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키에르케고르의 의심 / 불안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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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23 ก.ย.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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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uw9lz
    @TV-uw9lz  4 ปีที่แล้ว +39

    불안
    불안(Angst)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서양 철학자들 가운데 특히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리쾨르, 레비나스의 사유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념이다. 이것은 언제나 서양철학의 사유에서 존재와 함께 다루어졌다. 존재의 결핍은 악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고 악에 대한 불안은 존재의 관점에서 사유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배려의 세계에서 기분에 사로잡혀있다. 장애가 없는 평정심이든 장애가 있는 불쾌감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기분은 사태의 인식 이전에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기분이 얹잖다는 것이나 극단적 무관심도 존재론적으로 무의 상태가 아니다. 기분이 급격하게 좋아졌다가 나빠진다는 것도 역시 현존재가 각기 그대마다 이미 언제나 기분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분은 세계 안에서 현존재에게 그의 존재의 짐으로 다가온다. 기분을 통하여 그는 그의 존재 앞으로 데려와진다. 그는 기분을 통하여 자신이 지금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느낀다. 그러나 그는 왜 내가 지금 이런 기분에 사로잡혀있는지 그 원인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분의 열어밝혀짐은 인식의 가능성을 훨씬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분은 존재론적으로 인식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개념이다. 이것은 다시 공포와 불안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불안은 공포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에서 “불안”을 “공포”와 비교함으로써 현존재를 죽음의 무 앞으로 데려온다. 공포는 두려워하는 대상을 분명히 갖고 있는 인식론적 개념이고 불안은 그것의 대상을 갖고 있지 않은 존재론적 개념이다. 뱀에 대한 공포, 피에 대한 공포, 폭력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타자에 대한 공포,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공포는 언제나 대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불안은 특정한 대상을 갖지 않는 존재론적 분위기나 으스스한 기분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식의 대상이 되기 전에 인식 밖에서 갑자기 인간을 덮쳐서 그의 존재를 사로잡아 오는 음산한 날씨나 으스스한 공기와 같은 것이다. 불안이 찾아오면 인간은 지금까지 유의미했던 세계를 무로 느끼고 앞질러 달려가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적나라한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발가벗은 실존 앞에서 불안에 사로잡힌 채 존재의 무를 느낀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불안의 개념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개념이 키에르케고르의 으로부터 차용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이데거는 자신의 작품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고대 신화의 실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지만 말이다. 은 죄의 현상학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대들은 다음에 전개될 내용을 보면서 하이데거의 불안이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차용되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화에 따르면 인간이 죄를 짓기 전에 그는 에덴동산에서 살았다. 거기는 신, 인간, 자연, 동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낙원이었다. 그런데 이 완벽한 조화 속에서도 부재한 기표가 있었다. 바로 뱀이었다. 뱀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완벽한 조화를 뒤흔드는 존재의 결핍으로서 신의 낙원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악의 기원이 인간이 아닌 셈이다. 죄를 지은 후 인간은 이성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머릿속에 지닌 채 신화의 세계에서 역사의 세계로 추방된다. 그런데 역사로 추방된 인간이 최초로 행한 범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카인이 동생 아벨에게 저지른 형제살인이었다. 이때부터 역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인간의 죄는 점점 늘어만 갔다. 이제 그의 죄는 원죄로서 자신의 인식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론적 불안으로 변화된다. 생존하기 위해 호흡해야 하는 인식 밖의 공기와 같은 것이 된 것이다. 인간이 지배하고 통제하기 전에 언제나 그의 실존을 사로잡고 있는 존재론적 기분! 죄의 현상학이자 악의 기분잡혀있음! 그러나 리쾨르는 키에르케고르의 을 칸트의 인식론에 근거하여 으로 풀어냈다. 정말 탁월한 통찰이다. 여기서 개념은 상징으로 변화된다. 근본악으로서 죄의 발전단계에는 흠, 죄, 허물이 있다. 흠은 죄가 사물성에 비유되는 단계이고 죄는 공동체에서 발견되는 악으로서 추방의 대상이 되는 단계이고 허물은 인식론적으로 “이것은 나의 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단계이다. 이 문제와 연관하여 리쾨르의 을 읽어볼 것을 권고한다.
    레비나스는 에서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불안을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 변형시킨다. 존재의 결핍이 악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악이라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이 아니라 존재의 긍정성 자체가 악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 형이상학 전체를 넘어서는 사유 같지만 실은 서구 형이상학으로서의 신학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사유이다. 하이데거 역시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악을 존재의 결핍으로 보든 존재의 긍정성으로 보든 양자 모두에서 악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존재의 충만 안에서 결핍을 보거나 존재의 긍정성 안에서 부정성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다. 곧 악의 근원을 존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존재자에게서 찾으려는 의도 말이다. 여기서 특정한 존재자란 아마도 나치의 전체주의일 것이다. 아마도 프로이트, 라캉, 지젝이었다면 무의식의 관점에서 악의 문제를 풀어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리쾨르, 레비나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나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그대들이 서양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악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때로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신학도 철학도 모두 이 문제에서 정체되고 이 문제에서 비트적거리고 이 문제와의 끈질긴 씨름을 통하여 발전했기 때문이다.” 악의 기원? 그대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