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에 만납시다] 밝은 표정, 밝은 말 - 광덕스님 | 19860106 KBS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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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20 ธ.ค. 2024

ความคิดเห็น • 16

  • @emma-tv2pv
    @emma-tv2pv 20 วันที่ผ่านมา

    귀한 영상 감사합니다 🙏😊

  • @연꽃서재
    @연꽃서재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옛날티브에 지극한 감사를 드립니다

  • @불국토
    @불국토 7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귀한 영상 감사합니다

  • @은성-b3f
    @은성-b3f ปีที่แล้ว +2

    광덕 대선사님의 젊으셨을때의 모습을 뵈니 감개무량합니다.
    혜담스님의 젊으셨을때의 모습을 뵈니 타임머신을 탄것
    같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 @재벌1세
    @재벌1세 ปีที่แล้ว +1

    광덕 대선사님! 그립습니다.
    찬란한 빛으로 돌아오소서((🙏))
    이땅 사바세계 남섬부주 해동
    대한민국 잠실 불광법회 보현보살
    생불로 오셔 반야법문 일깨워
    주시고 무한긍정..인도하시며
    가셨으나 오고감이 없는 경지
    불국정토 청정법계 모두함께
    마하반야 바라밀~!!!

  • @kyungsookoh1893
    @kyungsookoh1893 ปีที่แล้ว +4

    스님의 평화통일을 강조하시는
    수행을 하시면서도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아주 강직한
    옳으신 참 훌륭한 스님이십니다.
    깨달음이 수행이다.감사합니다

  • @10birdss
    @10birdss ปีที่แล้ว +3

    38:30 땍~~! 스님 말씀하시는데 졸기는...😂

  • @문두환-u1p
    @문두환-u1p ปีที่แล้ว

    나무 관세음보살 성불하십시요.

  • @공덕진
    @공덕진 ปีที่แล้ว

    큰스님 너무 너무 뵙고 싶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

  • @비젼비젼-x9l
    @비젼비젼-x9l ปีที่แล้ว

    마하 반야바라밀 🙏🙏🙏🙏🙏
    내생명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국토 성취한다 🙏🙏🙏🙏🙏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면 역사를 밝힌다 🙏🙏🙏🙏🙏
    광덕스님 반갑 습니다 그리고
    젊은날의 모습 지상스님도 반갑습니다 따라서 이계진씨의 옛모습도 반갑습니다
    영상을 올려주신 옛날티비님께 감사합니다

  • @봉현남-e2i
    @봉현남-e2i 3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우주법계중생 지구촌사람 모두함께 나무아미타불 마하반야바라밀 숙연의일대사인연 덕분입니다 현산김봉현 합장ㅅㅎㅅ

  • @신동하-x7y
    @신동하-x7y ปีที่แล้ว +7

    ✔광덕(1927~1999).
    속명은 고병완(高秉完)이다.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내리(지금의 경기도 오산시)의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지닌 집안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소년기에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성한 독서욕과 몸에 배인 독학으로 철학, 역사, 법률, 경제 등 인문사회 분야와 물리학, 수학, 농학 등 자연과학 분야를 넘나드는 독서를 하였다.
    청년기에 어머니를 따라 가톨릭에 입교하였으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식민지 청년의 민족의식이 눈을 뜨게 되자 삶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당시 박종홍과 신소천의 영향으로 카톨릭으로부터 불교로 귀의하게 되는데, 박종홍은 그에게 한국 사상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일제시대에 대각사에서 금강경 강의를 통해서 구국운동(救國運動)을 펴고 있던 소천은 깨달음을 불교 속에 가두어 두지 않고 인간사회의 모든 영역에 반야의 대용(大用)을 열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1950년 24세 때 범어사로 출가하여 1956년에 구족계(具足戒)를 동산으로부터 받았다.
    은사이자 계사인 동산은 늘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할 것을 요구하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날 중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는 중이 된 다음에도 행자를 자처하여 출가한 뒤 10여 년 동안이나 행자생활(行者生活)을 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광덕은 곧 비구·대처 양측이 가담한 통합 종단 발족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6년에 대각회를 창립하였는데, 이 무렵 그는 새로 탄생하는 종단의 종헌(宗憲) 전문(前文)에 보조 지눌(普照知訥)을 종조(宗祖)로 명기하였다.
    하지만 태고 보우(太古普愚)와 보조 지눌을 둘러싼 종조 논란은 당시 큰 문제가 되었다.
    1963년에는 대학생불교연합회를 조직하였고,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봉은사 주지를 역임하였다.
    1974년에는 문서포교의 일환으로 월간 『불광』과 출판사를 만들었으며, 1975년에는 불광회를 조직하여 최초로 도심포교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1977년부터 1995년까지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를 역임하는 등, 그는 일생을 전법(傳法) 포교와 교육에 전념하다가 1999년 2월 27일(음력 1월 12일), 나이 73세, 법랍 50세로 입적하였다.

  • @일뽕발작감지센서
    @일뽕발작감지센서 ปีที่แล้ว +2

    다른 편에서는 여자 아나운서분 병풍처럼 앉혀놓았었는데 이번 편에선 중간에 진행 같이 하셔서 보기 좋네요.

  • @10birdss
    @10birdss ปีที่แล้ว +1

    처갓집이 광덕리인데...😅

  • @드스느승르르으흐흐
    @드스느승르르으흐흐 ปีที่แล้ว

    요즘 스님들은 경허선사만큼의 견성도 없이 무애행이라고 하며 육식에 음주를 막행막식으로 하면서 참회나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다만... 저 시절 행자님들은 속가 시절 습으로 국에 멸치라도 넣으면 노장스님께서 크게 호통치던 시절이었거늘...

  • @싼듀
    @싼듀 ปีที่แล้ว +5

    생몰연도: 1927~1999
    불광사 창건자, 잡지 창간.
    이거 불광사 유튜브 채널에서 저화질로 보던 건데, 원본 고화질은 처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