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시마다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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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6 ก.ย. 2024
  • 노예노동자와 일했던 일본인 시마다 모토타로 :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2부)
    시마다 기계공장은 그 당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현대 산업 기업의 모델이었다.
    동시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일본 본토의 신용 기관의 광범위한 지원이 없었다면 시마다의 성공과 수입을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은 일본 해군부 및 참모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제공되었다.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시마다는 두 아들을 낳았으며 일본 이름과 함께 러시아 이름도 부여했습니다. 첫 번째 아들 (1902년 출생)-테리히샤, 두 번째 아들 (1903년 출생)-바타루. 시마다에게 몇 명의 자녀, 처와 조선인 첩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시마다는 당연히 극동 지역과 하류 아무르에서 소련(소비에트) 권력의 확립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러시아와 제정 러시아 국민에 대한 전문가로서 그는 당시 일본군 엘리트 대표들에게 조언을 제공했다. 다나카 장군에게 일본 침략군을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에 파견할 것을 권고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최고위급 밀정중 한명이었던 시마다 모토타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사에서는 시마다 모토타로, 안드레예브(니항과 자유시의 군대 부대장중 한명), 바실리 박, 독립유공자 이지택 등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마다 등의 권유로 1918. 8. 2. 일경 일본군이 체코군단 구원 등을 내걸고서는 별 관계가 없는 니항과 사할린섬 북부 등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일본 천황에게 시베리아 출병 청원서를 제출한 러시아 백파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당연히 있었다.
    백파 라비치의 소설에는 일본군이 러시아 평화를 위해 온 것으로 묘사되었다. (일본이 주장하는 시베리아 출정 원인은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의 구조 요청, 선량한 사람들의 구원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함)
    일본군은 니항에 병영건물과 위안소,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 러시아 내전이 백파와 일본 출병군에게 불리해지자 일본군은 사할린 주만큼은 점령하여 괴뢰국가를 건국하고 유전, 광산 등을 확보하고자 대사관 설립까지 획책한다. 이러한 일본군의 목적을 볼 때 니항을 불태운 것을 잘못이라고만 보기는 힘든다.
    일본인들이 급속히 증가하여 1920년초 발생한 니항사건 당시 일본인들의 총수를 추측하기 힘드나 러시아 측에서는 대략 900여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
    상업만 하는 줄 알았던 시마다는 니항 일대와 아무르강 일대의 시베리아 지역, 사할린섬 일대 등을 돌아다니며 밀정활동을 한다. 이 무렵 조선인 배정자 등도 돌아다니며 조선인회, 보민회, 조선인 민회 등의 명칭을 가진 친일 단체를 조직한다.
    1918년 9월경 이후에는 백파정권(주로 콜차크, 메르쿨로프, 시묘노프, 칼미코프 등)의 지원뿐만이 아니라 이들과 내통한 일본군의 아무르강 하류에 대한 개입과 만주 동청철도 장악, 바이칼호에 이르는 지역까지 점령 등의 지원에 힘입어 시마다는 어업 사업도 크게 확장된다.
    1917-18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지속과 러시아 내전으로 인한 백파계 러시아인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시마다 매장의 이익도 증가하고 있었다. 니항에 있던 주요 경쟁사인 독일 회사인 Kunst and Albers의 백화점은 폐업하였다.
    1918년 중반, 하류 아무르 지역에서는 화폐 부족 현상이 나타난다. 이 무렵 극심한 경제난을 겪던 러시아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통화 대체에 관한 문제인 시마다 지폐의 발행은 역사가들에게는 특히 흥미롭다.
    일본인이 러시아 혼란기에 일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돈까지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정부의 지원과 일본인들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같은 1차 세계대전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니항의 중국인들을 식민지배를 하던 조선인과 비슷하게까지 멸시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고 한다. 형식적으로 시마다 화폐는 식품 및 산업용품에 대한 “임시 영수증” 또는 간단히 쿠폰, 혹은 상품권이라고 한다. 이 시마다 화폐의 생산과 통용은 1919년 봄쯤 부터였다.
    시마다 화폐 발행 이후 시마다에게는 “아무르의 표트르 대왕”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사람들은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시마다 모토타로가 때때로 자신이 “아무르의 첫 번째 표트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기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1919년 5월 말, 시마다는 일본 해군부의 요청에 따라 증기선을 타고 일본으로 귀국한다. 그는 일본의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서 간섭과 러시아 내전이 악화되는 시기를 보내게 된다. 1920년 3월 12일 일본군의 반자이 기습공격과 4월경의 일본군 재공격으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이 발생하여 도시 전체가 거의 완전히 불타고 폭파되었을 때 시마다는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니항 도심의 주택을 포함한 대략 2,107여개 건물 중 35개 건물(대부분 외곽에 있음)정도, 13개 시장 건물, 개울 건너 우측편의 중국인 거주지 내 건물, 4개 부두 등만 남았다. (주택은 대략 1,130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니항 외곽의 거주지들인 츠니르라흐, 마가 등등은 파괴되지 않았으며 니항 도심의 총 건물수 2,100여개소는 오늘날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항구 도심의 1/3정도 수준이다. 그런데도 일부 공식도서는 오늘날 인구의 1/3 정도에 해당하는 인구가 아닌 몇 배에 해당되는 3만명까지 거주했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습니다. 1917년경 니항 인구 조사결과로는 도심 인구는 7천에서~8천명 내외였습니다. 러시아 내전 피난민들도 겨울에는 거의 대부분 돌아간 상황이기 때문에 그 정도 수준이 타당하다고 보여집니다.)
    1920년 6월 4일경, 일본 군함이 사할린과 하류 아무르로 파견되면서 시마다는 니콜라예프스크로 돌아왔다.
    일본인과 조선인 여성 90명 이상이 시베리아에 출정한 일본군과 일본인들을 위해 성매매하던 가라유키상 유곽, 일본군 병영, 일본인 집단 거주지뿐만이 아니라 시마다의 모든 재산과 부동산이 불타게 되는 ‘니항사건’의 결과 러시아인 거주지, 상점, 창고가 불에 탔고 기계 공장이 폭파되었다. 시마다는 망했다. 시마다는 니항사건 이후 자신의 상점들을 재건하고자 한다. 그리고 곧 그는 전쟁관련 부서, 지방 점령 당국, 일본 신용 기관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다시 부활시킨다. 동시대 사람들이 언급했듯이 그러한 일본과 백파의 지원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본 점령군이 러시아 극동 전역에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하류 아무르에 대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시마다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러시아어, 현지 인물, 정치적, 경제적, 시장 상황 등을 볼 때 시마다는 중요한 인물이었고 일본도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시마다와 일본군은 ‘인류 역사에 없었던 대학살극’이라고 선전하며 조선의 경성에서도 초혼제장을 만들어 놓고 전국적으로 친일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동원해 선전에 나섰고 일본 본토와 시베리아에서도 황족, 장성, 일본 수상 등이 나서 시베리아 침략의 근거를 삼기위해 니항 사건을 조작하고 선동질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러시아계 친일파로는 Y.A.구트만, 예밀야노프, 에치, 압친니코프, 바라비요프, 라비치 외에도 엄청나게 많았고, 당시 일본의 선동이 맞다고 협조하는 자는 수두룩했던 모양입니다.
    시마다는 철근-콘크리트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 높이 15m가 넘는 일본군 충혼탑을 세웠으나 현재는 파괴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혁명세력의 승리로 끝나자, 1922. 10. 2. 일경 일본군은 니항에서 철수합니다.
    일본군이 니항에서 철군할 때 시마다는 한때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자원의 보물섬이던 사할린섬 북부로 이주하여 석유 개발업을 시작했으나, 석유개발과 정유업은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사업이었고, 당시 일본의 대기업들이 이미 선점하고 있었다.
    1925. 1. 20일경 일소기본조약 체결되어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에서 삼림·석유·석탄 채굴권 등 획득하며 소련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되고 조선 비적(독립군)의 활동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1925. 5. 14.일경 북위 50도 이상 사할린섬 북부의 일본 군인들은 철군한다.
    (그러나 1944. 3. 30일경까지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 및 석탄 광산은 활용하였다.
    2차 세계대전 전황이 악화되자 소련의 중재와 연합국과의 관계회복을 노린 일본은 결국 북위 50도 이상의 사할린섬 북부에서도 완전 철수한다.)
    일본군의 북사할린섬 철군 무렵에 시마다는 조선 평안도로 이주하여 여러 차례 금광 사업 등을 하였으나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둘째 아들이 살고 있는 평안도 평양으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직후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아마 고령으로 인해 일본으로 귀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시마다 화폐발행 : 화폐 수집가들에게 시마다가 발행한 화폐는 가치가 있습니다. 러시아 내전 시기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여러 종류의 화폐가 발행되었으나, 러시아의 혼란으로 금과 은으로 된 화폐를 제외한 지폐는 제대로 된 화폐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시마다가 발행한 화폐는 보존 상태도 우수하고 도쿄의 제본소에서 인쇄되었기 때문에 다른 니항의 지폐들보다 인쇄 상태도 양호합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값어치가 있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말엽에는 일본군들이 대량의 군표를 발행했기 때문에 황군 위안부 여성들이 받았던 일본군 군표는 가치가 상실되었고, 오늘날까지 죽어서도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할린섬 강제 징용자중 상당수는 1945년 일본군이 패망 이후 귀국하는 배속에서도 몇 시간의 항해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최근 소식
    한 때 1920년 니항사건을 ‘독립군 3대 승리’로 부르는 사람이 많았으나 요즘은 A.Y.구트만의 책이 아니면 역사물에서 인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니항에서 일본군의 반자이 야습과 집단자살에 동참하지 않았고 포로가 되지 않아 생환한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시마다는 ‘생명의 은인’으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니항 일본 영사관의 이시다 토라마츠(Исида Торамац) 영사대리 부영사는 근래 확인한 바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즉 중국군함의 함포 공격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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