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선생묘소일원 金淨先生墓所一圓 The Area of Kim Jeong's Tomb 조선시대 문화재자료제25호 산해당山海堂 별묘別廟 신도비神道碑 부인정려각旌閭閣 묘소墓所 요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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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20 ม.ค. 2025
  • 대전광역시 문화유산자료
    김정선생묘소일원
    金淨先生墓所一圓
    The Area of Kim Jeong's Tomb
    종목 문화재자료 (구) 제25호
    (1991년 7월 10일 지정)
    수량 묘 1기 48.6m2,
    정려각 1동 32.1m2,
    별묘 1동 32.7m2,
    산해당 1동 102.2 m2
    시대 조선시대
    소재지 대전 동구 회남로 117
    (우) 34501(지번) 신하동 268-5
    소유관리자 경주김씨충암공파종중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新下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유적이다.
    1991년 7월 10일 대전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충암 김정(沖庵 金淨, 1486~1521)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문신으로,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庵),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刑曹判書)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지낸
    충암 김정(沖庵 金淨, 1486∼1521)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건물 등
    향약을 알리는데 큰 업적을 남긴
    김정 선생의 유적이 자리한 장소
    선생은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더불어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기 위해
    미신타파와 향론(鄕論)의 상호부조에 힘썼고,
    향약(鄕約)을 전국에 실시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금산에 유배된 후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망으로부터 55년이 지난 1576년(선조 9)
    문간(文簡)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는 청백리(淸白吏)의 한 사람으로
    녹선(錄選)되기도 했다.
    1978년 대청댐 수몰로 물에 잠긴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서 국비(國費)로 이곳 묘골로
    묘를 옮기면서 신도비(神道碑),
    충암선생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한
    별묘(別廟), 산해당(山海堂),
    그의 부인 정려각(旌閭閣)
    등도 함께 옮겼다.
    그의 부인은 조선 전기 학자
    쌍청당 송유(雙淸堂 宋愉,1389-1446)의
    현손녀 은진송씨(恩津宋氏)이다.
    진사 퇴어 여익(退漁 汝翼, 1684 ~ 1755)의 딸이다.
    산해당(山海堂)
    예전에는 강당이었으나 지금은 후손들의 재실로
    사용한다.
    명칭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충암 선생의 성품을
    '높은 산과 같고 넓은 바다와 같다'
    (산고해활山高海活)에서 유래
    신도비(神道碑)
    충암 김정(沖庵 金淨, 1486~1521)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
    이 지역은 대덕군 지역이던 곳이
    근래 대전광역시 동구로 편입되었다.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화가이다.
    시화(詩畫)에 능했으며 문집에는 충암문집,
    저서에는 제주풍토록 등이 있다.
    김정이 영모(翎毛) 등 그림을 잘 그린 사실이
    후대의 기록과 18세기 동국문헌록,
    서화가편에 언급되었다.
    김정의 영모도(翎毛圖) 가운데
    산초백두도(山椒白頭圖)가 대표작이다.
    김정은 글씨도 잘 썼다.
    특히 초서를 잘 썼는데,
    1519년 경 구례현감으로 있던
    안처순(安處順)에게 보낸
    간찰이 보물 1198호로 지정된
    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에 실려 있다.
    주요 작품
    山椒白頭圖, 翎毛折枝圖, 翎毛山水圖,
    送詩(1518, 己卯諸賢手筆), 簡札(1519년 경)
    여적 餘滴
    취재
    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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