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h-cam.com/video/MsoiKnnUskM/w-d-xo.html The Grey Ghost - The Queen Mary LBUSD Education : 영국 거대 여객선 퀸메리 성격이 다르지만 영 거대 여객선 퀸메리 단 1척이 2차대전 기간 5대양 ( 주로 대서양 ) 누비며 병력 약 80만 수송. 영국 7~8만톤급 거대 여객선 단 2척 퀸메리-퀸엘리자벳, 왕복 인원 약 160만 병력 수송, 즉 귀환 아닌 파병만 따질 경우 약 80만 병력 수송. 병력 수송 대부분은 미군 병력 + 소수의 호주-뉴질랜드 등 영연방군 = 즉 대서양 건넌 약 300만 미군 중 대략 그 1/4이 영 거대 여객선 2척으로 수송된. 2. 1940년 프랑스 덩케르크 철수 및 그 직후 실시된 아리엘 철수, 민간인 포함 약 56만명 탈출 = 영국군 약 37만 포함 1940년 5월26일~6월4일 덩케르크 다이나모 + 1940년 6월14일~6월25일 브리타뉴 지역 아리엘 철수 작전 합산. From the end of Operation Dynamo at Dunkirk, Operation Cycle from Le Havre, elsewhere along the Channel coast and the termination of Operation Aerial, another 191,870 troops were rescued, bringing the total of military and civilian personnel returned to Britain during the Battle of France to 558,032, including 368,491 British troops. 덩케르크 이후에도 프랑스 서부의 여러 항구들에서 채널제도의 영국령 섬들을 거치는등 부지런히 탈출시켰습니다. 물론 최종적 으로는 채널 제도의 영국령 섬들은 독일에 점령. 덩케르크 종료 후 아리엘 작전, 브리타뉴로 밀려난 영불군 셀부르와 브레스트 등에서 20만 추가 탈출 성공. th-cam.com/video/tH4zintf6qg/w-d-xo.html : Troops In Louvain, Belgium - May 1940 (1940) 영국군 1940년 벨기에, 덩케르크 쪽으로 철수하는 모습. 유니버설 캐리어에 병력이나 견인포 메달고 후퇴 장면. 트럭이 아닌 다양한 경장갑 차량들도 보일 겁니다. 1940년 당시 기계화 보병 수준이었습니다. 이 영상 말고 다른 영상에는 차량 후퇴 대열 후미에서 영국군 최후방 보병들이 폭파물 설치하면서 후퇴하는 장면도 있음. th-cam.com/video/0GsuaHTSgbA/w-d-xo.html : 아리엘 철수 영상, 도로 건물들 멀쩡. 신속한 후퇴 의미. 당시 독일군은 정지 명령 없이 공격중이었지만, 항구 도로 건물들 멀쩡한 상태로 보아 후퇴 속도가 훨씬 빨랐던 것. 화면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때도 역시 철수 부대 후미에선 독일군과 치열한 교전 있었을 것. 한국전쟁 흥남 철수는 압도적 제공권+제해권 조건에서 장비 빈약한 중공군 상대의 철수였지만 ----------------------------------------------> 1940년 프랑스에서의 철수는 강력한 독일 공군과 지상군 공세 속에서 벌어진 철수라는 성격 차이. ----------------------------------------------> 흥남 철수에선 미군 전함 항모 포함 수 많은 전투함들이 안전하게 해안 및 가까운 해역에서 철수 작전을 엄호할 수 있었지만, ----------------------------------------------> 1940년 프랑스에선 독일 공군 위협으로 영국 해군 주력 전투함들은 영불해협 근처에 접근도 하기 힘들었고 구축함급에서 큰 손실.
진짜 배워야되네요. 제가 지금 껏 알고 있던 6.25전쟁이 아닌 느낌이고 뭔가 또 시야가 확 넓어진 느낌입니다. 미국에 적당한 군대도 아니고 심지어 맥아더에 UN연합군이 참전했는데 심지어 또 소련도 아닌 중국에게 밀린다는 부담감이 미국에게 크게 느껴질법도 합니다. 이후에 베트남 전쟁에서도 고전을 한걸 보면 미국이 소련의 미그기나 전차, 군대들에 대해 왜 그렇게 과대평가를 했는지도 이해가 되네요.
지형도 보시면 함흥,흥남 지역만 가지고는 자연적 방어선이 사실상 없어서 거의 불가능합니다. 요새를 만든다 해도 황초령,부전령 등을 포함하는 높은 함경산맥이 있어 중공군이 바로 감제하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ㅜ 교두보가 더 넓어서 함경산맥 일부를 포함했을 정도면 모를까요
@@truth1472 흥남을 요새화해서 버티고 교두보하는 게 무조건 불가능하진 않았겠다만 현실적으로 보급문제, 방어선 형성, 병력 규모와 중공군 남하 및 공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어려웠습니다 ㅜ 함흥, 흥남 교두보 규모를 보면 함경산맥까지 포함하지 못해서 장기적으론 중공군이 함경산맥 등에서 감제하고 내다보기 때문에 방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함경산맥 일부를 제대로 포함하고 성천강을 완전히 낄 정도로 크게 교두보를 형성했다면 달랐겠지만요. 물자와 병력 등을 보급하면 가능하지 않냐 하시는데 이미 동해안은 원산도 빼앗기고 아예 양양까지 밀려났습니다. 이런데 양양 이남에서 흥남까지 먼 거리를 계속 보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다고 판단됩니다
흥남을 요새화해서 버티고 교두보하는 게 무조건 불가능하진 않았겠다만 현실적으로 보급문제, 방어선 형성, 병력 규모와 중공군 남하 및 공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어려웠습니다 ㅜ 함흥, 흥남 교두보 규모를 보면 함경산맥까지 포함하지 못해서 장기적으론 중공군이 함경산맥 등에서 감제하고 내다보기 때문에 방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함경산맥 일부를 제대로 포함하고 성천강을 완전히 낄 정도로 크게 교두보를 형성했다면 달랐겠지만요. 물자와 병력 등을 보급하면 가능하지 않냐 하시는데 이미 동해안은 원산도 빼앗기고 아예 양양까지 밀려났습니다. 이런데 양양 이남에서 흥남까지 먼 거리를 계속 보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다고 판단됩니다
일리있는 말씀입니다. 전황은 최고결정권자의 정확한 형세판단과 형세를 뒤집을만한 전략과 지원,보급 그리고 결정되면 뒤를 돌아보지않는 불굴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것 같습니다. 이미 제해권과 제공권은 연합군에게 있고 9병단은 상당히 와해된 상황이고 26군도 전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함흥-흥남권을 사수하면서 버티면서 오히려 원산쪽으로도 병력을 내려보내어 원산과 동해안축과 추가령지구대쪽 평강까지 도모를 계획한다면 서부라인의 중공군도 전선이 서쪽으로만 치우쳐 동쪽에 적을 두고 서쪽남하하기에도 부담이 되고 어쨌든 중공군의 전력 분산효과로 전황은 또 달라질수 있었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함흥 앞바다에서 미 해군의 위력함포사격과 공군의 폭격이 존재하기에 선상지로 지형이 달라져 장진호전투같이 산지로 돌아들어 중공군이 포위하기도 힘들고 감제고지 위치로 함흥-흥남라인을 내려다봐도 박격포외에 산에서 쏠 화력도 마땅치않은 중공군이 더이상 개활지인 함흥ㅡ흥남권을 막강 화력인 미국과 연합군을 상대로 손쉽게 점령하기는 어려웠을것으로 보입니다. 교대할 지원병력과 군수보급만 충분했다면 중공군의 전력고갈(망치와 모루전략)로 전세정황에 변화가 있었을거라 봅니다.
@@bbosaree 견해에 동감합니다. 군사적인 목적으로만이라면 어떻게든 승리를 위해 선택해볼만한 카드였겠지만 중간선거를 의식안할수 없는 트루먼과 미 정치인들은 정치적고려를 무시할수 없었기에 지적하신 말씀처럼 흘러갈수 없었던거 같습니다. 전쟁은 일어날수 있는 모든 변수를 고려해 최선의 수를 두지않으면 결국 국내외여론과 정치현실에 쓸려갈수 없기에 헤드쿼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이순신장군은 모든 전투마다 지형과 아웃사이더인 일본군의 심리,전력 그리고 아군의 전투력을 극대화한 수를 선택해 연전연승한 것 같습니다. 미군이나 연합군은 중공군의 전투력과 동향, 한국의 지형,기후등에 너무 낮선것도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이승만 정부는 한강인도교 조기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을 ( 공병감 ) 사형시켰습니다. 최창식 대령의 부인은 1961년 재심 청구를 했고 + 1964년 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승만은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피신 + 라디오 방송엔 의정부에서 국군이 북괴군을 격퇴했다는 전파가 흘러나왔고 +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폭파 ---------------------------------------> 저런 상태에서 한강인도교 폭파 후 악화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 명령 받고 임무 수행한 공병감 사형시킨 것. 따라서 이런 식의 합리화는 불가능합니다. 사례1 ( 좌파들은 파괴된 대동강교 사진을 이승만 대통령이 시민들이 건너고 있는데도 폭파시킨 한강철교라고 선동했죠.. ) 사례2 ( 좌빨들은 저 대동강철교로 피란하는 장면을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끊은 장면으로 왜곡했는데 참 기가 찹니다... ) 사례3 ( 요즘 역사교육의 문제를 절실히 느끼네요. 유튜브라는 매체가 생겨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대동강교 폭파사진조차도 한강대교라고 써먹는.. ) 다른 사례들은 생략 ---------------------------------------> 대동강 철교 사진과 상관 없이 바뀌는 것 사실상 전무하며 + 공병감을 사형시킨 부분에선 더더욱 기가 찰 수도 관련 기사 내용 인용하면 ========================================================= 당시 군법회의는 단심제(單審制)였기에 법적인 항고(抗告)가 불가능했다. 기자는 1950년 9월 15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유죄 판결문을 입수했다. 다음은 요지.
최 공병감은 한강교 폭파로 인한 책임을 지게 된 셈인데, 이 군법회의의 판결은 폭파를 직접 명령한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이 전사한 뒤였다.
이 판결은 그러나 1961년 9월 최 공병감의 부인인 옥정애(玉貞愛)씨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고 이를 접수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이듬해 5월 15일 원심판결 무효를 선고했고, 1964년 10월 23일 결심공판에서 최 공병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은 무죄 판결문 요지.
당시 재판을 맡았던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황준환 대령(재판장)은 ‘조급(早急) 폭파’를 인정하면서도 최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한국전쟁 때 우리 대통령-군-정부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한민국이어야 미래 희망이 있습니다. 1.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넘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불과 6개월 정도 후인 1951년 초 한겨울 추위 속에서 중공군 남하 당시, 전시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방비리가 벌어져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보충역으로 징집된 약 50만 병력 중에서 추정치 약 10만 병력이 적과의 전투 아닌 비전투 손실로 남쪽으로 후퇴 행군 도중에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서북청년단 단장 출신의 민간인이 임명된. 너무나 황당무계한 사태가 터져 다 덮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령관 포함 몇 명 처형되는 선에서 덮어버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국민방위군은 해체.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 15만 조금 안되는데, 국민방위군 비전투 손실로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병력이 추정 약 10만. ----------------------------------------> 2차대전 영국군 최대급 패배 마켓가든 작전 실패 때, ----------------------------------------> 서방 연합군 총 인명 손실, 영국+미국+폴란드의 전사+행불+포로 총합 = 약 18,000명 (십팔만 아닌 일만팔천 ) ----------------------------------------> 게다가 인명 피해 대부분은 포로, 영 공수부대 전사자 약 1100명 + 영 30군단 전사자 약 5500명. 이기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 안심시켜 놓고 + 한강다리 끊고 튀어서 ----------------------------------------> 님이 피난 못가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고 가정해보길. ----------------------------------------> 운좋게 전쟁 중 개죽음 당하지 않고 + 휴전 전에 북괴군 탈출해 대한민국에 남았다고 해도 ----------------------------------------> 한강다리 끊고 튀었다 다시 돌아온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들은 님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잊지 말기를. ----------------------------------------> 튀었던 넘들이 님을 북괴군 빨갱이 내지는 부역자로 몰고 + 님 아들 딸 역시 연좌제로 어려운 세월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단죄하는지 ... -----------------------------------------> 임진왜란 때도 잽싸게 튄 국왕과 조정이 충무공 고문해 죽음 직전으로 몰고, -----------------------------------------> 최대 의병 이끌던 의병장 김덕령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고 + 호란 때 겨우 살아 돌아온 여인들을 화냥년이라고 내치고 -----------------------------------------> 한국전 때도 단죄 당해야할 넘들이 오히려 단죄의 칼 휘둘렀던, 자유와 민주주의 깃발 나부끼면서. 2.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 터지기 전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좌익을 전향시켜 반공 데모 시위에 동원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하고 전황 안좋아지니까, 불안-초조-공포에 휩싸여 전향한 좌익인 보도연맹원들 대대적으로 체포, 체포로도 너무 불안해서 선제 대량 학살로 제거. 그렇게 희생된 이들 명단은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훗날 책임질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록 남기지 않고 처형. 추정치로 선제 예방 학살로 처형된 인원은 단위가 10만대, 정확히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르는. 보도연맹 희생자들 유골 발견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뉴스에 나오며 현재 진행형.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선제 사전 예방 학살 아닌 지진 터진 이후에 학살. 남경대학살 --------------------------------->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인들 상대로 도시 점령 과정 및 점령 완료 후 대량 학살. 우리 보도연맹 사건 --------------------> 같은 민족을 상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전 예방 학살. 21세기 현재 기준으론 전세계적 규탄과 반인류적 범죄로 반드시 처벌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는 것 명심하길. 더 안타까운 것은 보도연맹원 모집 당시 전국에 할당량이 내려져, 시골에선 아는 주민들 이름 공무원들이 그냥 올리기도 했고, 심할 경우에도 애들 이름도 적어 넣었는데, 보도연맹원 체포와 예방 학살 과정에서 완전 억울하게 좌익 아닌 이들도 꽤 많이 희생된. 실제 전향했던 좌익들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고. 3. 휴전 후 귀환 포로 심문 사망 남북은 정말 휴전되던 최후의 순간에도 대단했습니다. ----------------------------------------> 북괴군 포로들 38선 넘을 때 영상 보길, 팬티만 남기고 옷 다 남쪽으로 벗어던지고 욕퍼붓고 구호 외치면서 북으로. ----------------------------------------> 북괴는 우리 국군 포로 대부분의 존재 인정안하고 강제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 극히 일부 포로만 인정해 남으로 송환시킴 ----------------------------------------> 북이 일부 국군 포로를 남으로 송환시킨 이유 역시 반공포로 거부하고 북으로 가겠다는 포로들 돌려받기 위한 목적. ----------------------------------------> 불행히도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 겨우 살아돌아온 우리 국군 포로들을 구 북괴군 포로 수용소에 일단 가두고, ----------------------------------------> 혹 간첩으로 파견되었는지 여부 조사 과정에서 일부 귀환 우리 국군 포로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 ----------------------------------------> 말로만 조사했겠습니까? ----------------------------------------> 대한민국이 저랬는데 북괴는 안그랬겠습니까? 북으로 팬티만 입고 넘어간 이들 일부 역시 북에서 비참한 최후 맞았을 것. ----------------------------------------> 자국의 군인들이 적에게 포로되었을 때 저 따위로 대접하는 국가와 군은 도대체 뭡니까?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국민방위군-보도연맹 사태 정도면 일단 전시여도 내각 총사태하고 대통령 및 군 최고지휘부 상당수는 사법치리 피할 수 없었을 것. 특히 거짓 방송 틀어놓고 튄 대통령의 행위,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소 휴전 후에라도 그 책임을 물었을 것. 우린 사실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도. 우리 모두 운이 좋아 저 당시 대한민국의 20세 청년이 아니어서 개죽음 면한 것. 북괴 공산당 매운 맛 뺨칠 정도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매운 맛도 엄청났다는 것 경험하지 못한 행운에 감사해야. 한국전 당시 남북은 상호간 그리고 남과 북 각각의 내부에서 머리띠 두르고 완장차고 확신에 가득차 쳐죽여댔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 최고 지휘부의 전쟁 지휘 능력 -------------------> 전시 작전권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박탈당할 때 최고 지휘부에 있었던 이를 구국의 영웅인양 받드는 정신 나간 행위들이 아직도. 또한 한국전 휴전 과정에서도 믿는 것도 없이 북진 통일 궐기하면서 나대다가, 휴전 협정 당사자로 참여도 못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대상들은 미국-유엔-중공-북괴 ------------------------------> 대한민국은 업저버 정도. 휴전 당시 업저버 위치가 된 대한민국이라면, 대통령-정부-군의 결정적 오판 부인하기 힘들 것. 그리 북진통일 자심감 넘쳤다면 남침당하지 말고 선제 기습 북진해서 북괴를 멸망시키는 대한민국 먼저 만들었던지 ... 한국전쟁 직전에도 군 일부 장성들 자신감 만땅에,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에서 어쩌고 주둥이질에...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총알 부터 식량까지 원조에 의존하면서, 주둥이로만 북진 통일, 거기다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둥이로만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고 ...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셰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미국이 잘못하는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미국과 참전국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후 한국전에 도움을 주신 국가들에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게 되더군요 앞으로도 정부가 나서서 그들에게 보답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두번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이긴다해도 몇 십년은 후퇴할태니까요
19세기 영국 수상을 지냈던 탬플, 외무장관으로서 1843년 하원 연설. " 국제관계엔 영원한 동맹도, 영구적인 적도 없다. 우리의 관심은 영원한 국익뿐이며, 국익추구는 우리의 의무. " " We have no eternal allies, and we have no perpetual enemies. Our interests are eternal and perpetual, and those interests it is our duty to follow. " 지난 수 백 년, 영국과 전쟁한 적들 ---------------------------> 프 + 독 + 러 + 스페 + 네 + 미 + 중 + 일 + ... 지난 수 백 년, 영국과 함께한 동맹 ---------------------------> 프 + 독 + 러 + 스페 + 네 + 미 + 중 + 일 + ... 영국은 지난 수 백년간 세력균형 정책으로 유럽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프랑스가 쎄지면 프로이센(구독일)등 꼬드겨 프랑스 두들겨 패고, 독일이 강해지면 얼마 전까지 두들겨 패던 프랑스 달래서 함께 독일 몰매하는 과정의 무한 반복 루프, 당한 넘들이 바보. -------------------------------------------------------> 프-독 등이 바보라서 당한 것 아닐 겁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몰려버린. 한반도에는 그 보다 더한 바보들이 널렸죠. 프랑스나 독일은 깃발 날리고 유럽을 휩쓸기도 했지만, 한반도에선 바보들이 내부에서 외세 부추김 당하면서 내부 초토화를 스스로 가열차게 했으니. 미국은 과거 영국에 비하면 서툴지만, 그래도 꽤나 현란한 테크닉으로 세계를 요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는 미국과 영국에게 확실하게 당했던 역사가 있음을 명심해야. 지난 세기초 미국과 영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한반도를 일본에 넘겼습니다. 일본은 미국 영국의 동맹으로 선택되어 극동에서 러시아-소련의 남하는 막는 미영의 방패로 기능했습니다. 미영의 동맹이었기에 1차대전 연합국으로 참전.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국의 독일 조차지와 중부태평양 독일령 마리아나 제도를 1차대전 이후 점령 또는 신탁통치령으로 획득해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발판 전진기지 획득했던 것.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에게 뺨싸대기 쳐맞은 이후에야 미영은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 생각해보길 진주만 이전 일본이 미영의 극동 행동대장 시절 미영이 우리 항일독립운동 지원할 수 있을지. (1898년 미-스페인 전쟁 승리로 쿠바와 필리핀 탈취. 스페인이 전쟁에 패배하자 그 틈에 필리핀은 독립선언 하고 제1공화정 선포. 승리한 미국은 무력 진압에 나서 약 60만의 인명 피해 발생. 명백히 미국은 국익을 위해 스페인과 전쟁. 필리핀인들의 자유, 민주주의, 민족자결 위해 전쟁했다면 왜 무력 진압했겠습니까?) 지난 세기 미국은 한반도에 병과 약을 모두 주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지원만 고마워해선 안되는.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38선 그리고 미 극동방어선 에치슨 라인에서 대한민국 배제. 카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반도는 일본 지배 확정되었고, 미국의 미숙한 전후 처리 과정에서 38선 분단. 38선 분단 이후 애치슨 라인 배제로 남침 욕망을 극대화시켰던. 미국이 개입했던 외부 요인도 중요했던 지난 세기 한반도 암흑, 잊어선 안되는. 한국전 이후 혈맹으로 거듭났다지만 외세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일방적 믿음 역시 잠재 위협 요소입니다. 물론 민족분단과 동족상쟁의 가장 큰 책임은 우리 민족 내부에 있습니다. 남북간 극한 투쟁과 대한민국 내부의 적대적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한반도의 미래 없습니다. (한 때 유럽 열강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 2차대전 독일 패전 후 미영프소 연합국 4개국에 분할 점령 신탁통치 후 영세중립 선언. 저들의 좌우익은 민족 내부 투쟁 피했습니다. 우린 옳다는 확신과 불타는 적개심으로 서로 쳐죽여댔고.) 19세기 영국 수상을 지냈던 이가 했던 발언 무시무시한 겁니다. 저런 지도자 국가가 존재하는 지구촌에서, 넋빠진 이들이 영원한 혈맹 운운하며 공동체 내부 투쟁에 몰두하기에, 저런 국가들이 세계를 쥐락펴락 해왔고, 해오고 있고 앞으로도 할 예정. (어디에 좌우 구분이 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좌우 아닌 안밖의 투쟁이 결정적.)
민족분단과 동족상쟁의 가장 큰 원인은 물론 우리 민족 내부 적대적 분열 투쟁. 하지만 외부적 요인 역시 존재했습니다. 서구제-동구제 이데올로기가 수입되면서 더 큰 내부 적대적 투쟁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또한 외부 요인이 단순히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수입한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닌 + 한반도 분단의 가장 결정적 물리적 요소로 작용한 측면도 있습니다. th-cam.com/users/shorts4xYAzsdguHo --------------------------------------------> 1945년 8월, 처음 계획된 --------------------------------------------> 미영중소 연합 4개국에 의한 일본 분할 점령 계획안. --------------------------------------------> 일본만이 아닌 한반도 역시 미영중소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일본군 무장 해제 계획이었지만 결국 변경된. th-cam.com/video/8ldqolPJIG0/w-d-xo.html The British Occupation of Japan --------------------------------------------> 2차대전 종전 후 독일-오스트리아-일본에 대한 연합군 분할 점령 관련 내용. --------------------------------------------> 유럽에선 전범국이 미영프소 4토막 분할 점령되었지만, 극동에선 전범국 일본 아닌 한반도가 미소 2토막 나눠 먹기. --------------------------------------------> 전범 일본에 대한 연합국 점령 계획안이 어떻게 사실상 거의 미국 단일 점령에 가깝게 ( 영국이 약간 점령하는 형태 ) --------------------------------------------> 바뀌는지 보길. 소련의 일본 홋카이도-혼슈북부 점령 철회 + 영국의 일본 점령지 축소 + 중국의 일본 점령지 0화 한국전쟁은 외세의 역활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미영중소 4개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 계획안 검색해서 찾아보길. 소련 점령 예정지는 함경도 일대에 국한되고 한반도의 대부분은 미영중이 점령하는 형태. 만일 일본과 한반도의 4개국 분할 점령 계획대로 전후 처리가 실시되었다면, 동서독에서 서독이 훨씬 컸던 그 조건과 본질적으로 같아져, --------------------------------------------------------------> 함경도 귀퉁이 차지한 물리적 조건에서 한국전 발발은 사실상 힘들었을 것. --------------------------------------------------------------> 소련군 점령 예정지는 인구 측면에선 미영중 점령지에 비한다면 압도에 압도에 압도되는 수준. --------------------------------------------------------------> 또한 모택동 아닌 장개석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는 조건에서 중국 공산화 역시 조금은 더 힘들었을 것. ---------------------> 미국이 일본 전체 점령 욕심 부리면서, ---------------------> 그 반대급부로 한반도 38선 이북을 소련에게 떼어주는 선택을 한 것. ---------------------------------------------> 유럽에선 전범국 독일과 독일어 사용하는 오스트리아가 미영프소 4개국에 분할 점령되었지만, ---------------------------------------------> 태평양전쟁 종전 처리 과정에선, 미국의 주도적 역활로 전범국 일본 아닌 한반도가 유탄 맞은 것은 치명적 민족분단 원인. ---------------------------------------------> 오스트리아는 4개국 신탁통치 후 영세 중립 선언, 하지만 ---------------------------------------------> 오스트리아는 내용적-경제적으로 사실상 친서방 서구 민주주의 국가가 된. 그 이유는 ---------------------------------------------> 미국-영국-프랑스군의 점령과 서방측 원조가 친소 공산세력의 확산을 저지 + 현명한 오스트리아 내부 타협 때문. ---------------------------------------------> 한반도의 좌우익은 정파적 승리를 위해 외세와 결탁해 자발적 내부 투쟁에 돌입했지만 오스트리아 좌우익은 달랐던. 그리고 미국의 태평양 전쟁 막판 끝내기는 인류 역사상 아마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대악수, 최악의 오판 삽질. ---------------------------------------------> 사실상 태평양 전쟁 승패 결정된 상태에서, ---------------------------------------------> 미군 희생 좀 더 줄여보겠다고 + 소련의 대일전 참전 요청 + 소련은 형식적으로 미국의 요청을 수용하면서 ---------------------------------------------> 과장 아주 아주 조금 보태 일본 항복 1초 전에 + ( 게다가 태평양 전쟁 기여도 0 상태에서 ) + 만주 전체와 한반도 절반 점령. ---------------------------------------------> 소련 입장에선 그냥 굴러 들어온 떡. ---------------------------------------------> 만주만 점령해도 중국 국공내전 모택동의 승리를 결정지을 조건에 + 추가로 한반도 절반 떼어준다는데 왜 거부합니까? 덜떨어진 미국이었지만 자신들이 오키나와에서 악전고투 하던 그 무렵, 미국의 요청으로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할 경우 사실상 한반도 전체를 무혈 점령 가능성 뒤늦게 깨닫고, --------------------------------------------------------------------> 허겁지겁 수정안 즉 38선 경계로 북의 소련군 점령을 용인하면서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 막는 잔머리. --------------------------------------------------------------------> 소련군이 만주 점령한 그 순간 ---------------------------> 중국 국공내전 모택동 승리, 장개석 패배 확정. --------------------------------------------------------------------> 소련이 만주 점령, 일본군 무장 해제만 하겠습니까? --------------------------------------------------------------------> 소련군이 무장 해제한 일본군 무기는 사실상 모택동에 가는 겁니다. --------------------------------------------------------------------> 또한 소련군이 점령한 만주는 모택동이 대륙 전체를 노리는 배후 강력한 거점으로 변하는. -------------------------------> 저렇게 허접했던 미국, 아마도 소련이 오케이 해준 순간 --------------------> 한반도 절반은 건졌다면서 속으로 만만세 외쳤을 것. 1945년 당시 세계 유일 핵 보유국으로서, 미국이 정상적인 판단했다면 이랬어야 하는 겁니다. ---------------------> 소련에 대한 강력 경고, 대일본전 지원 빌미로 감히 만주-한반도 발 내딛지 말라!!! --------------------------------------------------------------------------------------------------------> 태평양 전쟁 기여도 0에 + 일본과 소일-불가및 맺은 주제에 감히 나대지 마라!!! --------------------------------------------------------------------------------------------------------> 혹이라도 일본 항복 밥상에 숟가락 얹는 꼼수 부리면 핵무기 사용해서라도 막겠다!!! 한국전쟁 유엔군 파병, 소련이 거부권 행사했다면 불가능, 왜 소련이 안보리 불참 기권했는지도 냉정히 생각해보길. -------------------------------------------------> 독소전에서 우랄 서부 소련의 핵심 유럽 지역이 사실상 완전 토초화 + 민간인 포함 거의 2천만 인명 피해 상태에서 -------------------------------------------------> 강력하지만 덜떨어진 미국을 극동의 국지전에 몰아 넣고, 동구권에서 철의 장막 확실하게 치려고 의도적으로 기권한 것. -------------------------------------------------> 미국이 한국전쟁에 붙들린 사이에 소련은 동구권에서 철의 장막 완성했음을 깨닫길. -------------------------------------------------> 국가 이익이 충돌하는 장에서 소련-스탈린이 정말 쫄아서? 멍 때리다 안보리 출석 못해 유엔군 파견??? -------------------------------------------------> 스탈린은 독소 불가침 + 일소 불가침 맺었던 음흉한 넘이기에 순진하게 멍 때렸다고 보기 어려운. 만일 영국 없이 미국 단독으로 유럽에서 종전 협상했다면 미국은 소련에게 완벽하게 당했을 것. -------------------------------------------------> 영국은 1944년 그리스에 상륙, 공산 빨치산 토벌 + 티토 유고 지원하며 반소 독자 노선 걷도록 유도. -------------------------------------------------> 미국은 유럽에서도 그저 그저 그저 ... 하루라도 아니 1초라도 빨리 미 본토로 돌아가려 정신 넋 빠졌던. -------------------------------------------------> 그러다 전후 막상 철의 장막 현실 보고서, 뒤늦게 처칠 초청해서 철의 장막 연설 들으며 박수쳤던 뒤늦은 수습. 또한 지난 세기 초, 미국과 영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일본을 극동의 파트너로 선택 러시아-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역활 일본에 부여. 한반도의 일본 지배는 그렇게 사실상 최종 결정된 겁니다. ----------------------> 일본에 먹힌 한반도 때문에 태평양전쟁 종결 과정에서 38선이 태어난 것도 명백. 만일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없이 일본이 미영의 극동 지부 행동대장으로 만족하고 계속 미영의 편에 남았다면 21세기 현재도 한반도와 만주는 여전히 일본령 가능성 압도적. 따라서 한국전 이후 한미 관계만 보며, 미국에 대한 지나친 합리화는 위험. 우리 민족은 이미 지난 세기 초 미국에게 제대로 뒤통수 쳐맞은 경험도 있었다는 점에서.
유효 숫자 개념 잊지 말아야. 이미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에서 오차 발생했다면, 그 아래로 소수점 아래 10번째 자리 ... 100번째 자리 계산 아무리 열심히 해도 무의미. ---------------------------------------------> 한반도 분단의 민족 내부 아닌 외부 원인을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미국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치명적 역활.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한반도의 일본 지배 최종 결정되지 않았다면 + 일본의 2차대전 패망 후 광복과 + 태평양전쟁 종전 처리 과정에서 전범국 일본 아닌 한반도가 유탄 맞고 분단되는 사태의 원인 자체가 소멸할지도 모를 정도로 미국의 역활은 결정적. 태평양 전쟁 종전 끝내기에서, 미국은 일본을 태평양의 방파제로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 그 때문에 전범 일본 아닌 한반도 허리가 두동강 난 것 부인하기 힘든. 만일 한반도가 38선 분단 아닌 미영중소 4개국 분할 점령되었다면 물리적 조건, 소련 점령지는 협소했고 인구 측면 압도당하는 수준에선 한국전 발발은 사실상 불가능. 미소 분할 38선 그어진 이후에라도 미국이 현명히 대처했다면, -----------------------------------------------> 즉 미국의 극동방어선 애치슨 라인에 대한민국 포함시켜 발표하고, -----------------------------------------------> 대만과 대한민국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만 과시했더라도, 한국전 발발은 훨씬 어려웠거나 사실상 불가능. 독일어 사용권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역시 미영프소 4개국 분할 점령 되었지만, ------------------------------------------------> 미영프 3개국 점령 지역의 우세로 독일에선 한국전쟁과 같은 대규모 무력 분쟁 자체가 불가능. ------------------------------------------------> 독일의 소련 점령지 내부에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포함되었고 + 독일 통일 전 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그 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가 소련령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영프 서방측 점령지의 인구 우세가 결정적이라 한국전쟁과 같은 무력 도발은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오스트리아는 운이 좋게도 독일과 같은 강력함이 없었기에 미영프소 4개국은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 후 바로 철군 + 오스트리아는 영세 중립 선언. ------------------------------------------------> 한 때 유럽의 강력한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1차대전 패배로 제국이 해체되면서 지금과 같이 쪼그라들었고, ------------------------------------------------> 히틀러의 물리적 지리적 고향이기도 한 오스트리아의 좌우익은 2차대전 독일 패망 후 정파 이익을 버리고 합리적 타협. ------------------------------------------------> 비록 영세 중립 선언했지만 + 정치적-경제적으로는 사실상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는 형태로 현명하게 위기에서 벗어난. 해방 후 한반도 남북의 좌우익, 냉정하게 본다면 그냥 자폭한 겁니다.
주적 개념과 + 주적을 구태여 명시할 필요성, 둘 모두 심각히 고민해야 합니다. 특히 한반도 민족 내부 주적질과 완전 대비된 철천지 원수 이민족 연합체의 세계 패권 장악과 내부 패권 승계 무시할 수 없는. 내부 주적질 >>>> 남북의 극단적 좌우익 사생결단 투쟁관 -------------------------------------------------------> 아직 인류는 아와 비아의 투쟁 예외 없으며, -------------------------------------------------------> 모든 도전은 비아로부터 아를 향해 오며 + 그 도전에 대한 응전을 아가 하는 것. -------------------------------------------------------> 아와 비아의 투쟁 및 도전과 응전, 단순히 인간의 역사에만 적용되는 것 아닌 바이러스와 그에 대한 인간의 대응도 내포. 내부 주적질에 대해 냉정할 필요, 대한민국 유신-두환 시절 초중고 학생들은 사실상 국가가 제시한 이념으로 가축과 같이 사육되었지만 그들이 가장 강력한 반독재 투쟁자로 번한. 통행금지 + 국민교육헌장 암기 + 국기하강식 + 고등학교 여학생도 교련 + 대학생 교련만이 아닌 전방 입소와 문무대 교육에, 북과 유사하게 뻑하면 학생들 동원해 궐기대회 규탄대회 + 해 마다 6.25 무렵이면 국민학생들이 학교 운동장 빙빙 돌며 행진하며 6.25노래 부르고. --------------------------------------------------------> 냉정하게 본다면 유치 찬란, 북이 아직도 하는 짓거리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 깨닫길. 생각해보길. 한반도 남북의 6.25노래 가사 보면서 두려움에 떨 세계인들이 얼마나 될지. ------------------------------------------------------> 아마도 가사 확인한다면, 세계인들 다수는 재들 같은 민족끼리 왜 저래??? 생각해보길. 철천지 원수 켈트-앵글로색슨 연합체 연합왕국의 룰브리타니아 가사 보면서, 세계인들이 연합왕국 우습게 여길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길.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모국 영국이 반공을 국시로 하고 구소련과 현중국을 과연 주적으로 명시했는지. 주적 명시는 어리석은 겁니다. 명시하건 하지 않건 주적에 대한 대비만 철저하면 됩니다. 한국전 직전 주적에 대한 적개심 노출 및 개전 직후 전선 붕괴가 반례. ----------------------------------> 한국전 직전 일부 국군 장성들이, ----------------------------------> 주적 북괴에 대한 적개심과 자심감을 밝혔어도, 개전 직후 전선 붕괴. ----------------------------------> 그들은 이렇게 자신만만 했었습니다.,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 그러나 현실은 완전 달랐던.
625전쟁은 특히 인천상륙작전 이후로는 킴필비와 캠프리지 오인방 등의 영국 정부 내의 소련간첩들을 얘기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맥앋더부터 작전만 세우면 적이 알고 움직이는 것 같아서 나중에는 국무부에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실제로 나중에 밝혀졌고, 그 중에 결정적인 것은 미군이 원폭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란 정보룰 영국을 거쳐 소련으로 넘겨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만들었죠. 킴필비를 비롯한 영국간첩에 대한 언급 없이 625 전사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진짜 아몬드의 생각처럼 철수하지 않고 흥남을 요새화 했다면 어땠을까요? 전함 미주리에서 쏴제끼고 함재기가 끊임없이 엄호할 수 있었던 상황이라면 교두보로써 차후 북진을 할때도 시선을 분산하는데 충분히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몬드가 그런 의견을 가졌다는게 놀랍네요. 근데, 만약 유럽이었다면, 하다못해 동남아였다 해도 그렇게 했을 거에요. 허나 안중에도 없던 한반도였기에 그렇게 철수한 거겠죠 ㅠㅠㅠ
이렇게 보니까 정말 장진호 전투에서 병단 1개가 전투불능에 빠져 발이 묶여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확실히 느껴지네요. 너무 빠르고 너무 급했던 철수가 참 아쉽게 느껴지긴 합니다. 그래도 이것도 역사의 교훈이 되었으니까요. 바른 역사를 알려주시는 역전다방 오늘도 고맙습니다! 정말 잘 봤습니다.
이렇게 보지말고 저렇게 봐라. 장진호 좌익의 미해병 1사단 쪽에는 9병단 조공인 1개군 3개 사단만 투입되었고 사단당 실병력은 5천의 경보병뿐이었다. 거기다 혹한에 장거리 기동해 이미 지치고ㅈ굶주려 있어 제대로 전투조차 못했는데도 3만의 대병력에 군단급 화력의 미해병1사단은 공포에 질려 도주한다. 미3사단과 미해군이 살려준다. 그전에 우입의 미7사단 31 연대 전투단이 9병단 주력을 맞아 혈전을 벌려 미해병1사단을 살려준다. 미해병은 제대로 된 전투도 한 적이 없다. 미군이라서 살아남은거란다.
팩트. 9병단 편제상으로는 12개 사단 12만 병력이다. 헌데 각 군당 1개 사단씩은 예비라 투입되지도 못해 9개 사단으로 직전하나 중공군 사단 완편이 8천인 시절이란다. 거기에 중화기나 차량은 두고 와서 실작전 투입 병력은 5천의 경보병뿐이었닺 9병단 실투입 병력 다합해봐야 5만이다. 반도 투입되지 못했다. 미해병 1사단 병력만 25000 이야. 거기다 지원배속부대까지 합치면 3만이 넘는 대군이란다. 사단이라고 다같은 사단인 줄 알지? (한국군 사단도 12000 이상이다) 거기다 미군으로 쳐도 군단급화력이다. 그래서 13병단 배후를 때리는 돌파선봉으로 세운건데 작명을 위반한다. 그러고는 이도저도 아니게 적지에 고립되어 공포에 질려 도주한다. 총이 안나가요 하면서 운다.
흥남을 요새화해서 버티고 교두보하는 게 무조건 불가능하진 않았겠다만 현실적으로 보급문제, 방어선 형성, 병력 규모와 중공군 남하 및 공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어려웠습니다 ㅜ 함흥, 흥남 교두보 규모를 보면 함경산맥까지 포함하지 못해서 장기적으론 중공군이 함경산맥 등에서 감제하고 내다보기 때문에 방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함경산맥 일부를 제대로 포함하고 성천강을 완전히 낄 정도로 크게 교두보를 형성했다면 달랐겠지만요. 물자와 병력 등을 보급하면 가능하지 않냐 하시는데 이미 동해안은 원산도 빼앗기고 아예 양양까지 밀려났습니다. 이런데 양양 이남에서 흥남까지 먼 거리를 계속 보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다고 판단됩니다
흥남 방어라인 자체는 미 7함대의 막강한 화력에다가 잘 만들어진 항구면 보급도 어느정도 해볼만 하긴 한데, 문제는 흥남 구조 자체가 거대한 산맥이 둘러싼 곳인지라 전쟁 막판이나 전쟁 후에 방어하기엔 정말 어려울 듯 싶네요. 전쟁중이야 중공이던 북한이든 포병전력이나 제공권이 없으니 일방적인 방어가 가능한데, 전후 포병전력이 막강해지고 80년대 이전까진 제공권까지 유리했던게 중공 북한이니 포기하는게 장기적으로 이득인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전쟁내내 유지하기만해도 중공의 화력 분산으로 이만한 곳도 없을뿐더러 만약 전후까지 유지한다면 정말 절묘한 위치라 유지한다고 쳐도 정말 좋긴 할듯 싶네요. 저기다가 미군기지라도 하나 있으면 소련이든 중국이든 북한이든 환장할 위치라
이승만 정부는 한강인도교 조기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을 ( 공병감 ) 사형시켰습니다. 최창식 대령의 부인은 1961년 재심 청구를 했고 + 1964년 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승만은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피신 + 라디오 방송엔 의정부에서 국군이 북괴군을 격퇴했다는 전파가 흘러나왔고 +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폭파 ---------------------------------------> 저런 상태에서 한강인도교 폭파 후 악화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 명령 받고 임무 수행한 공병감 사형시킨 것. 따라서 이런 식의 합리화는 불가능합니다. 사례1 ( 그 대동강 파괴된 다리 사진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런승만 만들었지요 ) 사례2 ( 좌파들은 파괴된 대동강교 사진을 이승만 대통령이 시민들이 건너고 있는데도 폭파시킨 한강철교라고 선동했죠.. ) 사례3 ( 좌빨들은 저 대동강철교로 피란하는 장면을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끊은 장면으로 왜곡했는데 참 기가 찹니다... ) 사례4 ( 요즘 역사교육의 문제를 절실히 느끼네요. 유튜브라는 매체가 생겨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대동강교 폭파사진조차도 한강대교라고 써먹는.. ) 다른 사례들은 생략 ---------------------------------------> 대동강 철교 사진과 상관 없이 바뀌는 것 사실상 전무하며 + 공병감을 사형시킨 부분에선 더더욱 기가 찰 수도 관련 기사 내용 인용하면 ========================================================= 당시 군법회의는 단심제(單審制)였기에 법적인 항고(抗告)가 불가능했다. 기자는 1950년 9월 15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유죄 판결문을 입수했다. 다음은 요지.
최 공병감은 한강교 폭파로 인한 책임을 지게 된 셈인데, 이 군법회의의 판결은 폭파를 직접 명령한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이 전사한 뒤였다.
이 판결은 그러나 1961년 9월 최 공병감의 부인인 옥정애(玉貞愛)씨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고 이를 접수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이듬해 5월 15일 원심판결 무효를 선고했고, 1964년 10월 23일 결심공판에서 최 공병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은 무죄 판결문 요지.
당시 재판을 맡았던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황준환 대령(재판장)은 ‘조급(早急) 폭파’를 인정하면서도 최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한국전쟁 때 우리 대통령-군-정부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한민국이어야 미래 희망이 있습니다. 1.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넘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불과 6개월 정도 후인 1951년 초 한겨울 추위 속에서 중공군 남하 당시, 전시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방비리가 벌어져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보충역으로 징집된 약 50만 병력 중에서 추정치 약 10만 병력이 적과의 전투 아닌 비전투 손실로 남쪽으로 후퇴 행군 도중에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서북청년단 단장 출신의 민간인이 임명된. 너무나 황당무계한 사태가 터져 다 덮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령관 포함 몇 명 처형되는 선에서 덮어버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국민방위군은 해체.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 15만 조금 안되는데, 국민방위군 비전투 손실로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병력이 추정 약 10만. ----------------------------------------> 2차대전 영국군 최대급 패배 마켓가든 작전 실패 때, ----------------------------------------> 서방 연합군 총 인명 손실, 영국+미국+폴란드의 전사+행불+포로 총합 = 약 18,000명 (십팔만 아닌 일만팔천 ) ----------------------------------------> 게다가 인명 피해 대부분은 포로, 영 공수부대 전사자 약 1100명 + 영 30군단 전사자 약 5500명. 이기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 안심시켜 놓고 + 한강다리 끊고 튀어서 ----------------------------------------> 님이 피난 못가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고 가정해보길. ----------------------------------------> 운좋게 전쟁 중 개죽음 당하지 않고 + 휴전 전에 북괴군 탈출해 대한민국에 남았다고 해도 ----------------------------------------> 한강다리 끊고 튀었다 다시 돌아온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들은 님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잊지 말기를. ----------------------------------------> 튀었던 넘들이 님을 북괴군 빨갱이 내지는 부역자로 몰고 + 님 아들 딸 역시 연좌제로 어려운 세월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단죄하는지 ... -----------------------------------------> 임진왜란 때도 잽싸게 튄 국왕과 조정이 충무공 고문해 죽음 직전으로 몰고, -----------------------------------------> 최대 의병 이끌던 의병장 김덕령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고 + 호란 때 겨우 살아 돌아온 여인들을 화냥년이라고 내치고 -----------------------------------------> 한국전 때도 단죄 당해야할 넘들이 오히려 단죄의 칼 휘둘렀던, 자유와 민주주의 깃발 나부끼면서. 2.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 터지기 전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좌익을 전향시켜 반공 데모 시위에 동원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하고 전황 안좋아지니까, 불안-초조-공포에 휩싸여 전향한 좌익인 보도연맹원들 대대적으로 체포, 체포로도 너무 불안해서 선제 대량 학살로 제거. 그렇게 희생된 이들 명단은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훗날 책임질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록 남기지 않고 처형. 추정치로 선제 예방 학살로 처형된 인원은 단위가 10만대, 정확히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르는. 보도연맹 희생자들 유골 발견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뉴스에 나오며 현재 진행형.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선제 사전 예방 학살 아닌 지진 터진 이후에 학살. 남경대학살 --------------------------------->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인들 상대로 도시 점령 과정 및 점령 완료 후 대량 학살. 우리 보도연맹 사건 --------------------> 같은 민족을 상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전 예방 학살. 21세기 현재 기준으론 전세계적 규탄과 반인류적 범죄로 반드시 처벌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는 것 명심하길. 더 안타까운 것은 보도연맹원 모집 당시 전국에 할당량이 내려져, 시골에선 아는 주민들 이름 공무원들이 그냥 올리기도 했고, 심할 경우에도 애들 이름도 적어 넣었는데, 보도연맹원 체포와 예방 학살 과정에서 완전 억울하게 좌익 아닌 이들도 꽤 많이 희생된. 실제 전향했던 좌익들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고. 3. 휴전 후 귀환 포로 심문 사망 남북은 정말 휴전되던 최후의 순간에도 대단했습니다. ----------------------------------------> 북괴군 포로들 38선 넘을 때 영상 보길, 팬티만 남기고 옷 다 남쪽으로 벗어던지고 욕퍼붓고 구호 외치면서 북으로. ----------------------------------------> 북괴는 우리 국군 포로 대부분의 존재 인정안하고 강제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 극히 일부 포로만 인정해 남으로 송환시킴 ----------------------------------------> 북이 일부 국군 포로를 남으로 송환시킨 이유 역시 반공포로 거부하고 북으로 가겠다는 포로들 돌려받기 위한 목적. ----------------------------------------> 불행히도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 겨우 살아돌아온 우리 국군 포로들을 구 북괴군 포로 수용소에 일단 가두고, ----------------------------------------> 혹 간첩으로 파견되었는지 여부 조사 과정에서 일부 귀환 우리 국군 포로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 ----------------------------------------> 말로만 조사했겠습니까? ----------------------------------------> 대한민국이 저랬는데 북괴는 안그랬겠습니까? 북으로 팬티만 입고 넘어간 이들 일부 역시 북에서 비참한 최후 맞았을 것. ----------------------------------------> 자국의 군인들이 적에게 포로되었을 때 저 따위로 대접하는 국가와 군은 도대체 뭡니까?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국민방위군-보도연맹 사태 정도면 일단 전시여도 내각 총사태하고 대통령 및 군 최고지휘부 상당수는 사법치리 피할 수 없었을 것. 특히 거짓 방송 틀어놓고 튄 대통령의 행위,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소 휴전 후에라도 그 책임을 물었을 것. 우린 사실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도. 우리 모두 운이 좋아 저 당시 대한민국의 20세 청년이 아니어서 개죽음 면한 것. 북괴 공산당 매운 맛 뺨칠 정도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매운 맛도 엄청났다는 것 경험하지 못한 행운에 감사해야. 한국전 당시 남북은 상호간 그리고 남과 북 각각의 내부에서 머리띠 두르고 완장차고 확신에 가득차 쳐죽여댔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 최고 지휘부의 전쟁 지휘 능력 -------------------> 전시 작전권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박탈당할 때 최고 지휘부에 있었던 이를 구국의 영웅인양 받드는 정신 나간 행위들이 아직도. 또한 한국전 휴전 과정에서도 믿는 것도 없이 북진 통일 궐기하면서 나대다가, 휴전 협정 당사자로 참여도 못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대상들은 미국-유엔-중공-북괴 ------------------------------> 대한민국은 업저버 정도. 휴전 당시 업저버 위치가 된 대한민국이라면, 대통령-정부-군의 결정적 오판 부인하기 힘들 것. 그리 북진통일 자심감 넘쳤다면 남침당하지 말고 선제 기습 북진해서 북괴를 멸망시키는 대한민국 먼저 만들었던지 ... 한국전쟁 직전에도 군 일부 장성들 자신감 만땅에,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에서 어쩌고 주둥이질에...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총알 부터 식량까지 원조에 의존하면서, 주둥이로만 북진 통일, 거기다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둥이로만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고 ...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19세기 영국 수상을 지냈던 탬플, 외무장관으로서 1843년 하원 연설. " 국제관계엔 영원한 동맹도, 영구적인 적도 없다. 우리의 관심은 영원한 국익뿐이며, 국익추구는 우리의 의무. " " We have no eternal allies, and we have no perpetual enemies. Our interests are eternal and perpetual, and those interests it is our duty to follow. " 지난 수 백 년, 영국과 전쟁한 적들 ---------------------------> 프 + 독 + 러 + 스페 + 네 + 미 + 중 + 일 + ... 지난 수 백 년, 영국과 함께한 동맹 ---------------------------> 프 + 독 + 러 + 스페 + 네 + 미 + 중 + 일 + ... 영국은 지난 수 백년간 세력균형 정책으로 유럽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프랑스가 쎄지면 프로이센(구독일)등 꼬드겨 프랑스 두들겨 패고, 독일이 강해지면 얼마 전까지 두들겨 패던 프랑스 달래서 함께 독일 몰매하는 과정의 무한 반복 루프, 당한 넘들이 바보. -------------------------------------------------------> 프-독 등이 바보라서 당한 것 아닐 겁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몰려버린. 한반도에는 그 보다 더한 바보들이 널렸죠. 프랑스나 독일은 깃발 날리고 유럽을 휩쓸기도 했지만, 한반도에선 바보들이 내부에서 외세 부추김 당하면서 내부 초토화를 스스로 가열차게 했으니. 미국은 과거 영국에 비하면 서툴지만, 그래도 꽤나 현란한 테크닉으로 세계를 요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는 미국과 영국에게 확실하게 당했던 역사가 있음을 명심해야. 지난 세기초 미국과 영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한반도를 일본에 넘겼습니다. 일본은 미국 영국의 동맹으로 선택되어 극동에서 러시아-소련의 남하는 막는 미영의 방패로 기능했습니다. 미영의 동맹이었기에 1차대전 연합국으로 참전.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국의 독일 조차지와 중부태평양 독일령 마리아나 제도를 1차대전 이후 점령 또는 신탁통치령으로 획득해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발판 전진기지 획득했던 것.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에게 뺨싸대기 쳐맞은 이후에야 미영은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 생각해보길 진주만 이전 일본이 미영의 극동 행동대장 시절 미영이 우리 항일독립운동 지원할 수 있을지. (1898년 미-스페인 전쟁 승리로 쿠바와 필리핀 탈취. 스페인이 전쟁에 패배하자 그 틈에 필리핀은 독립선언 하고 제1공화정 선포. 승리한 미국은 무력 진압에 나서 약 60만의 인명 피해 발생. 명백히 미국은 국익을 위해 스페인과 전쟁. 필리핀인들의 자유, 민주주의, 민족자결 위해 전쟁했다면 왜 무력 진압했겠습니까?) 지난 세기 미국은 한반도에 병과 약을 모두 주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지원만 고마워해선 안되는.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38선 그리고 미 극동방어선 에치슨 라인에서 대한민국 배제. 카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반도는 일본 지배 확정되었고, 미국의 미숙한 전후 처리 과정에서 38선 분단. 38선 분단 이후 애치슨 라인 배제로 남침 욕망을 극대화시켰던. 미국이 개입했던 외부 요인도 중요했던 지난 세기 한반도 암흑, 잊어선 안되는. 한국전 이후 혈맹으로 거듭났다지만 외세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일방적 믿음 역시 잠재 위협 요소입니다. 물론 민족분단과 동족상쟁의 가장 큰 책임은 우리 민족 내부에 있습니다. 남북간 극한 투쟁과 대한민국 내부의 적대적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한반도의 미래 없습니다. (한 때 유럽 열강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 2차대전 독일 패전 후 미영프소 연합국 4개국에 분할 점령 신탁통치 후 영세중립 선언. 저들의 좌우익은 민족 내부 투쟁 피했습니다. 우린 옳다는 확신과 불타는 적개심으로 서로 쳐죽여댔고.) 19세기 영국 수상을 지냈던 이가 했던 발언 무시무시한 겁니다. 저런 지도자 국가가 존재하는 지구촌에서, 넋빠진 이들이 영원한 혈맹 운운하며 공동체 내부 투쟁에 몰두하기에, 저런 국가들이 세계를 쥐락펴락 해왔고, 해오고 있고 앞으로도 할 예정. (어디에 좌우 구분이 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좌우 아닌 안밖의 투쟁이 결정적.)
민족분단과 동족상쟁의 가장 큰 원인은 물론 우리 민족 내부 적대적 분열 투쟁. 하지만 외부적 요인 역시 존재했습니다. 서구제-동구제 이데올로기가 수입되면서 더 큰 내부 적대적 투쟁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또한 외부 요인이 단순히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수입한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닌 + 한반도 분단의 가장 결정적 물리적 요소로 작용한 측면도 있습니다. th-cam.com/users/shorts4xYAzsdguHo --------------------------------------------> 1945년 8월, 처음 계획된 --------------------------------------------> 미영중소 연합 4개국에 의한 일본 분할 점령 계획안. --------------------------------------------> 일본만이 아닌 한반도 역시 미영중소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일본군 무장 해제 계획이었지만 결국 변경된. th-cam.com/video/8ldqolPJIG0/w-d-xo.html The British Occupation of Japan --------------------------------------------> 2차대전 종전 후 독일-오스트리아-일본에 대한 연합군 분할 점령 관련 내용. --------------------------------------------> 유럽에선 전범국이 미영프소 4토막 분할 점령되었지만, 극동에선 전범국 일본 아닌 한반도가 미소 2토막 나눠 먹기. --------------------------------------------> 전범 일본에 대한 연합국 점령 계획안이 어떻게 사실상 거의 미국 단일 점령에 가깝게 ( 영국이 약간 점령하는 형태 ) --------------------------------------------> 바뀌는지 보길. 소련의 일본 홋카이도-혼슈북부 점령 철회 + 영국의 일본 점령지 축소 + 중국의 일본 점령지 0화 한국전쟁은 외세의 역활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미영중소 4개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 계획안 검색해서 찾아보길. 소련 점령 예정지는 함경도 일대에 국한되고 한반도의 대부분은 미영중이 점령하는 형태. 만일 일본과 한반도의 4개국 분할 점령 계획대로 전후 처리가 실시되었다면, 동서독에서 서독이 훨씬 컸던 그 조건과 본질적으로 같아져, --------------------------------------------------------------> 함경도 귀퉁이 차지한 물리적 조건에서 한국전 발발은 사실상 힘들었을 것. --------------------------------------------------------------> 소련군 점령 예정지는 인구 측면에선 미영중 점령지에 비한다면 압도에 압도에 압도되는 수준. --------------------------------------------------------------> 또한 모택동 아닌 장개석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는 조건에서 중국 공산화 역시 조금은 더 힘들었을 것. ---------------------> 미국이 일본 전체 점령 욕심 부리면서, ---------------------> 그 반대급부로 한반도 38선 이북을 소련에게 떼어주는 선택을 한 것. ---------------------------------------------> 유럽에선 전범국 독일과 독일어 사용하는 오스트리아가 미영프소 4개국에 분할 점령되었지만, ---------------------------------------------> 태평양전쟁 종전 처리 과정에선, 미국의 주도적 역활로 전범국 일본 아닌 한반도가 유탄 맞은 것은 치명적 민족분단 원인. ---------------------------------------------> 오스트리아는 4개국 신탁통치 후 영세 중립 선언, 하지만 ---------------------------------------------> 오스트리아는 내용적-경제적으로 사실상 친서방 서구 민주주의 국가가 된. 그 이유는 ---------------------------------------------> 미국-영국-프랑스군의 점령과 서방측 원조가 친소 공산세력의 확산을 저지 + 현명한 오스트리아 내부 타협 때문. ---------------------------------------------> 한반도의 좌우익은 정파적 승리를 위해 외세와 결탁해 자발적 내부 투쟁에 돌입했지만 오스트리아 좌우익은 달랐던. 그리고 미국의 태평양 전쟁 막판 끝내기는 인류 역사상 아마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대악수, 최악의 오판 삽질. ---------------------------------------------> 사실상 태평양 전쟁 승패 결정된 상태에서, ---------------------------------------------> 미군 희생 좀 더 줄여보겠다고 + 소련의 대일전 참전 요청 + 소련은 형식적으로 미국의 요청을 수용하면서 ---------------------------------------------> 과장 아주 아주 조금 보태 일본 항복 1초 전에 + ( 게다가 태평양 전쟁 기여도 0 상태에서 ) + 만주 전체와 한반도 절반 점령. ---------------------------------------------> 소련 입장에선 그냥 굴러 들어온 떡. ---------------------------------------------> 만주만 점령해도 중국 국공내전 모택동의 승리를 결정지을 조건에 + 추가로 한반도 절반 떼어준다는데 왜 거부합니까? 덜떨어진 미국이었지만 자신들이 오키나와에서 악전고투 하던 그 무렵, 미국의 요청으로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할 경우 사실상 한반도 전체를 무혈 점령 가능성 뒤늦게 깨닫고, --------------------------------------------------------------------> 허겁지겁 수정안 즉 38선 경계로 북의 소련군 점령을 용인하면서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 막는 잔머리. --------------------------------------------------------------------> 소련군이 만주 점령한 그 순간 ---------------------------> 중국 국공내전 모택동 승리, 장개석 패배 확정. --------------------------------------------------------------------> 소련이 만주 점령, 일본군 무장 해제만 하겠습니까? --------------------------------------------------------------------> 소련군이 무장 해제한 일본군 무기는 사실상 모택동에 가는 겁니다. --------------------------------------------------------------------> 또한 소련군이 점령한 만주는 모택동이 대륙 전체를 노리는 배후 강력한 거점으로 변하는. -------------------------------> 저렇게 허접했던 미국, 아마도 소련이 오케이 해준 순간 --------------------> 한반도 절반은 건졌다면서 속으로 만만세 외쳤을 것. 1945년 당시 세계 유일 핵 보유국으로서, 미국이 정상적인 판단했다면 이랬어야 하는 겁니다. ---------------------> 소련에 대한 강력 경고, 대일본전 지원 빌미로 감히 만주-한반도 발 내딛지 말라!!! --------------------------------------------------------------------------------------------------------> 태평양 전쟁 기여도 0에 + 일본과 소일-불가및 맺은 주제에 감히 나대지 마라!!! --------------------------------------------------------------------------------------------------------> 혹이라도 일본 항복 밥상에 숟가락 얹는 꼼수 부리면 핵무기 사용해서라도 막겠다!!! 한국전쟁 유엔군 파병, 소련이 거부권 행사했다면 불가능, 왜 소련이 안보리 불참 기권했는지도 냉정히 생각해보길. -------------------------------------------------> 독소전에서 우랄 서부 소련의 핵심 유럽 지역이 사실상 완전 토초화 + 민간인 포함 거의 2천만 인명 피해 상태에서 -------------------------------------------------> 강력하지만 덜떨어진 미국을 극동의 국지전에 몰아 넣고, 동구권에서 철의 장막 확실하게 치려고 의도적으로 기권한 것. -------------------------------------------------> 미국이 한국전쟁에 붙들린 사이에 소련은 동구권에서 철의 장막 완성했음을 깨닫길. -------------------------------------------------> 국가 이익이 충돌하는 장에서 소련-스탈린이 정말 쫄아서? 멍 때리다 안보리 출석 못해 유엔군 파견??? -------------------------------------------------> 스탈린은 독소 불가침 + 일소 불가침 맺었던 음흉한 넘이기에 순진하게 멍 때렸다고 보기 어려운. 만일 영국 없이 미국 단독으로 유럽에서 종전 협상했다면 미국은 소련에게 완벽하게 당했을 것. -------------------------------------------------> 영국은 1944년 그리스에 상륙, 공산 빨치산 토벌 + 티토 유고 지원하며 반소 독자 노선 걷도록 유도. -------------------------------------------------> 미국은 유럽에서도 그저 그저 그저 ... 하루라도 아니 1초라도 빨리 미 본토로 돌아가려 정신 넋 빠졌던. -------------------------------------------------> 그러다 전후 막상 철의 장막 현실 보고서, 뒤늦게 처칠 초청해서 철의 장막 연설 들으며 박수쳤던 뒤늦은 수습. 또한 지난 세기 초, 미국과 영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일본을 극동의 파트너로 선택 러시아-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역활 일본에 부여. 한반도의 일본 지배는 그렇게 사실상 최종 결정된 겁니다. ----------------------> 일본에 먹힌 한반도 때문에 태평양전쟁 종결 과정에서 38선이 태어난 것도 명백. 만일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없이 일본이 미영의 극동 지부 행동대장으로 만족하고 계속 미영의 편에 남았다면 21세기 현재도 한반도와 만주는 여전히 일본령 가능성 압도적. 따라서 한국전 이후 한미 관계만 보며, 미국에 대한 지나친 합리화는 위험. 우리 민족은 이미 지난 세기 초 미국에게 제대로 뒤통수 쳐맞은 경험도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 이해가 거지 안는게 아직 전쟁에 졌다고 할 만한 상황도 아니고 정보부재로 무작정 올라갔다가 조금 밀리는 상황에 너무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이 됩니다 철수니 머니 생각을 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갑자기 왜 밀리는지를 생각하보고 정보의 문제가 있었다면 왜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를 파악하고 대처를 해야 되는게 맞지 안나요 정말 한국전쟁을 보면 미국이 이렇게 무기력한 나라인가라는 생각이 정말 만이 듭니다
@@좌빨박멸 지형도 보시면 함흥,흥남 지역만 가지고는 자연적 방어선이 사실상 없어서 거의 불가능합니다. 요새를 만든다 해도 황초령,부전령 등을 포함하는 높은 함경산맥이 있어 중공군이 바로 감제하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ㅜ 교두보가 더 넓어서 함경산맥 일부를 포함했을 정도면 모를까요
그리고 흥남 교두보 유지가 추후 재북진시 제대로 도움이 되려면 육상전선이 최소한 개성-토산-안협-이천-판교-법동-원산 선까진 빠르게 올라왔어야 원산에서 보급을 해서 교두보를 유지시키고 이걸 바탕으로 양면전선으로 공산군을 밀어올린다는 전략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동해안을 원산까지 아니 못해도 장전/통천까지 올리지 못하면 흥남 교두보는 유의한 이득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위 이유들 때문에 평양원산선에 방어선을 만들어서 버틸 수가 없었던 점에서 참 씁쓸하죠 ㅠㅠ 더구나 이 평양 동쪽부터 낭림산맥을 메꿔야 할 미9군단이 중공군의 공세를 받은 국군2군단을 메꾸느라 많은 고생을 했고 또 미1군단이 청천강 라인에서 평양으로 후퇴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었답니다. 따라서 이로 인해 미9군단과 국군2군단이 속한 2사단은 피해가 너무 커서 평양 동쪽부터 원산까지 방어선을 만들 수가 없었고 이 틈을 타 중공군이 원산까지 남하해 먹어버렸죠 ㅠ
1차대전 미 지상군의 실전 경험은 사실 경미한 수준에 불과, 맥아더-패튼-트루먼 등 당시 투입된 모든 미군 장교들 실전 경험은 지극 짧았던.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에 했지만 + 대규모 징병과 훈련 등 대서양 건널 준비 과정이 필요했고 + 선발대는 1918년 초, 이후 축차로 대서양 건너 파병. 즉 투입된 미군이 본격 전투 참여 시작한 것은 독일 항복 전 몇 개월에 불과. 맥아더 1차대전 전 실전 경험 하기 힘들었고 + 1차대전 때 훈장을 받았지만 미 지상군 전체가 제대로 된 실전 경험 미약했으며 + 전간기 때는 아예 실전 경험 없었음. ---------------------------------> 아버지 후광으로 필리핀에서 총독 비스무리 위세를 떨쳤던 것이 태평양 전쟁 직전 맥아더 상황. ---------------------------------> 막상 태평양 전쟁 발발하고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시작되자 마자 맥아더는 필리핀 탈출. 이 정도가 맥아더의 태평양전쟁 이전 전투 경력. 대한민국과 미국은 한국전쟁 특수 관계로 엮여서 냉철하게 맥아더를 보지 않았던 측면이 있습니다. 중공군 개입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멍 때렸던 것은 치명적 + 명 때리다 중공군에 당한 다음에 핵폭??? -------------------------------> 게다가 중공군 개입은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난 것 아니며, -------------------------------> 지속적으로 특정 조건, 즉 유엔군이 38선 넘어 북으로 진격할 경우 반드시 개입한다고 반복적으로 밝힌 상황에서, -------------------------------> 맥아더는 중공군에 대한 그 어떤 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공군에 사전 대비만 철저히 했다면 충분히 격퇴할, -------------------------------> 군사적-경제적-과학기술 능력 모두를 갖추었기에 맥아더의 멍때림으로 치명적 후폭풍. -------------------------------> 수학에서 유효숫자 개념, 이미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에서 오차 발생했다면 10째 100째 자리 정밀 계산은 할 필요도 없는 시간 낭비. -------------------------------> 중공의 개입 협박을 깡그리 무시하고 멍때린 자가 + 중공군에게 충격받고 핵폭 운운하다가 + 군통수권자에게 해임당했던 것. 맥아더를 해임한 미국 대통령과 정부의 판단이 더 합리적. 1949년 즉 한국전 발발 1년 전, 소련 최초 원폭 실험 성공. 즉 미국의 핵독점 이미 깨진 현실. 또한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만주 전체 + 북경-상해-남경 등 중국 핵심지역 점령 + 중국 해안선 사실상 거의 다 장악하고서도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 1949년 소련 핵무장 현실화 + 1949년 장개석이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축출. 저런 조건에서 압록강 다리 다 부수고 + 중공군의 만주 보급기지 거점 서너 곳 폭격하면 승리 가능하겠습니까? ---------------------------------------------->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고작 1년 전 대륙 통일 완수하고 아직도 잔당 반군 소탕 와중에 한국전을 빌미로 ----------------------------------------------> 미국과 장개석이 다시 대륙 회복에 나설 가능성을 차단 차원에서라고 판단해야 합리적. ----------------------------------------------> 즉 중공 입장에선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반도 전체가 미국 세력권으로 넘어가는 것 방치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영국 미국은 원래 상륙 작전은 기본입니다. 또한 상륙작전 설계 및 실행 주체는 명백히 해군. --------------------------------> 2차대전 북아프리카 횃불 상륙 + 시칠리 상륙 + 노르망디 상륙 + 남부 프랑스 엔빌 상륙, 1차대전 때 실패했지만 갈리폴리 등. --------------------------------> 영국은 지난 수 백년, 지구 차원에서 전쟁 수행했는데 그 모두는 기본적으로 상륙을 전제. 2차대전 미영 연합국이 벌인 상륙 작전의 주도 세력은 미영 해군력. --------------------------------> 미영의 지상군은 퍼날라지는 택배 배송품 수준의 수동적 역활이었으며, 실질적 상륙 작전 수행은 해군 + 압도적 공군의 엄호 한국전쟁 인천상륙 아닌 군산이건 어디건 일단 상륙만 하면 적에겐 치명타. ----------------------------------> 2차대전 노르망디 역시 반드시 거기여서 승리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건 상륙만 성공하면 독일군은 패배할 조건. ----------------------------------> 압도적 제공권으로 독일의 방어선 정보를 사실상 모두 획득했기에 독일이 A에 방어 집중하면 A 지역 피해 다른 B,C 선택하면 그만. ----------------------------------> 롬멜전사록에서 롬멜 역시 그런 점 밝힌, 미영은 상륙 지점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 독일은 모든 해안선을 철저히 방어할 역량 없음을 인정. ----------------------------------> 따라서 여러 선택지들 가운데 오로지 노르망디여서 성공했다고 착각해선 안되는. 즉 인천상륙 맥아더의 천재성으로 과감히 벌인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전쟁 역전했다는 것은 냉정하게 본다면 착각. --------------------------------> 맥아더 아닌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 인천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상륙전 했었어도, --------------------------------> 압도에 압도에 압도적인 해공군력으로 유엔군은 돌파구를 말들었다고 판단해야 합리적. --------------------------------> 사실 냉정하게 본다면 인천상륙 없이 낙동강에서 북괴군을 돌파 섬멸했을 때 적의 타격이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애초 영국 미국과 같이 지구 차원에서 군사력 투사 적을 공격하는 세력이 취하는 것. --------------------------------> 영불해협-지중해-대서양-북해를 건너야만 적을 공격할 수 있기에 필수적인 상륙. --------------------------------> 한반도와 같은 좁아 터진 국지전에서 신규 상륙 병력 투입도 아닌 + 기존 투입된 병력 빼서 상륙??? 문제도 큰 겁니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 당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마 킴멜? 제독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책성 해임. --------------------------------> 만일 니미츠가 선배여서 킴멜 제독 보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 임명되고 그 직후 진주만 기습 당했다면 니미츠도 문책 해임당했을 것. --------------------------------> 킴멜 제독 가족과 후손들이 21세기 최근도 명예 회복시켜달라는 청원도. ( 킴멜은 41년 2월 진주만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 미 태평양함대는 원래 미 서부 해안에 위치, 하지만 루즈벨트 명령으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 ) ( 일본 위협 대비한다면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미 본토에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한 루즈벨트 + 지중해에서 영국의 타란토 기습 성공 및 영국측의 진주만 역시 타란토와 유사하기에 일본 위협에 철저 대비하란 경고 무시했던 루즈벨트 + 태평양함대 이전에 반대하던 제독을 해임하고 과거 루즈벨트가 해군성에 근무할 때 부관이었던 킴멜을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않히고선 진주만 기습당하자 해임 + 루즈벨트 자신의 멍 때림은 책임 안지고. ) ---------------------------------> 맥아더 역시 필리핀에서 사실상 혼자 탈출한 책임을 물어, ---------------------------------> 진주만으로 해임된 태평양함대 사령관 처럼 해임시켰더라도 솔직히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던 위치. ---------------------------------> 필리핀 함락 당시 해임되어도 별 문제 없었던 맥아더가 ---------------------------------> 미 해군이 사실상 주도한 태평양전쟁의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일본 항복 받아낸 그 사실 자체가 보기에 따라선 넌센스. ---------------------------------> 냉정하게 본다면 태평양전쟁은 미 해군의 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미 지상군은 사실상 들러리 수준에 불과. ---------------------------------> 필리핀 상륙 따위는 하거나 말거나 태평양 전쟁 승패에 아무런 영향 없는, 보기에 따라선 미 육군과 맥아더 개인 위신 체면치레용 성격도. ---------------------------------> 필리핀 상륙은 미 육군 입장에선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는 육군의 역활 존재감 과시용. 맥아더는 자신의 능력으로 검증받은 제대로 된 실전 성과 탁월함??? 의문입니다. 1차대전이전 + 1차대전 + 전간기 + 필리핀함락 + 태평양전쟁수행, 원수가 되어야할 그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는. ----------------------------------> 그리고 맥아더 주연 패튼 조연 흑역사 잊지 말아야. ----------------------------------> 대공황 당시 생계 어려움을 겪던 1차대전 참전 용사들이 그 동안 지급되지 않았던 참전 보상금 지급 시위하자, ---------------------------------->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맥아더는 공산주의 시위라고 폄하하며 패튼 중령에게 무력 해산 지시. ----------------------------------> 1차대전 참전 동료들을 향해 맥아더와 패튼은 장갑차까지 동원하고 + 가족들도 함께 있던 시위대 텐트 불사르며 강경 진압 부상자 발생하기도.
맥아더에 비해 실전 경험 훨씬 많은 패튼, 그 패튼의 실전 경험, 1차대전-전간기-2차대전 다 통틀어 본다면 이렇습니다. 1차대전 전 경험 제외. ( 세계대전급 아니며 + 강대국 상대 실전 아니기에 )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넉넉하게 추정해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4년 7월경. 하지만 대규모 지상군 편성하고 대서양 건너 파병하는데 약 1년의 시간 필요. 준비 차원의 조사관들은 즉시 대서양 건넜지만 최초 소규모 선발부대는 18년 2월경 유럽에 도착 + 이후 축차적 대서양 횡단 병력 증강. 독일 항복은 1918년 11월, 대서양 건넌 미군이 유럽에서 부대 편제 제대로 갖추고 실전 투입은 독일 항복 얼마 전으로 6개월 내외로 판단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짧았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시칠리 전투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발생. 맥아더는 패튼과 같이 야전에서 직접 대규모 전투 지휘한 경험도 없다는 점에서 맥아더의 원수 계급은 냉정하게 본다면 극단적 계급 인플레.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사실상 전멸급 패배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당시 인구 5천만에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를 영국-캐나다 연연방군이 상대. 당시 독일 타이거 및 판터 전차 격파할 전차포 갖춘 전차는 영연방군 파이어플라이 정도.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2차대전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약 80%를 영국-캐나다군이 상대. 당시 미군은 실전 경험 사실상 전무했던 신병들로 구성되어, 독일 주력 상대 불가능해 영국군이 독일 주력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캐나다군이 독일 5호 판터 및 6호 타이거 전차를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 소개하죠. 1. th-cam.com/video/cNGGt1ORO-0/w-d-xo.html Sherman Firefly vs King Tiger | July 1944 | Tank Duel ----------------------> 44년 7월 18일, 파이어플라이 서부전선 최초 킹타이거 격파. 2. th-cam.com/video/V-jGdZ5XWNM/w-d-xo.html Sherman Firefly vs SS Panthers - Tank Battle At Normandy, France ------------------------------> 44년 7월 9일, 캐나다군 파이어플라이 판터 7대 격파. 3. th-cam.com/video/IrEtdMkFA00/w-d-xo.html Tank Battles of WW2 - The Firefly Ace that knocked out 5 Panthers with 5 rounds ------------------> 44년 7월 14일, 파이어플라이 1대가 5번 사격, 5대 판터 격파 노르망디 전역에서 미하일 비트만이 탄 타이거 역시 영국군 파이어플라이에게 격파당해 전사. 4. th-cam.com/video/R4LyLCOUkzI/w-d-xo.html Cromwell vs 2 Panther tanks | September 1944 | Tank Duel ----------------------> 노르망디 돌파 후 44년 9월 19일 네덜란드, 영 크롬웰 전차 판터 2대 격파. 파이어플라이와 같은 17파운드 포를 장비한 크롬웰도 판터 타이거 격파 가능. 크롬웰은 당시 전차 중에선 기동성 가장 좋아 최고 속도 시속 약 65km/h.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타이거와 첫 교전 후 대응으로 43년 무렵 MBT 개발 시작, 그 사이 과도기에 미 셔면에 17파운드 포를 장착한 파이어플라이 및 크롬웰 등으로 응급 조치하며 버틴 것.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때 미군은 타이거 판터 대비 측면에선 사실상 멍 때렸던. 영국은 종전까지 약 2천대 파이어플라이 생산했고, 노르망디 상륙 때는 파이어플라이 생산 초기여서 초기 생산분 약 350대를 투입했다고.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는 영국군이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미국과 영국의 전차 중에서 전차포로 독일 판터나 타이거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군 파이어플라어-크롬웰 정도. 파이어플라이 역시 약한 장갑 때문에 극심한 피해를 당했지만, 독일 타이거나 판터 역시도 파이어플라이에게 먼저 공격당하거나 매복에 걸리면 격파당했기도. 노르망디 전역은 이미 독일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한 이후에 벌어진 전투로, 탁 트인 들판에서 전차가 고속 기동하는 전투 아닌 보카쥬 지형에서의 매복성 전차 전투. 처음엔 공격하는 영국군 전차가 매복한 독일군 전차에게 당하는 위치였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독일군 전차도 영국군 매복이나 배후 침투에 당해 격파되었던. 독일의 그 어떤 전차라도 격파할 수 있는 전차포를 가진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원거리에서는 약한 장갑 때문에 독일 타이거에게 당할 위험이 컸지만, 보카쥬 지형에선 원거리 아닌 근접 전투도 많았기에 파이어플라이는 나름 역활을 한. 하지만 미군의 일반적인 셔면은 판터나 타이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일 패전 직전인 1945년 1월, 2대의 독일 판터가 21대의 미 셔먼과 교전했을 때 ----------------> 셔먼 9대 격파 + 셔먼 12대 포획. 만일 보통의 셔먼만 아닌 파이어플라이와 혼성 편성되었다면 판터의 저런 전과 불가능. 45년에도 저랬으니 실전 경험 없었던 44년 노르망디에선 더 취약했을 것. 2 SS Panthers vs. 21 US Shermans th-cam.com/video/86K0ncTkAkA/w-d-xo.html 1945년 ( 영 최초 MBT인 센츄리온의 직전 모델인 ) 실전 투입된 마지막 순항전차 코메트. th-cam.com/video/tRxU0B8cybY/w-d-xo.html Comet Tank vs Tiger Tank | April 1945 | Tank Duel ----------------------------> 45년 4월 종전 직전, 영 코메트(센츄리온 직전 모델) 타이거 격파 여기 영상의 코메트 모습은 현대 주력 전차 유사, 하지만 센츄리온으로 바로 대체된. 최초의 MBT인 센츄리온은 너무 늦게 투입되어 실전 경험 없었음. th-cam.com/video/0AnoySTfvFM/w-d-xo.html Centurion - Tiger Tank's Nemesis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독일 항복 직후인 5월 14일, 센츄리온 6대 영 항구에서 선적, 몇 일 후 안트워프 항에 하역. 최전선 소련군 점령지 경계까지 약 400마일 자력 기동 영국군 기갑부대 배속, 영 미 탱크들과 함께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 후 7월 귀환. ----------------------------------------------------------------------------------> 2차대전 종전 당시 미 퍼싱, 영 센츄리온 등장으로 이미 독일 전차의 질적 우위는 끝난 상태.
이승만 정부는 한강인도교 조기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을 ( 공병감 ) 사형시켰습니다. 최창식 대령의 부인은 1961년 재심 청구를 했고 + 1964년 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승만은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피신 + 라디오 방송엔 의정부에서 국군이 북괴군을 격퇴했다는 전파가 흘러나왔고 +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폭파 ---------------------------------------> 저런 상태에서 한강인도교 폭파 후 악화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 명령 받고 임무 수행한 공병감 사형시킨 것. ( 좌빨들은 저 대동강철교로 피란하는 장면을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끊은 장면으로 왜곡했는데 참 기가 찹니다... ) ---------------------------------------> 대동강 철교 사진과 상관 없이 기가 찰 일임을 깨닫길. 바뀌는 것 사실상 전무하며 + 공병감을 사형시킨 부분에선 더더욱 기가 찰 수도. 관련 기사 내용 인용하면 ========================================================= 당시 군법회의는 단심제(單審制)였기에 법적인 항고(抗告)가 불가능했다. 기자는 1950년 9월 15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유죄 판결문을 입수했다. 다음은 요지.
최 공병감은 한강교 폭파로 인한 책임을 지게 된 셈인데, 이 군법회의의 판결은 폭파를 직접 명령한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이 전사한 뒤였다.
이 판결은 그러나 1961년 9월 최 공병감의 부인인 옥정애(玉貞愛)씨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고 이를 접수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이듬해 5월 15일 원심판결 무효를 선고했고, 1964년 10월 23일 결심공판에서 최 공병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은 무죄 판결문 요지.
당시 재판을 맡았던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황준환 대령(재판장)은 ‘조급(早急) 폭파’를 인정하면서도 최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한국전쟁 때 우리 대통령-군-정부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한민국이어야 미래 희망이 있습니다. 1.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넘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불과 6개월 정도 후인 1951년 초 한겨울 추위 속에서 중공군 남하 당시, 전시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방비리가 벌어져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보충역으로 징집된 약 50만 병력 중에서 추정치 약 10만 병력이 적과의 전투 아닌 비전투 손실로 남쪽으로 후퇴 행군 도중에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서북청년단 단장 출신의 민간인이 임명된. 너무나 황당무계한 사태가 터져 다 덮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령관 포함 몇 명 처형되는 선에서 덮어버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국민방위군은 해체.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 15만 조금 안되는데, 국민방위군 비전투 손실로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병력이 추정 약 10만. ----------------------------------------> 2차대전 영국군 최대급 패배 마켓가든 작전 실패 때, ----------------------------------------> 서방 연합군 총 인명 손실, 영국+미국+폴란드의 전사+행불+포로 총합 = 약 18,000명 (십팔만 아닌 일만팔천 ) ----------------------------------------> 게다가 인명 피해 대부분은 포로, 영 공수부대 전사자 약 1100명 + 영 30군단 전사자 약 5500명. 이기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 안심시켜 놓고 + 한강다리 끊고 튀어서 ----------------------------------------> 님이 피난 못가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고 가정해보길. ----------------------------------------> 운좋게 전쟁 중 개죽음 당하지 않고 + 휴전 전에 북괴군 탈출해 대한민국에 남았다고 해도 ----------------------------------------> 한강다리 끊고 튀었다 다시 돌아온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들은 님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잊지 말기를. ----------------------------------------> 튀었던 넘들이 님을 북괴군 빨갱이 내지는 부역자로 몰고 + 님 아들 딸 역시 연좌제로 어려운 세월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단죄하는지 ... -----------------------------------------> 임진왜란 때도 잽싸게 튄 국왕과 조정이 충무공 고문해 죽음 직전으로 몰고, -----------------------------------------> 최대 의병 이끌던 의병장 김덕령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고 + 호란 때 겨우 살아 돌아온 여인들을 화냥년이라고 내치고 -----------------------------------------> 한국전 때도 단죄 당해야할 넘들이 오히려 단죄의 칼 휘둘렀던, 자유와 민주주의 깃발 나부끼면서. 2.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 터지기 전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좌익을 전향시켜 반공 데모 시위에 동원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하고 전황 안좋아지니까, 불안-초조-공포에 휩싸여 전향한 좌익인 보도연맹원들 대대적으로 체포, 체포로도 너무 불안해서 선제 대량 학살로 제거. 그렇게 희생된 이들 명단은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훗날 책임질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록 남기지 않고 처형. 추정치로 선제 예방 학살로 처형된 인원은 단위가 10만대, 정확히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르는. 보도연맹 희생자들 유골 발견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뉴스에 나오며 현재 진행형.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선제 사전 예방 학살 아닌 지진 터진 이후에 학살. 남경대학살 --------------------------------->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인들 상대로 도시 점령 과정 및 점령 완료 후 대량 학살. 우리 보도연맹 사건 --------------------> 같은 민족을 상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전 예방 학살. 21세기 현재 기준으론 전세계적 규탄과 반인류적 범죄로 반드시 처벌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는 것 명심하길. 더 안타까운 것은 보도연맹원 모집 당시 전국에 할당량이 내려져, 시골에선 아는 주민들 이름 공무원들이 그냥 올리기도 했고, 심할 경우에도 애들 이름도 적어 넣었는데, 보도연맹원 체포와 예방 학살 과정에서 완전 억울하게 좌익 아닌 이들도 꽤 많이 희생된. 실제 전향했던 좌익들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고. 3. 휴전 후 귀환 포로 심문 사망 남북은 정말 휴전되던 최후의 순간에도 대단했습니다. ----------------------------------------> 북괴군 포로들 38선 넘을 때 영상 보길, 팬티만 남기고 옷 다 남쪽으로 벗어던지고 욕퍼붓고 구호 외치면서 북으로. ----------------------------------------> 북괴는 우리 국군 포로 대부분의 존재 인정안하고 강제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 극히 일부 포로만 인정해 남으로 송환시킴 ----------------------------------------> 북이 일부 국군 포로를 남으로 송환시킨 이유 역시 반공포로 거부하고 북으로 가겠다는 포로들 돌려받기 위한 목적. ----------------------------------------> 불행히도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 겨우 살아돌아온 우리 국군 포로들을 구 북괴군 포로 수용소에 일단 가두고, ----------------------------------------> 혹 간첩으로 파견되었는지 여부 조사 과정에서 일부 귀환 우리 국군 포로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 ----------------------------------------> 말로만 조사했겠습니까? ----------------------------------------> 대한민국이 저랬는데 북괴는 안그랬겠습니까? 북으로 팬티만 입고 넘어간 이들 일부 역시 북에서 비참한 최후 맞았을 것. ----------------------------------------> 자국의 군인들이 적에게 포로되었을 때 저 따위로 대접하는 국가와 군은 도대체 뭡니까?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국민방위군-보도연맹 사태 정도면 일단 전시여도 내각 총사태하고 대통령 및 군 최고지휘부 상당수는 사법치리 피할 수 없었을 것. 특히 거짓 방송 틀어놓고 튄 대통령의 행위,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소 휴전 후에라도 그 책임을 물었을 것. 우린 사실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도. 우리 모두 운이 좋아 저 당시 대한민국의 20세 청년이 아니어서 개죽음 면한 것. 북괴 공산당 매운 맛 뺨칠 정도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매운 맛도 엄청났다는 것 경험하지 못한 행운에 감사해야. 한국전 당시 남북은 상호간 그리고 남과 북 각각의 내부에서 머리띠 두르고 완장차고 확신에 가득차 쳐죽여댔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 최고 지휘부의 전쟁 지휘 능력 -------------------> 전시 작전권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박탈당할 때 최고 지휘부에 있었던 이를 구국의 영웅인양 받드는 정신 나간 행위들이 아직도. 또한 한국전 휴전 과정에서도 믿는 것도 없이 북진 통일 궐기하면서 나대다가, 휴전 협정 당사자로 참여도 못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대상들은 미국-유엔-중공-북괴 ------------------------------> 대한민국은 업저버 정도. 휴전 당시 업저버 위치가 된 대한민국이라면, 대통령-정부-군의 결정적 오판 부인하기 힘들 것. 그리 북진통일 자심감 넘쳤다면 남침당하지 말고 선제 기습 북진해서 북괴를 멸망시키는 대한민국 먼저 만들었던지 ... 한국전쟁 직전에도 군 일부 장성들 자신감 만땅에,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에서 어쩌고 주둥이질에...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총알 부터 식량까지 원조에 의존하면서, 주둥이로만 북진 통일, 거기다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둥이로만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고 ...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함흥,흥남일대를 포기하지 않고 버텨 요새화해서 가지고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당연하지만 실제 당시 전황을 고려하면 불가능했다고 보입니다. 중공군의 남하 속도도 빨랐던데다 평양 쪽 외의 중부,동부전선을 메꿔야 할 사단이 거의 궤멸수준이라 흥남에 교두보 만들어 다시 재북진때까지 버틴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저 교두보를 유지할 강력한 자연적인 방어선도 없었고 (경계가 함경산맥까지 형성되었다면 자연 방어선이 되어 좀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만요) 재북진 때까지 공산측이 계속 공격했을 것입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진흥왕이 함흥평야 먹고 황초령,부전령까지 북진했었지만 결국 숨을 돌린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자진 포기하거나 다시 빼앗겼던 걸 생각하면 (거기에 진흥왕 때는 교두보 형태가 아닌 원산, 함흥을 통해 본토와 완전히 연결되었는데도요)
흥남을 요새화해서 버티고 교두보하는 게 무조건 불가능하진 않았겠다만 현실적으로 보급문제, 방어선 형성, 병력 규모와 중공군 남하 및 공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어려웠습니다 ㅜ 함흥, 흥남 교두보 규모를 보면 함경산맥까지 포함하지 못해서 장기적으론 중공군이 함경산맥 등에서 감제하고 내다보기 때문에 방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함경산맥 일부를 제대로 포함하고 성천강을 완전히 낄 정도로 크게 교두보를 형성했다면 달랐겠지만요. 물자와 병력 등을 보급하면 가능하지 않냐 하시는데 이미 동해안은 원산도 빼앗기고 아예 양양까지 밀려났습니다. 이런데 양양 이남에서 흥남까지 먼 거리를 계속 보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다고 판단됩니다
이승만 정부는 한강인도교 조기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을 ( 공병감 ) 사형시켰습니다. 최창식 대령의 부인은 1961년 재심 청구를 했고 + 1964년 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승만은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피신 + 라디오 방송엔 의정부에서 국군이 북괴군을 격퇴했다는 전파가 흘러나왔고 +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폭파 ---------------------------------------> 저런 상태에서 한강인도교 폭파 후 악화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 명령 받고 임무 수행한 공병감 사형시킨 것. 따라서 이런 식의 합리화는 불가능합니다. 사례1 ( 그 대동강 파괴된 다리 사진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런승만 만들었지요 ) 사례2 ( 좌파들은 파괴된 대동강교 사진을 이승만 대통령이 시민들이 건너고 있는데도 폭파시킨 한강철교라고 선동했죠.. ) 사례3 ( 좌빨들은 저 대동강철교로 피란하는 장면을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끊은 장면으로 왜곡했는데 참 기가 찹니다... ) 사례4 ( 요즘 역사교육의 문제를 절실히 느끼네요. 유튜브라는 매체가 생겨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대동강교 폭파사진조차도 한강대교라고 써먹는.. ) 다른 사례들은 생략 ---------------------------------------> 대동강 철교 사진과 상관 없이 바뀌는 것 사실상 전무하며 + 공병감을 사형시킨 부분에선 더더욱 기가 찰 수도 관련 기사 내용 인용하면 ========================================================= 당시 군법회의는 단심제(單審制)였기에 법적인 항고(抗告)가 불가능했다. 기자는 1950년 9월 15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유죄 판결문을 입수했다. 다음은 요지.
최 공병감은 한강교 폭파로 인한 책임을 지게 된 셈인데, 이 군법회의의 판결은 폭파를 직접 명령한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이 전사한 뒤였다.
이 판결은 그러나 1961년 9월 최 공병감의 부인인 옥정애(玉貞愛)씨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고 이를 접수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이듬해 5월 15일 원심판결 무효를 선고했고, 1964년 10월 23일 결심공판에서 최 공병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은 무죄 판결문 요지.
당시 재판을 맡았던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황준환 대령(재판장)은 ‘조급(早急) 폭파’를 인정하면서도 최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한국전쟁 때 우리 대통령-군-정부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한민국이어야 미래 희망이 있습니다. 1.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넘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불과 6개월 정도 후인 1951년 초 한겨울 추위 속에서 중공군 남하 당시, 전시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방비리가 벌어져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보충역으로 징집된 약 50만 병력 중에서 추정치 약 10만 병력이 적과의 전투 아닌 비전투 손실로 남쪽으로 후퇴 행군 도중에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서북청년단 단장 출신의 민간인이 임명된. 너무나 황당무계한 사태가 터져 다 덮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령관 포함 몇 명 처형되는 선에서 덮어버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국민방위군은 해체.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 15만 조금 안되는데, 국민방위군 비전투 손실로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병력이 추정 약 10만. ----------------------------------------> 2차대전 영국군 최대급 패배 마켓가든 작전 실패 때, ----------------------------------------> 서방 연합군 총 인명 손실, 영국+미국+폴란드의 전사+행불+포로 총합 = 약 18,000명 (십팔만 아닌 일만팔천 ) ----------------------------------------> 게다가 인명 피해 대부분은 포로, 영 공수부대 전사자 약 1100명 + 영 30군단 전사자 약 5500명. 이기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 안심시켜 놓고 + 한강다리 끊고 튀어서 ----------------------------------------> 님이 피난 못가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고 가정해보길. ----------------------------------------> 운좋게 전쟁 중 개죽음 당하지 않고 + 휴전 전에 북괴군 탈출해 대한민국에 남았다고 해도 ----------------------------------------> 한강다리 끊고 튀었다 다시 돌아온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들은 님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잊지 말기를. ----------------------------------------> 튀었던 넘들이 님을 북괴군 빨갱이 내지는 부역자로 몰고 + 님 아들 딸 역시 연좌제로 어려운 세월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단죄하는지 ... -----------------------------------------> 임진왜란 때도 잽싸게 튄 국왕과 조정이 충무공 고문해 죽음 직전으로 몰고, -----------------------------------------> 최대 의병 이끌던 의병장 김덕령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고 + 호란 때 겨우 살아 돌아온 여인들을 화냥년이라고 내치고 -----------------------------------------> 한국전 때도 단죄 당해야할 넘들이 오히려 단죄의 칼 휘둘렀던, 자유와 민주주의 깃발 나부끼면서. 2.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 터지기 전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좌익을 전향시켜 반공 데모 시위에 동원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하고 전황 안좋아지니까, 불안-초조-공포에 휩싸여 전향한 좌익인 보도연맹원들 대대적으로 체포, 체포로도 너무 불안해서 선제 대량 학살로 제거. 그렇게 희생된 이들 명단은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훗날 책임질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록 남기지 않고 처형. 추정치로 선제 예방 학살로 처형된 인원은 단위가 10만대, 정확히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르는. 보도연맹 희생자들 유골 발견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뉴스에 나오며 현재 진행형.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선제 사전 예방 학살 아닌 지진 터진 이후에 학살. 남경대학살 --------------------------------->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인들 상대로 도시 점령 과정 및 점령 완료 후 대량 학살. 우리 보도연맹 사건 --------------------> 같은 민족을 상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전 예방 학살. 21세기 현재 기준으론 전세계적 규탄과 반인류적 범죄로 반드시 처벌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는 것 명심하길. 더 안타까운 것은 보도연맹원 모집 당시 전국에 할당량이 내려져, 시골에선 아는 주민들 이름 공무원들이 그냥 올리기도 했고, 심할 경우에도 애들 이름도 적어 넣었는데, 보도연맹원 체포와 예방 학살 과정에서 완전 억울하게 좌익 아닌 이들도 꽤 많이 희생된. 실제 전향했던 좌익들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고. 3. 휴전 후 귀환 포로 심문 사망 남북은 정말 휴전되던 최후의 순간에도 대단했습니다. ----------------------------------------> 북괴군 포로들 38선 넘을 때 영상 보길, 팬티만 남기고 옷 다 남쪽으로 벗어던지고 욕퍼붓고 구호 외치면서 북으로. ----------------------------------------> 북괴는 우리 국군 포로 대부분의 존재 인정안하고 강제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 극히 일부 포로만 인정해 남으로 송환시킴 ----------------------------------------> 북이 일부 국군 포로를 남으로 송환시킨 이유 역시 반공포로 거부하고 북으로 가겠다는 포로들 돌려받기 위한 목적. ----------------------------------------> 불행히도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 겨우 살아돌아온 우리 국군 포로들을 구 북괴군 포로 수용소에 일단 가두고, ----------------------------------------> 혹 간첩으로 파견되었는지 여부 조사 과정에서 일부 귀환 우리 국군 포로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 ----------------------------------------> 말로만 조사했겠습니까? ----------------------------------------> 대한민국이 저랬는데 북괴는 안그랬겠습니까? 북으로 팬티만 입고 넘어간 이들 일부 역시 북에서 비참한 최후 맞았을 것. ----------------------------------------> 자국의 군인들이 적에게 포로되었을 때 저 따위로 대접하는 국가와 군은 도대체 뭡니까?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국민방위군-보도연맹 사태 정도면 일단 전시여도 내각 총사태하고 대통령 및 군 최고지휘부 상당수는 사법치리 피할 수 없었을 것. 특히 거짓 방송 틀어놓고 튄 대통령의 행위,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소 휴전 후에라도 그 책임을 물었을 것. 우린 사실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도. 우리 모두 운이 좋아 저 당시 대한민국의 20세 청년이 아니어서 개죽음 면한 것. 북괴 공산당 매운 맛 뺨칠 정도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매운 맛도 엄청났다는 것 경험하지 못한 행운에 감사해야. 한국전 당시 남북은 상호간 그리고 남과 북 각각의 내부에서 머리띠 두르고 완장차고 확신에 가득차 쳐죽여댔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 최고 지휘부의 전쟁 지휘 능력 -------------------> 전시 작전권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박탈당할 때 최고 지휘부에 있었던 이를 구국의 영웅인양 받드는 정신 나간 행위들이 아직도. 또한 한국전 휴전 과정에서도 믿는 것도 없이 북진 통일 궐기하면서 나대다가, 휴전 협정 당사자로 참여도 못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대상들은 미국-유엔-중공-북괴 ------------------------------> 대한민국은 업저버 정도. 휴전 당시 업저버 위치가 된 대한민국이라면, 대통령-정부-군의 결정적 오판 부인하기 힘들 것. 그리 북진통일 자심감 넘쳤다면 남침당하지 말고 선제 기습 북진해서 북괴를 멸망시키는 대한민국 먼저 만들었던지 ... 한국전쟁 직전에도 군 일부 장성들 자신감 만땅에,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에서 어쩌고 주둥이질에...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총알 부터 식량까지 원조에 의존하면서, 주둥이로만 북진 통일, 거기다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둥이로만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고 ...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맥아더의 지도력은 형편없었다. 못해도 그렇게 못할 수가 없다. 내가 해도 맥아더보다 더 잘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맥아더 개인의 정치적 욕심을 위해 한국전쟁을 엉망진창으로 한건지 아니면 보너스아미진압 이후부터 형편없는 구식군인이었는지 구분이 안간다. 게다가 일개 군인이 국가의 정치적 목표달성을 위해 치르는 전쟁에 항명이나 하고 있으니 참으로 형편없는 군인이었다. 추수감사절공세, 크리스마스공세 때의 맥아더는 치매노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시 우리나이로 72세였으니 노쇠하기도 했다.
따라서 서부전선의 미1군단으로만은 평양원산선을 만드는 게 도저히 불가능했고 게다가 빨리 후퇴하지 않으면 매섭게 남하하는 중공군에 의해 후방까지 차단되어서 자칫 평양에서 궤멸될 위험이 너무 컸죠 ㅜ 이러한 상황에서 평양원산선은 커녕 빨리 임진강-영평천-화천저수지-한계령-양양까지 전략적 후퇴를 한 다음에 병력 보강, 방어선 확충을 한 후 중공군을 막고 다시 재북진을 바랄 수밖에 없었죠 ㅠ
거짓말 않고 5번이상 봅니다
59세인데 제대로 625의 실상 현실을 배우는것 같습니다
4분의 역량에 감사하며
역전다방 응원합니다 ~~^^
와...진짜 그냥 겉넘게 들은 역사 였는데......암튼 너무 감사 합니다..진짜 정말 우리나라를 아끼고 사랑 해야 합니다
넘 잼 있어서.........시간 가는줄 모르겠습니다...........그리고 흥남 요새화 시도가 실현 되지 않은 점은 참 아쉽네요............
흥남 요새화가 설득력 있네요
역전다방 최고입니다
너무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학교에선 625전쟁 배울때 인천상륙작전 평양진격 압록강 흥남철수 협상 이렇게만 요약해서 배우고 자세히 안다루는데 이런 과정들이 있었군요..
갑자기 평양에서 확 밀려난것도 궁금했는데 이제서야 알게 되는군요
진짜 앞으로도 저정도의 민간 구호수송작전은 전무후무할듯...
배(해상)라서 저 정도 대규모 인원이 가능한 면도 있다고 봐요. 육상, 항공으로는 애초에 힘들지 않을까
@@삼사라잠자라 포위 퇴각 작전에 자국민도 아닌 민간인을 무기 장비 보급 다 버리고 저 정도로 배애 태워서 구출한 전례가 없죠.
1. th-cam.com/video/MsoiKnnUskM/w-d-xo.html
The Grey Ghost - The Queen Mary LBUSD Education : 영국 거대 여객선 퀸메리
성격이 다르지만 영 거대 여객선 퀸메리 단 1척이 2차대전 기간 5대양 ( 주로 대서양 ) 누비며 병력 약 80만 수송.
영국 7~8만톤급 거대 여객선 단 2척 퀸메리-퀸엘리자벳, 왕복 인원 약 160만 병력 수송, 즉 귀환 아닌 파병만 따질 경우 약 80만 병력 수송.
병력 수송 대부분은 미군 병력 + 소수의 호주-뉴질랜드 등 영연방군 = 즉 대서양 건넌 약 300만 미군 중 대략 그 1/4이 영 거대 여객선 2척으로 수송된.
2. 1940년 프랑스
덩케르크 철수 및 그 직후 실시된 아리엘 철수, 민간인 포함 약 56만명 탈출 = 영국군 약 37만 포함
1940년 5월26일~6월4일 덩케르크 다이나모 + 1940년 6월14일~6월25일 브리타뉴 지역 아리엘 철수 작전 합산.
From the end of Operation Dynamo at Dunkirk, Operation Cycle from Le Havre, elsewhere along the Channel coast and the termination of Operation Aerial, another 191,870 troops were rescued, bringing the total of military and civilian personnel returned to Britain during the Battle of France to 558,032, including 368,491 British troops.
덩케르크 이후에도 프랑스 서부의 여러 항구들에서 채널제도의 영국령 섬들을
거치는등 부지런히 탈출시켰습니다. 물론 최종적 으로는 채널 제도의 영국령 섬들은 독일에 점령.
덩케르크 종료 후 아리엘 작전, 브리타뉴로 밀려난 영불군 셀부르와 브레스트 등에서 20만 추가 탈출 성공.
th-cam.com/video/tH4zintf6qg/w-d-xo.html : Troops In Louvain, Belgium - May 1940 (1940)
영국군 1940년 벨기에, 덩케르크 쪽으로 철수하는 모습. 유니버설 캐리어에 병력이나 견인포 메달고 후퇴 장면.
트럭이 아닌 다양한 경장갑 차량들도 보일 겁니다. 1940년 당시 기계화 보병 수준이었습니다. 이 영상 말고 다른
영상에는 차량 후퇴 대열 후미에서 영국군 최후방 보병들이 폭파물 설치하면서 후퇴하는 장면도 있음.
th-cam.com/video/0GsuaHTSgbA/w-d-xo.html : 아리엘 철수 영상, 도로 건물들 멀쩡. 신속한 후퇴 의미.
당시 독일군은 정지 명령 없이 공격중이었지만, 항구 도로 건물들 멀쩡한 상태로 보아 후퇴 속도가 훨씬 빨랐던 것.
화면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때도 역시 철수 부대 후미에선 독일군과 치열한 교전 있었을 것.
한국전쟁 흥남 철수는 압도적 제공권+제해권 조건에서 장비 빈약한 중공군 상대의 철수였지만
----------------------------------------------> 1940년 프랑스에서의 철수는 강력한 독일 공군과 지상군 공세 속에서 벌어진 철수라는 성격 차이.
----------------------------------------------> 흥남 철수에선 미군 전함 항모 포함 수 많은 전투함들이 안전하게 해안 및 가까운 해역에서 철수 작전을 엄호할 수 있었지만,
----------------------------------------------> 1940년 프랑스에선 독일 공군 위협으로 영국 해군 주력 전투함들은 영불해협 근처에 접근도 하기 힘들었고 구축함급에서 큰 손실.
@user-zf5sf9tl8y 장진호전투보면 장비 보급지키면서 같이 퇴각할려고 애를 씀 근데 그걸 마지막에 민간인때매 버린건 대단한거임 까놓고 다른나라인 미국이기도하고
고맙습니다^^*
정보가 어느정도 확보됐다면 흥남요새화 작전을 썼을텐데..ㅜ 정말 아쉽네요
흥남대철수는
진짜 대한에 자랑입니다 🎉
아몬드대장
고맙습니다 🎉
저꼬라지 나게한 원흉중 하나인데 뭐가 고마워
이정도면 만약 다시 전쟁이 난다면 고 가정하고 교보제로 써야합니다
한국전 흥남철수를 감정적으로 다룬것만 봤지 전력적으로 본 내용은 처음입니다
재미나게봅니다 일주일을 또 언제기다리누
공감합니다😂ㅋㅋ
방송 재밌게 잘 보구있습니다.부탁을 한가지 건의를 좀 드리고자 합니다.6 25전쟁의 터닝포인트가 됐던 전투들이 많이 있습니다.개전초 북괴군의 작전계획을 완전히 망가뜨렸던 국군6사단의 춘천,홍천전투.해군의 대한해협해전,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지평리전투,문경전투.3군단이 해체됐던 현리전투.국군6사단의 사창리전투.그리고 용문산전투에서 시작이 된 파로호전투 까지 연도별로 자세하게 다뤄주셨으면 합니다.꼭 이요!^^
이 영상은 여러번 봐야 겠네요. 진짜 흥미 진진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희생 당하신 한국군과 미국군, 유엔군에게 감사드리면서 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누리는 자유가
선대분들의 피와땀으로 이루어진 것은데
온 국민들이 다 봐야하는 방송입니다.
고급진 영상으로 베풀어주신 4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
한회 한회 몰랐던 사실 알았지만 깊이가 부족했던 사실까지 모두 알게되네요. 감사합니다. 채박사님 화이팅~!!
결과론이긴 하지만 흥남 요새화 계획만 실행되었어도 통일까지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휴전선이 훨씬 북쪽에 있었을 것 같은데 너무 아쉽네요. 이래서 총사령관의 판단이 중요한데 말이죠. 맥아더 사령관은 여러가지로 아쉬운 점이 많은 분 같습니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단정 못 합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요.
러일전쟁도 다뤄주시길 바랍니다 😮😮😮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 봤다...
진짜 배워야되네요. 제가 지금 껏 알고 있던 6.25전쟁이 아닌 느낌이고 뭔가 또 시야가 확 넓어진 느낌입니다.
미국에 적당한 군대도 아니고 심지어 맥아더에 UN연합군이 참전했는데
심지어 또 소련도 아닌 중국에게 밀린다는 부담감이 미국에게 크게 느껴질법도 합니다.
이후에 베트남 전쟁에서도 고전을 한걸 보면
미국이 소련의 미그기나 전차, 군대들에 대해 왜 그렇게 과대평가를 했는지도 이해가 되네요.
흥남에서 충분히 버텼을 것 같은데 ㅠㅠ
지형도 보시면 함흥,흥남 지역만 가지고는 자연적 방어선이 사실상 없어서 거의 불가능합니다. 요새를 만든다 해도 황초령,부전령 등을 포함하는 높은 함경산맥이 있어 중공군이 바로 감제하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ㅜ 교두보가 더 넓어서 함경산맥 일부를 포함했을 정도면 모를까요
버티는 게 가능합니다.
평지가 화력전으로 방어를 하기가 쉽기도 해요,
보급을 충분하게 받는 미군의 승리죠.
중공군들은 얼어 죽지요.
@@truth1472 흥남을 요새화해서 버티고 교두보하는 게 무조건 불가능하진 않았겠다만 현실적으로 보급문제, 방어선 형성, 병력 규모와 중공군 남하 및 공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어려웠습니다 ㅜ 함흥, 흥남 교두보 규모를 보면 함경산맥까지 포함하지 못해서 장기적으론 중공군이 함경산맥 등에서 감제하고 내다보기 때문에 방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함경산맥 일부를 제대로 포함하고 성천강을 완전히 낄 정도로 크게 교두보를 형성했다면 달랐겠지만요. 물자와 병력 등을 보급하면 가능하지 않냐 하시는데 이미 동해안은 원산도 빼앗기고 아예 양양까지 밀려났습니다. 이런데 양양 이남에서 흥남까지 먼 거리를 계속 보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다고 판단됩니다
보급은 해군과 공군이 강한 미군이 유리하지?
중공군들은 굶어 죽고 얼어 죽어서 자멸한다.
@@게딱지-x3i예전에 이 작전 평가에 관해서 본 기억이 있는데 자칫 고립될 위험성이 커서 괜한 병력과
물자만 낭비될 가능성이 커서 포기했다는 말이 있었죠
미10군단 아몬드 발상처럼 함흥-원산 라인을 공고히했다면 나토의 리투아니아 서편에 뚝 떨어져있는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처럼 남한영토가 될수도 있어 6.25전황이 크게 달라졌을수도 있었을것 같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나 장진호철수작전초기 역발상이었던것처럼, 전쟁에서는 전황을 비관적으로만 보는것도 배격해야할거 같습니다. 현실을 도외시한 무모함도 조심해야겠지만(버어마전선의 랜야처럼)
중공군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기가 힘들죠.
뒤에 화력이 좋은 적을 두면 힘들죠.
흥남을 요새화해서 버티고 교두보하는 게 무조건 불가능하진 않았겠다만 현실적으로 보급문제, 방어선 형성, 병력 규모와 중공군 남하 및 공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어려웠습니다 ㅜ 함흥, 흥남 교두보 규모를 보면 함경산맥까지 포함하지 못해서 장기적으론 중공군이 함경산맥 등에서 감제하고 내다보기 때문에 방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함경산맥 일부를 제대로 포함하고 성천강을 완전히 낄 정도로 크게 교두보를 형성했다면 달랐겠지만요. 물자와 병력 등을 보급하면 가능하지 않냐 하시는데 이미 동해안은 원산도 빼앗기고 아예 양양까지 밀려났습니다. 이런데 양양 이남에서 흥남까지 먼 거리를 계속 보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다고 판단됩니다
희생을 감당할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고
미국자체의 정치적 충격 ( 타국 전쟁에 수만명의 미국인이 고립되고 포로나 전사하는 ) 데미지를 정치인들이 감당하기엔
힘들었겠죠
일리있는 말씀입니다. 전황은 최고결정권자의 정확한 형세판단과 형세를 뒤집을만한 전략과 지원,보급 그리고 결정되면 뒤를 돌아보지않는 불굴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것 같습니다. 이미 제해권과 제공권은 연합군에게 있고 9병단은 상당히 와해된 상황이고 26군도 전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함흥-흥남권을 사수하면서 버티면서 오히려 원산쪽으로도 병력을 내려보내어 원산과 동해안축과 추가령지구대쪽 평강까지 도모를 계획한다면 서부라인의 중공군도 전선이 서쪽으로만 치우쳐 동쪽에 적을 두고 서쪽남하하기에도 부담이 되고 어쨌든 중공군의 전력 분산효과로 전황은 또 달라질수 있었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함흥 앞바다에서 미 해군의 위력함포사격과 공군의 폭격이 존재하기에 선상지로 지형이 달라져 장진호전투같이 산지로 돌아들어 중공군이 포위하기도 힘들고 감제고지 위치로 함흥-흥남라인을 내려다봐도 박격포외에 산에서 쏠 화력도 마땅치않은 중공군이 더이상 개활지인 함흥ㅡ흥남권을 막강 화력인 미국과 연합군을 상대로 손쉽게 점령하기는 어려웠을것으로 보입니다. 교대할 지원병력과 군수보급만 충분했다면 중공군의 전력고갈(망치와 모루전략)로 전세정황에 변화가 있었을거라 봅니다.
@@bbosaree 견해에 동감합니다. 군사적인 목적으로만이라면 어떻게든 승리를 위해 선택해볼만한 카드였겠지만 중간선거를 의식안할수 없는 트루먼과 미 정치인들은 정치적고려를 무시할수 없었기에 지적하신 말씀처럼 흘러갈수 없었던거 같습니다. 전쟁은 일어날수 있는 모든 변수를 고려해 최선의 수를 두지않으면 결국 국내외여론과 정치현실에 쓸려갈수 없기에 헤드쿼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이순신장군은 모든 전투마다 지형과 아웃사이더인 일본군의 심리,전력 그리고 아군의 전투력을 극대화한 수를 선택해 연전연승한 것 같습니다. 미군이나 연합군은 중공군의 전투력과 동향, 한국의 지형,기후등에
너무 낮선것도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소련이 레닌그라드를 결사적으로 사수한것처럼 평양을 지켜냈으면 참 좋았을텐데요. 😢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흥남 요새화를 주장한 알몬드를 보면 비관은 바보들이나 내리는 결론이라는 격언이 참 맞는것 같습니다.
요즘 역사교육의 문제를 절실히 느끼네요. 유튜브라는 매체가 생겨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대동강교 폭파사진조차도 한강대교라고 써먹는..
이승만 정부는 한강인도교 조기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을 ( 공병감 ) 사형시켰습니다.
최창식 대령의 부인은 1961년 재심 청구를 했고 + 1964년 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승만은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피신 + 라디오 방송엔 의정부에서 국군이 북괴군을 격퇴했다는 전파가 흘러나왔고 +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폭파
---------------------------------------> 저런 상태에서 한강인도교 폭파 후 악화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 명령 받고 임무 수행한 공병감 사형시킨 것.
따라서 이런 식의 합리화는 불가능합니다.
사례1 ( 좌파들은 파괴된 대동강교 사진을 이승만 대통령이 시민들이 건너고 있는데도 폭파시킨 한강철교라고 선동했죠.. )
사례2 ( 좌빨들은 저 대동강철교로 피란하는 장면을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끊은 장면으로 왜곡했는데 참 기가 찹니다... )
사례3 ( 요즘 역사교육의 문제를 절실히 느끼네요. 유튜브라는 매체가 생겨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대동강교 폭파사진조차도 한강대교라고 써먹는.. )
다른 사례들은 생략
---------------------------------------> 대동강 철교 사진과 상관 없이 바뀌는 것 사실상 전무하며 + 공병감을 사형시킨 부분에선 더더욱 기가 찰 수도
관련 기사 내용 인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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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법회의는 단심제(單審制)였기에 법적인 항고(抗告)가 불가능했다. 기자는 1950년 9월 15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유죄 판결문을 입수했다. 다음은 요지.
최 공병감은 한강교 폭파로 인한 책임을 지게 된 셈인데, 이 군법회의의 판결은 폭파를 직접 명령한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이 전사한 뒤였다.
이 판결은 그러나 1961년 9월 최 공병감의 부인인 옥정애(玉貞愛)씨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고 이를 접수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이듬해 5월 15일 원심판결 무효를 선고했고, 1964년 10월 23일 결심공판에서 최 공병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은 무죄 판결문 요지.
당시 재판을 맡았던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황준환 대령(재판장)은 ‘조급(早急) 폭파’를 인정하면서도 최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한국전쟁 때 우리 대통령-군-정부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한민국이어야 미래 희망이 있습니다.
1.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넘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불과 6개월 정도 후인 1951년 초 한겨울 추위 속에서 중공군 남하 당시,
전시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방비리가 벌어져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보충역으로 징집된 약 50만 병력 중에서 추정치 약 10만 병력이 적과의 전투 아닌 비전투 손실로
남쪽으로 후퇴 행군 도중에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서북청년단 단장 출신의 민간인이 임명된.
너무나 황당무계한 사태가 터져 다 덮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령관 포함 몇 명 처형되는 선에서 덮어버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국민방위군은 해체.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 15만 조금 안되는데, 국민방위군 비전투 손실로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병력이 추정 약 10만.
----------------------------------------> 2차대전 영국군 최대급 패배 마켓가든 작전 실패 때,
----------------------------------------> 서방 연합군 총 인명 손실, 영국+미국+폴란드의 전사+행불+포로 총합 = 약 18,000명 (십팔만 아닌 일만팔천 )
----------------------------------------> 게다가 인명 피해 대부분은 포로, 영 공수부대 전사자 약 1100명 + 영 30군단 전사자 약 5500명.
이기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 안심시켜 놓고 + 한강다리 끊고 튀어서
----------------------------------------> 님이 피난 못가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고 가정해보길.
----------------------------------------> 운좋게 전쟁 중 개죽음 당하지 않고 + 휴전 전에 북괴군 탈출해 대한민국에 남았다고 해도
----------------------------------------> 한강다리 끊고 튀었다 다시 돌아온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들은 님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잊지 말기를.
----------------------------------------> 튀었던 넘들이 님을 북괴군 빨갱이 내지는 부역자로 몰고 + 님 아들 딸 역시 연좌제로 어려운 세월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단죄하는지 ...
-----------------------------------------> 임진왜란 때도 잽싸게 튄 국왕과 조정이 충무공 고문해 죽음 직전으로 몰고,
-----------------------------------------> 최대 의병 이끌던 의병장 김덕령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고 + 호란 때 겨우 살아 돌아온 여인들을 화냥년이라고 내치고
-----------------------------------------> 한국전 때도 단죄 당해야할 넘들이 오히려 단죄의 칼 휘둘렀던, 자유와 민주주의 깃발 나부끼면서.
2.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 터지기 전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좌익을 전향시켜 반공 데모 시위에 동원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하고 전황 안좋아지니까,
불안-초조-공포에 휩싸여 전향한 좌익인 보도연맹원들 대대적으로 체포, 체포로도 너무 불안해서 선제 대량 학살로 제거.
그렇게 희생된 이들 명단은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훗날 책임질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록 남기지 않고 처형.
추정치로 선제 예방 학살로 처형된 인원은 단위가 10만대, 정확히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르는.
보도연맹 희생자들 유골 발견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뉴스에 나오며 현재 진행형.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선제 사전 예방 학살 아닌 지진 터진 이후에 학살.
남경대학살 --------------------------------->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인들 상대로 도시 점령 과정 및 점령 완료 후 대량 학살.
우리 보도연맹 사건 --------------------> 같은 민족을 상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전 예방 학살.
21세기 현재 기준으론 전세계적 규탄과 반인류적 범죄로 반드시 처벌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는 것 명심하길.
더 안타까운 것은 보도연맹원 모집 당시 전국에 할당량이 내려져,
시골에선 아는 주민들 이름 공무원들이 그냥 올리기도 했고, 심할 경우에도 애들 이름도 적어 넣었는데,
보도연맹원 체포와 예방 학살 과정에서 완전 억울하게 좌익 아닌 이들도 꽤 많이 희생된.
실제 전향했던 좌익들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고.
3. 휴전 후 귀환 포로 심문 사망
남북은 정말 휴전되던 최후의 순간에도 대단했습니다.
----------------------------------------> 북괴군 포로들 38선 넘을 때 영상 보길, 팬티만 남기고 옷 다 남쪽으로 벗어던지고 욕퍼붓고 구호 외치면서 북으로.
----------------------------------------> 북괴는 우리 국군 포로 대부분의 존재 인정안하고 강제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 극히 일부 포로만 인정해 남으로 송환시킴
----------------------------------------> 북이 일부 국군 포로를 남으로 송환시킨 이유 역시 반공포로 거부하고 북으로 가겠다는 포로들 돌려받기 위한 목적.
----------------------------------------> 불행히도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 겨우 살아돌아온 우리 국군 포로들을 구 북괴군 포로 수용소에 일단 가두고,
----------------------------------------> 혹 간첩으로 파견되었는지 여부 조사 과정에서 일부 귀환 우리 국군 포로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
----------------------------------------> 말로만 조사했겠습니까?
----------------------------------------> 대한민국이 저랬는데 북괴는 안그랬겠습니까? 북으로 팬티만 입고 넘어간 이들 일부 역시 북에서 비참한 최후 맞았을 것.
----------------------------------------> 자국의 군인들이 적에게 포로되었을 때 저 따위로 대접하는 국가와 군은 도대체 뭡니까?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국민방위군-보도연맹 사태 정도면
일단 전시여도 내각 총사태하고 대통령 및 군 최고지휘부 상당수는 사법치리 피할 수 없었을 것.
특히 거짓 방송 틀어놓고 튄 대통령의 행위,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소 휴전 후에라도 그 책임을 물었을 것.
우린 사실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도.
우리 모두 운이 좋아 저 당시 대한민국의 20세 청년이 아니어서 개죽음 면한 것.
북괴 공산당 매운 맛 뺨칠 정도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매운 맛도 엄청났다는 것 경험하지 못한 행운에 감사해야.
한국전 당시 남북은 상호간
그리고 남과 북 각각의 내부에서 머리띠 두르고 완장차고 확신에 가득차 쳐죽여댔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 최고 지휘부의 전쟁 지휘 능력 -------------------> 전시 작전권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박탈당할 때 최고 지휘부에 있었던 이를 구국의 영웅인양 받드는 정신 나간 행위들이 아직도.
또한 한국전 휴전 과정에서도 믿는 것도 없이 북진 통일 궐기하면서 나대다가, 휴전 협정 당사자로 참여도 못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대상들은 미국-유엔-중공-북괴 ------------------------------> 대한민국은 업저버 정도.
휴전 당시 업저버 위치가 된 대한민국이라면, 대통령-정부-군의 결정적 오판 부인하기 힘들 것.
그리 북진통일 자심감 넘쳤다면 남침당하지 말고 선제 기습 북진해서 북괴를 멸망시키는 대한민국 먼저 만들었던지 ...
한국전쟁 직전에도 군 일부 장성들 자신감 만땅에,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에서 어쩌고 주둥이질에...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총알 부터 식량까지 원조에 의존하면서,
주둥이로만 북진 통일, 거기다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둥이로만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고 ...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좌빨들의 이승만 악마화에 필요했거든요.
아쉽네요. 알몬드중장의 흥남 쐐기...
아 흥남 요새화 너무도 아깝네요... 서부전선은 평야지대라 유엔군 화력전으로 모루를 삼고 흥남을 기지로 해서 재편성된 병력들을 투입해 망치로 썼다면
아 아악... 이번 편은 5분만에 끝났어 ㅜㅜ ....
아닙니다 😂이번 편도 재생하자마자 끝났습니다ㅋㅋ
흥남요새화 항모에 전함포사격 까지 받으면서 가능했을지도
29:15 이 사진이 대동강 철수때 피난민 사진이네요.
이승만이 한강철교 폭파시켰는데 피난가는 길이라고 구라치는데 쓰이는 대표적인 사진이죠. 저도 얼마전에 처음 알았다능.
제가 2009년 고등학생때 이 사진은 한강철교 사진이 아니라고 왜곡되었다고 얘기 했다가 학교에서 식민사관에 잘못된 세뇌 받은거라고 욕 먹었죠. 그래서 고등학생때 제 별명이 매국노 , 친일파 였습니다.
알몬드 의견대로 흥남에서 진지구축하고 방어를 했더라면...🤔
서부전선 퇴각하고 재설정한 방어라인에 들어갈 병력이 부족하여 방어실패하는것은 아닌지요
부상병과 방어라인에 투입될 병력빼고 나머지로 버텨야하는 거잖아요
거기다가 패색이 짙은 부대 데리고서 방어작전이 가능할지 의문이네요
무기랑 장비 싹다 버리고 철수하는 상황인데 말이죠
철수한것이 맞는 결정이라고 봅니다
영상을 보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 여쭤봅니다
전쟁 당시 육군이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과정이 있었나요 ?? 지금이야 육군 항공부대에서 회전익을 다루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도 그랬는지 궁금합니다
BOB를 10번 넘게 봤습니다.
고증잘된 장진호드라마가
꼭 제작되었으면 하네요
지금 내용으로도 BOB뛰어 넘습니다.
BOB-공수사단-유럽
퍼시픽-해병대-태평양/동양
MOA-공군-유럽
625-육해공-한국
정치파트가 빠지니 아쉽군요
해당시점에 전세계의 움직임을
읽어주니 빠져 듭니다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셰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미국이 잘못하는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미국과 참전국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후 한국전에 도움을 주신 국가들에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게 되더군요
앞으로도 정부가 나서서 그들에게 보답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두번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이긴다해도 몇 십년은 후퇴할태니까요
우리의 가장 큰 동맹이 미국이었다는게 대한민국의 축복이다.
19세기 영국 수상을 지냈던 탬플, 외무장관으로서 1843년 하원 연설.
" 국제관계엔 영원한 동맹도, 영구적인 적도 없다. 우리의 관심은 영원한 국익뿐이며, 국익추구는 우리의 의무. "
" We have no eternal allies, and we have no perpetual enemies. Our interests are eternal and perpetual, and those interests it is our duty to follow. "
지난 수 백 년, 영국과 전쟁한 적들 ---------------------------> 프 + 독 + 러 + 스페 + 네 + 미 + 중 + 일 + ...
지난 수 백 년, 영국과 함께한 동맹 ---------------------------> 프 + 독 + 러 + 스페 + 네 + 미 + 중 + 일 + ...
영국은 지난 수 백년간 세력균형 정책으로 유럽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프랑스가 쎄지면 프로이센(구독일)등 꼬드겨 프랑스 두들겨 패고, 독일이 강해지면
얼마 전까지 두들겨 패던 프랑스 달래서 함께 독일 몰매하는 과정의 무한 반복 루프, 당한 넘들이 바보.
-------------------------------------------------------> 프-독 등이 바보라서 당한 것 아닐 겁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몰려버린.
한반도에는 그 보다 더한 바보들이 널렸죠. 프랑스나 독일은 깃발 날리고 유럽을 휩쓸기도 했지만,
한반도에선 바보들이 내부에서 외세 부추김 당하면서 내부 초토화를 스스로 가열차게 했으니.
미국은 과거 영국에 비하면 서툴지만,
그래도 꽤나 현란한 테크닉으로 세계를 요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는 미국과 영국에게 확실하게 당했던 역사가 있음을 명심해야.
지난 세기초 미국과 영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한반도를 일본에 넘겼습니다.
일본은 미국 영국의 동맹으로 선택되어 극동에서 러시아-소련의 남하는 막는 미영의 방패로 기능했습니다.
미영의 동맹이었기에 1차대전 연합국으로 참전.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국의 독일 조차지와 중부태평양 독일령 마리아나 제도를
1차대전 이후 점령 또는 신탁통치령으로 획득해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발판 전진기지 획득했던 것.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에게 뺨싸대기 쳐맞은 이후에야 미영은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
생각해보길 진주만 이전 일본이 미영의 극동 행동대장 시절 미영이 우리 항일독립운동 지원할 수 있을지.
(1898년 미-스페인 전쟁 승리로 쿠바와 필리핀 탈취.
스페인이 전쟁에 패배하자 그 틈에 필리핀은 독립선언 하고 제1공화정 선포.
승리한 미국은 무력 진압에 나서 약 60만의 인명 피해 발생. 명백히 미국은 국익을 위해 스페인과 전쟁.
필리핀인들의 자유, 민주주의, 민족자결 위해 전쟁했다면 왜 무력 진압했겠습니까?)
지난 세기 미국은 한반도에 병과 약을 모두 주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지원만 고마워해선 안되는.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38선 그리고 미 극동방어선 에치슨 라인에서 대한민국 배제.
카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반도는 일본 지배 확정되었고, 미국의 미숙한 전후 처리 과정에서 38선 분단.
38선 분단 이후 애치슨 라인 배제로 남침 욕망을 극대화시켰던.
미국이 개입했던 외부 요인도 중요했던 지난 세기 한반도 암흑, 잊어선 안되는.
한국전 이후 혈맹으로 거듭났다지만 외세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일방적 믿음 역시 잠재 위협 요소입니다.
물론 민족분단과 동족상쟁의 가장 큰 책임은 우리 민족 내부에 있습니다.
남북간 극한 투쟁과 대한민국 내부의 적대적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한반도의 미래 없습니다.
(한 때 유럽 열강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
2차대전 독일 패전 후 미영프소 연합국 4개국에 분할 점령 신탁통치 후 영세중립 선언.
저들의 좌우익은 민족 내부 투쟁 피했습니다. 우린 옳다는 확신과 불타는 적개심으로 서로 쳐죽여댔고.)
19세기 영국 수상을 지냈던 이가 했던 발언 무시무시한 겁니다.
저런 지도자 국가가 존재하는 지구촌에서, 넋빠진 이들이 영원한 혈맹 운운하며
공동체 내부 투쟁에 몰두하기에, 저런 국가들이 세계를 쥐락펴락 해왔고, 해오고 있고 앞으로도 할 예정.
(어디에 좌우 구분이 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좌우 아닌 안밖의 투쟁이 결정적.)
민족분단과 동족상쟁의 가장 큰 원인은 물론 우리 민족 내부 적대적 분열 투쟁.
하지만 외부적 요인 역시 존재했습니다. 서구제-동구제 이데올로기가 수입되면서 더 큰 내부 적대적 투쟁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또한 외부 요인이 단순히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수입한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닌 + 한반도 분단의 가장 결정적 물리적 요소로 작용한 측면도 있습니다.
th-cam.com/users/shorts4xYAzsdguHo
--------------------------------------------> 1945년 8월, 처음 계획된
--------------------------------------------> 미영중소 연합 4개국에 의한 일본 분할 점령 계획안.
--------------------------------------------> 일본만이 아닌 한반도 역시 미영중소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일본군 무장 해제 계획이었지만 결국 변경된.
th-cam.com/video/8ldqolPJIG0/w-d-xo.html The British Occupation of Japan
--------------------------------------------> 2차대전 종전 후 독일-오스트리아-일본에 대한 연합군 분할 점령 관련 내용.
--------------------------------------------> 유럽에선 전범국이 미영프소 4토막 분할 점령되었지만, 극동에선 전범국 일본 아닌 한반도가 미소 2토막 나눠 먹기.
--------------------------------------------> 전범 일본에 대한 연합국 점령 계획안이 어떻게 사실상 거의 미국 단일 점령에 가깝게 ( 영국이 약간 점령하는 형태 )
--------------------------------------------> 바뀌는지 보길. 소련의 일본 홋카이도-혼슈북부 점령 철회 + 영국의 일본 점령지 축소 + 중국의 일본 점령지 0화
한국전쟁은 외세의 역활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미영중소 4개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 계획안 검색해서 찾아보길.
소련 점령 예정지는 함경도 일대에 국한되고 한반도의 대부분은 미영중이 점령하는 형태.
만일 일본과 한반도의 4개국 분할 점령 계획대로 전후 처리가 실시되었다면, 동서독에서 서독이 훨씬 컸던 그 조건과 본질적으로 같아져,
--------------------------------------------------------------> 함경도 귀퉁이 차지한 물리적 조건에서 한국전 발발은 사실상 힘들었을 것.
--------------------------------------------------------------> 소련군 점령 예정지는 인구 측면에선 미영중 점령지에 비한다면 압도에 압도에 압도되는 수준.
--------------------------------------------------------------> 또한 모택동 아닌 장개석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는 조건에서 중국 공산화 역시 조금은 더 힘들었을 것.
---------------------> 미국이 일본 전체 점령 욕심 부리면서,
---------------------> 그 반대급부로 한반도 38선 이북을 소련에게 떼어주는 선택을 한 것.
---------------------------------------------> 유럽에선 전범국 독일과 독일어 사용하는 오스트리아가 미영프소 4개국에 분할 점령되었지만,
---------------------------------------------> 태평양전쟁 종전 처리 과정에선, 미국의 주도적 역활로 전범국 일본 아닌 한반도가 유탄 맞은 것은 치명적 민족분단 원인.
---------------------------------------------> 오스트리아는 4개국 신탁통치 후 영세 중립 선언, 하지만
---------------------------------------------> 오스트리아는 내용적-경제적으로 사실상 친서방 서구 민주주의 국가가 된. 그 이유는
---------------------------------------------> 미국-영국-프랑스군의 점령과 서방측 원조가 친소 공산세력의 확산을 저지 + 현명한 오스트리아 내부 타협 때문.
---------------------------------------------> 한반도의 좌우익은 정파적 승리를 위해 외세와 결탁해 자발적 내부 투쟁에 돌입했지만 오스트리아 좌우익은 달랐던.
그리고 미국의 태평양 전쟁 막판 끝내기는 인류 역사상 아마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대악수, 최악의 오판 삽질.
---------------------------------------------> 사실상 태평양 전쟁 승패 결정된 상태에서,
---------------------------------------------> 미군 희생 좀 더 줄여보겠다고 + 소련의 대일전 참전 요청 + 소련은 형식적으로 미국의 요청을 수용하면서
---------------------------------------------> 과장 아주 아주 조금 보태 일본 항복 1초 전에 + ( 게다가 태평양 전쟁 기여도 0 상태에서 ) + 만주 전체와 한반도 절반 점령.
---------------------------------------------> 소련 입장에선 그냥 굴러 들어온 떡.
---------------------------------------------> 만주만 점령해도 중국 국공내전 모택동의 승리를 결정지을 조건에 + 추가로 한반도 절반 떼어준다는데 왜 거부합니까?
덜떨어진 미국이었지만 자신들이 오키나와에서 악전고투 하던 그 무렵,
미국의 요청으로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할 경우 사실상 한반도 전체를 무혈 점령 가능성 뒤늦게 깨닫고,
--------------------------------------------------------------------> 허겁지겁 수정안 즉 38선 경계로 북의 소련군 점령을 용인하면서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 막는 잔머리.
--------------------------------------------------------------------> 소련군이 만주 점령한 그 순간 ---------------------------> 중국 국공내전 모택동 승리, 장개석 패배 확정.
--------------------------------------------------------------------> 소련이 만주 점령, 일본군 무장 해제만 하겠습니까?
--------------------------------------------------------------------> 소련군이 무장 해제한 일본군 무기는 사실상 모택동에 가는 겁니다.
--------------------------------------------------------------------> 또한 소련군이 점령한 만주는 모택동이 대륙 전체를 노리는 배후 강력한 거점으로 변하는.
-------------------------------> 저렇게 허접했던 미국, 아마도 소련이 오케이 해준 순간 --------------------> 한반도 절반은 건졌다면서 속으로 만만세 외쳤을 것.
1945년 당시 세계 유일 핵 보유국으로서,
미국이 정상적인 판단했다면 이랬어야 하는 겁니다. ---------------------> 소련에 대한 강력 경고, 대일본전 지원 빌미로 감히 만주-한반도 발 내딛지 말라!!!
--------------------------------------------------------------------------------------------------------> 태평양 전쟁 기여도 0에 + 일본과 소일-불가및 맺은 주제에 감히 나대지 마라!!!
--------------------------------------------------------------------------------------------------------> 혹이라도 일본 항복 밥상에 숟가락 얹는 꼼수 부리면 핵무기 사용해서라도 막겠다!!!
한국전쟁 유엔군 파병,
소련이 거부권 행사했다면 불가능, 왜 소련이 안보리 불참 기권했는지도 냉정히 생각해보길.
-------------------------------------------------> 독소전에서 우랄 서부 소련의 핵심 유럽 지역이 사실상 완전 토초화 + 민간인 포함 거의 2천만 인명 피해 상태에서
-------------------------------------------------> 강력하지만 덜떨어진 미국을 극동의 국지전에 몰아 넣고, 동구권에서 철의 장막 확실하게 치려고 의도적으로 기권한 것.
-------------------------------------------------> 미국이 한국전쟁에 붙들린 사이에 소련은 동구권에서 철의 장막 완성했음을 깨닫길.
-------------------------------------------------> 국가 이익이 충돌하는 장에서 소련-스탈린이 정말 쫄아서? 멍 때리다 안보리 출석 못해 유엔군 파견???
-------------------------------------------------> 스탈린은 독소 불가침 + 일소 불가침 맺었던 음흉한 넘이기에 순진하게 멍 때렸다고 보기 어려운.
만일 영국 없이 미국 단독으로 유럽에서 종전 협상했다면 미국은 소련에게 완벽하게 당했을 것.
-------------------------------------------------> 영국은 1944년 그리스에 상륙, 공산 빨치산 토벌 + 티토 유고 지원하며 반소 독자 노선 걷도록 유도.
-------------------------------------------------> 미국은 유럽에서도 그저 그저 그저 ... 하루라도 아니 1초라도 빨리 미 본토로 돌아가려 정신 넋 빠졌던.
-------------------------------------------------> 그러다 전후 막상 철의 장막 현실 보고서, 뒤늦게 처칠 초청해서 철의 장막 연설 들으며 박수쳤던 뒤늦은 수습.
또한 지난 세기 초, 미국과 영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일본을 극동의 파트너로 선택 러시아-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역활 일본에 부여.
한반도의 일본 지배는 그렇게 사실상 최종 결정된 겁니다. ----------------------> 일본에 먹힌 한반도 때문에 태평양전쟁 종결 과정에서 38선이 태어난 것도 명백.
만일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없이
일본이 미영의 극동 지부 행동대장으로 만족하고 계속 미영의 편에 남았다면 21세기 현재도 한반도와 만주는 여전히 일본령 가능성 압도적.
따라서 한국전 이후 한미 관계만 보며, 미국에 대한 지나친 합리화는 위험.
우리 민족은 이미 지난 세기 초 미국에게 제대로 뒤통수 쳐맞은 경험도 있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시작한 이후 미국은 계속 동맹이었고 중국은 계속 적이었지.
유효 숫자 개념 잊지 말아야.
이미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에서 오차 발생했다면,
그 아래로 소수점 아래 10번째 자리 ... 100번째 자리 계산 아무리 열심히 해도 무의미.
---------------------------------------------> 한반도 분단의 민족 내부 아닌 외부 원인을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미국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치명적 역활.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한반도의 일본 지배 최종 결정되지 않았다면 + 일본의 2차대전 패망 후 광복과
+ 태평양전쟁 종전 처리 과정에서 전범국 일본 아닌 한반도가 유탄 맞고 분단되는 사태의 원인 자체가 소멸할지도 모를 정도로 미국의 역활은 결정적.
태평양 전쟁 종전 끝내기에서,
미국은 일본을 태평양의 방파제로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 그 때문에 전범 일본 아닌 한반도 허리가 두동강 난 것 부인하기 힘든.
만일 한반도가 38선 분단 아닌 미영중소 4개국 분할 점령되었다면 물리적 조건, 소련 점령지는 협소했고 인구 측면 압도당하는 수준에선 한국전 발발은 사실상 불가능.
미소 분할 38선 그어진 이후에라도 미국이 현명히 대처했다면,
-----------------------------------------------> 즉 미국의 극동방어선 애치슨 라인에 대한민국 포함시켜 발표하고,
-----------------------------------------------> 대만과 대한민국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만 과시했더라도, 한국전 발발은 훨씬 어려웠거나 사실상 불가능.
독일어 사용권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역시 미영프소 4개국 분할 점령 되었지만,
------------------------------------------------> 미영프 3개국 점령 지역의 우세로 독일에선 한국전쟁과 같은 대규모 무력 분쟁 자체가 불가능.
------------------------------------------------> 독일의 소련 점령지 내부에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포함되었고 + 독일 통일 전 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그 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가 소련령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영프 서방측 점령지의 인구 우세가 결정적이라 한국전쟁과 같은 무력 도발은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오스트리아는 운이 좋게도 독일과 같은 강력함이 없었기에 미영프소 4개국은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 후 바로 철군 + 오스트리아는 영세 중립 선언.
------------------------------------------------> 한 때 유럽의 강력한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1차대전 패배로 제국이 해체되면서 지금과 같이 쪼그라들었고,
------------------------------------------------> 히틀러의 물리적 지리적 고향이기도 한 오스트리아의 좌우익은 2차대전 독일 패망 후 정파 이익을 버리고 합리적 타협.
------------------------------------------------> 비록 영세 중립 선언했지만 + 정치적-경제적으로는 사실상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는 형태로 현명하게 위기에서 벗어난.
해방 후 한반도 남북의 좌우익, 냉정하게 본다면 그냥 자폭한 겁니다.
주적 개념과 + 주적을 구태여 명시할 필요성, 둘 모두 심각히 고민해야 합니다.
특히 한반도 민족 내부 주적질과 완전 대비된 철천지 원수 이민족 연합체의 세계 패권 장악과 내부 패권 승계 무시할 수 없는.
내부 주적질 >>>> 남북의 극단적 좌우익 사생결단 투쟁관
-------------------------------------------------------> 아직 인류는 아와 비아의 투쟁 예외 없으며,
-------------------------------------------------------> 모든 도전은 비아로부터 아를 향해 오며 + 그 도전에 대한 응전을 아가 하는 것.
-------------------------------------------------------> 아와 비아의 투쟁 및 도전과 응전, 단순히 인간의 역사에만 적용되는 것 아닌 바이러스와 그에 대한 인간의 대응도 내포.
내부 주적질에 대해 냉정할 필요, 대한민국 유신-두환 시절 초중고 학생들은
사실상 국가가 제시한 이념으로 가축과 같이 사육되었지만 그들이 가장 강력한 반독재 투쟁자로 번한.
통행금지 + 국민교육헌장 암기 + 국기하강식 + 고등학교 여학생도 교련 + 대학생 교련만이 아닌 전방 입소와 문무대 교육에,
북과 유사하게 뻑하면 학생들 동원해 궐기대회 규탄대회 + 해 마다 6.25 무렵이면 국민학생들이 학교 운동장 빙빙 돌며 행진하며 6.25노래 부르고.
--------------------------------------------------------> 냉정하게 본다면 유치 찬란, 북이 아직도 하는 짓거리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 깨닫길.
생각해보길.
한반도 남북의 6.25노래 가사 보면서 두려움에 떨 세계인들이 얼마나 될지.
------------------------------------------------------> 아마도 가사 확인한다면, 세계인들 다수는 재들 같은 민족끼리 왜 저래???
생각해보길.
철천지 원수 켈트-앵글로색슨 연합체 연합왕국의 룰브리타니아 가사 보면서, 세계인들이 연합왕국 우습게 여길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길.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모국 영국이 반공을 국시로 하고 구소련과 현중국을 과연 주적으로 명시했는지.
주적 명시는 어리석은 겁니다. 명시하건 하지 않건 주적에 대한 대비만 철저하면 됩니다. 한국전 직전 주적에 대한 적개심 노출 및 개전 직후 전선 붕괴가 반례.
----------------------------------> 한국전 직전 일부 국군 장성들이,
----------------------------------> 주적 북괴에 대한 적개심과 자심감을 밝혔어도, 개전 직후 전선 붕괴.
----------------------------------> 그들은 이렇게 자신만만 했었습니다.,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 그러나 현실은 완전 달랐던.
625전쟁은 특히 인천상륙작전 이후로는 킴필비와 캠프리지 오인방 등의 영국 정부 내의 소련간첩들을 얘기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맥앋더부터 작전만 세우면 적이 알고 움직이는 것 같아서 나중에는 국무부에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실제로 나중에 밝혀졌고, 그 중에 결정적인 것은 미군이 원폭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란 정보룰 영국을 거쳐 소련으로 넘겨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만들었죠.
킴필비를 비롯한 영국간첩에 대한 언급 없이 625 전사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이제야 우리 5사단을 볼 수 있네요
흥남요새화는 미군은 쓸수있은 카드지만
미국 정부는 쓰기어려운 카드라고
생각함
흥남철수작전 미국 🇺🇸 헐리우드 영화 🎥 로 나왔으면 좋겠다 😂
혹한의 17일? 이라는 제목으로 제작예정인데 취소됨.
동시에 제작소식이 중국에 전해져서 장진호라는 영화가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아몬드의 생각처럼 철수하지 않고 흥남을 요새화 했다면 어땠을까요? 전함 미주리에서 쏴제끼고 함재기가 끊임없이 엄호할 수 있었던 상황이라면 교두보로써 차후 북진을 할때도 시선을 분산하는데 충분히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몬드가 그런 의견을 가졌다는게 놀랍네요. 근데, 만약 유럽이었다면, 하다못해 동남아였다 해도 그렇게 했을 거에요. 허나 안중에도 없던 한반도였기에 그렇게 철수한 거겠죠 ㅠㅠㅠ
방어는 100% 성공했겠죠...
보급도 원활하고 지원 화력도 빵빵하니까요.
북한 지역에 남겨져있던 발전소와 공업단지들은 어찌보면 일제시대가 그나마 우리에게 남겨준 귀중한 유형의 자산이었는데 김일성 이 인간의 도발로 모든것이 잿더미로 돌아갔죠
귀신 잡는 해병대가 북한 패잔병을 못 잡다니요... 😭
저렇게 되면 원산의 한국군 해병은 어디로 퇴각해야 하나?? 밑은 막혔고 흥남부두 까지는 막혔는지 아님 알수없는데…..그냥 운에 맡기고 흥남으로 가야하는건가
또한 흥남을 요새화 시킬려는 전략을 쓸려면 원산 사수가 필수인데 원산을 너무 빠르게 내줌
중국본토와 북한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으면 기가막혔는데 아쉽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장진호 전투에서 병단 1개가 전투불능에 빠져 발이 묶여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확실히 느껴지네요.
너무 빠르고 너무 급했던 철수가 참 아쉽게 느껴지긴 합니다. 그래도 이것도 역사의 교훈이 되었으니까요. 바른 역사를 알려주시는 역전다방 오늘도 고맙습니다! 정말 잘 봤습니다.
이렇게 보지말고 저렇게 봐라.
장진호 좌익의 미해병 1사단 쪽에는 9병단 조공인 1개군 3개 사단만 투입되었고 사단당 실병력은 5천의 경보병뿐이었다.
거기다 혹한에 장거리 기동해 이미 지치고ㅈ굶주려 있어 제대로 전투조차 못했는데도 3만의 대병력에 군단급 화력의 미해병1사단은 공포에 질려 도주한다.
미3사단과 미해군이 살려준다.
그전에 우입의 미7사단 31 연대 전투단이 9병단 주력을 맞아 혈전을 벌려 미해병1사단을 살려준다.
미해병은 제대로 된 전투도 한 적이 없다.
미군이라서 살아남은거란다.
팩트.
9병단 편제상으로는 12개 사단 12만 병력이다.
헌데 각 군당 1개 사단씩은 예비라 투입되지도 못해 9개 사단으로 직전하나 중공군 사단 완편이 8천인 시절이란다.
거기에 중화기나 차량은 두고 와서 실작전 투입 병력은 5천의 경보병뿐이었닺
9병단 실투입 병력 다합해봐야 5만이다.
반도 투입되지 못했다.
미해병 1사단 병력만 25000 이야.
거기다 지원배속부대까지 합치면 3만이 넘는 대군이란다.
사단이라고 다같은 사단인 줄 알지?
(한국군 사단도 12000 이상이다)
거기다 미군으로 쳐도 군단급화력이다.
그래서 13병단 배후를 때리는 돌파선봉으로 세운건데 작명을 위반한다.
그러고는 이도저도 아니게 적지에 고립되어 공포에 질려 도주한다.
총이 안나가요 하면서 운다.
5:54 맥아더 장군 진짜 니암리슨이랑 브루스 윌리스 닮았다
채명신 베트남 가즈아ㅏㅏㅏㅏ
진짜 흥남을 요새화 시키고 서부의 자원과 병력을 딥결 시켰으면 진짜 전쟁이후 상황과 전후 판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정도면 왕건의 나주 점령으로 나중에 후백제 무너트린 점령 작전 못지않은 기회였는데요.ㅎㅎㅎ아쉽네요.
흥남을 요새화해서 버티고 교두보하는 게 무조건 불가능하진 않았겠다만 현실적으로 보급문제, 방어선 형성, 병력 규모와 중공군 남하 및 공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어려웠습니다 ㅜ 함흥, 흥남 교두보 규모를 보면 함경산맥까지 포함하지 못해서 장기적으론 중공군이 함경산맥 등에서 감제하고 내다보기 때문에 방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함경산맥 일부를 제대로 포함하고 성천강을 완전히 낄 정도로 크게 교두보를 형성했다면 달랐겠지만요. 물자와 병력 등을 보급하면 가능하지 않냐 하시는데 이미 동해안은 원산도 빼앗기고 아예 양양까지 밀려났습니다. 이런데 양양 이남에서 흥남까지 먼 거리를 계속 보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다고 판단됩니다
@@게딱지-x3i항구도시인데 바다로 보급 쌉가능 보급이 문제가 아니라 중공의 실태파악 불가, 구멍난 양양쪽 서부전선을 매꿀 병력부족이 큰 이유였겠지요
625를 이렇게 세세히 배운적이 없어서 평양철수가 그냥 중공군의 기습에 밀려내려간 건 줄 알았는데 상당한 패닉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군요....
흥남 방어라인 자체는 미 7함대의 막강한 화력에다가 잘 만들어진 항구면 보급도 어느정도 해볼만 하긴 한데, 문제는
흥남 구조 자체가 거대한 산맥이 둘러싼 곳인지라 전쟁 막판이나 전쟁 후에 방어하기엔 정말 어려울 듯 싶네요.
전쟁중이야 중공이던 북한이든 포병전력이나 제공권이 없으니 일방적인 방어가 가능한데, 전후 포병전력이 막강해지고 80년대 이전까진 제공권까지 유리했던게 중공 북한이니 포기하는게 장기적으로 이득인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전쟁내내 유지하기만해도 중공의 화력 분산으로 이만한 곳도 없을뿐더러 만약 전후까지 유지한다면 정말 절묘한 위치라 유지한다고 쳐도 정말 좋긴 할듯 싶네요.
저기다가 미군기지라도 하나 있으면 소련이든 중국이든 북한이든 환장할 위치라
대동강철교를 한강철교로 둔갑시킨 우리 역사 선생들 참 고맙다 😂😂
이승만 정부는 한강인도교 조기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을 ( 공병감 ) 사형시켰습니다.
최창식 대령의 부인은 1961년 재심 청구를 했고 + 1964년 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승만은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피신 + 라디오 방송엔 의정부에서 국군이 북괴군을 격퇴했다는 전파가 흘러나왔고 +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폭파
---------------------------------------> 저런 상태에서 한강인도교 폭파 후 악화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 명령 받고 임무 수행한 공병감 사형시킨 것.
따라서 이런 식의 합리화는 불가능합니다.
사례1 ( 그 대동강 파괴된 다리 사진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런승만 만들었지요 )
사례2 ( 좌파들은 파괴된 대동강교 사진을 이승만 대통령이 시민들이 건너고 있는데도 폭파시킨 한강철교라고 선동했죠.. )
사례3 ( 좌빨들은 저 대동강철교로 피란하는 장면을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끊은 장면으로 왜곡했는데 참 기가 찹니다... )
사례4 ( 요즘 역사교육의 문제를 절실히 느끼네요. 유튜브라는 매체가 생겨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대동강교 폭파사진조차도 한강대교라고 써먹는.. )
다른 사례들은 생략
---------------------------------------> 대동강 철교 사진과 상관 없이 바뀌는 것 사실상 전무하며 + 공병감을 사형시킨 부분에선 더더욱 기가 찰 수도
관련 기사 내용 인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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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법회의는 단심제(單審制)였기에 법적인 항고(抗告)가 불가능했다. 기자는 1950년 9월 15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유죄 판결문을 입수했다. 다음은 요지.
최 공병감은 한강교 폭파로 인한 책임을 지게 된 셈인데, 이 군법회의의 판결은 폭파를 직접 명령한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이 전사한 뒤였다.
이 판결은 그러나 1961년 9월 최 공병감의 부인인 옥정애(玉貞愛)씨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고 이를 접수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이듬해 5월 15일 원심판결 무효를 선고했고, 1964년 10월 23일 결심공판에서 최 공병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은 무죄 판결문 요지.
당시 재판을 맡았던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황준환 대령(재판장)은 ‘조급(早急) 폭파’를 인정하면서도 최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한국전쟁 때 우리 대통령-군-정부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한민국이어야 미래 희망이 있습니다.
1.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넘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불과 6개월 정도 후인 1951년 초 한겨울 추위 속에서 중공군 남하 당시,
전시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방비리가 벌어져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보충역으로 징집된 약 50만 병력 중에서 추정치 약 10만 병력이 적과의 전투 아닌 비전투 손실로
남쪽으로 후퇴 행군 도중에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서북청년단 단장 출신의 민간인이 임명된.
너무나 황당무계한 사태가 터져 다 덮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령관 포함 몇 명 처형되는 선에서 덮어버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국민방위군은 해체.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 15만 조금 안되는데, 국민방위군 비전투 손실로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병력이 추정 약 10만.
----------------------------------------> 2차대전 영국군 최대급 패배 마켓가든 작전 실패 때,
----------------------------------------> 서방 연합군 총 인명 손실, 영국+미국+폴란드의 전사+행불+포로 총합 = 약 18,000명 (십팔만 아닌 일만팔천 )
----------------------------------------> 게다가 인명 피해 대부분은 포로, 영 공수부대 전사자 약 1100명 + 영 30군단 전사자 약 5500명.
이기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 안심시켜 놓고 + 한강다리 끊고 튀어서
----------------------------------------> 님이 피난 못가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고 가정해보길.
----------------------------------------> 운좋게 전쟁 중 개죽음 당하지 않고 + 휴전 전에 북괴군 탈출해 대한민국에 남았다고 해도
----------------------------------------> 한강다리 끊고 튀었다 다시 돌아온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들은 님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잊지 말기를.
----------------------------------------> 튀었던 넘들이 님을 북괴군 빨갱이 내지는 부역자로 몰고 + 님 아들 딸 역시 연좌제로 어려운 세월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단죄하는지 ...
-----------------------------------------> 임진왜란 때도 잽싸게 튄 국왕과 조정이 충무공 고문해 죽음 직전으로 몰고,
-----------------------------------------> 최대 의병 이끌던 의병장 김덕령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고 + 호란 때 겨우 살아 돌아온 여인들을 화냥년이라고 내치고
-----------------------------------------> 한국전 때도 단죄 당해야할 넘들이 오히려 단죄의 칼 휘둘렀던, 자유와 민주주의 깃발 나부끼면서.
2.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 터지기 전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좌익을 전향시켜 반공 데모 시위에 동원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하고 전황 안좋아지니까,
불안-초조-공포에 휩싸여 전향한 좌익인 보도연맹원들 대대적으로 체포, 체포로도 너무 불안해서 선제 대량 학살로 제거.
그렇게 희생된 이들 명단은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훗날 책임질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록 남기지 않고 처형.
추정치로 선제 예방 학살로 처형된 인원은 단위가 10만대, 정확히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르는.
보도연맹 희생자들 유골 발견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뉴스에 나오며 현재 진행형.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선제 사전 예방 학살 아닌 지진 터진 이후에 학살.
남경대학살 --------------------------------->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인들 상대로 도시 점령 과정 및 점령 완료 후 대량 학살.
우리 보도연맹 사건 --------------------> 같은 민족을 상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전 예방 학살.
21세기 현재 기준으론 전세계적 규탄과 반인류적 범죄로 반드시 처벌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는 것 명심하길.
더 안타까운 것은 보도연맹원 모집 당시 전국에 할당량이 내려져,
시골에선 아는 주민들 이름 공무원들이 그냥 올리기도 했고, 심할 경우에도 애들 이름도 적어 넣었는데,
보도연맹원 체포와 예방 학살 과정에서 완전 억울하게 좌익 아닌 이들도 꽤 많이 희생된.
실제 전향했던 좌익들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고.
3. 휴전 후 귀환 포로 심문 사망
남북은 정말 휴전되던 최후의 순간에도 대단했습니다.
----------------------------------------> 북괴군 포로들 38선 넘을 때 영상 보길, 팬티만 남기고 옷 다 남쪽으로 벗어던지고 욕퍼붓고 구호 외치면서 북으로.
----------------------------------------> 북괴는 우리 국군 포로 대부분의 존재 인정안하고 강제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 극히 일부 포로만 인정해 남으로 송환시킴
----------------------------------------> 북이 일부 국군 포로를 남으로 송환시킨 이유 역시 반공포로 거부하고 북으로 가겠다는 포로들 돌려받기 위한 목적.
----------------------------------------> 불행히도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 겨우 살아돌아온 우리 국군 포로들을 구 북괴군 포로 수용소에 일단 가두고,
----------------------------------------> 혹 간첩으로 파견되었는지 여부 조사 과정에서 일부 귀환 우리 국군 포로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
----------------------------------------> 말로만 조사했겠습니까?
----------------------------------------> 대한민국이 저랬는데 북괴는 안그랬겠습니까? 북으로 팬티만 입고 넘어간 이들 일부 역시 북에서 비참한 최후 맞았을 것.
----------------------------------------> 자국의 군인들이 적에게 포로되었을 때 저 따위로 대접하는 국가와 군은 도대체 뭡니까?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국민방위군-보도연맹 사태 정도면
일단 전시여도 내각 총사태하고 대통령 및 군 최고지휘부 상당수는 사법치리 피할 수 없었을 것.
특히 거짓 방송 틀어놓고 튄 대통령의 행위,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소 휴전 후에라도 그 책임을 물었을 것.
우린 사실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도.
우리 모두 운이 좋아 저 당시 대한민국의 20세 청년이 아니어서 개죽음 면한 것.
북괴 공산당 매운 맛 뺨칠 정도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매운 맛도 엄청났다는 것 경험하지 못한 행운에 감사해야.
한국전 당시 남북은 상호간
그리고 남과 북 각각의 내부에서 머리띠 두르고 완장차고 확신에 가득차 쳐죽여댔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 최고 지휘부의 전쟁 지휘 능력 -------------------> 전시 작전권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박탈당할 때 최고 지휘부에 있었던 이를 구국의 영웅인양 받드는 정신 나간 행위들이 아직도.
또한 한국전 휴전 과정에서도 믿는 것도 없이 북진 통일 궐기하면서 나대다가, 휴전 협정 당사자로 참여도 못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대상들은 미국-유엔-중공-북괴 ------------------------------> 대한민국은 업저버 정도.
휴전 당시 업저버 위치가 된 대한민국이라면, 대통령-정부-군의 결정적 오판 부인하기 힘들 것.
그리 북진통일 자심감 넘쳤다면 남침당하지 말고 선제 기습 북진해서 북괴를 멸망시키는 대한민국 먼저 만들었던지 ...
한국전쟁 직전에도 군 일부 장성들 자신감 만땅에,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에서 어쩌고 주둥이질에...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총알 부터 식량까지 원조에 의존하면서,
주둥이로만 북진 통일, 거기다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둥이로만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고 ...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19세기 영국 수상을 지냈던 탬플, 외무장관으로서 1843년 하원 연설.
" 국제관계엔 영원한 동맹도, 영구적인 적도 없다. 우리의 관심은 영원한 국익뿐이며, 국익추구는 우리의 의무. "
" We have no eternal allies, and we have no perpetual enemies. Our interests are eternal and perpetual, and those interests it is our duty to follow. "
지난 수 백 년, 영국과 전쟁한 적들 ---------------------------> 프 + 독 + 러 + 스페 + 네 + 미 + 중 + 일 + ...
지난 수 백 년, 영국과 함께한 동맹 ---------------------------> 프 + 독 + 러 + 스페 + 네 + 미 + 중 + 일 + ...
영국은 지난 수 백년간 세력균형 정책으로 유럽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프랑스가 쎄지면 프로이센(구독일)등 꼬드겨 프랑스 두들겨 패고, 독일이 강해지면
얼마 전까지 두들겨 패던 프랑스 달래서 함께 독일 몰매하는 과정의 무한 반복 루프, 당한 넘들이 바보.
-------------------------------------------------------> 프-독 등이 바보라서 당한 것 아닐 겁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몰려버린.
한반도에는 그 보다 더한 바보들이 널렸죠. 프랑스나 독일은 깃발 날리고 유럽을 휩쓸기도 했지만,
한반도에선 바보들이 내부에서 외세 부추김 당하면서 내부 초토화를 스스로 가열차게 했으니.
미국은 과거 영국에 비하면 서툴지만,
그래도 꽤나 현란한 테크닉으로 세계를 요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는 미국과 영국에게 확실하게 당했던 역사가 있음을 명심해야.
지난 세기초 미국과 영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한반도를 일본에 넘겼습니다.
일본은 미국 영국의 동맹으로 선택되어 극동에서 러시아-소련의 남하는 막는 미영의 방패로 기능했습니다.
미영의 동맹이었기에 1차대전 연합국으로 참전.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국의 독일 조차지와 중부태평양 독일령 마리아나 제도를
1차대전 이후 점령 또는 신탁통치령으로 획득해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발판 전진기지 획득했던 것.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에게 뺨싸대기 쳐맞은 이후에야 미영은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
생각해보길 진주만 이전 일본이 미영의 극동 행동대장 시절 미영이 우리 항일독립운동 지원할 수 있을지.
(1898년 미-스페인 전쟁 승리로 쿠바와 필리핀 탈취.
스페인이 전쟁에 패배하자 그 틈에 필리핀은 독립선언 하고 제1공화정 선포.
승리한 미국은 무력 진압에 나서 약 60만의 인명 피해 발생. 명백히 미국은 국익을 위해 스페인과 전쟁.
필리핀인들의 자유, 민주주의, 민족자결 위해 전쟁했다면 왜 무력 진압했겠습니까?)
지난 세기 미국은 한반도에 병과 약을 모두 주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지원만 고마워해선 안되는.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38선 그리고 미 극동방어선 에치슨 라인에서 대한민국 배제.
카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반도는 일본 지배 확정되었고, 미국의 미숙한 전후 처리 과정에서 38선 분단.
38선 분단 이후 애치슨 라인 배제로 남침 욕망을 극대화시켰던.
미국이 개입했던 외부 요인도 중요했던 지난 세기 한반도 암흑, 잊어선 안되는.
한국전 이후 혈맹으로 거듭났다지만 외세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일방적 믿음 역시 잠재 위협 요소입니다.
물론 민족분단과 동족상쟁의 가장 큰 책임은 우리 민족 내부에 있습니다.
남북간 극한 투쟁과 대한민국 내부의 적대적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한반도의 미래 없습니다.
(한 때 유럽 열강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
2차대전 독일 패전 후 미영프소 연합국 4개국에 분할 점령 신탁통치 후 영세중립 선언.
저들의 좌우익은 민족 내부 투쟁 피했습니다. 우린 옳다는 확신과 불타는 적개심으로 서로 쳐죽여댔고.)
19세기 영국 수상을 지냈던 이가 했던 발언 무시무시한 겁니다.
저런 지도자 국가가 존재하는 지구촌에서, 넋빠진 이들이 영원한 혈맹 운운하며
공동체 내부 투쟁에 몰두하기에, 저런 국가들이 세계를 쥐락펴락 해왔고, 해오고 있고 앞으로도 할 예정.
(어디에 좌우 구분이 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좌우 아닌 안밖의 투쟁이 결정적.)
민족분단과 동족상쟁의 가장 큰 원인은 물론 우리 민족 내부 적대적 분열 투쟁.
하지만 외부적 요인 역시 존재했습니다. 서구제-동구제 이데올로기가 수입되면서 더 큰 내부 적대적 투쟁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또한 외부 요인이 단순히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수입한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닌 + 한반도 분단의 가장 결정적 물리적 요소로 작용한 측면도 있습니다.
th-cam.com/users/shorts4xYAzsdguHo
--------------------------------------------> 1945년 8월, 처음 계획된
--------------------------------------------> 미영중소 연합 4개국에 의한 일본 분할 점령 계획안.
--------------------------------------------> 일본만이 아닌 한반도 역시 미영중소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일본군 무장 해제 계획이었지만 결국 변경된.
th-cam.com/video/8ldqolPJIG0/w-d-xo.html The British Occupation of Japan
--------------------------------------------> 2차대전 종전 후 독일-오스트리아-일본에 대한 연합군 분할 점령 관련 내용.
--------------------------------------------> 유럽에선 전범국이 미영프소 4토막 분할 점령되었지만, 극동에선 전범국 일본 아닌 한반도가 미소 2토막 나눠 먹기.
--------------------------------------------> 전범 일본에 대한 연합국 점령 계획안이 어떻게 사실상 거의 미국 단일 점령에 가깝게 ( 영국이 약간 점령하는 형태 )
--------------------------------------------> 바뀌는지 보길. 소련의 일본 홋카이도-혼슈북부 점령 철회 + 영국의 일본 점령지 축소 + 중국의 일본 점령지 0화
한국전쟁은 외세의 역활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미영중소 4개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 계획안 검색해서 찾아보길.
소련 점령 예정지는 함경도 일대에 국한되고 한반도의 대부분은 미영중이 점령하는 형태.
만일 일본과 한반도의 4개국 분할 점령 계획대로 전후 처리가 실시되었다면, 동서독에서 서독이 훨씬 컸던 그 조건과 본질적으로 같아져,
--------------------------------------------------------------> 함경도 귀퉁이 차지한 물리적 조건에서 한국전 발발은 사실상 힘들었을 것.
--------------------------------------------------------------> 소련군 점령 예정지는 인구 측면에선 미영중 점령지에 비한다면 압도에 압도에 압도되는 수준.
--------------------------------------------------------------> 또한 모택동 아닌 장개석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는 조건에서 중국 공산화 역시 조금은 더 힘들었을 것.
---------------------> 미국이 일본 전체 점령 욕심 부리면서,
---------------------> 그 반대급부로 한반도 38선 이북을 소련에게 떼어주는 선택을 한 것.
---------------------------------------------> 유럽에선 전범국 독일과 독일어 사용하는 오스트리아가 미영프소 4개국에 분할 점령되었지만,
---------------------------------------------> 태평양전쟁 종전 처리 과정에선, 미국의 주도적 역활로 전범국 일본 아닌 한반도가 유탄 맞은 것은 치명적 민족분단 원인.
---------------------------------------------> 오스트리아는 4개국 신탁통치 후 영세 중립 선언, 하지만
---------------------------------------------> 오스트리아는 내용적-경제적으로 사실상 친서방 서구 민주주의 국가가 된. 그 이유는
---------------------------------------------> 미국-영국-프랑스군의 점령과 서방측 원조가 친소 공산세력의 확산을 저지 + 현명한 오스트리아 내부 타협 때문.
---------------------------------------------> 한반도의 좌우익은 정파적 승리를 위해 외세와 결탁해 자발적 내부 투쟁에 돌입했지만 오스트리아 좌우익은 달랐던.
그리고 미국의 태평양 전쟁 막판 끝내기는 인류 역사상 아마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대악수, 최악의 오판 삽질.
---------------------------------------------> 사실상 태평양 전쟁 승패 결정된 상태에서,
---------------------------------------------> 미군 희생 좀 더 줄여보겠다고 + 소련의 대일전 참전 요청 + 소련은 형식적으로 미국의 요청을 수용하면서
---------------------------------------------> 과장 아주 아주 조금 보태 일본 항복 1초 전에 + ( 게다가 태평양 전쟁 기여도 0 상태에서 ) + 만주 전체와 한반도 절반 점령.
---------------------------------------------> 소련 입장에선 그냥 굴러 들어온 떡.
---------------------------------------------> 만주만 점령해도 중국 국공내전 모택동의 승리를 결정지을 조건에 + 추가로 한반도 절반 떼어준다는데 왜 거부합니까?
덜떨어진 미국이었지만 자신들이 오키나와에서 악전고투 하던 그 무렵,
미국의 요청으로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할 경우 사실상 한반도 전체를 무혈 점령 가능성 뒤늦게 깨닫고,
--------------------------------------------------------------------> 허겁지겁 수정안 즉 38선 경계로 북의 소련군 점령을 용인하면서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 막는 잔머리.
--------------------------------------------------------------------> 소련군이 만주 점령한 그 순간 ---------------------------> 중국 국공내전 모택동 승리, 장개석 패배 확정.
--------------------------------------------------------------------> 소련이 만주 점령, 일본군 무장 해제만 하겠습니까?
--------------------------------------------------------------------> 소련군이 무장 해제한 일본군 무기는 사실상 모택동에 가는 겁니다.
--------------------------------------------------------------------> 또한 소련군이 점령한 만주는 모택동이 대륙 전체를 노리는 배후 강력한 거점으로 변하는.
-------------------------------> 저렇게 허접했던 미국, 아마도 소련이 오케이 해준 순간 --------------------> 한반도 절반은 건졌다면서 속으로 만만세 외쳤을 것.
1945년 당시 세계 유일 핵 보유국으로서,
미국이 정상적인 판단했다면 이랬어야 하는 겁니다. ---------------------> 소련에 대한 강력 경고, 대일본전 지원 빌미로 감히 만주-한반도 발 내딛지 말라!!!
--------------------------------------------------------------------------------------------------------> 태평양 전쟁 기여도 0에 + 일본과 소일-불가및 맺은 주제에 감히 나대지 마라!!!
--------------------------------------------------------------------------------------------------------> 혹이라도 일본 항복 밥상에 숟가락 얹는 꼼수 부리면 핵무기 사용해서라도 막겠다!!!
한국전쟁 유엔군 파병,
소련이 거부권 행사했다면 불가능, 왜 소련이 안보리 불참 기권했는지도 냉정히 생각해보길.
-------------------------------------------------> 독소전에서 우랄 서부 소련의 핵심 유럽 지역이 사실상 완전 토초화 + 민간인 포함 거의 2천만 인명 피해 상태에서
-------------------------------------------------> 강력하지만 덜떨어진 미국을 극동의 국지전에 몰아 넣고, 동구권에서 철의 장막 확실하게 치려고 의도적으로 기권한 것.
-------------------------------------------------> 미국이 한국전쟁에 붙들린 사이에 소련은 동구권에서 철의 장막 완성했음을 깨닫길.
-------------------------------------------------> 국가 이익이 충돌하는 장에서 소련-스탈린이 정말 쫄아서? 멍 때리다 안보리 출석 못해 유엔군 파견???
-------------------------------------------------> 스탈린은 독소 불가침 + 일소 불가침 맺었던 음흉한 넘이기에 순진하게 멍 때렸다고 보기 어려운.
만일 영국 없이 미국 단독으로 유럽에서 종전 협상했다면 미국은 소련에게 완벽하게 당했을 것.
-------------------------------------------------> 영국은 1944년 그리스에 상륙, 공산 빨치산 토벌 + 티토 유고 지원하며 반소 독자 노선 걷도록 유도.
-------------------------------------------------> 미국은 유럽에서도 그저 그저 그저 ... 하루라도 아니 1초라도 빨리 미 본토로 돌아가려 정신 넋 빠졌던.
-------------------------------------------------> 그러다 전후 막상 철의 장막 현실 보고서, 뒤늦게 처칠 초청해서 철의 장막 연설 들으며 박수쳤던 뒤늦은 수습.
또한 지난 세기 초, 미국과 영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일본을 극동의 파트너로 선택 러시아-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역활 일본에 부여.
한반도의 일본 지배는 그렇게 사실상 최종 결정된 겁니다. ----------------------> 일본에 먹힌 한반도 때문에 태평양전쟁 종결 과정에서 38선이 태어난 것도 명백.
만일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없이
일본이 미영의 극동 지부 행동대장으로 만족하고 계속 미영의 편에 남았다면 21세기 현재도 한반도와 만주는 여전히 일본령 가능성 압도적.
따라서 한국전 이후 한미 관계만 보며, 미국에 대한 지나친 합리화는 위험.
우리 민족은 이미 지난 세기 초 미국에게 제대로 뒤통수 쳐맞은 경험도 있었다는 점에서.
오만과 두려움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군이 일본군을 상대할 때 처럼 좀더 연구하고 분석해서 대응했다면 이런 상황은 만들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올리버 스미스 해병대 사단장이 이오지마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어서 동양인 적들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았죠
못돌아가요
6.25 빨리 끝나고 독소전 보고 싶은 1인
영국총리 같은 사람이 히틀러를 키웠는데 처칠이 대전이후 총리에서 밀려난이후 다시 반대 성향의 사람이 영국총리가 되었군요
얼마전부터 폰트 몇개가 이상한거같은데
괜히 해병대가 아니다 해병대는 항상 병력 열세에서 전투에 입한다
정말 이해가 거지 안는게 아직 전쟁에 졌다고 할 만한 상황도 아니고 정보부재로 무작정 올라갔다가 조금 밀리는 상황에 너무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이 됩니다
철수니 머니 생각을 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갑자기 왜 밀리는지를 생각하보고 정보의 문제가 있었다면 왜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를 파악하고 대처를 해야 되는게 맞지 안나요
정말 한국전쟁을 보면 미국이 이렇게 무기력한 나라인가라는 생각이 정말 만이 듭니다
결국 흥남까지 왔구나..
우크 이젠고만해라,,피곤하다,,그게 남의일이니깐,,고따우로 말하는거지,미국에 이익을 위해 6,25참전했다,,고따우로 말하는 인간들 뇌구조를 보고싶다,,맞는말이지 근데 그이상의것 있다는것
맥아더의 실책이 너무 컸네요
이당시 미국은 자유진영을 지키려는 의지와 국민들 공감대가 있기에 3년동안 남의땅에서 전투의지를 불태울수 있었지만
그후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은 명분을 다 잃었다
중공군 철수 안하모
베이징에 핵폭탄 터트린다고 중국 압박했으면 어떨까?싶습니다
동맹국들이 머라카든말든 밀어 붙였으면 어땠을까?
진짜 안되모 베이징에
핵폭탄2개만 떨어트려도 시마이했을것 같습니다
망구 내생각
5:54 그냥 전화하면, 중간에 누가 도청할지 모를것임. 군용통신이니 보안이 철저하겠지만서도, 서독에서 스파이는 비서/타이피스트 등 수뇌부의 주변인들임. 게다가 중요한 내용일수록 표정과 태도를 보면서 이야기 나누는것이 중요.
당시 대만이 본토상륙하지 못 한게 대만은 영원히 본토수복을 못하게된거라고 생각됩니다!
무기고는요????????
배에 타지 못한 10만여명의 피란민들이 흥남부두 폭파와 함께 사라졌다...
피란민 20만, 배에 탄 피란민 9만8천... 나머지 10만의 피란민이 흥남부두 폭파때 같이 폭사 했다.....
베이징과 상해
근디...9병단 피해가 큰거 같은데..흥남을 배수에 진을 치고...1개 사단정도 지원하면 중공군 다 섬멸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여단만 주둔을 시켜도 궤멸됩니다.
저 흥남철수작전 이후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는 흥남을 포함한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를 밟을 수 없었다는 점이 눈물이 납니다 ㅠㅠ 기세를 몰아 북진해서 압록강까지도 전진해 갔는데 중공군 남하에 전략적으로 잘 대처하지 못한 대가로 영원히 날아간 북진통일 ㅜㅜ
6.25당시 소련에 핵폭탄이 없지않았나요?
있었죠.
윤시원 님은 방송 리뷰를 안하시는 것 같아요. 진짜 홀로 여포놀이 하고 계셔요.. 말씀하시는 부분 나오면 은근 넘기고 싶어질 정도로 안어울리심..
그래도 처음 방송 때보다는 많이 나아지셨는데😊
@@귀요미-y1k 저는 오히려 처음에 오셨을 때가 볼륨이나 톤앤매너가 더 나았던 것 같아요. ㅠㅠ
이거 보면서 알았는데, 영국이 한반도 끼친 영향이 많았군요.
한일합방때는 영일 동맹으로 악명을 떨치고, 625때는 한반도에서 조기철수까지, 게다가 1990년대 남아프리카 인권유린까지
참으로 영국은 역사적으로 보면 저질 국가네요.
1950년에 자유진영의 리더를 어떻게 미국이 영국에 줄 수가 있습니까ㅋㅋㅋㅋㅋ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죠. 그런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으니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계속하잖아요.
흥남과 함흥에 방어선을 쳤으면 중공군들의 무덤을 만들수가 있었네요!
다들 아쉬워하지만 당시 전선상황과 병력규모,실력 고려하면 요새 구축했어도 유엔군 재북진하기 전에 중공군에 의해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ㅠ
@@게딱지-x3i
가능합니다.
중공군은 보급을 못 받고 미군은 해상에서 막대한 보급을 받으니까요.
다만 돈이 많이 들지요.
전략적으로 상당한 우위에 있게 되죠.
@@좌빨박멸 지형도 보시면 함흥,흥남 지역만 가지고는 자연적 방어선이 사실상 없어서 거의 불가능합니다. 요새를 만든다 해도 황초령,부전령 등을 포함하는 높은 함경산맥이 있어 중공군이 바로 감제하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ㅜ 교두보가 더 넓어서 함경산맥 일부를 포함했을 정도면 모를까요
요약을 하면 보급이 잘되는 곳이 이긴다.
그곳을 중공군들의 무덤을 만들수가 있었다.
@@좌빨박멸 원산까지도 빼앗기고 동해안은 양양까지 쭉 물러난 상황에서 양양 이남에서 흥남까지 먼 거리를 보급하는 것도 말이 그렇지 매우 어려웠을 겁니다 ㅜ
정말...미군에게 감사해야한다. 중공군의 침략에 밀여서 미군과 연합군이 패퇴하고 철수 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 티벳꼬라지 나있을거다.
중공군들이 야간에만 이동을했는데 미국의 막강한 전략폭격기로 예상돼는 중공군집결지에융단폭격 콜세어 전투기로 집속탄인 소이탄으로 불구덩이로만들어야돼는데 그런점이 아쉽군요 원폭으로 20발갈겨쓰면 더좋고요
그리고 흥남 교두보 유지가 추후 재북진시 제대로 도움이 되려면 육상전선이 최소한 개성-토산-안협-이천-판교-법동-원산 선까진 빠르게 올라왔어야 원산에서 보급을 해서 교두보를 유지시키고 이걸 바탕으로 양면전선으로 공산군을 밀어올린다는 전략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동해안을 원산까지 아니 못해도 장전/통천까지 올리지 못하면 흥남 교두보는 유의한 이득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위 이유들 때문에 평양원산선에 방어선을 만들어서 버틸 수가 없었던 점에서 참 씁쓸하죠 ㅠㅠ 더구나 이 평양 동쪽부터 낭림산맥을 메꿔야 할 미9군단이 중공군의 공세를 받은 국군2군단을 메꾸느라 많은 고생을 했고 또 미1군단이 청천강 라인에서 평양으로 후퇴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었답니다. 따라서 이로 인해 미9군단과 국군2군단이 속한 2사단은 피해가 너무 커서 평양 동쪽부터 원산까지 방어선을 만들 수가 없었고 이 틈을 타 중공군이 원산까지 남하해 먹어버렸죠 ㅠ
걍 평양에서. 방어 진지를 구축 헸어야지
맥아더는 진짜 광화문 세종대왕 이순신 담으로 동상이 세워져야 한다 대한민국을 구한 인물
1차대전 미 지상군의 실전 경험은 사실 경미한 수준에 불과, 맥아더-패튼-트루먼 등 당시 투입된 모든 미군 장교들 실전 경험은 지극 짧았던.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에 했지만 + 대규모 징병과 훈련 등 대서양 건널 준비 과정이 필요했고 + 선발대는 1918년 초, 이후 축차로 대서양 건너 파병.
즉 투입된 미군이 본격 전투 참여 시작한 것은 독일 항복 전 몇 개월에 불과.
맥아더 1차대전 전 실전 경험 하기 힘들었고 + 1차대전 때 훈장을 받았지만 미 지상군 전체가 제대로 된 실전 경험 미약했으며 + 전간기 때는 아예 실전 경험 없었음.
---------------------------------> 아버지 후광으로 필리핀에서 총독 비스무리 위세를 떨쳤던 것이 태평양 전쟁 직전 맥아더 상황.
---------------------------------> 막상 태평양 전쟁 발발하고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시작되자 마자 맥아더는 필리핀 탈출. 이 정도가 맥아더의 태평양전쟁 이전 전투 경력.
대한민국과 미국은 한국전쟁 특수 관계로 엮여서 냉철하게 맥아더를 보지 않았던 측면이 있습니다.
중공군 개입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멍 때렸던 것은 치명적 + 명 때리다 중공군에 당한 다음에 핵폭???
-------------------------------> 게다가 중공군 개입은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난 것 아니며,
-------------------------------> 지속적으로 특정 조건, 즉 유엔군이 38선 넘어 북으로 진격할 경우 반드시 개입한다고 반복적으로 밝힌 상황에서,
-------------------------------> 맥아더는 중공군에 대한 그 어떤 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공군에 사전 대비만 철저히 했다면 충분히 격퇴할,
-------------------------------> 군사적-경제적-과학기술 능력 모두를 갖추었기에 맥아더의 멍때림으로 치명적 후폭풍.
-------------------------------> 수학에서 유효숫자 개념, 이미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에서 오차 발생했다면 10째 100째 자리 정밀 계산은 할 필요도 없는 시간 낭비.
-------------------------------> 중공의 개입 협박을 깡그리 무시하고 멍때린 자가 + 중공군에게 충격받고 핵폭 운운하다가 + 군통수권자에게 해임당했던 것.
맥아더를 해임한 미국 대통령과 정부의 판단이 더 합리적.
1949년 즉 한국전 발발 1년 전, 소련 최초 원폭 실험 성공. 즉 미국의 핵독점 이미 깨진 현실.
또한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만주 전체 + 북경-상해-남경 등 중국 핵심지역 점령 + 중국 해안선 사실상 거의 다 장악하고서도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 1949년 소련 핵무장 현실화 + 1949년 장개석이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축출.
저런 조건에서 압록강 다리 다 부수고 + 중공군의 만주 보급기지 거점 서너 곳 폭격하면 승리 가능하겠습니까?
---------------------------------------------->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고작 1년 전 대륙 통일 완수하고 아직도 잔당 반군 소탕 와중에 한국전을 빌미로
----------------------------------------------> 미국과 장개석이 다시 대륙 회복에 나설 가능성을 차단 차원에서라고 판단해야 합리적.
----------------------------------------------> 즉 중공 입장에선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반도 전체가 미국 세력권으로 넘어가는 것 방치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영국 미국은 원래 상륙 작전은 기본입니다. 또한 상륙작전 설계 및 실행 주체는 명백히 해군.
--------------------------------> 2차대전 북아프리카 횃불 상륙 + 시칠리 상륙 + 노르망디 상륙 + 남부 프랑스 엔빌 상륙, 1차대전 때 실패했지만 갈리폴리 등.
--------------------------------> 영국은 지난 수 백년, 지구 차원에서 전쟁 수행했는데 그 모두는 기본적으로 상륙을 전제. 2차대전 미영 연합국이 벌인 상륙 작전의 주도 세력은 미영 해군력.
--------------------------------> 미영의 지상군은 퍼날라지는 택배 배송품 수준의 수동적 역활이었으며,
실질적 상륙 작전 수행은 해군 + 압도적 공군의 엄호 한국전쟁 인천상륙 아닌 군산이건 어디건 일단 상륙만 하면 적에겐 치명타.
----------------------------------> 2차대전 노르망디 역시 반드시 거기여서 승리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건 상륙만 성공하면 독일군은 패배할 조건.
----------------------------------> 압도적 제공권으로 독일의 방어선 정보를 사실상 모두 획득했기에 독일이 A에 방어 집중하면 A 지역 피해 다른 B,C 선택하면 그만.
----------------------------------> 롬멜전사록에서 롬멜 역시 그런 점 밝힌, 미영은 상륙 지점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 독일은 모든 해안선을 철저히 방어할 역량 없음을 인정.
----------------------------------> 따라서 여러 선택지들 가운데 오로지 노르망디여서 성공했다고 착각해선 안되는.
즉 인천상륙 맥아더의 천재성으로 과감히 벌인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전쟁 역전했다는 것은 냉정하게 본다면 착각.
--------------------------------> 맥아더 아닌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 인천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상륙전 했었어도,
--------------------------------> 압도에 압도에 압도적인 해공군력으로 유엔군은 돌파구를 말들었다고 판단해야 합리적.
--------------------------------> 사실 냉정하게 본다면 인천상륙 없이 낙동강에서 북괴군을 돌파 섬멸했을 때 적의 타격이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애초 영국 미국과 같이 지구 차원에서 군사력 투사 적을 공격하는 세력이 취하는 것.
--------------------------------> 영불해협-지중해-대서양-북해를 건너야만 적을 공격할 수 있기에 필수적인 상륙.
--------------------------------> 한반도와 같은 좁아 터진 국지전에서 신규 상륙 병력 투입도 아닌 + 기존 투입된 병력 빼서 상륙??? 문제도 큰 겁니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 당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마 킴멜? 제독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책성 해임.
--------------------------------> 만일 니미츠가 선배여서 킴멜 제독 보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 임명되고 그 직후 진주만 기습 당했다면 니미츠도 문책 해임당했을 것.
--------------------------------> 킴멜 제독 가족과 후손들이 21세기 최근도 명예 회복시켜달라는 청원도.
( 킴멜은 41년 2월 진주만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 미 태평양함대는 원래 미 서부 해안에 위치, 하지만 루즈벨트 명령으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 )
( 일본 위협 대비한다면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미 본토에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한 루즈벨트 + 지중해에서 영국의 타란토 기습 성공 및 영국측의 진주만 역시 타란토와 유사하기에 일본 위협에 철저 대비하란 경고 무시했던 루즈벨트 + 태평양함대 이전에 반대하던 제독을 해임하고 과거 루즈벨트가 해군성에 근무할 때 부관이었던 킴멜을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않히고선 진주만 기습당하자 해임 + 루즈벨트 자신의 멍 때림은 책임 안지고. )
---------------------------------> 맥아더 역시 필리핀에서 사실상 혼자 탈출한 책임을 물어,
---------------------------------> 진주만으로 해임된 태평양함대 사령관 처럼 해임시켰더라도 솔직히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던 위치.
---------------------------------> 필리핀 함락 당시 해임되어도 별 문제 없었던 맥아더가
---------------------------------> 미 해군이 사실상 주도한 태평양전쟁의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일본 항복 받아낸 그 사실 자체가 보기에 따라선 넌센스.
---------------------------------> 냉정하게 본다면 태평양전쟁은 미 해군의 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미 지상군은 사실상 들러리 수준에 불과.
---------------------------------> 필리핀 상륙 따위는 하거나 말거나 태평양 전쟁 승패에 아무런 영향 없는, 보기에 따라선 미 육군과 맥아더 개인 위신 체면치레용 성격도.
---------------------------------> 필리핀 상륙은 미 육군 입장에선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는 육군의 역활 존재감 과시용.
맥아더는 자신의 능력으로 검증받은 제대로 된 실전 성과 탁월함??? 의문입니다.
1차대전이전 + 1차대전 + 전간기 + 필리핀함락 + 태평양전쟁수행, 원수가 되어야할 그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는.
----------------------------------> 그리고 맥아더 주연 패튼 조연 흑역사 잊지 말아야.
----------------------------------> 대공황 당시 생계 어려움을 겪던 1차대전 참전 용사들이 그 동안 지급되지 않았던 참전 보상금 지급 시위하자,
---------------------------------->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맥아더는 공산주의 시위라고 폄하하며 패튼 중령에게 무력 해산 지시.
----------------------------------> 1차대전 참전 동료들을 향해 맥아더와 패튼은 장갑차까지 동원하고 + 가족들도 함께 있던 시위대 텐트 불사르며 강경 진압 부상자 발생하기도.
맥아더에 비해 실전 경험 훨씬 많은 패튼,
그 패튼의 실전 경험, 1차대전-전간기-2차대전 다 통틀어 본다면 이렇습니다. 1차대전 전 경험 제외. ( 세계대전급 아니며 + 강대국 상대 실전 아니기에 )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넉넉하게 추정해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4년 7월경.
하지만 대규모 지상군 편성하고 대서양 건너 파병하는데 약 1년의 시간 필요.
준비 차원의 조사관들은 즉시 대서양 건넜지만 최초 소규모 선발부대는 18년 2월경 유럽에 도착 + 이후 축차적 대서양 횡단 병력 증강.
독일 항복은 1918년 11월, 대서양 건넌 미군이 유럽에서 부대 편제 제대로 갖추고 실전 투입은 독일 항복 얼마 전으로 6개월 내외로 판단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짧았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시칠리 전투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발생.
맥아더는 패튼과 같이 야전에서 직접 대규모 전투 지휘한 경험도 없다는 점에서 맥아더의 원수 계급은 냉정하게 본다면 극단적 계급 인플레.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사실상 전멸급 패배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당시 인구 5천만에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를 영국-캐나다 연연방군이 상대. 당시 독일 타이거 및 판터 전차 격파할 전차포 갖춘 전차는 영연방군 파이어플라이 정도.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2차대전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약 80%를 영국-캐나다군이 상대.
당시 미군은 실전 경험 사실상 전무했던 신병들로 구성되어, 독일 주력 상대 불가능해 영국군이 독일 주력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캐나다군이 독일 5호 판터 및 6호 타이거 전차를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 소개하죠.
1. th-cam.com/video/cNGGt1ORO-0/w-d-xo.html
Sherman Firefly vs King Tiger | July 1944 | Tank Duel ----------------------> 44년 7월 18일, 파이어플라이 서부전선 최초 킹타이거 격파.
2. th-cam.com/video/V-jGdZ5XWNM/w-d-xo.html
Sherman Firefly vs SS Panthers - Tank Battle At Normandy, France ------------------------------> 44년 7월 9일, 캐나다군 파이어플라이 판터 7대 격파.
3. th-cam.com/video/IrEtdMkFA00/w-d-xo.html
Tank Battles of WW2 - The Firefly Ace that knocked out 5 Panthers with 5 rounds ------------------> 44년 7월 14일, 파이어플라이 1대가 5번 사격, 5대 판터 격파
노르망디 전역에서 미하일 비트만이 탄 타이거 역시 영국군 파이어플라이에게 격파당해 전사.
4. th-cam.com/video/R4LyLCOUkzI/w-d-xo.html
Cromwell vs 2 Panther tanks | September 1944 | Tank Duel ----------------------> 노르망디 돌파 후 44년 9월 19일 네덜란드, 영 크롬웰 전차 판터 2대 격파.
파이어플라이와 같은 17파운드 포를 장비한 크롬웰도 판터 타이거 격파 가능. 크롬웰은 당시 전차 중에선 기동성 가장 좋아 최고 속도 시속 약 65km/h.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타이거와 첫 교전 후 대응으로 43년 무렵 MBT 개발 시작,
그 사이 과도기에 미 셔면에 17파운드 포를 장착한 파이어플라이 및 크롬웰 등으로 응급 조치하며 버틴 것.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때 미군은 타이거 판터 대비 측면에선 사실상 멍 때렸던. 영국은 종전까지 약 2천대 파이어플라이 생산했고,
노르망디 상륙 때는 파이어플라이 생산 초기여서 초기 생산분 약 350대를 투입했다고.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는 영국군이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미국과 영국의 전차 중에서 전차포로 독일 판터나 타이거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군 파이어플라어-크롬웰 정도.
파이어플라이 역시 약한 장갑 때문에 극심한 피해를 당했지만, 독일 타이거나 판터 역시도 파이어플라이에게 먼저 공격당하거나 매복에 걸리면 격파당했기도.
노르망디 전역은 이미 독일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한 이후에 벌어진 전투로, 탁 트인 들판에서 전차가 고속 기동하는 전투 아닌 보카쥬 지형에서의 매복성 전차 전투.
처음엔 공격하는 영국군 전차가 매복한 독일군 전차에게 당하는 위치였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독일군 전차도 영국군 매복이나 배후 침투에 당해 격파되었던.
독일의 그 어떤 전차라도 격파할 수 있는 전차포를 가진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원거리에서는 약한 장갑 때문에 독일 타이거에게 당할 위험이 컸지만, 보카쥬 지형에선 원거리 아닌 근접 전투도 많았기에 파이어플라이는 나름 역활을 한.
하지만 미군의 일반적인 셔면은 판터나 타이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일 패전 직전인 1945년 1월, 2대의 독일 판터가 21대의 미 셔먼과 교전했을 때 ----------------> 셔먼 9대 격파 + 셔먼 12대 포획.
만일 보통의 셔먼만 아닌 파이어플라이와 혼성 편성되었다면 판터의 저런 전과 불가능. 45년에도 저랬으니 실전 경험 없었던 44년 노르망디에선 더 취약했을 것.
2 SS Panthers vs. 21 US Shermans
th-cam.com/video/86K0ncTkAkA/w-d-xo.html
1945년 ( 영 최초 MBT인 센츄리온의 직전 모델인 ) 실전 투입된 마지막 순항전차 코메트.
th-cam.com/video/tRxU0B8cybY/w-d-xo.html
Comet Tank vs Tiger Tank | April 1945 | Tank Duel ----------------------------> 45년 4월 종전 직전, 영 코메트(센츄리온 직전 모델) 타이거 격파
여기 영상의 코메트 모습은 현대 주력 전차 유사, 하지만 센츄리온으로 바로 대체된. 최초의 MBT인 센츄리온은 너무 늦게 투입되어 실전 경험 없었음.
th-cam.com/video/0AnoySTfvFM/w-d-xo.html Centurion - Tiger Tank's Nemesis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독일 항복 직후인 5월 14일, 센츄리온 6대 영 항구에서 선적, 몇 일 후 안트워프 항에 하역.
최전선 소련군 점령지 경계까지 약 400마일 자력 기동 영국군 기갑부대 배속, 영 미 탱크들과 함께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 후 7월 귀환.
----------------------------------------------------------------------------------> 2차대전 종전 당시 미 퍼싱, 영 센츄리온 등장으로 이미 독일 전차의 질적 우위는 끝난 상태.
아니 왜 내가 쓴 글이 블라인드 처리가 되냐?
욕을 쓰지 않았다.
좌빨들은 저 대동강철교로 피란하는 장면을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끊은 장면으로 왜곡했는데 참 기가 찹니다...
이승만 정부는 한강인도교 조기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을 ( 공병감 ) 사형시켰습니다.
최창식 대령의 부인은 1961년 재심 청구를 했고 + 1964년 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승만은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피신 + 라디오 방송엔 의정부에서 국군이 북괴군을 격퇴했다는 전파가 흘러나왔고 +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폭파
---------------------------------------> 저런 상태에서 한강인도교 폭파 후 악화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 명령 받고 임무 수행한 공병감 사형시킨 것.
( 좌빨들은 저 대동강철교로 피란하는 장면을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끊은 장면으로 왜곡했는데 참 기가 찹니다... )
---------------------------------------> 대동강 철교 사진과 상관 없이 기가 찰 일임을 깨닫길. 바뀌는 것 사실상 전무하며 + 공병감을 사형시킨 부분에선 더더욱 기가 찰 수도.
관련 기사 내용 인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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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법회의는 단심제(單審制)였기에 법적인 항고(抗告)가 불가능했다. 기자는 1950년 9월 15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유죄 판결문을 입수했다. 다음은 요지.
최 공병감은 한강교 폭파로 인한 책임을 지게 된 셈인데, 이 군법회의의 판결은 폭파를 직접 명령한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이 전사한 뒤였다.
이 판결은 그러나 1961년 9월 최 공병감의 부인인 옥정애(玉貞愛)씨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고 이를 접수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이듬해 5월 15일 원심판결 무효를 선고했고, 1964년 10월 23일 결심공판에서 최 공병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은 무죄 판결문 요지.
당시 재판을 맡았던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황준환 대령(재판장)은 ‘조급(早急) 폭파’를 인정하면서도 최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YS때 국민학교 다니던 나도 저 사진을 한강교로 알고있었는데 뭔 개짖는소리 하냐? 그냥 다리 끉어진 사진이니 그게 한강교구나 하고 갖다쓴 무지한 인간들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착각하게 되는거지.
@@scz8333 이 좌파반미반일노재팬대깨는 이악물고 같은 댓글을 몇개를 복사 붙여넣기 하는거여 ㅋㅋㅋ
한국전쟁 때 우리 대통령-군-정부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한민국이어야 미래 희망이 있습니다.
1.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넘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불과 6개월 정도 후인 1951년 초 한겨울 추위 속에서 중공군 남하 당시,
전시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방비리가 벌어져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보충역으로 징집된 약 50만 병력 중에서 추정치 약 10만 병력이 적과의 전투 아닌 비전투 손실로
남쪽으로 후퇴 행군 도중에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서북청년단 단장 출신의 민간인이 임명된.
너무나 황당무계한 사태가 터져 다 덮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령관 포함 몇 명 처형되는 선에서 덮어버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국민방위군은 해체.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 15만 조금 안되는데, 국민방위군 비전투 손실로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병력이 추정 약 10만.
----------------------------------------> 2차대전 영국군 최대급 패배 마켓가든 작전 실패 때,
----------------------------------------> 서방 연합군 총 인명 손실, 영국+미국+폴란드의 전사+행불+포로 총합 = 약 18,000명 (십팔만 아닌 일만팔천 )
----------------------------------------> 게다가 인명 피해 대부분은 포로, 영 공수부대 전사자 약 1100명 + 영 30군단 전사자 약 5500명.
이기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 안심시켜 놓고 + 한강다리 끊고 튀어서
----------------------------------------> 님이 피난 못가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고 가정해보길.
----------------------------------------> 운좋게 전쟁 중 개죽음 당하지 않고 + 휴전 전에 북괴군 탈출해 대한민국에 남았다고 해도
----------------------------------------> 한강다리 끊고 튀었다 다시 돌아온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들은 님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잊지 말기를.
----------------------------------------> 튀었던 넘들이 님을 북괴군 빨갱이 내지는 부역자로 몰고 + 님 아들 딸 역시 연좌제로 어려운 세월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단죄하는지 ...
-----------------------------------------> 임진왜란 때도 잽싸게 튄 국왕과 조정이 충무공 고문해 죽음 직전으로 몰고,
-----------------------------------------> 최대 의병 이끌던 의병장 김덕령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고 + 호란 때 겨우 살아 돌아온 여인들을 화냥년이라고 내치고
-----------------------------------------> 한국전 때도 단죄 당해야할 넘들이 오히려 단죄의 칼 휘둘렀던, 자유와 민주주의 깃발 나부끼면서.
2.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 터지기 전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좌익을 전향시켜 반공 데모 시위에 동원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하고 전황 안좋아지니까,
불안-초조-공포에 휩싸여 전향한 좌익인 보도연맹원들 대대적으로 체포, 체포로도 너무 불안해서 선제 대량 학살로 제거.
그렇게 희생된 이들 명단은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훗날 책임질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록 남기지 않고 처형.
추정치로 선제 예방 학살로 처형된 인원은 단위가 10만대, 정확히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르는.
보도연맹 희생자들 유골 발견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뉴스에 나오며 현재 진행형.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선제 사전 예방 학살 아닌 지진 터진 이후에 학살.
남경대학살 --------------------------------->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인들 상대로 도시 점령 과정 및 점령 완료 후 대량 학살.
우리 보도연맹 사건 --------------------> 같은 민족을 상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전 예방 학살.
21세기 현재 기준으론 전세계적 규탄과 반인류적 범죄로 반드시 처벌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는 것 명심하길.
더 안타까운 것은 보도연맹원 모집 당시 전국에 할당량이 내려져,
시골에선 아는 주민들 이름 공무원들이 그냥 올리기도 했고, 심할 경우에도 애들 이름도 적어 넣었는데,
보도연맹원 체포와 예방 학살 과정에서 완전 억울하게 좌익 아닌 이들도 꽤 많이 희생된.
실제 전향했던 좌익들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고.
3. 휴전 후 귀환 포로 심문 사망
남북은 정말 휴전되던 최후의 순간에도 대단했습니다.
----------------------------------------> 북괴군 포로들 38선 넘을 때 영상 보길, 팬티만 남기고 옷 다 남쪽으로 벗어던지고 욕퍼붓고 구호 외치면서 북으로.
----------------------------------------> 북괴는 우리 국군 포로 대부분의 존재 인정안하고 강제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 극히 일부 포로만 인정해 남으로 송환시킴
----------------------------------------> 북이 일부 국군 포로를 남으로 송환시킨 이유 역시 반공포로 거부하고 북으로 가겠다는 포로들 돌려받기 위한 목적.
----------------------------------------> 불행히도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 겨우 살아돌아온 우리 국군 포로들을 구 북괴군 포로 수용소에 일단 가두고,
----------------------------------------> 혹 간첩으로 파견되었는지 여부 조사 과정에서 일부 귀환 우리 국군 포로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
----------------------------------------> 말로만 조사했겠습니까?
----------------------------------------> 대한민국이 저랬는데 북괴는 안그랬겠습니까? 북으로 팬티만 입고 넘어간 이들 일부 역시 북에서 비참한 최후 맞았을 것.
----------------------------------------> 자국의 군인들이 적에게 포로되었을 때 저 따위로 대접하는 국가와 군은 도대체 뭡니까?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국민방위군-보도연맹 사태 정도면
일단 전시여도 내각 총사태하고 대통령 및 군 최고지휘부 상당수는 사법치리 피할 수 없었을 것.
특히 거짓 방송 틀어놓고 튄 대통령의 행위,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소 휴전 후에라도 그 책임을 물었을 것.
우린 사실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도.
우리 모두 운이 좋아 저 당시 대한민국의 20세 청년이 아니어서 개죽음 면한 것.
북괴 공산당 매운 맛 뺨칠 정도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매운 맛도 엄청났다는 것 경험하지 못한 행운에 감사해야.
한국전 당시 남북은 상호간
그리고 남과 북 각각의 내부에서 머리띠 두르고 완장차고 확신에 가득차 쳐죽여댔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 최고 지휘부의 전쟁 지휘 능력 -------------------> 전시 작전권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박탈당할 때 최고 지휘부에 있었던 이를 구국의 영웅인양 받드는 정신 나간 행위들이 아직도.
또한 한국전 휴전 과정에서도 믿는 것도 없이 북진 통일 궐기하면서 나대다가, 휴전 협정 당사자로 참여도 못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대상들은 미국-유엔-중공-북괴 ------------------------------> 대한민국은 업저버 정도.
휴전 당시 업저버 위치가 된 대한민국이라면, 대통령-정부-군의 결정적 오판 부인하기 힘들 것.
그리 북진통일 자심감 넘쳤다면 남침당하지 말고 선제 기습 북진해서 북괴를 멸망시키는 대한민국 먼저 만들었던지 ...
한국전쟁 직전에도 군 일부 장성들 자신감 만땅에,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에서 어쩌고 주둥이질에...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총알 부터 식량까지 원조에 의존하면서,
주둥이로만 북진 통일, 거기다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둥이로만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고 ...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정치외교사는 박원장님이 있어야되는데..ㅠㅠ아쉽...
함흥,흥남일대를 포기하지 않고 버텨 요새화해서 가지고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당연하지만 실제 당시 전황을 고려하면 불가능했다고 보입니다. 중공군의 남하 속도도 빨랐던데다 평양 쪽 외의 중부,동부전선을 메꿔야 할 사단이 거의 궤멸수준이라 흥남에 교두보 만들어 다시 재북진때까지 버틴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저 교두보를 유지할 강력한 자연적인 방어선도 없었고 (경계가 함경산맥까지 형성되었다면 자연 방어선이 되어 좀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만요) 재북진 때까지 공산측이 계속 공격했을 것입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진흥왕이 함흥평야 먹고 황초령,부전령까지 북진했었지만 결국 숨을 돌린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자진 포기하거나 다시 빼앗겼던 걸 생각하면 (거기에 진흥왕 때는 교두보 형태가 아닌 원산, 함흥을 통해 본토와 완전히 연결되었는데도요)
한국전쟁 가장 위기였던건 낙동강 방어선 시절이 아니라 1.4 후퇴 시절이지
둘 다 위기였죠. 두 위기 상황 모두 UN 지도부내에서 철수 이야기가 나왔죠
🐕🐒🙋♂️🙋🙋♀️
6.25 당시 소련은 핵을 아직 보유하고 있지 않았는데?
49년 보유
오펜하이머만 봤어도 그런말 못함
49년 원자폭탄 개발
55년 수소폭탄 개발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두려워한건 3차대전이지. 한국의 안보가 아니다. 그 덕분에 한국이 안보의 도움을 받은건 사실이다. 미국과 한국이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이유다.
허준이 77년생인데 이산가족방송이 기억난다고?
철수작전은 성공적이었으나 재앙의 씨앗을 태우고 왔으니..
😂😂
흥남을 요새화해서 버티고 교두보하는 게 무조건 불가능하진 않았겠다만 현실적으로 보급문제, 방어선 형성, 병력 규모와 중공군 남하 및 공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어려웠습니다 ㅜ 함흥, 흥남 교두보 규모를 보면 함경산맥까지 포함하지 못해서 장기적으론 중공군이 함경산맥 등에서 감제하고 내다보기 때문에 방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함경산맥 일부를 제대로 포함하고 성천강을 완전히 낄 정도로 크게 교두보를 형성했다면 달랐겠지만요. 물자와 병력 등을 보급하면 가능하지 않냐 하시는데 이미 동해안은 원산도 빼앗기고 아예 양양까지 밀려났습니다. 이런데 양양 이남에서 흥남까지 먼 거리를 계속 보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다고 판단됩니다
그 대동강 파괴된 다리 사진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런승만 만들었지요
이승만 정부는 한강인도교 조기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을 ( 공병감 ) 사형시켰습니다.
최창식 대령의 부인은 1961년 재심 청구를 했고 + 1964년 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승만은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피신 + 라디오 방송엔 의정부에서 국군이 북괴군을 격퇴했다는 전파가 흘러나왔고 +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폭파
---------------------------------------> 저런 상태에서 한강인도교 폭파 후 악화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 명령 받고 임무 수행한 공병감 사형시킨 것.
따라서 이런 식의 합리화는 불가능합니다.
사례1 ( 그 대동강 파괴된 다리 사진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런승만 만들었지요 )
사례2 ( 좌파들은 파괴된 대동강교 사진을 이승만 대통령이 시민들이 건너고 있는데도 폭파시킨 한강철교라고 선동했죠.. )
사례3 ( 좌빨들은 저 대동강철교로 피란하는 장면을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끊은 장면으로 왜곡했는데 참 기가 찹니다... )
사례4 ( 요즘 역사교육의 문제를 절실히 느끼네요. 유튜브라는 매체가 생겨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대동강교 폭파사진조차도 한강대교라고 써먹는.. )
다른 사례들은 생략
---------------------------------------> 대동강 철교 사진과 상관 없이 바뀌는 것 사실상 전무하며 + 공병감을 사형시킨 부분에선 더더욱 기가 찰 수도
관련 기사 내용 인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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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법회의는 단심제(單審制)였기에 법적인 항고(抗告)가 불가능했다. 기자는 1950년 9월 15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유죄 판결문을 입수했다. 다음은 요지.
최 공병감은 한강교 폭파로 인한 책임을 지게 된 셈인데, 이 군법회의의 판결은 폭파를 직접 명령한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이 전사한 뒤였다.
이 판결은 그러나 1961년 9월 최 공병감의 부인인 옥정애(玉貞愛)씨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고 이를 접수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이듬해 5월 15일 원심판결 무효를 선고했고, 1964년 10월 23일 결심공판에서 최 공병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은 무죄 판결문 요지.
당시 재판을 맡았던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황준환 대령(재판장)은 ‘조급(早急) 폭파’를 인정하면서도 최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사진 착각 했다고 해서, 폭파시킨 한강다리가 다시 멀정해지나요!!!
한국전쟁 때 우리 대통령-군-정부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한민국이어야 미래 희망이 있습니다.
1.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넘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불과 6개월 정도 후인 1951년 초 한겨울 추위 속에서 중공군 남하 당시,
전시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방비리가 벌어져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보충역으로 징집된 약 50만 병력 중에서 추정치 약 10만 병력이 적과의 전투 아닌 비전투 손실로
남쪽으로 후퇴 행군 도중에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서북청년단 단장 출신의 민간인이 임명된.
너무나 황당무계한 사태가 터져 다 덮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령관 포함 몇 명 처형되는 선에서 덮어버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국민방위군은 해체.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 15만 조금 안되는데, 국민방위군 비전투 손실로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병력이 추정 약 10만.
----------------------------------------> 2차대전 영국군 최대급 패배 마켓가든 작전 실패 때,
----------------------------------------> 서방 연합군 총 인명 손실, 영국+미국+폴란드의 전사+행불+포로 총합 = 약 18,000명 (십팔만 아닌 일만팔천 )
----------------------------------------> 게다가 인명 피해 대부분은 포로, 영 공수부대 전사자 약 1100명 + 영 30군단 전사자 약 5500명.
이기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 안심시켜 놓고 + 한강다리 끊고 튀어서
----------------------------------------> 님이 피난 못가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고 가정해보길.
----------------------------------------> 운좋게 전쟁 중 개죽음 당하지 않고 + 휴전 전에 북괴군 탈출해 대한민국에 남았다고 해도
----------------------------------------> 한강다리 끊고 튀었다 다시 돌아온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들은 님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잊지 말기를.
----------------------------------------> 튀었던 넘들이 님을 북괴군 빨갱이 내지는 부역자로 몰고 + 님 아들 딸 역시 연좌제로 어려운 세월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단죄하는지 ...
-----------------------------------------> 임진왜란 때도 잽싸게 튄 국왕과 조정이 충무공 고문해 죽음 직전으로 몰고,
-----------------------------------------> 최대 의병 이끌던 의병장 김덕령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고 + 호란 때 겨우 살아 돌아온 여인들을 화냥년이라고 내치고
-----------------------------------------> 한국전 때도 단죄 당해야할 넘들이 오히려 단죄의 칼 휘둘렀던, 자유와 민주주의 깃발 나부끼면서.
2.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 터지기 전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좌익을 전향시켜 반공 데모 시위에 동원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하고 전황 안좋아지니까,
불안-초조-공포에 휩싸여 전향한 좌익인 보도연맹원들 대대적으로 체포, 체포로도 너무 불안해서 선제 대량 학살로 제거.
그렇게 희생된 이들 명단은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훗날 책임질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록 남기지 않고 처형.
추정치로 선제 예방 학살로 처형된 인원은 단위가 10만대, 정확히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르는.
보도연맹 희생자들 유골 발견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뉴스에 나오며 현재 진행형.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선제 사전 예방 학살 아닌 지진 터진 이후에 학살.
남경대학살 --------------------------------->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인들 상대로 도시 점령 과정 및 점령 완료 후 대량 학살.
우리 보도연맹 사건 --------------------> 같은 민족을 상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전 예방 학살.
21세기 현재 기준으론 전세계적 규탄과 반인류적 범죄로 반드시 처벌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는 것 명심하길.
더 안타까운 것은 보도연맹원 모집 당시 전국에 할당량이 내려져,
시골에선 아는 주민들 이름 공무원들이 그냥 올리기도 했고, 심할 경우에도 애들 이름도 적어 넣었는데,
보도연맹원 체포와 예방 학살 과정에서 완전 억울하게 좌익 아닌 이들도 꽤 많이 희생된.
실제 전향했던 좌익들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고.
3. 휴전 후 귀환 포로 심문 사망
남북은 정말 휴전되던 최후의 순간에도 대단했습니다.
----------------------------------------> 북괴군 포로들 38선 넘을 때 영상 보길, 팬티만 남기고 옷 다 남쪽으로 벗어던지고 욕퍼붓고 구호 외치면서 북으로.
----------------------------------------> 북괴는 우리 국군 포로 대부분의 존재 인정안하고 강제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 극히 일부 포로만 인정해 남으로 송환시킴
----------------------------------------> 북이 일부 국군 포로를 남으로 송환시킨 이유 역시 반공포로 거부하고 북으로 가겠다는 포로들 돌려받기 위한 목적.
----------------------------------------> 불행히도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 겨우 살아돌아온 우리 국군 포로들을 구 북괴군 포로 수용소에 일단 가두고,
----------------------------------------> 혹 간첩으로 파견되었는지 여부 조사 과정에서 일부 귀환 우리 국군 포로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
----------------------------------------> 말로만 조사했겠습니까?
----------------------------------------> 대한민국이 저랬는데 북괴는 안그랬겠습니까? 북으로 팬티만 입고 넘어간 이들 일부 역시 북에서 비참한 최후 맞았을 것.
----------------------------------------> 자국의 군인들이 적에게 포로되었을 때 저 따위로 대접하는 국가와 군은 도대체 뭡니까?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국민방위군-보도연맹 사태 정도면
일단 전시여도 내각 총사태하고 대통령 및 군 최고지휘부 상당수는 사법치리 피할 수 없었을 것.
특히 거짓 방송 틀어놓고 튄 대통령의 행위,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소 휴전 후에라도 그 책임을 물었을 것.
우린 사실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도.
우리 모두 운이 좋아 저 당시 대한민국의 20세 청년이 아니어서 개죽음 면한 것.
북괴 공산당 매운 맛 뺨칠 정도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매운 맛도 엄청났다는 것 경험하지 못한 행운에 감사해야.
한국전 당시 남북은 상호간
그리고 남과 북 각각의 내부에서 머리띠 두르고 완장차고 확신에 가득차 쳐죽여댔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 최고 지휘부의 전쟁 지휘 능력 -------------------> 전시 작전권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박탈당할 때 최고 지휘부에 있었던 이를 구국의 영웅인양 받드는 정신 나간 행위들이 아직도.
또한 한국전 휴전 과정에서도 믿는 것도 없이 북진 통일 궐기하면서 나대다가, 휴전 협정 당사자로 참여도 못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대상들은 미국-유엔-중공-북괴 ------------------------------> 대한민국은 업저버 정도.
휴전 당시 업저버 위치가 된 대한민국이라면, 대통령-정부-군의 결정적 오판 부인하기 힘들 것.
그리 북진통일 자심감 넘쳤다면 남침당하지 말고 선제 기습 북진해서 북괴를 멸망시키는 대한민국 먼저 만들었던지 ...
한국전쟁 직전에도 군 일부 장성들 자신감 만땅에,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에서 어쩌고 주둥이질에...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총알 부터 식량까지 원조에 의존하면서,
주둥이로만 북진 통일, 거기다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둥이로만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고 ...
한강교폭파는 반드시 했어야하는 메뉴얼중 하나입니다.소련제T-34가 230대가 밀고 오는데 대통령지시가 아니라 채병덕(육군참모총장)이 지시.
최창식(1선 착임자)가 진행한겁니다.
민간인피해 800명설은 2004년에 처음 나왔으나 신기철(인권평화연구소장)이 조사후 2016년에 민간인800명사망설은 근거없다고 정정발표합니다.
맥아더는 항상 오만하고 게다가 무능하기까지 함.
저기서 2명만 덜 싣고 갔어도 양산의 그가 없었을텐데
가장큰 실수
애비는 인민군 대위로 와서 포로가 됐답니다.
베충?😅
윤석렬병신도 대통령 안됬을텐데
재앙의 시작
우리 존경하는 문통 께서는 6.25때 적화통일이 되엇으면 하고 종종 생각하실듯합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맥아더의 지도력은 형편없었다.
못해도 그렇게 못할 수가 없다. 내가 해도 맥아더보다 더 잘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맥아더 개인의 정치적 욕심을 위해 한국전쟁을 엉망진창으로 한건지 아니면
보너스아미진압 이후부터 형편없는 구식군인이었는지 구분이 안간다.
게다가 일개 군인이 국가의 정치적 목표달성을 위해 치르는 전쟁에 항명이나 하고 있으니 참으로 형편없는 군인이었다. 추수감사절공세, 크리스마스공세 때의 맥아더는 치매노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시 우리나이로 72세였으니 노쇠하기도 했다.
흥남 철수때 딱 1명만 안 태웠다면
우리나라 남녀갈등과 초저출산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해지진 않았을텐데..
국가적 재앙
역사적 죄인
답답하네
여기는 역전다방을 사랑하는 분들이 오시는 곳입니다. 주제와 맞지 않는 얘기는 다른데 가서 하세요
이념전쟁이 여기서도 시작될 위험한 말이시네
@@arsha6666싹다 청소해야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세력과 같은하늘아래 살수없지
지랄병 좀 하지마라.
따라서 서부전선의 미1군단으로만은 평양원산선을 만드는 게 도저히 불가능했고 게다가 빨리 후퇴하지 않으면 매섭게 남하하는 중공군에 의해 후방까지 차단되어서 자칫 평양에서 궤멸될 위험이 너무 컸죠 ㅜ 이러한 상황에서 평양원산선은 커녕 빨리 임진강-영평천-화천저수지-한계령-양양까지 전략적 후퇴를 한 다음에 병력 보강, 방어선 확충을 한 후 중공군을 막고 다시 재북진을 바랄 수밖에 없었죠 ㅠ
육탄 10용사
심일 소위 건을 말할 용기는 없나요?
부끄럽지 않나요?
개전 초기 상황 설명하는 몇달전 편을 보고 오세요... 한심한 소리 그만하시고
육탄 10용사도 알려진 것과 다르답니다.
영화는 영화일뿐이죠.
😅😅😅
앞뒤 알아보지도 않고 헛소리 싸는 인간은 어디나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