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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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룬제 박물관 (비슈케크시) М. В. Фрунзенин Үй-музейи
키르기스탄 수도 비슈케크시에 있는
푸룬제 박물관 (비슈케크시) М. В. Фрунзенин Үй-музейи.
미하일 푸룬제 (1885~1925)는
중앙아시아 키르기즈스탄에서 태어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활동하였고, 그의 이름을 딴 장교 양성 학교와 군함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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วีดีโอ

키르기즈스탄 국립 역사 박물관. Кыргыз Республикасынын Улуттук тарых музей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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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즈스탄 비슈케크시 국립 역사 박물관 Kyrgyzstan State History Museum Кыргыз Республикасынын Улуттук тарых музейи. 키르기즈스탄에서 가장 큰 역사박물관이며 중앙아시아를 통한 동서양 문화 교류의 역사를 잘 보여줍니다.
러시아의 영웅인가? 일제 밀정인가? 자유시 포병부대장 안드레예브 이반 찌하노비치(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1884~1933)
มุมมอง 44114 วันที่ผ่านมา
1921년 자유시참변, 1920년 니항사건과 관련된 안드레예브 이반 찌하노비치(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1884~1933) 는 1884년 러시아 피트라그라드 지방의 두비키 마을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러시아로 귀화한 핀란드인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선원, 화부, 조타수로 러시아 서부인 발트해 일대의 상선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핀란드어와 덴마크어를 포함한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습니다. 안드레예브는 15년 정도 차르군대에서 군복무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장교 학교를 졸업하고 소위가 되어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용감함을 대해 그는 두 개의 세인트 조지 훈장을 받았습니다. 1917년 2월의 러시...
독립유공자법 개정으로 고손자녀 이후 후손1명도 혜택 가능해짐
มุมมอง 12321 วันที่ผ่านมา
독립 유공자와 독립 유공자 후손의 범위가 2015년부터 더욱 확대되었기에 증손자, 고손자녀 이후의 후손이라도 최소 1명은 국가유공자 후손이 누릴 수 있는 금전, 수당, 연금, 의료, 교육, 주택, 취업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관련법률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약칭: 독립유공자법 ) 제5조(유족 또는 가족의 범위) ① 이 법에 따라 보상을 받는 독립유공자의 유족 또는 가족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1. 배우자 2. 자녀 3. 손자녀(孫子女). 다만, 독립유공자의 유족으로 최초로 등록할 당시 이미 자녀 및 손자녀까지 사망한 경우에는 독립유공자의 가장 가까운 직계비속 중 1명을 손자녀로 본다. 4. 며느리로서 1945년 8월 14일 이전에 구호적에 기재된 자 ② 제1항제1호의 배우자의 경우, 사실...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옛날 성과 자연사박물관
มุมมอง 15721 วันที่ผ่านมา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옛날 성과 자연사박물관.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 시내에 있는 옛날 성과 성내의 자연사박물관입니다. 동식물과 비단, 목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동서양 문화 교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호치민시 베트남전쟁 잔재 박물관 Bảo tàng Chứng tích Chiến tranh
มุมมอง 119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호치민시 베트남전쟁 잔재 박물관 Bảo tàng Chứng tích Chiến tranh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배, 일본 식민지배, 내전, 미군과의 전쟁 등을 거치면서 남겨진 전쟁의 잔재를 박물관으로 만들어 전시중임. 베트남 호치민시에 위치함 한국인 관광객외에도 미국인 관광객, 프랑스인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합니다.
호치민시 역사박물관 Bảo tàng Lịch sử TP.Hồ Chí Minh
มุมมอง 120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호치민시 역사박물관 Bảo tàng Lịch sử TP.Hồ Chí Minh 베트남 최대 도시인 호치민시에 있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베트남 역사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
부진비치. 시베리아의 파르티잔 : Бузин-Бич, Дмитрий Семёнович
มุมมอง 206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부진비치, 혹은 '부진-비치' 또는 '부진' 의 성을 사용함 (Бузин-Бич, Дмитрий Семёнович. 1887년경 출생 ~ 1938년경 하바로프스크에서 처형. 1957년 구소련에서 복권됨) 1908년경 이르쿠츠크 사범학교 졸업, 하바로프스크 인근에서 교사 생활. 1차 세계대전에 차르군대 장교로 출전.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가담함. 1920년 3월 12일 니항(니콜라예프스크 =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에서 일본군의 반자이 야간 기습공격으로 부상당한 트리피츤과 함께 사진 촬영한 사람이다. 트리피츤(Яков Тряпицын) 부대의 간부로 께르비에서 처형되지 않고 생존하여 사할린 주, 하바로프스크 주, 아무르 주, 캄차트카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니항사건에 관한 회고를 남겼다...
정방사 (충북 제천)
มุมมอง 139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정방사. 충북 제천시 수산면 금수산에 위치하며 신라시대에 창건 청풍호(충주호) 주변에 위치한 정방사의 모습을 담아 봤습니다.
야한토프(Яхонтов, Иван Андреевич. 시베리아의 파르티잔)
มุมมอง 261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야한토프(Яхонтов, Иван Андреевич. 1894년경 출생) 1918년경 아무르주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에서 반일 활동. 1920년경 니항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파르티잔 활동(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1920년 3월 12일 일본군의 반자이 야간 기습공격으로 부상당한 야코프 트리피츤과 사진 촬영한 니항 파르티잔 간부들중 1명이다. 1920년 5월 말경 일본군의 공격에 피난길에 올랐다. 1920년 7월초 사할린주 께르비에서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와 박병길의 반란으로 체포되었으나 블라가베셴스크로 조선인 사할린 의용대원들과 이동중 탈출했다. 1923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복권됨. 마가단(Магадан) 등 동시베리아 일대에서 활동
내몽골 호륜패이 부도통아문 박물관
มุมมอง 202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내몽골 호륜패이 부도통아문 박물관. 청나라 시대부터 중화민국 초기의 부도통아문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알선동, 알바진, 중동로사건, 아이훈 조약, 네르친스크 조약, 노몽한 사건, 강교 사건, 해만 사건 등으로 한국에도 상당히 알려진 호륜패이 지방. 과거부터 잦은 국경분쟁으로 인해 러시아, 중국, 몽골 3개 국가의 국경 경비는 오늘날에도 삼엄합니다.
1919년 3·1운동. 독립을 위한 비폭력 평화 시위의 시작
มุมมอง 464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919년 3·1운동 : 독립을 위한 비폭력 평화 시위의 시작 ......일제 식민지시대의 본격적 민족해방운동은 3·1운동을 기점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은 러시아 혁명,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되어 일본 동경의 유학생들의 2·8선언이 먼저 나오고 뒤이어 서울에서 종교계를 중심 한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민족자결주의는 주로 유럽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에 적용하기 위한 원칙이었을 뿐, 뒤늦게 참전하여 전승국의 대열에 끼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의 독립문제에 도움을 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대표’의 일부도 이 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있었던 것 같으며,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그들에 의해 하나의 기회로 활용되었다. ...
니항사건 순난자비
มุมมอง 875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920년 니항사건 순난자 비 라는 것은 도대체 또 무엇인가 ? 니항사건 순난자 비 라는 것은 오늘날 일본 본토에 여러개 세워져 있는, 1920년 3월 12일 러시아 아무르강 하류 니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발생한 니항사건에서 반자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가 패퇴하여 집단 자살하거나 사망한 일본인 약 680여명의 명단이 적혀 있는 비석이다.​ 니항사건은 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중 하나로 조작되면서 일제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물론 친일 조선인중에도 맞다고 북치는 자들이 수두룩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당시 시베리아에만 친일 조선인 단체 가담자가 최소 수천여명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일제의 러시아 적백내전을 틈탄 시베리아 만주침략 시기 가라유키상 위안부로 강제동원되거나...
봉오동 전투 참가 김재규 선생 회상
มุมมอง 485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봉오동(鳳梧洞) 전투 홍범도 등 독립군의 국내진입 유격전에서 여러 차례 패배한 일본군은 1920년 6월경 두만강을 건너 간도의 독립군과 근거지를 공격하였다. 독립군의 대표적인 승리로 알려진 봉오동 전투는 함경도 온성에서 두만강 건너편인 봉오골에서 1920년 6월 7일 발생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주장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을 내었고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 이라고 「독립신문 1920. 12. 25.일자」에 보도되었다. (※ 6월 4일경부터 발생하였다는 자료도 있다. 봉오동 전투는 인터넷과 많은 책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상세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 전투 중 하나하나 사망자 수를 표시하면서 세지 못하고, 대충 추정하여 과장...
청산리 전투 참가 이종학 선생 회상
มุมมอง 513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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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시마다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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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시마다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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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Хон Бом До) 장군의 생애 (1984년 고려인 라디오방송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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Рувим Фраерман, 러시아의 작가 : 루빔 프라예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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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화 박물관, Ким Пен Хва колхоз Ташкент, Kim Pen Khva Kolkhoz, Muze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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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트리피츤'과 니콜라옙스크 사건(니항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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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니항 사건 (혹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콜라옙스크 사건') 과 일제의 만주 시베리아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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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니항 사건 (혹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콜라옙스크 사건') 과 일제의 만주 시베리아 침략

ความคิดเห็น

  • @RoziqSharipov-ry6tm
    @RoziqSharipov-ry6tm 14 วันที่ผ่านมา

    Karesityrydâlybi,minaroʻd❤

  • @user-jk4qh7rh6l
    @user-jk4qh7rh6l 7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임시정부와 독립군ㆍ광복군이 아니라 대한제국군이 맞습니다.. 임시정부와 독립군ㆍ광복군은 말 그대로 임시일뿐이고 국외에 있었던는 의병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임시정부와 독립군ㆍ광복군 활동을 폄훼하거나 왜곡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국내에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고종황제가 건재했으므로 대한제국군이 국군의 뿌리여야 합니다.

  • @imjin6025
    @imjin6025 8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921. 3. 1. 고려공산당대회 개최 예정일이었나. 양파의 다툼으로 개최되지 않음(상해파는 치타, 이르쿠츠크파는 이르쿠츠크를 주장) 1921. 3월 중순경 상해파 장도정, 계봉우, 김진 등이 고려공산당대회 장소를 블라가베셴스크로 변경 1921. 3. 15. 일경 아무르주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일대에서 상해파 박일리야, 이용, 장도정 등이 전한의병대의회 개최, 전한군사위원회와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 1921. 3월경 상해파는 극동공화국 정부와 교섭하였으나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는 고려군대 군권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있음을 통보 1921. 3월경 총군부, 국민회군, 홍범도 부대, 군정서군, 이만군, 다반군, 박그리고리 부대 자유시 도착. 만주지방 및 연해주지방 독립군 부대를 중심으로 대한혁명군(대한독립군) 조직됨 1921. 4월경에서 5월경 중국 북경 일대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대립하던 측에서 독립군부대 통합을 위해 『북경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실패 1921. 4월경 극동공화국 군부에서 계봉우, 김진, 박애, 이용, 장도정 등 등을 이르쿠츠크로 압송 1921. 4. 14. 일경 이르쿠츠크파는 극동공화국 군부에 임시고려군정의회 조직을 통보 (상해파인 계봉우, 박애, 김진, 이용, 김규면, 이한영, 임상춘, 한형권과 협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 1921. 5. 2. 일경 이르쿠츠크파가 비밀리에 조직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의 오하묵 일행 자유시 도착 1921. 5. 4. 일경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하여 5월 17일경 폐회.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지도하에) 정식 고려군정의회 조직.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의원에 류동열, 최고려 등 임명 1921. 5. 12. 일경 예전 오하묵의 보병 자유대대가 크라스나야라바로부터 원래 주둔지 자유시로 이동 1921. 5. 13. 일경 이르쿠츠크의 합동민족군대 소속 한인부대가 자유시로 이동시작(5월 28일경까지 최종 600여명 이동) 1921. 5. 18. 일경 치타에서 사할린부대로 가던 동림 체포.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측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고려군정의회 무력화 시도. 이 무렵 상해임시정부의 지원금인 금은화 약 3만루블 이상이 러시아 관청에 압수됨 1921. 5. 19 일경 까란다리시비리, 류동열, 최고려 이르쿠츠크에서 자유시로 출발(독립신문 1922. 2. 27 일자) 1921. 6. 2. 일경 홍범도 부대 일부 마자나바에서 자유시로 이탈 1921. 6. 2. 일경 김홍일 단독으로 자유시 도착 1921. 6. 6. 일경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시비리, 류동열, 최고려 등이 코카서스(혹은 카자키, Казаки) 기병 600여명에서 900여명을 인솔해 자유시 도착. 정식 총사령관 선포 (대한혁명군측은 무장해제 명령에 대체적으로 불복) 1921. 6. 6. 일경 까란다리시비리와 통역사 최고려 등은 자유시 주둔 군인 전부를 모아서 설명 1921. 6. 9. 일경 안무 부대 마자나바 이탈후 자유시 도착. 일부 독립군의 주장에 따르면 안무 장군은 홍범도가 떠나자 수차례 자체 회의를 통해 일단 자유시쪽으로 이동하여 내분과 식량난 등을 해소할 목적으로 이동하였으며,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기 위해서 이동한 것은 아니라고 함. 안무 장군의 이탈로 사할린 의용대도 통합에 대한 압박이 가중됨 1921. 6. 14. 사할린부대 자유시 도착후 수라제프카로 이동. 사실상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임. 자유시가 한국 독립군들로 뒤덮임. 1921. 6. 15. 까란다리시비리, 오홀라 및 3명 블라가베셴스크를 방문하여 체포되었던 김규면, 한운용, 박원섭, 마시욱, 주영섭, 안태국, 임상춘 등을 조사하고, 금은화 3만루블 이상을 회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까란다리시비리 등은 6월 18일 자유시로 돌아옴 1921. 6. 19일경 자유시에서 장교회의 개최(분대장 이상 간부) (※이 무렵 수라제프카에 주둔한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와 공격을 반대한 합동민족군대 소속 고려인 간부 투옥) 1921. 6. 20일경에도 군회가 있었다.(※독립신문 1922. 2. 27 일자에 따르면 1921. 6. 20.일경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1921. 6. 21. 그리고리예프, 박일리야 등 장교 7인이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를 축출하면 고려군정의회에 복종하겠다는 혈서 제출 1921. 6. 22. 일경(※1921. 6. 20일날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까란다리시비리, 최고려 등이 독립군 3천여명을 자유시에 집합시켜 전군의 통합을 촉구.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66쪽에 따르면 최고려가 고려혁명 분열을 막기 위해 분란을 일으킨 자신이 독립군이 쏜 3천발의 총알을 맞고 죽겠다고 하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현장에 있던 독립군들은 최고려나 까란다리시비리가 누군지 조차 제대로 몰랐고, 당시 연설을 하여 화합을 유도한 사람은 홍범도 장군 등이었다고 한다. 홍범도는 과거 의병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갑자기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라는 연설을 하여 자유시 군관학교 운동장에 모인 독립군들에게 울음 바다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날 다시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홍범도가 이순신, 사명당, 최무선, 김방경, 이종무, 박제상 등의 유명한 장군 이야기를 안하고 왜 갑자기 김유신 장군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21. 6. 24. 일경 독립군 부대 편제 개편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발생 1921. 6. 25. 까란다리시비리, 류동열 등 수라제프카에서 사할린부대 장교회의 개최 1921. 6. 27. 수라제프카에 주둔중이던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인 그리고리예프 사면서 제출. 27일 자정이후부터 공격 개시 1921. 6. 28. 상오 한밤중부터 시작된 기습으로 수라제프카 일대에서 자유시 사건 발생. (사망 수백여명, 포로 등 천여명 이상)​ 1921년 후반기부터 포로로 잡힌 독립군 다수가 이르크추크 등지로 압송중 사망, 일부는 만주⦁연해주 일대로 탈출, 이동휘⦁만주지방독립군 단체⦁상해임시정부 등의 항의로 결국에는 포로생활을 하던 독립군 대부분 석방됨 1921. 10. 16일경 상해파 측이 러시아 지원 자금의 사용처 등을 보고 1921. 11. 28일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동휘, 홍도, 박진순, 통역사 김아파나시 4명이 레닌과 면담하여 독립군 석방을 탄원. 1921. 11. 월경부터 『워싱턴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 제기하였으나 실패 1921. 12. 9일경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б))는 자유시의 포격·총격 사건을 수사할 것을 지시 1921. 12. 18. 일경(혹은 12월 20일경) 슈먀츠키와 바이친스키 형식적인 퇴진 발표 1922. 1월경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 코민테른 총비서 사파라프(Сафаров),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김규식, 여운형, 구오남, 홍범도, 일본대표 센카타야마(片山潜), 중국대표 왕, 인도대표 등의 만남이 있었고, 한국측 통역사는 최고려였음 1922. 4. 22. 일경 코민테른 상임위원회 한국문제위원회가 이르쿠츠크 대회에서 제명된 모든 당원 복권, 박진순·박애·최고려·김규식 퇴진, 두세력의 통합을 위한 3개월의 휴식기간 결정 1925. 1. 20일경 일소기본조약(日蘇基本條約) 체결.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삼림·석유·석탄 채굴권 등을 획득하고 일본군 철수

  • @user-gn3mr7ib4p
    @user-gn3mr7ib4p 9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노래가사

  • @user-jk4qh7rh6l
    @user-jk4qh7rh6l 10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모였는데 서로 권력을 잡겠다고 싸우다가 자유시참변의 주인공이 된 박일리아...

  • @imjin6025
    @imjin6025 ปีที่แล้ว

    프라예르만이 직접 참가하였던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1920년 일본의 국회의원 선거와 연관되어, 친일조선인, 황족, 수상, 장성 등이 대규모로 동원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조작되고 선전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 침략과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 간도토벌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니항사건. 1920. 3. 12. 일 반자이 기습이 실패하자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한 후 '국가의 수치'라며 대대적으로 미화하였습니다. 또 1920년 니항사건은 당시 조선 서울에서도 친일조선인 등이 중심이 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초혼제를 지낼 만큼 일제의 선전은 대단하였다. 니항사건에서 독립군들이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속이지 말고, '독립군이 몇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오늘날에서라도 보상과 사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러시아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에는 파르티잔 부대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없고,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많다고 합니다.

  • @imjin6025
    @imjin6025 ปีที่แล้ว

    1920년 일본의 국회의원 선거와 연관되어, 친일조선인, 황족, 수상, 장성 등이 대규모로 동원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조작되고 선전되었던 1920년 니항사건... 그리고 시베리아 침략과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 간도토벌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니항사건. 1920. 3. 12. 일 반자이 기습이 실패하자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한 후 '국가의 수치'라며 대대적으로 미화하였다. 또 1920년 니항사건은 당시 조선 서울에서도 친일조선인 등이 중심이 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초혼제를 지낼 만큼 일제의 선전은 대단하였다. 니항사건에서 독립군들이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속이지 말고, '독립군이 몇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오늘날에서라도 보상과 사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러시아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에는 파르티잔 부대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없고,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많다고 합니다.

  • @imjin6025
    @imjin6025 ปีที่แล้ว

    1920년 니항사건은 러시아, 중국, 일본 역사학계의 견해가 많이 다른 사건입니다. 황국사관 혹은 친일학자들의 허위주장을 걸러서 들어야 합니다. 일제 앞잡이의 주장만을 맞다고......사기치는 자들도 많은 모양입니다.

  • @imjin6025
    @imjin6025 ปีที่แล้ว

    1920년 니항사건(니콜라옙스크 사건) 당시 조선인 독립군들이 사살한 기록을 살펴보면 러시아의 공식적인 자료들에서는 포로 약 1~2명을 처형하였고 오늘날 공개된 일본군측 기록들에서는 이것보다는 약간 많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1920. 3. 12. 일본군의 야습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실제로는 더 많은 적군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일부 백과사전에서 일본과 친일파들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사실인양 인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와 일본측 기록에는 없는 허황된 내용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