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뭔지도 모르고 의식은 천수경으로 하면서 그저 머리 비우고 무념무상의 미로만 헤매던 나에게 쫑카파의 보리도 차제론 즉 람림과 샨티데바의 입보리 행론은 어둠속 등불로 다가왔던 기억이 나중에 황당했던건 샨티데바의 입보리 행론은 고려대장경중 보리행경이라는 제목으로 들어있었다는 사실
마하연 선사의 문제는, 무념무상이라고 하면서 선업의 생각을 일으킴 조차도 끊으려 했던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수승한 복덕자량이 필요한데, 선업의 생각을 일으키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조차 방해가 된다고 여기니 바른 길에서 벗어났고 결국 논쟁에서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출리심을 바탕으로 한 선업의 일으킴과 실천은 불과를 이루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생각이든 악한 생각이든 절대적으로 선정에 방해가 됩니다 다만 선한 생각은 선정에 들기에 좋은 조건이 될 뿐입니다 왜 그렇까요?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은 반드시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일체의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선한 생각이든 악한 생각이든 한생각 일어나는 찰라를 반드시 반드시 체득해서 알아내야 합니다 ()()()
논쟁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야기 하면 한국 조계종의 발작버튼을 누를까봐 일부러 뺀듯한 느낌이 있지만....ㅎㅎ 그 드라마틱한 전개와 결말만으로도 스리랑카의 파아나두라 대논쟁 만큼이나 재미있네여... 뭐.. 논쟁이란 그걸 진행하는 사람의 자질과 수준이 중요하니까... 티베트의 삼예논쟁에서 패했다고 선불교가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어쩌면... 논쟁이라고 하는 틀 자체가 불사불관의 돈오론자들에게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을지도....ㅋ
@@아침이슬-y6i 글세요... 그게 과연 방편일까요? 어떤 사람의 맘을 깨우치고 그를 고통으로 부터 꺼내와야 하는데... 논리에서 밀려서... 말빨에 딸려서... 입으로는 승복을 내 뱉으나 맘속에는 거부감이 가득하며 머리로는 끊임없이 반격의 기회를 엿보게 만드는 것이 정법일까요? 아님 사변만 주구장창 늘어 놓은 인간의 귀싸대기를 쳐 올려서 정신이 번쩍들게 만드는 것이 정법일까요? 논리적이어야 세계화를 달성 할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편견에 불과 할지 모릅니다. 논리적 견고함이 특정 철학과 종교의 승리를 가져다 준다면 이 세계는 진즉에 하나의 철학이나 종교로 통일이 되었을 겁니다. 심지어 불교의 발생지였던 인도에서 불교가 망해버린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티베트 삼예논쟁을 들여다 보면 그들의 논리체계는 선불교 보다 더 우위에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저는 그 원인을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대략 30년 주기로 순백의 애기로 태어나고... 대략 20년간을 공부해서 5~60년을 살다가 간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20년의 기간 동안 어떠한 질문을 하더라도 그 것을 논파 할 수 있는 방대한 논리적 지식을 특정 개인이 축적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다라고 봅니다. 더군다나 잠자는 시간을 제하고... 일을 해서 밥벌이를 하는 시간을 제하고 나면 일반 대중들에게는... 31,039 구절의 성경도 당대의 모든 불경을 총 망라했다는 8만 대장경도 주역 24,207자 논어 12,700자 맹자 34,685자 시경 39,124자등 조선의 선비가 과거시험 준비를 위해서 외어야 했다는 485,228자 분량의 유교경전도... 그림의 떡에 불과 하며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과제일 뿐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종교나 철학중 하나를 선택해서 무작정 진리라고 믿으며... 목사나 스님이나 학자들에게 자신의 뇌를 맡기고... 자신은 기도나 핵심적인 문구 몇개만 인용을 하며 계율을 지키면서 살아가는데 만족을 할 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적인 체득이다 보니 더 어렵죠... 어쩌면 각 개개인의 논리적인 동의를 쌓아가서 궁극적인 해탈의 경지에 도달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그래서 발달이 된 것이 선불교라고 봅니다. 특정 개인에게 가장 자극을 줄 수 있는 주제나 순간을 발견해서 그 순간을 치고 들어 가는 것이죠... 그게 그나마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다라고 결론을 내린거겠죠... 물론 그래 봤자... 아주 극소수의 인원에 불과 하지만... 암튼... 대나무를 그리기 전에 이미 맘속에 완성된 대나무가 있다는 흉유성죽(胸有成竹)이라는 말이 있듯이... 맘속에 완성된 대나무가 있는 사람과... 정작 대나무가 자라는 것은 본적도 없고... 전해들은 이야기나 책으로만 대나무를 배운 사람이 말하고 묘사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것은 분명하겠죠... 선불교는 동아시아적인 전통에 따라서 도제식으로 맘속에 완성된 대나무를 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고... 또다른 계파는 논리.. 즉 집단지성의 힘을 믿고 대나무에 대한 온갖 다양하고 세부적인 묘사를 축적 해 나가는 방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논리적 접근은 현대수학의 수렴처럼... 정답에 아주아주 근접을 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완전한 정답이 될 수 없죠... 다만 많은 경우에... 혹은 공학적으로(일생활에 써먹기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문제가 없는 정답이 될 수는 있죠... 이 둘중에 어떤 것을 선택 할 것인가는 결국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닐가 싶네요... 마지막으로... 논리를 중요시 하는 서구 학자가 펴낸 책의 번역본인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에 나온 불교에 대한 묘사중 한구절을 소개 해 드리고 싶네요... ----------------- 마지막으로 불교는 초자연적 권위나 형이상학적인 사색보다는 인본주의적이며 매일의 삶을 사는 기술에 더 관심을 가진 세계관이다.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는 사색을 피하는 종교를 설파했다. 그는 세계의 위대한 형이상학자 중 한 명일 수 있으나 이론적으로 복잡하게 엮지 않았다. 이 세상이 영구한가 아닌가, 무한한가, 유한한가, 그리고 사후 부처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같은 질문에 대해 그는 고상한 침묵을 지킨다. ----------------- 어쩌면 마하연사가 마지막에 침묵을 지키면서 건넨 꽃은 '고상한 침묵'의 의미는 아니었을 까요?
조사선의 문제는 단박에 깨닫기 위해 교학을 무시하고, 점진적인 수행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을 강조하다보니 깨달음의 요행수를 바라게 되고, 어떤 체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예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욕망에 사로잡혀도 괜찮다(또는 욕망이 아니라)고 하는 회괴한 말을 하게 됩니다 석가모니께서는 선함을 행하고 악함은 행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말씀중 가장 중요한 수행방법인 팔정도가 그 예입니다 즉 정사유 정어 정행 정명 정정진에서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계(선함)는 수행(깨달음)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며, 기초없는 상태에서 어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수행해 보시면 번뇌망상 때문에 수행의 진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번뇌망상 때문인데, 번뇌망상을 일어키게 되는 것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악함) 때문임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누구나 단박에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수행자들을 보면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조사선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김종용-p5z 수행을 무시한다? 그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수행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수행 또한 완성된다는 관점이 틀렸을까요? 이전의 오류를 반복한다면 깨달음이 없는 것이겠지요. 얽매이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지는 경지, 그것이 깨달음 아닐까요?
파드마삼바바는 인도말, 마하연은 중국 사투리, 왕은 티벳말 쓰는데, 토론은 어느 말로 했나요? 동시 통역이 있었나요? 서로 제대로 의미가 전달될수 있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마하연은 어휘력이 딸려서 포기했을 수도... 또 논리적이고 말많은 인도인에게 중국사람은 애당초 토론 상대가 안됩니다.
스님과 재가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음의 불안(불쾌감)을 없애는게 핵심이잖아요. 그중에서 분별심을 없애는게 핵심이고요. 그런데 분별심을 없애도 먹고사는문제에서 오는 불안은 없어지지 않아요. 재가자 입장에서 남과 비교해서 더 돋보이기 위한 집착심이 탐욕인줄 알고 내려놓아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먹고사는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처자식도 없지, 공양받은것으로 먹는 문제 해결하지, 스님은 수행만으로 열반에 도달할수 있지요. 하지만 재가자는 열반까지는 힘듭니다. 그냥 지혜를 얻어서 불안이 많이 줄어들었다 정도죠. 약간의불안이 남아 있으니, 뭔가 좀 달래줘야 하고요. 그래서 선업도 지을려고 합니다. 선업을 지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스님입장에서는 그 기분 좋은 쾌감 조차 사라지면 불쾌감으로 변하니 짓지 말라고 할수 있죠..제가 티벳 왕 입장이라도 이런식의 주장을 하는 종파는 폐지시키고 싶겠네요.
한국식 불교는 맞는데... 파인애플/고구마 피자, 카레덮밥, 아이스아메리카노, 라면, 짬뽕, 짜장면처럼... 종주국의 음식에서 벗어 났다고 해서 그 음식들이 맛이 없거나 먹어서는 안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더 현지화 되어 있고 더 대중적이고, 더 우리 입맛에 더 맞는 음식이죠... 사상과 종교도 마찮가지 입니다. 원조국이 아니니까 니들은 변종이고 사이비이며 틀린 것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웃긴 겁니다. 오히려 더 대중적인 힘을 가지도록 검증되고 골수만 남기고 새로운 생명력이 추가 되었다라고 봐야 합니다. 때때로 무엇이 진정한 피자이고 무엇이 카레인가에 대해서 종주국의 음식을 고찰 할 필요는 있지만 무조건 종주국의 래시피를 준수해야 한다라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과 발전성을 포기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이지... 이탈리아인과 인도인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다 보면... 중국의 라미엔과 일본의 라면을 넘어서는 불닭면이 나오고 짬뽕과 짜장면이 한국음식이 되는 거죠...ㅋㅋ
연거푸 네번을 봤습니다 막연하게 아는것에 전문적으로 공부하신 분의 견해는 처음이었습니다 티벳이 인도 전통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자세하게 설명하셔서 감사드립니다 한국불교가 서서히 티벳불교로 갈아타는 과정이라 너무나도 실감나는 강연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햇불이 되어주세요
박은정교수님 강의 감사 합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의식은 천수경으로 하면서 그저 머리 비우고 무념무상의 미로만 헤매던 나에게 쫑카파의 보리도 차제론 즉 람림과 샨티데바의 입보리 행론은 어둠속 등불로 다가왔던 기억이 나중에 황당했던건 샨티데바의 입보리 행론은 고려대장경중 보리행경이라는 제목으로 들어있었다는 사실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
폴 드미에빌이 쓰고 국내에 '라싸 종교회의'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논서를 모두 읽어봤지만 티벳불교에 정통하신 원장님 말씀으로 들으니 훨씬 티벳의 입장에서 이해가 잘 되네요. 감사드립니다 ^^
정말 잘 들었습니다.
티베트에 이러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접합니다.
고맙습니다.
'파드마삼바바'가 '티벳사자의서' 저자인가요?
맞습니디()
파나마 삼바바(연화생 대사ᆢ)
세월이 많이 지났군요. 멈추지않고 계속 가셨군요. 고맙습니다.
티벳불교 역사 너무너무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전생에 선업을 많이 쌓으셨나봅니다.
달라이라마님과
훌륭한 스승님들 곁에서 수행 할 수 있는 복이......
❤️🍀🙂🙏
감사합니다.😊
짧은 지식으로는 티벳이 밀교 성격이 강한 걸로만 알았는데 전체적인 역사를 보니.. 제 정보가 많이 제한되었네요. 강의잘 들었네요. 미국이나 영국의 합리성이 보는 티벳불교도 같이 보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파나두라 논쟁도 올려주시면 감사합니다.
❤❤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한국불교 개혁되어야 할게 많은것 같아유~~^^
😅😅
저 왕의 선언이 지금 한국 불교 상태를 딱 지적하고 있더라.
성리학의 성립이 이해가 되네요. 인간은 무지성을 견딜 수 없죠.
너무나도 좋은말씀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할수있게 해주셔서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
마하연 선사의 문제는, 무념무상이라고 하면서 선업의 생각을 일으킴 조차도 끊으려 했던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수승한 복덕자량이 필요한데, 선업의 생각을 일으키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조차 방해가 된다고 여기니 바른 길에서 벗어났고 결국 논쟁에서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출리심을 바탕으로 한 선업의 일으킴과 실천은 불과를 이루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생각이든 악한 생각이든 절대적으로 선정에 방해가 됩니다
다만 선한 생각은 선정에 들기에 좋은 조건이 될 뿐입니다 왜 그렇까요?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은 반드시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일체의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선한 생각이든 악한 생각이든 한생각 일어나는 찰라를 반드시 반드시 체득해서 알아내야 합니다 ()()()
티벳불교가 모든 것은 아니라고 해도, 수행만 하다 지쳐 나락에 빠진 한국불교가 나아갈 바를 잘 지적해준 강의라고 생각합니다!
🙏🙏🙏
논쟁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야기 하면 한국 조계종의 발작버튼을 누를까봐 일부러 뺀듯한 느낌이 있지만....ㅎㅎ
그 드라마틱한 전개와 결말만으로도 스리랑카의 파아나두라 대논쟁 만큼이나 재미있네여...
뭐.. 논쟁이란 그걸 진행하는 사람의 자질과 수준이 중요하니까... 티베트의 삼예논쟁에서 패했다고 선불교가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어쩌면... 논쟁이라고 하는 틀 자체가 불사불관의 돈오론자들에게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을지도....ㅋ
쓰레기는 아니지만 정법은 아니라고 봅니다! 방편일 뿐이죠! 그런데, 마하연식 선불교가 한국불교의 주류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외국에 나가 논리적 설명은 없고, 선문답만 하니 한국불교의 세계화는 힘들겠죠!!
부처님께서 돈점에 있어서 어느것이 옳다 그르다 하신적이 있나요?()()()
@@아침이슬-y6i 글세요... 그게 과연 방편일까요?
어떤 사람의 맘을 깨우치고 그를 고통으로 부터 꺼내와야 하는데...
논리에서 밀려서... 말빨에 딸려서... 입으로는 승복을 내 뱉으나 맘속에는 거부감이 가득하며 머리로는 끊임없이 반격의 기회를 엿보게 만드는 것이 정법일까요? 아님 사변만 주구장창 늘어 놓은 인간의 귀싸대기를 쳐 올려서 정신이 번쩍들게 만드는 것이 정법일까요?
논리적이어야 세계화를 달성 할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편견에 불과 할지 모릅니다.
논리적 견고함이 특정 철학과 종교의 승리를 가져다 준다면 이 세계는 진즉에 하나의 철학이나 종교로 통일이 되었을 겁니다.
심지어 불교의 발생지였던 인도에서 불교가 망해버린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티베트 삼예논쟁을 들여다 보면 그들의 논리체계는 선불교 보다 더 우위에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저는 그 원인을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대략 30년 주기로 순백의 애기로 태어나고...
대략 20년간을 공부해서 5~60년을 살다가 간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20년의 기간 동안 어떠한 질문을 하더라도 그 것을 논파 할 수 있는 방대한 논리적 지식을 특정 개인이 축적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다라고 봅니다.
더군다나 잠자는 시간을 제하고...
일을 해서 밥벌이를 하는 시간을 제하고 나면 일반 대중들에게는...
31,039 구절의 성경도
당대의 모든 불경을 총 망라했다는 8만 대장경도
주역 24,207자
논어 12,700자
맹자 34,685자
시경 39,124자등
조선의 선비가 과거시험 준비를 위해서 외어야 했다는 485,228자 분량의 유교경전도...
그림의 떡에 불과 하며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과제일 뿐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종교나 철학중 하나를 선택해서 무작정 진리라고 믿으며...
목사나 스님이나 학자들에게 자신의 뇌를 맡기고... 자신은 기도나 핵심적인 문구 몇개만 인용을 하며 계율을 지키면서 살아가는데 만족을 할 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적인 체득이다 보니 더 어렵죠...
어쩌면 각 개개인의 논리적인 동의를 쌓아가서 궁극적인 해탈의 경지에 도달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그래서 발달이 된 것이 선불교라고 봅니다.
특정 개인에게 가장 자극을 줄 수 있는 주제나 순간을 발견해서 그 순간을 치고 들어 가는 것이죠...
그게 그나마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다라고 결론을 내린거겠죠...
물론 그래 봤자... 아주 극소수의 인원에 불과 하지만...
암튼...
대나무를 그리기 전에 이미 맘속에 완성된 대나무가 있다는 흉유성죽(胸有成竹)이라는 말이 있듯이...
맘속에 완성된 대나무가 있는 사람과...
정작 대나무가 자라는 것은 본적도 없고... 전해들은 이야기나 책으로만 대나무를 배운 사람이 말하고 묘사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것은 분명하겠죠...
선불교는 동아시아적인 전통에 따라서 도제식으로 맘속에 완성된 대나무를 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고...
또다른 계파는 논리.. 즉 집단지성의 힘을 믿고 대나무에 대한 온갖 다양하고 세부적인 묘사를 축적 해 나가는 방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논리적 접근은 현대수학의 수렴처럼... 정답에 아주아주 근접을 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완전한 정답이 될 수 없죠...
다만 많은 경우에... 혹은 공학적으로(일생활에 써먹기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문제가 없는 정답이 될 수는 있죠...
이 둘중에 어떤 것을 선택 할 것인가는 결국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닐가 싶네요...
마지막으로...
논리를 중요시 하는 서구 학자가 펴낸 책의 번역본인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에 나온 불교에 대한 묘사중 한구절을 소개 해 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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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불교는 초자연적 권위나 형이상학적인 사색보다는 인본주의적이며 매일의 삶을 사는 기술에 더 관심을 가진 세계관이다.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는 사색을 피하는 종교를 설파했다. 그는 세계의 위대한 형이상학자 중 한 명일 수 있으나 이론적으로 복잡하게 엮지 않았다. 이 세상이 영구한가 아닌가, 무한한가, 유한한가, 그리고 사후 부처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같은 질문에 대해 그는 고상한 침묵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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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마하연사가 마지막에 침묵을 지키면서 건넨 꽃은 '고상한 침묵'의 의미는 아니었을 까요?
선업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선업에의 집착이 번뇌를 일으킨다는 것이 동아시아 선종 불교 가르침의 핵심이 아닐까요? "선한 일에도, 악한 일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육조단경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선업에의 집착은 번뇌를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甘節 사문 시대때부터 있었던 말이며
자신의 본질에 붙는 흰업 검은업 모두 떼어낸 무착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석존 시절부터 있었던 말입니다. 세친보살의 형의 이름도 이 무착 아상가 이며 당시 인도인들에게도 중요한 개념이었읍니다.
어느 불교 가르침이건 정말 좋은 가르침이네요
@@harenochikoo 물론이지요. 가르침의 원형은 당연히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후세들이 보다 심화시킨 것이라 하면 되겠군요.
조사선의 문제는 단박에 깨닫기 위해 교학을 무시하고, 점진적인 수행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을 강조하다보니 깨달음의 요행수를 바라게 되고, 어떤 체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예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욕망에 사로잡혀도 괜찮다(또는 욕망이 아니라)고 하는 회괴한 말을 하게 됩니다
석가모니께서는 선함을 행하고 악함은 행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말씀중 가장 중요한 수행방법인 팔정도가 그 예입니다
즉 정사유 정어 정행 정명 정정진에서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계(선함)는 수행(깨달음)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며, 기초없는 상태에서 어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수행해 보시면 번뇌망상 때문에 수행의 진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번뇌망상 때문인데, 번뇌망상을 일어키게 되는 것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악함) 때문임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누구나 단박에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수행자들을 보면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조사선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김종용-p5z 수행을 무시한다? 그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수행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수행 또한 완성된다는 관점이 틀렸을까요? 이전의 오류를 반복한다면 깨달음이 없는 것이겠지요. 얽매이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지는 경지, 그것이 깨달음 아닐까요?
잘들었습니다
공부 많이 하세요. 이런 나열식 강의도 참 귀하네요.
자신들이 옳고 너는 안그렇고...
그래 분파가 생기고..
무지개 같죠. 분광기를 통과한 빛은
셀수 없을 만큼 달라집니다.
분광기를 없에면 되는데..
가 분광기가 내안에 다들 있으니
사람 수먄큼 분파가 나올 겁니다.
😊😊
파드마삼바바는 인도말, 마하연은 중국 사투리, 왕은 티벳말 쓰는데, 토론은 어느 말로 했나요?
동시 통역이 있었나요? 서로 제대로 의미가 전달될수 있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마하연은 어휘력이 딸려서 포기했을 수도...
또 논리적이고 말많은 인도인에게 중국사람은 애당초 토론 상대가 안됩니다.
스님과 재가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음의 불안(불쾌감)을 없애는게 핵심이잖아요. 그중에서 분별심을 없애는게 핵심이고요. 그런데 분별심을 없애도 먹고사는문제에서 오는 불안은 없어지지 않아요. 재가자 입장에서 남과 비교해서 더 돋보이기 위한 집착심이 탐욕인줄 알고 내려놓아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먹고사는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처자식도 없지, 공양받은것으로 먹는 문제 해결하지, 스님은 수행만으로 열반에 도달할수 있지요. 하지만 재가자는 열반까지는 힘듭니다. 그냥 지혜를 얻어서 불안이 많이 줄어들었다 정도죠. 약간의불안이 남아 있으니, 뭔가 좀 달래줘야 하고요. 그래서 선업도 지을려고 합니다. 선업을 지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스님입장에서는 그 기분 좋은 쾌감 조차 사라지면 불쾌감으로 변하니 짓지 말라고 할수 있죠..제가 티벳 왕 입장이라도 이런식의 주장을 하는 종파는 폐지시키고 싶겠네요.
얼음과 물 파도와물
차별와 평등
결국은 불이의 법 론란은 사라지고
원융의 도리로 회향~
김치 종주국이 한국인데 중국에서 갑자기 자기네가 김치의 종주국이라고 우기는 꼴...붓다가 아마 인도 북부에서 탄생했다면 아마 중국에서 탄생했다고 우길 나라 ..말할가치도 없는 논쟁
인도의 불교를 개인에서 중국으로 가면 가족으로 왜곡시킴
한국식 불교는 맞는데... 파인애플/고구마 피자, 카레덮밥, 아이스아메리카노, 라면, 짬뽕, 짜장면처럼...
종주국의 음식에서 벗어 났다고 해서 그 음식들이 맛이 없거나 먹어서는 안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더 현지화 되어 있고 더 대중적이고, 더 우리 입맛에 더 맞는 음식이죠...
사상과 종교도 마찮가지 입니다. 원조국이 아니니까 니들은 변종이고 사이비이며 틀린 것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웃긴 겁니다.
오히려 더 대중적인 힘을 가지도록 검증되고 골수만 남기고 새로운 생명력이 추가 되었다라고 봐야 합니다.
때때로 무엇이 진정한 피자이고 무엇이 카레인가에 대해서 종주국의 음식을 고찰 할 필요는 있지만
무조건 종주국의 래시피를 준수해야 한다라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과 발전성을 포기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이지... 이탈리아인과 인도인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다 보면... 중국의 라미엔과 일본의 라면을 넘어서는 불닭면이 나오고 짬뽕과 짜장면이 한국음식이 되는 거죠...ㅋㅋ
그 나라 민족성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겠죠. 타국에 좋은 걸 가져다 모방해서 비슷하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걸 잘하는 나라죠. 불교도 예외가 없겠죠.
향후에는 좀 더 깊이있는 논쟁의 근거들을 듣고 싶습니다. 마하연화상이 주장한 내용들중 어떤것들이 논박이 이루어져서 답을 못하고 패배를 인정했는지요...
육조단경을 보시지
티벳까지 유학 하느라 고생 많이 하셌네~
쌈예논쟁의 승패는.다르마 곧 불교의. 진리에 대한 관점보다는 아무래도 인도불교에. 대한 정치적 배려가 컸던 것 같다. 한편 신라의 무상선사가 티벳불교에 끼친 영향도 더 천착해 보면 어떨지?
마하연선사는,
선종 중 북종 신수스님 계열로,
불성이 실재한다는 불성실체설을 따랐는데,
중국선불교의 정통인 6조스님의 남종선 계통이 아니라서,
번쩍이고, 날가로운 선기가 부족했지요.
그때 남종선 계통의 고승이 갔더라면
논쟁에서 압도했을 겁니다.
그 당시 까지는 북종선 계통이 강성해서 저렇게 되었겠지요.
ㅋㅋㅋㅋㅋㅋmma한테 발리고 변명하는 중국무술다운 발언이네요.....
@@jungchaeheejung8207 남종선 계통의 스님이 가셨더라면 까말라실라 존자님과 서로 인정하고 논쟁을 안하지 않았을까요?
인도는 불교가 사라졌고 법맥은 중국으로 이전되어 빛을 냈네요.
정치란 생산성이 있어야 하니 돈교인 선불교 보다는 점교인 생산성있는 교학불교가 정치 하기에는 좋지 않을까 해서 왕은 점교인 교학불교에 손들어 주었을 긧이다~
이런 자들에 의해서 부처님의 법이 변화되고 변이되어 끝내는 부처님의 정법이 邪法이 되겠지요
달팽이 뿔만도 못한 지식의로..............
하!
스스로의 마음을 밝혀 등불을 삼아 부처님의 법을 밝혀 세상을 밝혀야 되겠지요()()()
인도에 불교가 있슬까.
정각을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로 다만 깨달음의 인지에 들어 본 자라면
지금의 논쟁들, 무아 또는 윤회,돈점등 이러한 것들의 논쟁이 안타까운 연민하는 마음이 들겠지요()()()
불교논쟁에 대한 요점만을 강의해야지 ᆢ쓸데없는 티벳얘기를 장황스럽게ᆢ할필요까지 ᆢ뭐하자는건지 ᆢ에휴
불교발전사가 부처님의 발걸음이다
불교 어전논쟁같은수행자들의 어리석음으로 선불교를 부처님께서 새로 만드신거다
모든존재는 재생되지 윤회하지않는다 그래서 티벳달라이라마가 완전 사쿠라같은 존재이다
한국의 무당들이 신물림을 계속하는데 티벳달라이라아도 이와비슷하다
그래서티벳불교는 사쿠라불교다
티벳불교 티베사람들 샤머니즘믿는 사람들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