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프렌치님 안녕하세요? 나날이 음악의 지식이 더해지고 있네요. 노트를 사서 열심히 필기하면서 영상을 보고 있네요. 제사 사는 뉴질랜드는 겨울이라 비도 자주오고 다운되기 쉬운 계절인데 정 프렌치님의 영상이 좋은 활력소가 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술에도 재능이 있으시고 타고나신 복이 많은분 같아요. 고흐작품보다 색감이나 표현된 얼굴이 저에겐 더 매력적이네요. 10개월간의 노고가 작품에 녹아있는게 보입니다. 정 프렌치님 영상을 알게되고 일상이 점점 업그레이드가 되고 있는것 같아 참 좋습니다. 항상 건강 잘 챙기시고요 감사한 마음 한번 더 전합니다
새로운 영상 방금 올려놓고 막 잠자리로 들려다 답을 안 할 수가 없군요.... ㅎㅎㅎ. 뉴질랜드 방문했을때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고갱이 타히리의 자연스러운 여성들을 그린 그림은 보기보다 색상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한가지 붉은 색을 내기 위해 8가지 이상 색을 섞어야 하고 ....10달만에 그의 테크닉을 알아냈을때의 기쁨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그대로였답니다. 정성이 듬북 들어간 댓글 매우 감사드리며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화이팅! 그럼 꿈나라고 가겠습니다. ㅎㅎ
선생님 시간만 오면 너무즐겁읍니다 들을수록 점점 더 흥미가 붇는군요 저는 음악공부를 싫어햇던 사람이엇는데 닥터 도토리 깨서 저를 음악에 대해서 깨우쳐 주셨으니 음악 상식과 유머감각도 제가 늘었군요 다음방송 빨리 부탁드립니다 ㅋㅋ 인상파가 무슨음악인지에 대해 너무 잘들엇읍니다
도토리 박사님! 무척 존경하고 감사드립니다. 인상파가 왕성했던 그 시기와 지금이 유사하게 겹쳐지며 너무 슬퍼 눈물이 고였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이 너무 비 상식적이고 부패한데다가 다 방면에서너무 품위가 없어 세상 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선별적이고 아름다운 것들만 뽑아 편파적으로 미화하여 심미적인면만 뽑아 간직하면서 좋아했었습니다. 그 시대상을 박사님 통해 좀 더 알게되니 이 세태와 공통점이 많아 놀라면서 슬퍼진 겁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몇 년에 걸쳐 공부할 내용인데, 엑기스를 뽑아 알기쉽게 설명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갱 그림까지 섭렵하신 박사님, 참 대단하십니다! 음악과 미술은 표현만 다르지, 예술적인 면에서는 동질감이 있나 봅니다. 제자신 얼마나 무식했나 깨닫게 됐습니다. 감동적인 강의 입니다!
마치 소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불교철학 공부할 때 "관세음"이라는 단어가 무척 멋있었는데요 소리를 관하다. 소리를 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짧은 명화를 감상한 것 같네요.. 자주와서 강의 들으면서 공부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방송을 알게 된 것도 참 행운입니다. 🍀
정말로 하나도 놓칠것이 없는 너무나 알찬 강의 있어요. 2,500 의 음악 역사를 통하여 점점 더 음악의 매력에 빠져 들게 됩니다. 이렇게 멋지고 수준 높은 강의 를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지금까지 배운 강의들 이론적인 지적 인 면에서나 피아노 피아노 연습 시 유익하게 잘 사용하고 있어요.
강의 너무 좋습니다.쉽고 폭넓게 핵심적으로 전달해주시고 연주기법까지 설명해주셔서 감탄합니다 음악을 듣다보면 인상파 이후 현대음악은 동시대의 예술 특히 미술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직접 관련이 있는 경우도 있고 아니더라도 음악의 감성과 이미지를 그리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와..그림도 엄청 잘 그리시는군요!!대단하십니다! 제가 그린 사람 그림은 "옷" ->이 그림인데요ㅎㅎㅎ 저도 그림에 관심이 많이 가서 도슨트 영상를 즐겨듣습니다. 그림 해석, 당시 시대상이 너무도 잘 표현된 보이는 예술이니까요! 이런부분에서 음악은 악보가 없으면 시간예술이라 들을수없다는것이 아쉽네요~ 고흐와 슈베르트 인생이 비슷하다고 느끼는건 저뿐일까요ㅎㅎ생전보다 사후에 더 인정받았다는것이 마음아픈날이네요😢 결핍이 때로는 성장시킨다고 믿기에 저에게 가난은 힘들었지만 지금에 제가 있다고 믿습니다! 박사님도 그러실거라 믿어요❤
종을 댕~ 하고 울리면 파동이 서로 간섭하며 퍼져나가는 모습이 태어나고 죽는 모습 같아서 종은 영혼을 의미하는 걸까요? ^ ^ 빛과 물 같이 우리를 둘러싼 재료들을 가지고 미술과 음악, 문학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인상파 시대를 표현했다는게 놀랍네요~ 선생님 덕분에 오늘도 교양 충전! =) 잘 봤습니다~
맞습니다. 그리크 시대부터 철학자들은 그것을 메타피직과 연결해 증명하려 했습니다. 소리는 우주와 연결되고, 살아있는 모든 물체는 보이는 형태와 보이지 않는 영혼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진동도 보이지 않는 영혼과 관련시켰죠. 제 인상파 강의를 100% 이해하셨군요. 꾸벅 꾸벅! 행복한 주일 되세요.
신관웅은 미군부대에 다니면서 명지대 경영학과를 다녔지만 사실 공부를 할 시간도 없이 자나 깨나 연습에 몰두하여 실력을 키웠으므로 수업에 지장이 많아 학교는 건성으로 다녔다. 그러나 집에 피아노가 없으니 연습하고자 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궁리를 짜낸것이 개인레슨이었다. 레슨비를 반으로 깍아주면서 한시간씩 피아노를 빌렸다. 클래식도 그렇지만 재즈도 악보를 보고 치는것과 외워서 치는것은 큰 차이가 있으므로 신관웅은 고집스럽게 꼭 외워서 쳤다. 그래서 그는 가 되었다. 재즈 음반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청계천에서 어렵게 구한 음반은 바늘을 올려 놓으면 그냥 쭈욱 미끄러졌다. 그럴때 마다 낙심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만 오스카 피터슨, 존 콜트레인 등의 음반을 들으면서 즉흥연주를 배울수가 있었다. 처음으로 구한 재즈 음반은 조지 쉐린의 연주였다. 그는 맹인 피아니스트였는데 스타일이 독특해서 라는 재즈용어가 생겨났을 정도였다. 수백번을 반복해서 듣고 음을 하나씩 골라내어 채보를 한 것이 많은 공부가 되었다. 물론 재즈 이론서가 있을리 만무였다. 어쩌다 동료가 필사해서 보관하고 있는 재즈교본을 발견하면 빌려다가 밤새도록 베꼈다. 이런 교본은 재즈 연주자에게 비장의 무기이어서 남에게 빌려주기를 꺼려했으므로 술을 사주고 달래야 겨우 얻어 볼 수가 있었다. 이런 사정은 기술업도 그러하다. 절대로 자기 기술을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나의 기술을 습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까지, 나름 고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에는 공짜점심이 없는 법이다. 이렇게 세월을 보냈으나, 미군부대가 일부 철수를 하면서 클럽도 줄게되어 어쩔 수 없이 미군부대를 나와 색스폰 주자의 빅밴드로 들어갔다. 명동 뉴코리아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매일밤 연주를 했다. 끝나면 밤 11시..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포장마차에 들러 큰 컵에 소주를 따라 훗딱 마시고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이런 생활을 대학 4년 동안 반복했다. 학교친구들은 취직 등 진로문제로 고민했으나 이것은 신관웅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쨌든 학교를 힘들게 졸업한 후 결혼을 했고 비로소 할부로 피아노를 장만할 수가 있었다. 단칸방에 피아노를 들여놓던 날 신관웅은 꿈을 꾸는 듯 황홀했다. 피아노를 치면 주인 집에서는 시끄럽다고 난리를 쳤지만 그래도 기쁘기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먼지를 털고 건반을 닦았다. 이렇게 재즈 음악에 대한 간절함으로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아온 그였다. 당시 알고 지내던 재즈 연주자들끼리 의기투합하여 라는 그룹을 만들고 명동의 오비스 캐빈에서 연주를 했으나 어느날 업주가 피아노를 빼달라는 것이다. 70년대 비틀즈가 유행하면서 전자 악기가 가공되지 않은 순수음을 내는 어쿠스틱(Acoustic) 악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사태가 이러한즉 피아노보다는 전자오르간이 더 인기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아끼고 아끼던 피아노를 팔아 오르간을 장만했다. 가정도 있으니 당장 먹고 살아야 했다. 피아노를 내가던 날, 이거! 내 피아노인데 왜 가져가는 거야!~딸내미가 방바닥에 주저앉아 울음보를 터뜨렸다. 어쩔 수 없었지만 몹시 울적한 날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음악시장에서 재즈 연주자를 둘러싼 상황은 바뀌어만 갔다. 건반 하나면 색소폰에서 바이올린 까지 해결이 되었으니 연주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졌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재즈 연주자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신관웅도 진지하게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했다. 이 땅에서 한국의 대중음악계를 풍미한 유명인은 이봉조, 길옥윤, 김강섭이다. 다행스럽게도 신관웅은 이 분들을 모시는 영광을 누렸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단연 이봉조의 전성시대였다. 미8군에서 색소폰 연주자로 활약했던 그는 대중음악으로 눈을 돌렸다. 그 때는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청춘영화가 영화판을 휩쓸고 있었다. 이 때의 영화음악은 단연 이봉조였다. 또 정훈희와 짝을 이뤄 국제가요제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였고 현미의 유명한 는 그가 만든 곡이었다. 당시 신관웅은 이동기 악단의 피아니스트였다. 매일 밤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술꾼들을 상대로 연주했다. 그때 한 친구가 신관웅에게 에 피아니스트가 없다고 귀뜸해줬다. 봉조클럽은 청계천 3가 센추럴 호텔의 꼭대기 층에 있었고 이봉조씨가 사장이었다. 이 곳에서 일한다는 것은 이봉조씨를 선생님으로 모실 수 있다는 이야기 였다. 며칠 후 봉조 클럽에 찾아갔더니 누군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연주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바로 이봉조씨 였다. 연주를 끝내자 다가가 이봉조씨에게 인사를 하고, 피아니스트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지금은 이동기 악단에 있는데 제가 여기에서 일하고 싶습니다..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자 사람좋은 이봉조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시다면, 스테이지에서 한번 연주를 해봐요! 이봉조씨가 내 연주를 듣고 당장 내일부터 나오라고 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처럼 너무나 뿌듯했다. 다음날 부터 이봉조씨와 일하게 되었다. 다만 봉조클럽에서는 재즈만 고집할 수가 없었으므로 재즈 반, 대중가요 반을 연주했다. 그러나 몇 달 있다가 문을 닫았으므로 다른 클럽을 전전하며 연주를 했다. 이봉조씨와 함께 일한 경력이 붙자 개런티가 꽤 높게 책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게 좋을리가 없었다. 고작 3개월에서 길어야 6개월이면 일이 끝났다. 대부분 새로 문을 열 때 이봉조 악단을 불렀다가 장사가 되면 이내 내보냈다. 그래서 우리끼리 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업소 따까리 였다. 고용불안이라는 것, 막연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음악을 물론 한국 역사까지 꿰고 있는 누나~~~~ 원래 인상파가 아니다! 그렇죠 보면 어느 이름이나 지명도 그 자리에서 그냥 무심코 부른 것들로 정해지는 것들이 많다! 술과 여자들과 즐기면서 그림을 그리다 죽었다! 후회는 없겟군요 ㅎㅎ 궁상각치우 오랜만에 듣네요! 음계도 동양에서 먼저 나온 것 그렇죠! 결국 인상파 음악은 자장가로 ㅋㅋㅋㅋㅋㅋ 검으 바탕에 검은 옷! 역시 파숀 감각도 최고 누나~~~~~~~~~
악사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술에 취한 손님들이었다. 지금은 재즈클럽에서 연주할 때 손님들이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쳐주지만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재즈 연주자로서 무대 위에서 갖는 외로움은 숙명이었다. 또 하나는 가정생활이었다. 밤 11시 30분에 일이 끝나면 집에 갈 시간이 없었다. 업소에서 새우잠을 자고 새벽에 통금이 풀리면 집으로 갔는데 큰 딸의 백일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새벽 5시에 악단 동료들과 함께 집에 갔더니 온 식구가 밤새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의 평생 소원은 월급 봉투를 한번이라도 받아보는 것이었다. 생활이 점점 힘겹게 느껴질 때 쯤 이봉조씨가 제안을 해왔다. 이봉조씨는 TBC TV 개국과 함께 전속 악단을 이끌고 있었다. 나에게 방송악단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것이었는데, 막상 방송국에 들어가기를 결심하기까지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한달에 한번씩 월급이 나온다는 건 정말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고 방송이라는 미디어도 매혹적이었으나 방송악단이 하는 일은 재즈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마디로 가요반주가 주된 역할이었다. 특유의 매력인 즉흥연주나 재즈 화성은 거리가 멀었다. 방송국에 처음 들어가서 한동안은 모든 것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유명가수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체험이었다. 정훈희, 최희준, 위키리, 한명숙, 현미, 패티김 등이었다. 녹화가 시작되면 서소문의 TBC 스튜디오가 스타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싫증이 났다. 언제나 비슷한 곡을 연주하는 것도 싫었지만 NG는 왜 그렇게 많이 나는지?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녹화하려면 거의 하루종일 진을 빼야 했다. 방송 초창기라 방송 기자재가 완전할 리가 없었다. 연기자가 아닌 가수들도 문제였다. 다양한 변주를 하다가 정해진 악보에 따라, 그것도 같은 곡을 몇십번씩 연주를 하다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떻든 스트레스를 풀어야 했다. 그래서 무교동의 스타더스트나 내자호텔 나이트클럽처럼 재즈만 전문으로 하는 곳에 즐겨 출연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점점 어려워졌다. 나이트클럽 자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70년대 중반에 등장한 고고 클럽들이 밤풍속을 바꾸어가고 있었고 낭만이 넘치던 재즈보다 빠르고 시끄러운 음악이 대접받았다. 당시 재즈인이 걸었던 길은 두 가지였다. 이민 바람을 타고 너도 나도 미국으로 건너가거나 아니면 카바레나 요정의 악사가 되는 것이었다. 어느새 돌아보니 주위에 남아있는 동료가 별로 없었다. 바로 그때 드럼을 치던 유영수를 만나게 됐다. 방송국에 들어가기 전 에서 함께 연주했었던 친구였다. 그가 박성현씨가 운영하는 라는 재즈클럽이 문을 열었는데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당시 는 신촌시장 골목의 허름한 건물 2층에 고작 10평이 될까 말까 했다. 그래도 재즈음반이나 자료가 꽤 많았고 고물이지만 피아노도 한대 있었다. 그곳에서 박성현씨와 인사를 했다.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미 8군에서 활동할 때부터 재즈계에 소문이 자자했던 여가수였다. 나이도 나와 비슷했다. 우리는 의기투합해 밴드를 하나 만들었다. 색소폰의 김수열, 베이스의 이판근, 보컬의 박성현, 피아노는 신관웅..재즈 전용공간이 마련됐으니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하기로 했다. 매달 첫째 주 일요일이면 야누스 정기연주회를 열었다. 초창기 야누스의 손님은 연주회가 있건 없건 대부분 재즈 애호가였다. 우리가 연주회를 열기 시작하자 옛날 함께 일했던 이들이 하나 둘 씩 찾아왔다. 그들은 재즈를 포기하고 술집 악사로 전락해 있었지만 가슴 속의 열정만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식구들만 모이니 장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연주회라고 해봐야 손님이 10명 남짓했고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연주자의 개런티는 성의표시 정도였다. 악기나 음향설비도 열악했다. 나는 조율기계를 가지고 다녔다. 조율사를 부를 여유가 없었으므로 급한 대로 내가 알아서 피아노 조율을 했다. 그래도 마음은 늘 행복했다. 곡이 끝날 때마다 받는 박수도 황홀했고 옛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된 것도 꿈만 같았다. 게다가 점점 입소문이 퍼지면서 야누스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졌다. 2, 3년 지났을 때는 10평 공간에 100명이 넘는 관객이 들어찰 정도로 성황이었다. 야누스에서 재즈는 술맛을 돋우는 배경음악이 아닌, 진지하게 감상하는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음악세계로 들어가면 장르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만큼 총총하다..미술은 안 그런가? 마음을 열고 보면 다시 보이는 세상은 황홀하다. 사람들은 대중 음악가를 딴따라로 부르고 천시하지만 신관웅 선생은 한눈을 팔지않고 음악, 그것도 평생 재즈의 길 만을 올곧게 걸어온 진정한 재즈 연주자다. 생각해보면 예술가 이전에 이 분들도 생활인이다. 그 점에서는 조금도 우리와 다를게 없다. 기예(伎藝)를 평생 갈고 닦는것ㅡ영광보다는 외로움과 고독이 자리할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히 자기의 길을 걸어온 신관웅 선생을 딴따라로 부르고 천시하는 사람이야 말로 선생만큼 평생을 바쳐 한 분야에 치열하게 노력을 해 보았나? 묻고 싶다. 모든게 열악한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게 얼마나 힘든 가시밭길 인가! 세상에는 돈과 권력, 명예가 아닌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통키타 가수 밥 딜런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덧붙여 매주 일요일 낙원동에 가면 째즈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종로3가역 6번출구 악기상가앞 010-9337-5546 우리나라 재즈 1 세대 선생님을 들자면, 피아노..신관웅 드럼..임헌수 트럼펫..최선배 섹소폰..김수열 보컬..김준 1세대 선생님들과 늘 함께하시는 베이스 전성식이 있다. Bravo !
안녕하세요, 평소 알고 싶던 클래식 지식을 쉽게 풀이해주신 여러 영상을 잘 시청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대학강의 교양수업 시간에, 인상파 동영상 자료를 학생들과 함께 시청해도 될지 여쭤보려고 합니다. 마침 제가 인상주의 회화작품에 관하여 수업하고 있습니다. 좋은 수업 감사합니다.👍
가야병원 복도 벽에는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이 있었어요. 환한 어느 날 아이와 같이 풀꽃언덕에 서 있는 여인. 그녀의 마음은 흰구름처럼 가벼웠고 풀꽃처럼 연하고 바람처럼 맑았습니다. 그런 날이 있었지요. 환자들은 그녀가 가장 아름다윘던 날을 그리며 그림을 보았겠습니다. 귀여운 아이와 거닐던 시간을 생각하며 혹은 환자 그녀가 아이일때 엄마따라 다니던 날이 되기도 했겠어요. 그림에는 환자 그녀들의 망막에 찍힌 날이 그렇게 하고싶은 날이 환영처럼 걸려 있었어요. 어둠이 숯가루처럼 내리는데 저 아래서 저 깊은 곳에서 가야, 가야, 부르며 우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가을물보다 슬프고 차가운 울음이었어요. 가야가 떠나갔나 봐요. 난 그날 가가 들어난 이름은 거의 슬퍼 보이고 약해 보여요. 라고 생각했어요. 가실이 가련이 가야. 무거운 소식으로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 누나를 문병하던 가야병원의 그날 누나는 퇴원해도 여전히 무거운데 가끔은 다섯살 아이가 되고싶은지 엄마따라 풀꽃언덕에 가고싶은지 그날을 생각하는지 생글거리다가 네다섯 살 아이와 열여덣 살 때의 노래를 부르고 듣기를 좋아해서 난 그때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 그림을 거실에 걸어주고 싶어요. 난 그림을 본 그 복도와 가을 오후의 시간과 아 진저리 쳐지던 무겁던 마음이 여전히 있기에.. 그림과 별개로 인상파를 듣고 보니 난 안개에 무척 약하다고 느꼈는데 이를테면 안개가 자욱하면 가슴이 저리는 그런거 안개가 전부 슬픔의 육화라고 생각하던거 안개에 대한 노래를 찾고 어쨋든 안개가 무대의 배경인 무진기행을 읽던 그런 습성같은게 있었는데 그럼 나도 인상파인가,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의 마음이 나와 비슷한 면이 있었을까. 안개는 가을안개가 가슴을 가장 젖게하고 겨울지나 봄안개는 새싹들의 꿈속같아 나도 새싹이 되보기도 하는데 그래, 가을안개 자욱한 속에서 보이는 젖은 단풍잎은 처절한 절망의 끝같기도 했어. 그리는 그들은 풀꽃 피는 언덕을 늘 가지고 싶었을거야. 목마르게도 몽마르게도 그런 이들이 모여 있던 언덕이 목마르뜨나 몽마르뜨라고 불리어 졌는지도 몰라. 요즘 어떤 부류들은 몽마르뜨를 유트뷰라는데에 짓거나 거기 얼정대기도 한다는군.
걱정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은 안전하며 아직 혐오범죄는 한건도 없지만, 실체는 한국인들이 오히려 인종차별을 많이 해, 되 돌림 받을까봐 걱정입니다. 흑인을 멸시하고, 멕시칸을 무식하다며 무시하고, 중국인은 짱게라고 놀리고 일본인을 강점기를 상기시키며 괴물보듯 하고, 중동인들은 사기꾼들이라고 경계하니 어느 인종이 좋아하겠습니까 ..... 운동 열심히 하시죠? 평화로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개인 스튜디오에서 대학생들에게 강의도 해주고 사사주며 25년간 미국, 영국, 이태리 명문대들을 장학금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강의도 했고, 전공은 3가지 각기 다른 degree 를 가지고 있으며 1. Performance 2. Pedagogy 3. Historical Performance Practice 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공부중에 선생님 그림까지 있는 것 놀랬습니다. 재미있게 오래전 기억이 나면서 머리에 다시 채운 시간 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인상파 스타일로 그리고 있는데 많이 미숙합니다. 뉴스 전달하시느라 항상 수고가 많으시며 형제, 친구들도 좋아하는 방송입니다. 행복한 주말 되시길 바래요.
오늘도 시작과 마무리를 교수님의 애정어린 강의와 함께~~~
오늘은 덕분에 하루살이인생을 잘~살았어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
하하 저도 하루살이로 매일 붕붕 날고 있습니다. 감사드리며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정 프렌치님 안녕하세요?
나날이 음악의 지식이 더해지고 있네요. 노트를 사서 열심히 필기하면서 영상을 보고 있네요. 제사 사는 뉴질랜드는 겨울이라 비도 자주오고 다운되기 쉬운 계절인데 정 프렌치님의 영상이 좋은 활력소가 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술에도 재능이 있으시고 타고나신 복이 많은분 같아요. 고흐작품보다 색감이나 표현된 얼굴이 저에겐 더 매력적이네요. 10개월간의 노고가 작품에 녹아있는게 보입니다.
정 프렌치님 영상을 알게되고 일상이 점점 업그레이드가 되고 있는것 같아 참 좋습니다. 항상 건강 잘 챙기시고요 감사한 마음 한번 더 전합니다
새로운 영상 방금 올려놓고 막 잠자리로 들려다 답을 안 할 수가 없군요.... ㅎㅎㅎ. 뉴질랜드 방문했을때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고갱이 타히리의 자연스러운 여성들을 그린 그림은 보기보다 색상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한가지 붉은 색을 내기 위해 8가지 이상 색을 섞어야 하고 ....10달만에 그의 테크닉을 알아냈을때의 기쁨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그대로였답니다. 정성이 듬북 들어간 댓글 매우 감사드리며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화이팅! 그럼 꿈나라고 가겠습니다. ㅎㅎ
@@Dr.JungFrench죄송합니다 . 고흐가 아니고 고갱 ㅎㅎ. 감사합니다
@erink991 하하 고갱과 고흐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게 쉽죠. 😁 이미 알고 계신 것 압니다. ❤️🙏🎶
유투브로 인해 이렇게
좋은 이야기 집에서 편히
들을수있어 넘감사해요~~~
👏👏👏👏
꾸벅 꾸벅.... 고맙습니다. 행복의 에너지 듬북 보내드립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그럼요~그럼요
미술과음악은항께하는
영혼이죠
어쩜~이리풀어내시는지요
세포의떨림까지도......
고맙습니다
하하 댓글의 표현이 재미있으시며 무척 creative하신 분 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렇게 귀한 음악강의를 들을수 있어서 행운으로 생각 합니다^^삶의대한 자세와 열정과 노력과 용기가 대단한 분이신것같습니다 큰 박수를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늘 행복하시고, 좋은 일만 많이 많이 생기시길 기원합니다.
답글 주셔서감사합니다 ~^^ 갖고계신 다양한지식과 멋진외모가 어우러져서 너무매력적이십니다. 정말 배울점이많습니다. 요새 도토리님과 사랑에빠졌습니다~~^^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 인상파 정리가 확실히 되네요 ㅎ늘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어서 좋습니다.~^^ 건강조심하시고. 다음 강의도 기대하겠습니다 ~^^
감사드립니다. 늘 긍정적 마인드로 남의 것을 인정 해 주시는 최고 탈렌트 목사님 화이팅!
선생님 안녕하세요 🙇♂️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 참나무 꽃 입니다 🌸
멋진 선생님 좋은밤 되세요 🙇♂️🙏👍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항상 노고가 많으십니다.
가르쳐 주신 인상파 음악가들의 음악들을 하나씩 들어보면서
되새겨 보겠습니다.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뭐든지 적극적인 박사님 감사합니다. 인상파음악은 싫증이 안 난답니다. 행복한 시간 되세요.
인상파 음악 찾다가 처음 들럿습니다
친철하고 박식햐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감사합니다
매우 감사드리며 대 환영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교수님은 너무 늦게 알았어요 ㅠ
지금이라도 감사하네요. 건강 하세요❤
대 환영하며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
Wooow. Very good vidio. Like 17. Thank you.
Thank you for watching !🙏
@@Dr.JungFrench thank you..
선생님 시간만 오면 너무즐겁읍니다 들을수록 점점 더 흥미가 붇는군요
저는 음악공부를 싫어햇던 사람이엇는데
닥터 도토리 깨서 저를 음악에 대해서 깨우쳐 주셨으니 음악 상식과 유머감각도 제가 늘었군요 다음방송 빨리 부탁드립니다 ㅋㅋ
인상파가 무슨음악인지에 대해 너무 잘들엇읍니다
감사합니다. 음악역사처럼 재미난게 없는데, 음대 학생들조차 음악역사를 싫어하고나 골치아파 하는 것은 외우기 위주며 그 필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직 음악에 갇혀 공부를 하기 때문이랍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많이 많이 감사 합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행복한 5월 보내시길 바랍니다.
Very good lighting!
Thanks!
도토리 박사님! 무척 존경하고 감사드립니다. 인상파가 왕성했던 그 시기와 지금이 유사하게 겹쳐지며 너무 슬퍼 눈물이 고였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이 너무 비 상식적이고 부패한데다가 다 방면에서너무 품위가 없어 세상 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선별적이고 아름다운 것들만 뽑아 편파적으로 미화하여 심미적인면만 뽑아 간직하면서 좋아했었습니다. 그 시대상을 박사님 통해 좀 더 알게되니 이 세태와 공통점이 많아 놀라면서 슬퍼진 겁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깊이 감사드립니다. 세상을 바로보는 Daisy Olson 같은 분들이 있어 또 세상이 꾸역꾸역 돌아가죠.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음성이 나긋 나긋 하시네유^^
하하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시대가변화되는것도 음악에따라변화되고 예술에변화도.음악이없는 세상은역사도 없을거같네요.
신비롭습니다.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음악은 처음부터 존재했고 또 영원히 존재 할 것입니다. 자연의 본질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봅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
몇 년에 걸쳐 공부할 내용인데, 엑기스를 뽑아 알기쉽게 설명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갱 그림까지 섭렵하신 박사님, 참 대단하십니다!
음악과 미술은 표현만 다르지, 예술적인 면에서는 동질감이 있나 봅니다.
제자신 얼마나 무식했나 깨닫게 됐습니다.
감동적인 강의 입니다!
멋진 댓글 감사합니다. 많은 음악 전공 학생들이 음악역사를 배우면서 왜곡된 히스토리를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마치 소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불교철학 공부할 때 "관세음"이라는 단어가 무척 멋있었는데요 소리를 관하다. 소리를 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짧은 명화를 감상한 것 같네요.. 자주와서 강의 들으면서 공부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방송을 알게 된 것도 참 행운입니다. 🍀
정말 철학적 멋진 단어며 매우 감사합니다. 소리를 보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지식기부 감사드립니다.
진정되지 않는 COVID19으로 어지러운 날들 잘 이겨내시고 건강하십시오^&^"
님 영상에 주먹 꽉 쥐고 엄지를 하늘로 치켜올리고 갑니다
👍👍👍
하하 감사드립니다. 더욱 좋은 방송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로 하나도 놓칠것이 없는 너무나 알찬 강의 있어요.
2,500 의 음악 역사를 통하여 점점 더 음악의
매력에 빠져 들게 됩니다. 이렇게 멋지고
수준 높은 강의 를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지금까지 배운 강의들 이론적인 지적 인 면에서나
피아노 피아노 연습 시 유익하게 잘 사용하고 있어요.
멋진 댓글 감사드립니다. 제 영상 다 보신 후 최고의 음악 박사가 되실 겁니다. ㅎㅎ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강의 너무 좋습니다.쉽고 폭넓게 핵심적으로 전달해주시고 연주기법까지 설명해주셔서 감탄합니다
음악을 듣다보면 인상파 이후 현대음악은 동시대의 예술 특히 미술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직접 관련이 있는 경우도 있고 아니더라도 음악의 감성과 이미지를 그리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ㅎㅎ 깜짝 놀랬습니다. 제가 다음 강의를 근대음악과 현대음악을 미술과 연관해 준비해야겠구나 하며 미술, 음악, 문학과 연관, 생각하고 있는데 댓글을 받았습니다. 소름...ㅎㅎㅎ 다음 강의 엄청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와..그림도 엄청 잘 그리시는군요!!대단하십니다! 제가 그린 사람 그림은 "옷" ->이 그림인데요ㅎㅎㅎ
저도 그림에 관심이 많이 가서 도슨트 영상를 즐겨듣습니다. 그림 해석, 당시 시대상이 너무도 잘 표현된 보이는 예술이니까요! 이런부분에서 음악은 악보가 없으면 시간예술이라 들을수없다는것이 아쉽네요~
고흐와 슈베르트 인생이 비슷하다고 느끼는건 저뿐일까요ㅎㅎ생전보다 사후에 더 인정받았다는것이 마음아픈날이네요😢
결핍이 때로는 성장시킨다고 믿기에 저에게 가난은 힘들었지만 지금에 제가 있다고 믿습니다! 박사님도 그러실거라 믿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옷을 그릴 정도면 아주 잘 그리는 것이죠 ㅎㅎ 예술과 음악을 바라보는 눈은 거의 같습니다. 의견에 깊이 감사드리며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와.. 인상주의 미술과 음악의 연관성을 알고 싶었는데 진짜 제가 딱 궁금해하고 찾아보던 내용이에요! 감사합니다!
하하 매우 감사드립니다. 음악은 학문이라서 모든 필드와 연결이 된답니다. 그런데 음악, 미술, 역사 전부 따로 각자의 전공에만 치우쳐 가르치니 재미가 있을리가 없죠. ㅎㅎ 행복한 봄날 뵈시길 바랍니다.
안년하세요 멋진분을 만나서 반가워요 음악역사 공부합니다 처음이라 빨간 버튼누르고갑니다
제방에도 놀러오세요 또올게요
감사합니다. 무궁한 발전을 빌며 늘 건강하세요
선생님, 강의 너무 좋아서 열심히 듣고 있어요~ ^^ 감사해요~~그런데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만국 박람회 전에 1874년에 작곡 한 곡이고 친구의 유작 전시회에서 영감받아 작곡 했다고 알고 있어요~
파리 박람회에 가서 감동받고 예술작품을 좋아한, 그리고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편곡한 라벨과 착각한 것을 강의 해놓고 발견, 다시 수정해야지 하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말씀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곧 수정하겠습니다. 꾸벅 꾸벅.
제가 박인환시인의 고장 인제 에삽니다 얼마전 박인환축제때마다 부르는 세월이가면 합창 을 했죠 ㅎ여기에 박인환 박물관있죠 목마와숙녀 마리서사가 있는곳~~
아 ~ 그렇군요. 멋진 시인의 영혼이 있는 곳, 고인도 노래를 들으며 기뻐하고 감사하겠죠? 🙏🙏🙏🎶
종을 댕~ 하고 울리면 파동이 서로 간섭하며 퍼져나가는 모습이 태어나고 죽는 모습 같아서 종은 영혼을 의미하는 걸까요? ^ ^
빛과 물 같이 우리를 둘러싼 재료들을 가지고 미술과 음악, 문학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인상파 시대를 표현했다는게 놀랍네요~
선생님 덕분에 오늘도 교양 충전! =) 잘 봤습니다~
맞습니다. 그리크 시대부터 철학자들은 그것을 메타피직과 연결해 증명하려 했습니다. 소리는 우주와 연결되고, 살아있는 모든 물체는 보이는 형태와 보이지 않는 영혼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진동도 보이지 않는 영혼과 관련시켰죠. 제 인상파 강의를 100% 이해하셨군요. 꾸벅 꾸벅! 행복한 주일 되세요.
교수님의인생철학을 표현할 미술작품활동도 충분할듯/ 고전음악+회화=팔색조파!!
하하 미술은 그냥 취미로 합니다. 감사합니다🙏🙏🙏
고흐와 고갱 특히 말러를 이야기 하시니 알마와 그로피우스 슬픈 삼각관계가 생각납니다
아무튼 참 인상적으로 설명해주세요 그리고 안경이 너무 잘 어울리세요
감사합니다. 말러.... 마음고생 엄청하고 갔죠.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태평양 건너편에서 파저티브 에너지 팡팡 보냅니다 🙏
@@Dr.JungFrench Je vous remercie Madame!
신관웅은 미군부대에 다니면서 명지대 경영학과를 다녔지만 사실 공부를 할 시간도 없이 자나 깨나 연습에 몰두하여 실력을 키웠으므로 수업에 지장이 많아 학교는 건성으로 다녔다. 그러나 집에 피아노가 없으니 연습하고자 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궁리를 짜낸것이 개인레슨이었다. 레슨비를 반으로 깍아주면서 한시간씩 피아노를 빌렸다. 클래식도 그렇지만 재즈도 악보를 보고 치는것과 외워서 치는것은 큰 차이가 있으므로 신관웅은 고집스럽게 꼭 외워서 쳤다. 그래서 그는 가 되었다.
재즈 음반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청계천에서 어렵게 구한 음반은 바늘을 올려 놓으면 그냥 쭈욱 미끄러졌다. 그럴때 마다 낙심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만 오스카 피터슨, 존 콜트레인 등의 음반을 들으면서 즉흥연주를 배울수가 있었다. 처음으로 구한 재즈 음반은 조지 쉐린의 연주였다. 그는 맹인 피아니스트였는데 스타일이 독특해서 라는 재즈용어가 생겨났을 정도였다. 수백번을 반복해서 듣고 음을 하나씩 골라내어 채보를 한 것이 많은 공부가 되었다.
물론 재즈 이론서가 있을리 만무였다. 어쩌다 동료가 필사해서 보관하고 있는 재즈교본을 발견하면 빌려다가 밤새도록 베꼈다. 이런 교본은 재즈 연주자에게 비장의 무기이어서 남에게 빌려주기를 꺼려했으므로 술을 사주고 달래야 겨우 얻어 볼 수가 있었다. 이런 사정은 기술업도 그러하다. 절대로 자기 기술을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나의 기술을 습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까지, 나름 고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에는 공짜점심이 없는 법이다.
이렇게 세월을 보냈으나, 미군부대가 일부 철수를 하면서 클럽도 줄게되어 어쩔 수 없이 미군부대를 나와 색스폰 주자의 빅밴드로 들어갔다. 명동 뉴코리아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매일밤 연주를 했다. 끝나면 밤 11시..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포장마차에 들러 큰 컵에 소주를 따라 훗딱 마시고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이런 생활을 대학 4년 동안 반복했다. 학교친구들은 취직 등 진로문제로 고민했으나 이것은 신관웅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쨌든 학교를 힘들게 졸업한 후 결혼을 했고 비로소 할부로 피아노를 장만할 수가 있었다. 단칸방에 피아노를 들여놓던 날 신관웅은 꿈을 꾸는 듯 황홀했다. 피아노를 치면 주인 집에서는 시끄럽다고 난리를 쳤지만 그래도 기쁘기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먼지를 털고 건반을 닦았다. 이렇게 재즈 음악에 대한 간절함으로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아온 그였다.
당시 알고 지내던 재즈 연주자들끼리 의기투합하여 라는 그룹을 만들고 명동의 오비스 캐빈에서 연주를 했으나 어느날 업주가 피아노를 빼달라는 것이다. 70년대 비틀즈가 유행하면서 전자 악기가 가공되지 않은 순수음을 내는 어쿠스틱(Acoustic) 악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사태가 이러한즉 피아노보다는 전자오르간이 더 인기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아끼고 아끼던 피아노를 팔아 오르간을 장만했다. 가정도 있으니 당장 먹고 살아야 했다. 피아노를 내가던 날, 이거! 내 피아노인데 왜 가져가는 거야!~딸내미가 방바닥에 주저앉아 울음보를 터뜨렸다. 어쩔 수 없었지만 몹시 울적한 날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음악시장에서 재즈 연주자를 둘러싼 상황은 바뀌어만 갔다. 건반 하나면 색소폰에서 바이올린 까지 해결이 되었으니 연주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졌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재즈 연주자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신관웅도 진지하게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했다.
이 땅에서 한국의 대중음악계를 풍미한 유명인은 이봉조, 길옥윤, 김강섭이다. 다행스럽게도 신관웅은 이 분들을 모시는 영광을 누렸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단연 이봉조의 전성시대였다. 미8군에서 색소폰 연주자로 활약했던 그는 대중음악으로 눈을 돌렸다. 그 때는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청춘영화가 영화판을 휩쓸고 있었다. 이 때의 영화음악은 단연 이봉조였다. 또 정훈희와 짝을 이뤄 국제가요제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였고 현미의 유명한 는 그가 만든 곡이었다. 당시 신관웅은 이동기 악단의 피아니스트였다. 매일 밤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술꾼들을 상대로 연주했다. 그때 한 친구가 신관웅에게 에 피아니스트가 없다고 귀뜸해줬다.
봉조클럽은 청계천 3가 센추럴 호텔의 꼭대기 층에 있었고 이봉조씨가 사장이었다. 이 곳에서 일한다는 것은 이봉조씨를 선생님으로 모실 수 있다는 이야기 였다. 며칠 후 봉조 클럽에 찾아갔더니 누군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연주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바로 이봉조씨 였다. 연주를 끝내자 다가가 이봉조씨에게 인사를 하고, 피아니스트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지금은 이동기 악단에 있는데 제가 여기에서 일하고 싶습니다..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자 사람좋은 이봉조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시다면, 스테이지에서 한번 연주를 해봐요! 이봉조씨가 내 연주를 듣고 당장 내일부터 나오라고 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처럼 너무나 뿌듯했다. 다음날 부터 이봉조씨와 일하게 되었다. 다만 봉조클럽에서는 재즈만 고집할 수가 없었으므로 재즈 반, 대중가요 반을 연주했다. 그러나 몇 달 있다가 문을 닫았으므로 다른 클럽을 전전하며 연주를 했다. 이봉조씨와 함께 일한 경력이 붙자 개런티가 꽤 높게 책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게 좋을리가 없었다. 고작 3개월에서 길어야 6개월이면 일이 끝났다. 대부분 새로 문을 열 때 이봉조 악단을 불렀다가 장사가 되면 이내 내보냈다. 그래서 우리끼리 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업소 따까리 였다. 고용불안이라는 것, 막연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머리 더 죽인다 정 프렌치 누나 오늘! 시작~ 예~~~~~~~~~~~
음악을 물론 한국 역사까지 꿰고 있는 누나~~~~ 원래 인상파가 아니다! 그렇죠 보면 어느 이름이나 지명도 그 자리에서 그냥 무심코 부른 것들로 정해지는 것들이 많다! 술과 여자들과 즐기면서 그림을 그리다 죽었다! 후회는 없겟군요 ㅎㅎ 궁상각치우 오랜만에 듣네요! 음계도 동양에서 먼저 나온 것 그렇죠! 결국 인상파 음악은 자장가로 ㅋㅋㅋㅋㅋㅋ 검으 바탕에 검은 옷! 역시 파숀 감각도 최고 누나~~~~~~~~~
하하, 감사합니다. 평화로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악사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술에 취한 손님들이었다. 지금은 재즈클럽에서 연주할 때 손님들이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쳐주지만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재즈 연주자로서 무대 위에서 갖는 외로움은 숙명이었다. 또 하나는 가정생활이었다. 밤 11시 30분에 일이 끝나면 집에 갈 시간이 없었다. 업소에서 새우잠을 자고 새벽에 통금이 풀리면 집으로 갔는데 큰 딸의 백일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새벽 5시에 악단 동료들과 함께 집에 갔더니 온 식구가 밤새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의 평생 소원은 월급 봉투를 한번이라도 받아보는 것이었다. 생활이 점점 힘겹게 느껴질 때 쯤 이봉조씨가 제안을 해왔다.
이봉조씨는 TBC TV 개국과 함께 전속 악단을 이끌고 있었다. 나에게 방송악단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것이었는데, 막상 방송국에 들어가기를 결심하기까지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한달에 한번씩 월급이 나온다는 건 정말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고 방송이라는 미디어도 매혹적이었으나 방송악단이 하는 일은 재즈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마디로 가요반주가 주된 역할이었다. 특유의 매력인 즉흥연주나 재즈 화성은 거리가 멀었다.
방송국에 처음 들어가서 한동안은 모든 것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유명가수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체험이었다. 정훈희, 최희준, 위키리, 한명숙, 현미, 패티김 등이었다. 녹화가 시작되면 서소문의 TBC 스튜디오가 스타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싫증이 났다. 언제나 비슷한 곡을 연주하는 것도 싫었지만 NG는 왜 그렇게 많이 나는지?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녹화하려면 거의 하루종일 진을 빼야 했다. 방송 초창기라 방송 기자재가 완전할 리가 없었다. 연기자가 아닌 가수들도 문제였다.
다양한 변주를 하다가 정해진 악보에 따라, 그것도 같은 곡을 몇십번씩 연주를 하다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떻든 스트레스를 풀어야 했다. 그래서 무교동의 스타더스트나 내자호텔 나이트클럽처럼 재즈만 전문으로 하는 곳에 즐겨 출연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점점 어려워졌다. 나이트클럽 자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70년대 중반에 등장한 고고 클럽들이 밤풍속을 바꾸어가고 있었고 낭만이 넘치던 재즈보다 빠르고 시끄러운 음악이 대접받았다. 당시 재즈인이 걸었던 길은 두 가지였다. 이민 바람을 타고 너도 나도 미국으로 건너가거나 아니면 카바레나 요정의 악사가 되는 것이었다.
어느새 돌아보니 주위에 남아있는 동료가 별로 없었다. 바로 그때 드럼을 치던 유영수를 만나게 됐다. 방송국에 들어가기 전 에서 함께 연주했었던 친구였다. 그가 박성현씨가 운영하는 라는 재즈클럽이 문을 열었는데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당시 는 신촌시장 골목의 허름한 건물 2층에 고작 10평이 될까 말까 했다. 그래도 재즈음반이나 자료가 꽤 많았고 고물이지만 피아노도 한대 있었다. 그곳에서 박성현씨와 인사를 했다.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미 8군에서 활동할 때부터 재즈계에 소문이 자자했던 여가수였다. 나이도 나와 비슷했다.
우리는 의기투합해 밴드를 하나 만들었다. 색소폰의 김수열, 베이스의 이판근, 보컬의 박성현, 피아노는 신관웅..재즈 전용공간이 마련됐으니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하기로 했다. 매달 첫째 주 일요일이면 야누스 정기연주회를 열었다. 초창기 야누스의 손님은 연주회가 있건 없건 대부분 재즈 애호가였다. 우리가 연주회를 열기 시작하자 옛날 함께 일했던 이들이 하나 둘 씩 찾아왔다. 그들은 재즈를 포기하고 술집 악사로 전락해 있었지만 가슴 속의 열정만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식구들만 모이니 장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연주회라고 해봐야 손님이 10명 남짓했고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연주자의 개런티는 성의표시 정도였다. 악기나 음향설비도 열악했다. 나는 조율기계를 가지고 다녔다. 조율사를 부를 여유가 없었으므로 급한 대로 내가 알아서 피아노 조율을 했다. 그래도 마음은 늘 행복했다. 곡이 끝날 때마다 받는 박수도 황홀했고 옛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된 것도 꿈만 같았다. 게다가 점점 입소문이 퍼지면서 야누스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졌다. 2, 3년 지났을 때는 10평 공간에 100명이 넘는 관객이 들어찰 정도로 성황이었다. 야누스에서 재즈는 술맛을 돋우는 배경음악이 아닌, 진지하게 감상하는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음악세계로 들어가면 장르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만큼 총총하다..미술은 안 그런가? 마음을 열고 보면 다시 보이는 세상은 황홀하다. 사람들은 대중 음악가를 딴따라로 부르고 천시하지만 신관웅 선생은 한눈을 팔지않고 음악, 그것도 평생 재즈의 길 만을 올곧게 걸어온 진정한 재즈 연주자다. 생각해보면 예술가 이전에 이 분들도 생활인이다. 그 점에서는 조금도 우리와 다를게 없다. 기예(伎藝)를 평생 갈고 닦는것ㅡ영광보다는 외로움과 고독이 자리할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히 자기의 길을 걸어온 신관웅 선생을 딴따라로 부르고 천시하는 사람이야 말로 선생만큼 평생을 바쳐 한 분야에 치열하게 노력을 해 보았나? 묻고 싶다. 모든게 열악한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게 얼마나 힘든 가시밭길 인가!
세상에는 돈과 권력, 명예가 아닌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통키타 가수 밥 딜런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덧붙여 매주 일요일 낙원동에 가면 째즈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종로3가역 6번출구 악기상가앞 010-9337-5546
우리나라 재즈 1 세대 선생님을 들자면,
피아노..신관웅
드럼..임헌수
트럼펫..최선배
섹소폰..김수열
보컬..김준
1세대 선생님들과 늘 함께하시는 베이스 전성식이 있다. Bravo !
안녕하세요, 평소 알고 싶던 클래식 지식을 쉽게 풀이해주신 여러 영상을 잘 시청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대학강의 교양수업 시간에, 인상파 동영상 자료를 학생들과 함께 시청해도 될지 여쭤보려고 합니다. 마침 제가 인상주의 회화작품에 관하여 수업하고 있습니다. 좋은 수업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당연히 환영하며 감사드립니다. 🙏가르침에 열정적인 스승에 학생들도 매우 흐믓해 할 것이며 존경 받으시겠습니다. 🎶
@@Dr.JungFrench 이렇게 회화와 음악 장르를 횡단하며 멋진 수업을 보여주셔서 저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우연히 방문해서 찐팬이된지 한 달도 안됬어요
아침 눈틀때
커피마실때
화장할때 잠자리들때...
정 프렌치교수님의 맛깔나는 클래식수다에
푸욱 빠져지냅니다
인상주의음악이 궁금하던차에 구글에서도 잘찾지못해 2% 부족했었는데
기막힌 자료를통해 귀에쏙쏙~!!!!!
저의 클라식세계에 놀이판을 지대루 깔아주시네요
정말 교수님의 삶과 인생을 닮고싶은 일인입니다~!!!!!
멋진 댓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으시고 자신을 위해 노력, 공부하시는 아름다운 루나님은 많은 분에게 사랑을 받으실 겁니다. 성탄의 달, 축복 많이 받으시고 더욱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가야병원 복도 벽에는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이 있었어요. 환한
어느 날 아이와 같이 풀꽃언덕에 서 있는 여인. 그녀의 마음은 흰구름처럼 가벼웠고 풀꽃처럼 연하고 바람처럼 맑았습니다. 그런 날이 있었지요.
환자들은 그녀가 가장 아름다윘던 날을 그리며 그림을 보았겠습니다. 귀여운 아이와 거닐던 시간을 생각하며 혹은 환자 그녀가 아이일때 엄마따라 다니던 날이 되기도 했겠어요.
그림에는 환자 그녀들의 망막에 찍힌 날이
그렇게 하고싶은 날이 환영처럼 걸려 있었어요.
어둠이 숯가루처럼 내리는데
저 아래서 저 깊은 곳에서
가야, 가야, 부르며 우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가을물보다 슬프고
차가운 울음이었어요.
가야가
떠나갔나 봐요.
난 그날 가가 들어난 이름은 거의 슬퍼 보이고 약해 보여요. 라고 생각했어요.
가실이 가련이 가야.
무거운 소식으로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 누나를 문병하던 가야병원의 그날
누나는 퇴원해도 여전히 무거운데 가끔은 다섯살 아이가 되고싶은지
엄마따라 풀꽃언덕에 가고싶은지 그날을 생각하는지 생글거리다가 네다섯 살 아이와 열여덣 살 때의 노래를 부르고 듣기를 좋아해서
난 그때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 그림을 거실에 걸어주고 싶어요.
난 그림을 본 그 복도와 가을 오후의 시간과 아 진저리 쳐지던 무겁던 마음이 여전히 있기에..
그림과 별개로 인상파를 듣고 보니 난 안개에 무척 약하다고 느꼈는데
이를테면 안개가 자욱하면 가슴이 저리는 그런거 안개가 전부 슬픔의 육화라고 생각하던거 안개에 대한 노래를 찾고
어쨋든 안개가 무대의 배경인 무진기행을 읽던 그런 습성같은게 있었는데 그럼 나도 인상파인가,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의 마음이 나와 비슷한 면이 있었을까.
안개는 가을안개가 가슴을 가장 젖게하고 겨울지나 봄안개는 새싹들의 꿈속같아 나도 새싹이 되보기도 하는데 그래,
가을안개 자욱한 속에서 보이는 젖은 단풍잎은 처절한 절망의 끝같기도 했어.
그리는 그들은 풀꽃 피는 언덕을 늘 가지고 싶었을거야. 목마르게도 몽마르게도
그런 이들이 모여 있던 언덕이 목마르뜨나 몽마르뜨라고 불리어 졌는지도 몰라.
요즘 어떤 부류들은 몽마르뜨를 유트뷰라는데에 짓거나 거기 얼정대기도 한다는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댓글 잘 읽었습니다. 인상파의 안개속엔 김봄님 처럼 가슴 저미는 추억, 아련한 미래, 잡을 수 없는 시간들 속의 그리움들이 빛을 바란채 저희들 마음속에 영원히 담겨져 있죠. 감사합니다.
요즘 미국내 아시아계 혐오범죄가 심해져서 선생님이 걱정이 되네요..
걱정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은 안전하며 아직 혐오범죄는 한건도 없지만, 실체는 한국인들이 오히려 인종차별을 많이 해, 되 돌림 받을까봐 걱정입니다. 흑인을 멸시하고, 멕시칸을 무식하다며 무시하고, 중국인은 짱게라고 놀리고 일본인을 강점기를 상기시키며 괴물보듯 하고, 중동인들은 사기꾼들이라고 경계하니 어느 인종이 좋아하겠습니까 ..... 운동 열심히 하시죠? 평화로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꽃샘추위..디지게 춥네야ㅡ불알도 얼엇스리~딸랑~딸랑~먹통이로세ㅡ
교수이신가요
일반인 이라면 엄청난 내공을 같고 있네요.
깊이 감사드립니다. 개인 스튜디오에서 대학생들에게 강의도 해주고 사사주며 25년간 미국, 영국, 이태리 명문대들을 장학금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강의도 했고, 전공은 3가지 각기 다른 degree 를 가지고 있으며 1. Performance 2. Pedagogy 3. Historical Performance Practice 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미술사와 음악사는 톱니바퀴 처럼
열차 레일처럼. DNA 이중나선 처럼. 대칭형 도형 처럼. 정치와 경제 처럼. 남녀 한쌍 처럼. 야구경기에서 투수와 포수 처럼..
하하 재미난 표현, 맞습니다. 행복한 10 월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