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한국의 역사학을 한국,중국,일본에개서 배우는것은 매우 왜곡된것을 답습하게 될것이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중국 일본은 말할것도 없고 일제의 조선반도론에 부역했던 이병도씨가 70년대까지 일제의 식민사학을 이나라에 뿌리내려 잘 관리해왔기 때문에 100년전 식민역사학에서 한글자도 바뀌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온것입니다. 과거에 중국이라는 나라는 없었으며 18세기초까지도 이땅은 고려였습니다. 그래서 서방에 우리국호가 조선이 아닌 코리아로 알려진것입니다. 현재의 경상도엔 물소가 자랄수 없으며 낙타의 흔적도 없습니다. 또한 110개의 왕성터나 부지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습니다. '신라는 낙타와 물소가 자라기에 알맞다.' [신당서] '신라말 후백제를 완전히 제압한 왕건에게 신라 동부의 110개의 성과 부가 왕건에게 귀의하였다.'' [고려사] AD 28년(유리이사금 5년)에 도솔가 兜率歌를 지었고, AD 32년에 고조선 유민들이 모여살던 6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의 성(姓)을 주었으며, 17관등(官等)을 마련했다. 대한민국 국보 [삼국사] 왕씨성인 박씨 석씨(전씨) 김씨까지 2천년된 신라의 대표 성씨들입니다. 그 이씨성이 훗날 당나라를 세웠습니다. 낙양에서 장안으로 옮겨와 4년을 버티다가 밍한 서진을 끝으로 [[흉노(전조)14년, 저족(전진)43년, 강족(후진)33년, 선비(서위)21년, 선비(북주)24년, 선비(수나라)37년, 선비(당나라)289년]]까지 장안은 한족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나당연합으로 백제 고구려에 승리한후 당나라는 그 땅을 나누는데 불만을 품어 전쟁을 벌였다가 신라에 패한후 신라왕이 돌아가시면 대성통곡(거해)하며 국사를 2틀동안 맡지않았다거나 진덕왕릉도 서안에 있는걸로봐서 당나라는 신라의 제후국이었던걸로 보여집니다 백제가 이땅에 있어 당이 충남에 5도독부를 두려면 고구려를 먼저 쳤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어도 시안의 자그마한 당나라가 이역만리의 이 반도땅에 무슨 이익이 있다고 도독부를 둘까요.? 생뚱맞게 당나라가 이땅을 관리했었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겁니다.그냥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해 일본의 임나가라처럼 중공이 국제사회에 점령의 정당성을 위해 씨앗을 심어놓은겁니다. 가라도 마찬가지지만 고구려 백제 모두 중국땅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들입니다. 고구려가 있을째까지만 해도 당나라포함 한족들의 북방 최대영토는 산서성의 태원 바로위 흔주(忻州市),정양(定襄县)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곳에 운중산이 있고 운중하가 있고 그곳이 운주이고 정양인것입니다. ''당나라에 사신이 도착했을 때 일본 사신에겐 답례를 하지 않았고, 신라 사신에겐 말에서 내리지 않은 상태인데도 답례를 했으며, 발해 사신에겐 말에서 내려 먼저 예의를 표하는 것을 본 후에 답례를 했다.'' -일본서기- '왜인은 스스로 태백의 후예라 하고 또 옛부터 사신을 보낼때 자칭 대부(大夫고구려의 관직명) 라했다 여자들은 홀옷을 입으며.. 맨손 맨발로 다닌다. 땅이 따뜻하며, 소나 말이 없다.' [진서 동이열전] '동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왜 일본이다.' [신당서] 이순신은 일본군과 싸운것이 아닌 일 본국의 왜군과 싸운것입니다. 가정 (33년) 1554년. (왕직)이 여러 왜구들읊 결집해 상해 광저우 산동등 대부분의 연안은 물론 태흥까지 밀고 들어와 (이천종)과 병부상서(장경)을 총독으로 보내 물리친다 1588년까지 명나라를 괴롭히던 왜구는 이후 잠잠해진다. 그로부터 3년후인 선조(24년) 1591년 3월에 도요토미는(정명가도)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서신을 보냈지만 조선은 단호히 거절하였고 이일로 1592년 왜군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포르투갈로부터 들여온 조총과 삼판선으로 대표되는 왜군은 임진왜란 이전에 필리핀 북부의 루손섬에서 스페인해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들이 현 중국의 남부연안과 대만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명나라 전 연안을 포위했던 왜군이 부산을 통해 걸어서 서울과 평양을치고 만주를거쳐 산해관을 뚫고 진격하고 싶을까요.? 가다가 절반은 죽을거 같지 않나요.? 부산이라는 작은산은 중국에 있었고 이곳의 부산은 후대에 생겼습니다. 닝보(영파)에 윗입술이 뒤집어진 장수의 석상이 전시돼있습니다.류 성룡일수도 있는 석상과 함께...
90~00년대 한국은 지금의 중국과 비슷했음. 민족주의 광기가 사회에 만연했지. 그 당시 만들어진 역사 프로그램들은 그래서 어느정도 걸러 들어야 됨. 민족주의 광풍을 떠나서도 고고학이란게 발굴 성과에 따라 정설이 뒤집히는 경우가 있기에 너무 오래된 학설들은 곧대로 믿으면 곤란함
철이 니왔다는 그동굴은 흔적이 없네요, 나는 영상강이 보이는데서 61 년도에 테어났는데 테어나기전부터 있었어요, 동네가 금광산이었는데, 파고남은 돌들이 산을이루었어요 굉장히 컸어요 광산이, 동굴 들도 많이 있었어요...전남나주군 공산면 신곡리, 아..그립네요, 지금나는 미국에 있고, 안가본지 35년이 남었네요, 아직도 금을케는지 궁금하네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한국의 역사학을 한국,중국,일본에개서 배우는것은 매우 왜곡된것을 답습하게 될것이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중국 일본은 말할것도 없고 일제의 조선반도론에 부역했던 이병도씨가 70년대까지 일제의 식민사학을 이나라에 뿌리내려 잘 관리해왔기 때문에 100년전 식민역사학에서 한글자도 바뀌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온것입니다.
과거에 중국이라는 나라는 없었으며 18세기초까지도 이땅은 고려였습니다.
그래서 서방에 우리국호가 조선이 아닌 코리아로 알려진것입니다.
현재의 경상도엔 물소가 자랄수 없으며
낙타의 흔적도 없습니다.
또한 110개의 왕성터나 부지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습니다.
'신라는 낙타와 물소가 자라기에 알맞다.' [신당서]
'신라말 후백제를 완전히 제압한 왕건에게 신라 동부의 110개의 성과 부가 왕건에게 귀의하였다.'' [고려사]
AD 28년(유리이사금 5년)에
도솔가 兜率歌를 지었고,
AD 32년에 고조선 유민들이 모여살던 6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의
성(姓)을 주었으며, 17관등(官等)을 마련했다.
대한민국 국보 [삼국사]
왕씨성인 박씨 석씨(전씨) 김씨까지 2천년된 신라의 대표 성씨들입니다.
그 이씨성이 훗날 당나라를 세웠습니다.
낙양에서 장안으로 옮겨와 4년을 버티다가 밍한 서진을 끝으로 [[흉노(전조)14년, 저족(전진)43년, 강족(후진)33년, 선비(서위)21년, 선비(북주)24년, 선비(수나라)37년, 선비(당나라)289년]]까지 장안은 한족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나당연합으로 백제 고구려에 승리한후 당나라는 그 땅을 나누는데 불만을 품어 전쟁을 벌였다가 신라에 패한후 신라왕이 돌아가시면 대성통곡(거해)하며 국사를 2틀동안 맡지않았다거나 진덕왕릉도 서안에 있는걸로봐서 당나라는 신라의 제후국이었던걸로 보여집니다
백제가 이땅에 있어 당이 충남에 5도독부를 두려면 고구려를 먼저 쳤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어도 시안의 자그마한 당나라가 이역만리의 이 반도땅에 무슨 이익이 있다고 도독부를 둘까요.? 생뚱맞게 당나라가 이땅을 관리했었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겁니다.그냥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해 일본의 임나가라처럼 중공이 국제사회에 점령의 정당성을 위해 씨앗을 심어놓은겁니다. 가라도 마찬가지지만 고구려 백제 모두 중국땅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들입니다.
고구려가 있을째까지만 해도 당나라포함 한족들의 북방 최대영토는 산서성의 태원 바로위 흔주(忻州市),정양(定襄县)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곳에 운중산이 있고 운중하가 있고 그곳이 운주이고 정양인것입니다.
''당나라에 사신이 도착했을 때 일본 사신에겐 답례를 하지 않았고,
신라 사신에겐 말에서 내리지 않은 상태인데도 답례를 했으며,
발해 사신에겐 말에서 내려 먼저 예의를 표하는 것을 본 후에 답례를 했다.''
-일본서기-
'왜인은 스스로 태백의 후예라 하고 또 옛부터 사신을 보낼때 자칭 대부(大夫고구려의 관직명) 라했다
여자들은 홀옷을 입으며.. 맨손 맨발로 다닌다. 땅이 따뜻하며, 소나 말이 없다.'
[진서 동이열전]
'동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왜 일본이다.'
[신당서]
이순신은 일본군과 싸운것이 아닌 일 본국의 왜군과 싸운것입니다.
가정 (33년) 1554년.
(왕직)이 여러 왜구들읊 결집해 상해 광저우 산동등 대부분의 연안은 물론 태흥까지 밀고 들어와 (이천종)과 병부상서(장경)을 총독으로 보내 물리친다
1588년까지 명나라를 괴롭히던 왜구는 이후 잠잠해진다.
그로부터 3년후인 선조(24년) 1591년 3월에 도요토미는(정명가도)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서신을 보냈지만 조선은 단호히 거절하였고 이일로 1592년 왜군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포르투갈로부터 들여온 조총과 삼판선으로 대표되는 왜군은 임진왜란 이전에 필리핀 북부의 루손섬에서 스페인해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들이 현 중국의 남부연안과 대만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명나라 전 연안을 포위했던 왜군이 부산을 통해 걸어서 서울과 평양을치고 만주를거쳐 산해관을 뚫고 진격하고 싶을까요.?
가다가 절반은 죽을거 같지 않나요.?
부산이라는 작은산은 중국에 있었고 이곳의 부산은 후대에 생겼습니다.
닝보(영파)에 윗입술이 뒤집어진 장수의 석상이 전시돼있습니다.류 성룡일수도 있는 석상과 함께...
이야 99년 방송분 ㄷㄷㄷㄷㄷ
밀레니엄 전의 이 갬성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고분들이 테페와 비슷한 느낌드네 개인적인 생각임
금동신의 물고기장식ㅡ(밤낮 눈을 감지 않고 지켜준다 수호신 상징)
산에 도굴된 아파트형고분들 그대로 방치되어 있더라
임라의 과학적인 증거
북방계와 섞어지기전의😂😢전라남도 마한 원주민...이들중 일부는 백제와 통합되고..일부는 일본으로 진출해서 일본지배층이 되었다.😂😢
집배층이 되었다구?? 근거 없는 소릴 ㅋ
90~00년대 한국은 지금의 중국과 비슷했음. 민족주의 광기가 사회에 만연했지. 그 당시 만들어진 역사 프로그램들은 그래서 어느정도 걸러 들어야 됨.
민족주의 광풍을 떠나서도 고고학이란게 발굴 성과에 따라 정설이 뒤집히는 경우가 있기에 너무 오래된 학설들은 곧대로 믿으면 곤란함
유인초니 나오느는건 재수없어 안본다
@@체인똥빵꾸패치 ㅋㅋㅋㅋ 그짝이신가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