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 일본경제상황을 명치유신이후 근대화로 직결시키는 사고방식에는 결정적인 맹점이 있습니다. 우선 일본의 개항이 미국에 의해 강제로 된것이고 에도시대말기의 경제상황이 매우 열악했다라는 것입니다. 에도시대도 겐로쿠시대를 넘어가면서 점차 침체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면 민생경제가 파탄날 지경입니다. 보통 동시대 조선도 19세기 세도정치로 민생파탄은 운운하지만 그렇게 민생이 어려워진점은 한중일삼국이 19세기 들어서 공히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에도시대 군사력은 분명 전시대에 비하면 쇠퇴하게 됩니다. 풍신수길집권때는 조총을 대량생산하고 조선침공을 하기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스나 에도시대에 들어서면서 대외 침략행위를 하지 않고 평화가 지속되니 사무라이들의 무력도 퇴보하게 됩니다.
에도시대를 근대화의 기반으로 직결시키고자 한다면 1. 에도시대가 말기까지 경제가 번성하고 대외환경을 잘 읽었다면 미국의 강압이전에 자주적으로 서양국가들과 근대적 통상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에도막도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폈고 제한된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들지만 이것을 가지고 대외정세를 잘 파악하고 통상으로 근대화기반을 닦았다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17세기 당시만 하더라도 서양문물이 동양을 앞도한것이 아닌데다가 일본은 조선이나 중국과는 입장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서구와 교역을 한다고 해도 조선의 경우 실익이 별로 없다라는 측면을 간과한것입니다. 2. 근대화라는 것이 단순히 상공업번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에도시대 상공업이 번성한것 처럼 보여도 근대화와 관련된 각종 근대적 제도과 태동이 되어야 하는데 에도시대에 그런 근대적 사회제도가 태동이 되었나요? 여전히 지방은 다이묘들의 자치하에 농민을 착취하고 있었고 조선이나 중국처럼 중앙집권적 관료행정체제 정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신분제도에 대해서는 명치유신이후에도 비록 천민계층은 폐지되었스나 귀족과 평민의 두계층구분은 존재했습니다. 3. 보통 서구국가들은 근대화와 관련해서 민권의 성장이 일반적인데 일본은 명치유신이후에도 근대적 민주주의 관련한 민권의 성장이라는 것이 부재했습니다. 단순히 왕의 전제군주제가 부활한것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민주주의 개념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조선보다 경제력과 산업기술력이 앞섰다라고 주장하는데 합당한 근거가 있서야 합니다. 우선 그당시를 평가하는데 오늘날의 산업기술경쟁력을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죠. 에도시대 동경과 오사카등 대도시의 생활상을 들어서 조선보다 부유했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이묘들의 지배를 받는 농민이 아닌 상공업 종사자인 조닌계층만을 생각하면 타당할수 있습니다. 일반 다수의 다이묘지배하에 농민들의 생활상은 매우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들은 다이묘들의 경제적으로나 인권적인 착취에 만성으로 시달리니 차라이 조선의 농민들의 삶이 월등히 나은 편입니다.
비록 일본은 명치유신이후 조선정복때까지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도 서구 제국주의 선진국에 비해서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열세였습니다. 심지어 2차대전때도 국민들이 굶어가면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사람들이 잘못오해하는 것으로 일본이 러일전쟁즘 해서 서구선진국과 대등한 경제대국이 된것으로 착각하지만 2차대전도 그러했고 러일전쟁때만 하더라도 전쟁전비에 국가재정은 휘청이고 민생도 궁핍할지경의 실정이었습니다.
너무 유익한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성리학이 못살더라도 평등하게 살자라는 생각이었다니 공산당이네요.
흠... 그정돈가..? ㅋㅋ
15:01
일본은 믿을수 없는나라니 잘 감시해야합니다.
니가뭔데 감시해ㅋㅋ 일본이 우리를 종국 친중하는지 감시해야지
미개? ㅋㅋ 우리가 더 미개
일본보다 잠깐 잘 살았다는 사실 하나로 1500년동안 우려먹고 앉았음
원래 무식하고 가진 것 없는 것들이 내세울게 없으니 유교사상의 품격이니 예절예의예법이니 들이밀면서 우리가 더 낫다는 자위를 함
우리가 더 내세울게없어 등신아
에도시대 일본경제상황을 명치유신이후 근대화로 직결시키는 사고방식에는 결정적인 맹점이 있습니다.
우선 일본의 개항이 미국에 의해 강제로 된것이고 에도시대말기의 경제상황이 매우 열악했다라는 것입니다. 에도시대도 겐로쿠시대를 넘어가면서 점차 침체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면 민생경제가 파탄날 지경입니다. 보통 동시대 조선도 19세기 세도정치로 민생파탄은 운운하지만 그렇게 민생이 어려워진점은 한중일삼국이 19세기 들어서 공히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에도시대 군사력은 분명 전시대에 비하면 쇠퇴하게 됩니다. 풍신수길집권때는 조총을 대량생산하고 조선침공을 하기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스나 에도시대에 들어서면서 대외 침략행위를 하지 않고 평화가 지속되니 사무라이들의 무력도 퇴보하게 됩니다.
에도시대를 근대화의 기반으로 직결시키고자 한다면
1. 에도시대가 말기까지 경제가 번성하고 대외환경을 잘 읽었다면 미국의 강압이전에 자주적으로 서양국가들과 근대적 통상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에도막도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폈고 제한된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들지만 이것을 가지고 대외정세를 잘 파악하고 통상으로 근대화기반을 닦았다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17세기 당시만 하더라도 서양문물이 동양을 앞도한것이 아닌데다가 일본은 조선이나 중국과는 입장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서구와 교역을 한다고 해도 조선의 경우 실익이 별로 없다라는 측면을 간과한것입니다.
2. 근대화라는 것이 단순히 상공업번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에도시대 상공업이 번성한것 처럼 보여도 근대화와 관련된 각종 근대적 제도과 태동이 되어야 하는데 에도시대에 그런 근대적 사회제도가 태동이 되었나요? 여전히 지방은 다이묘들의 자치하에 농민을 착취하고 있었고 조선이나 중국처럼 중앙집권적 관료행정체제 정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신분제도에 대해서는 명치유신이후에도 비록 천민계층은 폐지되었스나 귀족과 평민의 두계층구분은 존재했습니다.
3. 보통 서구국가들은 근대화와 관련해서 민권의 성장이 일반적인데 일본은 명치유신이후에도 근대적 민주주의 관련한 민권의 성장이라는 것이 부재했습니다.
단순히 왕의 전제군주제가 부활한것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민주주의 개념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조선보다 경제력과 산업기술력이 앞섰다라고 주장하는데 합당한 근거가 있서야 합니다. 우선 그당시를 평가하는데 오늘날의 산업기술경쟁력을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죠.
에도시대 동경과 오사카등 대도시의 생활상을 들어서 조선보다 부유했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이묘들의 지배를 받는 농민이 아닌 상공업 종사자인 조닌계층만을 생각하면 타당할수 있습니다. 일반 다수의 다이묘지배하에 농민들의 생활상은 매우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들은 다이묘들의 경제적으로나 인권적인 착취에 만성으로 시달리니 차라이 조선의 농민들의 삶이 월등히 나은 편입니다.
역사학부 교수라면 한국사전공입니까? 일본사 전공입니까? 일본에 대해서 참으로 잘못 생각하시는것이 많으시네요.
한국이 일본에 대해서 국력상 열세는 오늘날이 더 심하지 조선시대에는 전혀 그럴 열세상태가 아닙니다.
동양사학 전공 서울대 교수에게 일침을 가하는 유튜브 댓글러 ㄷㄷ 잘못된 부분이 있으시면 교수 메일 공개되어 있으니 메일이라도 보내보셈
비록 일본은 명치유신이후 조선정복때까지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도 서구 제국주의 선진국에 비해서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열세였습니다.
심지어 2차대전때도 국민들이 굶어가면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사람들이 잘못오해하는 것으로 일본이 러일전쟁즘 해서 서구선진국과 대등한 경제대국이 된것으로 착각하지만 2차대전도 그러했고 러일전쟁때만 하더라도 전쟁전비에 국가재정은 휘청이고 민생도 궁핍할지경의 실정이었습니다.
일본의 성공은 임진왜란때 도공을 끌고 가서 도자기를 생산하고 청나라 경덕진에서 도자기 수출을 금하자 본격적으로 네덜란드 포루투칼 등과 교류하면서 변화가 밀려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