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하는 삶의 고민을 철학적으로 풀어낸 저의 책 📖 서점 링크 교보문고: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578919 예스24: www.yes24.com/Product/Goods/135744489 알라딘: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426887
2분까지 봤는데 여기서 말하는 픽션적인 대상은 약속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정확히 똑같은 사과 두개가 존재할 수 없지만 1+1=2라고 약속한 것 처럼. 약속은 믿음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이게 최신 이론이었구나 올해 들어서 이 주제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영상이 도움이 될 듯 싶다. 나머지도 계속 봐야겠다. 4분30초까지 봤는데 여기서 나오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은 곧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어두워서 충분한 정보가 없었지만 그냥 해골에 담긴 물이 깨끗한 물이라고 믿기로 한 것이다. 15분까지 보았는데 의미장이라는 개념이 엄청 재미있네요. 17분까지 봤는데 판별의 기준이 있을때 실재가 된다는것도 재미있네요. 가지고 있는 관점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니까 사람마다 실재한다고 보는 범위도 다르겠네요. 20분까지 봤는데 결국 모든것은 실재하는지 아닌지 확실히 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에 기반해서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 우리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믿음의 범위가 정해지고, 그 범위 안에 들어오는 약속들에 기반해서 세상을 본다.
불교철학이 생각나는 그런 이론이에용. 배움이 짧아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존재를 대하는 관점이 비슷한거같아용. 특정할 수 있는 객관적 세계를 계속 반박하려한다는 점에서용. 불교는 그래서 주변의 주관적 감각에만 집중하는 수련법이 있죠. 우리가 알고 있는 객관과 지식은 허상이라고 봤으니까요.
최신 철학 경향을 설명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신실재론 외에 정동이론, 신유물론, 객체지향 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같은 현대 철학 조류들도 소개해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비록 최신 철학들이 과거에 비해 담론들이 거대하거나 혁신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유튜브에서 누군가 한 명은 최근 철학이 어떻게 갈라지고 어떤 계보에 따라 나아가고 있는지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집합"이 있는데 만약 자신이 자기에 포함되지 않으면 조건이 성립하므로 자기자신에 포함되고 만약 자기자신이 자기를 포함하면 조건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자기자신을 포함하지 않게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집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ZFC공리계나 러셀의 계형이론이 등장해서 집합의 정의를 조금더 엄밀히 하게 됩니다
최근에, 진실을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종속시켜버리는 탈진실(post-truth)에 맞서기 위해 문학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교육철학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문학이 허구라는 것을 알고 읽으며, 건강하게 설계된 개방적 허구로서의 문학을 읽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 논문은 하루키의 소설론을 바탕으로 그런 주장을 펼쳤지만 이 영상에서, 특히 후반부에서 말하는 바와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는 듯합니다. "거짓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진실"이 post-truth적인 생각으로서 "순전한 환상"에 갇히게 되는 것이라면, 허구임을 전제하는 문학을 읽는 사람들은 오히려 실재에 대한 감각을 더 기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 논문의 참고문헌 목록을 살펴보니 마르쿠스 가브리엘을 다룬 다른 교육철학 논문도 있었네요. ^^;) 여튼 존재론의 측면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우리의 일상과 관련해서도 꽤 중요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1. 노력해도 극복을 못하거나 극복이 안되는 일도 있다. 2. 과유불급: 뭐든지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이건 독서, 종교, 운동, 게임도 마찬가지다. 3.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게 좋은 삶은 아니다. 적당히 모르는 것도 있어야 한다. 4. 학교폭력은 녹음기로 녹음해서 고소하면 된다. 5. 공부 습관이 잡혀있지 않다면 그냥 포기하라. 공부 습관을 잡는 데만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6. 책 출간하면 어디 대학이든지 가능하다. 7. 내신(학교 시험)이 수능의 기초다. 내신 절대 포기하지 말라! 해외대학에 갈 때, 쓰이는 바탕 자료가 학교 시험이기 때문이다. 8. 연애를 할 거라면 이 사실을 명심하라. 이 사람이랑 결혼까지 할 수 있을지..? 그게 아니라면 안하는 게 낫다.ㆍ
철학자란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무심결에 지나쳐버린 것을 포착하여 주제로 삼아 자신만의 언어로 논거를 디테일하게 잘 풀어놓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마치 바윗돌을 부수고 점점더 잘게 부수어 놓을 수록 지적 능력이 탁월해지는 생각이 크기와 넓이 로 풍부하게 구사 묘사하는 능력 힘 이런 부분이 보통사람과 다르다고 봐요.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 지구가 듣고 우주로 소리가 나간다 해도 살아있다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이 세상 주인은 아무도 아닌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지구의 조각을 잡고 사는 다양한 자신들을 인정하게 될것입니다. 내가 주장하여 나라나 민족이 중요하게 됩니다. 이제는 인류가 모두 중요한 시점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서로가 하여야 합니다. 어머니 태에서 태어날때 우주의 기운으로 태어나 우주의 마음이 이미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우주에서 소우주로 태어나 이미 있었던 큰 우주를 또한 알아차려 재관혼사에 따라 또한 소우주를 탄생시키는 삶의 크기는 우리 인간에 대해 본질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천재분께는 인간의 철학들을 근간으로 뭔가 더 깨달음이란 자신의 시각이 최신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이시군요. 그러나 저도 제 개인적인 존재로써 놓여진 세상은 주변은 평화롭고 잘 살아보이나, 남과 다르게 인생의 굴레가 전쟁통이다보니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도 더 힘든 일들이 연속이라 죄얼이나 탄생이전 하나님께 범죄함, 불완전한 본질 등 생각하게 되지요. 저같은 사람은 범접할수 없던 과학이나 철학을 이런 유튜브에서 보고 듣게 되면서 느껴진 건 어릴 때 수학공식을 배우면서 느꼈던 생각, 이 세상의 모든 공간이란 수학공식을 이렇다 저렇다 무수하게 만들어 채울 수도 있겠다는 거였어요. 우리의 생각도 무수하게 나와 누군에겐 이렇게 저렇게 보여지는 것일텐데 누군가의 발견이나 주장이 도드라지면 그게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코끼리든 코끼리에 붙은 세균이든 그저 무수하게 존재하는 한정된 지구안에 시간을 따라 생육번성하는 물체이지요. 천재분이나 저도 그런 면에선 마찬가지인데, 지구란 공간에서 처하고 겪은 안생은 참 다르지요. 세상이 인정한다는 천재분의 철학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언어가 저라는 개인이 살아온 삶으로썬 느껴지는 게 이질적인 것처럼, 많은 여느 사람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세상공식일 수도 있는 것이겠네요.
손님: 이발사님. 항상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이발사님의 머리는 누가 깎아주나요? 이발사: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그러고 보니 옛날에 단골손님 중에서 러셀이라는 분이 언젠가 똑같은 질문을 하셨었는데요, 나중에는 대학 교수님들이 그 질문을 '러셀의 역설'이라고 부르면서 가르치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손님: 그래서 러셀이라는 사람이 그 질문에 답을 얻었다고 하던가요? 이발사: 아마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공부를 많이 안 한 사람이라서 어려운 건 잘 몰라요. 아무튼 그 이후에 괴델이라는 손님이 오셨었는데, 수학자들이 자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탄하시면서 오직 러셀 그 사람은 내 견해를 반겨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하던 것도 기억이 나네요. (한 달 후) 이발사: 어이쿠 손님, 보통 두세 달에 한 번 찾아오시던데 이번에는 한 달 만에 다시 오셨네요. 손님: 네. 실은 이발사님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평소보다 더 빨리 찾아온 건데요, 저번에 머리를 깎고 집에 돌아가서 이발사님이 언급하셨던 러셀과 괴델이라는 두 사람에 대해서 더 알아봤더니, 제가 얼마 전에 서점의 신간코너에서 산 '허구의 철학'이라는 책에 써있는 내용과 비슷한 말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발사: 그래요? 러셀과 괴델 두 분 모두 오래전의 손님들인데 추억이 새록새록하네요. 손님: 철학은 모든 학문의 근본이라고 하는데, 왜 철학자들이 하는 말들은 마치 똑같은 머리카락이 끊임없이 계속 자라나고 다시 잘리듯이 다들 뭔가 비슷한게 반복되는 느낌일까요? 이발사: 글쎄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학교를 오래 다니지 않아서 어려운 건 잘 모릅니다. 다만 러셀과 괴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의 손님 중에서 왕족이었던 솔로몬이라는 분이 강조했었던 그 말씀이 떠오르네요. 손님: 무슨 말인데요? 이발사: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 것이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 (성경 전도서) 손님: ..? '서양 철학은 결국 플라톤에 대한 끊임없는 각주다 - 화이트헤드'..?!! 이발사: 놀라는 표정을 지으시네요? 손님: 아니 근데 잠시만요, 이발사님은 대체 나이가 몇 살이시길래 고대의 인물인 솔로몬의 머리까지 잘라주셨던 겁니까? 이발사: 아시면서 그러세요. 이 이발소는 가상의 장소로서,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특정 답글이라는 상황과 그 맥락의 '의미장' 속에서만 존재하지요. 위에서 '한 달 후'라고 써있는 걸 지나왔을 때에, 사실은 일초 남짓도 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대략 30일이 지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 주의: 위 내용 중 '마치 똑같은 머리카락이 끊임없이 계속 자라나고 다시 잘리듯이' 라는 구절은 탈모인들에게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장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탈모인에겐 가발의 의미장이 있죠. 의미장에는 의미의 의미장이 있고요. 보통의 철학은 의미의 의미장의 연쇄죠. 일상이 일상적인 상품들의 의미장의 연쇄이듯. 진짜 일상은 상품들의 연쇄가 끊어지는 곳에서 시작되고, 진짜 철학도 의미의 의미장의 연쇄가 끊어지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철학사에서 엄선된 몇몇은 플라톤과 결이 다르죠. 본문에서 얼렁뚱땅 넘어간 것을 각주에서 쇄신하는 사람들. 철학을 시작하는 철학자들.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더 많은 의미장을 갖게 된다면 내 삶이 더욱 다층적인 차원에서 존재할 수 있게 되어 더 풍부한 삶을 누리게 할 수도 있겠군요. 어떤 생각을 접하다 보면 실재하는 것의 절대성을 말하면서 우리의 상상을 제거하려는 견지가 있고, 반면에 우리 앞의 현실은 다 우리의 환상이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무시하는 견해를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상은 앞서 말한 양자가 놓쳤던 것들에 대하여 깊게 숙고한 것 같네요. 무의미한 세계에서 혼자만의 환상에 빠지지 않고 실재적 삶의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 해야 하겠어요.
1. 사람 이성(감성)은, ⑴ 물질을 추상으로 받아 들이니, 1.1. 의미장 존재론. ⑴ 모든 대상은, 의미장 안에서만 존재한다. 에서, ① 물질 = 대상(실재). ② 추상 = 의미장(존재). 겠네요. 1-1. 의미. ⑴ 물질인, 대상(실재)은, 추상인 의미장(존재)안에서만 존재한다. 겠네요. . 2. 방송 내용 유익하게 시청 잘 했습니다.
사고는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일까요? 사고를 설계 한다면, 사고하는 구조도 정의되어 질 수 있다면, 전제 된다면 어떤 사고체를 설계할 수 있을까요? 지적구조, 사고적 구조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을까요? 외계의 지적 생명체도 사고하는 방법이 인류와 같은 걸까요? 우리의 사고는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일까요? 사고의 구조도 변화되어 질 수 있는 것일까요? 새로운 사고의 구조는 어떤 것이 될수 있을까요? 사고의 구조, 철학적 틀, 우린 특정된 사고로서만 사고하게 됩니다. 1,000년전 사고법과 2,000년전 , 또는 현재의 사고법이 다를 수도 있을 겁니다. 사고는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일까요? (사고의 구조는 뭘까요?)
사라지는 것은 자신이고 주장하는 말이며 글이며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육체는 원자로 존재하고 말과 글또한 돌아 다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장하고 시간이 지나도 알아차려 세상이 좀더 밝은지혜를 갖고 서로 다툼없는 삶이 될수 있도록 단지 주장할뿐 마음이 통하지 않아 서로 차단한다면 의미도 없이 사라질뿐입니다. 또 누군가 이러한 주장을 시간이 지나 찾아쓰겠습니다.
오감으로 느끼고,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존재가 '나' 라고 느끼거나 인지한다는게 오래전부터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시간을 거슬러 부모님이 각자 다른 짝을 만나 자식들을 낳았다면.. 그중에 어떤 사람이 지금 현재 '나'라고 느끼는 것처럼... 누군가를 '나'라고 존재를 느낄 수 있게될지.. 아니면 존재 자체가 다른 개체들이라서 지금 현재의 '나'를 인지하는것을 느낄수도 없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것인지...
이 영상의 '의미장'을 적용해서 답변해보자면, 현재의 나를 인지하는 동안만 '나'로 정의할 수 있겠네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또다른 내가 있었다해도 현재의 내가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한 그건 허상이고 무의미. 나라는 존재는 내 기억의 범위라는 '의미장'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難易度(난이도)는 어려울 難 쉬운 易 정도 度의 의미로 어렵고 쉬운 정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난이도가 높다, 낮다는 말이 안 됩니다. 많이 어려울 땐 高難度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中難度.低難度(저난도)라는 표현은 어색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 중난도는 보통'으로 '저난도는 쉬운'으로 말하면 더 자연스럽습니다. "難易度 조절에 실패했다" 이 때의 란 말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難易度란 말을 정확하게 쓰지 않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의 철학을 비판하는 사상가들의 주장도 같이 살펴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1. 전통적 실재론자들 전통적인 실재론자들은 가브리엘이 주장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비판합니다. 이들은 실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그 실재를 왜곡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객관적 실재: 전통적 실재론자들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는 인간의 인식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인식과 실재의 관계: 이들은 인식이 실재를 나타내고, 인식의 한계가 실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가브리엘의 주장처럼 모든 것이 해석 가능한 의미의 장 안에만 존재한다는 입장은 지나치게 상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합니다. 2. 관념론자들 관념론자들은 가브리엘의 철학이 상대주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기반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식의 중요성: 관념론자들은 의식이나 인식이 실재를 구성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한다고 보며, 가브리엘의 '의미의 장' 개념이 이러한 관념론적 전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해석의 무한성: 가브리엘이 주장하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은 결국 특정한 관점에서 고립된 의미로 귀결될 수 있으며, 이는 실재를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비판합니다. 3. 탈실재론자들 탈실재론자들은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이 현대 철학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이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실재의 구성성: 탈실재론자들은 실재가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구성된다고 주장하며, 가브리엘이 실재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판합니다. 맥락의 중요성: 이들은 실재가 특정한 맥락이나 조건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가브리엘의 '의미의 장'이 그러한 맥락의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4. 실증주의자들 실증주의자들은 가브리엘의 철학이 경험적 검증이 어렵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진다고 비판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과학적 근거의 부족: 실증주의자들은 철학적 주장이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해야 한다고 믿으며, 가브리엘의 개념들이 실험적 데이터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주관적 해석: 그들은 가브리엘의 철학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과학적 방법론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합니다.
@@장애옹-s3w 1. 전통적 실재론자들 비유: 우리가 눈앞에 있는 책을 본다고 합시다. 전통적 실재론자들은 이 책이 우리의 '인식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책이 여기 있다는 사실은 내가 인식하든 못하든 변하지 않으며, 내가 어떻게 인식하든 책의 존재나 그 본질을 왜곡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사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책은 파란색이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갈색이라면, 실재론자는 '그 사람의 인식이 잘못되었을 뿐 책은 여전히 갈색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이 잘못되거나 한계가 있더라도 책의 실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죠. 가브리엘: 책은 '하나의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장'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즉, 실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2. 관념론자들 비유: 같은 책을 본다고 가정했을 때, 관념론자들은 우리가 책을 인식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책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그 실재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봅니다. 사례: 한 사람은 책을 지식의 상징으로 보고, 다른 사람은 단순한 물체로 봅니다. 관념론자들은 '책'이라는 실재가 사람의'인식'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며, 그 의미나 본질이 인식 주체의 의식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가브리엘: 관념론적인 접근을 일정 부분 수용. 하지만, '의미의 장'은 단순히 주관적 의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 의미의 장 개념은 해석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며, 실재가 어떤 의식에 의해 전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 주체 외에도 다양한 장에서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고 보며, 의식 너머에 있는 다른 층위의 의미들도 중요하게 다룸. 다양한 장의 예: 문학적 장 (예술의 장), 과학적 장 (지식의 장), 정치적 장(정치적 목적의 장), 경제적 장(경제적 목적의 장), 개인적 장 (개인의 인식) 3. 탈실재론자들 비유: 책이 존재한다고 할 때, 탈실재론자들은 책이라는 실재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우리가 속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의미가 형성된다고 봅니다. 사례: 한 사회에서는 책이 '지식과 교양의 상징'일 수 있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그것이 '권력과 억압의 도구'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탈실재론자들은 실재가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책은 그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그 자체로는 고정된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가브리엘: 탈실재론자들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른 책의 의미의 구성을 어느 정도 수용. 그러나 탈실재론의 주장보다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해석 구조'를 제시. 책이 단순히 특정 사회적 맥락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의 장' 속에서 여러 해석과 맥락에 따라 존재한다고 봄. 4. 실증주의자들 비유: 실증주의자들은 책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려면 실험적 방법이나 과학적 검증을 통해 판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책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관찰이나 경험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사례: 책이 눈앞에 있다고 주장한다면, 실증주의자들은 "책이 존재한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책을 만져보거나 읽어보면 그것이 진짜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가브리엘의 철학이 너무 주관적이어서 경험적으로 검증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하는 것이 이들의 입장입니다. 가브리엘: 책의 의미와 존재는 주관적 해석과 다양한 맥락에서 생성된다고 보고, 모든 것을 '경험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 결국, 가브리엘의 관점에서 책은 다양한 의미가 공존하는 복합적 존재이며, 각 장에서의 해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고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isajah038 위의 글은 지피티의 내용입니다. 가브리엘을 비판하는 다른 사상가들의 내용을 그대로 올려드린 것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신실재론에 대한 제 개인의 견해입니다.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에서는 사물의 본질이 단일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것으로 이해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본질이라는 것은 애초 사물이나 존재의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속성을 일컫는 개념이기 때문에 사물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속성일진데 그런 본질이 단일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본질은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와 같이 모순되는 주장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반면 본질과는 달리 ‘실재’ 또는 ‘실존’이라는 것은 시공간속에서 매 순간 주변 세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것일 수 없는 것이므로 “실제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다.”와 같은 직관적인 사실은 굳이 하나의 철학적 고찰로 주장할 필요도 없을 테니, 분명 그들이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고 굳이 주장한 것은 ‘본질’에 대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본질이 단일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층적이다.”라는 그들의 주장을 “본질이 변한다.”라는 말로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라고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철학자들은 본질을 굳이 다층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층위에서만 파악한 것임에 반해, 신실재론자들은 그 본질의 층을 여러 개로 상정한 것일 뿐이지 본질이 변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이 변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닐 수는 있는데, 거의 그런 주장과 다름없는 모순된 주장을 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오류는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브리엘의 사상에 영향을 준 하먼에 따르면 그 다른 층위의 본질이 각각 실재객체(Real Object), 감각객체(Sensual Object), 실재성질(Real Quality), 감각성질(Sensual Quality)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감각객체와 감각성질을 무슨 이유나 논리로 실재객체와 실재성질과 같이 묶어서 본질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갖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감각객체와 감각성질은 사물의 본질과는 상반되는 사물의 비본질적 속성으로 봐야 함이 마땅할 것 같은데, 그들의 주장은 “실재객체와 실재성질의 층위에서는(버려야 할 전통적 개념의 본질로 보는가?) 사물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본질을 파악할 수 없으므로 본질이 의미를 가질 수 없거나 본질이 부재하는 것과 동일시 한다는 것인가?) 두 나머지 층위인 감각객체, 감각성질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고 이들과의 상호작용과 긴장 관계를 통해 객체의 복잡한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입니다. 즉 본질을 단일한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네 가지 층위의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분리되어져야 할 상반된 요소인 본질과 비본질을 다소 억지스럽거나 너무 난해하게 하나의 개념 안에 통합하려는 시도가 매우 완성도 있게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차라리 어떤 사물이 A라는 맥락이나 관점에서는 o이라는 본질을 가지며, B라는 맥락이나 관점에서는 oo이라는 본질을 독립적으로 갖는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이런 억지스러움과 난해함은 이와 같은 사물의 다층적 실재성 뿐 아니라 다의성(사물은 무한히 다의적인 특성을 지닌다), 의미의 이중성(사물에는 의미가 있는 무의미라는 실재계가 숨어 있어, 단순히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다), 유한성과 무한성의 공존(사물은 잠정적으로 '이러이러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한한 의미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다의성을 지닌다)의 주장에 명확히 드러납니다. 본질과 비본질의 통합으로 인한 개념의 모호성과 같이 무한한 다의성, 유한성과 무한성의 공존과 같은 해석은 무한의 개념에 대한 오해나 오용으로 보일 수 있고 유, 무한성의 공존이 어떤 매커니즘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면 이 또한 존재론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끌고 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무한의 개념과 유, 무한의 공존의 매커니즘을 새롭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의 헛점은 대상(사물이 대표적)에 대한 인식과 인식에 대한 인식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분명히 구분해 주어야 한다. 그 차이는 '생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반응'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건 내가 요즘 붙잡고 있는 문제다.
안녕하세요, 제가 생각하던것과 비슷한 내용의 철학이야기를 들어서 처음으로 댓글을 남겨 봅니다. 꼭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최근에 크리스찬이 된 한 성도 입니다. 저는 이분의 책을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의미에서 성경적 내용과 하나님의 존재가 가장 사실에 가까운 관점이 아닐까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했던 생각은 우리가 흔히 "존재"한다고 하면 유물론적 실체와 가까운 어떤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저는 이에 대단히 반대합니다. 이유는 영상의 철학자분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고있는 지식의 형식은 때에 따라 항상 변하기도 한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두번째는 그 형식을 이해하는데에 필연적으로 믿음과 상징이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처럼 깊게 실재와 실재 사이의 차이가 꼭 존재해야만 한다는 결론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아는 모든 물리학적 지식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는 특정한 형식안에 있다는 생각을 철학자 칸트에게 배웠습니다. 칸트의 철학처럼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이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과, 물리학적 진실도 특정 의미를 묶어내는 상징기호들과 그것을 나타내는 숫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결국 상징과 믿음으로 비롯하여 사실이 구성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제 생각이 닿은 곳은, 우리는 의미가 실재한다는데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어와 숫자를 담아내는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그 어떤 사고도 맥락을 잃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너무나도 현실로 와닿습니다. 하나님과 사탄 마귀를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크리스찬은 없습니다. 우리가 파악하는 이 존재들은 의미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굉장히 현실을 잘 담아낸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들면, 사탄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우리사이를 그리고 성도와 성도 사이를 이간하고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저는 늦게 믿음이 생긴만큼 이렇게 바라보는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관점은 "우리가 싸워야하는 가장 본질적인 실체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잠깐 여기서부터는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있겠지만, 저는 모든 사람이 외로움과 싸운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속에서 갈등한다고도 믿습니다. 또 우리의 생존에 이 모든 것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도 믿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뭉쳐야만 합니다. 그것이 어떤 공동체이던 간에 우리는 함께 해야만 나아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이간하는 무언가를 적으로 상정하고 사탄이라는 이름을 마치 물리학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를 중력이라고 설명하듯 붙이면 어떤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런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실재하는 것들보다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행적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행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저의 대답은 "십자가를 지는것" 입니다. 그 의미는 사회적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질서와 희망을 선물하는 그 일입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 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한걸음도 이 밖에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상 마지막에 "그것과 관련한 진실을 판별할 기준이 있는채로 존재한다" 라는 말이 너무나도 인상깊었습니다. 첫째로는 성경이라는 존재가 크리스찬들이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점에서 인상깊었고, 두번째는, 이것도 철학적인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독교적 사랑은 존재에 대한 긍정 그 자체이며 그 존재를 성경적 궁극적 실체인 하나님에게 부합시키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말씀과 정확히 공명하는 해석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으로부터 생성되고 하나님이 진실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긍정하지 않고는 사랑을 판별할 수 없고, 하나님을 긍정하고는 하나님을 판별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하는 질문들 "왜 전지전능한 사랑의 신이 악을 허용하는가". "왜 과학적 사실들 (진화론, 빅뱅이론)과 다른 방식으로 성경에서는 인류의 탄생을 묘사하는가?", "하나님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들이 다 지옥에 가는것을 어떻게 합리화 할 수 있는가?", "정말 예수님이 부활했는가?" 등등의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아마 모른다 일 것 같습니다. 일정 수준의 대답이 다른사람들을 설득 할 수는 있어도 이것들을 본질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못하면 어리석은 종교처럼 보이는 반면, 인류에게 사랑과 자비, 존엄과 생명, 희생과 가치를 가르쳐준 종교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제게 후대에 남길 사실을 적으라 라고 묻는다면 저는 후자의 것을 남기렵니다. 이런 이유들로 저는 기독교적 삶의 태도와 방향이 진실과 너무나도 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의 삶속에 생겨나는 너무나도 많은 모순과 불합리들을 있어야할 자리로 돌려 놓는 것이 기독교적 삶의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많은 크리스찬들이 정말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읽어주셨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외적 의지의 존재를 학문적 측면에서 상정하는 것은 실체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운동 법칙을 이해하는 것에 크게 필요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현실에 대한 이해를 저해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음을 밝혀내게 된 이상 물리학을 연구할 때에 에테르를 상정하지 않듯이, 현대과학이 존재하는 이상 실체적인 원리에 대한 연구에서 형이상학적인 절대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Aa-0202 일단 형이상학과 신학도 엄연한 학문으로 보는것이 옳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실체적인 세계 자체에 대한 논의가 영상과 저의 논점이었습니다. 아마도 답변을 보니 물리적 세계를 가장 실체적인 현실이라고 상정하고 답하신 것 같아 약간의 혼돈이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합니다. 저의 요지는 과학이 상징적 체계과 의미단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물리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물리를 연구한다면 그것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형이상학적 존재가 사랑과 고통같은 비과학적이지만 충분하 실재적 의미가 있는 존재들을 무엇보다 잘 설명할 수 있다면 눈여겨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또한 종교적 신념은 특정한 사회경제적 여건에 의해 형성된 의식적 산물입니다. 종교 신도들은 계급적 억압을 경험할 때 그것의 해소의 방법으로 초월적 존재와 구원에 의지하게 되며, 이런 점에서 종교는 물질적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종교는 필수적으로 신도에 대한 사상적 통제를 활용하게 되는데, 이러한 종교의 기제는 과거 장기간동안 착취적 이데올로기 정당화의 주된 도구로서 활용되기도 하였으므로, 인간 해방에 있어서 종교적 관념론은 의식적 투쟁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RaehyungLee 약간 무례하게 느껴졌다면 미안합니다..댓글과는 별개의 내용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좋은 기억보단 안 좋은 기억이 많아서 그런지 종교 관련 얘기만 나오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여튼 좋은 주말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전혀 무례하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만 몇가지 이야기를 첨가하자면, 종교라는것은 분명히 특정 사회경제적 환경에 의해 산출된 의식적 산물이라고 보는 주장을 완전히 부정할 순 없지만 문제는 영상에 유발히라리의 주장처럼 국가나 회사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들도 물질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라고 하신다면 틀린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또 문제는 올바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과연 물리적안 시선뿐인가 라는 점입니다. 만일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정한다면 사법체계는 완전하 무너질 것 입니다. 그리고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는 못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유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칸트는 인간은 자신의 정언명령에 응답할 자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흔히 생각하는 자유인 반면, 저를 포함한 크리스찬들은 자신의 도덕 의무를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을 자유라고 합니다. 죽은 물고기는 바다에 떠내려가고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간다는 비유를 저희 목사님이 많이 하십니다. 진정한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도 한번도 고려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려운 이론을 쉽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이 의미장 이론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참신한 이론이며 한편으론 물리학계의 통일장 이론(혹은 통일장 이론을 언젠가 발견할 수 있을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철학적 반론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과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명제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계와 이해체계에 대한 복잡성을 강조하는 이론을 보면 언제나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시간과 지식, 그리고 관심의 한계로 인해, 또 항상 이성보다 먼저 앞서기만 하는 감정 때문에 세계와 그 속의 구성 요소들을 단순화해서 생각하곤 하는데, 이것이 가지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단순화는 세계가 가진 복잡성을 간과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해버리는 위험성도 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요즘엔 그 위험성이 점점 심각해지는것처럼보이는데, 그런 면에서 이 영상이 지니는 가치가 참 크다고 생각이 듭니다. 다시 한 번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1. 실제 2. 영상이나 기호의 측정,기록 도구 및 관측자,기록자의 인식 해상도로 변형 3. 표시,발설 매체의 표현 해상도로 변형 4. 시력,경험등 보는,듣는이의 인식 해상도로 변형 5. 그시점 그공간에서 인식된 실체 6. 사용 시간,공간에 의한 변형 및 2,3,4 변경으로 변형 7. 사용 시간,공간상 인지하는(사용하는) 실체
0:34 '사피엔스'에서 말한 상호주관적 실체의 예시는 종교, 국가, 화폐입니다. 이건 예시일 뿐이고 수많은 상호주관적 실체가 있는데 민족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들은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며 깎아내리기에 바쁘죠. 특히 뉴라이트가요. 이젠 민족주의를 종족주의라고 비하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그 민족도 '실체'입니다. 물론 뉴라이트의 지적 수준으로 그걸 이해하기는 쉽지 않겠지요.
형이상학적 실재론에서 실재와 실재의 모습간의 '차이'를 물리적인 것으로 보고 실재 쪽에 포함시킨다면 물론 모순이 발생하겠지만, 그 '차이'를 '차이와 함께(차이를 보일 가능성을 지닌채) 드러나는 실재의 모습' 쪽으로 포함시킨다면 모순이 안 생길 거 같은데요? 그렇게 되면 실재 자체의 다원적 층을 인정할 필요 역시 사라지고요, 실제의 모습 쪽의 다원적 층만 얘기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닌가요? 아울러 홍길동, 유니콘을(혹은 둘 중 하나만) 실재한다고 말하게 되는 어색함(실재성의 재정의) 역시 피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0:1221:17 물리학 예시를 많이 들어주셨는데 언급하신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시대의 물리학 이론으로 설명되는 대상들이나 상정되는 개념들'의 의미장도 예시로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동시대의 물리학 이론들이라도 에너지 스케일에 따라 설명할 수 있는 대상들이나 정확도, 상정되는 개념들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에너지 스케일의 이론으로 설명되는 것들이나 상정되는 개념들'의 의미장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통계물리학, 재규격화, 유효 이론, UV cutoff, etc.) 예를 들어 분자들 간의 결합이나 충돌을 기술하는 이론에서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나 중성자 내에 속박된 쿼크들의 글루온을 통한 상호작용("강한 상호작용")은 고려할 필요가 없고 할 수도 없지요.
사피엔스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인데 사피엔스는 인간을 깊게 생각할 수있게 픽션을 예로 말한거 같아요. 가끔 과학도 종교이지 싶었는데 이 영상을 보니 그런 생각을 하는것도 철학적 해석이 가능하네요.. 다만 물리적 한계는 절대적 값이 있을거 같아요. 그것은 인간이 찾든 말든 있긴할거같지만 이 영상에선 물리적 관점 이외에도 더 많은 관점이 따로 있다는걸 지적하는건가요? 생각하게 하는 영상 감사합니다.
우주는 존재할까요?...우리의 인식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만큼 우주로 인식합니다.... 우주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부분이 실재로 존재하지만,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따라서 과학의 발전에 따라 우주의 인식이 달라지는 것은 인간이 인식한 부분만큼만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에도 존재를 거론하는 자체가 비합리적 아닐까요?
자살하지 않을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근데 자살은 본인의 선택이 맞는가는 생각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추가로 더 적자면 어차피 소멸될 것들에 대해 미련을 두시기 전에 우리들도 어차피 소멸할 것인데 천명보다 앞서서 선택할 이유가 있습니까? 과연 고대처럼 배도 고프며 채찍을 맞아가며 주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사색하기 딱 적당한 고통과 혼돈 아니겠습니까? 산책을 친우삼아 산다면 누가 떠나는 무엇 상관이 있겠습니까
알베르 카뮈의 철학적 허무주의를 읽어보신다면 '존재'를 유지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해석이 가능합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 카뮈 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만 이 부분은 알베르 카뮈,허무주의 문서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이분 무서운 말씀 하시는군요. 관념 속에 많이 파묻혀 사시는 듯. 인간은 어떠한 고통과 슬픔에도 '존재'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의 존재를 내려놓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요. 인간이란 대체로 자기 자신에 대해 과도한, 혹은 절대적인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반대의 경향 또한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귀하의 내적 혼란, 고통에 많이 공감합니다. 가슴에 박힌 화살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존재의 유지와 포기를 고민하기보다는 일단 그 화살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권한다면 자신의 내면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보시라고 하고싶습니다. 무슨 철학이니 실존이니 의미장존재론이니 하는 관념으로 들어가라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모든 관념들을 가라앉혀 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관념은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관념, 철학, 종교들 다 그렇지요. 하지만 자신의 내면 속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는 종교, 철학, 사상 등의 모든 관념들이 다 의미를 잃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예요. 단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어떻게 자기 내면 속으로 들어가냐고 물으면 그건 답을 할 수 없군요. 거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얘기할만한 길이나 방법이 보이지 않는 것같습니다. 그래도 얘기하라고 하면 모든 관념을 내려놓고 자신의 내면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며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 그런데 이 길로 들어서면 몇 가지 분명한 표시가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우선 호흡이 저절로 느려진다거나, 전신에 부드러운 열기가 느껴지고 온몸의 감각이 전에 없이 살아나서 바람이 팔의 미세한 솜털을 스치는 것까지 예민하게 느껴진다거나, 모든 관념 생각 혼란 두려움들이 다 사라지고 눈 앞의 대상(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무심하게 직시할 수 있게 된다거나 하는.. 뭐 그런 것들.. 그런데 그 깊이가 끝이 없습니다. 얘기가 너무 개인적으로 흘러버렸는데 말씀에 아픔이 느껴져서 몇 마디 주절거렸습니다. 관념이니 존재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 삶의 본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내적 겸손 속에서 기쁘고 즐겁게, 모든 것을 열심히 사랑하며 할 수 있는 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훌륭한 삶의 방식이겠지요. 부디 귀하의 내면에 조용한 평화와 만물에 대한 사랑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나아가면 존재하는 것은 불변하는 우주의 가장작은 입자뿐 아닐까요. 사람도 몇 년이 지나면 대부분의 세포들이 새 것으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다 새로운 세포인데 그대로 나일까요. 혹은 바위가 있는데 반으로 쪼개졌다고 하면. 어떤게 그 바위일까요. 혹은 새로 생긴 둘과 다른걸까요.
공간이 부피적으로 무한성을 가지는 것은 의식 차원이기 때문이다. 즉...인간의식의 근원처는 공간이...인간의 육신과 신경,기관들은 공간으로부터 의식을 수신받아 정체성을 형성한다. 인간의 육신세포와 신경을 구성하는 분자의 질이나 밀도에 따라서... 공간에서 수신받는 정보에 차등이 생겨서.. 이것이 인간마다의 지능과 성격적 개성이 되는 것이다. 자식을 가지기전에...부모가 육신의 건강,혈액건강을 최고로 맑히고 좋게해서..자식을 가져서..태교를 특수하게해서.. 자식의 혈액을 맑게하고..신경조직을 견고하게 조직해서 자식을 낳으면.. 태어난 아기는...무척 건강하고...두뇌도 공간에서.. 저급한 신경조직을 타고난 아이들이 수신하지 못하는 고급지식과 정보를 수신하게된다. 이런 인간을 생이지지라고한다. 공간이란 의식체속에 존재하는 물질 만물들은...의식차원인 공간이 만들어낸 상념체들인것이다. 이런 이유로...공간속의 만물들은 형질적으로 고정불변하지 않고...생각이 시간지나면 변해가듯...물질도 형질적으로 변하게되는 것이다. 무한공간은 의식차원이며..의식차원은 존재이며...존재는 존재로서 존재하고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것에서 탄생하거나 존재할수 있는건 없다. 존재에서만 존재가 기인된다.
존재 정의의 어려움은 언어와 실재의 불일치성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무지개를 5개의 색으로 표현하는 언어 체계에서는 5개로 인식하고, 10개의 색으로 표현하는 언어 체계에서는 10개로 인식한다고 하죠. 언어는 이미지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의 언어로 우주를 설명하곤 하지만, 수 자체에 우리가 모르는 논리적 결함이 있고, 우주를 설명하는데에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수는 계속 쪼갤 수 있지만, 우주에는 쪼갤 수 없는 게 있으니까요. 수렴하는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해왔지만, 양자 역학은 쪼갤 수 없는 상수를 기반으로 확산되는 형식으로 수 체계를 다시 정립해야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언어가 나오면, 새로운 발견이 나타난다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수백억 년 이후의 미래에서 우주를 연구했다면, 우리는 우주가 팽창하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별빛이 지구에 도달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렇듯 연구의 한계는 언제나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겠네요. 의미장 내에서 알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해야 실재를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물리학에서 대전제처럼 깔고 가는 대칭성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제에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면 내일도 그럴 것이다. 이 또한 물리적 의미장에 포함되는 것이며, 그 바깥의 것을 그 정의 내에서는 알 수는 없다이겠네요. 블랙 스완처럼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실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발견 전에는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와 같은 모순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것이기도 하겠네요. 우리는 실재의 근사치만을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우주 설명서가 있다고 해도, 그걸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싶기도 합니다. 관점으로 실재를 이해할 수 밖에 없다라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완벽하게 반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빛이 유한한 속도를 가졌다는 것이 인식에 의한 것이 아닌 현상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속도의 유한성은 우주의 유한성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게 하니까요. 전체를 알게 해주는 도구는 아닐지언정 우주라는 체계가 어떤 정의로 설명할 수는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연 현상이니까요. 물론, 우리는 코끼리의 그림자만을 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우리가 여태까지 알아본 바를 넘어서서 빛이 보여주는 것이 지금까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면, 물리적 실재를 일단은 근사치 이외로는 기술할 수 없다고 봅니다. 보여지는 현상의 의미를 다르게 정의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의 현상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에테르의 이름이 바뀌고 에테르를 쪼개고 에테르의 성질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고 실재의 문제에 빗댈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물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가정하고 인식하던 체계가 변화하여 에테르의 정의가 원자가 되고 양자가 된 것이지 에테르의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의미장의 변화는 인간 사고의 변화이지 실재의 변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반박의 근거로 실재와 실재의 모습 차이를 실재에 내포하는 것을 모순이라 하는 것은 양자 역학을 떠오르게 하는데, 실재가 있는 것이라 가정하면서 왜 확률이나 파동 함수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느냐는 것에 의문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지는 아직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모순 그 자체를 실재가 내포하는 것이 우주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범위에 있는 실재가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실재가 모순되어 있다고 해서 실재의 모습이 균질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는 가정은 옳은 것인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주의 체계가 일정한 껍데기 내부에서는 모순을 가지게끔 정의되어있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층적이고 다원적이라 하는 것 또한 이렇지 않을까요. 실재가 다층적이고 다원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라 믿는 것을 쪼갤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보여집니다. 고정된 실재가 아닌 매 순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해석이겠지만, 그 집합적 해석이 확률 분포가 되고 파동 함수가 되는 것이겠죠. 하지만, 아직까지 양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미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다층적 다원적 실재는 하나 하나를 다방면으로 고려하는 해석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그 내부에서 모순적인 원리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보장 또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세계 해석 등과 그리 다른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능성을 가정할 수 있지만, 가능성을 모두 고려한다면 무한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주가 유한한 체계로 보여지는 이상, 이와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듭니다. 양자의 성질이 사람이 이해하기 힘들고 해석하기 난해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파동이면서 입자인 것이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 사고는 구분짓고 분류하는데 특화되어 있다보니 더욱 그래보입니다. 상반된 성질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상반되고 모순되어 보이는 성질을 우리의 언어로 해석하려니 난해하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아직까지는 자연 현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치환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고 실재가 있는 것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실재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연구할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연구해도 알 수 없을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근사치만으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룬 기반을 만들었기도 했다는 것은, 고정된 실재가 있는 것이라 믿어도 되지 않을까.. 믿어야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 알아내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비약했나 싶고 결과론적인가 싶기는 하지만.. ㅎㅎ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본인은 본인이 왜 태어 났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할 수 있나요 왜 굳이 님이 ;; 님 관점에서 해석하면 인지적 체계 따르고 결과적으로 해석한 게 본인이잖아요 그게 다고 근데 본인은 살아보겠다고 연구도 하고 글도 쓰고 여럿 물리적 법칙에 해당하는 일들을 많이 했겠죠 근데도 결과적으로 궁금한 건 굳이 왜 님이..?따지고 보면 자연법칙도 그냥 존재했고 정해진 법칙 따르는 거겠죠 왜 라고 묻는 사람만 있 을뿐이지 태생적으로 그런 조건에서 태어났으면 결과값에서 의문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한테도 왜 태어났냐고 물어보는 것 처럼 그냥 얘네도 따르고 있는 법칙이 있는 거고 우리가 왜 라고 묻는 게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해요 왜가 무슨 의미일까 왜라는 파생된 의미가 왜 항상 바깥을 향할까 그게 좀 본인한테 향하면 안 되나요? 난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을까?
@@장애옹-s3w 공격적인 의도로 달았던 댓글이 아닙니다^^ 영상을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철학에 답이 있다면, 정답이 없는 것이 답이 아닐까 하네요. 생각하면서 글 쓰는 걸 즐겨하다보니. ㅎㅎ 쓰면서 영상의 내용이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아서 더 좋았습니다.
@@장애옹-s3w 댓글에 화가 났나 싶을 정도로 감정적으로 쓰신 것 같아보이더라구요. 난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을까? 굳이 왜 님이..? 같은 표현에 불만스러운 것 같아보였습니다. 물론, 비판해주시는 것은 좋습니다. 부족한 면이 많은데 어떻게 안다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철학을 주제로 한 채널이다보니 생각을 나눠보고 싶었던 점이 큽니다. 저는 왜라는 질문은 자신에게도 향하고 바깥에도 향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떠한 철학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물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누군가가 주장하는 것은 왜 이랬을까부터 어떤 상황에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나 같은 것이 있겠죠. 묻다보면 생각을 보게 되고 그 맥락을 보게 되죠. 그리고 개인의 경험과 지식에 따라서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죠. 오해할 수도 있겠구요. 이것이 앞서 말했던 언어의 불일치성일 것입니다. 지식이라는 빵을 던져주더라도 빵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와 비슷하죠. 누군가는 금방 씹어먹을 테고 누군가는 천천히 음미할 것입니다. 그 빵에서 어떤 맛을 느끼는지 설명한다면, 우리는 경험을 토대로 설명합니다. 탄수화물이 몇 퍼센트 들어갔고.. 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빵이 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해체하고 분석해서 빵에 탄수화물이 몇 퍼센트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검증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빵이냐를 두고 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 관점과 언어인 것이죠. 처음에 영상을 보고 그저 넘길 것이기도 했지만, 무언가 걸리는 기분이다보니 써보았습니다. 저는 저자가 양자 역학의 해석에 중점을 많이 둔 것 같다고 느꼈거든요. 쓰다보니 영상만으로는 저자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이런 해석으로 생각했겠구나 하는 것으로 썼습니다. 논거가 부족할 수는 있으나... 아무래도 유튜브 댓글이니 나름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썼습니다. 저자가 모순을 이야기하지만, 제 생각은 사실적 현상이 철학적으로 모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게 주 맥락입니다. 우리가 알게 되고 생각하는 철학적 주제는 인간이라는 토대로 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오류를 가지고 실재 운운한다..라고 한다면, 그 오류를 제거해서 실재를 아는 것이 가능할까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실재를 알고 있고 실재를 알려주더라도 그 실재에 대한 해석은 다시 인간이 알아볼 수 있게 바꿔야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류는 필연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양자 역학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죠. 양자 역학은 수학적으로는 현상에 대해 정밀한 근사치를 얻을 수 있고 실험에서도 검증이 되는데, 설명하기에는 굉장히 비직관적입니다. 비직관적인 것에 대한 해석이 어렵다고 가능성으로만 해석해버린다면, 아이디어로서는 좋을지라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일지도 모르죠. 리처드 파인만은 양자가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이동할 때 전 우주의 모든 경로를 지나간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에 꽤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실재를 모르니 겪는 것이기도 하고, 우주 전체를 우리가 직접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A라는 원자의 전자 구름은 다른 A원자에서도 같은 확률 분포를 갖습니다. 이러한 것은 대칭성과도 연관 됩니다. 물질이 가진 정보는 어디에서나 같다는 것이죠.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실재는 하나를 뜻하는 게 아니라 의미장 내에서 다층적으로 다원적으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각기 독립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으로 비춰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미장 내에서 a라는 해석, b라는 해석, c라는 해석이 결과가 맞으면 모두 맞다라는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양자의 무작위성이 의미장 내의 해석에 부합하면 맞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천차만별의 해석이라도..? 예를 들었던 A원자의 전자 구름이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완전한 무작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A원자가 가진 전자 구름의 모양은 같습니다. 아직까지 이외의 현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발견된다면 우주가 지금의 모습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우주와 다른 우주였을 것이니까요. 저에게 이 사실은 좁힐 수 있는 실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 옳겠지만, 다양한 가능성이 모두 옳다고 보는 것은 회의적입니다. 정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는 정보가 무한할 수 없다고 보는 쪽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의 실재를 유한한 우주에 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한한 실재가 있으리라는 쪽인 거죠. 하늘 위에 떠다니는 구름에 모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은 인간이라는 토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름으로 퉁치고 분류하는 것은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것이죠. 그 토대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 또한 현상의 일부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그 토대의 오류를 지적한 게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적 오류가 있어서 알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있기도 하니까요. 실재가 있다고 믿으며 실재를 밝히고자 하는 욕망이 오류라고 한들 그것이 있어서 과학, 철학 등의 발전을 이끈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니까요. 그래서 결국은 모릅니다. 아직은 상상의 영역에 둘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토대라는 것은 언어 뿐만 아니라 신체적 반응, 환경 역시도 포함하니까요. 로봇이나 AI가 답을 찾을지도 모르죠.
칸트식으로 해석하자면 유일하게 외부에 있는 것은 공간입니다. 나머지는 내부에 있습니다. 시간도 내부에 있습니다.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실재한다고 볼 수 있지만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감성형식과 오성형식, 그 형식도 관념화 해서 나타낼 수 있으니 존재하는 것이 겠죠. 그 형식들에 들어오고 구성되는 대상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이 모든 것들은 내부에 있습니다 그러나 공간은 외부에 있습니다. 감성형식과 오성형식으로 관념 그리고 개념으로 표상되는 공간 이전이 공간은 직관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외부에 있습니다. 따라서 외부의 것을 가늠할 수 있고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공간이라는 점에서 공간을 실재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가브리엘은 이런 근본적인 인식론의 틀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논리적으로 시뮬레이션 우주와 동일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본적인 인식론적 한계를 하나의 존재론적 구성에서 본다는 점에서요.
중간의 실재와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파르메니데스의 이야기군요. 고대 인도 철학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쩌면 고대부터도 많은 현자들이 고민했을지 모를 근본적인 철학 문제로 보이고요.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신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과 닮아있죠. 그런데도 많은 과학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그걸 확실한 진실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본인들은 스스로 과학적이라고 또는 유물론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모순적이게도 불합리하게 신앙적 태도를 보입니다. 과거에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정도의 생각으로도 유용했습니다. 형이상학적 실재론도 나름대로 유용성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족해지는 순간도 생겨나고 시간이 지날 수록 그 강도와 빈도가 높아질 겁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들로 저는 넓게 보면 장자철학이 합당해 보입니다. 모든 의미장에 빈틈이 있기 때문에 혼돈에 구멍을 뜷어 놓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언어도 사고의 구조인데, 각 지역마다 언어의 특징들이 모두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부분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인류의 뉴런, 뇌세포 구조는 거의 같을텐데, 인간의 사고하는 방법, 그것이 집약되어진 언어가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수 있을까요? 인간의 사고도 진화해 온 걸까요? 진화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까요?
인류는 그동안 (자연스럽게) 진화해 왔습니다. 현 인류는 진화의 방향 조차도 결정할 수 있는 지적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인간이 진화해온 이유, 또는 진화의 방향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왔으며 그것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기린 같은 경우 높은 곳의 열매를 따먹기 위해 목이 길게 진화해 왔다는 진화론적 방향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방향으로의 진화도 이제는 고려해 볼수 있는 것입니다. 사고의 진보, 의도적 진화, 물질적 진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뇌의 진화적 방법에서의 선택적 진화에 대한 얘기인 것입니다. optional evolution of thinking
이다 & 있다 1. 있다 '있다'는 늘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색깔, 크기, 길이, 넓이, 높이, 부피를 가진 모든 것들은 실은 '확정적 물질'이 아니라, '불특정한 것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얽힌 관계들이 서로 복잡하게 매듭을 이루고 있는 것이 '누리(세계·우주)'.. 모든 것의 속성은 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 정보는 관계에 기초한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내가 보지 못했으니, 그 사건은 없었던 것이다"라 되뇌어 보지만, 그 사건은 일어났었고, 또렷하게 내 삶에 영향을 끼치더라..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인식하지 못하면 '있지 않다(없다)'고 여기게 됨"이라는 인식론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우리가 누리며 살아가는 이 '누리(세계·우주)'는 '확정적이지 않고, 경계가 또렷하지 않은 대상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다. 우리가 보통 '실재적 대상'이라 믿는 물질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 아니라, 관계들이 뒤얽혀 있는 장! 2. 이다 ① 이다 : 눈앞의 '이것'이 머리속에 떠올린 '그것'과 맞아떨어지면 '~이다'! ② 안·밖 -안이다=아니다 : 눈앞의 '이것'이 머리속에 떠올린 '그것'과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안(머리속 그것)'이다! ※내가 지금 머리속에 떠올리는 게 맞지.. '안'이다=아니다.. -밖이다=바뀌다 : 눈앞의 '이것'이 머리속에 떠올린 '그것'과 맞아떨어졌는데, 다음날 다시 보니 맞아떨어지지 않네? 그러면 '밖(눈앞 이것)'이다! ※내가 머리속에 떠올렸던 게 맞지 않지. 눈앞 이것이 맞지.. '밖'이다=바뀌다.. ③ 참·거짓 -참이다 : 겉에 '생수'라 적힌 병. 속에 마셔보니 생수면 참! -거짓이다 : 겉에 '생수'라 적힌 병. 마셔보니 소주면, '겉짓(겉에 뭔 짓)'한 것! 거짓! -속이다 : 겉에 '생수'라 적힌 병. 속에 생수 아니면, '속'에 어떤 짓 한 것! 속이다! ※내가 머리속에 떠올렸던 게 맞지 않지. '속(병 속에 있는 것)'이 맞지.. ④ 맞음·맞지않음 (진·위=眞·僞=진짜·가짜, True·False) -맞지 : 눈앞 이것과 '머리속 그것'이 맞아떨어지는 상태.. ※'지'=풀이말의 바탕꼴.. -맞다 : ‘맞지’ 상태가 다 되면 ‘맞다’ ※'다'='완결'의 뜻..
얼마전에 소개해주신 나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하는말과 비슷해보여서..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의 한방편?한이론?..뭐 그렇게 봐도 무방할거 같아 보이네요.. 의미장도 양자얽힘현상과 비슷해보이고요.. 저도 그렇고 요즘 사람들이 양자역학에 심취해있는데...역시 철학과 맞닿아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네요.세계의 비밀..존재의 비밀.. 알고싶당.. 영상 잘봤습니다~
실제로 가브리엘도 에서 카를로 로벨리에 대해 언급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요. 다만 가브리엘은 로벨리는 결국에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적 입장에 가까운 입장을 고수한다고 평가합니다. 아무리 관찰자와 얽혀 있는 우주의 면모를 강조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관찰에 앞서서 존재하는 우주를 어떤 방식으로든 옹호하는 것으로요.
@@chungco_phil 오홍 그렇군요.저는 카를로 로벨리가 오히려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반대편이라고 생각했거든요.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주장하시는분들은 뉴턴의 고전역학처럼 답이 꼭 나와야만 하는 느낌이고... 카를로 로벨리는 상호작용전까지는 파동형태인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느낌으로...존재...여튼 존재는 존재니까 그렇게 판단하신걸지도 모르겠네요.여튼 재미있는 생각인거 같습니다.
세계와 세계관의 구분에 대한 이야기네요. 좋은 주제입니다. 인간의 한정된 삶과 인지 체계로는 세계를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죠. 어느 학문을 배우더라도 진짜 끝까지 배운다면, 그것이 설명하는 세계는 결국 세계관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의미장 안에서만 그 이론이 유효한거죠. 한 분야의 의미장이 가지는 이론적 한계를 깨닫게 된 사람은 겸손하고, 다른 분야의 이론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하잖아요. 의미장의 개념은 그런 사람들이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이런 영상을 챙겨보지 않죠. 그저 본인들의 한계를 깨닫고 수치심을 느낄 때까지 기다려야 할 뿐.)
실재 존재 허구... 명확한 꼭 한가지 정의가 있는건 아니겠지만서두... 인문학 철학하시는 분들은 통용되는 정의의 범주를 벗어나 많이 비틀어 새롭게 정의하는 듯 하다. 유발하라리가 국가 제도 등을 허구라고 하면서 통용되는 허구의 정의를 비틀었을 때는 나름 주장하는 바에 부합하다고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의미장 어쩌구하는 본 내용은 그다지 천재적으로 새롭게 비틀어 본 이론 보다는 이 쪽 세계에서나 화자되는 언어 유희 정도가 아닐지... 절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말장난으로 여겨질수도 있게구요. ^^
존재, 의미, 관념, 가치관, 물질에 대해 켜켜히 쌓아왔던 제 생각들과도 겹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부분들 속에서 괴리와 또다른 논점들이 떠오르네요. 오랜만에 영상 1초들이 모두 와닿았고 필요한 생각 단계를 만들어준 영상이었습니다. 좋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창조주의 표현에서 “존재의 모든것” 이란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고려할때 가브리엘의 메세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논한것 같습니다. 오늘 이것에 관해 얘기해 보려 합니다. 우리는 시작도 끝도 없이 과거 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창조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꽉찬 진공상태 처럼, 우린 모든 것이 창조 가능한 상태, 하지만 그 모든 것 조차도 이미 만들어져 있는 진화의 창조의 순환 구조 속에, 새롭게 더 창조될 것은 없었습니다. 창조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미래에 이미 창조될 수 있기에, 그 이상의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은 더 이상 창조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창조주는 알파와 오매가 이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주는 어디로 부터 왔는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의미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기에… 창조주 철학의 진실 이었습니다. 허무하기 까지 한 창조의(창조주의) 진실 이었습니다. 신은 존재할까? 신의 형상은 무엇일까? 신은 이 세계를 어떻게 창조 하였을까? 그런 질문의 보다 더 본질적인 접근인 것이죠. 이 세계가 창조 되어졌다면 그것은 방법론일 테고요,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창조하느냐의 창조적 에센스, 본질에 관한 것이겠지요. 그런 부분에서 사고의 본질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요 같은 의미로, 신은 왜 존재할까? 이 세상은 왜 창조되어 진 것일까? 하는 질문에도 답이 될 수있는, 그냥 존재해 왔으니까.. 왜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어지는 존재의 본질론에 관한 답변이었던 것인데요, 존재하는 모든것에 대한 개념…
우리의 이성과 경험은 직관적인 믿음을 기본 전제로 해서 출발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직관적인 믿음안에서 출발하는 인식이 완전한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환원적으로 쪼개어진채로 설명할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은 너무나 유용한 학문이지만 철학 그 자체로는 존재와 생성의 문제 그리고 존재와 인식 윤리를 하나로 묶는 의미있는 지식이 될 수 없는 것이죠
누구나 하는 삶의 고민을 철학적으로 풀어낸 저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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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까지 봤는데 여기서 말하는 픽션적인 대상은 약속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정확히 똑같은 사과 두개가 존재할 수 없지만 1+1=2라고 약속한 것 처럼.
약속은 믿음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이게 최신 이론이었구나 올해 들어서 이 주제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영상이 도움이 될 듯 싶다.
나머지도 계속 봐야겠다.
4분30초까지 봤는데 여기서 나오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은 곧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어두워서 충분한 정보가 없었지만 그냥 해골에 담긴 물이 깨끗한 물이라고 믿기로 한 것이다.
15분까지 보았는데 의미장이라는 개념이 엄청 재미있네요.
17분까지 봤는데 판별의 기준이 있을때 실재가 된다는것도 재미있네요.
가지고 있는 관점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니까 사람마다 실재한다고 보는 범위도 다르겠네요.
20분까지 봤는데 결국 모든것은 실재하는지 아닌지 확실히 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에 기반해서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 우리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믿음의 범위가 정해지고, 그 범위 안에 들어오는 약속들에 기반해서 세상을 본다.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니,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불교철학이 생각나는 그런 이론이에용. 배움이 짧아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존재를 대하는 관점이 비슷한거같아용. 특정할 수 있는 객관적 세계를 계속 반박하려한다는 점에서용. 불교는 그래서 주변의 주관적 감각에만 집중하는 수련법이 있죠. 우리가 알고 있는 객관과 지식은 허상이라고 봤으니까요.
이해란 인간이 대상에 대한 분해를 멈추고 그 접합면이란 층위에 만족하여 머물기로, 즉 믿기로 결정하는 행위이다. 즉 모든 이해는 믿음이다. 모든 논리 또한 믿음이다.
최신 철학 경향을 설명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신실재론 외에 정동이론, 신유물론, 객체지향 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같은 현대 철학 조류들도 소개해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비록 최신 철학들이 과거에 비해 담론들이 거대하거나 혁신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유튜브에서 누군가 한 명은 최근 철학이 어떻게 갈라지고 어떤 계보에 따라 나아가고 있는지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학에서 모든 집합을 포함하는 집합이 있다고 하면 그 집합은 어떤 집합이 담을 수 있나 이런 내용이 기억납니다
쿠르드 괴델의 불완정성의 정리 말하시는 걸까요?
멱집합은 항상 그 집합의 크기보다 더 커서 (2^x > x) 끝없이 더 큰 집합을 만들 수 있다는 거
@@repairshipㄴㄴ 칸토어 집합론
러셀의 역설입니다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집합"이 있는데
만약 자신이 자기에 포함되지 않으면 조건이 성립하므로 자기자신에 포함되고
만약 자기자신이 자기를 포함하면 조건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자기자신을 포함하지 않게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집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ZFC공리계나 러셀의 계형이론이 등장해서 집합의 정의를 조금더 엄밀히 하게 됩니다
최근에, 진실을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종속시켜버리는 탈진실(post-truth)에 맞서기 위해 문학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교육철학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문학이 허구라는 것을 알고 읽으며, 건강하게 설계된 개방적 허구로서의 문학을 읽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 논문은 하루키의 소설론을 바탕으로 그런 주장을 펼쳤지만 이 영상에서, 특히 후반부에서 말하는 바와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는 듯합니다. "거짓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진실"이 post-truth적인 생각으로서 "순전한 환상"에 갇히게 되는 것이라면, 허구임을 전제하는 문학을 읽는 사람들은 오히려 실재에 대한 감각을 더 기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 논문의 참고문헌 목록을 살펴보니 마르쿠스 가브리엘을 다룬 다른 교육철학 논문도 있었네요. ^^;) 여튼 존재론의 측면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우리의 일상과 관련해서도 꽤 중요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그 논문 제목을 좀 알 수 있을까요?
@@wa4bari 입니다.
종교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맥락도 가능하겠네요..!
@@탱탱우람 감사합니다😀
@@탱탱우람 엄청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시네요 굿!
좋은 강의 늘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 배우고 갑니다.
Thank you 최신이론에 대한 탁월한 설명!
1. 노력해도 극복을 못하거나 극복이 안되는 일도 있다.
2. 과유불급: 뭐든지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이건 독서, 종교, 운동, 게임도 마찬가지다.
3.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게 좋은 삶은 아니다. 적당히 모르는 것도 있어야 한다.
4. 학교폭력은 녹음기로 녹음해서 고소하면 된다.
5. 공부 습관이 잡혀있지 않다면 그냥 포기하라. 공부 습관을 잡는 데만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6. 책 출간하면 어디 대학이든지 가능하다.
7. 내신(학교 시험)이 수능의 기초다. 내신 절대 포기하지 말라! 해외대학에 갈 때, 쓰이는 바탕 자료가 학교 시험이기 때문이다.
8. 연애를 할 거라면 이 사실을 명심하라. 이 사람이랑 결혼까지 할 수 있을지..? 그게 아니라면 안하는 게 낫다.ㆍ
1,2개 빼고는 그냥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같은데 그런 픽션들을 보편적인 진실인마냥 써놓네요
철학자란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무심결에 지나쳐버린 것을 포착하여 주제로 삼아 자신만의 언어로 논거를 디테일하게 잘 풀어놓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마치 바윗돌을 부수고 점점더 잘게 부수어 놓을 수록 지적 능력이 탁월해지는 생각이 크기와 넓이 로 풍부하게 구사 묘사하는 능력 힘 이런 부분이 보통사람과 다르다고 봐요.
의미장 존재론은 이론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시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지가 얼마나 비틀려있는지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철학은 매우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 지구가 듣고 우주로 소리가 나간다 해도
살아있다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이 세상 주인은 아무도 아닌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지구의 조각을 잡고 사는 다양한 자신들을 인정하게 될것입니다. 내가 주장하여
나라나 민족이 중요하게 됩니다.
이제는 인류가 모두 중요한 시점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서로가 하여야 합니다.
어머니 태에서 태어날때 우주의 기운으로 태어나 우주의 마음이 이미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우주에서 소우주로 태어나 이미 있었던 큰 우주를 또한 알아차려 재관혼사에 따라 또한 소우주를 탄생시키는 삶의 크기는 우리 인간에 대해 본질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천재분께는 인간의 철학들을 근간으로 뭔가 더 깨달음이란 자신의 시각이 최신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이시군요.
그러나 저도 제 개인적인 존재로써 놓여진 세상은 주변은 평화롭고 잘 살아보이나, 남과 다르게 인생의 굴레가 전쟁통이다보니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도 더 힘든 일들이 연속이라 죄얼이나 탄생이전 하나님께 범죄함, 불완전한 본질 등 생각하게 되지요.
저같은 사람은 범접할수 없던 과학이나 철학을 이런 유튜브에서 보고 듣게 되면서 느껴진 건 어릴 때 수학공식을 배우면서 느꼈던 생각, 이 세상의 모든 공간이란 수학공식을 이렇다 저렇다 무수하게 만들어 채울 수도 있겠다는 거였어요.
우리의 생각도 무수하게 나와 누군에겐 이렇게 저렇게 보여지는 것일텐데 누군가의 발견이나 주장이 도드라지면 그게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코끼리든 코끼리에 붙은 세균이든 그저 무수하게 존재하는 한정된 지구안에 시간을 따라 생육번성하는 물체이지요.
천재분이나 저도 그런 면에선 마찬가지인데, 지구란 공간에서 처하고 겪은 안생은 참 다르지요. 세상이 인정한다는 천재분의 철학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언어가 저라는 개인이 살아온 삶으로썬 느껴지는 게 이질적인 것처럼, 많은 여느 사람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세상공식일 수도 있는 것이겠네요.
손님: 이발사님. 항상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이발사님의 머리는 누가 깎아주나요?
이발사: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그러고 보니 옛날에 단골손님 중에서 러셀이라는 분이 언젠가 똑같은 질문을 하셨었는데요, 나중에는 대학 교수님들이 그 질문을 '러셀의 역설'이라고 부르면서 가르치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손님: 그래서 러셀이라는 사람이 그 질문에 답을 얻었다고 하던가요?
이발사: 아마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공부를 많이 안 한 사람이라서 어려운 건 잘 몰라요. 아무튼 그 이후에 괴델이라는 손님이 오셨었는데, 수학자들이 자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탄하시면서 오직 러셀 그 사람은 내 견해를 반겨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하던 것도 기억이 나네요.
(한 달 후)
이발사: 어이쿠 손님, 보통 두세 달에 한 번 찾아오시던데 이번에는 한 달 만에 다시 오셨네요.
손님: 네. 실은 이발사님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평소보다 더 빨리 찾아온 건데요, 저번에 머리를 깎고 집에 돌아가서 이발사님이 언급하셨던 러셀과 괴델이라는 두 사람에 대해서 더 알아봤더니, 제가 얼마 전에 서점의 신간코너에서 산 '허구의 철학'이라는 책에 써있는 내용과 비슷한 말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발사: 그래요? 러셀과 괴델 두 분 모두 오래전의 손님들인데 추억이 새록새록하네요.
손님: 철학은 모든 학문의 근본이라고 하는데, 왜 철학자들이 하는 말들은 마치 똑같은 머리카락이 끊임없이 계속 자라나고 다시 잘리듯이 다들 뭔가 비슷한게 반복되는 느낌일까요?
이발사: 글쎄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학교를 오래 다니지 않아서 어려운 건 잘 모릅니다. 다만 러셀과 괴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의 손님 중에서 왕족이었던 솔로몬이라는 분이 강조했었던 그 말씀이 떠오르네요.
손님: 무슨 말인데요?
이발사: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 것이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 (성경 전도서)
손님: ..? '서양 철학은 결국 플라톤에 대한 끊임없는 각주다 - 화이트헤드'..?!!
이발사: 놀라는 표정을 지으시네요?
손님: 아니 근데 잠시만요, 이발사님은 대체 나이가 몇 살이시길래 고대의 인물인 솔로몬의 머리까지 잘라주셨던 겁니까?
이발사: 아시면서 그러세요. 이 이발소는 가상의 장소로서,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특정 답글이라는 상황과 그 맥락의 '의미장' 속에서만 존재하지요. 위에서 '한 달 후'라고 써있는 걸 지나왔을 때에, 사실은 일초 남짓도 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대략 30일이 지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 주의: 위 내용 중 '마치 똑같은 머리카락이 끊임없이 계속 자라나고 다시 잘리듯이' 라는 구절은 탈모인들에게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장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와! 재치있으시다~👍
주의에서 빵터졌네요😂😅
하이 인텔리전스 유우머
으어.. 시뮬라시옹
탈모인에겐 가발의 의미장이 있죠. 의미장에는 의미의 의미장이 있고요. 보통의 철학은 의미의 의미장의 연쇄죠. 일상이 일상적인 상품들의 의미장의 연쇄이듯. 진짜 일상은 상품들의 연쇄가 끊어지는 곳에서 시작되고, 진짜 철학도 의미의 의미장의 연쇄가 끊어지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철학사에서 엄선된 몇몇은 플라톤과 결이 다르죠. 본문에서 얼렁뚱땅 넘어간 것을 각주에서 쇄신하는 사람들. 철학을 시작하는 철학자들.
거 참 이발사님 말잘하시네
언어의 한계
언어가 만든 사고체계로 존재를 확인할순 없음
언어는 구간을 정해야만 소통가능함
구간은 편의상 만든 도구
펼쳐진 우주를
무한을 이해못할 인간임을
과연 무한을 담을수 있을까
인간의 죽음이 필연적인 게 아니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스쳤는데, 아마 아닐 것 같네요, 제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질문이거나
진짜 복잡하고 달라진 현대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관점이네. 역시 철학은 재밌어 ㅋㅋ
정신건강에 좋은 존재론이라는 점에서 좋네요. 유물론 관념론같이 어디에 갇히는 느낌이 안들어서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가브리살 먹고 싶네유☺️
현대 수학의 집합론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입각한 이론으로서 상당히 공감이 갑니다. 기본적으로 철학적 주제들은 사람들이 과거에 샹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내용을 가집니다. 실재와 허구의 구별도 위의 설명처럼 복잡하죠.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더 많은 의미장을 갖게 된다면 내 삶이 더욱 다층적인 차원에서 존재할 수 있게 되어 더 풍부한 삶을 누리게 할 수도 있겠군요.
어떤 생각을 접하다 보면 실재하는 것의 절대성을 말하면서 우리의 상상을 제거하려는 견지가 있고, 반면에 우리 앞의 현실은 다 우리의 환상이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무시하는 견해를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상은 앞서 말한 양자가 놓쳤던 것들에 대하여 깊게 숙고한 것 같네요.
무의미한 세계에서 혼자만의 환상에 빠지지 않고 실재적 삶의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 해야 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차원진동장
재밌게 잘 봤습니다 좀 더 생각의 시야가 넓어진거 같아요😊
1. 사람 이성(감성)은,
⑴ 물질을 추상으로 받아 들이니,
1.1. 의미장 존재론.
⑴ 모든 대상은, 의미장 안에서만 존재한다. 에서,
① 물질 = 대상(실재).
② 추상 = 의미장(존재). 겠네요.
1-1. 의미.
⑴ 물질인, 대상(실재)은, 추상인 의미장(존재)안에서만 존재한다. 겠네요.
.
2. 방송 내용 유익하게 시청 잘 했습니다.
존재는 빛입니다 빛이 없으면 존재는 가상입니다
너를바라보는건 빛때문입다 상대방을 바라보고 의자에 앉는다는건 과거의 당신이므로 존재와현백사이의괴리일뿐 존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해보던 생각인데 이걸 철학적으로 서술한 사람이 있군요.
예전에 읽었던 미우라 도시히코가 쓴 '허구세계의 존재론'이 생각나는 영상이네요 그래서 그런지 생각보다 편하게 영상을 봤습니다.
평소에 "존재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 많이 했었는데 유익한 영상인것 같네요
영상 중반부터 의미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허무해지고 그래서 이 학자의 견해 가지고 어쩌란 거냐는 생각이 들었는데 영상 말미에 복잡성을 고려하자는 말에 깨달음 얻고 갑니다.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존재하는 모든것에는 반대되는 것이 있다는 말과 같은것 같네요
사고는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일까요?
사고를 설계 한다면, 사고하는 구조도 정의되어 질 수 있다면, 전제 된다면 어떤 사고체를 설계할 수 있을까요?
지적구조, 사고적 구조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을까요? 외계의 지적 생명체도 사고하는 방법이 인류와 같은 걸까요?
우리의 사고는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일까요?
사고의 구조도 변화되어 질 수 있는 것일까요?
새로운 사고의 구조는 어떤 것이 될수 있을까요?
사고의 구조, 철학적 틀, 우린 특정된 사고로서만 사고하게 됩니다.
1,000년전 사고법과 2,000년전 , 또는 현재의 사고법이 다를 수도 있을 겁니다.
사고는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일까요?
(사고의 구조는 뭘까요?)
의미장을 정의하는 의미장 역시 하나의 의미장이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말이 생각 나네요
절대적 존재=신, 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픽션의 대상을 믿는 것이네요
양자역학의 슈뢰딩거의 고양이부터 오타쿠들 짜여진 '세계관'을 덕질하는 것까지 스치는 이론이네요 ㅋㅋㅋㅋ 의미장이라는 네이밍도 묘하게 재밌어요
사라지는 것은 자신이고 주장하는 말이며 글이며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육체는 원자로 존재하고 말과 글또한 돌아 다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장하고 시간이 지나도 알아차려 세상이 좀더 밝은지혜를 갖고 서로 다툼없는 삶이 될수 있도록 단지 주장할뿐 마음이 통하지 않아 서로 차단한다면 의미도 없이 사라질뿐입니다. 또 누군가 이러한 주장을 시간이 지나 찾아쓰겠습니다.
가브리엘 이론은 칸트 이후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잘 설명하는 이론이네요.
진실보다는 사실이 더 어울릴 것 같네요.진실은 공전,사실은 동쪽의 해
오감으로 느끼고,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존재가 '나' 라고 느끼거나 인지한다는게 오래전부터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시간을 거슬러 부모님이 각자 다른 짝을 만나 자식들을 낳았다면.. 그중에 어떤 사람이 지금 현재 '나'라고 느끼는 것처럼...
누군가를 '나'라고 존재를 느낄 수 있게될지.. 아니면 존재 자체가 다른 개체들이라서 지금 현재의 '나'를 인지하는것을 느낄수도 없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것인지...
이 영상의 '의미장'을 적용해서 답변해보자면, 현재의 나를 인지하는 동안만 '나'로 정의할 수 있겠네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또다른 내가 있었다해도 현재의 내가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한 그건 허상이고 무의미.
나라는 존재는 내 기억의 범위라는 '의미장'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환생하기 때문이죠.저도 어릴때 부터 내가 누구인지 생소했거든요.
수학이론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수학자들도 32차원 공간이 존재한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難易度(난이도)는
어려울 難 쉬운 易 정도 度의
의미로
어렵고 쉬운 정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난이도가 높다, 낮다는
말이 안 됩니다.
많이 어려울 땐 高難度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中難度.低難度(저난도)라는
표현은 어색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 중난도는 보통'으로
'저난도는 쉬운'으로 말하면
더 자연스럽습니다.
"難易度 조절에 실패했다"
이 때의 란 말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難易度란 말을 정확하게
쓰지 않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의 철학을 비판하는 사상가들의 주장도 같이 살펴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1. 전통적 실재론자들
전통적인 실재론자들은 가브리엘이 주장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비판합니다. 이들은 실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그 실재를 왜곡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객관적 실재: 전통적 실재론자들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는 인간의 인식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인식과 실재의 관계: 이들은 인식이 실재를 나타내고, 인식의 한계가 실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가브리엘의 주장처럼 모든 것이 해석 가능한 의미의 장 안에만 존재한다는 입장은 지나치게 상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합니다.
2. 관념론자들
관념론자들은 가브리엘의 철학이 상대주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기반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식의 중요성: 관념론자들은 의식이나 인식이 실재를 구성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한다고 보며, 가브리엘의 '의미의 장' 개념이 이러한 관념론적 전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해석의 무한성: 가브리엘이 주장하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은 결국 특정한 관점에서 고립된 의미로 귀결될 수 있으며, 이는 실재를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비판합니다.
3. 탈실재론자들
탈실재론자들은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이 현대 철학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이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실재의 구성성: 탈실재론자들은 실재가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구성된다고 주장하며, 가브리엘이 실재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판합니다.
맥락의 중요성: 이들은 실재가 특정한 맥락이나 조건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가브리엘의 '의미의 장'이 그러한 맥락의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4. 실증주의자들
실증주의자들은 가브리엘의 철학이 경험적 검증이 어렵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진다고 비판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과학적 근거의 부족: 실증주의자들은 철학적 주장이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해야 한다고 믿으며, 가브리엘의 개념들이 실험적 데이터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주관적 해석: 그들은 가브리엘의 철학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과학적 방법론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합니다.
주장들은 이해하겠는데 실제 사례를 예로 들으면 어떤 식으로 비유해서 나올 수 있나요 ;;? 마냥 해석하기엔 포괄적인 것 같아서
@@장애옹-s3w
1. 전통적 실재론자들
비유: 우리가 눈앞에 있는 책을 본다고 합시다. 전통적 실재론자들은 이 책이 우리의 '인식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책이 여기 있다는 사실은 내가 인식하든 못하든 변하지 않으며, 내가 어떻게 인식하든 책의 존재나 그 본질을 왜곡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사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책은 파란색이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갈색이라면, 실재론자는 '그 사람의 인식이 잘못되었을 뿐 책은 여전히 갈색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이 잘못되거나 한계가 있더라도 책의 실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죠.
가브리엘:
책은 '하나의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장'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즉, 실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2. 관념론자들
비유: 같은 책을 본다고 가정했을 때, 관념론자들은 우리가 책을 인식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책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그 실재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봅니다.
사례: 한 사람은 책을 지식의 상징으로 보고, 다른 사람은 단순한 물체로 봅니다. 관념론자들은 '책'이라는 실재가 사람의'인식'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며, 그 의미나 본질이 인식 주체의 의식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가브리엘:
관념론적인 접근을 일정 부분 수용. 하지만, '의미의 장'은 단순히 주관적 의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 의미의 장 개념은 해석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며, 실재가 어떤 의식에 의해 전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 주체 외에도 다양한 장에서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고 보며, 의식 너머에 있는 다른 층위의 의미들도 중요하게 다룸.
다양한 장의 예: 문학적 장 (예술의 장), 과학적 장 (지식의 장), 정치적 장(정치적 목적의 장), 경제적 장(경제적 목적의 장), 개인적 장 (개인의 인식)
3. 탈실재론자들
비유: 책이 존재한다고 할 때, 탈실재론자들은 책이라는 실재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우리가 속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의미가 형성된다고 봅니다.
사례: 한 사회에서는 책이 '지식과 교양의 상징'일 수 있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그것이 '권력과 억압의 도구'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탈실재론자들은 실재가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책은 그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그 자체로는 고정된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가브리엘:
탈실재론자들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른 책의 의미의 구성을 어느 정도 수용. 그러나 탈실재론의 주장보다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해석 구조'를 제시. 책이 단순히 특정 사회적 맥락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의 장' 속에서 여러 해석과 맥락에 따라 존재한다고 봄.
4. 실증주의자들
비유: 실증주의자들은 책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려면 실험적 방법이나 과학적 검증을 통해 판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책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관찰이나 경험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사례: 책이 눈앞에 있다고 주장한다면, 실증주의자들은 "책이 존재한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책을 만져보거나 읽어보면 그것이 진짜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가브리엘의 철학이 너무 주관적이어서 경험적으로 검증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하는 것이 이들의 입장입니다.
가브리엘: 책의 의미와 존재는 주관적 해석과 다양한 맥락에서 생성된다고 보고, 모든 것을 '경험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
결국, 가브리엘의 관점에서 책은 다양한 의미가 공존하는 복합적 존재이며, 각 장에서의 해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고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브리엘은 그 모든 반문을 일정 부분 수용하고 더 포괄적이고 개방적으로 바라보는 개념을 제시한 것 같네요. 지금 제가 가진 글의 형태의 종류를 다룬 의미장 안에서 보자면 써두신 형식이 꼭 지피티 답변 같아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isajah038 위의 글은 지피티의 내용입니다. 가브리엘을 비판하는 다른 사상가들의 내용을 그대로 올려드린 것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신실재론에 대한 제 개인의 견해입니다.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에서는 사물의 본질이 단일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것으로 이해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본질이라는 것은 애초 사물이나 존재의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속성을 일컫는 개념이기 때문에 사물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속성일진데 그런 본질이 단일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본질은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와 같이 모순되는 주장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반면 본질과는 달리 ‘실재’ 또는 ‘실존’이라는 것은 시공간속에서 매 순간 주변 세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것일 수 없는 것이므로 “실제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다.”와 같은 직관적인 사실은 굳이 하나의 철학적 고찰로 주장할 필요도 없을 테니, 분명 그들이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고 굳이 주장한 것은 ‘본질’에 대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본질이 단일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층적이다.”라는 그들의 주장을 “본질이 변한다.”라는 말로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라고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철학자들은 본질을 굳이 다층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층위에서만 파악한 것임에 반해, 신실재론자들은 그 본질의 층을 여러 개로 상정한 것일 뿐이지 본질이 변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이 변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닐 수는 있는데, 거의 그런 주장과 다름없는 모순된 주장을 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오류는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브리엘의 사상에 영향을 준 하먼에 따르면 그 다른 층위의 본질이 각각 실재객체(Real Object), 감각객체(Sensual Object), 실재성질(Real Quality), 감각성질(Sensual Quality)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감각객체와 감각성질을 무슨 이유나 논리로 실재객체와 실재성질과 같이 묶어서 본질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갖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감각객체와 감각성질은 사물의 본질과는 상반되는 사물의 비본질적 속성으로 봐야 함이 마땅할 것 같은데, 그들의 주장은 “실재객체와 실재성질의 층위에서는(버려야 할 전통적 개념의 본질로 보는가?) 사물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본질을 파악할 수 없으므로 본질이 의미를 가질 수 없거나 본질이 부재하는 것과 동일시 한다는 것인가?) 두 나머지 층위인 감각객체, 감각성질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고 이들과의 상호작용과 긴장 관계를 통해 객체의 복잡한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입니다. 즉 본질을 단일한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네 가지 층위의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분리되어져야 할 상반된 요소인 본질과 비본질을 다소 억지스럽거나 너무 난해하게 하나의 개념 안에 통합하려는 시도가 매우 완성도 있게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차라리 어떤 사물이 A라는 맥락이나 관점에서는 o이라는 본질을 가지며, B라는 맥락이나 관점에서는 oo이라는 본질을 독립적으로 갖는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이런 억지스러움과 난해함은 이와 같은 사물의 다층적 실재성 뿐 아니라 다의성(사물은 무한히 다의적인 특성을 지닌다), 의미의 이중성(사물에는 의미가 있는 무의미라는 실재계가 숨어 있어, 단순히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다), 유한성과 무한성의 공존(사물은 잠정적으로 '이러이러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한한 의미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다의성을 지닌다)의 주장에 명확히 드러납니다. 본질과 비본질의 통합으로 인한 개념의 모호성과 같이 무한한 다의성, 유한성과 무한성의 공존과 같은 해석은 무한의 개념에 대한 오해나 오용으로 보일 수 있고 유, 무한성의 공존이 어떤 매커니즘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면 이 또한 존재론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끌고 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무한의 개념과 유, 무한의 공존의 매커니즘을 새롭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Transcendence00이 모든 게 관측적 데이터나 실험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고 있나용?
여러분들은 그저 가족 친척 친구 그외의 모든 사물들을 믿지도 말고 안믿지도 마세요 참고만하시고 살아가야 현명하게 살아갈 확률이 높아집니다
어쩌면 모든게
나에 의해서 혹는 내뇌가 만들어내고 보여지는 환상일 수도..
원자도 우주도 사람도, 들려오는 소리도, 물도,공기도 빛도..
내가 죽는 동시에 모든건 사라지는..
존재라는 존재의 실제존재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문화와 문명은 실제하지 않으며
또 실제한다.
없다는 실제와 있다는 실제가
어찌 실제가 되겠는가
일체중도를 설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바람도 없이 이는
파도와 같다.
가브리엘의 헛점은 대상(사물이 대표적)에 대한 인식과 인식에 대한 인식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분명히 구분해 주어야 한다. 그 차이는 '생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반응'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건 내가 요즘 붙잡고 있는 문제다.
안녕하세요, 제가 생각하던것과 비슷한 내용의 철학이야기를 들어서 처음으로 댓글을 남겨 봅니다. 꼭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최근에 크리스찬이 된 한 성도 입니다. 저는 이분의 책을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의미에서 성경적 내용과 하나님의 존재가 가장 사실에 가까운 관점이 아닐까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했던 생각은 우리가 흔히 "존재"한다고 하면 유물론적 실체와 가까운 어떤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저는 이에 대단히 반대합니다. 이유는 영상의 철학자분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고있는 지식의 형식은 때에 따라 항상 변하기도 한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두번째는 그 형식을 이해하는데에 필연적으로 믿음과 상징이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처럼 깊게 실재와 실재 사이의 차이가 꼭 존재해야만 한다는 결론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아는 모든 물리학적 지식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는 특정한 형식안에 있다는 생각을 철학자 칸트에게 배웠습니다. 칸트의 철학처럼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이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과, 물리학적 진실도 특정 의미를 묶어내는 상징기호들과 그것을 나타내는 숫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결국 상징과 믿음으로 비롯하여 사실이 구성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제 생각이 닿은 곳은, 우리는 의미가 실재한다는데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어와 숫자를 담아내는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그 어떤 사고도 맥락을 잃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너무나도 현실로 와닿습니다. 하나님과 사탄 마귀를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크리스찬은 없습니다. 우리가 파악하는 이 존재들은 의미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굉장히 현실을 잘 담아낸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들면, 사탄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우리사이를 그리고 성도와 성도 사이를 이간하고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저는 늦게 믿음이 생긴만큼 이렇게 바라보는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관점은 "우리가 싸워야하는 가장 본질적인 실체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잠깐 여기서부터는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있겠지만, 저는 모든 사람이 외로움과 싸운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속에서 갈등한다고도 믿습니다. 또 우리의 생존에 이 모든 것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도 믿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뭉쳐야만 합니다. 그것이 어떤 공동체이던 간에 우리는 함께 해야만 나아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이간하는 무언가를 적으로 상정하고 사탄이라는 이름을 마치 물리학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를 중력이라고 설명하듯 붙이면 어떤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런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실재하는 것들보다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행적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행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저의 대답은 "십자가를 지는것" 입니다. 그 의미는 사회적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질서와 희망을 선물하는 그 일입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 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한걸음도 이 밖에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상 마지막에 "그것과 관련한 진실을 판별할 기준이 있는채로 존재한다" 라는 말이 너무나도 인상깊었습니다. 첫째로는 성경이라는 존재가 크리스찬들이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점에서 인상깊었고, 두번째는, 이것도 철학적인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독교적 사랑은 존재에 대한 긍정 그 자체이며 그 존재를 성경적 궁극적 실체인 하나님에게 부합시키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말씀과 정확히 공명하는 해석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으로부터 생성되고 하나님이 진실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긍정하지 않고는 사랑을 판별할 수 없고, 하나님을 긍정하고는 하나님을 판별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하는 질문들 "왜 전지전능한 사랑의 신이 악을 허용하는가". "왜 과학적 사실들 (진화론, 빅뱅이론)과 다른 방식으로 성경에서는 인류의 탄생을 묘사하는가?", "하나님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들이 다 지옥에 가는것을 어떻게 합리화 할 수 있는가?", "정말 예수님이 부활했는가?" 등등의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아마 모른다 일 것 같습니다. 일정 수준의 대답이 다른사람들을 설득 할 수는 있어도 이것들을 본질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못하면 어리석은 종교처럼 보이는 반면, 인류에게 사랑과 자비, 존엄과 생명, 희생과 가치를 가르쳐준 종교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제게 후대에 남길 사실을 적으라 라고 묻는다면 저는 후자의 것을 남기렵니다.
이런 이유들로 저는 기독교적 삶의 태도와 방향이 진실과 너무나도 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의 삶속에 생겨나는 너무나도 많은 모순과 불합리들을 있어야할 자리로 돌려 놓는 것이 기독교적 삶의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많은 크리스찬들이 정말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읽어주셨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외적 의지의 존재를 학문적 측면에서 상정하는 것은 실체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운동 법칙을 이해하는 것에 크게 필요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현실에 대한 이해를 저해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음을 밝혀내게 된 이상 물리학을 연구할 때에 에테르를 상정하지 않듯이, 현대과학이 존재하는 이상 실체적인 원리에 대한 연구에서 형이상학적인 절대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Aa-0202 일단 형이상학과 신학도 엄연한 학문으로 보는것이 옳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실체적인 세계 자체에 대한 논의가 영상과 저의 논점이었습니다. 아마도 답변을 보니 물리적 세계를 가장 실체적인 현실이라고 상정하고 답하신 것 같아 약간의 혼돈이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합니다.
저의 요지는 과학이 상징적 체계과 의미단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물리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물리를 연구한다면 그것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형이상학적 존재가 사랑과 고통같은 비과학적이지만 충분하 실재적 의미가 있는 존재들을 무엇보다 잘 설명할 수 있다면 눈여겨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또한 종교적 신념은 특정한 사회경제적 여건에 의해 형성된 의식적 산물입니다. 종교 신도들은 계급적 억압을 경험할 때 그것의 해소의 방법으로 초월적 존재와 구원에 의지하게 되며, 이런 점에서 종교는 물질적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종교는 필수적으로 신도에 대한 사상적 통제를 활용하게 되는데, 이러한 종교의 기제는 과거 장기간동안 착취적 이데올로기 정당화의 주된 도구로서 활용되기도 하였으므로, 인간 해방에 있어서 종교적 관념론은 의식적 투쟁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RaehyungLee 약간 무례하게 느껴졌다면 미안합니다..댓글과는 별개의 내용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좋은 기억보단 안 좋은 기억이 많아서 그런지 종교 관련 얘기만 나오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여튼 좋은 주말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전혀 무례하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만 몇가지 이야기를 첨가하자면, 종교라는것은 분명히 특정 사회경제적 환경에 의해 산출된 의식적 산물이라고 보는 주장을 완전히 부정할 순 없지만 문제는 영상에 유발히라리의 주장처럼 국가나 회사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들도 물질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라고 하신다면 틀린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또 문제는 올바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과연 물리적안 시선뿐인가 라는 점입니다. 만일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정한다면 사법체계는 완전하 무너질 것 입니다. 그리고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는 못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유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칸트는 인간은 자신의 정언명령에 응답할 자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흔히 생각하는 자유인 반면, 저를 포함한 크리스찬들은 자신의 도덕 의무를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을 자유라고 합니다. 죽은 물고기는 바다에 떠내려가고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간다는 비유를 저희 목사님이 많이 하십니다. 진정한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도 한번도 고려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려운 이론을 쉽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이 의미장 이론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참신한 이론이며 한편으론 물리학계의 통일장 이론(혹은 통일장 이론을 언젠가 발견할 수 있을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철학적 반론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과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명제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계와 이해체계에 대한 복잡성을 강조하는 이론을 보면 언제나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시간과 지식, 그리고 관심의 한계로 인해, 또 항상 이성보다 먼저 앞서기만 하는 감정 때문에 세계와 그 속의 구성 요소들을 단순화해서 생각하곤 하는데, 이것이 가지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단순화는 세계가 가진 복잡성을 간과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해버리는 위험성도 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요즘엔 그 위험성이 점점 심각해지는것처럼보이는데, 그런 면에서 이 영상이 지니는 가치가 참 크다고 생각이 듭니다.
다시 한 번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오5, 완성된 의미에 도전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게 의미있을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그 철학자는 개념과 픽션이라는 용어 구별을 못하는 것 같네요. 사람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그냥 인지이지, 물리적 세상 자체가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1. 실제
2. 영상이나 기호의 측정,기록 도구 및 관측자,기록자의 인식 해상도로 변형
3. 표시,발설 매체의 표현 해상도로 변형
4. 시력,경험등 보는,듣는이의 인식 해상도로 변형
5. 그시점 그공간에서 인식된 실체
6. 사용 시간,공간에 의한 변형 및 2,3,4 변경으로 변형
7. 사용 시간,공간상 인지하는(사용하는) 실체
0:34 '사피엔스'에서 말한 상호주관적 실체의 예시는 종교, 국가, 화폐입니다. 이건 예시일 뿐이고 수많은 상호주관적 실체가 있는데 민족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들은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며 깎아내리기에 바쁘죠. 특히 뉴라이트가요. 이젠 민족주의를 종족주의라고 비하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그 민족도 '실체'입니다. 물론 뉴라이트의 지적 수준으로 그걸 이해하기는 쉽지 않겠지요.
형이상학적 실재론에서 실재와 실재의 모습간의 '차이'를 물리적인 것으로 보고 실재 쪽에 포함시킨다면 물론 모순이 발생하겠지만, 그 '차이'를 '차이와 함께(차이를 보일 가능성을 지닌채) 드러나는 실재의 모습' 쪽으로 포함시킨다면 모순이 안 생길 거 같은데요? 그렇게 되면 실재 자체의 다원적 층을 인정할 필요 역시 사라지고요, 실제의 모습 쪽의 다원적 층만 얘기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닌가요? 아울러 홍길동, 유니콘을(혹은 둘 중 하나만) 실재한다고 말하게 되는 어색함(실재성의 재정의) 역시 피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니까요. 관념으로 시작해서 왜 물리적 실체와 연관을 짓는 걸까요. 형이하학적 관점을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고 규정하더니 형이상학을 가져와버렸잖아요.
차이를 보일 '가능성'이라는 거 부터가 형이상학적 차이라서 그 차이는 절대적 혹은 객관적 실재가 될 수 없기에, 우리의 인식과 고정불변의 실체가 얼마만큼 차이가 있는지,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재의 다원적 층을 인정할 명분이 생기는 겁니다.
20:12 21:17 물리학 예시를 많이 들어주셨는데 언급하신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시대의 물리학 이론으로 설명되는 대상들이나 상정되는 개념들'의 의미장도 예시로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동시대의 물리학 이론들이라도 에너지 스케일에 따라 설명할 수 있는 대상들이나 정확도, 상정되는 개념들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에너지 스케일의 이론으로 설명되는 것들이나 상정되는 개념들'의 의미장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통계물리학, 재규격화, 유효 이론, UV cutoff, etc.) 예를 들어 분자들 간의 결합이나 충돌을 기술하는 이론에서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나 중성자 내에 속박된 쿼크들의 글루온을 통한 상호작용("강한 상호작용")은 고려할 필요가 없고 할 수도 없지요.
사피엔스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인데
사피엔스는 인간을 깊게 생각할 수있게 픽션을 예로 말한거 같아요.
가끔 과학도 종교이지 싶었는데
이 영상을 보니 그런 생각을 하는것도 철학적 해석이 가능하네요..
다만 물리적 한계는 절대적 값이 있을거 같아요. 그것은 인간이 찾든 말든 있긴할거같지만 이 영상에선 물리적 관점 이외에도 더 많은 관점이 따로 있다는걸 지적하는건가요?
생각하게 하는 영상 감사합니다.
오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라니! 너무 재밌습니다 감사합니다
꿈을 꿀때는 눈을 감고 앞을 안보고 있는 상황인데 꿈에선 정신적으로 앞을 보고 움직이고하는 시야가 있다는게 신기해요.. 오로지 뇌의 환상으로만 보고 있다는건데 환상으로만 인생을 살아갈 방법이 있을거같아요..
모든 존재는 의식입니다!
실재지만 지나고 나면 환상이다...
내 지난 날들은 눈뜨면 잊는 꿈
I AM WHO I AM
나는 스스로 있는(존재) 자이니라
(출애굽기 3장 14절)
21:35 초보적 지적태도 21:48 더 업그레이드된 복잡성을 고려한 지적태도 21:06 이론의 포섭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왜? 20:05 형이상학적 산물들의 의미장 안에 실재
아주 괜찮은 철학이론인듯
혼란한 존재에 대한 의미를 매우 잘 설명하고 있네요.
의미장이란 단어 하나가 인류가 천동설에서 지동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만큼 깔끔하고 파격적인 효과를 주고있네요.
영상 설명도 굿!
감사합니다
우주는 존재할까요?...우리의 인식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만큼 우주로 인식합니다.... 우주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부분이 실재로 존재하지만,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따라서 과학의 발전에 따라 우주의 인식이 달라지는 것은 인간이 인식한 부분만큼만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에도 존재를 거론하는 자체가 비합리적 아닐까요?
영상과는 상관 없는 얘기지만.. 인간은 어떠한 고통과 슬픔에도 '존재'를 유지해야할 이유가 있는걸까요? 본인의 존재를 내려놓지 말아야할 이유에 대해 철학적인 관점에서 설득력 있는 지침이 있을까요?
자살하지 않을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근데 자살은 본인의 선택이 맞는가는 생각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추가로 더 적자면 어차피 소멸될 것들에 대해 미련을 두시기 전에 우리들도 어차피 소멸할 것인데 천명보다 앞서서 선택할 이유가 있습니까?
과연 고대처럼 배도 고프며 채찍을 맞아가며 주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사색하기 딱 적당한 고통과 혼돈 아니겠습니까?
산책을 친우삼아 산다면 누가 떠나는 무엇 상관이 있겠습니까
알베르 카뮈의 철학적 허무주의를 읽어보신다면 '존재'를 유지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해석이 가능합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 카뮈 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만 이 부분은 알베르 카뮈,허무주의 문서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CamusSophie 카뮈까지 안가더라도
햄릿 파우스트 등 문학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겁니다.
@@ShallSetmefree 저는 톨스토이의 고백록 그 과정과 결과물을 보고서는 포기하고 더이상 문학에서 찾지 않게 되더군요 😅😂
이분 무서운 말씀 하시는군요. 관념 속에 많이 파묻혀 사시는 듯. 인간은 어떠한 고통과 슬픔에도 '존재'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의 존재를 내려놓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요. 인간이란 대체로 자기 자신에 대해 과도한, 혹은 절대적인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반대의 경향 또한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귀하의 내적 혼란, 고통에 많이 공감합니다. 가슴에 박힌 화살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존재의 유지와 포기를 고민하기보다는 일단 그 화살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권한다면 자신의 내면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보시라고 하고싶습니다. 무슨 철학이니 실존이니 의미장존재론이니 하는 관념으로 들어가라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모든 관념들을 가라앉혀 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관념은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관념, 철학, 종교들 다 그렇지요. 하지만 자신의 내면 속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는 종교, 철학, 사상 등의 모든 관념들이 다 의미를 잃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예요. 단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어떻게 자기 내면 속으로 들어가냐고 물으면 그건 답을 할 수 없군요. 거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얘기할만한 길이나 방법이 보이지 않는 것같습니다. 그래도 얘기하라고 하면 모든 관념을 내려놓고 자신의 내면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며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 그런데 이 길로 들어서면 몇 가지 분명한 표시가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우선 호흡이 저절로 느려진다거나, 전신에 부드러운 열기가 느껴지고 온몸의 감각이 전에 없이 살아나서 바람이 팔의 미세한 솜털을 스치는 것까지 예민하게 느껴진다거나, 모든 관념 생각 혼란 두려움들이 다 사라지고 눈 앞의 대상(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무심하게 직시할 수 있게 된다거나 하는.. 뭐 그런 것들.. 그런데 그 깊이가 끝이 없습니다. 얘기가 너무 개인적으로 흘러버렸는데 말씀에 아픔이 느껴져서 몇 마디 주절거렸습니다. 관념이니 존재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 삶의 본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내적 겸손 속에서 기쁘고 즐겁게, 모든 것을 열심히 사랑하며 할 수 있는 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훌륭한 삶의 방식이겠지요. 부디 귀하의 내면에 조용한 평화와 만물에 대한 사랑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나아가면 존재하는 것은 불변하는 우주의 가장작은 입자뿐 아닐까요.
사람도 몇 년이 지나면 대부분의 세포들이 새 것으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다 새로운 세포인데 그대로 나일까요. 혹은 바위가 있는데 반으로 쪼개졌다고 하면. 어떤게 그 바위일까요. 혹은 새로 생긴 둘과 다른걸까요.
일견 어지러운 형이상학적 논설들로 구성된 가브리엘의 철학적 견해는 사실 우주와 물질에 대한 양자역학의 사고를 철학적 사변으로 재구성한 견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오르네요. 아무튼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듭니다. 😮
언어의 한계, 우리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죠. 과거에는 남자 여자로 구별해놨었는데, 지금은 홀몬 생식기 유무 발달상황으로 구분되는 수많은 중간단계가 있고. 게다가 신체적인 특징을 아예 무시하고 본인의 생각 취향 많으로도 수많은 성 정체성이 있잖아요.
존재의 정의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요!!
듣다보면 '존재'라는 단어가 매우 빨리 구식이 되어감을 느낌니다. 새롭게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단어들로 분화되고 있는 중이겠지요. 존재 뿐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점점 무거워지는 단어들도 마찬가지이고~ 철학이 그 분화의 중심에 서 있고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ㅋㅋㅋ 뭘 생각하시는지?...2찍을 생각하면서 존재하시나요?....ㅉㅉ
이해하기 복잡한 이론은,
그 이론을 그것의 Creator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도 모른다.'라는
참 쉬운 말을,
그들은 참 어려워한다.
*T는 공감하기 힘들고 F가 공감할만한 영상..*
공간이 부피적으로 무한성을 가지는 것은 의식 차원이기 때문이다.
즉...인간의식의 근원처는 공간이...인간의 육신과 신경,기관들은 공간으로부터
의식을 수신받아 정체성을 형성한다.
인간의 육신세포와 신경을 구성하는 분자의 질이나 밀도에 따라서... 공간에서 수신받는 정보에 차등이 생겨서.. 이것이 인간마다의 지능과 성격적 개성이 되는 것이다.
자식을 가지기전에...부모가 육신의 건강,혈액건강을 최고로 맑히고 좋게해서..자식을 가져서..태교를 특수하게해서.. 자식의 혈액을 맑게하고..신경조직을 견고하게 조직해서 자식을 낳으면.. 태어난 아기는...무척 건강하고...두뇌도 공간에서.. 저급한 신경조직을 타고난 아이들이 수신하지 못하는 고급지식과 정보를 수신하게된다. 이런 인간을 생이지지라고한다.
공간이란 의식체속에 존재하는 물질 만물들은...의식차원인 공간이 만들어낸 상념체들인것이다. 이런 이유로...공간속의 만물들은 형질적으로 고정불변하지 않고...생각이 시간지나면 변해가듯...물질도 형질적으로 변하게되는 것이다.
무한공간은 의식차원이며..의식차원은 존재이며...존재는 존재로서 존재하고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것에서 탄생하거나 존재할수 있는건 없다. 존재에서만 존재가 기인된다.
꼭 영원히 존재하지 말아야할 존재이자 악도 선도 아닌,꼭 영원히 존재하지 말아야할 존재,악에 해당되는 자아,정체성,자아정체성,존재본질의 성질,존재,본질,성질에 대해서 답글로 알려주세요?
존재 정의의 어려움은 언어와 실재의 불일치성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무지개를 5개의 색으로 표현하는 언어 체계에서는 5개로 인식하고, 10개의 색으로 표현하는 언어 체계에서는 10개로 인식한다고 하죠. 언어는 이미지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의 언어로 우주를 설명하곤 하지만, 수 자체에 우리가 모르는 논리적 결함이 있고, 우주를 설명하는데에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수는 계속 쪼갤 수 있지만, 우주에는 쪼갤 수 없는 게 있으니까요. 수렴하는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해왔지만, 양자 역학은 쪼갤 수 없는 상수를 기반으로 확산되는 형식으로 수 체계를 다시 정립해야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언어가 나오면, 새로운 발견이 나타난다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수백억 년 이후의 미래에서 우주를 연구했다면, 우리는 우주가 팽창하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별빛이 지구에 도달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렇듯 연구의 한계는 언제나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겠네요. 의미장 내에서 알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해야 실재를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물리학에서 대전제처럼 깔고 가는 대칭성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제에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면 내일도 그럴 것이다. 이 또한 물리적 의미장에 포함되는 것이며, 그 바깥의 것을 그 정의 내에서는 알 수는 없다이겠네요. 블랙 스완처럼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실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발견 전에는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와 같은 모순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것이기도 하겠네요.
우리는 실재의 근사치만을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우주 설명서가 있다고 해도, 그걸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싶기도 합니다. 관점으로 실재를 이해할 수 밖에 없다라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완벽하게 반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빛이 유한한 속도를 가졌다는 것이 인식에 의한 것이 아닌 현상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속도의 유한성은 우주의 유한성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게 하니까요. 전체를 알게 해주는 도구는 아닐지언정 우주라는 체계가 어떤 정의로 설명할 수는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연 현상이니까요. 물론, 우리는 코끼리의 그림자만을 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우리가 여태까지 알아본 바를 넘어서서 빛이 보여주는 것이 지금까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면, 물리적 실재를 일단은 근사치 이외로는 기술할 수 없다고 봅니다. 보여지는 현상의 의미를 다르게 정의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의 현상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에테르의 이름이 바뀌고 에테르를 쪼개고 에테르의 성질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고 실재의 문제에 빗댈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물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가정하고 인식하던 체계가 변화하여 에테르의 정의가 원자가 되고 양자가 된 것이지 에테르의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의미장의 변화는 인간 사고의 변화이지 실재의 변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반박의 근거로 실재와 실재의 모습 차이를 실재에 내포하는 것을 모순이라 하는 것은 양자 역학을 떠오르게 하는데, 실재가 있는 것이라 가정하면서 왜 확률이나 파동 함수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느냐는 것에 의문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지는 아직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모순 그 자체를 실재가 내포하는 것이 우주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범위에 있는 실재가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실재가 모순되어 있다고 해서 실재의 모습이 균질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는 가정은 옳은 것인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주의 체계가 일정한 껍데기 내부에서는 모순을 가지게끔 정의되어있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층적이고 다원적이라 하는 것 또한 이렇지 않을까요. 실재가 다층적이고 다원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라 믿는 것을 쪼갤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보여집니다. 고정된 실재가 아닌 매 순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해석이겠지만, 그 집합적 해석이 확률 분포가 되고 파동 함수가 되는 것이겠죠. 하지만, 아직까지 양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미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다층적 다원적 실재는 하나 하나를 다방면으로 고려하는 해석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그 내부에서 모순적인 원리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보장 또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세계 해석 등과 그리 다른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능성을 가정할 수 있지만, 가능성을 모두 고려한다면 무한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주가 유한한 체계로 보여지는 이상, 이와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듭니다.
양자의 성질이 사람이 이해하기 힘들고 해석하기 난해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파동이면서 입자인 것이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 사고는 구분짓고 분류하는데 특화되어 있다보니 더욱 그래보입니다. 상반된 성질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상반되고 모순되어 보이는 성질을 우리의 언어로 해석하려니 난해하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아직까지는 자연 현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치환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고 실재가 있는 것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실재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연구할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연구해도 알 수 없을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근사치만으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룬 기반을 만들었기도 했다는 것은, 고정된 실재가 있는 것이라 믿어도 되지 않을까.. 믿어야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 알아내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비약했나 싶고 결과론적인가 싶기는 하지만.. ㅎㅎ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본인은 본인이 왜 태어 났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할 수 있나요 왜 굳이 님이 ;; 님 관점에서 해석하면 인지적 체계 따르고 결과적으로 해석한 게 본인이잖아요 그게 다고 근데 본인은 살아보겠다고 연구도 하고 글도 쓰고 여럿 물리적 법칙에 해당하는 일들을 많이 했겠죠 근데도 결과적으로 궁금한 건 굳이 왜 님이..?따지고 보면 자연법칙도 그냥 존재했고 정해진 법칙 따르는 거겠죠 왜 라고 묻는 사람만 있 을뿐이지 태생적으로 그런 조건에서 태어났으면 결과값에서 의문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한테도 왜 태어났냐고 물어보는 것 처럼 그냥 얘네도 따르고 있는 법칙이 있는 거고 우리가 왜 라고 묻는 게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해요 왜가 무슨 의미일까 왜라는 파생된 의미가 왜 항상 바깥을 향할까 그게 좀 본인한테 향하면 안 되나요? 난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을까?
@@장애옹-s3w 공격적인 의도로 달았던 댓글이 아닙니다^^ 영상을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철학에 답이 있다면, 정답이 없는 것이 답이 아닐까 하네요. 생각하면서 글 쓰는 걸 즐겨하다보니. ㅎㅎ 쓰면서 영상의 내용이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아서 더 좋았습니다.
@@jupiterwi3845 에고...;;; 의도와는 달라서 죄송합니다 순수한 궁금증이었습니다 ;; 교류측면에서 어떤점에서 좀 이상하게 느끼셨는지 ;;;
@@장애옹-s3w 댓글에 화가 났나 싶을 정도로 감정적으로 쓰신 것 같아보이더라구요. 난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을까? 굳이 왜 님이..? 같은 표현에 불만스러운 것 같아보였습니다. 물론, 비판해주시는 것은 좋습니다. 부족한 면이 많은데 어떻게 안다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철학을 주제로 한 채널이다보니 생각을 나눠보고 싶었던 점이 큽니다.
저는 왜라는 질문은 자신에게도 향하고 바깥에도 향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떠한 철학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물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누군가가 주장하는 것은 왜 이랬을까부터 어떤 상황에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나 같은 것이 있겠죠. 묻다보면 생각을 보게 되고 그 맥락을 보게 되죠. 그리고 개인의 경험과 지식에 따라서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죠. 오해할 수도 있겠구요. 이것이 앞서 말했던 언어의 불일치성일 것입니다. 지식이라는 빵을 던져주더라도 빵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와 비슷하죠. 누군가는 금방 씹어먹을 테고 누군가는 천천히 음미할 것입니다. 그 빵에서 어떤 맛을 느끼는지 설명한다면, 우리는 경험을 토대로 설명합니다. 탄수화물이 몇 퍼센트 들어갔고.. 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빵이 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해체하고 분석해서 빵에 탄수화물이 몇 퍼센트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검증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빵이냐를 두고 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 관점과 언어인 것이죠.
처음에 영상을 보고 그저 넘길 것이기도 했지만, 무언가 걸리는 기분이다보니 써보았습니다. 저는 저자가 양자 역학의 해석에 중점을 많이 둔 것 같다고 느꼈거든요. 쓰다보니 영상만으로는 저자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이런 해석으로 생각했겠구나 하는 것으로 썼습니다. 논거가 부족할 수는 있으나... 아무래도 유튜브 댓글이니 나름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썼습니다.
저자가 모순을 이야기하지만, 제 생각은 사실적 현상이 철학적으로 모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게 주 맥락입니다. 우리가 알게 되고 생각하는 철학적 주제는 인간이라는 토대로 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오류를 가지고 실재 운운한다..라고 한다면, 그 오류를 제거해서 실재를 아는 것이 가능할까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실재를 알고 있고 실재를 알려주더라도 그 실재에 대한 해석은 다시 인간이 알아볼 수 있게 바꿔야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류는 필연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양자 역학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죠. 양자 역학은 수학적으로는 현상에 대해 정밀한 근사치를 얻을 수 있고 실험에서도 검증이 되는데, 설명하기에는 굉장히 비직관적입니다. 비직관적인 것에 대한 해석이 어렵다고 가능성으로만 해석해버린다면, 아이디어로서는 좋을지라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일지도 모르죠. 리처드 파인만은 양자가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이동할 때 전 우주의 모든 경로를 지나간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에 꽤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실재를 모르니 겪는 것이기도 하고, 우주 전체를 우리가 직접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A라는 원자의 전자 구름은 다른 A원자에서도 같은 확률 분포를 갖습니다. 이러한 것은 대칭성과도 연관 됩니다. 물질이 가진 정보는 어디에서나 같다는 것이죠.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실재는 하나를 뜻하는 게 아니라 의미장 내에서 다층적으로 다원적으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각기 독립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으로 비춰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미장 내에서 a라는 해석, b라는 해석, c라는 해석이 결과가 맞으면 모두 맞다라는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양자의 무작위성이 의미장 내의 해석에 부합하면 맞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천차만별의 해석이라도..? 예를 들었던 A원자의 전자 구름이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완전한 무작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A원자가 가진 전자 구름의 모양은 같습니다. 아직까지 이외의 현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발견된다면 우주가 지금의 모습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우주와 다른 우주였을 것이니까요. 저에게 이 사실은 좁힐 수 있는 실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 옳겠지만, 다양한 가능성이 모두 옳다고 보는 것은 회의적입니다. 정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는 정보가 무한할 수 없다고 보는 쪽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의 실재를 유한한 우주에 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한한 실재가 있으리라는 쪽인 거죠.
하늘 위에 떠다니는 구름에 모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은 인간이라는 토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름으로 퉁치고 분류하는 것은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것이죠. 그 토대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 또한 현상의 일부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그 토대의 오류를 지적한 게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적 오류가 있어서 알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있기도 하니까요. 실재가 있다고 믿으며 실재를 밝히고자 하는 욕망이 오류라고 한들 그것이 있어서 과학, 철학 등의 발전을 이끈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니까요.
그래서 결국은 모릅니다. 아직은 상상의 영역에 둘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토대라는 것은 언어 뿐만 아니라 신체적 반응, 환경 역시도 포함하니까요. 로봇이나 AI가 답을 찾을지도 모르죠.
@@jupiterwi3845 우리 세대에 풀 수 없는 것이라는 게 있겠죵 우리는 최대한 길을 갈고 닦는다는 측면으로 보고 그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아 봅시당 ㅎㅎ.우리한테는 그래도 다음이 있다라는 게 희망적일 수도 있죠
7:18
- [다번역성경찬송]
개역개정 창세기 2장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칸트식으로 해석하자면 유일하게 외부에 있는 것은 공간입니다. 나머지는 내부에 있습니다. 시간도 내부에 있습니다.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실재한다고 볼 수 있지만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감성형식과 오성형식, 그 형식도 관념화 해서 나타낼 수 있으니 존재하는 것이 겠죠. 그 형식들에 들어오고 구성되는 대상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이 모든 것들은 내부에 있습니다
그러나 공간은 외부에 있습니다. 감성형식과 오성형식으로 관념 그리고 개념으로 표상되는 공간 이전이 공간은 직관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외부에 있습니다. 따라서 외부의 것을 가늠할 수 있고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공간이라는 점에서 공간을 실재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가브리엘은 이런 근본적인 인식론의 틀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논리적으로 시뮬레이션 우주와 동일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본적인 인식론적 한계를 하나의 존재론적 구성에서 본다는 점에서요.
가브리엘은 공간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궁금하네요.
철학자들은 생각이라는 망상을 합니다
부처처럼 깨달으면 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제법무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도가도 비상도 정도 되겠네요.
중간의 실재와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파르메니데스의 이야기군요. 고대 인도 철학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쩌면 고대부터도 많은 현자들이 고민했을지 모를 근본적인 철학 문제로 보이고요.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신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과 닮아있죠. 그런데도 많은 과학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그걸 확실한 진실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본인들은 스스로 과학적이라고 또는 유물론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모순적이게도 불합리하게 신앙적 태도를 보입니다. 과거에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정도의 생각으로도 유용했습니다. 형이상학적 실재론도 나름대로 유용성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족해지는 순간도 생겨나고 시간이 지날 수록 그 강도와 빈도가 높아질 겁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들로 저는 넓게 보면 장자철학이 합당해 보입니다. 모든 의미장에 빈틈이 있기 때문에 혼돈에 구멍을 뜷어 놓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의 구조는 뉴런이 결정할까요?(음, 뇌세포를 의미합니다.)
뇌세포의 구조대로 우리는 사고할까요? 아니면 뇌세포는 하나의, 인간의 사고 구조를 뒷받침해주는 어떤 틀인 걸까요?
우리의 사고는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일까요?
언어도 사고의 구조인데, 각 지역마다 언어의 특징들이 모두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부분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인류의 뉴런, 뇌세포 구조는 거의 같을텐데, 인간의 사고하는 방법, 그것이 집약되어진 언어가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수 있을까요?
인간의 사고도 진화해 온 걸까요?
진화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까요?
인류는 그동안 (자연스럽게) 진화해 왔습니다. 현 인류는 진화의 방향 조차도 결정할 수 있는 지적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인간이 진화해온 이유, 또는 진화의 방향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왔으며 그것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기린 같은 경우 높은 곳의 열매를 따먹기 위해 목이 길게 진화해 왔다는 진화론적 방향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방향으로의 진화도 이제는 고려해 볼수 있는 것입니다.
사고의 진보, 의도적 진화, 물질적 진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뇌의 진화적 방법에서의
선택적 진화에 대한 얘기인 것입니다.
optional evolution of thinking
이다 & 있다
1. 있다
'있다'는 늘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색깔, 크기, 길이, 넓이, 높이, 부피를 가진 모든 것들은 실은 '확정적 물질'이 아니라, '불특정한 것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얽힌 관계들이 서로 복잡하게 매듭을 이루고 있는 것이 '누리(세계·우주)'..
모든 것의 속성은 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 정보는 관계에 기초한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내가 보지 못했으니, 그 사건은 없었던 것이다"라 되뇌어 보지만, 그 사건은 일어났었고, 또렷하게 내 삶에 영향을 끼치더라..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인식하지 못하면 '있지 않다(없다)'고 여기게 됨"이라는 인식론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우리가 누리며 살아가는 이 '누리(세계·우주)'는 '확정적이지 않고, 경계가 또렷하지 않은 대상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다. 우리가 보통 '실재적 대상'이라 믿는 물질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 아니라, 관계들이 뒤얽혀 있는 장!
2. 이다
① 이다 : 눈앞의 '이것'이 머리속에 떠올린 '그것'과 맞아떨어지면 '~이다'!
② 안·밖
-안이다=아니다 : 눈앞의 '이것'이 머리속에 떠올린 '그것'과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안(머리속 그것)'이다! ※내가 지금 머리속에 떠올리는 게 맞지.. '안'이다=아니다..
-밖이다=바뀌다 : 눈앞의 '이것'이 머리속에 떠올린 '그것'과 맞아떨어졌는데, 다음날 다시 보니 맞아떨어지지 않네? 그러면 '밖(눈앞 이것)'이다! ※내가 머리속에 떠올렸던 게 맞지 않지. 눈앞 이것이 맞지.. '밖'이다=바뀌다..
③ 참·거짓
-참이다 : 겉에 '생수'라 적힌 병. 속에 마셔보니 생수면 참!
-거짓이다 : 겉에 '생수'라 적힌 병. 마셔보니 소주면, '겉짓(겉에 뭔 짓)'한 것! 거짓!
-속이다 : 겉에 '생수'라 적힌 병. 속에 생수 아니면, '속'에 어떤 짓 한 것! 속이다! ※내가 머리속에 떠올렸던 게 맞지 않지. '속(병 속에 있는 것)'이 맞지..
④ 맞음·맞지않음 (진·위=眞·僞=진짜·가짜, True·False)
-맞지 : 눈앞 이것과 '머리속 그것'이 맞아떨어지는 상태.. ※'지'=풀이말의 바탕꼴..
-맞다 : ‘맞지’ 상태가 다 되면 ‘맞다’ ※'다'='완결'의 뜻..
결국 의미장 이론-->언어게임 이론 아님? 맥락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니까
얼마전에 소개해주신 나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하는말과 비슷해보여서..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의 한방편?한이론?..뭐 그렇게 봐도 무방할거 같아 보이네요.. 의미장도 양자얽힘현상과 비슷해보이고요.. 저도 그렇고 요즘 사람들이 양자역학에 심취해있는데...역시 철학과 맞닿아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네요.세계의 비밀..존재의 비밀.. 알고싶당.. 영상 잘봤습니다~
실제로 가브리엘도 에서 카를로 로벨리에 대해 언급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요. 다만 가브리엘은 로벨리는 결국에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적 입장에 가까운 입장을 고수한다고 평가합니다. 아무리 관찰자와 얽혀 있는 우주의 면모를 강조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관찰에 앞서서 존재하는 우주를 어떤 방식으로든 옹호하는 것으로요.
@@chungco_phil 오홍 그렇군요.저는 카를로 로벨리가 오히려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반대편이라고 생각했거든요.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주장하시는분들은 뉴턴의 고전역학처럼 답이 꼭 나와야만 하는 느낌이고... 카를로 로벨리는 상호작용전까지는 파동형태인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느낌으로...존재...여튼 존재는 존재니까 그렇게 판단하신걸지도 모르겠네요.여튼 재미있는 생각인거 같습니다.
세계와 세계관의 구분에 대한 이야기네요. 좋은 주제입니다. 인간의 한정된 삶과 인지 체계로는 세계를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죠. 어느 학문을 배우더라도 진짜 끝까지 배운다면, 그것이 설명하는 세계는 결국 세계관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의미장 안에서만 그 이론이 유효한거죠. 한 분야의 의미장이 가지는 이론적 한계를 깨닫게 된 사람은 겸손하고, 다른 분야의 이론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하잖아요. 의미장의 개념은 그런 사람들이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이런 영상을 챙겨보지 않죠. 그저 본인들의 한계를 깨닫고 수치심을 느낄 때까지 기다려야 할 뿐.)
이런 책을 도데체 어디서 얻어 가지고 오는 거에요 ㅋㅋㅋ 대단하네용 일단 평균점 내세우고 분화된 형태 확인하고 차이점 구별한 뒤 계속해서 유리할 수 있도록 수정해 나아가야겠죠 그리고 대상과 주체를 명확히 나누지 않아서 말하는 문법이 쪼메 헷갈리네용 ㅋㅋ
실재 존재 허구... 명확한 꼭 한가지 정의가 있는건 아니겠지만서두... 인문학 철학하시는 분들은 통용되는 정의의 범주를 벗어나 많이 비틀어 새롭게 정의하는 듯 하다. 유발하라리가 국가 제도 등을 허구라고 하면서 통용되는 허구의 정의를 비틀었을 때는 나름 주장하는 바에 부합하다고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의미장 어쩌구하는 본 내용은 그다지 천재적으로 새롭게 비틀어 본 이론 보다는 이 쪽 세계에서나 화자되는 언어 유희 정도가 아닐지... 절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말장난으로 여겨질수도 있게구요. ^^
자신이 숨쉬고 있음으로 존재한다
? 칸트의 선험론이나 쿤 패러다임론에 비해 새로운 면이 뭔가요?
참 좋아요 ^^
존재, 의미, 관념, 가치관, 물질에 대해 켜켜히 쌓아왔던 제 생각들과도 겹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부분들 속에서 괴리와 또다른 논점들이 떠오르네요. 오랜만에 영상 1초들이 모두 와닿았고 필요한 생각 단계를 만들어준 영상이었습니다. 좋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인간들도
에테르에둘러싸여있지요!!
그것은에너지장입니다!
I don't think the demarcation holds water. Surely, the stt "unicorns have two horns" is false, while "unicorns have have one horn" is true.
양자 역학에서 모든 걸 풀어내는 하나의 이론을 밀고 있는데 그렇기 위해선 믿기 힘든 다차원 세계같은걸 도입했죠. 출발점 자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철학적 관점에서 말하는거 같네요.
0.1초 후: 뭐의 존재?
0.5초 후: 문장이 이상한데?
1초 후: 어???
창조주의 표현에서 “존재의 모든것” 이란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고려할때 가브리엘의 메세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논한것 같습니다.
오늘 이것에 관해 얘기해 보려 합니다.
우리는 시작도 끝도 없이 과거 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창조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꽉찬 진공상태 처럼, 우린 모든 것이 창조 가능한 상태, 하지만 그 모든 것 조차도 이미 만들어져 있는 진화의 창조의 순환 구조 속에, 새롭게 더 창조될 것은 없었습니다.
창조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미래에 이미 창조될 수 있기에, 그 이상의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은 더 이상 창조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창조주는 알파와 오매가 이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주는 어디로 부터 왔는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의미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기에… 창조주 철학의 진실 이었습니다.
허무하기 까지 한 창조의(창조주의) 진실 이었습니다.
신은 존재할까? 신의 형상은 무엇일까? 신은 이 세계를 어떻게 창조 하였을까? 그런 질문의 보다 더 본질적인 접근인 것이죠.
이 세계가 창조 되어졌다면 그것은 방법론일 테고요,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창조하느냐의 창조적 에센스, 본질에 관한 것이겠지요.
그런 부분에서 사고의 본질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요
같은 의미로, 신은 왜 존재할까? 이 세상은 왜 창조되어 진 것일까? 하는 질문에도 답이 될 수있는, 그냥 존재해 왔으니까..
왜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어지는 존재의 본질론에 관한 답변이었던 것인데요, 존재하는 모든것에 대한 개념…
충코님 그냥 예수님이 이세상의 창조자라고 생각하면 그냥 철학의 거의 모든 부분이 해결되요 진심입니다...
철학은 끝없는 물음이지만 성경은 거기에 대한 해답을, 넘어서 세상의 창조원리와 생명탄생의 근본섭리들을 알려줍니다
이분도 크리스천같던데
모든 철학의 문제는 통일성과 다양성 보편성과 개별성 실존과 본질 전체를 아우르는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이성과 경험은 직관적인 믿음을 기본 전제로 해서 출발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직관적인 믿음안에서 출발하는 인식이 완전한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환원적으로 쪼개어진채로 설명할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은 너무나 유용한 학문이지만 철학 그 자체로는 존재와 생성의 문제 그리고 존재와 인식 윤리를 하나로 묶는 의미있는 지식이 될 수 없는 것이죠
좋은 내용 잘 봤습니다. 그런데 광고가 중간에 3번이나 나오네요. 이건 좀 배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마 한번 더 20분짜리 동영상에 이렇게 광고수가 더 나오는 경험 생기면, 아마 충코님 그만 볼 것 같습니다. 배려 부탁합니다.한번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