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i Goen: Winner of the Frieze Artist Award | Frieze Seou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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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15 ก.ย. 2024
  • Artist Choi Goen takes us through her practice of repurposing and transforming industrial elements - such as exhaust pipes and air-conditioning units - to reveal the complex physical materials that sustain our digital connections and silently permeate our urban environment.
    Choi Goen has been named as the recipient of the 2024 Artist Award at Frieze Seoul. Now in its second year, the Artist Award enables an emerging or mid-career artist to realize an ambitious new body of work.
    This commission was supported by Bulg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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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oiGoen #StudioVisit #Frieze #FemaleArtist

ความคิดเห็น • 2

  • @user-iq2ur7dg2y
    @user-iq2ur7dg2y 24 วันที่ผ่านมา +1

    높은 수준의 비가시화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9월 7일 주어져서
    기대 됩니다
    동영상은
    작가님의 작품에 어떻게생명을 불어넣는 지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 @user-jx3oh6my9u
    @user-jx3oh6my9u 24 วันที่ผ่านมา +2

    1. 개념 미술
    사실 나는 오늘날 설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개념 미술"을 별로 좋아하는 감상자는 아닙니다.
    예술 작품에서 "물리적 형태나 미적 가치"보다 "아이디어나 개념을 중심에"
    두겠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저 순수하게 작품을 느끼고 감상하고 싶을 뿐인데
    개념 미술가들이 감상자인 대중을
    가르치고 싶어한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거든요.
    오늘날에는 예술의 정의와 경계가 확장되어야 함을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고 있었음에도
    내 마음은 과거 미술이 지향했던
    모방이나 재현의 세계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글을 읽지 못하던 과거에도
    미술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게 할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과거의 고전주의가 신 고전주의로 재 탄생하면서
    고전주의의 "미학 적 이상"이
    신 고전주의에서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자리를 내준 것만 봐도
    미술이 단순히 미학 적 아름다움의 영역에만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왜 이리 개념 미술에만 유독 속 좁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던 걸까요?
    예술 작품은 단순히 미적 감상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 미술가들이 주장하듯
    예술도 생각하고 논의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담은 매개체가 될 수 있는데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왜 그토록 미술에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걸까요?
    어쩌면 미술이 당한 이런 차별은
    칸딘스키가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악이 구체적인 형태나 재현 없이도 감정을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칸딘스키의 "구성(Composition)"시리즈에서
    미술 역시 "색채와 형태로 감정과 내적 상태를 추상으로 전달하며
    미술을 보이는 음악으로 끌고와 색과 형태에 비로소 자유를 얻었으니 말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개념 미술가들이 예술의 방향이 작품의 형태나 제작 과정보다
    그 뒤에 숨겨진 생각, 메시지, 개념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문자를 이용한 문학은 아주 오래전부터
    독자에게 형태로는 문체의 다양성 존중으로
    내용으로는 주제 의식이나 은유 같은 개념의 영역에서 소비되고 있지 않습니까?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으로 감각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요소의 긴장을 문학의 탄생 요인으로 꼽았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미술이 아폴론 적 특징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너무 늦은 출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영상을 통해 작가가 설명하는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들으며
    디오니소스 적 감상은 잠시 뒤로 한 채 아폴론 적인 태도로
    작품 뒤에 숨겨진 생각, 메시지, 개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2. 가시성 (Visibility), 불 가시성 (Non-Visibility) 그리고 비 가시성 (Invisibility)
    나는 그동안 기술이 가진 물질성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 보지 않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현실 공간에서 마주하는 디지털 기술은
    "소프트웨어나 데이터 같은 비 물질적인 것이기에"
    이러한 기술이 존재하고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물질적 인프라와 자원이라는
    하드웨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인간이란 자신도 모르게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 가시성 (Visibility)에 현혹되어 살아가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제가부터 저 역시 관성에 익숙해지고 있었는지
    시각적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고 더 나아가 이해를 넘어서는
    불 가시성 (Non-Visibility)이나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거나 인식되지 않는
    비 가시성 (Invisibility)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있었습니다.
    이 영상에서 작가는
    디지털 세상의 이면에 숨겨진 사회 기반 시설을
    비 가시화 개념으로 확장하더군요.
    그런데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비 가시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어찌 디지털만이 가진 특징이겠습니까?
    내가 현대인의 삶은 각박하다는 핑계를 대며
    눈에 보이고 직접 경험하는 것에만 익숙해지는 동안
    그 이면에 있는 물질적 실체가 사회적 관성이나 관념에 매몰되어
    점점 더 그 특성이
    "비 가시화되고 추상화되어" 가고 있음을 잊고 있었네요.
    나는 작가가 작품에서 "가학성과 우아함의 교환"을 통해
    이면을 표현해 보고 싶다고 하면서 종교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할 때
    가시성, 비 가시성, 불 가시성이라는 개념이
    시각적 인식의 차이를 넘어,
    "존재와 인식, 표현의 방식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유"를 작품에 담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3. 가학성과 우아함을 지나 레디 메이드( Ready-made)의 새로운 변화
    12세기 중반부터 16세기까지 중세 유럽에서는
    섬세한 장식과 정교한 세부 묘사라는
    우아한 표현이 특징인 고딕 미술이 유행했습니다.
    고딕 미술가들이
    가혹하고 강렬한 종교적 메시지를 위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표현의 극단성으로 몰리는 순간에도
    가학성과 우아함의 절정 이루어 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전부터 이어져 온 가학성과 우아함은 예술의 아주 오래된 전통이지요.
    나는 작가가 단순히 디지털 이면을
    가학성이나 우아함의 교환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한 마르셀 뒤샹의 "샘" 같은
    기존의 레디 메이드( Ready-made) 작품 방식을
    다른 형태로 변주하는 과정을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
    즉, 폐기된 기성품이 작가의 손에 의해
    작가의 의도를 담아 부수고 다듬어지는 동안
    폐기된 기성품은 단순히 레디 메이드( Ready-made)의 소재가 아니라
    Ready ingredients 과 Ready material의
    중간쯤에 있는 재료로 변했음을 발견했거든요.
    Ready ingredients 과 Ready material가
    한국어로는 똑같이 준비된 재료로 번역 되겠지만
    악성 재고로 이름 붙인 물질적 재료가 작가의 손에서 구부러지고 절단되면서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를 찾아가는 동안"
    작가의 손에 오기 전에는 죽지도 못한 채 남겨진 채 있던
    그 폐기물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는"
    이미 손질 되었거나 사용 준비가 된 재료인 Ready ingredients와
    특정 목적에 맞게 사용될 준비가 완료된 상태의 재료인
    Ready material 의 특징을 모두 가져오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디지털 정보를 위해 물리적 공간에 저장되고 전달되다가
    그 쓰임을 다한 후 남겨진 전자 폐기물을 향해 작가는
    "악성 재고로 이름 붙인 물질적 재료를"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상태이나 죽지 못하고 " 있다 말했습니다.
    나는 악성 재고가 되어버린 "폐기물을 개념적 재료로 변형 시킨" 작가의 시도를
    가학성과 우아함의 교환이라는 예술적 전통을 이어가는 동시에
    레디 메이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변주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공간을 비 가시화된 이미지로 채우겠다는"
    작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 물론 작가가 작품에 녹인 이미지가
    작가 자신의 본래 의도나 생각과는 다르게
    나에게 이해될 수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어차피 이미지가 가진 속성은
    개인의 해석과 경험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작품과 감상자 간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만큼
    작품은 감상자에게 열린 해석을 통해
    이미지가 전달하는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다층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테니까요.
    4. 9월 7일 서울 코엑스몰 - "화이트 홈 윌: 웰컴"
    뭐,,,아무튼 9월7일 코엑스몰에서 내가 마주하게 될
    작품 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꽃잎의 수는 셀 수 있지만,
    나는 그토록 재능 있는 문인들이 하는 것처럼
    그 빛깔을 묘사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조심할 것이다."
    라고 자신을 다독였던 것처럼
    나는 다음과 같은 각오로 작품을 만나보려 합니다.
    일식의 움직임을 빌어서 잠시 그 이면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시도한
    작가의 작품 앞에서
    파이프의 크기나 재어보고
    이 파이프의 구부러진 각도는 몇 도나 될까? 같은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
    아주 오랜만에 디지털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비가시성 (Invisibility) 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잠시 현실을 벗어나 공간과 감응하는 사치를 누리면서 말입니다.
    5. 덧붙임
    이 영상을 보고 나서 개념 미술에 가졌던 나의 편협한 생각의 틀이 유연해졌습니다.
    동영상 제작을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최고은 작가를 향한 무한한 응원도 함께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