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튼 장군 '따귀 사건'의 전말◆전쟁 영웅의 실수인가? 전장에서 불가피한 상황인가?♣결정적 하루 [2차 세계대전 외전]-76★전쟁 피로증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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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31 ธ.ค. 2024

ความคิดเห็น • 326

  • @stukak4561
    @stukak4561 ปีที่แล้ว +1

    현재 대한민국 똥별이 저랬다면 승진시켜줬을 듯.

  • @두리네-s3x
    @두리네-s3x ปีที่แล้ว

    겁나 재미나게 보고있어요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 @루카치-u3m
    @루카치-u3m 2 ปีที่แล้ว +41

    영문위키로 패튼 구타 사건을 보니 말라리아에 감염돼 후송된 병사를 때렸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설령 꾀병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야전병원에서 병사를 구타한 행위는 절대 좌시할 수 없는 범죄 가혹행위인 건 분명합니다..

    • @doulk2476
      @doulk2476 7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히스토리 채널이나 ngc 다큐에도 나온 내용입죠

  • @사람사는세상-n1f
    @사람사는세상-n1f 2 ปีที่แล้ว +1

    즐감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 @theochemsRE
    @theochemsRE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한국군 장성이 병사 따귀를 때려도 문제가 될까? 그런 점에서 미군이 부럽네요.

  • @jaeyunji728
    @jaeyunji728 7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줄 결론 : 패튼은 시범케이스로 병사를 조졌는데, 결국 시범케이스로 본인이 징계받았다.

  • @JaeS-pg3nd
    @JaeS-pg3nd 2 ปีที่แล้ว +5

    퍼플하트 훈장이 그냥 장려상 참가상 같은 건가 했는데 복귀율이 5%였다는거 보니 진짜 용기의 훈장이였군요

    • @의탁김-b4k
      @의탁김-b4k 2 ปีที่แล้ว +1

    • @노펜하우어
      @노펜하우어 2 ปีที่แล้ว +2

      @@의탁김-b4k 니엄마

    • @의탁김-b4k
      @의탁김-b4k 2 ปีที่แล้ว +1

      난최거강백두산저격수다근데ㅣ전쟁은글세다

    • @의탁김-b4k
      @의탁김-b4k 2 ปีที่แล้ว

      21사단m60저겨수

    • @의탁김-b4k
      @의탁김-b4k 2 ปีที่แล้ว

      @@노펜하우어 니엉니

  • @chichi-os1fk
    @chichi-os1fk ปีที่แล้ว

    패튼은 맥아더 아이젠하워처럼 안전한 후방에서 작전지시나 하달하는 그런 장군이 아니었다
    최전방에서 부하들과 같이 온갓 전투를 수행하고 전쟁터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던 맹장중에 맹장

  • @R드레이크
    @R드레이크 2 ปีที่แล้ว +9

    전 이것보단 참호족 환자 귀싸대기 날렸다가 병사가 따박따박 대들자 할말이 없어 결국 사과했다는 이야기가 더 인상적이더군요,

  • @stevenH3427
    @stevenH3427 2 ปีที่แล้ว +2

    언제나와 같은 좋은 컨템츠 감사합니다.

  • @645lottotv8
    @645lottotv8 2 ปีที่แล้ว +11

    그간 사실적이고 객관적이며, 각각 상황에 의거해 해설한 전쟁사를 잘 보고 있습니다.

  • @은둔수행자
    @은둔수행자 ปีที่แล้ว

    그게 아니고, 정략적으로 패튼을 보직 해임 시켜서 전장에서 사라진 것 처럼, 위장한 적전이다.
    히틀러는, 가장 두려운 자가 패튼인데, 패튼을 비밀리에 기동부대를 맡겨서 전과를 올린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연합군은 노르만디 상륙 작전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 @diamolee559
    @diamolee559 2 ปีที่แล้ว

    전투피로증이란 말 보다,
    전투신경증이란 말이 내용상 더 맞는 것 같다.

  • @ChocoMilkTea1
    @ChocoMilkTea1 2 ปีที่แล้ว +7

    짧지만 알찬 내용인데 더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습니다.

  • @antoniohlee454
    @antoniohlee454 2 ปีที่แล้ว +1

    선배님 좋은 이야기 늘 감사합니다

  • @로렘
    @로렘 2 ปีที่แล้ว +12

    패튼도 존나 대단한것 같던데 개인성격이나 연설같은 거 들어보면 ㄹㅇ 병과부터 기갑재질임

  • @fierwalt
    @fierwalt 2 ปีที่แล้ว

    잘못은 잘못. 하지만 그 시기에 겪었을 고충도 이해합니다. 아이젠하워 말대로네요.

  • @fhana97
    @fhana97 2 ปีที่แล้ว +2

    밀덕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는데...
    저것만 보면 똥별 같은데... 위관 시절에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하다...

    • @유사인류조센진
      @유사인류조센진 2 ปีที่แล้ว +5

      꼴통이었지만 집안 빽이 빵빵해서 쭉쭉 진급함. 맥아더와 비슷한 케이스.
      서민출신이 이런 개망나니면 걍 조기에 짤려버림. 서민출신 장군은 니미츠처럼 둥글둥글한 성격일수밖에 없음.

    • @jaeyunji728
      @jaeyunji728 7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맥시코 국경의 판초 비야 토벌전에서 적을 사살하고 그 시체를 자동차 본네트에 매달고 귀환. 이 때 직속상관 퍼싱장군 "진짜 산적은 우리 군에 있었군."

  • @landpax1543
    @landpax1543 2 ปีที่แล้ว +3

    패튼 그는 군인이다.

  • @kangsj1977
    @kangsj1977 2 ปีที่แล้ว +1

    오늘도 넘나 재밌는 영상 감사합니다!!

  • @빨간다라이-z1d
    @빨간다라이-z1d 2 ปีที่แล้ว +5

    외상후스트레스 장애인데
    그 병사는 많이 억울했겠네~

  • @Water1878
    @Water1878 2 ปีที่แล้ว +3

    패튼 장군은 일화로는 포로가 된 독일군 장교들하고 기분좋게 식사할 때 소련군 장교가 항의하자 그 소련군 장교에게 욕지거리 내 뱉고 쫓아낸 이야기도 있습니다.

    • @bearangry9075
      @bearangry9075 2 ปีที่แล้ว

      그 뿐만 아니라 패튼자체도 문제가 많았죠. 복장규정위반도 저지르고 보너스아미 사건때 시위에 참가한 자신의 전우들을 죽이는 짓도 저질렀을 정도로 1차대전 참전용사들에게는 배은망덕한 개XX로 낙인 찍혔으니까요.

    • @Water1878
      @Water1878 2 ปีที่แล้ว +2

      @@bearangry9075 사실 패튼이 독일군에 우호적이였던 것은 자신처럼 구데리안이나 롬멜 같은 전차를 중심으로 운용하는 교리를 보고 나름 동질감을 느꼈거나 혹은 이들의 능력을 서독군에 녹여서 소련과 맞서 싸울때 쓰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패튼이 워낙 반공주의자이다 보니...

    • @dkrlrhlanf7
      @dkrlrhlanf7 2 ปีที่แล้ว +1

      적국의 장교 포로들을 우대하고 대접하는건 당연한겁니다.. 그들의 입에서 소중한 정보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 @우문식-k6b
      @우문식-k6b 2 ปีที่แล้ว +1

      @@dkrlrhlanf7 근데 패튼이 그런건 진짜 귀족주의 느낌이 강해서리...

  • @user-shevfixyafrjfg
    @user-shevfixyafrjfg 2 ปีที่แล้ว

    모두가 덮어놓고 걱정한 문제에대해 패튼이 총대를 멘거라고 볼수도 있네요

  • @xtinct77able
    @xtinct77able ปีที่แล้ว +1

    나치를 옹호한 패튼

  • @ysw198111
    @ysw198111 2 ปีที่แล้ว +1

    금수저 패튼 거침없는게 매력이지만 자신의 약점

  • @jkduck1109
    @jkduck1109 2 ปีที่แล้ว

    법위에 사람이 없어야 한다 어느 나라

  • @cjh-mq1cp
    @cjh-mq1cp 2 ปีที่แล้ว +3

    정맣 후덜덜한 존테일!!!!

  • @Night_is_still_young
    @Night_is_still_young 2 ปีที่แล้ว

    우와 감사합니다

  • @QSdhkYr5QqVy7in
    @QSdhkYr5QqVy7in 2 ปีที่แล้ว +8

    패튼은 군인으로썬 모르겠으나 한 인간으로써는 별로...

  • @javaxerjack
    @javaxerjack 2 ปีที่แล้ว +16

    또 한번 아이젠 하워의 깊은 빡침이 느껴지네요.
    더불어 페튼 한테도 예외가 없는 미국도 대단하다는.

    • @황천의볶음밥
      @황천의볶음밥 2 ปีที่แล้ว +2

      아이크가 대머리인 이유

    • @javaxerjack
      @javaxerjack 2 ปีที่แล้ว +2

      @@황천의볶음밥 오늘도 총 사령관의 수심은 깊어만 갑니다.(홍차 중독자, 전쟁 중독자 등등)

    • @jaeyunji728
      @jaeyunji728 7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황천의볶음밥 그래도 패튼조련사 역할을 그보다 더 잘한 사람이 없었기에 5성장군, 대통령까지 할 수 있었다고 봐야죠.

  • @김현오-t5s
    @김현오-t5s 2 ปีที่แล้ว +2

    전쟁에지면 인권이 통한까 그양끝이다 ㅠ,ㅠ

    • @grandmaster7146
      @grandmaster7146 2 ปีที่แล้ว

      전쟁에지면 인권이 끝이지만 영상에서보면 때릴이유까지는 없습니다.

    • @donchoo4706
      @donchoo4706 2 ปีที่แล้ว

      양쪽이 다 일리가 있긴합니다. 독일 처럼 각성제를 먹이면 되겠지만... 그럴수는 없었고

  • @박동구-f5b
    @박동구-f5b 2 ปีที่แล้ว

    실제 일선 전투장에서 상관에게 폭행을 당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있다.. 분해서 쏴 죽이고 싶은생밖에 없다....

  • @oyk5092
    @oyk5092 2 ปีที่แล้ว +1

    그래도 나는 패튼에 한표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여기 영상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인구 5천만 안되고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한국전 종료 후 우리 국군이 당한 사고사 제외한 비전투 손실.
      즉 사병들의 병영 생활 과정에서 자살 + 총기 난사 타살 사건 등으로 발생한 사망자 수
      한 10년 전 쯤 기억 정확치는 않은데 아마 1만명 넘었을 겁니다. 당시 기억으로 1개 사단 병력 사라졌다고.
      대충 어림셈 해보죠.
      계산 편의상 1960년 ~ 2010년 50년 기간이라고 하면,
      1만명 / 50년 = 200명 ------------------------------------> 1년에 평균 200명 정도 사망했던.
      그래서 10년 전 그 기사 충격적이었던. 위 기억 바탕한 추정치 정확한 수치는 아니어도 당시 너무나 놀라서.
      우리 군 영내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는 무시할 수 없는 심각한 경우도.
      전시 아닌 평시에 왕따-괴롭힘-부적응 등의 사유로, 취침 시간 내무반에 수류탄 투척. 무차별 총기 난사 포함.
      패튼 유형의 지휘관 아래선 저런 일 더 자주 생길 것. 재수 없으면 지휘관 자체가 타겟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 보니 많은 전사자 발생한 러시아 기갑부대 탱크 승무원이 열받아 부대 지휘관
      탱크로 밀어 지휘관 하반신 부상당해 후송되기도. 그 병사 입장에선 순간 감정 통제 못하고 욱해서 그리 되었을 것,
      우크라이나에서 격파되는 러시아군 전차나 장갑차 동영상 보기를. 개죽음으로 내몰린 러시아 기갑부대 병사들.)
      지금은 많이 줄었을 겁니다. 대놓고 패대는 구타 사라졌으니.
      정부와 군에서 해 마다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정말 껄끄러운 통계 자료라 몇 년 지나 어떤 계기가 있으면 수치 공개되는.
      21세기 현재 많이 줄었다고 해도 만일 공개된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치가 될 수도.
      실제 전쟁 상황 아닌 휴전 상황에서 우리 군이 겪은 사병들의 정신적 문제로 일어난 사망 사건이 저렇습니다.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인심 팍팍 써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날릴만한 역전의 용사인지 사실 의문이군요.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먼저 깨집니다.
      th-cam.com/video/34oR2D1GVU4/w-d-xo.html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 @방랑자-z8t
    @방랑자-z8t 2 ปีที่แล้ว +1

    군대 나와서도 꾸준히 보고있습니다. 정말 이 분 아니고서는 제2차세계대전은 물론 전쟁사에 대해서 만족할수가 없습니다. 하앍 너무 맛있게 설명을 잘해주십니다.

  • @sjialdhyf1258
    @sjialdhyf1258 2 ปีที่แล้ว +3

    제가 알기론 저거 외에도 다른 병사들에게 권총대고 협박한것, 참호족 병사한테 쌍욕한것 때문에 욕먹은걸로 아는데요? 저게 터졌을땐 첨에 아이젠하워가 기자들 설득해서 막았는데 참호족 병사들 상대로 똑같은짓을 하니 저렇게 대응했다고 들었습니다

  • @쿠마짱-q9l
    @쿠마짱-q9l 2 ปีที่แล้ว

    깔레로 독일 선생님들을 모으기위한 포포몬스

  • @koei88kr
    @koei88kr 2 ปีที่แล้ว

    1943년에도 미군은 부상자와 인권에 대해서 이런 자세를 가졌군. 역시 괜히 세계 최강대국이 되는 게 아님. 트러블 메이커였지만 유능했던 패튼을 다시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 @남자탁용삼
    @남자탁용삼 2 ปีที่แล้ว +4

    다음주에 보급전쟁 기대된다

  • @GNG45
    @GNG45 2 ปีที่แล้ว +35

    전쟁영웅이든 뭐든 미국 법과 제도 범위를 넘어서면 예외없이 그에 따른 책임 묻는 미국시스템이 부럽네요.결국 따귀문제가 아니라 미국 법과제도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명령서를 내린 장군에 대한 중징계사건였군요.

  • @방탕중년단-j2g
    @방탕중년단-j2g 2 ปีที่แล้ว +8

    패튼 시각에서는 전쟁피로증이 비겁한 병사들의 변명이라 본 것 같아요.
    전쟁 피로증은 알아도 인정하지 못한 패튼은 자기 이름대로 조지고 패고 본....

  • @유로현
    @유로현 2 ปีที่แล้ว +2

    역전다방 보면서 2차 세계대전에 관심이 생기고 여러가지 궁금한게 생겼는데
    16:04 이 사진에 가운데 앉아계신분이 조지 마샬 인가요? 왼쪽 뒤에 분이 헨리 아놀드 입니까? 혹시 이 장군들(8분 다 )이름 알고 계신 능력자분들 도아 주세요 ^^

    • @lmg991231
      @lmg991231 2 ปีที่แล้ว

      조지 마셜 장군 맞는거 같네요

    • @의탁김-b4k
      @의탁김-b4k 2 ปีที่แล้ว +1

      역시나

  • @hjca6105
    @hjca6105 2 ปีที่แล้ว +4

    유럽을 보면 병사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던 장교단의 행태가 결국 반전 여론이되서 대대적인 군축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싫네요.

    • @아리아-j4u
      @아리아-j4u 2 ปีที่แล้ว

      ㅈ같았죠 대책 없이 믹서기로 사람 갈아넣었죠 맨날 파티나 하면서 근데 최 악질은 일본과 러시아죠

  • @enoeht9629
    @enoeht9629 2 ปีที่แล้ว +9

    차라리 군의관들한태 전쟁피로증 환자들을 전선에 보내도 된다고 진단하도록 압박했다면 권력 남용일수는 있어도 명백한 문제까진 아닐텐데 처벌하라고 자기가 직접 명령해버린건 잘못했네요.

    • @혁신-s5y
      @혁신-s5y ปีที่แล้ว

      패튼이 군의관을 짜를수 있는 권력이 없은던데 그것이 먹힐까요?
      제가 알기로 의료장교는 의료 장교를 거친 장성 출신 군의관 소속이여서 폐튼이 뭐라하든 씹어 버리는 것이 가능함
      의료 장교는 상부에서 주어진 규정안에서 움직이는데 일게 3성 장군이 중간에 명령질 하는것도 명령 체계를 무시하는 일이여서 그거 역시 좋은 선택은 아닌듯
      의료나 법관련 장교들은 아무리 군당장 이던 뭐던간에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할수 없을건데
      그냥 페튼이 아무리 불만이 있다 한들 이건 국회나 대통령이 결정할 일이지 장군 혼자서 내릴만한 결정은 아닌듯

    • @enoeht9629
      @enoeht9629 ปีที่แล้ว

      ​@@혁신-s5y 큰 차이는 없지 않을까요? 패튼이 군의관을 짜를수도 없지만, 병사를 따귀를 때린다고 전선에 복귀시키는것도 안되죠.
      한마디로 둘다 어차피 안되는 일이고, 둘다 항의목적이 더 큰 상징성있는 행동에 가까운거죠.
      결국 둘다 안좋은 선택인건 맞지만, 다만 그 안에서 장단을 따져보자면 군의관을 탓하는게 여러 장점이 많이 보입니다.
      그나마 계급차이가 적은 쪽을 상대하는게 모양새도 좋고, 군의관의 복귀불가 판정은 어찌보면 지휘관의 명령 같은거라 볼수 있으니
      군의관-환자를 지휘관-부대원으로 볼수 있다면 당연히 아무리 큰 죄를 지은 군인도, 그걸 명령한 지휘권자를 처벌하는게 맞는거죠.
      병사는 군의관이 전선에 가지 말래서 못가는거고 그저 명령에 따를뿐이라는 항변도 가능하죠.
      만약 군의관도 전투 가능 판정을 내린 상태에서 버틴 병사라면 어차피 군법 처벌이 될테니 논할 필요도 없구요.

    • @혁신-s5y
      @혁신-s5y ปีที่แล้ว

      @@enoeht9629 보통은 꾀병 이라 판단하는것은 군의관의 판단 영역이고 이건 부대 내부가 아니니깐 이건 군사 재판에서 처벌할 문제임
      약한 일탈 정도는 부대 내부에서 처벌하지만 꾀병일 경우 군사 법원에 가는게 맞음
      즉 꾀병이라 할지라도 이건 군의관과 군사 법원이 판단할 일이지 지휘관이 판단할 일은아님
      그리고 군대에서 계급이 무시 되는 경우가 있음 대표적으로 과거에는 헌병 지금은 군사경찰 중령이 군검찰 소령한테 계급상은 상급자는 맞지만 수사에 관해서는 군검찰이 가지고 있어서 중령이 함부러 계급 가지고 깝치지도 못하고 군사 검찰이 하는 일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터치 못함 왜냐하면 검찰이 기소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령은 기소에 관해서 어떠한 실권도 없음
      의무 장교도 비슷함 아무리 대위 나부랭이여도 치료에 관해서는 중령이던 대령이던 장성급이던 어떠한 실권을 행사할수 없음

    • @enoeht9629
      @enoeht9629 ปีที่แล้ว

      ​@@혁신-s5y 그러니까요.. 그거 역시 별로 차이가 없어보여요.
      꾀병 판단이 군의관 영역이고 재판으로 가는것도 맞지만
      병사에 대한 처벌 역시 재판으로 가는게 맞는 영역입니다. 후송상태면 자기 부대 병사도 아니니까요.
      계급이 무시되는 경우 역시, 아무래도 계급 차이가 적을수록 문제가 적은게 맞다고 봅니다.
      장군이 장교에게 권력남용을 하던, 병사에게 권력남용을 하던 당연히 둘 다 문제이지만,
      병사에게 한게 더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치료에 관해서는 군의관외에 누구도 실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것 역시
      군의관을 직접 압박하는것이나, 이미 군의관이 판정을 내린 병사를 탓하는 것이나,
      둘 다 해서는 안되는 실력행사 시도 차원에서는 동일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장교가 아닌 병사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 @혁신-s5y
      @혁신-s5y ปีที่แล้ว

      @@enoeht9629 근데 저의 생각으로는 아이젠 하워나 다른 상원의원 한테 부탁을 하는 선에서 끝나야 하는 문제라고 샹각합니다.
      애초에 이문제가 심각하다면 대통령이나 국회에서 적절한 대책을 내놓을 건데 굳이 중간에 장성이 뭐좀 해보겠다고 하는건 일단 직권 남용으로 보일수도 있고 이건 상원의원 대통령 다른 4성장군이나 원수들을 무시하는 행동이여서 좋게 보이지는 않아요...
      제가 만약에 당시 대통령이였다 해도 3성장군이 자기의 통제에 벗어나서 군의관에 압박을 가했다고 이야기가 전해지면 이건 아이젠 하워가 일단 부하 관리가 안된다는 의미 이면서 그리고 자기를 무시한 3성 장군 패튼에 대해서 좋게 보이지는 않을거 같은데...

  • @페르소냐
    @페르소냐 2 ปีที่แล้ว +1

    최근 윌 스미스 따귀 사건이 생각나네요 ㅋ

  • @marksmithcollins
    @marksmithcollins 2 ปีที่แล้ว +11

    무슨 신념과 소신이 있든
    사령관이 병사 하나하나를 닥달해서 무엇을 하겠나
    더군다나 모두가 바라보고 사기와 직결되는 전선 순시도 아니고 부상병들이 있는 병동에서 그래봤자 멏명에게나 경각심(본인 의도는)을 심어주겠는가
    꾀병환자를 개같이 갈궈봤자 진짜 환자들이 무임승차자를 쫓았다 신난다 나도 어서 나아서 싸우러 가야지 하고 생각할리 없을텐데

    • @marksmithcollins
      @marksmithcollins 2 ปีที่แล้ว +2

      오히려 전방에서 그런 불호령 액션을 했어야 잠재적 꾀병환자가 전투후 한명이라도 딴마음을 덜 먹지...

    • @sungkilcho7210
      @sungkilcho7210 2 ปีที่แล้ว +3

      높은 직위일수록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엄격한 행동은 말단부대에서나 있을 일...

  • @eliyahaverial
    @eliyahaverial 2 ปีที่แล้ว

    인권이나 이런 걸 떠나서 확실히 저건 패튼이 잘못 대응한 것 같네요, 병사들의 꾀병이건 전투 피로이건 당면한 문제에 대한 잘못된 접근과 해결 방식인 것 같음.

  • @적랑-o2w
    @적랑-o2w 2 ปีที่แล้ว

    아군에게 총맞아 죽어도 이해돼는,
    자신이 소모품으로 보는 병사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오로지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한 전쟁범죄자.

  • @johncage70
    @johncage70 2 ปีที่แล้ว +2

    미국에서 따귀 트라우마의 씨앗인가열? 그래서 윌 스미스에게도 그렇게나... 주먹질도 아닌 싸다귀에...

    • @edwardkim114
      @edwardkim114 2 ปีที่แล้ว

      윌스미스 ㅋㅋㅋㅋㅋ

    • @eliyahaverial
      @eliyahaverial 2 ปีที่แล้ว

      퐁 스미스는 비난받을만하지.

  • @sudap111
    @sudap111 2 ปีที่แล้ว

    패튼은 정적이 많았던 케이스 같네요

  • @sjl8315
    @sjl8315 2 ปีที่แล้ว

    노르망디 이후 프랑스 내륙의 전과 확장 및 진공 작전에는 패튼이 3군 사령관으로 복직되어 파죽지세로 독일로 진격합니다. 바스통에서 고립된 101 공수사단을 구출한것도 패튼 지시로 진로를 북으로 바꾼 휘하 기갑부대의 쾌속 진격때문이었죠. 그때 일선 전차 대대장이 얼마전 주한미군 사령관의 아버지인 에이브람스 당시 중령이었습이다.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먼저 깨집니다.
      th-cam.com/video/34oR2D1GVU4/w-d-xo.html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th-cam.com/video/p-9w2J5s0xU/w-d-xo.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Secret 1944 Mission to Assassinate Germany's Panzer Leaders :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 제거 공습
      th-cam.com/video/c844En8XvC4/w-d-xo.html
      미군이 롬멜 공습해 전선 이탈시키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핀포인트 공습으로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군 최고 지휘부 제거한 적 없습니다.
      미국이 가지지 못한 영국의 정보능력, 브레칠리 파크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으로 얻은 정보 울트라.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역습인 모르탱 반격과 독일 기갑부대 최고 지휘부의 위치 모두 알아냈습니다.
      영국 제2전술 공군의 전술기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보기를.
      동영상 4분50초 이후 참조 (영어 자막만 제공됨)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
      6월8일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위치를 파악하고, 6월10일
      영국 제2전술공군은 호커 타이푼 42대, B-25 72대, 호위 스핏파이어 4개 편대 동원해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를 급습했습니다. 다수 지휘관 참모들이 사망하고, 지휘 통신차량등이 파손되어,
      노르망디 상륙지에 대한 독일 서부 기갑군의 반격을 하루 연기하려 했지만 지휘부 희생이 너무 커 파리에서
      새로 지휘부 구성하고 반격은 3주 연기되었습니다. 이 동영상 보니 영국은 이미 1차대전 때도 독일 빌헬름2세를
      공습으로 암살시도 했던 적이 있었군요.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암살은 공습 아닌 특수부대 투입으로 시도했지만,
      롬멜은 행운으로 마침 숙소에 없어서 실패. 하지만 노르망디에서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기습은 대성공.
      영국이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모든 방어 계획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독 기갑군 상대 지극히 어려웠죠.
      적 정보를 아는 것과 적을 물리치는 것은 별개인 겁니다. 특히 전차전에서 전차의 성능 차이는 정보로 해결 안됨.
      격투기 헤비급 챔피온 상대로 그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해도 내가 격투기 선수가 아니면 아무 소용 없는 그런 상황.
      영국은 독일 암호 해독으로 독일의 모든 방어계획 반격작전을 파악하고 대응했지만, 그 대응에서 일선의 전차병들과
      군인들은 몸빵으로 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확연한 이점은 있었죠. 독일군 기갑군 주력이 까앵에 집결하고, 모르탱
      반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전차 함정을 파서 팔레즈 포켓으로 유인하고, 미군이 그 빈틈을 노려 돌파하도록
      미군에게 공세 개시 시점을 지정해준 것.
      미국이 2차대전 물주인 것 분명합니다.
      영국 보다 북서유럽 상륙군 최종 병력이 3 :1로 훨씬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과 그 이후의 전투를 거의 다했고 영국은 들러리라고 하긴 힘들죠.
      미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그 쪽에서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베네룩스 3국을 경유하면서 해안가를 끼고 전진했죠.
      이유는 독일의 v-1, v-2, v-3 기지 제거와 해안 항구 확보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서.
      v-3는 초장거리 대포입니다. 포신 길이가 과장 좀 보태면 100m대. 영국 입장에선 최우선 목표.
      영국 본토가 독일 로켓과 장거리포로 타격당하던 시기라.
      영국 공군이 5톤, 10톤 짜리 블록버스터로
      우선 독 로켓 기지 예상 지점 폭격하고, 그 뒤에 영국 지상군이 점령해서 위협을 최종 제거.
      노르망디 상륙 때 동원된 해군 미군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영국이 압도했겠습니까? 인공항구, 해저송유관도.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영어 발음으로 안트워프) 점령을 영국이 해야 더 합리적이죠. 모든 유지보수 인력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담당하기 더 편하니까.
      또한 독일이 그런 중요한 항구 지역 순순히 내줄 이유 없으니, 항구와 항구 인근 해안과 강 지역에서
      소규모의 상륙전도 전개되었습니다. 항구 점령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도 없죠. 독일군이 다 폭파시킨 후 점령.
      그것 다 치우고 새로 항구 개통도 영국 몫이죠. 미군은 독일군 상대로 전투 주력하며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잡다한
      일들 함께 하면서 전진했습니다.
      영국 본토가 아닌 최전선의 연합군을 향한 독일의 v-2 공격 ,
      역시 대부분은 미군 지역이 아닌 영국군이 담당한 안트베르펜등 항구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의 소중한 전략 자산 v-2, 패튼의 미3군과 같은 곳 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치명적인 지역 공격.
      미영소 당시 인구 영국은 5000만이 될까 말까, 소련은 1억5천만 이상, 미국도 1억을 넘었죠.
      그 때문에 영국은 상시적 병력 부족에 시달렸던 겁니다. 미국이 북서유럽에 300만 투입할 때 왜 영국은
      고작 100만 밖에 투입하지 못했는지, 왜 영국이 겨우 100만 북서유럽에 투입하면서도, 지중해 북아프리카에
      육해공 100만 병력을 여전히 남겼는지 생각할 필요 있습니다. 영국군은 44년부터 그리스에서 빨치산 소탕.
      사실 수백만 미군을 대서양 건너 퍼나른 것도 영국이 더 많았죠.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 7만톤 8만톤급이었던 퀸메리와 퀸엘리자벳은 미군 병력 만명 단위로 운반.
      저 거대 여객선이 미국에서 출발해 대서양 건너다 침몰당했다면, 미군 수 만명이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는 것.
      패튼 북아프리카에서 특별히 내세울 전투 없습니다.
      패튼 아니 미 지상군 전체는 북아프리카에서 사실 마지막 순간 숟가락만 얹은 겁니다.
      미공군은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름 역활했지만.
      1943년 5월 튀니스 함락 까지 미 지상군과 해군 별로 한 일 없습니다.
      영국 해공군은 몰타 방어 및 지중해 제해권, 영 지상군의 보급 유지와 지원 엄청난 전투치뤘죠.
      영국 지상군도 탁월한 롬멜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보급을 유지하는 것도 능력.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승리?
      영국의 보급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 그런 주장 할 수 없을 것.
      추축국 해상보급선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250마일, 영국은 최단 지중해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3,500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사용 못할 땐 아프리카 우회한 수만km 지구 차원.
      최단 3,500km도 집결 후 출발점인 지브롤타 기준입니다. 실제로는 영국-캐나다-미국에서 출발한 선단임을 고려해야.
      영국의 해상보급은 룰루랄라 진행된 것 아니죠.
      페데스탈 몰타 호송선단 보듯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된 겁니다.
      사실 2차대전 영국의 전쟁 수행, 최전방 전투 투입 아닌 보급 지원 운반에도 엄청난 자원 소모.
      대서양의 유보트전에서 유보트 1척 잡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함정과 항공기 합해서 약 100대 단위가 투입.
      되니츠 회고록, 전황 악화로 유보트를 철수시켜야 했지만 철수시킬 경우, 대잠전에 투입된 막대한 병력과 자원이
      독일 침공군의 전차 항공기 병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보면서도 잠수함전 지속했다는 내용.
      북아프리카의 독일 이태리 추축군은 영국군에 의해 격멸되었습니다.
      미군은 횃불 상륙 때 나타났고, 전투다운 전투 해본 적 없고, 캐서린 패스의 미 기갑부대 데뷰전은 전멸.
      미 기갑부대가 캐서린 패스에서 노련한 독일군에게 전멸당할 무렵, 영국8군은 튀니지 거점 마랫 방어선을 뚫었고.
      시칠리에서도 패튼은 거의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을 전투하면서 전진했고, 패튼은 지프 타고 손흔들면서 전진.
      패튼은 또한 노르망디 상륙에 직접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패튼은 기만 유령부대 지휘관으로 도버에 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 투입됩니다.
      패튼이 일선에서 배제된 이유는 패튼대전차군단 영화에도 나오듯 사병 뺨싸대기 날린 후 징계탓도 있었고.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1

      노르망디 상륙 당일 연합군 상륙 병력.
      1. 미군 : 공수부대 포함 약 7만3천 (공수부대 약 1만5천). 상륙지는 2곳으로 유타, 오마하.
      2. 영국 : 공수부대 포함 약 8만3천 (영국군 약 6만1천, 나머진 캐나다군). 상륙지는 3곳 골드, 주노, 소드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해군함정 총합 약 7천.
      그 중 전투함 약 1천2백, 상륙주정 약 4천2백, 나머진 수송을 맡은 상선 포함 각종 지원함들.
      상륙에 동원된 전투함 중 영국측이 약 9백, 영국측 상륙주정 약 3천3백, 상선 및 각종 지원함 대부분은 영국측 제공.
      인공부두 멀버리 미군과 영국군 상륙지점에 건설되었는데 2곳 모두 영국이 건설했습니다.
      멀버리 건설 얼마 후 폭풍우 몰아쳐 미군 상륙지에 건설된 멀버리는 파괴되었지만, 영국군 지역 멀버리는 건재.
      영국군 지역 인공부두를 통해 상륙한 병력이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대략 120만 정도로 기억하는데 수치 좀 다를수도.
      전차와 차량등도 수 만대가 상륙했습니다. 영불해협 해저로는 상륙군에 대한 연료 공급을 위한 해저 파이프도 영국이 설치.
      상륙지 배분에서도 영국측이 칼레-독일쪽 방향으로 3곳, 미군은 상대적으로 후방쪽 셀부르 방향 2곳.
      상륙지 배분할 때 이미 독일 주력 부대를 영국군이 맡는 식으로 정해짐. 실제로도 독일 기갑부대의 대부분은 영국군이 상대했고.
      노르망디 전역에서의 지상군 지원을 위해 영국공군은 제2전술공군을 별로도 조직해 노르망디 하늘을 휘젓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롬멜이 공습당해 부상으로 전선에서 영구히 이탈된 것, 미군 공습이 아닌 영국공군 공습.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기갑군 사령부가 공습당해 지휘관 참모 상당수 사망, 부상으로 독일 기갑부대 반격 3주늦춘 것도 영공군.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측의 모르탱 역습 에니그마 해독으로 함정파고 팔레즈 포켓으로 몰아넣고 미군에게 돌파 시점 지정도 영국.
      독일 주력 기갑부대 상대한 영국측 전차 손실과,
      독일 알보병 주로 상대했던 미국측 전차 손실이 거의 대등한 것 ---------------------> 실전 경험 전무했던 생초짜 미군
      그리고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영국군 역시 2/3는 신병들로 북아프리카 지중해 전선의 정예병은 일부만 섞인 상태.
      북아프리카 지중해 전선의 영국 최정예 지상군 제8군은 이미 이태리 전선에 투입된 상태라 빼는 순간 노르망디 상륙 노출되니까.
      영국에서 출발해 좁아 터진 해협 건너 침공하는데 어떻게 상륙일 당일 미군이 거의 대부분을 점할 수 있겠습니까?
      영국이 육상세력도 아니고 오랜 기간 세계 최고의 해양국가였는데, 영국에서 출발한 상륙전에 미해군이 다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노르망디 상륙작전 계획상 상륙전 자체 최종 투입 병력은 약 100만으로,
      미군 22개 사단, 영군군 12개 사단, 캐나다군 3개 사단, 폴란드 1개사단, 프랑스 1개사단 총 39개 사단.
      하지만 상륙 당일 투입에선 영국군측이 오히려 약간 더 많았음. 이유는 생초짜 미군 보다는 조금은 더 안전하니까.
      노르망디 전역 돌파 전까지 투입 병력에서 미군이 더 많았지만 압도한 것 아닌 미군 22개 사단, 영국캐나다 연방군 15개 사단.
      (자유 폴란드군은 2차대전 개전 이후 영국측이 무장시킨 군대입니다. 자유 폴란드군은 북아프리카, 이태리에서도 열심히 싸웠죠.
      마켓가든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폴란드 공수부대도 있었지만 크게 보아선 영국과 아주 밀접한 동맹 협조관계. 자유 폴란드 정부는
      2차대전 종전 후에 귀국하지 못하고 폴란드 공산정권이 자유노조 바웬사 정부에 무너진 이후 바웬사 정부에 자유 폴란드 깃발과
      군의 정통성 이전하고 해체됩니다. 그런 이유로 영국에는 폴란드 출신 이주민들이 많습니다. 브렉시트로 그들 입지가 좁아진 것
      안타깝군요. 21세기 현재도 영국군은 폴란드에서 대러시아 공동 방어 훈련 자주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최고 수준의 동맹 관계.)
      노르망디 전역 돌파 후 북서유럽에 투입된 서부 연합군 총병력에선 미군이 약 300만, 영국캐나다군 약 100만으로 미군이 3배.
      저 최종 투입 병력만으로 착각한 겁니다. 그리고 영국군은 북서유럽에 투입하지 않은 상당 규모의 병력이
      지중해에 남아 있었고, 그리스에서 이미 44년 부터 공산 빨치산 토벌 후 그리스 왕정 복고시켰죠. 영국측 판단이 세월 지나고
      보니 미국 보다 더 현명. 영국이 총병력에서 미국에 훨씬 적었던 이유는 인구 자체가 적어서. 2차대전 당시 소련 1억5천만 이상,
      미국 1억 훨씬 넘고 영국은 5천만 정도. 독일 제외하곤 단위 인구당 가장 많은 병력 투입했을 겁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군
      몸사림의 가장 큰 원인은 병력 부족 때문, 전차등 장비는 얼마든지 보충 가능했지만 병력은 거의 한계치 징집한 상태라 여유 없었음.
      미국은 노르망디 상륙 직후 엔빌 상륙작전이라고 프랑스 남부 지중해 상륙전 벌였습니다. 미친 비효율의 극치.
      영국은 지극 당연히 엔빌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왜 프랑스 남부에 상륙합니까? 어짜피 노르망디 돌파되면 프랑스 해방인데.
      이태리에서도 미군은 프랑스쪽인 이태리 서부, 영국군은 그리스 발칸쪽 아드리아해쪽 동부에 상륙 전진.
      영국은 사실 프랑스 상륙 보다는 그리스나 발칸반도에서 중부유럽으로의 침공도 고려했었죠, 스탈린 철의 장막 줄이기 위해.
      영국이 힘이 부족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북서유럽 침공 합의했지만, 혹시나 하는 측면에서 이태리 동부 해안 침공로 선택.
      유고의 티토를 지원하면서 소련의 위성국이 아닌 독자노선 걷도록 부추긴 것도 미국이 아닌 영국입니다.
      미국은 덩치만 큰 어리숙한 최강대국으로 등장했던.
      2차대전 서부연합군의 전쟁 밑그림 설계는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다 짠겁니다.
      북아프리카 지중해 평정, 그 뒤 시칠리 상륙, 이태리 침공 그 다음에 미루고 미룬 북서유럽 침공.
      북서유럽 상륙 시기는 영국은 최대한 미루려 했고, 미국은 시칠리 침공 생략하고 바로 프랑스 상륙 원했지만 논쟁에서 밀린 것.
      영국은 북서유럽 상륙 최대한 미뤄, 독일과 소련 양측 희생이 최대화되기를 의도적으로 원했습니다.
      카사블랑카 회담 당시 미국측 고위 인사가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사블랑카에서 미국이 영국에 완전히 당했다는 푸념을 이렇게. -----------> " 왔노라, 보았노라, 당했노라! "
      카사블랑카 회담 당시 영국은 영국 본토 및 미국, 전세계 각지 영국군과 통신할 전용 통신함정 까지 갖추고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미국은 튀니지 점령 후 프랑스 침공하자고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영국측에 논쟁에서 완전 압도당해 저렇게 되어버린 것.
      카사블랑카 이후 미국도 정신 차리고 전용 통신함정등 갖추고 영국과의 이후 협상에 나섰답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상세 세부계획도 영국이 수 년간 세워온 기본 설계에 미군 참전 후 미국이 숟가락 얹은 것.
      영국은 지중해 전역 부터 미군을 총사령관 내세우면서, 그 휘하 실질적 작전 수행은 영국군 장군들로 도배하며 꼬드겼고.
      노르망디 상륙전에서도 총사령관은 아이젠하워지만, 연합 지상군 사령관, 연합 해군 사령관은 영국, 연합공군은 영미 함께.
      그렇게 작전 계획이 세워졌기에 영국이 3곳, 미국이 2곳 그것도 상대적으로 후방지역 2곳 배정된 겁니다.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 상했겠지만, 생초짜 미군이 독일 주력군 상대할 수도 없었으니 수용한 것.
      물론 상륙 후 실전 경험 쌓은 뒤엔 물주 영향력이 말빨이나 작전계획통을 압도했습니다.
      2차대전 후에도 중동에서 철수하는 영국군 대타로 미군이 기어들어가 개고생중이죠.
      현재도 영국군은 아주 소수의 병력을 투입하면서 미국의 대규모 군대와 물자를 영국 국익에 유리한 쪽으로 중동에서 활용중.
      겉보기엔 영국 수상이 미국의 푸들로 모욕당하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 영국측이 미국의 힘을 최대한 영국 국익에 활용하는 노련함.
      미국은 아직도 과거 영국이 짜놓았던 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미군이 수렁에 빠지고 헤메는 중동은 영국이 떠넘기고 선물한 것.
      영국은 베트남전에는 참전 안했습니다. 대신 호주군 대타로 극히 극히 극히 소규모로 살짝 투입시켜 살살 달랬죠.

  • @KANGtwitter
    @KANGtwitter 2 ปีที่แล้ว +10

    만약 패튼처럼 미군 전체를 운영했다면 아마 2차대전에 패전했을거임
    전투피로증 환자들이 전방에 있다면 아군의 전투력및 사기는 없는 것보다 더 못해짐 믿을 수 없는 아군은 적군보다 더 무서움

  • @랜디로즈-h4r
    @랜디로즈-h4r 2 ปีที่แล้ว

    군 야전 병원에서 다친 병사들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약해 보여 겠습니까? 패튼은 약한자를 질밟는 짐승같은 본능이 강하다고 봅니다

  • @positionzff8524
    @positionzff8524 2 ปีที่แล้ว

    어쨌든 현장에 없으면 그당시 상황을 알수 없겠지만...
    패튼 위치에서 저런 구설수가 나오면 그냥 나가리 되는 것이지요.
    기사로만 접하면 그냥 이런 쓰레기가 없는 사람으로 추락해버리는데...
    어찌되었든 화를 누그러뜨리고 대책을 세웠어야 하지만 그냥 그 성격에 뚜껑 열려버린듯....

  • @치즈피자치즈추가
    @치즈피자치즈추가 2 ปีที่แล้ว

    그깟 따귀가 뭐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생각할게 많은 사건이었습니다. 단순히 패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과 그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고심하고 조치가 이뤄진 과정을 볼 수 있었네요

  • @Panorama-memory
    @Panorama-memory 2 ปีที่แล้ว

    지휘관 입장에서는 전투피로증 은 있어도 인정하기 힘들지.. 그걸 인정하는 순간 누가 전장에 나가고 싶어하겠냐.. 꾀병 미친듯이 늘어나지. 부대가 와해될 위험까지 직면하게 되기 때문에..
    전투라는 지옥 때문에 사람이 정상이 아니게 되는거 인정하지만, 꾀병도 엄청날것도 분명한 것.

  • @donchoo4706
    @donchoo4706 2 ปีที่แล้ว

    양쪽 다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미국은 독일군 처럼 각성제 약을 억지로 먹일수도 없고...모든것을 인권에 바탕으로 절차를 통해서 풀어가야 하니까....

  • @조르바-h4m
    @조르바-h4m 2 ปีที่แล้ว +4

    전쟁이나 리더십은 진짜 복잡하네요

  • @유수윤-m4o
    @유수윤-m4o 2 ปีที่แล้ว +14

    군도 그렇고 대규모 조직으로 움직이는 단체나 기관에서 꼭 이러한걸 주의해야한다고 봅니다 자칫하면 문제의 원인을 정신력으로 찾기 쉽고 개인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죠

    • @전으뜸-p1n
      @전으뜸-p1n 2 ปีที่แล้ว

      왜 이리 맞는 말을 하는거죠? 똑똑한 사람인가요?

    • @oyk5092
      @oyk5092 2 ปีที่แล้ว

      자본주의는결과주의

    • @jaeyunji728
      @jaeyunji728 7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그걸 무시한 게 일본제국, 독'일제'국

  • @markpark6450
    @markpark6450 2 ปีที่แล้ว +2

    BOB에서 병원에서 탈영한 이유가 설명이군요

  • @김현수-c6z4t
    @김현수-c6z4t 2 ปีที่แล้ว +2

    지원과장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 @그러게요-d1v
    @그러게요-d1v 2 ปีที่แล้ว +2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다만 프랑스나 영국의 환자 복귀율이 높은거야 당연히 자신들 국가의 전쟁이니 당연한거고...
    미국 병사들이야 어떻게 보면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다른 대륙 전쟁에 징집병들이 끌려나온거니 당연한 것 아닐까요?
    결과적으로 영상에선 패튼은 전쟁 영웅이 되었고, 대부분 병사들은 죽음으로 내몰리거나 야전 병원에서 겁장이라고 따귀나 맞으니...
    현재 우리나라 군은 어떨까요?
    저야 90년대 군 생활을 했으니 서서히 군대 물이 빠지고도 말라버렸고, 이제 아들 놈이 몇 년 후에는 갈테니 슬슬 걱정이 되네요.
    아직도 장성들 인식이 예전이랑 똑같이 저따위일지???

  • @seungjaehan5801
    @seungjaehan5801 2 ปีที่แล้ว +3

    2차세계대전 당시는 PTSD나 전투피로증 등이 본격적인 의학 연구대상이 되기 전이었으니 당시의 장군/장교라면 정신력 문제로 보고 구타를 하는게 아주 이상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시절이긴 합니다. 그리고 구타를 하면 군대가 망한다는 분들이나 뭐 이런 근거가 희박한 논리를 전개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대로 군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기 전에 맹장형 장군/장교가 부하들을 구타하는 일은 종종 일어났고 전쟁귀신으로 불린 프로이센군은 구타로 유명한 군대였으며 레드코트로 유명했던 영국의 군대는 병사가 규율을 어기면 규칙에 따라 죽기 직전까지 태형으로 처벌했습니다. 물론 현재는 그렇게 하면 군대가 제대로 안돌아가겠죠. 당시의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 @진자림-f8e
      @진자림-f8e 2 ปีที่แล้ว +4

      이 영상에는 가치판단에 대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패튼의 행동에 대한 사실관계만 있죠.
      패튼을 욕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았습니다.
      '희박한 논리를 전개한다?'
      여기 어딜봐도 구타해서 군대 망했다고 하는 댓글이 없는데요?
      그냥 혼자 쉐도우 복싱 하는거 아님? ㅋㅋ

    • @너우누리
      @너우누리 2 ปีที่แล้ว

      말씀하신 프로이센군이나 레드코트는 2차대전으로부터 무려 150~200년 전의 군대입니다. 전장식 소총에 전열보병 집중전술이 주류였던 시대였죠. 2차대전 시기는 철도와 전신, 발전된 무기 체계로 인해서 징집병을 공포와 규율로 통제, 유지되는 제식이 전투력이 되는 시절이 이미 아니었습니다.
      구타를 하면 군대가 망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구타 따위는 전투력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건 1차대전의 끔찍한 참호전으로 이미 증명된 바 있고요 그 교리를 2차대전까지도 고집하던 일본군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 @우문식-k6b
      @우문식-k6b 2 ปีที่แล้ว +1

      음. 이 댓글의 의견은 조금 과한 면이 있어서 생각 남깁니다. 우리가 과거의 것들을 비교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 중 하나가 각기 다른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댓글의 내용에 대해 간단하게 반박이 가능한 것이, 예시로 든 것들이 죄다 전열보병 시대, 라인배틀 시대의 예시라는 점입니다. 당시의 전투 방식(라인배틀), 그리고 전투 구성원(대부분 하층민), 그 구성원들의 낮은 사기 등등으로 군대 내에서 구타나 폭력적인 행위로 규율을 강제한 것이고, 또 당시 장교와 병사 간의 계급적 마인드 차이가 그것을 허용할 수 있게 해줬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수 있겠죠. 2차 대전은 그 당시의 환경보다 차라리 현대의 환경에 가깝고, 특히나 본 영상에서도 나왔듯이 미군은 특히 민주주의, 인권 문제에 대해 민감했던 군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장군의 사적인 폭행은 더더욱 문제가 될 만한 일이죠. 구타를 하면 군대가 망한다? 그렇지 않은 시대가 있었고, 그럴 시대가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군대가 있고 아닌 군대가 있죠. 당시 미군은 그럴 시대였고 그럴 군대였다고 보는 게 좀 더 사실에 맞죠. 댓글의 주장이 맞을려면 당시 일본군은 세계 제일의 엄정한 군기가 선 군대여야 하는데 그건 좀 아니...잖아요?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여기 영상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인구 5천만 안되고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 @BLACKZAEKK
    @BLACKZAEKK 2 ปีที่แล้ว

    윌 스미스 했다

  • @user-dq6tf9ms6q
    @user-dq6tf9ms6q 2 ปีที่แล้ว

    꾀병이고 자시고 최전방에서 이송된 병원에 있는 병사의 뺨따구를 후려갈기다니 ㅎㅎ

  • @usa6539
    @usa6539 2 ปีที่แล้ว +1

    폭력 반대

  • @wjdcp9401
    @wjdcp9401 2 ปีที่แล้ว

    중대장 해보셨으니 알겠지만 진단이고 머고 애가 진짜 아픈건지 회피하는 건지 다 압니다. 때린 인간이 문제가 있었던지 유발적으로 했을 경우도 있고 대부분 욱해서 나간게 아닌가 하는데 미국사회를 고려해 볼때 때린사병이 좀 줄이 있지 안을까 생각된내요 제가 얼기론 다 구타나 가혹행위가 있었습니다. 서구문화가 장군씩이나 되서 사병끼리 하는 구타나 가혹행위를 하나로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귀족이 평민을 품위없게 다룬다고 보이는 거죠 그냥 쏴죽이지 말하긴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그런데요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얼마 전 기사 기억나는군요. 현역 사병이 몸이 아파 의무대 갔지만,
      별 것 아니다고 치료 못 받다 군대 밖 병원에서 암 진단 받아서 부모가 인터뷰한 기사. 21세기 군의관도 오판합니다.
      하물며 의학적 지식 사실상 전무한, 그것도 외상 등 눈에 보이는 부분도 아닌 정신적 영역을 80년 전 지휘관들이 다 알겠습니까?
      (중대장 해보셨으니 알겠지만 진단이고 머고 애가 진짜 아픈건지 회피하는 건지 다 압니다) --------------> 너무 확신하지 말길.
      한국전 종료 후 우리 국군이 당한 사고사 제외한 비전투 손실.
      즉 사병들의 병영 생활 과정에서 자살 + 총기 난사 타살 사건 등으로 발생한 사망자 수
      한 10년 전 쯤 기억 정확치는 않은데 아마 1만명 넘었을 겁니다. 당시 기억으로 1개 사단 병력 사라졌다고.
      대충 어림셈 해보죠.
      계산 편의상 1960년 ~ 2010년 50년 기간이라고 하면,
      1만명 / 50년 = 200명 ------------------------------------> 1년에 평균 200명 정도 사망했던.
      그래서 10년 전 그 기사 충격적이었던. 위 기억 바탕한 추정치 정확한 수치는 아니어도 당시 너무나 놀라서.
      우리 군 영내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는 무시할 수 없는 심각한 경우도.
      전시 아닌 평시에 왕따-괴롭힘-부적응 등의 사유로, 취침 시간 내무반에 수류탄 투척. 무차별 총기 난사 포함.
      패튼 유형의 지휘관 아래선 저런 일 더 자주 생길 것. 재수 없으면 지휘관 자체가 타겟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 보니 많은 전사자 발생한 러시아 기갑부대 탱크 승무원이 열받아 부대 지휘관
      탱크로 밀어 지휘관 하반신 부상당해 후송되기도. 그 병사 입장에선 순간 감정 통제 못하고 욱해서 그리 되었을 것,
      우크라이나에서 격파되는 러시아군 전차나 장갑차 동영상 보기를. 개죽음으로 내몰린 러시아 기갑부대 병사들.)
      지금은 많이 줄었을 겁니다. 대놓고 패대는 구타 사라졌으니.
      정부와 군에서 해 마다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정말 껄끄러운 통계 자료라 몇 년 지나 어떤 계기가 있으면 수치 공개되는.
      21세기 현재 많이 줄었다고 해도 만일 공개된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치가 될 수도.
      실제 전쟁 상황 아닌 평시 우리 군이 겪은 사병들의 정신적 문제로 일어난 사망 사건이 저렇습니다.
      2차대전 때 소련군이나 독일군에는 군을 감시 통제하는 집단이 있었고, 특히 소련군에는 정치 장교가.
      2차대전 때 미군 영국군은 현재 우리 군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인권이 보장된.
      우린 불과 몇 년 전에 공관병 갑질 사건 터졌던, 감나무의 감을 사병이 따지 그럼 사모나 장군이 따냐고 했던.
      미국이 강하고 대단했던 것은, 패튼과 같은 용감무쌍한 장군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 패튼 조차도 군내 인권을 유린하거나 법을 어기면 문책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영국과 미국은 알렉산더-카이사르-징키즈칸-나폴레옹 등의 위대한 군사적 영웅에 의존하지 않고 건설되었습니다.
      따라서 패튼급의 군 지휘관에 목멜 아무런 이유 없습니다. 고만 고만한 능력의 군 지휘관을 내세워도 잘 굴려가는 시스템이 중요.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인심 팍팍 써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날릴만한 역전의 용사인지 사실 의문이군요.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여기 영상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인구 5천만 안되고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미국과 영국의 군대 문화 관련해 소개합니다. 미국도 거의 유사할 것.
      군 퍼레이드를 아래 첨부와 하는 군에서 사병간 구타나, 부대 지휘관의 부대 장병 향한 패튼과 같은 행위는 마땅히 문책됩니다.
      대한민국의 우리 군 경험이나, 전세계 대부분 국가 군대 분위기로 미국 영국을 바라봐선 안되는.
      -------------------------------------------------------------------------------------------------------------
      1. GUARDSMEN'S FAREWELL TO OLD TED :1965년 1차대전 참전 후 부대에서 50년간 음료 판매했던 노병 은퇴식
      th-cam.com/video/pkfMcsUIM7k/w-d-xo.html : 나이 80이 넘어 스스로 은퇴, 사열 후 만세 외쳐주는 부대원들
      저 노인이 부대에서 차와 음료를 판매하는 푸드 트럭에는 1차대전 참전했던 전투들 이름이 새겨져 있군요.
      장군들, 높은 사람들만 부대로 부터 사열받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부대원들의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군요.
      나치 독일군이 아무리 막강했다고 해도, 이런 군인들을 상대로 전쟁에서 최종 승리할 자격은 없는 것일테고.
      2. The Highlanders Royal Regiment of Scotland homecoming parade through Aberdeen Sept 2017 - 4K
      th-cam.com/video/zjj-64Gyx00/w-d-xo.html : 뒷 부분 무장하고 실제 전투 순찰 대형, 경장갑 차량도.
      3. The Highlanders Homecoming Parade : 2014 은퇴한 노병이 사열받고, 전역 군인들도 함께 행진에 참여.
      th-cam.com/video/mE6cJJQACGU/w-d-xo.html
      4. Ipswich Honours Suffolks Aka Suffolk Regiment In Ipswich (1953) : 1953 말레이 공산 반군과 교전 후 귀국
      th-cam.com/video/hoT08_uCwp4/w-d-xo.html : 이 부대 출신 1차대전 노병 퇴역 군인이 사열받음.
      영국은 지난 수 백년 간 거의 쉬지 않고 전투 중이죠. 부대를 순환시키며 언제나 지구촌 어디선가 전투 수행.
      순환 배치로 귀국한 부대들은 자신들의 부대가 있는 도시에서 퍼레이드를 합니다.
      조금 오래 된 부대들은 100년 아닌 100년 단위의 역사를 가졌고. 육군의 경우 대개 지역에 기반한 부대.
      그래서 그 부대가 전쟁 파병될 경우, 주민들 가족 중 전사자 부상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영국은 군사독재 국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각 지역에 전쟁 추모비, 참전군인 동상들이 많죠.
      2번, 3번 동영상은 최근의 아프카니스탄 또는 다른 중동 지역에서 전투 직후 귀국한
      군인들로 구독일군, 구소련군, 현러시아군 등과 같은 각 잡히고 철두철미한 헬마치와는 다른 느낌의 행진.
      전장에서 실제 전투하는 군인들에게 각과 절도 안맞는다고 무시하는 이도 없죠. 실제 전투력과는 별개이니.
      4번 영상은 1953년 말레이에서 3년간 임무 마치고 귀환 퍼레이드. 우리 한국전 때 말레이에서도 교전했군요.
      찾아보면 분명 한국전쟁 후 귀환한 부대들의 영상도 있기는 있을 겁니다.
      시민들이 전투 후 귀국한 군인들을 맞이하는 모습, 군국주의의 열광적 환호와 분위기 다른.
      일반 시민들이 나치식 경례를 하고 어린 소년들이 열광하는 모습과 대비된, 차분하지만 따뜻한 분위기.
      영국과 미국의 군과 시민들 사이의 관계는 지금만이 아니라 나치독일 등장 전 오래 전 부터 이미 저랬죠.
      군이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의회나 시민이 새로운 저항군을 조직해 투쟁한 역사 전통 때문이겠죠.
      장군 크롬웰이 군을 동원해 국왕을 타도한 것이 아니라,
      의회가 해산당하자 의원이었던 크롬웰이 저항군을 만들고 왕정을 무너뜨렸고,
      북미 식민지에서도 시민들이 저항하며 혁명군이 조직되고 독립을 쟁취했기에 군이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죠.
      퍼레이드 보면 사열단에 높은 계급의 현역 군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민간인도 있는데 아마도 시장일 것. 과거 내전 당시 저항군의 지도자는 대체로 마을의 수장이었을테니.
      경우에 따라선 그 부대 출신의 예비역 노병이 사열단에 서기도 합니다. 미국 조차도 보기 힘든 모습.
      미국은 국토가 넓어 주둔하는 마을 도시 출신 위주로 부대가 편성되지 않아.
      저런 모습이 바로 군에 대한 문민통제 원형일 겁니다.
      저랬기에 알렉산더-카이사르-징키즈칸-나폴레옹 급의 탁월한 영웅 없이도 사상 최대의 제국과 미국 건국이 가능했던.
      반면 강력한 독일은 구 프로이센 시절
      프리드리히 대체 때 극단적인 병영국가로 탈바꿈, 그것을 계승한 비스마르크의 통일 독일제국.
      그 이후 독일 모두 국가를 이끌기 위해 강력한 군이 키워지고 선봉에 서고 국민 위에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죠.
      영국과 미국이 세계 패권을 거머쥐고 바톤 터지한 가장 결정적 이유일 겁니다.
      병영국가, 군국주의, 전체주의, 개발독재 공동체가 느쓴해보이는 공동체에 패한 것 우연은 아닐 겁니다.
      독일이 영국 미국에게 과학기술과 산업에서 뒤진 것은 없었지만, 공동체 내부의 저런 분위기에서 심각히 뒤졌던 것.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귀족이 평민을 품위없게 다룬다고 보이는 거죠 그냥 쏴죽이지 말하긴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그런데요)
      아직도 신분제가 남아 있는 영국이지만,
      수 백년 전 세금과 의회 해산 건수로도 국왕 목이 도끼로 잘려 처형되었습니다.
      앵글로색슨 전통, 남들 입장에서 지극 경미한 건수에도 쉽게 분노하는 경향. 국왕도 저리되는데 하물며 장군 따위야.
      그래서 다른 나라에선 언론 보도 안될 사안이 보도 되고, 여론에 두들겨 맞고 피해자와 부대에 공개 사과 몰린 겁니다.
      그 영국의 북미 식민지는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자치를 누렸지만,
      그 마저도 억압이라면서 무장 독립투쟁 시작되었고 결국은 독립. 그 무장 투쟁이 배경이 되어 총기 소지 자유화.
      어젠가 그젠가 미국 지하철에서 무차별 총기 난사 일어났죠.
      전시 아닌 평시에 이유가 뭐건 욱하면 저런 일 벌어지는 곳이 미국입니다.
      전시에 미군 지휘관들이 패튼식 행동 잦아진다면, 피해자나 지켜보던 이들 중에서 여차하면 큰 일 터지는 겁니다.

  • @정비오-h9z
    @정비오-h9z 2 ปีที่แล้ว +2

    우발적이든 고의적이든 결론은 후방의 고위 장교와 사무직들이 최전선의 병사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는지 명확하게 확인시켜준 사건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도 변함없듯이 말입니다.

  • @lalala8575
    @lalala8575 2 ปีที่แล้ว +4

    패튼은 보직해임된후 칼레에 상륙하는 가상부대를 지휘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있던 나찌들은 이 모든걸 양키들의 유치한 속임수로 봤죠.
    그래서 몇번이나 노르망디로 간다는 정보를 얻었음에도 잘 만들어진 가짜정보로 판단하게됩니다.
    저 두려운 패튼을 저런 이유로 해임하는것도 가짜 상륙작전의 지휘관으로 쓰는것도 다 이해가 안됬거든요.
    그래서 막판까지 칼레로 올거라고 확신하다가.... ㅎㅎ

  • @여차저차-o1r
    @여차저차-o1r 2 ปีที่แล้ว

    처칠의 갈리폴리에 비하면 오명은 무슨 패튼이 전투피로증 아니였을까? 병사들의 죽음을 보는 지휘관도 힘들테니까 병사보단 편하겠지만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여기 영상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인구 5천만 안되고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갈리폴리 영국이 패하고 거기서 철수했지만,
      오스만투르크는 소수의 영국 파견군에게 중동 각지에서 패배하고 최종 항복.
      저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라비아의 로렌스, 반투르크 아랍반군 봉기를 유도하면서 소수의 영국군 투입으로 승리.
      저 때 사우디아라비아 등 현 아랍 왕국들이 오스만투르크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팔레스타인-시리아-이라크 등은 위임통치령으로
      바뀌면서 오스만투르크는 현 터키 영토로 쪼그라 든 것. 2차대전 후에 위임통치령에서 이스라엘,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이 독립.
      특히 쿠웨이트는 유전 밀집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는데 영국이 석유 이권 통제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라크에서 떼어내 별도록 독립시킴.
      1990년 걸프전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할 때, 애초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한 주였다면서 원래 자기 영토 찾겠다면서 침공.
      영국은 삽질해도 어지간해선 전쟁에서 안집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국 보호령에서 독립국가로 나아간 계기. ANZAC DAY의 시작.
      갈리폴리 상륙지에서 해마다 열리는 기념 행사, 영-호-뉴-터 4개국 공동 행사로 열리며 호주와 뉴질랜드 독립 상징.
      다른 국가였다면 갈리폴리급 대규모 삽질했다면 분명 중동에서 완전 축출되었을 것. 하지만 영국은 정반대.
      갈리폴리 전투를 지휘했던 오스만투르크의 장군이 바로 케말 파샤.
      1차대전 패전 후 오스만투르크 왕정이 붕괴하고, 전쟁 영웅이었던 케말 파샤가 공화정 터키의 지도자가 됨.
      케말 파샤는 1차대전 패전에서 서구화 방식의 근대화를 선택했고, 알파벳 사용과 이슬람의 정치 간섭을 철저히 배제.
      그랬던 터키 공화국이 현 터키 대통령 취임과 함께 다시 이슬람 근본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 이슬람화하는 터키를
      다시 케말파샤의 공화정으로 되돌리려했던 쿠데타 시도가 터키 국민들의 개입으로 실패하기도.
      오스만투르크의 1차대전 패전 트라우마로 인해,
      2차대전 초중반 승승장구하던 독일의 거듭된 동맹 요청에도 끝까지 거부하며 중립.
      갈리폴리에서 영국을 막아냈지만 결국 소수의 영국군에게 중동 지역에서 패배해 제국이 해체된 충격 때문임.
      전함 2척 때문에 1차대전 독일에 줄서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해체당했다면 좀 이상하죠.
      즉 한 국가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는 상황에서 그 깟 전함 2척으로 결정이 되지는 않았을 것. 다른 더 결정적 요인들이 있는. (1차대전 터지고 영국이 투르크에 인도해야할 전함 2척 자국 함선으로 돌려 투르크가 삐져 독일편에 섰다는 주장.)
      1차대전 직전 독일과 영국의 중동 아프리카 정책이 가장 결정적일 것.
      독일의 3B 영국의 3C 정책. 독일의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 비잔티움이 현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 바그다드는 이라크 영토.
      즉 1차대전 전 독일은 베를린에서 중부 유럽을 관통해 오스만투르크의 수도 및 바그다드 까지 철도 건설로 유혹하며 동맹 설득.
      오스만투르크 입장에선 이집트와 수에즈를 장악하고 오스만투르크를 위협하는 영국을 막기 위해 독일을 선택했을 수도.
      영국에 대한 트라우마는 터키만이 아니라 스페인도 강했죠.
      2차대전 초기 독일이 깃발 날릴 때, 지브롤타 점령을 위한 육상 통로를 내달라는 요청 끝까지 거부.
      독일이 제 아무리 승리하고 잘 나가도, 독일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독일과의 군사동맹과 침공로 통과 모두 거부.
      이유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된 이후에도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시기 트라팔가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한 충격.
      스페인 프랑코 총통은 중립지킨 행운으로 전후에 전범으로 처리되지 않았고.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1

      패튼이 전투피로증??? -----------------------------> 그러기엔 세계대전 장군 치고는 너무나 전투 경험이 적었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후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력을 부풀려 산정해도 사실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짧았던.
      인심 팍팍 써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 저런 수치 상태에서 정말 패튼이 전투피로증 걸렸겠습니까???
      -------------------------> 사병이라면 몰라도 장군 정도라면 절대로 아닐 겁니다.

    • @user-vt2dc8923
      @user-vt2dc8923 2 ปีที่แล้ว

      중2병 걸렸냐

  • @LEETG00264
    @LEETG00264 2 ปีที่แล้ว +1

    언제 한번 이런 전쟁 영웅 외전으로 미하일비트만 같은 사람들 한번 다루면 좋겠네여

  • @유사인류조센진
    @유사인류조센진 2 ปีที่แล้ว +1

    패튼은 당시 이미 독일에선 요주의 인물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일시 경질돼서 영국의 칼레 방면에 처박혀 있게 됨.
    놀망디 상륙 때 독일군이 안그래도 부족한 전력의 상당 부분을 칼레 방면에 묶어놔서 상륙 방어전의 효율이 떨어졌는데, 그쪽에 처박혀있던 패튼을 의식해서였다는 썰이 있음.

  • @청솔향-g9u
    @청솔향-g9u 2 ปีที่แล้ว

    벌받을 행위는 분명하지만 보직해임은 정치적 판단 특히 연합군내에서의 알력이라 생각 합니다.
    사실 연합군입장으로 볼때 패튼의 행동은 결코 과한게 아니고 어찌보면 선무공작이라 부를 수도
    있을 수위 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내부의 규율이라던가 혹은 명령체계의 군기가 엉망이었다는
    증좌이겠지요. 미군으로서는 과할지 몰라도 나머지 연합군 특히 전쟁초기부터 싸워왔던
    영국군에게 이것은 결코 과한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패튼을 본보기 삼아 완전히 짓밟은 것은 연합군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무리수가 아니엇나 생각 합니다. 1차 세계 대전에서건 2차 세계대전에서건
    결국 미국은 손님이었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이런 별거 아닌 상황으로 장군을 날려 버릴 수 있다!'라는 데몬스트레이션이죠!
    덕분에 한동안 드골이나 몽고메리가 찌그러지긴 했습니다. 패튼이 전장에 복귀하자 다시 미쳐날뛰긴 했지만.....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밴드 오브 브러더스, 제목이 왜 저렇지 그런 생각 해본적 없습니까?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 연극 대사 중 일부,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
      100년 전쟁 아쟁꾸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로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을 격려했던 헨리5세의 연설 대사라고 합니다.
      " 우리 수는 적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
      ------------------->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흘리며 싸운 이들은 국왕-귀족-평민 신분 차이를 넘어 모두 한 형제.
      ------------------->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후회하리라.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41년 12월 진주만 기습, 그 직후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
      미국이 준비를 갖추어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에 지상군을 파병한 것은 대략 43년 초.
      미 지상군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43년 2월 튀니지의 캐서린 패스 전투, 롬멜에게 사실상 전멸급 패배당했습니다.
      당시 롬멜의 핵심 방어선 마렛 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당하면서 독일군이 철수해 미군은 재정비 기회를 얻었고,
      패튼은 그 때 신임 지휘관으로 교체 투입되었던.
      43년 5월 독-이 추축국 지상군 25만 병력이 최종 항복하며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그 시점 까지 미군은 보조 역활.
      미 지상군이 본격적으로 북서유럽에서 독일군과 교전한 것은 44년 6월 노르망디 이후.
      즉 미 지상군은 45년 5월 독일 항복 까지 북서유럽에서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전투했던 겁니다.
      저 짧은 교전을 배경으로 70년대 tv 시리즈 컴뱃, 2000년 이후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가 등장했던 것.
      노르망디 전역에서도 독일 기갑부대 80%와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는 영-캐군이 담당했습니다.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전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코브라 돌파 역시 브래들리의 미1군이 돌파했던 겁니다.
      영연방군이 독일 주력을 깡 전투에서 고착 소모시키는 동안, 미군 전방의 독일 방어선이 사실상 알보병 지대로
      지극 취약해져 그 약해진 곳을 브레들리의 미1군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 상륙 실행 전 작전 계획에서 이미 그렇게 짜여진.
      캐서린 패스 전투로 사실상 신병 수준의 미군에게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기대가 불가능했기에.
      패튼은 코브라 돌파 무렵 노르망디에 부임해 재편성되는 쌩쌩한 미3군 지휘를 맡았던 것.
      미 지상군이 단독으로 독일 주력 상대한 것은 종전 몇 개월 전인 벌지 전투가 처음이었고, 그것도 너덜너덜해진 독일군 상대.
      밴드 오브 브러더스, 컴뱃 시리즈 시청한 사람들은 미 지상군이 독일군 괴멸시킨 주력으로 오해할 여지가 상당합니다.
      냉정하게 본다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독일 지상군과 제대로 교전 너무 늦게 시작되었고, 전투 기간 역시 지극히 짧았던.
      가장 오래 교전한 영국, 가장 대규모에 엄청난 피를 흘린 소련이
      드라마로 다룰만한 에피소드 훨씬 더 넘쳐날 것. 특히 밴드 오브 브러더스는 그 제목 부터 표절 성격.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100년 전쟁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리더쉽의 차이.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현재는 폐지된 구 독일 국가 1절, 보기 드문 호전성 전투적 특성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죠.
      역시 현재는 사라진 공산혁명의 산물인 볼세비키-공산소련 시절의 같은 선율, 다른 가사 노래들엔 개인 우상화 바로 느껴지고.
      1. 독일 국가 th-cam.com/video/WO3NXx0k9-E/w-d-xo.html
      2. 룰브리타니아 th-cam.com/video/UKfXVm4fDw8/w-d-xo.html
      3. 룰브리타니아 해군 버전 th-cam.com/video/j_wYihc37dw/w-d-xo.html
      4. 영국 국가 th-cam.com/video/Xm7CZvvsC64/w-d-xo.html
      5. 볼세비키-소비에트-현러시아 국가 th-cam.com/video/SjVCTQsUDIk/w-d-xo.html
      참고로 볼세비키-소비에트-현러시아 국가는 모두 동일 선율의 가사만 바뀐 국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선율로 여러번 선정된 국가-노래. 소련 붕괴 전 가사는 공산혁명, 공산당, 레닌, 스탈린에 대한 찬양.
      룰브리타니아, 1997년 홍콩 반환식 tv 중계를 보면서 처음 접했었죠.
      나중에 가사를 알고 나서 정말 놀랐습니다. 우리의 6.25 노래 가사와 너무나 달랐기에.
      " ~ 하늘을 찢을듯한 천둥 같은 외세의 일격에도 더욱 강해지리라 ~
      후렴구 : 지배하라 브리튼이여, 지배하라 파도를! 브리튼은 결코 결코 결코 노예가 되지 않으리라! "
      후렴구에 3번 반복됩니다. never, never, never!
      영국 국가 3절엔 왕권에 대한 점잖은 공손한 협박이 포함됩니다.
      국왕이 선정을 베풀게 해서, 국민들이 국왕을 따르고 충성할 수 있도록 하소서! --------------> 독재, 억압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
      영국 국가와 룰브리타니아는 모두 1740년경 국가로 지정되거나 출현했습니다.
      룰브리타니아는 프랑스, 스페인등과의 전쟁에서 연이은 승전보 속에서 영국 제2국가 유사하게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 의회의 잉글랜드와의 평화적 합병안이 통과되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영국 즉 연합왕국이 1707년 출현했으니 그 직후.
      (대한민국과 북괴의 6.25 노래 유형의 가사와 완전 대비되는 영국 제2국가 룰브리타니아)
      (동족끼리 조국의 원수가 되어 피끓는 적대 분노를 토하는 것과 대비된 외세에 굴복해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투쟁가)
      (세계 패권은 아무나 힘만 세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안에서 새는 바가지에게는 더 어렵고)
      현재 사용중인 독일과 러시아 국가는 비로서 정상적인 수준의 노래말을 가진 겁니다.
      즉 과거 막강한 군사력을 뽐내며 깃발 휘날리던 시절의 독일과 소련은 비성숙한 저차원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것.
      엄청난 힘을 가진 성숙하지 못한 교양 없는 깡패의 세계 패권 장악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패권 아래서 더 큰 고통과 신음할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나머지 전세계가 그런 패권을 본능적으로 거부.
      (전세계는 그나마 교양 있는 깡패가 승리하는 쪽에 줄을 선 것이죠.)
      세계에 군림하겠다는 독일,
      외세 억압에 굴복해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영국.
      동맹 확보에서 영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겁니다. 실제 역사도 그랬습니다.
      독일의 위협이 너무나 컸기에 소련까지 반독일 대동맹에 참여해 독일의 승리를 저지시킨 것.
      독일이 붕괴된 이후 소련, 핵무장과 가장 큰 규모의 재래식 군대를 보유한 소련은 총 1발 못쏘아 보고 자체 붕괴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영국은 패권 장악에 성공했던 겁니다.
      상대적으로 가장 소규모의 병력을 동원하고, 낮은 군사력 의존도에 불구하고,
      비군사적 부분에서 부드럽게 전세계 표준을 장악해 지구촌 생활양식과 경제활동을 결정지어서 패권 장악.
      영국과 독일의 가장 큰 차이는 과학기술이나 경제 규모가 아닙니다.
      1215년 마그나 카르타 부터 지속된 수백년간의 점진적 민주화로 공동체 분위기 자체가 달랐습니다.
      의회 해산과 세금 정도의 꼬투리로도 국왕이 독재로 몰려 목이 잘려 처형되는 강력한 반독재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반면에 독일은 프로이센이 도입한 병영국가, 전체주의 시스템이 2차대전 패망 때 까지 유지되었죠.
      프로이센 주도의 비스마르크식 통일 독일 제국 건설. 철혈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가 활동하던 때가 1800년대 후반기.
      냉정하게 말하면 비스마르크 독일의 정치적 수준은 미국독립 당시의 북미 식민지 수준에도 까마득히 미치지 못하는 저차원.
      독재자에 순응하고 저항하지 않는 공동체와
      사소한 부조리 불합리에도 저항하는 공동체는 수백년이 흐르면서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겁니다.
      영국과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결정적으로 달랐습니다. 선민주-후경제개발.
      영국의 적들은 개발독재 수준에 머물렀었죠. 그 어떤 개발독재도 선민주-후경제개발 길을 걸었던 퍼스트 무버를 극복 못했죠.
      영국은 오늘날 현대 세계 자체를 기본 포맷, 세계 표준을 확립했습니다.
      1. 의회 대의 민주주의
      2. 자본주의 시장경제 및 산업혁명
      3. 뉴턴 이후의 자연과학 혁명
      4. 명확한 룰 체계를 갖춘 근현대 스포츠
      5. 현 최강국 미합중국 건국 기초
      물리학과 공학의 핵심 밑바닥 기초 단위명만 봐도 확인.
      힘의 단위 뉴턴N, 일과 에너지 단위 쥴J, 일률의 단위 와트W, 절대온도 켈빈K.
      가장 기본적 단위는 영국인 이름, 그 유명한 아인쉬타인 조차도 아직 기본 단위명 채택 없을 정도.
      앞으로 수 백년 세월이 흐르며 수 많은 자연과학의 성과가 쌓여야만, 더 근본적인 새로운 단위 체계로 바뀔 것.
      왜 오늘날 세계표준을 영국이 만들었을까요?
      왜 여러 나라가 경쟁하며 각 부분 상대적 우세 보이면서 분할 못하고 영국이 독점적으로 모든 분야 장악했을까요?
      정치적 민주화, 작동하는 의회를 가장 먼저 보유.
      그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 분위기가 다양한 분야에서 창조성 폭발.
      내부의 갈등 역시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혁명, 우리의 한국전쟁과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를
      회피 헛되이 낭비되는 내부 에너지를 줄여 대외 팽창에 집중. 내부의 대규모 유혈 혁명은 그 공동체의 비성숙을 의미.
      그래서 저 작은 공동체가 오늘날 현대 세계 자체를 기본 포맷 성공했다고 판단합니다.
      영국인들이 특별한 유전자를 가져서 모든 부분의 세계 표준을 확립한 것이 아닌 내부 민주화가 촉발시킨 경쟁력 때문에.
      나폴레옹, 많이 안타깝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숭고한 가치가 프랑스 대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주변 외세의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방어 차원에서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으로 퇴색했기에.
      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는 보불전쟁에서 비스마르크에 패배할 때 까지 3/4 세기 정도를 혁명과 반혁명의 수렁에 빠졌죠.
      왕정복귀와 공화정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내부 역량을 갉아 먹는 동안 영국은 전세계를 장악했고.
      (프랑스 대혁명 약 100년 전, 영국은 명예혁명으로 사실상 유혈 없이 전제 왕권 극복)
      (100년 후 프랑스라는 공동체의 수준이 대규모 유혈 사태로 갈등을 해결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것)
      (러시아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부터 다시 100년이 넘어서도 대규모 유혈 사태를 피하지 못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그 원인은 수백년간의 누적된 저항 투쟁의 성과 차이, 즉 내부 민주화 수준의 차이)
      (푸틴이 영구집권 꾀하는 현 러시아 역시 본질적으로 전체주의 속성 강하고)
      비스마르크 이후 독일 정말 엄청났죠.
      하지만 독일이라는 공동체가 병영국가 전체주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해 애초 승리할 자격 자체가 안되었던 것.
      개발독재 방식의 엄청난 속도의 추격자, 패스트 팔로워 였지만, 전체주의 속성 때문에 퍼스트 무버의 벽을 못 넘은 것.
      독일축구의 강함을 흔히 독일 전차군단이라고도 하죠.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독일은 전차도 축구도 먼저 개발했거나 제도화한 적이 없습니다.
      탱크만이 아니라 최초의 비행기, 최초의 잠수함, 최초의 항공모함...무기 체계에서도 대부분의 최초는 독일이 아닙니다.
      비군사적 측면의 사회 시스템과 일상 생활 관련 부분에서는 독일의 영향력 군사부분 보다 더 찾아보기 힘들죠.
      2차대전 인상적인 독일제 멋진 무기에만 심취하면 안보이는 것들.
      역으로 접근하면 보일 수 있습니다. 왜 저런 막강함에도 독일은 실패했지? 실패할만한 치명적 문제점을 가졌던 것이죠.
      현 최강국 미국은 과연 어떤 수준이겠습니까?
      미국이 과연 현재의 표준을 대체할 새로운 표준을 확립하겠습니까?
      패권 잃을 때 같은 언어-문화-가치관 가진 우호세력 만들면서 적대 세력의 패권 장악 저지하겠습니까?
      -------------------------------------> 2차대전 후 현재 까지 미국을 본다면 안타깝지만 NEVER!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아더왕 신화 : 앵글로색슨 용병을 불러들인 분열했던 켈트의 후회, 신화로 거듭나다.
      로마 철수 후 로마화 문명화한 켈트가 스코틀랜드 웨일즈에서 로마에 투쟁했던 켈트 막기 위해 앵글로색슨 용병 고용.
      수 백년이 흐르며 결국 용병들이 고용주 켈트 지배층 내쫒고 잉글랜드 왕국 건설. 이후 앵글로색슨과 켈트의 증오와 투쟁.
      영국 정확히는 연합왕국 UK는 단일민족 국가가 아닙니다. 원수나 다름 없는 증오가 가득찬 앵글로색슨과 켈트의 연합체.
      현재 한반도 남북의 적대감, 대한민국 내부 동서 지역분열 등은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피의 복수혈전 반복되던.
      하지만 연합왕국 성립 이후, 그들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세계제국으로 팽창했고 미합중국 건국의 초석을 놓았죠.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평화적 합병으로 연합왕국, 이 후 내부 분열 극복하고 세계제국으로 팽창.
      중미 식민지 개척에 국운을 걸고 전국민이 투자했다 파산한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와의 평화적 합병을
      승인하고 연합왕국이 수립됩니다. 그 이전 까진 같은 국왕 다른 나라였던 동군이국이었는데 진정한 한 나라로.
      여기선 그 내용은 생략하고, 로마제국 말기로 거슬러 올라가 앵글로색슨과 켈트의 투쟁 시작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브리튼 제도에 오래 전 이주해 살던 켈트족.
      줄리어스 시저의 잉글랜드 남부 상륙 시작으로 로마에 점령.
      로마화 문명화한 다수 켈트인들이 로마제국 백성으로 번영을 누릴 때,
      로마의 군사력에 산악 오지였던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바다건너 아일랜드로 쫒긴 켈트인들 로마에 저항.
      (유명한 미 드라마 왕좌의 게임,
      7왕국은 고대 앵글로색슨 7왕국, 스타크 가문이 지키는 북쪽의 얼음장벽은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장벽.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웨스트로드 땅덩어리는 아일랜드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에 붙인 다음 남북을 뒤집은 형태.
      즉 왕좌의 게임은 통채로 고대 앵글로색슨과 켈트의 투쟁에 기반한 작품입니다. 켈트인들은 얼음장벽 너머의 종족들.
      하지만 결국 나중엔 장벽 너머에서 나타난 공동의 적 상대로 함께 싸우게 되죠. 영국 역사가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켈트와 앵글로색슨의 원한 증오 시작해보죠.
      제정로마 후기 로마가 위태로워지자,
      로마 본토 수호를 위해 브리튼의 로마군이 철군하면서,
      이미 로마화한 켈트인들은 로마에 저항했던 야만적 켈트인들은 두려워했고,
      그들을 막기 위해 현 독일 북서부와 덴마크 지역의 앵글로색슨을 용병으로 고용하기 시작.
      수 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굴러들어온 용병 앵글로색슨이 박힌 돌 문명화한 켈트인들을 내쫒고 잉글랜드 수립.
      같은 민족인데 단합하지 못한 켈트인들, 앵글로색슨에 패해 웨일즈, 스코틀랜드로 쫒겨났습니다.
      그 원한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후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태어난 것이 아더왕 신화입니다.
      현실에선 단합하지 못하고 분열해서 패배했지만, 신화 속에선 승리하죠. 아더왕의 적은 앵글로색슨 침략자.
      그 앵글로색슨이 바이킹의 일족 노르만에 정복당해 오늘날의 영국 왕조 수립.
      덴마크 스칸디나비아에 기원을 둔 바이킹들이 유럽 각지로 퍼저나가면서 일부 세력이 프랑스 노르망디 점령.
      군사력이 너무 막강해 물리칠 수 없었던 프랑스 국왕은 노르만 공이라는 작위 내리고 땅을 영지로 하사하며 달램.
      잉글랜드 왕족들과 친척인 노르만 공이, 잉글랜드 국왕 승계 문제로 전쟁.
      1066년 노르만 정복으로 앵글로색슨 왕조가 붕괴되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노르만 왕조가 성립.
      노르만디 지역엔 앵글로색슨에 추방된 수 많은 켈트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노르만과 함께 잉글랜드 정복군에 가담.
      노르만 정복 이후 아더왕 신화가 영국과 유럽에 널리 퍼짐.
      선주민 켈트, 켈트를 정복한 앵글로색슨, 그 앵글로색슨을 정복한 극소수 노르만 바이킹,
      노르만 바이킹에 협력해 앵글로색슨에 복수한 노르망디의 켈트 유민들. 그들이 뒤섞여 현 영국.
      분열해서 좋을 것 없습니다.
      민족의 원수 주적이 같은 민족인 것은 어리석죠.
      앵글로색슨을 용병으로 고용했던 로마화한 켈트인들의 주적은, 같은 민족인 켈트였습니다.
      현명한 외세는 어리석게 내부 분열하는 틈을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분열한 켈트인들은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분열했던 켈트의 후회와 반성이 신화로 재창조된 것이 아더왕 전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아더왕 신화는 켈트를 넘어 모든 브리튼 거주민 및 브리튼에서 전세계로 퍼져나간 모든 이의 신화.
      용병으로 굴러들어왔던 앵글로색슨과
      그 앵글로색슨과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던 노르만 바이킹의 고대로부터의 관습들이
      국왕이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에 좀 더 저항하게 만들었고, 결국 잉글랜드 왕국 내부로부터,
      느리지만 점진적인 왕권제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고 1215년 마그나카르타 대헌장으로 성과가 시작.
      하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증오에 바탕한 투쟁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죠.
      잉글랜드는 결코 스코틀랜드를 무력으로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의회 스스로 평화적 합병을 결정.
      그 관련 내용은 여기선 생략합니다.
      일단 연합왕국 구성 이후엔,
      그들은 내부의 증오가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지는 것을 철저히 회피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혁명, 한국전쟁과 같은 내부 역량을 갉아먹는 대규모 유혈 분쟁을 피하면서 대외 팽창.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약했던 민주주의 싹이 연합왕국을 통해 되살아났습니다.
      대서양 동서 양편에서 입헌군주정과 공화정으로.
      미국 건국은 붕괴했던 고대 로마 공화정의 약 2000년 후 부활입니다.
      미국 건국에는 수 많은 켈트의 후손들이 가담했고, 앵글로색슨은 미 건국의 아버지 대다수였죠.
      비록 켈트의 나라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앵글로색슨과 함께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는 제2의 조국으로 미국을 건국하였고 많은 미국 대통령도 배출했죠.
      사실 함께 섞여 산지 오래라 유전적 분류는 무의미하고, 스스로 누구의 후손이라 여기는지 문화적 차이가 더 중요.
      2차대전 때 미 장군 패튼이 몽고메리에 감정적 대립을 보인 겉으로 말하기 힘든 가장 큰 이유 그가 스코틀랜드 후예.
      스코틀랜드는 작지만 정말 대단한 지역입니다.
      현재 인구 고작 500만 정도인데, 영국 전체 노벨상 수상자의 1/3, 영국군 막강한 부대들 배출.
      영국은 독일 보다 과학분야 노벨상 수 더 많고, 단위 인구당 수상자 수로는 미국의 2배 이상인데 영국에서 압도적.
      아담스미스와 산업혁명이 시작된 곳.
      연합왕국 내부에서 어마어마한 공헌을 했죠.
      영국이 만든 세계표준의 거의 다는 스코틀랜드의 결정적 역활 때문.
      스코틀랜드 단독으로는 결코 그런 일들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잉글랜드 역시 마찬가지일테고.
      원수나 다름 없는 이민족들이 뭉쳐서 내부 분열을 극복하고 세계로 뻗어나가,
      함께 대영제국을 건설하고 또한 영국에서 파생된 미합중국을 건국해서 세계패권을 승계하며 유지한 역사.
      반면 한반도의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인데도,
      식민지에서 해방되자 마자 극단적 내부분열로 전쟁 까지 하고 현재 휴전 대치 중.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1. 4,500년간 전투 승리 횟수 국가별 랭킹 : BC2,500~2,017년, 위키디피아 오른 전투들, 중요도 무시 오직 횟수, 내전 포함.
      th-cam.com/video/HK5OsDWYJmQ/w-d-xo.html
      1위 프랑스 1,115회 , 2위 영국 1,105회 , 3위 미국 833회 , 4위 러시아 491회 , 5위 독일 425회
      6위 스페인 387회 , 7위 폴란드 344회 , 8위 로마 259회 , 9위 중국 244회 , 10위 터키 210회
      위키디피아 등재된 전투가 어떤 규모 이상인지 아니면 규모 상관 없이 역사 기록에 남은 전투 모두인지 모름.
      승률이 아닌 승리 횟수만을 반영한 통계. 프랑스가 횟수로는 근소한 차의 1위지만, 승률로는 1위는 아닌 느낌.
      2차대전 대서양에서 벌어진 해상 전투들은 나타나지 않는 것 같군요. 4,500년 전체 관점에서는 미미한 오류.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미세한 차이는 역전되고도 남을만한 누락임도 분명합니다. 영국은 수 백년 동안 해상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반으로 강대국으로 거듭났는데, 대규모에 결정적인 해상 전투들도 누락된 느낌.
      마찬가지로 항공전도 빠진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4,500년 장기 통계엔 거의 영향은 없고.
      세계지도에서 전투 발생을 점으로 나타내며 승리 횟수 높은 국가 순으로 자막이 나옴. 인용된 총 전투 수는 약 10,600개
      전투의 중요도 가중치 없이 모든 전투를 1회로 단순 평가. 내전에서의 전투 또한 1회로 취급해서 실제 타국과의 전쟁에서
      군대의 강력함을 반영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측정해도 결과는 현재 강대국들 다 포함.
      비스마르크 통일 독일제국에서 1,2차 대전 까지 막강했던 독일이 5위로 조금 낮은 평가인듯 하지만, 4,500년의 누적임.
      로마는 로마공화정과 제정로마를 모두 합산했는데, 생각 보다 전투 횟수가 많지 않아 승리 수도 적은듯. 너무 강해 적들
      이 미리 굴복해서 전투 횟수가 줄었을 수도 있음.
      중국의 경우는 주로 한족 왕조만 따진 것 같음. 몽골 등이 별도로 계산. 하지만
      청나라는 중국으로 환산됨. 즉 국적 분류가 딱부러지게 쉽지만 않고 애매할 수가 있음.
      청 등이 중국으로 분류되었다면, 한족 주도의 중국의 승리 횟수와 승률은 추가로 하락하게 됨.
      프랑스와 영국은 거의 같은 횟수, 그 두 나라 사이의 전투가 아마도 상당한 비중일 것임. 백년전쟁 여파로.
      프랑스는 승리 횟수로 간발의 차이로 영국에 앞선 1위지만, 결정적 전쟁에 패한 충격이 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1위 아님.
      나폴레옹 때문에 프랑스의 1위가 결정된듯. 하지만 나폴레옹 몰락 후, 특히 보불 전쟁 부터 프랑스는 중요한 전쟁에서
      패배한 취약점이 있음.
      프랑스의 승리에 노르만 정복을 포함한다면 수정 필요. 노르만 정복의 승리로 현재의 영국이 완성되니까 영국의 승리,
      영국의 내전 횟수로 기록해야 되는데 파악할 길은 없음. 노르만과 앵글로색슨 왕가는 애초 친척지간. 친척간의 왕위 다툼.
      미국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3위. 하지만 남북전쟁으로 내전에서 승리 횟수도 상당히 많음. 폴란드 전투 승리 많은 편.
      폴란드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세계사에서 막강했던 세력들이라 간단한 어림셈도 상당히 정확한 결과를 낸듯.
      2. 거의 같은 자료, 세계지도가 아닌 국가별 통계로 1위~100위 까지 나열한 랭킹 총 전투 횟수는 약 12,000회로 더 많음.
      th-cam.com/video/xgLKVaJwpXY/w-d-xo.html
      1위 2위 ...10위 결과는 1번 자료와 동일함. 승리 횟수도 같거나 거의 같음.
      미국은 역사가 아주 짧지만, 남북전쟁 이후 1차 2차대전 참전과
      2차대전 이후로는 현재 까지 꾸준히 계속 전투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3위에 오른 것 같음.
      영국은 2차대전 이후에도 미국과 거의 같은 전장에서 함께 전투하기 때문에 승리 횟수도 늘고.
      저런 통계를 분석한 사람이 외국에 존재한다는 것, 사용된 원본 데이터에 상당한 오류나 누락이 있을 수 있지만,
      크게 크게 보았을 때 지난 4,500년간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게 하는 분석을 시도했다는 것, 시야 대단히 넓은 것.
      개인적으로 정리한다면,
      1. 4500년간 전쟁이 가장 많이 일어난 곳은 유럽.
      2. 주관적 가중치 부여하면, 가장 강력한 전투 민족은 영국
      범게르만의 일족으로 통합한다면 영국 미국의 앵글로색슨과 독일.
      미국의 인구 구성 조차도 잉글래드-스코틀랜드-웨일즈-아일랜드를 통칭한 영국과 독일이 합이 백인의 압도적 다수.
      3. 1차 2차대전 독일의 막강함이 인상적이었지만, 미국이 독일 아닌 영국으로 부터 건설되었듯 영국의 영향력 결정적.
      4. 영국은 과거나 지금이나 군대의 규모, 병력 수에서는 다른 경쟁국 보다 작지만 승리가 많다는 것.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미 육사의 샌드허스트 경연에서 영국과 영연방에 미국 조차 압도당하고 있음.
      그 원인은 소규모지만 꾸준히 어디선가 계속 전투 중이고, 그 전훈을 지속 엎데이트 하는 걸로 추정.
      5. 위키디피아에 등재된 기록은 일단 영어가 압도적이고 분석하는 사람도 영어 자료를 분석했을 듯.
      따라서 영어권 아닌 지역의 전쟁이나 전투 기록은 영어로 올리지 않는 한 분석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고대 발생한 전쟁들, 고대 몽골 초원의 전투들은 모두 배제되었을 것.
      즉 역사는 실제 사건 발생 여부를 떠나, 기록을 남긴 자들의 영향력이 더 크게 남음.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1. 100 Greatest Generals in History 역사상 승리 많은 장군 랭킹 : 전투 중요도 가중치 없이 횟수만, 나폴레옹 1위
      th-cam.com/video/TmSQriq0zTc/w-d-xo.html
      2. Have the British really invaded 90% of the countries in the world? 영국은 전세계 국가 90%를 실제로 침략했는가?
      th-cam.com/video/t86J_zZjjq4/w-d-xo.html : 유엔 회원국 193개 시점에서, 무려 171개국 군사적 침공
      1. 승리 횟수로 본 장군 랭킹 정리
      1위 나폴레옹 56회, 2위 웰링턴 39회, 3위 칼리드 이반 알 왈리드 28회, 4위 줄리어스 시저 23회, 5위 알렉산더 22회
      전투 승리 횟수로 본 국가 랭킹과 달리 실제 체감과 차이가 훨씬 더 나는 편입니다.
      단순한 전투 승리 횟수 보다 전투의 중요성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국가 랭킹에서는 누적 전투 수가 1만회를 넘어가지만,
      장군 지휘관들의 한 평생 전투 누적 기록은 아무리 많아도 100회를 넘기 어렵게 때문에 통계적 오류 발생 확률이 커서.
      하지만 그렇게 단순화시켜도 랭킹 1위, 4위, 5위에는 나폴레옹, 시저, 알렉산더가 포함됩니다.
      문제는 한니발과 같은 위대한 장군이 20위 근처인데 그런 부분은 결정적 오류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전투 횟수 산정에 애매한 점이 있기 때문이죠.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에 진공한 다음 로마군과 거의 20년을
      이태리 반도에서 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치러진 전투를 어떻게 구분하고 횟수 산정할지 지극히 애매하죠.
      한니발은 횟수만이 아닌 질도 결정적이죠. 고국 카르타고의 지원 없이 고립된 상태에서.
      섬멸전의 원조, 망치와 모루의 원조인 칸나 전투 하나만으로도 한니발은 1위가 될 여지가 있습니다.
      문제는 한니발은 최종적으로 로마에 패했다는 약점이 있고, 알렉산더는 아예 패전을 경험한 적이 없이 젊은 나이에 병사.
      승리 횟수로만 산정할 때 일본 전국시대 장수들이 꽤나 순위에 들어가는 오류도 생깁니다.
      그런 부분들은 고려하면서 영상 보면 될 겁니다. 충무공이 11승으로 나오는데, 23전 23승 아닌 무패로 본 모양.
      (충무공의 23전에는 매우 인접한 장소에서 몇 일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각각 셈한 결과. 그런 전투들은 1개로 통합될 여지도.)
      (충무공의 23전 식으로 횟수 산정할 경우, 2차대전 대서양 해전은 어마어마한 횟수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수송선단과 유보트 교전
      횟수는 약 1,000회에 개별 항해 선박과 유보트 교전은 수천 회에 달하지만 모두 다 교전 횟수로 계산하지는 않았겠죠.)
      근대 이후로는 단연 나폴레옹이 압도적입니다.
      1차, 2차대전의 탁월했던 그 어떤 독일 장군도 감히 넘보지 못할 기록이며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 중반부 이후 포병 장교로 등장해서 워털루에서 패배 까지 20년 동안 유럽을 석권.
      1차 대전 독일 4년, 2차대전 독일 6년과 비교할 수 없고 나폴레옹은 모스코바를 점령 후 후퇴했지만 독일은 불가능했죠.
      웰링턴의 승리 횟수 대부분은 스페인에서 벌어진 전투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형제 친척들은 유럽 각각의 국왕으로 임명하면서 스페인 국왕 역시 그렇게 되었죠.
      그 때문에 스페인과 포르투칼에서 반 프랑스 봉기가 일어났고, 영국은 10년 이상 이베리아 반도에서 장기적 전투를 수행.
      스페인 전역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에 패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기억이 희미한데 프랑스가 스페인에서 손실한 병력이
      10년 동안 누적해서 대략 30만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가랑비에 몸이 젖은 셈이죠.
      만쉬타인, 구데리안, 롬멜, 패튼 몽고메리 등도 나옵니다.
      롬멜, 패튼, 몽고메리는 제 아무리 유능한 장군이라고 해도 만쉬타인급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2차대전에서 그토록 유능했던 전쟁의 대가 만쉬타인 조차도 인류 전쟁사에선 앞 순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
      독일과 영국의 가장 큰 차이
      독일은 무수한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엔 패배.
      영국은 수 많은 전투의 패배에도 결국 전쟁에선 승리. 그 원인은 전투의 중요도 결정성 때문.
      1588년 무적함대 격파는 세계제국 팽창 시발점,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충무공의 승리는 조선의 강대국 부상과 아무 관련 없고.
      영국 북미와 인도에서의 결정적 승리로 대륙 장악, 트라팔가와 워털루는 유럽의 향후 100년을 결정.
      독일은 분명 압도적 대승을 거두었지만, 전략적으로는 결정적 승리가 아닌 지역적 일시적 승리에 지나지 않았고.
      2. 영국은 과연 오늘날 존재하는 전세계 모든 국가 90%를 그 어떤 이유건 침공한 적이 있는가?
      정리하면 상당 부분 근거는 있는 것 같군요. 침공 후 지배 까지는 아니더라도 군사적 개입, 주둔, 압박.
      동영상에 소개된 책자 발행 시점 당시 유엔 회원국 193개국 중에서 무려 171개국이 영국의 군사적 침공을 경험.
      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 관저 : 화이트 하우스, 불 탄 후 흰색 페인트로 가림.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시기 잠시 일어났던 미영 전쟁 중 수도 워싱턴이 점령당해 대통령 관저가 불타버렸죠.
      막강한 군사강국 러시아 :
      크림 전쟁 때 크림 반도만 점령당한 것이 아니고,
      그 무렵 극동에서 캼차캬 반도 까지 일시적이지만 점령당했습니다.
      그 충격으로 알래스카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미국에 매각했죠.
      알래스카는 영국령 캐나다와 미국과 접하고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영국이나 미국에 먹힐 것이라고 판단해 손 턴 것.
      러시아 혁명 당시 적백 내전이 벌어졌고,
      영국이 주도한 영국 미국 일본 등이 무르만스크, 흑해의 크림반도, 극동의 블라디보스톡 등에 상륙해서 상당기간 점령.
      하지만 트로츠키가 지휘하는 적군의 승리로 백군 반혁명군이 패배하자 결국은 모두 철수.
      중국과 인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카리브해와 남미에도 영국령 섬들과 영령 가이아나.
      심지어 조선말 우리도 거문도를 점령당했죠. 일본 역시 일부 지역 번들이 영국과 소규모지만 전쟁 했고.
      프랑스는 백년전쟁의 전쟁터,
      독일은 18세기초 말버러공이 이끄는 대륙 원정군의 전쟁터. 지중해는 영국의 연못. 중동 아프리카 생략.
      정리하면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들의 대다수는 영국의 직간접 침공, 주둔, 압박등 경험한 적이 있다.
      없는 곳을 구태여 찾자면, 바다로 부터 완전 격리된 몽골과 같은 정도.
      그런데 다른 강대국들과 차별되는 점이 있죠.
      대영제국은 위대한 영웅에 의존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건설되었다는 것.
      알렉산더, 징키즈칸, 시저, 나폴레옹 급의 탁월한 군사지도자 없이
      고만 고만한 장군들과 그렇게 많지 않은 병력으로 세계 최초로 전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되었죠.
      그 것은 미국도 유사해서.
      미국 역시 그런 위대한 지도자 군사 지휘관 없이
      고만 고만한 능력의 장군들에 의존했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을 이어 세계 패권을 장악했죠.
      영국 미국이 내세울만한 지상군 장군 말보러, 울프, 웰링턴, 워싱턴, 퍼싱, 아이젠하워, 알렉산더, 패튼, 몽고메리...
      고대 로마, 중국의 거대 제국들, 몽골 제국 등은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전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중국, 몽골이 아무리 강력해도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 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엔 접근도 불가능했으니.
      위대한 군사 지도자에 의존 없이.
      어마어마한 병력을 동원하지도 않으면서,
      게다가 병영국가 독재 시스템의 강력한 효율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영국과 미국은 세계를 장악해나간 것이죠. 역사상 최초의 동일 세력 내부의 평화적 패권 이동까지도.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2 ปีที่แล้ว

    (th-cam.com/video/iIz4iGgvcmU/w-d-xo.html) 2차대전 참전국 중 가장 최강의 국가는? 이라는 영상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3성장군 전쟁영웅을 말단병사를 때렸단 이유로 해임시키는 미군은 2차대전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 @아이고야와일노
    @아이고야와일노 2 ปีที่แล้ว +1

    휴전중인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별거 아닌걸로 치부되는 현실..

  • @lastsailor
    @lastsailor 2 ปีที่แล้ว +2

    걍 한마디로 전쟁이 일어나야만 제 능력을 발휘하는 전쟁광.
    시대를 잘못태어난 군인.

  • @마리앵
    @마리앵 2 ปีที่แล้ว +5

    지들이 직접 달리고 죽이지 않으니까 저런 인간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면 제일먼저 무너진다에 한표

    • @마리앵
      @마리앵 2 ปีที่แล้ว

      네 패튼과 지휘관들 아직 귀족사상이 남아 있던 무리들 영국과 프랑스 복귀율이 높았던 이유도 병사를 사람으로 취급한다기보다 장기알로. . .

  • @푸헐헐-h7b
    @푸헐헐-h7b 2 ปีที่แล้ว +4

    2차대전 당시에도 미국은 이렇게 민주화된 나라였다는게 대단한 것 아닌가? 당시 일본은 얼마나 끔찍했는데. 미국이 그 전쟁을 이긴건 정말 전세계적으로 다행인 일이다. 물론 일본이 이겼다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일본의 개돼지가 되어 영혼없이 잘먹고 잘살았을 수도 있었을련지도 모르지만.. 미국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시민들이 모여 세운 나라다. 모든 나라들이 왕에 의해 시작됐지만 미국은 시민들이 스스로 각성해서 세운 나라이기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이를 본받아서 미국의 우수한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생각을 해야지 그저 은혜의 나라 어쩌고 하면서 무조건 친미 외치는 것들은 임란때 명나라가 도와줬다고 무조건적으로 명나라만 추종하며 광해군을 내쫒던 능양군 일파와 머가 다르냐? 한심할 뿐!

  • @2023MooHyeon
    @2023MooHyeon 2 ปีที่แล้ว

    패튼도 쓰레기였네. 저병사들은 도대체 뭐 때문에 싸워야 하는데..

  • @truth1472
    @truth1472 2 ปีที่แล้ว +3

    패튼은 전투 피로증을 인정하지 않았네요!

  • @paull77ful
    @paull77ful 2 ปีที่แล้ว +2

    성인군자가 지휘를 해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건 아니니까.

  • @남김지환-l2q
    @남김지환-l2q 2 ปีที่แล้ว

    저는 육군 보병 소총수. 남들은 땅개? 총알받이?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암튼 저는 무식하지만 패튼장군이 잘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한국전 종료 후 우리 국군이 당한 사고사 제외한 비전투 손실.
      즉 사병들의 병영 생활 과정에서 자살 + 총기 난사 타살 사건 등으로 발생한 사망자 수
      한 10년 전 쯤 기억 정확치는 않은데 아마 1만명 넘었을 겁니다. 당시 기억으로 1개 사단 병력 사라졌다고.
      대충 어림셈 해보죠.
      계산 편의상 1960년 ~ 2010년 50년 기간이라고 하면,
      1만명 / 50년 = 200명 ------------------------------------> 1년에 평균 200명 정도 사망했던.
      그래서 10년 전 그 기사 충격적이었던. 위 기억 바탕한 추정치 정확한 수치는 아니어도 당시 너무나 놀라서.
      우리 군 영내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는 무시할 수 없는 심각한 경우도.
      전시 아닌 평시에 왕따-괴롭힘-부적응 등의 사유로, 취침 시간 내무반에 수류탄 투척. 무차별 총기 난사 포함.
      패튼 유형의 지휘관 아래선 저런 일 더 자주 생길 것. 재수 없으면 지휘관 자체가 타겟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 보니 많은 전사자 발생한 러시아 기갑부대 탱크 승무원이 열받아 부대 지휘관
      탱크로 밀어 지휘관 하반신 부상당해 후송되기도. 그 병사 입장에선 순간 감정 통제 못하고 욱해서 그리 되었을 것,
      우크라이나에서 격파되는 러시아군 전차나 장갑차 동영상 보기를. 개죽음으로 내몰린 러시아 기갑부대 병사들.)
      지금은 많이 줄었을 겁니다. 대놓고 패대는 구타 사라졌으니.
      정부와 군에서 해 마다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정말 껄끄러운 통계 자료라 몇 년 지나 어떤 계기가 있으면 수치 공개되는.
      21세기 현재 많이 줄었다고 해도 만일 공개된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치가 될 수도.
      실제 전쟁 상황 아닌 휴전 상황에서 우리 군이 겪은 사병들의 정신적 문제로 일어난 사망 사건이 저렇습니다.
      ---------------------------------------------> 님은 너무 간단히 생각하는 듯. 전시 아닌 평시에도 철저하게 관리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2차대전 때 소련군이나 독일군에는 군을 감시 통제하는 집단이 있었고, 특히 소련군에는 정치 장교가.
      2차대전 때 미군 영국군은 현재 우리 군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인권이 보장된.
      우린 불과 몇 년에 공관병 갑질 사건 터졌던, 감나무의 감을 사병이 따지 그럼 사모나 장군이 따냐고 했던.
      미국이 강하고 대단했던 것은, 패튼과 같은 용감무쌍한 장군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 패튼 조차도 군내 인권을 유린하거나 법을 어기면 문책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1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인심 팍팍 써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날릴만한 역전의 용사인지 사실 의문이군요.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여기 영상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인구 5천만 안되고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1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1

      할리웃 영화 비판적으로 관람해야 합니다.
      할리웃의 선전에 속아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영화 U-571의 예를 들겠습니다.
      2차대전 때 영국 해군의 전과를 할리웃이 가로첸 표절 왜곡이 바로 U-571이며 영화 내용도 엉망진창 비현실적 수준.
      1. 제목 U-571 -----------------------> 영국해군이 처음 독 유보트 U-570 나포한 것 표절, 함 번호에 +1
      2. 독 유보트에서 최초 에니그마 암호기 탈취 ------------------------------> U-599 침몰할 때 영국해군이 에니그마 탈취.
      3. 미 구축함과 독 구축함이 동시에 나오면서 독 유보트가 출현하는 전장 ----------------------------------------------> 존재할 수 없음.
      할리웃 영화로 대서양 해전을 처음 접한 사람들, 특히 대한민국 사람들은 착각하게 됩니다. 미해군이 대서양 평정한 것으로.
      미해군은 상당기간 독 유보트의 밥이었습니다. 영국해군은 유보트에게 저승사자였었고. 미 해군은 영국해군에게 대잠전 교리와
      훈련 장비 기술 전수받은 후에야 겨우 유보트에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관련 이야기 해보죠.
      제목은 실제 U-570 표절. U-570은 1941년 북대서양에서 영해군 공격받고 결국 나포되었고, 영해군 잠수함으로 국적 바뀌어 취역.
      U-570이 공격받고 나포되는 과정에서 독 잠수함 승무원들은 에니그마 암호기 영국해군에 탈취당하지 않도록 폐기 성공했습니다.
      에니그마 최초 탈취는 1942년 지중해에서 U-599가 격침되는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몇 시간 동안 수 백발의 폭뢰 공격을 당했던 유보트는 선체 손상이 너무 심해 함장 이하 전승무원이 함을 버리고 탈출.
      침몰하는 텅 빈 유보트에 영국해군 장교 3명이 목숨걸고 탑승 진입 선체 수색해서 폐기되지 않은 에니그마 암호기와 해독키를
      잠수함 밖으로 전달. 불행히도 유보트에 진입했던 3명 중 2명은 탈출하지 못하고 전사. 1명은 생존. 너무 급속히 침몰하는 상태라
      전승무원이 암호기 파괴하지 못하고 탈출했는데, 영해군이 위험 무릅쓰고 진입해 암호기 탈취
      영화 제목이 왜 U-571? 왜 U-600이 아닐까요?
      미 해군은 지중해에서 존재감 자체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염치학상 도저히 지중해의 영해군 전과 표절 못했을 것.
      그나마 미 해군이 왔다 갔다라도 했던 북대서양에서의 영해군 전과를 표절 왜곡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
      그렇게 실제 U-570 표절했지만 내용 자체는 엉망입니다.
      독일 구축함의 작전 구역은 발트해와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근해 북해 연안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 구역은 영해군의 작전 구역이라, 미 해군 구축함이 영 함대 호위 임무가 아닌 독자적 작전 벌일 수 있는 곳 아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독일의 구축함이 출현하고
      거기에 독 유보트가 미국 구축함에게 당해 탈취당한다? 할리웃이 그냥 쌩쑈 했던 겁니다.
      2차대전 포로수용소 관련 영화들도 할리웃의 장난질이 꽤 섞였습니다.
      대탈주, 포로 대부분 사실상 거의 다는 영국군 포로들인데, 주인공 역활에 미군이 양념으로 꼭 끼어들죠.
      심지어는 콰이강의 다리에서도 미군 장교 1명이 주연급으로 등장하죠. 할리웃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그런 양념들이 생긴 것.
      패튼대전차군단, 무려 아카데미 작품상에 빛나는 작품입니다. 작품성? 솔직히 동의할 수 없지만, 하여간 작품상 받았습니다.
      패튼이 지중해 북아프리카 시칠리 등에서 과연 어떤 실질적 전과를 거두었는지, 언제 처음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는지 확인해보길.
      상륙 시점과 튀니지에서의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 시점을 비교해보면, 패튼대전차군단이 얼마나 뻥튀기된 전개인지 바로 알 것.
      튀니지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될 때 미지상군은 그냥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얹은 정도입니다. 너무 영화만 믿지말길.
      영화 U-571 관련 영어 검색 자료들 첨부하죠.
      여러 자료들 비교하면 얼마든지 엉터리 자료 피할 수 있습니다. 위키나 영어위키 자료라고 무조건 엉터리 아닙니다.
      할리웃 영화 U-570 관련 영어위키 자료는 엉터리가 아닌 거의 100% 신뢰해도 될만한 널리 알려진 사건.
      에니그마 암호기 탈취했던 전사자 2명과 생존자 1명에게 영국 최고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훈장 아닌 그 아래 등급과 아래 아래 등급 수여.
      혹시나 암호기 탈취 독일측에 누설되지 않도록, 일상의 대잠작전 위장하기 위해서도 이유. 또한 당시 영국해군은 사망한 2명을 교전 중
      전사로 여기지는 않았다고 하며 따라서 최고 무공훈장이 아닌 아래 등급 수여.
      영화 U-571 개봉 당시, 매우 매우 매우 이례적으로,
      영국 수상이 불쾌함을 공개적으로 표했습니다. 영화가 2차대전 영국해군의 전과를 미군 전공으로 왜곡한다면서.
      1. U-570 관련
      U-boat captured by an aircraft
      An extraordinary incident occurred when a Coastal Command Hudson of 209 Squadron captured U-570 on 27 August 1941 about 80 miles (130 km) south of Iceland. Squadron Leader J. Thompson sighted the U-boat on the surface, immediately dived at his target, and released four depth charges as the submarine crash dived. The U-boat surfaced again, a number of crewmen appeared on deck, and Thompson engaged them with his aircraft's guns. The crewmen returned to the conning tower while under fire. A few moments later, a white flag and a similarly coloured board were displayed. Thompson called for assistance and circled the German vessel. A Catalina from 209 Squadron took over watching the damaged U-boat until the arrival of the armed trawler 'Kingston Agate' under Lt Henry Owen L'Estrange. The following day the U-boat was beached in an Icelandic cove. Although no codes or secret papers were recovered, the British now possessed a complete U-boat. After a refit, U-570 was commissioned into the Royal Navy as HMS Graph
      2. U-599 관련
      It was her own demise that made her most famous. At about 05:00 on 30 October 1942, U-559 was spotted by a Royal Air Force Sunderland, W from 201 Squadron in position 31°47′N 33°24′E, 70 miles north of the Nile Delta. The destroyer HMS Hero was alerted by radio and steamed to intercept her, while the destroyers HMS Petard, Pakenham, Dulverton and Hurworth sailed from Port Said, Egypt. At about 12:34 a Wellesley patrol aircraft, F from 47 Squadron, spotted the periscope of the submerged U-559 and attacked with depth charges.[7][2][8]
      The destroyer group hunted for the U-boat for 16 hours, constantly depth charging. After dark, U-559, with a cracked pressure hull, unable to maintain level trim and four of her crew dead from explosions and flooding, was forced to the surface. She was close to Petard, which immediately opened fire with her Oerlikon 20 mm cannon.[1][9]
      The German crew hurriedly scrambled overboard without destroying their codebooks or Enigma machine and, crucially, having failed to open all the sea-water vents to scuttle the U-boat properly. Three Royal Navy sailors, Lieutenant Anthony Fasson, Able Seaman Colin Grazier and NAAFI canteen assistant Tommy Brown, then boarded the abandoned submarine. There are differing reports as to how the three British men boarded the U-boat. Some accounts (such as that of Kahn) say that they "swam naked" to U-559, which was sinking, but slowly.[10] Sebag-Montefiore states that they either leapt from Petard or, in Brown's case, from a whaler. They retrieved the U-boat's Enigma key setting sheets with all current settings for the U-boat Enigma network. Two German crew members, rescued from the sea, watched this material being loaded into Petard's whaler but were dissuaded from interfering by an armed guard. Grazier and Fasson were inside the U-boat, attempting to get out, when it foundered; both drowned.[11]
      Aftermath
      Grazier and Fasson were awarded the George Cross posthumously, Brown was awarded the George Medal. The Victoria Cross was considered but not awarded, for the ostensible reason that their bravery was not "in the face of the enemy".[12] Another consideration may have been that a Victoria Cross would have drawn unwanted attention to the U-boat capture from German Intelligence. It was also discovered that Brown had lied about his age in order to enlist, and was only 16 years old, making him one of the youngest recipients of the George Medal. He was discharged and returned home to North Shields, only to die two years later attempting to rescue his younger sister from a house fire.[13]
      The code-book material they retrieved was immensely valuable to the code-breakers at Bletchley Park, who had been unable to read the 4-rotor U-boat Enigma for ten months since its introduction by the German Kriegsmarine at the beginning of 1942. This captured material allowed them to read the cyphers for several weeks, and to break U-boat Enigma thereafter right through to the end of the war.
      The recovery was one of several such events (e.g., the earlier capture of U-110), that inspired the fictional account of the submarine capture in the 2000 film U-571.

  • @rulrastar
    @rulrastar 2 ปีที่แล้ว +2

    군필자의 한사람으로서 제 생각은 전쟁중인데 어디 팔다리가 다쳐서 부상당한것도 아니고 신경증때문에 못싸운다니 그런 소리를 들은 패튼장군의 속이 안뒤집히면 이상했을것 같습니다. 몸이 멀쩡한데 전투에서 제외되는 병사가 자꾸 나온다면 군대의 사기에도 당연히 영향을 끼치는거죠. 전쟁에 참가한 병사라면 당연히 스스로 더 강력한 정신무장을 해야하는데 저런식이면 본인이 전쟁에 참가한 의미가 없잖아요. 저는 패튼장군의 행동에 매우 공감합니다.

  • @뭐하지-r5r
    @뭐하지-r5r 2 ปีที่แล้ว

    따귀?

  • @manhan95
    @manhan95 2 ปีที่แล้ว +1

    참 아이러니 한듯, 전쟁은 효율이 극대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따귀 때렸다고 명장을 즉시 경질한다? 전후에 처분을 하면 몰라도 바로 경질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으면서도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잖음. 국민의 여론이 정부를 흔들 수 있기 때문에 패튼을 바로 경질했을 텐데 또 한편으로 민주주의를 부정할 수는 없고 어려워~

    • @marksmithcollins
      @marksmithcollins 2 ปีที่แล้ว +2

      달리보면 미국 군대의 시스템이란건 장군 한명이 펄펄 뛰어다니면서 싸대기질을 하고 다니지 않아도 노르망디 전투를 진행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임
      불투명하게 굴러가는 군대와는 달리 처벌 후엔 복귀하잖음
      패튼 상관이 패튼을 경질할때 무슨 통솔력 -85 같은 식으로 판단한게 아니라는거

    • @김민규-e3d4i
      @김민규-e3d4i 2 ปีที่แล้ว

      에초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제공권이 완전히 잡힌 상황으로 패튼없이도 할수있엇음 하지믄 몽고메리가 문제지 패튼이엇으면 노르망디상륙작전이후로 캉을 빠르게 점령할수있지만 몽고메리여서 캉에서 3개월동안 쩔쩔맴 그래서 아이젠하워로 바뀐거 아닙니까 노르망디는 몽고메리가 해도 성공할수밖에없습니다 이미 제공권이 잡혀있는대 성공안하는게 신기하죠 하지만 노르망디 이후로 독일군을 어떻게 상대하냐가문제 입니다 독일에 기갑부대때문에 캉에서 쩔쩔맷으니 패튼이 나섯스면 캉을 밀엇죠 미국정부에선 노르망디만 생각햇을뿐 노르망디이후로에 전선을 어떻게 미냐 그걸 생각못햇습니다 햇으면 패튼을 경질하진 않앗겟죠 누가모래도 제공권을 차지한 연합국은 노르망디를 실패할수가없습니다 하지만 노르망디이후로 전선을 미는대에 많이 해맷을뿐이죠진작에 패튼을 넣엇으면 문제가 생기진 않앗을겁니다 노르망디만 생각하면서 패튼없어도 됀다고 하니깐 캉에서 3개월 해매며 서부전선군이 베를린 먹는것은 글러먹엇죠 나라한개만 생각하고 대륙을 생각하지않은 결과죠 패튼이 맡앗으면 캉에서 3개월동안 해매지 않고 서부전선군이 베를린을 먹엇을거라고 봄니다

    • @truth1472
      @truth1472 2 ปีที่แล้ว

      별 세개면 뺨을 때리지 말고 제도를 만들었어야죠.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인심 팍팍 써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날릴만한 역전의 용사인지 사실 의문이군요.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여기 영상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인구 5천만 안되고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2 ปีที่แล้ว +2

    한국군 장성이라면 해임당했을까 싶습니다. 3성장군이고 시실리 메시나에 영국군을 제치고 1위로 입성한 공을 세웠던 장군이었는데 말단병사를 구타했다고 해임시키는 것은 독일이나 미국, 심지어는 한국에서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덕분에 패튼은 그렇게도 싸우고 싶었지만 라이벌인 몽고메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하는데 패튼은 끝내 선봉으로 참가하지 못하게 되죠. 그러나 패튼은 독일군 속이기 용도로 쓰이게 됩니다. 롬멜과 패튼의 맞대결 성사 여부에 대한 본 컨텐츠를 같이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추천드립니다. (th-cam.com/video/EbFotR911Eo/w-d-xo.html)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미국과 영국의 군대 문화 관련해 소개합니다. 미국도 거의 유사할 것.
      군 퍼레이드를 아래 첨부와 하는 군에서 사병간 구타나, 부대 지휘관의 부대 장병 향한 패튼과 같은 행위는 마땅히 문책됩니다.
      대한민국의 우리 군 경험이나, 전세계 대부분 국가 군대 분위기로 미국 영국을 바라봐선 안되는.
      -------------------------------------------------------------------------------------------------------------
      1. GUARDSMEN'S FAREWELL TO OLD TED :1965년 1차대전 참전 후 부대에서 50년간 음료 판매했던 노병 은퇴식
      th-cam.com/video/pkfMcsUIM7k/w-d-xo.html : 나이 80이 넘어 스스로 은퇴, 사열 후 만세 외쳐주는 부대원들
      저 노인이 부대에서 차와 음료를 판매하는 푸드 트럭에는 1차대전 참전했던 전투들 이름이 새겨져 있군요.
      장군들, 높은 사람들만 부대로 부터 사열받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부대원들의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군요.
      나치 독일군이 아무리 막강했다고 해도, 이런 군인들을 상대로 전쟁에서 최종 승리할 자격은 없는 것일테고.
      2. The Highlanders Royal Regiment of Scotland homecoming parade through Aberdeen Sept 2017 - 4K
      th-cam.com/video/zjj-64Gyx00/w-d-xo.html : 뒷 부분 무장하고 실제 전투 순찰 대형, 경장갑 차량도.
      3. The Highlanders Homecoming Parade : 2014 은퇴한 노병이 사열받고, 전역 군인들도 함께 행진에 참여.
      th-cam.com/video/mE6cJJQACGU/w-d-xo.html
      4. Ipswich Honours Suffolks Aka Suffolk Regiment In Ipswich (1953) : 1953 말레이 공산 반군과 교전 후 귀국
      th-cam.com/video/hoT08_uCwp4/w-d-xo.html : 이 부대 출신 1차대전 노병 퇴역 군인이 사열받음.
      영국은 지난 수 백년 간 거의 쉬지 않고 전투 중이죠. 부대를 순환시키며 언제나 지구촌 어디선가 전투 수행.
      순환 배치로 귀국한 부대들은 자신들의 부대가 있는 도시에서 퍼레이드를 합니다.
      조금 오래 된 부대들은 100년 아닌 100년 단위의 역사를 가졌고. 육군의 경우 대개 지역에 기반한 부대.
      그래서 그 부대가 전쟁 파병될 경우, 주민들 가족 중 전사자 부상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영국은 군사독재 국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각 지역에 전쟁 추모비, 참전군인 동상들이 많죠.
      2번, 3번 동영상은 최근의 아프카니스탄 또는 다른 중동 지역에서 전투 직후 귀국한
      군인들로 구독일군, 구소련군, 현러시아군 등과 같은 각 잡히고 철두철미한 헬마치와는 다른 느낌의 행진.
      전장에서 실제 전투하는 군인들에게 각과 절도 안맞는다고 무시하는 이도 없죠. 실제 전투력과는 별개이니.
      4번 영상은 1953년 말레이에서 3년간 임무 마치고 귀환 퍼레이드. 우리 한국전 때 말레이에서도 교전했군요.
      찾아보면 분명 한국전쟁 후 귀환한 부대들의 영상도 있기는 있을 겁니다.
      시민들이 전투 후 귀국한 군인들을 맞이하는 모습, 군국주의의 열광적 환호와 분위기 다른.
      일반 시민들이 나치식 경례를 하고 어린 소년들이 열광하는 모습과 대비된, 차분하지만 따뜻한 분위기.
      영국과 미국의 군과 시민들 사이의 관계는 지금만이 아니라 나치독일 등장 전 오래 전 부터 이미 저랬죠.
      군이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의회나 시민이 새로운 저항군을 조직해 투쟁한 역사 전통 때문이겠죠.
      장군 크롬웰이 군을 동원해 국왕을 타도한 것이 아니라,
      의회가 해산당하자 의원이었던 크롬웰이 저항군을 만들고 왕정을 무너뜨렸고,
      북미 식민지에서도 시민들이 저항하며 혁명군이 조직되고 독립을 쟁취했기에 군이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죠.
      퍼레이드 보면 사열단에 높은 계급의 현역 군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민간인도 있는데 아마도 시장일 것. 과거 내전 당시 저항군의 지도자는 대체로 마을의 수장이었을테니.
      경우에 따라선 그 부대 출신의 예비역 노병이 사열단에 서기도 합니다. 미국 조차도 보기 힘든 모습.
      미국은 국토가 넓어 주둔하는 마을 도시 출신 위주로 부대가 편성되지 않아.
      저런 모습이 바로 군에 대한 문민통제 원형일 겁니다.
      저랬기에 알렉산더-카이사르-징키즈칸-나폴레옹 급의 탁월한 영웅 없이도 사상 최대의 제국과 미국 건국이 가능했던.
      반면 강력한 독일은 구 프로이센 시절
      프리드리히 대체 때 극단적인 병영국가로 탈바꿈, 그것을 계승한 비스마르크의 통일 독일제국.
      그 이후 독일 모두 국가를 이끌기 위해 강력한 군이 키워지고 선봉에 서고 국민 위에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죠.
      영국과 미국이 세계 패권을 거머쥐고 바톤 터지한 가장 결정적 이유일 겁니다.
      병영국가, 군국주의, 전체주의, 개발독재 공동체가 느쓴해보이는 공동체에 패한 것 우연은 아닐 겁니다.
      독일이 영국 미국에게 과학기술과 산업에서 뒤진 것은 없었지만, 공동체 내부의 저런 분위기에서 심각히 뒤졌던 것.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한국전 종료 후 우리 국군이 당한 사고사 제외한 비전투 손실.
      즉 사병들의 병영 생활 과정에서 자살 + 총기 난사 타살 사건 등으로 발생한 사망자 수
      한 10년 전 쯤 기억 정확치는 않은데 아마 1만명 넘었을 겁니다. 당시 기억으로 1개 사단 병력 사라졌다고.
      대충 어림셈 해보죠.
      계산 편의상 1960년 ~ 2010년 50년 기간이라고 하면,
      1만명 / 50년 = 200명 ------------------------------------> 1년에 평균 200명 정도 사망했던.
      그래서 10년 전 그 기사 충격적이었던. 위 기억 바탕한 추정치 정확한 수치는 아니어도 당시 너무나 놀라서.
      우리 군 영내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는 무시할 수 없는 심각한 경우도.
      전시 아닌 평시에 왕따-괴롭힘-부적응 등의 사유로, 취침 시간 내무반에 수류탄 투척. 무차별 총기 난사 포함.
      패튼 유형의 지휘관 아래선 저런 일 더 자주 생길 것. 재수 없으면 지휘관 자체가 타겟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 보니 많은 전사자 발생한 러시아 기갑부대 탱크 승무원이 열받아 부대 지휘관
      탱크로 밀어 지휘관 하반신 부상당해 후송되기도. 그 병사 입장에선 순간 감정 통제 못하고 욱해서 그리 되었을 것,
      우크라이나에서 격파되는 러시아군 전차나 장갑차 동영상 보기를. 개죽음으로 내몰린 러시아 기갑부대 병사들.)
      지금은 많이 줄었을 겁니다. 대놓고 패대는 구타 사라졌으니.
      정부와 군에서 해 마다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정말 껄끄러운 통계 자료라 몇 년 지나 어떤 계기가 있으면 수치 공개되는.
      21세기 현재 많이 줄었다고 해도 만일 공개된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치가 될 수도.
      실제 전쟁 상황 아닌 평시 우리 군이 겪은 사병들의 정신적 문제로 일어난 사망 사건이 저렇습니다.
      2차대전 때 소련군이나 독일군에는 군을 감시 통제하는 집단이 있었고, 특히 소련군에는 정치 장교가.
      2차대전 때 미군 영국군은 현재 우리 군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인권이 보장된.
      우린 불과 몇 년 전에 공관병 갑질 사건 터졌던, 감나무의 감을 사병이 따지 그럼 사모나 장군이 따냐고 했던.
      미국이 강하고 대단했던 것은, 패튼과 같은 용감무쌍한 장군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 패튼 조차도 군내 인권을 유린하거나 법을 어기면 문책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영국과 미국은 알렉산더-카이사르-징키즈칸-나폴레옹 등의 위대한 군사적 영웅에 의존하지 않고 건설되었습니다.
      따라서 패튼급의 군 지휘관에 목멜 아무런 이유 없습니다. 고만 고만한 능력의 군 지휘관을 내세워도 잘 굴려가는 시스템이 중요.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인심 팍팍 써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날릴만한 역전의 용사인지 사실 의문이군요.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인구 5천만 안되고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먼저 깨집니다.
      th-cam.com/video/34oR2D1GVU4/w-d-xo.html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렬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 @dkrlrhlanf7
    @dkrlrhlanf7 2 ปีที่แล้ว +2

    패튼 역시 1차대전에 참전해서 전장을 누볐었죠.. 전투피로증이란건 결국은 심리적인 정신질환인건데...
    그것을 전투피로증이 없거나.. 있어도 동료 및 책임감으로 버텨나가는 사람들 눈에는 단지 겁쟁이로 보일뿐인거죠..
    의학적으론 환자이지만.. 동료들의 입장에선 겁쟁이인거죠...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1

      여기 영상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인구 5천만 안되고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 2차대전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패튼 최대 실전 경험 6개월 -------------> 사실상 3개월 --------------> 그조차, 시칠리 상륙 준비 기간 제외 실제 전투 경험 1달 쯤???)
      (물론 1차대전 경험 있었겠지만, 그 역시 당시 영국-프랑스군과 비교한다면 전쟁 끝나기 직전 몇 개월 정도였을 것.)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1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먼저 깨집니다.
      th-cam.com/video/34oR2D1GVU4/w-d-xo.html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th-cam.com/video/p-9w2J5s0xU/w-d-xo.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한국전 종료 후 우리 국군이 당한 사고사 제외한 비전투 손실.
      즉 사병들의 병영 생활 과정에서 자살 + 총기 난사 타살 사건 등으로 발생한 사망자 수
      한 10년 전 쯤 기억 정확치는 않은데 아마 1만명 넘었을 겁니다. 당시 기억으로 1개 사단 병력 넘었다고.
      대충 어림셈 해보죠.
      계산 편의상 1960년 ~ 2010년 50년 기간이라고 하면,
      1만명 / 50년 = 200명 ------------------------------------> 1년에 평균 200명 정도 사망했던.
      그래서 10년 전 그 뉴스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겁니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어도 거의 그 근방이라 당시 너무나 놀라서.
      지금은 많이 줄었을 겁니다. 대놓고 패대는 구타 사라졌으니.
      정부와 군에서 해 마다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정말 껄끄러운 통계 자료라 몇 년 지나 어떤 계기가 있으면 수치 공개되는.
      21세기 현재 많이 줄었다고 해도 만일 공개된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치가 될 수도.
      실제 전쟁 상황 아닌 휴전 상황에서 우리 군이 겪은 사병들의 정신적 문제로 일어난 사망 사건이 저렇습니다.
      -------------------------------------------------------------------------------> 님은 너무 간단히 생각하는 듯.
      2차대전 때 소련군이나 독일군에는 군을 감시 통제하는 집단이 있었고, 특히 소련군에는 정치 장교가.
      2차대전 때 미군 영국군은 현재 우리 군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인권이 보장된.
      우린 불과 몇 년에 공관병 갑질 사건 터졌던, 감나무의 감을 사병이 따지 그럼 사모나 장군이 따냐고 했던.
      미국이 강하고 대단했던 것은, 패튼과 같은 용감무쌍한 장군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 패튼 조차도 군내 인권을 유린하거나 법을 어기면 문책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 @인생이레이스화이팅동
    @인생이레이스화이팅동 2 ปีที่แล้ว +2

    😱😱😱😱😱😰😰😰😰😰😅😅😅😅😅

  • @kbzkbz2000
    @kbzkbz2000 2 ปีที่แล้ว

    패튼도 트럼프처럼 부자로 태어난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특권의식이나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만 행동하는 독선적인 기질이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자제력이 문제가 있는 재벌과 재벌2세들 처럼... 행동에 대해서 주의가 부족하죠. 그것이 군인으로써 타인에게는 과감한 성격과 용감함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오만함과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나타나죠.

  • @KoKa22
    @KoKa22 2 ปีที่แล้ว +4

    잘못된 분석이었습니다 .. 라고 단정 짓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반론을 충실히 소개해 주시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논란은 논란대로 소개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단정 말구요.

  • @sungminkim6309
    @sungminkim6309 2 ปีที่แล้ว +1

    미국만이 문제될 수 있는 사건! ㅎㅎㅎ

  • @changyeonjo1121
    @changyeonjo1121 2 ปีที่แล้ว +5

    20년전에 분대장 하는데 신병이 "어짜피 끌려온거 전역까지 대충 하다 가면 되는거 아닙니까?" 라고 말해서 너가 대충하면 네 임무를 다른 사람들이 나눠서 하는거 아니냐고 이기적인 색히라고 졸라 빡쳐서 점호시간까지 갈궜는데....

    • @marksmithcollins
      @marksmithcollins 2 ปีที่แล้ว +5

      신병은 안일한 잘못을 저질렀는데
      당신은 그걸 다 뒤집을만큼 가혹행위를 저지른거임
      위험운전으로 차가 끼어들었다고 "화나네?" 하면서 폭행하면 상대방 선 과실로 당신 행동이 무효화되는건 아니거든

    • @changyeonjo1121
      @changyeonjo1121 2 ปีที่แล้ว

      @@marksmithcollins 그러게요 그냥 몇건 더 관찰일지에 적어놓고 주말에 연병장 수색이나 돌게 할껄 말이죠 괜히 목아프게 3시간을 떠들고 말이죠

    • @bunningshouse
      @bunningshouse 2 ปีที่แล้ว +4

      신병이란게 핵심이네 ㅋㅋ 병장들이나 할수잇는말을 속으로만 생각해야지 입으로 내뱉는다라 빡칠만은 합니다

    • @truth1472
      @truth1472 2 ปีที่แล้ว +2

      자신들의 가족들을 지키러 가서 끌려 갔다고 하는 마인드가 문제군요.
      군대라는 다자안보체제를 구성하고 조직을 해서 국가의 평화를 지키는 곳이 군대입니다.

    • @콜라맛별사탕
      @콜라맛별사탕 2 ปีที่แล้ว +1

      정말 전체주의적인 마인드입니다.
      이해 못 하는 건 아니고 그 신병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말이 완전 틀린 말도 아니지 않나요?
      그 시절에 국가가 복무한 군인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줬으면 모르겠는데 월급도 제대로 안 주고 누구 죽어도 은폐하던 시기에 저런 말 할 수도 있죠
      그리고 점호시간까지 잡고 욕하면 부조리고 지금 기준으로는 휴가 잘리고 전출 갈 일입니다.
      잘한 일도 아닌데 이런데 적는 건 좀...
      참고로 저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지만 반성하고 있습니다.

  • @jmd9151
    @jmd9151 2 ปีที่แล้ว

    간사 이양반...병들의 적이구만...ㅋ

  • @남자탁용삼
    @남자탁용삼 2 ปีที่แล้ว +2

    패튼장군 따귀사건 미군의 사기를 올리려고 한것일까😨🤔?!

    • @marksmithcollins
      @marksmithcollins 2 ปีที่แล้ว +2

      도배꾼

    • @Jbgmjbgm
      @Jbgmjbgm 2 ปีที่แล้ว +1

      @@marksmithcollins 얘한테 관심가져 주지마삼 방구석에서 하루종일 유튜브 쳐보면서 이런식으로 어그로 댓글 다는 30대 후반 백수임

    • @의탁김-b4k
      @의탁김-b4k 2 ปีที่แล้ว +1

      넌밤길조심햐

    • @의탁김-b4k
      @의탁김-b4k 2 ปีที่แล้ว +1

      애들아 나

    • @의탁김-b4k
      @의탁김-b4k 2 ปีที่แล้ว +1

      풀어

  • @atwone
    @atwone 2 ปีที่แล้ว

    난 따귀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진짜 패튼이 대단한거는 진짜로 사과를 했다는 거다. 한국 장교 였다면 사과를 했을까? 아마도 때린적 없다고 발뺌하거나 죽어도 사과 안하거나
    그랬을 거라고 본다. 저런 성격에 사람이 사과를 한다? 군인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게 결코 쉬운일이 아니란것을 알것이다.
    일본군만 바도 알수 있다. 자신의 작전 때문에 수만명이 죽었는데도 반성은 커녕 자신은 아무 죄도 없다고 장례식장 앞에서 전단지 까지 뿌린 사람도 있다.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1

      자발적으로 사과한 것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미군 당국의 사과 지시로 사과했을 겁니다. 만일 사과 거부했다면 거기서 바로 강제 전역 조치당해 군경력 완전 끝장났을 것.
      즉 보기에 따라선 군 경력 유지하기 위해, 겁쟁이 사병이라고 확신하며 따귀 날렸던 신념을 억눌렀던 것.

    • @atwone
      @atwone 2 ปีที่แล้ว

      @@scz8333 어 진짜 대깨문 욀케 많어 그런 논리로 따지면 조선도 일본에 사과 요구를 하지 말아야 하나? 자발적인 사과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자발적이고 아니고는 그사람 내면에 문제니 알수 없는 거고 그러니 함부러 그사람에 진정성을 폄하 하는 것이야 말로 깨문 스러운 생각이다. 패튼은 금수저로 군생활 끝나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다.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한국전 종료 후 우리 국군이 당한 사고사 제외한 비전투 손실.
      즉 사병들의 병영 생활 과정에서 자살 + 총기 난사 타살 사건 등으로 발생한 사망자 수
      한 10년 전 쯤 기억 정확치는 않은데 아마 1만명 넘었을 겁니다. 당시 기억으로 1개 사단 병력 사라졌다고.
      대충 어림셈 해보죠.
      계산 편의상 1960년 ~ 2010년 50년 기간이라고 하면,
      1만명 / 50년 = 200명 ------------------------------------> 1년에 평균 200명 정도 사망했던.
      그래서 10년 전 그 기사 충격적이었던. 위 기억 바탕한 추정치 정확한 수치는 아니어도 당시 너무나 놀라서.
      우리 군 영내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는 무시할 수 없는 심각한 경우도.
      전시 아닌 평시에 왕따-괴롭힘-부적응 등의 사유로, 취침 시간 내무반에 수류탄 투척. 무차별 총기 난사 포함.
      패튼 유형의 지휘관 아래선 저런 일 더 자주 생길 것. 재수 없으면 지휘관 자체가 타겟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 보니 많은 전사자 발생한 러시아 기갑부대 탱크 승무원이 열받아 부대 지휘관
      탱크로 밀어 지휘관 하반신 부상당해 후송되기도. 그 병사 입장에선 순간 감정 통제 못하고 욱해서 그리 되었을 것,
      우크라이나에서 격파되는 러시아군 전차나 장갑차 동영상 보기를. 개죽음으로 내몰린 러시아 기갑부대 병사들.)
      지금은 많이 줄었을 겁니다. 대놓고 패대는 구타 사라졌으니.
      정부와 군에서 해 마다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정말 껄끄러운 통계 자료라 몇 년 지나 어떤 계기가 있으면 수치 공개되는.
      21세기 현재 많이 줄었다고 해도 만일 공개된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치가 될 수도.
      실제 전쟁 상황 아닌 휴전 상황에서 우리 군이 겪은 사병들의 정신적 문제로 일어난 사망 사건이 저렇습니다.
      ---------------------------------------------> 님은 너무 간단히 생각하는 듯. 전시 아닌 평시에도 철저하게 관리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2차대전 때 소련군이나 독일군에는 군을 감시 통제하는 집단이 있었고, 특히 소련군에는 정치 장교가.
      2차대전 때 미군 영국군은 현재 우리 군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인권이 보장된.
      우린 불과 몇 년에 공관병 갑질 사건 터졌던, 감나무의 감을 사병이 따지 그럼 사모나 장군이 따냐고 했던.
      미국이 강하고 대단했던 것은, 패튼과 같은 용감무쌍한 장군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 패튼 조차도 군내 인권을 유린하거나 법을 어기면 문책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패튼이 문제가 되는 곳도 있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곳도 있고,
      패튼이 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가 21세기에는 문제가 되는 곳도 있습니다. 님은 21세기에도 문제 별로 못느끼는듯.
      세계대전 미국 상황 보다는 현 우크라이나 전쟁이 더 우리와 유사한듯. 러시아-우크라이나 범슬라브계 유사성도 있고.
      하지만 우리 6.25와 현 우크라이나 전쟁, 비슷한 면도 있지만 차이도 큽니다. 패튼은 한국전쟁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사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전쟁과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 비교해보죠.
      1. 침략당한 측의 최고 지도자 처신 : 코메디언 출신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영웅적 리더쉽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직후 우리 이승만 대통령은 승리하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놓고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2. 더 본질적 문제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거슬러 거슬러 올라면 같은 기원으로 수렴하는 부분이 크지만, 한반도의 남북은 그냥 한 형제.
      패튼 정도의 잘못에 냉정한 비판하려면 우선 더 큰 잘못들에 대해 엄격해야 할 겁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 대통령-군-정부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한민국이어야 미래 희망이 있습니다.
      1.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 터지기 전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좌익을 전향시켜 반공 데모 시위에 동원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하고 전황 안좋아지니까,
      불안-초조-공포에 휩싸여 전향한 좌익인 보도연맹원들 대대적으로 체포, 체포로도 너무 불안해서 선제 대량 학살로 제거.
      그렇게 희생된 이들 명단은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훗날 책임질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록 남기지 않고 처형.
      추정치로 선제 예방 학살로 처형된 인원은 단위가 10만대, 정확히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르는.
      보도연맹 희생자들 유골 발견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뉴스에 나오며 현재 진행형.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선제 사전 예방 학살 아닌 지진 터진 이후에 학살.
      남경대학살 --------------------------------->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인들 상대로 도시 점령 과정 및 점령 완료 후 대량 학살.
      우리 보도연맹 사건 --------------------> 같은 민족을 상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전 예방 학살.
      21세기 현재 기준으론 전세계적 규탄과 반인류적 범죄로 반드시 처벌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는 것 명심하길.
      더 안타까운 것은 보도연맹원 모집 당시 전국에 할당량이 내려져,
      시골에선 아는 주민들 이름 공무원들이 그냥 올리기도 했고, 심할 경우에도 애들 이름도 적어 넣었는데,
      보도연맹원 체포와 예방 학살 과정에서 완전 억울하게 좌익 아닌 이들도 꽤 많이 희생된.
      실제 전향했던 좌익들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고.
      2.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넘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불과 6개월 정도 후인 1951년 초 한겨울 추위 속에서 중공군 남하 당시,
      전시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방비리가 벌어져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보충역으로 징집된 약 50만 병력 중에서 추정치 약 10만 병력이 적과의 전투 아닌 비전투 손실로
      남쪽으로 후퇴 행군 도중에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서북청년단 단장 출신의 민간인이 임명된.
      너무나 황당무계한 사태가 터져 다 덮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령관 포함 몇 명 처형되는 선에서 덮어버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국민방위군은 해체.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보도연맹-국민방위군 사태 정도면
      일단 전시여도 내각 총사태하고 대통령 및 군 최고지휘부 상당수는 사법치리 피할 수 없었을 것.
      특히 거짓 방송 틀어놓고 튄 대통령의 행위,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소 휴전 후에라도 그 책임을 물었을 것.
      우린 사실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도.
      우리 모두 운이 좋아 저 당시 대한민국의 20세 청년이 아니어서 개죽음 면한 것.
      북괴 공산당 매운 맛 뺨칠 정도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매운 맛도 엄청났다는 것 경험하지 못한 행운에 감사해야.
      한국전 당시 남북은 상호간
      그리고 남과 북 각각의 내부에서 머리띠 두르고 완장차고 확신에 가득차 쳐죽여댔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 최고 지휘부의 전쟁 지휘 능력 -------------------> 전시 작전권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박탈당할 때 최고 지휘부에 있었던 이를 구국의 영웅인양 받드는 정신 나간 행위들이 아직도.
      또한 한국전 휴전 과정에서도 믿는 것도 없이 북진 통일 궐기하면서 나대다가, 휴전 협정 당사자로 참여도 못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대상들은 미국-유엔-중공-북괴 ------------------------------> 대한민국은 업저버 정도.
      휴전 당시 업저버 위치가 된 대한민국이라면, 대통령-정부-군의 결정적 오판 부인하기 힘들 것.
      그리 북진통일 자심감 넘쳤다면 남침당하지 말고 선제 기습 북진해서 북괴를 멸망시키는 대한민국 먼저 만들었던지 ...
      한국전쟁 직전에도 군 일부 장성들 자신감 만땅에,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에서 어쩌고 주둥이질에...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총알 부터 식량까지 원조에 의존하면서,
      주둥이로만 북진 통일, 거기다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둥이로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고 ...
      --------------------> 한국전쟁 대한민국의 저런 치명적 삽질 눈감는 이들은 패튼 뺨사대기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을 것.

    • @scz8333
      @scz8333 2 ปีที่แล้ว

      패튼은 한국전쟁 남북 기준으로는 아무런 문제 되지 않는 오직 위대한 지휘관일 겁니다.
      패튼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는 한국전쟁 남북을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패튼의 위대성 남북을 통해 느껴보기를.
      한국전쟁 휴전 후 양측 포로 송환 과정에서 벌어진 일도, 남북은 정말 극한의 찌질함-비열함 선보인.
      그냥 위대한 아메리카가 된 것이 아닐 겁니다. 한국전 휴전할 때 남북의 포로 교환 과정을 보면 더 그렇습니다.
      반공포로 석방과 북괴측의 노골적 맞대응 생각해봐야.
      북괴는 우리 국군 포로 거의 대부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극히 일부만 포로 교환 때 남으로 보냈습니다.
      그 일부를 남으로 보낸 이유 역시 반공포로 거부하고 북으로 송환 원하는 북괴군 포로들을 돌려받기 위한 목적에 지나지 않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이승만의 신의 한수 논리, 북괴에게도 동일했습니다. 북괴 역시
      분단된 상태에서 언젠가 다시 적이 될 가능성이 있기에 포로 송환하기 거부하며, 강제 노동력으로 착취하겠다는 논리.
      한반도의 남북은 그렇게 잔대가리를 양측이 모두 함께 굴렸던 것.
      민족 내부 투쟁에 그렇게 열정적인 공동체는 사실 지구 전체로 본다면 미래가 결코 밝을 수 없을 겁니다.
      이승만은 신의 한수, 북괴는 야비한 작태. 또는 반대로 공화국은 마땅했고 남조선은 비열했던 포로 석방 문제라고 보기 힘든.
      포로 교환 당시 북으로 넘어가는 북괴군 포로들은,
      38선에서 팬티만 남기고 옷 다 벗어 남쪽으로 던지고 남을 향해 욕하면서 북으로 귀환.
      우리 역시 겨우 살아돌아온 국군포로들 그리운 가족과 고향 품이 아닌 북괴군 포로 수용소에 가두고,
      혹이나 간첩으로 파견된 것 아닌지 철저히 조사(아마도 폭력 동반) 중에 일부 생환 포로들이 심문 중에 사망하기도.
      팬티만 입고 북으로 넘어간 북괴군들 일부 역시 북에서 숙청되었을 겁니다. 남이 그랬는데 북이 안그랬겠습니까?
      이승만의 유명한 어록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스마트 정밀 유도 무기 판치는 오늘날 기준으로 뭉치면 함께 골로 가는 세상.
      구한말 미국 유학생에 박사에 대단히 지식이 많은 분의,
      결코 지성인 같지 않는 저런 원초적 발언과 지극히 대비되는 상놈 출신이나 다름 없던 김구의 나의 소원.
      ------------------------------------------> 한 없는 문화의 힘으로 세계 속에서 빛나는 한반도를 희망했던 그 꿈이 조금씩 현실화 되는.
      6.25 노래 유형의 한국전쟁 관련 남북의 투쟁가 -------------------> 동족 끼리 원수가 되어 부르는 투쟁가
      철천지 원수 켈트-앵글로색슨 연합체 연합왕국 UK의 외세와의 투쟁가, 룰브리타니아 ---------------------> 차원이 다른 겁니다.
      크게 크게 지구촌의 다양한 공동체 성격도 파악하면서, 민족 내부 투쟁에서의 영웅들을 재평가해보길.
      중국 국공내전 때 희생되어 현재 중국 본토와 대만의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양측 영웅들 ---------------> 제3자에겐 그저 저런.
      러시아 혁명 직후 벌어진 적백내전 때 희생된 양측의 영웅들 ------------------> 세계인들 기준에서 영웅이라고 보기 힘든.
      ------------------------------------------> 그냥 없었어도 될 안타까운 희생이 너무나 많았다고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더 압도적일 것.
      우리 포함 세계인들이 다른 나라의 자칭 영웅들 그렇게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한반도 남북의 자칭 영웅들 역시 지구촌 사람들 입장에선 동족 끼리 왜 저랬지 하는 대상일 수도 있음도 인지해야.
      (북괴에서 돌아오지 못한 우리 국군포로 거의 대대대부부부부부분은 남한 출신일 겁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석방한 반공 포로 대부분 역시 북괴군 점령 후 강제 징집된 남한 출신들 가능성이 매우 큰.
      비극입니다.)

  • @센먀락
    @센먀락 2 ปีที่แล้ว +1

    DP가 현실이고 생닭을 먹으라고 배급하는 K조선군 : ??? 따귀 정도로 저 난리야?

  • @user-vt2dc8923
    @user-vt2dc8923 2 ปีที่แล้ว

    살고 싶어서 꾀병 부리는 게 잘못이냐

  • @gusepheyping
    @gusepheyping 2 ปีที่แล้ว

    노오오력충 꼰대 패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