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져버린 노도부대로 투입되었던 한명입니다. 출발할때 유서쓰라고 갑자기 중대장이 종이를 내밀던게 생각나더군요. 지나고 보니 중대장도 제정신이 아니였을꺼란 생각도 들고... 하여튼 잊지못할 추억으로 남았네요. 복무기간은 짧아졌지만 나라를 지키는 노고는 같을꺼라 생각됩니다. 모든 국군 장병들 화이팅! 2년전에 쓴 댓글인데. 밑에 달린 댓글보니 한번도 본적없는 분들이지만 다 같이 고생하면서 병역을 수행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50인데 짧았지만 양구에서 보낸 젊은 청춘이 그립기도 하네요. 모두들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랍니다~
당시 작전에 직접 동원됐던 1인입니다. 그때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유서고 뭐고 없이 투입됐었던걸로 기억하는데요. 나중에 안 사실은 이미 각 고향집으로 귀하의 자녀가 현 무장공비소탕작전에 투입되었고 무사히 잘 귀가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편지가 갔었다고 하네요. 당시 작전을 생각해보면 진짜 고생 많았던 기억이 나네요. 낮엔 수색정찰, 밤엔 매복, 낮엔 졸음과의 싸움, 밤엔 추위와의 싸움... 이기자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때 함께 고생했던 전우들이 생각나는군요.
22사 출신 입니다 저때 고생 고생 개고생 했지요ㅎㅎ 결국 한명이 안잡혀서 그후로 수색 매복 작전이 생겨서 한달에 한두번씩 야외 나가서 밤새 매복 하던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는 왜 하필 내가 군대 있을때 넘어왔냐 이쉐리들아 하고 욕 많이 했었죠 당시 희생당한 군인및 민간인분들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겠습니다..
이미 우리국민(군대갔다온 남자가 있는 경우)은 이미 거의 군사전문가입니다. 무장공비침투라 했지만 잠수함1대 침투라는 것에서 이미 병력수가 20여명정도라는 것이 파악 되었고 그들이 도로를 따라 차량을 탈취하거나 한게 아니라 대거 산으로만 간 것으로 보아 작전에 의한 침투가 아니라 비상상륙이라는 것도 상당수가 알았습니다. 거기다가 수색도중 집단자살이 나왔을 때 이건 무장공비의 본격적 침투가 아니라 전투조가 아닌 사람들의 자살이라는 것도 예상이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군의 작전능력이 허술하고 특전사 마저도 헬기에서도 천천히 내려오다 조준사격당해 죽고 했지만 이미 우리군이 몇개 사단이 출동한 상태였기에 도시로의 진입은 어렵다 보아 안심이 되었었습니다. 상황에 대해 대충 파악이 끝났기에 국민들 동요가 없었던 것이지 안보불감증이나 이런 것은 아닙니다.
04군번인데 저 사건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밤에 불시에 상황걸어서 다 몽둥이고 삽이고 뭐든 들고 위병소에 집결하게 했었고 진짜 뜬금없이 진짜 상황인거처럼 당직사령이 유서 작성하라 그러고 단독군장 시켜 연병장이나 위병소 또는 수송부연병장 앞에 집결하게 했었음 공비 침투 상황 걸고
@@user-oh4jc9uk6x 계급장 사병은 노란색(야전잠바는 붉은색), 이름도 노란색 자수 오바로쿠 그것도 맨날 다림질 해대서 뺀질뺀질 광이나서 야밤에 달빛 비추면 반짝반짝 굳 사냥감이었음. 나도 현역때 그런 점을 소대장에게 건의한적있는데 그런걸로 걱정은 없다고 개솔 해댔었음.장교는 더했음 하아얀색 계급장 ㅎ 육군은 진노랑 해병은 밝은 노랑 해군 해병 동일 공군은 흰색 였음.
원래 작전상 일반 부대는 어느 지점을 막고 그 주변만에 대해 경계를 서는 경계병력이지 대부대가 수색나가고 하면 오인사고도 나고 해서 안되는 것입니다. 수색을 전문으로 하는 수색대가 있지 않습니까.. 96년 실전상황에 이런 작전개념도 무시되고 우왕좌왕 했다는 증거입니다. 실제 오인사격이 발생해 병사가 죽었었잖아요 장교들이 떼로모여 경계도 소홀히 하며 개활지에서 작전회의 하다 대령을 비롯한 수많은 장교들이 몰살당했었고 ...
그런데, 저 때 제일 욕먹어야 하는 건 방송사 같은 언론사들 이었음. 엠바고가 안돼서 작전 내용이 그대로 언론에 나가던지, 작전중인데 카메라 들고 들어오고, 간첩들이 라디오 뉴스로 그 내용을 들은 공비들이 그에 맞게 도주경로를 적절하게 변경하며 수색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럴 정도인데. 이게 실화임.
이때 중학교 1학년이었고, 강원도 용평스키장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보통 2박 3일로 가서 둘째날 밤에 캠프파이어를 하는데 하룻밤 자고 둘째날부터 모든 일정이 스톱. 무장공비가 쳐들어왔다고.. 숙소에서만 있는데 뭔가 긴박하게 헬기들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날 밤에 캠프파이어는 군사작전에 해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취소되었고, 셋째날 용평을 떠날때 서울로 향하는 버스안에서 강원도쪽으로 계속 진입하는 군인들이 탄 트럭을 봤었다. 그리고 계곡을 날아다니는 아파치 헬기들까지 봤었지.. 그때 진짜 전쟁나는건가 하고 개쫄렸었음
이당시 저는 초등학교 1학년인데 기억이 안나네요. 96년 9월에 난거 보니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반년이 지난거말곤... 근데 엄마가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예전 전쟁날때 강릉 초당에서 북으로 넘어간 사람 그렇게 많다고 하고... 심지어 휴전 후에 어느 집은 알고보니 간첩이라고... 지금도 강원도에 산불나면 혹시 간첩이 그러는거 아닌가 하고 의심부터 들곤하세요.
제 기억으로는 저희 부대가 충남 청양 칠갑산 전술훈련을 시작으로 경기도 양수리까지 천리행군 복귀후에 정비완료하고 2주동안 비상 대기후 시누크6대 나눠타고 1공수 1대대가 하진부리에 은거지 구축후 오대산일대 8부능선에 레펠및 페스트로프 하강후 3일 토끼몰이 수색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에 6부능선에 매복호 구축후 잠복하고 하루 퇴각 정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검 한자루 수류탄2발 실탄 420발 지급받고 정말 실전이란 생각에 전쟁이 시작된줄 알았습니다. 쇠밥이 그렇게 맛있다는걸 그때 알았습니다. 모든 선배 군인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강릉사람이라 그때 9살쯤?인데 엄마말로는 저녁9시 통행금지 시켰데요~근데 전 어려서 심각한줄 몰랐는데 정동진가면 소탕끝나고 무장공비 죽은사진 찍어서 길에다 전시해놨었음. 아무생각없이 보다가 울 아빠 닮은사람이 사진에 있어서 거 사람 많은데서 "어?!!!아빠닮았어!!!!!!" 이랬다가 그 많은사람들 아빠보고 사진보고 웃었던 기억뿐인데. 그 때 군인아찌들 감사했습니다ㅠ
뭘 작전미숙이야..침투한 북한군은 최정예 부대임이 나중에 밝혀졌는데..그야말로 사격솜씨가 헬기에서 내리는 군인을 저격하여 맞출정도로 엄청난 부대였는데 그정도로 끝난게 정말 대단할 정도였는데..다만 중간에 작전철수로 인해 민간인 사상자가 생긴건 좀 유감이지만 주민들의 말도 안돼는 항의로 풀어준것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주민들도 크게 항의를 하지 않았지만 좀 유감스러웠지..
제대로 된 댓글 처음 발견...여긴 더불어공산당 앞잡이 놈 같은 댓글이 지천.. 저런 작전은 어차피 숨은 적과 교전시 우리군대 피해자가 더 나오는거 당연한 이치임...북한찬양하는 부역자들이 천지라 전쟁 나면 이놈들부터 처형해야 함..한국전때도 전쟁 나자 서로 톱질하듯 몰살시켰음...어차피 전쟁 나면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저때 저렇게 고생하고 많은 분들이 희생되었음에도 다시 무장공비가 들어온다면 글쎄요... 못 막을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군 전체의 전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했지만 저렇게 소규모로 들어오는 게릴라 토벌은 진짜 무척이나 어렵죠 경험이 있음에도 재발하면 또 무도한 희생을 치루지 않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5:10 해안경계 관련된걸 강화해야 하는건 맞긴 하지만 문제는 잠수함이란 물건이 괜히 인류가 만들어 놓고도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 붙는 비대칭전력이라서 탐지하는게 쉬운게 아닌것도 있지.. 막말로 깊이 들어가서 버로우 타고 있으면 탐지가 되더라도 암초같은거로 탐지되는게 잠수함이고, 미 해군도 조그만 잠수함 하나 잡는데만 수많은 수상함과 항공기를 가져올 정도니까
27~28년 전인데 고등학생 때였다.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정말 이런일이 가능한일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말로만 듣던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침투해서 자살 및 교전으로 사망한걸 TV에서 보고 놀라웠다. 그때 대한민국 난리였다. 그리고 예비군들 집합시켜 경찰서에 모두 움집됐었다. 아쉬웠던건 야자 절대 없어지지않고 계속 해왔다는거...... 개 새....
논산1284- 78년 2월 군번으로 통신기술행정병 출신인데, 강동은 당시 O경사 5XR 2BN 해안경계구역이기도 했었음(정동진도 강동면). 정기적으로 해안초소 통신장비 순회정비하러 다닐 때 기억으론 강동 해안에 소나무 숲도 꽤 많았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의하면 대대장이 참모들하고 강동쪽에 야간 순찰 나갔다 귀신소동이 발생되어 권총을 발사했었다는, 웬지 쒜~하고 음침한 기운이 강했음. 후에 제대 말년에 O청교육대 근로봉사대 125명 데리고 해안선 통신선 매립작업 다닐 때 625때 전사유해로 추정되는 유골들도 꽤 많이 발견되어 잘 닦아서 양지에 묻어주고 술붓고 묵념한 적도. 내가 군복무할 때만 해도 현역이 주를 이뤘는데 예전에는 방위들이 많았다는 풍문. 그래서 사단명도 초창기에 O방사(OO안방위사령부)였다가 내가 자대 가기 몇 년 전에 O경사(OO안경비사령부)로 개명되었다 함. 확인된 사항은 아니지만, 고참들 썰에 의하면 극히 일부겠지만, 동해안에 거수자(불온한 사상을 가진 소수 자를 거동수상자라 칭함)가 북에 포섭되어 고정간첩짓을 했었다는 풍문도, 하긴 그 시절엔 이곳 뿐이었으랴? 조상님들께서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는바람에 외세의 침략을 받아 지배당하고 나라가 두 동강 나서 현재까지도 분단의 아픔이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현재도 보수의 옷을 입고 일본놈들에 매수 당해 버젓이 대놓고 매국노짓을 일삼고 있는 토착왜구들이 있지 않는가? 보수는 애즈녁에 사라졌다. 작금의 기득원을 지키기 위해 거짓선동으로 나라를 망치려는 그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잖은가? 부정축재 기득권 사깃꾼 버러지들의 세 치 혀에 놀아나지 말자. 진정 나라와 국민을 위해 정직하게 일할 수 있는 분들을 선택해야 국가와 국민이 공생할 수 있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된다. 선택은 자유지만 잘못 선택한 후유증은 그들에게 되돌려 받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끝으로, 공비토벌작전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군애국장병님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편안한 곳으로 영면하옵소서~! 꾸벅~!!!!!
00군번 702특공연대 출신입니다.. 저 사건..내 군번 군인들..특히 저때 투입된 부대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겁니다.. 왜냐?????? 일단 울부대원이 저당시 96년도에 가장먼저 투입됬고 전사자가 가장많이 나왔슴.. 702특공 출신들은 알거임;;;부사관 장교급 해드샷 당해 죽어나가자 702특공은 잠시 작전지역에서 빼고 703특공애들 재수색하자말자 하루만에 공비 잡음.. .. 이로인해 702특공의 불명예라고 해서 동해안취약훈련 이라는게 생김.. 따로 연대에 박물관 만들어서 죽어나간 아군 사진들과 당시 북한이 사용한 무기들까지 죄다 전시해놓음 ... 훈련의 시작은 춘천에서 강릉까지 행군 -_- 그리고 잠수함 침투지역부터 수색지역까지 죄다 걸어가서 훈련함 당시 투입된 수색대 해병대 특공대들과 같이 또 훈련함 그리고 복귀;;; 이걸 매년 함.. 그러니 잊을수있겠냐??? 지금도 하고있을려나 몰겠다 암튼 그때 사고로 돌아가신 군인장병들에게 유감을 표합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노도부대로 투입되었던 한명입니다.
출발할때 유서쓰라고 갑자기 중대장이 종이를 내밀던게 생각나더군요.
지나고 보니 중대장도 제정신이 아니였을꺼란 생각도 들고...
하여튼 잊지못할 추억으로 남았네요.
복무기간은 짧아졌지만 나라를 지키는 노고는 같을꺼라 생각됩니다.
모든 국군 장병들 화이팅!
2년전에 쓴 댓글인데. 밑에 달린 댓글보니 한번도 본적없는 분들이지만
다 같이 고생하면서 병역을 수행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50인데 짧았지만 양구에서 보낸 젊은 청춘이 그립기도 하네요.
모두들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랍니다~
유서에 뭐라고 쓰셨나요?
@@user-ms9kk6cl8z 진심 돌아이인가?
나도 그때 출동대기 막 신병인 이등병이였는데 5톤 트럭에 무장하고 소대장이 진짜 실탄과 수류탄을 나눠주더라
겁나 떨었는데 소대장이 너는 지켜준다고 하는 말이 간동이였듬
지금 생각해보니 소대장도 한참 어린 나이였는데 다행히 출동은 안하고 부대가 합쳐짐
ㅎㄷㄷㄷ
@@user-ms9kk6cl8z 찐으로 돌아이인가
충성선배님08년도2사딘81m후배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때
상병 두달째 였는데...
그때 산화하신
동료 장병님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쿠... 그 때 나는 일병 3호봉이었는데... 고생하셨습니다. 102여단 2대대 5중대 2소대 였습니다.
당시 작전에 직접 동원됐던 1인입니다.
그때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유서고 뭐고 없이 투입됐었던걸로 기억하는데요. 나중에 안 사실은 이미 각 고향집으로 귀하의 자녀가 현 무장공비소탕작전에 투입되었고 무사히 잘 귀가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편지가 갔었다고 하네요.
당시 작전을 생각해보면 진짜 고생 많았던 기억이 나네요.
낮엔 수색정찰, 밤엔 매복, 낮엔 졸음과의 싸움, 밤엔 추위와의 싸움...
이기자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때 함께 고생했던 전우들이 생각나는군요.
깊은 감사드립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기자부대 06년 1월 군번입니다.. 화천에 있는 부대인데 강릉까지 가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96.1월 군번입니다. 당시 현역이었지만 작전엔 참여 안했습니다.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를 항상 지켜주신 모든 국군장병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고개숙여.....전사자장병들에
희생을...애도합니다..
당시..대구후방에서근무하고있어서
경계근무만썻었는데....
미안한마음이...많이듭니다.
나이가50이 다된지금 저때신병교육 받고 있을땐데 손발톱깍은것과 부모님께 편지쓰라고 하더니 집에보내고 대기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그런 세월을 살았고 우리부모님들은 더 한 세월을 사셨으며 그 고생을 자식들에겐 물러주지 않으려 그 고생을 견뎌낸다.
캬 저는 저때 자대가서 100일휴가 준비중이 였는데 저사건 때문에 100일휴가 짤렸던 기억이
저도 그랬어요
양구에서 매복 섰음.......손톱 같은건 안 깎았는디 난
설마 2번 지지자 아니시죠ㅠ
@@태왕이-d1u뭐래 이쉑은?
이때 작전이 힘들었던 이유중에 언론이 한몫을 했음... 무슨 스포츠 중계하듯이 작전내용을 전부 뉴스로 내보냄...
군도 자세한 브리핑을 어느 정도 선을 지켜서 해야한건데
@@jamesLee-px4ux 만약에 그랬다면 언론에서는 또 국민들의 알권리를 내세워서 군을 몰아붙을겁니다. 이러나저러나 언론이 기레기인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udt가ㅡ잠수함 수색할 때 백업중이던 저격수 옆에서 계속 인터뷰를 종용하던 기자나부랭이가ㅡ기억나네… 생방송으로 그 광경이 다 중계됐음..
22사 출신 입니다 저때 고생 고생 개고생 했지요ㅎㅎ 결국 한명이 안잡혀서 그후로 수색 매복 작전이 생겨서 한달에 한두번씩 야외
나가서 밤새 매복 하던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는 왜 하필 내가 군대 있을때 넘어왔냐 이쉐리들아 하고 욕 많이 했었죠 당시 희생당한
군인및 민간인분들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겠습니다..
저도 훈련소는 22사 뇌종부대. 95년 9월군번이고여 102여단에서 님과같이 개고생했읍니다. 동감합니다..
혹시 저 시절 저런 실전상황에서 낮이나 밤에 담배도 태우고 그랬는지 궁금합니다.
@@move7830돌거래
강릉 무장공비 2년뒤 입대했음. 그때도 간부들이 굉장히 날선 느낌이었는데 공비들때문이었고 우리가 사용하는 비표나 명찰이 전부 노란색에서 검정색으로 바뀌었죠.
네 맞아요
그때 노란명찰
때문에 동료 몇명이
전사 하셨죠.
그래서
저도 노란 명찰을
검은 명찰로 교체
했었습니다.
장교랑 하사관들은 이후 사병들이 계급안보여 경례안한다고 다시 색깔있는걸로 돌아옴
무장공비 소탕직후 96년말인가.. 97년 1월부터인가..부터 계급장 다 바뀜...
94년 10월군번까지는 노란색 계급장 달고 전역했고..
94년 11월군번부터는 검정색 계급징 달고 전역함...
현역들도 96년말부터 계급장 다 바꿔야 했음.. 나 일병때였음..
뭔소리 난 97년 1월에 전역할때도 전투복 노란색 계급장 야상 빨간색 계급장 달고 전역했는데??
6:23 참… 이게 무슨 미친 소린지.. 북한이 남침해서 우리 국군 수십여명 민간인 네 명을 학살하고 어제까지 전투가 이어졌는데, 유해를 건내주면서 남북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미 저 때부터 대한민국은 정상이 아니었음.
저 이후 이제서야 방탄복을 지급하고 있는게 우리의 현실 아니겠는가?
저때 언론때문에 고생 많이 했었지요 뉴스보도한다고 군사작전 다 누설해버려서 밤에 이동할거라고 예측하고 준비했는데 언론에서 다 떠들어버려서 공비는 그거 듣고 역으로 밤에 숨고 낮에 이동하고 이런식으로 작전 장기화되었음
평화를 원하는 자
전쟁을 준비하라.
22사단 출신으로 새벽에 보고 무너지네요.저때가 상병 2호봉 부터 4호봉까지.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강원도는 난리 났는데 서울은 너~무~평온 한걸 보고 우리는 간 큰 민족 이라고 느꼈다.
ㅋㅋㅋ그게간큰게아니라 당연한겁니다 집앞에 폭탄한발만떨어져봐요 난리날거애요
자기 지역 아니면 원래 ㅈ도 신경 안 씀
이미 우리국민(군대갔다온 남자가 있는 경우)은 이미 거의 군사전문가입니다.
무장공비침투라 했지만 잠수함1대 침투라는 것에서 이미 병력수가 20여명정도라는 것이 파악 되었고
그들이 도로를 따라 차량을 탈취하거나 한게 아니라 대거 산으로만 간 것으로 보아 작전에 의한 침투가 아니라 비상상륙이라는 것도 상당수가 알았습니다.
거기다가 수색도중 집단자살이 나왔을 때 이건 무장공비의 본격적 침투가 아니라 전투조가 아닌 사람들의 자살이라는 것도 예상이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군의 작전능력이 허술하고 특전사 마저도 헬기에서도 천천히 내려오다 조준사격당해 죽고 했지만
이미 우리군이 몇개 사단이 출동한 상태였기에 도시로의 진입은 어렵다 보아 안심이 되었었습니다.
상황에 대해 대충 파악이 끝났기에 국민들 동요가 없었던 것이지 안보불감증이나 이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평온할수 있는건
군인들 덕분이지
항상 감사하고 살아라
@@gun_love 군인도 대통령을 잘 만나야지...ㅎ
안그럼, 깡패들이나 다름없는.
x세대라고 나약하다고 듣던 세대였는데
저당시 94군번으로 병장계급으로 출동했는데
진심 간첩잡고 싶단생각이 들더군요
82년생으로 x세대 오빠들하고도 많이 어울렸는데, 돌이켜보면 이 땅의 마지막 남자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찌질하지 않고 남자다웠던 마지막 세대죠.
@@user-ugt7hjiyrr5e 나한테 와라..나도x세대 오빠다
96년9월18일 투입되어11월5일 상황해제시까지 대침투작전을 수행한
당시 제11보병사단 화랑부대 보병입니다.
오대산 월정사 독거촌 수색 노인봉 차단매복
칠성산차단매복
고성건봉산매복
오대산명게리 수색매복
그리고 마지막 인제에서 종료될때까지
28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기억이 선명하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전 11사단 신교대 9월 10일 입소해서~~다행이었죠
화랑!
저도 말년에 3달있었네요.보수대 운전병으로
3개월의 작전
기억속의나
젊은날 추억이었다
택시기사가 소변 볼려고 내렸다가 잠수정 보고 신고 했던 사건인가
그 택시기사가 혹시 마지막 1인.... ㅎㅎㅎ
사건당시 향로봉일대 Tod 열상장비에 공비로 보이는 영상이 포착댐. 하지만 잡지못한관계로 묵인. 정보부대쪽에선 이미 넘어간걸루 생각함
진돗개 발령만 6개월동안 지속되었던걸루 기억
저때 죽은 병사들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입대한 사람도 있었고 대학생도 있었다. 30년가까이 지났어도 오늘도 불쌍한 젊은 또래들에게 군무새라고 개지랄말고 오늘도 고맙다고 한마디 해주는게 어떨까?
지금도 간첩들 많습니다. 무장하고 내려와야 간첩이 아닙니다. 사회 혼란을 일으키고 갈라치기하란 지령받고 활동하는 간첩들 조심하고 정신차려야 합니다
04군번인데 저 사건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밤에 불시에 상황걸어서 다 몽둥이고 삽이고 뭐든 들고 위병소에 집결하게 했었고
진짜 뜬금없이 진짜 상황인거처럼 당직사령이 유서 작성하라 그러고 단독군장 시켜 연병장이나 위병소 또는 수송부연병장 앞에 집결하게 했었음 공비 침투 상황 걸고
저도 04군번인데. 우리때 유서쓰게 한건 저 사건 아니고 철책 사건 때 입니다
96년 일인데 04군번? 군번이 뭔줄 알고 말하나?
이 사건 이후로 계급장과 이름 명찰들이 모두 검정색으로 바뀌었죠. 그리고 훈련 시에 탄이 없어 입으로 두두두두... 소리 내고 했는데 ..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작전중에 검정색으로 바뀌었죠~^^
@@user-oh4jc9uk6x 계급장 사병은 노란색(야전잠바는 붉은색), 이름도 노란색 자수 오바로쿠 그것도 맨날 다림질 해대서 뺀질뺀질 광이나서 야밤에 달빛 비추면 반짝반짝 굳 사냥감이었음. 나도 현역때 그런 점을 소대장에게 건의한적있는데 그런걸로 걱정은 없다고 개솔 해댔었음.장교는 더했음 하아얀색 계급장 ㅎ 육군은 진노랑 해병은 밝은 노랑 해군 해병 동일 공군은 흰색 였음.
아 하이바도 뒷머리 보호하는걸로 바뀌었죠.. 그때도 50년대 수통..
DP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bluemoon6395 97년 군번인데 아마 지금까지도 50년대 수통 안 바꼈을 겁니다 😂 ㅋㅋ
19군번 파주출신입니다. 수통이 많이 낡아 6.25급의 물건인지는 알 수없으며 일부 인원말고는 전 부대원 신형 k2c1이 보급됐으며
교전 훈련시 공포탄을 이용한 장비로 좀 더 사실적인 훈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때 예비군 소집 명령 떨어졌는데 부른 인원의 10퍼센트만 왔다고함...나머지 벌금 때렸는데 200인가 300만원인가 그랬다고함 저시절이면 큰돈임
죽을바에 그게 나을수도
94년12월군번입니다 26개월군생활 1만원군월급 구타와 암기는기본 선임병업시는 공등전화불가 그래도 이를악물고버터서 제대를햇습니다~
저때 말년병장이였는데 공비사건때 군계급장 노란 새우깡 빨간 치토스 검은색으로 바뀌고 좀지나 바탕 진군청색 밝은색으로 또바뀌었음 ...제대 얼마안남기고 몇번을 띠고 다시달았는지 .....강원도에서 복무했는데 말년에 수색한다고 개고생했습니다 .저도 군인이였지만 진짜 우리나라군대 당나라군대였음 야산 수색하다 자빠저다치고 체력도 받처주질못하고 ..뒤처지고 .. .. 공비들 이동이 너무빨라서 따라잡질못하고 게속처지니 홍길동마냥 여기나타났다 저기서나타났다 보고게속들어오고 우리군은 우왕자왕 ..비상대기라 시간아낀다고 몇일날밤을 군복 전투화신고 잠을잤었는지...ㅠㅠㅠ 지금 군대는 그때보다 더 군기강 약해졋을텐데 .........................
우리나라군대가 체력적인 문제는 있지만 공비랑 비교불가죠,김정일이 저특수부대원 한명이랑 한개사단과도 안바꾼다는 특수요원이예요.
그리고 군기는 장교가 솔선수범이 우선인데 우리군은 뒷짐형군대죠.
우리나라폭설대 비상근무하는데 주한미군은 영관급이 대기데 우리는병사가 대기했다는 말이있어요, 병사가 뭘지시합니까?
원래 작전상 일반 부대는 어느 지점을 막고 그 주변만에 대해 경계를 서는 경계병력이지 대부대가 수색나가고 하면 오인사고도 나고 해서 안되는 것입니다.
수색을 전문으로 하는 수색대가 있지 않습니까..
96년 실전상황에 이런 작전개념도 무시되고 우왕좌왕 했다는 증거입니다.
실제 오인사격이 발생해 병사가 죽었었잖아요
장교들이 떼로모여 경계도 소홀히 하며 개활지에서 작전회의 하다 대령을 비롯한 수많은 장교들이 몰살당했었고 ...
25년전 그랬는데 요즘은 안봐도 비디오죠..
저런상황이 요즘 발생하면
부모들 전화하고 난리날거같네요..
특수부대는 우리나라 hid가 부칸 침투해도 저랬을겁니다.
군기강은 모르겠고 훈련은 지금은 어지간해선 FM으로 다합니다
가라로 하는곳도 있겠지만
저때 매복들어가면 해뜨고 철수할때까지 아무도 접근못했죠.... 괜히 순찰돌다가 총맞은 간부가 있다고 얘길 들은거 같고... 암튼 겁나 추웠던 기억이....
12사 출신입니다. 저당시 병장1호봉이였는데..유서쓰고 머리카락 손톱 같이 동봉하고 실탄지급후 수색매복 40일가량 반복햇네요. 부대근처인 진부령에서 총격전끝에 마지막으로 상황이 종료되었지요..
병장이 호봉이 어딨습니까 ㅎㅎ 병장 1개월이지 고생많이하셨습니다
@@김디올-s8d 적당히 넘어가 뭘 그런걸 따지고 앉았냐.
@@babywaxxup4562 아 기분나쁘라고 올린 댓글은 아닙니다 ^^ 군생활할때 추억이떠올라서 그만... 메리크리스마스 보내세요
@@김디올-s8d 저땐 호봉이라 불렀는데?
상병말 병장말호봉 병장삼호봉 이런식으로
@@구심동 00군번입니다 저때도 호봉이였습니다
저당시 수색 나가서 간첩 비트도 여러개 발견했는데...간첩들 훈련 겁나 잘 되있고 국군작계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렇죠..
부칸군 최고전사가 넘어왔을겁니다.
황장엽씨가 얘기했던 내용중에 전날 우리나라 최고위급들의 회의내용이 김정일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있는걸 봤다했다지요..
@@csd2577 간첩이 있나보네요
황장엽 말을 믿냐
최전방 복무당시 탈북자 넘어온거 하나로 출동했을때도 엄청 떨리고 그랬었는데.. 저상황에서 고생했을분들 생각하니 진짜 대단...
8사단 수색대대 04년 군번입니다.제가 군생활 할때도 철책이 끊어져있다고 공비침투로 의심된다고 유서쓰고 손톱 이랑 봉투에 넣고 수색작전 갔던때가 떠오르네요.알고보니 철책은 남에서 북으로 끊은걸로 확인되었고 월북한걸로 추정된다고하여 수색 4시간정도만에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그 4시간도 엄청난 긴장감과 스트레스였고 피로도도 상당했습니다.무장공비 침투당시 투입되었던 모든분들 존경합니다.
아... 저래서 내가 어릴때 동해로 휴가가면 해안마다 철조망이 있고 모래사장도 저녁6시이후에는 진입금지였구나...
이런 거 얘기 하면 요즘 세대는 고리타분 하다고 할 것 같은데..유비무한이란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저는 20대인데 유비무환을 가장 좋아합니다.
미리 준비하면 우환을 당하지 않는다.
시험이나 인간관계나 마찬가지로 미리 공부를 해두면 걱정이 없고
항상 배신에 대비를 하면 뒤통수를 당해도 충격이 없죠.
감사합니다.
하물며 요즘에 간첩이 어딨냐는 세상이지요...
꼭 그렇진 않아요. 저도 20대인디...
오히려 2030세대는 이런거 보면 공감하는데 뇌가 좌측으로 많이 삐뚤어진 4050 틀니들이 고리타분하다고 발작함 ㅋㅋ
실상은 지네들이 제일 고리타분 하면서
정신차려라
적군이 자국 침투해서 민간인 군인 죽였는데 시신 화장까지 잘하고 돌려주는게 존나게 웃기네
이기자, 95군번, 작전때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젠 50줄이네요.
혹시 저 시절 저런 실전상황에서 낮이나 밤에 담배도 태우고 그랬는지 궁금합니다.
@@move7830 ㅎ 네 똑같아요. 불편하고 힘들뿐이지.
그런데, 저 때 제일 욕먹어야 하는 건 방송사 같은 언론사들 이었음. 엠바고가 안돼서 작전 내용이 그대로 언론에 나가던지, 작전중인데 카메라 들고 들어오고, 간첩들이 라디오 뉴스로 그 내용을 들은 공비들이 그에 맞게 도주경로를 적절하게 변경하며 수색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럴 정도인데. 이게 실화임.
저당시 기자들도 작전 하는데 따라가서 취재하고 야간인데도 카메라 플래쉬 계속 키고 ㅈㄹ했음...
대한민국 국군의 비참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 최악의 작전, 군의 무능과 무기력의 끔찍한 수준이였음
저 때 예비군까지 다 소집되고 타지역에 있던 특전부대들도 다 넘어오고 아주 난리였음...
이때 중학교 1학년이었고, 강원도 용평스키장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보통 2박 3일로 가서 둘째날 밤에 캠프파이어를 하는데 하룻밤 자고 둘째날부터 모든 일정이 스톱.
무장공비가 쳐들어왔다고.. 숙소에서만 있는데 뭔가 긴박하게 헬기들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날 밤에 캠프파이어는 군사작전에 해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취소되었고,
셋째날 용평을 떠날때 서울로 향하는 버스안에서 강원도쪽으로 계속 진입하는 군인들이 탄 트럭을 봤었다.
그리고 계곡을 날아다니는 아파치 헬기들까지 봤었지.. 그때 진짜 전쟁나는건가 하고 개쫄렸었음
96년에도 아파치헬기가 있었나요?
@@도손-x9h 1983년부터 양산했음
@@Bigmac_bro 주한미군 아파치헬기를 보신거군요! 국군에는 2013년부터 도입한걸로 알고있어서
그때 코브라지 뭔 아파치야
@@ske1205 저 나이 때 이미 코브라 , 아파치, 하인드 이런 헬기들 외형 다 알고 있었음. 윗대댓처럼 주한미군 꺼 일수도.
이당시 저는 초등학교 1학년인데 기억이 안나네요.
96년 9월에 난거 보니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반년이 지난거말곤...
근데 엄마가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예전 전쟁날때 강릉 초당에서 북으로 넘어간 사람 그렇게 많다고 하고...
심지어 휴전 후에 어느 집은 알고보니 간첩이라고...
지금도 강원도에 산불나면 혹시 간첩이 그러는거 아닌가 하고 의심부터 들곤하세요.
그넓은 산악지역에서 전원 발견하고 사살했다는건 정말 대단한거다. 불가능한걸 이뤄낸거다. 작전중 순국한 장병들의 명복을 빕니다
96년 11사단 불침번 말2번 근무 서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직하사가 점등하면서 하는말이 진돗개 하나..
당시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작전 100일째 부대 잠시 복귀해서 정비중.. 인제에 함장 발견..
다시 새벽에 출동...
제 기억으로는 저희 부대가 충남 청양 칠갑산 전술훈련을 시작으로 경기도 양수리까지 천리행군 복귀후에 정비완료하고 2주동안 비상 대기후 시누크6대 나눠타고 1공수 1대대가 하진부리에 은거지 구축후 오대산일대 8부능선에 레펠및 페스트로프 하강후 3일 토끼몰이 수색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에 6부능선에 매복호 구축후 잠복하고 하루 퇴각 정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검 한자루 수류탄2발 실탄 420발 지급받고 정말 실전이란 생각에 전쟁이 시작된줄 알았습니다. 쇠밥이 그렇게 맛있다는걸 그때 알았습니다. 모든 선배 군인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단결 선배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때 당시 무장공비 대침투작전 투입 여단이 아마 3여단 1여단 5여단 세개 여단이 투입 된 거로 알고있슴다~!
강릉사람이라 그때 9살쯤?인데 엄마말로는 저녁9시 통행금지 시켰데요~근데 전 어려서 심각한줄 몰랐는데 정동진가면 소탕끝나고 무장공비 죽은사진 찍어서 길에다 전시해놨었음. 아무생각없이 보다가 울 아빠 닮은사람이 사진에 있어서 거 사람 많은데서 "어?!!!아빠닮았어!!!!!!" 이랬다가 그 많은사람들 아빠보고 사진보고 웃었던 기억뿐인데. 그 때 군인아찌들 감사했습니다ㅠ
저도 88년생인데 ㅋㅋ 96년도면 9살때 맞아요 ㅋㅋ 전 서울에서 태어나서 저 사건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유튜브보고 알게 됨ㅋㅋㅋ
힘 없는 정의는 무능이다.
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힘을 길러야 한다..
북한잠수함 저게 마지막에 잡힌거네요.
말하자면 그동안 안들키고 수시로 동해안을 들락낙락 거리다가 파도때문에 자초되서 잡힌거네요.하늘이 도왔네요.
나 언별리 살았는데 진짜 밤에 존나무서웠음
ㅜㅜ
몇살 처먹었는데 아직까지 존나존나 거림?
하 우리장병들 돌아가신 것이 너무 가슴아프네
21사단 96년 5월 군번 자대 신병 배치 얼마 안됐을때네요.. 아직도 당일 아침 기억이 생생하네요.
내무반에 싸이렌이 울리고 실탄지급 . . 각자 방공호로 출동....
신병이라 당연히 실탄 지급하고 훈련하는걸로만 알고 있어는대.... 비상사태...
한달정도 참호 파고 야전 생활할때가 생각나네요..
사격 훈련도 점사, 난사도 해보고 ..... 벌써 27년이 지났네요...
희생자분들 명복을 빕니다. .. . .
선임 , 후임들 잘들 살고 계시죠~~
백두산 단결!!
백두산 후배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뭘 작전미숙이야..침투한 북한군은 최정예 부대임이 나중에 밝혀졌는데..그야말로 사격솜씨가 헬기에서 내리는 군인을 저격하여 맞출정도로 엄청난 부대였는데
그정도로 끝난게 정말 대단할 정도였는데..다만 중간에 작전철수로 인해 민간인 사상자가 생긴건 좀 유감이지만 주민들의 말도 안돼는 항의로 풀어준것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주민들도 크게 항의를 하지 않았지만 좀 유감스러웠지..
글고 숨은 놈들을 추격하는 쪽이 피해가 클 수밖에 없는 게 어쩔수가 없죠
제대로 된 댓글 처음 발견...여긴 더불어공산당 앞잡이 놈 같은 댓글이 지천..
저런 작전은 어차피 숨은 적과 교전시 우리군대 피해자가 더 나오는거 당연한 이치임...북한찬양하는 부역자들이 천지라 전쟁 나면 이놈들부터 처형해야 함..한국전때도 전쟁 나자 서로 톱질하듯 몰살시켰음...어차피 전쟁 나면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그건 와전된이야기입니다
레펠하고 내려와서 3명이 하향수색 하고 내려오던중 매복하고있던 공비가 쏜겁니다.같이 수색하던 동료분들은 다 피했는데ㅠㅠ
레펠 저격은 구라소설이고요 하향식 수색중에 매복해있던 공비테 조준 사격당한겁니다
진짜 이날...강원도에서 학교다닐때인데 부천에살던 여친이 놀러온다고 고속버스타고오다가 이거 터진후 대관령을 한참을 못넘고 버스는 수시로 검문 낮2시에 출발했던
여친이 밤9시 다되어서 도착....
이때 우리 군인들중 공비 총에 맞은게 아니라 우리 군인들 총에 맞아 죽은 사람있었죠
당황하니 음폐엄폐하고 총만 들어 막 쐈을듯
당시 rotc 복무하던 중학 동창도 이 작전에 투입됐는데 아군간 오인사격으로 사상자 발생했었다고 고백했었죠.
군대 시절 소대장도 특공대원들이 매복후 철수하는데 특전사에서 적으로 오인후 사격해서 전사할 뻔 해서 특전사 대령 목을 들고 항의했다고.
17년전쯤 상무대 기계화학교 교육파견시 11사단 고참들 몇명 있었는데..강릉 무장공비 사건때 매복하고 하느라 고생한거 이야기 들은적 있었는데...진짜 죽는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11사단은 전투부대라 쏘고 죽이고 달리는데 최고의 부대...광주사태때도 출동해서 교전했고 강릉공비사건때도 출동함....보초경계만 하는 전방부대완 비교가 안되는 부대....
못 찾은 간첩 이름이 리철진.. 영화도 나왔었지 간첩 리철진.. 아류작 여간첩 리철순..
1996년 9.18일 이기자부대 사단창설 기념일이었는.. 체육대회 하다말고 완전 무장해서 출동했다는... 인명사고도있었지.. 아군끼리 오인교전으로 1명숨지기도...
이기자부대 출신이신가요? 반갑습니다. 저도 같은 부대 출신입니다. 전 쌍독수리연대 진격대대였습니다. 그때 고생 많았죠^^
리철진이 아니라 김영일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공비 한명은 잘살고 있는 건가요 ??
저때 저렇게 고생하고 많은 분들이
희생되었음에도 다시 무장공비가 들어온다면
글쎄요... 못 막을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군 전체의 전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했지만
저렇게 소규모로 들어오는 게릴라 토벌은 진짜
무척이나 어렵죠 경험이 있음에도 재발하면
또 무도한 희생을 치루지 않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무빙 보고 오신 분들 계시겠죠?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은 누구의 명령으로 목숨을 받쳐야 하는 세상 지금도 ing
택시기사 아니였으면 온지도 몰랐거나 알아도 북으로갔거나 어디로 간지도 몰랐을듯
그때 저도 출동했었는데.. 홍천에서 부대이다 보니....처음부터끝까지 있었는데..... 마지막 한명은....잡지 않은이유.....부대가 출동하다보니... 하루에 들어가는 비용이 몇억이 되었다.....그게 마지막 공비를 잡지 않은 이유이다.
@@blade8422 휴전선 철책 끊고 북으로 갔습니다
@@한천수-v5b 사실인가요?
@@riankal 네 사실입니다
흥보 비디오 영상도
있습니다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 아주머니 엉덩이도
나옵니다 기쁨조도 잠깐 나오고
국방부에서 제작 한겁니다
@@한천수-v5b 아주머니 엉덩이는 무슨...? 혹시 그거 영상 어디서 볼수있나요?
@@riankal 아니 ㅋㅋㅋ 글순서를 저렇게 해 놓으시면 우짭니까? ㅋㅋ
아주마 궁디보러 묻는거 같잖아요.
5:10 해안경계 관련된걸 강화해야 하는건 맞긴 하지만 문제는 잠수함이란 물건이 괜히 인류가 만들어 놓고도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 붙는 비대칭전력이라서 탐지하는게 쉬운게 아닌것도 있지.. 막말로 깊이 들어가서 버로우 타고 있으면 탐지가 되더라도 암초같은거로 탐지되는게 잠수함이고, 미 해군도 조그만 잠수함 하나 잡는데만 수많은 수상함과 항공기를 가져올 정도니까
나 초4때인가 있었던 일인데 쑈킹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음 ㅎㄷㄷ
공비들 중 마지막 한 명은 끝내 안 잡혔는데, 나중에 북한이 공개한 강릉 무장 공비들의 공동 묘비에 붙은 사진들 중에 그 마지막 한 명의 사진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그 마지막 한 명은 월북하는 중에 원인 불상으로 사망한 것 같네요.
네 그럴겁니다. 나머지 한명 월북 못한것으로 한참지나 국정원에서 확인한바 있다고합니다.
@@조성원-e8m 그런 자료가 어디에 있나요? 링크 한번 걸어주세요. 네이버 지식인에 보면 북한으로 돌아갔다고 하던데요. 엄청난 영웅 대접 받았다고 하는데... 어느말이 맞는건지...
@@똘이-d9j그건 김신조사건요
@@똘이-d9j 사실 1명이 아니라 2명 넘어갔음 뉴스언론에 나오는건 반만 믿으시면됩니다
저는 그당시 김포에서 155견인포 일병 으로 근무하고있었구요..
마지막 공비 2명사살한건 특전사가 아닙니다...장갑차...
27~28년 전인데 고등학생 때였다.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정말 이런일이 가능한일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말로만 듣던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침투해서 자살 및 교전으로 사망한걸 TV에서 보고 놀라웠다. 그때 대한민국 난리였다. 그리고 예비군들 집합시켜 경찰서에 모두 움집됐었다. 아쉬웠던건 야자 절대 없어지지않고 계속 해왔다는거...... 개 새....
이때군대가 진짜 오리지날이지..
저때나 지금이나
실제 상황 경험이 없어서 죤나 어리버리 했음...
@@antenna..
아니예요~ 저 당시에
상사급들은 실전경험
있는 사람들(월남전)
있었어요
저때 소대장이었던분이 우리부대 대대장님이었는데..
이때 두달동안 뒤지는줄 알았습니다.1년만에 휴가 나갔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트니 무장공비가 넘어왔다고...ㅠ
그때 당시 병장이였는데 무장공비 침투 지역과 거리가 좀 있는 강원도 철원이였지만 부대주변에서 실탄 장전하고 24시간 잠복 경계근무 섰던 기억이 납니다. 병장이 되어서 이제 쉴만 했는데 왜 난리인가 싶었죠
그래서 마지막 공비 1명은 어디에..??
너지?
더듬어 만진당 당원임 ㅎ
@잉아슈타인 건국이래 최고의 대통령이? 북에서 공비좀 더내려보내죠. 우리남쪽것들은 까불지말고 농사나짓고살자.
@@카이란-g9e /성폭행한 당은 봐주고 성추행 정도로 세상최악의 당인양 욕하는 이 선택적 정의감은 정의라 부르면 안됩니다.
그냥 선거운동구호일 뿐이니까요..
@@user-dl123 무지성 대깨문 투하 훠어어
그때나 지금이나 북은 변한게없다 국군 장병님들 감사합니다
나 이때 고3. 강릉 바로 밑 동네 동해. 학교에서 야자 취소하고 일찍 하교 시켜 줌. 집에 가는 길에 군인들이 총 들고 여기저기 서 있음. 쫌 무서웠음
양구군무중 gop철책근무 투입된지 한달만에 강릉무장공비로 고생좀했었지
와...벌써 몇년 전 일인가요..나 8군단 야공단 말년후가 나가있을때..집에서 뉴스듣고..알았는데...ㅎㅎㅎㅎㅎ
대한민국에
괴뢰는 많죠
국회의원, 의원 한다는놈, 아주아주 많아요ㅠ
북에서 고위층으로 호의호식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대한민국에 위장 잠입한 태영호와과그의 뒷 배가 되어주는 당을 말하는 군요. 동감입니다. 입으로만. 안보를 떠들고 뒤로는 사리사욕만 챙기는 놈들이죠. 병역비리면제율이 가장 높은 당이라지.
지금도 한반도는 전쟁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물자를 지원해 주다니
정신이 있는 정권인가 싶다
95군번 22사단 사단 훈련소 3주차인가?? 서울병력인데 집이 서초동인 훈병 다나오라고 하니 중대장실 데려가더니 집에 전화해보라고 .. 알고봤더니 삼풍 백화점 무너져서 부모님 잘계신지 전화하게 한거임.. 상병 말호봉때 강릉 잠수함 사건 터져서 두달을 길바닥에서 잤네.. 뭔 차단작전인지 뭔지 한다고 사건사고많은 95군번 22사단..
훈련소때 다른 기수보다 편햇던게 사단에서 사고터짐 2주 전에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까서 다 죽음 그래도 방송 안나옴..
그때의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하다
2:24
두더쥐인줄
ㄹㅇ 지금은 저렇게 내려오면 바로 잡히겠지
2:15 칠성산전투 공포라디오에 나왔던 내용 아닌가??
산은 그냥 1개사단이 포위하고
특전사랑 HID 투입했어야했음
남은한명 구룡포가 놓쳤는데...
헉 내가 2000군번인데 해경전경으로 동해 묵호쪽 근무햇는대 불과 4년전이었다니 ㅎㄷㄷ
저 때 휴가나왔다가 다 복귀하고 난리났었는데 그 때만 해도 군생활
제법 괴롭던 시절이라 휴가나왔다가
다시 복귀하는 심정은 아마 탈영하고
싶은 심정이었을듯
저때 전화같은게 있었나요? 복귀를 어떻게 알렸나요?
@@미실세수임당 집전화로 다 돌리고
뉴스로 아마 대대적으로 알렸을거에요
휴가나온 군인이라면 아마 대부분 복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거고 모르고 술퍼먹고
놀았다간 고참들한테 줘터지고 얼차려 받을걸
알기때문에 번개같이 복귀했을거로 생각됩니다
94년 김일성 사망으로 보름늦게 제대하고 강릉집으로 와서 복학했는데, 96년에 무장공비 침투..
96년에는 손 쉽게 바다를 건너오고
2023년에는 손 쉽게 하늘을 건너오고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군은 변한게 없다는..
예비군 1명 ㅠㅠ
그것도 예비군들끼리 오인사격해서 그런 거래요...
그나마 gop근무가 제일 편했음 ᆢ경계근무만 서면
되어서 수색 지원부대 고생
많았음 ᆢ신교대 68사단
나왔구 당시102여단 근무중
이사건으로 68사단 없어지구
너무 아쉬었음
논산1284- 78년 2월 군번으로 통신기술행정병 출신인데, 강동은 당시 O경사 5XR 2BN 해안경계구역이기도 했었음(정동진도 강동면).
정기적으로 해안초소 통신장비 순회정비하러 다닐 때 기억으론 강동 해안에 소나무 숲도 꽤 많았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의하면 대대장이 참모들하고 강동쪽에 야간 순찰 나갔다 귀신소동이 발생되어 권총을 발사했었다는, 웬지 쒜~하고 음침한 기운이 강했음.
후에 제대 말년에 O청교육대 근로봉사대 125명 데리고 해안선 통신선 매립작업 다닐 때 625때 전사유해로 추정되는 유골들도 꽤 많이 발견되어 잘 닦아서 양지에 묻어주고 술붓고 묵념한 적도. 내가 군복무할 때만 해도 현역이 주를 이뤘는데 예전에는 방위들이 많았다는 풍문. 그래서 사단명도 초창기에 O방사(OO안방위사령부)였다가 내가 자대 가기 몇 년 전에 O경사(OO안경비사령부)로 개명되었다 함.
확인된 사항은 아니지만, 고참들 썰에 의하면 극히 일부겠지만, 동해안에 거수자(불온한 사상을 가진 소수 자를 거동수상자라 칭함)가 북에 포섭되어 고정간첩짓을 했었다는 풍문도, 하긴 그 시절엔 이곳 뿐이었으랴?
조상님들께서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는바람에 외세의 침략을 받아 지배당하고 나라가 두 동강 나서 현재까지도 분단의 아픔이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현재도 보수의 옷을 입고 일본놈들에 매수 당해 버젓이 대놓고 매국노짓을 일삼고 있는 토착왜구들이 있지 않는가? 보수는 애즈녁에 사라졌다. 작금의 기득원을 지키기 위해 거짓선동으로 나라를 망치려는 그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잖은가? 부정축재 기득권 사깃꾼 버러지들의 세 치 혀에 놀아나지 말자.
진정 나라와 국민을 위해 정직하게 일할 수 있는 분들을 선택해야 국가와 국민이 공생할 수 있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된다. 선택은 자유지만 잘못 선택한 후유증은 그들에게 되돌려 받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끝으로, 공비토벌작전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군애국장병님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편안한 곳으로 영면하옵소서~! 꾸벅~!!!!!
지금도 거제도 연안은 북한잠수함이 자주출몰할걸요
다만 발각되지 않을뿐,,,,,
이때 초5엿는데 난리낫엇음 아직도 생각나네..공비 넘어오는줄도 모르고 무슨 해수욕장오듯 넘어와서 강릉에 어떤 택시아저씨가 잠수함 신고함ㅋㅋ
간첩 20명이 아니지요!! 공작원은 몇 명 없던걸로 알고있고 그마저도 공작원 일부는 행방이 확실치 않다고 들었네요.
저 때 해당 지역에 동생이 근무중이었다는....
또 동기간에 전방초소에서 총기 난사 탈영사건이 있지 않았나 ???
꼬꼬무보고 넘어왔습니다
화랑!
북한은 주적이다
00군번 702특공연대 출신입니다..
저 사건..내 군번 군인들..특히 저때 투입된 부대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겁니다..
왜냐??????
일단 울부대원이 저당시 96년도에 가장먼저 투입됬고 전사자가 가장많이 나왔슴..
702특공 출신들은 알거임;;;부사관 장교급 해드샷 당해 죽어나가자
702특공은 잠시 작전지역에서 빼고 703특공애들 재수색하자말자 하루만에 공비 잡음..
..
이로인해 702특공의 불명예라고 해서 동해안취약훈련 이라는게 생김..
따로 연대에 박물관 만들어서 죽어나간 아군 사진들과 당시 북한이 사용한 무기들까지 죄다 전시해놓음
...
훈련의 시작은 춘천에서 강릉까지 행군 -_-
그리고 잠수함 침투지역부터 수색지역까지 죄다 걸어가서 훈련함
당시 투입된 수색대 해병대 특공대들과 같이 또 훈련함
그리고 복귀;;;
이걸 매년 함..
그러니 잊을수있겠냐???
지금도 하고있을려나 몰겠다
암튼 그때 사고로 돌아가신 군인장병들에게 유감을 표합니다!!
당시 703특공연대 출신입니다. 새벽5시 사이렌이 울리고 60트럭 타던 기억이 눈 앞에 선하네요.
해병대는 강릉무장공비에 투입안됐는데 뭔소리고
그리고 강릉무장공비 사건 아군 사살자에 702특공은 없는데?
뻥은 ㅎ ㅎ ㅎ 칠성산에서 한번 떨어바라 ㅎ ㅎ
@@성이름-x7c2u 동해안취약훈련이라고 702특공 전원 군장매고 화천에서 동해안까지 행군해서 가면 베이스캠프가 해병대에 있었슴..개네덜이랑 같이 합동훈련 받고 그랬슴! ㅇㅋ?? 702특공 군번 없냐? 여기 미필한테 설명좀 해줘 ㅋㅋ
@@westmead4975 3공수 이야길 하네요
강릉이라는 영화가 이 사건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인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그런거라면 제목을 강릉이라하긴엔.임팩트가 없음 ㅋㅋㅋㅋ 무장공비 정도 해줘야함 ~
@@iqeqjq20 맞아요 이거를 소재로 만들어서
영화화 했다면 도시이름답게 관람반응도
좋았을텐데 근데 깡패뒤치닭거리 영화는 망
지금 또같은 일 벌어져도 마찬가지다.
추워서 훈련안하고 더워서 훈련안하고
이런데 무슨 공비를 잡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