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네요. 1. 원래 일본에는 속치마 같은 것은 있었지만 팬티형 속옷이 없었습니다. 이건 원래 많은 문화권에서 보이는 현상입니다. 유럽만 해도 지금과 같은 팬티형 비슷한 여성 속옷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무렵입니다. 2. 기모노 입은 여성이 종종 걸음을 걷는 이유는 치마 폭이 짧아 그런 것입니다. 속옷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기모노 끝단의 폭이 좁다 보니까 성큼성큼 걸을 수가 없이 종종 걸음을 걷게 되는 겁니다.
네.여러분 의견이 맞습니다.저는 일본에서 거주한지 40년이 조금 넘었읍니다.자연스럽게 기모노나 유카타를 입을 기회가 있습니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것도 있으나 기모노에 대해 간단히 말씀 드립니다. 기모노를 입기전에 기모노와 똑같은 흰색이나 유색의 속치마를 입습니다. 속바지나 속옷은 본래 없습니다. 그리고 기모노를 입지요.오비를 매면서 오비의 안쪽으로 손바닥만한 베게를 넣습니다.이것을 오비아게라고 합니다. 우리의 문화적인 생각으로 보면 베게모양과 같다고 봅니다.ㅎㅎ 전쟁이 많았기에 하허벌판에서 누워 자야하는 사정도 있었지만 자고나면 오비가 구깃구해져서 옷매무새가 영 아니었지요. 당시의 손수건이나 여성용품으로 쓸수있는 면 쪼가리를 여러장 묶어 허리부분에 묶어 다니던것을 오비아게라는것을 만들어 오비의 안쪽에 넣어 볼륨을 주고 그 위에 오비를 얹어 한번 말아서 묶어 주면 구겨졌던 오비의 주름이 쫘악펴집니다. 우스꽝스런 이야기지만 일리가 있는 옛 이야기 입니다. 기모노를 입고 쫑쫑걸은을 걷는 이유는 기모노나 유카타의 원단 폭이 우리나라의 삼베나 모시의 폭과 같은 너비로 짜여 집니다. 입을 사람의 신장의크기에 따라 여러개로 잘라서 폭을 넓혀야하기때문에 기본은 뒷판 두장 앞판두장으로 만드는 디자인이라 당연히 폭이좁아 성큼성큼 걸을수 없는 디자인 입니다. 전쟁이나 먼길을 가야할때는 보폭을 늘리기위해 밑단을 올려 허리춤에 끼우고 걸어야합니다. 일본 사극에서 많이 볼수 있습니다. 유카타라는것은 한자의 어원대로 목욕전후에 입는 옷입니다. 유카타는 속옷도 속치마도 없이 오직,알몸에 유카타 한벌만 입는 여름옷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현시대에는 현대식 속옷을 모두 입습니 다. 기모노 패션쇼에 나갈때는 속옷을 입으면 속옷의 라인이 드러나는 이유로 속옷의 장착이 금지 됩니다. 이유는 속옷만이 가지는 볼륨감 때문에 기모노를 입었을땨 가슴부분과 등판이 필요이상으로 자국이 나기 때문입니다.❤❤❤
유타카 는 백제 때 왜 사신 이 우리 는 벗고 사니 상국 에서 옷 을 하사해 달라 해서 ,백제왕 이 생각해 보니 야만인 에게 어찌 우리 와 같은 옷을 내려 줄수 없으니 이거나 입어라 해서 하사 한게 상복 이 현제 유타카 고 왜인들 이 유타카 입을때 관? 같은걸 쓰는데 이건 장례때 머리에 쓰는 삼배망간.그리고 기모노 는 백제 시절 천민여자 들 이 입는 옷 이고 천민 은 속옷 을 입을수 없어서 이거나 같다 왜녀들 에게 입혀라 하고 하사한것임.
일본 현지에서 기모노를 배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모노를 입을 때 나가쥬반(長襦袢)이라는 우리나라 한복의 속적삼과 비슷한 것을 입고, 그 아래 현대식 팬티는 아니지만 하다쥬반(肌襦袢)이라는 위아래 분리된 속옷을 따로 입습니다. 요즘은 입기 편하게 원피스 형으로 많이 나옵니다. 기모노에도 평상복과 예복이 따로 있는데 기모노의 소재,무늬, 오비의 길이에 따라 다르며 예복은 혼자 입기 힘들어 현재에도 입혀주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 따로 계십니다. 현대에는 화학섬유도 있으나, 기모노의 소재가 비단에 손바느질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상당히 고가품으로 예전엔 결혼할 때 예물로 많이 받았습니다. 일반 가정의 경우 평소에 입고 다니기보다 형편이 어려울 때 팔아서 살림에 보태는 목적이 컸어요.
일본 유학생으로 기모노 관련으로 알바하고있는 사람입니다. 기모노는 안쪽엔 여성이든 남성이든 속옷을 입지 않는게 아닌 襦袢(쥬반)이라는 속옷을 따로 입습니다. 이게 현대식 속옷처럼 음부와 가슴이 따로 제작된게 아닌 한벌로 된 옷으로 안쪽에 덧대어 입는 옷 이죠 현대식으로 생각하면 쥬반이 속옷이 아니라고 생각 될 수 있지만 그 당시로썬 쥬반이 속옷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현재는 그 쥬반밑에 현대식 속옷을 따로 또 입습니다.
75세 노인입니다 저희 친정 아버님께서 일본 와세다대학 국문학과 나오셨는데 일본에대한 예기를 많이듣고 자랐지요 기모노는 남자와 관계를 하기위해 펼치는 담요 형태가 맞습니다 일본은 내분 전쟁이 워낙 많았던 나라다보니 남자의 욕구를 아무대서 채우는 수단으로 발전한 기모노입니다 미화 하지마시길 왜놈이라는 단어 기원 이라던지 일본 원조상은 진짜 못생긴 짝딱막한 원시인데 조작하여 키나 코도 크고 꼭 튀기 외국인처름 포장 되어 섬에서 살게하고 있습니다 기타 할 예기가 많으나 이만
@@DraF_6412 고려양은 몽골의 원나라 시대의 유행입니다. 몽골은 고려가 왕실 간의 결혼도 많고 북방 기마 민족의 뿌리라서 중국 한족과는 다르게 문화적으로 통하는 게 많고 한국 문화가 일방적으로 전해진 게 아니라 전통 혼례의 연지곤지와 소년들의 댕기머리는 몽골에서 들어온 풍습이고요. 그래서 고려 시대 당시 완고한 꼰대들도 엄청 싫어했다는 기록이 많아요. 오히려 한족이 지배한 당나라, 송나라 때는 무역과 민간 교류가 엄청나게 활발했지만 한국 문화는 중국에 별다른 영향을 남기지 못했고.
@@jnj2112 명나라 복식 자체가 몽골족의 원나라 복식의 연장으로 이전 송나라와는 크게 다르고 몽골 복식이 고려와 몽골의 양식이 결합된 것입니다. 상류층 복식은 중국 한족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건 맞지요. 선비들이 입던 학창의나 관복으로 쓰인 단령을 제외한 한국 전통 복식은 중국보다 북방 유목민족과 통합니다. 특히 군복이나 서민복은 중국과는 확연히 달라요.
일본은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와 단절되어 오랜 전란을 겪게되어 모계사회와 유사한 사회가 지속되어 왔지요. 남자는 해적으로, 전쟁으로 전쟁터로 끌려나가야 했기 때문에 여성이 가정을 꾸리고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요. 이런 사회에서는 다산이 당연시 되었고 우리도 삼국시대에는 모계사회와 비슷한 사회였지요. 잦은 전란으로 강한 남자를 낳고 다산을 장려하였지요. 그 예로 고구려에서는 형사취수,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해야 했고, 신라에서는 강한 남자의 씨를 얻기 위해 다른 남성과의 성관계가 당연시 되는 사회였지요. 처용가가 그 증거이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생부가 연개소문이란 설도 있지요. 따라서 일본의 기모노는 풍신수길보다 훨씬 이전부터 유행을 했고 그 용도는 사무라이들의 요구를 어디서나 들어주기 쉽도록 속옷을 안입고 등뒤에는 담요를 덧댄 옷을 입었지요. 옷벗느라 우물거리다가는 언제 사무라이의 칼이 날라올지 모르기 때문이었지요. 그게 점차 장식도 변하고 묶는 고리도 다양하게 발전한거지요.
만엽집은 고대의 우리말 지금의 경상도 사투리를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적은 향가이다. 옷은 귀족이 입는 입는 좌비와 천민의 옷인 황비가있다 좌비는 남의 도움을 받아서 갖추어 입는 옷으로 정장이다 해석하다 보면 동침하는 것에 대한 시가 많은데 별 볼일 없는 객에겐 풀베개룰 준다는 귀절이 나온다. 그러나 연분이 나면 옷을 펴서 사용하는 것도 나온다. 시들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이 섹스인데 그 부분에서 많이 자유로웠고 부하의 아름다운 부인을 상관이 와서 자고 가서 남편이 불편한 심정을 쓴 시도 있다. 또 동성애의 적나라한 행위를 묘사한 시도 있다
일본의 성씨가 많은 이유는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일반서민은 성이 없었지요. 메이지유신후 전 국민에게 성을 부여하려니 오랜 전국시대를 거쳐 모계사회(비슷한)가 유지되다 보니 부친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래서 가장 나중에 남자와 관계를 맺은곳이 어딘가를 물어 밭가운데서 가졌으면 田中, 소나무 밑에서 가졌으면 松下, 대나무 밑에서 가졌으면 竹田..이렇게 성씨를 부여했지요. 일본의 성씨중에 논을 뜻하는 畓이나 水田등의 글자가 들어가는 성씨는 전혀 없지요. 아무리 급해도 물소처럼 논가운데서 그짓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내 말이 틀렸다면 일본의 성씨중에 畓이나 水田등 논을 뜻하는 글자가 들어간 성씨를 찾아서 제시하면 그대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지요.
기모노를 안입어보고 오비를 크기 그대로 안 본 사람은 깜박 속겠구만 오비가 펼치면 2인용 이불크키인건 왜 말을 안하나요. 오비아게는 묶을때 모양을 잡기 위한 것으로 작고 별 의미없는 거 맞구요. 기모노를 입는게 일거리가 아니고 오비가 워낙 크기가 크고 기니까 그걸 매는게 일거리인 거예요. 실제 길이는 2~3인용 이불보다 길다고 봅니다. 중국이나 한국처럼 허리끈을 매기 쉬운 길이의 가벼운 천을 쓰면 될 것을 왜 그런 큰 이불보다 길도록 원단을 이어 붙여서 무겁게 허리에 맨 것인지는 일본만이 알겠죠!
남자죠 ? 그것두 한복에 대해 잘 알지 못하죠 조선시대 여인옷은 일단 겉옷 장옷 이 있습니다 그다음 두루마기 당의 입습니다 겉 저고리 겉치마 중간 속 치마 속 저고리 소고 저고리 치마 가슴 처매는 천 속바지 소고 바지 등 입는 옷이 어마 어마 합니다 뭔 저고리 치마를 펼칩니까 옷 벗기다 하루 다갈판이고만
@@윤기현-z1m 그래서.. 12겹 속곳 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한복(특히 여성)은 속곳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 옷매무새, 태가 난다 하죠. 요즘은 속곳을 제대로 입지 않고 태를 내기 위해서 서양의 그.. 뭐지? 용어가 생각이 나지 않음. 붕~ 뜨게 하는 뻣뻣하고 풍~성한 속치마 그걸 입드군요 ㅎㅎ
내인생 조차 과거는 아쉬움으로 가득한데, 남의나라 문화 역사를 현대의 관점으로 후벼파는 짓은 누구에게나 도움되지 않는 짓. 기든 아니든 존중하며 예쁘구나 생각하면 될 것을 모욕적인 글이나 말로 상대방 문화를 폄하하는건 본인얼굴 침뱉기 정도의 내용으로 받아들아 이는게...
꼭 일본을 대신하여 변명해 주는 것 같음. 1)속옷을 안입는다. 2)뒤에 천을 메고 다닌다. 3)성씨가 유독 지역적 위치를 주는 글자를 쓴다. 4)전국시대에 무수한 남자들이 죽어 여성의 성비가 많았다. 5)인구 감소 때문에 출산을 강요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종합해 볼때 변병을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다.
저도 공감합니다. 일본 춘추 전국 시대에 너무나도 많은 남자들이 전쟁에서 희생되다 보니 남편을 잃은 과부가 너무나도 많았고 남자들이 너무 귀해지다 보니 무조건 애를 많이 낳아야 하는 상황이었던것도 당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 됩니다. 여러 지역이 쪼개져서 너무도 많은 전투를 치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은 일단 이미지 부터가 본인들의 치부나 불리한 부분은 날조를 해서라도 숨기려는 게 너무 심한 나라라는 것도 한몫 하겠구요.
기모노의 기원은 1910년대 만국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해 가장 일본적인 옷 디자인에서 만들어진겁니다. 전통옷이 아니라 생활한복 개념이죠. 19c영상을 보면 지금의 기모노와는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18c 중반까지 일본의 기본 패션은 옷을 안 입는거였습니다.
기원이 그렇다고 지껄이는 멍청이들이 문제이나 기모노가 그런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고 확언하는것도 문제임. 어디든 의복은 상류층이 먼저 만들어 입고 복잡해짐. 아래로 내려올수록 간소화됨. 입고 벗기 불편한건 제대로 갖춰 입었을때고 겉만 비슷하게 대충 두르고 입는 하류층에서 불편하게 항상 제대로 챙겨 입었을까? 크고 긴 옷을 그것을 하기위해 바닥에 까는건 충분히 생각하고 실행할만한 방법이니까. 그건 침대는 찐 잠만 자기위한 용도일뿐이라고 말하는것과 같음.
@@jiocafe 성이 아니라 나는 내가 시집간 집안의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은 여자이다는 자부심을 과시(외부 표현)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나는 60세 정도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도 어린시절 동네아줌마들이 들판이나 밭, 시내 노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가슴을 내놓고 아기들 젖멕이는 것을 자주 볼 수있었죠
일본의 성씨가 많은 이유는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일반서민은 성이 없었지요. 메이지유신후 전 국민에게 성을 부여하려니 오랜 전국시대를 거쳐 모계사회(비슷한)가 유지되다 보니 부친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래서 가장 나중에 남자와 관계를 맺은곳이 어딘가를 물어 밭가운데서 가졌으면 田中, 소나무 밑에서 가졌으면 松下, 대나무 밑에서 가졌으면 竹田..이렇게 성씨를 부여했지요. 일본의 성씨중에 논을 뜻하는 畓이나 水田등의 글자가 들어가는 성씨는 전혀 없지요. 아무리 급해도 물소처럼 논가운데서 그짓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내 말이 틀렸다면 일본의 성씨중에 畓이나 水田등 논을 뜻하는 글자가 들어간 성씨를 찾아서 제시하면 그대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지요.
담요를 옷뒤에 묶고 사는 민족은 없습니다. 일본에도 은장도 비슷한 것이 있고 여자들이 호신용으로 쓴 일이 있음. 기모노는 겉옷까지 있고 허리에 두꺼운 띠를 하고 입기도 힘들어 담요를 붙이지는 않음. 헤이안시대의 남자옷은 이불처럼 사용함. 성씨가 많아진것은 메이지시대때 호적제도와 조세제도 개혁으로 동명이인을 구별하기위해 정부에서 성씨를 부여함
야. 좀 알고 말하자.. 요바이가 있던 나라다.. 일본의 성은 지금도 개방적이지만 과거에는 훨씬 더 개방적이였다. 서민에게는 정조 개념 자체가 없었다. 왜냐하면 먹고 살기에도 힘든데 뭔 정조냐.. 중앙정부와 지방영주가 60%를 뜯어가기 때문에 노인과 애를 죽이는 풍습조차 있었는데 하물며 정조? 개 풀뜯어먹는 소리다.
@@ALPHEON13 귀족집안 여자들은 정략 결혼을 많이 하지요. 쉽게 생각하면 사무라이 (군인)을 많이 거느리고 영토가 많은 성주는 다른 지방 성주들과의 연맹을 위해 딸이나 여동생을 다른 성주나 자녀들과 정략결혼 시켜서 세력을 넓이고 보호도 해줍니다. 상위 성주의 딸과 혼인한 장남이 전쟁에서 전사하면 상위 성주와 인연이 끊어 질까봐 차남이 형수와 다시 결혼을 하기도 하고 쫒아 낼수 없어서 두번째 부인으로도 드려서 전쟁을 막아지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 하기에 정조관념 없고 괴랄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귀족의 기모노는 최소 여섯벌을 겹처 입고 평민이나 노비들은 한벌, 사무라이 부인들도 세네벌은 겹처 입어데요. 그리고 소속되어 있는 여자 잘못 건드리면 바로 칼싸움 나서 함부로 못해요.
일본 전통 사극은 전문가들의 고증을 통해 만들어 졌다. 고증: 예전에 있던 사물들의 시대, 가치, 내용 따위를 옛 문헌이나 물건에 기초하여 증거를 세워 이론적으로 밝힘. 잘못된 고증이라 말하는 '팩스토리'는 말로만 하는 설명말고 하나라도 증거나 자료를 내놓을 수 있나??
@@다내미리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으신게 아닌지? 물감이 귀했지 없지는 않았는데 무슨 온통 흑백이라는 건가요? 사농공상의 신분제 조선에도 수요층이 분명 존재했는데 공급이 없다고 주장하시는 건 무슨 이유? 경제 논리 몰라요? 혹! 흑백 사진만을 가지고 오해하시는 건가? 물론, 조선 시대에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노동계층은 없는 살림에 흰옷을 입었지만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색상 옷이 없었다는건 아닙니다. 다만, 귀했기에 특별한 날 아니면 아까워서 집안에 모셔 뒀다 뿐이고 돈있는 백성들은 평상시에도 입고 다녔죠~ 색상이 연한 것들은 보다 저렴했고 정확한건 아니지만 색상 옷은 전체 인구의 20% 미만으로 보고요 또한 양반, 기생, 관원, 무당 등 당시 사진들 컬러 복원한 것들만 찾아봐도 생각하시는 것보다 정말 다양한 컬러들이 한복에 들어갔습니다. 괜히 오방색을 조선인들이 의미를 뒀을까? 그리고 사극에서 상놈이 짙은 색이 들어간 의상을 입었다 말하는데 어떤 드라마인가요? (상놈도 하는 일에 따라 색옷을 입혔고 외거 노비는 돈도 벌수 있음)
@@다내미리내 흑백 사진을 보고 흑백 뿐이라 말하고 일부를 전체로 본다면 정말 할말이 없다. 세상 살아보면 꼭 이런 사람 사회에 한두명 있더라~ 너 고문관이지~~ 흑백 사진으로 찍으면 컬러도 흑백으로 나옴. 색상 옷이 없었다면 염색소가 조선에 왜 있었고 좀 사는 이들은 어떻게 조선산 색동 옷들을 입었다는 걸까?? 하늘에서 한복이 내려와요~앵~~ 이지랄 떠는건가? 본인 소개글 처럼 기초 교육도 받지 못하신 노총각의 60대 분이신가? 질문에 대답은 좀 하자~
@@다내미리내 주장하는 글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전문가 대동하고 내기하자 했더니 글만 신고로 삭제하고선 무반응이시네~ 그러게 가만이나 있지 한심한 짓거리는 왜 하신거요 ㅋ 세상 어디에 수요와 공급을 무시하는 사회가 있다고, 조선시대에도 신분이나 하는 일, 경제적인 여건에 따라 색상(염색) 옷들은 입고들 살았지.. 옛 사람이라고 눈이 없나~ 흑백사진 본다고 그게 흑백이냐~~ 그쪽은 노총각이라 돈 있어도 그렇지 않으신가봐요~ 좀 사입지 검소하시다 정말ㅋㅋ 컬러 복구한 사진들만 살펴봐도 들킬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머리시라면 죄송합니다 밀양사는 60대 날품파리 총각씨 ㅠ ㅠ ㅈㅅㅈㅅ
20년전에 일본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봤는데 기모노 펼치고 그위에서 관계 맺는걸 봤다. 윗분처럼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데 그런용도로 만들지 않았어도 성생활이 개방적인 시대였고 이런 얘기도 맞는것 같음 그리고 1800년 시대에는 기모노 속에 지금처럼속 뭐입지도 않고 길게 둘둘 말지 않았음 그냥 끈 풀면 원터치 였음
@@mallivideo2157 현재의 기모노는 일본정부거 순화시킨거지...예적으로 올라가면 생각하는 그게 맞아...풍신수길전에 맨날 전쟁도 하고 툭하믄 할복하고 당연히 인구수가 줄어드는것 맞는데..그렇다면 용도는,,,,그리고 그당시 법령도 그랬다는데...일뽕빠는애들은 대체 뭐냐???
통소매를 달은 넓은 천을 여러번 두른 것이 기모노...즉 우리 옷처럼 입체재단이 안 된 평면재단의 옷이고 이러한 것을 미적으로 보완하려고 후대 다양한 색상의 프린트를 많이 한 것이 기모노의 특징...사실 다양한 문양의 염색을 빼면 낮은 수준의 재봉으오 만든 의복이고 오비의 용도는 모든 사람의 주장하는 내용이 얼추 멎을 듯
기모노는 예전 일본 연극? 이런거 할때 여성 차별이 있어서 무대에는 남성들만 설수가 있었음! 그런데 등장인물이 남성만 있을수는 없기에 여성역할을 하는 남성이 있을수 밖에 없었는데 이걸 관객에게 구분이 되게 하려고 허리띠같은 큰 천을 허리에 두르게 했음! 이게 변형, 개량이 된게 기모노임! 나도 일본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사실을 왜곡해서 국뽕이나 비하하는건 오히려 더 안 좋다고 생각함! 역사 왜곡해서 우리나라 비하하는 일본과 다를게 뭐가 있음?
일본은 성씨문화가 아니라 가문 중심의 문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씨와 이름을 수시로 바꾼 이들도 많고 공을 많이 세우면 군주가 신하에게 성씨를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토요토미히데요시)도 이름을 4번이나 바꿨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처럼 성씨에 집착하지 않고 가문을 위해서면 데릴사위에게도 처가쪽 성씨로 바꾸기도했습니다
복잡한 매듭의 오비를 제대로 갖추는 것이 예의 였고, 그래서 귀족층에는 오비를 묶어주는 하녀 또한 존재했다하시는데 그럼 일반인들은 어떻게 맺나요? 가족 중에 도움 줄 이가 없다면 어떻게 했으며 서구나 동양 어디를 살펴봐도 귀족층이 아니라면 서민 의복은 생각보다 단정하지도 비싸지도 않던데 아닌가요? (서민 여성이 복잡한 매듭을 맺을까?? 절대 아니다 복잡한 매듭의 오비는 귀족문화일 뿐) 증거도 없이 설명만 하는건 아니라 봅니다. 한국 포함 동서양의 서민과 귀족은 입는 의복의 형태며 재질, 문양 등에 차이가 있기에 이를 일반화 시키는건 문제가 됩니다.
@@nameage576 본래 오비는 지금 처럼 과장되게 크지 않았답니다. 그렇기에 단단하게 묶이는 정도라 해봤자 손가락 2~3마디 (높이? 가로 길이?) 정도의 작은 천조각 이였다는데 혹! 알고 계신가요? 지금의 오비는 극단에서 남성이 여성 분장 시 과장된 크기로 묶어 극중 여성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것이 극과 같이 유행하면서 완성된 것이지 그 이전에는 없던 문화입니다.
오비가 유행하던 시절의 일본 옛 사진들을 찾아보더라도 대부분의 서민 여성들은 움직임을 방해해서거나 가격대만 있지 쓸데없이 큰 오비 같은 의복 장식은 출신을 나타내야 하는 신분이나 타인의 눈에 띄어야 하는 일부 직업, 축제·행사 등이 아니면 입지 않았답니다. 그들도 묶는데도 오래 걸리고 푸는데도 오래 걸려 번거로운 것을 실생활에 사용하기는 힘들었죠
저와 비슷한 연배신거 같은데 저도 당시 그렇게 배웠습니다 현실은 고려시대 이후 일본이 대부분 압도적으로 발전한 문명을 가졌다고 하죠 당시엔 참 왜곡된 국뽕들이 많았어요 피카소, 고흐같은 유럽미술보다 흑백먹물로 그린 한국화가 더 뛰어나다거나 유럽의 거대한 성이나 노틀담 성당, 그 스페인 성당 뭐지? 그런 건축물은 습기찬다고 조선의 흙으로 만든 한옥이 더 과학적이라거나 등등 조금만 생각해봐도 참 말도 안되는 소리였죠
@@sungjoohan1316 왜놈이라며 미개하다고만 인식시키고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지금도 양국에 엄청난 손해지요. 그러나, 양국역사를 보면 고려후기부터 압도라고 보기는 힘들지요. 양국관계에 있어서는 일본열도의 비약의 시작이 1603년 시작된 에도시대이며 안정된 정국을 바탕으로 그 중기인 겐로쿠때부터 튼튼했다는 건 역사가 말해주지만, 것도 17세기 중반이니. 에도 바로 전으로 거꾸로 가보면 1598 노량해전 1592 임진왜란 게다가 고려말로 가보면 1389 박위 대마도정벌 1380 왜구 격파 이성계 황산대첩 나세 최무선 진포 대첩 1376 왜구 격파 최영 홍산대첩 등등도 있지요. 그래도 무엇보다 그 시절에 에도막부의 시작과 발전을 가볍게 여긴 한반도의 세력을 안타까워 할 일이긴 하지요 ㅠㅠ
기모노의 요대가 담요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닐지는 모르지 위에서 설명한 데로 매우 복잡한 절차의 기모노라면 왕성한 성생활을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을것이며 옷감에 의한 경제적 부담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어서 어지간한 일반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의복으로 귀족이나 최 상류층들만이 입을 옷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낮은곳에서 위를 쳐다보고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가진거 없는 양민이나 하층민들은 복잡하고 비싼 기모노 보다는 값싸고 간편하고 실속있는 저렴한 기모노를 입기 시작 했다는거다 평범한 나라의 평범한 시대의 지극히 평범한 국민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로 이야기가 끝나지만 왜 일본에는 전통 옷이라고 하는 기모노에 활발한 성생활을 할수 있는 또는 해온 옷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냐는 것이다 그것은 기모노와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그들의 국민정서 즉 성에 대한 매우 개방적인(?) 일상 생활때문이다 상략 중략 하략 다하고 요점만 말하자면 기모노를 입어서 성 생활이 왕성했던게 아니고 성 생활이 왕성한 사람들이 입었던 옷이 알고보니 기모노 였다는 것이다 기모노를 욕하지 마시라 그옷을 입은 음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탓할 일이다 그들의 후예가 야동천국 성진국을 이끌어 가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것이다 기모노는 왕성한 성생활을 위한 도구중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라는것을 ............
가볍게 보러 들어왔다가 기모노와 일본의 성씨까지 공부 하고 갑니다~
공부는 개뿔. 모두 사실일 가능성 100%이구만
조작의 달인 일본인들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질 정도면 진실일 확률 100%.
전쟁후에 인구가 줄어서 관계 많이해서 인구늘리려고 했던 것이 정설.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네요.
1. 원래 일본에는 속치마 같은 것은 있었지만 팬티형 속옷이 없었습니다.
이건 원래 많은 문화권에서 보이는 현상입니다.
유럽만 해도 지금과 같은 팬티형 비슷한 여성 속옷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무렵입니다.
2. 기모노 입은 여성이 종종 걸음을 걷는 이유는 치마 폭이 짧아 그런 것입니다.
속옷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기모노 끝단의 폭이 좁다 보니까 성큼성큼 걸을 수가 없이 종종 걸음을 걷게 되는 겁니다.
@@dominion1004 어후 식견이 높으십니다. 멋있네요
팬티대신 삿바를 했어요
@@석바라밀 아, 훈도시 말이군요.
그건 남자용 속옷입니다.
@@dominion1004 훈도시는 남자용으로 부르나 여자는 훈도시보다 작고 얇음. 생리 때도 합니다
접는 방법은 같고 우리나라도 예전에 생리 때 그렇게 접어서 썼습니다
@@석바라밀 그렇군요.
하나 배워 갑니다.
네.여러분 의견이 맞습니다.저는 일본에서 거주한지 40년이 조금 넘었읍니다.자연스럽게 기모노나 유카타를 입을 기회가 있습니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것도 있으나 기모노에 대해 간단히 말씀 드립니다.
기모노를 입기전에 기모노와 똑같은 흰색이나 유색의 속치마를 입습니다.
속바지나 속옷은 본래 없습니다.
그리고 기모노를 입지요.오비를 매면서 오비의 안쪽으로 손바닥만한 베게를 넣습니다.이것을 오비아게라고 합니다.
우리의 문화적인 생각으로 보면 베게모양과 같다고 봅니다.ㅎㅎ
전쟁이 많았기에 하허벌판에서 누워 자야하는 사정도 있었지만
자고나면 오비가 구깃구해져서 옷매무새가 영 아니었지요.
당시의 손수건이나 여성용품으로 쓸수있는 면 쪼가리를 여러장 묶어 허리부분에 묶어 다니던것을 오비아게라는것을 만들어 오비의 안쪽에 넣어 볼륨을 주고 그 위에 오비를 얹어 한번 말아서 묶어 주면 구겨졌던 오비의 주름이 쫘악펴집니다.
우스꽝스런 이야기지만 일리가 있는 옛 이야기 입니다.
기모노를 입고 쫑쫑걸은을 걷는 이유는 기모노나 유카타의 원단 폭이 우리나라의 삼베나 모시의 폭과 같은 너비로 짜여 집니다.
입을 사람의 신장의크기에 따라 여러개로 잘라서 폭을 넓혀야하기때문에 기본은 뒷판 두장 앞판두장으로 만드는 디자인이라
당연히 폭이좁아 성큼성큼 걸을수 없는 디자인 입니다.
전쟁이나 먼길을 가야할때는 보폭을 늘리기위해
밑단을 올려 허리춤에 끼우고 걸어야합니다.
일본 사극에서 많이 볼수 있습니다.
유카타라는것은 한자의 어원대로 목욕전후에 입는 옷입니다.
유카타는 속옷도 속치마도 없이 오직,알몸에 유카타 한벌만 입는 여름옷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현시대에는 현대식 속옷을 모두 입습니
다.
기모노 패션쇼에 나갈때는 속옷을 입으면 속옷의 라인이 드러나는 이유로 속옷의 장착이 금지 됩니다.
이유는 속옷만이 가지는 볼륨감 때문에 기모노를 입었을땨 가슴부분과 등판이 필요이상으로 자국이 나기 때문입니다.❤❤❤
유타카 는 백제 때 왜 사신 이 우리 는 벗고 사니 상국 에서 옷 을 하사해 달라 해서 ,백제왕 이 생각해 보니 야만인 에게 어찌 우리 와 같은 옷을 내려 줄수 없으니 이거나 입어라 해서 하사 한게 상복 이 현제 유타카 고 왜인들 이 유타카 입을때 관? 같은걸 쓰는데 이건 장례때 머리에 쓰는 삼배망간.그리고 기모노 는 백제 시절 천민여자 들 이 입는 옷 이고 천민 은 속옷 을 입을수 없어서 이거나 같다 왜녀들 에게 입혀라 하고 하사한것임.
@@younghuh3642어휴ㅡ.ㅡ
어떤 이유를 대도 속옷이나 팬티를 안입는 이유가 될수 없지~~~
조선시대 때 우리 여인들 속옷은 아랫부분을 튀어 졌어요
浴衣유카타는 그 한자로부터 목욕가운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속옷 없이 입는 여름 옷이 아닌 목욕 후 자기 전에 입는 목욕가운이기에 속옷을 입지 않는 것입니다
호텔에서 샤워하고 속옷 다 챙겨입고 목욕가운 입는 사람 없듯이 똑같은 겁니다
늘 감사히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감정적인 혐오나 혹은 성적인 조롱이 아닌 역사적 전통과 문화 형성 과정을 알려줌으로서 모든 나라의 문화는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야한다는 영상 잘 봤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신기하고 유익해요 너무 재미있어요 ❤😊❤
일본 현지에서 기모노를 배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모노를 입을 때 나가쥬반(長襦袢)이라는 우리나라 한복의 속적삼과 비슷한 것을 입고, 그 아래 현대식 팬티는 아니지만 하다쥬반(肌襦袢)이라는 위아래 분리된 속옷을 따로 입습니다. 요즘은 입기 편하게 원피스 형으로 많이 나옵니다.
기모노에도 평상복과 예복이 따로 있는데 기모노의 소재,무늬, 오비의 길이에 따라 다르며 예복은 혼자 입기 힘들어 현재에도 입혀주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 따로 계십니다.
현대에는 화학섬유도 있으나, 기모노의 소재가 비단에 손바느질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상당히 고가품으로 예전엔 결혼할 때 예물로 많이 받았습니다. 일반 가정의 경우 평소에 입고 다니기보다 형편이 어려울 때 팔아서 살림에 보태는 목적이 컸어요.
마지막 좋네요.. 존중하고 존중받읍시다
일본 유학생으로 기모노 관련으로 알바하고있는 사람입니다. 기모노는 안쪽엔 여성이든 남성이든 속옷을 입지 않는게 아닌 襦袢(쥬반)이라는 속옷을 따로 입습니다. 이게 현대식 속옷처럼 음부와 가슴이 따로 제작된게 아닌 한벌로 된 옷으로 안쪽에 덧대어 입는 옷 이죠 현대식으로 생각하면 쥬반이 속옷이 아니라고 생각 될 수 있지만 그 당시로썬 쥬반이 속옷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현재는 그 쥬반밑에 현대식 속옷을 따로 또 입습니다.
@@C0MC0MC0M 기모노 멋있죠
복식학 연구한 분에 따르자면 초창기에는 속옷을 입지않았지만 일본에 큰 화재가 있은 후 부터 입었다고 하네요.
옛날에도 있었긴 해도 현대처럼 잘 안입었죠.
@@C0MC0MC0M
그럼 훈도시는요?
75세 노인입니다
저희 친정 아버님께서 일본 와세다대학 국문학과 나오셨는데
일본에대한 예기를 많이듣고 자랐지요
기모노는 남자와 관계를 하기위해 펼치는 담요 형태가 맞습니다 일본은 내분 전쟁이 워낙 많았던 나라다보니 남자의 욕구를 아무대서 채우는 수단으로 발전한 기모노입니다
미화 하지마시길
왜놈이라는 단어 기원 이라던지 일본 원조상은 진짜 못생긴 짝딱막한 원시인데
조작하여 키나 코도 크고 꼭 튀기 외국인처름 포장 되어 섬에서 살게하고 있습니다 기타 할 예기가 많으나 이만
기모노랑 이름은 여전히 그소문이네 이름은 관계한 장소고 기모노는 그렇다고 진짜 90년대 선생들이긴하지만 고등학교때 교사한테 들었다 수업시간에 남고가 그런 이바구를 흔하게 듣고그랬지
이방송첨봤는데. 우리문화를. 존중받길원하는것처럼. 남의. 문화도. 존중해야한다는. 말이. 너무좋아숩니다. ❤
이분의 말씀 또한 일개 개인의 의견일뿐입니다.
오비가 단순히 미적요소라면 그냥 담요를 허리에 매고 다닐 가능성은 낮죠
설명 잘들었습니다, 유익한 영상입니다.
역시와 전통이있는 상대적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게 배우고 품격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봄밤-b2g 그 품격은 우리나라에게만 요구하는건 억지네요.
너나 많이 이해하고 준중해라!
대댓글 꼬라지만 봐도ㅋㅋ
훌륭한 멘트 훌륭합니다.
기모노가 애초에 백제랑 당나라 영향을 좀 많이 (사실 엄청 ) 받았습니다 . 그냥 그거 둘 합친거라고 해도 무방할정도..
우리 한복은 명나라복식 영향을 크게받았죠. 애시당초 동쪽끝에위치한 지정학적이유로 중국을통해 선진문물을 공급받은 한국,일본이니 옷역시 영향을받은듯합니다.
@@jnj2112 고려양이라고 송나라에 고려식 옷이 유행하던게 명나라 초기까지 이어진게 한푸에요 그리고 공산당 교육 다 믿지 마세요
@@DraF_6412 고려양은 몽골의 원나라 시대의 유행입니다. 몽골은 고려가 왕실 간의 결혼도 많고 북방 기마 민족의 뿌리라서 중국 한족과는 다르게 문화적으로 통하는 게 많고 한국 문화가 일방적으로 전해진 게 아니라 전통 혼례의 연지곤지와 소년들의 댕기머리는 몽골에서 들어온 풍습이고요. 그래서 고려 시대 당시 완고한 꼰대들도 엄청 싫어했다는 기록이 많아요. 오히려 한족이 지배한 당나라, 송나라 때는 무역과 민간 교류가 엄청나게 활발했지만 한국 문화는 중국에 별다른 영향을 남기지 못했고.
@@jnj2112 명나라 복식 자체가 몽골족의 원나라 복식의 연장으로 이전 송나라와는 크게 다르고 몽골 복식이 고려와 몽골의 양식이 결합된 것입니다. 상류층 복식은 중국 한족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건 맞지요. 선비들이 입던 학창의나 관복으로 쓰인 단령을 제외한 한국 전통 복식은 중국보다 북방 유목민족과 통합니다. 특히 군복이나 서민복은 중국과는 확연히 달라요.
@@kunufelixㅋㅋㅋ고려양이 원나라 궁녀들이 퍼트린건 맞는데 고려는 우릴 칭하는 명칭이고 중국에서 건너온 문화를 당이란 이름으로 불렀듯이 ㅋㅋㅋㅋ고려양이 님말대로 라면 명나라는 호구여 몽골시대때 그리멸시 당했는데 단지 귀족이 입었다고 유행하겠음 ㅋㅋㅋ씹어먹어도 모자를판에 ㅋㅋㅋㅋ황제가 금지시킬정도로 영향력있었고 중국복식과 달랐다는거임 ㅋㅋㅋㅋ이름에서 나왔듯 고려에 끌려간 궁녀가 유행시키면서 원나라 복식보단 우리복식인걸 알았다는 증거임 ㅋㅋㅋ만주족이 입었던 복식이 전통의상이 돼니 자칭 한족이란 놈들이 오랑캐에 지배된게 족팔리니 명나라 복식을 뛰운거고 찾아봤자 기록도 멋도 없어보이니 한푸라고 삽질하는거지 무슨 영향력이 어쩌고 저쪼고임 건국200년도 안가서 망한 왕조인대 ㅋㅋ
기모노란 의상이 항상 궁금했었는데~
팩님 덕분에 새로운 지식을 얻었습니다~😃👍
기모노 하면 마이~죵ㅎㅎㅎㅎ😊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팩님~~😁
항상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facstory 저두 늘 감사합니다^^
일본은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와 단절되어 오랜 전란을 겪게되어 모계사회와 유사한 사회가 지속되어 왔지요. 남자는 해적으로, 전쟁으로 전쟁터로 끌려나가야 했기 때문에 여성이 가정을 꾸리고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요. 이런 사회에서는 다산이 당연시 되었고 우리도 삼국시대에는 모계사회와 비슷한 사회였지요. 잦은 전란으로 강한 남자를 낳고 다산을 장려하였지요. 그 예로 고구려에서는 형사취수,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해야 했고, 신라에서는 강한 남자의 씨를 얻기 위해 다른 남성과의 성관계가 당연시 되는 사회였지요. 처용가가 그 증거이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생부가 연개소문이란 설도 있지요. 따라서 일본의 기모노는 풍신수길보다 훨씬 이전부터 유행을 했고 그 용도는 사무라이들의 요구를 어디서나 들어주기 쉽도록 속옷을 안입고 등뒤에는 담요를 덧댄 옷을 입었지요. 옷벗느라 우물거리다가는 언제 사무라이의 칼이 날라올지 모르기 때문이었지요. 그게 점차 장식도 변하고 묶는 고리도 다양하게 발전한거지요.
만엽집은 고대의 우리말 지금의 경상도 사투리를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적은 향가이다.
옷은 귀족이 입는 입는 좌비와 천민의 옷인 황비가있다
좌비는 남의 도움을 받아서 갖추어 입는 옷으로 정장이다
해석하다 보면 동침하는 것에 대한 시가 많은데
별 볼일 없는 객에겐 풀베개룰 준다는 귀절이 나온다.
그러나 연분이 나면 옷을 펴서 사용하는 것도 나온다.
시들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이 섹스인데 그 부분에서 많이 자유로웠고
부하의 아름다운 부인을 상관이 와서 자고 가서 남편이 불편한 심정을 쓴 시도 있다.
또 동성애의 적나라한 행위를 묘사한 시도 있다
일본의 성씨가 많은 이유는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일반서민은 성이 없었지요. 메이지유신후 전 국민에게 성을 부여하려니 오랜 전국시대를 거쳐 모계사회(비슷한)가 유지되다 보니 부친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래서 가장 나중에 남자와 관계를 맺은곳이 어딘가를 물어 밭가운데서 가졌으면 田中, 소나무 밑에서 가졌으면 松下, 대나무 밑에서 가졌으면 竹田..이렇게 성씨를 부여했지요. 일본의 성씨중에 논을 뜻하는 畓이나 水田등의 글자가 들어가는 성씨는 전혀 없지요. 아무리 급해도 물소처럼 논가운데서 그짓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내 말이 틀렸다면 일본의 성씨중에 畓이나 水田등 논을 뜻하는 글자가 들어간 성씨를 찾아서 제시하면 그대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지요.
왜정적에 동경유학가서 여친인 하나꼬집에 방문했는데 밤이돼서 하숙집돌아가려니 하나꼬아버님께서 나한테 화내시면서 내딸이 어디가 어떼서 그냥 가느뇨해서 할수없이 하나꼬랑 그날밤 만리장성쌓음.
조선시대는 유교의 영향으로 성을 억압했을지 몰라도, 고려시대에는 우리도 성이 굉장히 자유로웠다. 중요한 건 현대의 한국이나 일본의 성은 똑같이 자유롭다.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기모노를 안입어보고 오비를
크기 그대로 안 본 사람은 깜박 속겠구만 오비가 펼치면 2인용 이불크키인건 왜 말을 안하나요. 오비아게는 묶을때 모양을 잡기 위한 것으로 작고 별 의미없는 거 맞구요. 기모노를 입는게 일거리가 아니고 오비가 워낙 크기가 크고 기니까 그걸 매는게 일거리인 거예요. 실제 길이는 2~3인용 이불보다 길다고 봅니다. 중국이나 한국처럼 허리끈을 매기 쉬운 길이의 가벼운 천을 쓰면 될 것을 왜 그런 큰 이불보다 길도록 원단을 이어 붙여서 무겁게 허리에 맨 것인지는 일본만이 알겠죠!
잘 봤습니다..
오 잘 보았습니다~ㅎㅎ
저 이야기들 다 우리가 만든 게 아닙니다.
모두 일본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마치 우리가 악감정을 가지고 만들어 낸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은데요
기모노 의 쓰임새나 성씨의 기원들 다 일본에서 자기들이 만들어 낸 겁니다
우리한복도 여자는 치마고름을 풀면 치마가 펼쳐지고 남자는 허리끈만풀면 바지가 주르르... 애들피해 밭이건 어디건 후딱한판
기모노도 그론식으로 생각하면 좋지 오비아게도 하고난후 딱는용도... 뭐 생각학하기나름이니까....
그렇게 안만들었어도 그렇게 사용하였겠지...
남자죠 ? 그것두 한복에 대해 잘 알지 못하죠
조선시대 여인옷은 일단 겉옷 장옷 이 있습니다 그다음 두루마기 당의 입습니다 겉 저고리 겉치마 중간 속 치마 속 저고리 소고 저고리 치마 가슴 처매는 천 속바지 소고 바지 등
입는 옷이 어마 어마 합니다 뭔 저고리 치마를 펼칩니까
옷 벗기다 하루 다갈판이고만
무식한것들..한복은 저고리.속옷.속바지 다입었었어. .
@@ljw1025 조선시대때 다 그러지 못했어 먹을것도 없는데 무슨 옷에 투자를 해. 헛웃음만 나온다.
@@윤기현-z1m 그래서..
12겹 속곳
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한복(특히 여성)은 속곳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 옷매무새, 태가 난다 하죠.
요즘은 속곳을 제대로 입지 않고 태를 내기 위해서 서양의 그.. 뭐지? 용어가 생각이 나지 않음.
붕~ 뜨게 하는 뻣뻣하고 풍~성한 속치마 그걸 입드군요 ㅎㅎ
@@ohylan622 페티코트? 크리놀린??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
그러니까, 오비는 왜 있는건가요?
결국 멋으로 하는 허리매듭이라는건가요?
멋으로 하는거죠 귀족옷중에 멋이 안들어간 옷이 어디있나요 한복도 멋으로 몇겹씩 겹쳐입잖아요 고위층일수록 더 그렇구요
오비를 펼치는게 아니라..기모노 자체가 돗자리 역할을 하는겁니다ㅎㅎ 기모노 펼치면..넓직한 자리가 되죠..그리고 치마 폭이 좁은건..도망 못가게 하려고 좁힌거라는 설이 있습니다...그래서 일본 여성 같은 경우엔 비율적으로 숏다리이거나 발이 작은 사람도 많죠..
그냥 유튜브에 기모노 입는거 한번 쳐보세요 님이 말하는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말인지 알수있을테니까 혼자서 입는게 매우힘든 옷이 기모노 입니다 님말처럼 그냥 아무때나 할수있게 만든옷이면 입고 벗기 편하게 만들었겠죠?
궁중 한복하고 백성 치마하고 같나 ㅎㅎ 복잡하다고 팬티안입는게 말이되나 싸대기 맞것네
@@ni_91m64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기 없기..ㅎㅎ
기모노하면 역시 일본 특유의 벚꽃같은 분위기가 ㄷㄷ 🌸
@@표펙크쿻-o6q 웃겨 ..미인을 보통으로 만드는 기모노 ..추녀를 더욱 추녀로 만드는 기모노..한복은 보통여성을 나이관계없이 미인을 만들지요.일본장기거주민
내인생 조차 과거는 아쉬움으로 가득한데, 남의나라 문화 역사를 현대의 관점으로 후벼파는 짓은 누구에게나 도움되지 않는 짓. 기든 아니든 존중하며 예쁘구나 생각하면 될 것을 모욕적인 글이나 말로 상대방 문화를 폄하하는건 본인얼굴 침뱉기 정도의 내용으로 받아들아
이는게...
첫 배경 음악이 궁금하네요...ㅠ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처음엔,속옷을안입다가,최근에입게된것입니다,뭘제데로알고떠들기바랍니다
우리한복을 관광온 외국인 들이 많이입는데 큰키에 길이가 작고 소메도 좁게만든걸 빌려입고도 좋아하는모습을 보며 디자인을 더예쁘게 서구인들의 체형에 어울리게 멘머리에 갓을쓰니뒤로 젖혀저 볼품이 없었습니다 말로만 하지말고 제대로해주세요
나는 기모노가 여자가 들판에서도 쉽게 섹스를 하기위한 복장이라는 설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등에 진 담요같은게 뭔지에 대한 설명은 너무 옹색하다고 생각됩니다.
뭘 비판하든 옹호하든 충분한 연구 뒤에 해야죠.
이래서 사람은 모르면 배워야 합니다 저도 전자처럼 알고있었습니다. 아하😂😂😂
기모노가 영상에서 나왔듯이 입고 벗는게 매우 힘들고 혼자서는 입지도 못해서 그거 입고 돌아다니가 급똥매려울때 그냥 지리는 일이 허다하죠. 구글 이미지 검색만해도 그런 사진 꽤 있습니다.
꼭 일본을 대신하여 변명해 주는 것 같음. 1)속옷을 안입는다. 2)뒤에 천을 메고 다닌다. 3)성씨가 유독 지역적 위치를 주는 글자를 쓴다. 4)전국시대에 무수한 남자들이 죽어 여성의 성비가 많았다. 5)인구 감소 때문에 출산을 강요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종합해 볼때 변병을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을 위한 변명이 맞네요. 일본은 역사 날조, 문화 날조, 사실 날조 자체가 일본 문화입니다. 냄새나는 것은 덮는게 일본 문화입니다.
@@dfas1497tcf3
2차대전 종료후 한국이 전승국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선 한국은 왜 숨기고 교과서로 가르치지않음?
당시 일제국주의에 일조를 가장많이 해놓고선 가장 억울한 피해자인척 하는게 바로 전형적인 왜곡과 날조임
팩트네요. 공감합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일본 춘추 전국 시대에 너무나도 많은 남자들이 전쟁에서 희생되다 보니 남편을 잃은 과부가 너무나도 많았고 남자들이 너무 귀해지다 보니 무조건 애를 많이 낳아야 하는 상황이었던것도 당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 됩니다. 여러 지역이 쪼개져서 너무도 많은 전투를 치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은 일단 이미지 부터가 본인들의 치부나 불리한 부분은 날조를 해서라도 숨기려는 게 너무 심한 나라라는 것도 한몫 하겠구요.
인구증대를 위해서는 좋은 방법인듯
성씨가 낭설안지는 몰라도 기모노의 발달은 송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게 맞울거 같아요.
영상을 보다보니 오히려 낭설이 정설인듯~요즘 형태의 기모노를 입고 노비 여자들은 일을 어떻게 하나요? 걷기 불편하고 움직이기 힘들면?요즘 기모노는 후에 미스럽게 변형된게 아닐까 생각이듭니다
?당연히 일반사람들은 기모노를 입지못했습니다 기모노는 굉장히 고급옷이에요
자기생각을 고칠줄도 알아야해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기모노의 기원은 1910년대 만국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해 가장 일본적인 옷 디자인에서 만들어진겁니다. 전통옷이 아니라 생활한복 개념이죠. 19c영상을 보면 지금의 기모노와는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18c 중반까지 일본의 기본 패션은 옷을 안 입는거였습니다.
18~19세기에 영상찰영이 가능했음??😅
@@machmax7 18c는 제 착각이고 19c부터네요. 수정했습니다.
@@machmax7 19세기 후반에 인류 처음으로 동영상 활영이 가능해졌지요...1800년대 후반부터.
어디서 나온 낭설이죠
기본 패션이 입지 않은 것이라 함은 해적들 그림을 보고 말하는 건가요?
이는 남고에서 남자애들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일본은 의복에 대한 분류도 상당했을 정도로 옷에 민감했습니다
@@nameage576 조금만 찾아봐도 이불킥 하실 발언이신데. 18c 중반 일본의 빈부격차는 우리가 상상 못하는 수준이었어요. 일본애들 망상을 어디서 듣고 오신듯.
기원이 그렇다고 지껄이는 멍청이들이 문제이나
기모노가 그런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고 확언하는것도 문제임.
어디든 의복은 상류층이 먼저 만들어 입고 복잡해짐. 아래로 내려올수록 간소화됨.
입고 벗기 불편한건 제대로 갖춰 입었을때고 겉만 비슷하게 대충 두르고 입는 하류층에서 불편하게 항상 제대로 챙겨 입었을까?
크고 긴 옷을 그것을 하기위해 바닥에 까는건 충분히 생각하고 실행할만한 방법이니까.
그건 침대는 찐 잠만 자기위한 용도일뿐이라고 말하는것과 같음.
기모노는 하류층이 입었던 적이 없는데요? 기모노는 엄청난 고급품입니다 즉 기모노는 하류층에서 그런식으로 쓰였던적이 없었다는거죠
기모노는 중산층도 굉장히 귀한취급의 옷이여서 정말 중요할때 결혼식이나 매우 중요한 자리에서나 한번 꺼내입는정도 였습니다
기모노의 유래에 대해 다른 주장을 하는 유튜버도 많으니 그 사람들의 의견도 존중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우리나라도 1950년도까지도 애기 젖먹인다고 젖가슴이 드러나는 윗도리를 입고 물동이 지고 다니는 여자 사진도 나오는 마당에. 성이 개방적인 성진국이 오죽할까요
아들 낳은 표식이라고 하는 말도 있더군요.
아들 낳은 표식이라는 ... 자랑할려고..
@@jiocafe 성이 아니라 나는 내가 시집간 집안의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은 여자이다는 자부심을 과시(외부 표현)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나는 60세 정도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도 어린시절 동네아줌마들이 들판이나 밭, 시내 노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가슴을 내놓고 아기들 젖멕이는 것을 자주 볼 수있었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일본인들은 숨기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글쎄요?
일본의 성씨가 많은 이유는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일반서민은 성이 없었지요. 메이지유신후 전 국민에게 성을 부여하려니 오랜 전국시대를 거쳐 모계사회(비슷한)가 유지되다 보니 부친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래서 가장 나중에 남자와 관계를 맺은곳이 어딘가를 물어 밭가운데서 가졌으면 田中, 소나무 밑에서 가졌으면 松下, 대나무 밑에서 가졌으면 竹田..이렇게 성씨를 부여했지요. 일본의 성씨중에 논을 뜻하는 畓이나 水田등의 글자가 들어가는 성씨는 전혀 없지요. 아무리 급해도 물소처럼 논가운데서 그짓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내 말이 틀렸다면 일본의 성씨중에 畓이나 水田등 논을 뜻하는 글자가 들어간 성씨를 찾아서 제시하면 그대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지요.
나이프 매니아 인데. 와..
그럼
스미스 웨슨 브랜드는 전통 대장장이 집안이였네.
밀러 브로 브랜드는 방앗간 주인 집안이고
신기하네
담요를 옷뒤에 묶고 사는 민족은 없습니다.
일본에도 은장도 비슷한 것이 있고
여자들이 호신용으로 쓴 일이 있음.
기모노는 겉옷까지 있고 허리에 두꺼운 띠를 하고 입기도 힘들어
담요를 붙이지는 않음.
헤이안시대의 남자옷은
이불처럼 사용함.
성씨가 많아진것은 메이지시대때
호적제도와 조세제도 개혁으로
동명이인을 구별하기위해
정부에서 성씨를 부여함
야. 좀 알고 말하자.. 요바이가 있던 나라다.. 일본의 성은 지금도 개방적이지만 과거에는 훨씬 더 개방적이였다.
서민에게는 정조 개념 자체가 없었다. 왜냐하면 먹고 살기에도 힘든데 뭔 정조냐.. 중앙정부와 지방영주가 60%를 뜯어가기 때문에 노인과 애를 죽이는 풍습조차 있었는데 하물며 정조? 개 풀뜯어먹는 소리다.
@@MR-vd7wj 사무라이가 요구하면 무조건 벌려줘야하는게 국법이었다.
@@MR-vd7wj ㅇㅈ;; 먹고살기 힘든데 정조 지키다가는 굶어죽지 ㅋㅋㅋㅋ
현재도 마찬가지... 가난해봐라;; 밥한끼만 사줘도 ㄱㄴ
@@성민기억법영어회화 사무라이가 그정도로 깡패는 아님 그러다 원한 사서 살해당하거나 경쟁 사무라이한테 붙어서 습격당하면 답없음
@@ALPHEON13 귀족집안 여자들은 정략 결혼을 많이 하지요. 쉽게 생각하면 사무라이 (군인)을 많이 거느리고 영토가 많은 성주는 다른 지방 성주들과의 연맹을 위해 딸이나 여동생을 다른 성주나 자녀들과 정략결혼 시켜서 세력을 넓이고 보호도 해줍니다. 상위 성주의 딸과 혼인한 장남이 전쟁에서 전사하면 상위 성주와 인연이 끊어 질까봐 차남이 형수와 다시 결혼을 하기도 하고 쫒아 낼수 없어서 두번째 부인으로도 드려서 전쟁을 막아지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 하기에 정조관념 없고 괴랄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귀족의 기모노는 최소 여섯벌을 겹처 입고 평민이나 노비들은 한벌, 사무라이 부인들도 세네벌은 겹처 입어데요. 그리고 소속되어 있는 여자 잘못 건드리면 바로 칼싸움 나서 함부로 못해요.
일본 전통 사극은 전문가들의 고증을 통해 만들어 졌다.
고증: 예전에 있던 사물들의 시대, 가치, 내용 따위를 옛 문헌이나 물건에 기초하여 증거를 세워 이론적으로 밝힘.
잘못된 고증이라 말하는 '팩스토리'는 말로만 하는 설명말고 하나라도 증거나 자료를 내놓을 수 있나??
우리나라 사극은 엉터리임 당시 물감이 귀해서 온통흑백뿐이였는데 총천연색한복들 입고나옴 심지어 상놈들도 물들인 한복입고나옴. 말도않됌 우리나라도 1960년대 후반까정 한복은 그냥 흑백색뿐임 오방색이라고 무당들이 입고나온 옷들도 그당시엔 흑백한복이였음.
@@다내미리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으신게 아닌지? 물감이 귀했지 없지는 않았는데 무슨 온통 흑백이라는 건가요?
사농공상의 신분제 조선에도 수요층이 분명 존재했는데 공급이 없다고 주장하시는 건 무슨 이유? 경제 논리 몰라요?
혹! 흑백 사진만을 가지고 오해하시는 건가?
물론, 조선 시대에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노동계층은 없는 살림에 흰옷을 입었지만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색상 옷이 없었다는건 아닙니다. 다만, 귀했기에 특별한 날 아니면 아까워서 집안에 모셔 뒀다 뿐이고 돈있는 백성들은 평상시에도 입고 다녔죠~
색상이 연한 것들은 보다 저렴했고 정확한건 아니지만 색상 옷은 전체 인구의 20% 미만으로 보고요
또한 양반, 기생, 관원, 무당 등 당시 사진들 컬러 복원한 것들만 찾아봐도 생각하시는 것보다 정말 다양한 컬러들이 한복에 들어갔습니다. 괜히 오방색을 조선인들이 의미를 뒀을까? 그리고 사극에서 상놈이 짙은 색이 들어간 의상을 입었다 말하는데 어떤 드라마인가요? (상놈도 하는 일에 따라 색옷을 입혔고 외거 노비는 돈도 벌수 있음)
@@다내미리내 1960년대 후반까지 한복은 그냥 흑백색뿐이라 주장을 계속하실거면 전문가를 대동하고 내기하실레요 그럴 용기가 있다면 연락처 주세요 ㅋㅋ 돈좀 벌게..
@@다내미리내 흑백 사진을 보고 흑백 뿐이라 말하고 일부를 전체로 본다면 정말 할말이 없다.
세상 살아보면 꼭 이런 사람 사회에 한두명 있더라~
너 고문관이지~~
흑백 사진으로 찍으면 컬러도 흑백으로 나옴.
색상 옷이 없었다면 염색소가 조선에 왜 있었고 좀 사는 이들은 어떻게 조선산 색동 옷들을 입었다는 걸까??
하늘에서 한복이 내려와요~앵~~ 이지랄 떠는건가?
본인 소개글 처럼 기초 교육도 받지 못하신 노총각의 60대 분이신가? 질문에 대답은 좀 하자~
@@다내미리내 주장하는 글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전문가 대동하고 내기하자 했더니 글만 신고로 삭제하고선 무반응이시네~
그러게 가만이나 있지 한심한 짓거리는 왜 하신거요 ㅋ
세상 어디에 수요와 공급을 무시하는 사회가 있다고,
조선시대에도 신분이나 하는 일, 경제적인 여건에 따라 색상(염색) 옷들은 입고들 살았지.. 옛 사람이라고 눈이 없나~ 흑백사진 본다고 그게 흑백이냐~~
그쪽은 노총각이라 돈 있어도 그렇지 않으신가봐요~
좀 사입지 검소하시다 정말ㅋㅋ
컬러 복구한 사진들만 살펴봐도 들킬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머리시라면 죄송합니다 밀양사는 60대 날품파리 총각씨 ㅠ ㅠ ㅈㅅㅈㅅ
글쎄 올씨다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걸면 귀거리
양쪽면이 있으니까
이야기꺼리가 나오는것이죠
수준 하고는
그럼 동북공정이랑 임나일본부도 있을만한 얘기냐?
20년전에 일본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봤는데 기모노 펼치고 그위에서 관계 맺는걸 봤다.
윗분처럼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데 그런용도로 만들지 않았어도 성생활이 개방적인 시대였고 이런 얘기도 맞는것 같음
그리고 1800년 시대에는 기모노 속에 지금처럼속 뭐입지도 않고 길게 둘둘 말지 않았음
그냥 끈 풀면 원터치 였음
영화잖아요, 일본전통 기모노는 정말 입고 벗기가 불편했다고 합니다만..원터치는 정말 아닌걸로 알고있습니다.
@@mallivideo2157 현재의 기모노는 일본정부거 순화시킨거지...예적으로 올라가면 생각하는 그게 맞아...풍신수길전에 맨날 전쟁도 하고 툭하믄 할복하고 당연히 인구수가 줄어드는것 맞는데..그렇다면 용도는,,,,그리고 그당시 법령도 그랬다는데...일뽕빠는애들은 대체 뭐냐???
개상도 일뽕들이 지네본국 수치스런 부분이 드러나니 열받는 모양이다! 열받는 왜들 꾀 많네!!
@@수미니수미니참나 영화잖아요 시간이 제한되어있는 영화에 그거 푸는데 5분 촬영하면 되겠음? 영화를 사실 장면 그대로 이해하시는 분이 있네
사무라이가 국법으로 허용된 성관계를 길에서 갑자기 요구하면 깔개가필요하다 . 모든 여자는 깔개를 차고다녀야한다.
낭설이 아니라 다 근거있는 사실입니다
뒤로 넘어지면 다칠까봐서
대비하는거 아닐까?
나도 잘못알거 잇엇네요 하나배워감니다
백화점 화재는 보일까봐 안뛰게 아니고 기모노 입으면 뛸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입어보니 여러겹 입고, 벗기도 힘듦. 무게도 나가고 보이지 않게 오비안에 끈으로 묶어놔서 혼자 풀기도 힘듦. 온천료칸이나 여름에 입는 유카타랑은 차원이 다름
되~~~게 불편하게 생긴건 맞어~~근대 허리 복대는 두껍게 이불하나 매고있는것처럼 왜그렇게 둘르고 다니는지 누가 그따위로 전통복장이라고 만들고 유행시켯는지참~~여자를 얼마나하대하고 소유물로봤길래 절대달릴수도없고 스스로풀수도없는 철저한남자를위한옷으로만 만들었냐 이거야~~~
잘볼께요^^
기모노 안쪽에는 속옷을 입습니다
통소매를 달은 넓은 천을 여러번 두른 것이 기모노...즉 우리 옷처럼 입체재단이 안 된 평면재단의 옷이고 이러한 것을 미적으로 보완하려고 후대 다양한 색상의 프린트를 많이 한 것이 기모노의 특징...사실 다양한 문양의 염색을 빼면 낮은 수준의 재봉으오 만든 의복이고 오비의 용도는 모든 사람의 주장하는 내용이 얼추 멎을 듯
저도 일본가서 高씨중 高橋 같은줄 알았는데 高木씨 다 고씨인줄 알았는데 완전 다른성이라고 하더라고요
잘보고가용
기모노 낭설 사실 유무는 아니더라도 요바이도 있었으니..
기모노를 입고 있을때 급똥이 오면 대략난감 이라네요
종종 걸음은 짧은 다리 때문이 아닐까요?
기모노 기모찌 둘이 무슨관계인가요?>
비으응신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여러겹에 뒤에 묶는 기모노는 재질도 좋은거 써서 있는 집들이 쓰던거였고 일반적인 것은 유카타 같이 간편한 것들이었음
세간에 알려진 것들중 오류들이 많아서 그렇게 알고있는 사람들이 많았을 뿐이지
그쵸.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해야죠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우리의 이런 마음을 알지 못하네요..😂😂😂😂
기모노는 예전 일본 연극? 이런거 할때 여성 차별이 있어서 무대에는 남성들만 설수가 있었음! 그런데 등장인물이 남성만 있을수는 없기에 여성역할을 하는 남성이 있을수 밖에 없었는데 이걸 관객에게 구분이 되게 하려고 허리띠같은 큰 천을 허리에 두르게 했음! 이게 변형, 개량이 된게 기모노임! 나도 일본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사실을 왜곡해서 국뽕이나 비하하는건 오히려 더 안 좋다고 생각함! 역사 왜곡해서 우리나라 비하하는 일본과 다를게 뭐가 있음?
스즈키 씨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역사탈탈 미친ㅋㅋㅋㅋㅋ하야부사 타면서??
너무 웃겨서 눈물이날 정도로 호탕하게 많이 웃었습니다.너무웃겨줘서 감사합니다.
일본은 성씨문화가 아니라 가문 중심의 문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씨와 이름을 수시로 바꾼 이들도 많고
공을 많이 세우면 군주가 신하에게 성씨를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토요토미히데요시)도 이름을 4번이나 바꿨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처럼 성씨에 집착하지 않고
가문을 위해서면 데릴사위에게도 처가쪽 성씨로 바꾸기도했습니다
복잡한 매듭의 오비를 제대로 갖추는 것이 예의 였고, 그래서 귀족층에는 오비를 묶어주는 하녀 또한 존재했다하시는데 그럼 일반인들은 어떻게 맺나요?
가족 중에 도움 줄 이가 없다면 어떻게 했으며 서구나 동양 어디를 살펴봐도 귀족층이 아니라면 서민 의복은 생각보다 단정하지도 비싸지도 않던데 아닌가요?
(서민 여성이 복잡한 매듭을 맺을까?? 절대 아니다 복잡한 매듭의 오비는 귀족문화일 뿐)
증거도 없이 설명만 하는건 아니라 봅니다. 한국 포함 동서양의 서민과 귀족은 입는 의복의 형태며 재질, 문양 등에 차이가 있기에 이를 일반화 시키는건 문제가 됩니다.
코르셋 조여주는 하녀 있듯이 오비 묶어주는 하녀가 있을 뿐 간단히 묶고자하면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nameage576 본래 오비는 지금 처럼 과장되게 크지 않았답니다. 그렇기에 단단하게 묶이는 정도라 해봤자 손가락 2~3마디 (높이? 가로 길이?) 정도의 작은 천조각 이였다는데 혹! 알고 계신가요?
지금의 오비는 극단에서 남성이 여성 분장 시 과장된 크기로 묶어 극중 여성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것이 극과 같이 유행하면서 완성된 것이지 그 이전에는 없던 문화입니다.
오비가 유행하던 시절의 일본 옛 사진들을 찾아보더라도 대부분의 서민 여성들은 움직임을 방해해서거나 가격대만 있지 쓸데없이 큰 오비 같은 의복 장식은 출신을 나타내야 하는 신분이나 타인의 눈에 띄어야 하는 일부 직업, 축제·행사 등이 아니면 입지 않았답니다. 그들도 묶는데도 오래 걸리고 푸는데도 오래 걸려 번거로운 것을 실생활에 사용하기는 힘들었죠
서양에서도 언더우드등 사는곳을 지칭해서 만들어진 성씨도 많아요. 나무아래 집에서 사는 사람!!!
1950년대까지 남의 여자 강간하는 요바이 문화까지 있다는 것은 일견 상통한것 같다.
뭔가 근거는 있네요
1,담요성격.
2,속옷 미착용.
3,환경에 따른 성씨들.
4, 전국시대에 전투참가로 많은 무사죽음.
뭔가가 이치에 합합니다ㅡ
낭설이란 미화한것임
그렇게까지 알고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존중까지야 뉴라이트도 아니고 일본성이 다양한건 전자에 말하신 부분이 더확실한것 같은데요
여인들을 잘 그리시는군요. 잘 봤습니다
잘못된 속설이 참 많이 떠돈다는...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진짜 다 검증 하신거 맞나요. 여전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많은 내용이
전혀 모르던 썰이 였네요 기모노에 그런 소문?이 있단것도 처음 알았네요
맞습니다. 우리 문화가 존중 받길 원한다면 타국의 문화도 존중해줘야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을 무조건 까고 밑으로 보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이제는 깨야 할 때입니다.
까는게 아니라 팩트를 말하는거죠
@@lukeseo4879 朝鮮王朝の女性は胸部を丸出しで外を出歩き、犬を食べていました。
それでも私は韓国の文化を尊重します。
성진국 문화 존중할게없다 모두가 아류작에 성과 관련되어 있음은 부정할수 없잖아
일본이 문화가 성문화뿐인데??가족끼리 아직도 목욕하고 그짓하는애들도 많다는데.
여름에 무지 덥겠당.
성씨는 분적해서 더 많아짐 즉 덴노계(겐지류) 후지와라계라도 분적해서 더 증가한것임 정식기모노는 입기도 시간걸리고 벗기도 힘듦
낭설인건 맞지만.. 강x가 많았던것도 사실이라서요.. 내전이 많았던 만큼.. 당시 전쟁에서 패배한쪽 여자들은 죄다 털리는건 기본이였으니까요..
저거 고딩 때 역사선생이 진짜인 거 처럼 얘기했었는데.. 그래서 왜놈들이 미개하다는 결론으로. 진짜 수준 이하 역사 교사들 많았다
자국 역사를 미화하고 타국의 역사를 무조건적으로 왜곡하는 것은 문화적 열등감이죠 문화대혁명으로 과거 문화 나락 간 중국처럼요 SNS도 무조건적 반일에 동조하고
저와 비슷한 연배신거 같은데 저도 당시 그렇게 배웠습니다
현실은 고려시대 이후 일본이 대부분 압도적으로 발전한 문명을 가졌다고 하죠
당시엔 참 왜곡된 국뽕들이 많았어요 피카소, 고흐같은 유럽미술보다 흑백먹물로 그린 한국화가 더 뛰어나다거나
유럽의 거대한 성이나 노틀담 성당, 그 스페인 성당 뭐지? 그런 건축물은 습기찬다고 조선의 흙으로 만든 한옥이 더 과학적이라거나 등등
조금만 생각해봐도 참 말도 안되는 소리였죠
네...1000년 왜구는 아무나 할수는 없지요..!바이킹이나 기타 오랑캐들 처럼 먹고 살기 위함 보다는 왜구이니 가능한 쾌락의 도둑질..!왜구의 공격성과 변태성은 지구상의 생명체중 최강..!
@@sungjoohan1316 왜놈이라며 미개하다고만 인식시키고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지금도 양국에 엄청난 손해지요. 그러나, 양국역사를 보면 고려후기부터 압도라고 보기는 힘들지요. 양국관계에 있어서는 일본열도의 비약의 시작이 1603년 시작된 에도시대이며 안정된 정국을 바탕으로 그 중기인 겐로쿠때부터 튼튼했다는 건 역사가 말해주지만, 것도 17세기 중반이니. 에도 바로 전으로 거꾸로 가보면 1598 노량해전 1592 임진왜란 게다가 고려말로 가보면 1389 박위 대마도정벌 1380 왜구 격파 이성계 황산대첩 나세 최무선 진포 대첩 1376 왜구 격파 최영 홍산대첩 등등도 있지요. 그래도 무엇보다 그 시절에 에도막부의 시작과 발전을 가볍게 여긴 한반도의 세력을 안타까워 할 일이긴 하지요 ㅠㅠ
얘네 문화 본질 자체가 헨타이 세크스 관음증에서 비롯됐는데 그 깟 기모노가 벗겨지기 쉬운 것이 그 용도라고 추론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요지임😅
저는 영상의 내용이 오히려 가짜라고 봅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인구증가를 위해 아무 남자든지 성관계를 요구하면 하도록 명령 내린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역사는 본래 승자의 기록이기에.. 현재 알려진 모든 역사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요. 때문에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사실인 것처럼 떠들고 다니면 안된다 생각합니다
일본의 복식은 한반도와 만주에서 건너온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의 도래인들의 영향을 받았고 현대 일본인들은 도래인과 원주민들의 혼혈 이고 올라가면 일본인 조상 중에서 도래인들이 상당수 있죠. 일왕가도 백제 무령왕의 후손 이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요.
그 도래인이 꼭 한국인이 아니라는거지.
@@만슈타인-o3k 중국 대륙에서 온 사람도 있고 동남아 지역에서 온 사람도 있고 만주와 한반도를 거쳐서 북방초원 지대에서 온 사람도 있겠죠.
@@고대경-b6d 동이족이 건국한 고조선.. 지금의 신의주나 대련 ..중국쪽이 치우쳐져있는데. 이게 4900년전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훨씬 이전에도 한반도에는 한반도 토착민이 살고있었음.
@@고대경-b6d 만주 쪽에서 온 사람은 아이누족
중국 동남아는 워낙 거리가 멀어서 그당시 항해기술로 불가능한 일
일본으로 간 도래인이 꼭 한국인이아니라고요? 그럼 미쿡인인가 웃기네요^^
아하~~
기모노의 요대가 담요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닐지는 모르지
위에서 설명한 데로 매우 복잡한 절차의 기모노라면
왕성한 성생활을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을것이며
옷감에 의한 경제적 부담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어서
어지간한 일반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의복으로
귀족이나 최 상류층들만이 입을 옷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낮은곳에서 위를 쳐다보고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가진거 없는 양민이나 하층민들은 복잡하고 비싼 기모노 보다는
값싸고 간편하고 실속있는 저렴한 기모노를 입기 시작 했다는거다
평범한 나라의 평범한 시대의 지극히 평범한 국민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로 이야기가 끝나지만
왜 일본에는 전통 옷이라고 하는 기모노에
활발한 성생활을 할수 있는 또는 해온 옷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냐는 것이다
그것은 기모노와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그들의 국민정서 즉 성에 대한 매우 개방적인(?) 일상 생활때문이다
상략 중략 하략 다하고 요점만 말하자면
기모노를 입어서 성 생활이 왕성했던게 아니고
성 생활이 왕성한 사람들이 입었던 옷이 알고보니 기모노 였다는 것이다
기모노를 욕하지 마시라
그옷을 입은 음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탓할 일이다
그들의 후예가 야동천국 성진국을 이끌어 가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것이다
기모노는 왕성한 성생활을 위한 도구중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라는것을 ............
6:00 원터치 텐트 ㅋㅋㅋㅋㅋ
일본 기모노을 좋게 설명 하려고 포장 잘 했네...😂😂
막장나라답다😮
공장사장하는 사람이 정말 그렇게 말하는거 듣고 사실여부를 떠나서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여겨지더군요.
사실이 아니란 글을보니 뒤늦게나마 무식한 위인의 말이 낭설맞구나..하면서 후련^%
그냥 더워서 웃옷만 길게 가운처럼 입다가
(어차피 일본은 옷감도 부족해서 하의를 잘안입음)
허리띠가 장식용으로 커진거 뿐입니다
잘못알고계시는게 많네요ㅋ 기모노가 여러겹을껴입는다? 그건 사람마다 다 다름..님이 말하는 여려겹을 껴입는건 높고 나름 이름있는처자들이나 그리한거고...서민들이 기모노를 무슨겹겹이 입었는줄아시나요? 가볍게 입고 편하게 유타카입고다닌사람도 많았음. 한국인이 보기에 기모노나 유타카나 비슷비슷하니까 그냥 한데 묶어서 기모노라고 말한것도 있고... 참고로 실제로 전쟁통에 사람많이죽고 그래서 관계할장소에 구애받지않아서 담요로사용한것도 맞음.기원은 님말처럼 여러겹을 입어야하는 매듭이라고 말할순있지만 그게 이유라해도 관계시에 편하게 깔고 하는경우도 많았음. 그리고 님이 자꾸 기모노가 혼자서는 쉽게 입지못할정도라고 하는데..그건 일부만 그런거고~ 일반사람들은 충분히 혼자서도 입고벗을수있는게 기모노입니다. 거기다가 기모노가 속옷안입는거는 뭐라말할까 궁금했는데 안그래도 몇겹씩입어야하는 기모노에 속옷까지입으면 너무덥고 불편해서안입었다는말에 실소를 금치못하겠네요. 솔직히 일본전국시대나 전란시대는 여성은 그냥 노리개였습니다. 사무라이가 길가다가 여자보고 꼴리면 벗으라고 해서관계하고 말안들으면 죽여도 뭐라말할수없는 그런위치였구요. 그래서 어느정도는 기모노=관계하기편한옷 이라는게 사실 맞는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순결을 잃으면 자살하기위해 은장도를 지닌여성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본에는 순결을 잃었다고 자살하는경우는 별로없었습니다. 솔직히 기모노가 만들어진발단은 님말이 맞을지라도 어찌됬든 바로 이부자리깔수있고 관계할수있게끔 벌려주기만 하면 되는 옷인것도 사실이구요 실제로도 그렇게 많이 사용된 옷입니다. 한마디로 친구분말이 어느정도는 맞는말이다이겁니다
글쎄 요바이가 실재했던거보면 진짜아닐까😂
조선은 요바이 안해서 식민국 됐나요?
@@user-generated5123 요바이 하면 지배국 되냐?
그건 20세기잖아 ㅂㅅ아
@@user-generated5123빠가야로😊
너는 논리구조가 딱 그 수준인거가? 대가리 못질만 할것같노
좋은 영상에 이런 댓글을 싸지르는 자들을 보면 0.6 망국에 필요한 게 요바이가 아닐까 생각된다.
설명이 납득은 간다만 낭설이라고 다른 이론들은 이야기 하면서 정작 본인 영상에는 참고 문서나 찾아볼수 있는 영상 출처가 더보기에 없다..
대체 본인이 주장하는 낭설이라고 하는 이야기들과 차이 점이 뭘까?
그렇다면 기모노보다 조선의 치마가 더넓 고 좋을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