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는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쩌는 인간이었고, 또한 쏘시오패스이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이 참 고달펐을 것이다. 임란에 공이 큰 광해군, 이순신, 류성룡 등을 절대 칭찬하지 않았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의병장들 또한 다 죽여 후환을 없앤 인물이었다.
@@안병욱-r6q 가장 크게는 이순신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했지만 결국 원균같은 놈한테는 공을 인정하면서 이순신한테는 백의종군하게 만들었죠. 도원수 권율 공신 책봉때도 피하는 전술 사용했다고 칠량해전에서 원균 내몰아서 죽에만들었다면서 1등공신에 포함안시키려고 버르다가 결국 5년 뒤에나 포함시켰죠. 셀수도 없어요! 그래서 결국 잠석해버린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쯧. 모르면 공부를 하세요 공부를
아닙니다. 영창대군을 지지한 사족은 소북중에서도 유당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동인이 분화되기도 전부터 광해를 세자로 하라고 주창했었습니다.(이거 때문에 정철이 팽당하고.) 그렇기때문에 광해정권 초기에는 서인과 남인 그리고 대북의 연립정권이였고 여기에 소북도 참여했습니다. 오직 유당(탁소북)만이 끝까지 영창을 지지하다가 숙청되죠. 사실 영창의 존재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미 전쟁 영웅 타이틀 하나때문에 사족들이 눈길하나 주지 않았고요.
@@정재성-c1l 그래서 광해군 집권 이후에 영창을 광해의 라이벌로 인식한건 대북 뿐이었지 나머지는 유당마저 정리된 상황에서 굳이 영창을 지지할 이유는 없었죠. 먼곳에 유배하고 나중에 죽이자는 상소가 빗발칠때 죽여도 되는걸 대북이 충동질 하자 바로 죽이는데 쓸데없이 너무 일찍 죽였습니다.(어차피 서인 남인도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서면 죽이자고 상소를 올렸을겁니다.
@@정재성-c1l 명분상 그럴 확율은 희박합니다 이미 세자가 광해군으로 영창대군 탄생 이전부터 확정된 상황이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가 뒤집힐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광해군이 일찍 죽거나 사도세자 양녕대군 처럼 세자의 신분으로막장으로 살거나 하지 않는한) 당시 유교적 가법 제도상으로도 본부인에게 자식이 없어서 서자나 양자로 종통을 이을 후계자로 삼았으면 나중에 본부인이 자식을 낳더라도 이를 무를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고 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 유당도 세자를 바꾸자는 소리는 공식적으로 입밖으로 꺼내질 못했습니다. 그 말 나오는 순간 역적이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기록이 정확하게 신뢰할수 있는지가 의문인데 현재의 해석은 이이첨이 영창대군을 경계해서 죽음으로 몰아가도록 사주했다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만 문제는 여기도 의문점이 많습니다. 우선 영창대군을 죽음을 집행했던 강화부사 정항이 반정후에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조반정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한 어떤 진상조사도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의문입니다. 진정으로 광해군의 폐륜을 조사하고 반정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진상조사는 필수인데 그것을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죠. 그리고 대북이 영창대군의 죽음을 사주하였다라고 하는데 이이첨은 몰라도 정인홍은 되려 더 반대였습니다. 정인홍은 폐모살제에 적극 반대했습니다. 헌데 반정세력들은 정인홍이 폐모살제에 적극 나섰다라고 둘러 쒸웁니다.
@@Jabberblabla 광해의 해결책은 매관매직이었음. 궁궐 짓는데 필요한 것을 지원하고 벼슬을 얻은 자들이 있다 연은도정(蓮恩都正) 응호(應虎)에게 가자하였는데, 영건 도감에 철 5백 근을 내었기 때문이었다. 서인(庶人) 이현룡(李見龍)도 철을 내었다는 이유로 감목관(監牧官)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영건 도감에 터·돌·재목·철·포·곡식 등을 내고서 등급을 뛰어넘어 높은 벼슬을 얻는 자들이 앞뒤로 서로 이어졌는데, 심지어 생선·소금·젓갈을 바치고서 등급을 뛰어넘어 높은 벼슬에 오른 자도 있었다.
@@HanWoong1015 연산도 광해 이상으로 과소평가는 맞기는 합니다. 적어도 재위중만 놓고 보면 광해보다 나앗고.. 말년데 송휘종+충혜왕 시즌2만 되지 않았어도 다른 조선왕들이 등한시한 기술에 관심이 많아 아깝긴 하죠. 자식농사도 좋아 신수근은 반정 자체를 반대한게 아니라 진성대신 이황을 세우자고 한거고
@@kmh624 광해군은 우리가 중립외교와 대동법 때문에 성군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폭군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때 파괴된 궁궐을 복구하는 공사를 지시했는데 이게 문제는 너무 과했습니다.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아예 증축을 명했을 정도에요. 이로 인해 농번기에 강제로 차출당한 백성들로부터 원성이 높았습니다. 게다가 부족한 재정을 메꾼다고 매관매직까지 일삼았어요. 형인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건 유명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강제로 서궁에 가둔 건 유명하며(이건 현대 기준으로도 패륜이다)증거도 없이 몇몇 신하들을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가족까지 멸문지화를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권신들을 관리하지 않아 붕당간의 경계가 깨졌죠. 심지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대동법 시행도 정작 광해군 본인은 반대했으며 광해군은 말년에 한 궁녀와 주색잡기에 빠졌다고 합니다. 폭군의 모든 걸 다 갖춘 셈이었습니다
@@phdogy 조선 중기처럼 꽉 막힌 시대가 비교적 아닐 뿐이지 명분으로 따지면 더 취약함 왜냐 우리는 신진사대부다 고려 권문세족 따위랑 다르다를 내세웠는데 결국은 썩은 건 마찬가지라는 걸 보여줬기 때문에 왕조 극초기면 더욱 혼란스러워야 맞는데 그렇지 않았음 그냥 광해는 만만했던 거고 태종은 무서워 죽겠던 거지 세상살이 답을 내고 끼워맞추기의 연속임
왕자리에서 쫒겨난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해산물 많이 먹고 80살 까지 천수를 누리며 마음은 쬐끔 불편했겠지만 암튼 오래토록 살다가 죽었다. ㅋㅋㅋ 그동안 육지에서는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나라에게 굴욕 당하는 중이었고 인조 모지리가 삽질 중이었다. ㅎㅎㅎ 광해군 형과 동생은 사이코패스 였고 기분 나쁘면 민간인을 맘대로 죽였고 부녀자들을 겁탈..암튼 조선왕조는 이때 망했어야 했는데...성리학 기득권들이 절대 놓지 않았지. 현재 기득권들도 똑같은 세력들.😢😢
선조, 인조, 고종은 군으로 내리고 광해는 조, 종으로 올려야 합니다 선조 - 임진왜란 7년 동안 국토 황폐화 인조 - 병자호란, 정묘호란으로 국토 황폐화 고종 - 40년 동안 일본에 국권 뺐김(제일 개xx) 한국사에서 가르치지는 않지만 저시기에 한민족을 노예로 데려가기도 하고 재미로 죽여버리기도 하고 여자들을 셀수 없이 강간한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다시는 역사에 저런 지도자가 나오면 안됩니다. 너무 많은 선량한 민중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광해는 폭군이자 암군이 맞습니다. 선조가 임란 7년동안 찌질한 모습을 보였지만 임란에서 양위파동을 이르킨것 정도를 빼면 합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애초에 연산군-중종-명종으로 이어진 개폐급라인에서 나온 문제를 해결하고 조선이 나아갈 비전을 제시한(대여진 외교, 대동법등) 뛰어난 행정가가 선좁니다. 7년못한걸로 30년을 잘한것을 못했다고 할 수없죠. 명암이 분명한 군주였을 뿐이지. 인조도 선조와 같은 맥락입니다. 물론 인조는 선조처럼 재평가 할 부분이 적고 전반적으로 암군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한게 없는것도 아니고 광해에게 선조때문에 분조장 온거라는 프레임으로 커버쳐준다면 인조에게도 광해가 박살낸 내치와 인재플에 대해서 두둔해줄수 있습니다. 광해가 망쳐버린 조선의 내치를 정상화 시킨 사람이 인조거든요. 물론 호란에 대해서는 변명에 여지가 거의 없지만요.(광해때문에 군사력을 키울수 없었다도 정묘호란까지이지 병자호란은 논외.) 고종도 방법론이 잘못됬을뿐 노력은 열심히 했습니다.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끝까지 버티고 싸운사람이 고종이니까요. 방법론과 방향성, 외교적 실패등으로 실패한 군주지 무기력한 군주는 아니였습니다. 사실 광해군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고평가된 왕일뿐이지 왕 광해는 강경하게 보면 연산보다도 아랩니다. 자신의 업적이라고 말할만한게 존재하지 않는 왕이 광햅니다. 조선을 망친건 세조/연산군-중종-(인종)-명종라인(사실상 조선을 정체시킨 라인)/광해군/인조/숙종/순조/고종입니다.
미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장 인터넷에서 물고빠는 정조보다 업적이 우월한게 선조인데 뭔 개소리를 이렇게 ㅋㅋㅋ 궁궐 짓는다고 서북방면 군량미 죄다 삥땅치고, 방납으로 돈 빼돌려야하니까 이원익과 김육이 그렇게 주장하는 대동법을 다 죽일 기세로 반대하고, 명황제가 임진란 참전 백성들과 유족들 주라고 보낸 은도 다 빼돌려서 한푼도 나눠주지 않은 광해가 성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니가 물고 빠는건 광해가 아니라 이병헌이예요
@@SWLEE-dj1kk 대동법의 기틀은 선조가 이미 재위말년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았고, 광해는 경기도에만 실시하는 것도 부정적이었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으로 실시한겁니다. 그나마도 6개월만에 폐지해버리려는걸 이원익이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 막아섭니다 조세제도를 새로 시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과는 별개로 광해가 대동법 자체를 싫어해서 안하려고 온갖 발악을 떤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방납으로 돈 벌던 세력이 대북이거든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고 했는데, 수신은 그렇다쳐도 가정 하나 재대로 못 이끌면서 왕 노릇하는게 화가 납니다. 믈론 가정을 잘 이끌어 가는 것만으로 위인이라 할 정도로 쉬운 일이 절대 아니지만, 수백수천 종류의 사람들과 이햐관계를 짊어져야 할 왕좌에 비하면 그나마 쉬운 일이 잖아요
@@Jabberblabla 일단 왕으로서의 기본인 내치도 못한게 광해고 내치로는 한국역사상 상위권에 있는 선조나 딱 평균수준으로 한 인조에게 비빌 껀덕지가 없습니다. 단지 인조는 외치부분에서는 심각한 부분이었습니다. 선조는 솔직히 외치도 크게 깔게없음. 이외에 선조-광해-인조모두 인성 문제를 지녔습니다. 선조가 이부분이 굉장히 강조되죠. 그러면 광해가 15년동안 한게 뭔가요??? 1.일부 소북(탁북만)을 제외하면 모든 당파의 지지를 받아 강한왕권을 가졌으면서 쓸데없는 옥사로 양반층 지지를 잃고, 극단적 유교 강경파이자 원론파인 대북(친명도 아닌 숭명파이다.)주도의 정치로 외교정책 망쳤다. (영창대군계 숙청에 대한 비판이 아님. 영창대군계 숙청은 당연한거임.) 2.무리한 토목공사로 "전쟁 영웅"이라는 특수성으로 가진 민심을 스스로 날리는 기행을 저질렀다. 3.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그런 외교정책을 주장한 광해는(정작 대북 때문에 국가 외교노선은 친명배금 노선이었다.)전쟁이 날 수도 있다면서 군비를 빼먹으며 궁궐을 짓는 만행을 저질렀다. 4.사실 외교도 좋게 보장해서 중립이지 그냥 이도저도 아닌 외교정책이다.(현재 중립외교론은 거의 들어가는 추세이다. 이중외교와 같은 말을 더쓴다.) 이 이도저도 아닌 정책으로 자신의 친위대(대북)랑 싸우게된다. 5.개혁군주라는 사람이 서얼 차별 금지해달라는 거에 대해서 힘으로 찍어누르는 행보를 보였다. 지도 서얼이면서... 6.대동법 덕분에 개혁군주라는 소리를 듣지만 사실 선조때 이전부터 나왔던 것으로 선조때 논의되다가 광해때 실행된거 였다. 심지어 왕권에 ㅁㅊㄴ이었던 광해는 중국황제가 조공을 받는 것 처럼 나도 공물 받고 싶다고 대동법에 반대했으며 정치척인 교환으로 실행시켜주었다. 사실 대동법의 확산및 법안가동은 인조정권이 해낸 결과물이다. 7.전쟁 끝나고 양전, 인구조사와 같은 기본적인 것도 안한(인조즉위 직후 실행함.) 사람이 내치에서 받을 +점수는 없음. 8.지가 키운 사냥개인 이이첨에게 역으로 끌려다녔으며 김개시에게도 흔들리는 전형적인 꼭두각시형 군주였다. 선조는 인간성이 문제가 있는 군왕으로 왕의 그릇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괜히 목릉성세가 아니다. 인조는 난세에 범인이 민족주의에 빠저 권력을 잡으면 생기는 일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광해는 한 개인으로서 똑똑했지만 정치 능력이 전무하였으며 연산군 마냥 왕권 강화에 ㅁㅊ놈이었다.
@@likeaflower44 대동법은 광해군이 시작하고 추진한 업적이 맞습니다. 1. 즉위한 지 2개월만에 "선혜"라는 키워드를 담은 비망기를 내림. 이미 광해군은 방납의 폐단을 요목조목 지적하며 이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비망기에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선혜청이란 이름도 백성에 대한 구휼책을 강구하면서 '무선일푼지혜(務宣一分之惠)', 즉 '한 푼의 은혜라도 베풀기를 힘써야 한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며 여기서의 은혜는 국왕이 백성들에게 베푸는 은혜입니다. 이 모든 내용이 광해군의 비망기에 담겨있습니다.
나라의 큰 위기때, 백성을 뒤로하고 안위만을 걱정한 왕과 신하들이 피신에 급급했던 사건.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기도전 선조는 어린 여인에게 정신이 팔려 과거 난을 잊은채 또 평화스러움에 젖어 국정을 게일리 했지. 근데, 이는 충신들에 의한 승리였지, 왕ㅇ; 잘나서가 아니었다. 광해군은 그저 칼받이었을뿐.....
지금 우리가 미국에 사대하는것이랑 같습니다. 조선이란 이름도 명의 윤허를 받은 이름이라 고조선 후기 위만조선의 이름을 따서 조선이 됩니다. 참고로 고려도 송나라에 사대하였습니다. 어이 없는건 송나라가 거란에 패배해 거란에게 물자를 바쳤지만 고려는 거란에 뻑유를 날리죠 왜냐면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를 멸한게 거란이니까요
인조반정 덕에 그나마 이후 300년 가까이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죠 이미 광해군 말기엔 전쟁 없이도 알아서 망할 수준이었고 그걸 보여준 것이 인조반정입니다 불과 몇백명의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반정군사들에게 도성안에서 저항한번 못하고 궁궐까지 점령당할 정도로 나라꼴이 개판이었죠.
@@k_dori0105 광해군은 대동법 자체를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광해군은 즉위 한 달만에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비망기에 대동법의 뜻을 펼치고 두달 뒤 최초 시행하고 대동법을 꾸준히 경기도 지역에 실시하고 심지어 과거 대과에 논술 문제로 직접 출제했으며 폐위되기 불과 16개월 전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는 광해군의 신하라 할 수 있는 북인 인사가 대동미를 징수한 기록까지 있습니다. 광해 6년의 기록 한 줄 '경솔하게 동시에 실시할 수 없다'만 가지고 그 이외 광해군이 대동법에 진심이었던 많은 행적과 흔적을 덮을 수 없습니다.
@@Sun-n5y7n 적이 도사리는곳에 뛰어들었냐? 적이 없는곳에 가서 있었지. 적이 도사리는곳에 갔으면 벌써 체포됐지. 원래 전쟁이 나면 혹시 왕이 잡힐것을 대비해서 분조한다. 그냥 적이 없는곳에 따로가서 피난다니는거다. 같이 잡히면 안되니까. 광해군이 군을 지휘했냐? 광해군은 한게없어.
광해군이 영창대군에 대한 아무런 견제의식없시 넘어간다고 해도 언젠가 영창대군이 자라나면서 영창대군을 끼고 도는 정치세력이 성장할 가능성은? 다른 유튜브에 영창대군의 사주를 분석한 내용이 있습니다. th-cam.com/video/5GK1ex9ZxdA/w-d-xo.html 그렇다면 언젠가는 영창대군이 광해군을 위협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벌거벗은한국사 광해군 2편 -> th-cam.com/video/0HGIsi5L1I4/w-d-xo.html
광해군이 폭군이고 성군이고를 떠나서 그냥 너무 불쌍하다 아버지한테 저런 취급을 받을때마다 너무 속상했을 것 같음… 광해군도 나름 잘보이려고 애썼을텐데 ㅠㅠㅠ
세상 어떤 아버지가 자식을 질투하고 전장에 자식을 등을 떠밀고 자식간에 편애를 할까요..
선조가 그런상황을 만든건 맞지만 광해군도 잘한건 1도없음 선조가 광해군을 후계자로 지목한건 사실이고 선조의 질투가 있었지만 광해군의 초기 왕권은 엄청나게 강력한 편이었는데 이이첨같은 권신한테 몰아주다보니... 심지어 영창대군도 죽였으니 말다한거지
조선시대 왕 하면서 정신병 안생기기 힘들듯. 일만 힘든게 아니고 목숨이 위태로우니... 제대로 해낸 왕들이 진짜 대단한 멘탈
@@나이아흐 영창 대군 죽인 건 그렇다 쳐도 인목 대비를 쫓아낸 건 잘못된 거죠
(+ 영창 대군에서 멈췄어야 했는데..)
그 뒤에 선조의 유전자를 물려 받은 게장 대왕이 아들을 뒤주에 가둬버리죠.
선조 - 희대의 개병싄
광해 - 불운의 명종
인조 - 왕의 그릇이 아닌 자
공감
동의합니다.
글쎄?? 선조는 왜란만 아니었다면 성군 이었을지도 ㅋㅋㅋㅋ
@@noodleman1129왜란에 제대로 대처를 못했으니 암군이지
@@noodleman1129그건인정.근데 종전이후 공과보다는 적장자컴플렉스에 미친 쓰래기짓땜에 인조반정의 화근을 만듬😊
선조는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쩌는 인간이었고, 또한 쏘시오패스이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이 참 고달펐을 것이다. 임란에 공이 큰 광해군, 이순신, 류성룡 등을 절대 칭찬하지 않았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의병장들 또한 다 죽여 후환을 없앤 인물이었다.
의병장 누구?
의병장은 죽일수밖에 없었는데 ㅋㅋ 이건 선조잘못이 아니라 이몽학 잘못이지
@@안병욱-r6q 가장 크게는 이순신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했지만 결국 원균같은 놈한테는 공을 인정하면서 이순신한테는 백의종군하게 만들었죠. 도원수 권율 공신 책봉때도 피하는 전술 사용했다고 칠량해전에서 원균 내몰아서 죽에만들었다면서 1등공신에 포함안시키려고 버르다가 결국 5년 뒤에나 포함시켰죠. 셀수도 없어요! 그래서 결국 잠석해버린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쯧. 모르면 공부를 하세요 공부를
@@달구지-t8b 뭔말인지 좀 똑바로 적으세요. 백의 종군이 이등병 강등쯤으로 생각하는 댁보다 많이 알아요.
@@안병욱-r6q김덕령
자식에게 조차 찌질했던 선조
다들 도망다니기 바쁜데 광해는 분조를 이끌며 조선의최선전에서 분투하였다.영웅이었다.전란의 영웅
난세의 간웅
@@형님-y1h 그 영웅이 개시랑 잘못된 사랑으로 망가졌다..
@@Hyunjong_the_great 영웅은 분명하다
영웅과 아들을 질투한 왕 이순신 장군님께 질투만 안했어도........사람들이 선조를 싫어하는 이유
헛소리야 질투를 뛰어넘어서 선무공신에 원균 넣는게 정상이니? 지아들에게 질투하는게 정상이야? 지 첫재아들이 아녀자 강간범 플러스 지아비가 있다면 죽이고 취하는 싸이코 패스짓에도
아무 제재도 안하고 그걸 사실대로 고한 병양걸은 어찌되었나?
의병장 김덕령은 왜 돌아가셨냐?
박진장군은 명나라 장군에 맞아죽을동안 선조는 뭐했냐?
붕당정치를 만든게 누구냐?
@@Jabberblabla 뭐지 이 똘추는
@@김성배-y4d 선조를 고작 그거 하나로 판단하니다 ㅉ
@@Jabberblabla 내가 선조 칭찬을 했니 뭘 했니 틀딱아 시비 걸지 말고 꺼져
선조 인조 순조 멍청한 임금,.. 이 왕가 자체가 개**
견부호자의 대표인물 두명. 선조 인조.. 진짜 광해군과 소현세자가 제대로 왕을 할수 있었다면... ㅠㅠ
왕으로서의 자질이나 능력은 선조가 광해보다 나은인물입니다
@@soridaizin79 맞음. 인재발탁과 적재적소 쓰임에는 선조가 굉장히 뛰어났음. 임진왜란, 정유재란만 아니었으면 못난이 모습도 안보여주고 뛰어난 군주가 될 뻔(?) 했던 임금
광해가 선조만큼의 정치력을 배웠다면 한국사가 달라졌겠죠
@@soridaizin79 ⁹⁰
99
영창대군의 탄생은 선조가 아니고서라도 사대부들사이에서도 내분분위기를 일으킬 충분한 사유가 되었슬것입니다.
아닙니다.
영창대군을 지지한 사족은 소북중에서도 유당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동인이 분화되기도 전부터 광해를 세자로 하라고 주창했었습니다.(이거 때문에 정철이 팽당하고.)
그렇기때문에 광해정권 초기에는 서인과 남인 그리고 대북의 연립정권이였고 여기에 소북도 참여했습니다. 오직 유당(탁소북)만이 끝까지 영창을 지지하다가 숙청되죠.
사실 영창의 존재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미 전쟁 영웅 타이틀 하나때문에 사족들이 눈길하나 주지 않았고요.
@@로갓-i8w 영창대군이 애기때니 당장은 그에 대한 지지가 늘어날수는 없죠. 하지만 영창대군이 자라날수록 영창대군을 끼고도는 세력들이 늘어날 소지는 무시할수가 없습니다.
@@정재성-c1l 만약 영창대군이 임란때 10대초반 이었다면 몰라도 이미 전쟁영웅이 된 광해를 이길 껀덕지가 없었습니다.
서인=이전부터 광해 지지로 선조에게 팽당함.
남인=선조에게 팽당하고 임란 때문에 광해지지.
대북=임란때 함께한 전우.
이상황속에서 그나마 소북이 영창지지세력이 될텐데 역사속에서도 소북이 대북이 싫어서 광해를 크게 지지안한거지 영창이 좋아서 지지한건 소북에서 유당 뿐입니다. 영창이 분조활동을 하지않는 이상 불가능합니다.
@@정재성-c1l 그래서 광해군 집권 이후에 영창을 광해의 라이벌로 인식한건 대북 뿐이었지 나머지는 유당마저 정리된 상황에서 굳이 영창을 지지할 이유는 없었죠. 먼곳에 유배하고 나중에 죽이자는 상소가 빗발칠때 죽여도 되는걸 대북이 충동질 하자 바로 죽이는데 쓸데없이 너무 일찍 죽였습니다.(어차피 서인 남인도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서면 죽이자고 상소를 올렸을겁니다.
@@정재성-c1l 명분상 그럴 확율은 희박합니다 이미 세자가 광해군으로 영창대군 탄생 이전부터 확정된 상황이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가 뒤집힐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광해군이 일찍 죽거나 사도세자 양녕대군 처럼 세자의 신분으로막장으로 살거나 하지 않는한) 당시 유교적 가법 제도상으로도 본부인에게 자식이 없어서 서자나 양자로 종통을 이을 후계자로 삼았으면 나중에 본부인이 자식을 낳더라도 이를 무를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고 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 유당도 세자를 바꾸자는 소리는 공식적으로 입밖으로 꺼내질 못했습니다. 그 말 나오는 순간 역적이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광해가 똑똑하긴 했지. 근데 그 똑똑한 왕을 멍청한 주위 사대부들이 끌어 내리려고 지랄지랄 한거임. 지들 기득권 안뺏기려고
맞습니다 광해가 지들 뜻대로 안대니 끌어내리려 개수작떨다 걸려서 반대로 지들이 광해를 버린거지
이 찌질함때문에 아이러닉하게 임진왜란이 초반에 왕이 잡혀서 다 손 놀뻔한걸 기회를 잡음. 그당시에 40-60키로를 하루에서 이틀만에 튀니 왜군이 아이러닉하게 도망간 거리를 예상치도 못하고 추격을 못함. 밥도 제대로 못먹고 튀었다고 했으니까...
주변상황이 폭군이될수밖에없었던 광해군
한국말이나 똑바로 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존나 같잖아
@@김삼다 연산군은 일이라도 열심히했지.. (갑자사화 전까지 500번 이상) 광해는 개시한테 일 다맡긴다고 환관한테 까임
그냥 제 자신도 한계가 명확했음
인조 선조 개폐급임
선조는 주변사람들이 뛰어나서 전란을 막기라도 했지.. 인조는 말아먹기만
많이 아시네요^^
영조도 잇늠
인조가 최악이지 ㅋㅋ
@@JOHNNIEWALKERBLUE00영조가 왜? 이 새끼는 개똑똑하자나. 자식이 문제인거지
인목대비입장에서 쓴 계축일기에 대해서 당연히 광해군에 대해서는 악감정 일변도인데 과연 계축일기의 내용을 신뢰해야 할까요?
도대체 권력이 뭐길래 아버지가 아들을 시기하고 죽이는지 선조는 괄시하고 인조는 아들 손주들 며느리까지 죽이고 영조는 아예 광에 가두고 지키는 포도대장이 멸시해도 놔두고 이런 임금들 끝에 -조를 붙이고. 차라리 받침 ㅅ 을 붙이지 ㅠㅠ
사도세자는 미치광이라 죽여야하긴했음
인조가 언제 아들죽임? ㅋㅋㅋ
그리고 손주 며느리들은 소현세자 죽은이상
인조손으로 정리했어야함 ㅋ
권력 앞에서 다 죽인거지 뭐. 선조나 인조나
@@데통영 영조는 죽였어야했음. 사도세자는 현대로 가져와도 연쇄살인범에 범죄자임
멀리 볼 것도 없이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도 같은 짓을 저질렀죠.
금쪽이왕 선조...비운의 광해군...
오죽 했으면 일부 양반들은 이참에 진짜 양위하고 물러나라고 상소까지 올려서 패드립을 치기도 했다고 하니 선조가 얼마나 찌질하게 보였는지 알수 있죠
명분을 잃은 왕
피땀으로 쌓아온 정통성을 스스로 저버린 왕
참.. 고딩때 광해가 처음부터 폭군이 아니였다길래 그런갑다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광해군 처음 젊은 시절 행했던 행보를 보고 다시봤습죠
😊
선조는 부관참시 하고 그의 능은 없애버려야함
선조때문에 2차세계대전 일어나고 유태인 600만명 학살당한거임
재밌네영~ 전달력 굿
선조는 겁이 많아도 스피디한 실행력이 없었는데
인조는 겁이 많고 실행력을 가진터라 위협당하면 바로 아작을 내버렸음...
광해는 폭군은 아니지... 아예 왕의 실적이 전혀 없는 연산군과는 비교 불가... 왕의 그릇이 아니었던 인조보단 훨씬 나아 보임...
@@kephas7772 연산군 실적 있는데요;; 재위 중만 놓고 보면 광해보다 나았는데.. 연은분리법 세계 최초 발굴한게 연산인데 경연도 갑자사화 전에 500번 넘게 했고
연산은 잘하다 대번에 말아먹었고 광해는 천천히 말아먹었음
선조인조.. 어디서 양아치가튼것들이 왕이 되서 저사단을 만들었냐..
기록이 정확하게 신뢰할수 있는지가 의문인데 현재의 해석은 이이첨이 영창대군을 경계해서 죽음으로 몰아가도록 사주했다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만 문제는 여기도 의문점이 많습니다.
우선 영창대군을 죽음을 집행했던 강화부사 정항이 반정후에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조반정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한 어떤 진상조사도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의문입니다. 진정으로 광해군의 폐륜을 조사하고 반정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진상조사는 필수인데 그것을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죠.
그리고 대북이 영창대군의 죽음을 사주하였다라고 하는데 이이첨은 몰라도 정인홍은 되려 더 반대였습니다. 정인홍은 폐모살제에 적극 반대했습니다.
헌데 반정세력들은 정인홍이 폐모살제에 적극 나섰다라고 둘러 쒸웁니다.
@@정재성-c1l 개시와의 잘못된 사랑이 파국으로 깨달았음..
명나라로부터 세자교지를 받지 못해… 위태한 자리와 아버지로부터의 압박 질투.. 하..
광해의 실수 이방원처럼 인목대비 포함 왕 후손들 씨를 말렸어야 한다는거, 자기편을 확실히 만들었어야 한다는거 선조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는거
당연한거 아닌가? 왕권을 공고히 해야 민생이 안정된다는걸 모르는건가?
세조는 단종죽인거 비판도 못하는 애들이
심지어 세종 문종 이미 핏줄로 똑똑이가 그대로 이어진 핏줄인데 단종은 그 반만해도 충분할텐데?
광해의 실수는 지나친 궁궐욕심입니다.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등 궁궐 5개를 동시에 만드는데, 흥선대원군도 궁궐 2개 짓느라 당백전 만들고 경제위기 있었습니다. 그 궁궐을 임진왜란 직후에 5개라니요. ㅡㅡ
@@보고보고-x3q 그걸 했기 때문에 명나라에 그것들이 안간거라곤 생각 안하시나요?
@@Jabberblabla 뭔 헛소리임? ㅡㅡ
@@Jabberblabla 광해의 해결책은 매관매직이었음.
궁궐 짓는데 필요한 것을 지원하고 벼슬을 얻은 자들이 있다
연은도정(蓮恩都正) 응호(應虎)에게 가자하였는데, 영건 도감에 철 5백 근을 내었기 때문이었다. 서인(庶人) 이현룡(李見龍)도 철을 내었다는 이유로 감목관(監牧官)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영건 도감에 터·돌·재목·철·포·곡식 등을 내고서 등급을 뛰어넘어 높은 벼슬을 얻는 자들이 앞뒤로 서로 이어졌는데, 심지어 생선·소금·젓갈을 바치고서 등급을 뛰어넘어 높은 벼슬에 오른 자도 있었다.
광해군 급하게 세자가 되었지만 그는 당시로써 장남 임해군 휘아 여럿 아들 있지만 왕이 될 사람은 광해군 이외 전쟁중에 가장 적합한 세자 다음 보위 이어갈 아들 광해군 가장 유력 했고 그만한 인물 없었다
아버지 선조가 잘못한게 100. 제위 물러받기전까지 영창대군을 낳아서 입지를 불안하게 했고.. 죽을때까지 신하들은 2편으로 나눠 싸우게하고..임진년에 이용만하고 토사구팽 ㅋ.. 입지만 단단하게 해줬으면 저렇게까지 자리에 집착은 안했지..
영창이 진짜 선조(개조)의 아가 맞나??
조선왕조 촤악의 왕은 선조 인조가 투탑이 아닐까?
철종,고종도 있잖어
팩트는 선조는 업적으로 따지면 태종 세종 성종 바로 밑까지 올라감
인터넷에서 뭐 성군이네 조선말 유일한 희망이네 물고 빠는 정조보다 선조가 업적이 우월함
인조, 고종이 최악임ㅋ
선조는 찌질하고 속이 좁아서 그렇지 인재등용만큼은 잘한편임..류성룡,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이순신 등이 모두 선조시대인물이니..
연산 광해지 뭔
@@Sun-n5y7n영상 제대로 안보셧나요 ㅎㅎ
책임은 안지고 회피하고 능력있는 주변을 질투하고 중국에 굴종적으로 사대 의존하려는 모습이 누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네요
머저리개똥녕 윤 哥?
문재인받고이재명추가
노무현 추가요
윤석열 얘기구만
@@goodjobice942멸공
영상속 말이 좀 안맞지 않나요?
양위를 하지않으면 세자는 불효가 된다.
양위를 하면 세자는 불효가된다는 표현이 맞지 않나요?
왕위를 물려주는데 그것을 자식이 덥썩받으면 불효이고,
거절하면 충효아닌가요?
왕이 양위를 하려는데 양위를 받지않으려 하는데 어명을 어기는것이 불효이자 불충인것은 당연한거 아닌가요?
광해 반대세력의 반정으로 쫒겨난 임금으로 역사는 이긴자의 편으로 기록되는것이니 만큼 자기들 반란을 정당화 시키려면 광해군을 악마화 시켜야되기에 폭군으로 된것이 아닌가 싶어요
글쎄요... 승자의 입장인 세조는 그렇게 항상 악마화 당하는데 왜 광해군만 억까를 당하는거라 생각하지
선조와 인조사이에 광해군이 없었다면 조선은 100년은 더 일찍 망했을 것이다란 말도 역사학자가 한 말이죠.
광해군이 그정도로 잘한건 없는데 너무 오바인듯
@@dragonet271그정도로 역사를 모르시는거같음
그 역사학자가 누군데그래서
광해군은 폭군이야. 그러니 쫒겨났지.
@@푸른산-v3m 임진왜란 터졌을때 광해군에게 고기방패 세워놓고 명나라로 도망친후 임진왜란 수습될때 복귀해서 왕자리 회수 후에 다른아들 생기니 그 아들 세자책봉하려고 너 꺼저 시전 광해군에게 이순신에게 한것처럼 질투 엄청하고 겐세이 놓기시작 인조세력은 미래 생각없이 반역해서 왕자리 차지하려고 호시탐탐 노림 그 사이에서 광해군이 할수있는것은?
선조가 사실 한양에서 도망친건 이해가안되는건아닌데 명나라로 가겟다 이건 진짜 욕쳐먹야됨 이떄부터 왕자격없엇음 ㄹㅇ
선조 같은 사람은 사회에서 제일 만나지 말아야 할 유형!
시기 질투심 강한 선임...
굿굿굿굿
가끔 나오는 영상들 드라마에요 영화에요??
왕위서열이라는 것도 바라보기나름인데 보편적인 성리학적 종통명분상으로야 적자우선이죠
아닌데요,,,
적자가 우선이긴 하지만 그때 그때 융퉁성 있게 했죠
한번 살다가는 인생 잘 살고 사야겠다고 선조보고 느꼈다
그 순간의 열등감과 찌질함때문에 몇천년이 지나도 이리 욕을 먹으니… 그릇이 크게 살아야겠다.
오너 그룹의 장점 : 세종, 영조, 정조가 나옴
오너 그룹의 단점 : 선조, 인조, 고종이 나옴
연산군, 광해군: 흑화되기 전에 사연이 있었던 과대평가, 과소평가 되어진 비운의 왕들..
연산군은 그거 핑계고 걍 폭군 맞음. 광해군도 앞뒤가 더 병신이어서 상대적으로 나아보일뿐..
@@qaz010zaq 최종적으로 폭군이긴 하죠.. ㅠㅠ
@@qaz010zaq 생모기일에 무덤앞에서 포르노파티한것도 반정사유중 하나였음 즉위전부터 그 사건 다 알고있었고
@@HanWoong1015 연산도 광해 이상으로 과소평가는 맞기는 합니다. 적어도 재위중만 놓고 보면 광해보다 나앗고.. 말년데 송휘종+충혜왕 시즌2만 되지 않았어도 다른 조선왕들이 등한시한 기술에 관심이 많아 아깝긴 하죠. 자식농사도 좋아 신수근은 반정 자체를 반대한게 아니라 진성대신 이황을 세우자고 한거고
하아...선조아재 딱밤마렵네.....
인조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니 정당성을 위해서는 결코 종이 되면 안되지 그래서 군으로 정했다고 봄..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역사이니깐... 결국 이 모든 사건을 시발점이 수양 대군이 왕위 쟁탈이라고 봄..
폐위 되었어도 후에 종으로 올려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단종이죠. 광해군이 추서되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던 또라이였기 때문이죠
@@maple4801 먼지 알려주세요
@@kmh624 광해군은 우리가 중립외교와 대동법 때문에 성군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폭군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때 파괴된 궁궐을 복구하는 공사를 지시했는데 이게 문제는 너무 과했습니다.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아예 증축을 명했을 정도에요. 이로 인해 농번기에 강제로 차출당한 백성들로부터 원성이 높았습니다. 게다가 부족한 재정을 메꾼다고 매관매직까지 일삼았어요. 형인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건 유명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강제로 서궁에 가둔 건 유명하며(이건 현대 기준으로도 패륜이다)증거도 없이 몇몇 신하들을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가족까지 멸문지화를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권신들을 관리하지 않아 붕당간의 경계가 깨졌죠. 심지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대동법 시행도 정작 광해군 본인은 반대했으며 광해군은 말년에 한 궁녀와 주색잡기에 빠졌다고 합니다. 폭군의 모든 걸 다 갖춘 셈이었습니다
@@maple4801 역시 실정은 더 심했군요.. 감사합니다
@@maple4801그건 세조나 태종이 권력지키기위해 위협인물 제거하는것과 다른게없어보이는데요? 태종세조도 군이여야한단 말씀이십니까? 왜 저 똑같은 이유로 광해만 군입니까. 광해도 오래 재위했다면 뛰어난 성군일수있었습니다. 어쩌면 세조보다도 더.
폭군이라 칭하는 결정적인 건 동생 죽이고 자기 어미를 가뒀다 이건데 태종이 딱 광해랑 같은 격인데 태종은 폭군이라 부르지 않음 그냥 패자이기 때문에 폭군이 된 거지 달리 설명할 필요 없음
저시대는 사림파시대임
초기 관학파 아님..ㅋ
방워니는 본인이 유학자라
명분을 잘만들어낸거뿐임
머리좋은
가스라이팅의 대가였을뿐임
이방원은
@@phdogy 조선 중기처럼 꽉 막힌 시대가 비교적 아닐 뿐이지 명분으로 따지면 더 취약함 왜냐 우리는 신진사대부다 고려 권문세족 따위랑 다르다를 내세웠는데 결국은 썩은 건 마찬가지라는 걸 보여줬기 때문에 왕조 극초기면 더욱 혼란스러워야 맞는데 그렇지 않았음 그냥 광해는 만만했던 거고 태종은 무서워 죽겠던 거지 세상살이 답을 내고 끼워맞추기의 연속임
@@그래그래-t1z
저시대는 혈통중시 왕조시대임
뭔 현대적이념을따짐?
국가가 곧 왕이고 왕의 정당성을 혈통으로입증하는시기임
광해는 운이 지독히없었을뿐..
의인왕후가주욱살았으면
양자명분으로 정통성 의심없이 왕이되었겠지만 그 의인왕후가
승하하면서명분이사라진게 결정적으로 타격이었고
적자인 영창을 의심하기시작하면서
그나마사대부에게
두둔받을정당성도 사라짐
최소한 인목대비에게는 관대했어야
사대부가챙겨줄수있었음. 조선은 효를 강조하는 나라였으니까
@@그래그래-t1z 방원이었으면 개시랑 이첨이부터 처리했습니다.
대표 명분으로 내세운 게 그거일 뿐 진짜 심각한 건 궁궐병이랑 정치판 붕괴였음. 전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라에서 궁궐 공사 몇개씩 벌이고 의심가는 놈들 닥치는 대로 때려잡으니까 대북 천하 되고. 태종이랑은 격이 다름
왕자리에서 쫒겨난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해산물 많이 먹고 80살 까지 천수를 누리며 마음은 쬐끔 불편했겠지만 암튼 오래토록 살다가 죽었다. ㅋㅋㅋ 그동안 육지에서는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나라에게 굴욕 당하는 중이었고 인조 모지리가 삽질 중이었다. ㅎㅎㅎ 광해군 형과 동생은 사이코패스 였고 기분 나쁘면 민간인을 맘대로 죽였고 부녀자들을 겁탈..암튼 조선왕조는 이때 망했어야 했는데...성리학 기득권들이 절대 놓지 않았지. 현재 기득권들도 똑같은 세력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평등하고 성공 가능성이 열린시대
67살에 죽었는데 무슨 80살까지 살았냐? 왕자리에서 쫒겨나서 시종들에게도 멸시받으며 목숨만 연명하는데 오래살면 뭐하냐?, 일찍 죽는게낫지.
@@푸른산-v3m 능양이 광해가 아플때마다 어의 보내주고 그랬지요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근대화가 빨랐을것이나..
결국 후의 세도정치까지 막을 수 있었을까 ..
누가 왕이 된들 대세는 바꿀 수 없었을까..
대동법은 광해군때 시작된건 맞지만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에 반대했습니다. 실록에 나와있구요 시행 중에도 대동법을 그만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 이유는 서인들과 양반들의 반발이 너무 심했기 때문임
그래서 대동법은 강원도에서부터 시작하게 되었죠
이제 이해 가시죠?
@@dwt3506 서인뿐만 아니라 북인이든 뭐든 그냥 다 왠만하면 부정적이였음
아버지가 제대로만 왕위계승을 했으면 일어나지않을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선조 - 광해 - 인조
이 3명의 지도자 중에 유일한 성군
선조랑 인조의 시호를 격하시키고 광해를 왕으로 올려야함
선종 ㅡ광해군은 광조ㅡ인종종?
선조랑 인조랑이 조를 쓴다는 게
선조, 인조, 고종은 군으로 내리고
광해는 조, 종으로 올려야 합니다
선조 - 임진왜란 7년 동안 국토 황폐화
인조 - 병자호란, 정묘호란으로 국토 황폐화
고종 - 40년 동안 일본에 국권 뺐김(제일 개xx)
한국사에서 가르치지는 않지만 저시기에 한민족을 노예로 데려가기도 하고 재미로 죽여버리기도 하고 여자들을 셀수 없이 강간한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다시는 역사에 저런 지도자가 나오면 안됩니다. 너무 많은 선량한 민중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임. 조선은 이미 끝난 나라라는 걸 명심하길. 너무 감정 몰입하지 마시길.
광해는 폭군이자 암군이 맞습니다.
선조가 임란 7년동안 찌질한 모습을 보였지만 임란에서 양위파동을 이르킨것 정도를 빼면 합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애초에 연산군-중종-명종으로 이어진 개폐급라인에서 나온 문제를 해결하고 조선이 나아갈 비전을 제시한(대여진 외교, 대동법등) 뛰어난 행정가가 선좁니다. 7년못한걸로 30년을 잘한것을 못했다고 할 수없죠. 명암이 분명한 군주였을 뿐이지.
인조도 선조와 같은 맥락입니다. 물론 인조는 선조처럼 재평가 할 부분이 적고 전반적으로 암군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한게 없는것도 아니고 광해에게 선조때문에 분조장 온거라는 프레임으로 커버쳐준다면 인조에게도 광해가 박살낸 내치와 인재플에 대해서 두둔해줄수 있습니다. 광해가 망쳐버린 조선의 내치를 정상화 시킨 사람이 인조거든요. 물론 호란에 대해서는 변명에 여지가 거의 없지만요.(광해때문에 군사력을 키울수 없었다도 정묘호란까지이지 병자호란은 논외.)
고종도 방법론이 잘못됬을뿐 노력은 열심히 했습니다.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끝까지 버티고 싸운사람이 고종이니까요. 방법론과 방향성, 외교적 실패등으로 실패한 군주지 무기력한 군주는 아니였습니다.
사실 광해군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고평가된 왕일뿐이지 왕 광해는 강경하게 보면 연산보다도 아랩니다. 자신의 업적이라고 말할만한게 존재하지 않는 왕이 광햅니다.
조선을 망친건
세조/연산군-중종-(인종)-명종라인(사실상 조선을 정체시킨 라인)/광해군/인조/숙종/순조/고종입니다.
미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장 인터넷에서 물고빠는 정조보다 업적이 우월한게 선조인데 뭔 개소리를 이렇게 ㅋㅋㅋ
궁궐 짓는다고 서북방면 군량미 죄다 삥땅치고, 방납으로 돈 빼돌려야하니까 이원익과 김육이 그렇게 주장하는 대동법을 다 죽일 기세로 반대하고, 명황제가 임진란 참전 백성들과 유족들 주라고 보낸 은도 다 빼돌려서 한푼도 나눠주지 않은 광해가 성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니가 물고 빠는건 광해가 아니라 이병헌이예요
만약 광해군이 스스로세자에서 내려왔었다면 오래도록살다갈수있었는데
폐세자는 죽음임.
태종이 양녕을 너무나 아꼈기에 안죽은거지.
그럼 또 선조가 지랄할껄 지 마음대로 내려간다고
잘하던 세자가 내려가면? 폐세자는 죽임당하기 딱좋지. 평판도좋겠다. 평판개쓰레기 선조,인조가 광해군,전 세자빈, 전 세손을 냅둘까? 다 죽이기전까진 안끝나지
이미 오래 살기는 했음
@@로갓-i8w태종이 아니라 세종이 양녕대군을 보호한거지
광해가 성군은 아니죠
그러나 분명한것은 폭군은 더더욱 아니었다는 겁니다
뭘 근거로요?
@@가시나무-k7i 공부좀하세요
@@미문-o7n 하고서 내린 판단이 ”광해는 지나치게 미화되어있다“ 인데요?
폭군 맞아요. 광해군의 실정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시나무-k7i 궁궐병 하나로도 폭군 빼박입니다..
그러게
믿을수가 있어야지 이제
공부 또 다시 해봐야겠네 광해
진짜 선조는 악군중 악군
광해군이 똥인줄 알고 치웠는데 다음 왕 인조는 설사였다
왜란중의 일들로 어쩌면 PTSD를 앓게 된 건 아닐까
폭군의 개념이 왕권강화에 성공하면 묻히고 실패하면 걍 폭군으로 낙인시키는거지
최강폭군은 태종아닌가?
태종이 민생을 망쳤나? 누구 죽여야만 폭군인 건 아니지
다좋은데 배경음악 좀 줄이세요 시끄러워서 공부가 안되네요
안타깝다 이이첨은 기왕 욕먹는 확 다 쳤어야 했는데 그바람에 재위 앞뒤로 다 말아 먹은 인조를 탄생시켰으니 ㅠㅠ 훨씬 빨리 근대화될 수 있었는데 붕당정치의 희생양 광해군님 정말 안타깝습니다 ㅠ
광해군이 욕먹을 만하긴 해도 앞뒷놈보다 못했다곤 말할수 없음
팩트) 광해군은 대동법에 부정적이었다. 경기도에 한해서만 실시하게 했고 다른 도로 확대 실시에 극히 부정적이었다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 실시는 서인(김육 등 한당)들이 주도했다. 광해군 성군설을 무참히 깨부수는 사실
@@SWLEE-dj1kk 대동법의 기틀은 선조가 이미 재위말년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았고, 광해는 경기도에만 실시하는 것도 부정적이었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으로 실시한겁니다. 그나마도 6개월만에 폐지해버리려는걸 이원익이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 막아섭니다
조세제도를 새로 시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과는 별개로 광해가 대동법 자체를 싫어해서 안하려고 온갖 발악을 떤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방납으로 돈 벌던 세력이 대북이거든요
@@SWLEE-dj1kk광해군이 대동법을 반대한건 그런 이유가 아님
대동법을 시행하면 기존 공납법으로 들어오던 정치자금 즉 뒷돈을 챙기기 어려워져서 반대한거지
미온적이었으나 결국 허락한 최종결재권자는 광해군. 지도자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리지 실무적인것부터 적극적으로 추진을 해야하는 자리는 아님. 결국 그런의견을 받아 시행하도록 했냐 안했냐가 중요한것.
@@umm2359 언제는 대동법의 아버지를 광해군이라 사기치더니만 이제와서 딴 소리 ㅋㅋ 그리고 광해군이 백성 골수까지 등처먹은건 얘기 안하쥬
@@SWLEE-dj1kk 뭔 현판 ㅋㅋ? 조도사라는 관직까지 만들어서 지방 곳곳 구석구석 파견해 백성들 수탈해먹은게 광해군인데
와아,
선조 속 ㅈㄴ좁다 ....
그아비에 그아들임
국가를 위해 열혈했던 남자인데, 부모에게 내팽겨진 비운의 왕자.....
선조에 인정받지 못하고 스트레스 가 쌓여 분노조절 장애가 있지 않았을까요
솔찍히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에 멸망해도 무방한 왕조임.. 민생은 명분이었을 뿐이였고, 지네들 왕권강화를 위해서만 있었던 왕조가 조선왕조였음 ~~~
벌거벗은 한국사 내용 자체가 좀 수박 겉핥기식 인가.. 이제 좋은 프로들이 많아서 대부분 알만한 지식을 알려주는게 아쉽네요..
제목대비 기대했던 내용은없으니
이내용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더 깊게 공부를 하려면 개인이 파면되요. 이건 방송프로이지 교육방송은 아니거든요
심도 깊게 들어가면 이해를 못하는 사람도 있음
이건 흥미를 끌기위해 너무 어려운 내용은 뺀 거 같아요. 어려운 거 보려면 유튜브에 역사스페셜 있으니 그거 보시길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고 했는데, 수신은 그렇다쳐도 가정 하나 재대로 못 이끌면서 왕 노릇하는게 화가 납니다.
믈론 가정을 잘 이끌어 가는 것만으로 위인이라 할 정도로 쉬운 일이 절대 아니지만, 수백수천 종류의 사람들과 이햐관계를 짊어져야 할 왕좌에 비하면 그나마 쉬운 일이 잖아요
이런거 보면 선조가 개 폐급이었네
인조와 더불어 조선의 쌍두마차가 아니겠소이까....자신의 컴플렉스를 자식에게 까지ㅜㅜ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왜곡 수준으로 심하게 되서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선조는 솔직히 넘사고 인조도 못 넘는게 현실 광해 입니다.
@@로갓-i8w ㅋㅋ 미쳤네 심지어 선조 폐급짓들 1할도 안나왔는데
이런애들 뭔 제정신으로 이런소리 하는지 궁금하네
여기서 나온건 아주 일부
찾아보면 폐급도 보통 폐급이 아님
이순신 장군 관련해서 윤두수 원균 관련만 찾아도 욕이 알아서 나올것이고 이몽학의 난 찾아보시고 자식들이 어떠했는지 찾아보시면 보통 폐급이 아니란걸 알수 있을겁니다
@@Jabberblabla 일단 왕으로서의 기본인 내치도 못한게 광해고 내치로는 한국역사상 상위권에 있는 선조나 딱 평균수준으로 한 인조에게 비빌 껀덕지가 없습니다. 단지 인조는 외치부분에서는 심각한 부분이었습니다. 선조는 솔직히 외치도 크게 깔게없음. 이외에 선조-광해-인조모두 인성 문제를 지녔습니다. 선조가 이부분이 굉장히 강조되죠.
그러면
광해가 15년동안 한게 뭔가요???
1.일부 소북(탁북만)을 제외하면 모든 당파의 지지를 받아 강한왕권을 가졌으면서 쓸데없는 옥사로 양반층 지지를 잃고, 극단적 유교 강경파이자 원론파인 대북(친명도 아닌 숭명파이다.)주도의 정치로 외교정책 망쳤다. (영창대군계 숙청에 대한 비판이 아님. 영창대군계 숙청은 당연한거임.)
2.무리한 토목공사로 "전쟁 영웅"이라는 특수성으로 가진 민심을 스스로 날리는 기행을 저질렀다.
3.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그런 외교정책을 주장한 광해는(정작 대북 때문에 국가 외교노선은 친명배금 노선이었다.)전쟁이 날 수도 있다면서 군비를 빼먹으며 궁궐을 짓는 만행을 저질렀다.
4.사실 외교도 좋게 보장해서 중립이지 그냥 이도저도 아닌 외교정책이다.(현재 중립외교론은 거의 들어가는 추세이다. 이중외교와 같은 말을 더쓴다.) 이 이도저도 아닌 정책으로 자신의 친위대(대북)랑 싸우게된다.
5.개혁군주라는 사람이 서얼 차별 금지해달라는 거에 대해서 힘으로 찍어누르는 행보를 보였다. 지도 서얼이면서...
6.대동법 덕분에 개혁군주라는 소리를 듣지만 사실 선조때 이전부터 나왔던 것으로 선조때 논의되다가 광해때 실행된거 였다. 심지어 왕권에 ㅁㅊㄴ이었던 광해는 중국황제가 조공을 받는 것 처럼 나도 공물 받고 싶다고 대동법에 반대했으며 정치척인 교환으로 실행시켜주었다. 사실 대동법의 확산및 법안가동은 인조정권이 해낸 결과물이다.
7.전쟁 끝나고 양전, 인구조사와 같은 기본적인 것도 안한(인조즉위 직후 실행함.) 사람이 내치에서 받을 +점수는 없음.
8.지가 키운 사냥개인 이이첨에게 역으로 끌려다녔으며 김개시에게도 흔들리는 전형적인 꼭두각시형 군주였다.
선조는 인간성이 문제가 있는 군왕으로 왕의 그릇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괜히 목릉성세가 아니다. 인조는 난세에 범인이 민족주의에 빠저 권력을 잡으면 생기는 일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광해는 한 개인으로서 똑똑했지만 정치 능력이 전무하였으며 연산군 마냥 왕권 강화에 ㅁㅊ놈이었다.
좋은 내용인데.. 광고가 너무 많다
조나단
만약에 임해군이
동생의 생각이나 마음을 알고
서신을 보낸후 자살한거라도
내가 광해였다면 암것도 안했을거 같은데
역사는 어느정도 뇌피셜이 있어서
이래서 이랬다라기엔 애매함..
빈수레가요란한왕이였네요 사람죽이고권력을차지한왕 이성계이지요
능력이없으면서도 장기간 왕으로 무능력의극치를 보여준선조에비해서 광해군은 임진란후에 너무 일을해놓은게 많다
지금 정치가 왜 서로 밥그릇만 가지고 싸우는지 알겠네요.
광해군 최대 업적: 후대에 영화가 잘 나옴
만일 영창대군이 선조 죽기전 나이가 초등학교입학정도라도 되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슬것입니다.
선조가 그때까지 살아있었으면 광해군도 임해군못지않게 정신병에걸렸겠죠
늙어서 왜 영창대군을 만들어 총명한 광해를 폭군으로 만들었는지.
콘돔도 없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죠
언론과 영화가 과대포장 시켜 만든 성군
현실은 누구보다 정치적이였고 백성보다 왕권강화에 힘쓴 사람
광해군이 실책도 분명 있었지만 후임 왕이 하필 인조라 선녀처럼 보이네 ㅋㅋ
오은영선생님만 계셨어도ㅜ
위인 지분율이 가장 높은 선조 치세..(이순신 권율 유성룡 정철 이황 이이 이항복 이덕형 허준 이원익 정탁 곽재우 김덕령 등 문무 골고루 쏟아져 나옴) 영웅이 많다는 건 그만큼 난세였단 건가..
대동법(선혜법)은 광해군때 시행하긴 했지만 본인은 계속 반대했었음
시행 자체가 남인 이원익이 주청한거고, 그나마 경기선혜법이였는데 유생들이랑 호조에서 전국에 확대하자고 상소 올라올때마다 안한다고 땡강부린게 광해군인데 단지 광해군때 시행했다고 광해군의 업적이라니
광해군이 반대를 하든 말든 광해군때 시행됐으니까 광해군 업적이지
@@Blue-q1w8f 처음부터 할 생각이 없었는데 즉위 초반에 삼정승이 주청하니깐 어쩔 수 없이 시행했고 6개월도 안 되서 말만 나오면 그만하자고 했는데 업적이라고?
@@likeaflower44 잘알고있네 세종 1년에 대마도 정벌도 사실상 태종이 주도한건데 세종 업적으로 보고 있는것처럼 광해때 시행된 일은 광해 업적이라봐야지
@@Blue-q1w8f 세제개혁의지를 가지고 선혜법[=대동법]을 주체적으로 추진했던 개혁군주 광해군의 업적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꼬투리잡아 폭군취급하는 요즘 트렌드는 왜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구름님처럼 역사 인사이트를 갖고 계신 분을 보니 가뭄의 단비같습니다.
@@likeaflower44 대동법은 광해군이 시작하고 추진한 업적이 맞습니다.
1. 즉위한 지 2개월만에 "선혜"라는 키워드를 담은 비망기를 내림. 이미 광해군은 방납의 폐단을 요목조목 지적하며 이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비망기에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선혜청이란 이름도 백성에 대한 구휼책을 강구하면서 '무선일푼지혜(務宣一分之惠)', 즉 '한 푼의 은혜라도 베풀기를 힘써야 한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며 여기서의 은혜는 국왕이 백성들에게 베푸는 은혜입니다. 이 모든 내용이 광해군의 비망기에 담겨있습니다.
이정도역사도 모르는데 어떻게 아나운서가 됐을꼬..싶다
아이씨 무슨 광고가 일곱개나 나오냐...
스토리 이어지는데 계속 끊겨 짜증나네.
나라의 큰 위기때, 백성을 뒤로하고 안위만을 걱정한 왕과 신하들이 피신에 급급했던 사건.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기도전 선조는 어린 여인에게 정신이 팔려 과거 난을 잊은채 또 평화스러움에 젖어 국정을 게일리 했지. 근데, 이는 충신들에 의한 승리였지, 왕ㅇ; 잘나서가 아니었다. 광해군은 그저 칼받이었을뿐.....
영웅
설마 선조?
진짜 쪽팔리지 않게 살아야지 선조..
선조는 알았을까? 추후에 자국 국민들이 이렇게 비웃을줄 .. 알았다면 안그랬겠지
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돼~~~??? 이성계가 고려의 정신을 이어갔어야 되는데 더 한심한 꼴이 된 조선이구만~~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 중국과 전쟁이 별로 없었던 게 저런 이유였구만~~ 신하국
조선의 왕들은 명나라 황제의 윤허를 받아야 정식으로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정통성 인정 못받으면 반정으로 추방됩니다.
조선시대의 국가사상
성리학은 명나라의 학문.
지금 우리가 미국에 사대하는것이랑 같습니다.
조선이란 이름도 명의 윤허를 받은 이름이라 고조선 후기 위만조선의 이름을 따서 조선이 됩니다.
참고로 고려도 송나라에 사대하였습니다.
어이 없는건 송나라가 거란에 패배해
거란에게 물자를 바쳤지만
고려는 거란에 뻑유를 날리죠
왜냐면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를 멸한게 거란이니까요
당나라한테 망한 고구려, 백제는 까먹었냐?
고려도 말이좋아 황제국 자주국이었지 실상은 송나라한테 좌지우지 당했다. 송나라가 아니면 금나라한테도 좌지우지 당했고 게다가 고려는 원나라한테 아예 식민지가 되었다
@@maple4801 근데 그때 원나라는 그만큼 강하긴 했었죠. 이긴 나라가 거의 없었으니
조나단 천재 인정~
능양군부터 조선의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인목대비 아버지는 왜 역모를 꾀하였는가 그 당시 역모는 사형이다 이복 동생을 죽인 광종 당연한 것 아닌가
궁 재건은 무리한 것은 잘못이지만
임해군도 알고 있었을 것
내가 죽어야 광종이 왕이 된다는 그 당시에 상황을
광종? 고려 광종 애기 인가요?
궁을 재건해야 왕권이 살것이고
그걸 함으로서 그돈들 명나라에 못바치게 되었으니 좋은거 아닌가요?
조선이 기울기 시작한건 세조 때부터라고 확신한다.
인조반정 덕에 그나마 이후 300년 가까이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죠 이미 광해군 말기엔 전쟁 없이도 알아서 망할 수준이었고 그걸 보여준 것이 인조반정입니다 불과 몇백명의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반정군사들에게 도성안에서 저항한번 못하고 궁궐까지 점령당할 정도로 나라꼴이 개판이었죠.
@@SuperWonder ㅇㅈ... 세조보단
단종이랑 그 휘하 세력들이 다스리는게 더 나앗을 것임.
선조가 광해군 왕위를 불안정하게해서.. 누구라도 저렇게 될 듯.
사람들이 가장잘못알고잇는것 광해는 대동법을 반대햇다 하지만 대동법을 광해가 시행햇다고함 ㅋㅋㅋㅋ
반대한 것도 광해군이고 시행한 것도 광해군임
@@k_dori0105 광해군은 대동법 자체를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광해군은 즉위 한 달만에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비망기에 대동법의 뜻을 펼치고 두달 뒤 최초 시행하고 대동법을 꾸준히 경기도 지역에 실시하고 심지어 과거 대과에 논술 문제로 직접 출제했으며 폐위되기 불과 16개월 전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는 광해군의 신하라 할 수 있는 북인 인사가 대동미를 징수한 기록까지 있습니다.
광해 6년의 기록 한 줄 '경솔하게 동시에 실시할 수 없다'만 가지고 그 이외 광해군이 대동법에 진심이었던 많은 행적과 흔적을 덮을 수 없습니다.
@@k_dori0105광해군은 반대했는데 신하들이 하자고 하니 하는 시늉만 냈지
다 떠나서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영웅.. 이거는 확실함
영웅좋아하네 광해군이 한게 뭐가있냐? 이순신과 권율 명나라때문에 살았지. 세자가 그것도 안하냐?
@@푸른산-v3m 역사시간에 자빠져잤냐?
@@푸른산-v3m 왕이 도망가는 통에 직접 적들이 도사리는 곳으로 뛰어들어 민심 담합시켰는데 활약한 건 맞음
@@Sun-n5y7n 적이 도사리는곳에 뛰어들었냐? 적이 없는곳에 가서 있었지. 적이 도사리는곳에 갔으면 벌써 체포됐지. 원래 전쟁이 나면 혹시 왕이 잡힐것을 대비해서 분조한다. 그냥 적이 없는곳에 따로가서 피난다니는거다. 같이 잡히면 안되니까. 광해군이 군을 지휘했냐? 광해군은 한게없어.
@@푸른산-v3m 가는 곳마다 인심 추스리고 다들 도망가는 통에 16살밖에 안된 세자가 나서서 일본군들 도사리는데 직접 분조 이끌면 자동으로 민심이 모아지지. 갑자기 맡아진 세자 역할을 충분히, 그것도 잘 수행했으니 도움이 안됐다고 볼 순 없음
선조 나쁜놈이죠
폐위당하는 왕이라 엄청 비관적으로 썻을건데.. 솔직히 정통성 문제아녔음 명군이 됫을꺼라봄..
그놈의 정치가 뭐라고...사람을 망가트리니...
선조입장도 이해가 되네. 그 당시 조선이면😊
광해군이 영창대군에 대한 아무런 견제의식없시 넘어간다고 해도 언젠가 영창대군이 자라나면서 영창대군을 끼고 도는 정치세력이 성장할 가능성은?
다른 유튜브에 영창대군의 사주를 분석한 내용이 있습니다.
th-cam.com/video/5GK1ex9ZxdA/w-d-xo.html
그렇다면 언젠가는 영창대군이 광해군을 위협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조선 3대폭군
수양대군 연산대군 광해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