에 진을 치고 거란(契丹)에 대비하였다 흥화진 ㅡㅡ양규ㅡㅡ전쟁영웅 신묘 거란주(契丹主)가 직접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양규(楊規)·이수화(李守和) 등이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영주(靈州)는 현종 21년(1030)에 ㅡ흥화진(興化鎭)을 승격시켜 주(州)로 삼아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였다 정묘 거란(契丹)이 영주성(寧州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 귀주(구주)ㅡㅡ강감찬 2월 기축 초하루 거란군[丹兵]이 귀주(龜州)를 지나가는데, 강감찬(姜邯贊) 등이 맞아 싸워 크게 무찔러서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세종대왕의 고려사 ㅡ지리 서문 ㅡ우리나라[東國]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를 이루었다. 10도는 첫째는 관내(關內), 둘째는 중원(中原), 셋째는 하남(河南), 넷째는 강남(江南), 다섯째는 영남(嶺南), 여섯째는 영동(嶺東), 일곱째는 산남(山南), 여덟째는 해양(海陽), 아홉째는 삭방(朔方), 열 번째는 패서(浿西)이었다. 관할하는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서북은 당(唐)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다. 압록은 안문에ㅡ 하공진(河拱辰)을 안문(鴈門)에 파견하여 _압록(鴨綠)에서 구당사(勾當使)가 되도록 하고,
이 자료는 학생들에게 역사의 잔실를 알리고자 명사와 고려사를 검색하여 복사해 놓은 것입니다 복사해서 검색하면 더 자세히 알고 우리는 찬란하고 위대한 코리아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가지세요 ㅡ역사상 최대강국 몽고와의 전쟁애서 73전55승 이겨습니다 ㅡ출처 나무위키 ㅡ여몽전쟁 산서지리지도ㅡㅡ평양부 북경 해주 예성 포주 대동 곽주 마읍 삭주 심주(강화현) 등 등 이 지도안에 지명이 있습니다 ㅡ산서지리지도 복사해서 검색하면 지도 나오고 클릭하면 한글로 지명이 나옵니다 대명여지도 ㅡㅡㅡ통주와 흥화가 나옵니다 강동 6주 압강 영정하 동쪽 6주ㅡㅡ교과서는 강남 6 주 거란이 멸망한 곳이 고려의 북계 압강 ㅡㅡ제왕운기 鴨江]에 이르렀다가 스스로 패하였구나 지진 기록 ㅡ검색어 동경 ㅡ 동경과 서경에 동시에 발생한 건물이 무너지고 천둥소리가 메뚜기(황충) 피해에 대한 고려사 54건 기록 검색어 황충 구글 뉴스 검색어 북경 메뚜기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의 만리장성 베이징 북쪽에 높이 7.5미터 (3층 높이 정도) 폭이 7.5 미터 길이 250 키로 〈덕종(德宗)〉 2년(1033)에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방 경계에 처음으로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서해 바닷가의 옛 국내성(國內城)의 경계로서 압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위원(威遠)·흥화(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영덕(寧德)·영삭(寧朔)·운주(雲州)·안수(安水)·청새(淸塞)·평로(平虜)·영원(寧遠)·정융(定戎)·맹주(孟州)·삭주(朔州) 등의 13개 성(城)을 거쳐 요덕(耀德)·정변(靜邊)·화주(和州) 등의 세 성(城)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니, ㅡㅡㅡㅡ길이가 1,000여 리에 뻗었고, --돌로 성을 쌓았는데ㅡㅡ 높이와 두께가 각 25척(尺)이다. 고려사 ㅡ동남해 안무사가 해적의 투항을 보고하다 ㅡ 고려영토가 홍콩까지 취안장 就安 이 홍콩이네요 ㅡ 복사해서 구글지도 검색해 보새요 고려사ㅡ 1128년 10월 01일 (음) 겨울 10월 임자 초하루 동남해안무사(東南海安撫使) 정응문(鄭應文)이 아뢰기를, “명진현(溟珍縣)·송변현(松邊縣)·아주현(鵝洲縣) 등 세 현의 해적(海賊) 좌성(佐成) 등 820인이 투항하였으므로, 합주(陜州) 삼기현(三岐縣)에 귀후장(歸厚場)과 취안장(就安場)을, 진주(晉州) 의령현(宜寧縣)에 화순장(和順場)을 설치하여 이들을 살게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신하들이 하례를 올렸다 1 우리역사-History 답글 @booksbogo @booksbogo 4개월 전 영상 공유합니다
고려는 일찍이 출병하여 전투를 지원하지 않음이 없었고, ₩₩₩요수(遼水)의 동쪽 해안 1만 리가 그 덕분에 평온했습니다. 고려는 동쪽 번병이 되어 대대로 현저한 공을 세웠으며, 여러 대에 걸쳐 우리 왕실과 혼인을 맺어 마침내 그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이는 대개 고려의 충성과 조종(祖宗)의 유훈(遺訓)에 의한 것입니다ㅡㅡ고려사
그곳에서 여기 궁궐까지는 거리가 모두₩₩₩ 5,000리인데 가까운 경기[近甸]를 ₩₩₩산동(山東)으로 옮기면 산하(山河)를 12개나 넘을 정도이다. 영령께서는 이 특별한 보답을 알고 받으시라. 〈이에〉 황고제국대장공주 고려왕비(皇姑齊國大長公主 高麗王妃)로 추봉한다.” 라고 하였다. 처음에 나라에서는 송(宋), 요(遼), 금(金)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였으나 역대의 시호는 모두 종(宗)이라고 칭하였다. 원을 섬기기 시작하자 명분이 더욱 엄중해져서 옛날 한(漢)의 제후들이 모두 한의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왕도 표문을 올려 상승왕(上昇王: 충렬왕)의 존호를 청한 것이다. 또한 고종(高宗)과 원종(元宗) 두 왕도 추시(追諡)해줄 것을 청한 것이었는데,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진나라 진시황제가 한족이냐? 왜 중국에서 한족이라고 배웠어? 내가 알기로는 죽신이나 여진족으로 알고있는데 대만 역사학자들 책에서 진시황은 여진말고 몽골어가 가능했다잖아 니가 말하는 중국문화가 뮈냐? 몽골말 했다는 말은 몽골태생이라는 말인데 그럼 진나라 역사는 몽골역사구나 ㅎㅎ
이미 고려는 대륙에 있다는게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송나라 사신단이 가는 길목이 지금의 북경으로 가고 있음을 여러 재야쪽에서 입증해주고 있네요.. 강단이 문제예요..
그건 돌팔이 사기꾼이 하는 말입니다.
역사만 하루 종일 틀어주는 방송이 하나 있었으면 해요. 미국같이 역사가 짧은 나라도 그런 방송이 있거든요.
우리나라는 cg에 예산 쓰는 것만 봐도 그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절로 알게 되지... 고려 황궁 복원 cg 에 200만원도 안쓰는 나라가 무슨 채널을 다뤄 ㅋㅋㅋㅋㅋ
좋은의견
좋은 의견 입니다
더도말고 현재 우파역사채널만 제대로 가동할 수있도록 정부가 간접지원해주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국민이 너무 이 역사패널을 보지 않아요. 겨우 사극 정도에나 관심을 갖고 이따끔씩 들쳐보죠.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해 봅니다. 하나의 역사프로를 방영하고나서 맨뒤에 퀴즈문제를 넣고 당첨자에겐 (당첨자가 많으면 제비를 뽑아서 결정) 소정의 상품을 지급하는... 이런 상품지원을 바로 국가가 담당하는 형식을 취하면 되지요.
히스토리채널 ㅋㅋ
고례 개경에서.. 청자로 기와지붕을 얹었다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런데 드라마에서 이를 재현한걸 본적이 있다.. 다른 이미지라도... 왜 멋진 엄연한 사실도 고증하질 않는걸까... 대만 박물관에 고려때의 왕관이 있는걸로 안다...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고 기존 왕관과 색다른.... 그 역시 고증된바 없다.... 문화재청은 무슨 일을 하는거지,...
문화재청의 임무가 무엇입니까.대만과 세계 여러나라에 대한민국 유물이있는 것을 왜 못 찾아옵니까.그리고 대만이 우리조상의 문화재가 그곳에 있나요.세계평화 더불어사는 세상에서 남의나라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순 심보입니까?우리나라도 남의나라 문화재 있으면 다 돌려주세요.만약 돈주고사왔으면 그나라가 지들 조상 역사물 팔아먹은 것이니 그것은 줄필요 없고 현재 대한민국 옛조상들이 만든것들 찾아오세요.돈으로 사와야 한다면 온 국민들이 7천원씩 보태면 나뿐놈의 나라 아니면 다 사올수있습니다.조상의 얼과 작품과 기술의역사도 찾아오지못하는 나라가 무순놈의 선진국가 입니까.이런것도 뻥입니까.선진국들은 없는 역사도 거짖말로 만들고 있는대 사실를 사실대로 찻는 것도 뻥이고 진실이 아닌가요.
식민사관
조선 근정전도 청자지붕이었다는데 그냥 흑기와로 복원함.
@@entn8769 아깝군요.
어디선가 보았는데 고려가 우리가 그동안 배워서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에 있었다네요
세계와 호흡한 고려!
영상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역시.,,, 한국민은 글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배움에 열정적이었어.
목욕해서 깨끗이 생활하는 데에 남녀의 차이가 없고 여성을 속박하지도
않았고, 남 녀 간 관계가 자연스러웠네. 이게 원래 고려인의 모습이었어 !
그 목욕 문화가 일본으로도 전해져 남녀혼탕과 남묘호랑지교에서 하는 폭포수 수련 목욕이 존재하지요. 뭐 십수년전만 하여도 서울 삼청동에 가면 계곡 폭포에서 목욕하던 장소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전통으로 목욕하는 풍속이 있어서 나체 목욕한다며 뉴스에 나오기도 할 정도였죠. 2006년도에 학생들 데리고 야외 수업 하러 가다보면 목욕터에서 나체 아저씨들은 물론 속옷 입은 아줌마들 목욕 모습에 눈 두기도 뭐했었습니다. 하여튼, 우리가 역사를 너무 많이 왜곡되어 가르친 것들이 많습니다. 하다못해 숙종 시절까지만 하여도 어전 회의에 들어가는 양반들이 서로 부를 과시하기 위해 엄청 큰 귀걸이를 하고 들어가곤 하였으니까요... 조선이 고려사를 엄청 왜곡축소시켰듯이 조선 후기에는 조선 중기시절 까지 남았던 전통 역사를 왜곡 축소시키기도 하였죠.
ㄱㄱㅁㅁ
몸을 정갈히하는건 불교문화이고 여성을 핍박하지않은건 고려뿐만아니라 조선 중기까지 유효했어요
색스 색스
조선시대 유교가 다 망침
요즘에는 이런 질 좋은 역사다큐들은 돈내고 봐야하는데,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한국사 다큐 너무 좋아요!
서긍사신의 방문시 고려수도는 지금의 북경입니다.
서긍의 북경까지 이동경로를 구글 지도 및 고지도로 명괘하게 설영한 방송이 있습니다. 책보고 방송을 보시면 나옵니다.
@@바다무-x3i 책보고는 돌팔이 사기꾼입니다. 진짜로 정사들을 근거로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사이트도 있습니다.
고려의 수도는 지금의 개성이 맞습니다. 고려의 서경은 지금의 중국 요양입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은 처음에 지금의 북경 근처였다가 나당군의 공격으로 지금의 중국 요양으로 옮겨갔고 그 곳이 고려의 서경이 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이어받아 세계로 다시 도약해야 할 우리
역사스페셜 다시좀 만들어주세요ㅠㅠ
요번주에 시작했어요 이제 토크역사는 않함ㅋㅋ
없애불자.전교조.여가부.민로총.강단사단.민족의 호연지기를 위해서 반민족.반국가.반역사.반교육.반성평등단체들을 폐지하여 본연의 호연지기로 큰 대한민국으로 다시 태어나자.잉.
문재앙 정부 들어서고
역사저널은 2년 넘게 반일하다가
시간대 옮겨버리고
고액출연료 지불하면서
헌법조무사 김좌동 앉혀서
되도안되는 방송 조기종영 ㅋㅋㅋㅋㅋ
ㅡ
서긍사신의 방문시 고려수도는 지금의 북경입니다.
서긍의 북경까지 이동경로를 구글 지도 및 고지도로 명괘하게 설영한 방송이 있습니다. 책보고 방송을 보시면 나옵니다.
이런 프로그램 하나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취재가 필요할까
맞아요.
나무위키
대고려사는 언제 보아도, 연구해도, 흥미롭고 신비롭습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시진핑 구두나 닦아라
@@고구려백제중국사들
三國史記 - 中 - '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 :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의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두통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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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봤냐? 고구려와 백제가 남으로는 오, 월 북으로는 연,제,노 란다... 그럼 위치가 어디매뇨? 1시간줄께... 위치가 어디야? 븅신색이..... 그것도 모르냐? 짱골라 쉑기가?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송나라는 몽골한테 멸망당해서 ㅋ
중국 처녀들은 전부 결혼 전에 초야권으로 몽골군인들 한테 겁탈당했잔아 ㅋㅋㅋㅋㅋㅋ
오죽 못났으면 몽골 통치 시기 고려인들 아래 3등 국민이 한족들 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가축이랑 같은 취급 당했잔아 ㅋㅋㅋ 지금도 당 간부들이 가축 노예로 취급하는 중이잖아 ㅋㅋ
반박좀 해보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
서긍사신의 방문시 고려수도는 지금의 북경입니다.
서긍의 북경까지 이동경로를 구글 지도 및 고지도로 명괘하게 설영한 방송이 있습니다. 책보고 방송을 보시면 나옵니다.
대고려에 대한 참으로 귀중한 역사적 자료 영상입니다. 주변에 잘 알리겠습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송나라는 몽골한테 멸망당해서 ㅋ
중국 처녀들은 전부 결혼 전에 초야권으로 몽골군인들 한테 겁탈당했잔아 ㅋㅋㅋㅋㅋㅋ
오죽 못났으면 몽골 통치 시기 고려인들 아래 3등 국민이 한족들 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가축이랑 같은 취급 당했잔아 ㅋㅋㅋ 지금도 당 간부들이 가축 노예로 취급하는 중이잖아 ㅋㅋ
반박좀 해보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가 고구려라 부르는 고려도 사실은 고려고 발해라 부르는 고려도 고려고 왕건의 고려도 고려고 영어로 코리아라 부르는 말도 고려고 한민족의 전체 역사에서 조선도 있고 신라도 있고 백제도 있고 가야도 있지만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할때 가장 자주적이고 강력한 나라를 운용했던거 같아서 결국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름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유태인은 어디서 태어나도 유태인이 거처럼 우리 민족을 이제 고려인으로 정의하는 것도 괜찮을듯싶은데
@동해안오징어 고려 = 코리아 가 포인트가 아니구요 우리가 교과서에서 잘못배워서 부르는 나라들이 다 고려였다는게 포인트 입니다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불렀나가 아니라
우리가 한자와 중국기록 사대주의 일본제국시대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우리의 선조들이 불렀던 나라이름에 대해서요
@동해안오징어 … 고구려라고 부르지만 장수왕때 그당시 사람들은 일단 정확한 발음이 같지는 않지만 고려라고 했습니다 웹에서 검색해보세요 나와요 발해도 중국기록이고 스스로를 고려왕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고요 고려라 배운 왕건이 세운 고려는 당연히 고려구요
근데 교과서에선 고구려, 발해로만 가르치잖아요 요즘은 모르겠지만 저때는 그랬어요
지금도 그냥 보편적으로 고구려라고 부르고 발해라고 부르잖아요
고구려를 좀더 연구하신 분들 이야기중에
고려가 아니라 고리라 발음되었던게 맞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당시 발음과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고 대부분 한자를 보고 소리를 유추하는거니까요
암튼 고려였다구요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선조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이름이
@동해안오징어 다 알면서 모르겠다고 하니 저도 더 무슨 이야기를 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qwer4k4096 동해안 오징어라고 하잖아요~ 이해하세요. 북한에서 남북이 교류하고 통일되면 그때가서 발굴 모색해야한다면서 발굴을 미뤄둔 고려 유적들이 흙속에 많이 묻혀 있습니다. 건물 지을 때에도 성터 건드리지말고 건물 짓게 김일성이 명하고,,, 앞으로 개성은 남북 교류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 나올 도시입니다.
@@mooyook2 진짜인가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나라가 진정한 대고려의 후예로서 그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지
우리역사 중 고려만큼 억울한 평가를 받는 나라는 없을 듯.. 대제국 고려가 조선만도 못하게 그려놨어ㅡㅡ언제 고칠래ㅡ
대제국은 개뿔ㅋㅋㅋㅋ요,금,원의 속국이었는데
@@PrettyT-rex 지랄을해라. 요,금,한 은의 뿌리는 배달과 같다. 단지 한나라의 위치상 우리 민족의 발현지라서 고토수복의 목적을가지고 오랑캐니 뭐니 하며 싸웠지만.같은 뿌리인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 알고있는데?
@@PrettyT-rex그럴리가 ㅎㅎ 중국이 다 왜곡된역사지 고려는 황제국이에요 ㅎㅎ
왕씨가 왜 중국내륙에 더 많겠어요 생각좀해보세요 ㅎㅎ
@@PrettyT-rex서긍사신의 방문시 고려수도는 지금의 북경입니다.
서긍의 북경까지 이동경로를 구글 지도 및 고지도로 명괘하게 설영한 방송이 있습니다. 책보고 방송을 보시면 나옵니다.
@@달달허네-o5f황제가 먼진아세요? 삼황과오제 합쳐서 황제 , 삼환오제는 고려의 전설인가요? 단군은 버릴거예요?
우람한 고래등 같은 검푸른 돌기와도 멋지건만 푸른 청자기와라니 ㅎㄷㄷㄷㄷㄷㄷㄷㄷ 그걸 일일이 문양 새기고 엄청난 고열에서 파트별로 다 굽고 걸 퍼즐처럼 다 맞췄을거 아닌가.. 진짜 목판인쇄술 금속활자 역시 세계 최초 최고에 찬란하고 위대한 우리 민족!
그 청자기와를 굽는 대규모 도자기 생산 단지가 한반도에는 없고 중국 경덕진에서 고려청자와 그 기와들을 구웠으리라 추정합니다.
가마터가 기록에 나와 있어요.
뭐가 다 엇어서 추정하고 그런게 아니에요.
청자 기와는 주 재료가 코발트라 이후 수입되지 않아서 청자도 못만듭니다.
그래서 백제의 시대가 오는 거에요
아 대륙에 존재했던 고구려와 백제 신라
옛고토를 제대로 알고싶다. 책보고 유튜브 꼭 봐보시면 진정한 역사를 아실겁니다
고려는 대륙에 있었다
황제국 고려 ...
식민사관은 이제그만
ㄹㅇ 이게 진짜 역사...
근데 어디가서 이런말하니까 모지리 취급받음 ㅋㅋ...
책보고는 너무 나갔음 무쿠리나 고대사 매림 보셈
@@brgb90 아니지 뇌피셜보단 항상 근거 제시하는 책보고가 더 논리적이다.
책보고 주장은 반박할수 없다 왜냐
근거를 제시하거든
19년전 다큐를 다시 볼수있다니 너무 좋네요
예전에 고려도경을 도서관에서 잠깐 읽은 적이 있는데 서긍은 개성에 들어가기 전 서해 섬을 거쳐서 들어갔습니다,추정한다면, 소정방 당군대와 맥아더 유엔군이 주둔한 덕적도는 교통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서긍도 덕적도에 하루 머문 후에 송경에 들어갔을 겁니다,,그리고 내용중 선인문은 양주,전주,나주로 통하고 안정문은 경주,경기 광주,청주로 통하고 북창문은 한성으로 통한다고 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다는데,저 지명이 지금 지명과 같은지 의문이 든다,양주,전주,나주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같이 묶일 수 있는 건가?박창화 강역고에서 본 적 있는데 상주,나주,청주,전주, 이런 지명은 원래 모두 한강 유역에 있었다고 했다,왕건이 후백제와 싸울 때 바다를 돌아 나주 상륙작전을 하는데 좀 이상하단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나주가 지금 위치 아니라면 이상한 게 아니다,또 왕건이 나주 호족 딸과 결혼하는데 훈요십조에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인을 쓰지마란 훈요를 남긴 게 이상하지않나?우리 역사의 미스터리는 지명의 혼란때문인데 학계의 지명연구는 좀 부족한 거 같다,,
서해라는 표현이 나오나요?
개인적인 내 생각, 대한민국은 새로운 거는 추진을 많이 하는데 역사와 전통은 소홀히 여기는 듯.
아주 좋은 내용입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ㅂ
@@고구려백제중국사들 ㅅ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너의 무식이나 신경써라
@@고구려백제중국사들 한나라가 중국인 조상이냐? 등신아 그 사람들도 다 복방민족들인데
@@고구려백제중국사들 그럼 무식은 죄지 너 같은 무식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세뇌되는거야 지금 중국이 정상이더냐
33:25 고려때는 저렇게 잘 씻고 문명국가였는데 조선시대 500년은 우리 역사의 퇴행길이었음이 분명하다
이희수교수님~반가워용~ㅎ
고마워요 ! 😄 😄 😄
고려시대의 다섯 관문들은 국제 무역과 경제적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진 곳 들 이었네요.
역사스패셜 전편을 다시 4K로 리뉴얼해서 재방송 했으면 좋겠습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교육열...
서북을 경계라 했고 서로는 과거 고구려에 못미쳤으나 동으로는 선춘령에 이르렀다 했습니다. 선춘령은 두만강북쪽 700리에 있습니다. 지금 심양 북쪽에 철령박물관에도 그곳이 거란과 고려의 국경지대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환빠도 병이지만 당신같은 국까도 병입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아이디가 ㅂㅅ인증인데. ㅋㅋ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금나라, 요나라가 중국역사였어?? ㅋㅋㅋㅋ
댓글도배하고 다니는 알바는 차단하시면 됩니다 , 차단기능들 쓰세요
@@yorkaveeno378 그럼 어디 역사임?
목욕을 자주하고 남녀가 혼욕하고 성이 개방적이었다니 감동적이다. 조선시대 사극보다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사극을 더 많이 만들면 좋겠다.
그래서망햇나고려가성욕?
@@김주상-w9i 천하의 역적 리성계한테 물어보라.리성계는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감동적일꺼 까지야 있나. 일본이 그래왔는데
정말 성리학 지겹다.
성 개방적인건 지금도 못지않음 ㅋㅋ
혼욕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전통이었을듯... 삼국시대 풍속중 상당부분이 일본에서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왔음...
옛날 개성사람들이 한양을 갈때 상경한다고 안하고 서울에 내려간다고 한 이유가 저렇게 개성이 고려의수도였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었군요!!
뭐야 그냥 그건 아래지방으로 내려간다는 뜻 아닌가
@@금김-j9g 니라의 수도는 산의 정상과 같은 의미라서 산의 동서남북 사방 모두 정상에서는 내려가는거고 주위에서는 정상으로 올라가는거죠 예로 신의주도 한양으로 올라가는거고 부산도 한양으로 올라가는거죠 한양에서는 신의주 부산 모두 내려가는거고요
개성은 아카드인의 후예가 세운 도시입니다
아카드 - 아카스 - 아카서 - 아카성 - 카성 - 캐서우- 개성
@동해안오징어 귀속말 (오늘은 몇번했냐?)123?
여러분은지금 고자가 발기가 되는
기적을 보고 계시십니다
@@vegetator 넌 누구니? 여기서 이럴 시간에 윤짜장네 술쳐먹고 있다하니 거기가서 서빙이나 보려무나. 가는 길에 나경원이 데리고 좀 가고...
반도 고려가 아니고 대륙고려다 아 잃어버렸다
고려의 개경은 지금 개성이 아닌데... ㅠ
지금 중국 땅... 서경은 지금의 북경이었음..
@@mikekm88 그땅들은 언제 잃었어요? 진거면진거고 잃었으면은 잃은거예요 .
역성 반란하려는 이성계하고 역시 동족이나 다름없는 사타족으로서 홍건적하다 공민왕때 개경을 침입한 주원장을 포함한 홍건적을 개경을 되찾는 진공작전에 처음 투입된 젊은 장수이자 여러 성문중 첫 성문을 연 이성계가 다른 홍건적 리더들은 나중에 잡혀서 다 목을 베였는데 전라도에서 이성계와 주원장 둘다 아버지들 묘자리 찾다 만난적있는 안면으로 주원장만 빼내준 적 있는 것에 대한 보답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때 주원장과 그 아들 후일의 영락제와 이성계와 이방원이 만나서 둘다 한민족과 같으니 나이많은 주원장이 대륙 먹고 이성계가 연산파절에서 공험진,선춘령까지 만주와 반도를 먹기로 하고 역성혁명이 가능하게 되도 않는 명이 왕을 정할 권한이 있는 황제국인양 보이게 우리국민을 현혹해온 것임. 여기나 책보고 고려도경 2024.3.2 영상보니 본래 고려가 왕을 정할 권한있던 황제국이었네.
반란자 이성계와 사타족 주원장 둘다 우리민족 계열이라 우리가 화하족에 빼앗긴게 아니고 우리끼리의 담합이었음. 청은 명을 계승하였기에 명의 영토으 계승자이고 청도 우리 친척 북방의 말갈족이지만 청을 계승하지않은 신해혁명 동조자들 청의 영토와 청이 개척한 땅에 대한 권한이 없음. 청의 땅은 같은 북방민족이자 친척인 우리가 대신 되찾을 자격이 있음. 그 땅에 여진 즉 말갈족과 거란족등 친척 북방민족은 살 자격있음.
@@kun3929 땅을 잃었어도 역사는 제대로 가르쳐야죠.
책보고 유튜브 채널에서 황제국 고려영토에 대해 확인해보시길... 원 침공전 고려영토가 얼마나 거대했는지....
고려는 전세계를 지배했음
송나라가 당대 고려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며 조화를 꽤한부분도 인상깊지만 무엇보다 글공부하는거, 조상들이 글읽지못하는걸 부끄럽게여겨 애고 병졸이고 모두 글공부를 하였다고 최고로 극찬했다는점을보면 우리나라가 청나라에 갔을때 또 임란후 일본에가서 각 국가의 실정과 파악한모습을 보며 똥덩이조차도 효율적으로 관리하던 청의 모습, 일찍이 개방해서 조총등을 들이고 여러 재원들을 타국과 교역하며모은 어마어마한 은으로 국방력과 내수를 전성기로 끌어올려100년의 전국시대의 바로다음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부유했던 당대 일본의 모습을 애써눈가리고 비판, 비난만했던모습과 대비되네요.. 대국,강국이 되는건 다 이런 사소한 마음가짐에서 시작되죠..
이건 못났네 이걸뭐하러해 가 아닌 아 이 점은 인상깊다 아 이건 잘한다 부러운모습이다 이 나라는 왜 이걸 하려했나?
한족들은 왜 만주족에게 굴복하였는가? 일본의 부유함의 근원이 어디서 시작됬는가?이런식의 열하일기를 썼던 박지원같은 모습이 우리가 지금 가져야할 덕목이 아닌가 생각케 합니다.
@폭행몬스터 제가 언어적으로 인정했다는 말로 혼란을 드려서그런지 공격적으로 반응하시는거같네요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기록은 없겠죠.
다만 고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썼던것, 조공국을 두고 조공제도를 유지하던점 그 기록으로써 조공국,속국이라는 개념으로써 해당 지역이나 국가을 기록한점 제후국왕을주고 식읍과 작위를 하사한점, 팔관회같은 큰 행사를 독자적으로 열고 온갖사신들과 연회를 열던점, 똑 풍입송조같은시에서 해동"천자"하며 금석문들의 기록과 같이 고려인 스스로도 자국 최고지도자를 황제로써 칭한점, 원구단같은 황제국이나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개소를 설치하여 제사를지낸점, 제후국을 자처하고 중화에 사대함으로써 나라의 근간을 뒀던 조선과달리 6부 정치체계를 정비하여 운용했던점,
결정적으로 송 또한 고려사신을 맞이하며 조공국이아닌 동등한 국신사의 대우로 고려사신을 맞이한점등
고려가 고구려의 기백을이어 당대 독자적인 천하관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국으로써 뽐내며 송이나 여타 국가들이 그에 제동을걸거나 마찰을 가진것이 없다는점은 충분히 싫든 좋든 송이 고려를 명실상부 황제국으로 칭하던말던 놔뒀던거랑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정했다는 말씀을드린건데 공식문서기록이없으니 말실수라면실수입니다 아시겠지만, 중원의 통일국가는 중원이 중심으로 돌아가는 중화사상에 주변국을 제후국으로써 두고조공제도로써 운용하겠다는게 근간사상입니다 송은 그러지못했죠
그 사실자체만으로도 고려가 황제국으로써 거칠게없었고 송도 그런의지가없었다는건 명실상부 고려가황제국이었다는걸 의미하는것이고 이러한 증거와 기록, 정황들이 당시 주변국들에게 고려가 황제국으로써 인정받은거라고 지금 여기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제말이 틀렸습니까?
생각만해도. 가슴 벅차 오르는 북한과의 통일~이것은 진정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의 앞장설 디딤돌이 될것이라 생각되어 우리의 우수성과 ,화합하고 선진국의 조건을 갖추기에 손색이 없는 문화민족으로 나아가길 두손모아 기원합니다
좁은 반도에서 벗어나 웅대한 꿈을 가지시길...동북삼성과 연해주를 탈환하여 중국 러시아를 노예로 부려야죠.
현재 전세계 통용되는 우리 국호가 chosen이 아니라 korea라서 정말 다행~
조선도 나쁘지는 않아보여요 조선이란 지금의 미국 usa처럼 고대사에 연방국가라는 개념이었으니까요 지금도 카자흐스탄은 조선의 음차인 주스시스템 오르타주스 크스주스 울루주스 3주스쓰고있으니까요 우리도 그연방중에 일원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니까요 그렇다고 다 우리꺼 이건아니고 조선 (주스)이라는 큰카테고리안에 한 일원이었으니까요
@@SamSaek. 이런 근거없는 주장은 제발 그만요. 동북공정 탓할 수가 없어요.
@@piggypiggy2029 카자흐스탄 가보셨나요? 전 오르타주스 알마티에서 좀있었구요 거기교수님이 들려주신 얘기구요 본인의 무지를 통용이라 생각하지마세요 카쟉스탄 130개부족중에 캉글리 케레이등은 그사람들이 우리를 동족으로봐요 걔들 족보에도 써있구요 괜히터키가 추진중인 범알타이 튀르크 역사교과서에 우리나라까지 넣는 이유가있습니다
@@SamSaek. 국가로서 조선은 BC7세기경부터 중국역사서에 등장합니다만....그때도 연방국가라는 개념이 있었나요? 중국은 주나라 봉건국가시대였는데요.
우리나라는 지금 식민사관때문에 수천년 세월동안 반도에서 벗어나면 큰일나는 사람들이 주류에요.. 본인들이 알고있는거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미친x취급받음 ㅜㅜ
이런 고려가 무너지고 쇄국의 조선으로 이어진게 안타깝다.
조선초기는 그래도 갓세종과 한글로 방어가 됨
그래도 고려후기보다는 조선초기가 훨씬 좋았음
조선도 태종 세종 문종 라인은 대한민국 역사 최고 전성기중 하나였음 수양ㅅㄲ가 말아먹은게 나비효과로 터진거지
훈구파들이 다른문물에 호의적이고 사림파들이 우리가 흔히아는 주자학빠는 ㅆ선비들
개방적이긴하나 음서제등으로 진짜 지들끼리만 다 해처먹는 극한의 귀족중심사회인 고려도 그렇게 좋다고만은 못할듯...
종아쉽지만 ㅡ어쩌랴 역사적흐름인것을
벽란도
강화도에가 본 사람은 알죠
개경이 개성이면 절대 나무배타고
가기 쉽지 않습니다
일단 조수간만의 차가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해변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많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리고 조류가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지역인데
거기로 해상무역을 했다고 생각하는건
어불성설입니다
중국 베이징동남쪽에 벽란이란 지역이 있으며
그곳은 바다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베이징엔 고려영 즉 고려의 군사기지란
지명이 남아있죠
개경은 베이징이었습니다
고려보다 수백년뒤의 해상강국이라던
일본이 임진왜란때도 먼바다로 못가고
굳이 명량에 들어가 어떤 일을 겪는지
역사를 이해못하고 당시 항해술을 이해 못하는겁니다
고려가 정말 교과서만큼
작은 나라였다면
수도가 서경 개경 남경이라
굳이 수도를 3개로 나눌 이유도
없을 뿐더러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당시
철령위를 설치한다는데
개성에서 동북방향인 철령으로
가는것이 아니고 압록강을 건넌것도
모순입니다
개경은 이름이 비슷한 개성이다
라고 비정하는것일뿐
그 어떤 증거도 없으며
이것은 이명박을
김명박 최명박 강명박을
모두 같은 사람으로
인지하는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씰데없는 상상이라 ~~~~
@@이진호-i5l
논리로 설명 못하고
상상이라 반박하는건가요?
@@이진호-i5l 빙딱 식민사관 처믿는것들ㅋ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다. 인천항의 그것이 약 9m에 이를 정도니, 인천보다 약 60km 북쪽에 있는 벽란도도 10m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에서 온 무역선들이 벽란도에 어떻게 접안을 했을까? 문헌자료에 의하면,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수심이 깊다는 언급만 있을 뿐 부두시설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추측하건대, 외해(外海) 쪽에 묘박지(錨泊地)를 두고 밀물 때에 접안을 하여 하역과 선적을 했던 것 같다
또한 여러 선박들이 동시에 접안을 하려면 기다란 잔교(棧橋) 시설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도경’에 묘사된 화려한 입항 장면으로도 능히 상상이 된다.
잔교 설치를 위해서는 우선 연안의 물 속에다 일정 간격으로 말뚝을 박고, 그 위에 가교(架橋)를 가설하면 된다. 비슷한 사례로 해상왕 장보고의 청해진(완도) 유적에는 지금도 해안에 가지런히 박혀있는 말뚝들을 볼 수 있다.
[출처] 벽란도(碧瀾渡), 고려의 국제항은 얼마나 붐볐을까|작성자 박하
청자기와를 사용했다하니 그자태가 궁금해지네요.!고려는 황제국이어음이 틀림없네요
고려圖경인데 그림만 싹 사라짐ㅋㅋㅋㅋㅋㅋ
고려 대륙에 있었던거 맞는 듯ㅋ
송나라 조선술로 서해바다 넘어갈 배 못만든다ㅋ
기원전후에서 서해 바다 넘나 들었어요.
한국도 일본도 중국도 이미..
하루 이틀이면 갑니다.
기원전에 한나라는 어떻게 평양성을 공격했겠어요.
배타고 왔는데.. 한두척도 아니고..
그리고 사신단이 타 송나라배는 100미터 가까이 됩니다.
무동력으론 못오죠
주자학을 근본으로 문치를 하는 나라는 모두 주변 국가에 먹잇감이된다.
중국의 송나라가 그랬고
우리의 조선이 그랬다.
영문 코리아의 기원이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한 고려에서 비롯된것이죠 고려와 무역을 하던 중동의 상인들이 자기나라의 왕에게 보고할때 고려를 코리아라고 보고했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전 고구려에서 이미 고려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외국에도 고려라고 하고 다닌 걸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시기가 앞당겨진거죠.
그리고 고려는 고구려의 줄임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ㅋㅋㅋㅋ
고려의 어원은 부여를 세운 동명왕이 살았던 '고리국'에서 온 것이 정설입니다.
참고로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주몽은 당연히 다른사람임.
@@김환희-j9y 아 ~~예 저도 어릴 때 한문학자셨던 외할아버지께서 동명성왕과 주몽은 다른사람이고 동명왕이 주몽보다 한참 앞의 사람이고 고리국사람 이라셨던 말씀 기억납니다
고려의 원래 발음을 "코리" 혹은 "고리" 로 보기도 합니다. 옛날의 권위있는 자전을 보면 '고울 려'자가 지역 이름으로 쓰일 때는 '리'라고 발음된다고 적혀 있기도 하고, 원제국 시대의 이슬람 학자가 쓴 글에는 고려를 '코리' 또는 '카울리'로 적고 있습니다. 만약에 '고려'가 아닌 '고리' 로 불렸다면 매우 자연스럽게 '코리아'가 됩니다. 이슬람 학자가 쓴 원나라 역사서에 나오는 '카울리'에 '아'를 붙여도 빠르게 발음할 때는 '카울리아'가 '코리아'가 됩니다..
고려도경의 고려는, 대륙 고려임을 증명하기 바랍니다. 이제는 진실을 찾아야 할 때.
세계 속의 고려가 처음 등장한
지도에 'COREA' ~
일제가 바꿔버린 KOREA를
원상 회복에 국민의 마음이 한뜻되도록 노력하여 주십시오.
고려의 위상은 자긍심을
갖게합니다^^
그건 망상임
C K 는 나라마다 다름
중국이 C인데 굳이 C할 필요는 없음
네 그건 저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데 요즘 전세계 K-팝이 유행인데 , 바꾸면 C-팝 이 약간 욕같아서 그것도 큰일입니다
최영이 철령위를 공격하러 갈 때 그 지역에는 정주도 있다 했습니다. 정주는 고려사에서 말하기를 옛 귀주의 개명이라 했습니다. 강감찬이 거란을 패퇴시킨 곳입니다.
지금 심양 북쪽의 철령박물관에는 과거 그 곳이 거란과 고려의 국경지역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주원장이 철령위를 새로 옮기려 한 지역은 심양 남쪽의 奉集堡 입니다.
지금도 그곳에 표지석이 있습니다.
그랬군요.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귀중한 정보를 얻고 갑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부지런히도 댓달고 다녔다잉?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송나라는 몽골한테 멸망당해서 ㅋ
중국 처녀들은 전부 결혼 전에 초야권으로 몽골군인들 한테 겁탈당했잔아 ㅋㅋㅋㅋㅋㅋ
오죽 못났으면 몽골 통치 시기 고려인들 아래 3등 국민이 한족들 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가축이랑 같은 취급 당했잔아 ㅋㅋㅋ 지금도 당 간부들이 가축 노예로 취급하는 중이잖아 ㅋㅋ
반박좀 해보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
거란과 대치하던 시절 고려국경은 최소 요하동쪽이 맞는듯, 그런데 교과서는 왜 이모냥일까
알고보면 고려도경은 첩자와 내부 첩부 보고서... 저 송 나라 신하 첩자가 능력이 뛰어나서 다행이네요 꼼꼼히 작성해서
아이러니하게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의 한양은 아주 폐쇄적인 도시였죠.. 명이 해금 정책을 편다고 조선도 같이 해금정책을 썼죠.. 송나라도 해금정책이었지만, 고려는 개방적이었죠..
송나라가 왜 해금정책?? 원나라때부터 해금정책 이고
명나라땐 해금정책 굳건히.
조선은 해금을 넘어서 공도화
해상교역도 같이 할 상대가있어야하는 겁니다.ㅋㅋ혼자배끌고나가면 뭐합니까?
헐 청자 기와라니... 멀리서 보면 푸른빛이 번쩍번쩍했겠네 ㄷㄷ
고려는 유교보다는 불교중심 국가였으니까 문화적인 부분에서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여성의 지위도 그렇고 외국이랑 교역도 많이해서 꽤 국제적이었을 듯해요
조선시대가 없었다면 이라고 역사엔 가정이 불가능하다지만 만약 고려가 망하고 비슷한 왕조가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궁금합니다
청나라에게 멸망했겠죠 뭐
고려가 조선보다 훨씬 부강한 나라였음은 분명합니다. 다만 서민이나 천민에게 얼마나 가혹했던 나라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백성에게 있어 더 나은 시대가 언제였을 거라곤 확신하지 못하겠네요.
다만 자주적 ㆍ 개방적이었던 그 기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면 한국의 국력과 국제적 지위는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청과의 관계에 있어선 거란에게 그랬던 것처럼 굴하지 않고 한 판 붙었을 것 같긴 해요. 애초에 농경민족의 정서로는 북방민족을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요.
조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충돌의 대외적 근거. 바보처럼 명나라를 숭상하는 교리를 내세워 청을 배척하진 않았겠죠.
그리고 승리했다면 여요전쟁과 같은 대박이고 단숨에 국제적 갑의 자리에 올라섰겠죠.
패배했다면 당연히 신하국으로 전락했겠지만 청과 서역의 발전된 문물을 거부하지 않고 부강해질 방법을 찾았을 거고요.
근대에 들어선 많이 다른 한국이 되었겠죠.
@@별밤지기 네 맞습니다.
@@별밤지기 금나라하던거처럼 똑같았을거라봄 ㅋ형제나라로하고 중국중서부는 청나라가 차지
홍건적이 무엇하려 개성까지 왔을까요. 배고프면, 광활한 황하평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중요한 그림, 중요한 부분의 내용, 항상 중요한 부분만 안보이니 왜일까요. 남제서도 그렇고
중요한 부분은 삭제되고 별볼일 없는 부분만 남는군요. 삼국사의 현장에서 활동한 최치원의 상대사시중장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것은 그나마 기적에 가깝습니다. 언젠가는
그나마 사라지겠지만.........
그러게 말입니다 요가 송정벌전에 왜 고려를 먼저 쳤을까 송은왜 서북으로 고려랑 맞닿아있었다 했을까 옛국가들의 영토가 항상 같을거라고 생각하는 멍청한 사학자들 고려의 영토가 왜 한반도에만 국한되있다고 생각하는지
33:03 중국인들에게 깨끗하지 않다고 충고했다...... 중국인이 때넘으로 불리는 이유다.
근데 일본기록보면 조선통신사들 냄새나고 꼬질꼬질하다고 기록된게있어요 우리도 씻는문화는 조선시대가면서 좀 퇴보했죠..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송나라는 몽골한테 멸망당해서 ㅋ
중국 처녀들은 전부 결혼 전에 초야권으로 몽골군인들 한테 겁탈당했잔아 ㅋㅋㅋㅋㅋㅋ
오죽 못났으면 몽골 통치 시기 고려인들 아래 3등 국민이 한족들 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가축이랑 같은 취급 당했잔아 ㅋㅋㅋ 지금도 당 간부들이 가축 노예로 취급하는 중이잖아 ㅋㅋ
반박좀 해보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
되놈이라 불렀죠 삼국시대 이전부터
외국인들 경복궁만 봐도 놀라던데, 고려 황성도 남아있고 볼 수만 있다면 더 놀라겠다.
걍 립서비스 해주는거지 뭔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모스크바 중국 미국 영국 등 선진국 대도시 가봐라 어떻게 저렇게 만들었을까 싶은 규모 모양을 건물들이 수백년동안 계속 이어져 오고있음
@@maye1672 고구려 남은 성벽만 봐도 조선보다 어마어마 하던디유
고려도경 내용을 보면 역시 고려수도 개경은 하북성 북경 이었음이 증명 되는군요.
고려의 원래 발음을 "코리" 혹은 "고리" 로 보기도 합니다. 옛날의 권위있는 자전을 보면 '고울 려'자가 지역 이름으로 쓰일 때는 '리'라고 발음된다고 적혀 있기도 하고, 원제국 시대의 이슬람 학자가 쓴 글에는 고려를 '코리' 또는 '카울리'로 적고 있습니다. 만약에 '고려'가 아닌 '고리' 로 불렸다면 매우 자연스럽게 '코리아'가 됩니다. 이슬람 학자가 쓴 원나라 역사서에 나오는 '카울리'에 '아'를 붙여도 빠르게 발음할 때는 '카울리아'가 '코리아'가 됩니다..
고쿠나이=고구려(음차)=국내(한자)
아사다노루=아사달(음차)=조선(한자)
고구려는 장수왕때 이 음차와 연결된 국가명을 끈으려고 “고려”(고씨의나라)로 탈피함
영어에서나 코리아 입니다. 원래 코리 입니다.
" 고리 " 나 " 코리 " 또는 "가리" 로 불렸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우리 민족의 한 갈래인 '훈족' 도 같은 나라이름 ' 고리' 를 썼습니다.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을 해서 나라이름 ' 훈고리 -> 헝가리' 로 변한 이유입니다.
무슨 소리에요 중국식 발음이 고리에 가까운데. 가오리였나?
고려에서 려는 고울 려, 나라 이름으로 쓸때는 리로 부른다.
옥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게임캐릭터 춘리 春麗 한자가 동일합니다. 려 또는 리
쓰잘데기 없는 드라마 만들지 말고 이런 프로그램 좀 다시 만들어라 이 개비에스야! 수신료 값을 해
그래서 다시 만들었습니다 ㅋㅋㅋ
요번주에 첫방송 했어요
역사스페셜 대하드라마 없앤 놈이 누구지?
개막장 불륜드라마 신데렐라드라마 개쓰레기 프로그램들 말잔치들
이성계의 500년 조선으로 인해 지금까지 헬조선....
남북통일이 되면 개성 도성을 다시 복구하기 위하여 현존하는 시설물들을
외곽으로 이주시키고 옛 도성을 완벽하게 재현하여 국제적인 관광지로
만들자.
그려...짝짜꿍
의미가 없음ㅋㅋ 역사적 가치가 있을려면 그시대 원형과 똑같이 재건해야 하는데 자료가 하나두 없어요
경복궁조차 자료 부족으 로 복원하는데 애먹고 있는데 ㅋㅋ
복구하면 진짜 멋잇긴할듯... 근데 경주도 그렇고 복구가 쉽진않을듯.. 고려 만월대 복구만해도 기와를 다 청자로 만들어야하는데 어휴 ;; 돈 장난아닐듯;
공감합니다. 예전부터 해 오던 생각인데, 같은 생각을 가진 분이 계시니 반갑습니다! 궁뿐만 아니라, 개경이라는 도시 전체를 복원+관광지+세트장으로 만들면 경제적으로도 유익한 프로젝트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duke-tv 제가 장담하는데 월정교도 상록하단에다가 고증에 안맞게 만들었는데... 경주조차 그런데 과연 개성을 고려식으로 만들까요 만들고 나면 조선식처럼 보일꺼에 100프로 장담합니다.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라 직접 개성에서 촬영하고, 북한 대학교수의 해설도 들어가며 프로그램을 제작했군요.
그러게요. 개성 거리의 실황과 북한 역사학자들의 설명을 보고 들으니 신기하네요. 학문적 교류가 가능한 시점에 다큐를 남겨주셔서 감사하네요.
송악산도 멋지네요
고려에 가서 고려인들을 만난 것이지요. 고려는 중국 대륙에 있었습니다. 중국에 세워진 남자 동상의 머리가 상투로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우리 한민족이네요. 제발 한반도 식민사관에서 벗어납시다.
상투 비슷한건 일본,중국,인도에도 있어요.
홍건적이 개경까지 왔다고...
이해할 수가 없음..
말도 안되는 것 같음..
요동에서 얼마 안멀어요 개경이.. 말타면 3일이면 와요
위오촉과 우리 삼국의 위치 강의 잘 들었어요.
이런것으로보면 고려가 송에 조공을 받쳤다는 중국 기록은 거짓이고 오히려 송이 고려에 조공외교 한것인 것 같습니다.
조공은 했어요 그때는 조공이 항상 나쁜건 아니고 물건선물 정도였거든요.
@@userkoreakorea 조공 온 하국의 사절단을 환대하느라 국가 경제에도 영향을 주다는 항소가 올라 갔었던거군요 제가 대학때 교양시간에 배웠던기억에는 조공으ㅣ 의미가 원 나라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고 배웠던거 같네요
그때는 고려와 송나라가 국력이 달랐던게 아닐까요?
고려 서북국경이 요서 시라무렌강이었다구 하던데요~~
고구려를 이은 나라라구 해서 나라이름도 고려인데 영토도 고구려정도 되지 않았을까여~~?
Since there was ancient civilization North of North Korea with Stonehenge and waved sword only mostly found in Korea and North region, there as a culture that had religion, language, culture, metallurgy. If that is the indication, the recent discovery of the red mountain including the Godness statue wearing a Bear necklace (Bear is symbolic for women in Korean culture at that time there was Bear nation and Tiger nation and Bird nation(the root of ancient Korea has bird at top of their totem poles) and most likely Bird nation took Bear nation's princess(VIP woman) as Bride) -- that dates back 7000 BC. Fast forward to about 700 AD, After writing was more prevalent, the numerous books scripted by "GongJa"(Confucius) words by his followers from China indicated "GongJa" say he learned everything from 'north' civilization. Thus, most historical documents indicate China's civilization was derived from this civilization. The Chinese books indicate 'north' civilization just 'north civilization' without a name. However, Korean calls in "GoChoSen" which means ancient (go) Cho (bird) sen (nation) of the old Korea. This first civilization of east Asia was so large that its people moved out to both east and westwards. The same or exact same artifacts are being discovered in North Italy to Ireland and Finland, to east all the way to Mexico, and along the traveling route, same or similar artifacts and languages are found. By the way, the next nation was called "Gogyro" which means hook which the ying-yang symbol came from, it means 'order or harmony via governing' set by GoChoSen. And following after GoChosen was the nation name of "Go (old) gyro (hook)' the 'hook' part 'gyro' became 'Korea' in the present day. It's interesting to find "Mississippi" "Michigan", etc and its meanings are the same as Korean! "Mi" - means in Korea is 'freshwater or river'; "chi or ci (si)" - means in Korea 'fish' - sippi and gan - means in Korea 'place (home or house), Again only in old GoChoSen languages. Note that in linguistics, it's very hard to not only match the sound but also the meaning. If I follow the logic, unless there was a large population and civilization with the resource and advancement of culture only can have the means to explore in the motivation of necessity or curiosity. And the people from such civilizations can only expand and overlap o ver further expansions It may be worth studying the "yo-dong" civilization and first nation of Eas Asia (or maybe the human Sapien Sapien) "GochoSen" more in-depth. It can bring together the puzzles of where nations come from and why there was a road before the silk road that was well-traveled with premium horses and carts with carts at least 5000 BC before the silk road.
저는 역사를 공부를 하
류도 종일 책보고 유 트뷰 보고 하류가
즐거운. 습니다..~~~
고려 전성기 때 국제위상에 대해서도 꼭 다뤄주세요. 송사에는 이런 기록까지 남아있습니다.
1. 송나라가 고려 사신을 위해 운하까지 파버리자 이를 반대하다 파직 당한 손부와 허한의 일화.
"고려가 조공하러 들어오자 백성을 동원하여 운하를 파느라 민간이 시끄러웠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손부(孫傅)가 고려가 나라에 도움이 없다고 하면서 큰 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니, 손부는 죄를 받아 파직되었다. 허한이 손부의 파직은 부당하고 말하니, 당시의 재상이 화가 나서 〈허한도〉 파직하고 강주태평관(江州太平觀)을 맡게 하였다."『宋史』卷363 列傳122 許翰 宋 徽宗 宣和 7年
2. 고려 사신에게 홀로 절을 하지 않아 중국의 자존심을 지킨 호순지 일화
"호순지(胡順之)가 청주(靑州)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고려가 사신을 보내오자 환관이 끼고는 중요하다고 여겨서는 청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성(城) 밖의 교(郊)에서 〈고려 사신〉을 맞이하게 하였다. 호순지가 “청주는 큰 군진(軍鎭)이다. 당나라 때에 신라(新羅)와 발해(渤海)를 맡았는데, 어찌 이 같이 비굴한가?”라고 말하고는 홀로 〈고려 사신에게〉 절하지 않았다."『宋史』卷303 列傳62 胡順之 宋 眞宗 天禧 4年 4月
고려의 황제 자존심이 너무 멋집니다
이것으로보면 고려때 청주는 대륙에 있다는 거죠? 고려이전 청주는 (통일)신라영역이었다는 거죠, 그말은 신라도 대륙에 있었다는 겁니다. 청주가 큰 성이 있는 군진이라는데 지금의 한반도 청주는 그 어디에도 성의 흔적이 있나요? 궁금하네요.
@@l.p.p2879 상당산성
교육열 높은 건,
고려시대나 현재나 다를 바 없네요.
유전자에 새겨진 걸까요?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친일식민사학의 부스러기들이 설치고 다니네요. 입지가 점차 줄어가는게 두려운건가? 역사를 매개로 밥그릇 싸움인거 압니다. 적당히 하쇼~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신농씨 동이족 이죠 확실히 알고 얘기 하시죠
그냥 한중일 유교문화권이 교육열이 세요. 중국같은 경우도 요즘에 보면 교육열 엄청나고 한국보다 심한 수준임.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송나라는 몽골한테 멸망당해서 ㅋ
중국 처녀들은 전부 결혼 전에 초야권으로 몽골군인들 한테 겁탈당했잔아 ㅋㅋㅋㅋㅋㅋ
오죽 못났으면 몽골 통치 시기 고려인들 아래 3등 국민이 한족들 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가축이랑 같은 취급 당했잔아 ㅋㅋㅋ 지금도 당 간부들이 가축 노예로 취급하는 중이잖아 ㅋㅋ
반박좀 해보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
유교 문화지 선비는 가난해도 책읽고 공부하는게 도리
고려땅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북쪽, 즉 북쪽의 천리장성까지 이어졌을 확률이 높고, 지금은 왜 한반도 밖에 안되냐... 고려가 원에 줘 터졌을 때와 조선이 여러번 이민족에 침입 받아 굴욕을 당했는데 땅을 북방 땅을 그대로 유지 했다는건 말이 안됨. 조금씩 실효 지배에서 밀리면서 한반도 안으로 축소된 것으로 보임.
우리 고대 삼국중 고구려는
로마 기록에도 나옵니다
그쪽에선 맥고리 라고 불럿습니다
고려도 고려가 아닌 고리 였고
우리가 코리아 라는 국명을
사용하게 된것은 고려 이전
고구려때 부터 입니다
우린 결코 반도 역사가 아닙니다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말한 도시가 개경, 북한의 개성이 정확하게 맞나요?
네
고려초기 1014년 이전의 수도는 개주(봉성.옛평양.발해동경)임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고 하였으며 요나라와의 전쟁 이후 수도를 개경으로 완전히 옮기고 개주를 서경이라고 하였으며 서경천도를 다시 고려하였습니다.고려는 황제국으로 송과 대등한 위치였습니다
송과 대등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죠 송에 파견된 고려사신단을 국신사로 모시고 올때마다 재정이 흔들릴정도 극진한 예우를 하고 고려사신을 맞으려 운하도 판걸로 중국고서 고려전에 나옵니다..
@@k5545ㄹㅇ 송은 불안정하여 남송때는 남송 화하족들이 한민족 영토로 도망갔다함
그래서 한국 국적자지만 시조가 남송때 화하족인 사람이 있음 성씨의 발음이나 글자가 같아도 시조가 다름 외모도 다르고
니뽕에도 있던데 손정의라는 사람은 시조가
화하족 사람임 손흥민과 달랐음 손흥민은 한민족 사람 니뽕까지도 갔나보다 함
@@k5545 여기에 분개하여 고려를 극혐한 '소동파'가 있습니다. 고려인들은 송나라 황제의 명까지도 우습게 여기고 금서도 마음대로 집어갔으니까요. 대만 드라마에서도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민필지고려는 송나라가 조공을 바치던 요나라를 격파한 명실상부 황제국이었고 송나라가 고려의 제후국이었다고 봅니다. 대륙 동부와 만주, 한반도에 걸쳐있던 고려는 원나라가 쫒겨나고 명나라와 조선이 고려를 나누어 가지면서 철저히 왜곡되고 축소됬어요.
서경이 지금 북경이다
자금성이 고려 왕성이다
검색좀 해봐라
고려는 불교를 사상기반으로하여 건국된 상업을 중시한 나라였다.
상인들은 이익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는 사람들이니 고려는 당연히
외국 상인들이 모여들었을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활력이 넘치고
사람들은 부유하게 살았다. 고대로부터도 불교 지지세력은 상인들 이었다.
상업이 발달하면 불교가 성했고 상업이 쇠퇴하면 불교도 영향력이 약해졌다. 활기가 넘치던 상업국가 고려.
그러나 그런 고려를 이은 나라는 유교와 농업을 근본으로한 조선이었다.
이는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종의 퇴행이었다.
이후 수백년간 사회는 침체되고 나라는 자주성조차 잃으면서
거지로 변해갔다. 백성들은 항상 가난했다.
조선의 건국은 한민족의 재앙이었다.
백성들의 불만은 성리학적 이념을
백성들에게 주입해 세뇌 시킴으로써 막았다.
그리하여 자체 개혁을 할수 없었던 조선은 그사이 힘을 키운
일본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다.
그건 아니고요 이거 하나면 님 주장이 틀리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화폐경제가 활성화 되었나요? 답은 아니조 상업이 발달하면 화폐경제로 나갈 수 밖게 없습니다 그런데 화폐는 있었지만 물품화폐를 주로 사용했지 그 다음 단계라 볼 수 있는 금속화폐 혹은 계수화폐 신용화폐로 넘어가지 못 했조 고려가 조선보다는 좀 낫지만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고려가 그렇게 강하고 부유한 국가였으면 왜 망해요?
@@품위있는녀석 조선보다 강성했어요. 아무리 국력이 기울었더도..특히나 공민왕을 엄청 왜곡시켰는데 공민왕이 원나라의 힘이 약해진 사이에 지금의 만주지역까지 국토를 넓혔습니다. 명나라가 흥해지자 그에 줄대어 쿠데타를 일으킨 이성계가 가장 큰 원흉중에 하나입니다. 이 성계는 전두환과 동급으로 보시면 됩니다.
@@mooyook2 공민왕 요동정벌군의 주축중 하나가 이성계 동북면 사병집단입니다. 고려말 왜구침입에 개박살 나던 때 살려놓은 게 이성계 군벌입니다. 조선보다 강한 고려가 일개 사병집단의 쿠데타로 무너졌다는 게 뭔 논리입니까?
참고로 조선건국 초기 정도전이 정계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까지도 명나라와 사이 안좋던 게 조선입니다. 오죽하면 정도전이 요동정벌 소리까지 했겠습니까? 태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친명노선으로 갈아탄거라 이성계 쿠데타는 명나라에 줄댄거와 무관합니다.
@@품위있는녀석 그건 고려가 강성하고 부유한 나라였다고 시인한 조선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 조선시대 사람들이 바라본 고려 ->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 고려 전성기에 동서 여진(女眞)의 무리와 거란(契丹)·발해(渤海)의 인민들이 계속 투항 귀순해 온 것은 모두가 위엄과 덕망(威德)의 소치였으며, 역대의 군왕도 그 성의를 권장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히 양계(兩界)의 땅을 확장시키고 나아가서는 옛날 숙신(肅愼)의 봉강(封疆)까지 회복하였던 것입니다.『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6월 19일 계미 2번째기사』
"임금이 말하기를... 해주(海州)는 여러 해 연거푸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의 사망율이 대개 5분의 1이나 되온즉, 그런 일(인육을 먹은 일)이 비록 사실이 아닐지라도... 고려(高麗) 5백 년 동안에 진실로 이러한 일이 없었는데... 마음에 심히 부끄럽다..."『세종실록 119권, 세종 30년 1월 16일 계묘 1번째기사』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高麗) 때에는 밥을 먹이는 중[僧]이 3만 명이었으니, 당시에[고려]는 나라가 부유(富裕)해서 그렇게 했던가? 지금이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성종실록 67권, 성종 7년 5월 12일 갑인 5번째기사』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첫번째 기사』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일을 망칠 것이다"『광해군일기[중초본] 166권, 광해 13년 6월 6일 병자 4번째기사』
"이양이 상소하기를... 고려(高麗)의 군제(軍制)는 6위(六衛)와 8령(八領)으로 되어 있었는데, 1령이 각각 1천 인이니, 도하(서울)의 군대만 모두 합쳐 4만 8천 명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훈국(訓局)을 새로 설치한 뒤로 5영(五營)의 군대를 제외하면 곧 오합지졸(烏合之卒)이니, 이것으로 적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1월 2일 경자 5번째기사』
"생각해보면 고려에서 나라를 세운 이래 물력의 풍부함은 우리 조선이 거의 미치지 못할 바이다. 석물을 세운 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다[고려]를 보고 나면 다른 물[조선]은 시시하게 보인다더니 정릉의 석물을 보고 나니 길가의 소소한 석물들을 마주칠 때마다 저게 무슨 애들 장난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흠영, 조선 후기 선비 유만주의 일기』
"고려는 송악에 도읍하여 거의 5백 년이 지나서 망하였다. 그런데 [고려의]그 전성 시대에는 군신이 서로 화합하여 태평 성대를 이룩하였으니, 비단 성지나 궁궐, 누대가 그 위엄을 중하게 드러내 보이고 유람의 장소를 풍부히 제공했던 것뿐만이 아니었다. 공경대부(높은 벼슬아치)나 호민부상(세력이 있고 부유한 상인)들의 정원과 저택들은 자하동을 에워싸고 남산을 임하여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게다가 승사와 탑묘들이 기려함을 서로 다투어 금벽색의 고운 단청이 서로 휘황찬란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태조(이성계)가 일어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자, 수년도 안 되어서 왕씨들의 겹겹으로 경영해 놓은 높은 대사와 깊은 오지들이 쓸어버린 듯이 다 없어져서, 동으로 만든 낙타상이 가시덤불 속에 묻히고 서리가 눈에 그득한 것이 지금까지 80여 년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유민으로서 그 당시에 어렸던 사람들은 이제 늙어 꼬부라졌고, 당시에 장성했던 사람들은 벌써 묘목이 한 아름이 되었으니, 또 누구에게서 그 지난날의 번화했던 시절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 부귀영화를 쌓는 데는 500년도 모자랐으나, 모든 것이 허물어질 적에는 하루도 안 걸렸으니, 아아! 왕씨의 도읍은 바로 오늘날의 ‘은감’이 라고 할 만하도다!"『점필재집 제2권』
축소된 영토로 설명하면 앞뒤가 맞지않다 고려의 강역은 최소 동서가2000리 남북이 1500리이다 그후에는 그것보다 더욱 넓은 강토가 사실이다 중국대륙에 있었던 고려 개경 서경 동경 동경이 한반도에있었고 개경은 지금의 베이징에 있었다 이것이 진실된 사실이며 고려사와 송사에도 나온일이다
황성을 비탈에 세웠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별궁이라면 모를까. 아마도 다른 곳이었을 것 같다.
원본 그림이 소실 됐다니 너무 안타깝네요.
훼손으로 소실된거같은데 ...
고려시대가 무역과 상업이 훨씬 번성했고 서양 문명(당시 아라비아 기준)에 관심도 높았으며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과 지위도 조선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역성혁명으로 세워진 조선은 전왕조를 없앴다는 명분으로 고려의 무역과 개방적인 사회분위기도 전부 없애버렸다. 망할 헬조선 처음부터 건국되지 말았어야
완전 동감이요
개경 궁궐 만약 지금까지도 남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고려에 파견된 송나라 사신단원이 1000여명에 달했다고 하는군요..
대륙을 지배했다는 송나라가 반도 보다 작은 나라에 사신단 1000명을 보내다니 믿겨지세요? 그 고려가 우리가 알던 고려가 아닐려나요? ㅋ
@@패미박멸거란을 이긴 시점부터 송나라는 고려를 형님으로 모심
선화봉사고려도경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 성읍(城邑) 영토[封境] ㅡㅡ대륙고려 북경
고려위치 ㅡㅡㅡ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로 막히고, ₩₩₩₩₩₩₩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와 맞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옛 거란 지역과 접경하였고, 동쪽으로는 금[大金]과 맞닿아있다.
육로ㅡ고려는 우리 송(宋) 수도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를 거친 다음
요수(遼水)를 건너[陸走渡遼] 동쪽
해로 ㅡ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는 항상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서 먼바다[絶海]로 길을 잡아
ㅡㅡㅡ북쪽으로₩₩₩ㅡㅡㅡ 나아갔다. 배를 탈 때는 언제나 하지(夏至) 다음의 남풍(南風)을 탔으니 ₩₩₩₩바람이 순조로우면₩₩₩₩₩₩ 닷새도 안 돼 해안에 도착할 수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 성읍(城邑) 영토[封境] ㅡ
영토[封境]ㅡㅡㅡ요수는 영정하 ㅡ압록강은 원문에 압록
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로 막히고, ₩₩₩₩₩₩₩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와 맞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옛 거란 지역과 접경하였고, 동쪽으로는 금[大金]과 맞닿아있다. 그리고 일본(日本)·유구(流求)·담라(聃羅)·흑수(黑水)·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개의 어금니[犬牙]처럼 서로 맞물려있다. 저 신라와 백제가 자신들의 영토[圉]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병합이 되었으니 현재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여기에 해당된다.
고려는 우리 송(宋) 수도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를 거친 다음
요수(遼水)를 건너[陸走渡遼] 동쪽으로 고려 국경까지 가는데 모두 3,790리(里)이다
. 해도(海道)로는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淮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 등이 있는데 모두 왕래가 가능하다.
지금 세워진 나라는[今所建國] 등주(登州)·내주(萊州)·빈주(濱州)·체주(棣州)와 정확하게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 원풍(元豐)註 001 연간 이래
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는 항상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서 먼바다[絶海]로 길을 잡아
ㅡㅡㅡ북쪽으로₩₩₩ㅡㅡㅡ 나아갔다. 배를 탈 때는 언제나 하지(夏至) 다음의 남풍(南風)을 탔으니 ₩₩₩₩바람이 순조로우면
₩₩₩닷새도 안 돼 해안에 도착할 수 있다.
옛날에는 그 영토가 동서(東西)로는 2,000여리, 남북(南北)으로는 1,500여리였는데 현재는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동북쪽이 약간 넓어졌고 서북쪽은 거란과 접해 있다. 전에는 요[大遼]와 경계를 이루었는데 나중에 침범을 당하게 되자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견고하게 〈방어토록〉 하였다. 아울러 압록강을 의지하여 요새로 삼으려 하였다.
말갈에서 발원하는 압록강[鴨綠水]은 그 물빛이 오리 머릿빛[鴨頭]과 같아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요동(遼東)과는 500리 떨어져 있는데 국내성(國內城)을註 002 거치면서 다시 서쪽으로 한 강물과 합류하여 흐르는데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註 003 이 두 강물이 합쳐서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註 004
고려에서는 이것이 가장 큰 강이다. 물결은 맑고[淸澈] 지나치는 나루터[津濟]에는 큰 배를 댈 수 있다. 고려에서는 이 곳을 천혜의 요충지[天塹]로 여기는데 폭이 300보에 이를 정도로 넓다
. 평양성(平壤城)에서는 서북쪽으로 450리이며 요수(遼水)의 동남쪽으로는 480리에 있다.
요(遼)의 동쪽은 곧 옛날 거란에 속했던 지역인데 현재는 사람들[虜衆]이 이미 흩어진 상태이다. 금[大金]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여서 다시 성을 세워 수비하지 않고 다만 오가는 길목으로 삼았을 뿐이다. 압록의
서쪽으로는 백랑수(白浪水)와 황암수(黃嵓水)라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몇 리(里)를 흐른 곳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니 이것이 바로 요수(遼水)이다 ==========%%%%₩₩₩₩₩₩₩₩₩
.註 005
당 정관(貞觀)註 006 연간에 이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를 크게 격파하고 물을 건널 때 그 물이 얕고 좁은 것이 괴이하여 물으니
이곳이 요수(遼水)의 수원(水源)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註 007 이로써 옛날에는 요수를 견고하다고 믿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려가 압록강의 동쪽으로 물러나 국경을 지키고 있는 이유이다
거란고려국경에 대한ㅡ 한국최초로 안문 압강 이라는 역사적 지리적 과학적 근거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세종대왕은 고려사 지리 서문에 고려는 우리역사 최대 영토ㅡ고조선ㅡ 고구려보다 큰 고려영토
ㅡ 고려거란전쟁ㅡㅡ 고려국경 ㅡㅡ 명사 고려사에서 찾았습니다 ㅡ틀리면 의견주시면 고맙겠습나다
안문(압록) 압강 하공진 국경 근무지ㅡ 통주 강조의 30만 대군 ㅡ흥화진 양규전쟁영웅ㅡ 귀주강감찬
명사 ㅡ상건하의 하류가 남쪽으로 고려장을 지나다ㅡㅡ 압강
상건하(桑乾河)는 노구(盧溝)의 상원(上源)이다.ㅡㅡ 태원(太原)의 천지(天池)에서 발원하여 복류해서ㅡㅡ 삭주(朔州) 마읍(馬邑) 뇌산(雷山)의 남쪽에 이르는데, 금룡지(金龍池)라는 곳에서 솟아나서 넘쳐 흐르니 이것이 상건이다. 동쪽으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대동(大同)의 고정교(古定橋)로 흐르며 선부(宣府) 보안주(保安州)에 이르러ㅡㅡㅡ 안문(雁門)·응주(應州)·운중(雲中)의 여러 물길이 모두 모인다. 서산(西山)을 가로지르고 완평(宛平)의 경계로 들어온다. 동남쪽으로 간주구(看舟口)에 이르러 둘로 나뉜다. 그 하나는 동쪽으로ㅡㅡㅡ 통주(通州) 고려장(高麗莊)을 거쳐 백하(白河)로 들어간다. 그 하나는 남쪽으로 패주(霸州)로 흘러 역수(易水)와 합류하고 남쪽으로 천진(天津) 정자고(丁字沽)에 이르러 조하(漕河)로 들어가니 노구하(盧溝河)라고도 하고 또는 혼하(渾河)라고도 한다
고려사ㅡㅡ 거란주(契丹主)가 분노하여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흥화(興化)·통주(通州)·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귀주(龜州) 등 6개 성을 빼앗으라고 하였다
.안문 ㅡㅡ하공잔 국경 근무지ㅡㅡ 압록은 안문에ㅡ 하공진(河拱辰)을 안문(鴈門)에 파견하여 ___압록(鴨綠)에서 구당사(勾當使)가 되도록 하고, 낮에는 나가서 동쪽 강변을 감시하고 밤에는 내성(內城)으로 들어와 머물게 하였습니다
통주 ㅡㅡ강조의 30만 대군ㅡ병사 30만 명을 통솔하여 ㅡ통주(通州)에 진을 치고 거란(契丹)에 대비하였다
흥화진 ㅡㅡ양규ㅡㅡ전쟁영웅 신묘 거란주(契丹主)가 직접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양규(楊規)·이수화(李守和) 등이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영주(靈州)는 현종 21년(1030)에 ㅡ흥화진(興化鎭)을 승격시켜 주(州)로 삼아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였다
정묘 거란(契丹)이 영주성(寧州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
귀주(구주)ㅡㅡ강감찬 2월 기축 초하루 거란군[丹兵]이 귀주(龜州)를 지나가는데, 강감찬(姜邯贊) 등이 맞아 싸워 크게 무찔러서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세종대왕의 고려사 ㅡ지리 서문 ㅡ우리나라[東國]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를 이루었다.
10도는 첫째는 관내(關內), 둘째는 중원(中原), 셋째는 하남(河南), 넷째는 강남(江南), 다섯째는 영남(嶺南), 여섯째는 영동(嶺東), 일곱째는 산남(山南), 여덟째는 해양(海陽), 아홉째는 삭방(朔方), 열 번째는 패서(浿西)이었다. 관할하는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서북은 당(唐)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다.
압록은 안문에ㅡ 하공진(河拱辰)을 안문(鴈門)에 파견하여 _압록(鴨綠)에서 구당사(勾當使)가 되도록 하고,
이 자료는 학생들에게 역사의 잔실를 알리고자 명사와 고려사를 검색하여 복사해 놓은 것입니다
복사해서 검색하면 더 자세히 알고 우리는 찬란하고 위대한 코리아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가지세요
ㅡ역사상 최대강국 몽고와의 전쟁애서 73전55승 이겨습니다 ㅡ출처 나무위키 ㅡ여몽전쟁
산서지리지도ㅡㅡ평양부 북경 해주 예성 포주 대동 곽주 마읍 삭주 심주(강화현) 등 등 이 지도안에 지명이 있습니다
ㅡ산서지리지도 복사해서 검색하면 지도 나오고 클릭하면 한글로 지명이 나옵니다
대명여지도 ㅡㅡㅡ통주와 흥화가 나옵니다
강동 6주 압강 영정하 동쪽 6주ㅡㅡ교과서는 강남 6 주
거란이 멸망한 곳이 고려의 북계 압강 ㅡㅡ제왕운기 鴨江]에 이르렀다가 스스로 패하였구나
지진 기록 ㅡ검색어 동경 ㅡ 동경과 서경에 동시에 발생한 건물이 무너지고 천둥소리가
메뚜기(황충) 피해에 대한 고려사 54건 기록 검색어 황충 구글 뉴스 검색어 북경 메뚜기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의 만리장성 베이징 북쪽에 높이 7.5미터 (3층 높이 정도) 폭이 7.5 미터 길이 250 키로
〈덕종(德宗)〉 2년(1033)에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방 경계에 처음으로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서해 바닷가의 옛 국내성(國內城)의 경계로서 압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위원(威遠)·흥화(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영덕(寧德)·영삭(寧朔)·운주(雲州)·안수(安水)·청새(淸塞)·평로(平虜)·영원(寧遠)·정융(定戎)·맹주(孟州)·삭주(朔州) 등의 13개 성(城)을 거쳐 요덕(耀德)·정변(靜邊)·화주(和州) 등의 세 성(城)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니, ㅡㅡㅡㅡ길이가 1,000여 리에 뻗었고, --돌로 성을 쌓았는데ㅡㅡ 높이와 두께가 각 25척(尺)이다.
고려사 ㅡ동남해 안무사가 해적의 투항을 보고하다 ㅡ 고려영토가 홍콩까지
취안장 就安 이 홍콩이네요 ㅡ 복사해서 구글지도 검색해 보새요
고려사ㅡ 1128년 10월 01일 (음)
겨울 10월 임자 초하루 동남해안무사(東南海安撫使) 정응문(鄭應文)이 아뢰기를, “명진현(溟珍縣)·송변현(松邊縣)·아주현(鵝洲縣) 등 세 현의 해적(海賊) 좌성(佐成) 등 820인이 투항하였으므로, 합주(陜州) 삼기현(三岐縣)에 귀후장(歸厚場)과
취안장(就安場)을, 진주(晉州) 의령현(宜寧縣)에 화순장(和順場)을 설치하여 이들을 살게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신하들이 하례를 올렸다
1
우리역사-History
답글
@booksbogo
@booksbogo
4개월 전
영상 공유합니다
고려는 일찍이 출병하여 전투를 지원하지 않음이 없었고, ₩₩₩요수(遼水)의 동쪽 해안 1만 리가 그 덕분에 평온했습니다. 고려는 동쪽 번병이 되어 대대로 현저한 공을 세웠으며, 여러 대에 걸쳐 우리 왕실과 혼인을 맺어 마침내 그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이는 대개 고려의 충성과 조종(祖宗)의 유훈(遺訓)에 의한 것입니다ㅡㅡ고려사
그곳에서 여기 궁궐까지는 거리가 모두₩₩₩ 5,000리인데 가까운 경기[近甸]를 ₩₩₩산동(山東)으로 옮기면 산하(山河)를 12개나 넘을 정도이다. 영령께서는 이 특별한 보답을 알고 받으시라. 〈이에〉 황고제국대장공주 고려왕비(皇姑齊國大長公主 高麗王妃)로 추봉한다.”
라고 하였다. 처음에 나라에서는 송(宋), 요(遼), 금(金)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였으나 역대의 시호는 모두 종(宗)이라고 칭하였다. 원을 섬기기 시작하자 명분이 더욱 엄중해져서 옛날 한(漢)의 제후들이 모두 한의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왕도 표문을 올려 상승왕(上昇王: 충렬왕)의 존호를 청한 것이다. 또한 고종(高宗)과 원종(元宗) 두 왕도 추시(追諡)해줄 것을 청한 것이었는데,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45분 45초 고리에 국경이 보이네요. . 붉은색으로 산해관까지의 만리장성을 경계로 국경선이. . 선명합니다.
부디 지금도 무사히 존재하고 있기를~~
통일의 그날을 기다립니다.
기와를 청자로 올리는 클라스~
심지어 색도 예뻐~
고려시대까지의 우리 고유의 풍속과 전통이 중국 주자,성리학의 도입으로 조선시대 때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결과가 지금도 성리학 전통이 우리의 전통인양 생각케하는 폐단이 생겨났다고 보여집니다...
퀄러티가 쩌네
그곳은 북경이다 이따위 방송은 내려라 욕나온다
쭝궈뤈들은 예전에도 똑같이 안씻었구나... ㅋㅋ 과거 영역이고 나발이고 특성이 확실히 다르네 동이족과 하화족들은 ㅋㅋ
Korea! 우리의 뿌리가 참 대단 하네요....!
킹갓제네럴 고려
역성혁명으로 나라를 세우면 전왕조를 완전히 없애야 된다는 못된의식을 갖은 한반도 고려의 실록이나 역사를 완전히 불태운건 누구인가.
세종이요 ㅋㅋ
킹세종이요ㅋㅋ
문화적 기술적으로나 백성들의 생활수준은 물론
군사적으로도 막강했음
명실상부 황제국임
몽고침략 전까지 동아시아 어느누구도 간섭못함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시진핑 정신병이나 걱정해 왜 남의나라에 와서 헛소리야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진나라 진시황제가 한족이냐? 왜 중국에서 한족이라고 배웠어? 내가 알기로는 죽신이나 여진족으로 알고있는데 대만 역사학자들 책에서 진시황은 여진말고 몽골어가 가능했다잖아 니가 말하는 중국문화가 뮈냐? 몽골말 했다는 말은 몽골태생이라는 말인데 그럼 진나라 역사는 몽골역사구나 ㅎㅎ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와 이젠 중국인들 시진핑 욕하는구나 세력이 약해져 이젠 욕이 가능한거야 중국인? 대단한 발전인가ㅎㅎ
송나라 서긍의 여행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북경의 자금성이 나온다. 북경이 고려 수도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두심이 참 고우시네~^^
황제를 칭한 고려......명에 알아서 긴 조선.....
이희수 교수님, 젊으셨네요.!
서긍이 고려수도라고 간곳은 개경이 아니고 북경의 자금성이었음이 그의 방문길을 기록한 해도편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역사를 다시 해석하십시요.
자금성이랑 묘사가 달라요. 후졌다고 쓰여 있어요
자금성은 멍태조 주원장이 도읍한 곳인
데 저때 무슨 자금성이 있단 말인가
자금성이 아니어도 서긍이 묘사한 성은 중국에는 없는 성이에요.
해자와 방어시설이 없는 성이라
중국 입장에서 보면 만들다 만 성이에요...
중국도 일본도 그런 성은 없어요..
여기의 개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개성이 아니다, 대륙본토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북경이 고려의 개경이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책은 일제시대때 지식인들을 교도서에 가두고 다쓰 편찬한거임. 우리나라는 대륙에있었고 한반도에 정착함. 베이징 자금성 1900년초에 사진보면 고구려맞음 이후에 성밖에 벽들 허뭄
아닙니다. 대륙에 있던건 사실이지만 중국처럼 중앙에 있진 않았고 고구려 살짝 위쪽에 살았었고 대부분 이 한반도에도 한국인들 있었어요.
자금성 외성은 치가 있죠 고구려성입니다
그걸지금은 다 헐어버렸죠
구글에서 중국 고성 위성사진 보면 치가 있는 고려성 많습니다
서안에도 있구요
1900년대 자금성사진도 치가 있죠
장개석이 본토에서 도망칠 때 여러유물 참 야무지게 쓸어왔네..! 그러니 본토에 유물이 거의 없지
그게 유일하게 잘한 일임
그거 안챙겨 같으면 모두 파괴되었을거임ㅋ
한반도에 있는지명은 중국쪽에 있는 지명 그대로 배껴온거라 역사왜곡이 쉽게 될가능성이 높음 북경이 고려 수도일 가능성이 높음 고려라는 지명도 많고 고려영도 있음
자칭타칭 황제국인 고려가
반도 귀퉁이에 있었다고요?
개도 웃겠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