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일 경주 황리단길 맛집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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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1 เม.ย. 2023
  • 남평문씨 문재환 46대손 / 문성용 47대손 / 문성빈&문성민 48대손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고려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지고 무성(武成)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문다성은 갓난 아기 때 백제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의 장자못이라는 연못가의 높은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의 장자못가에 문암(文巖)이라는 전설 속의 바위가 남아 있다.
    남평(南平)은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 남평읍 일대의 지명이다.
    문익점(文益漸)
    (高麗 字 : 日新 號 : 思隱 又 三憂堂 諡號 : 忠宣 官職 : 提學)
    초명은 익첨(益瞻), 경덕재에서 수학하였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병과로 급제, 직강ㆍ박사 등을 거쳐 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 원나라 순제는 최유(崔濡)가 추대하는 덕흥군을 왕위에 대립시킬 계획으로 공민왕 폐위에 가담하기를 권유하였으나 불사이군의 충절을 내세워 강경히 거절, 이로 인하여 운남성(交趾)으로 유배되었다. 원 순제는 후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석방, 귀국케 하였는데 당시 금수품으로 되어 있던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 우리나라 의류 및 경제상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은 충의에 감복하여 중현대부 예문관 제학에 임명하였으며, 1375년(우왕 1) 좌사의대부ㆍ우문관 제학ㆍ동지경연사에 오르고 시무팔조를 상소하였다. 그 후 전제개혁에 이색(李穡)ㆍ우현보(禹玄寶)ㆍ이림(李琳) 등의 편을 들어 병을 핑계러 서명하지 않으므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사직, 낙향(落鄕)하여 삼우의 뜻을 품고 은거(隱居)하였다. 고려(高麗)가 망(亡)하자 9년간이나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고 이태조가 친히 불렀으나 굳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효행(孝行) 또한 지극하여 왕의 특명으로 효자비가 세워지고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을 효자리라 명명하였다. 성리학에도 밝았다. 태종 때 참지의정부로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지고 부조묘를 세웠으며, 1440년(세종 22) 영의정에 추증,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다. 1461년(세조 7) 사당이 세워졌다. 남평의 정연서원(長淵書阮), 산청의 도천서원(道川書阮)에 제향되었다. 문익점(文益漸)의 후손(後孫)인 강성군파(江城君派) 가문(家門)이 가장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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