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 정신현상학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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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11 พ.ย. 2024

ความคิดเห็น • 15

  • @cskim7153
    @cskim7153 4 ปีที่แล้ว +5

    쩍쩍 입에 달라붙는 명강!
    최고의 만남, 감사합니다.

    • @TV-uw9lz
      @TV-uw9lz  4 ปีที่แล้ว +2

      네, 방가워요‼️

    • @cskim7153
      @cskim7153 4 ปีที่แล้ว +2

      지젝을 공부하다가 헤겔 정리가 필수인지라
      다시 들었습니다. 지젝 강의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본명은 김영범 입니다.

    • @TV-uw9lz
      @TV-uw9lz  4 ปีที่แล้ว +2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영범님^^ 예도tv에 짜장면 열그릇과 명랑핫도그 25개를 보내주셨네요.

  • @youngcheolpark421
    @youngcheolpark421 6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일사천리네요 쑥쑥들어오면서 관통되네요 정말 헤겔은 시대를 꿰뚫어보는 선지자였군요 프랑스혁명을 보고 어떤 설계도를 그렸나싶은데 나폴레옹을 찬양한 베토벤이 떠올려지네요 당시 독일은 프랑스를 얼마나 짝사랑했을까요
    이럴 수 있나요 선생님
    이렇게 위대한 설계자 헤겔
    허나 그걸 다 압살해버리는 선생님강의에 탄복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거듭요

  • @이도영-z5j
    @이도영-z5j ปีที่แล้ว +1

    감사합니다

  • @김다솔-m7z
    @김다솔-m7z 2 ปีที่แล้ว

    앗ㅎㅎ 여기서 또 막히네요 풀어야 할 새로운 재미가 생겼습니다
    인륜성이 변증법의 처음과 끝에 놓인다는 게 어렵고 흥미롭습니다 인륜성이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생겨나는 공동체의 기본적 정신? 같은데, 그래서 교양과 도덕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즉자인 동시에 법철학에선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인 걸로 보아 지양의 완성격인 즉자대자도 겸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결국 생철학인 만큼 정신은 운동하는 것이라면, 이 즉자대자였던 지양된 도덕도 어느 시점에서는 새 시대의 정신에 의하자면 또 다른 즉자, 첫 인륜성이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그 출발과 끝에 나란히 인륜성이 들어갈 수 있는 걸까요 모든 법이 새로 생겨날 때는 늘 다른 법에 대한 위반이 된다는 게(안티고네처럼) 이런 즉자적이면서도 즉자대자적인 인륜성의 특성과 연관이 있나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 @bhlee4265
    @bhlee4265 2 ปีที่แล้ว +3

    이전의 정신현상학5 까지보다는 월등하게 내용이 많았던것 같습니다. 반복해서 듣어도 잘 이해가 안되서, 집중해서 받아 적으며 듣으니 좀 이해가 되는 듯 하네요. 받아적은 것 아래에 공유해봅니다.
    ---- 아래 --
    현실성과 정신은 같이가고, 이성은 정신과 같이 간다. 정신은 객관 정신있을 수 밖에 없다. 안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의식은, 객관적인 현실 사회성과 연관된다. 그래서, 헤겔은 이성의 마지막단계에서 객과적 현실성을 말합니다. 법철학이라는것은 헤겔의 철학에서 정신의 부분을 다룬다고 볼 수 있다. 목차를 보면, 객관정신 주관정신 절대정신은 목차로 나누어져있지 않고, 주로 내용적으로 다뤄지는데. 주관 정신은 주로 주관의 의식을 다루는 단계, 의식은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의 단계가 있고, 자기 의식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여러 단계를 거쳐서 이성에 도달한다는 거에요. 고대 그리스에서 스토아 학파라든지, 회의주의라든지, 기독교의 신적 이성과 인간의 이성의 모순, 이런걸 통해서 현실성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 현실성은 주로 사회적인 법과 연관되는것입니다. 헤겔 법철학에서는 추상적 권리(아프스트라 레이스트라), 추상적 권리에서 (모랄리테트) 도덕성으로 가고, 도덕성에서 인륜성으로 가는데, 정신현상학에서는 거꾸로 갑니다. 인륜성이 먼저고, 두번째가 빌둥 이것은 계몽주의와 연관되어 있어요. 교양이라고 그러죠. 세번째 단계를, 모랄리테트. 계몽주의 단계를 거쳐서 헤겔 자신이 사는 독일의 정신 독일의 낭만주의, 정신 철학의 마지막 단계에서 도덕성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깐 법철학은 어떻게 보면, 헤겔의 정신현상에서 객관 정신의 부분을 사회적 의식으로서 상세하게 다룬다고 볼 수 있고, 그다음 정신 현상학에서는 주관정신 객관정신 절대정신을 다루며, 절대 정신의 단계에서는 주로 종교가 다뤄집니다. 자연종교 예술종교 계시종교 이런게 있고, 마지막에 절대 지가 있어. 이런 방식으로 정신 현상학에서는 객관정신이 절대정신으로 가는 과정 안에서 다뤄지기때문에, 법 철학에서 다루는 계기들하고 정신현상학에서 다루는 계기들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죠. 목차를 보면 정신 이후에 종교가 다뤄지고 있다. 그럼 왜 이것을 객관 정신이라고 하느냐? 주간 정신에서는 정신의 현연이 완전한 단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현진의 현연이 완전하게 정신으로써 나타나는 개념이 정신이 이제 시작되는 단계는 객관 정신의 단계다. 그래서, 주관정신은 이성까지 다뤄지고, 가이스트(정신)가 이성(페어룸프트) 보다 더 큰 개념입니다. 주관적 의식을 벗어나서, 사회적 법과 윤리 도덕 국가 이런 개념들과 연관을 맺게 된다.

    • @bhlee4265
      @bhlee4265 2 ปีที่แล้ว

      정신이라는 이 개념은 결코 인간의 머리안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정신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헤겔의 정신이라는 개념은 사회적인 연결망과 연결되어 있다. 절대 정신은 보편자 '신' 개념 무한자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객관정신 까지는 유한자와 관게되어 있다. 헤겔은 정신에서 인륜성 계몽 미신타파 도덕 이런걸 다룬다. 사회적 법을 다루는것이 정신과 연관되어 있다. 인륜성이라고 하는것은 진정한 정신의 출발점이요. 그것은 남과 여의 관계, 가정을 이루는 기초 단위로써의 남과 여가 어떻게 인륜을 지켜야 하며, 이런것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관계 하고 있는지를 주로 이야기하는것이 인륜입니다. 그런데, 헤겔은 인륜의 출발점을 고대사회 그리스에 갔다 놓았다. 그러한 인륜성이 로마시대로 가면서, 이 인륜성은 추상적 법으로 나타나게되며, 이때 모순을 겪는데, 가정의 법 관습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이런것들이 로마의 시대에서 추상적인 법 체계로 가면서, 인륜성은 모순과 반목을 격계 된다. 그러면서, 변증법적 지향을 통하여 추상적 법으로 갑니다. 추상적 법으로 가면, 인류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모순을 겪으면서 자신의 결핍을 의식하게 되는거죠. 추상적 권리의 법으로 가면서, 고대 사회에서의 인륜의 특징은 초기 법을 현성한다. 그러나 이법이 추상적인 이유는, 인간의 자유를 올바르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헤겔이 볼때 로마의 법은 제국을 위한 법이며, 인간의 자유(자유는 인간의 최고 이념입니다. 칸트에게서도 같습니다. 이것이 헤겔 철학으로 옮겨오면서, 그대로 최고의 이념으로 사용되고 있다)의 이념을 올바르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래서 추상적 권리다. 이게 중세로 가면서 현세와 저 세상이 이세상에 모순을 불러 옴으로써 이 법은 인간의 자유의 현실성을 결여하게 되는... 중세는 이세상과 저세상의 이런것을 저세상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사회 안에서의 자유를 올바르게 형성하지 못한다. 그리고 국가가 배제되어 있다. 제국의 국가에서 시민국가가 아닌 종교의 국가로 옮겨진 거죠. 마침내, 게몽주의가 찾아 오면서, 인륜의 상태의 추상적 법은 마침내 계몽주의와 더불어서 교양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가다머가 말하는 교양의 단계를 진리와 방법에서 다루는데, 이것은 헤겔의 영향이 강력하다. 헤겔의 이부분 정신의 과정에서 객관정신의 과정 이 교양의 과정을 벗어나 극복하면서 예술은 마침내 주관주의를 벗어난다. 그래서, 주간정신을 벗어난 객관 정신에서 교양을 다루는 이유가 있다. 계몽주의는 객관정신에서 최고의 단계다. 국가안에서 시민의 자유를 인식한 국가단계에서 성립되는 그러한 법체계가 계몽주의다. 미신을 타파하며 계몽의 시대를 열어가는 프랑스 혁명 때 까지의 이 역할은 교양의 단계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교양의 단계는 너무나 주관성을 현실성으로, 현실성에 대한 너무나 많은 자각이 일어나는 시대였다. 신적인 법칙이 사상되고 인간의 이성의 법칙들이 강조되면서 교양이 게속해서 발전해 나가는 그런 단계에 있었다. 여기에서 변증법적 단계에서 모순은 올바른 신적인 무한자의 법칙들이 사상되었기 때문에 올바른 정신이 자기 자신의 올바른 통일과 변증법적 종합을 완성하지는 못하는 단계가 된다. 헤겔은 철저히 낭만주의자다. 무한자가 전제되어 있다. 베젤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낭만주의의 무한자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라고 하는 그 정신의 단계를 다루는 헤겔은 거기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정신이라고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은 누군인가? 무한자의 정신이다. 인간의 이성만 있는 교양의 시대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정신이 바로 계몽이다. 헤겔은 철저히 독일의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의 프로이센 국가를 스탠다드로 삼고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자주의로는 그렇다. 그러나, 헤겔의 객관 정신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동양인으로써 헤겔의 객관정신을 또 다른 방식으로 해석 할 수 있다. 헤겔이 자기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정신을 다루면서 계몽주의를 다루는것은 너무나 많은것을 시사하고 있다. 헤겔의 관점에서는, 계몽주의는 너무나 인간의 현실성만을 고려하면서 무한자의 정신을 소외 시켰다. 정신의 소외 현상에서 마침내 도덕성으로 가게된다. 무한자의 신적 법칙이 결여된 계몽주의는 한계에 접하게 된다. 중세는 반대다. 중세는 유한자를 무한자로 귀속 시켰다면, 계몽주의 시대는 반대로 현실성만 강조하는 도식으로 갔기 때문에 헤겔은 여기서도 결핍을 본다. 이 결핍을 지향시켜서 마지막으로 객관정신에서 도달한것이 도덕성이다. 칸트를 생각해보면, 도덕은 신적인 보편법칙을 전제해야 가능하다. 독일 철학에서는 신을 요청해야 한다. 헤겔이 마지막 단계에서 도달한 이 도덕성은 신적인 보편자와의 조화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자기를 아는 지식을 갖고 있는 정신이다. 그 정신이 바로 양심이다. 그다음, 자유로운 의무, 그다음 양심. 이런것들이 강조되는 프로이센의 단계에서는 유한자와 무한자의 적절한 조화가 일어나는 도덕성에서의 객관 정신이 도달하게 되었다. 이것이 정신의 단계에서 가장 좋고 합리적인 형식이긴 하지만, 도덕성에서는 너무나 양심에 대한 의무로 침잠되기 때문에 올바른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국가와 사회안에서의 균형을 맞추는것에 있어서 최고의 단계이기 하지만, 아직 절대 정신이 자기 자신을 아는 완전한 지식의 단계에 도달한것은 아니다. 도덕성에서 나타나는 결핍의 문제는 너무나 양심에 대한 의무로 침참되어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또 다시 현실성과의 괴리가 발생하기 때문에 헤겔은 도덕성의 단계에서도 변증법적 지향을 통하여 종교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하며, 객관정신을 마친다.

    • @bhlee4265
      @bhlee4265 2 ปีที่แล้ว +2

      객관정신의 형식은 서구 역사속에서 사회의 법이 만들어져서 이런것들이 인간의 자유의 이념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하는지를 지의 관점에서 자기의 객관정신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로마법은 추상적 권리에 들어가는 것이고, 중세는 추상적 권리를 보편자에게 옮겨 놓음으로써 교회의 신적 권위로 가지고 갔다. 이런점에서 인간의 자유의 이념은 추상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추상성이 계몽주의 교양의 단계에서 사회 속에서 구체와 되는데 여기서의 문제는 보편적 이념이 삭제되고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법이 확립됨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강조했지만 국가외의 모순을 통하여 시민의 자유가 실현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인간이 아름다운 영혼을 이루기 위한 무조건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는거. 그래서 헤겔은 객관정신의 마지막 단계에서 악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문화의 결핍을 이야기하고 양심을 이야기하고 또 아름다운 영혼을 이야기 한다. 아름다운 영혼이 국가의 보편적 법 안에서 또 다른 결핍을 경험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게몽주의의 완벽한 인간의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허무주의를 19세기 중반부터 나타나는것을 예견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칸트는 도덕성이 보편이성을 통하여 신을 요청함으로써 거기에 따라 갈때 진정한 올바른 사회와 국가에 봉사함으로써 도덕법칙을 지킬때에 올바른 조화가 일어난다고 본다. 헤겔은 이 도덕성을, 안에서 보는 이 결핍을 문화와의 결핍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더덕을 지켜도 거기에서는 주관적인것과 객관적인 사회의 법과 모순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며, 아름다운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결핍을 의식해야 된다는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 헤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언제나 종교를 위한 것이었다. 절대 정신의 이러한 마지막 종교와 마지막 절대 지 철학의 단계가 절대정신이라고 하는데, 절대 정신에 도달하게 되기 까지 객관정신은 모순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한자에 대한 확고한 통합과 무한자와 유한자의 조화와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그러한 단계에 있는 것이다. 문화속에서 나타나는 현실성과 아름다운 영혼은 악의 문제 때문에.. 현실에서 도덕을 지켜도, 악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도덕은 기존 질서를 지키는 기호이긴 하지만 인간의 최상의 법이지만, 문화는 도덕성으로 통제될 수 있는것이 아니다. 그래서 헤겔은 종교의 무한자를 사회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것으로 갖고 간다. 헤겔이 언급하는 종교는 문화의 최고의 단계로서 예술을 포함한 종교는 모든 도덕과 인륜과 교양을 포괄하는 문화의 기호로써 헤겔은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이후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시대에도 종교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에서는 이러한 종교의 기능이 상당히 많이 신뢰를 잃었다. 종교이 문화적 현상을 비판했다. 헤겔은 현실성과 윤리를 지키는 주체와 현실의 문화와의 부조화를 악으로 봤다. 이러한 악 때문에 정신은 아직까지 괴로워하고 아파한다. 그래서 결코 변증법적 종합을 통한 화애의 운동에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인륜과 교양을 통과한 도덕성에서도 여전히 변증법적 지향을 해야 하는 결핍과 모순과 부정의 단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영홍은 조화를 하려고 하는 인식을 갖고 있다. 객관정신의 어떤것은 결국은 절대정신의 관계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 정신과의 관계 안에서만 항상 설명이 되어야 하고, 그래야 정신이 자기 자신과의 통일을 통하여 자기를 의식하는 완전한 단계에 도달하는 관점에서, 객관정신을 헤겔이 이러한 3개의 정신들의 계기들중 절대정신의 결핍 단계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정신과 종교의 마지막 단계를 고찰 할 때는 객관정신이 왜 지향의 단계를 통하여 절대정신의 완전성을 향해 역사가 나아가야 하는지를 고찰 할 수 있다. 헤겔은 왜, 칸트가 인간의 실천이성의 최고로 둔 도덕성에서 결핍으로 본 이유는 실천이성과 이론이성의 결합이 변증법적 운동 하에서 절대지를 향하여 달려나간다라고 봤다라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하면, 헤겔은 두개를 칸트와 같이 나누지 아니하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두가지를 함께 고찰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칸트와의 비교에 있어서 마지막까지 실천 이성의 단절된 부분들을 역사에 풀어 놓음으로써 역사의 과정으로써 두가지의 결합된 이성이 마지막 절대정신안에서 통일된다라고 하는것을 전제 하고 있다. 그래서 헤겔의 철학은 현싱과 이성의 종합이고, 이론과 실천의 종합이며 유한자와 무한자의 종합이다. 주관정신과 객관정신까지는 유한자이고 절대정신만이 무한자이다. 절대정신의 마지막 단계는 역사적 변증법적 단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신이 반성하는 단계이다. 자기자신을 반성하는 정신의 단계를 헤겔은 절대 정신의 최고의 위치에서 이야기 한다. 역사적 변증법의 단계는 도덕성까지 이다. 고대로부터 로마시대를 지나서 중세를 거쳐 근대를 넘어와서 계몽주의를 거쳐서 마지막 독일의 낭만주의 시대에 프로이센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역사의 단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면 이것은 객관 정신까지의 단계고, 마지막에 헤겔은 종교와 절대 지를 다루는 이 단계에서, 정신은 마침내 자기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자기 완성에 도달하는 그 단계로 절대정신을 다루고 있다.

  • @lynnseo9055
    @lynnseo9055 4 ปีที่แล้ว +3

    보편적 도덕과 자기자신의 통일을 이루지못하여 꼭 신을 불러와야만 하는 것인지요.. 니체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힘의 의지측면으로만은 여전히 부족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결국 우린 본질적 인간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고 신을 불러와야만 하는 것일까요? 인간의 욕망이 발현하는 힘의 양태(능동 반동)에 좀 더 정신을 집중하는 쪽으로 살아가야하는 것은 아닐까요? 신을 불러오는 것이 제일 쉬운 것이 아닐지.. 제 생각 중심에 자리한 의문들입니다. 인간이 왜 신을 블러올 수 밖에 없는지에 관한 정신현상학은 가능할까요?

    • @TV-uw9lz
      @TV-uw9lz  4 ปีที่แล้ว +4

      왜 안되겠어요? 이미 저의 강좌 무수한 곳에서 이미 그것을 피력하고 있지요. 포이어바흐, 막스, 니체, 프로이트는 모두 서린님의 질문에 응답하고 있지요. 하지만 헤겔은 신을 끌어들이고 있지요.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요. 끌어들이든 끌어들이지 않든 그것은 관찰자의 세계관의 문제겠죠. 그렇다고 헤겔의 무수한 사유들을 버릴 수는 없겠죠. 지금도 무신론과 그것을 넘어선 유신론은 공존하고 있으니까요. 아무도 신의 존재와 비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자는 없습니다.

  • @TheMusicmalife
    @TheMusicmalife 5 ปีที่แล้ว +5

    예도님 고전 강의 감사합니다.
    위의 영상과는 상관 없는 질문이긴 한데, 너무 여쭙고 싶어서 혹시 답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댓글 남겨봅니다.
    오늘날 지젝이 철학자중 가장 최전선에 있는 철학자로 평가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less than nothing", " tarrying with the negative", "the parallax view" 같은 magnum opus 들을 제가 아직 직접 독파하지는 못했지만, 지젝이 그 자신의 이론이라 할만한 게 있을까요?
    헤겔이나 칸트 라캉과 같이 그 자신의 철학세계를 설립했는지 궁금합니다..
    늘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TV-uw9lz
      @TV-uw9lz  5 ปีที่แล้ว +8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지금 지젝의 시대는 칸트나 헤겔이나 하이데거와 같은 대가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을 포함하여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에 대한 논평으로서 철학을 하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프랑스 철학은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겠죠. 그러나 지젝은 이들과 또 다르게 모든 철학 대가들의 사유에 관해 코멘터리를 다는 방식으로 철학을 하지요. 그게 바로 자기 철학입니다! 그러나 지젝의 철학을 구태여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무에 대한 철학적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캉보다 더 풍성하죠! 러시아계로서 독일관념론과 유물론을 전부 꽤뚫고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을 사회정치적 문제에 적용시킵니다! 심지어 영화, 소설, 사진, 예술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죠. 글쓰기 자체는 상당히 난삽하지만 모든 사태를 재밌게 풀어가죠. 더 할 말은 많지만 저의 페북글들을 참조해주셔요. - 예도

    • @TheMusicmalife
      @TheMusicmalife 5 ปีที่แล้ว +4

      @@TV-uw9lz 예도님 정말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더 자세한 점은 페이스북의 글들을 참조하겟습니다. 답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