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의해 지배당했던 대만사람들은 현재도 일본을 비하 하거나 혐호 하지 않고 일본을 좋아해요ㅜ조선오백년동안 계급사회로 같은 민족을 상놈.백정.노비로 나누어 개.돼지 취급한 조선 보다는 .문맹에서 벗어나게해준 일본이 더 나은거죠ㅜ 만약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지금에 한반도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네요ㅠㅠ
@@dasiworldmap미치겠다. 소득세 면제가 조선인을 위한 조치냐고? 그게 조선으로 갔던 일본인을 위한 조치지. 그걸 뒤집으려면 구체적인 데이터를 가져오든가... 게다가, 조선의 쌀소비랑 일본의 쌀 소비를 왜 1:1로 비교하는데? 일본인은 적게 먹는 민족으로 이미 구한말부터 많은 외국인들이 설명했고, 그에 비해 조선인은 대식가로 외국인들이 놀랄 지경이었는데, 이걸 그냥 단순히 1:1이라....일본이 철도 등을 놓은 게 수탈 위한 거고, 일본이 아니었어도, 그 당대에 발전으로 신문물을 놨겠지. 종두법도 그런 역할에 하나인데... 조선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말하려면, 경제적 지원으로 조선인 서민 중에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설명하든가...1930년에 일본의 수탈은 생산의 80프로를 넘는 수탈이었고, 영국등의 제국등은 인도에 50%를 했었다. 즉, 병작반수제 정도를 했었으나, 우리는 과거 조선의 세도정치의 수탈보다 더했었고, 그렇게 짜내자, 결국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영국등 제국등은 그래서 짤 수 있는 여력이 있어서 블록경제 유직가 가능했으나, 일본은 수탈을 극한까지 해서, 더는 할 수 없어서, 한게 대륙진출.... 그런데도, 마치 선의인양 구라치는 걸 뭔 불편한 진실? 제대로 비판하려면 데이터라도 제대로 가져오든가...죄다 왜곡해놓고 뭐하는 짓임?
조선의 문제점은 유교 였는데 삼년상 치르는것이 효자의 상징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문중의 선산이나 조상의 묘들이 마을 근처에 수많은 묘지 들이 있었으며 인구는 늘어나는데 묘지를 할땅이 없었겠죠 철도나 국도를 만드는데 수많은 산을 지나가야 하며 가급적이면 산세를 봐서 직선 이나 터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제시대 신작로(지금의 국도)를 만드는데도 문중의 묘지나 어떤이들의 조상묘가 있는산을 지나가야 해서 이장 이나 팔아라고 하면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조선 같았으면 그런 반대를 극복하기 불가능했을것입니다 유교사상 때문에 ... 일제가 강제하여 국도 도 뚫고 묘지들이 있는 산의 터널도 뚫고 했지만 수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경찰이나 헌병을 앞세워 밀어부친 강제성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듯...... 식민지 생활 한다고 당시 모든 조선인들이 괴롭고 힘들기만 했겠냐 ㅋㅋ 조선 말기에 백성들 상당수가 하층 노예 생활 하던 이들이었고. 그런 이들에게는 일본 식민지 시절이 오히려 새로운 장이 되고, 기회가 된거지.... 우리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서, 고통스러운 식민지 시대였음을 가르치고 배우지만, 정말 평범한 이들에게는 개개인별로 다 입장과 생각이 달랐던거고......... 조금 다른 얘기지만, 우리가 지금 보물로 여기고, 문화재로 여기는 경주 불국사나 석굴암 같은게, 조선말기 당시의 실제 사진을 보면 처참한 폐허였고, 다 망가진 곳이었지.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불교문화재는 쓰레기에 불과했으니까.......그걸 일본이 그 당시의 최신의 기술로 다 복원시켜 준거고. 물론, 그 당시의 최신기술이라는게 바로 시멘트였고. 지금에 와서 시멘트로 복원시킨게 일제가 그걸 훼손시킨거니 뭐니 난리치지만, 그 시멘트 기술이 그 당시엔 최신의 첨단 기술이었으니까..
현재 주류사학계에 근대화얘기를 하면 가장 마지막에 내놓는다는 얘기가, 우리 자체적으로 공업화와 민족자본 성장이라는 우리 자발적인 근대화 동력이 있었어서 일본 아니었어도 근대화 됐을거라는 소리를 함. 문제는 그런 동력이 충분히 조선이라는 구식체제의 압제를 누르고 국가체제를 현대 민주체제로 체질을 격변시킬정도로 조직화된 큰 힘이 아니었다는데에 결정적 문제가 있는걸 모름. 마치 그건 실학자들이 암만 백년넘게 토지제도와 정책개선을 책으로 썼어도 북인남인 동인서인 노론소론의 분화를 막지못하고 수백년 휘둘리다 그냥 역사속으로 사라진거랑 같은 상황인거임. 이미 지역 경제권이 지방관 수탈 한번에 다 모래성처럼 쓰러지고 반상제 때문에 백정이든 머슴이든 돈을 모아도 할수 있는 일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쉽게 이런저런 이유로 목이 잘리는데 근대화가 국소적 힘으로 이뤄졌을거라는건 오만임. 일본이 싫은건 맞지만 그만큼 조선후기는 그냥 구체제로 백성수탈이 더 많았고 그런 구식정치체제가 서양에 먹히든 일본에 먹히던 중국에 먹히던 할걸 일본에 먹힌것 뿐이고 자기 민족을 자기 민족이 억누르다가 망한게 팩트임. 그걸 전적인 일본탓으로 돌리며 또다시 피해호소하는걸로 약자로 남겠다는 다짐을 오늘도 하는게 현재 사학계의 인식인거고. 일본이 정말 싫다면 국력을 키워서 일본인을 전멸 시켜버리려는 팽창적 세계관을 함양할 역사관을 연구할 일이지, 지금 주류사학계는 또다시 중국식 동북아공정에 먹히려고 수동적 사학관을 고집하는 집단적 오류에 빠져있는것도 모르고 있는듯함.
역사는 가정을 하면 안되는게 맞긴 함. 임오군란이 없었다면,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했다면 등의 이야기들은 죄다 현실세계에 없는 망상일 뿐임. 역사교과서에도 보면 한계점들을 이야기하는데, 당시에는 그걸 왜 외워야하나는 생각을 하곤했음. 하지만 한계점을 인지하고 이를 극복해나가는게 맞는거임. 기존 사학계가 전적으로 피해호소를 하는 것은 약자로 남겠다는 게 아니라, 당시에 피해자였던게 맞으니까 하는 이야기임. 일본이 싫다면 국력을 키워서 다시는 그런 일을 안 당하게 하는 것도 맞다고 생각함. 근데 정말 일본이 없었다면 근대화가 안 되었을까? 이건 일본측 주장과 뉴라이트 주장임. 한국에서 10년 전부터 뉴라이트들이 저 맥락을 계속 들고오니까, 거기에 반발하는 학계에서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할 가능성이 있었다라는 것을 캐고있는거임. 왜냐? 현실의 결과는 일본이 산업화/근대화를 시킨 것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100년 전의 자료들을 찾아서 싸우는거임. 근데 그 자체로 두고보자면 뉴라이트의 주장과 학계의 주장 둘 다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함. 100년 전에 조선이 자주적으로 산업화/근대화를 시킬 여력이 있었다는건, 맨 처음 말했듯이 역사적 가정에 불가한 거니까. 그러니까 뉴라이트들은 지들이 그걸로 이길 걸 알고 싸움을 거는거고,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고싶은 일부 역사학자들은 거기에 반대해서 싸우는거임. 난 후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편임.
@@무명-f6r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보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반공주의"를 근간으로 합니다. 70년대 80년대 다큐나 사진을 보면 "때려잡자 빨갱이"같은 표어가 붙어있는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반공주의"를 기치로 내세운 보수주의 정권, 권위주의적 독재 정권 하에서는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억압하고, 위해를 가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쁘락치, 간첩 조작을 한 사건들을 내보내기도 하고, 일련의 사건을 위해 무고한 희생양들을 많이 생겨났었죠. 하지만 일련의 민주화 움직임으로 독재정권들이 몰락하고, 사회가 바뀌자 기존 구보수, 구진보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세력이 뉴라이트입니다. 그들은 식민지근대화론, 건국절, 독재미화 등을 통한 사상을 퍼트리며 한국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것은 동학반란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왕조창립이고 실패하면 반란이고 역적들 입니다 홍경래의 난도 먹고살기 힘들고 핍박받아서 일어난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난이 무엇이 다릅니까? 전라도가 하면 무조건 민주화고 운동입니까? 동학반란 때문에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평양에서 전투를 벌여 청군이패하고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결과 일본군이 조 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서해바다에서도 태안부근에서 해전을 벌여 독일에서 구입한 현대식 청나라 전함들이 박살나서 침몰했죠 전함만 거대했지 포탄도 제대로 없었으니까요 .. 그때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보병 3천명중 1500명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고 동학난 진압당시 고종의 관군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우금치(공주시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잔당들도 소탕이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조선의 국가예산 3년치 이상의 부채로 조선은 어짜피 망해서 쓰러질정도였고 병사들 급여도 못줄정도 였는데 한양주둔 일본군을 앞세워 압박하니 조선왕조의 고종과 순종 및 고관대작들 모조 리 한일합방에 도장을 찍었으며 왕족들은 무슨왕 이런식 허울뿐인 왕의 칭호를 받고 일본왕족들과 결혼을 하였으며 고관대작과 민씨들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같 은 서양식 귀족칭호를 받고 귀족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갔다
@@uncut125f 교묘하게 지능적으로 왜곡하는게 이 채널이다 병원 철도 공장만 지었다고 근대화냐 조선시대나 일제시대나 문맹률 비슷하고 신분차별도 다를게 없었다 병원을 지었어도 조선인 이용율은 10%도 안되었고 철도는 전쟁물자 소송을 위해서였고 공장도 기술을 넘겨준게 아니라 값싸게 일만 시켰고 여성 문맹률이 90%가 넘었다 최하층민으로 일제의 노비처럼 살았던게 조선인들이다 양반 사대부만 조선귀족으로 대우 받았고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것은 동학반란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왕조창립이고 실패하면 반란이고 역적들 입니다 홍경래의 난도 먹고살기 힘들고 핍박받아서 일어난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난이 무엇이 다릅니까? 전라도가 하면 무조건 민주화고 운동입니까? 동학반란 때문에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평양에서 전투를 벌여 청군이패하고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결과 일본군이 조 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서해바다에서도 태안부근에서 해전을 벌여 독일에서 구입한 현대식 청나라 전함들이 박살나서 침몰했죠 전함만 거대했지 포탄도 제대로 없었으니까요 .. 그때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보병 3천명중 1500명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고 동학난 진압당시 고종의 관군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우금치(공주시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잔당들도 소탕이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조선의 국가예산 3년치 이상의 부채로 조선은 어짜피 망해서 쓰러질정도였고 병사들 급여도 못줄정도 였는데 한양주둔 일본군을 앞세워 압박하니 조선왕조의 고종과 순종 및 고관대작들 모조 리 한일합방에 도장을 찍었으며 왕족들은 무슨왕 이런식 허울뿐인 왕의 칭호를 받고 일본왕족들과 결혼을 하였으며 고관대작과 민씨들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같 은 서양식 귀족칭호를 받고 귀족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갔다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아니... 눈에 보이는 수치나 상식등이 있는데 무조건 암울한 시대고 비참했던 생활상이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너무 심함 진짜 암울하고 비참한 시대는 돈좀 있다고 하면 관아로 끌고가서 곤장을 쳐서 돈을 뜯어내 노동의지를 잃어버린 성인남성들이 길에 주저앉아 술만 마시던 시대임 그런 나라가 망했다고 슬퍼하는 그당시 백성들이 얼마나 될까
그러한 실용주의는 환영입니다. 근데 한국식 정치는... 기반조차 약해서 민족주의 발판을 만드는 게 아예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조금이라도 민족주의적이면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몰리죠 정식 정부의 발판을 마련한 사람조차도 기독교인이고, 미국 유학을 갔다왔으니까요. 갠적으론 서양식 정치방식을 어거지로 동양으로 끌어들인 부작용이자 폐해라고 전 봅니다. 동양인들은 어쨌건 항상 봉건식 사회에 절여져있었으니까요 항상 최고 통치자, 군주가 있어야 했죠. 현대의 그 군주는 어거지로 일대일 대응을 시켜서 대통령이 군주다! 하지만... 영국만 봐도 입헌군주제라면 왕이 따로 있고 총통이 따로 있듯이.
@@intelamd3076음....저기여. 천황까진 몰라도 일본군 장군 (홍사익 중장)을 비롯해서 고위 관료나 군인은 이미 많이 나왔습니다. 1945년에는 조선에 참정권도 줘서 사실상 오키나와나 홋카이도 급으로 격상시키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버려서 못하게 됐죠. 누가 알아요? 그 상태로 한 1980년대까지 같으면 조선인 총리가 나왔을지? 현실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보다는 조선인들에게 긍정적이었을듯 하네요.
@@alexkimvv은근슬쩍 감정에 의한 역사왜곡 그만두쇼 일본이 강압과 협박으로 우리나라 먹은게 아니라 고종이 전쟁한번 안하고 그냥 넘긴거다 러시아에 나라넘기는 아관파천하자는 고종을 설득해서 차라리 일본에 나라 맡기자는 이완용은 오히려 시대를 정확하게 보는 천재다 진짜 매국노는 고종이지 이게 역사적인 팩트다
제가 4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제시대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것보다 훨씬 엣센셜한 자료로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정확한 팩트로만 이루어진 훌륭한 영상 같고 이 방대한 자료를 취합하고 정리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었겠구나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블로그로 일제시대의 사실들을 전달하고 있는데 이러한 개괄적인 방향보다는 디테일한 책자번역, 지도 한글화, 팜플렛 해석등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것은 동학반란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왕조창립이고 실패하면 반란이고 역적들 입니다 홍경래의 난도 먹고살기 힘들고 핍박받아서 일어난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난이 무엇이 다릅니까? 전라도가 하면 무조건 민주화고 운동입니까? 동학반란 때문에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평양에서 전투를 벌여 청군이패하고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결과 일본군이 조 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서해바다에서도 태안부근에서 해전을 벌여 독일에서 구입한 현대식 청나라 전함들이 박살나서 침몰했죠 전함만 거대했지 포탄도 제대로 없었으니까요 .. 그때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보병 3천명중 1500명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고 동학난 진압당시 고종의 관군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우금치(공주시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잔당들도 소탕이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조선의 국가예산 3년치 이상의 부채로 조선은 어짜피 망해서 쓰러질정도였고 병사들 급여도 못줄정도 였는데 한양주둔 일본군을 앞세워 압박하니 조선왕조의 고종과 순종 및 고관대작들 모조 리 한일합방에 도장을 찍었으며 왕족들은 무슨왕 이런식 허울뿐인 왕의 칭호를 받고 일본왕족들과 결혼을 하였으며 고관대작과 민씨들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같 은 서양식 귀족칭호를 받고 귀족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갔다
공감합니다. 참고로.. [1894년 7월 23일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공격했다. 궁궐 수비대인 시위대 500명이 격전을 벌였다. 독일제 연발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조선 제일인 평양군으로 구성돼 있었다. 싸우겠다는 사기도 충만했다. 격렬하게 전투가 벌어지던 오전 5시 30분쯤 고종으로부터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왔다.(1894년 음6월 21일 ‘고종실록’) 투항하라는 것이다. 그 어명에 시위대는 ‘통곡하면서 총통과 군복을 마구 찢고 부순 후’ 도주했다.(황현, ‘매천야록’2 1894년③ 14.일본인의 대원군 영입, 국사편찬위) 일본군은 개틀링포 8문과 크루프 기관포 8문, 각종 소총 3000정과 무수한 잡무기, 군마 15필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전리품을 챙기는 사이, 고종이 직접 현장에 나와서 이렇게 요구한 것이다. “그 무기들은 쏜 일이 없기 때문에 빼앗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여단보고’ 보고철 등. 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일조각, 1989, pp64~65, 재인용) 이듬해 서울을 방문했던 러시아 육군 대령 카르네프와 중위 미하일로프는 이렇게 기록했다. ‘목조 헛간에는 개틀링 기관총 10문과 7.5cm 구경 크루프 포 6문이 망가진 채 뒹굴고 있었다. 남의 나라 일이었지만 그렇게 스산하게 망가진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카르네프 외 4인, ‘내가 본 조선, 조선인’(1896), 가야넷, 2003, p106) 수집한 무기와 위기에 빠진 나라 사이에서 그 지도자는 무엇을 생각한 것인가.].. 유튜브 채널 박종인의 땅의 역사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저 역시 사료를 검증하였습니다. 사실입니다. 고종이란 인물, 우리가 아는 그런 인물이 전혀 아닙니다. 이 외에도 한숨만 나오는 일들이 무궁무진합니다.
@@그-d1y 그러니까 숫자만 믿는 병신들 이라고 하는거야. 실제로 조선제국기준으로 토지조사뿐만 아니라 쌀생산량관련해서 조세제도가 달라서. 중앙정부에 보고된 수량의 절반만 신고해서 관청및 고관대작들이 쳐먹은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통계적으로 식량생산이 몇배라고 하지만, 실제생산량은 약.. 30% 증가율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도 비료가 개발되고 나서나 몇몇 군데 대단위 농경지에나 투입해서 증가분한 것이고, 실제로 보면 착취분량이 더심했다고 보는게 일반적인 관점이다. 즉, 위에 통계라는것에 대한 역사사료를 기준으로 추정만 할뿐이지 실제생산량은 지금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라는 것이다. 분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 생산의 문제가 아니였다라는 점이 속속히 나온다. 특히 왕실과 고관대작의 부패가 결정적이였지 실제로 식량생산은 당시 기상상황이 더영향을 끼쳤던것이 맞다. 실제로 조선이 기운것이 임진왜란 과 병자호란을 두번연달아 겪어서 .. 망해갔다고 하는데. 실제로 조선시대가 망하기 시작한것은 그이후.. 경신대기근이후에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다. 그후 복구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려고 했지만, 이때. 경신대기근때. 계급전복을 노리던 상인계층과 기존 양반계층의 계급다툼이 발생하는데.. 그게 바로 장희빈 으로 중심으로한 상인계층의 도전이였다. 그후에 상인계층을 다 때려잡으면서 엄청난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 되면서 복구불가능한 상황까지 가게 된다. 실제로 이부분에서 근대화가 늦어진 가장 큰이유이기도 하고, 다만 이러한 곳에 근대자같은 실학자출신들이 정계에 진출하지 못해서 .. 근대화가 늦어진것이고, 즉, 니들이 말하는 통계는 조작된 통계라는 것과 비교해서 실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엄청난 오류를 겪게 된다라는 것이다. 물론 당시 조선시대는 망조가 든것이 사실이고, 부정부패가 얼마나 국가를 좀먹는지에 대해서 어떠한 대책도마련할수 없는 왕실정권이라는게 근대화를 막았던 기존근간의 정치적인 개혁없이는 근대화를 이룰수 없다라는 것을 제일놓친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면서 세계1차대전으로 인한 서양열강들의 빈곳을 노렸다라는것이지. 역사적으로 국내 쌀생산 그것도 조작되고 왜곡된 자료를 기반으로 오차율이 큰 자료를 가지고서 거론하는것 조차 비교질 하는것은 지금 북한경제정책관들의 행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라는것을 왜 모르냐. 어디서 뉴또라이들의 일본의 변명거리를 기정사실화하는 개소리를 자꾸거들먹거리는데. 뉴또라이들의 자료자체가 틀린것만 골라서 주장한다라는 사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는게. 한심하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것은 동학반란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왕조창립이고 실패하면 반란이고 역적들 입니다 홍경래의 난도 먹고살기 힘들고 핍박받아서 일어난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난이 무엇이 다릅니까? 전라도가 하면 무조건 민주화고 운동입니까? 동학반란 때문에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평양에서 전투를 벌여 청군이패하고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결과 일본군이 조 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서해바다에서도 태안부근에서 해전을 벌여 독일에서 구입한 현대식 청나라 전함들이 박살나서 침몰했죠 전함만 거대했지 포탄도 제대로 없었으니까요 .. 그때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보병 3천명중 1500명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고 동학난 진압당시 고종의 관군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우금치(공주시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잔당들도 소탕이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조선의 국가예산 3년치 이상의 부채로 조선은 어짜피 망해서 쓰러질정도였고 병사들 급여도 못줄정도 였는데 한양주둔 일본군을 앞세워 압박하니 조선왕조의 고종과 순종 및 고관대작들 모조 리 한일합방에 도장을 찍었으며 왕족들은 무슨왕 이런식 허울뿐인 왕의 칭호를 받고 일본왕족들과 결혼을 하였으며 고관대작과 민씨들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같 은 서양식 귀족칭호를 받고 귀족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갔다
조선말기 까지 갑오개혁을 하였어도 여전히 노비제도는 쉽게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기득권 양반층들이 버티고 있었으니까 ... 서원의 폐단이 극악에 달했어도 서원철폐가 쉽게 되지 않았죠 일제시대가 되어 주도권이 바뀌니 쉽게 노비제도가 폐지되고 조선인구의 절반이상인 동족을 노비로 부리던 제도는 폐지가 되 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등하게 교육도 받고 상업도 하며 인구절반의 능력이 경제발전에 이용될수 있었죠 그전에는 철도나 도로 같은 길을 뚫으려면 산이많 은 조선의 특성상 산소가 많은 지역들을 지나가야 하는데 유학으로 똘똘뭉친 문중들이 목숨걸고 반대를 하여 길이나 터널도 능력이 있었다 쳐도 도로를 만들 수 없었지만 일제시대 엄청난 철도와 도로들이 건설되어 경제발전과 지역간에 물류 및 상업이 활발해지고 역들이 생겨나며 숙박시설들도 많이 생겨납니다
애초에 극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일본인과 유사합니다. 언어의 어순도 비슷하죠 따라서 한국과 일본은 무지몽매한 권력자들로 인해 역사적, 국토적, 정치적 합병 통일의 노력을 서로 하지 않을 뿐입니다. 일본 땅이 정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된다면 뭐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한반도로 건너오기도 하겠지만요 😮
조선의 문제점은 유교 였는데 삼년상 치르는것이 효자의 상징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문중의 선산이나 조상의 묘들이 마을 근처에 수많은 묘지 들이 있었으며 인구는 늘어나는데 묘지를 할땅이 없었겠죠 철도나 국도를 만드는데 수많은 산을 지나가야 하며 가급적이면 산세를 봐서 직선 이나 터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제시대 신작로(지금의 국도)를 만드는데도 문중의 묘지나 어떤이들의 조상묘가 있는산을 지나가야 해서 이장 이나 팔아라고 하면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조선 같았으면 그런 반대를 극복하기 불가능했을것입니다 유교사상 때문에 ... 일제가 강제하여 국도 도 뚫고 묘지들이 있는 산의 터널도 뚫고 했지만 수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경찰이나 헌병을 앞세워 밀어부친 강제성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것은 동학반란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왕조창립이고 실패하면 반란이고 역적들 입니다 홍경래의 난도 먹고살기 힘들고 핍박받아서 일어난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난이 무엇이 다릅니까? 전라도가 하면 무조건 민주화고 운동입니까? 동학반란 때문에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평양에서 전투를 벌여 청군이패하고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결과 일본군이 조 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서해바다에서도 태안부근에서 해전을 벌여 독일에서 구입한 현대식 청나라 전함들이 박살나서 침몰했죠 전함만 거대했지 포탄도 제대로 없었으니까요 .. 그때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보병 3천명중 1500명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고 동학난 진압당시 고종의 관군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우금치(공주시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잔당들도 소탕이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조선의 국가예산 3년치 이상의 부채로 조선은 어짜피 망해서 쓰러질정도였고 병사들 급여도 못줄정도 였는데 한양주둔 일본군을 앞세워 압박하니 조선왕조의 고종과 순종 및 고관대작들 모조 리 한일합방에 도장을 찍었으며 왕족들은 무슨왕 이런식 허울뿐인 왕의 칭호를 받고 일본왕족들과 결혼을 하였으며 고관대작과 민씨들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같 은 서양식 귀족칭호를 받고 귀족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갔다
항일운동은 곧, 공산화운동 입니다. 물론, 이승만계를 빼곤 말입니다. 김구의 테러형태의 운동과 초대임정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외교형태의 운동으로 나뉘는데 역시 이승만의 노력으로 패전의 전쟁배상문제에서 한반도가 일본에서 분리하여 정산하게 되었다죠? 남북으로 나뉜 슬픈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말입니다.
@@intelamd3076일본인들도 일왕을 태양으로 모시진 않습나다. 그냥 구시대적인 상징일뿐. 왜 흥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감정적으로 일본 생각해봐야 좋을거 없고 우리가 손해입니다. 일본은 반일 감정이 커지기를 바라고 , 과학 특히 순수 과학 분야에서는 여전히 일본보다 뒤쳐지는게 사실이니까요.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조선의 문제점은 유교 였는데 삼년상 치르는것이 효자의 상징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문중의 선산이나 조상의 묘들이 마을 근처에 수많은 묘지 들이 있었으며 인구는 늘어나는데 묘지를 할땅이 없었겠죠 철도나 국도를 만드는데 수많은 산을 지나가야 하며 가급적이면 산세를 봐서 직선 이나 터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제시대 신작로(지금의 국도)를 만드는데도 문중의 묘지나 어떤이들의 조상묘가 있는산을 지나가야 해서 이장 이나 팔아라고 하면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조선 같았으면 그런 반대를 극복하기 불가능했을것입니다 유교사상 때문에 ... 일제가 강제하여 국도 도 뚫고 묘지들이 있는 산의 터널도 뚫고 했지만 수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경찰이나 헌병을 앞세워 밀어부친 강제성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당신 같은 뇌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면 그랬을 것입니다. 한 왕조가 500년을 지속한다는 것이 쉬운 것 같아요? 전세계를 통틀어 로마제국 외에는 거의 유일한 것입니다. 신라 거의 천년, 고려 오백년, 조선 오백년.. 그 오랜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국가체계가 견고했다는 걸 말합니다. 그런 위대한 민족의 후손이었다게 부끄럽다니 .. 기가 막힌다.
@@소토교회 500년 왕조. 이어온게 우리나라뿐이라고요?ㅋㅋㅋ 유럽이랑 고대국가들에 대해선 안배우셨나봐요ㅋㅋㅋ 여기서부터 걸러야할 님은 아웃ㅋㅋㅋㅋㅋㅋ그리고 지금 지도가 완성되어서 그렇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로 나눠져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태조왕건이 전범자임 ㅋ똑같이 전쟁해서 삼국시대 각나라들 멸망시키고 새 국가세운건데?ㅋㅋ그리고 역사적으로 몽골제국시대 및 청.명나라 근대까지 짱개몽골 북방민족에게 수탈당하고 어린애들 부녀자까지 공물바쳐가며 더크게 희생되고 그냥 솔직히 조선이란 이름만 쓰게해줬을뿐 중국속국으로 살은거나 마찬가지였음. 황제칭호도 못쓰고 사람이며 식량이며 왕자까지 바쳐가며 중국에 빼앗기고산게 오랜세월동안?국민들 피해가 훨씬큰데 ㅋㅋㅋㅋㅋ 병자호란은 모르고 임진왜란만 아는 무식한 티 팍팍내는 사람 여기또있네ㅋㅋㅋㅋ
@@Allin7days유럽이랑 일제시대랑 같냐?? 우린식민지가 아니라 아에 합방한거야..그냥 우리가 일본인이 된거라고 그래서 철도놓고 교육시키고 감염병예방하고 전근대시대에서 근대국가로 된거라고..우리 스스로 못한건 아쉽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이제 밥먹고 제대로 재판도받고 국민이 된거야 양반 지배계층이 20%정도일텐데 나머지 80퍼센트는 어떤삶을 살았을까?? 교육도 못받고 그냥 이렇게 밥주면 먹고 농사지어도 다 세금이고 맨날 군대로 끌려가도 ...오죽 세금때문에 죽을것 같으면 스스로 노비신세가 되었을까?? 자국민을 노비로 만든국가가 그당시 얼마나 있었을지 생각좀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일제의 강제가 없었다면 조선말기 당시 그많았던 무당들에 의해 백성들이 속아서 미신을 숭배했던 것을 쉽게 해결하기 어려웠을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아니라면 ... 공산주의는 종교를 부정합니다 중국이나 북한에선 아직도 종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조선말기 당시 수많은 사이비 종교와 무속인들이 난립했던 사실은 극히 일부에만 기록되고 있습니다
조선의 문제점은 유교 였는데 삼년상 치르는것이 효자의 상징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문중의 선산이나 조상의 묘들이 마을 근처에 수많은 묘지 들이 있었으며 인구는 늘어나는데 묘지를 할땅이 없었겠죠 철도나 국도를 만드는데 수많은 산을 지나가야 하며 가급적이면 산세를 봐서 직선 이나 터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제시대 신작로(지금의 국도)를 만드는데도 문중의 묘지나 어떤이들의 조상묘가 있는산을 지나가야 해서 이장 이나 팔아라고 하면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조선 같았으면 그런 반대를 극복하기 불가능했을것입니다 유교사상 때문에 ... 일제가 강제하여 국도 도 뚫고 묘지들이 있는 산의 터널도 뚫고 했지만 수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경찰이나 헌병을 앞세워 밀어부친 강제성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조선후기 배고프고 가난한것도 서러운데 곡식 빌리려고 관청에 가면 모래를 섞어서 내줬던게 당시 쓰레기ㅈ같앴던 벼슬아치 였습니다. 저렇게 부패했으니 나라가 안망하면 그게 이상한거죠. 일본 미워할것도 없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 아니었어도 누군가한테 나라 뺏겼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 식민지 됐으면?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davidjacobs8558 여자들은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했고 가축만도 못했다고 하던데요 조선인이 아니라 남자라고 하시오 일해봐야 다 수탈당하니까 안했다고 핑계를 대지만 조선남자들은 본래 일을 안했습니다 집안에서 여자를 노예처럼 부려먹고 수탈했던게 조선 남자들 외국인이 와서 보고 조선남자의 야만성에 치를 떨었어요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함에 있어서 긍적적인 부분은, 일본이 거의 300년동안 서양과 교류/무역을 하면서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해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고, 그 성공을 바탕으로,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었으니, 조선을 일본 본토와 비슷한 수준으로 근대화를 빨리 시켜야 하기에 투자를 많이 해서 일본이 300년 걸린 것을 조선에서는 거의 30년만에 메이지 유신의 반 정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에서도 이익의 충돌로 사회적 갈등이 있는 것처럼, 식민지하에서 근대화 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는데, 반대의 측면에서는 또 일본이 한 나쁜 일을 말 할수도 있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 역사시간에는 일본이 잘 한 것은 전혀 얘기하지를 않고 나쁜 것만 과장해서 한다는 것이 문제지요. 아베가 얘기한 것처럼 일본의 식민지배가 나쁜 것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라는 것과 동시에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에 뿌리 및 체계를 마련한 것은 분명합니다.
진실들을 무조건 거부하는것이 아닌 사실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는 너무 감성팔이로 사실들을 숨기고 있는게 너무 많아요. 지배되면서 안좋은 점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한국의 모든 사람들가질 수 있는 기회와 자본사회와 발전할 수 있는 배경이 만들어 졌다는 것들도 다 사실이니.
조선왕조 시대에 수탈과 학정에 시달리다, 나라는 뺏았겼지만 근대 문명에 기반한 지배를 받다 보니까 일반 민중들은 오히려 살기가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고로 나라를 빼앗긴 잘못은 신문명을 받아들인 개혁을 하지 않고 부국 강병을 하지 않았으며 외교에서도 실수를 연발한 조선왕조와 민비 등 외척들의 잘못이 크다.
잘 살았다라. 시게사와 게이조 등이 농촌 등 조사시키며 3년 조사의 자료에 영상 남긴 것 등이 다 있는데? 왜 진실 타령 하면서 정작 증거자료들로 진실 말하면 다들 대답을 못할까? 조선총독부 및 제국의회, 도쿄의대생 등의 자료로 얘기하면 일제시대 잘 산게 진실이라 선동질하던 사람들 아무도 대답 못하더라. 이 영상 제작자도 답변 못피하고 동문서답 하며 대답회피하더라.
수방공사, 수리공사, 금융조합 등 해서 농민이 대출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게 일정 땅 이상 가진 지주들에게만 한정됐다는 것은 영상에서 빼버린 설명임. 1930년대 후반이면 이미 73%가 소작농인게 확인이 될 정도로 자영농들이 대거 몰락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데 이게 수리조합 때 대지주들에 의해 중소지주나 자영농들이 몰락한 원인임. 수리조합 비용을 관개시설을 이미 갖추거나 갖출 수도 없는 지역까지 편입시켜서 중소지주와 자영농들에게 떠넘겨서 이들이 망해버리게 만들고. 농민은 저렴한 금리로 대출을 받아서 조선인 농민에게 막대한 이익을 준다의 실상은 [대지주가 자영농들 몰락시켜서 소작농으로 만들어서 착취한다. 대지주들만 이득 본다.] 임. 대체 영상의 이 왜곡은 참...안그래도 일제강점기 때 사정이 나빠졌던 조선 농민들을 지옥으로 만들고, 자영농들을 대거 몰락시킨 결정타급 사건인데. 조선 농민들이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경험하고 대지주들만 이득을 보면서 대지주와 조선총독부의 이해관계 중심으로 진행됐는데.
@@KGJ-user 일제시대때의 도로정비는 도시내 엉망진창이었던 도로를 도시계획으로 정비하고 하수도시설이 없었던 조선시대에 하수도 깔아서 오물을 위생적으로 처리하게 한거임. 도시간, 대외적 도로는 철도망 중심으로 설치하였음. 교통수단이 자동차가 아니었던 시대였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되지. 일본 본토에서도 도시간 연결도로는 포장된게 별로 없었음. 지금도 그래서 도로는 고속도로 같은 도로법상 도로와 도시내 도시기본계획상 도로로 구분되는데 이게 일제시대때 세워진 체계임. 어떻게든 까내리고 싶어서 환장하신거 이해는 하는데 그런 소리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만 들음.
@@산들바람-n9h-o9x조선왕조보다 더한 북한김씨왕조도 외부세력 개입 안하면 언제까지 북한주민들 우물안 개구리로 세뇌되어 노예로. 강력한 태풍이 위험하지만 그것이 바다를 정화.수백년 겹겹히 쌓은 기득권 조선왕조도 외부세력 개입 없었다면 자체적 내부 혁명으로 혁신되었을지? 비단 일본 아니라 러시아 등 외부세력 없이는 최소 수십년 더 조선왕조 갔을듯, 조선시대 백정은 아예 사람취급 아니었고.일본침략 두둔하는것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변화 가능했을지? 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청나라도 건륭제 이후 막장,전족 등 (고인물은 썩는다) 영국(서구세력) 침략으로 그나마 억지로 근대화,우산혁명 서구식 근대화 맛본 홍콩인들 같은 민족 중국 복속 원할까요?
역사는 감정을 섞지말고, 냉정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일제 시대가 옳았다는거냐?. 일본에 감사하라는거냐?며 몰아가는 능지가 처참한 자들이 많습니다, 아니 누가 일제의 지배가 합당하다했나.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거다. 왜 조선이 망했나?. 망국의 역사도 제대로 가르쳐야 반복을 안할텐데, 그런 교육은 전혀 안했으니 다시 반복되려는거다. 일본의 침략이 정당했다의 논쟁과 그 당시 일제시대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완전 별개의 문제이다. 같은 문제로 끌고 들어가는게 저들의 수법
맞지요...일본이 조선을 근대화 시켜서 좋았다라고 할 거면...우리는 이순신을 엄청 미워해야 한다. 이순신만 없었으면 조선은 벌써 멸망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모두 먹었겠지...그러면 우리는 일본왕을 섬기고 일본처럼 빨리 개항해서 근대화를 더욱 더 빠르게 이룩했을 텐데....따라서 이순신을 천하의 역적으로 봐야 한다....이런 논리네요..
해방후 지나는 80년간 역대 정권이나 국뽕들의 악은 정권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교육계와 협력하고 일제 시대 99% 국가 이익이 있어도 1%의 불이익을 열심히 찾고 과장하고, 일본을 악마화시키고 100% 무시하고, 국민 대다수가 우리나라가 어떻게 근대화했는지 객관적인 역사 인식을 가지는 기회를 방해한 것.
@@권상균-e8v 강제징용 호소인 ㅋㅋㅋㅋㅋ 애초에 강제징용이면 멀쩡히 잘살고있던사람 갑자기 납치해서 끌고가면 강제징용이 맞지 근데 이건 인력공고문 보고 갔는데 거기서 뒤지게 고생한거잖아. 우리는 이런걸보고 취업사기로하지 강제징용이라고는안함. 차라리 신안 염전이 강제징용에 가깝지.
썩어 빠진 조선 말기 의 상황으로 볼 때 우리 스스로의 근대화는 불가능 했으리라 본다. 일제에 의한 근대화가 자존심 상하나 나름 긍정적인 효과도 사실 이지만 빼앗긴 것도 많으니 고마울 것도 없다 지금 부터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속히 일본을 앞질러 우리의 우월함을 보여주자. 뭐 벌써 상당 부분은 추월했지만.
교과서고 나발이고 당시 10대, 20대 시절을 보낸 우리 외할머니는 일본을 무척 그리워해서 해외여행 자유화 되기전 늘 일본에 가고 싶어했다. 집에 돌아와봐야 농사일이나 돕고 조선식 문화로 사람갈구는 것밖에 없는데 그나마 학교 생활이라도 즐겁게 한것 같았다. 창씨개명도 했었다. 그것 이상한것 아냐. 요즘 미국 유학 가고, 거기서 눌러사는것과 전혀 다를바 없다. 우리 외할머니 태어날때 어차피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고, 일본정부를 우리의 정부라고 부르고 있던 시절이고 일본은 선진국이니까 당연히 선택할수 있는거다. 민족주의라는건 양반들이 뒤늦게 자기들 기득권 되찾기 위해 내세운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지. 대부분 사람에게는 좆선은 회복될 이유가 없는 나라였다. 오늘날 미국 생활한 사람들도 어차피 적화통일되면 미제 승냥이의 앞잡이라고 욕쳐먹을 것이다. 즉, 일제가 전쟁에 져서 무너졌으니 모든게 악마화 되었을 뿐이다.
정말 좋은 영상입니다. 이영훈 교수님도 이런 생각으로 자세하게 연구해서 책을 쓰셨지만 결국 식민사관이라고 매도되고 그 책들은 읽지 말아야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학문에 성역은 없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근현대사는 조금만 파보면 진짜 소설 그 자체입니다. 심지어 안중근가 같은 인물도 실체가 있는지도 불분명하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김구는 김일성에게 대한민국을 넘기려고 했는데도 국부라고 칭송 받고 정작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했던 이승만은 런승만이라며 매도하는게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귀중한 영상 잘봤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영상이 많아지고 갑론을박이 허용되는 분위기로 가야 정상적인 국가가 됩니다.
일반화 하긴 어렵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그들은 1000원 10000원에 인색할 필요가 없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동남아 가면서 1000원 정도는 그냥 쓰잖아요. 그대신 그들은 우리 목숨을 쉬이 여겼음을 여러 역사 사료로 알 수 있죠. 한국인의 목숨도 10000원짜리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인이 신뢰가 있다는건 기업인 오너 전체가 대국민사죄하는 걸 보면 그 신뢰도 모래알 같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가족의 재산을 지켜준 사람이 일본인이니 그냥 신뢰가 갈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
1925년 02월 15일 동아일보 기사 100여명 재일 조선인 인부 기한으로 참사자 속출 일본 하코네산 전차공사에 종사하던 노동을 마치니 수중에 한 푼 없고 갈 곳도 없어 시간이 갈수록 위험한 사선의 환자들 일본 하코네산으로 오르는 전차를 건설하는 공사에 종사하는 인부들은 최근 공사를 마치자 일본 인부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갔으나 남아 있는 100여명의 조선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 지난 1월부터 온천마을 등지로 방황하며 밤낮으로 울고 있는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다고 한다. 그 곳에 있자니 먹을 것이 없는데다 추위에 못 견딜 것이고 다른 곳으로 가자니 손에 돈 한 푼 없다보니 굶주림과 추위에 못 견디어 날마다 병들어 앓는 이가 늘어나 벌서 10여명은 병에 걸려 신음하지만 그들을 위하여 구호하여 줄 사람도 없어 그들의 운명은 갈수록 위험한 처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경상남도 출생의 김월룡(37)은 지난 10일 굶주림과 추위를 못 이기어 사망하였으나 그 시체조차 어떻게 수습할 도리가 없었다고 하며 환자는 날마다 늘어가는 중이라고 한다.(열전천전) 이런 기사 천지임
음.. 우리가 타인에게 이유없이 친절을 베풀거나 돈, 자금등을 제공하면 반드시 숨은 의도가 있을거라고 전제하거나 경계하는게 당연한 이치이고 이 진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면서, 이상하게 일본 식민지에 한해서는 이 당연한 이치도 의심하지 않고 일본이 우리를 근대화 시켜주었으니 고마워해야한다 논리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움.. 물론 군부 이전 이토 히로부미처럼 신기하리만큼 대동아 이상론자가 있기는 해서 진짜 먼 미래를 내다보고 조선을 통합해 평화 공영을 만들 비전을 갖고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심지어 이 비전에 따르더라도 한국사람은 1.5~2등 시민이었을거임. 중국은 3,4등 시민) 결국에는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위한 초기 투자비용에 불과함.. 나중에 전쟁이 시작되자 법의 적용 없이 수탈이 진행된 방식과 그 양만 봐도 알 수 있음… 생각보다 조선이 낙후되어서 인프라 개발 비용이 많이 든 것 뿐이지 일본이 선의에 의해서 조선 사람을 계몽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선핸을 한건 아니라는거임. 일부 사람들은 그때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이좋았던 일부 사례를 꺼내기도 하는데.. 결국 다 같은 사람임. 남아공에서 철저한 인종 차별이 있었을 시절에도 백인과 흑인의 우정 사례가 있던것처럼, 선한 순경이 조선 종로구에만 해도 못해도 몇십명은 있었을거고 그들은 인도적 차원에서 조선 사람을 대했을 수 있음. 이런 일부 사례를 가지고 사실 식민통치가 조선을 위한것인마냥 포장하는 일반화 사례도 바보같은거임 님들아… 일본이 수탈과 대동아공영권 구축을 위한 초기 투자비용으로 조선을 개화시켰을 수 는 있는데 그걸 “불편한 진실”로 포장해서 마치 일본이 선행으로 우릴 도와준 것 마냥 호도해서는 안됨요
여기서 다루는 본질은 그걸 교과서나 정식 역사 교육시간에서 배우냐고요.. 결국 일제시대 하 토지수탈이라는 것은 하나의 견해일 뿐인데 그걸 정설마냥 가르치고 있잖아. 의도가 뭐든 지금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건 저때 기반이 마련된 덕분인거임 특히 일본의 개입이 없었어도 알아서 발전했을거라는 이야기는 진짜 바보같다는 생각이다
@@이소영-q2u “우리가 농촌에서 보고 들은 것은 아무리 말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이 많다. 가난한 농민의 식량을 참고해 봐도 잡곡 한 홉에 풀뿌리나 나무 껍질을 끓여 먹는다. 봄에는 풀의 새싹을 겨울에는 나무의 뿌리를 채굴한다. 나무 껍질은 소나무 껍질, 아카시아 나무 껍질, 기타 모든 껍질을 잘게 찧거나 도토리 열매로 가루를 낸 후 물을 넣어 단자를 만들고, 소금을 쳐서 먹는다. 어느 지방에는 먹을 것이 전혀 없어서 고령토를 먹는 경우도 있다. 그 상태는 일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비참하고 진기한 현상이다.” 나가노 스에키(長野末喜)저술, 내외사정사(1932년 발간)
19세기 말 일본에서 발간된 여행서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부산까지 가는 데는 고작 15엔밖에 들지 않으며, 미국에 가는 비용으로 조선 노동자를 헐값에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자기 사업까지 벌일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자국민의 조선 이주를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rishche7258 받아들일용기가 없는 보통 한국인의 발악으로도 보이지만. 나쁘게 보기보다는 무지한 이의 안타까운 혼란 정도로 보시는게 어떨까합니다. 그간 한국내 역사교육은 학교 교육을 넘어 드라마, 영화 등 온갖 매체에 의해 장기간 세뇌과정을 진행하여 심리적 반발이 없는것이 이상한 일이죠.
@@빨강-w6i 멍청한.... 소리. 이념시점이 현재로 잡지말란 소리다. 그당시 이념의 시점에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라는 뜻이다. 누가 독립만세하는 사람들을 빨강이라고 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테러분자로 하는 명칭은 당시 상해임시정부가 계속해서 무마되면서. 세력이 약화 한반도에 직접적인 인력을 배치하지 못하자. 개인적인 행동자. 즉, 아니키스트들의 분풀이로 묘사하게 된다. 하지만 이 아나키스트들의 지원하는데 주력한 사람이 바로 김원봉선생이였고, 김구선생의 실질적인 임정의 역할을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과. 실질적인 국제적협의체에 정면적으로 등장하기 위해서 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즉 니가 말한 빨강이.. 라고 하는 개념자체는 현시점에서 생각하는 빨강이라고 규정짓는 무식함을 범했다. 실질적인 이러한 개인적인 행동자들의 모임은 점조직화 되었고 그들을 규합하기 보다는 이들을 지원하는쪽으로 한 김원봉선생의 .. 상황에서. 알려지지 않은 상당한 전과를 올리게 된단다.... 다만 이게 조직화되지 않은 정치적인집단체로서 후에 두집단체에서 전부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김원봉선생의 지원체와 개인적인 행동자들의 활동은 사실상 무마되게 된다. 역사적으로 은폐하기 되지. 이들은 빨강이도 뭣도 아닌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부분을 김원봉선생이 지원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정말로 집단체로 볼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일탈자로 볼것인지... 이를 빌미로 일본의 역사왜곡자들은 이들을 테러분자로 현재개념의 시각으로 왜곡화하고 있고, 이들을 전체적인 항일투쟁집단화 묘사하려고 하고 있다라는게 현재의 역사적인 관점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라. 수많은 희생에 개인적인 감정으로 복수에 참여한 ..희생자들에 대한 독립투쟁의 역사의 한부분이니까. 그중 한부류가 .. 야인시대에 나오는 시라소니도 한부류가 된다. 그당시를 살아가는 정치적개념으로 판단하는게 역사적인 관점이다. 지금의 너의 그 일베스러운. 허접한 혀놀림이 아니란 말이다. 어디서 일본의 역사왜곡에 동참하는 . 허접스런 . 왜곡을 들이밀지 말란말이다.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박정현-w1b OECD에서 발간한 앵거스 매디슨의 자료를 보면 1990년 달러 불변가격 기준으로 조선의 1870년 GDP가 700불이 안 됩니다. 그랬던 것이 1910년부터 1930년에 이르면 1300불까지 증가합니다. 무시무시한 경제성장이고 세계 경제성장률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일제시대 장점도 있었다면 있었겠져. 나라를 잃고 본국에게 불리했던 역사는 뜯어 고치고 수탈해가고 철도, 항만, 금광, 은행등 굵직한 기간산업은 전부 일본의 공, 사, 군 소속이었고 등등 찌바에 반년정도 있었는데 거기 시립도서관에 주말에 자주갔습니다. 우연히 일제시대 자료가 있어서 보았더니 독립군 포로였는지 저항하던 시민이었는지 강가에서 작두로 썬 머리를 나열해서 전시하고 사진으로 남기더이다 마치 전리품처럼. 군관이 일본도로 포로 목치기 바로전 사진은 수두룩하고. 2차대전으로 사망자가 7천만 (독일, 이탈리아.일본) 철길 놓아주고 문명개화 시켜주면 퉁칠수있는 문제일까요 과연.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역사를 관점으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통계자료 그대로 알면 된다. 교육 분야에 집중하면 조선까지는 통치자/관료를 위한 엘리트 교육이었다. 백성이 많이 알면 통치가 어려워 지니 백성에 대한 교육은 없었다. 일제는 조선인 교육을 하여 부국강평 우선정책으로 전국민대상으로 확대 된다. 물론 교육 후 조선인들이 많은 지식인들이 생기면서 독립 자립이 강해졌지. 그 후에는 우리가 아는 역사가 연결 되는 거지, ,
조선이 다른 나라들보다 가혹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도 조정은 진압에 앞서서 다른 지방관을 파견하는 식으로 협상을 먼저 하려고 했고, 농민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서의 주민들의 자치를 인정해주는 등의 유화책을 벌이기도 했다. 당장 비슷한 시기인 산업 혁명기의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이나 러다이트 운동같은 여러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학살극까지 벌이면서 잔혹하게 진압했고, 훨씬 이후인 1930년대에도 식민지인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총독부의 가혹한 통치에 저항하던 암리차르의 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장군이 당시 국왕인 조지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전근대적인 인권침해는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보다 딱히 비난의 대상이 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이 다른 나라들보다 가혹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도 조정은 진압에 앞서서 다른 지방관을 파견하는 식으로 협상을 먼저 하려고 했고, 농민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서의 주민들의 자치를 인정해주는 등의 유화책을 벌이기도 했다. 당장 비슷한 시기인 산업 혁명기의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이나 러다이트 운동같은 여러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학살극까지 벌이면서 잔혹하게 진압했고, 훨씬 이후인 1930년대에도 식민지인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총독부의 가혹한 통치에 저항하던 암리차르의 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장군이 당시 국왕인 조지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전근대적인 인권침해는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보다 딱히 비난의 대상이 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평범한 국민 입장에서는 나랏님이 바꼈을 뿐 자신의 생활권만 보장이 되면 정부가 어떻게 되든지 알빠 아니였겠죠 로마 공화정 때 정복지 국민들도 그러했고요. 어떤 면이든지 명암이 있고, 일제가 도움을 준 측면도 분명히 있는데 우리나라는 피해의식으로 인해 눈을 가리고 있는 부분이 많은거 같습니다. 일제로 인해 피해 받은 부분과 긍정적이라고 생각할수 있는 부분 모두 포용해야 과거로부터 역사를 배우고 미래를 위해 발전할 수 있는거죠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일본에의해 지배당했던 대만사람들은
현재도 일본을 비하 하거나 혐호 하지 않고 일본을 좋아해요ㅜ조선오백년동안 계급사회로 같은 민족을
상놈.백정.노비로 나누어 개.돼지 취급한 조선 보다는 .문맹에서 벗어나게해준 일본이 더 나은거죠ㅜ 만약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지금에 한반도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네요ㅠㅠ
@@dasiworldmap 선동과 왜곡과 거짓이 아닌 진실 그대로를 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dasiworldmap미치겠다. 소득세 면제가 조선인을 위한 조치냐고? 그게 조선으로 갔던 일본인을 위한 조치지. 그걸 뒤집으려면 구체적인 데이터를 가져오든가... 게다가, 조선의 쌀소비랑 일본의 쌀 소비를 왜 1:1로 비교하는데? 일본인은 적게 먹는 민족으로 이미 구한말부터 많은 외국인들이 설명했고, 그에 비해 조선인은 대식가로 외국인들이 놀랄 지경이었는데, 이걸 그냥 단순히 1:1이라....일본이 철도 등을 놓은 게 수탈 위한 거고, 일본이 아니었어도, 그 당대에 발전으로 신문물을 놨겠지. 종두법도 그런 역할에 하나인데...
조선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말하려면, 경제적 지원으로 조선인 서민 중에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설명하든가...1930년에 일본의 수탈은 생산의 80프로를 넘는 수탈이었고, 영국등의 제국등은 인도에 50%를 했었다. 즉, 병작반수제 정도를 했었으나, 우리는 과거 조선의 세도정치의 수탈보다 더했었고, 그렇게 짜내자, 결국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영국등 제국등은 그래서 짤 수 있는 여력이 있어서 블록경제 유직가 가능했으나, 일본은 수탈을 극한까지 해서, 더는 할 수 없어서, 한게 대륙진출....
그런데도, 마치 선의인양 구라치는 걸 뭔 불편한 진실? 제대로 비판하려면 데이터라도 제대로 가져오든가...죄다 왜곡해놓고 뭐하는 짓임?
조선 쇄도정치보다 더 약탈했는데 왜 인구수는 증가함??? 아니 존나 잘살았는데 동학농민운동은 왜 일어남? ㅋㅋㅋㅋㅋㅋ 아유 깨무니 조선놈아 ㅉㅉ 너 너 조선 건국 어떻게 되었는지나 아니? @@kelsen1975
황현필이 개거품 물겠군
ㄹㅇ ㅋㅋ
그넘은 혀가 짧아서 거품 안나옴
요즘 유투부 안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황 구독자가 100만이 넘음.
@@정의헌-x5h 은퇴시켜야지 ㅎㅎㅎ 전교조도 이참에 은퇴필요
단편적 주입식 교육으로만 배워 온 우리 세대에게는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좋은 내용들입니다. 제대로 된 역사를 알아야 거짓선동질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좋은 컨텐츠 감사합니다.
상해 임시정부에 정통성을 부여해서 중국의 속국이라는 프레임을 맞추려는것 같습니다. 순수한 의도가 아닌것 같음
이야 이래서 뉴라이트도 아닌 왜라이트 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 알겠네요
선생 역사 공부좀 새로해라
조선의 문제점은 유교 였는데 삼년상 치르는것이 효자의 상징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문중의 선산이나 조상의 묘들이 마을 근처에 수많은 묘지
들이 있었으며 인구는 늘어나는데 묘지를 할땅이 없었겠죠 철도나 국도를 만드는데 수많은 산을 지나가야 하며 가급적이면 산세를 봐서 직선
이나 터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제시대 신작로(지금의 국도)를 만드는데도 문중의 묘지나 어떤이들의 조상묘가 있는산을 지나가야 해서 이장
이나 팔아라고 하면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조선 같았으면 그런 반대를 극복하기 불가능했을것입니다 유교사상 때문에 ... 일제가 강제하여 국도
도 뚫고 묘지들이 있는 산의 터널도 뚫고 했지만 수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경찰이나 헌병을 앞세워 밀어부친 강제성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진실을 불편해 할 필요 없다. 그냥 진실은 진실로 받아들이면 된다.
반일팔이들은 불편 할 수 밖에..ㅋ
근데 불편해 하여 조작질하는 것들이 많고 대부분 그에 세뇌 당하는 것 같습니다.
통계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쓰레기 영상입니다.
@@이규준-q7x 그냥 니가 쓰레기임
이러면 좀 있어보이나? 왜 일본 자료만으로 해석하냐? 다 일본 기준으로 작성 됐네?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듯...... 식민지 생활 한다고 당시 모든 조선인들이 괴롭고 힘들기만 했겠냐 ㅋㅋ 조선 말기에 백성들 상당수가 하층 노예 생활 하던 이들이었고. 그런 이들에게는 일본 식민지 시절이 오히려 새로운 장이 되고, 기회가 된거지.... 우리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서, 고통스러운 식민지 시대였음을 가르치고 배우지만, 정말 평범한 이들에게는 개개인별로 다 입장과 생각이 달랐던거고......... 조금 다른 얘기지만, 우리가 지금 보물로 여기고, 문화재로 여기는 경주 불국사나 석굴암 같은게, 조선말기 당시의 실제 사진을 보면 처참한 폐허였고, 다 망가진 곳이었지.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불교문화재는 쓰레기에 불과했으니까.......그걸 일본이 그 당시의 최신의 기술로 다 복원시켜 준거고. 물론, 그 당시의 최신기술이라는게 바로 시멘트였고. 지금에 와서 시멘트로 복원시킨게 일제가 그걸 훼손시킨거니 뭐니 난리치지만, 그 시멘트 기술이 그 당시엔 최신의 첨단 기술이었으니까..
지금의 북조선을 보면 일제시대가 북조선
독재체제 보다 너무 살기 좋았다고 북한
노인들이 말했음
60년대 우리나라보다
탈북자들이 자기나라 좋다고 하겠음??
일본에 의해 차별받던 재일교포들이 북한으로 북송된후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해야합니다.
비교할걸 비교해라. 북조선이 정상적인 국가냐? 북한과 비교하면서 일제한테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냐? ㅋ
@@앵무새-k4f 일본에 정당성을 부여하는게 아니라 더불어벌레들과 종북주사파들이 북한을 좋아하니 그러는것 같은데?
울엄니 26년생이신데(돌아가심) 말씀하시길..엄니 어렸을때 대부분 머슴들이 엄청 많았고 양반들한테 툭하면 돗자리로 둘둘말아서 맞아죽었고 지게에 시체 들러메서 산에다 갖다 버린경우가 허다했다고함.
일본놈들이 들어오고 난후 반상 차별없애고 난후 함부러 못했다고 함...
어느 사회나 밑바닥 인생들은 살고있던 사회가 뒤집히는게 오히려 나을수도 있어요. 한국에서 정말 잃을거 없는 노가다 흙수저가 미국이나 호주에 이민가서 똑같은 막노동으로 한국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는거처럼..
ㅠㅠ 조선이 고인 상태로 500년을 이어오니.. 계급의 고착화가 심한거 같긴허네요...
미스터 선싸인이 그런 부분을 잘 짚긴했죠...( 그래도 고종을 미화하긴 함)
1910년에 이미 한일합방이고 어머니가 어렸을 적인 1930년대는 이미 일본이 통치한지 20년이 넘었는데 그럼 계속 반상 차별이 이어졌던 거 아닌가요?
틀딱이 지어내다 걸린거지ㅋㅋㅋ 대가리가 안돌아가니 거짓말도 제대로 못해요ㅋㅋㅋㅋㅋ
@@Anthkkm근데 그 밑바닥 삶이 과반수이니 정상적인 국가라 보기엔 어려웠죠
그 당시에는 일제시대라고 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일제 강점기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라는 말은 김정일이 쓰기 시작한것인데 이제는 모두들 따리한다.
"후과"라는 말도 우리는 안 썼는데 요즘은 마구 쓰더군요
"일제시대" 때 사신 분들은 입말로 "왜정" 때라고 하시더군요.
@@2011olden 맞아요. 왜정 때라고 했습니다. 문어체로는 안 쓴 것 같군요,.
정확히 일정시대 라고 해야 정부가 일본이 었고 조선인도 일본인 이었으니
@@반채헌-f5q 정확한가요? 근거가 있는 얘깁니까? 출처가 어딘지 궁금하고 알고싶습니다.
현재 주류사학계에 근대화얘기를 하면 가장 마지막에 내놓는다는 얘기가, 우리 자체적으로 공업화와 민족자본 성장이라는 우리 자발적인 근대화 동력이 있었어서 일본 아니었어도 근대화 됐을거라는 소리를 함. 문제는 그런 동력이 충분히 조선이라는 구식체제의 압제를 누르고 국가체제를 현대 민주체제로 체질을 격변시킬정도로 조직화된 큰 힘이 아니었다는데에 결정적 문제가 있는걸 모름. 마치 그건 실학자들이 암만 백년넘게 토지제도와 정책개선을 책으로 썼어도 북인남인 동인서인 노론소론의 분화를 막지못하고 수백년 휘둘리다 그냥 역사속으로 사라진거랑 같은 상황인거임. 이미 지역 경제권이 지방관 수탈 한번에 다 모래성처럼 쓰러지고 반상제 때문에 백정이든 머슴이든 돈을 모아도 할수 있는 일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쉽게 이런저런 이유로 목이 잘리는데 근대화가 국소적 힘으로 이뤄졌을거라는건 오만임. 일본이 싫은건 맞지만 그만큼 조선후기는 그냥 구체제로 백성수탈이 더 많았고 그런 구식정치체제가 서양에 먹히든 일본에 먹히던 중국에 먹히던 할걸 일본에 먹힌것 뿐이고 자기 민족을 자기 민족이 억누르다가 망한게 팩트임. 그걸 전적인 일본탓으로 돌리며 또다시 피해호소하는걸로 약자로 남겠다는 다짐을 오늘도 하는게 현재 사학계의 인식인거고. 일본이 정말 싫다면 국력을 키워서 일본인을 전멸 시켜버리려는 팽창적 세계관을 함양할 역사관을 연구할 일이지, 지금 주류사학계는 또다시 중국식 동북아공정에 먹히려고 수동적 사학관을 고집하는 집단적 오류에 빠져있는것도 모르고 있는듯함.
역사는 가정을 하면 안되는게 맞긴 함. 임오군란이 없었다면,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했다면 등의 이야기들은 죄다 현실세계에 없는 망상일 뿐임. 역사교과서에도 보면 한계점들을 이야기하는데, 당시에는 그걸 왜 외워야하나는 생각을 하곤했음.
하지만 한계점을 인지하고 이를 극복해나가는게 맞는거임. 기존 사학계가 전적으로 피해호소를 하는 것은 약자로 남겠다는 게 아니라, 당시에 피해자였던게 맞으니까 하는 이야기임. 일본이 싫다면 국력을 키워서 다시는 그런 일을 안 당하게 하는 것도 맞다고 생각함.
근데 정말 일본이 없었다면 근대화가 안 되었을까? 이건 일본측 주장과 뉴라이트 주장임. 한국에서 10년 전부터 뉴라이트들이 저 맥락을 계속 들고오니까, 거기에 반발하는 학계에서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할 가능성이 있었다라는 것을 캐고있는거임.
왜냐? 현실의 결과는 일본이 산업화/근대화를 시킨 것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100년 전의 자료들을 찾아서 싸우는거임. 근데 그 자체로 두고보자면 뉴라이트의 주장과 학계의 주장 둘 다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함.
100년 전에 조선이 자주적으로 산업화/근대화를 시킬 여력이 있었다는건, 맨 처음 말했듯이 역사적 가정에 불가한 거니까. 그러니까 뉴라이트들은 지들이 그걸로 이길 걸 알고 싸움을 거는거고,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고싶은 일부 역사학자들은 거기에 반대해서 싸우는거임. 난 후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편임.
뛰어쓰고....문맥부터 나누라....
누가 당신 스타일의 논리가 맞아도 읽어볼까?
@@평범한사람-x4g 뉴라이트 어원이나 그 뜻을 아시는지요?
아시면 설명좀 부탁요
조선은 국가가 썩어 문들어지고 무능해 스스로 망할 힘도 없었다고 한다~
@@무명-f6r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보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반공주의"를 근간으로 합니다. 70년대 80년대 다큐나 사진을 보면 "때려잡자 빨갱이"같은 표어가 붙어있는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반공주의"를 기치로 내세운 보수주의 정권, 권위주의적 독재 정권 하에서는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억압하고, 위해를 가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쁘락치, 간첩 조작을 한 사건들을 내보내기도 하고, 일련의 사건을 위해 무고한 희생양들을 많이 생겨났었죠.
하지만 일련의 민주화 움직임으로 독재정권들이 몰락하고, 사회가 바뀌자 기존 구보수, 구진보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세력이 뉴라이트입니다.
그들은 식민지근대화론, 건국절, 독재미화 등을 통한 사상을 퍼트리며 한국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국민들이 많아져야 대한민국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것은 동학반란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왕조창립이고 실패하면 반란이고 역적들 입니다
홍경래의 난도 먹고살기 힘들고 핍박받아서 일어난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난이 무엇이 다릅니까? 전라도가 하면 무조건 민주화고 운동입니까? 동학반란
때문에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평양에서 전투를 벌여 청군이패하고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결과 일본군이 조
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서해바다에서도 태안부근에서 해전을 벌여 독일에서 구입한 현대식 청나라 전함들이 박살나서 침몰했죠 전함만 거대했지 포탄도 제대로
없었으니까요 .. 그때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보병 3천명중 1500명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고 동학난 진압당시 고종의 관군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우금치(공주시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잔당들도 소탕이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조선의 국가예산 3년치 이상의
부채로 조선은 어짜피 망해서 쓰러질정도였고 병사들 급여도 못줄정도 였는데 한양주둔 일본군을 앞세워 압박하니 조선왕조의 고종과 순종 및 고관대작들 모조
리 한일합방에 도장을 찍었으며 왕족들은 무슨왕 이런식 허울뿐인 왕의 칭호를 받고 일본왕족들과 결혼을 하였으며 고관대작과 민씨들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같
은 서양식 귀족칭호를 받고 귀족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갔다
그렇습니다
교묘하게 지능적으로 왜곡하는 왜라이트의 사관을 경계해야 합니다
@@uncut125f 교묘하게 지능적으로 왜곡하는게 이 채널이다
병원 철도 공장만 지었다고 근대화냐
조선시대나 일제시대나 문맹률 비슷하고
신분차별도 다를게 없었다
병원을 지었어도 조선인 이용율은 10%도 안되었고
철도는 전쟁물자 소송을 위해서였고
공장도 기술을 넘겨준게 아니라
값싸게 일만 시켰고 여성 문맹률이 90%가 넘었다 최하층민으로 일제의 노비처럼 살았던게
조선인들이다
양반 사대부만 조선귀족으로 대우 받았고
@@딩고-c4t
맞습니다 이 채널 보고 그렇게 느껴서 이른바 뉴라이트 혹은 왜라이트 라고 불리우는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쓴 겁니다
그럼 중국의 식민통치를 받고있는 티베트도 그대로 바라볼까? 티베트왕국은 1950년대까지도 근대화를 전혀 안하고 노예제도를 유지했으며 스스로 마오쩌둥에게 항복한 나라인데?
수고하셨습니다.
엄청난 공부와 일반인은 거의 몰랐던 사실들, 자료로써의 가치가 대단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것은 동학반란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왕조창립이고 실패하면 반란이고 역적들 입니다
홍경래의 난도 먹고살기 힘들고 핍박받아서 일어난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난이 무엇이 다릅니까? 전라도가 하면 무조건 민주화고 운동입니까? 동학반란
때문에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평양에서 전투를 벌여 청군이패하고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결과 일본군이 조
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서해바다에서도 태안부근에서 해전을 벌여 독일에서 구입한 현대식 청나라 전함들이 박살나서 침몰했죠 전함만 거대했지 포탄도 제대로
없었으니까요 .. 그때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보병 3천명중 1500명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고 동학난 진압당시 고종의 관군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우금치(공주시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잔당들도 소탕이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조선의 국가예산 3년치 이상의
부채로 조선은 어짜피 망해서 쓰러질정도였고 병사들 급여도 못줄정도 였는데 한양주둔 일본군을 앞세워 압박하니 조선왕조의 고종과 순종 및 고관대작들 모조
리 한일합방에 도장을 찍었으며 왕족들은 무슨왕 이런식 허울뿐인 왕의 칭호를 받고 일본왕족들과 결혼을 하였으며 고관대작과 민씨들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같
은 서양식 귀족칭호를 받고 귀족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갔다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눈에 보이는 수치나 상식등이 있는데 무조건 암울한 시대고 비참했던 생활상이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너무 심함
진짜 암울하고 비참한 시대는 돈좀 있다고 하면 관아로 끌고가서 곤장을 쳐서 돈을 뜯어내 노동의지를 잃어버린 성인남성들이 길에 주저앉아 술만 마시던 시대임
그런 나라가 망했다고 슬퍼하는 그당시 백성들이 얼마나 될까
그러한 실용주의는 환영입니다.
근데 한국식 정치는... 기반조차 약해서
민족주의 발판을 만드는 게 아예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조금이라도 민족주의적이면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몰리죠
정식 정부의 발판을 마련한 사람조차도
기독교인이고, 미국 유학을 갔다왔으니까요.
갠적으론 서양식 정치방식을 어거지로
동양으로 끌어들인 부작용이자 폐해라고 전 봅니다.
동양인들은 어쨌건
항상 봉건식 사회에 절여져있었으니까요
항상 최고 통치자, 군주가 있어야 했죠.
현대의 그 군주는 어거지로 일대일 대응을 시켜서
대통령이 군주다! 하지만...
영국만 봐도 입헌군주제라면 왕이 따로 있고
총통이 따로 있듯이.
한국 사람들은 한국 보다 못사는 나라 국민들 무시하는데.. 저 시대 일본인 눈에 조선인은 얼마나 하찮게 보였을까
제정신인 사람이 깨무늬나 딸개를 바라볼때 그느낌?
그럼에도, 일제시대때 고교야구인 고시엔에는 한국인도 평등히 참여할수있었음. 4강까지도 올라갔던 한국 고교도있고 매년 더많은 고교가 참여했음. 그것만봐도 일본은 식민지라기보다 병합이라는게 맞았고, 가난한 조선이후 일제시대는 등산을 다닐정도로 여유가 있었음.
@@대게머그러가까 고시엔에 가는게 평등한 건가요? 진짜 평등하려면 일본 일왕제를 없애고 한국인도 일본의 왕이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해야 평등한 것 아닐까요? 한국인이 일본의 군수통치권자나 최고권력기관의 수장이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해야 평등한 것 아닐까요?
@@intelamd3076음....저기여. 천황까진 몰라도 일본군 장군 (홍사익 중장)을 비롯해서 고위 관료나 군인은 이미 많이 나왔습니다. 1945년에는 조선에 참정권도 줘서 사실상 오키나와나 홋카이도 급으로 격상시키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버려서 못하게 됐죠. 누가 알아요? 그 상태로 한 1980년대까지 같으면 조선인 총리가 나왔을지? 현실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보다는 조선인들에게 긍정적이었을듯 하네요.
@@intelamd3076 일본 제국 신민중 2등이었죠. 1등 일본인, 2등 조선인, 대만인, 만주인, 3등 일본 내 부라쿠민, 그리고 아예 인간 대접을 못받은 4등이 중국인, 동남아인 등 점령지 주민.
역사는 사실의 영역이지 감정의 영역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역사는 감정의 영역인듯합니다...
역사는 팩트에 근거해야 합니다. 지난 36년과 임진왜란 등 일본넘들과 관련은 수없이 많습니다... 은근 슬쩍 일본넘 찬양 ... 그만두세요...
@@alexkimvv은근슬쩍 감정에 의한 역사왜곡 그만두쇼 일본이 강압과 협박으로 우리나라 먹은게 아니라 고종이 전쟁한번 안하고 그냥 넘긴거다
러시아에 나라넘기는 아관파천하자는 고종을 설득해서 차라리 일본에 나라 맡기자는 이완용은 오히려 시대를 정확하게 보는 천재다
진짜 매국노는 고종이지
이게 역사적인 팩트다
@@alexkimvv팩트에 근거해야 한다면서 감정적으로 댓글다네 ㅋ
@@alexkimvv당신 과거 글을 보면 팩트가 아니라 감정만이 존재함
대한민국 모든 영역이 감정의 영역임
기분상해죄. 시선강간죄 등등
이미 나라 망조에요. 다들 준비 잘하세요
제가 4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제시대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것보다 훨씬 엣센셜한 자료로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정확한 팩트로만 이루어진 훌륭한 영상 같고 이 방대한 자료를 취합하고 정리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었겠구나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블로그로 일제시대의 사실들을 전달하고 있는데 이러한 개괄적인 방향보다는 디테일한 책자번역, 지도 한글화, 팜플렛 해석등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quixc 블로그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OWER-ADE blog.naver.com/quixcha/222244326449 입니다. 목록을 모아놓은 페이지 입니다.
푸핫 구라 치는거 봐라 4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똥구녕으로 공부했냐 ㅋㅋ
@@POWER-ADE
m.blog.naver.com/quixcha
차경환님 반갑습니다
참 귀한 자료입니다. 이토록 교육이 매우 중요해요. 감사합니다.
역사는 부끄러움도 팩트로 가르쳐야..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것은 동학반란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왕조창립이고 실패하면 반란이고 역적들 입니다
홍경래의 난도 먹고살기 힘들고 핍박받아서 일어난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난이 무엇이 다릅니까? 전라도가 하면 무조건 민주화고 운동입니까? 동학반란
때문에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평양에서 전투를 벌여 청군이패하고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결과 일본군이 조
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서해바다에서도 태안부근에서 해전을 벌여 독일에서 구입한 현대식 청나라 전함들이 박살나서 침몰했죠 전함만 거대했지 포탄도 제대로
없었으니까요 .. 그때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보병 3천명중 1500명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고 동학난 진압당시 고종의 관군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우금치(공주시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잔당들도 소탕이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조선의 국가예산 3년치 이상의
부채로 조선은 어짜피 망해서 쓰러질정도였고 병사들 급여도 못줄정도 였는데 한양주둔 일본군을 앞세워 압박하니 조선왕조의 고종과 순종 및 고관대작들 모조
리 한일합방에 도장을 찍었으며 왕족들은 무슨왕 이런식 허울뿐인 왕의 칭호를 받고 일본왕족들과 결혼을 하였으며 고관대작과 민씨들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같
은 서양식 귀족칭호를 받고 귀족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갔다
공감합니다. 참고로..
[1894년 7월 23일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공격했다. 궁궐 수비대인 시위대 500명이 격전을 벌였다. 독일제 연발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조선 제일인 평양군으로 구성돼 있었다. 싸우겠다는 사기도 충만했다. 격렬하게 전투가 벌어지던 오전 5시 30분쯤 고종으로부터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왔다.(1894년 음6월 21일 ‘고종실록’) 투항하라는 것이다. 그 어명에 시위대는 ‘통곡하면서 총통과 군복을 마구 찢고 부순 후’ 도주했다.(황현, ‘매천야록’2 1894년③ 14.일본인의 대원군 영입, 국사편찬위) 일본군은 개틀링포 8문과 크루프 기관포 8문, 각종 소총 3000정과 무수한 잡무기, 군마 15필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전리품을 챙기는 사이, 고종이 직접 현장에 나와서 이렇게 요구한 것이다. “그 무기들은 쏜 일이 없기 때문에 빼앗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여단보고’ 보고철 등. 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일조각, 1989, pp64~65, 재인용) 이듬해 서울을 방문했던 러시아 육군 대령 카르네프와 중위 미하일로프는 이렇게 기록했다. ‘목조 헛간에는 개틀링 기관총 10문과 7.5cm 구경 크루프 포 6문이 망가진 채 뒹굴고 있었다. 남의 나라 일이었지만 그렇게 스산하게 망가진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카르네프 외 4인, ‘내가 본 조선, 조선인’(1896), 가야넷, 2003, p106) 수집한 무기와 위기에 빠진 나라 사이에서 그 지도자는 무엇을 생각한 것인가.].. 유튜브 채널 박종인의 땅의 역사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저 역시 사료를 검증하였습니다. 사실입니다. 고종이란 인물, 우리가 아는 그런 인물이 전혀 아닙니다. 이 외에도 한숨만 나오는 일들이 무궁무진합니다.
솔직히 독립도 미국이 핵폭탄 날려서 걍 거져 얻은거잖아 독립운동자들 니들은 양아치짓 한거고
@@Ires-643윤봉길이 양아치라는소리하고있네ㅋㅋㅋㅋㅋ
그래서 사람들교육하고다녔냐?
@@puckyoun 그렇죠. 윤봉길이나 안중근같은 분들이 거사를 하시었기에 중국의 장제스도 포츠담회의때 조선의 독립을 꺼낼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이념적 개입없이 가감없는 역사적 진실... 이것이 진짜 역사다
꼭 이렇게 무식한놈들이 선동당하지.
그렇게 따지면 괴벨은. 선도적인 정치가지.
@@billee5759통계가 말해주는데 ㅋㅋㅋ 아직도 세뇌에서 못깨어나는 조선인^^
@@그-d1y 그러니까 숫자만 믿는 병신들 이라고 하는거야. 실제로 조선제국기준으로 토지조사뿐만 아니라 쌀생산량관련해서 조세제도가 달라서.
중앙정부에 보고된 수량의 절반만 신고해서 관청및 고관대작들이 쳐먹은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통계적으로 식량생산이 몇배라고 하지만,
실제생산량은 약.. 30% 증가율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도 비료가 개발되고 나서나 몇몇 군데 대단위 농경지에나 투입해서 증가분한 것이고,
실제로 보면 착취분량이 더심했다고 보는게 일반적인 관점이다.
즉, 위에 통계라는것에 대한 역사사료를 기준으로 추정만 할뿐이지 실제생산량은 지금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라는 것이다.
분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
생산의 문제가 아니였다라는 점이 속속히 나온다.
특히 왕실과 고관대작의 부패가 결정적이였지
실제로 식량생산은 당시 기상상황이 더영향을 끼쳤던것이 맞다.
실제로 조선이 기운것이 임진왜란 과 병자호란을 두번연달아 겪어서 .. 망해갔다고 하는데.
실제로 조선시대가 망하기 시작한것은
그이후.. 경신대기근이후에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다.
그후 복구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려고 했지만,
이때. 경신대기근때. 계급전복을 노리던 상인계층과 기존 양반계층의 계급다툼이 발생하는데..
그게 바로 장희빈 으로 중심으로한 상인계층의 도전이였다. 그후에 상인계층을 다 때려잡으면서
엄청난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 되면서 복구불가능한 상황까지 가게 된다.
실제로 이부분에서 근대화가 늦어진 가장 큰이유이기도 하고,
다만 이러한 곳에 근대자같은 실학자출신들이 정계에 진출하지 못해서 .. 근대화가 늦어진것이고,
즉, 니들이 말하는 통계는 조작된 통계라는 것과 비교해서 실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엄청난 오류를 겪게 된다라는 것이다.
물론 당시 조선시대는 망조가 든것이 사실이고,
부정부패가 얼마나 국가를 좀먹는지에 대해서 어떠한 대책도마련할수 없는 왕실정권이라는게 근대화를 막았던 기존근간의 정치적인 개혁없이는
근대화를 이룰수 없다라는 것을 제일놓친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면서 세계1차대전으로 인한 서양열강들의 빈곳을 노렸다라는것이지.
역사적으로 국내 쌀생산 그것도 조작되고 왜곡된 자료를 기반으로 오차율이 큰 자료를 가지고서 거론하는것 조차 비교질 하는것은 지금 북한경제정책관들의 행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라는것을 왜 모르냐.
어디서 뉴또라이들의 일본의 변명거리를 기정사실화하는 개소리를 자꾸거들먹거리는데.
뉴또라이들의 자료자체가 틀린것만 골라서 주장한다라는 사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는게.
한심하다.
조선인 탈출은 지능순 ㅋ
통계? 정말? @@그-d1y
봉건왕조 그대로 냅뒀어야 하는데
배은망덕한 족속들
신분제를 폐지하고 모두가 동일하게
교육받을수 있게한 조치가 얼마나 큰 은덕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래도 진실을 알려고 하고, 솔찍히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숫자가 지금은 적어서 그렇지만, 널리 알려지고, 인정 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것은 동학반란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왕조창립이고 실패하면 반란이고 역적들 입니다
홍경래의 난도 먹고살기 힘들고 핍박받아서 일어난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난이 무엇이 다릅니까? 전라도가 하면 무조건 민주화고 운동입니까? 동학반란
때문에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평양에서 전투를 벌여 청군이패하고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결과 일본군이 조
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서해바다에서도 태안부근에서 해전을 벌여 독일에서 구입한 현대식 청나라 전함들이 박살나서 침몰했죠 전함만 거대했지 포탄도 제대로
없었으니까요 .. 그때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보병 3천명중 1500명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고 동학난 진압당시 고종의 관군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우금치(공주시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잔당들도 소탕이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조선의 국가예산 3년치 이상의
부채로 조선은 어짜피 망해서 쓰러질정도였고 병사들 급여도 못줄정도 였는데 한양주둔 일본군을 앞세워 압박하니 조선왕조의 고종과 순종 및 고관대작들 모조
리 한일합방에 도장을 찍었으며 왕족들은 무슨왕 이런식 허울뿐인 왕의 칭호를 받고 일본왕족들과 결혼을 하였으며 고관대작과 민씨들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같
은 서양식 귀족칭호를 받고 귀족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갔다
조선말기 까지 갑오개혁을 하였어도 여전히 노비제도는 쉽게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기득권 양반층들이 버티고 있었으니까 ... 서원의 폐단이 극악에 달했어도
서원철폐가 쉽게 되지 않았죠 일제시대가 되어 주도권이 바뀌니 쉽게 노비제도가 폐지되고 조선인구의 절반이상인 동족을 노비로 부리던 제도는 폐지가 되
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등하게 교육도 받고 상업도 하며 인구절반의 능력이 경제발전에 이용될수 있었죠 그전에는 철도나 도로 같은 길을 뚫으려면 산이많
은 조선의 특성상 산소가 많은 지역들을 지나가야 하는데 유학으로 똘똘뭉친 문중들이 목숨걸고 반대를 하여 길이나 터널도 능력이 있었다 쳐도 도로를 만들
수 없었지만 일제시대 엄청난 철도와 도로들이 건설되어 경제발전과 지역간에 물류 및 상업이 활발해지고 역들이 생겨나며 숙박시설들도 많이 생겨납니다
배은망덕? 은해?.. 너 일본 극우냐
한국인이 하는말이 아닌데
너가 한국인이면 부모가 불쌍하다
사실 요즘 진정한 친일파가 누가 있겠습니다. 정치적 이유로 반일 사상을 부추기는 세력들만 있습니다. 이제는 반일이 아니라 극일을 위해서도 이런 정확한 역사적 인식을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애초에 극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일본인과 유사합니다.
언어의 어순도 비슷하죠
따라서 한국과 일본은 무지몽매한 권력자들로 인해
역사적, 국토적, 정치적 합병 통일의 노력을 서로 하지 않을 뿐입니다.
일본 땅이 정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된다면 뭐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한반도로 건너오기도 하겠지만요
😮
조선의 문제점은 유교 였는데 삼년상 치르는것이 효자의 상징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문중의 선산이나 조상의 묘들이 마을 근처에 수많은 묘지
들이 있었으며 인구는 늘어나는데 묘지를 할땅이 없었겠죠 철도나 국도를 만드는데 수많은 산을 지나가야 하며 가급적이면 산세를 봐서 직선
이나 터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제시대 신작로(지금의 국도)를 만드는데도 문중의 묘지나 어떤이들의 조상묘가 있는산을 지나가야 해서 이장
이나 팔아라고 하면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조선 같았으면 그런 반대를 극복하기 불가능했을것입니다 유교사상 때문에 ... 일제가 강제하여 국도
도 뚫고 묘지들이 있는 산의 터널도 뚫고 했지만 수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경찰이나 헌병을 앞세워 밀어부친 강제성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항일 운동사만 배우고, 북한 애들은 김일성 얘기만 듣고... 맹목이였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것은 동학반란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왕조창립이고 실패하면 반란이고 역적들 입니다
홍경래의 난도 먹고살기 힘들고 핍박받아서 일어난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과 동학난이 무엇이 다릅니까? 전라도가 하면 무조건 민주화고 운동입니까? 동학반란
때문에 텐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평양에서 전투를 벌여 청군이패하고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결과 일본군이 조
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서해바다에서도 태안부근에서 해전을 벌여 독일에서 구입한 현대식 청나라 전함들이 박살나서 침몰했죠 전함만 거대했지 포탄도 제대로
없었으니까요 .. 그때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보병 3천명중 1500명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고 동학난 진압당시 고종의 관군3천명과 일본군200명이 우금치(공주시
부근)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잔당들도 소탕이 되었다 그로인해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조선의 국가예산 3년치 이상의
부채로 조선은 어짜피 망해서 쓰러질정도였고 병사들 급여도 못줄정도 였는데 한양주둔 일본군을 앞세워 압박하니 조선왕조의 고종과 순종 및 고관대작들 모조
리 한일합방에 도장을 찍었으며 왕족들은 무슨왕 이런식 허울뿐인 왕의 칭호를 받고 일본왕족들과 결혼을 하였으며 고관대작과 민씨들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같
은 서양식 귀족칭호를 받고 귀족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갔다
항일운동은 곧, 공산화운동 입니다. 물론, 이승만계를 빼곤 말입니다. 김구의 테러형태의 운동과 초대임정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외교형태의 운동으로 나뉘는데 역시 이승만의 노력으로 패전의 전쟁배상문제에서 한반도가 일본에서 분리하여 정산하게 되었다죠? 남북으로 나뉜 슬픈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말입니다.
항일운동이 없었다면 지금 한국은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왕을 태양으로 떠받들고, 일본국민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런 삶을 동경하시나요?
@@intelamd3076조선노예나 중공노예보단 낫겠죠
@@intelamd3076일본인들도 일왕을 태양으로 모시진 않습나다. 그냥 구시대적인 상징일뿐.
왜 흥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감정적으로 일본 생각해봐야 좋을거 없고 우리가 손해입니다.
일본은 반일 감정이 커지기를 바라고 ,
과학 특히 순수 과학 분야에서는 여전히 일본보다 뒤쳐지는게 사실이니까요.
전국민의 10%만 인간답게 산 말 그대로 헬조선시대....
조선시대 개처럼 노예로 살던
70% 이상이 일제시대 때는
노예신분으로 부터 해방 되어 노력한 만큼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게 일본이잖아.. 마비키, 츠지기리...
@@solla3130 ㅋㅋ 옳고 그름 좋다 나쁘다를 구분못하는 너의 뇌는 정말 장식용인듯.. 쓸모가 없다.
모두의 인권이 바닥이면 근대화라는게 일어날수가 없다. 그게 조선과 일본의 차이야
@@만슈타인-o3k 그게 일본이잖아 ㅇㅇ 가라유키상, 위안부 노예제, 츠지기리, 마비키가 근대화된 모습이냐? ㅋㅋㅋㅋㅋㅋ 일제가 근대화면 북한은 초근대화겠네 ㅋㅋㅋ
@@solla3130 초딩인갑다.ㅋ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진실을 알리는 영상이 많아져야 한다.
듣고싶은 이야기가 진실이었으면 하는 마음.. ㅋㅋ 이해하지..
이 프로는 귀중한 자료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일제시대를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국적타령하던데, 중국에있던 독립운동가 대다수가 중국국적이었던건 말안하지..
아마 중국국적 갈아타고 하는일 없이 용돈받다가, 어디 가선 뭔 운동하던 척 하던 양아치 용역들 많았을 것이요.
@@부장-o2l 미국살면서 좌익방송하고 계죄 걸어놓는 그런거?
이승만 미국 국적인데 미국인에게 한국을 갖다바친겨? 뭔 논리가 강점기의 특수성을 감안하지않고 들이대는듯....
@@daumdaume 이승만은 오랜 시간 미국에서 활동했지만 단 한 번도 미국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없습니다.
알고 떠드시길.
@@daumdaume미국국적인데 대한민국 대통령을 한겨? ㅋㅋ
팩트로 이야기하니까 너무 좋습니다
예전 한국사 능력검정시험 1급 취득해 본 저로서도
지금의 학교 국사교육은 전면 개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익 합니다
조선왕조를 버린게 아니라 왕부터가 일본 왕실에 돈받으면서 생활하는데 누가 버린거여 ㅋㅋㅋ
@@pranzbonaparto601 일본정부한테 돈받은겁니다 일본황실다음가는 큰돈받고 조선내 재산수익까지 합치면 일본황실보다 더큰 수익이있었죠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중에 상놈은 거의 없습니다. 양반들의 학대에 눌려살던 사람들이 과연 우리나라라는 생각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현실은 의병운동주도하던사람이 대부분 노비였음
이건 비약이구요...3.1운동은 개 좆이 아닙니다 선생님.....
@@puckyoun가스라이팅. 세뇌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조선의 문제점은 유교 였는데 삼년상 치르는것이 효자의 상징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문중의 선산이나 조상의 묘들이 마을 근처에 수많은 묘지
들이 있었으며 인구는 늘어나는데 묘지를 할땅이 없었겠죠 철도나 국도를 만드는데 수많은 산을 지나가야 하며 가급적이면 산세를 봐서 직선
이나 터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제시대 신작로(지금의 국도)를 만드는데도 문중의 묘지나 어떤이들의 조상묘가 있는산을 지나가야 해서 이장
이나 팔아라고 하면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조선 같았으면 그런 반대를 극복하기 불가능했을것입니다 유교사상 때문에 ... 일제가 강제하여 국도
도 뚫고 묘지들이 있는 산의 터널도 뚫고 했지만 수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경찰이나 헌병을 앞세워 밀어부친 강제성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불편하고 자존심 상해도 진실된 역사를 바로 알고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 진실을 외면하면 또 같은 역사를 되풀이 한다.
역사는 있는 사실 그대로 보면 됩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명암이 있겠지요 그러나 한가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직접 조선과 일제시대를 경험 하셨던 평범한 분들의 이야기는 일제시대가 좋았다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조선후기와 대한제국1897년도 가혹한 수탈과 관리들에 탐학을 받으며 사느니 일본에 지배받는게 뭐로 보나 일반 절대 대중은 유리하죠.
일본과 재통일해야함 어마어마 해질겁니다
일본 아니었어도 어딘가에게 먹히고도 남았을.....우리의 위대하신 500년 조상들 ㅋㅋ
명나라 청나라에 수백년간 간 쓸개 다빼주고 살았는데뭘 ㅋㅋ
독도는 일본땅😊
당신 같은 뇌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면 그랬을 것입니다. 한 왕조가 500년을 지속한다는 것이 쉬운 것 같아요? 전세계를 통틀어 로마제국 외에는 거의 유일한 것입니다. 신라 거의 천년, 고려 오백년, 조선 오백년.. 그 오랜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국가체계가 견고했다는 걸 말합니다. 그런 위대한 민족의 후손이었다게 부끄럽다니 .. 기가 막힌다.
@@소토교회찬란했던 전성기를 누린것도 아니고 500년을 빌어먹고 산게 자랑인가?
@@소토교회 500년 왕조. 이어온게 우리나라뿐이라고요?ㅋㅋㅋ 유럽이랑 고대국가들에 대해선 안배우셨나봐요ㅋㅋㅋ 여기서부터 걸러야할 님은 아웃ㅋㅋㅋㅋㅋㅋ그리고 지금 지도가 완성되어서 그렇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로 나눠져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태조왕건이 전범자임 ㅋ똑같이 전쟁해서 삼국시대 각나라들 멸망시키고 새 국가세운건데?ㅋㅋ그리고 역사적으로 몽골제국시대 및 청.명나라 근대까지 짱개몽골 북방민족에게 수탈당하고 어린애들 부녀자까지 공물바쳐가며 더크게 희생되고 그냥 솔직히 조선이란 이름만 쓰게해줬을뿐 중국속국으로 살은거나 마찬가지였음. 황제칭호도 못쓰고 사람이며 식량이며 왕자까지 바쳐가며 중국에 빼앗기고산게 오랜세월동안?국민들 피해가 훨씬큰데 ㅋㅋㅋㅋㅋ 병자호란은 모르고 임진왜란만 아는 무식한 티 팍팍내는 사람 여기또있네ㅋㅋㅋㅋ
1931년에 지방 선거가 있어서 조선인이 80%가 당선 되었다는 데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되나?
일본 식민지 근대화 이론을 좀 알고 싶다 .귀중한 자료 돌려 가면서 잘 시청 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이 전세계에 식민지 만들고 다닐때도 현지인을 이용해 지배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홍콩선거가 평등하다고 생각하니?
충추원 참의를 매 임기마다 누가했냐? 장난하니? 아니 반론으로 해도 이치와 맥이 닿게 해야 하는데, 매번 이런 식이니?나도
@@Allin7days유럽이랑 일제시대랑 같냐?? 우린식민지가 아니라 아에 합방한거야..그냥 우리가 일본인이 된거라고 그래서 철도놓고 교육시키고 감염병예방하고 전근대시대에서 근대국가로 된거라고..우리 스스로 못한건 아쉽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이제 밥먹고 제대로 재판도받고 국민이 된거야
양반 지배계층이 20%정도일텐데 나머지 80퍼센트는 어떤삶을 살았을까?? 교육도 못받고 그냥 이렇게 밥주면 먹고 농사지어도 다 세금이고 맨날 군대로 끌려가도 ...오죽 세금때문에 죽을것 같으면 스스로 노비신세가 되었을까??
자국민을 노비로 만든국가가 그당시 얼마나 있었을지 생각좀
@@순종맨 정말 맞다. 내가 만약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통계적으로 80%로 양민이나 노예일 듯... 난 이씨조선 경멸한다. 왕족만을 위한 나라가 조선이다. 사대부들이 왕을 찬양하는 시구들을 봐라. 지금의 북한과 비슷하다. 군주제는 절대 절대 반대한다.
식민지도 맞고 근대화도 맞음
일본덕에 많이 발전함
자랑도 비난도 할거없음
자신이 못난탓
맞지.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최고지,
이게맞지 원래 노예로 사람취급조차 못받고 사라질 사람들이 진짜 인간처럼 살게 만들어줬는데 그저 일본은 악이라고 우기는 작자들이 우글우글 댄다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일제의 강제가 없었다면 조선말기 당시 그많았던 무당들에 의해 백성들이 속아서 미신을 숭배했던 것을 쉽게 해결하기 어려웠을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아니라면 ... 공산주의는 종교를 부정합니다 중국이나 북한에선 아직도 종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조선말기 당시 수많은 사이비
종교와 무속인들이 난립했던 사실은 극히 일부에만 기록되고 있습니다
조선의 문제점은 유교 였는데 삼년상 치르는것이 효자의 상징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문중의 선산이나 조상의 묘들이 마을 근처에 수많은 묘지
들이 있었으며 인구는 늘어나는데 묘지를 할땅이 없었겠죠 철도나 국도를 만드는데 수많은 산을 지나가야 하며 가급적이면 산세를 봐서 직선
이나 터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제시대 신작로(지금의 국도)를 만드는데도 문중의 묘지나 어떤이들의 조상묘가 있는산을 지나가야 해서 이장
이나 팔아라고 하면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조선 같았으면 그런 반대를 극복하기 불가능했을것입니다 유교사상 때문에 ... 일제가 강제하여 국도
도 뚫고 묘지들이 있는 산의 터널도 뚫고 했지만 수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경찰이나 헌병을 앞세워 밀어부친 강제성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조선후기 배고프고 가난한것도 서러운데 곡식 빌리려고 관청에 가면 모래를 섞어서 내줬던게 당시 쓰레기ㅈ같앴던 벼슬아치 였습니다. 저렇게 부패했으니 나라가 안망하면 그게 이상한거죠. 일본 미워할것도 없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 아니었어도 누군가한테 나라 뺏겼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 식민지 됐으면?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들 도 비슷한 소리 했씀. 조선에선 누가 돈좀 벌었다고 하면, 탐관오리들이 붙잡아 가서 어거지 죄 뒤집어 씌우고, 재산 뺐고 풀어줬다고. 그래서 조선인들 아무도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는다고.
애초에 나라를 뺏겼다는 표현도 이상한거임
조선인들은 나라를 가져본적이 없는데 어떻게 뺏김ㅋㅋ 나라는 고종과 그들 세력의 것이었고 그 고종이 직접 일본에 나라를 넘겨준거기 때문에 나라를 뺏겼었다는 말은 일본에게 할게 아니라 고종에게 하는게 맞음ㅋㅋㅋㅋ
@@davidjacobs8558
여자들은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했고
가축만도 못했다고 하던데요
조선인이 아니라 남자라고 하시오
일해봐야 다 수탈당하니까 안했다고 핑계를 대지만
조선남자들은 본래 일을 안했습니다
집안에서
여자를 노예처럼 부려먹고 수탈했던게 조선 남자들
외국인이 와서 보고 조선남자의 야만성에 치를 떨었어요
@@davidjacobs8558전근대는 원래 그래 멍청아 당장 유대은행에서 돈 빌리고 유대인 줘 패는게 유럽의 전통이었다. 사유재산권 보장이 법에 박힌건 프랑스 대혁명 이후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을 식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다 사회모순으로 뒤져가는 국가가 어떻게 식민지를 만드는데ㅋㅋㅋㅋㅋ 진짜 재미있는 농담이었다ㅋㅋㅋ
대부분의 우리가 부르는 의병이 양반사회를 지키기 위한 양반들의 저항이었다는 불편한 진실.
쌍놈은 일제를 찬양하고 독립운동을 반대했나 보군? 일제를 미화하는 인간들은 천민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군....
그와중에 평민의병장 나타나서 자기들보다 날라다니니까 양반가오잡는다고 개무시하고 텃세부렸죠
독립운동가의 98%가 일제에게 기득권을 뺏긴 양반출신이었다는거..그 대표적 인물이 안중근으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양반토벌대 대장으로 동학농민을 학살하고,갑오개혁의 주역인 조선계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지요
우리아버지도 일본욕 안하더라 살기좋았데 김일성을 욕함 아버지가 1923년생 평양 출신 할아버지말로는 조선시대보다 훨씬 좋았다함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함에 있어서 긍적적인 부분은, 일본이 거의 300년동안 서양과 교류/무역을 하면서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해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고, 그 성공을 바탕으로,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었으니, 조선을 일본 본토와 비슷한 수준으로 근대화를 빨리 시켜야 하기에 투자를 많이 해서 일본이 300년 걸린 것을 조선에서는 거의 30년만에 메이지 유신의 반 정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에서도 이익의 충돌로 사회적 갈등이 있는 것처럼, 식민지하에서 근대화 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는데, 반대의 측면에서는 또 일본이 한 나쁜 일을 말 할수도 있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 역사시간에는 일본이 잘 한 것은 전혀 얘기하지를 않고 나쁜 것만 과장해서 한다는 것이 문제지요. 아베가 얘기한 것처럼 일본의 식민지배가 나쁜 것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라는 것과 동시에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에 뿌리 및 체계를 마련한 것은 분명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히 봤습니다… 생각해보지 않았던 자료이네요…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인정되는 사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진실앞에 두려움없이 설 줄 알아야 나라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진실들을 무조건 거부하는것이 아닌 사실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는 너무 감성팔이로 사실들을 숨기고 있는게 너무 많아요. 지배되면서 안좋은 점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한국의 모든 사람들가질 수 있는 기회와 자본사회와 발전할 수 있는 배경이 만들어 졌다는 것들도 다 사실이니.
팩트를 말하면 분노하는 세력이 있어요. 조심하세요.
😂좌익도 우익도 아닙니다
분노보다는 그냥 웃깁니다... 이런 거지같은 내용에 동조하는 친일것들이 이땅에 북한 간첩만큼 많다는 사실에요...,
이미 최근댓글 보면 논리적으로 반박은 못하고 무작정 아니라고 우기기만 하는 애들 널렸음 ㅋㅋㅋㅋㅋ
真実を知ると発狂してしまう人もいる
@@치이카와친구토끼 이거 자체가 논리가 없는 친일역적 토착왜구들의 주장이고 조작인데 뭘? 이 무뇌충아
진짜 너무 좋은영상이다. 일제강점기에 인구가 1700만에서 2500만으로 늘었네 50프로가 늘은거임. 수탈당해서 죽겠는데 30년만에 인구가 50프로 증가한다? 30년이면 한세대밖에 안된다. 사람이 살만해진거고 출산율이 엄청나게 올라간거임
증가율이 연 1.5%정도인데 폭발적이라고 하는건 너무 심한 과장 아니오~
정신차려 등쉬나!! 토왜놈이 만든 영상에 부하내동하는 꼬라지라니~! ㅉㅉㅉ
@@jrjin9442 증가율이 연1.5%라는걸 지금 인구로 환산하면 한해에 인구가 75만명 느는거임. 10년 좀 더 지나면 인구가 5천만에서 6천만이 되는거임. 이게 엄청난게 아니면 뭐임?
그러면 왜 지금 출산율이 낮아요? 😂😂😂 출산율은 못사는 나라일수록 높아요~ 공부좀하시길...
@@QWER-wv5kn 잘살고 못살고 그 얘기하는게 아님. 이건 좌파 역사학자들이 일제강점기 기간 동안 조선인 6백만명이 학살당했니뭐니 하는 말이 개구라라는걸 증명하는거임.
영상제작자랑 영상 찬양하는 댓글 쓴 사람들은 무단통치 시절로 돌아가서 자랑스러운 대일본제국 헌병의 태형찜질 한번 좍~받으면서 기쁜마음으로 천황에게 근대화에 대한 찬미노래 불러봐요~~☺️
제 생각에 역설적 이게도 일제시대, 6.25 아니었으면 우리나라는 인도 카스트제도와 유사한 양반 상놈 유사한 계급사회가 이어졌을거라 생각합니다…불편하더라도 이렇게 팩트로 얘기를
해야함 역사는 감성이 아닌 이성적 팩트 로 접근해야합니다..
조선왕조 시대에 수탈과 학정에 시달리다, 나라는 뺏았겼지만 근대 문명에 기반한 지배를 받다 보니까 일반 민중들은 오히려 살기가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고로 나라를 빼앗긴 잘못은 신문명을 받아들인 개혁을 하지 않고 부국 강병을 하지 않았으며 외교에서도 실수를 연발한 조선왕조와 민비 등 외척들의 잘못이 크다.
일제 새로운 진실의 역사를 조금식 알게되어 갑니다. 좌파성향에 외곡된 역사를 빨리 정상적인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내용 너무 좋다.
일제시대 잘 살았음! 이게 진실~
잘 살았다라. 시게사와 게이조 등이 농촌 등 조사시키며 3년 조사의 자료에 영상 남긴 것 등이 다 있는데? 왜 진실 타령 하면서 정작 증거자료들로 진실 말하면 다들 대답을 못할까? 조선총독부 및 제국의회, 도쿄의대생 등의 자료로 얘기하면 일제시대 잘 산게 진실이라 선동질하던 사람들 아무도 대답 못하더라. 이 영상 제작자도 답변 못피하고 동문서답 하며 대답회피하더라.
이 내용들에 대해 사회적 논의와 토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정말 불편했던 역사네요.
그래도, 젊은시절 의문이 들었던 몇가지가 해결되었어요.
우리나라 역사는 의문 투성이죠. 결론을 위한 역사
수방공사, 수리공사, 금융조합 등 해서 농민이 대출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게 일정 땅 이상 가진 지주들에게만 한정됐다는 것은 영상에서 빼버린 설명임. 1930년대 후반이면 이미 73%가 소작농인게 확인이 될 정도로 자영농들이 대거 몰락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데 이게 수리조합 때 대지주들에 의해 중소지주나 자영농들이 몰락한 원인임. 수리조합 비용을 관개시설을 이미 갖추거나 갖출 수도 없는 지역까지 편입시켜서 중소지주와 자영농들에게 떠넘겨서 이들이 망해버리게 만들고. 농민은 저렴한 금리로 대출을 받아서 조선인 농민에게 막대한 이익을 준다의 실상은 [대지주가 자영농들 몰락시켜서 소작농으로 만들어서 착취한다. 대지주들만 이득 본다.] 임. 대체 영상의 이 왜곡은 참...안그래도 일제강점기 때 사정이 나빠졌던 조선 농민들을 지옥으로 만들고, 자영농들을 대거 몰락시킨 결정타급 사건인데. 조선 농민들이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경험하고 대지주들만 이득을 보면서 대지주와 조선총독부의 이해관계 중심으로 진행됐는데.
그런 구조는 본토도 똑같다 그땐 세계적으로 그런 시대였으니까 성장의 과실인 복지란게 등장한게 60년대부터임
지금 나라 꼬라지 보면 가만히 나둬도 근대화 되었다는 거는 불가능일듯...
절대 불가능함
1 도로정비안함
2 상공업발달불가능
3 책 양산못함 - 문맹율 높음
4 민간이 돈이 많은것도 아님. 그와중에 왕실은 국고 탕진함.
5 돈이 없는데 어떻게 도로를 정비하고 상공업이 발달하며 잉여생산물이 나오고 어디에 내다 팔겠음
성리학 때문에 불가능 그냥 북한 되는거
@@user-google-noodle-idle 딱 북괴보면 알 수 있죠. 도로가 조선때와 거의 같다고 함. 위성자료보면 병자호란 침투로가 고스란히 존재해서 사료로 좋다고 함.
@@youngwookkim2630 일제시대에 도로를 엄청나게 정비했다더니 갑자기 조선시대랑 차이가 없다는 모순
@@KGJ-user 일제시대때의 도로정비는 도시내 엉망진창이었던 도로를 도시계획으로 정비하고 하수도시설이 없었던 조선시대에 하수도 깔아서 오물을 위생적으로 처리하게 한거임. 도시간, 대외적 도로는 철도망 중심으로 설치하였음. 교통수단이 자동차가 아니었던 시대였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되지. 일본 본토에서도 도시간 연결도로는 포장된게 별로 없었음. 지금도 그래서 도로는 고속도로 같은 도로법상 도로와 도시내 도시기본계획상 도로로 구분되는데 이게 일제시대때 세워진 체계임. 어떻게든 까내리고 싶어서 환장하신거 이해는 하는데 그런 소리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만 들음.
자기 눈뜨겠다고 공양미 삼백석에 딸을 파는게 동화로 쓰인게 조선임.... 위안부가 어떻게 갔을지 뻔함...
와 맞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각해보니깐 딱 이 내용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지금 생각해보니 소름돋네
지멋대로해석하넼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위안부들이 들고일어났냐?
@@puckyoun위안부 이전에 위안부에 팔려가는 자기 딸 붙잡느라 군인이랑 맞짱떴다는 무용담 얘기는 왜 하나도없노? 저 동화랑 진짜 얼추 맞는거 같은데 ㅋㅋㅋㅋㅋㅋ
틀렸습니다. 심청이는 스스로 자신을 판 겁니다. 심봉사는 공양으로 눈을 뜰 수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심청은 수양딸이 되는 조건으로 자진해서 간 거라며 구라쳤습니다. 공양미 삼백석에 딸을 판 게 아니죠. 심봉사는 복받았다며 축하해주면서도 딸 걱정에 식음을 전폐했음.
일반 백성들에게 조선 왕조가 더 좋았을까 일본 제국이 더 좋았을까를 생각해보면 답은 확실하다.
북한이 조선보다는 100배 이상 발전한 사회다.
다만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1000배 이상 발전해서 북한이 병신 소리 듣고 사는 것 뿐.
조선왕조가 매관매직하고 자국민들 노예살이 시킨 역사기록은 끝까지 부정하더만 근대화 반대한것도 노예들 지들처럼 계급 높아지는거 싫어서 반대한거고
@@Ires-643 현실은 도시에사는 친일파들만 좋다떠들지
일반서민들은 일본어안배우면 양반네노비마냥 두들겨패고 그릇안내놓는다고 감방보내서죽여댔음ㅋㅋㅋㅋㅋㅋ
뉴라이트가 그리떠들던?
국가 시스템이 문제가 있었지요 그걸 모르는 국민이 문제였습니다 스스로 성장하지 않았기에 강제합병된 것이고 무엇보다 타국을 침략한 일본의 잘못이 있습니다
@@산들바람-n9h-o9x조선왕조보다 더한 북한김씨왕조도 외부세력 개입 안하면 언제까지 북한주민들 우물안 개구리로 세뇌되어 노예로.
강력한 태풍이 위험하지만 그것이 바다를 정화.수백년 겹겹히 쌓은 기득권 조선왕조도 외부세력 개입 없었다면 자체적 내부 혁명으로 혁신되었을지?
비단 일본 아니라 러시아 등 외부세력 없이는 최소 수십년 더 조선왕조 갔을듯,
조선시대 백정은 아예 사람취급 아니었고.일본침략 두둔하는것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변화 가능했을지?
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청나라도 건륭제 이후 막장,전족 등 (고인물은 썩는다) 영국(서구세력) 침략으로 그나마 억지로 근대화,우산혁명 서구식 근대화 맛본 홍콩인들 같은 민족 중국 복속 원할까요?
역사는 감정을 섞지말고, 냉정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일제 시대가 옳았다는거냐?. 일본에 감사하라는거냐?며 몰아가는 능지가 처참한 자들이 많습니다, 아니 누가 일제의 지배가 합당하다했나.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거다. 왜 조선이 망했나?. 망국의 역사도 제대로 가르쳐야 반복을 안할텐데, 그런 교육은 전혀 안했으니 다시 반복되려는거다. 일본의 침략이 정당했다의 논쟁과 그 당시 일제시대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완전 별개의 문제이다. 같은 문제로 끌고 들어가는게 저들의 수법
맞지요...일본이 조선을 근대화 시켜서 좋았다라고 할 거면...우리는 이순신을 엄청 미워해야 한다. 이순신만 없었으면 조선은 벌써 멸망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모두 먹었겠지...그러면 우리는 일본왕을 섬기고 일본처럼 빨리 개항해서 근대화를 더욱 더 빠르게 이룩했을 텐데....따라서 이순신을 천하의 역적으로 봐야 한다....이런 논리네요..
요즘애들은 친일파가많아보여, 큰일이다,나라가위험해,일본인들의속성을잘모르고겉만보고판단하니---
해방후 지나는 80년간 역대 정권이나 국뽕들의 악은 정권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교육계와 협력하고 일제 시대 99% 국가 이익이 있어도 1%의 불이익을 열심히 찾고 과장하고, 일본을 악마화시키고 100% 무시하고, 국민 대다수가 우리나라가 어떻게 근대화했는지 객관적인 역사 인식을 가지는 기회를 방해한 것.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객관적인 역사인식과 끊임없는 되물음이 중요한것 같습니다
일본이 조선에게 잘 해줬으면.. 그래도 독립운동이 필요 했을까요? 기득권들이 35년간 조선인 착취하고 일본으로 돌아 가는데 ㅋ
@@빨강-w6i
그것 해방후 만든 가짜 국사이구나.
국민 대다수는 노비이며, 애국심이나 민족 의식 등 전혀 없고, 계속 24시 양반에게 착취되었다.그니까 일제에 의한 신분 제도 철폐는 모두 환영했다.만세 운동의 중심은 기득권을 잃은 양반들의 폭동이다.😂
@@빨강-w6i독립운동의결과는?
팩트! 일제가 패망하자 조선인들중에 슬퍼서 할복한 사람들은 단 한명도 없었고 전부 태극기 흔들면서 기뻐했다 ㅇㅇ
실제로 일제시대 살아본 할머니 할아버지 얘기 들어본사람들은 대충 알고있음. 일제시대에 일본이 조선사람을 노예부리듯이 부린게 아니란걸. 그냥 식민지 국민으로 취급했을뿐 일상생활은 현재와 크게 다른게 없었다고 함.
625도 재조명해야합니다. 인민군은 실제로 인민을 해방하러 와서 식량 나눠주고 키우던 소는 돈주고 사갔는데... 미군은 사람만 보이면 빨갱이와 구분 안간다는 이유로 학살하고 쌀이며 소 돼지며 그냥 뻇어가고 여자는 강간.... 절은 모조리 불태우고.
이거ㄹㅇ임 우리 할아버지 일제강점기 겪으셨는데 대학도 다니심
그사람이 강제징집,강제위안부,강제징용,전사하고병신됐다면 그소리할까요?
@@권상균-e8v 영상 안봤나요? 강제징집 강제 없었다잖아요.
@@권상균-e8v 강제징용 호소인 ㅋㅋㅋㅋㅋ 애초에 강제징용이면 멀쩡히 잘살고있던사람 갑자기 납치해서 끌고가면 강제징용이 맞지 근데 이건 인력공고문 보고 갔는데 거기서 뒤지게 고생한거잖아. 우리는 이런걸보고 취업사기로하지 강제징용이라고는안함. 차라리 신안 염전이 강제징용에 가깝지.
역사교육 감사합니다. 일본을 다시보게하는 역사네요
썩어 빠진 조선 말기 의 상황으로 볼 때 우리 스스로의 근대화는 불가능 했으리라 본다. 일제에 의한 근대화가 자존심 상하나 나름 긍정적인 효과도 사실 이지만 빼앗긴 것도 많으니 고마울 것도 없다 지금 부터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속히 일본을 앞질러 우리의 우월함을 보여주자. 뭐 벌써 상당 부분은 추월했지만.
우리 할아버지도 당시 일본인들이 예의도 바르고 조선인들을 극진히 예우했다고 했다. 조선시대보다 훨씬 사람대우를받고 잘살게되었다고 했다.
일본인이 종자가 다른게 아니라 이미 선진국가 였기 때문에 에티켓과 매너에 대해 자연스러웠을 것이라 봅니다
유투브의. 순기능❤
감사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용기에.
자국민의 70%가 노예였던 그지같은 조선시대를 해방하고 오히려 자유를 되찾아 국민들이 더 살기 좋았다고들었다. 거짓된역사를 배우고 자라서 할머니께서 해주시던 일제시대 이야기를 믿지못했었다.
사실상 식민통치의 수혜를 다 받아쳐먹고도(청진제철소, 송림제철소, 흥남질소비료공장, 각종 수력발전소 등) 개같이 말아쳐먹은 김일성의 영도력은 진짜 레전드다...
교과서고 나발이고 당시 10대, 20대 시절을 보낸 우리 외할머니는 일본을 무척 그리워해서 해외여행 자유화 되기전 늘 일본에 가고 싶어했다.
집에 돌아와봐야 농사일이나 돕고 조선식 문화로 사람갈구는 것밖에 없는데 그나마 학교 생활이라도 즐겁게 한것 같았다.
창씨개명도 했었다. 그것 이상한것 아냐. 요즘 미국 유학 가고, 거기서 눌러사는것과 전혀 다를바 없다.
우리 외할머니 태어날때 어차피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고, 일본정부를 우리의 정부라고 부르고 있던 시절이고
일본은 선진국이니까 당연히 선택할수 있는거다. 민족주의라는건 양반들이 뒤늦게 자기들 기득권 되찾기 위해 내세운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지.
대부분 사람에게는 좆선은 회복될 이유가 없는 나라였다.
오늘날 미국 생활한 사람들도 어차피 적화통일되면 미제 승냥이의 앞잡이라고 욕쳐먹을 것이다. 즉, 일제가 전쟁에 져서 무너졌으니 모든게 악마화 되었을 뿐이다.
한글 학자들의 스승이 일본인이라는걸 알면 얼마나 불편할까 ㅋㅋㅋㅋㅋㅋㅋ
교과서나 용선생 한국사 같은데서 식민통치와 독립운동만 나온 것도 아니고 근대 문물의 도입과 생활상 변화 등이 나오지만 결국 조선인이 편하라고 만든 것도 아니고 가난에 고통받은 사람도 많았다고 나온 것 같네요.
공공 위생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쓰레기면
평균 수명이 24세 ㅋㅋㅋㅋ
난세는 영웅을 부른다, 용감한 젊은이가 진실을 이야기하니 이게 국가의 치부라 부끄러운가? 이것이 진짜 용기임을 선포한다!
17:25 보통학교용 속담 문제자법을 작성하고
"보통학교용 속담 문제자법"이 뭔지를 모르겠어서... 그냥 한글 맞춤법으로 검색하니까,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普通學校用 諺文綴字法)를 만들었다고 나옵니다.
17:32 신정서법인 속담 문제자법을 작성하고
여기에서도 또 "속담 문제자법"이 나오는데, 1930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다시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통학교는 공장같은 거예요. 그리고 조선은 일제가 침입하기전에 이미 1890년대부터 1900년 서양의 선교사들로 인해 서민들을 위한 병원이나 학교 한글로 된 성경책 보급 등 근대화 개혁이 시작될 찰라였는데 일제에 의해 문화 말살당하고 약탈당하고 망한거지
대한제국 한글과 다릅니다. 지금 한글은 일제시대 조선어 입니다. 일본인 자식들이 만든 조선어학회
@@빨강-w6i // 조선어학회는 조선인들이 만든 단체입니다만... ^^a
에혀..어디서 좌빨들이 할 법한 말들을 듣고 와선..ㅉ@@빨강-w6i
역사는 팩트입니다
감성. 민족 주의 가 아닙니다
저시절에 토지개혁으로
소작농 들도. 자기땅 을. 가졌고
일제시대. 본인. 이름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만았다
ㅇ
정말 좋은 영상입니다.
이영훈 교수님도 이런 생각으로 자세하게 연구해서 책을 쓰셨지만 결국 식민사관이라고 매도되고 그 책들은 읽지 말아야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학문에 성역은 없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근현대사는 조금만 파보면 진짜 소설 그 자체입니다.
심지어 안중근가 같은 인물도 실체가 있는지도 불분명하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김구는 김일성에게 대한민국을 넘기려고 했는데도 국부라고 칭송 받고
정작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했던 이승만은 런승만이라며 매도하는게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귀중한 영상 잘봤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영상이 많아지고 갑론을박이 허용되는 분위기로 가야 정상적인 국가가 됩니다.
우리 시엄니의 부모님은 진도 거상댁이셨는데요…남편이 지병으로 돌아가시자, 많은 조선 거래처 사람들 입 싹닦고 거짓말하며대금 치르지 않음. 하지만 일본사람들 장부에 있는대로 거래대금 다 치루더래요.그래서 울시댁분들 전라도우파신데 일본인 칭찬함. 정직하다고.
그래서 한국을 소중국이라고 하는겁니다. 도처에 깔린 cctv들이 그나마 사람 만들어놓은거지 애초에 인성은 중국인과 다를 바가 없죠😅
일반화 하긴 어렵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그들은 1000원 10000원에 인색할 필요가 없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동남아 가면서 1000원 정도는 그냥 쓰잖아요. 그대신 그들은 우리 목숨을 쉬이 여겼음을 여러 역사 사료로 알 수 있죠. 한국인의 목숨도 10000원짜리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인이 신뢰가 있다는건 기업인 오너 전체가 대국민사죄하는 걸 보면 그 신뢰도 모래알 같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가족의 재산을 지켜준 사람이 일본인이니 그냥 신뢰가 갈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
@@TV-jr3rh 뭐래니? 그냥 일본인들 대체로 정직한 사람들이라고요.거상 몰라요? 거상이었다고요. 그시절 부자여서 자식들 이대숙대, 카톨릭 의대보내심. 푼돈 얼마에 고마워서 굽신거린게 안니라 오랜 경험에서 나온 살아있는 증언이란 이말입니다
@@user-dj6wr6we4z그래서 도요다는 정직하게 충돌테스트를 조작합니다❤
@@kalita504맞아요 일본분들은 정직하게 일본인과 백인한테 받는 가격과 다르게 1.∆배 더 받아주시죠❤ 역시 바른 성품의 잽스❤
감사합니다 잘배웠습니다 🎉 한일대만간 재통일해 중공 군사팽창 제국주의를 쳐부수고 후손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를 물려줍시다
좋은자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노비로 살거나 사실상 노비로 살다가 근대화된 법치국가에서 일한만큼 먹고살게 됐다
조선시대에 노비로 살거나, 일제시대에 양반출신 친일파집에서 소작농(농노)으로 살거나 무슨 차이가 있음?
@@KGJ-user 당신 증조부모도 친일파가 안일수없지 왜냐구? 여기가 일본이였구 일본학교다니고 일본회사 다니고 일본철도 타고다니는데 친일이 아닌사람있나?
1925년 02월 15일 동아일보 기사
100여명 재일 조선인 인부
기한으로 참사자 속출
일본 하코네산 전차공사에 종사하던 노동을 마치니 수중에 한 푼 없고 갈 곳도 없어
시간이 갈수록 위험한 사선의 환자들
일본 하코네산으로 오르는 전차를 건설하는 공사에 종사하는 인부들은 최근 공사를 마치자 일본 인부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갔으나 남아 있는 100여명의 조선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 지난 1월부터 온천마을 등지로 방황하며 밤낮으로 울고 있는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다고 한다. 그 곳에 있자니 먹을 것이 없는데다 추위에 못 견딜 것이고 다른 곳으로 가자니 손에 돈 한 푼 없다보니 굶주림과 추위에 못 견디어 날마다 병들어 앓는 이가 늘어나 벌서 10여명은 병에 걸려 신음하지만 그들을 위하여 구호하여 줄 사람도 없어 그들의 운명은 갈수록 위험한 처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경상남도 출생의 김월룡(37)은 지난 10일 굶주림과 추위를 못 이기어 사망하였으나 그 시체조차 어떻게 수습할 도리가 없었다고 하며 환자는 날마다 늘어가는 중이라고 한다.(열전천전)
이런 기사 천지임
@@par_zar 조선인만 착취당한걸로 선동질하지 마라
다 똑같아
@@KGJ-user 소작이 뭔데 소작을 농노라 하냐?
지금은 소작농 없는줄 아니?
용기라는 말을해야 님의 영상에 감사하단 말씀드릴수있는 작금의현실이 애통합니다.
농장주, 경영주의 입장이 아닌 농장주, 근로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재 조명해 보시고 영상 만들어 주시면 고맙겠네요.
백성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이후에 보상이 있었나요? 조선의 근본적인 문제를 개혁하지 못한게 참 안타깝죠.
널리알려져야할 내용 입니다.
음.. 우리가 타인에게 이유없이 친절을 베풀거나 돈, 자금등을 제공하면 반드시 숨은 의도가 있을거라고 전제하거나 경계하는게 당연한 이치이고 이 진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면서, 이상하게 일본 식민지에 한해서는 이 당연한 이치도 의심하지 않고 일본이 우리를 근대화 시켜주었으니 고마워해야한다 논리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움..
물론 군부 이전 이토 히로부미처럼 신기하리만큼 대동아 이상론자가 있기는 해서 진짜 먼 미래를 내다보고 조선을 통합해 평화 공영을 만들 비전을 갖고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심지어 이 비전에 따르더라도 한국사람은 1.5~2등 시민이었을거임. 중국은 3,4등 시민) 결국에는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위한 초기 투자비용에 불과함.. 나중에 전쟁이 시작되자 법의 적용 없이 수탈이 진행된 방식과 그 양만 봐도 알 수 있음…
생각보다 조선이 낙후되어서 인프라 개발 비용이 많이 든 것 뿐이지 일본이 선의에 의해서 조선 사람을 계몽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선핸을 한건 아니라는거임.
일부 사람들은 그때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이좋았던 일부 사례를 꺼내기도 하는데.. 결국 다 같은 사람임. 남아공에서 철저한 인종 차별이 있었을 시절에도 백인과 흑인의 우정 사례가 있던것처럼, 선한 순경이 조선 종로구에만 해도 못해도 몇십명은 있었을거고 그들은 인도적 차원에서 조선 사람을 대했을 수 있음. 이런 일부 사례를 가지고 사실 식민통치가 조선을 위한것인마냥 포장하는 일반화 사례도 바보같은거임
님들아… 일본이 수탈과 대동아공영권 구축을 위한 초기 투자비용으로 조선을 개화시켰을 수 는 있는데 그걸 “불편한 진실”로 포장해서 마치 일본이 선행으로 우릴 도와준 것 마냥 호도해서는 안됨요
영상 자체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져서 사료들 끼워 맞추기네요 ㅋ 조선은 노예의 나라였다며 차라리 식민지 국민이 낫다는 노예 근성 가진 머저리들 다수도 재미있고
다들 뇌뺴고 살아서 그럼. 이런 유튜브보고 아 일제때가 정말 좋았구나 선동당하는 사람들은 조상 친척들 중에 대동아전쟁에서 고기방패로 뒤진 사람 몇명 있을 듯
@@par_zar 그쵸.. 일제에 의해서 절대적 생활 수준이 이전에 비해 개선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을 가지고 일제 시대를 찬양하는건 그야말로 일차원 단세포 저지능 정박아 내집단 사회부적응자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루는 본질은 그걸 교과서나 정식 역사 교육시간에서 배우냐고요.. 결국 일제시대 하 토지수탈이라는 것은 하나의 견해일 뿐인데 그걸 정설마냥 가르치고 있잖아. 의도가 뭐든 지금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건 저때 기반이 마련된 덕분인거임 특히 일본의 개입이 없었어도 알아서 발전했을거라는 이야기는 진짜 바보같다는 생각이다
@@이소영-q2u “우리가 농촌에서 보고 들은 것은 아무리 말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이 많다. 가난한 농민의 식량을 참고해 봐도 잡곡 한 홉에 풀뿌리나 나무 껍질을 끓여 먹는다. 봄에는 풀의 새싹을 겨울에는 나무의 뿌리를 채굴한다. 나무 껍질은 소나무 껍질, 아카시아 나무 껍질, 기타 모든 껍질을 잘게 찧거나 도토리 열매로 가루를 낸 후 물을 넣어 단자를 만들고, 소금을 쳐서 먹는다. 어느 지방에는 먹을 것이 전혀 없어서 고령토를 먹는 경우도 있다. 그 상태는 일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비참하고 진기한 현상이다.”
나가노 스에키(長野末喜)저술, 내외사정사(1932년 발간)
너무 좋은 영상입니다.
오래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신의주에서 장사하셨는데, 그때 제일 무서운거는 일본순사도 아니고 마적단도 아니고 독립군이었다고 한다. 모든걸 말그대로 싹쓸어갔다고 했다. 그들도 먹어야 싸울수 있었을테니까.
"오래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라고 인트로 끌꼬 말한다? = 구라다ㅋㅋㅋㅋㅋ
@@김호두-t1c 일부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료에 기록으로 남아있죠.
@@downhillermr9 일본군도 조선에 도움이된 소수의 사람이 있드시, 100명중 1%도 안되는 개인의 경험으로 일반화하는것은 무리가있습니다.
@@김호두-t1c어떤근거로 구라라는건데?
@@poetgwak 어떤 근거로 저걸 사실이라고 믿는건데?ㄲㅋㅋㅋㄲㄱㅋㅋㅋ
19세기 말 일본에서 발간된 여행서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부산까지 가는 데는 고작 15엔밖에 들지 않으며, 미국에 가는 비용으로 조선 노동자를 헐값에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자기 사업까지 벌일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자국민의 조선 이주를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일제강점기는 조선근대화시기입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이 미국에게 원자탄 맞은 것도 근대화 겠네요. 감사
@@빨강-w6i 일본이 미국의 지배 받는 국가였나요?
핵 맞은게 근대화라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거조
이 맥락과는 어울리지 않는데
본인 감정인가?
@@rishche7258 받아들일용기가 없는 보통 한국인의 발악으로도 보이지만.
나쁘게 보기보다는 무지한 이의 안타까운 혼란 정도로 보시는게 어떨까합니다.
그간 한국내 역사교육은 학교 교육을 넘어 드라마, 영화 등 온갖 매체에 의해 장기간 세뇌과정을 진행하여
심리적 반발이 없는것이 이상한 일이죠.
@@빨강-w6i 바본가
그니까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 근대이후는 분명히 가릴거 가리고 한쪽 입장(민족주의 사학)에서 서술된 역사인거지. 한국에서 서술된 한국사와 세계속에서 비춰진 한국사는 차이가 많더라구
이런 관점에서 역사를 돌아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그래야 더 건설적인 미래를 설계하지 않을까 저 자료는 일본 사료에 기반을 한점을 염두해 두고 우리 사료와 비교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 같다. 물론 졸라 억울한 일 많이 당했겠지 나라 잃은 국민들이라...
공평하게
바로알아
이념정치
속지말자
?? 역사에 공평이 어딧어.
바로아는데.. 이념정치.. 가 왜냐와.
속지말자가 아니라. 왜곡에 속지말자이지.
역사에 정치를 들이미는 순간부터.. 무식이 꽃을 핀다.
역사에 이념을 빼면 ㅋ 일본군이 왜 독립만세 하는 사람들을 빨강이 라며 쏴죽였나요?
@@빨강-w6i 멍청한.... 소리. 이념시점이 현재로 잡지말란 소리다.
그당시 이념의 시점에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라는 뜻이다.
누가 독립만세하는 사람들을 빨강이라고 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테러분자로 하는 명칭은 당시 상해임시정부가 계속해서 무마되면서. 세력이 약화 한반도에 직접적인 인력을 배치하지 못하자. 개인적인 행동자. 즉, 아니키스트들의 분풀이로 묘사하게 된다.
하지만 이 아나키스트들의 지원하는데 주력한 사람이 바로 김원봉선생이였고,
김구선생의 실질적인 임정의 역할을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과. 실질적인 국제적협의체에 정면적으로 등장하기 위해서 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즉 니가 말한 빨강이.. 라고 하는 개념자체는 현시점에서 생각하는 빨강이라고 규정짓는 무식함을 범했다.
실질적인 이러한 개인적인 행동자들의 모임은 점조직화 되었고 그들을 규합하기 보다는 이들을 지원하는쪽으로 한 김원봉선생의 .. 상황에서. 알려지지 않은 상당한 전과를 올리게 된단다.... 다만 이게 조직화되지 않은 정치적인집단체로서 후에 두집단체에서 전부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김원봉선생의 지원체와 개인적인 행동자들의 활동은 사실상 무마되게 된다.
역사적으로 은폐하기 되지.
이들은 빨강이도 뭣도 아닌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부분을 김원봉선생이 지원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정말로 집단체로 볼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일탈자로 볼것인지... 이를 빌미로 일본의 역사왜곡자들은 이들을 테러분자로 현재개념의 시각으로 왜곡화하고 있고, 이들을 전체적인 항일투쟁집단화 묘사하려고 하고 있다라는게 현재의 역사적인 관점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라.
수많은 희생에 개인적인 감정으로 복수에 참여한 ..희생자들에 대한 독립투쟁의 역사의 한부분이니까. 그중 한부류가 .. 야인시대에 나오는 시라소니도 한부류가 된다.
그당시를 살아가는 정치적개념으로 판단하는게 역사적인 관점이다.
지금의 너의 그 일베스러운. 허접한 혀놀림이 아니란 말이다. 어디서 일본의 역사왜곡에 동참하는 . 허접스런 . 왜곡을 들이밀지 말란말이다.
@@빨강-w6i 빨갱이독립군(박상실)이 반공독립군(김좌진) 쏴 죽인건?
자유시 참변 고려공산당 내 소련파 독립군이 상하이파 독립군 다 쏴 죽인건?
민족주의 이념만 있는게 아니라 공산주의 이념도 있지라
@@billee5759 아직 뭘 모르네 ㅋㅋ
역사마저 정치의 지배 아래 있단다...
역사를 써내려가는 가거나 수정하는 사람이 기득권이기 때문에 정치는 역사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친단다...
쉽게말해서 저당시 모든 조선인이 수난당했으면 3.1만세운동보다 더크게 일어났지 울돌아가신 할머니는 지극히 평범하게 사시다 광복된거 보시고 어머니낳으셨다ㅋ
영화는 영화일뿐 그게 모든거인척 하지말자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붙여넣기 싫어요
@@박정현-w1b OECD에서 발간한 앵거스 매디슨의 자료를 보면 1990년 달러 불변가격 기준으로 조선의 1870년 GDP가 700불이 안 됩니다. 그랬던 것이 1910년부터 1930년에 이르면 1300불까지 증가합니다. 무시무시한 경제성장이고 세계 경제성장률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반사다 반박 안해서 덕은 거짓 근대화 거짓입니다
친일 했으니 평범하게 사셨겠지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던 것이 비극의 시작이 아니었을까요?
일제시대때 남쪽보다 북쪽이 산업화가 발달해서 더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장점도 있었다면 있었겠져. 나라를 잃고 본국에게 불리했던 역사는 뜯어 고치고 수탈해가고
철도, 항만, 금광, 은행등 굵직한 기간산업은 전부 일본의 공, 사, 군 소속이었고 등등
찌바에 반년정도 있었는데 거기 시립도서관에 주말에 자주갔습니다. 우연히 일제시대 자료가 있어서 보았더니
독립군 포로였는지 저항하던 시민이었는지 강가에서 작두로 썬 머리를 나열해서 전시하고 사진으로 남기더이다
마치 전리품처럼. 군관이 일본도로 포로 목치기 바로전 사진은 수두룩하고. 2차대전으로 사망자가 7천만
(독일, 이탈리아.일본) 철길 놓아주고 문명개화 시켜주면 퉁칠수있는 문제일까요 과연.
35년 만에 인구가 2배로 증가
이거로 얘기 끝
TMI: 북한도 인구가 늘긴 늘었다 ㅇㅇ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독립운동가분들께서도 훌륭하시지만, 보통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나도 중요해 보이네요^^
역사를 관점으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통계자료 그대로 알면 된다. 교육 분야에 집중하면 조선까지는 통치자/관료를 위한 엘리트 교육이었다. 백성이 많이 알면 통치가 어려워 지니 백성에 대한 교육은 없었다. 일제는 조선인 교육을 하여 부국강평 우선정책으로 전국민대상으로 확대 된다. 물론 교육 후 조선인들이 많은 지식인들이 생기면서 독립 자립이 강해졌지. 그 후에는 우리가 아는 역사가 연결 되는 거지, ,
조선보다는 훨씬 나은 사회였지만 이젠 그런소리했다가는
천인공로할넘 뉴라이트 친일파 식민지근대화론자라는
낙인이 찍힙니다
걍 저 시절은 단 한사람도
태어날구 없던 지옥의 시대였다 퉁치시죠
조선이 다른 나라들보다 가혹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도 조정은 진압에 앞서서 다른 지방관을 파견하는 식으로 협상을 먼저 하려고 했고, 농민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서의 주민들의 자치를 인정해주는 등의 유화책을 벌이기도 했다.
당장 비슷한 시기인 산업 혁명기의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이나 러다이트 운동같은 여러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학살극까지 벌이면서 잔혹하게 진압했고, 훨씬 이후인 1930년대에도 식민지인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총독부의 가혹한 통치에 저항하던 암리차르의 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장군이 당시 국왕인 조지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전근대적인 인권침해는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보다 딱히 비난의 대상이 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이 다른 나라들보다 가혹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도 조정은 진압에 앞서서 다른 지방관을 파견하는 식으로 협상을 먼저 하려고 했고, 농민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서의 주민들의 자치를 인정해주는 등의 유화책을 벌이기도 했다.
당장 비슷한 시기인 산업 혁명기의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이나 러다이트 운동같은 여러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학살극까지 벌이면서 잔혹하게 진압했고, 훨씬 이후인 1930년대에도 식민지인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총독부의 가혹한 통치에 저항하던 암리차르의 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장군이 당시 국왕인 조지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전근대적인 인권침해는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보다 딱히 비난의 대상이 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제식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럽 국가들인 신민지주민들 수탈 잘 안되면 팔자르고 했음
@@박정현-w1b이런놈이 무서움 개소리도 지말이 다 맞다는식 댓글마다 이 ㅈㄹ 하네
원래 평범한 국민 입장에서는 나랏님이 바꼈을 뿐 자신의 생활권만 보장이 되면 정부가 어떻게 되든지 알빠 아니였겠죠
로마 공화정 때 정복지 국민들도 그러했고요.
어떤 면이든지 명암이 있고, 일제가 도움을 준 측면도 분명히 있는데
우리나라는 피해의식으로 인해 눈을 가리고 있는 부분이 많은거 같습니다.
일제로 인해 피해 받은 부분과 긍정적이라고 생각할수 있는 부분 모두 포용해야
과거로부터 역사를 배우고 미래를 위해 발전할 수 있는거죠
맞습니다...
@@jhon-w5h 역사란 부끄럽고 괴로워도 팩트를 바로 알고 가르쳐야 그런 수치스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됨으로 역사교육의 가치가 제대로 부여되는 것
잘 보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걸 보여줘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거... 그래서 세상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거죠.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9:50부분이 핵심포인트이네요 결론은 우리나라하고 일본은 서로 다른 천년이상의 문화를 서로 존중하면서 유럽국가들처럼 나토 연맹으로 국가를 유지하는길외에는 지금현재로써는 다른대안이 없어보이네요.
전세계 어느 식민지가 일제시대의 조선처럼 초중고 대학을 그렇게 많이 설립하고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다 시피 교육을 하고
특히 식민지의 사람들을 본국에서 왕과 백작 공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작위를 주면서 우대를 하였습니까? 조선왕가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서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일본의 왕족과 결혼을 한 왕족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씨들과 민씨 권력
층 많은 이들이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일본인들 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지주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 동남아 남북 아메리카 와 호주 대륙에서는 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우민화를 위해서 인구의 절반이상인 노비들과 평민들 상당
수는 아예 기초적인 문자교육 조차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사화나 수많은 난에 연류되어 남자들은 3족이 전멸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
데 똑똑한 양반출신 여자노비가 노비나 양반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고(어머니가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였음) 그자식 노비가 어머니가 몰
래 후일 어떻게 될지 몰라 가르쳐주었던 글을 아는 노비들이 드물게 있었을 것입니다 상민중에서도 그리고 중인인 농부들조차 글을 모르는 자
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 일제가 진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만 봤다면 우민화 를 실시하는것이 더효율적이었겠죠 반란을 하기 힘들테니까 ...
조선왕가 공주와 왕자들은 일본왕가와 결혼하고 고관대작 출신싱당수가 백작 공작 남작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에서는 이런일
은 없었습니다
일본이 억압한게아니라 조선이 억압한거라구요 ㅋㅋㅋㅋ죄없는 시민들을요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