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제가 항상보는 원탑 유튜브 영상 시리즈 중에 토전사랑 순삭밀톡있는데 둘다 교수님이 계셔서 그런것 같습니다 물론 샤를세환님과 허준씨 아나님과의 케미가 좋은 토전사를 제일 좋아하고 매일 잘때 틀어놓고 자지만 교수님이 계신 순삭밀톡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교수님 유튜브도 자주보고요 너무 감사합니다
아마도 왜성과 같은 전문적인 기술과 복잡한 축성에 관한 이해도가 높아야하는 구조를 지방까지 커리큘럼화시켜 도입하는데 실패한 것이 아닐까요? 조선은 엄연한 '중앙행정국가'에다 확장이 아닌 '내치' 위주로 놀아가는 나라이다보니 제도적으로 완전히 뒤엎을 만한 개혁에는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당연히 스스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부분이 컸습니다.
우리나라 산성은 인근의 모든 사람들을 모아서 보호하는 것이 주된 용도라서 그런듯 그래서 산 정상부나 계곡부를 전부 둘러서 식수가 확보된 넓은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거고요 다만 삼국시대 산성들 특히 백제 신라 국경이었던 지역의 산성터 가보면 백성들의 수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구조의 성들이 대부분입니다. 백제시대 산성들 보면 교통로 바로 옆 낮은 구릉같은 곳 정상부에 쌓은 경우가 많은데 단순히 타원형의 구조가 아니고 반드시 적어도 장대와 외성벽 등이 어루러져 삼중의 성벽 구조를 보여줍니다. 당연히 일본성보다 원시적이긴 하지만 지형을 기가 막히게 잘 이용해서 성내 구역이 분리되어 있는 구조를 상당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외적과의 전쟁이 잦았고 내란은 비교적 적었거나 금방 진압되었죠. 고려 광종대부터 과거제 실시와 기존 호족 집단 및 개국 공신과 통일 공신을 대거 숙청하면서 호적 난립 시대를 견제했습니다. 그리고 성종대에서 현종대에 이르면 지방 행정이 정립되면서 본격 유학 통치 시대가 됩니다. 고려와 조선조에도 기강 해이로 민란이나 군란 등이 일어나긴 했지만 전국 곳곳에서 각자 자기 세력으로 난립하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영주 같은 존재는 없었다는 거죠. 그나마 이성계 같은 군벌 정도는 있었지만 자신이 천하를 거머쥐겠다는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역적 취급받아 공공의 적이 되어버리죠. 그리고 조선은 사대외교를 통해서 중국과 원만히 지내고자 한 터였고 일본 여진 간의 관계도 개선되면서 오랫동안 평화에 젖어있었습니다. 전쟁하지 않는데 산성을 높게 기기묘묘하게 쌓을 필요가 없었죠. 게다가 조선은 가난해서 그만한 비용을 충당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성리학적 사고에 입각해 백성들을 너무 고단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있었구요.
@@j8663 자기들을 번번히 깨뜨리는 이순신을 일본은 무슨 고질라 같은 괴수마냥 귀신취급을 하면서 ㅂㄷㅂㄷ거렸지만 우짜든동 교훈을 얻어서 다른 데 써먹긴 써먹었는데 일본을 석권하고 침공해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우리나라에선 쥐새끼에 비유해 교활한거고 나쁜놈인 거다 라고 분석하고 '그러니 나쁘면서 센 놈인거지 대단하거나 무서운 인물인게 아니다' 라는 이른바 '구름에서 지면으로 끌어내리기' 를 해서 멘탈을 잡아 구전한게 아쉬움. 이러면 모랄빵(?)에는 강해질지언정 뭘 얻어갈 기회는 줄어드는데.
왜성은 백성까지 보호할 수 있는 성이 아닙니다. 전국시대 농민들은 자산의 개념이었기 때문에 공격하는 측도 죽이지 않았죠.. 그래서 수비하는 측에서 보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성은 군인들만 보호하도록 만들었기에 수비하기에는 좋지만 규모가 작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는 군대와 함께 백성도 보호해야 했습니다 외적이 백성이라고 그냥 봐주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 자연적으로 크게 만들었고 상대적으로 수비는 허술해졌죠 진주성같은 경우 6만명도 수용했습니다 왜성과는 목적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참고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넓고 크게 만들어야 하는데 미로같은 구조를 만들기는 어려웠겠죠 그런 사회,정치적이 차이때문이지 조선이 성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조선이 산성방어체계를 포기햏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산성방어체계가 붕괴된 것은 고려 무신집권기의 문란으로 전시과가 무력화되면서 군반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협력방어체계가 무너졌고 고려시대 거란 여진전쟁에서 힘을 발휘하던 고려군은 유명무실화되고 무신들의 개인사병이 중앙군을 압도하게 됩니다. 물론 이들은 몽골군과의 전쟁에서 동원되지 않고 강화도에서 경비나서며 잔치나 하다가 몽골군이 물러가면 슬금슬금 육지로 기어나가 세금이나 뜯어갔죠. 원간섭기를 지나며 고려가 군대을 복구하는걸 이래저래 견제하던 원때문에 역시 이전의 산성방어체계는 복구되지 않았고 그래서 홍건적이나 나하추 왜구들과의 전투를 보면 야전에서 요격하여 승전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특히 이성계의 사병집단이 강력했고 전국토를 누비며 야전에서 온갖 적을 상대했던 이성계는 자신의 경험때문인지 산성에 박혀 방어하는 식의 수세적 전략을 탐탁치 않아했습니다. 태종인지 태조인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신하들이 성을 쌓아 적을 방어해야한다고 건의하자 적이 쳐들어오면 나가 맞서 싸울 일이지 성에 틀어박혀서야 되겠느냐고 반박할 정도로 조선초기 조선의 군사적 자신감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중앙집권에 매우 신경쓰던 나라라 지방민 통제에 유리한 읍성을 선호하는 경향 또한 있었고 이런 요소들이 결합하여 조선이 산성방어체계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생겨납니다.
왜성 복원해서 임진왜란 박물관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어떻게 일본이 이땅에 성을 짓고 약탈을 일삼았는지,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당했으며 어떻게 지켜냈는지... 이러한 것들을 왜성 복원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렸으면 좋겠다. 창원시와 국방부가 협력해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곳으로 왜성을 만들어주세요.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고 그러한 역사 인식이 있어야 반복되지않고 더 번영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왜성은 일본 내부의 투쟁역사 200년이 그대로 적용된 성이었지요. 그들의 군대도 마찬가지였지만 성곽 또한 그런 전쟁 경험이 그대로 다 들어가있었고 이에 대한 허심탄회한 고평가는 우리 기록에도 나옵니다. 강항록 같은 포로 회고록에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구요. 단점이 있다하면 포격전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건데 우리 성의 장점과 일본성의 장점들 그리고 단점에 대한 피드백을 통해 더 좋은 성을 쌓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포격 앞에서는 성벽은 장사가 없지 않나요? 그래서 수원화성도 오히려 성벽 높이가 낮아진 것이고요. 그리고 일본 성의 장점이 각 공간의 분할과 격리인데 이걸 적용하려면 성 안에 들어가서 농성하는 인원을 최소화시켜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에서 성벽이란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데 이러한 일본 성의 구조는 조선과는 맞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서생포진성이나 부산진성과 같이 왜성의 둘레만 둘러 조선식 성곽으로 개축하는 데서 그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커싄 울산성 전투당시 명군 위주로 각종 화포를 동원했는데도 공성엔 실패했지요. 사실 당시 동아시아 수준에서 운용되던 화포 수준이라면 크게 염려할 수준은 아닌거 같습니다. 게다가 서구의 성형요새같이 본격적인 포탄 방호를 위해 설계된 요새가 아니라 하더라도 생각보다 구형성곽도 포격전에서 그냥저냥 괜찮은 방호력을 보여주고 하기도 하더군요.
그러게요 당시 조선남성이 150후반에서 160초반 이 평균키 였을텐데 그럼 80cm 전후일듯한테 160m가 잘못 표기 된게 아닐까싶네요 요즘의 자동소총도 유효사거리는 350~600m 내외고(최대 사거리는 1km넘기도 하던데) 강선조차 없던 그 시절 화승총이 사거리가 600m가 나올 수 있을지
1보가 보통 70센치 60센치 그 정도 볼겁니다 200보가 600미터라는 계산은 틀렸지만 저 당시 600미터 이상 날아가는 조총을 일본이 보유한건 사실 입니다 심지어 서양의 후장식(뒤로장전) 화포 불량기포 까지도 소수 보유하고 있었죠 조선 천자총통에 대장군전 (34키로 그램) 넣고 발사하면 그게 최대 1.4키로 미터 까지 날아간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일본이 보유한 대구경 조총에 철환을 넣으면 600미터 충분히 날릴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효 사거리 100미터도 안되는 그런 조총이 아니라 대구경 조총이 있죠 부산포 해전때 육지에서 쏜 그런 조총에 정운 장군이 전사했죠 일반 소구경 조총은 육지에서 배에 타격을 못 줍니다 배가 육지에 바짝 붙어 다니는게 아니거든요
우리나라 산성이 단순히 둘레만 큰 구조는 아니구요 일본성 못지 않게 구획이 나뉜 구조의 산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전 성북동산성은 최소 4겹 이상의 층구조이고 대전 안산동산성 청양 두릉윤성 논산 외성리산성 등등은 삼중구조 인데 이러한 백제시대 산성들은 둘레는 조선시대보다 대체로 작고 높이도 낮지만 반드시 외성과 가장 높은 곳에 장대를 지어 결국 이중 삼중의 구역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종시 정부청사 뒷편에 있는 진의리토성은 통통한 불가사리 모양인데 구역이 다섯 군데 이상 나뉘어 있고 차단벽과 좁은 통로를 막은 문지등이 있어서 이는 일본 성들처럼 전투원들만을 위한 성임을 알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일본성이 백제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일본의 조선식산성을 백제인들이 감독하여 쌓은것은 맞지만 후에 전국시대 일본성과는 백제시대가 시기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으므로 ) 환경과 상황에 따라 우리나라 산성도 매우 다양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근데 이게 면적이나 위치 보니까 전략 방어 거점이라기 보다는 그냥 병참부대 주둔지 같은데. 지도만 보면 짓기 훨씬 전략적인 곳이 있는것 같은데 왜 저기 지었지? 곶 북쪽이 제일 그럴싸 하고 내륙쪽 막으려면 평탄한 항구위치 중간에 위치한, 현재 위치 왜성의 동북쪽에 제법 높고 면적 있는 야산도 있는데.. 기껏 해야 수용 규모는 천명? 보급 보관도 많이는 못할거 같은데? 규모 저정도 성이면 굳이 안싸우고 1.2배병력으로 빙 둘러서 토성 쌓고 포위만 해도. 금방 떨굴거 같은데? 우물이 있는것도 아니고... 물은 위치가 왜 저런지 궁금하네. 침략군에게만 중요한 성인거 같은데.
왜 한단계 더 못 갔을지 짐작 하는 바는 타 국가는 패전이든 승전이든 국 민을 위로 하는 과정과 자긍심을 키우고 그북돋는 과정을 통해서 국민의 커진 의지를 바탕으로 극복하는 과정이 진행 되나 우리나라는 끝났으니 됐지 안나 공무원 표창 몇개 나가고 정치인 사진 몇장 찍고 힘내세요 빠이빠이 하고 마니 저 어려운 성을 시간 돈 노동 들여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는 것 같다. 국민을 설득하고 보상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 못하는데 더 하겠는가? 국민입장에서는 누구 좋으라고 일하나 싶은거다.
교수님 왜놈들은 영주와 군사만을 보호하는 축성이고 조선은 단순히 군주만을 위한 축성이 아니었습니다. 왜놈들은 오로지 영주보호에 전념을 다했다면 조선은 군주와 백성보호에 좀더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이념의 차이인데 왜는 병법이 그들의 안보체계였다면 조선은 민본주의에 중점을 둔 안보체계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어릴적 학교에서 어떤 선생님이 조선이 아둔하고 무식해서 일본에게 계속 당한거라고 말했던게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당시는 어려서 이해를 못했는데 정말 열받고 화가납니다. 지금 세상이야 평화롭게 지내면서 서로 윈윈하는게 최선이라고 하지만 그 옛날엔 감정문제나 자원문제로 전쟁을 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나라를 지키는 국민과 훌륭한 인재들이 많았다는 것을 지금 학생들에게도 꼭 강조하고 가르치는 학교이기를 바랍니다. 저때는 진짜 우리를 그렇게 깎아내리면서 중국이나 일본역사를 우위인 것처럼 말하는 선생님들이 있었다는게 너무나 화가나고 충격적입니다.
믿고보는 순삭밀톡.
불금만큼 기다려집니다.
정말 대단한 프로그램입니다. 교수님 덕분에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가르칠 수 있겠네요! 왜성에 벗꽃 구경히러 다녔는데 왜성은 너무 성벽이 낮다고 웃었는데,,, 이것을 보면서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중국이나 한국의 성채는 성벽을 높이 세워 공간의 완전한 단절로 일체의 침입도 거부한다는 전략을 채용하는 반면 왜성은 병력의 분리와 연속적인 단절로 소모를 강요해 공격군의 공세역량을 소진시켜 후퇴시키는 전략을 택합니다.
이제야 이런 훌륭한 영상을 보네요.
마지막 말씀 백번맞는말인듯 역사뿐만아닌 인생의 교훈으로 삼아도 부족하지않을 말씀이다
교수님 제가 항상보는 원탑 유튜브 영상 시리즈 중에 토전사랑 순삭밀톡있는데 둘다 교수님이 계셔서 그런것 같습니다 물론 샤를세환님과 허준씨 아나님과의 케미가 좋은 토전사를 제일 좋아하고 매일 잘때 틀어놓고 자지만 교수님이 계신 순삭밀톡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교수님 유튜브도 자주보고요 너무 감사합니다
안골포 해전의 일본측 기록을 보면 조선군의 장군전 운용법에 대한 단서를 찾을수 있는데 조선수군이 3~5간까지 접근하여 장군전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막연히 편견으로 가지고있던 원거리에서 포격이 아니라 초근거리에서 화포를 운용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매회마다 교훈을 배우고 갑니다
언제나 유익한 신비로운 성 이야기네요
교수님 너무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총평이 멋진, 임용한 박사 센세~~
다시 영상을 보니 문득 느낀건데요.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이란 100년동안 진짜 지옥도를 경험하듯이 전쟁했던 경험이 있고 그 경험으로 만든게 왜성이니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 같네요. 그런 상대가 만들었다면 분명 참고했었어야 했지 않나라는 생각이 문득듭니다.
아마도 왜성과 같은 전문적인 기술과 복잡한 축성에 관한 이해도가 높아야하는 구조를 지방까지 커리큘럼화시켜 도입하는데 실패한 것이 아닐까요?
조선은 엄연한 '중앙행정국가'에다 확장이 아닌 '내치' 위주로 놀아가는 나라이다보니 제도적으로 완전히 뒤엎을 만한 개혁에는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당연히 스스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부분이 컸습니다.
과거의 굴곡을 지을 수는 없다. 더 좋게 이용해야한다. 가슴에 와 닿네요 ㅠㅠ
근데 지금 나라 꼬라지 보면 음...
@@쁍삡 토착왜구들 때문에 나라가 망해가고 있음
@@조성빈-k7p 글쎄요 성향이 어느쪽이건 극단적인 논리를 펼치는게 위험한거 아닐까요...
잘 봤습니다.
박사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
박사님 연륜이 묻어나는 마무리 멘트네요
일본 성 구조를 보면 마치 디펜스게임을 하는듯한 느낌입니다
우린 왜 저렇게 못지었는지 아쉽네요
삼년산성잇잔아요
조선도 그렇게 하려면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습니다.
100년동안 서로 죽이고 죽이며 피지배층들을 한계까지 쥐어 짰으면요.
우리나라 산성은 인근의 모든 사람들을 모아서 보호하는 것이 주된 용도라서 그런듯 그래서 산 정상부나 계곡부를 전부 둘러서 식수가 확보된 넓은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거고요
다만 삼국시대 산성들 특히 백제 신라 국경이었던 지역의 산성터 가보면 백성들의 수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구조의 성들이 대부분입니다. 백제시대 산성들 보면 교통로 바로 옆 낮은 구릉같은 곳 정상부에 쌓은 경우가 많은데 단순히 타원형의 구조가 아니고 반드시 적어도 장대와 외성벽 등이 어루러져 삼중의 성벽 구조를 보여줍니다. 당연히 일본성보다 원시적이긴 하지만 지형을 기가 막히게 잘 이용해서 성내 구역이 분리되어 있는 구조를 상당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외적과의 전쟁이 잦았고 내란은 비교적 적었거나 금방 진압되었죠. 고려 광종대부터 과거제 실시와 기존 호족 집단 및 개국 공신과 통일 공신을 대거 숙청하면서 호적 난립 시대를 견제했습니다. 그리고 성종대에서 현종대에 이르면 지방 행정이 정립되면서 본격 유학 통치 시대가 됩니다. 고려와 조선조에도 기강 해이로 민란이나 군란 등이 일어나긴 했지만 전국 곳곳에서 각자 자기 세력으로 난립하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영주 같은 존재는 없었다는 거죠. 그나마 이성계 같은 군벌 정도는 있었지만 자신이 천하를 거머쥐겠다는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역적 취급받아 공공의 적이 되어버리죠. 그리고 조선은 사대외교를 통해서 중국과 원만히 지내고자 한 터였고 일본 여진 간의 관계도 개선되면서 오랫동안 평화에 젖어있었습니다. 전쟁하지 않는데 산성을 높게 기기묘묘하게 쌓을 필요가 없었죠. 게다가 조선은 가난해서 그만한 비용을 충당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성리학적 사고에 입각해 백성들을 너무 고단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있었구요.
@@Gilgamesh2013 누가보면 조선은 일반백성을 위한 나라인줄알겠네요 그당시 일본 빈민층이 조선빈민층보다 최소 5배는 잘먹고 살았습니다
아 임용한 박사님 마지막 말씀이 너무 와닿는군요.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 옛날 이순신 장군님은 판옥선 컨트롤이 정말 대단하셨군요. 한 대 깨고 튀고 한 대 깨고 튀고. 대단하심 ㄷㄷ
교수님..분석 Best of the best 입니다...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말라가시는 박사님
의문의 다이어트
기억하기 싫어도 장점을 취득해서 지금의 행복에 이용하자라는말씀.좋은 말씀 이십니다^^ 현장에 직접 가서 현장답사 하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일본의치밀함은 적이지만 정말 배워서 저들을 꺾어야함.
욕할 줄만 알았지 발전 시키지 못해 재차 침략당하는게 지금도 마찬가지 인것이 아쉽네요
싸움은 적에게서 배운다고
일본이 진주만 기습 한것도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의 부산포 해전을 따라 한거고
이스라엘도 중동전쟁 때 써 먹은 전술이 독일의 전격전 이었구요
미국은 진주만 기습 이후로 항공모함을 끌고 다니구요
근데 한국만 너무 감정만 앞서 나가는거 같네여
@@j8663 자기들을 번번히 깨뜨리는 이순신을 일본은 무슨 고질라 같은 괴수마냥 귀신취급을 하면서 ㅂㄷㅂㄷ거렸지만 우짜든동 교훈을 얻어서 다른 데 써먹긴 써먹었는데
일본을 석권하고 침공해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우리나라에선 쥐새끼에 비유해 교활한거고 나쁜놈인 거다 라고 분석하고 '그러니 나쁘면서 센 놈인거지 대단하거나 무서운 인물인게 아니다' 라는 이른바 '구름에서 지면으로 끌어내리기' 를 해서 멘탈을 잡아 구전한게 아쉬움. 이러면 모랄빵(?)에는 강해질지언정 뭘 얻어갈 기회는 줄어드는데.
감정만 앞서서 글렀음
일본의 치밀했다기 보단 문종이후로 군사력 및 군용 무기 개발 자체도 거의 없었고 붕당 정치로 지들끼리 싸우느라 외세의 침략에 무기력했던걸 보면 그냥 조선이라는 나라의 태생적 문제가 더 컸다고 생각이 드네여
캄사합니다!!!!^^
전후 복구 때문에 군사시설 확충+보강이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렸을 가능성이 크겠네요. 어마어마한 인적손실에 황폐화된 농경지, 부족한 재정 등... 기초체력이 부실해진 상태에서 두번의 호란은 정말 막막했겠습니다.
역사는 다양한 시점과 가치관을 담은 거울이라는 결론 좋습니다.
방송에 대한 의견 한마디 하겠습니다 이왕이면 더 사실적으로 보이게 교수님이 설명한 성의 구조나 형태등을 cg로 약간 표현해주는것도 더 사실적이고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드는데 제작진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지는지??
종박8520 국방티비 돈없어요 ㅠ 토전사도 흰방에서 의자 4개놓고 촬영하고 본게임도 의자세게 탁상 하나로 촬영하고 답사도 시청자 모금 받아서 촬영가고 ㅠ ㅠ
예산 부족요
나라에서 좀 더 자원해줬으면 ㅠㅠ
엌ㅋㅋㅋ 캐슬어택이다 이거덕분에 오늘 하루 너무 신이난다
이순신 장군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안타까우면서 아쉬웠을 것 같습니다 눈 앞의 적이 있는데도 쉽게 칠 여건이 안 되었을테니까요 들으면 들을수록 아쉽네요
그동안 왜성구조설명할때 손으로만 가리켜서 설명듣다보니 좀 두루뭉술했는데 드론과 수목에 안가려진 곳에서 설명듣다보니 훨씨 더 이해가 수월해서 좋네요^^7
국방티비에서 이게 제일 흥미로워 ㅋㅋㅋ 나중에 일본 중국 성도 탐방 가셔야죵!
안골왜성은 몰랐는데 이번에 알았습니다~~~
병자 호란은 성내 예비 물자가 부실하고, 잘 훈련된 정예 구원병이 없으면 농성전에 준비된 적에게는 성 자체가 필요 없다는 전훈을 주었죠.
역시나 이순신장군님
왜성은 백성까지 보호할 수 있는 성이 아닙니다.
전국시대 농민들은 자산의 개념이었기 때문에 공격하는 측도 죽이지 않았죠.. 그래서 수비하는 측에서 보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성은 군인들만 보호하도록 만들었기에 수비하기에는 좋지만 규모가 작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는 군대와 함께 백성도 보호해야 했습니다
외적이 백성이라고 그냥 봐주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 자연적으로 크게 만들었고 상대적으로 수비는 허술해졌죠
진주성같은 경우 6만명도 수용했습니다
왜성과는 목적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참고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넓고 크게 만들어야 하는데 미로같은 구조를 만들기는 어려웠겠죠
그런 사회,정치적이 차이때문이지 조선이 성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교수님 설명하시니 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이 가네요 잘들었습니다
흐.... 이 더운 날씨에 등산이라니!!! 교수님은 즐거워하시는거 같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작진:드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ㅠㅠ)
예산 이런데다 안쓰고 뭐하나 싶다. 이렇게 좋은 교양 컨텐츠가 어딨나,,,
저러넘들에게 전승을 올린 이순신장군은 대단함.
조선이 산성방어체계를 포기햏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산성방어체계가 붕괴된 것은 고려 무신집권기의 문란으로 전시과가 무력화되면서 군반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협력방어체계가 무너졌고 고려시대 거란 여진전쟁에서 힘을 발휘하던 고려군은 유명무실화되고 무신들의 개인사병이 중앙군을 압도하게 됩니다. 물론 이들은 몽골군과의 전쟁에서 동원되지 않고 강화도에서 경비나서며 잔치나 하다가 몽골군이 물러가면 슬금슬금 육지로 기어나가 세금이나 뜯어갔죠.
원간섭기를 지나며 고려가 군대을 복구하는걸 이래저래 견제하던 원때문에 역시 이전의 산성방어체계는 복구되지 않았고 그래서 홍건적이나 나하추 왜구들과의 전투를 보면 야전에서 요격하여 승전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특히 이성계의 사병집단이 강력했고 전국토를 누비며 야전에서 온갖 적을 상대했던 이성계는 자신의 경험때문인지 산성에 박혀 방어하는 식의 수세적 전략을 탐탁치 않아했습니다.
태종인지 태조인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신하들이 성을 쌓아 적을 방어해야한다고 건의하자
적이 쳐들어오면 나가 맞서 싸울 일이지 성에 틀어박혀서야 되겠느냐고 반박할 정도로 조선초기 조선의 군사적 자신감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중앙집권에 매우 신경쓰던 나라라 지방민 통제에 유리한 읍성을 선호하는 경향 또한 있었고 이런 요소들이 결합하여 조선이 산성방어체계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생겨납니다.
역사는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끄러운 것일지라도...
입구가 좌측으로 휜 이유는 왼손에 든 방패를 무용지물이 되게 하려는 의도이죠. 우측엔 칼이나 창 화살을 들고 있었을테니 말이죠
박사님 다이어트 성공각인가?
오오ㆍ오 안골이네
일본의 축성술도 그렇지만 이순신장군의 정교한 해전전술도 임진왜란이후에도 계속 이어질수 있도록 노력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 특히 우리해역에서 딱 맞아떨어진 전술이라 계속 발전시켜왔다면 현대에도 도움이 될만큼 좋았을거같은데..
조선군 승리포즈 ㅋㅋㅋ 재밌어요!!!!
마지막 총평 너무 좋네요. 캐슬어택 늘 좋은 정보가 가득해서 최곱니다
그.. 명언 할때요
" ... 안좋은 과거는 잊고 현재의 행운으로 바꾸도록 노력하자. "
이게 아니라
" 안좋은 과거도 잊지말고 그것을 토대로 현재의 행운으로 바꾸도록 노력하자. "
가 임용한 박사님이 하시는 말씀 아닌가요?
잊으면 왜성을 활용못한 조선이랑 같아지는데오....ㅇㅅㅇ
양주 대모산성도 부탁드려요
왜성 복원해서 임진왜란 박물관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어떻게 일본이 이땅에 성을 짓고 약탈을 일삼았는지,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당했으며 어떻게 지켜냈는지... 이러한 것들을 왜성 복원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렸으면 좋겠다. 창원시와 국방부가 협력해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곳으로 왜성을 만들어주세요.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고 그러한 역사 인식이 있어야 반복되지않고 더 번영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초등학교때 소풍겸해서 갔던 것이 기억이 나는군요
선생님, 언제 한번 산성에 이어서 읍성도 리뷰해주셨으면 합니다.
드론이름 이세환 기자님 관련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네여 ㅎㅎ
댓글이 없네요 ㅋㅋㅋ
우리 시대에 제2의 을사늑약, 제2의 임진왜란(정유재란 제외)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하겠습니다.
중국이랑 북한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가 급선무임. 일본은 그 후의 문제
근데 임박사님 체력 정말 대단하심...
왜성은 일본 내부의 투쟁역사 200년이 그대로 적용된 성이었지요. 그들의 군대도 마찬가지였지만 성곽 또한 그런 전쟁 경험이 그대로 다 들어가있었고 이에 대한 허심탄회한 고평가는 우리 기록에도 나옵니다. 강항록 같은 포로 회고록에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구요. 단점이 있다하면 포격전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건데 우리 성의 장점과 일본성의 장점들 그리고 단점에 대한 피드백을 통해 더 좋은 성을 쌓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포격 앞에서는 성벽은 장사가 없지 않나요? 그래서 수원화성도 오히려 성벽 높이가 낮아진 것이고요. 그리고 일본 성의 장점이 각 공간의 분할과 격리인데 이걸 적용하려면 성 안에 들어가서 농성하는 인원을 최소화시켜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에서 성벽이란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데 이러한 일본 성의 구조는 조선과는 맞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서생포진성이나 부산진성과 같이 왜성의 둘레만 둘러 조선식 성곽으로 개축하는 데서 그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커싄 울산성 전투당시 명군 위주로 각종 화포를 동원했는데도 공성엔 실패했지요. 사실 당시 동아시아 수준에서 운용되던 화포 수준이라면 크게 염려할 수준은 아닌거 같습니다. 게다가 서구의 성형요새같이 본격적인 포탄 방호를 위해 설계된 요새가 아니라 하더라도 생각보다 구형성곽도 포격전에서 그냥저냥 괜찮은 방호력을 보여주고 하기도 하더군요.
스튜디오보다 산성오시니까 신나신듯
그런데 왜성은 안에 백성이 살지 못하겠지만 한국의 산성이나 성은 사람이 안에서 거주하는 형태라 조금 다르지 않나요?
구조적으로 공간적 분리와 연속된 단절등을 노리는 전투법을 말씀하시는듯
백성의 거주유무는 일본성과 한국성의 차이라기보단, 성의 지리적특징이나 규모와 축성목적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본성의 특징에 대해 토크멘터리 전쟁사 일본 전국시대 편 보시면 큰 도움 되실 겁니다.
받들겠습니다!!!
저것이 바로 미역 매니아로 알려진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은 성이로군요.
다음은 무슨성인가요?
우리동네 내 산책 코스 나왔다!! 방가요~~
부럽슴다. 진짜 존데 사시네요!😀👍
용원 사시나보네요.
넵. 용원을 아시네요~~~ 신항만부터 안골만 돌아 희돌메공원까지 경치 끝내주는 곳입니다 ^^
박사님 말의 요지는 '과거를 잊지말고 현재에 반영하자'인데 자막에서는 과거를 잊자고하네. 뭐하는건지
저 포즈는 등산하면서 꼭대기 올라갈 때, 야호를 외친 후에 정상 기념샷으로 잡는 포즈로 써도 되겠다.
근데 생각보다 엄청 작은거 같아요..왜성이.. 다 부서져서 그런거겟죠??
수군이 강했던 조선. 육지에서 싸우길 원했던 왜구. 어째 뭐가 바뀐 느낌은 뭐지?
일본이 오히려 한반도보다 산지지형 비율이 높은 탓도 분명 있을 겁니다. 오키나와 제도처럼 작은 섬이 흩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큰 섬들이 포진해 있으니까요.
육군이 질만 했네ㅋㅋㅋㅋㅋ
저 시대에 건물짓고 저격하는걸 어케 이겨!!
마지막 말이 참 인상적이네요 과거는 과거 일뿐
적상산성 꼭 해주세요
교수님은 ㅋㅋㅋ 명나라 군이 느낌 ㅋㅋㅋ
교수님 < @_@ > 팔 ㅋㅋㅋ
병자호란 때 홍이포 경험하고 나서 성 증축 필요성을 크게 못느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02:31 200보 = 약 600M -> 1보 = 약 3M ?
그러게요 당시 조선남성이 150후반에서 160초반 이 평균키 였을텐데 그럼 80cm 전후일듯한테 160m가 잘못 표기 된게 아닐까싶네요 요즘의 자동소총도 유효사거리는 350~600m 내외고(최대 사거리는 1km넘기도 하던데) 강선조차 없던 그 시절 화승총이 사거리가 600m가 나올 수 있을지
600미터는 에러인데, 1보는 보통 사람의 보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의 단위입니다. 주척으로 1보는 1.2m, 당척은 1.8m입니다.
@@인문채널휴 아! 그렇군요. 난 보폭으로 알앗네요. ㅋ
@@인문채널휴 아 ! 저도 이때까지 보폭으로만 알고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박사님
@@happyhan608 보폭이 맞습니다.
1보는 사람의 왼발과 오른발 두개다 걸었을때 길이로 당척으로 1.8m입니다.
보의 단위는 6척인데 당시 사용하던 당척이 대충 29.7cm쯤 됬으니 보는 180cm쯤으로 보는것이 합당해요.
7:27 지당하신말씀. 알량한 자존심 집어치우고 실용적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됐으면..
총독부 때려부수면 지지율 80프로찍어주는 국민성인데 ... 그게 될까요 ㅎㅎ
전지적 용가리 시점일 때 간단하게라도 성곽이나 진지 복원도를 그려주면 더 이해하기 좋을 거 같아요
조선 사람이 얼마나 게으른데 퍽이나 저런 축성기술을 배울려고 했을까
조선에서 오셨어요?
부산강서구 가락동 서낙동강변 있는 김해죽도 왜성 어릴때 소풍으로 많이 갔었는데
김해 죽도 왜성이랑 부산북구 덕천동 구포왜성 양산 물금 증산리 왜성도 방송좀 해주지
맨날 안골 기장 순천 왜성 밖에 안나옴 바닷가에 있는 왜성 말고
낙동강변에 있는 왜성도 좀 해주세요
cg 로라도 실물로 보고픈 ㅠ
200보 600m 는 에러인듯
자막작업하면서 400년전 화승총이 21세기 최신소총과 맞먹는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드셨나봐요
200보가 600미터는 에러인듯 하네요 한 걸음이 3미터면 거인족 ㅋ
0 하나 더 붙은듯
교수님이 말하시는 것은 아마 대조총일 겁니다. 실물을 보시면 거의 바추카 수준이고 10 여발의 총알을 넣고 쏘는 산탄 형태인데 명중률이 굉장히 높았다고 합니다. 이건 200보 이상 갑니다
1보가 보통 70센치 60센치 그 정도 볼겁니다 200보가 600미터라는 계산은 틀렸지만 저 당시 600미터 이상 날아가는 조총을 일본이 보유한건 사실 입니다 심지어 서양의 후장식(뒤로장전) 화포 불량기포 까지도 소수 보유하고 있었죠
조선 천자총통에 대장군전 (34키로 그램) 넣고 발사하면 그게 최대 1.4키로 미터 까지 날아간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일본이 보유한 대구경 조총에 철환을 넣으면 600미터 충분히 날릴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효 사거리 100미터도 안되는 그런 조총이 아니라 대구경 조총이 있죠
부산포 해전때 육지에서 쏜 그런 조총에 정운 장군이 전사했죠 일반 소구경 조총은 육지에서 배에 타격을 못 줍니다 배가 육지에 바짝 붙어 다니는게 아니거든요
근데 그 대조총을 조선 숙종시절 군기시의 박영준에 개량이 되었는데 그게 바로 천보총 이었다네요
천보총은 기존 대조총 보다 최대 사거리가 1620m
유효 사거리는 900m였다고 하더군요
정말 냉정한 사람이 아니고선 사실 치욕의 기억과 흔적은 다 부숴버리게 되죠.. 근데 성장하려면 부수지 않고 분석을 하고 흡수를 하고 반성하고 해야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으니까요..
해양민족이라는 왜놈들이 오히려 육지로 올라와서 농성을 했던 아이러니..
일본이 한국보다 두배이상큰데 왜 해양민족임..? ㅋㅋㅋ
솔직히 드론 이름 샤를이나 샤를 2세될줄 알았는데...
중기이후 조선은 창의력이 거의 없어 왜군성의 장점을 살린다는게 무리였고 정조임금이였으면 충분히 가능했을텐데 망해가는 시기에 왕위에 올라 안타깝네
옆이 제포고 안골포는
울산왜성이 오히려 구조상으로 더 강한 편이었죠
죄송한데 저기서 드론날리면 안되요
복원하자
우리나라 산성이 단순히 둘레만 큰 구조는 아니구요 일본성 못지 않게 구획이 나뉜 구조의 산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전 성북동산성은 최소 4겹 이상의 층구조이고 대전 안산동산성 청양 두릉윤성 논산 외성리산성 등등은 삼중구조 인데 이러한 백제시대 산성들은 둘레는 조선시대보다 대체로 작고 높이도 낮지만 반드시 외성과 가장 높은 곳에 장대를 지어 결국 이중 삼중의 구역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종시 정부청사 뒷편에 있는 진의리토성은 통통한 불가사리 모양인데 구역이 다섯 군데 이상 나뉘어 있고 차단벽과 좁은 통로를 막은 문지등이 있어서 이는 일본 성들처럼 전투원들만을 위한 성임을 알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일본성이 백제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일본의 조선식산성을 백제인들이 감독하여 쌓은것은 맞지만 후에 전국시대 일본성과는 백제시대가 시기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으므로 ) 환경과 상황에 따라 우리나라 산성도 매우 다양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선은 당시 임진왜란 이 터지기전엔 몇백년동안 침략을 당하지않았던 나라였고 당시 왜군은 몇십년동안 통일전쟁하면서 경험을 쌓아온 상태였죠. 경험에서 얻을 껀덕지가 없었죠. 문제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배우질못했다는게 큰 문제
일본성은 대규모 침략에 맡서기엔 적합하지 않음 규모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지형 지물에 따라 성에 축성도 달라져야하는게 정상아님??
근데 이게 면적이나 위치 보니까 전략 방어 거점이라기 보다는 그냥 병참부대 주둔지 같은데. 지도만 보면 짓기 훨씬 전략적인 곳이 있는것 같은데 왜 저기 지었지? 곶 북쪽이 제일 그럴싸 하고 내륙쪽 막으려면 평탄한 항구위치 중간에 위치한, 현재 위치 왜성의 동북쪽에 제법 높고 면적 있는 야산도 있는데.. 기껏 해야 수용 규모는 천명? 보급 보관도 많이는 못할거 같은데? 규모 저정도 성이면 굳이 안싸우고 1.2배병력으로 빙 둘러서 토성 쌓고 포위만 해도. 금방 떨굴거 같은데? 우물이 있는것도 아니고... 물은 위치가 왜 저런지 궁금하네. 침략군에게만 중요한 성인거 같은데.
성 입구쪽 구조는 뭐 쉽게 말해서 타워디펜스네
일본넘은 옜날이나 지금이나 ~~ 골치구만 ~~~
부산 신항 오셨네요 ㅋㅋ 저기 가보면 조선 수군이 원래 사용 하던 성을 일본식으로 증충 한거 아닌가요
왜 한단계 더 못 갔을지 짐작 하는 바는 타 국가는 패전이든 승전이든 국 민을 위로 하는 과정과 자긍심을 키우고 그북돋는 과정을 통해서 국민의 커진 의지를 바탕으로 극복하는 과정이 진행 되나 우리나라는 끝났으니 됐지 안나 공무원 표창 몇개 나가고 정치인 사진 몇장 찍고 힘내세요 빠이빠이 하고 마니 저 어려운 성을 시간 돈 노동 들여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는 것 같다. 국민을 설득하고 보상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 못하는데 더 하겠는가? 국민입장에서는 누구 좋으라고 일하나 싶은거다.
엥?? 용가리??? 샤를이가더 좋은디...
진주성 대첩의 진주성도 해주세요 ㅜㅜ
우리나라 임금이란 자고로 욕받이인데 토목공사한다고 사람동원하면 정치적으로 감당이 안되니 뭐 손가락 빨고 끝난게 참 아쉽죠.
그 토목공사를 무상으로 시키려 하니.. 욕먹었던거죠.
돈이나 보상을 맞게 줘가며 시켜봐요.. 서로 할려고 했을 것임.
축성뿐만 아니라 조선의 건축양식 또한 국가적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것도 기본 운임이 무임금이였던지라..
@@HwangSungUk 그리고 그 원인을 찾자면 국가운영 자체가 경제육성과 풍족한 세금으로 사업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긴축과 소규모 재정에서 오는거라 왕이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애매....
@@HwangSungUk 조선의 세금은 기본적으로 조용조로 역을 세금의 개념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엿도 없으면서 존심만 높았던 사대부네요
교수님 왜놈들은 영주와 군사만을 보호하는 축성이고 조선은 단순히 군주만을 위한 축성이 아니었습니다. 왜놈들은 오로지 영주보호에 전념을 다했다면 조선은 군주와 백성보호에 좀더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이념의 차이인데 왜는 병법이 그들의 안보체계였다면 조선은 민본주의에 중점을 둔 안보체계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성도 지금 남아있는게 중심부쪽이 남아있을 뿐이지 밖으로 외성을 크게 둘렀습니다
조선은 상업적 자본이 없는 나라이니 모방하고 개발할 여력은 없었을것 같네요
저 어릴적 학교에서 어떤 선생님이 조선이 아둔하고 무식해서 일본에게 계속 당한거라고 말했던게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당시는 어려서 이해를 못했는데 정말 열받고 화가납니다. 지금 세상이야 평화롭게 지내면서 서로 윈윈하는게 최선이라고 하지만 그 옛날엔 감정문제나 자원문제로 전쟁을 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나라를 지키는 국민과 훌륭한 인재들이 많았다는 것을 지금 학생들에게도 꼭 강조하고 가르치는 학교이기를 바랍니다. 저때는 진짜 우리를 그렇게 깎아내리면서 중국이나 일본역사를 우위인 것처럼 말하는 선생님들이 있었다는게 너무나 화가나고 충격적입니다.
화가 안나도록 배우고 교훈을 얻어서 발전시켜야죠. 그러려면 치욕의 역사도 있는 그대로 가르쳐야함. 기술이나 학문이 한 수 뒤쳐졌던 부분도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 반면교사 삼아야죠. 민족감정이나 열등감은 잠시 뒤로 접어두셔야죠.
아예 임진전쟁과 병자전쟁에 관해서 따로 특집을 만들어 하시는 게 어떨까요? 특히 임진년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전쟁부터 당시 나라꼴이 어땠는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