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준비론이든 뭐든 설사 아무리 신학적으로 하나님 주권에 근거한 교리들이 형성된다 한들 결국 신학교에서나 교회 현장에서는 결국 대부분 부지중에 인본주의적으로 이해되고 적용된다는 점이 가장 큰 핵심 문제라 봅니다. 인간 이성이란게 일단 이론이 설정되면 그걸 자기 목적을 위해 본능적으로 도구화 하려고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 유혹과 싸우는 지적 작업을 하는 것이 신본주에 근거한 정통신학의 역사입니다.
능동적 순종은 성경신학적 측면이 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조직신학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전생애의 순종(온전한 순종, 능동적 순종) 안에 그리스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포함되는 구도로 필자는 이해합니다. 능동적 순종 has broader meaning !!!
예수님의 율법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의를 얻는다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할만하시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셔야만 했나요? 십자가가 없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의 순종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면 우리는 의롭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오직 의인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만이 우리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성경은 이것만 증거합니다.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가 많은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능동적 순종이 아니란 것을 알게 하실려고 하나님께서 한 이란 단수를 쓰신 것이고 의로운 행위도 헬라어로 단수인 것입니다. 한 의로운 행위는 십자가의 희생을 말한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님의 율법을 순종하신 이유는 하나님이시니 당연히 사랑으로 충만하신 의로우신 분이시니 당연한 것이고 우리에게 율법순종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고 율법순종으로 의인이어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는 것이 효과가 있으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의를 준다고 하면 십자가의 복음이 큰 훼손을 입는 것입니다.
좋은 말씀 감 감사합니다. 저는 한가지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순종을 저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 즉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기간 동안에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이해를 합니다. 환원하면 위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첫사람 아담과 달리 원래 의로우셔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실 수 있었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수 없는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킨것 처럼 간주하셔서 개인종말시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셔서 천국에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전생애의 순종, 온전한 순종, 능동적 순종은 같은 개념으로 봅니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순종에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배제되었다는 것은 ‘이신칭의’를 언급함에 있어 앞뒤가 안 맞는 nonsense 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배제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만으로는 ‘이신칭의’가 성립이 안됩니다.
능동적 순종이 행위언약과는 무관한가요??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인간으로서 아담의 율법순종의 실패를 온 율법에 순종하심으로써 의를 획득하셨다는 주장이 틀린건가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박교수님은 용어를 통해 능동적 순종을 옹호하시는 것처럼 들리나 실상은 최근 논쟁의 핵심은 건드리지 않으셨고 심지어 능동적순종 반대자들의 주장과 먝이 닿아보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피조물이 조물주를 연구한다는 것은 잘못 된 생각이다 성경은 지혜와 총명을 주신다 하였고 깨닫는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하신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 시 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인자 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 , , ,(로마서2장4절)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레위기4장28절) 회개도 하나님이 하게 하는 회개를 해야 하고, 죄도 하나님이 말씀하는 죄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제사법과 민법으로만 알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이 어느 정도여야까지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시는 대목이 마가복음 12장의 내용입니다. 안식일 잘 지키고 살인과 도둑질 안하고 간음안하고 남의 재물 탐내지 않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 맹세를 했거나 음욕을 품기만 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즉 제사법과 민법으로만 알았던 율법의 실제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신 것이지요. 실체는 도덕법이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몰랐던 것이고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도 십계명 그 내용들이 실제로 도덕법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현명한 지혜를 가진 자도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꽤 있었을 것입니다.) 32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절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절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다함은 율법으로 정죄된 인간의 죄를 십자가로 속하심을 뜻합니다. 성경어딜봐도 이렇게만 이해되지, 율법을 준수해내고야말았다는 식의 언급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율법아래 나셨다는 것도 율법으로 정죄되는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것이 중요한거죠. 무슨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뉘앙스가 도대체 어디있는지요. 그리스도의 율법성취는 죄와 그 속함의 십자가형벌을 뜻하는겁니다. 그 사이에 율법준수가 강조될 겨를이 아예없습니다. 이걸 주장하고싶다면 관련 성경구절을 가져오면되는데 그건 전혀못합니다.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중요하다면 간음한여인은 율법대로라면 돌에맞아죽는게 마땅한데 그걸 말리신건 어찌설명하실지요? 또 죽은 시체에 다가간것은요? 그리고 굳이 안식일에 병고치고 다니심으로 바리새인들의 눈에 난 것은요? 율법준수를 강조하고싶었다면 안식일 외 다른 날도 많았을진데 굳이 수차례 안식일에 일하십니다. 제 보기엔 능동적순종이론은 성경구절을 부분적으로 인용해 무리하게 주장을 펴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신약성경을 쭉 읽어내려가면 그런 주장을 펼 어떤 기미도 없습니다. 능동적순종이론이 부정적인 이유는 성경의 일관되게 말하는 저의가 심히 분열되고 혼란스럽게하고 납득도 안 간다는겁니다. 다시한번말하지만 율법의 성취는 그 준수가 아니라 율법으로 정죄된 죄를 십자가에 못박는것입니다. 이 확연한 복음의 의미를 붙드시길.
1계명에서 4계명까지가 제사법(의식법)이라는 주장은 너무 과도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오히려 도덕법의 최상층을 구성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구약의 5계명에서 10계명까지가 사회법 내지 소송법이긴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막 12장 29절~31절)으로 보건대 1계명에서 10계명까지 모두가 도덕법이라고 봐야 하죠. 또한 법률적 용어를 차용해서 표현한다면 구약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계명은 (법률)행위에 한정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행위 뿐만 아니라 용태(의사적 용태와 관념적 용태)까지도 포괄해서 계명을 설명하시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마 5장 (27절)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막 12장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절)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능동적 순종이라는 말을 지어낸 자들이 문제이다. 삼위일체라는 성경에 없는 용어가 절실히 필요했던 칼뱅이 토로한 내용을 보자.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그 한계 : 그러므로 이 용어들이 경솔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것들을 거부하여 경솔하며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성부·성자·성령이 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고, 성령도 성자가 아니시며, 그들이 각기 고유한 특성을 지니신다는 이 믿음에 동의한다면, 위의 용어들이 차라리 묻혀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경을 익힘에 불필요하고 난잡한 능동적 순종이라는 말을 지어낼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스콜라 학자들을 늘 경계했던 칼뱅이 다시 태어나 말한다면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이성적 한계 내에 하나님의 경륜을 가두려는 어리석음의 증거가 "능동적 순종"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강의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동안 능동적 순종 논쟁을 유심히 관찰만 했더라도 논쟁에 쓰였던 "개혁주의 신학자료들"만 보았어도 저런 오류를 범하지 않았을텐데요.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를 작성한 우르시누스는 그의 해설서에 "율법과 의"에 대해서 "율법에 일치한 상태가 의로운 상태"라고 정의를 내리고, 그리스도의 본성적 의와 획득한 의를 구분을 하며 율법의 두 가지 요구 곧 (1) 순종 (2) 불이행시 형벌 을 요구하는데, 첫째 아담의 실패로 인해 모든 인류가 율법의 요구인 형벌의 상태에 처했고,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신게 바로 율법의 두 가지 요구를 모두 순종하여 이루심으로 율법의 두 요구를 성취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위 강의를 보니, 박교수께서는 아직 개혁주의에서 가르치는 "율법"의 이해에 대해서 깊이있게 다룬적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킨 곧 성취한 그 이유에 대해서 철학적사변으로 여겨 능동수동구별을 한것으로만 정리하시는데요. 이건 아직 잘 정립을 안하신 상태로 강의를 하신거 같은데요. 심각한 오류입니다. 이 동영상강의는 박교수님께는 큰 흠이 될 듯 하네요. 박교수께서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획득헀다고 하면 그건 이단이라 하셨는데, 능동적 순종 논쟁에서 언급된 혹 주장한 대표적 교수님들께서 그러면 다 이단이 되고, 우르시누스 역시 이단이 됩니다.
성경은 절대적 하나님의 주권을 아무 곳에나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를 합하여 일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보혜사로 말씀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으로 말씀하시는데 칼빈의 절대 예정론에 빠지면 인간의 의지는 아예 무시해버린다 그러면서 말로는 자유의지를 인정한다 만일 하나님께 모든 것에 절대주권을 행사하신다면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수 없고 상도 주실 수도 없게된다 예정과 의지는 항상 같이 사용된다
Thomas Shepherd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Jonathan Edwards는 말하기를, “믿음은 복음에 대한 인격적인 피조물의 반응이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에는 지, 정, 의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인간의 영역 입니다. 인간은 robot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행함이 없는 ‘죽은믿음(약)’이 있고, 사랑이 없는 ‘거짓믿음(딤전)’이 있으며, 부활이 없다고 하는 ‘헛된믿음(고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믿음에 힘써야지 하나님의 영역인 구원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은 신성모독 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고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택한 당신의 백성들을 그들의 믿음을 통해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택자인가 ? 인간은 이 세상에서는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은 A에 대한 구원을 창세 전에 이미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구원을 알 수 없고 개인종말시 심판대 앞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믿음과 구원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 입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준비론을 적극 지지합니다. 준비론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구원을 사건으로‘ 이 논리는 구원파신학 입니다. 이러한 구원파신학이 소위 정통개혁교회 뿐만이 아니라 일반 교회에도 깔려있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구원파의 특징 1.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인데 하나님을 대신해서 피조물인 인간이 타인이나 나의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거나 구원의 확신을 종용하는 행위 2.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는 행위 3. 복음과 율법을 분리하는 행위 4.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하는 행위 5. 상급사상을 강조하는 행위 6. 심판이 배제된 이신칭의 7. 영과 육을 분리하는 행위 8. 구원을 사건으로 보는 행위
“목회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순종 교리를 교훈할 때 주의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의 순종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친 완전한 순종을 말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생애 전체 순종의 절정이며 십자가의 속량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위의 문장에서 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빠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의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삶 전체, 즉 율법의 온전한 순종이 우리의 의가 된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누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을 구태어 나눈다면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수동적 순종’으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능동적 순종’으로 나누는데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적극적 순종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에 포함되는 구도로 봅니다. 저는 위의 사실을 롬 4:25과 고전 15:1-8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부활을 제외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만으로는 우리는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KRV (위의 성경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수동적 의미가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능동적 의미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1-8) 위의 말씀에서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학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량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배제되었는지 필자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다음 성경구절은 증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17-20 KRV
@@새미기픈-w6r 능동적 순종을 부인하고 수동적 순종민을 주장하는 목사(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대속의 죽음의 결과로 봅니다. 예수님은 양성의 존재이시기에, 그리스도의 부활하심도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인성으로서는 성부하나님에 의해 살아나셨고(부활하셨고), 신성으로서는 예수님 스스로 부활하셨습니다. 독자님께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결과로 아니면 능동순종의 결과로 부활하신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고전 15:). 이는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전 15:)고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지 않습니까 ?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하는 와중에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빠졌네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으로 이신칭의가 성립이 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인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새미기픈-w6r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가가를 십자가 되게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성령님이 오셨는데 성령님은 아무에게나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에게만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속죄의 은혜를 택자에게 적용시켜서 그들로 천국(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칼빈의 제한속죄).
@@새미기픈-w6r ‘수동적 순종(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자기들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nonsense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셔서 의를 얻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첫인간 아담과 달리 원래 죄가 없으시고 의로우셔서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기고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택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습니다. 능동적순종(온전한순종, 전생애의 순종)운 좀더 broad한 의미가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은 그 안래 포함되는 구도로 필자는 봅니다. 전자는 성경신학적 측면이 있고 후자는 조직신하적 측면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samuelkim2611 그리스도의 부활은 순종의 열매이지, 순종의 과정이 아닙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흡족해 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예수께서 스스로 하신 순종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중요한 것은 순종의 과정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그리스도의 순종이 완전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으며, 하나님이 그를 부활하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의인들의 모범이 되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순종은 완전한 순종이라도 합니다. 이것을 GI 윌리암슨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모두를 말한다고 합니다. 십자가 순종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이 불완전합니다. 예수님의 30년 지상 사역이 왜 있어야 하는지 답해 보세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었다고 하는데, 이 의가 무엇이고 어디서 온 의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신적 거룩함과 의가 전가되었다고 말하신다면, 내게 전가된 의가 하나님의 본래적 의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며,내가 신이 되려했다던 범죄자 아담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의 삶 자체가 순종의 삶이었기 때문에, 순종을 둘로 나누고 다른 하나는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무함은 언제나 지적 당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시대의 변형된 영지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수님 말씀대로라면 펠라기안도 구원에 대한 적극성이 확대된 회심 준비론자일 수밖에..... 자기가 구원 받을 줄 어떻게 알고 회심을 준비한답니까? 떡을 줄 이는 생각도 않고 있다면.... 교수님 말씀대로 한다면 거듭나기 전의 모든 사람은 세미펠라기안이라도 되어야겠습니다 그려.
~이쁜공주님들 둘이네요 축복하고 행복하세요
회심 준비론이든 뭐든 설사 아무리 신학적으로 하나님 주권에 근거한 교리들이 형성된다 한들 결국 신학교에서나 교회 현장에서는 결국 대부분 부지중에 인본주의적으로 이해되고 적용된다는 점이 가장 큰 핵심 문제라 봅니다. 인간 이성이란게 일단 이론이 설정되면 그걸 자기 목적을 위해 본능적으로 도구화 하려고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 유혹과 싸우는 지적 작업을 하는 것이 신본주에 근거한 정통신학의 역사입니다.
자식이태어나면자식이지태어난자식이자식이되는과정이있는가요구원의서정이구원받는과정입니까이과정을거쳐야비로소구원받는것입니까
답변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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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동적 순종은 성경신학적 측면이 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조직신학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전생애의 순종(온전한 순종, 능동적 순종) 안에 그리스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포함되는 구도로 필자는 이해합니다. 능동적 순종 has broader meaning !!!
신학은 용어의 정확한 개념정리가 중요합니다.
회심 준비론은 제가 느끼기에는 알미니안 신학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드내요
율법의 순종을 통해 얻은 의를 전가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율법위반으로 인한 율법의 요구를 성육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죄를 대속하신 것이 구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자체셨음.
저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 그럼 회심의 경험이 있기전에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인가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지켰음을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함을얻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는 것인가?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바울 사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율법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의를 얻는다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할만하시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셔야만 했나요?
십자가가 없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의 순종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면 우리는 의롭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오직 의인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만이 우리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성경은 이것만 증거합니다.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가 많은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능동적 순종이 아니란 것을 알게 하실려고 하나님께서 한 이란 단수를 쓰신 것이고 의로운 행위도 헬라어로 단수인 것입니다. 한 의로운 행위는 십자가의 희생을 말한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님의 율법을 순종하신 이유는 하나님이시니 당연히 사랑으로 충만하신 의로우신 분이시니 당연한 것이고
우리에게 율법순종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고
율법순종으로 의인이어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는 것이 효과가 있으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의를 준다고 하면 십자가의 복음이 큰 훼손을 입는 것입니다.
좋은 말씀 감 감사합니다. 저는 한가지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순종을 저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 즉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기간 동안에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이해를 합니다. 환원하면 위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첫사람 아담과 달리 원래 의로우셔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실 수 있었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수 없는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킨것 처럼 간주하셔서 개인종말시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셔서 천국에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전생애의 순종, 온전한 순종, 능동적 순종은 같은 개념으로 봅니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순종에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배제되었다는 것은 ‘이신칭의’를 언급함에 있어 앞뒤가 안 맞는 nonsense 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배제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만으로는 ‘이신칭의’가 성립이 안됩니다.
능동적 순종이 행위언약과는 무관한가요??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인간으로서 아담의 율법순종의 실패를 온 율법에 순종하심으로써 의를 획득하셨다는 주장이 틀린건가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박교수님은 용어를 통해 능동적 순종을 옹호하시는 것처럼 들리나 실상은 최근 논쟁의 핵심은 건드리지 않으셨고 심지어 능동적순종 반대자들의 주장과 먝이 닿아보입니다;;
구원에 대한 제반 과정은 하나님의 작용에 의한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하여금 준비해야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알미니안의 발상 이상이 아니지요.
성경은 인간의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피조물이 조물주를 연구한다는 것은 잘못 된 생각이다
성경은 지혜와 총명을 주신다 하였고 깨닫는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하신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 시 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인자 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 , , ,(로마서2장4절)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레위기4장28절) 회개도 하나님이 하게 하는 회개를 해야 하고, 죄도 하나님이 말씀하는 죄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완벽한 강의네요!!! 회심준비 반대하신 분은 이제 논란을 일으키지 마시길!!!!
예수께서 율법을 다 지킴으로 의를
획득하신 것이 아니죠.
율법의 요구.저주를 택자들 대신
감당하셔 죄를 해결하신 것이죠.
구분.전제.정의부터 오류라 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도 율법을 순종하신 것이 아닌가? 죄의 삯은 사망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뭔가? 그리고 이 십자가의 죽으심도 능동적인 자발적인 죽으심이 아니고 뭔가?
회심을 어떻게 준비하나요 ?
예전에 회중파의 똑같은 논리십니다
또 시작입니다 ….
이미 몇천년 전에 싸운걸 또또 !!
장로교가 왜 회중파 논리를 따라가는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고... 하는데요
@@somebody-nx2xc 그런데요 ?
님 말이 맞아요
장로교에서 왜 회중파의 가르침을 따라가는지
회중파 청교도나 장로교 신학은 일치핮니다 다만 교회 정치에서 다를뿐입니다^^
제사법과 민법으로만 알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이 어느 정도여야까지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시는 대목이 마가복음 12장의 내용입니다.
안식일 잘 지키고 살인과 도둑질 안하고 간음안하고 남의 재물 탐내지 않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 맹세를 했거나 음욕을 품기만 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즉 제사법과 민법으로만 알았던 율법의 실제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신 것이지요. 실체는 도덕법이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몰랐던 것이고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도 십계명 그 내용들이 실제로 도덕법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현명한 지혜를 가진 자도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꽤 있었을 것입니다.)
32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절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절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다함은 율법으로 정죄된 인간의 죄를 십자가로 속하심을 뜻합니다.
성경어딜봐도 이렇게만 이해되지, 율법을 준수해내고야말았다는 식의 언급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율법아래 나셨다는 것도 율법으로 정죄되는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것이 중요한거죠. 무슨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뉘앙스가 도대체 어디있는지요.
그리스도의 율법성취는
죄와 그 속함의 십자가형벌을 뜻하는겁니다.
그 사이에 율법준수가 강조될 겨를이 아예없습니다.
이걸 주장하고싶다면 관련 성경구절을 가져오면되는데 그건 전혀못합니다.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중요하다면
간음한여인은 율법대로라면 돌에맞아죽는게 마땅한데 그걸 말리신건 어찌설명하실지요?
또 죽은 시체에 다가간것은요?
그리고 굳이 안식일에 병고치고 다니심으로 바리새인들의 눈에 난 것은요?
율법준수를 강조하고싶었다면 안식일 외 다른 날도 많았을진데 굳이 수차례 안식일에 일하십니다.
제 보기엔 능동적순종이론은
성경구절을 부분적으로 인용해 무리하게 주장을 펴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신약성경을 쭉 읽어내려가면
그런 주장을 펼 어떤 기미도 없습니다.
능동적순종이론이 부정적인 이유는 성경의 일관되게 말하는 저의가 심히 분열되고 혼란스럽게하고 납득도 안 간다는겁니다.
다시한번말하지만
율법의 성취는 그 준수가 아니라
율법으로 정죄된 죄를 십자가에 못박는것입니다.
이 확연한 복음의 의미를 붙드시길.
1계명에서 4계명까지가 제사법(의식법)이라는 주장은 너무 과도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오히려 도덕법의 최상층을 구성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구약의 5계명에서 10계명까지가 사회법 내지 소송법이긴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막 12장 29절~31절)으로 보건대 1계명에서 10계명까지 모두가 도덕법이라고 봐야 하죠.
또한 법률적 용어를 차용해서 표현한다면 구약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계명은 (법률)행위에 한정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행위 뿐만 아니라 용태(의사적 용태와 관념적 용태)까지도 포괄해서 계명을 설명하시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마 5장 (27절)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막 12장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절)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능동적 순종이라는 말을 지어낸 자들이 문제이다. 삼위일체라는 성경에 없는 용어가 절실히 필요했던 칼뱅이 토로한 내용을 보자.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그 한계 : 그러므로 이 용어들이 경솔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것들을 거부하여 경솔하며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성부·성자·성령이 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고, 성령도 성자가 아니시며, 그들이 각기 고유한 특성을 지니신다는 이 믿음에 동의한다면, 위의 용어들이 차라리 묻혀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경을 익힘에 불필요하고 난잡한 능동적 순종이라는 말을 지어낼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스콜라 학자들을 늘 경계했던 칼뱅이 다시 태어나 말한다면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이성적 한계 내에 하나님의 경륜을 가두려는 어리석음의 증거가 "능동적 순종"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강의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동안 능동적 순종 논쟁을 유심히 관찰만 했더라도 논쟁에 쓰였던 "개혁주의 신학자료들"만 보았어도 저런 오류를 범하지 않았을텐데요.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를 작성한 우르시누스는 그의 해설서에 "율법과 의"에 대해서 "율법에 일치한 상태가 의로운 상태"라고 정의를 내리고, 그리스도의 본성적 의와 획득한 의를 구분을 하며 율법의 두 가지 요구 곧 (1) 순종 (2) 불이행시 형벌 을 요구하는데, 첫째 아담의 실패로 인해 모든 인류가 율법의 요구인 형벌의 상태에 처했고,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신게 바로 율법의 두 가지 요구를 모두 순종하여 이루심으로 율법의 두 요구를 성취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위 강의를 보니, 박교수께서는 아직 개혁주의에서 가르치는 "율법"의 이해에 대해서 깊이있게 다룬적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킨 곧 성취한 그 이유에 대해서 철학적사변으로 여겨 능동수동구별을 한것으로만 정리하시는데요. 이건 아직 잘 정립을 안하신 상태로 강의를 하신거 같은데요.
심각한 오류입니다. 이 동영상강의는 박교수님께는 큰 흠이 될 듯 하네요.
박교수께서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획득헀다고 하면 그건 이단이라 하셨는데, 능동적 순종 논쟁에서 언급된 혹 주장한 대표적 교수님들께서 그러면 다 이단이 되고, 우르시누스 역시 이단이 됩니다.
맞습니다
개혁주의를 표방한곳에 회중파 신학이 쓸었습니다 …
성경은 절대적 하나님의 주권을 아무 곳에나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를 합하여 일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보혜사로 말씀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으로 말씀하시는데 칼빈의 절대 예정론에 빠지면 인간의 의지는 아예 무시해버린다 그러면서 말로는 자유의지를 인정한다 만일 하나님께 모든 것에 절대주권을 행사하신다면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수 없고 상도 주실 수도 없게된다 예정과 의지는 항상 같이 사용된다
Thomas Shepherd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Jonathan Edwards는 말하기를, “믿음은 복음에 대한 인격적인 피조물의 반응이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에는 지, 정, 의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인간의 영역 입니다. 인간은 robot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행함이 없는 ‘죽은믿음(약)’이 있고, 사랑이 없는 ‘거짓믿음(딤전)’이 있으며, 부활이 없다고 하는 ‘헛된믿음(고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믿음에 힘써야지 하나님의 영역인 구원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은 신성모독 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고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택한 당신의 백성들을 그들의 믿음을 통해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택자인가 ? 인간은 이 세상에서는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은 A에 대한 구원을 창세 전에 이미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구원을 알 수 없고 개인종말시 심판대 앞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믿음과 구원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 입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준비론을 적극 지지합니다. 준비론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구원을 사건으로‘ 이 논리는 구원파신학 입니다. 이러한 구원파신학이 소위 정통개혁교회 뿐만이 아니라 일반 교회에도 깔려있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구원파의 특징
1.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인데 하나님을 대신해서 피조물인 인간이 타인이나 나의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거나 구원의 확신을 종용하는 행위
2.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는 행위
3. 복음과 율법을 분리하는 행위
4.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하는 행위
5. 상급사상을 강조하는 행위
6. 심판이 배제된 이신칭의
7. 영과 육을 분리하는 행위
8. 구원을 사건으로 보는 행위
구원파 신학이 개신교에 깔려 있습니다. ㅇ호통재라 !!! 이를 어찌할고 !!!
뭔가잘못이해하신듯 천천히 연구해보십시요 응원합니다
믿음은 복음에 대한 인격적인 피조물의 반응 입니다.
믿음은 지, 정, 의를 포함합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A의 사후에 적용됩니다.
하트만 달지 마시고 답변을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죄송합니다. 저는 호스트였을 뿐 강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답을 드리지 못합니다. 질문은 직접 박재은 교수님께(jepark2@csu.ac.kr) 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shenere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회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순종 교리를 교훈할 때 주의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의 순종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친 완전한 순종을 말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생애 전체 순종의 절정이며 십자가의 속량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위의 문장에서 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빠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의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삶 전체, 즉 율법의 온전한 순종이 우리의 의가 된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누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을 구태어 나눈다면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수동적 순종’으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능동적 순종’으로 나누는데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적극적 순종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에 포함되는 구도로 봅니다. 저는 위의 사실을 롬 4:25과 고전 15:1-8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부활을 제외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만으로는 우리는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KRV
(위의 성경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수동적 의미가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능동적 의미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1-8)
위의 말씀에서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학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량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배제되었는지 필자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다음 성경구절은 증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17-20 KRV
부활은 순종의 영역이 아니지 않나요?
성경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영광스러운 부활을 주신 것으로 말하지 않나요?
@@새미기픈-w6r
능동적 순종을 부인하고 수동적 순종민을 주장하는 목사(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대속의 죽음의 결과로 봅니다. 예수님은 양성의 존재이시기에, 그리스도의 부활하심도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인성으로서는 성부하나님에 의해 살아나셨고(부활하셨고), 신성으로서는 예수님 스스로 부활하셨습니다. 독자님께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결과로 아니면 능동순종의 결과로 부활하신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고전 15:). 이는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전 15:)고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지 않습니까 ?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하는 와중에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빠졌네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으로 이신칭의가 성립이 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인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새미기픈-w6r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가가를 십자가 되게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성령님이 오셨는데 성령님은 아무에게나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에게만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속죄의 은혜를 택자에게 적용시켜서 그들로 천국(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칼빈의 제한속죄).
@@새미기픈-w6r
‘수동적 순종(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자기들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nonsense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셔서 의를 얻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첫인간 아담과 달리 원래 죄가 없으시고 의로우셔서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기고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택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습니다.
능동적순종(온전한순종, 전생애의 순종)운 좀더 broad한 의미가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은 그 안래 포함되는 구도로 필자는 봅니다. 전자는 성경신학적 측면이 있고 후자는 조직신하적 측면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samuelkim2611 그리스도의 부활은 순종의 열매이지, 순종의 과정이 아닙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흡족해 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예수께서 스스로 하신 순종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중요한 것은 순종의 과정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그리스도의 순종이 완전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으며, 하나님이 그를 부활하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의인들의 모범이 되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순종은 완전한 순종이라도 합니다. 이것을 GI 윌리암슨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모두를 말한다고 합니다.
십자가 순종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이 불완전합니다. 예수님의 30년 지상 사역이 왜 있어야 하는지 답해 보세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었다고 하는데, 이 의가 무엇이고 어디서 온 의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신적 거룩함과 의가 전가되었다고 말하신다면, 내게 전가된 의가 하나님의 본래적 의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며,내가 신이 되려했다던 범죄자 아담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의 삶 자체가 순종의 삶이었기 때문에, 순종을 둘로 나누고 다른 하나는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무함은 언제나 지적 당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시대의 변형된 영지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교수님이 하신 말씀대로라면, 갈라디아 교회에 스며든 거짓 선생들을
대적한 사도바울의 논리조차 무식의 소치라는결론을 내릴 수 밖에요.
무식한 사람들은 어디 예수님을 믿기나 하겠습니까?
합동측 목사님들 중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반대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
합동측에서 이분들부터 잘 정리하시고,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지켜가시길 소망합니다
전 개신교인이지만 현대 가톨릭 흐름에도 관심이 있는데 가톨릭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으신 것 같아요 중세와 같지는 않아요. 거기도 얼마나 많은 변화의 흐름이 있어왔는데...
교수님 말씀대로라면 펠라기안도 구원에 대한 적극성이 확대된 회심 준비론자일 수밖에.....
자기가 구원 받을 줄 어떻게 알고 회심을 준비한답니까? 떡을 줄 이는 생각도 않고 있다면....
교수님 말씀대로 한다면 거듭나기 전의 모든 사람은 세미펠라기안이라도 되어야겠습니다 그려.
내가ㅡ구원 받은 걸
모르면ᆢ그는 가짜다
아니ᆢ자기가
구원의 능력과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모를 말할 수가 있는가
그럼ᆢ
니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