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영상에서 너무 잘 정리해주신 북아프리카전선 내용을 보니 여기에서의 결정적 하루는 롬멜이 자리 비운날인거 같네요. 그리고 체급이 깡패고 물량에 장사없고 몽고메리는 약아빠진 혐성놈 같네요. 역전다방 나가시면 샤를님과 존테일님이 같이 꽁트도 하고 입체적 시각에서 전황도 보고 좋을텐데 거기 자리가 꽉 차서 정말 아쉽습니다
다시보면서 느끼는것이... 미국이 영국에게 꽤 많은 정보, 지식을 받고 안준 이유를 알거같네요 ㅋㅋㅋ 영국군 하는게 저런거면... 위에도 비슷해보일듯 하고... 핵무기 관련한것도 그러하고 왜 미국이 영국에게 안줬을까? 했는데 얼추 이해갑니다 ㅋㅋㅋㅋ 결국 미국에게 도와달라고 한것도 자기들 죽기싫어서 그렇고, 전쟁은 자기들이 앞서서 이기고 싶고의 마음... 미국 입장에선 빡치죠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th-cam.com/video/34oR2D1GVU4/w-d-xo.html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1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초,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th-cam.com/video/L-rRc5hQFbA/w-d-x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th-cam.com/video/34oR2D1GVU4/w-d-xo.html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1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초,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코브라, 패튼 지휘 미3군이 해낸 것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코브라, 패튼 아닌 브래들리의 미 1군이 돌파해냈고 패튼은 돌파된 이후 투입된 겁니다.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약 1달 후 까지 영국에서 대기중이었습니다. 미군의 노르망디 전선 돌파, 영국군이 독일 기갑부대 80%를 까앵에서 고착 소모시킬 때 발생한 빈틈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상륙 이전 작전 계획에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고착 소모시키고 미군이 돌파하는 쪽으로 정해졌습니다. 이유는 실전 경험 사실상 전무한 미군이 독일 주력을 상대할 수 없었기에.
노르망디 상륙 당일 연합군 상륙 병력. 1. 미군 : 공수부대 포함 약 7만3천 (공수부대 약 1만5천). 상륙지는 2곳으로 유타, 오마하. 2. 영국 : 공수부대 포함 약 8만3천 (영국군 약 6만1천, 나머진 캐나다군). 상륙지는 3곳 골드, 주노, 소드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해군함정 총합 약 7천. 그 중 전투함 약 1천2백, 상륙주정 약 4천2백, 나머진 수송을 맡은 상선 포함 각종 지원함들. 상륙에 동원된 전투함 중 영국측이 약 9백, 영국측 상륙주정 약 3천3백, 상선 및 각종 지원함 대부분은 영국측 제공. 인공부두 멀버리 미군과 영국군 상륙지점에 건설되었는데 2곳 모두 영국이 건설했습니다. 멀버리 건설 얼마 후 폭풍우 몰아쳐 미군 상륙지에 건설된 멀버리는 파괴되었지만, 영국군 지역 멀버리는 건재. 영국군 지역 인공부두를 통해 상륙한 병력이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대략 120만 정도로 기억하는데 수치 좀 다를수도. 전차와 차량등도 수 만대가 상륙했습니다. 영불해협 해저로는 상륙군에 대한 연료 공급을 위한 해저 파이프도 영국이 설치. 상륙지 배분에서도 영국측이 칼레-독일쪽 방향으로 3곳, 미군은 상대적으로 후방쪽 셀부르 방향 2곳. 상륙지 배분할 때 이미 독일 주력 부대를 영국군이 맡는 식으로 정해짐. 실제로도 독일 기갑부대의 대부분은 영국군이 상대했고. 노르망디 전역에서의 지상군 지원을 위해 영국공군은 제2전술공군을 별로도 조직해 노르망디 하늘을 휘젓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롬멜이 공습당해 부상으로 전선에서 영구히 이탈된 것, 미군 공습이 아닌 영국공군 공습.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기갑군 사령부가 공습당해 지휘관 참모 상당수 사망, 부상으로 독일 기갑부대 반격 3주늦춘 것도 영공군.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측의 모르탱 역습 에니그마 해독으로 함정파고 팔레즈 포켓으로 몰아넣고 미군에게 돌파 시점 지정도 영국. 독일 주력 기갑부대 상대한 영국측 전차 손실과, 독일 알보병 주로 상대했던 미국측 전차 손실이 거의 대등한 것 ---------------------> 실전 경험 전무했던 생초짜 미군 그리고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영국군 역시 2/3는 신병들로 북아프리카 지중해 전선의 정예병은 일부만 섞인 상태. 북아프리카 지중해 전선의 영국 최정예 지상군 제8군은 이미 이태리 전선에 투입된 상태라 빼는 순간 노르망디 상륙 노출되니까. 영국에서 출발해 좁아 터진 해협 건너 침공하는데 어떻게 상륙일 당일 미군이 거의 대부분을 점할 수 있겠습니까? 영국이 육상세력도 아니고 오랜 기간 세계 최고의 해양국가였는데, 영국에서 출발한 상륙전에 미해군이 다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노르망디 상륙작전 계획상 상륙전 자체 최종 투입 병력은 약 100만으로, 미군 22개 사단, 영군군 12개 사단, 캐나다군 3개 사단, 폴란드 1개사단, 프랑스 1개사단 총 39개 사단. 하지만 상륙 당일 투입에선 영국군측이 오히려 약간 더 많았음. 이유는 생초짜 미군 보다는 조금은 더 안전하니까. 노르망디 전역 돌파 전까지 투입 병력에서 미군이 더 많았지만 압도한 것 아닌 미군 22개 사단, 영국캐나다 연방군 15개 사단. (자유 폴란드군은 2차대전 개전 이후 영국측이 무장시킨 군대입니다. 자유 폴란드군은 북아프리카, 이태리에서도 열심히 싸웠죠. 마켓가든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폴란드 공수부대도 있었지만 크게 보아선 영국과 아주 밀접한 동맹 협조관계. 자유 폴란드 정부는 2차대전 종전 후에 귀국하지 못하고 폴란드 공산정권이 자유노조 바웬사 정부에 무너진 이후 바웬사 정부에 자유 폴란드 깃발과 군의 정통성 이전하고 해체됩니다. 그런 이유로 영국에는 폴란드 출신 이주민들이 많습니다. 브렉시트로 그들 입지가 좁아진 것 안타깝군요. 21세기 현재도 영국군은 폴란드에서 대러시아 공동 방어 훈련 자주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최고 수준의 동맹 관계.) 노르망디 전역 돌파 후 북서유럽에 투입된 서부 연합군 총병력에선 미군이 약 300만, 영국캐나다군 약 100만으로 미군이 3배. 저 최종 투입 병력만으로 착각한 겁니다. 그리고 영국군은 북서유럽에 투입하지 않은 상당 규모의 병력이 지중해에 남아 있었고, 그리스에서 이미 44년 부터 공산 빨치산 토벌 후 그리스 왕정 복고시켰죠. 영국측 판단이 세월 지나고 보니 미국 보다 더 현명. 영국이 총병력에서 미국에 훨씬 적었던 이유는 인구 자체가 적어서. 2차대전 당시 소련 1억5천만 이상, 미국 1억 훨씬 넘고 영국은 5천만 정도. 독일 제외하곤 단위 인구당 가장 많은 병력 투입했을 겁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군 몸사림의 가장 큰 원인은 병력 부족 때문, 전차등 장비는 얼마든지 보충 가능했지만 병력은 거의 한계치 징집한 상태라 여유 없었음. 미국은 노르망디 상륙 직후 엔빌 상륙작전이라고 프랑스 남부 지중해 상륙전 벌였습니다. 미친 비효율의 극치. 영국은 지극 당연히 엔빌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왜 프랑스 남부에 상륙합니까? 어짜피 노르망디 돌파되면 프랑스 해방인데. 이태리에서도 미군은 프랑스쪽인 이태리 서부, 영국군은 그리스 발칸쪽 아드리아해쪽 동부에 상륙 전진. 영국은 사실 프랑스 상륙 보다는 그리스나 발칸반도에서 중부유럽으로의 침공도 고려했었죠, 스탈린 철의 장막 줄이기 위해. 영국이 힘이 부족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북서유럽 침공 합의했지만, 혹시나 하는 측면에서 이태리 동부 해안 침공로 선택. 유고의 티토를 지원하면서 소련의 위성국이 아닌 독자노선 걷도록 부추긴 것도 미국이 아닌 영국입니다. 미국은 덩치만 큰 어리숙한 최강대국으로 등장했던. 2차대전 서부연합군의 전쟁 밑그림 설계는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다 짠겁니다. 북아프리카 지중해 평정, 그 뒤 시칠리 상륙, 이태리 침공 그 다음에 미루고 미룬 북서유럽 침공. 북서유럽 상륙 시기는 영국은 최대한 미루려 했고, 미국은 시칠리 침공 생략하고 바로 프랑스 상륙 원했지만 논쟁에서 밀린 것. 영국은 북서유럽 상륙 최대한 미뤄, 독일과 소련 양측 희생이 최대화되기를 의도적으로 원했습니다. 카사블랑카 회담 당시 미국측 고위 인사가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사블랑카에서 미국이 영국에 완전히 당했다는 푸념을 이렇게. -----------> " 왔노라, 보았노라, 당했노라! " 카사블랑카 회담 당시 영국은 영국 본토 및 미국, 전세계 각지 영국군과 통신할 전용 통신함정 까지 갖추고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미국은 튀니지 점령 후 프랑스 침공하자고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영국측에 논쟁에서 완전 압도당해 저렇게 되어버린 것. 카사블랑카 이후 미국도 정신 차리고 전용 통신함정등 갖추고 영국과의 이후 협상에 나섰답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상세 세부계획도 영국이 수 년간 세워온 기본 설계에 미군 참전 후 미국이 숟가락 얹은 것. 영국은 지중해 전역 부터 미군을 총사령관 내세우면서, 그 휘하 실질적 작전 수행은 영국군 장군들로 도배하며 꼬드겼고. 노르망디 상륙전에서도 총사령관은 아이젠하워지만, 연합 지상군 사령관, 연합 해군 사령관은 영국, 연합공군은 영미 함께. 그렇게 작전 계획이 세워졌기에 영국이 3곳, 미국이 2곳 그것도 상대적으로 후방지역 2곳 배정된 겁니다.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 상했겠지만, 생초짜 미군이 독일 주력군 상대할 수도 없었으니 수용한 것. 물론 상륙 후 실전 경험 쌓은 뒤엔 물주 영향력이 말빨이나 작전계획통을 압도했습니다. 2차대전 후에도 중동에서 철수하는 영국군 대타로 미군이 기어들어가 개고생중이죠. 현재도 영국군은 아주 소수의 병력을 투입하면서 미국의 대규모 군대와 물자를 영국 국익에 유리한 쪽으로 중동에서 활용중. 겉보기엔 영국 수상이 미국의 푸들로 모욕당하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 영국측이 미국의 힘을 최대한 영국 국익에 활용하는 노련함. 미국은 아직도 과거 영국이 짜놓았던 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미군이 수렁에 빠지고 헤메는 중동은 영국이 떠넘기고 선물한 것. 영국은 베트남전에는 참전 안했습니다. 대신 호주군 대타로 극히 극히 극히 소규모로 살짝 투입시켜 살살 달랬죠.
Secret 1944 Mission to Assassinate Germany's Panzer Leaders :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 제거 공습 th-cam.com/video/c844En8XvC4/w-d-xo.html 미군이 롬멜 공습해 전선 이탈시키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핀포인트 공습으로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군 최고 지휘부 제거한 적 없습니다. 미국이 가지지 못한 영국의 정보능력, 브레칠리 파크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으로 얻은 정보 울트라.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역습인 모르탱 반격과 독일 기갑부대 최고 지휘부의 위치 모두 알아냈습니다. 영국 제2전술 공군의 전술기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보기를. 동영상 4분50초 이후 참조 (영어 자막만 제공됨)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 6월8일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위치를 파악하고, 6월10일 영국 제2전술공군은 호커 타이푼 42대, B-25 72대, 호위 스핏파이어 4개 편대 동원해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를 급습했습니다. 다수 지휘관 참모들이 사망하고, 지휘 통신차량등이 파손되어, 노르망디 상륙지에 대한 독일 서부 기갑군의 반격을 하루 연기하려 했지만 지휘부 희생이 너무 커 파리에서 새로 지휘부 구성하고 반격은 3주 연기되었습니다. 이 동영상 보니 영국은 이미 1차대전 때도 독일 빌헬름2세를 공습으로 암살시도 했던 적이 있었군요.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암살은 공습 아닌 특수부대 투입으로 시도했지만, 롬멜은 행운으로 마침 숙소에 없어서 실패. 하지만 노르망디에서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기습은 대성공. 영국이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모든 방어 계획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독 기갑군 상대 지극히 어려웠죠. 적 정보를 아는 것과 적을 물리치는 것은 별개인 겁니다. 특히 전차전에서 전차의 성능 차이는 정보로 해결 안됨. 격투기 헤비급 챔피온 상대로 그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해도 내가 격투기 선수가 아니면 아무 소용 없는 그런 상황. 영국은 독일 암호 해독으로 독일의 모든 방어계획 반격작전을 파악하고 대응했지만, 그 대응에서 일선의 전차병들과 군인들은 몸빵으로 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확연한 이점은 있었죠. 독일군 기갑군 주력이 까앵에 집결하고, 모르탱 반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전차 함정을 파서 팔레즈 포켓으로 유인하고, 미 패튼의 3군이 그 빈틈을 노려 돌파하도록 미군에게 공세 개시 시점을 지정해준 것. 미국이 2차대전 물주인 것 분명합니다. 영국 보다 북서유럽 상륙군에서 병력이 3 :1로 훨씬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과 그 이후의 전투를 거의 다했고 영국은 들러리라고 하긴 힘들죠. 미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그 쪽에서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베네룩스 3국을 경유하면서 해안가를 끼고 전진했죠. 이유는 독일의 v-1, v-2, v-3 기지 제거와 해안 항구 확보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서. v-3는 초장거리 대포입니다. 포신 길이가 과장 좀 보태면 100m대. 영국 입장에선 최우선 목표. 영국 본토가 독일 로켓과 장거리포로 타격당하던 시기라. 영국 공군이 5톤, 10톤 짜리 블록버스터로 우선 독 로켓 기지 예상 지점 폭격하고, 그 뒤에 영국 지상군이 점령해서 위협을 최종 제거. 노르망디 상륙 때 동원된 해군 미군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영국이 압도했겠습니까? 인공항구, 해저송유관도.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영어 발음으로 안트워프) 점령을 영국이 해야 더 합리적이죠. 모든 유지보수 인력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담당하기 더 편하니까. 또한 독일이 그런 중요한 항구 지역 순순히 내줄 이유 없으니, 항구와 항구 인근 해안과 강 지역에서 소규모의 상륙전도 전개되었습니다. 항구 점령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도 없죠. 독일군이 다 폭파시킨 후 점령. 그것 다 치우고 새로 항구 개통도 영국 몫이죠. 미군은 독일군 상대로 전투 주력하며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잡다한 일들 함께 하면서 전진했습니다. 영국 본토가 아닌 최전선의 연합군을 향한 독일의 v-2 공격 , 역시 대부분은 미군 지역이 아닌 영국군이 담당한 안트베르펜등 항구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의 소중한 전략 자산 v-2, 패튼의 미3군과 같은 곳 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치명적인 지역 공격. 미영소 당시 인구 영국은 5000만이 될까 말까, 소련은 1억5천만 이상, 미국도 1억을 넘었죠. 그 때문에 영국은 상시적 병력 부족에 시달렸던 겁니다. 미국이 북서유럽에 300만 투입할 때 왜 영국은 고작 100만 밖에 투입하지 못했는지, 왜 영국이 겨우 100만 북서유럽에 투입하면서도, 지중해 북아프리카에 육해공 100만 병력을 여전히 남겼는지 생각할 필요 있습니다. 영국군은 44년부터 그리스에서 빨치산 소탕. 사실 수백만 미군을 대서양 건너 퍼나른 것도 영국이 더 많았죠.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 7만톤 8만톤급이었던 퀸메리와 퀸엘리자벳은 미군 병력 만명 단위로 운반. 저 거대 여객선이 미국에서 출발해 대서양 건너다 침몰당했다면, 미군 수 만명이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는 것. 패튼 북아프리카에서 특별히 내세울 전투 없습니다. 패튼 아니 미 지상군 전체는 북아프리카에서 사실 마지막 순간 숟가락만 얹은 겁니다. 미공군은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름 역활했지만. 1943년 5월 튀니스 함락 까지 미 지상군과 해군 별로 한 일 없습니다. 영국 해공군은 몰타 방어 및 지중해 제해권, 영 지상군의 보급 유지와 지원 엄청난 전투치뤘죠. 영국 지상군도 탁월한 롬멜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보급을 유지하는 것도 능력.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승리? 영국의 보급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 그런 주장 할 수 없을 것. 추축국 해상보급선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250마일, 영국은 최단 지중해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수천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사용 못할 땐 아프리카 우회한 수만km 지구 차원. 영국의 해상보급은 룰루랄라 진행된 것 아니죠. 페데스탈 몰타 호송선단 보듯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된 겁니다. 사실 2차대전 영국의 전쟁 수행, 최전방 전투 투입 아닌 보급 지원 운반에도 엄청난 자원 소모. 대서양의 유보트전에서 유보트 1척 잡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함정과 항공기 합해서 약 100대 단위가 투입. 되니츠 회고록, 전황 악화로 유보트를 철수시켜야 했지만 철수시킬 경우, 대잠전에 투입된 막대한 병력과 자원이 독일 침공군의 전차 항공기 병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보면서도 잠수함전 지속했다는 내용. 북아프리카의 독일 이태리 추축군은 영국군에 의해 격멸되었습니다. 미군은 횃불 상륙 때 나타났고, 전투다운 전투 해본 적 없고, 캐서린 패스의 미 기갑부대 데뷰전은 전멸. 미 기갑부대가 캐서린 패스에서 노련한 독일군에게 전멸당할 무렵, 영국8군은 튀니지 거점 마랫 방어선을 뚫었고. 시칠리에서도 패튼은 거의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을 전투하면서 전진했고, 패튼은 지프 타고 손흔들면서 전진. 패튼은 또한 노르망디 상륙에 직접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패튼은 기만 유령부대 지휘관으로 도버에 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 투입됩니다. 패튼이 일선에서 배제된 이유는 패튼대전차군단 영화에도 나오듯 사병 뺨싸대기 날린 후 징계탓도 있었고.
누가 17분이라는 이 짧은 시간을 위해서 1차 사료를 뒤지고, 논문을 뒤지고, 번역 하고, 핵심을 요약해서 전달해줄까요. 최고입니다. 존테일 만세
마지막 비유 대박이네요ㅋㅋㅋㅋㅋ 빵 터졌음요ㅋㅋㅋ 미치광이 손에 쥐어진 광선검ㅎㅎ
북아프리카 시리즈 재밌게 잘봤어용
정말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냥 블랙홀이네요.
몽고메리가 왜 인기 없었는지 이해가 가네요.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戰史를 六何原則 에 입각하여 조리있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재능이 압권 입니다!
앞으로 충성구독자 가 되어 응원 하겠읍니다!
점점 더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요. 지식도 많이 얻어가요.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정말 재밌네요!
롬멜 몽고메리 비유도 찰떡이라 낄낄거리다가 패튼 인디아나 존스 듣고 빵 터짐 ㅋㅋㅋ
오늘도 존테일 만세!!
이번 영상에서 너무 잘 정리해주신 북아프리카전선 내용을 보니 여기에서의 결정적 하루는 롬멜이 자리 비운날인거 같네요. 그리고 체급이 깡패고 물량에 장사없고 몽고메리는 약아빠진 혐성놈 같네요. 역전다방 나가시면 샤를님과 존테일님이 같이 꽁트도 하고 입체적 시각에서 전황도 보고 좋을텐데 거기 자리가 꽉 차서 정말 아쉽습니다
롬멜도 더 약아빠진 몽고메리를 못이김. 롬멜이 패튼과 붙으면 너죽고 나죽자임
역시 전쟁은 대의명분!
아아.. 벌써 마지막이었군요..
다음꺼 기다립니다.
선 좋아요 꾹👍
세 명장의 비유가 압권!
😄😄😍😄😍
👍
지중해 해상권을 영국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진짜 골치 아팠겠네요 전쟁도 길어지고
다시보면서 느끼는것이...
미국이 영국에게 꽤 많은 정보, 지식을 받고 안준 이유를 알거같네요 ㅋㅋㅋ
영국군 하는게 저런거면... 위에도 비슷해보일듯 하고...
핵무기 관련한것도 그러하고 왜 미국이 영국에게 안줬을까? 했는데 얼추 이해갑니다 ㅋㅋㅋㅋ
결국 미국에게 도와달라고 한것도 자기들 죽기싫어서 그렇고, 전쟁은 자기들이 앞서서 이기고 싶고의 마음...
미국 입장에선 빡치죠
와 대대장 8명?
6:02 예! 패튼은 롬멜이 아니라 몽고메리와 붙습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가 인내합니다.
몽고메리 가 얼마나 야비한 기회 주의자인지 확실히 알수 있는영상
정작 자기네 기회는 소시하게 나가다 한방 반격당하고 이러한 실패한 작전은 주변이나 다른 연합군에게 책임 전가 하고 자기이득만 취한 정형적인 인간이었음.
마켓 가든~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th-cam.com/video/34oR2D1GVU4/w-d-xo.html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1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초,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th-cam.com/video/L-rRc5hQFbA/w-d-x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이것도 역전 다방이나 본 게임처럼 1시간 편성합시다.
샤를세환 남보람 두분의 콜라보 해주세요
히틀러가 롬멜을 직접 키웠기 때문에 아낀겁니다.롬멜은 귀족이 대다수인 군부에서 평민 출신인 명장이었죠.그때문에 견제도 많이...
북아프리카 전선만 해도 치고빅고 밀고 밀리고 이야기 거리가 엄청나네요 막판에 항복한 독일군 숫자만 30만명에 가까울 정도라니 뼈아프겠네요 ㅎㅎ
👍🏿
진짜 미군 없었으면 지금 유럽은 러시아빼고 다 독일령이 됐겠네요 ㄷㄷㄷ
1944년 코브라 작전 이후, 쾌속으로 진격 하다가, 메쯔 전투에서 3번 연패를 하면서 정신이 나갑니다. 대신 워커 장군(한국전 전사)이 교대하고 패튼 3군단이 메쯔를 우회를 합니다.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th-cam.com/video/34oR2D1GVU4/w-d-xo.html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1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초,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코브라, 패튼 지휘 미3군이 해낸 것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코브라, 패튼 아닌 브래들리의 미 1군이 돌파해냈고 패튼은 돌파된 이후 투입된 겁니다.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약 1달 후 까지 영국에서 대기중이었습니다.
미군의 노르망디 전선 돌파,
영국군이 독일 기갑부대 80%를 까앵에서 고착 소모시킬 때 발생한 빈틈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상륙 이전 작전 계획에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고착 소모시키고 미군이 돌파하는 쪽으로 정해졌습니다.
이유는 실전 경험 사실상 전무한 미군이 독일 주력을 상대할 수 없었기에.
노르망디 상륙 당일 연합군 상륙 병력.
1. 미군 : 공수부대 포함 약 7만3천 (공수부대 약 1만5천). 상륙지는 2곳으로 유타, 오마하.
2. 영국 : 공수부대 포함 약 8만3천 (영국군 약 6만1천, 나머진 캐나다군). 상륙지는 3곳 골드, 주노, 소드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해군함정 총합 약 7천.
그 중 전투함 약 1천2백, 상륙주정 약 4천2백, 나머진 수송을 맡은 상선 포함 각종 지원함들.
상륙에 동원된 전투함 중 영국측이 약 9백, 영국측 상륙주정 약 3천3백, 상선 및 각종 지원함 대부분은 영국측 제공.
인공부두 멀버리 미군과 영국군 상륙지점에 건설되었는데 2곳 모두 영국이 건설했습니다.
멀버리 건설 얼마 후 폭풍우 몰아쳐 미군 상륙지에 건설된 멀버리는 파괴되었지만, 영국군 지역 멀버리는 건재.
영국군 지역 인공부두를 통해 상륙한 병력이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대략 120만 정도로 기억하는데 수치 좀 다를수도.
전차와 차량등도 수 만대가 상륙했습니다. 영불해협 해저로는 상륙군에 대한 연료 공급을 위한 해저 파이프도 영국이 설치.
상륙지 배분에서도 영국측이 칼레-독일쪽 방향으로 3곳, 미군은 상대적으로 후방쪽 셀부르 방향 2곳.
상륙지 배분할 때 이미 독일 주력 부대를 영국군이 맡는 식으로 정해짐. 실제로도 독일 기갑부대의 대부분은 영국군이 상대했고.
노르망디 전역에서의 지상군 지원을 위해 영국공군은 제2전술공군을 별로도 조직해 노르망디 하늘을 휘젓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롬멜이 공습당해 부상으로 전선에서 영구히 이탈된 것, 미군 공습이 아닌 영국공군 공습.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기갑군 사령부가 공습당해 지휘관 참모 상당수 사망, 부상으로 독일 기갑부대 반격 3주늦춘 것도 영공군.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측의 모르탱 역습 에니그마 해독으로 함정파고 팔레즈 포켓으로 몰아넣고 미군에게 돌파 시점 지정도 영국.
독일 주력 기갑부대 상대한 영국측 전차 손실과,
독일 알보병 주로 상대했던 미국측 전차 손실이 거의 대등한 것 ---------------------> 실전 경험 전무했던 생초짜 미군
그리고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영국군 역시 2/3는 신병들로 북아프리카 지중해 전선의 정예병은 일부만 섞인 상태.
북아프리카 지중해 전선의 영국 최정예 지상군 제8군은 이미 이태리 전선에 투입된 상태라 빼는 순간 노르망디 상륙 노출되니까.
영국에서 출발해 좁아 터진 해협 건너 침공하는데 어떻게 상륙일 당일 미군이 거의 대부분을 점할 수 있겠습니까?
영국이 육상세력도 아니고 오랜 기간 세계 최고의 해양국가였는데, 영국에서 출발한 상륙전에 미해군이 다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노르망디 상륙작전 계획상 상륙전 자체 최종 투입 병력은 약 100만으로,
미군 22개 사단, 영군군 12개 사단, 캐나다군 3개 사단, 폴란드 1개사단, 프랑스 1개사단 총 39개 사단.
하지만 상륙 당일 투입에선 영국군측이 오히려 약간 더 많았음. 이유는 생초짜 미군 보다는 조금은 더 안전하니까.
노르망디 전역 돌파 전까지 투입 병력에서 미군이 더 많았지만 압도한 것 아닌 미군 22개 사단, 영국캐나다 연방군 15개 사단.
(자유 폴란드군은 2차대전 개전 이후 영국측이 무장시킨 군대입니다. 자유 폴란드군은 북아프리카, 이태리에서도 열심히 싸웠죠.
마켓가든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폴란드 공수부대도 있었지만 크게 보아선 영국과 아주 밀접한 동맹 협조관계. 자유 폴란드 정부는
2차대전 종전 후에 귀국하지 못하고 폴란드 공산정권이 자유노조 바웬사 정부에 무너진 이후 바웬사 정부에 자유 폴란드 깃발과
군의 정통성 이전하고 해체됩니다. 그런 이유로 영국에는 폴란드 출신 이주민들이 많습니다. 브렉시트로 그들 입지가 좁아진 것
안타깝군요. 21세기 현재도 영국군은 폴란드에서 대러시아 공동 방어 훈련 자주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최고 수준의 동맹 관계.)
노르망디 전역 돌파 후 북서유럽에 투입된 서부 연합군 총병력에선 미군이 약 300만, 영국캐나다군 약 100만으로 미군이 3배.
저 최종 투입 병력만으로 착각한 겁니다. 그리고 영국군은 북서유럽에 투입하지 않은 상당 규모의 병력이
지중해에 남아 있었고, 그리스에서 이미 44년 부터 공산 빨치산 토벌 후 그리스 왕정 복고시켰죠. 영국측 판단이 세월 지나고
보니 미국 보다 더 현명. 영국이 총병력에서 미국에 훨씬 적었던 이유는 인구 자체가 적어서. 2차대전 당시 소련 1억5천만 이상,
미국 1억 훨씬 넘고 영국은 5천만 정도. 독일 제외하곤 단위 인구당 가장 많은 병력 투입했을 겁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군
몸사림의 가장 큰 원인은 병력 부족 때문, 전차등 장비는 얼마든지 보충 가능했지만 병력은 거의 한계치 징집한 상태라 여유 없었음.
미국은 노르망디 상륙 직후 엔빌 상륙작전이라고 프랑스 남부 지중해 상륙전 벌였습니다. 미친 비효율의 극치.
영국은 지극 당연히 엔빌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왜 프랑스 남부에 상륙합니까? 어짜피 노르망디 돌파되면 프랑스 해방인데.
이태리에서도 미군은 프랑스쪽인 이태리 서부, 영국군은 그리스 발칸쪽 아드리아해쪽 동부에 상륙 전진.
영국은 사실 프랑스 상륙 보다는 그리스나 발칸반도에서 중부유럽으로의 침공도 고려했었죠, 스탈린 철의 장막 줄이기 위해.
영국이 힘이 부족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북서유럽 침공 합의했지만, 혹시나 하는 측면에서 이태리 동부 해안 침공로 선택.
유고의 티토를 지원하면서 소련의 위성국이 아닌 독자노선 걷도록 부추긴 것도 미국이 아닌 영국입니다.
미국은 덩치만 큰 어리숙한 최강대국으로 등장했던.
2차대전 서부연합군의 전쟁 밑그림 설계는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다 짠겁니다.
북아프리카 지중해 평정, 그 뒤 시칠리 상륙, 이태리 침공 그 다음에 미루고 미룬 북서유럽 침공.
북서유럽 상륙 시기는 영국은 최대한 미루려 했고, 미국은 시칠리 침공 생략하고 바로 프랑스 상륙 원했지만 논쟁에서 밀린 것.
영국은 북서유럽 상륙 최대한 미뤄, 독일과 소련 양측 희생이 최대화되기를 의도적으로 원했습니다.
카사블랑카 회담 당시 미국측 고위 인사가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사블랑카에서 미국이 영국에 완전히 당했다는 푸념을 이렇게. -----------> " 왔노라, 보았노라, 당했노라! "
카사블랑카 회담 당시 영국은 영국 본토 및 미국, 전세계 각지 영국군과 통신할 전용 통신함정 까지 갖추고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미국은 튀니지 점령 후 프랑스 침공하자고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영국측에 논쟁에서 완전 압도당해 저렇게 되어버린 것.
카사블랑카 이후 미국도 정신 차리고 전용 통신함정등 갖추고 영국과의 이후 협상에 나섰답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상세 세부계획도 영국이 수 년간 세워온 기본 설계에 미군 참전 후 미국이 숟가락 얹은 것.
영국은 지중해 전역 부터 미군을 총사령관 내세우면서, 그 휘하 실질적 작전 수행은 영국군 장군들로 도배하며 꼬드겼고.
노르망디 상륙전에서도 총사령관은 아이젠하워지만, 연합 지상군 사령관, 연합 해군 사령관은 영국, 연합공군은 영미 함께.
그렇게 작전 계획이 세워졌기에 영국이 3곳, 미국이 2곳 그것도 상대적으로 후방지역 2곳 배정된 겁니다.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 상했겠지만, 생초짜 미군이 독일 주력군 상대할 수도 없었으니 수용한 것.
물론 상륙 후 실전 경험 쌓은 뒤엔 물주 영향력이 말빨이나 작전계획통을 압도했습니다.
2차대전 후에도 중동에서 철수하는 영국군 대타로 미군이 기어들어가 개고생중이죠.
현재도 영국군은 아주 소수의 병력을 투입하면서 미국의 대규모 군대와 물자를 영국 국익에 유리한 쪽으로 중동에서 활용중.
겉보기엔 영국 수상이 미국의 푸들로 모욕당하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 영국측이 미국의 힘을 최대한 영국 국익에 활용하는 노련함.
미국은 아직도 과거 영국이 짜놓았던 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미군이 수렁에 빠지고 헤메는 중동은 영국이 떠넘기고 선물한 것.
영국은 베트남전에는 참전 안했습니다. 대신 호주군 대타로 극히 극히 극히 소규모로 살짝 투입시켜 살살 달랬죠.
Secret 1944 Mission to Assassinate Germany's Panzer Leaders :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 제거 공습
th-cam.com/video/c844En8XvC4/w-d-xo.html
미군이 롬멜 공습해 전선 이탈시키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핀포인트 공습으로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군 최고 지휘부 제거한 적 없습니다.
미국이 가지지 못한 영국의 정보능력, 브레칠리 파크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으로 얻은 정보 울트라.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역습인 모르탱 반격과 독일 기갑부대 최고 지휘부의 위치 모두 알아냈습니다.
영국 제2전술 공군의 전술기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보기를.
동영상 4분50초 이후 참조 (영어 자막만 제공됨)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
6월8일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위치를 파악하고, 6월10일
영국 제2전술공군은 호커 타이푼 42대, B-25 72대, 호위 스핏파이어 4개 편대 동원해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를 급습했습니다. 다수 지휘관 참모들이 사망하고, 지휘 통신차량등이 파손되어,
노르망디 상륙지에 대한 독일 서부 기갑군의 반격을 하루 연기하려 했지만 지휘부 희생이 너무 커 파리에서
새로 지휘부 구성하고 반격은 3주 연기되었습니다. 이 동영상 보니 영국은 이미 1차대전 때도 독일 빌헬름2세를
공습으로 암살시도 했던 적이 있었군요.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암살은 공습 아닌 특수부대 투입으로 시도했지만,
롬멜은 행운으로 마침 숙소에 없어서 실패. 하지만 노르망디에서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기습은 대성공.
영국이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모든 방어 계획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독 기갑군 상대 지극히 어려웠죠.
적 정보를 아는 것과 적을 물리치는 것은 별개인 겁니다. 특히 전차전에서 전차의 성능 차이는 정보로 해결 안됨.
격투기 헤비급 챔피온 상대로 그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해도 내가 격투기 선수가 아니면 아무 소용 없는 그런 상황.
영국은 독일 암호 해독으로 독일의 모든 방어계획 반격작전을 파악하고 대응했지만, 그 대응에서 일선의 전차병들과
군인들은 몸빵으로 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확연한 이점은 있었죠. 독일군 기갑군 주력이 까앵에 집결하고, 모르탱
반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전차 함정을 파서 팔레즈 포켓으로 유인하고, 미 패튼의 3군이 그 빈틈을 노려
돌파하도록 미군에게 공세 개시 시점을 지정해준 것.
미국이 2차대전 물주인 것 분명합니다.
영국 보다 북서유럽 상륙군에서 병력이 3 :1로 훨씬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과 그 이후의 전투를 거의 다했고 영국은 들러리라고 하긴 힘들죠.
미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그 쪽에서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베네룩스 3국을 경유하면서 해안가를 끼고 전진했죠.
이유는 독일의 v-1, v-2, v-3 기지 제거와 해안 항구 확보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서.
v-3는 초장거리 대포입니다. 포신 길이가 과장 좀 보태면 100m대. 영국 입장에선 최우선 목표.
영국 본토가 독일 로켓과 장거리포로 타격당하던 시기라.
영국 공군이 5톤, 10톤 짜리 블록버스터로
우선 독 로켓 기지 예상 지점 폭격하고, 그 뒤에 영국 지상군이 점령해서 위협을 최종 제거.
노르망디 상륙 때 동원된 해군 미군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영국이 압도했겠습니까? 인공항구, 해저송유관도.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영어 발음으로 안트워프) 점령을 영국이 해야 더 합리적이죠. 모든 유지보수 인력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담당하기 더 편하니까.
또한 독일이 그런 중요한 항구 지역 순순히 내줄 이유 없으니, 항구와 항구 인근 해안과 강 지역에서
소규모의 상륙전도 전개되었습니다. 항구 점령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도 없죠. 독일군이 다 폭파시킨 후 점령.
그것 다 치우고 새로 항구 개통도 영국 몫이죠. 미군은 독일군 상대로 전투 주력하며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잡다한
일들 함께 하면서 전진했습니다.
영국 본토가 아닌 최전선의 연합군을 향한 독일의 v-2 공격 ,
역시 대부분은 미군 지역이 아닌 영국군이 담당한 안트베르펜등 항구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의 소중한 전략 자산 v-2, 패튼의 미3군과 같은 곳 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치명적인 지역 공격.
미영소 당시 인구 영국은 5000만이 될까 말까, 소련은 1억5천만 이상, 미국도 1억을 넘었죠.
그 때문에 영국은 상시적 병력 부족에 시달렸던 겁니다. 미국이 북서유럽에 300만 투입할 때 왜 영국은
고작 100만 밖에 투입하지 못했는지, 왜 영국이 겨우 100만 북서유럽에 투입하면서도, 지중해 북아프리카에
육해공 100만 병력을 여전히 남겼는지 생각할 필요 있습니다. 영국군은 44년부터 그리스에서 빨치산 소탕.
사실 수백만 미군을 대서양 건너 퍼나른 것도 영국이 더 많았죠.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 7만톤 8만톤급이었던 퀸메리와 퀸엘리자벳은 미군 병력 만명 단위로 운반.
저 거대 여객선이 미국에서 출발해 대서양 건너다 침몰당했다면, 미군 수 만명이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는 것.
패튼 북아프리카에서 특별히 내세울 전투 없습니다.
패튼 아니 미 지상군 전체는 북아프리카에서 사실 마지막 순간 숟가락만 얹은 겁니다.
미공군은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름 역활했지만.
1943년 5월 튀니스 함락 까지 미 지상군과 해군 별로 한 일 없습니다.
영국 해공군은 몰타 방어 및 지중해 제해권, 영 지상군의 보급 유지와 지원 엄청난 전투치뤘죠.
영국 지상군도 탁월한 롬멜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보급을 유지하는 것도 능력.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승리?
영국의 보급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 그런 주장 할 수 없을 것.
추축국 해상보급선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250마일, 영국은 최단 지중해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수천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사용 못할 땐 아프리카 우회한 수만km 지구 차원.
영국의 해상보급은 룰루랄라 진행된 것 아니죠.
페데스탈 몰타 호송선단 보듯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된 겁니다.
사실 2차대전 영국의 전쟁 수행, 최전방 전투 투입 아닌 보급 지원 운반에도 엄청난 자원 소모.
대서양의 유보트전에서 유보트 1척 잡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함정과 항공기 합해서 약 100대 단위가 투입.
되니츠 회고록, 전황 악화로 유보트를 철수시켜야 했지만 철수시킬 경우, 대잠전에 투입된 막대한 병력과 자원이
독일 침공군의 전차 항공기 병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보면서도 잠수함전 지속했다는 내용.
북아프리카의 독일 이태리 추축군은 영국군에 의해 격멸되었습니다.
미군은 횃불 상륙 때 나타났고, 전투다운 전투 해본 적 없고, 캐서린 패스의 미 기갑부대 데뷰전은 전멸.
미 기갑부대가 캐서린 패스에서 노련한 독일군에게 전멸당할 무렵, 영국8군은 튀니지 거점 마랫 방어선을 뚫었고.
시칠리에서도 패튼은 거의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을 전투하면서 전진했고, 패튼은 지프 타고 손흔들면서 전진.
패튼은 또한 노르망디 상륙에 직접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패튼은 기만 유령부대 지휘관으로 도버에 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 투입됩니다.
패튼이 일선에서 배제된 이유는 패튼대전차군단 영화에도 나오듯 사병 뺨싸대기 날린 후 징계탓도 있었고.
패튼은 약점의 반대편에 있는 남자.
모델원수 집단군을 대대단위로 쪼개서 마이크로컨트롤하는 괴물
275000명이라는 병력을 날려버린 히틀러
우리의 스티븐시갈~존테일ㅋ칵펀쳐
몽고메리의 주식량은 고구마가 아닐련지...ㅎ
16:32 정말 이상한 건...40년 5월 10일 프랑스 침공...43년 5월 13일 북 아프리카 전역 종료...45년 5월 11일 독일 중부집단군 프라하에서 저항 종료...
이태리군은 그냥 북아프리카에 파스타집차렸으면 쉽게 정복가능했을 것
결국 보급전의 패배
패튼 vs 롬멜 2차대전 붙었다면 역사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
존테일!! 존테일!! 존테일!!
롬멜 vs 몽고메리 & 롬멜 vs 패튼 싸우면 누가이길까 🤔🤔🤔?!
난 정말 몽고메리 싫어... 말아먹는 장군의 전형...
몽고메리 선생...
으휴 몽고메리…. 졸렬한자
순삭밀톡 이탈리아 전선 & 프랑스 노르망디상륙작전 언제 나올까 🤔?!
시칠리아 상륙작전 먼저 해야할것 같은데
몽고메리같은 경우 귀족이었지만 왕따를 많이 당해서 살아 남으려고 평민 부하들에게 어필을 한거고...
동맹군이 미국인 나라와 동맹군이 이탈리아인 나라의 차이 ㅋㅋㅋ
유럽의 조선, 이태리.^^
독일 VS 미국 & 영국
전시상황은 전투에 참가한 최전선만 알고 시시각각 적의 위치가 변하는데 어떻게 구체적인 전술을 알려주냐? 소설 삼국지의 제갈공명 빨강주머니에서나 가능하지
기다리다 지친 독일군, ㅋㅋㅋ
몽고메리 쓔렉이네요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를 읽어보세요. ... 몽고메리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갖게 됩니다.
스스로 포위된 ㅋㅋㅋ
역시 연합군은 으근히 손발도 안맞고 고집불통들이라
몽고메리가...
전쟁사의 박한이 루틴을 갖은 사람이었구나...
헬멧 냄새 맡을때까지는
전장에 안나가!!!!!!
몽고메리를 비유하자면 축구선수 '인자기'........ 줏어먹는데 1인자.
막타충 몽고메리
패튼장군의 약점은 전술은 있어도 전략이 없었다고 독일군 장군들의 메무아에 적혀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때 그때 전투를 해결 해나가는 능력 과 운이 좋았지만, 사령관의 자질은 없었다고 평가 했습니다.
혐성 ㄷㄷ
결국 롬멜이 있었고 없었고의 차이네
영국 프랑스 점점 더 싫어지네.
여러분 요즘 이념분쟁이 많은데 조심하세요.어차피 님들은 쓰고 버리는 말일 뿐입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