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토사구팽한적 없음 오히려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전직 관료내지 재지사족들이라 시간이 지나면 관직 내려주고 관군으로 재편입시킴(애초 의병진의 병력 자체가 대부분 정상적인 체제였으면 관군으로 소집되었을 인적자원이었음) 선조가 죽인건 김덕령이랑 이산겸뿐인데 이 인물들은 죄다 역모에 연루된 케이스임 진짜 했냐가 문제가 아니라 전근대 시대에 한번도 아니라 여러차례 역모세력의 입에 오르내렸다는건 상당히 큰문제임 김덕령은 한번도 아닌 대형역모에 두번이나 이름이 거론되었던 케이스고 더 큰문제는 이산겸과 김덕령 둘은 제대로 된 전공이 하나도 없다는데 있음 역모세력이 이름 거론한 나머지 유명 의병장들은 전공도 뚜렷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선조도 처벌하지 않음 병자년에도 여러 의병사례가 있고 임진왜란과 달리 그 숫자가 적어보이는건 청군의 기동전략에 조선정부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항복했기 때문에 의병이 일어나고 자시고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임
의병장 누구를 토사구팽했나요?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 단 한명도 없고 대부분의 의병장들 관군 체제나 중앙 관직 받으면서 이후에도 크게 활약하거나 재야의 명사로 천수 누렸습니다 그리고 병자호란은 의병이 활약할 여지가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전쟁 개시 일주일만에 왕이 포위되었고 모든 전쟁이 근왕으로 목표가 정해져 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의병이 활약합니까
@@zzang-mathis 참고로 의병장만이 아닌 이순신이나 당시 공군을 세운 장수들이 찬밥 신세죠 호종공신, 선무공신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박진이 명나라 장수에게 대접이 소홀하단 이유로 맞아 죽어도 박진이 무례하다 라며 명나라 장수를 두둔한일도 한창 전쟁때 안그래도 바쁜데 지 권력 챙기겠다고 분조로 나뉘어 열일중인 세자 견제하겠다고 선위쇼를 하는것도 그렇고
로마제국, 그리스 제국, 포르투갈 제국, 스페인제국, 몽고제국, 오토만 제국, 프랑스제국, 네덜란드 제국, 대영제국, 일본제국, 나치 독일 ..... 공통점은 새 영토를 정복하고 식민지를 운영해서 흥했고 군사력이 약해지고 영토를 빼앗기면서 쇠퇴한 겁니다. 미국이 영토를 빼앗길 일 있나요? ㅋㅋㅋ 식량은 넘치고 석유 천연가스 광물 등 자원도 넘치고 인재는 세계에서 계속 모여들고 인구는 꾸준히 성장하고 과학 기술 혁신을 주도하고 군사력도 아무도 넘볼 수 없고 NATO, 일본, 한국, 호주 등을 동맹으로 가진 나라인데?
청나라가 임오군란때 군대 끌고와서 조선에 상주시키면서 속국 관계를 공식 명문화하고 조선왕 지위는 청의 북양대신과 동급으로 정하고 청이 재판 관할권을 차지하고 주권과 외교권 박탈, 조선 대신들을 멋대로 갈아치우고 고종을 압박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이 청에 조공을 바치는 속방이라는 '속방조회문'을 보내게 했죠. 청나라가 조선의 주권을 박탈한 것에 분노해서 일어난 의병 있었나요? 청이 유학파들을 귀국 즉시 속속 처형하며 조선의 개화를 막은 반면 일본은 개화를 많이 도와줬죠.
독립군은 1919년에 조직되어서 청산리 전투, 봉오동전투등에서 잠시 반짝하고 1921년 자유시 참변 후 사실상 소멸되었죠. 그후 만주에서 무장항일투쟁은 중국공산당 지휘로 일어난거고 중대규모 이하 작은 병력의 공산당 게릴라로 활동한거고. 1919-1921년 독립군도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 빨치산의 성격이 상당하다고 봅니다. 청산리 전투, 봉오동전투의 영웅들 홍범도,김좌진 등은 양민들을 상대로 저지른 강도, 약탈, 살인등 수많은 만행으로 악명이 높았고 홍범도는 자신의 일기에 부자들을 이유도 없이 죽이고 재물을 빼앗은 것을 자랑스러운듯 자세히 기록해 놨습니다. 독립투사들 행위가 과장되고 미화된 부분이 많고요 물론 독립에도 전혀 기여하지 못했죠. 주로 정신승리에 도움된다 할까요. 일제시대때 이렇다한 반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죠. 인도에선 굵직한 반란이 다수 일어났는데.
독립군은 1919년에 조직되어서 청산리 전투, 봉오동전투등에서 잠시 반짝하고 1921년 자유시 참변 후 사실상 소멸되었죠. 그후 만주에서 무장항일투쟁은 중국공산당 지휘로 일어난거고 중대규모 이하 작은 병력의 공산당 게릴라로 활동한거고. 1919-1921년 독립군도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 빨치산의 성격이 상당하다고 봅니다.
@@gahyunkim2301 글킨하지만..... 사회적인 인식을 너무 간과하여 바꾸지 않는게 현실이죠 결론적으로 역사에서 다들 알고 있다시피 백제 의자왕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왕권을 강화하여 호족들을 무자비하게 탄압을 한것도 모자라 나,당 연합군의 사비성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대비를 하지도 않고 그냥 사치와 향략으로 결국 충신인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옥에 가두어 버리고 배척하여 결국은 나,당(신라,당나라)연합군이 탄현에서 기벌포를 거치고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과 계 백이 이끄는 백제군의 5천과 싸운후 결국은 계 백의 이끄는 백제군 5천이 김유신의 이끄는 신라군 5만의 군대랑 3번싸워서 이겼으나..... 신라의 화랑(관 창)이 계백과 1대1로 겨루고 사망하자 신라의 군대는 사기 오르는데요 즉 백제군은 패하고 결국 계 백은 전사를 하게 되죠 그 다음 신라군은 소정방의 이끄는 당나라군과 합세후 나,당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켜 결국 백제가 웅진성의 성주(예식진)의 항복으로 인해서 나,당 연합군에게 망하고 말았죠..... 결론적으로 이 나라 국민들은 뭔일이 터져야 제도를 바꾸는 민족인데요 그만큼 민족성이 깨어있지 못하는것입니다. 그냥 알면서도 사회의 문제점에 심각성을 그만큼 모르면서 간과하여 방관을 하도록 한심하다는 증거죠.....
당시 선조와 조정은 의병과 의병장들이 그대로 군벌로 변할 것을 우려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해왔고.. 이게 왜란 이후의 전쟁에서 의병들이 잘 일어서지 않았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후 구한말, 국권이 침탈 된 이후 다시금 의병들이 일어났지만 역시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과 자유시 참변이란 사실상의 내분으로 명맥이 끊겨버립니다ㅠ
그건 억측입니다 지금은 그들을 의병이라 부르지만, 당시엔 근왕군이라 했습니다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대부분 의병장으로 활동했구요 당시 조정에서는 의병들이 군벌화 되는걸 걱정한적 없구요, 단지 의병을 가장한 도적떼들이 창궐해서 그걸 처리하는게 문제엿죠 왜란후 대부분의 의병장은 공신록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곽재우 같이 성깔있는 의병장을 수령으로 임명해 줬더니만 자기 성격에 안맞다고 사퇴상소를 올리고 집에 가버린거죠 아니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집에 가버리면 중죄가 될터인데, 그걸 대신들이 커버쳐줍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이야기하는 영상이 많이 없어서 이 채널은 꽤 유익한 정보를 주는 채널이고 특히나 최근에는 무인정변을 보고 있기에 그 시기를 대략적으로 가늠하게 되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영상은 의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제목에도 그 의병이 강한 이유를 말해서 제도나 무기등 우국충정같은 감상적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나올줄 알고 기대했는데 약간 아쉽습니다
조선은 세율이 낮았습니다. 귀족연합의 고려보다 관료주의 조선이었으니까요 백성은 귀족과 조정에 세를 주었던 고려보다 조정에만 세를 납부하는 조선이 살기 수월했을겁니다. 고려때만 해도 대략 70~80%를 세금으로 떼갔습니다. 그러다 권문세족들이 몰락하자 이들에 대한 세금이 사라졌고 오직 조정에만 세를 바치는 30%정도만 납부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죠 일본은 여전히 봉건제 국가였고 70% 이상의 세를 납부했습니다. 저라도 곡괭이 들고 일어났을거 같습니다. 아무리 조선이란 나라가 ㅈ까타도 당시 일본 보단 덜 ㅈ깥았거든요
세금을 수취하기전에, 먼저, 소득과 재산을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농업이 산업의 중심이었던 에도시대는, 그 조사를 '검지'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쌀의 수확량, 여타 작물의 수확등을 쌀가격으로 변환한 것을 합계하여 계산하였습니다. '코쿠다카'라는 단위로 표시하였습니다. 현대의 농가는, 소득의 조사(신고)를 1년마다 행합니다. 그러나 에도시대는 제각각이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17세기 전반에 1회뿐이였던 지역도 많았습니다. 즉, 에도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200년전의 마을의 수입과 재산을 근거로 과세된 지역이 많이 있었습니다. 200년도 더 전의 수입의 40~50%라니, 꽤 가벼운 세금이지요. 막부의 영지에서는 1700년경, 실질세율 28% 1800년경에 20%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실질세율을 약 28%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8대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와, 세액을 비율로 하지않고 정액으로 하는 '정면법'등을 시행하여, 연공징수의 증가를 목표로 하였으나, 실질세율은 35%가 고작으로, 요시무네가 죽은 뒤에는, 다시 30% 이하로 내려갔습니다. 논밭에 90%나 세금이 물려진 마을도 있었습니다만, 이 마을의 중심산업인 해운과 과수원은 무과세 대상이었습니다. (무사정권이 감세해주었다는것보다, 농민측이 산업을 바꾸어 절세(탈세?)한 것입니다.) 당연히, 막부와 각 번들은, '검지'의 재실시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렇지만, '검지'를 반대하는 백성들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단 한번 봉기가 일어나면, 마을을 관리하는 무사측의 책임자가 책임을 추궁당하거나, 평판이 안좋아져 출세에 지장이 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검지'의 강행은 어려웠던 것입니다. 18세기정도부터 현금수입을 추구하여, 농민들은 면화나 담배등 상품작물의 재배에 힘쓰게 됩니다. 농민들은,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상품작물을 팔아서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 이 상황을 눈치챈 각 번들은, 상품작물을 농민으로부터 강제적으로 값싸게 매입하여, 오사카등의 대도시에서 매매하여 번의 재정을 확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전매제'라고 합니다. 당연히 이 '전매제'에 반대하는 봉기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유형의 봉기가 에도시대 후반에 일어났던 봉기중의 대부분이었습니다. ※부유한 농민은, 가난함을 강조하는 글쓰기를 어렸을때부터 연습하여, 어른이 되어서 마을의 대표가 되면, 그것을 대관에게 제출하였습니다. 대관도 거짓말인걸 알면서도, 봉기를 방지하는 것과, 자신의 평판문제때문에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문서가 후세에 전해져, '가난한 농민상'이란 이미지를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 외에 자생가능한 감자나 잡곡을 많이 심어서 저장해두면 기근등은 일어나지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현금수입을 추구하기때문에, 돈이 벌리지 않는 일은 기피하게되는 법입니다. 츠가루의 기근은, 풍작을 예상해서 저장미를 팔아 큰돈을 벌었을때에, 시원한 여름이 찾아와서 식량부족이 되었습니다. 농민은 금화를 쥐고 죽어갔습니다. 카이의 기근은, 면화재배만으로 돈을 벌었지만, 면가격이 폭락하여 파산하여 굶어죽은 농민도 많았습니다. 정치가 가혹했다라기보다는, 서투른 화폐경제, 시장경제에 말려든 비극이라고 해야되겠죠
정규군 장군들과 양반들이 자기몫을 못하고 전쟁시작과동시에 다도망간 역사에 먆이화가나고, 전쟁때마다 항상 백성들을 핍박 과 이용에 대상으로만 대햇던 나라, ㄱ리고 그 나라에 왕족, 정치, 군부 사람들 과 상위층만 을위해돌아가던 근대화전에 나라를 지키기위해서 싸워줫던 의병님들에 아그리고 625때 의병대 와 학도군분들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글고 이 비됴도잘봣어요 크리에이터님
영상에 일부 의문점이 있어 이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이는 수정적 첨언이 아닌 단순 지식간의 충돌에 대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이니 오해는 없기를 바랍니다.^^) 1.조선 전기,그러니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은 농병일치를 지니는 부병제 국가이기에 의병이라 한들 그 지휘관이 대부분 문인 출신의 양반일 뿐이지 무장과 통솔 체계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관군과 인적 질에 차이가 거의 없기로 압니다. 그렇기에 특별한 훈련이나 조련 없이 곧장 전장에 무장 만을 갖춘 채 뛰어들 수 있었구요. 2.백성들이라고 대부분 의병에 참여한 것은 아닌걸로 압니다. 이는 왜란 이후 기록들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선조나 세자들에 대한 민심이 바닥을 들어내어 산으로 잠적,한성 내 폭력 활동,왜군에 항복 하거나 부역,협조와 왜군으로서 참전,직접 일본에 건너간 사례가 있을 만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컸습니다. 남부 지방,특히 전라도를 중심으로 의병이 결집한 이유는 전라 땅에 왜군 병력이 전쟁 초에 진입하지 않았고,한성이나 한성 이북 지역들과는 달리 왕이 피난하는 것을 듣거나 본 사람이 거의 없기에 순수한 저항 의지로 의병에 참여할 수 있었죠. 3.양반 중 대부분이 도망 갔다는 표현은 너무 과장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리 표현하신 이유는 왜군의 진격 경로를 보면 쉽게 헤아릴 수 있는데 왜군의 전략상 최단 경로로 한양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전라도를 제외한 경상,충주(탄금대 방면),한성 이후 선조의 피난길을 따라 평양까지 일직선으로 빠르게 북상했기에 이러한 오해가 생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왜군의 진격 속도가 매우 빠르고 가는 족족 관군이 격파 당했기에 의병 봉기가 일어날 명분과 인적 동기가 부족하고(희망을 쥐어주고 백성들을 규합할 사기가 부족),경상과 경기 땅의 백성 대부분이 왜군 손에 떨어졌으니까요.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부분 중 하나가 양반은 놀고 먹으며 공부만 하는 썩어빠진 족속으로 아는 분들이 계시는데 양반도 사람입니다. 오히려 왜군 주력군이 북상한 이후에는 각지에서 양반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이 대거 봉기했으며 이는 양반이 지닌 이론적 병법 지식,노비를 비롯한 인적 자원,대규모 병력을 보조할 식량 자원 등에 기인합니다. 실제로 천민 또는 중인을 중심으로 한 의병은 거의 없었죠. 그들이 일으키고 싶었어도 돈과 장비가 없으니 역부족이었을 테지요. 4.조정은 의외로 왜란 이전 남부지역에 철저한 방비를 갖춥니다.(물론 부산포가 뚫리고 탄금대에서 주력군이 전멸 하지만..) 류성룡 등의 고위 임원들 또한 일본 땅에 보낸 첩자와 대마도주,부산의 일본인들에 의해 곧 풍산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선조에게 고한 상태였고 북방 지역의 장수를 대거 전라 좌,우수영,한성 인근 지역에 파견 시켜 군을 조련 했으며 무리한 방비 조치에 남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폭동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장병기의 길이 차이(검과 창 모두 일본이 길이 면에서 우세),전국시대로 단련된 왜군에 비해 조선군의 대부분은 실전 경험이 없었으며 덕분에 병졸들의 사기가 매우 낮았고,신립의 주력 관군(병력만 많을 뿐 직속 기병대를 제외한 대부분이 여러지역에서 모여든 오합지졸)이 탄금대에서 왜군 조총부대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다 전멸하자 중남부 지역의 대부분 관군이 흩어지고 말죠. 5.영상의 자체적인 창작적 영역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장수의 무장은 영상에서 보여지는 어린갑이 아닌(물론 두정갑도 표현 하셨으나) 두정갑,찰갑,피갑 등이 알맞은 것으로 압니다. 또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상투를 들어내고 다니지 않고,천민의 경우 초립과 패랭이,방갓,중인의 경우 대가 높은 흑립,양반은 일반적인 흑립 등을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복식인 것으로 압니다. 6.불교 탄압은 여말선초에 중심적으로 이뤄졌으며 중기에 이르면 승려는 형식적으로 천할 뿐 딱히 핍박 받거나 탄압 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려에 비하면 매우 한정적이기는 하나 승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대부분 좋았습니다. 그저 하나의 종교로 바라봤죠. 승려들이 살생을 감행 하면서까지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은 사찰이 공격 받자 이를 수비하기 위해 승병을 조직하면서 본격화 되었는데 그들이 의병 또는 관군과 합세하여 공을 세운 것 또한 단순한 저항의식 때문이 아닌 자신들의 터전과 백성들을 위해 나선 것 같습니다. 7.의병은 왜군에 비해 전력이 매우 약했습니다. 이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근접 장병기의 열세,실전 경험의 부제 등이 증명하며 실제로 의병이 관군에 합세하여 공을 세운 경우는 많으나 단독 병력으로 왜군 주력부대와 견주어 이기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작은 습격이나 첩보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는 했으나 왜군에 비해 확실히 열세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8.위의 사항들을 종합하여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의병 봉기의 중심은 양반 이었으며 당시의 조선은 부패 상태가 일부 분들이 주장하시는 수준의 쓰레기 국가가 아니었고,백성들의 정서와 의식 또한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볼 수 있겠습니다. 신분 질서 또한 왜란 이후 무너지는 만큼 당시에는 나름의 사회 체계와 행정력이 뒷받침 되는 국가 였다고 봅니다. 물론 의병을 폄하 하거나 그들의 공을 낮추려는 의도가 아닌 단순 의병 봉기의 주요한 원인과 이해관계가 영상에 설명된 부분과 다소 차이를 보여 첨언 했습니다. 그들이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은 맞으나 엄연히 따지자면 이를 '가난한 백성들이 무능한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는 식으로 포장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될 것 같기도 하구요.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감정적이거나 주관적으로 해석 하기 보다도 사회현상의 원인과 이면에 대해서 배우고 알릴 필요가 있다 느낍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몇가지 반론을 하자면 1.의 반론 => 당시 농병일치 부병제로 하나 대립군이 횡행할 정도로 군인 확보가 어렵고 신립의 6~ 8천의 병력을 모을때도 옆구리에 책을 낀 유생도 보이고 늙은 노인도 있고 병사 한명 한명이 절망적인 상태인데 체계상 문제가 없어 보여도 현실은 아니기에 군사력의 실태가 처참한 지경이죠 2.의 반론 =>딱히 없습니다 대개 맞는 말이라 보여집니다 3.의 반론 =>당시 조선의 양반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우리가 흔히 아는 의병장들이 조선의 양반 전부는 아닐겁니다 그렇다면 전체 양반에서 얼만큼의 양반이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 했냐인데 그게 확실치 않아 단언은 못하나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면 흔히 인식하는 양반들은 도망갔다는 말이 현재로는 맞아 보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데 윗물이 더러운데 아랫물이 깨끗하진 않겠죠 또한 당시 원군으로 참전한 다양한 명나라 사람들의 기록 특히 경략 송응창의 기록에 조선의 주경야독만 하지 다른 재주는 없다, 선비는 옆에 기생을 끼고 시만 읆고 국책을 내던졌다 라는 기록도 있기에 놀고 먹고 무능한 양반의 인식이 그리 괴리가 있지는 않아보입니다 하지만 재력이 있기에 의병을 모으고 의병장이 된건 맞아 보입니다 당시 의병장이 양반 밑의 계급이 없었고(완전히 없는건 아니지만) 후일 구한말에 상민이나 평민 의병장이 많이 보이는것도 아마 재력이 있는 존재들이 많아진것도 한 몫 했을겁니다 4.의 반론 =>대마도주가 소요시토시와 승려 현소가 직접와서 까딱 잘못하면 전쟁이 일어날수 있다 계속 시급함을 알리고 황윤길과, 김성일로 대표되는 사신단을 보내고도 전쟁은 나지 않는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니 임진왜란 초기에 그렇게 속절없이 패배한거죠 솔직히 본분을 다해 대비한건 이순신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고 봐야죠 5.의 반론 =>이또한 대체로 맞다 봅니다 6.의 반론 =>조선초기에 억불정책을 피나 왕과 왕족들이 불교에 빠지고 이용도 하는 사례가 있어 본격적이진 않으나 조선 10대 연산군 무세 강력한 탄압을 시작으로 중종반정 이후 사람들의 주도로 더욱 탄압받기 시작하고 조선 13대 명종 암세 문정왕후와 승려 보우의 결탁으로 잠시 흥하나 오히려 사대부들이 강력한 반발을 맞아 이후 더 탄압을 받죠 율곡 이이가 불교에 빠진 전적이 있다, 이거 하나로 엄청나게 비판하는 상황이니 당시 불교의 시각이 어떤지 알수 있죠 물론 민간은 계속 좋아하나 양반계층에선 철저한 탄압이 이루어지고 그 양반계층이 조선 사회를 움직이니 대우가 좋을리 없죠 그러나 승려들이 의병이 된 동기와 원인은 얼추 맞다고 보여집니다 7.의 반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긴 한데 대표적으로 김화전투는 열세의 병력인 산척(사냥꾼)으로 일본군의 직군을 저지하고 패퇴시킨 전투라 대규모 전투가 아예 없다고 하기도 말할수는 없죠 8. 결론 필자의 견해는 흔히 인식하는 조선의 부정적 이미지가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고 양반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도 천차만별이나 이또한 세간의 그 부정적 인식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아 보입니다 여기서 괄목할건 의병들의 대한 시각이죠 '가난한 백성들이 무능한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 프레임이 틀린건 아니나 정말 의병들이 그저 무력하고 악전분투만 하는 집단일까? 정말 나라에 버림 받으나 우국충정만이 이유가 되어 싸운걸까? 흔히 의병들을 예비군의 비유하는데 정말 그럴까? 의병들의 무기체계는 어떨까? 좀더 심층적 연구가 필요한데 의병을 얘기하면 조선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도구나 일본과 다른 우수한 시스템및 가치관이다 자랑을 위한 도구로 쓰이기만 하지 좀더 구체적 이야기는 하지 않아 답답합니다
@@수집쟁이드라하카 친절하고 격식있는 반문에 감사드립니다. 반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본인이 충히 이해할 수 있고,관점 또한 그르친 것이 없기에 제 지식에 더하고 뺄 것이 늘었습니다. 님 같은 분들이 역사를 널리 알리셔야 하는데 정치와 역사를 엮고 무지성적으로 역사에 현대의 잣대와 식민사관을 대입하는 이들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늦었지만 평안한 하루 되시지요. ^^
그럴 수 밖에 없음. 병역의 의무가 있는 자들은 관군으로 끌려가야 했고, 행정력이 무너진 곳의 복구된 부분에서 관군 복구를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는 자들은 양반이 유일했기 때문임. 그리고, 솔직히 의병숫자를 보면 양반들이 많다고 볼 수 없는게 승려들도 많았고 이건 그나마 지역적 네트워크가 잘 살아있는 조직과 그 조직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지(사찰)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거. 의병을 이끈 의병장은 근거지와 네트워크를 유지할 재력이 있는 양반이 유리했기 때문에 많았던 거.
조헌은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였습니다. 충정도 및 전라도의 여러 장수들과 협력하여 대규모 연합군을 결성하여 금산성을 탈환한다는 최소한의 상식은 갖춘 구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위한 각 장수들과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금산성을 탈환해야할 전술적 정치적 당위성은 차고 넘쳤지만, 현실적으로 고경명의 패배로 인해 금산성 공격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았고, 지금은 일본군 전력이 우세하니 공세가 아니라 수세를 취할 때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수였습니다. 장수들의 합의를 끌어내는데 실패하자 조헌은 자신이 먼저 금산성 공세에 나서면 협공을 논의했던 다른 장수들도 소식을 듣고 달려와주리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알려진 것과 달리 조헌과 영규의 부대는 금산성을 공격했던게 아니라 금산성에서 조금 떨어진 지형에 진을 치고 일본군과 대치했습니다. 조헌-영규의 부대를 발견한 일본군은 조선군의 대공세가 벌어진 것인줄 알고 처음엔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지만 사방으로 척후를 보내보니 조헌-영규의 2천에 못미치는 병력이 전부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야음을 틈타 성문을 열고 나와 조헌-영규의 진형을 삽시간에 포위했습니다. 조선군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본군의 야간 전술 보행에 제대로 당한 조헌-영규였지만 포위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전멸할 때까지 항전했고 조헌-영규 부대원 대부분이 전사하여 조선에서 충의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원래 조선의 양반들은 초기에는 그 수고 적었을 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양반인게 아니라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나가거나 집안이 아주 잘살거나 하지 않으면 집에서 글공부만 하다가 집안이 궁핍해지면 생계를 위해서 양반을 버리고 장사를 하거나 다른직업으로 전향하기도 하면서 양반층이란게 유동적이였는데.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는데 공을세운 자들을 우대해 주면서 그들의 자식들까지 벼슬을 세습 할수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는 훈구층이 생기면서 썪기시작했던거고. 의병 문제도. 열등감 덩어리였던 선조가 자기 권력을 위해서 전쟁후 논공행상에서 의병들을 폄하하고 제대로된 보상을 해주지 않으면서 모든 민심이 돌아서게 되고. 병자호란때는 전국의 백성들이 침묵하고 눈감아 버렸기 때문에 대대적인 의병운동이나 이런것도 없었고. 인조가 성에 갇혀 죽니사니 해도 니들만의 리그라고 선을 긋고 만 계기가 되었던겨죠. 결국 조선이란 나라를 근본부터 썪어빠지게 만든 가장 큰 해악들. 민족의 암적인 임금들이 조카죽이고 훈구파란 세습 양반층이란 거대 세력을 출범시킨 세조. 오직 열등감 덩어리에 정신병자였던 선조. 머리나쁜데 눈치조차 없는게 힘도 없어서 신하들 말에 벌벌 기면서 안 일어나도 될 전쟁으로 나라를 전쟁터로 만드는건 물론 신하들이 힘을 모으면 왕을 가지고 노는건 물론 죽일수도 있겠다는 확신을 심어준 인조. 자기 권력지키고 부귀영화 누릴려고 중전이 일본 낭인들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것도 외면한건 물론 나라를 망하게 하고도 남탓만 미친듯이한 실질적인 한일합방의 주역 매국노 고종
의병의 수뇌부 대부분이 양반들 중심이 이었고 자신 고을에 사는 자기 친인척들, 농민, 노비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군 규율을 적용해 준관군에 해당하는 전투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음. 대부분 관직에서 물러났거나 과거를 봤던 자들이었고 이들은 나중에 관군에 재편성되어서 활동했음 의병으로 쭉 간게 아니라 뭐 이젠 인터넷에 조금만 쳐도 주루룩 나오는 정보를 다 틀리고 있네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세요 영상 만드는 거 참 쉽네
그당시 조선의 인재가 가장많고 드러나던 시기임. 조선이 문재가 아니라. 선조가 문제였음. 탕평책이란 명목으로 신하들 이간질하고 요심많은 놈들 이용하고 국체를 약화시킨건 애초 왕권명분이 약한 선조였음. 런승조.런승만.지금윤썩렬 같은이가 결국 나라를 망침. 지금은 이명박.바그네 윤썩렬 뽑는 어리석은 2찍이 더 문제.
흠...재미난 내용이긴 하지만. 실제와 다른 부분이 있어 첨언을 좀 하겠습니다. 임란 당시 전체 의병들의 최소 2/3는 조선 정규군(제승방략체제에 의해 지정된 장소에 모이던 지방군이 의병으로 그대로 전환)이었고, 남은 1/3도 일반 양인이었지만 거의 예비군이었으며, 노비나 천민 출신은 얼마 안되었습니다. (임란을 기준으로 조선을 전후기로 나누는데, 임란 직전 조선은 조선 전기로 봐야 하며, 이때는 노비나 천민의 비율이 거의 10% 내외 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노비나 천민 출신 의병 비율은 높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노비나 천민이 의병이 된 경우는 비율상 매우 낮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비율상 양반의 수가 매우 낮아보이지만, 이들 의병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며 군량까지 보급한게 지방 양반들이라 양반들이 의병에게 지원한게 사실상 엄청나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임란 직전 양반의 비율은 전체 조선 인구 중 2%가 채 안되었던걸로 기억하네요) 의병의 활약이 뛰어났던 것은 분명 맞지만, 그건 특권층이라 불리우던 양반들이 나름 조선에서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게 맞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선조 이놈이 임란후 공훈 서열을 나누면서 개씹창을 낸게 이후 계속 문제가 된거구요.
양반들은 가족도 버리고 도망가고 신하들은 왕 선조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의병활동한 양반은 소수였음. 군사훈련도 안받고 글만 외운 양반은 일본군과 전투하기 힘듬. 평민들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해서 싸워야 될 처지였음. 스코틀랜드도 평민들이 무기들고 잉글랜드와 싸움.
일본군은 100년간의 내전에서 살아남은 정예병들어있고 신무기 조총까지 동원했고 수많은 이름난 장군들이 있었다. 조선군은 그런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시작 후 4개월만 밀렸을 뿐이다. 전쟁준비가 안되어 있었고 15만 군사나 되는 대군의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예비대까지 죄다 동원했으므로 군사는 더 증가했다. 하지만 그 이후 모든 전투에서 조선군이 주도했고 대부분의 전투에서 군사수가 10배나 많은 일본군들을 상대로 싸워서 이겼다. 웅치 전투, 이치전투, 행주산성 전투, 연안성 전투, 진주성 전투 등 모든 전투에 일본군은 10배의 군사를 동원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이 모든 전투는 조선군이 주도했다. 조선군의 전과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전쟁 당시 일본군은 '왕을 빠르게 잡는다' 는 일념으로 한양을 향해 고속으로 전진했고, 그 빠른 속도에 조정도 관군도 제대로 대응할수없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조선의 방비 시스템이 후달려서 그런게 아니라 일본군이 비정상적으로 빠른거였어요. 흔히들 의병과 수군이 다 했고 관군은 뭐 하나 한거없다고 착각하지만, 관군에게 정비할 시간이 주어지자 의병도 관군지휘로 들어가 대부분의 승리는 관군이 했습니다. 의병과 관군은 뚜렷하게 나뉜 조직이 아니었거든요. 게다가 전국시대 경험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글자 하나 제대로 못읽는 백성들이 어떻게 게릴라로 치고 빠지면서 피해누적할수 있었을까요? 조선시대 선비가 무슨 책만 읽는 책벌레인줄 아는데 활도 잘쏴야하고, 전법에도 능통해야 하고, 지리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등 모든 면에서 육각형 만렙을 찍어야지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선비, 양반이었습니다. 의병의 지휘관은 양반들이었고 사람들이 "책만 읽고 현실은 모르는 놈들" 이라고 취급했던 양반의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게릴라였고, 전법이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지휘라는건. 영상에서는 백성들이 자기가 사는 곳 지리를 잘 알고 있어서 그거 이용했다고 하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의병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통솔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양반이었으니 말이죠. 후반부에 이몽학의 난이 나오는데, 이몽학은 어리석고 아무런 재능이 없었던 인물이었고 성격도 포악하고 불량하기까지 해서 호적에서 파일 정도로 망나니였습니다. 그런 놈이 백성들을 선동해서 몽둥이를 들게 하고 계를 꾸렸습니다. 김덕령도 억울하게 죽은것처럼 나오는데 안그래도 군졸폭행과 사적제재에 의한 살인을 일으켜서 문제 많은 사람이었던걸 선조가 '그래도 능력은 좋은 놈' 이라서 살려둔거 역모에 언루되고 나서야 체포됬고, 그마저도 선조가 안죽이겠다고 고집부리다가 앞선 군졸폭행과 사적살인이 문제되서 결국 죽인겁니다. 이몽학은 죽어도 할말 없는 사람이었고 김덕령은 워낙에 이름이 유명하니 반란 수괴들이 사람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도용된겁니다. 누명을 쓴거야 억울하지만 군졸폭행, 사적제재는 하나도 억울할거없습니다 자초한거니까요. 그리고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조선시대 지배계층인 양반도 잘 지킨 덕목입니다. 조선은 유교와 성리학이 통치이념으로 소프트웨어에 깔린 나라고, 특히 유교는 '군자라면 군자다워야 한다' 를 강조하니, 의병장들 대다수가 양반이었다는 것과 선조가 등신짓하는거 돌려까면서 맥일 정도로 양반들은 동시대 다른 지배계층에 비하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의심병자에 책임감마저 없던 선조가 등신이었던거지 '양반은 전부 개새끼다' 라고 하기엔 비약이 너무 심함. 조선만큼 논공행상 빡시게 한 나라는 없고, 실제로 많은 의병자들이 철저하게 추려낸 공에 따라서 그에 걸맞는 상을 받았습니다. 조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앞뒤 꽉 막힌 유교탈레반 국가가 아니에요. 그런 국가였으면 500년 동안 존속못했습니다;;
일각에선 의병이 평시에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 복무한 예비군 성격이 강하기에 전투력이 나쁘지 않다라 하던데 그게 진짜인지 궁금하고 무기체계나 지휘일선등 연구할게 많은데 툭하면 그들의 우국충정이나 나라에게 혜택이 없으면서 자진해서 의병이 되었다 이런 감상적인 말들만 해서 답답합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거든요
조선시대 군인들의 마인드가 얼마나 개차반이었냐면, 타지에서 죽으면 혼령이 고향땅을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이 원혼이 된다고 해서, 징병되면 외지에서 죽을바에 고향에서 죽겠다고 하고 자살했다고 함. 진짜 조선시대는 알면 알수록 한심한 왕조였고 애진작에 망해 없어져야했던 왕조였음
서민은 이민도 도망도 못간다 가고 싶어도 돈이 없다 가족을 지킬려면 직접 싸우는 방법 뿐이다 간절한것 뿐이다
지금도 가장 간절한것은 국민이다
나라에 바라는것 없이
싸웠던 의병이였지만
핍박받는것을
바라는것은 아니였다는 ㅠㅠ
의병 의병장에 대한 보상과 대우를 해줬다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지않았겠죠..
풍신수길도 침공전 미리 간자들을 풀어 훈련상태 병력 민심등을 알아보고..
자신들이 항상 그랬듯..
승리하는 모습을 보이면 알아서 굴복하고 조선왕에 대항할것이라는 착각을 일으켰지요..
지금도 마찬가지. 병역면제자가 대똥, 국개의원이 되는 세상. 어떤 사유이든 병역면제자는 공직자가 되면 안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
옜날이나. 지금이나 나라 살리는건. 국민들이네.
양반들도 국민이라면 맞죠.
지금도 변한게 없네요
선조가 의병 토사구팽해서
병자호란때는 의병에 적극 가담하지 않음
의병 토사구팽한적 없음
오히려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전직 관료내지 재지사족들이라 시간이 지나면 관직 내려주고 관군으로 재편입시킴(애초 의병진의 병력 자체가 대부분 정상적인 체제였으면 관군으로 소집되었을 인적자원이었음)
선조가 죽인건 김덕령이랑 이산겸뿐인데 이 인물들은 죄다 역모에 연루된 케이스임
진짜 했냐가 문제가 아니라 전근대 시대에 한번도 아니라 여러차례 역모세력의 입에 오르내렸다는건 상당히 큰문제임
김덕령은 한번도 아닌 대형역모에 두번이나 이름이 거론되었던 케이스고 더 큰문제는 이산겸과 김덕령 둘은 제대로 된 전공이 하나도 없다는데 있음
역모세력이 이름 거론한 나머지 유명 의병장들은 전공도 뚜렷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선조도 처벌하지 않음
병자년에도 여러 의병사례가 있고 임진왜란과 달리 그 숫자가 적어보이는건 청군의 기동전략에 조선정부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항복했기 때문에 의병이 일어나고 자시고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임
의병장 누구를 토사구팽했나요?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 단 한명도 없고 대부분의 의병장들 관군 체제나 중앙 관직 받으면서 이후에도 크게 활약하거나 재야의 명사로 천수 누렸습니다
그리고 병자호란은 의병이 활약할 여지가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전쟁 개시 일주일만에 왕이 포위되었고 모든 전쟁이 근왕으로 목표가 정해져 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의병이 활약합니까
@@zzang-mathis의병장 이산겸. 김덕령. 선조에 의해 죽임을 당함.
@@zzang-mathis 김덕령 곽재우
@@zzang-mathis
참고로 의병장만이 아닌
이순신이나 당시 공군을 세운 장수들이 찬밥 신세죠
호종공신, 선무공신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박진이 명나라 장수에게 대접이 소홀하단 이유로 맞아 죽어도
박진이 무례하다 라며 명나라 장수를 두둔한일도
한창 전쟁때 안그래도 바쁜데 지 권력 챙기겠다고
분조로 나뉘어 열일중인 세자 견제하겠다고
선위쇼를 하는것도 그렇고
현실적으로 의병은 지방 양반이 자기집 노비를 데리고 나가서 싸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곽재우도 재산을 탕진했죠
만약 조선이라는 의병에 대한 대우가 문제였지만 그것이 오늘 날 625 참전 용사에게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프네요....ㅠㅠ 정말 우리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시고 목숨까지 바치신 분들을 생각하게 하네요
북관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가토기요마사를 물리치신 의병장 정문부장군의 12대손입니다
오늘 영상은 가슴에 울림이 있습니다
영상을 보다가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네요
감사합니다
가토를 얼려서 죽일뻔한 정문부 장군요? 대단합니다
저는 울었습니다ㅜㅜ 대단하십니다!
멋지십니다 크ㅡ 존경받아 마땅한
쿨럭~~ 가토 기요마사요? 그 흉악한 인간을요?
대단하십니다.
정문부 장군은 그냥 위대하신분이 아님 친일파 흡수및 척살하고 여진족을 물리치고 왜군 8천을 전략 전술로 물리침 통솔 과 전략으로는 이순신과 비견됨
조선은 임진왜란, 적어도 호란 끝나고 왕조가 교체되는게 맞았음. 전란을 겪어도 지배층이 반성없고 뻔뻔하기 이를데 없으니...
진작 망했어야 할 조선
6.25처럼??
지금도 뭐 ㅎㅎ
애초에 성리학을 주류로 삼은게 잘못됬다고봄
아니면 유교탈래반인 전국의 서원들의 세력인 사림이 못컷어야함..서원철폐를. 진작했어야
조선을 말아 먹은것은 사실 인조와 사림들이라고봄
그렇진 않죠 단편적인 일반화의 오류라 이를 수 있겠습니당
김덕령은 너무 불쌍합니다
드라마 (징비록)에서 김덕령(조인표)배우가 민란에 관련돼서 고문을 받으면서 했던말이 (내 장부로 태어나서 일본군을 많이 못죽인게 죄)라고 했을때 슬프면서 무능한 전쟁이후 (재조지은)이나 외치는 무능한 조선정부 원망 많이 했어요😢
사실 선조는 김덕령을 살리고싶어했죠 서인들이 공격하는 입장이고 동인이 비호하는 입장인데 동인의 영수인 류성룡이 구명에 나섰다면 살았을수도 있는데 류성룡조차 죄를 물어야한다고하니 비호해야할 동인전체가 입다물고 있다가 못버티고 사망 ㄷㄷ
@@j.c.s7762
친히 국문을 한게 그 졸군인데 살리려 했다니 말이 안되죠
어디 김덕령뿐일까요
@@수집쟁이드라하카 조선왕조실록에 선조의 말이 나옵니다 찾아보세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인이 양아치라는건 똑 같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국은 국민들이 나라를 지킨다!~
그러다가 일본한테 나라가 넘어갔지...이세상에 영원한건 없지요...양지가 음지되고 음지가 양지되고...미국도 언젠가 영국 되는날 오지요...요샌 이양반 저양반 양반이 욕이 되어버린 세상이지요
영국은 아일랜드보다 경제능력이 약하고 미국하고는 국력과 경제력에서 비교사 안됩니다.
브렉시트로 결식어린이가 많아서
유니세프 지원받는 나라.
미국은 땅이 너무 사기라서... 오려나..?
로마제국, 그리스 제국, 포르투갈 제국, 스페인제국, 몽고제국, 오토만 제국, 프랑스제국, 네덜란드 제국, 대영제국, 일본제국, 나치 독일 ..... 공통점은 새 영토를 정복하고 식민지를 운영해서 흥했고 군사력이 약해지고 영토를 빼앗기면서 쇠퇴한 겁니다. 미국이 영토를 빼앗길 일 있나요? ㅋㅋㅋ 식량은 넘치고 석유 천연가스 광물 등 자원도 넘치고 인재는 세계에서 계속 모여들고 인구는 꾸준히 성장하고 과학 기술 혁신을 주도하고 군사력도 아무도 넘볼 수 없고 NATO, 일본, 한국, 호주 등을 동맹으로 가진 나라인데?
4:09 초 세 의병장은 전주성 전투가 아닌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잘볼께요^^ 조선의병이 임진왜란때에는 일본을 잘 막아내었습니다만 구한말때에는 일본에게 졌죠 의병들은 나중에 만주와 요동과 연해주로 건너가서 독립군들이 되었죠
청나라가 임오군란때 군대 끌고와서 조선에 상주시키면서 속국 관계를 공식 명문화하고 조선왕 지위는 청의 북양대신과 동급으로 정하고 청이 재판 관할권을 차지하고 주권과 외교권 박탈, 조선 대신들을 멋대로 갈아치우고 고종을 압박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이 청에 조공을 바치는 속방이라는 '속방조회문'을 보내게 했죠. 청나라가 조선의 주권을 박탈한 것에 분노해서 일어난 의병 있었나요? 청이 유학파들을 귀국 즉시 속속 처형하며 조선의 개화를 막은 반면 일본은 개화를 많이 도와줬죠.
독립군은 1919년에 조직되어서 청산리 전투, 봉오동전투등에서 잠시 반짝하고 1921년 자유시 참변 후 사실상 소멸되었죠. 그후 만주에서 무장항일투쟁은 중국공산당 지휘로 일어난거고 중대규모 이하 작은 병력의 공산당 게릴라로 활동한거고. 1919-1921년 독립군도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 빨치산의 성격이 상당하다고 봅니다. 청산리 전투, 봉오동전투의 영웅들 홍범도,김좌진 등은 양민들을 상대로 저지른 강도, 약탈, 살인등 수많은 만행으로 악명이 높았고 홍범도는 자신의 일기에 부자들을 이유도 없이 죽이고 재물을 빼앗은 것을 자랑스러운듯 자세히 기록해 놨습니다. 독립투사들 행위가 과장되고 미화된 부분이 많고요 물론 독립에도 전혀 기여하지 못했죠. 주로 정신승리에 도움된다 할까요. 일제시대때 이렇다한 반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죠. 인도에선 굵직한 반란이 다수 일어났는데.
구한말때는 기관총이라는 무기가 있어서.... 의병과 정규군의 전투력 차이가 임진난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상태였습니다.
독립군은 1919년에 조직되어서 청산리 전투, 봉오동전투등에서 잠시 반짝하고 1921년 자유시 참변 후 사실상 소멸되었죠. 그후 만주에서 무장항일투쟁은 중국공산당 지휘로 일어난거고 중대규모 이하 작은 병력의 공산당 게릴라로 활동한거고. 1919-1921년 독립군도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 빨치산의 성격이 상당하다고 봅니다.
오늘의 생활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구독합니다.
나레이션으로 선생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 구독합니다. 😊
감사합니다
4분18초에 전주성은 진주성을 잘못말한듯합니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의
전사에대해
여러가지설도
존재하나봅니다
죽음을 알고도 나라를 위하는 조헌 영규
누구는 어리석다 할수도 있지만 그런 행동을 할수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조선의 숨겨진 영웅들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지를 실천할수 있는 리더를 키우는 교육이 필요하다
곽재우장군님 넘 불쌍 왜란끝나고 의병들 버림받았지..
이 나라 한국은 국민들의 민족성 자체가 뭔일이 터져야..... 사태를 수습하여 깨우치는게 대부분인데요.... 지금 한국도 똑같습니다.
공감합니다... 윤석열 탄핵하고 이재명님을 필두로 한미연합훈련 폐지 중한 반도체 정보교류, 의대증원 정책폐지 해야합니다. 윤석열 탄핵
암만 나라가 미워도 일터지면 앞장서서 전쟁터 갈 사나이들 많습니다. 내 명의로 된 땅 하나 없어도 내가 살고 자라온 나라인데 누가 침략하는걸 보고만 있을순 없죠.
@@gahyunkim2301 글킨하지만..... 사회적인 인식을 너무 간과하여 바꾸지 않는게 현실이죠 결론적으로 역사에서 다들 알고 있다시피 백제 의자왕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왕권을 강화하여 호족들을 무자비하게 탄압을 한것도 모자라 나,당 연합군의 사비성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대비를 하지도 않고 그냥 사치와 향략으로 결국 충신인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옥에 가두어 버리고 배척하여 결국은 나,당(신라,당나라)연합군이 탄현에서 기벌포를 거치고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과 계 백이 이끄는 백제군의 5천과 싸운후 결국은 계 백의 이끄는 백제군 5천이 김유신의 이끄는 신라군 5만의 군대랑 3번싸워서 이겼으나.....
신라의 화랑(관 창)이 계백과 1대1로 겨루고 사망하자 신라의 군대는 사기 오르는데요 즉 백제군은 패하고 결국 계 백은 전사를 하게 되죠 그 다음 신라군은 소정방의 이끄는 당나라군과 합세후 나,당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켜 결국 백제가 웅진성의 성주(예식진)의 항복으로 인해서 나,당 연합군에게 망하고 말았죠..... 결론적으로 이 나라 국민들은 뭔일이 터져야 제도를 바꾸는 민족인데요 그만큼 민족성이 깨어있지 못하는것입니다. 그냥 알면서도 사회의 문제점에 심각성을 그만큼 모르면서 간과하여 방관을 하도록 한심하다는 증거죠.....
@@user-ob9kw2xf3r일리는 있는데...... 지금 현재 나라를 더 망국으로 치솟아서 병자호란 처럼 더 막장을 저지르는것의 국힘당이 아니라 민주당인거 모르십니까 ?????
@@gahyunkim2301 긍까 일터지기 전에 예방을 못 한다는 거잖아요 ㅋㅋㅋ
그래도 저때는 선진 전쟁기술이라 해도 격차가 크지 않았고 냉병기 비중도 컸으니 정규군이 붕괴한 상황에서도 손실을 강요해 피해를 누적시킬 수 있었던듯.
뭔가 하고 싶은 메세지...., 있으신듯.
지금도 똑같다.
동기부여와 실전경험치.
2024년 12월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선조와 조정은 의병과 의병장들이 그대로 군벌로 변할 것을 우려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해왔고.. 이게 왜란 이후의 전쟁에서 의병들이 잘 일어서지 않았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후 구한말, 국권이 침탈 된 이후 다시금 의병들이 일어났지만 역시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과 자유시 참변이란 사실상의 내분으로 명맥이 끊겨버립니다ㅠ
그건 억측입니다
지금은 그들을 의병이라 부르지만, 당시엔 근왕군이라 했습니다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대부분 의병장으로 활동했구요
당시 조정에서는 의병들이 군벌화 되는걸 걱정한적 없구요, 단지 의병을 가장한 도적떼들이 창궐해서 그걸 처리하는게 문제엿죠
왜란후 대부분의 의병장은 공신록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곽재우 같이 성깔있는 의병장을 수령으로 임명해 줬더니만 자기 성격에 안맞다고 사퇴상소를 올리고 집에 가버린거죠
아니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집에 가버리면 중죄가 될터인데, 그걸 대신들이 커버쳐줍니다;;
그때도 유교의 사상대문에 의병대장이 모친상을 당하자 부하들 팽개치고 고향으로 달려가 상복입고 상을 치렀다는 일썰..
반대로 유교의 충효와 멸사봉공 사상때문에 유생이나 서민이나 의기투합하여 다 들고 일어난거..흑백논리에 빠지지 마세요.
2:21 사실 나라가 해준 것은 없지만 당시에는 일본보다 세율이 많이 낮았어서...
양반 욕하고 의병 칭송하지만...
집집마다 다 족보가지고 있고,
저마다 모두 예전에 양반이었다 주장한다는게 함정
남명 조식의.후예들 덕 뿐입니다.
4:10 고종후 최경회 김천일 전주성에서 전사한게 아니라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아나? 황진도 포함
맞아요~ 2차 진주성전투!!!
적의 후방에 규모와 위치를 특정할수없는 게릴라 병력이란.. 아무것도 안해도 그냥 존재 그 자체로 적에게는 엄청난 타격이지..
우리나라 참 희한한 나라네
지금이나 예전이나 참으로 불합리한 세상 ㅋㅋㅋ 지금은 전쟁이 나면 임진왜란처럼 열심히들 싸울가 하는 의구심이 드네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이야기하는 영상이 많이 없어서
이 채널은 꽤 유익한 정보를 주는 채널이고 특히나 최근에는 무인정변을 보고 있기에
그 시기를 대략적으로 가늠하게 되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영상은 의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제목에도 그 의병이 강한 이유를 말해서
제도나 무기등 우국충정같은 감상적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나올줄 알고 기대했는데 약간 아쉽습니다
지금도 국민 절반은 군인이야... 더러운 역사..
아~테스형 아~테스형
중간에 슬쩍 호란때 의병이 안일어난거 뺌. 이미 왜란때 경험으로 의병해봐야 득이 없으니 일어나지 않은거지...
국민들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세계 어느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명석함과 용맹함, 근면함과 단결력은 강대국들이 두려워하고 부러워 할만 합니다.
근데 애초에 의병하고 군사가 되었던 사람들은 지방 사족들인데다가 애초에 귀족들은 말타기 활쏘기 무예 등등 문무를 다 갖춰야 했어서 전투력은 평민들을 압도했죠
조선은 세율이 낮았습니다.
귀족연합의 고려보다 관료주의 조선이었으니까요
백성은 귀족과 조정에 세를 주었던 고려보다
조정에만 세를 납부하는 조선이 살기 수월했을겁니다.
고려때만 해도 대략 70~80%를 세금으로 떼갔습니다.
그러다 권문세족들이 몰락하자 이들에 대한 세금이 사라졌고
오직 조정에만 세를 바치는 30%정도만 납부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죠
일본은 여전히 봉건제 국가였고 70% 이상의 세를 납부했습니다.
저라도 곡괭이 들고 일어났을거 같습니다.
아무리
조선이란 나라가 ㅈ까타도
당시 일본 보단 덜 ㅈ깥았거든요
왜군들이 점령지의 조선백성들에게 특별히 50%의 세율을 적용해 주겠다고하니 백성들이 어리둥절 했다고하죠
당시 일본평민은 거의 농노수준였음. 이분말에 적극동의.문명도 당시조선이 전반적으로 우월해ㅛ음.
당시 일본평민은 거의 농노수준였음. 이분말에 적극동의.문명도 당시조선이 전반적으로 우월해ㅛ음.
세금을 수취하기전에, 먼저, 소득과 재산을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농업이 산업의 중심이었던 에도시대는, 그 조사를 '검지'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쌀의 수확량, 여타 작물의 수확등을 쌀가격으로 변환한 것을 합계하여 계산하였습니다.
'코쿠다카'라는 단위로 표시하였습니다.
현대의 농가는, 소득의 조사(신고)를 1년마다 행합니다. 그러나 에도시대는 제각각이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17세기 전반에 1회뿐이였던 지역도 많았습니다.
즉, 에도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200년전의 마을의 수입과 재산을 근거로 과세된 지역이 많이 있었습니다.
200년도 더 전의 수입의 40~50%라니, 꽤 가벼운 세금이지요.
막부의 영지에서는 1700년경, 실질세율 28%
1800년경에 20%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실질세율을 약 28%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8대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와, 세액을 비율로 하지않고 정액으로 하는 '정면법'등을 시행하여, 연공징수의 증가를 목표로 하였으나,
실질세율은 35%가 고작으로, 요시무네가 죽은 뒤에는, 다시 30% 이하로 내려갔습니다.
논밭에 90%나 세금이 물려진 마을도 있었습니다만, 이 마을의 중심산업인 해운과 과수원은 무과세 대상이었습니다.
(무사정권이 감세해주었다는것보다, 농민측이 산업을 바꾸어 절세(탈세?)한 것입니다.)
당연히, 막부와 각 번들은, '검지'의 재실시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렇지만, '검지'를 반대하는 백성들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단 한번 봉기가 일어나면, 마을을 관리하는 무사측의 책임자가 책임을 추궁당하거나,
평판이 안좋아져 출세에 지장이 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검지'의 강행은 어려웠던 것입니다.
18세기정도부터 현금수입을 추구하여, 농민들은 면화나 담배등 상품작물의 재배에 힘쓰게 됩니다.
농민들은,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상품작물을 팔아서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
이 상황을 눈치챈 각 번들은, 상품작물을 농민으로부터 강제적으로 값싸게 매입하여, 오사카등의 대도시에서 매매하여 번의 재정을 확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전매제'라고 합니다.
당연히 이 '전매제'에 반대하는 봉기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유형의 봉기가 에도시대 후반에 일어났던 봉기중의 대부분이었습니다.
※부유한 농민은, 가난함을 강조하는 글쓰기를 어렸을때부터 연습하여, 어른이 되어서 마을의 대표가 되면, 그것을
대관에게 제출하였습니다.
대관도 거짓말인걸 알면서도, 봉기를 방지하는 것과, 자신의 평판문제때문에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문서가 후세에 전해져, '가난한 농민상'이란 이미지를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 외에 자생가능한 감자나 잡곡을 많이 심어서 저장해두면 기근등은 일어나지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현금수입을 추구하기때문에, 돈이 벌리지 않는 일은 기피하게되는 법입니다.
츠가루의 기근은, 풍작을 예상해서 저장미를 팔아 큰돈을 벌었을때에, 시원한 여름이 찾아와서 식량부족이 되었습니다.
농민은 금화를 쥐고 죽어갔습니다.
카이의 기근은, 면화재배만으로 돈을 벌었지만, 면가격이 폭락하여 파산하여 굶어죽은 농민도 많았습니다.
정치가 가혹했다라기보다는, 서투른 화폐경제, 시장경제에 말려든 비극이라고 해야되겠죠
저러니일본편에서 싸운사람도있었지
중간에,.. 전주성이 아니라 진주성요. ㅎ
벼슬길에 오른 양반이 공자왈 맹자왈 하는것도 있었지만 야인으로 살아가면서 유학을 공부하고 수련하는 도인이 많았어요. 죽을 줄 알고 싸우는 근원은 다들 정신적으로 반드시 해야 할것을 염두해 두고 살아갔습니다 아니면 짐승과 다를바없기에 불교도 마찬가지.
정규군 장군들과 양반들이 자기몫을 못하고 전쟁시작과동시에 다도망간 역사에 먆이화가나고, 전쟁때마다 항상 백성들을 핍박 과 이용에 대상으로만 대햇던 나라, ㄱ리고 그 나라에 왕족, 정치, 군부 사람들 과 상위층만 을위해돌아가던 근대화전에 나라를 지키기위해서 싸워줫던 의병님들에 아그리고 625때 의병대 와 학도군분들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글고 이 비됴도잘봣어요 크리에이터님
😮😢😢🎉🎉
김희철은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장수중 하나입니다.
의병들에게 명예직이라도 벼슬도 주고 부역도 면해주는 식으로 대응하면서 자기 편으로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죠.
대부분 그렇게 했습니다. 임란 이후 선무 공신이 거의 1만명 가까이인데, 대부분 그 공신들이 누구겠어요
삼치 문약 조선에 너무 많은걸 바라시네요
이순신도 국문해서 백의종군시키는 나라에 뭘더 바랍니까
작금의 대한민국도 매한가지.......... 에휴
@@수집쟁이드라하카 역사를 팩트로 보시길...
선조때 이순신을 괜히 파면시킨거 아닙니다
1.사후선 3척이 소실되고 병사들이 죽었는데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는걸 선조가 커버쳐줌
2.남해를 순시중인 광해군이 이순신에게 만나자고 사람을 보냈는데 이순신이 바쁘다며 거절함
3.육군이 왜군영에 불지른걸 이순신은 자신의 부하들이 한거라 거짓보고함
4.남원에서 징집중이던 이순신의 부하가 그곳 병방을 죽인일로 백성들 원망이 자자하다는 상소가 올라옴
5.원균이 아들을 공훈명단에 거짓으로 올렸다며 모함하다가 체찰사 이덕형에게 걸림
그러다가
다대포를 출발해서 서생포로 가는 가등청정을 공격하라는 조정을 명을 거부하다 체포된거임
그동안의 공이 있기에 그나마 백의종군 시킨거임
@@모카경쟁빵집
팩트라...................
2.은 그게 이 주제와 무슨 연관이고
3., 4., 5.는 금시초문에
만약 역사기록이 있다면 진작에 알려졌을 텐데 없죠
진짜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 출처는 어떻게 되는지?
@@모카경쟁빵집
또한 하성군이 이순신을 파직시킨 상황은
왜군의 반간계와 원균의 모함, 그리고 하성군 본인의 졸렬함과 권력만 지키려는 옹졸함이 빚은 사건이죠
원균을 치켜세우다 이순신이 파직되어 원균이 큰소리만 치지 명령대로 못 움직이고 적을 공격 못하니
권율이 원균을 곤장치고 하성군조차 쉴드를 쳐주지 않아 공격하다 칠천량에선 패배하고
하성군이
이것은 실로 하늘이 돕지 못해서다
란 망언을 내뱉죠
본인이 이순신 파직시키고 원균에게 명령해서 공격하라 했으면서
이제와서 하늘을 탓한다?
어처구니가 없죠
무한반복
그 이후도 지금도 변한건 하나도 없네요
영상에 일부 의문점이 있어 이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이는 수정적 첨언이 아닌 단순 지식간의 충돌에 대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이니 오해는 없기를 바랍니다.^^)
1.조선 전기,그러니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은 농병일치를 지니는 부병제 국가이기에 의병이라 한들 그 지휘관이 대부분 문인 출신의 양반일 뿐이지 무장과 통솔 체계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관군과 인적 질에 차이가 거의 없기로 압니다. 그렇기에 특별한 훈련이나 조련 없이 곧장 전장에 무장 만을 갖춘 채 뛰어들 수 있었구요.
2.백성들이라고 대부분 의병에 참여한 것은 아닌걸로 압니다. 이는 왜란 이후 기록들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선조나 세자들에 대한 민심이 바닥을 들어내어 산으로 잠적,한성 내 폭력 활동,왜군에 항복 하거나 부역,협조와 왜군으로서 참전,직접 일본에 건너간 사례가 있을 만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컸습니다.
남부 지방,특히 전라도를 중심으로 의병이 결집한 이유는 전라 땅에 왜군 병력이 전쟁 초에 진입하지 않았고,한성이나 한성 이북 지역들과는 달리 왕이 피난하는 것을 듣거나 본 사람이 거의 없기에 순수한 저항 의지로 의병에 참여할 수 있었죠.
3.양반 중 대부분이 도망 갔다는 표현은 너무 과장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리 표현하신 이유는 왜군의 진격 경로를 보면 쉽게 헤아릴 수 있는데 왜군의 전략상 최단 경로로 한양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전라도를 제외한 경상,충주(탄금대 방면),한성 이후 선조의 피난길을 따라 평양까지 일직선으로 빠르게 북상했기에 이러한 오해가 생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왜군의 진격 속도가 매우 빠르고 가는 족족 관군이 격파 당했기에 의병 봉기가 일어날 명분과 인적 동기가 부족하고(희망을 쥐어주고 백성들을 규합할 사기가 부족),경상과 경기 땅의 백성 대부분이 왜군 손에 떨어졌으니까요.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부분 중 하나가 양반은 놀고 먹으며 공부만 하는 썩어빠진 족속으로 아는 분들이 계시는데 양반도 사람입니다. 오히려 왜군 주력군이 북상한 이후에는 각지에서 양반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이 대거 봉기했으며 이는 양반이 지닌 이론적 병법 지식,노비를 비롯한 인적 자원,대규모 병력을 보조할 식량 자원 등에 기인합니다.
실제로 천민 또는 중인을 중심으로 한 의병은 거의 없었죠. 그들이 일으키고 싶었어도 돈과 장비가 없으니 역부족이었을 테지요.
4.조정은 의외로 왜란 이전 남부지역에 철저한 방비를 갖춥니다.(물론 부산포가 뚫리고 탄금대에서 주력군이 전멸 하지만..)
류성룡 등의 고위 임원들 또한 일본 땅에 보낸 첩자와 대마도주,부산의 일본인들에 의해 곧 풍산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선조에게 고한 상태였고 북방 지역의 장수를 대거 전라 좌,우수영,한성 인근 지역에 파견 시켜 군을 조련 했으며 무리한 방비 조치에 남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폭동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장병기의 길이 차이(검과 창 모두 일본이 길이 면에서 우세),전국시대로 단련된 왜군에 비해 조선군의 대부분은 실전 경험이 없었으며 덕분에 병졸들의 사기가 매우 낮았고,신립의 주력 관군(병력만 많을 뿐 직속 기병대를 제외한 대부분이 여러지역에서 모여든 오합지졸)이 탄금대에서 왜군 조총부대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다 전멸하자 중남부 지역의 대부분 관군이 흩어지고 말죠.
5.영상의 자체적인 창작적 영역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장수의 무장은 영상에서 보여지는 어린갑이 아닌(물론 두정갑도 표현 하셨으나) 두정갑,찰갑,피갑 등이 알맞은 것으로 압니다. 또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상투를 들어내고 다니지 않고,천민의 경우 초립과 패랭이,방갓,중인의 경우 대가 높은 흑립,양반은 일반적인 흑립 등을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복식인 것으로 압니다.
6.불교 탄압은 여말선초에 중심적으로 이뤄졌으며 중기에 이르면 승려는 형식적으로 천할 뿐 딱히 핍박 받거나 탄압 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려에 비하면 매우 한정적이기는 하나 승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대부분 좋았습니다. 그저 하나의 종교로 바라봤죠.
승려들이 살생을 감행 하면서까지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은 사찰이 공격 받자 이를 수비하기 위해 승병을 조직하면서 본격화 되었는데 그들이 의병 또는 관군과 합세하여 공을 세운 것 또한 단순한 저항의식 때문이 아닌 자신들의 터전과 백성들을 위해 나선 것 같습니다.
7.의병은 왜군에 비해 전력이 매우 약했습니다. 이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근접 장병기의 열세,실전 경험의 부제 등이 증명하며 실제로 의병이 관군에 합세하여 공을 세운 경우는 많으나 단독 병력으로 왜군 주력부대와 견주어 이기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작은 습격이나 첩보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는 했으나 왜군에 비해 확실히 열세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8.위의 사항들을 종합하여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의병 봉기의 중심은 양반 이었으며 당시의 조선은 부패 상태가 일부 분들이 주장하시는 수준의 쓰레기 국가가 아니었고,백성들의 정서와 의식 또한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볼 수 있겠습니다.
신분 질서 또한 왜란 이후 무너지는 만큼 당시에는 나름의 사회 체계와 행정력이 뒷받침 되는 국가 였다고 봅니다.
물론 의병을 폄하 하거나 그들의 공을 낮추려는 의도가 아닌 단순 의병 봉기의 주요한 원인과 이해관계가 영상에 설명된 부분과 다소 차이를 보여 첨언 했습니다. 그들이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은 맞으나 엄연히 따지자면 이를 '가난한 백성들이 무능한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는 식으로 포장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될 것 같기도 하구요.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감정적이거나 주관적으로 해석 하기 보다도 사회현상의 원인과 이면에 대해서 배우고 알릴 필요가 있다 느낍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글이 굉장히 기나 글 하나하나에 지식이 있고 탐구의 열망이 있는게 보여집니다
몇가지 반론을 하자면
1.의 반론
=> 당시 농병일치 부병제로 하나 대립군이 횡행할 정도로 군인 확보가 어렵고
신립의 6~ 8천의 병력을 모을때도 옆구리에 책을 낀 유생도 보이고 늙은 노인도 있고 병사 한명 한명이 절망적인 상태인데
체계상 문제가 없어 보여도 현실은 아니기에 군사력의 실태가 처참한 지경이죠
2.의 반론
=>딱히 없습니다 대개 맞는 말이라 보여집니다
3.의 반론
=>당시 조선의 양반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우리가 흔히 아는 의병장들이
조선의 양반 전부는 아닐겁니다 그렇다면 전체 양반에서 얼만큼의 양반이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 했냐인데
그게 확실치 않아 단언은 못하나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면
흔히 인식하는 양반들은 도망갔다는 말이 현재로는 맞아 보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데 윗물이 더러운데 아랫물이 깨끗하진 않겠죠
또한 당시 원군으로 참전한 다양한 명나라 사람들의 기록
특히 경략 송응창의 기록에
조선의 주경야독만 하지 다른 재주는 없다, 선비는 옆에 기생을 끼고 시만 읆고 국책을 내던졌다
라는 기록도 있기에 놀고 먹고 무능한 양반의 인식이 그리 괴리가 있지는 않아보입니다
하지만 재력이 있기에 의병을 모으고 의병장이 된건 맞아 보입니다
당시 의병장이 양반 밑의 계급이 없었고(완전히 없는건 아니지만) 후일 구한말에 상민이나 평민 의병장이 많이 보이는것도 아마 재력이 있는 존재들이 많아진것도 한 몫 했을겁니다
4.의 반론
=>대마도주가 소요시토시와 승려 현소가 직접와서 까딱 잘못하면 전쟁이 일어날수 있다 계속 시급함을 알리고
황윤길과, 김성일로 대표되는 사신단을 보내고도 전쟁은 나지 않는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니
임진왜란 초기에 그렇게 속절없이 패배한거죠
솔직히 본분을 다해 대비한건 이순신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고 봐야죠
5.의 반론
=>이또한 대체로 맞다 봅니다
6.의 반론
=>조선초기에 억불정책을 피나 왕과 왕족들이 불교에 빠지고 이용도 하는 사례가 있어 본격적이진 않으나
조선 10대 연산군 무세 강력한 탄압을 시작으로 중종반정 이후 사람들의 주도로 더욱 탄압받기 시작하고
조선 13대 명종 암세 문정왕후와 승려 보우의 결탁으로 잠시 흥하나 오히려 사대부들이 강력한 반발을 맞아 이후 더 탄압을 받죠
율곡 이이가 불교에 빠진 전적이 있다, 이거 하나로 엄청나게 비판하는 상황이니 당시 불교의 시각이 어떤지 알수 있죠
물론 민간은 계속 좋아하나 양반계층에선 철저한 탄압이 이루어지고 그 양반계층이 조선 사회를 움직이니 대우가 좋을리 없죠
그러나 승려들이 의병이 된 동기와 원인은 얼추 맞다고 보여집니다
7.의 반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긴 한데 대표적으로 김화전투는 열세의 병력인 산척(사냥꾼)으로 일본군의 직군을 저지하고 패퇴시킨 전투라
대규모 전투가 아예 없다고 하기도 말할수는 없죠
8. 결론
필자의 견해는 흔히 인식하는 조선의 부정적 이미지가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고
양반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도 천차만별이나 이또한 세간의 그 부정적 인식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아 보입니다
여기서 괄목할건 의병들의 대한 시각이죠
'가난한 백성들이 무능한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 프레임이 틀린건 아니나
정말 의병들이 그저 무력하고 악전분투만 하는 집단일까?
정말 나라에 버림 받으나 우국충정만이 이유가 되어 싸운걸까?
흔히 의병들을 예비군의 비유하는데 정말 그럴까?
의병들의 무기체계는 어떨까?
좀더 심층적 연구가 필요한데
의병을 얘기하면 조선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도구나 일본과 다른 우수한 시스템및 가치관이다 자랑을 위한 도구로 쓰이기만 하지
좀더 구체적 이야기는 하지 않아 답답합니다
@@수집쟁이드라하카 친절하고 격식있는 반문에 감사드립니다. 반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본인이 충히 이해할 수 있고,관점 또한 그르친 것이 없기에 제 지식에 더하고 뺄 것이 늘었습니다. 님 같은 분들이 역사를 널리 알리셔야 하는데 정치와 역사를 엮고 무지성적으로 역사에 현대의 잣대와 식민사관을 대입하는 이들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늦었지만 평안한 하루 되시지요. ^^
@@수집쟁이드라하카 4. 반론의 반론. 그당시 바다건너서 15만이나 드랍시키는건 상상하기도 어려움. 원나라 시기 2차 일본 원정때 15만을 보냈다는데 달리 말하자면 원나라급 국력이 아니라면 15만이나 드랍시킨다는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단것임.
@@SeaKing_Bonobono
맞죠
여몽 연합군이 일정벌을 1, 2차에 걸쳐 실행할때 상륙하는 걸로도 곡절이 있었죠
근데 그게 무슨 반론이란 건지?
5:34 묘청 오랜만이네 영규로 환생했구나
차라리 사병제도를 부활시켜서 국력을 강화시키는것도 좋지만 결국 왕권에 위혐이 되니까 안되고
진짜로 의병들이 저렇게 고생해도 30년뒤에 병자호란으로 더욱더 피폐해지고 경신대기근 까지 일어나니 진짜로 망하지 않는게 더 신기함
고려에는 양규, 조선에는 영규....
즈은하아~~그리웠나이다ㅜㅜ
@@facstory 제가 그리웠던 것 치고는 여전히 이상한 자가 덧글란에 상주하고 있군요. 제5공화국만 좋아하는, 그리고 일본을 우리의 남매라고 주장하는 그 이상한 자 말입니다. 이런 자가 활개치고 있는 곳에 덧글을 남기고 싶을까요?
@@이-방원저도 눈꼴시렵긴 하지만 계속 저리 굴다가 차단이나 먹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방원사극이 더 비정상 아니노?
그리고 일본은 남매 맞잖아
@@이-방원제5공화국 모르니?
사극게이야?
이렇게 어렵게 지켜온 나라를....
정규군은 게릴라전을 하지 않았지
치욕스러운 형태라서
의병은 정규군이 아니었으니
게릴라전을 하더라도 ....
정규군은 죽더라도 그런 전투는 용납하지 않아..
김천일등 진주성에서 전사한거요. 전주성이 아니라.
하지만 의병을 일으키고 지휘한것도 양반
그럴 수 밖에 없음. 병역의 의무가 있는 자들은 관군으로 끌려가야 했고, 행정력이 무너진 곳의 복구된 부분에서 관군 복구를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는 자들은 양반이 유일했기 때문임. 그리고, 솔직히 의병숫자를 보면 양반들이 많다고 볼 수 없는게 승려들도 많았고 이건 그나마 지역적 네트워크가 잘 살아있는 조직과 그 조직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지(사찰)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거. 의병을 이끈 의병장은 근거지와 네트워크를 유지할 재력이 있는 양반이 유리했기 때문에 많았던 거.
@@조성헌-q5y 당시 양반은 법으로 부역 군역 세금이 면제인 나라다~.~
민초들이 지켰고 민초들이 죽었다
죽어간 백성과 군졸들의 이름은 없다
@@뮤지션-z3q 일단 돈이 없으면 의병도 못일으킴
당장 의병들 먹을 양식과 무기부터 어떻게 구하겠음?
그렇다고 관청을 털면 그냥 도적때 되는거고
그렇기에 돈 좀 있고 지역에서 콧바람 좀 쌘 양반들이 의병들을 일으킬수 밖에 없었음
@@뮤지션-z3q게다가 양반의 교양으로 병서를 공부하며 군사학을 배운 양반들이 많았기에 전략,전술적인 안목도 있는 이들도 많았고
조헌은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였습니다.
충정도 및 전라도의 여러 장수들과 협력하여 대규모 연합군을 결성하여 금산성을 탈환한다는 최소한의 상식은 갖춘 구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위한 각 장수들과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금산성을 탈환해야할 전술적 정치적 당위성은 차고 넘쳤지만, 현실적으로 고경명의 패배로 인해 금산성 공격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았고, 지금은 일본군 전력이 우세하니 공세가 아니라 수세를 취할 때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수였습니다.
장수들의 합의를 끌어내는데 실패하자 조헌은 자신이 먼저 금산성 공세에 나서면 협공을 논의했던 다른 장수들도 소식을 듣고 달려와주리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알려진 것과 달리 조헌과 영규의 부대는 금산성을 공격했던게 아니라 금산성에서 조금 떨어진 지형에 진을 치고 일본군과 대치했습니다.
조헌-영규의 부대를 발견한 일본군은 조선군의 대공세가 벌어진 것인줄 알고 처음엔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지만 사방으로 척후를 보내보니 조헌-영규의 2천에 못미치는 병력이 전부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야음을 틈타 성문을 열고 나와 조헌-영규의 진형을 삽시간에 포위했습니다.
조선군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본군의 야간 전술 보행에 제대로 당한 조헌-영규였지만 포위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전멸할 때까지 항전했고 조헌-영규 부대원 대부분이 전사하여 조선에서 충의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현시대 전쟁나서 의병이 생긴다면
그 의병들은 예비군이네
끝까지 친일청산 애국지사복권을 해야 나라의 도덕이 바로선다
군사제도 때문에 임진란 때 크게 고생했다고 봅니다. 당시 군사제도가 소규모 침략에 맞추어져 있어 20만의 대규모 침략에는 적합하지도 않고, 백병전을 정예 기병을 제외하면 소홀히 했기에 발생한 일이죠..
저 당시 백성들이 불쌍할 뿐이죠😭
지금도 별다를 바 없음. 강제로 끌고가고 만 40 될때 까지 안보의무 지어주면서 보상도 따로 없고 ㅋ 정도 차이만 있을뿐 이 한반도는 별 달라진게 없음.
원래 조선의 양반들은 초기에는 그 수고 적었을 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양반인게 아니라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나가거나 집안이 아주 잘살거나 하지 않으면
집에서 글공부만 하다가 집안이 궁핍해지면 생계를 위해서 양반을 버리고 장사를 하거나 다른직업으로 전향하기도 하면서 양반층이란게 유동적이였는데.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는데 공을세운 자들을 우대해 주면서 그들의 자식들까지 벼슬을 세습 할수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는 훈구층이 생기면서 썪기시작했던거고.
의병 문제도. 열등감 덩어리였던 선조가 자기 권력을 위해서 전쟁후 논공행상에서 의병들을 폄하하고 제대로된 보상을 해주지 않으면서 모든 민심이 돌아서게 되고.
병자호란때는 전국의 백성들이 침묵하고 눈감아 버렸기 때문에 대대적인 의병운동이나 이런것도 없었고. 인조가 성에 갇혀 죽니사니 해도 니들만의 리그라고 선을 긋고 만 계기가 되었던겨죠.
결국 조선이란 나라를 근본부터 썪어빠지게 만든 가장 큰 해악들. 민족의 암적인 임금들이
조카죽이고 훈구파란 세습 양반층이란 거대 세력을 출범시킨 세조. 오직 열등감 덩어리에 정신병자였던 선조.
머리나쁜데 눈치조차 없는게 힘도 없어서 신하들 말에 벌벌 기면서 안 일어나도 될 전쟁으로 나라를 전쟁터로 만드는건 물론
신하들이 힘을 모으면 왕을 가지고 노는건 물론 죽일수도 있겠다는 확신을 심어준 인조.
자기 권력지키고 부귀영화 누릴려고 중전이 일본 낭인들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것도 외면한건 물론 나라를 망하게 하고도 남탓만 미친듯이한 실질적인 한일합방의 주역 매국노 고종
😱😱😱😱😱😱😱😱😱😱😱😱😱😱😱
남명 조식 선생도 있지요.
조선시대부터 이 나라는 희생하면 뒤통수 맞아
선조 그가왕이란게 열받게합니다.
몽둥이로 선조를 찜질하고싶다.
그 선조가 일개 군관이던 이순신을 몇계급 특진시켜서 총사령관을 시킵니다. 이런 안목과 결단은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닙니다.
의병의 수뇌부 대부분이 양반들 중심이 이었고 자신 고을에 사는 자기 친인척들, 농민, 노비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군 규율을 적용해 준관군에 해당하는 전투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음. 대부분 관직에서 물러났거나 과거를 봤던 자들이었고 이들은 나중에 관군에 재편성되어서 활동했음 의병으로 쭉 간게 아니라 뭐 이젠 인터넷에 조금만 쳐도 주루룩 나오는 정보를 다 틀리고 있네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세요 영상 만드는 거 참 쉽네
이순신도 힘이 너무 강해지니 의심해서 그 힘을 뺏은 인간이 선조이니 뭐. 지 살려고 명나라로 도망갈 생각만 하던 인간이 참. 조선은 기득권을 지닌 놈들이 썩어도 너무 썩었었다.
그당시 조선의 인재가 가장많고 드러나던 시기임. 조선이 문재가 아니라. 선조가 문제였음. 탕평책이란 명목으로 신하들 이간질하고 요심많은 놈들 이용하고 국체를 약화시킨건 애초 왕권명분이 약한 선조였음. 런승조.런승만.지금윤썩렬 같은이가 결국 나라를 망침. 지금은 이명박.바그네 윤썩렬 뽑는 어리석은 2찍이 더 문제.
저 의병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나 봐라
무능한 저 선조 치가 떨린다
덕분에 병자호란 때 의병 얘기 나오던가
평소 농사로 단련된 근육. 등산으로 단련된 근육.
흠...재미난 내용이긴 하지만. 실제와 다른 부분이 있어 첨언을 좀 하겠습니다.
임란 당시 전체 의병들의 최소 2/3는 조선 정규군(제승방략체제에 의해 지정된 장소에 모이던 지방군이 의병으로 그대로 전환)이었고, 남은 1/3도 일반 양인이었지만 거의 예비군이었으며, 노비나 천민 출신은 얼마 안되었습니다. (임란을 기준으로 조선을 전후기로 나누는데, 임란 직전 조선은 조선 전기로 봐야 하며, 이때는 노비나 천민의 비율이 거의 10% 내외 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노비나 천민 출신 의병 비율은 높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노비나 천민이 의병이 된 경우는 비율상 매우 낮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비율상 양반의 수가 매우 낮아보이지만, 이들 의병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며 군량까지 보급한게 지방 양반들이라 양반들이 의병에게 지원한게 사실상 엄청나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임란 직전 양반의 비율은 전체 조선 인구 중 2%가 채 안되었던걸로 기억하네요)
의병의 활약이 뛰어났던 것은 분명 맞지만, 그건 특권층이라 불리우던 양반들이 나름 조선에서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게 맞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선조 이놈이 임란후 공훈 서열을 나누면서 개씹창을 낸게 이후 계속 문제가 된거구요.
우리민족은 나라에 받은게 없어도ㅠ나라가 어려우면 목숨을 아까워하지않고 싸우는 신기한 민족입니다
나라가 힘들어서 싸웠겠습니까? 가족들 살릴려고 죽자고 싸웠겠죠
의병은 딴게 없습니다. 내가 안지키면 내 가족이 죽고 적에게 내 마누라가 강간당하고 내 자식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안지키고 배기겠습니까?
다른 나라도 똑같다 별 개 다 신기하네 국뽕도 정신병이지
양반들은 가족도 버리고 도망가고
신하들은 왕 선조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의병활동한 양반은 소수였음.
군사훈련도 안받고 글만 외운
양반은 일본군과 전투하기 힘듬.
평민들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해서 싸워야
될 처지였음.
스코틀랜드도 평민들이 무기들고
잉글랜드와 싸움.
진짜 개열받네 ㅋㅋ
근데 의병장들은 양반 아님?
일본군은 100년간의 내전에서 살아남은 정예병들어있고 신무기 조총까지 동원했고 수많은 이름난 장군들이 있었다.
조선군은 그런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시작 후 4개월만 밀렸을 뿐이다. 전쟁준비가 안되어 있었고 15만 군사나 되는 대군의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예비대까지 죄다 동원했으므로 군사는 더 증가했다.
하지만 그 이후 모든 전투에서 조선군이 주도했고 대부분의 전투에서 군사수가 10배나 많은 일본군들을 상대로 싸워서 이겼다.
웅치 전투, 이치전투, 행주산성 전투, 연안성 전투, 진주성 전투 등 모든 전투에 일본군은 10배의 군사를 동원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이 모든 전투는 조선군이 주도했다. 조선군의 전과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팩스토리님 역사를 기반으로 영상 만들어 주셔 감사합니다.
하지만 진짜 역사를 알고 영상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다시 한번 글 올립니다. 유튜브에 책보고 채널 가셔서 고려의 강역 및 우리 삼국의 강역을 한번 참고 하시면 매우 유익한 정보일 거에요
역시 헬조선
어떻게든 자신의 억지논리를 주장하기 위해 왜란 당시 활약했던 관군 장수들은 애써 외면하고ㅋㅋㅋㅋㅋㅋㅋ
전쟁 당시 일본군은 '왕을 빠르게 잡는다' 는 일념으로 한양을 향해 고속으로 전진했고, 그 빠른 속도에 조정도 관군도 제대로 대응할수없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조선의 방비 시스템이 후달려서 그런게 아니라 일본군이 비정상적으로 빠른거였어요. 흔히들 의병과 수군이 다 했고 관군은 뭐 하나 한거없다고 착각하지만, 관군에게 정비할 시간이 주어지자 의병도 관군지휘로 들어가 대부분의 승리는 관군이 했습니다. 의병과 관군은 뚜렷하게 나뉜 조직이 아니었거든요.
게다가 전국시대 경험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글자 하나 제대로 못읽는 백성들이 어떻게 게릴라로 치고 빠지면서 피해누적할수 있었을까요? 조선시대 선비가 무슨 책만 읽는 책벌레인줄 아는데 활도 잘쏴야하고, 전법에도 능통해야 하고, 지리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등 모든 면에서 육각형 만렙을 찍어야지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선비, 양반이었습니다. 의병의 지휘관은 양반들이었고 사람들이 "책만 읽고 현실은 모르는 놈들" 이라고 취급했던 양반의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게릴라였고, 전법이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지휘라는건. 영상에서는 백성들이 자기가 사는 곳 지리를 잘 알고 있어서 그거 이용했다고 하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의병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통솔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양반이었으니 말이죠.
후반부에 이몽학의 난이 나오는데, 이몽학은 어리석고 아무런 재능이 없었던 인물이었고 성격도 포악하고 불량하기까지 해서 호적에서 파일 정도로 망나니였습니다. 그런 놈이 백성들을 선동해서 몽둥이를 들게 하고 계를 꾸렸습니다. 김덕령도 억울하게 죽은것처럼 나오는데 안그래도 군졸폭행과 사적제재에 의한 살인을 일으켜서 문제 많은 사람이었던걸 선조가 '그래도 능력은 좋은 놈' 이라서 살려둔거 역모에 언루되고 나서야 체포됬고, 그마저도 선조가 안죽이겠다고 고집부리다가 앞선 군졸폭행과 사적살인이 문제되서 결국 죽인겁니다. 이몽학은 죽어도 할말 없는 사람이었고 김덕령은 워낙에 이름이 유명하니 반란 수괴들이 사람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도용된겁니다. 누명을 쓴거야 억울하지만 군졸폭행, 사적제재는 하나도 억울할거없습니다 자초한거니까요.
그리고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조선시대 지배계층인 양반도 잘 지킨 덕목입니다. 조선은 유교와 성리학이 통치이념으로 소프트웨어에 깔린 나라고, 특히 유교는 '군자라면 군자다워야 한다' 를 강조하니, 의병장들 대다수가 양반이었다는 것과 선조가 등신짓하는거 돌려까면서 맥일 정도로 양반들은 동시대 다른 지배계층에 비하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의심병자에 책임감마저 없던 선조가 등신이었던거지 '양반은 전부 개새끼다' 라고 하기엔 비약이 너무 심함. 조선만큼 논공행상 빡시게 한 나라는 없고, 실제로 많은 의병자들이 철저하게 추려낸 공에 따라서 그에 걸맞는 상을 받았습니다. 조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앞뒤 꽉 막힌 유교탈레반 국가가 아니에요. 그런 국가였으면 500년 동안 존속못했습니다;;
왜란의 조선 양반, 백성들의 모습과 지금 대한민국은 별다른 차이가 없는거같아...
사산대사가 아니라 서산대사.
일각에선 의병이 평시에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 복무한 예비군 성격이 강하기에 전투력이 나쁘지 않다라 하던데
그게 진짜인지 궁금하고 무기체계나 지휘일선등 연구할게 많은데
툭하면 그들의 우국충정이나 나라에게 혜택이 없으면서 자진해서 의병이 되었다
이런 감상적인 말들만 해서 답답합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거든요
0:26
조헌 "그래도 나는 가야합니다."
영규 "어쩔 수 없군요. 끝까지 가봅시다."
이 상황에 이 소리가 보통사람들이 할 수 있는 소리냐고...
상황인식이 안되는게 아니라 그냥 해야되니까 한다...
제일 어려운걸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함
의병도 대부분 양반들이었 습니다
의병을 조직하고 주도한게 대다수 양반들이었죠.
지금 터지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사산대사가 아니고 서산대사 ㅎㅎ
❤👍
잃을게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두려움도 일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고 비록 체계적 군사훈련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 전투력 또한 보통 생각하는 의병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을 것입니다
유럽은 전쟁나면 제일먼저 왕족 귀족들이 나가서 싸웁니다,,,그게 곧 가문의 명예라서,,
의병들도 기려야하지만 더 자세히 임진왜란을 들여다보면 승병이 의병들 보다 훨씬 잘 싸웠음... 곽재우 같은 경우는 너무 능력이 좋은 특이 케이스임...
곽재우의 의병은 초기엔 50명에 불과했으나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이 곽재우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그를 지원해주어 수천의 의병들이
곽재우 밑으로 모이게 해주었죠
조선시대 군인들의 마인드가 얼마나 개차반이었냐면, 타지에서 죽으면 혼령이 고향땅을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이 원혼이 된다고 해서, 징병되면 외지에서 죽을바에 고향에서 죽겠다고 하고 자살했다고 함. 진짜 조선시대는 알면 알수록 한심한 왕조였고 애진작에 망해 없어져야했던 왕조였음
일본이 조선왕족 다 잡아서 담가버렸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