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싼-r7s 음.... 잘못된 부분을 풀자면 선조는 이순신 장군님 편이었음. 대표적인 백의종군도.장군님을 모함한 원균 + 사대부들이 현장에서 즉결처형을 요구했지만 선조가 선방하고 장군님 편을 들어 일단 조정에 불러들여 이야기를 듣고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해서 합의점으로 된 게 백의종군이었음. 만약 선조가 장군님을 보호하지 않았으면 백의종군이 아니라 망나니가 내려갔을 겁니다.
@@남센터느림너무 야사 아닌가요..? 명은 자기들 영토에서 전쟁하기보다 조선에서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고 조선이 먹히면 장기간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최단시간 조선과 협조해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병력과 자본을 지원했고 명나라 신하들 조차 여진과 반란군등에 정신없고 피해가 심하니 더이상 피해보는건 조선에서 끝내고 동맹을 굳건히해서 그당시 후금을 견제하려 했던건데...진짠지 모르지만 꾸며낸 이야기같아요
@@남센터느림뭔헛소리야.. 만력제는 내란으로 정신없는데 일본침략까지 심지어 동맹국인 조선이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당시 후금이랑 견제하기에는 조선의 힘이 필요했고 자신의 나라에서 전쟁이 나느니 조선에서 막고 도움을 줬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충실한 신하의 나라로 만드려한거지 뭔 꿈이 어쩌구야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순신이 제일 대단한 이유는 자만하지 않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 생각함. 이순신을 가장 폄하한 자료가 난중일기라고 할 정도로 당시 사람들은 이순신을 칭송하는데도 정작 본인은 "운이 좋았다" "이러한 점은 아쉬웠다" 이런 식으로 회고함. 이러한 자세를 전쟁 내내 취했기 때문에 영웅이 된 것 아닌가 싶음.
거북선이 돌격선인 것을 잘 짚어주셨네요. 빠르게 적진으로 침투하여 적 대장선의 근접 포격용인 돌격선을 일명 렘잉 전술인(충파니 뭐니..하며) 들이받기 전술로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많으니... 돌격 과정에서 적들이 순순히 길을 내줄리 없으니 자연스레 충돌은 발생하겠지만, 최대속도 시속 9km로는 밀어내기 정도이지 부딪혀 배를 파괴할 수는 없을털데 말이죠..
@@m2cheki1 충파라는 단어는 영화 명량 이후에 성행한 단어. 과거에는 당파라 오류를 범하고... 과거 명량 영화 전 충파를 검색해보면 "멀리서 이는 파도"라고 했다가 영화 이후 들이받기로 바뀌더군요. 조선 수군은 물론 왜수군도 들이받기 전술은 행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16세기 해전술은 접현하며 총포를 쓰고, 접현 후 갈고리를 걸어 월선 백병전이 주된 전술로 봅니다만...
영상에도 말했지만 조선은 전쟁 준비를 했음. 당연히 지금도 과거도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국방비를 늘리고 평시에 전쟁 준비를 하면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군사력을 강화하게 되면 주변국을 자극하여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대표적인 주장이고요. 가장 중요한 건 목적은 달르지만 선조가 전쟁 준비에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겁니다. 성을 축성하고 유능한 장수들을 집안이나 인맥 같은 걸 보지 않고 능력에 따라 뽑고 그렇게 뽑은 유능한 장수들을 남해 일대에 배치했으며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극과 극인 이순신 장군님과 원균입니다. 개인적 견해이고 일부 역사학자들 주장이지만 원균은 무과를 통해 등용되었으며 북방에서 실적을 쌓아 선조의 픽업을 당해 경상 우수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보여준 행태들을 보면 원균이 쌓은 실적이 성안에 숨어 있다 부하나 기타 장수들이 쌓은 실적을 약탈하여 자신의 공적으로 올려 부풒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님의 함대에 기생충처럼 붙어 전투 중에도 전투를 하지 않고 바다에 떠 다니는 왜군들의 시체를 끌어올려 수급을 베어 실적을 쌓는데 급급했습니다. 심지어 수급을 취하려다 적들이 포진해 있는 곳에 들어가게 되어 이순신 장군님의 부하들을 위험에 빠뜨리기까지 했죠. 이 만행은 이순신 장군님읜 난중일기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빠졌는데 다시 말하지만 조선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음. 만약 원균이 일본의 선발대인 11만이 상륙했을 때 부산을 방어하고 판옥선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보급로를 막고 해안가에 저압ㄱ한 왜선들을 격파했다면 아니 최소한 부산성에 틀어 박히더라도 조정에 일본의 침략 사실을 봉화나 파벌로 전달했다면 조선이 그렇게 어이없게 털리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까놓고 말해 임진왜란은 원균이 롤로 치며 시작부터 미드를 달려 적들에게 2킬 씩 선물하는 빅트롤짓을 하지 않았따면 별다른 피해 없이 조선이 쉽게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일본이 수백 년 동안 전국시대를 거치며 실전에서 단련되고 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정병들이었다면, 조선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물량 공세를 막아내며 쌓아올린 축성 기술과 수성 전술, 전략들이 있었으며 그들을 지휘할 지휘관들은 북방에서 여진족들과 실전을 겪으며 단련한 지휘관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조선의 수성 능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는 거고 무기 체개조차 수비와 수성 그리고 다수를 잡아 족치기 좋은 무기 체개였다는 겁니다. 그 근거로 우선 조선은 신식조총을 만드는 대신 대량 살상무기인 포를 개발, 개량하였고 수성 능력은 세 가지 역사적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음. 1. 정선 장군의 500 명으로 가슴 언저리까지 올라오는 토성을 끼고 11만을 상대로 하루를 버텼으며 적의 침입과 그 숫자를 본진에 알리는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함(함정은 그 보고를 받은 게 원균 ㅆㄺ라는 거) 2. 정유재란 때 일어난 진주성 전투 : 의병 1500명과 진주성을 지키는 정규군500명 도합 2000명이 13만을 상대로 제대로 된 물자나 보급도 없이 성 내 물자가 다 떨어질 때까지 2주 동안 버팀. 3. 전라도 지역의 방어 : 이순신 장군님이 활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 전라도는 원균의 트롤링으로 국토 방어의 핵심인 신립이 이끄는 수도 정예병들이 삭제되고 조선팔도 각지에 퍼진 병력들이 각개격파 당하며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치면 본진이 털린 상황에서도 임진왜란 ~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의 공세에서 지켜내었음. 역사학자들이 원균을 한민족 역사의 최악의 빌런을 뽑으라면 무조건 베스트 3 안에 들어가는 이유가 임진뢔란 떄 조선이 그렇게 힘겹게 전쟁을 해야했던 원흉이면서 임진왜란의 피해 70%가 몰린 정유재란을 일어나게 한 원인 제공자(이순신을 모함해 실각시키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치한 것도 모자라 일본에게 일부러 가서 술을 주고 자신의 위치를 숨기지도 않으며 매일 선상 파티를 벌이는 짓을 하며 결국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킴)이며 이때 입은 피해로 인해 경신대기근 때 국고에 쌀 한 톨도 없어 인구 절반이 컷 당한 걸 명나라 고려 빠돌이 만력제가 구원하며 조선은 명나라에 6.25 때 미국이 지원한 것과 같은 은혜를 받게 되어 지금의 미국과 같은 지위를 확보한 ㅊ청나라와 전쟁을 병상에서 막 일어난 상태로 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그 여파로 청나라에 오랜 시간 내정간섭을 받으며 발전에 제약을 받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일제 강점기까지 오게 한 시작점이 바로 원균이기 때문임. 원균만 없었어도 ........ 2차 대전 일어날 시점에 일본과 비슷한 또는 그 이상의 산업화 근현대화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일제 강점기가 오지도 않았겠죠. 오히려 독일 믿고 덤빈 일본을 역관광 시켰을 수도.
조선은 근대화 절대 불가능했음ㅋㅋ 엄격한 신분사회에 기술을 멸시하고 상업을 천하다고 생각했는데 근대화가 가능할리가 일본은 저때 이미 근대화할 기초체력은 갖췄음 교통,상업 발달으로 글을 쓸줄 아는 사람도 많았고 장인들을 우대해줬음 무엇보다 노예가 없고 신분제도 엄격하지 않았음 게다가 섬나라라는 이점까지 더해져 강해진거지 우리가 여기까지 온건 한번 제대로 박살났기 때문임
@@꿀꿀-p6x 고종은 구한말 상황에서도 근대화 이미 99% 완료 했는데요???? 뭘 불가능함 ㅋㅋㅋㅋㅋ 그리고 기초 체력이라 하셨는데 임진왜란 기준으로 기초 체력은 조선이 일본 보다 더 우위에 있었는데요??? 일단 교통과 상업은 임진왜란 기준으로 고만고만했고 가진 기술은 오히려 조선이 몇 단계 위였음. 그리고 글을 쓸 줄 아는 사람 기준은 한글 때문에 조선이 일본 보다 더 압도적으로 위죠. 그리고 장인을 우대한 건 조선이나 일본이나 같아요. 중요 기술을 가진 자들은 국가에서 보호하고 지원한 건 조선이나 일본이나 같았음. 그리고 님아..... 일본은 그냥 평민 = 노예였는데요???? 말 그대로 일본은 세금을 중세 시대 기준 존재하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세율을 책정했고 세금을 걷는 향리의 재량에 따라 70~90%까지 걷어가 말 그대로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놔두고 다 가져간 게 일본임. 거기다 사무라이들이 자신들을 죽여도 합법이고 아내를 겁탈을 해도 괜찮은 나라가 중세 시대 일본인데요.??? 인권 x 재산권 o (but 세금 70~90%) 중세 유럽의 노예랑 다를 게 뭐 있음???? 반면 조선 시대 노비의 경우 개인 재산을 가질 수 있고 인간으로 법의 보호를 받았으며 단 하나 소속된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제약 뿐인데....이걸 노예랑 비교하면 실례죠 ㅋㅋㅋㅋ 참고로 노비에서 면천되는 건 쉽습니다. 세금도 안 내고 군역도 없이 다른 사람 밭에서 일해 번 돈이든 뭐든 정해진 돈을 모아 지불하면 바로 노비 신분에서 양인 신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임진왜란 같은 전쟁터에 의병같은 걸로 자진 참전한 후 전쟁이 끝나면 면천되는 경우가 있죠. 참고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한 노비들은 전부 면천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왕실은 틈만 나면 기회만 되면 노비 제도를 폐지하려 했었고요. 임진왜란이 없었으면 왕권이 그렇게 약화될 리가 없었을 것이고 노비라는 신분은 더 빨리 폐지가 되었겠죠. 그럼에도 노비들이 나라에서 대가 없이 면천해주지 않으면 굳이 면천하지 않았던 건 노비로 사는 게 더 편했기 때문입니다. 까놓고 말해 결혼 하기 전이나 자신 입으로 노비라고 말하거나 호패(신분증)를 까지 않는 이상 상대가 노비라는 걸 알기 힘들었고 세금을 내지 않고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결혼에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었죠. 그럼에도 법의 보호는 전부 받았으니..... 지금 시대에 노비하라고 하면 대한민국 국민 99%가 노비할 거라고 구한말처럼 스스로 노비가 될 겁니다. 즉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혹은 원균이 없어서 별 피해가 없었다면 근대화 역량은 조선이 일본보다 압도적으로 높고요. 왕권이 약화 되지도 않았을 테니 노비 제도도 임진왜란 기준 10년 내외로 폐지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을 수 있었겠죠. 거기다 청나라와 전쟁도 할 일이 없어질 거니 국토도 경제도 상업 기반도 멀쩡했을 거니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할 이유도 없으니 일본과 동시에 혹은 더 빨리 유럽과 무력을 하기 시작했겠죠.
@@꿀꿀-p6x 휴대폰으로 달아서 그런가 pc로 안보여서 다시 달게요. 일단 조선의 근대화 조건은 일본 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였습니다.고려말 권력층읩 부패가 재물에서 비롯된다 생각하여 상업을 천대하는 분위기는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압박하거나 국가적으로 못 하게 하지는 않았고 ㅋㅋ 애초에 그렇게 해도 일본 보다 임진왜란 기준 기술적인 우위는 확실했어요. 님이 말한 기초 체력도 임진왜란 기준 조선이 일본 보다 우위였습니다. 가진 기술 조선 > 일본 상업 조선 = 일본 문맹률조차 조선이 더 낮았죠. 까놓고 말해 문맹률은 일본이 조선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한자를 병행하지 않으면 히라가나만으로 문맥의 의미가 완성되지 않는 일본어 특성상 지금 일본조차 문맹류이 50%일 정도로 완전히 기억하고 익히는게 힘들 수 밖에 없는 반면 조선은 훈민정음 발명으로 인해 권력층은 한자와 훈민정음 병행으로 피지배층인 일반 양민은 훈민정음을 쓰는 미세한 이원화가 되었지만 문맹률 자채는 압도적으로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노예.....노비를 말하시는 거 같은데ㅋㅋㅋㅋㅋㅋㅋ 일본의 평민은 조선 노비들보다 못 한 삶을 살았어요. 까놓고 말해 그 당시 일본 양민은 그냥 노예죠ㅋㅋㅋㅋ 생산하여 벌어들인 수입의 70~90%를 말 그대로 먹고 죽지 않을 정도만 남기고 세금으로 걷으며 그렇게 내도고 받는 대우는 조선의 노비는 고사하고 유럽의 흑인 노예랑 좋은 경쟁자가 될 정도로 최악이었던 게 중세 시대 일본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분제도는 일본이 더 엄격했어요. ㅋㅋㅋ 정확히는 계층 구분이 명확했고 그에 따라 지배와 피지배 구분이 더 확실했죠. 그 영향이 지금도 일본 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을 정도로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비교를 하려면 같은 임진왜란 당시인 중세 시대로 하던가 조선이 임진왜란 때 원균이 없어 별다른 피해 없이 일본을 막아내었다는 전재로 깔고 근현대를 비교하던가해야지... 왜 조선은 중세고 일본은 에도부터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가 시작된 상황을 섞어 놓고 비교하는 거죠???
요새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단순히 임진왜란보다는 좀 더 포괄적으로 조일전쟁 혹은 동아시아 대전쟁으로 불러야된다는 시각도 있을만큼 거대한 전쟁이었죠. 당시 세계 1위의 육군 군사력을 갖춘 중세 일본이 인도까지 정복한다는 군사적 야욕을 가지고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한 대전쟁이 임진왜란인데 임진왜란이 단순히 이순신 장군만 잘싸워서 이긴게 아니라 조선의 대포 같은 화약 기술력, 군함이 워낙 뛰어났기에 이긴 측면도 있음. 조선을 흔히들 화약강국이라고 하는데 조선이 초기까지는 전쟁이 많아서 실전군인들이 많았지만 세조 이후부터는 전쟁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실전 경험이 줄어들다보니 군인의 전투력은 줄어들지만 반대로 화약 기술력만큼은 어마무시하게 강한것도 사실이었음. 문제는 실전 경험이 적다는건 조선이 발명한 우수한 화약무기들을 정작 조선군이 쓰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 그래서 임진왜란때 조선은 무기 수준들은 어마어마하게 강한데 군인의 전투력은 그 무기에 반도 못따라갔음. 이순신 장군님은 그 조선의 화약무기들을 사용하는 법을 군인들에게 알려주신 것이고.
일본은 정권이 바뀌고 중국은 아예 지배층의 종족이 바뀌며 잘 드러나진 않지만 서양의 자원을 사용하며 동남아, 아프리카 등지의 용병도 들어오는 등 16세기의 대전쟁이 맞음. 시작부터 20만 대군이 배 타고 침략하고 주요 참전국들이 국가의 자산을 다 털어가는 총력전을 벌였기 때문에 단순 '난''이라 칭하기엔 규모가 너무 큼. 임진전쟁이 더 좋은 호칭이라 생각함.
늪이 아니였어도 참패했을겁니다 이미 기마대전술은 일본 내에서도 많이 있었고 정발장군의 부산성전투 송상현장군의 동래성전투만 봐도 열심히 수성했지만 별다른 피해도 못주고 대패했는데 허허벌판에서 공성도 아니고 벼랑끝 평야전투라니..일본군에게는 호재고 오합지졸조선군은 공포 그자체 였을겁니다 전쟁이라고는 해본적도 없는 붓들고온 선비들과 농기구들고 온 백성들로 배수의진? 탄금대전투는 신립의 무능한 전투 였습니다.
일단 제 의견을 말하자면 신립은 북방에서 여진족들과 싸우며 명성을 얻은 장군이고 그 신립의 최정예 부대가 바로 기병부대, 궁기병이였죠 임진왜란 초반에 가장 큰 문제점은 적에대한 조사가 매우 형편없었다는 겁니다. 특히나 일본군은 빠른속도로 치고 올라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에는 시간이 매우 부족했죠. 하지만 적의 보병이 주력군이란 것은 들었을 것 입니다. 신립은 상대방의 장점은 없애고 나의 장점을 키워야한다고 적힌 손자병법에 나온 병법을 자기 뜻대로 해석했고 지피지기(나와,상대를 파악)하지 않은채 작선을 세우죠. 수성전을 하면 자신의 장점인 기병을 활약할 수 없으니 기병이 싸우기 좋은 평지인 탄금대에서 적 보병을 격파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다만 적이 너무 빠르게 북상한 나머지 탄금대의 자세한 지형과 상황을 캐치하지 못했기에 기병의 장점이 살지 못했고, 또한 적 지휘관이 유능했던 장군 고니시 유키나가 였기에 전술 싸움에서 진겁니다. 고니시의 전략은 상대의 장점인 기병을 먼저 없애야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신립의 기병대가 정면에서 돌격하자 부대를 양익으로 나눠서 조총으로 집중사격 했습니다. "십자포화" 즉 크로스 파이어로 신립의 장점인 기병대는 순식간에 전멸합니다. 일단 그런 훈련이 안된 말은 조총처럼 큰 소리가 나면 놀라서 멈추거나 날뛰게 됩니다. 기병을 상대하기엔 당연 최고는 총이였죠. 그리고 사실상 애초에 조선군의 수가 8000~16000 명이라고는 하는데 신립의 별동대를 제외한 대부분이 훈련이 안된 민병대였습니다. 그렇기에 신립의 정예군이 격파당한 것을 본 훈련이 안된 농민들은 당연 놀라서 순식간에 도망가며 와해되었을 겁니다. 반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선봉군은 당연 전국시대에서 실전으로 단련된 정예군이였구요. 수도 엇 비슷하거나 훨신 많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수성이 당연 올바른 판단이였으나 일본군은 성 하나하나 점령하는 것보다 속전속결로 한양을 점령하는게 첫 목표였기에 공성전으로 오랜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서 한양으로 가려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신립의 입장에서는 북상하는 일본군을 막아야했기에 수성이 아니라 나가서 전투하려 한걸지도 모르죠. 성 안에만 있다가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버리면 막을수가 없었을테니
윗분말씀이 맞는 얘기지만 질문하신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수있어 말씀드립니다. 신립장군의 주력부대는 궁기병입니다. 때문에 조총중심의 보병을 공략하기 쉬울것으로 판단해 시야가 트인 개활지를 전장으로 놓고 싸운게 패배의 가장큰 이유였습니다. 당시 개념으로는 보병은 기병돌격전으로 쉽게 제압할수있는 정도로 여겼기때문에 지형이나 상대부대의 무장상태나 전술에 따라 유려하게 전략을 구사할수있는 왜군에게 참패한것이죠.
탄금대 전투의 패인은 늪지대가 아니라 전술 연계의 실패이자 고립무원에서 시작함 배수진이 아니라 유사시 성으로 후퇴로는 확보했어야 했고 일본군들의 진로를 비스듬히 열고 측면에서 대치하며 이동하다 탄금대가 아닌 조총에 대한 방어와 기병 돌격에 유리한 지형으로 끌여들여야 했음 산악과 평지가 공존하는 지형이었다면 해볼만한 전투였음 물론 승전했다해도 즉각 후퇴했겠지만 일본군의 진격은 보류되었을 것
미스테리에 한 이유가 비가오는 조건인데 비가 오면 조총을 사용할수 없다고 생각해 돌격 했을 텐데 모노노케히메에 나오는거 처럼 파라솔을 땅에 박아 놓고 돌진해 오는 말들을 향해서 사격을 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방에서 칠경우 사격의 집중도가 떨어져서 한쪽으로만 돌격한건 이상하고 뭔가 협동공격을 하기로 했는데 도주해 버린 작전 미스도 있었다고 보는게 그냥 빈틈으로 들어가서 말발굽으로 밟고 다녀도 서로에게 총을 쏘기도 뒷편이나 중앙에 갖힌 병력은 갈대 밭속에 있는것 같아서 아무것도 안보이고 비명소리과 말발굽소리에 병기가 부딛소리만 들리고 낑겨서 아무것도 못 하는 식이라 서로가 압사되어 밟히고 결국 도망갈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쫒아다니며 밟아버리는게 기병전술중에 하나인데 그냥들 늪에 빠져서들 허우적 대다가 다 전멸한 걸로만 나와서 아쉽고 우천시에 공성은 위험해서 표현을 안하다 보니 드라마에서 재현을 안해도 기록은 남아있을듯 해요 활이 비에 불어서 활대가 휘어 못쓰게 되는 약점이 있는데 말이죠
이게 너무 우리입장이나 전술만 갖고 얘기를 하는데 전쟁의 진영은 최소둘인데 일본의 전술수행능력이나 그들의 대처역시 생각을 해야한다고 봅니다. 신립의 부대도 우리입장에서나 정예지 규모면에서는 진짜 한참못미치는 수준이라 신립입장에서는 빠르게 회복이 힘든정도의 타격을 줘야 한다는정도는 생각했다고 봅니다. 조정에서조차 상대군 규모파악이 제대로안되는 상황인데 전투하나만 갖고 어떤 평가를 하기에는 형평성이 너무 떨어진다고 봅니다. 그가 진정 무능한건지 아니면 그런 무리한 작전아니면 그 어떤희망도 없는 절망적상황이었는지에 대한 해석도 있어야한다고 봅니다. 그래도 조선 최고부대 지휘관인만큼 인재발탁등용인사에 천재인 선조가 신뢰했다는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봅니다
여진족과의 전투는 소규모 1000명 이내의 전투가 많았죠 실제 2만에 가까운 적을 상대하는 대규모 회전에 대한 경험은 신립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기병 돌격에 대한 조총부태 운용에 대해서는 전술 전략적으로 조선이 따라오지도 못할만큼 압도적 우위에 있었어요 조총도 일렬로 쏘지 않고 세줄로 나눠서 장전시간을 최소화 시키는 전략들을 썼었구요 정보의 부재도 중요했고 역량 자체도 상대가 안됐었던 그런 전투죠
행주대첩은 와전된 기록이 전해진답니다. 사실은 작은 토성이며, 행주치마로 돌..? 보다는 신기전을 장착한 화차가 승리의 관건이었다지요! 세종때 제작된 화차는 개량을 했는데, 문종 때 개량된 것을 문종 화차라 하고, 행주대첩때는 변이중 이라는 사람이 개량한 화차라고 한답니다.
그랬으면 혼란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중국이나 일본에 더 빠르게 병합 당했겠지? 백성들이 나라 만들고 하는 게 저 시대에 불가능함 귀족 계급만 가능하지 지금 같이 민주주의 선거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백성들이 나라 만들려고 했다면 국가 운영 능력도 없고 그냥 산적왕 같이 여기 저기 도시 국가 생기지
@@jindol9526 강병책을 받아들이고 국란이 없게 하는 게 옳은 판단이죠. 신하를 질투해서 공도 없는 인간을 벼슬 올려주고, 전선의 장군을 직위해제 시키고 고문 주는 게 아니라요. 아, 그러면서 세자는 화살받이 시키고 본인은 나라 버리고 망명하려고 했었죠? 이게 현대의 관점이라서 잘못돼 보이는 건가요? ㅋㅋ
무시하고 돌아가면 남해안 거쳐 서해안으로 올라가는 함대+보급선들의 뒤통수를 언제 어디서 나타나서 칠지 모르는데, 일본군 입장에서는 재앙 수준인 이순신이 배가 13척밖에 안남았다고 하니 이때가 아니면 안된다 마인드였죠. 그리고 양측 다 첩보원들 풀어서 정보전 열심히 했습니다.
손자병법과 같은 도서는 특히나 젊은 여자들이 굉장히 싫어하는 책인데 저러한 도서를 30분이 채 안되는 시간이 이렇게 요약하여 양질의 영상을 만들어줘 잘 볼 수 있었습니다. 매번 답글은 달지 못하지만 항상 빠짐없이 챙겨보고 있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길 바랍니다, 쏨작가 양^^
💚쏨작가 신간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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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잘 봤습니다. 딕션도 너무 좋으시고, 시청자들이 이해되게 깔끔하게 정리해주시는 것 같아요. 짱!
선조는 국란 극복속에서도 지자존심과
권력밖에는 관심없었습니다
요동으로튈려다 거부당해서 그제야
자기주제를좀안거죠
정말 딕션 너무좋아요👍👍
ai 아님?
이순신 장군은 정말 인류사에 몇 없는 불세출의 영웅인듯..
원군 선조가 영웅을 가로막아도 결국 영웅은 이름을 남길지어다
이순신때문에 조선백성들은 지옥같은 신분제, 자국민 노예제 사회인 조선에서 400년이나 더 고달퍼했다 이 등싱아
@@부싼-r7s 음.... 잘못된 부분을 풀자면 선조는 이순신 장군님 편이었음.
대표적인 백의종군도.장군님을 모함한 원균 + 사대부들이 현장에서 즉결처형을 요구했지만 선조가 선방하고 장군님 편을 들어 일단 조정에 불러들여 이야기를 듣고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해서 합의점으로 된 게 백의종군이었음.
만약 선조가 장군님을 보호하지 않았으면 백의종군이 아니라 망나니가 내려갔을 겁니다.
굼굼한게 오랑케는 어느 나라고, 명나라 그리고 청 나라는 어느 나라인거죠?
저 당시 강간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럼 그 여인들은 그 아이들을 낳으면 어떻게 보면 우린 중국 피가 석인 사람인가요?
이순신 장군님의 활약은 들어도들어도 소름돋음. 의병들의 저항부분은 소름돋게 멋있어요
이런거 보면 임진왜란, 6.25때 우리 선조들은 대단한것 닽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하지만 언제 들어도,
몇 번을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고
감동은 늘 새롭다.
불멸의 이순신!!
해전은 승리지만 전쟁에선 패배였찌..임진왜란 + 정유재란으로 조선군+민간인 100만명이 사망하고 전국토가 초토화되어 쌀생산량이 300만석에서 100만석으로 감소하며 굶어죽은 아사자만 20만명...일본군? 고작 3만명 사망하고 일본본토는 아무런 피해도 겪지않아 쌀생산량이 1500만석에서 2000만석으로 가파르게 상승함..종전까지 일본열도로빠져나간 조선의 금,은, 성노리개로 끌려간 여자만 10만명; 한국인들 종특이..부끄럽고 치욕적인 역사는 감추고싶으니까 불과 200년뒤에 식민지가 되버리지ㅉ
보통 임진왜란의 영웅적인 모습만 기억하지만 이번 영상에서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시대상에 기인한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알아갑니다. 깔끔하고 유익해서 26분 뚝딱!
손자병법은 누가 만든 책인가요?
지금이나, 그때나 꼭 나라를 지키는 건
의병이고 국민이고,
나라를 위해 늘 나서주시는 분들께
감사하고, 이 DNA 어디 안가네요.
한국인들…
리더한명 잘 만나는게 이렇게 중요하다.
세종대왕
이순신장군
박정희대통령.
@@포대기 박정희 대통령 아니였음 지금 필리핀수준으로 ..
조선은 태생 자체가 쿠데타라...
@@포대기박정희요..?
왜요..? 경제성장을 시킨건 사실이지만 20년넘게 독재하고 부마항쟁피해자가 얼마나 많은데
잘한것도 있지만 해선안될 일도 많이 했던인물입니다 세종 이순신 이분들에게 비비는건 말도 안됩니다
@@user-ml7vm3lc1y 박정희 대통령은 625때 공산당과 싸워서 우리나라를 구했어. 625때 통일을 방해하고, 우리국민 300만명을 죽인 중공에게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자. 투표는 주권이니, 157만 중공인의 투표권도 없애고.
임진왜란은 진짜 이순신 장군님을 신이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짜...
노량해전은 진짜 말도안되는듯 백의종군으로 석나갈대로 나갓는데 왕에대한 충성심보다는 국민과 나라를 지키고자 함이 컷던거같음
저정도로 당하고 통수맞고 어머니 아들 다잃고 조정에서 트롤짓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노량해전이 마지막이라서 전사하자는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정도로 마음의상처를ㅠ ㅠ
해군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황진장국이 있었죠 황진장군이 연전연승으로 마지막에 진주성 시민보호하려고 진주성에 주둔해서 일본군 10만을 호남쪽으로 다시 재진격하지 못할수준으로 피해를 입혀서 이순신이 해군정비해서 활약할수있었음
실제 황진장군이 진주성에서 최후까지 저항하다 전사하자 이순신이 "나랏일이 어긋났다" 라고까지 말했으며 당시 진주성을 점령하려고 일본군 10만이 진을 친거보고 권율,곽재우도 철군했는데 황진이 700명 데리고 진주성에 들어감 ...
맞습니다. 조선인들을 조선왕조 밑에서 수백년 더 노비로 고생하게 하기위해서 벌을두기위해서 이순신을 보낸것
너무나도 유익한 영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출병함 완전 이거 잘못된 정보
임진왜란에 대해 모르는부분도 알게되었네요. 감사합니다!
그 실제있엇던 일인지는 모르지만
저때 명이우리적극적으로도와준이유가
만력제가 꿈에서 삼국지 유비가나와서 선조는 형제의환생이니 꼭지켜주어라 이런 꿈을 꿔서
갑자기 급발진했다는 이야기가있습니다
말도안돼지만 완전 허무맹랑하진 않은게
자기나라한테도 돈한푼안쓰고 일이란일은
신하들한테맡기고 펑펑놀던 만력제가
갑자기 남의나라전쟁에 이상할정도로
열정을 보였다는게 이상하긴하죠
@@남센터느림너무 야사 아닌가요..? 명은 자기들 영토에서 전쟁하기보다 조선에서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고 조선이 먹히면 장기간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최단시간 조선과 협조해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병력과 자본을 지원했고 명나라 신하들 조차 여진과 반란군등에 정신없고 피해가 심하니 더이상 피해보는건 조선에서 끝내고 동맹을 굳건히해서 그당시 후금을 견제하려 했던건데...진짠지 모르지만 꾸며낸 이야기같아요
@@남센터느림뭔헛소리야..
만력제는 내란으로 정신없는데 일본침략까지 심지어 동맹국인 조선이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당시 후금이랑 견제하기에는 조선의 힘이 필요했고 자신의 나라에서 전쟁이 나느니 조선에서 막고 도움을 줬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충실한 신하의 나라로 만드려한거지 뭔 꿈이 어쩌구야
@@남센터느림국력이 약해질 만큼 도와준 건 의문을 제기할 만 하지만 중원 진출을 노리는 일본이 조선을 먹는 순간 명까지 노릴 수 있다는 점을 봤다고 봅니다
단 한명에.인간이 이토록 위대할수 있다는것에 경이로울 뿐....
자주 좀 와주세용 ㅠㅠ
일본의 공격목적이 도자기때문이기도 하다해서
도자기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실제로 많은 사기장들이 잡혀갔고 이도다완이라는 최고의 찻잔을 가지기를 원했던 다이묘들의 야욕에 대한 이야기도
정말 사실인지 또 전쟁원인에 반영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님. 도자기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부수입일 뿐, 일본의 본목적은 어디까지나 정복이였음. 아무리 도자기가 경제적 가치가 있다지만, 자기영지 떠나서 외국에서 싸우가 다 싫어했음.
존경스런 위인 이순신 장군님
이순신은 한마디로 그릇이 큰 사람이었음
역겨운 정치질 생각했으면 전쟁터 나라도 안감
이순신이 그릇은 작을걸?
이순신은 진짜 미래에서 타임머신 타고온 사람인듯... 소설보다 더 소설같음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볼께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순신이 제일 대단한 이유는 자만하지 않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 생각함. 이순신을 가장 폄하한 자료가 난중일기라고 할 정도로 당시 사람들은 이순신을 칭송하는데도 정작 본인은 "운이 좋았다" "이러한 점은 아쉬웠다" 이런 식으로 회고함. 이러한 자세를 전쟁 내내 취했기 때문에 영웅이 된 것 아닌가 싶음.
진짜 재밋게 잘 봣습니다!!
한반도 역대급 전장의 신 이순신 장군님.
이순신 장군이 지폐에 없다는게 아쉽다
@@제너시스동전에 있슈
@@boriborissal-00그건 아는데 이렇게 큰업적을 세웠는데 지폐에 없고 동전에 있다는게 아쉽다는거지
@@제너시스왜 동전이냐면 그 당시 카드 문화가 발전 하기 전에 동전을 많이 쓸 시절에 그 만큼 이순신
장군을 많이 접할수 있다는게 동전이래서 동전에 있습니다
@@주원킴-e7i 2000년생이라 몰랐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 디테일은 좀 다를수 있어도 전체적인 줄기는 흡입력있고 설명도 깔끔해서 좋네요 ^^
말씀하신대로 학익진은 상대보다 숫자가 많을때 사용하는 진인데요
한산도 대첩은 조선수군이 더 적은 숫자인데도 일본 수군 상대로 학익진을 사용해서 이긴 전투로 알고있었는데 혹시 어디서 정보를 가져오신건지 알수있을까요? 이참에 더 찾아보고싶네요 😊
왜군은 작은 배들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실제 전력은 비슷했다는 말이 있죠.
@@너와나-h3b 부끄럽고 치욕적인 역사는 감추고싶은게 한국인들 종특이라 축소시킨게 많을듯..해전은 승리지만 전쟁에선 패배였는데말입니다..임진왜란 + 정유재란으로 조선군+민간인 100만명이 사망하고 전국토가 초토화되어 쌀생산량이 300만석에서 100만석으로 감소하며 굶어죽은 아사자만 20만명...일본군? 고작 3만명 사망하고 일본본토는 아무런 피해도 겪지않아 쌀생산량이 1500만석에서 2000만석으로 가파르게 상승함..종전까지 일본열도로빠져나간 조선의 금,은, 성노리개로 끌려간 여자만 10만명; 한국인들 종특이..부끄럽고 치욕적인 역사는 감추고싶으니까 불과 200년뒤에 식민지가 되버리지ㅉ
이런 광고라면 환영. 구독 박고 갑니다
거북선이 돌격선인 것을 잘 짚어주셨네요.
빠르게 적진으로 침투하여 적 대장선의 근접 포격용인 돌격선을
일명 렘잉 전술인(충파니 뭐니..하며) 들이받기 전술로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많으니...
돌격 과정에서 적들이 순순히 길을 내줄리 없으니 자연스레 충돌은 발생하겠지만, 최대속도 시속 9km로는 밀어내기 정도이지 부딪혀 배를 파괴할 수는 없을털데 말이죠..
충파로 싸웠다기 보다는 충파를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보는것이 옳습니다.
@@m2cheki1 충파라는 단어는 영화 명량 이후에 성행한 단어.
과거에는 당파라 오류를 범하고...
과거 명량 영화 전 충파를 검색해보면
"멀리서 이는 파도"라고 했다가 영화 이후 들이받기로 바뀌더군요.
조선 수군은 물론 왜수군도 들이받기 전술은 행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16세기 해전술은 접현하며 총포를 쓰고,
접현 후 갈고리를 걸어 월선 백병전이 주된 전술로 봅니다만...
@@m2cheki1 충파를 시도하면 안됨. 기본적으로 철갑선이 아니고 목재선인데 배가 귀한 조선수군의 입장에서 그런 짓거리를 할 필요가 없음.
한산도 대첩 당시 일본 수군 사상자 6500 기준은 어디서 확인하신 건가요?일본 수군이 7000 정도 라고 듣긴 했는데 자료는 딱히 찾지 못 해서요 생존자 300 하면 얼추 비슷한 것 같아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일본 기록입니다 국방티비 보세요
이 목소리 디른 채널에서도 들은 듯한 느낌이네요... 편안하게 듣기 좋네요
역시 전쟁은 정보와 보급으로 하는것같네요
저때 만력제 꿈속에서 삼국지 유비가나와서
선조는 우리형제의 환생이니 꼭 도우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우리를적극적으로 도왔다는이야기가있습니다
신하들이 직무복귀데모를벌여도
눈하나꿈쩍않다가유되 임진때만열심히 일한게 말이안돼서 그런거같아요
@@남센터느림그건 임진록 소설 이야기 아닌가?
@@남센터느림관우가 나와서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니 도우라고 한 거 아님?
너무 재미있게 좋은 내용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진왜란은 흥미로운 소재가 많은듯
이 영상을 보면서 이순신이 그냥 대단한게 아니라 정말로 대단하단 사실을 느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그는 하늘이 내리신 인물입니다
영상에도 말했지만 조선은 전쟁 준비를 했음.
당연히 지금도 과거도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국방비를 늘리고 평시에 전쟁 준비를 하면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군사력을 강화하게 되면 주변국을 자극하여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대표적인 주장이고요.
가장 중요한 건 목적은 달르지만 선조가 전쟁 준비에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겁니다.
성을 축성하고 유능한 장수들을 집안이나 인맥 같은 걸 보지 않고 능력에 따라 뽑고 그렇게 뽑은 유능한 장수들을 남해 일대에 배치했으며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극과 극인 이순신 장군님과 원균입니다.
개인적 견해이고 일부 역사학자들 주장이지만 원균은 무과를 통해 등용되었으며 북방에서 실적을 쌓아 선조의 픽업을 당해 경상 우수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보여준 행태들을 보면 원균이 쌓은 실적이 성안에 숨어 있다 부하나 기타 장수들이 쌓은 실적을 약탈하여 자신의 공적으로 올려 부풒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님의 함대에 기생충처럼 붙어 전투 중에도 전투를 하지 않고 바다에 떠 다니는 왜군들의 시체를 끌어올려 수급을 베어 실적을 쌓는데 급급했습니다.
심지어 수급을 취하려다 적들이 포진해 있는 곳에 들어가게 되어 이순신 장군님의 부하들을 위험에 빠뜨리기까지 했죠. 이 만행은 이순신 장군님읜 난중일기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빠졌는데 다시 말하지만 조선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음.
만약 원균이 일본의 선발대인 11만이 상륙했을 때 부산을 방어하고 판옥선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보급로를 막고 해안가에 저압ㄱ한 왜선들을 격파했다면 아니 최소한 부산성에 틀어 박히더라도 조정에 일본의 침략 사실을 봉화나 파벌로 전달했다면 조선이 그렇게 어이없게 털리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까놓고 말해 임진왜란은 원균이 롤로 치며 시작부터 미드를 달려 적들에게 2킬 씩 선물하는 빅트롤짓을 하지 않았따면 별다른 피해 없이 조선이 쉽게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일본이 수백 년 동안 전국시대를 거치며 실전에서 단련되고 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정병들이었다면,
조선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물량 공세를 막아내며 쌓아올린 축성 기술과 수성 전술, 전략들이 있었으며 그들을 지휘할 지휘관들은 북방에서 여진족들과 실전을 겪으며 단련한 지휘관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조선의 수성 능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는 거고 무기 체개조차 수비와 수성 그리고 다수를 잡아 족치기 좋은 무기 체개였다는 겁니다.
그 근거로 우선 조선은 신식조총을 만드는 대신 대량 살상무기인 포를 개발, 개량하였고 수성 능력은 세 가지 역사적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음.
1. 정선 장군의 500 명으로 가슴 언저리까지 올라오는 토성을 끼고 11만을 상대로 하루를 버텼으며 적의 침입과 그 숫자를 본진에 알리는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함(함정은 그 보고를 받은 게 원균 ㅆㄺ라는 거)
2. 정유재란 때 일어난 진주성 전투 : 의병 1500명과 진주성을 지키는 정규군500명 도합 2000명이 13만을 상대로 제대로 된 물자나 보급도 없이 성 내 물자가 다 떨어질 때까지 2주 동안 버팀.
3. 전라도 지역의 방어 : 이순신 장군님이 활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 전라도는 원균의 트롤링으로 국토 방어의 핵심인 신립이 이끄는 수도 정예병들이 삭제되고 조선팔도 각지에 퍼진 병력들이 각개격파 당하며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치면 본진이 털린 상황에서도 임진왜란 ~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의 공세에서 지켜내었음.
역사학자들이 원균을 한민족 역사의 최악의 빌런을 뽑으라면 무조건 베스트 3 안에 들어가는 이유가 임진뢔란 떄 조선이 그렇게 힘겹게 전쟁을 해야했던 원흉이면서 임진왜란의 피해 70%가 몰린 정유재란을 일어나게 한 원인 제공자(이순신을 모함해 실각시키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치한 것도 모자라 일본에게 일부러 가서 술을 주고 자신의 위치를 숨기지도 않으며 매일 선상 파티를 벌이는 짓을 하며 결국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킴)이며 이때 입은 피해로 인해 경신대기근 때 국고에 쌀 한 톨도 없어 인구 절반이 컷 당한 걸 명나라 고려 빠돌이 만력제가 구원하며 조선은 명나라에 6.25 때 미국이 지원한 것과 같은 은혜를 받게 되어 지금의 미국과 같은 지위를 확보한 ㅊ청나라와 전쟁을 병상에서 막 일어난 상태로 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그 여파로 청나라에 오랜 시간 내정간섭을 받으며 발전에 제약을 받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일제 강점기까지 오게 한 시작점이 바로 원균이기 때문임.
원균만 없었어도 ........ 2차 대전 일어날 시점에 일본과 비슷한 또는 그 이상의 산업화 근현대화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일제 강점기가 오지도 않았겠죠.
오히려 독일 믿고 덤빈 일본을 역관광 시켰을 수도.
대가리 심각하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선조도 병신이지뭐~만력재가 안도와 주고 조선이
바이바이 했으면 다른시대가 열릴수도 있었겠죠
조선은 근대화 절대 불가능했음ㅋㅋ 엄격한 신분사회에 기술을 멸시하고 상업을 천하다고 생각했는데 근대화가 가능할리가 일본은 저때 이미 근대화할 기초체력은 갖췄음 교통,상업 발달으로 글을 쓸줄 아는 사람도 많았고 장인들을 우대해줬음 무엇보다 노예가 없고 신분제도 엄격하지 않았음 게다가 섬나라라는 이점까지 더해져 강해진거지 우리가 여기까지 온건 한번 제대로 박살났기 때문임
@@꿀꿀-p6x 고종은 구한말 상황에서도 근대화 이미 99% 완료 했는데요????
뭘 불가능함 ㅋㅋㅋㅋㅋ 그리고 기초 체력이라 하셨는데 임진왜란 기준으로 기초 체력은 조선이 일본 보다 더 우위에 있었는데요???
일단 교통과 상업은 임진왜란 기준으로 고만고만했고 가진 기술은 오히려 조선이 몇 단계 위였음. 그리고 글을 쓸 줄 아는 사람 기준은 한글 때문에 조선이 일본 보다 더 압도적으로 위죠.
그리고 장인을 우대한 건 조선이나 일본이나 같아요.
중요 기술을 가진 자들은 국가에서 보호하고 지원한 건 조선이나 일본이나 같았음.
그리고 님아..... 일본은 그냥 평민 = 노예였는데요????
말 그대로 일본은 세금을 중세 시대 기준 존재하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세율을 책정했고 세금을 걷는 향리의 재량에 따라 70~90%까지 걷어가 말 그대로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놔두고 다 가져간 게 일본임. 거기다 사무라이들이 자신들을 죽여도 합법이고 아내를 겁탈을 해도 괜찮은 나라가 중세 시대 일본인데요.???
인권 x
재산권 o (but 세금 70~90%)
중세 유럽의 노예랑 다를 게 뭐 있음????
반면 조선 시대 노비의 경우 개인 재산을 가질 수 있고 인간으로 법의 보호를 받았으며 단 하나 소속된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제약 뿐인데....이걸 노예랑 비교하면 실례죠 ㅋㅋㅋㅋ
참고로 노비에서 면천되는 건 쉽습니다.
세금도 안 내고 군역도 없이 다른 사람 밭에서 일해 번 돈이든 뭐든 정해진 돈을 모아 지불하면 바로 노비 신분에서 양인 신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임진왜란 같은 전쟁터에 의병같은 걸로 자진 참전한 후 전쟁이 끝나면 면천되는 경우가 있죠.
참고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한 노비들은 전부 면천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왕실은 틈만 나면 기회만 되면 노비 제도를 폐지하려 했었고요. 임진왜란이 없었으면 왕권이 그렇게 약화될 리가 없었을 것이고 노비라는 신분은 더 빨리 폐지가 되었겠죠.
그럼에도 노비들이 나라에서 대가 없이 면천해주지 않으면 굳이 면천하지 않았던 건 노비로 사는 게 더 편했기 때문입니다.
까놓고 말해 결혼 하기 전이나 자신 입으로 노비라고 말하거나 호패(신분증)를 까지 않는 이상 상대가 노비라는 걸 알기 힘들었고 세금을 내지 않고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결혼에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었죠. 그럼에도 법의 보호는 전부 받았으니..... 지금 시대에 노비하라고 하면 대한민국 국민 99%가 노비할 거라고 구한말처럼 스스로 노비가 될 겁니다.
즉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혹은 원균이 없어서 별 피해가 없었다면 근대화 역량은 조선이 일본보다 압도적으로 높고요. 왕권이 약화 되지도 않았을 테니 노비 제도도 임진왜란 기준 10년 내외로 폐지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을 수 있었겠죠. 거기다 청나라와 전쟁도 할 일이 없어질 거니 국토도 경제도 상업 기반도 멀쩡했을 거니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할 이유도 없으니 일본과 동시에 혹은 더 빨리 유럽과 무력을 하기 시작했겠죠.
@@꿀꿀-p6x 휴대폰으로 달아서 그런가 pc로 안보여서 다시 달게요.
일단 조선의 근대화 조건은 일본 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였습니다.고려말 권력층읩 부패가 재물에서 비롯된다 생각하여 상업을 천대하는 분위기는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압박하거나 국가적으로 못 하게 하지는 않았고 ㅋㅋ 애초에 그렇게 해도 일본 보다 임진왜란 기준 기술적인 우위는 확실했어요.
님이 말한 기초 체력도 임진왜란 기준 조선이 일본 보다 우위였습니다.
가진 기술
조선 > 일본
상업
조선 = 일본
문맹률조차 조선이 더 낮았죠.
까놓고 말해 문맹률은 일본이 조선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한자를 병행하지 않으면 히라가나만으로 문맥의 의미가 완성되지 않는 일본어 특성상 지금 일본조차 문맹류이 50%일 정도로 완전히 기억하고 익히는게 힘들 수 밖에 없는 반면 조선은 훈민정음 발명으로 인해 권력층은 한자와 훈민정음 병행으로 피지배층인 일반 양민은 훈민정음을 쓰는 미세한 이원화가 되었지만 문맹률 자채는 압도적으로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노예.....노비를 말하시는 거 같은데ㅋㅋㅋㅋㅋㅋㅋ
일본의 평민은 조선 노비들보다 못 한 삶을 살았어요.
까놓고 말해 그 당시 일본 양민은 그냥 노예죠ㅋㅋㅋㅋ
생산하여 벌어들인 수입의 70~90%를 말 그대로 먹고 죽지 않을 정도만 남기고 세금으로 걷으며 그렇게 내도고 받는 대우는 조선의 노비는 고사하고 유럽의 흑인 노예랑 좋은 경쟁자가 될 정도로 최악이었던 게 중세 시대 일본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분제도는 일본이 더 엄격했어요. ㅋㅋㅋ
정확히는 계층 구분이 명확했고 그에 따라 지배와 피지배 구분이 더 확실했죠. 그 영향이 지금도 일본 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을 정도로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비교를 하려면 같은 임진왜란 당시인 중세 시대로 하던가 조선이 임진왜란 때 원균이 없어 별다른 피해 없이 일본을 막아내었다는 전재로 깔고 근현대를 비교하던가해야지... 왜 조선은 중세고 일본은 에도부터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가 시작된 상황을 섞어 놓고 비교하는 거죠???
뚜겅만 열릴지 않는다면 카노지는 무조건 질수는 없음 이왕 시작했다면 안전한 “꼼프ㅡ라카” 에서 피해보지 말고 게임에 임할것
이 유투버 똑부러지네요!! 한번에 딱 들어오게~ 잘 들었습니다~
❤❤❤
훌륭한 정리와 정보, 만드시느라
고생하셨네오^^
새로운 시선의 면도 보여주시고....
세가지 포인트를 얻고갑니다.
영감과 함께.....
헐 올해 딱 오십되었는데 알고리즘인가요? 꼭 읽어볼게요. 귀에 쏙쏙 들어오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요새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단순히 임진왜란보다는 좀 더 포괄적으로 조일전쟁 혹은 동아시아 대전쟁으로 불러야된다는 시각도 있을만큼 거대한 전쟁이었죠.
당시 세계 1위의 육군 군사력을 갖춘 중세 일본이 인도까지 정복한다는 군사적 야욕을 가지고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한 대전쟁이 임진왜란인데 임진왜란이 단순히 이순신 장군만 잘싸워서 이긴게 아니라 조선의 대포 같은 화약 기술력, 군함이 워낙 뛰어났기에 이긴 측면도 있음. 조선을 흔히들 화약강국이라고 하는데 조선이 초기까지는 전쟁이 많아서 실전군인들이 많았지만 세조 이후부터는 전쟁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실전 경험이 줄어들다보니 군인의 전투력은 줄어들지만 반대로 화약 기술력만큼은 어마무시하게 강한것도 사실이었음.
문제는 실전 경험이 적다는건 조선이 발명한 우수한 화약무기들을 정작 조선군이 쓰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
그래서 임진왜란때 조선은 무기 수준들은 어마어마하게 강한데 군인의 전투력은 그 무기에 반도 못따라갔음. 이순신 장군님은 그 조선의 화약무기들을 사용하는 법을 군인들에게 알려주신 것이고.
군함과 대포때문이라면 칠천량에서 왜 전멸했겠니 ㅉㅉ
일본은 정권이 바뀌고
중국은 아예 지배층의 종족이 바뀌며
잘 드러나진 않지만 서양의 자원을 사용하며 동남아, 아프리카 등지의 용병도 들어오는 등 16세기의 대전쟁이 맞음.
시작부터 20만 대군이 배 타고 침략하고 주요 참전국들이 국가의 자산을 다 털어가는 총력전을 벌였기 때문에 단순 '난''이라 칭하기엔 규모가 너무 큼. 임진전쟁이 더 좋은 호칭이라 생각함.
팀차이@@심심타파-l4d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625끝난지 80년도 안됐는데 한국이 안전불감증인걸 보면 200년의 평화는 얼마나 큰건지 알 수 있다
전쟁 안 일어난다 걱정마라😂😂😂
어디서 안전불감증?? 우리나라 연간 국방비가 얼마인줄 앎??
안전불감증까지는 아님
@@볼거리-l3c 얼씨구... 그걸 장담하고 앉았네... ㅋㅋㅋ 어떻게 아슈? 어떻게 장담하냐고...
요즘 돌아가는 꼬라지 보면 미군 철수하는 순간부터 뭔 일 일어날 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전쟁 절대 안 일어난다는 개소리들 쳐싸고 있네 ㅋㅋㅋㅋ
평화를 유지하려면 전쟁을 준비해야 된다는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간첩한테 선동된 저능아들인 듯
나라 ㅈㄴ 좀먹네 ㄹㅇ
명나라 황제가 조선을 보고 고구려를 떠올렸다는 자료가 있나요? 궁금합니다
고려일듯..
임진왜란 마스터한 사람으로써 부산산성 정발이랑 동래부사 송상현에 대한 이야기랑 몇가지 빼먹으셨는데 아쉽네요..
마스터 같은소리한다 ㅋㅋㅋㅋ 부산산성이아니라 부산진성이야
그당시 부산진성은 지금으로치면
UDT급인거고
멋지네요 너무 잘 봤습니다. 편집 설명 너무 좋습니다
영상 퀄리티가 상당하네요.
수십억을 들여 제작한 웬만한 공중파 다큐보다 훨 나은듯요.
9:57 이일대로는 적이 지칠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아군의 장점, 적군의 장점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상우니추천으로 왔습니다 ^^*재밋어요 👍🏼👍🏼🌺
22:20 13척 아니었습니다.. 한척입니다.. ㅋㅋ 이건 기록으로도 남아있지요.. 그나마도 반은 나중에 눈치보면서 잔당 소탕할때 합류한 것이고, 나머지는 비비적대다 전투하는척 들어온걸로 알고있습니다..
저때 일본은 도요토미가문이 몰락하는선에서그쳤지만
청에의해 명은멸망하고
조선도 머리까지박는 수치를 겪어야했죠
도요토미는 결국 자신의 미천한 신분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고 그 때문에 멸문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죠ㅎ
@@piecherry9601커서배웠는데
노부나가 마차타고가는데
넙죽엎드려서 자기써달라고
화장실청소꾼으르들어간게 모든게시작이었다고하죠
명은 멸망 일본관백은 멸문지화 조선은 왕조건재
즉 조선이 최대 승전국입니다.
청은 명보다 더 허접했는데
이순신장군과 의병들이 버텨주고 도요토미가 죽음으로써 비로서 끝난 전쟁 ㅠ 이때도 우린 쏙 빠지고 명과 일본의 협상. 우리나라가 강해져야합니다.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있는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돌격선이라... 듣기 좋습니다!
이거 우리 역사쌤에 틀어준건데.. 진짜 재밌게 봤습니다. 졸음이 몰려오는 자장가 역사사간에 가장 집중했던 시간이었죠..
오만원권에 이순신 장군님과
거북선 넣어야한다
맞습니다.
진짜 제발
지폐도안 싹 다 바꿔야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감사합니다
이순신 장군님이 없었다면 한반도 어떻게 됐을까.. 감사합니다
오 재밌는데? 대본 잘 쓰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꿀잼이네요❤❤❤
이순신 장군님
장군님 이야기에 또한번 울고 갑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어떤 협상이든 당사자가 빠지게 되는 법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만 한국이 강해지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세력이 누군지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테니 투표 잘 하십시오.
@@thousand2163양산 개팔이 추종자
북한이군요
1찍이들 새겨듣거라
지금과 대한민국과 비슷한 상황이군요
국민들 갈라놓는 자들..!! 호남과 영남으로 갈라놓고, 남성과 여성을 갈라놓고, 가진자와 서민으로 갈라놓고, 좌파와 우파로 갈라놓고, 친일파와 빨갱이로 갈라놓고, 기성세대와 MZ세대로 갈라놓고.. 그판에서 서로 혐오하고..
잘봤습니다!
한산대첩에 관해 정보가 다른듯 합니다만, 조선 수군의 수가 훨씬 적었던 해전으로 압니다.
참고로 한산대첩은 세계 4대 해전중 하나로 꼽힙니다.
잘 봤습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전설처럼 재밌고 실화라 소름돋고
학익진은 항상 웅장하고
크으….
영상 너무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순신 장군은 진정한 영웅👍🏻👍🏻👍🏻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임진록 기반 조선의반격 게임 유투버로써 많이 배우는 영상이였습니다.
성웅이순신장군 활약 잘 보았습니다.
목빠지긋다 자주좀 올려달라. 수면제가 부족하다.
요약의 신👍👍
진짜 이순신장군님은 어떤 마음가짐이셨을지 감히 상상도 안가네
탄금대전투는 신립장군의 악재가 대패로 이어진게 아닌가싶습니다..
만약 전투전날 내린 비로 진흙밭이 아니었다면 일본군 조총병들도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을겁니다.
초반에는 병력수 병사들 숙련도
무기질등 유리한부분이없어서
밀릴수밖에 없었죠
애초에 전장을 육계도로 잡아서 비가 내리든 말든 기병 기동에 안좋음
늪이 아니였어도 참패했을겁니다
이미 기마대전술은 일본 내에서도
많이 있었고 정발장군의 부산성전투
송상현장군의 동래성전투만 봐도 열심히 수성했지만 별다른 피해도 못주고 대패했는데 허허벌판에서 공성도 아니고 벼랑끝 평야전투라니..일본군에게는 호재고 오합지졸조선군은 공포 그자체 였을겁니다 전쟁이라고는 해본적도 없는 붓들고온 선비들과 농기구들고 온 백성들로 배수의진?
탄금대전투는 신립의 무능한 전투 였습니다.
@@남센터느림신립장군이 탄금대 선택한건 다이유가 있어요? 말이ㅇ8천명이지 훈련이 안된 병사들 탈영병도 생기고 그래서 탄금대 배수진 친거에요. 탈영 못ㅎㅏ게 날씨가 좋았다면 승산 있는 전투 입니다.
일단 제 의견을 말하자면 신립은 북방에서 여진족들과 싸우며 명성을 얻은 장군이고 그 신립의 최정예 부대가 바로 기병부대, 궁기병이였죠 임진왜란 초반에 가장 큰 문제점은 적에대한 조사가 매우 형편없었다는 겁니다. 특히나 일본군은 빠른속도로 치고 올라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에는 시간이 매우 부족했죠. 하지만 적의 보병이 주력군이란 것은 들었을 것 입니다. 신립은 상대방의 장점은 없애고 나의 장점을 키워야한다고 적힌 손자병법에 나온 병법을 자기 뜻대로 해석했고 지피지기(나와,상대를 파악)하지 않은채 작선을 세우죠. 수성전을 하면 자신의 장점인 기병을 활약할 수 없으니 기병이 싸우기 좋은 평지인 탄금대에서 적 보병을 격파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다만 적이 너무 빠르게 북상한 나머지 탄금대의 자세한 지형과 상황을 캐치하지 못했기에 기병의 장점이 살지 못했고, 또한 적 지휘관이 유능했던 장군 고니시 유키나가 였기에 전술 싸움에서 진겁니다. 고니시의 전략은 상대의 장점인 기병을 먼저 없애야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신립의 기병대가 정면에서 돌격하자 부대를 양익으로 나눠서 조총으로 집중사격 했습니다. "십자포화" 즉 크로스 파이어로 신립의 장점인 기병대는 순식간에 전멸합니다. 일단 그런 훈련이 안된 말은 조총처럼 큰 소리가 나면 놀라서 멈추거나 날뛰게 됩니다. 기병을 상대하기엔 당연 최고는 총이였죠. 그리고 사실상 애초에 조선군의 수가 8000~16000 명이라고는 하는데 신립의 별동대를 제외한 대부분이 훈련이 안된 민병대였습니다. 그렇기에 신립의 정예군이 격파당한 것을 본 훈련이 안된 농민들은 당연 놀라서 순식간에 도망가며 와해되었을 겁니다. 반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선봉군은 당연 전국시대에서 실전으로 단련된 정예군이였구요. 수도 엇 비슷하거나 훨신 많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수성이 당연 올바른 판단이였으나 일본군은 성 하나하나 점령하는 것보다 속전속결로 한양을 점령하는게 첫 목표였기에 공성전으로 오랜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서 한양으로 가려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신립의 입장에서는 북상하는 일본군을 막아야했기에 수성이 아니라 나가서 전투하려 한걸지도 모르죠. 성 안에만 있다가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버리면 막을수가 없었을테니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 감사합니다.^^
곽재우 장군 지금으로 치면 부잣집사람입니다 ㅎㅎㅎㅎㅎㅎ
탄금대 전투 😂
신립 장군 무기력 하게💥
패배 하게된 결정적 이유가 🤔 무엇 인가요?
문경같은 길좁은곳을 수비하지 않고, 북쪽에서 기병과 싸우던 전법으로 심지어 갯벌같은 곳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기병으로 회전 벌여서 싹 녹았죠
압도적 정보의 부족이죠
윗분말씀이 맞는 얘기지만 질문하신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수있어 말씀드립니다.
신립장군의 주력부대는 궁기병입니다. 때문에 조총중심의 보병을 공략하기 쉬울것으로 판단해 시야가 트인 개활지를 전장으로 놓고 싸운게 패배의 가장큰 이유였습니다.
당시 개념으로는 보병은 기병돌격전으로 쉽게 제압할수있는 정도로 여겼기때문에 지형이나 상대부대의 무장상태나 전술에 따라 유려하게 전략을 구사할수있는 왜군에게 참패한것이죠.
적에 대한 무기 체계 정보 부족 및 지형을 활용한 전투를 효율적으로 하지 못한 실책
애당초 최정예도 아니었고 8천의 기병대도 아니었어요
징비록에서 급하게 서울에서 모은 장병과 지방에서 모은 장병이 8천이라 적혀 있던 걸로 기억함
아마 그냥 급하게 모은 오합지졸 보다 좀 더 나은 수준이 아닐까… 싶음
임진왜란 특
명:설마 쟤들이 오겠어?
조선: 올까?
일본:저길 미쳤다고 가냐?
히데요시 빼고 다 저래생각한게 ㄹㅈㄷ
결론만 보면 도요토미의 광역 트롤짓
히틀러 같은 놈인건가
그런놈이니깐 일본의 1인자가 되었던듯
조선 도공 기술자들 넘어가고 이후 더 많은 발전을 해서 19세기에 아시아 1위 국가로 성장.
광역 트롤이라고 하기엔 일본은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은 그 이후에도 정신 못차리고 가난한 나라로 겨우 겨우 연명하다 망함.
@@그리워하다-s4c이게 무슨 개소리냐, 진짜 역사에 무식하면 지 망상에 빠져서 욕하기에 바쁨. 임란 병란 후에 조선도 청나라와 일본과 같이 경제적 호황이였는데 ㅋㅋ
@@Mushroomhead0707 호황이 오지만 전체적인 국가, 국력 수준이 비교불가할정도로 벌어지기 시작하죠
유일하게 구독한 보겸!! 명절 잘 보내시고 앞으로도 선한 영향력 많이 보여주세요!!
바람처럼 왔다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인생인데 태풍급 바람 황사급 먼지는 되야지 꼼프라카 빨리와라
진짜 이순신은 전쟁의 신이다 말이안된다
제일큰 화페에 이순신장군이 나와야한다고 생각한다
다른분들이야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거나 한 분들이지만 이순신장군은 나라자체를 구하신분이 아닌가...
이순신 장군님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존경합니다. 장군님의 부하로 전장에서 함께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느 곳에 계시든 영원토록 평안하소서..
탄금대 전투의 패인은 늪지대가 아니라 전술 연계의 실패이자 고립무원에서 시작함
배수진이 아니라 유사시 성으로 후퇴로는 확보했어야 했고 일본군들의 진로를 비스듬히 열고 측면에서 대치하며 이동하다
탄금대가 아닌 조총에 대한 방어와 기병 돌격에 유리한 지형으로 끌여들여야 했음
산악과 평지가 공존하는 지형이었다면
해볼만한 전투였음
물론 승전했다해도 즉각 후퇴했겠지만 일본군의 진격은 보류되었을 것
미스테리에 한 이유가 비가오는 조건인데 비가 오면 조총을 사용할수 없다고 생각해 돌격 했을 텐데 모노노케히메에 나오는거 처럼 파라솔을 땅에 박아 놓고 돌진해 오는 말들을 향해서 사격을 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방에서 칠경우 사격의 집중도가 떨어져서 한쪽으로만 돌격한건 이상하고 뭔가 협동공격을 하기로 했는데 도주해 버린 작전 미스도 있었다고 보는게 그냥 빈틈으로 들어가서 말발굽으로 밟고 다녀도 서로에게 총을 쏘기도 뒷편이나 중앙에 갖힌 병력은 갈대 밭속에 있는것 같아서 아무것도 안보이고 비명소리과 말발굽소리에 병기가 부딛소리만 들리고 낑겨서 아무것도 못 하는 식이라 서로가 압사되어 밟히고 결국 도망갈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쫒아다니며 밟아버리는게 기병전술중에 하나인데 그냥들 늪에 빠져서들 허우적 대다가 다 전멸한 걸로만 나와서 아쉽고 우천시에 공성은 위험해서 표현을 안하다 보니 드라마에서 재현을 안해도 기록은 남아있을듯 해요 활이 비에 불어서 활대가 휘어 못쓰게 되는 약점이 있는데 말이죠
이게 너무 우리입장이나 전술만 갖고 얘기를 하는데 전쟁의 진영은 최소둘인데 일본의 전술수행능력이나 그들의 대처역시 생각을 해야한다고 봅니다.
신립의 부대도 우리입장에서나 정예지 규모면에서는 진짜 한참못미치는 수준이라 신립입장에서는 빠르게 회복이 힘든정도의 타격을 줘야 한다는정도는 생각했다고 봅니다.
조정에서조차 상대군 규모파악이 제대로안되는 상황인데 전투하나만 갖고 어떤 평가를 하기에는 형평성이 너무 떨어진다고 봅니다.
그가 진정 무능한건지 아니면 그런 무리한 작전아니면 그 어떤희망도 없는 절망적상황이었는지에 대한 해석도 있어야한다고 봅니다.
그래도 조선 최고부대 지휘관인만큼 인재발탁등용인사에 천재인 선조가 신뢰했다는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봅니다
@@hyeonseung6 신립이나 이순신도 여진족과 계속 싸워온걸로 알아요. 뭔가 있었다고 봐요
여진족과의 전투는 소규모 1000명 이내의 전투가 많았죠 실제 2만에 가까운 적을 상대하는 대규모 회전에 대한 경험은 신립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기병 돌격에 대한 조총부태 운용에 대해서는 전술 전략적으로 조선이 따라오지도 못할만큼 압도적 우위에 있었어요 조총도 일렬로 쏘지 않고 세줄로 나눠서 장전시간을 최소화 시키는 전략들을 썼었구요 정보의 부재도 중요했고 역량 자체도 상대가 안됐었던 그런 전투죠
아따.설명잘하시네요😊
배설은 12척의 배를 끌고 '도망' 간것임.. 후일에 그것으로 배설에게 벌을 줘야하냐 말아야 하냐를 논했음..
배씨 가문에게 소송당할라
@@밥밥축 뒤에있는 전투에서도 또 도망감.. 정사에 있는건데 뭔 소송???
지금 우리도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정말로 나라가 망하고, 다 죽을 상황에 버텨내주신 조상님들 덕에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복받치네요 ㅠ
"시즈가타케 칠본창" 애들에게 나눠줄 땅이 작아서 더더욱ㄷㄷ
12대 330의 싸움이 가능한 것은 좁은 길도 있지만 각개로 싸워 이길 수 있는 강함이 있었기 때문이죠. 한 놈 한 놈을 다 이겨야 되니.
부상이 아니고 부산일텐데요?…
한산도대첩에서 조선수군의수는 대략 많아도 60여척입니다~~당시 일본수군 73척vs 조선수군96척은 잘못된정보입니다~~ 13:40초에 나오는 자막입니다..
이순신장군님 안계셨으면 조선은 1592년부터 열도에 속국이됬겠지... 어휴
열도의 속국이되어 황국신민으로 사는게 낫지않냐?
@@쪼군지키미넌 나가임마
@@쪼군지키미넌 나가 임마
명이 그걸 그냥두지않습니다...
심각하면 정묘호란정도의 엔딩이 됬을겁니다.
그랬으면 지금 한녀들 갓스시녀랑 인성이 비슷했으려나 오히려 좋을지도?
듣는중에도 눈물이 난다 대단한 장군님
소름돋았습니다...지금의 대한민국도 하나로 똘똘 뭉치길..
그럴리가 없지 쩔라가 있는데
다 아는 이야기지만 언제들어도 몇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역사 스토리중 하나
손자병법을 쓴 손무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 이미 수천년 지났는데도 적용되는 병법서.
ㅔ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산하 봉건제 봉후국이 엇비슷한 국력으로 나누어논 영토아래서 나온 전법서라 어지간하면 맞죠.
행주대첩은 와전된 기록이 전해진답니다.
사실은 작은 토성이며, 행주치마로 돌..?
보다는 신기전을 장착한 화차가 승리의 관건이었다지요!
세종때 제작된 화차는 개량을 했는데, 문종 때 개량된 것을 문종 화차라 하고, 행주대첩때는 변이중 이라는 사람이 개량한 화차라고 한답니다.
행주 치마는 낭설이고 실제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행주산성 전투는 오히려 관군의 역할이 매우 컸고 각종 화약 무기를 다양하게 사용한 당시 최첨단 무기들이 사용됐던 전투입니다.
저때 선조가 죽고
살아남은 백성들끼리
새 나라를 세웠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혼란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중국이나 일본에 더 빠르게 병합 당했겠지? 백성들이 나라 만들고 하는 게 저 시대에 불가능함 귀족 계급만 가능하지 지금 같이 민주주의 선거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백성들이 나라 만들려고 했다면 국가 운영 능력도 없고 그냥 산적왕 같이 여기 저기 도시 국가 생기지
선조는 옳은 판단을 했는데 뭔... 현대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안됩니다
선조가 죽으면 나라가 망하는거지 뭔 새나라여 ㅋㅋ 일본에 합병됐을듯
@@jindol9526맞음요.
@@jindol9526 강병책을 받아들이고 국란이 없게 하는 게 옳은 판단이죠. 신하를 질투해서 공도 없는 인간을 벼슬 올려주고, 전선의 장군을 직위해제 시키고 고문 주는 게 아니라요. 아, 그러면서 세자는 화살받이 시키고 본인은 나라 버리고 망명하려고 했었죠? 이게 현대의 관점이라서 잘못돼 보이는 건가요? ㅋㅋ
21:37
그런데 고작 13척 남은 배를 무시하고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니였나요?
왜 왜군은 굳이 그까지 찾아가서 싸우는 건가요?
그리고 거기에 진치고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아는 걸까요? 무선통신이 있던 때도 아닌데
무시하고 돌아가면 남해안 거쳐 서해안으로 올라가는 함대+보급선들의 뒤통수를 언제 어디서 나타나서 칠지 모르는데, 일본군 입장에서는 재앙 수준인 이순신이 배가 13척밖에 안남았다고 하니 이때가 아니면 안된다 마인드였죠. 그리고 양측 다 첩보원들 풀어서 정보전 열심히 했습니다.
나 왜 눈물이 나지
저도 찔끔 흘렸습니다 저랑 같은분이 계시네요 그럼 생각보다 우리같은 분들 있으실듯
지구 최고의 햬군 제독님 진짜 업적만 보면 넬슨 제독님 무슨 그냥 전세계 전장서도 이런 업적 보기힘들듯요 😊
1군이 고니시 2군이 가토 3군이 구로다
굿굿
손자병법과 같은 도서는 특히나 젊은 여자들이 굉장히 싫어하는 책인데
저러한 도서를 30분이 채 안되는 시간이 이렇게 요약하여 양질의 영상을 만들어줘 잘 볼 수 있었습니다.
매번 답글은 달지 못하지만 항상 빠짐없이 챙겨보고 있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길 바랍니다, 쏨작가 양^^
이순신장군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렇게 지켜주셨는데 죄송합니다 ㅠ
진짜 눈물나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