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하는 삶의 고민을 철학적으로 풀어낸 저의 책 📖 서점 링크 교보문고: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578919 예스24: www.yes24.com/Product/Goods/135744489 알라딘: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426887
철학의 한계점은 1. 사후해석적인 성향이 강해서 현실검증력이 결여되어 있고 2. 언어를 통해 합리성을 추리하려고 하지만 언어자체가 갖는 한계에 대해서는 크게 다루지 않는다 인거 같아요. 위의 내용은 어떤 절대적인 규칙을 상정하고 가정의 가정의 가정을 통해 그 합리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상관주의식으로 보는 방식은 생각의 가능성을 제한하는데 무언가를 제한하는 이유는 가치의 위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용성이라는 말로 이 가치의 위계를 표현할 수 있겠죠. 위계 자체를 문제시하는 철학도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는 로봇인지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위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활동이 일어난다면 거기에는 이미 위계가 있으며 행위하는 생명체는 이러한 근본적인 판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현실 검증력의 끝에 있는 것이 과학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과학은 '측정가능한가'라는 전제 하에서만 대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측정이 불가능한 영역에서는 철학이나 문과적인 접근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며 필수적인데 거기에서도 핵심은 결국 사고의 내용물 자체보다 그 내용물이 나올 수 있었던 맥락, 그 전체 사고체계가 제시하는 가치의 위계입니다. 사람들은 그 가치 위계의 최상위에 있는 것을 '신'이라는 용어로 지칭할 뿐입니다. 1번의 극단에는 어떠한 위계도 없어도 된다는 극단주의가 있습니다. 세상은 말그대로 보고싶은데로 자기마음대로 볼 수 있으며 합리화를 잘 할 수록 반박할 수 없는 철학체계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떠한 실용성도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방식에서 실용성이 나온다면 이미 논리의 정합성을 깨고 위계체계를 도입한 것이며 요즘에는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2번은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논의에 해당하는 한계입니다. 세상은 지각을 통해서만 인지되며 이 지각에서부터 형성된 것이 언어입니다. 즉 현실로부터 두단계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친 것이 언어입니다. 그래서 종교에서 최상위의 진실은 항상 비유를 통해서만 언어로 전달 될 수 있을 뿐이라고 언급됩니다. 즉 사고체계 그 자체보다 경험을 더 중시하여 현실에서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을 따르라는 것이죠. 철학은 보다보면 항상 현실보다 사고체계 속에서 매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현실에서 멀어지는 메타적인 개념을 다룰 때 철학은 밑도 끝도 없는 어둠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미 그 상태에서는 이성에 의한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현실검증력이 이러한 곳에서 빠져나올 길을 보여주겠죠. 그래서 철학을 다룰 때는 그 철학이 실재 세상속에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역사를 통해 살펴보는 것이 이성적으로 합리성으로 그 철학을 다룰 때보다 더 정확하고 명료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객체지향존재론, 그러니까 사변적 실재론과 유사한 계열의 존재론적 입장이 1번과 2번을 모두 다룹니다.. (1) 객체들의 존재론적 층위는 모두 동등하며(인식론적 상관주의에 의한 존재론적 위계의 삭제) (2) 전개체적(현전화 이전, 언어 이전) 상태에 대한 가설적 탐구를 통한 비상관주의적 존재론의 토대를 쌓는 것. 물론 들뢰즈나 시몽동을 비롯해 포스트구조주의자 시절부터 다뤄지던 주제이긴 한데 그것을 명료하게 하고 체계화시킨건 하먼 메이야수 같은 사람들이죠. 지적하신 것처럼 딱히 어떤 실용적인 인식론적 틀을 제시하는건 아니긴 합니다만(애초에 인식론적 틀을 거부하는 쪽에 가깝죠) 세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탐구하면서 간접적으로 존재구조 그 자체에 접근하고자 한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철학은 언어를 통해 본원적인 합리성을 추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어의 한계는 비트겐슈타인 이래로 철학계도 아주 아주 잘 알고 있고, 언급하신 역사적인 접근법 역시 헤겔 이래로 여러 갈래로 사유되어 왔습니다.
다시 보니 아예 역사를 통해 철학을 검증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역사주의적인 해석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군요… 아무튼 철학이라는게 생각하시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고 굉장히 다양하고 폭넓은 사유가 있으니 철학사를 한번 공부해보시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 같습니다. 현실에 대한 검증력의 부재라든지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체계에의 매몰 등을 지적하시는데, 철학은 이미 현실화된 세계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그 현실화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조건을 다루는 학문에 가까워서 어쩔 수 없습니다. ‘현실화된’ 가치체계나 존재론적 구조는 이면의 본질적인 구조가 될 수 없지요..(물론 이면의 본질적인 구조를 부정하는 입장도 물론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탐구는 역사학과 사회과학에 맡기는 것으로 합시다.
@@jaylee9784 철학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굉장히 다양하고 폭넓은 사유가 있으나 위의 두가지 이유로 그중 극히 제한된 사유만이 실용성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뭔가 현실에 대한 탐구를 굉장히 좁은 의미로 사용하시는 거 같습니다..... 현실과 접점이 없다면 철학이라는 학문은 왜하는 건가요? 궤변만 늘어놓아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피스트들 조차 철학자로 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 현실화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조건을 다루는' 학문이 철학이라는데 뇌과학과 임상심리학, 로봇연구등을 통해서 그 조건들이 보다 명확하게 밝혀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가치의 위계가 없이는 어떠한 행위도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사변으로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으로 사변적으로 어떠한 사상체계의 온당함을 밀어붙여 현실에 실현시킬 순 있어도 그러한 '생각'이 실재 어떤 효과를 불러왔는지는 수십년동안 그 사상체계를 억지로 세상에 투영하려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언어로만 쌓아온 그 사고체계가 왜 현실에서 제대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의도와 정반대의 분란을 일으키는지 다른 학문들이 뒤늦게 밝혀내고 그 위험성을 알리고 있습니다. 철학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만큼 현실에서의 책임도 막중합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희생되는 사건의 뿌리에 그것을 추동하는 철학적 궤변이 있습니다. 무엇이 온당한 철학적 사유이고 무엇이 철학적 궤변인가요? 그것을 철학계 내에서 자정작용할 수 있나요? 어떠한 것이 진실이라면 과학을 통해서도 심리학을 통해서도 그것이 진실임이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합니다. ..... 철학이라는 학문을 깍아내릴려는 의도는 아니며 이 학문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적은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학문의 근본적인 문제는 '측정가능'한 영역만 다룰 수 있다라면 철학이라는 학문의 근본적인 문제는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고체계조차 합리적으로 보이도록 포장할 수 있는데 이를 당대에 검증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 나중에 큰 피해(실질적인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movement-profiler 이미 인식론을 비롯한 수많은 영역에서 자연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 철학연구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방법론과 철학의 논증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의 진실성을 다른 학문을 통해 교차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건 철학적 진리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계신 것 같네요. 가령 '동물은 생각할 수 있는가?' 혹은 '생각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인식론적 질문들은 뇌과학을 통해 밝혀낸 동물과 인간의 인지적 기제만으로는 답할 수 없습니다. 먼저 생각을 비롯해 이 주제와 관련되어 있는 다양한 개념들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어떤 지향성을 가진 동물의 행동은 '생각'의 결과일까요? 개념적 조작을 통한 언어적 사고가 수반되지 않는 것 또한 생각인가요? 이처럼 철학적인 주제들은 종종 복잡한 개념적 탐구를 수반하기 때문에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실증적 결과를 통해 검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의 탐구결과를 '해석'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사유를 제시하고 있다는 오해는 아마도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해 현대과학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않는 과거의 철학자들을 읽으면서 가지게 된 오해이실 것 같은데, 현대철학의 최전선은 당연히 과학의 연구성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논증을 만들어냅니다.
@@movement-profiler 또 철학적 사유가 현실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점들은 언어철학, 인식론, 존재론과 같이 현실의 문제들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철학분과보다는 정치철학과 같은 실천적인 철학이론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그러한 철학이론의 수용과정은 진리성과 무관한 지식사회학적 작용들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철학은 사유의 청사진을 제시할 뿐이고 행동가들이 그것을 해석하고 조작하는 과정은 그들이 속한 사회의 맥락과 권력관계에 강하게 의존적입니다. 당장 과학조차 사회학적인 기제에 의해 이론수용이 영향받는 판에, 철학은 지식사회학적 작용이 훨씬 심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철학적 사유가 현실세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라고 간주되는 것들은 그 진리성의 문제보다도 그것의 수용과정과 관련한 정치학적/사회학적 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때로는 철학의 사유 자체가 궤변일 수도 있습니다만, 사회라는 복잡계에 있어서 그것을 검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사후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여전히 많은 현대의 이데올로기들은 그 원류가 되는 철학사상을 상당히 왜곡시킨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커니즘의 작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치철학적 사유는 정치과학 및 경제학의 탐구범위를 벗어나있습니다. 정치과학이나 경제학의 탐구대상보다 근본적인 정치적 개념들을 다루는데, 그것이 어떻게 더 하위의 위계에 있는 학문들의 탐구로 해결될 수 있을까요? 철학은 메타-학문이어서 실증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 어렵습니다.
저는 현재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저는 제가 우주에 대해서 많은갈 배우고 진리를 배우는게 저의 목표라서 저는 물리학으로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물리학과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주의 진리가 물리학이 아니라면? 이런 고민도 많이 하고 애초에 내가 살아있는게 맞는지, 삶, 죽음은 뭔지, 이 세상이 없는건 아닌지, 없다는 개념도 없고 그냥 그저 세상이 뭔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었어요.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보면 삶을 방황한것 같아요. 아직은 우주를 완벽히 모르지만, 우주는 분명 완벽하고 우리가 모두 그것에 대해 배우고 알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이렇게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영상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도 마음이 조금 공허한 것 같네요 항상 응원 합니다 힘내세요
당연히 물리학으로도 세상을 설명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중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가령 종교도 세상을 설명하는 훌륭한 방식이될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는 진리를 배우는게 목표라 하셨습니다. 또한 우주의 진리가 물리학이 아닐 가능성까지 염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묻고싶습니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제말은.. 진리의 정의란 무엇입니까? 진리탐구를 원하시니 진리의 정의가 무엇인지 정도는 정의내릴수 있어야. 진리탐구를 하든 뭘하든 할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도 진리의 정의를 알지못합니다. 진리를 모르는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상내에서 흄이라는 철학자는 물리법칙이 당장 내일 바뀐다고 해도 이상할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진리탐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언젠가 물리학이 진리를 밝혀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리를 밝혀낸 다음날부터 물리법칙이 바뀐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상황까지 모두 고려하여 진리를 정의내릴 수 있는 학문은 오직 철학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있을지도 모릅니다. 질문자님이 그러했듯, 그리고 제가 그러했듯 누구도 진리를 모르며, 진리를 정의내리지 못한다는 의미는 첫째, 진리란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의 개념일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일것 둘째, 우리가 모른다는것 그것이 진리일껏
이 상황에서 아니야 그래도 진리는 어딘가에? 존재할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것은 일방적인 믿음에 불과하며, 아무근거없는 광기에 불과합니다. 진리를 정의하지도 못했는데, 그 진리를 도대체 어디서 찾겠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진리탐구를 한다는것은 그자체로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입니다. 정의되지도 않은 존재를 찾겠다는 것이니 광기도 이런 정신병이 없습니다. 진리탐구란 우리가 얼마나 모르고있는지를 깨닫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부디 괴로워하지 마시고, 하고싶은걸 하면서 진리를 쫓는 그 기괴한 상황자체를 즐기시면 됩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즐길수 없으니까요. 인간은 진리라는 허구의 괴물을 창조하여, 그 괴물에게 스스로 고통받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님아. 낭만은 "물리학으로 세계를 풀어내어 보겠다"를 계속 가지고 가는 거임. 이미 많은 이들도 그 꿈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음. 만약 형편상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 꿈을 잃지 말고 계속 쫓아가셈. 진짜 그게 가슴 뛰는 일이라면 현실 속을 살면서 꿈을 이루려고 계속 진도 빼기 ㄱㄱ 응원함
영상내용을 두 번 감상했습니다. 세상은 시뮬레이션이 아니다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의를 놓고 시작 했으면 좀더 매끄러운 영상이 되었을거 같아요.(좀 근거없는 비판댓글이 많이 보여서..) 제가 이해하기로 세상이 시뮬레이션=나또한 각본, 모형, 인형이라는 의미를 놓고 보는게 일반적인거 같은데 맞을까요? 그렇다면 요즘 주장하는 시뮬레이션 세상에다 상관주의에 입각한 사고방식이라면 그것은 곧 운명론적 (혹은 결정론적) 입장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본다는 거고 메이야수는 거기에 비판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게 맞는지 궁금합니다. 또 그가 절대적 우연성을 지지한다면 과학 또한 100퍼센트 같은 결과가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고정관념을 벗어나 생각의 확장은 나를, 더 나아가 내 주변의 세계까지 변화시킬수 있다는 의미로 말한걸까요? 편안한 휴일 되시길 바랍니다!😊
매번 충코님 영상을 챙겨 보는데요 평소 철학이라는게 되게 추상적으로 느껴지고 난해하며 일반인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학문으로만 느꼈는데, 충코님은 설명을 참 쉽고 간결하고 명쾌하게 정말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쩜 이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하시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고 재밌게 풀어서 설명해 주시네요 오늘 주제되게 재밌네요 충코님 언제 한 번 인간이 과연 무한히 윤회하는지 철학적인 관점에서 주제로 한 번 다뤄주시길 희망드립니다 예전에 지인들이랑 사람은 단 한 번 밖에 태어나지 못하느냐, 아님 여러번 혹은 무한히 태어나는지 토론했던 적이 있었는데 철학적 관점에서 궁금하네요^^ 덕분에 오늘 영상 재있게 잘 시청했습니다
영상 잘봤습니다. 매번 퀑텅 메이야수 이름만 듣다가 이렇게 쉽게 풀어내주신 덕에 맛보기로 사상도 접하는군요. 제 생각엔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사변에 의해서만 가능할) 사실만으로 메이야수가 너무 많은 것(의지와 같이 가정된 특정 실재)을 가처분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닌가, 즉 현실적 차원에 속한 또는 충분히 믿을만한 것들을 내어버리는 위험을 자초하진 않는가 싶기도 하네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반복 익숙하게 된 '현실'이 절대적 우연성으로서의 '실재'에 의해 납득 가능한 대상이 되겠나 잘 상상이 안되네요... 여전히 우리는 상관주의와 믿음을 추구할 이유가 있을듯 합니다.
만약 현대 물리학의 인플레이션 이론이 참이라면, 수학적 방법론을 통한 계산 결과 우리의 지각이 볼츠만 두뇌일 가능성이 100%로 수렴하게 됩니다. 이는 현실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하고 정교한 이론이 내놓는 결론이 "절대적 우연성으로서의 실재가 수학적으로 가능하다"를 넘어 "수학적으로 무조건적인 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질문하신 바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관계 맺지 않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관주의의 입장과 그에 반해 내가 관계 맺지 않은 것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매이야수 입장을 봤습니다. 매우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음에 감탄이 나오네요. 세계는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입장은 나라는 의지가 어떤 것을 존재한다고 믿냐에 따라 그것이 존재할 거라는 입장입니다.그렇다면 존재한다고 믿는 대상 외에 다른 것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도 이 입장이 되겠네요. 저는 상관주의의 입장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나라는 것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가상환경의 npc를 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개발자가 의도한대로 설계되어졌고 그것은 개발자의 의지라고 볼 수 있는데 npc들은 자신이 개발자의 의도대로 창조된 것인지 증명해내기 어려울 겁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는 곧 나라는 것을 만든 누군가의 의도가 포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움직이도록 설계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추가적으로 개발자 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개발한 개발자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는 총 둘, 서로 다른 인격을 가진 개발자가 둘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사람이 변화할 때가 있고 변화하기 전의 사람의 특성과 변화한 후의 사람의 특성이 서로 상이하면서도 각기 특성에 맞게 일관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 세상의 시뮬레이션 속에서도 개발자가 둘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봅니다
~ 매리야스? ㅎㅎㅎ ~ < 퀭텔메이야수> 흠~ 서양 철학자들은 머리 속이 복잡 다난 ~ 하네요. 어려운 전문 용어들만으로만 나열 조합 된 난해함이란~ . 저의 사견을 피력 하자면, * 영화 < 트루먼쇼 > 저도 이 영화 흥미롭게 관람 했던 것 같네요. 전체 스토리가 세세히 다 기억 나진 않지만. 충코님 영상에서, * 우리는 언제나 세계의 대상들이 나에게 나타나는 모습 만을 경험 할 뿐이다. > 메이야수 관련~ " 만약 내가 사유 너머의 어떤 것을 생각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에 따라 그것을 사유 안으로 들여오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이것은 결론적으로 실재론과 관념론에 대한 탐구 인 듯 합니다. 항상 또 "존재론"에 대한 방황이죠. > 먼저, 를 자세히 관찰 하면 , 우리는 새로운 시점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 선의로 위장된 어떤 거대한 공작으로 꾸며진 인위적 쇼룸에 살았던 트루먼의 시점. * 그 쇼를 마치 엿보기식 관음증을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시청자?의 시점. 더불어, * 역시 실상은 트루먼만이 쇼룸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며 , 시청자들의 시점 또한 쇼룸에 갇힌 처지라는 사실 입니다. 트루먼을 당당?하게 관음 하고 있는 시청자들 또한 한계적 프레임에 갇혀 있는 신세 일 뿐입니다. 그런데 보통 거기까지 발견해 내지 못합니다. 그게 현실이죠. 현실이 교묘 하기도 하고. * 우리는 언제나 세계의 대상들이 나에게 나타나는 모습 만을 경험 할 뿐이다. 어느 날 트루먼은 아마도 역시 사랑?의 힘에 의해 기적적으로 공간에 대한 각성이 일어 나게 되고, 자신의 현 위치에서 세계의 밖으로 확장 할 수 있는 미세한 틈을 발견 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에 대한 미세한 괴리감 같은 건강한 의심의 시작점이며, 그 지점으로부터 트루먼은 신세계에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오랜 항해 끝에 신세계를 발견한 선장과 같은 것이겠죠. 그런데 이와 동시에 , Tv쇼 프레임에 갇혀 있던 시청자들 또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 나게 되는 겁니다. 한 개인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인간의 총체적인 한계점에 대한 일화 입니다. 화각을 좀 더 확장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메이야스 철학적 단상에 의해 " 만약 내가 사유 너머의 어떤 것을 생각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에 따라 그것을 사유 안으로 들여오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그들은 진정 거대한 프레임을 깨는 그 웅장한 사건으로 인해 과연 무엇을 인식 할 수 있게 된 걸까요? 그럼에도 진정 , 인간이란, 사유 너머를 사유 해도 제자리 걸음 일 뿐일까요? 그렇다면 그 불명확 불완전성에 유일하게 수학이 해답을 가져 올 수 있을까요? 수학의 숫자들이 정녕 완벽한 공식을 이루어 명확한 답을 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 지구인들이 발견?한 숫자들이란, 인간의 한계 안에 있을 뿐입니다. "1"이란 숫자는 어쩌면 전우주적 차원에서는 무용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에 따라 "0"의 차원 또한 단순히 공식 안에서 사방이 완벽히 뚜렷한 답을 준다기 보다 무궁히 무한 한 것이죠. 거기서 바로 < 초월명상 > 이란 개념을 도출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 초월명상 > 은 굳이 현 인도명상이나 어느 명상 단체를 말함이 아닙니다. 개념에 대한 언급 입니다. 어쩌면 선(禪) 불교와 거의 흡사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초월명상 > 이란, 궁극적으로 , 존재 즉, 실재와 관념 모두가 초월 되어 사라진 완전무결 "無"의 세계 입니다. 초월 한다는 것은, 주변과 완전히 괴리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사람과 모든 사물이 밀접히 연결 됨을 각성한 근원적 통찰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 즉, 경계를 하나씩 허물어 모든 경계가 사라진 지점인 물아일체(物我一體), 혹은 무외지심(無外之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로써 , 나와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무경계이고 또 성인(聖人)의 경지 즉, 깨달음의 경지인 것입니다. 그 경지란 아마도 , 우주의 최소 단위인 "쿼크" , "힉스 입자" 를 초월한 미지의 어떤 신세계일 겁니다. 그것이 에너지 형태일지 그 무엇일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우리 "인간계" 인들이 그 수많은 종교, 난해한 철학적 이론과 논쟁과 이슈와 절박한 갈망적 방황 끝에 겨우 다다르게 되는 종착지가 될 것이라 생각 합니다. 결국 사유의 의심이란 내면을 향하게 만들겠죠. 좀 더 심대하고 심오한 미지의 내면. 실은 저도 잘은 모르지만 말이죠. 😊 다소 장황한 긴 사설이었습니다. 여기 부산은 눈 구경 하기 정말 불가능? 하네요. ㅎ . 눈으로 인한 피해는 더이상 없길 바랍니다. 거센 바람과 싸우던 요전 날 , 거센 바다에서 "카이트 서핑" 을 즐기는 사람들을 봤어요. "카이트 서핑"은 패러글라이딩과 서핑을 조합한 용어 입니다. 정말 에너지 팍팍 얻을 수 있는 멋진 광경이었습니다. 👍 점차 겨울의 깊은 골 가운데로 접어 드네요. 여러분, 감기 조심 하세요. 마음의 감기까지 ㅎ 😊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배움이 모자라 미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영상 속 칸토어의 무한 이론은 집합론 안에서의 설명입니다. 어떤 집합의 원소의 개수보다 부분집합의 개수가 항상 많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연수의 무한함을 증명할 수는 있겠지만, 이로 ‘가능성의 무한함’을 증명하기엔 논리가 느슨해 보입니다. 가능성과 집합 사이의 상동성을 밝혀야만 엄밀할 거 같은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배워가겠습니다.
가능성을 만약 '수적' 총체로 생각한다면, 집합론의 논리의 적용을 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가능성을 수적 총체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계산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갖게 될 겁니다.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국 가능성을 어떤 총체 중의 비율로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무너질 것입니다. 가능성을 수적 총체로 파악하는 방식의 문제는, 그렇게 되면 이미 '이 가능성들을 계산하는 나의 생각이라는 가능성'이라는 하나의 가능성이 추가로 생겨나고, 이와 비슷한 과정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데 이것을 얼마나 '문제'로 받아들일지는 견해가 갈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은 우연성과 절대성 개념보다 물질과 관념의 개념으로 보는 게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시뮬레이션 우주 세계관에선 물질은 곧 관념이고 정보 단위입니다. 컴퓨터 본체가 물질이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그건 알 수 없는 물자체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물질이 뭔지 모릅니다. 엘런 머스크 말대로 시뮬레이션 우주 안에 또다른 시뮬레이션 우주를 상상할 수 있고...결국 무한소급하면 물질의 형태로 최초의 컴퓨터가 있다?? 이건 딱봐도 모순적인 생각이죠.. 그래서 꺼꾸로 생각하면 시뮬레이션 우주론에 어떤 실재? 실체 따위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시뮬레이션 우주론에 물자체를 가정하는 게 논리적 모순이고 오히러 메이야수의 절대적 우연성의 세계관에 시뮬레이션 우주론이 더 부합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가 의심하는 나를 확실성의 시발점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 처럼 무언가 혁신적이기는 하지만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특히 주관성의 한계 내에서 다른 이들도 그런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수학적 사고를 통한 인식에 도달할 지 보증할 방법이 없죠. 근본적으로 그런 절대적 우연성이 세계의 본질일 것이라는 추측 조차 절대적 우연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극복할 지.
영상 제목하고 영상내용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영상내용은 세상이 어떤식으로 펼쳐질지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인데 그게 시뮬레이션 세상이 아니다를 어떻게 직적접으로 뒷받침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시뮬레이션 세상이라고 해서 꼭 유한한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건 아니잖아요 이건 다른 이야기긴 한데 저는 요즘에 이 세상은 나비효과에 의해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 그리고 우주안의 모든 움직임이 모여 내 주변에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것 같아요(행동과 생각이 유도됨) ex) 주변 친구가 동기부여 영상을 보고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내가 또 그 모습을 보고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름 그래서 결정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세상과 우주를 어떻게 통제하지 못하듯이 나 또한 내 의지와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치 떠오르는 생각을 통제할수 없듯이 그저 그 순간 생각이 떠오르고 하라는대로 행동을 할 뿐 물론 요즘에 주로 가지고있는 생각이라 언제든 바뀔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나중에 일이 잘풀려도 일이 잘 안풀려도 결국은 주변 상황과 제 상황을 조금은 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충코님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ㅎㅎ 궁금하네요
바리온, 렙톤 등이 갑자기 처음본 놈들로 바뀌거나, 물리량이 생기거나 사라지거나, 극단적으로는 세상이 보이드로 채워지거나 하는 등의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즉 현대의 과학이 기반으로 하는 뇌터의 방법론과 같은 시간 불변성이 어긋날 수 있으며 그러한 경우의 수는 무수히 많다. 이게 주장같은데, 여기서 어떤 부분이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반박하는 증거인가요? 오늘날 물리학이 관측에 기반하고, 또 관측한 내용이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게 기반인 것은 과학 배운 사람들은 다 동의할테고, 나도 현대 과학의 예측과 달리 세상이 말그대로 '격변'할 수 있다는 데에는 매우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왜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인지는 모르겠네요. 아무나 설명좀.
너무 멀어요.. 그냥 자기에게 일어나는 생각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관찰하는게 빠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해 보세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해 보세요. 그러나 그런다고 해도 생각은 일어날 겁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생각은 곧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해 보세요. 그러면 생각의 배경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 생각의 배경이 바로 생각을 일으키는 범인인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처럼 바보같은 말도 없는 겁니다. 생각은 그 배경에 의해서 저절로 자동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그 어떤 신통방통한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아인슈타인의 모든 생각도 마찬가지였고요. 즉..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 곧 생각의 배경.. 그것인 겁니다.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른다고 할 지라도..
물리적 실재는 궁극적으로 정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우주는 정보의 배열과 해석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주를 시뮬레이션이라고 표현 해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메이야수는 정보의 입출력만 가능한 생화학 기계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우주에 대한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비판하는군요
게임의 조건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이 게임의 조건 너머의 실재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에 말해야하는거 아닌가. 인간이 언어적인 매개 없이 사물과 세계 속에서 관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생존,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조건들인데, 마치 신선처럼 "세계는 이런 거야" 라는 선언에 그치는 관상용 철학하는 유튜버들 보면 왜 철학을 하나 싶다. 결국 마지막에 자기 책 광고에 넣어서 돈버는 것이 그들의 철학함 아닌가. 영상 마지막에 자기 고백처럼, 영상은 세계와 관계 맺는 게임의 규칙 너머를 이야기 하지만, 당사자는 철저히 이 세상에 (균열을 내기보다) 게임의 규칙(자본, 미디어)을 수행하고 있지 않나.
구체적 작동 방식, 또는 대상,물질 을 명시해 놓은 게 아니라서 맞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고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도 있고 개인적 초점이 자꾸 나가버리네요 ㅋㅋ;;어떻게 이해를 해야할 지 너무 어렵네요 근데 이성이라는 것도 인과적 관계가 아니라 갑자기 뿅 나타난 걸 수도 있는건가요? 이성을 통한 생각도 뿅하고 나타나고 그 결과를 말하기까지 논리를 축적한 것도 뿅하고 나타나고 그럼 무언가를 설명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있는 행동인지 의문이긴 하네요 '뿅 나타나고 아니면 뿅 나타나지 않다고 말하는 그 경계가 어딘지 궁금하네요 아니면 이성은 우연적 법칙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인지 ;;
이 영상과는 상관없지만 충코님은 '중요한건 아무것도없다.'라는 생각이 드신적이있나요 마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요 요즘 문득 아무것도 중요하지않다라는 생각이드네요 예컨데 이 우주에서 인류가사라지는게 정말 안좋은일인가? 그래도 그만아닌가? 이런생각이드네요 딱히 반박할길이없어 고민중입니다
내용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그 자체로는 재미있게 봤는데, 현재의 내용 구성으로는 시뮬레이션인지 아닌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네요. 1. 시뮬레이션 세계론은 가상현실이 있는데, 그것이 극도로 발전하면, 현실과 구분이 어렵다라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네요. (호접지몽 비슷하게) 2. 근거로는 빛이나 전기 속도가 제한되어 있고, 이중슬릿 실험을 통해 관측시와 아닌때의 차이, 기본적으로 양자화되어 있는 것 자체(디지털) 등을 간접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 --> 지금 이야기는 증거는 아니고, 그냥 상관주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지, 어떠한 반박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보이네요만??
모든것을 다 부정할수 있는데, 왜 수학은 진리라고 생각하는지는 설명은 없을까요? 우리가 상관주의로 세상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그 관계는 매번 달라진다고 봅니다. 공부를 할수록,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일수록 세상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낼거니까요. 흄이 지적한대로 칸트의 지성의 포착과, 이성의 연역과 귀납의 연결이 언제까지 통용될지는 알 수 없긴합니다만, 감성의 틀이 완전히 바뀐다고 한들 그 후에 우리가 그 틀에 적응할수 있을지, 없을지. 있다면 어떻게 다시 감성과 지성 이성을 구축할지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면 좀더 설득력있었을것 같습니다.
실재성에 대한 제 얄팍한 사변은 만약에 우주의 수명이 인간기준 무한대라면 지금 우리가 있는 물질계가 전체 우주수명중 0.1% 정도의 시간동안만 존재했다면 우주수명중 50%를 지낸 다른 물리력계의 우주 존재가 생각한다면 찰나의 순간 인간이 인식하는 우주가 존재했다고 회상하지 않을까 하는것이다. 현 물질계가 존재했다는것도 사실이지만 너무 짧아 게임이 온오프 됐다는 정도의 시뮬레이션 세계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개소리 늘어놔봐요.
영상 흥미롭게 봤습니다! 의문점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메이야수가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인식하기 불가능해보였던 세계의 속성을 밝힙니다. 그러면서 메이야수는 상관주의자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 신앙적인 세계관에 빠질 수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세계의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특성을 지닌다고 규명하면서 수학과 같은 이성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또다른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두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메이야수의 절대적 우연성 개념에 의하면 아직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되지 못한 시뮬레이션의 존재 유무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메이야수가 시뮬레이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신앙적 사고관에 불과합니다. 둘째는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개념은 세계의 특성이 될 수 있지만 단일한 특성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세계의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특성이 부여되는 순간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기 때문에 세계의 다른 특성은 탐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문점이 메이야수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을까요?
단순한걸 복잡하게 생각하시넹... 1번 가정이 틀렸으면 끝남. 1. "인류는 현실적인 (미세세계까지 포함한 물리엔진 구현) 시뮬레이션을 특정 목적을 위해 돌릴 정도로 발전하거나 그 전에 멸망한다" +) 6:03 참... 이미 예전에 부쳐가 했던 질답을 괴상하게 철학자들이 변형시켰네. (아니면 그걸 잘못 이해했거나) 개념의 인식 (시간, 숫자)들이 자연 그대로의 것임? 아닝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거임? 당연히 만든거임. 시간이란 개념도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만든 '기준'에 불과함. 심지어 숫자도 마찬가지. 간단한 예로 -1, i개의 사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수적으로 두 사과는 각각 동일한 개이지만, 현실에서는 완벽히 동일한 사과가 존재할 확률은 0 에 수렴함. 또 과학적으로 우리는 만유인력을 중력이라 표현하지만 그 실체를 설명할 수 조차 없음ㅋ 그저 편리를 위한 개념일 뿐이지 진리가 아님. 그래서 온갖 철학자들이 똑같은 결론에 다다름. '내가 안다는건 내가 무지하다는 것 뿐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등등... 심지어 과학자들도 과학에 100%는 없다고 단언함. 확률도 마찬가지. 세상의 모든건 필연적임. 과거가 확정되어 있기에 우연이라는 확률이 부정되죠. 확률은 우리가 인과관계를 명확히 파악, 계산하기 힘들기에 사용하는 개념임. 왜 뉴턴이 물리 계산할 때 모든 조건을 통제할까요? 모르니 넣을 수도 없고, 계산도 불가능해지니까. 그럼 그 불확실한 결과는 확률이 되어 버리죠. '모든게 100%/절대적이지 아니니까 모든지 일어날 수 있다.'...? 진짜 자폐적 사고네. 여기서 절대적이지 않다는건, '[우리]가 절대적으로 알 수 없다.'일 뿐이지, [세계]에서 절대적으로 일어날 일은 일어남. 그걸 필연성이라고 하구요. 모든걸 알고 모든걸 계산 가능한 전지적인 라플라스의 악마가 존재한다면 그 악마는 확률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듯이 말이죠. 내가 바람?을 일으켰는데 달이 쪼개진다라는 개소리도 '니들 어짜피 모르잖아? 그러니 난 사기쳐야지!' 하는 것과 마찬가지임. 왜냐? 논리적인 해석이 불가능하니까. 논리적이지 않은 소리를 우린 뭐라하죠? 맞죠. 바로 개소리라고 함. 뭐... 이 모든 걸 개소리로 들을지 말지는 님들에게 달렸지만ㅋㅋ 6:23 ... 이건 니체도 말한거지만... 내 존재 이유가 무의미 하기에 그 존재 의미를 내 맘대로 정할 수 있다를 이렇게 판타지적으로 해석할 줄이야... 그리고 과학자, 철학자들이 시뮬래이션을 믿는 이유는 종교, 사후세계 믿는 이유랑 똑같음. 부정하면 인류가 필연적으로 멸망하다는 것이니까 사후세계 믿듯이 이러는 것 뿐임.
저도 유한성 이후라는 책을 흥미롭게 봤는데, 상관주의를 더 엄밀하게 규정하고 비판하는 점은 흥미롭게 봤어요... 선조성이라는 개념도 생각해볼만 하구요. 하지만 일단 메이야수 자체도 우연성을 절대화시킴으로서 세계관을 세우고 있는데 전 그 논리 전개 과정이 느슨하다고 느꼈네요... 과학, 수학에 대한 견해도 좀 억지스러워서...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일 순 있지만 시뮬레이션 밖의 세상 그리고 그 밖의 세상으로 가면 결국 시뮬레이션이 아니라는 말이군요. 이 '세상'이 '누군가' 만든 시뮬레이션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우리가 궁금한 건 '세상'이지, '누군가'가 시뮬레이션인지 아닌지는 중요치가 않은데요. 그래서 영상을 본 시간이 아까워집니다.
알 수 없는곳에 말을 삼가하자는 상관주의가 그곳을 비합리적 신앙으로 채우는 문제를 책임질 필요는 없다. "절대적 우연성"이 비합리적 신앙이 아니라는걸 증명하지 못하면 상관주의를 넘어서는 철학이 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것에 침묵하자는것은 말에대해 부정적인것이지 실체에 대해 부정적인게 아니다. 결국 말을 안하면 그냥 비어 있는것을 말로 채우는 우를 범하게 되는걸 경계하는것일뿐이다. '나'와 '세계'라는 객체는 말로 만들어진 사고이기에 그 단어를 가지고 방식을 설명하고 과학과 수학을 논해본들 그 말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비트켄슈타인은 말하지 말자고 했을까? 아니겠지 말을 명확히 해봐야 실체를 담을 그릇이 안된다는것이니 신중하자는것이지. 말이 생각이고 생각이 말이니 그 말과 생각의 한계는 명확하다라는걸 말하고 싶은거다. 한계가 자명한 것이라고 해서 인간의 생각이 의미없다거나 과학 수학이 쓸모 없다는뜻은 또 아니다. 불가의 아뢰야식 처럼 우주는 저 밑바닥에서부터 의식이 생겨난것이니 저 밑바닥을 논할 필요도 능력도 안된다는것이고 그냥 수학, 과학으로 핵폭탄 만들고 전쟁하고 멸종하는 수준의 의식을 행할 뿐이다. 좀 더 진보적이라면 화성갈끄니까 하거나 외계생명체와 전쟁하는 수준이라는것이지 말이야말로 비합리적 신앙의 실체라는것이다. 바벨탑을 쌓던 인간들을 흩어버린 방법이 그들의 말을 잃어버리게 한것이니 말이야 말로 신이고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것이다. 말과 글이야 말로 합리성, 이성의 표본이면서도 비합리적, 비이성적이라는건 무슨 뜻일까? 바벨탑을 쌓는 우주의 법칙에는 이성적이지만 비이성적인 양면성이 있다는것이다. 인간의 이성에는 합리적이고 우주의 이성에는 비합리적인 그런 양태말이다. 동쪽으로 가면 서쪽에서 멀어지고 서쪽으로 가면 동쪽으로 멀어지지만 동쪽과 서쪽은 그저 말이고 실체는 없는것이니까
오히려 시뮬레이션보다 큰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걸까요? 수 많은 시뮬레이션 중인 다중우주 속에서 우리가 시뮬레이션인 확률이 거의 100퍼에 가깝다라는게 주장인거고 대답이 총체가 시뮬레이션 다중우주인거고 절대적 우연성은 이 총체를 규정짓는 경계가 없다고 말하는거니까. 사실 이렇게 생각하면 시뮬레이션 우주론도 비슷한 결인 것 같기도요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것은, 필연성을 부정하는 것인가요? 만일 메이야수가 필연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과학같은 만만한 샌드백을 물어뜯지 말고 a=a 라는 논리적 필연성도 부정할수 있는지가 궁금하네요. 메이야수가 이를 부정할수 없다면, 절대적 우연성은 궤변에 불과합니다. 당장 이 간단한 필연성조차 부정할수 없을테니까요.
@@봉진조-s2l공리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물론 이것은 공리로도 사용됩니다. 하지만 수학적 공리와는 다르게 논리학은 그저 참이라고 가정하는 단순한 일종의 게임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공리를 떠나서, 필연성이라는 단어를 소통함에 있어 의미가 왜곡된것 같습니다만 설령 a=a 공리가 우연적으로 설정된 거라고 합시다. 하지만 우리는 물리법칙이 변할수도 있다는걸 상상하는 것은 가능해도, a=a가 거짓이 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단 저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니 저는 철학적으로 정의된 필연성이라는 단어에 부합하고있는 a=a 에 대해 필연성의 권한을 부여한것입니다
아니요.. a=b 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소스를 넣는다면 모든 것들이 그 공리로 작동합니다. 단지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다. 가령 1=2가 같다고 치면 1+1은 무조건 2가 아니겠죠.. 4가 되겠죠.. 이런 일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고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양자역학 확률적인 세상이 그렇습니다.
철학적으로 비유하자면 "나"라는 자아라는 것은 유일한 A입니다. 절대 b일 수도 c일 수도 없는 a=a라는 무적논리죠.. 그런데 과연 "나"란 자아가 오로지 나일 수 밖에 없을까요? 데카르트의 코키토는 유일무일한 것일까요? 단지 그렇게 나=나, 이렇게 설정되어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봉진조-s2l제 견해가 올바르다면 우리가 공리라는 개념을 정식으로 도입하기 이전부터, 동일률은 법칙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져왔습니다. 그러니 제 견해가 올바르다면 이것을 단순히 공리의 일종으로 취급하는건 조금 앞뒤가 뒤바뀐 느낌이 듭니다 동일성은 객체가 자기자신과 동일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만일 이를 부정한다면 나는 나와 같지않다. 가 됩니다 어떤식으로 이를 부정할수읶는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 기호와 1,2 에 대해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사실저도 수학에 대해 그리 엄밀하게 아는편은 아니지만 1과 2는 정의상 같을수가 없는 개념입니다 1과 2를 다르게 정의하면 그리될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님과 제가 공유하고있는 1,2라는 개념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의 해석은 와 닿지 않네요. 비트겐슈타인의 저 말은 영원한건 없다~ 이 뜻을 내포한 말 같습니다. 영원한건 없으니 인생에 정답이 있는것 처럼 말하지 말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빡침에 산물이 아닐까하는 생각 입니다.ㅋㅋㅋㅋㅋ
영상 너무 잘 봤습니다! 충코님 책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다만 제가 문외한이라 분별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네요. 언뜻 들으면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적 우연성‘은 애초에 상관주의가 비롯한 출발점의 동어반복으로까지 느껴지는데... 둘의 분기점이 정확히 어디일까요? “어차피 (우연성조차) 알 수 없으니 그걸 알려고 하기보다는 눈앞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나름의 기준(예컨대 순전히 실용적인 기준)에 따라 그저 받아들이고 말자.” vs “알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근원 자체가 절대적 우연성이니 그 사실만큼을 끝까지 진리로서 안고 가야 된다.“ 같은 ’태도‘의 차이라고 봐야 할까요? 영상 말미에서 수학에 대한 메이야수의 입장을 보면 또 정작 메이야수는 세계의 실체가 존재하다고 보는 것 같기도 한데 ㅠㅠ 이건 우연히 그렇게 설정되어 있는(그래서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진리 체계(?)를 말하는 거겠죠?
@이창현-e5v 과학이 수학을 기반으로 한다고 해서 과학이 반드시 수학만큼 엄밀하겠어요? 만약 어떤 이론적 믿음으로 그렇게 생각할 순 있다고 쳐도, 무슨 자신이랑 다른 생각한다고 바로 궤변이라고 그렇게 내려치기를 합니까. 고대부터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흔하게 생각하던 논리를 왜 궤변 취급하는지
14:49 칸토어의 언어로는; (수정; 칸토어가 아니라 또 다른 ‘무한’을 그려낸 수학자인데. 이름을 까먹음… ㅋㅋㅋ) (수정2; ‘칸토어’와 ‘힐베르트’이다.) 무한 < 초한 Infinite. < Transfinite. 무한이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유한한 시공간 속‘의 ’인간들의 사고 방식‘으로 해석하는 ’무한대 중 하나‘이며, 그 위에는 ’초한‘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또 다른 더 거대한 ’무한^무한‘을 자체적으로 새로운 단어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제가 관측하는 면의 세상의 모습은, 마지막은 결국 ’역설•페러독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부처‘의 ’무한‘의 ’순환‘의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무한과 하나의 순환이 바로 인생이다.“라는 자체적인 동양 철학의 기초 구조를 만들었죠. ’하나‘만 옳은 것도 아니며, ’진리‘는 모른다.만 옳은 것도 아니며, 두가지 다 옳을 수도 틀릴 수도, 그리고, 순환된다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것을, ’그‘는 어떻게 2천년도 전의 그 오프라인 시공간에서, 인류의 속도 자체도 느렸을텐대, 깨달음에 도달 할 수 있었을까요? 참으로 신기한 세상 입니다.
18:13 세상은 ‘나’의 ‘세상’이 아닌, ‘무한대의 우리’의 ‘세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러므로, 모든 선구자들은 ‘그 사실•현실’을 깨닫고, 본인들이 가장 잘 하는 색깔으로, 본인들의 ‘유’의 ‘생명’은 비록 자연으로 돌아갈 지언정, 그들의 ‘무 또는 파동’의 ‘비관측적 에너지’를 ‘기록물’이라는 ‘생각의 전달’을 언어적으로 남겨놓지 않습니까. 결국 모두는 ‘본인’들의 ‘삶’의 ’영원‘이라는 ‘무한대 중 한 사람{의(to = 하나’의 과정으로 가는 것이며; 이과들은 철저하게 ‘나’라는 ‘1인칭 자아’를 버리고, ’3인칭의 관찰자 기준‘이라는 명확한 ’무한 중 하나의 유한대 시공간‘의 모든 사람들의 동일한 ’자연 법칙‘을 찾는 사람들이다. ’나‘는 1인칭인가? 3인칭인가? 나는 ‘둘 다’ 이다.
누구나 하는 삶의 고민을 철학적으로 풀어낸 저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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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넘어서는 건 생각이고 그걸 넘어서도 것도 생각이고 인간이 누를 수 있는 가장 큰 자유는 생각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네요. 하나의 놀이 같기도 함.
이런주제 너무재밌어요 👍
메이야수 어려웠는데 쉽게 풀어주시네요. 좋은 영상 감사드려요😊
철학의 한계점은 1. 사후해석적인 성향이 강해서 현실검증력이 결여되어 있고 2. 언어를 통해 합리성을 추리하려고 하지만 언어자체가 갖는 한계에 대해서는 크게 다루지 않는다 인거 같아요.
위의 내용은 어떤 절대적인 규칙을 상정하고 가정의 가정의 가정을 통해 그 합리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상관주의식으로 보는 방식은 생각의 가능성을 제한하는데 무언가를 제한하는 이유는 가치의 위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용성이라는 말로 이 가치의 위계를 표현할 수 있겠죠. 위계 자체를 문제시하는 철학도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는 로봇인지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위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활동이 일어난다면 거기에는 이미 위계가 있으며 행위하는 생명체는 이러한 근본적인 판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현실 검증력의 끝에 있는 것이 과학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과학은 '측정가능한가'라는 전제 하에서만 대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측정이 불가능한 영역에서는 철학이나 문과적인 접근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며 필수적인데 거기에서도 핵심은 결국 사고의 내용물 자체보다 그 내용물이 나올 수 있었던 맥락, 그 전체 사고체계가 제시하는 가치의 위계입니다. 사람들은 그 가치 위계의 최상위에 있는 것을 '신'이라는 용어로 지칭할 뿐입니다.
1번의 극단에는 어떠한 위계도 없어도 된다는 극단주의가 있습니다. 세상은 말그대로 보고싶은데로 자기마음대로 볼 수 있으며 합리화를 잘 할 수록 반박할 수 없는 철학체계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떠한 실용성도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방식에서 실용성이 나온다면 이미 논리의 정합성을 깨고 위계체계를 도입한 것이며 요즘에는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2번은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논의에 해당하는 한계입니다. 세상은 지각을 통해서만 인지되며 이 지각에서부터 형성된 것이 언어입니다. 즉 현실로부터 두단계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친 것이 언어입니다. 그래서 종교에서 최상위의 진실은 항상 비유를 통해서만 언어로 전달 될 수 있을 뿐이라고 언급됩니다. 즉 사고체계 그 자체보다 경험을 더 중시하여 현실에서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을 따르라는 것이죠. 철학은 보다보면 항상 현실보다 사고체계 속에서 매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현실에서 멀어지는 메타적인 개념을 다룰 때 철학은 밑도 끝도 없는 어둠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미 그 상태에서는 이성에 의한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현실검증력이 이러한 곳에서 빠져나올 길을 보여주겠죠. 그래서 철학을 다룰 때는 그 철학이 실재 세상속에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역사를 통해 살펴보는 것이 이성적으로 합리성으로 그 철학을 다룰 때보다 더 정확하고 명료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객체지향존재론, 그러니까 사변적 실재론과 유사한 계열의 존재론적 입장이 1번과 2번을 모두 다룹니다.. (1) 객체들의 존재론적 층위는 모두 동등하며(인식론적 상관주의에 의한 존재론적 위계의 삭제) (2) 전개체적(현전화 이전, 언어 이전) 상태에 대한 가설적 탐구를 통한 비상관주의적 존재론의 토대를 쌓는 것. 물론 들뢰즈나 시몽동을 비롯해 포스트구조주의자 시절부터 다뤄지던 주제이긴 한데 그것을 명료하게 하고 체계화시킨건 하먼 메이야수 같은 사람들이죠. 지적하신 것처럼 딱히 어떤 실용적인 인식론적 틀을 제시하는건 아니긴 합니다만(애초에 인식론적 틀을 거부하는 쪽에 가깝죠) 세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탐구하면서 간접적으로 존재구조 그 자체에 접근하고자 한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철학은 언어를 통해 본원적인 합리성을 추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어의 한계는 비트겐슈타인 이래로 철학계도 아주 아주 잘 알고 있고, 언급하신 역사적인 접근법 역시 헤겔 이래로 여러 갈래로 사유되어 왔습니다.
다시 보니 아예 역사를 통해 철학을 검증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역사주의적인 해석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군요… 아무튼 철학이라는게 생각하시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고 굉장히 다양하고 폭넓은 사유가 있으니 철학사를 한번 공부해보시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 같습니다. 현실에 대한 검증력의 부재라든지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체계에의 매몰 등을 지적하시는데, 철학은 이미 현실화된 세계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그 현실화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조건을 다루는 학문에 가까워서 어쩔 수 없습니다. ‘현실화된’ 가치체계나 존재론적 구조는 이면의 본질적인 구조가 될 수 없지요..(물론 이면의 본질적인 구조를 부정하는 입장도 물론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탐구는 역사학과 사회과학에 맡기는 것으로 합시다.
@@jaylee9784 철학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굉장히 다양하고 폭넓은 사유가 있으나 위의 두가지 이유로 그중 극히 제한된 사유만이 실용성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뭔가 현실에 대한 탐구를 굉장히 좁은 의미로 사용하시는 거 같습니다..... 현실과 접점이 없다면 철학이라는 학문은 왜하는 건가요? 궤변만 늘어놓아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피스트들 조차 철학자로 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 현실화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조건을 다루는' 학문이 철학이라는데 뇌과학과 임상심리학, 로봇연구등을 통해서 그 조건들이 보다 명확하게 밝혀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가치의 위계가 없이는 어떠한 행위도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사변으로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으로 사변적으로 어떠한 사상체계의 온당함을 밀어붙여 현실에 실현시킬 순 있어도 그러한 '생각'이 실재 어떤 효과를 불러왔는지는 수십년동안 그 사상체계를 억지로 세상에 투영하려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언어로만 쌓아온 그 사고체계가 왜 현실에서 제대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의도와 정반대의 분란을 일으키는지 다른 학문들이 뒤늦게 밝혀내고 그 위험성을 알리고 있습니다. 철학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만큼 현실에서의 책임도 막중합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희생되는 사건의 뿌리에 그것을 추동하는 철학적 궤변이 있습니다. 무엇이 온당한 철학적 사유이고 무엇이 철학적 궤변인가요? 그것을 철학계 내에서 자정작용할 수 있나요? 어떠한 것이 진실이라면 과학을 통해서도 심리학을 통해서도 그것이 진실임이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합니다. ..... 철학이라는 학문을 깍아내릴려는 의도는 아니며 이 학문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적은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학문의 근본적인 문제는 '측정가능'한 영역만 다룰 수 있다라면 철학이라는 학문의 근본적인 문제는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고체계조차 합리적으로 보이도록 포장할 수 있는데 이를 당대에 검증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 나중에 큰 피해(실질적인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movement-profiler 이미 인식론을 비롯한 수많은 영역에서 자연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 철학연구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방법론과 철학의 논증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의 진실성을 다른 학문을 통해 교차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건 철학적 진리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계신 것 같네요. 가령 '동물은 생각할 수 있는가?' 혹은 '생각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인식론적 질문들은 뇌과학을 통해 밝혀낸 동물과 인간의 인지적 기제만으로는 답할 수 없습니다. 먼저 생각을 비롯해 이 주제와 관련되어 있는 다양한 개념들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어떤 지향성을 가진 동물의 행동은 '생각'의 결과일까요? 개념적 조작을 통한 언어적 사고가 수반되지 않는 것 또한 생각인가요?
이처럼 철학적인 주제들은 종종 복잡한 개념적 탐구를 수반하기 때문에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실증적 결과를 통해 검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의 탐구결과를 '해석'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사유를 제시하고 있다는 오해는 아마도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해 현대과학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않는 과거의 철학자들을 읽으면서 가지게 된 오해이실 것 같은데, 현대철학의 최전선은 당연히 과학의 연구성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논증을 만들어냅니다.
@@movement-profiler 또 철학적 사유가 현실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점들은 언어철학, 인식론, 존재론과 같이 현실의 문제들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철학분과보다는 정치철학과 같은 실천적인 철학이론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그러한 철학이론의 수용과정은 진리성과 무관한 지식사회학적 작용들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철학은 사유의 청사진을 제시할 뿐이고 행동가들이 그것을 해석하고 조작하는 과정은 그들이 속한 사회의 맥락과 권력관계에 강하게 의존적입니다. 당장 과학조차 사회학적인 기제에 의해 이론수용이 영향받는 판에, 철학은 지식사회학적 작용이 훨씬 심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철학적 사유가 현실세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라고 간주되는 것들은 그 진리성의 문제보다도 그것의 수용과정과 관련한 정치학적/사회학적 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때로는 철학의 사유 자체가 궤변일 수도 있습니다만, 사회라는 복잡계에 있어서 그것을 검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사후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여전히 많은 현대의 이데올로기들은 그 원류가 되는 철학사상을 상당히 왜곡시킨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커니즘의 작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치철학적 사유는 정치과학 및 경제학의 탐구범위를 벗어나있습니다. 정치과학이나 경제학의 탐구대상보다 근본적인 정치적 개념들을 다루는데, 그것이 어떻게 더 하위의 위계에 있는 학문들의 탐구로 해결될 수 있을까요? 철학은 메타-학문이어서 실증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 어렵습니다.
뭔지도 모르고 지나가다 우연히 클릭하고 보았습니다.
이건 매우 놀라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네요.
감사합니다 잘볼게요 충코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현재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저는 제가 우주에 대해서 많은갈 배우고 진리를 배우는게 저의 목표라서 저는 물리학으로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물리학과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주의 진리가 물리학이 아니라면? 이런 고민도 많이 하고 애초에 내가 살아있는게 맞는지, 삶, 죽음은 뭔지, 이 세상이 없는건 아닌지, 없다는 개념도 없고 그냥 그저 세상이 뭔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었어요.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보면 삶을 방황한것 같아요. 아직은 우주를 완벽히 모르지만, 우주는 분명 완벽하고 우리가 모두 그것에 대해 배우고 알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이렇게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영상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도 마음이 조금 공허한 것 같네요
항상 응원 합니다 힘내세요
당연히 물리학으로도 세상을 설명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중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가령 종교도 세상을 설명하는 훌륭한 방식이될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는 진리를 배우는게 목표라 하셨습니다. 또한 우주의 진리가 물리학이 아닐 가능성까지 염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묻고싶습니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제말은.. 진리의 정의란 무엇입니까?
진리탐구를 원하시니 진리의 정의가 무엇인지 정도는 정의내릴수 있어야. 진리탐구를 하든 뭘하든 할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도 진리의 정의를 알지못합니다.
진리를 모르는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상내에서 흄이라는 철학자는 물리법칙이 당장 내일 바뀐다고 해도 이상할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진리탐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언젠가 물리학이 진리를 밝혀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리를 밝혀낸 다음날부터 물리법칙이 바뀐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상황까지 모두 고려하여
진리를 정의내릴 수 있는 학문은 오직 철학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있을지도 모릅니다. 질문자님이 그러했듯, 그리고 제가 그러했듯
누구도 진리를 모르며, 진리를 정의내리지 못한다는 의미는
첫째, 진리란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의 개념일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일것
둘째, 우리가 모른다는것 그것이 진리일껏
이 상황에서 아니야 그래도 진리는 어딘가에? 존재할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것은 일방적인 믿음에 불과하며, 아무근거없는 광기에 불과합니다.
진리를 정의하지도 못했는데, 그 진리를 도대체 어디서 찾겠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진리탐구를 한다는것은 그자체로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입니다. 정의되지도 않은 존재를 찾겠다는 것이니 광기도 이런 정신병이 없습니다.
진리탐구란 우리가 얼마나 모르고있는지를 깨닫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부디 괴로워하지 마시고, 하고싶은걸 하면서 진리를 쫓는 그 기괴한 상황자체를 즐기시면 됩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즐길수 없으니까요.
인간은 진리라는 허구의 괴물을 창조하여, 그 괴물에게 스스로 고통받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안타깝지만 행복은 상대적인 거라 영원한 행복은 없습니다
공학도입니다.
사춘기네요.
대학원가서 연구하고 싶으시면 공부하세요.
저는 게을러서 포기했습니다.
님아. 낭만은 "물리학으로 세계를 풀어내어 보겠다"를 계속 가지고 가는 거임. 이미 많은 이들도 그 꿈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음. 만약 형편상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 꿈을 잃지 말고 계속 쫓아가셈. 진짜 그게 가슴 뛰는 일이라면 현실 속을 살면서 꿈을 이루려고 계속 진도 빼기 ㄱㄱ 응원함
영상내용을 두 번 감상했습니다. 세상은 시뮬레이션이 아니다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의를 놓고 시작 했으면 좀더 매끄러운 영상이 되었을거 같아요.(좀 근거없는 비판댓글이 많이 보여서..)
제가 이해하기로 세상이 시뮬레이션=나또한 각본, 모형, 인형이라는 의미를 놓고 보는게 일반적인거 같은데 맞을까요?
그렇다면 요즘 주장하는 시뮬레이션 세상에다 상관주의에 입각한 사고방식이라면 그것은 곧 운명론적 (혹은 결정론적) 입장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본다는 거고 메이야수는 거기에 비판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게 맞는지 궁금합니다.
또 그가 절대적 우연성을 지지한다면 과학 또한 100퍼센트 같은 결과가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고정관념을 벗어나 생각의 확장은 나를, 더 나아가 내 주변의 세계까지 변화시킬수 있다는 의미로 말한걸까요?
편안한 휴일 되시길 바랍니다!😊
매번 충코님 영상을 챙겨 보는데요
평소 철학이라는게 되게 추상적으로 느껴지고 난해하며 일반인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학문으로만 느꼈는데, 충코님은 설명을 참 쉽고 간결하고 명쾌하게 정말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쩜 이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하시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고 재밌게 풀어서 설명해 주시네요
오늘 주제되게 재밌네요
충코님 언제 한 번 인간이 과연 무한히 윤회하는지 철학적인 관점에서 주제로 한 번 다뤄주시길 희망드립니다
예전에 지인들이랑 사람은 단 한 번 밖에 태어나지 못하느냐, 아님 여러번 혹은 무한히 태어나는지 토론했던 적이 있었는데 철학적 관점에서 궁금하네요^^
덕분에 오늘 영상 재있게 잘 시청했습니다
그 문제는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직접 답을 고르시면 되겠습니다. 관련 문제를 쉽게 설명하는 입문서로 셸리 케이건의 '죽음'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영상 잘봤습니다. 매번 퀑텅 메이야수 이름만 듣다가 이렇게 쉽게 풀어내주신 덕에 맛보기로 사상도 접하는군요.
제 생각엔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사변에 의해서만 가능할) 사실만으로 메이야수가 너무 많은 것(의지와 같이 가정된 특정 실재)을 가처분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닌가, 즉 현실적 차원에 속한 또는 충분히 믿을만한 것들을 내어버리는 위험을 자초하진 않는가 싶기도 하네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반복 익숙하게 된 '현실'이 절대적 우연성으로서의 '실재'에 의해 납득 가능한 대상이 되겠나 잘 상상이 안되네요... 여전히 우리는 상관주의와 믿음을 추구할 이유가 있을듯 합니다.
보기 드문 좋은 댓글입니다. 좋은 의견 잘 읽고 배워갑니다.
만약 현대 물리학의 인플레이션 이론이 참이라면, 수학적 방법론을 통한 계산 결과 우리의 지각이 볼츠만 두뇌일 가능성이 100%로 수렴하게 됩니다. 이는 현실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하고 정교한 이론이 내놓는 결론이 "절대적 우연성으로서의 실재가 수학적으로 가능하다"를 넘어 "수학적으로 무조건적인 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질문하신 바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훌륭하네 메이야수..우연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은 팔연성으로 만 구성된다는 내적 논리가 우연성에 의해 붕괴된다.
주식이랑 시장도 같은 관점인듯
나에게 노출된것만으로 실체를 내 두뇌 따위에 담을수 없음
내가 관계 맺지 않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관주의의 입장과 그에 반해 내가 관계 맺지 않은 것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매이야수 입장을 봤습니다.
매우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음에 감탄이 나오네요.
세계는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입장은 나라는 의지가 어떤 것을 존재한다고 믿냐에 따라 그것이 존재할 거라는 입장입니다.그렇다면 존재한다고 믿는 대상 외에 다른 것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도 이 입장이 되겠네요.
저는 상관주의의 입장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나라는 것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가상환경의 npc를 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개발자가 의도한대로 설계되어졌고 그것은 개발자의 의지라고 볼 수 있는데 npc들은 자신이 개발자의 의도대로 창조된 것인지 증명해내기 어려울 겁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는 곧 나라는 것을 만든 누군가의 의도가 포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움직이도록 설계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추가적으로 개발자 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개발한 개발자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는 총 둘, 서로 다른 인격을 가진 개발자가 둘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사람이 변화할 때가 있고 변화하기 전의 사람의 특성과 변화한 후의 사람의 특성이 서로 상이하면서도 각기 특성에 맞게 일관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 세상의 시뮬레이션 속에서도 개발자가 둘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봅니다
양자 역학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사실 입니다
관측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증명된 과학적 사실이죠
신기하게도 과학과 철학이 통하는 부분이 많음
감사합니다 잘 볼게요!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순수이성비판을 읽는데 마침 좋은 영상이네요.!
큰 수의 법칙이 무한히 큰 수 앞에선 붕괴될 지 모른다는 의심...존경스러운 사유네요 덕분에 좋은 철학가를 알아갑니다!
기다리던 내용이였는데 넘나 감사드려요^^
생각할거리 얻고 갑니다.😊
제가 메이야수의 생각을 확실하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주의를 건너서 이성의 힘으로 살펴본 너머가 결국은 절대적 우연이라는 또다른 거대한 불가해 지점이라니 참 아이러니 하네요
재미가 중요하다는 것😆
~ 매리야스? ㅎㅎㅎ ~
< 퀭텔메이야수>
흠~ 서양 철학자들은 머리 속이 복잡 다난 ~ 하네요.
어려운 전문 용어들만으로만 나열 조합 된 난해함이란~ .
저의 사견을 피력 하자면,
* 영화 < 트루먼쇼 >
저도 이 영화 흥미롭게 관람 했던 것 같네요.
전체 스토리가 세세히 다 기억 나진 않지만.
충코님 영상에서,
* 우리는 언제나 세계의 대상들이
나에게 나타나는 모습 만을 경험 할 뿐이다.
> 메이야수 관련~
" 만약 내가 사유 너머의 어떤 것을 생각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에 따라 그것을 사유 안으로 들여오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이것은 결론적으로 실재론과 관념론에 대한 탐구 인 듯 합니다.
항상 또 "존재론"에 대한 방황이죠.
> 먼저, 를 자세히 관찰 하면 ,
우리는 새로운 시점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 선의로 위장된 어떤 거대한 공작으로 꾸며진
인위적 쇼룸에 살았던 트루먼의 시점.
* 그 쇼를 마치 엿보기식 관음증을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시청자?의 시점.
더불어,
* 역시 실상은 트루먼만이 쇼룸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며 ,
시청자들의 시점 또한 쇼룸에 갇힌 처지라는 사실 입니다.
트루먼을 당당?하게 관음 하고 있는 시청자들 또한 한계적 프레임에 갇혀 있는 신세 일 뿐입니다.
그런데 보통 거기까지 발견해 내지 못합니다.
그게 현실이죠.
현실이 교묘 하기도 하고.
* 우리는 언제나 세계의 대상들이
나에게 나타나는 모습 만을 경험 할 뿐이다.
어느 날 트루먼은 아마도 역시 사랑?의 힘에 의해
기적적으로 공간에 대한 각성이 일어 나게 되고,
자신의 현 위치에서 세계의 밖으로 확장 할 수 있는
미세한 틈을 발견 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에 대한 미세한 괴리감 같은
건강한 의심의 시작점이며, 그 지점으로부터 트루먼은 신세계에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오랜 항해 끝에 신세계를 발견한 선장과 같은 것이겠죠.
그런데 이와 동시에 ,
Tv쇼 프레임에 갇혀 있던 시청자들 또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 나게 되는 겁니다.
한 개인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인간의 총체적인 한계점에 대한 일화 입니다.
화각을 좀 더 확장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메이야스 철학적 단상에 의해
" 만약 내가 사유 너머의 어떤 것을 생각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에 따라 그것을 사유 안으로 들여오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그들은 진정 거대한 프레임을 깨는 그 웅장한 사건으로 인해 과연 무엇을 인식 할 수 있게 된 걸까요?
그럼에도 진정 , 인간이란, 사유 너머를 사유 해도 제자리 걸음 일 뿐일까요?
그렇다면 그 불명확 불완전성에 유일하게 수학이 해답을 가져 올 수 있을까요?
수학의 숫자들이 정녕 완벽한 공식을 이루어 명확한 답을 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 지구인들이 발견?한 숫자들이란,
인간의 한계 안에 있을 뿐입니다.
"1"이란 숫자는 어쩌면 전우주적 차원에서는
무용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에 따라 "0"의 차원 또한 단순히 공식 안에서 사방이 완벽히
뚜렷한 답을 준다기 보다 무궁히 무한 한 것이죠.
거기서 바로 < 초월명상 > 이란 개념을 도출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 초월명상 > 은 굳이 현 인도명상이나 어느 명상 단체를 말함이 아닙니다.
개념에 대한 언급 입니다.
어쩌면 선(禪) 불교와 거의 흡사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초월명상 > 이란,
궁극적으로 , 존재 즉, 실재와 관념 모두가 초월 되어 사라진 완전무결 "無"의 세계 입니다.
초월 한다는 것은,
주변과 완전히 괴리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사람과 모든 사물이 밀접히 연결 됨을 각성한
근원적 통찰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
즉, 경계를 하나씩 허물어 모든 경계가 사라진 지점인 물아일체(物我一體),
혹은 무외지심(無外之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로써 , 나와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무경계이고
또 성인(聖人)의 경지 즉, 깨달음의 경지인 것입니다.
그 경지란 아마도 ,
우주의 최소 단위인 "쿼크" , "힉스 입자" 를 초월한 미지의 어떤 신세계일 겁니다.
그것이 에너지 형태일지 그 무엇일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우리 "인간계" 인들이
그 수많은 종교, 난해한 철학적 이론과 논쟁과 이슈와 절박한 갈망적 방황 끝에
겨우 다다르게 되는 종착지가 될 것이라 생각 합니다.
결국 사유의 의심이란 내면을 향하게 만들겠죠.
좀 더 심대하고 심오한 미지의 내면.
실은 저도 잘은 모르지만 말이죠. 😊
다소 장황한 긴 사설이었습니다.
여기 부산은 눈 구경 하기 정말 불가능? 하네요. ㅎ .
눈으로 인한 피해는 더이상 없길 바랍니다.
거센 바람과 싸우던 요전 날 ,
거센 바다에서 "카이트 서핑" 을 즐기는 사람들을 봤어요.
"카이트 서핑"은 패러글라이딩과 서핑을 조합한 용어 입니다.
정말 에너지 팍팍 얻을 수 있는 멋진 광경이었습니다. 👍
점차 겨울의 깊은 골 가운데로 접어 드네요.
여러분,
감기 조심 하세요.
마음의 감기까지 ㅎ 😊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내린 결론은 내가 시뮬레이션인걸 인지하지 못하는 시뮬레이션이면 기던 아니던 의미가 없다는거임.
그런걸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실용주의라고 하죠
어떤 사상이 나의 삶과 세상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논한다는 것이 넌센스라는 거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
넌센스라는것도 본인기준이지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배움이 모자라 미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영상 속 칸토어의 무한 이론은 집합론 안에서의 설명입니다. 어떤 집합의 원소의 개수보다 부분집합의 개수가 항상 많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연수의 무한함을 증명할 수는 있겠지만, 이로 ‘가능성의 무한함’을 증명하기엔 논리가 느슨해 보입니다. 가능성과 집합 사이의 상동성을 밝혀야만 엄밀할 거 같은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배워가겠습니다.
가능성을 만약 '수적' 총체로 생각한다면, 집합론의 논리의 적용을 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가능성을 수적 총체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계산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갖게 될 겁니다.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국 가능성을 어떤 총체 중의 비율로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무너질 것입니다.
가능성을 수적 총체로 파악하는 방식의 문제는, 그렇게 되면 이미 '이 가능성들을 계산하는 나의 생각이라는 가능성'이라는 하나의 가능성이 추가로 생겨나고, 이와 비슷한 과정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데 이것을 얼마나 '문제'로 받아들일지는 견해가 갈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은 우연성과 절대성 개념보다 물질과 관념의 개념으로 보는 게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시뮬레이션 우주 세계관에선 물질은 곧 관념이고 정보 단위입니다. 컴퓨터 본체가 물질이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그건 알 수 없는 물자체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물질이 뭔지 모릅니다. 엘런 머스크 말대로 시뮬레이션 우주 안에 또다른 시뮬레이션 우주를 상상할 수 있고...결국 무한소급하면 물질의 형태로 최초의 컴퓨터가 있다?? 이건 딱봐도 모순적인 생각이죠.. 그래서 꺼꾸로 생각하면 시뮬레이션 우주론에 어떤 실재? 실체 따위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시뮬레이션 우주론에 물자체를 가정하는 게 논리적 모순이고 오히러 메이야수의 절대적 우연성의 세계관에 시뮬레이션 우주론이 더 부합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상관주의 비판, 세상이 시뮬레이션이 아니라는 시뮬레이션, 요컨대 이데올로기(상관주의) 비판의 외양을 띈 이데올로기적 효과 혹은 장치
내가 생활하는 같은 시공간에 5차원이나 10차원의 외계인이 공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한다.
이른아침 산책길에 나는 달팽이를 보지만 달팽이는 나를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달팽이가 인식합니다
훨씬더 복잡하게 생각해도 좋은데? 나를 공유하는 다른차원의 내가 나에게 공존한다 하지만 나는 무엇인가? 나는 이 우주의 한부분인데? 어느정도의 시공간이 나인가? 그곳의 몇차원들을 나는 몇차원의 내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몇차원들의 리듬들을 사용해 인생이란 춤을 추는가?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살수있다고 생각하는사람들의 논리는 이런 책을 읽고 시작되는 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럴 수도 있으니 그러하다
너는 내 말이 100% 틀렸다고 논증할 수 없으니 내 말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이 논리임ㅋㅋㅋ
데카르트가 의심하는 나를 확실성의 시발점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 처럼 무언가 혁신적이기는 하지만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특히 주관성의 한계 내에서 다른 이들도 그런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수학적 사고를 통한 인식에 도달할 지 보증할 방법이 없죠. 근본적으로 그런 절대적 우연성이 세계의 본질일 것이라는 추측 조차 절대적 우연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극복할 지.
영상 제목하고 영상내용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영상내용은 세상이 어떤식으로 펼쳐질지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인데
그게 시뮬레이션 세상이 아니다를 어떻게 직적접으로 뒷받침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시뮬레이션 세상이라고 해서 꼭 유한한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건 아니잖아요
이건 다른 이야기긴 한데 저는 요즘에 이 세상은 나비효과에 의해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 그리고 우주안의 모든 움직임이 모여 내 주변에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것 같아요(행동과 생각이 유도됨)
ex) 주변 친구가 동기부여 영상을 보고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내가 또 그 모습을 보고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름
그래서 결정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세상과 우주를 어떻게 통제하지 못하듯이 나 또한 내 의지와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치 떠오르는 생각을 통제할수 없듯이 그저 그 순간 생각이 떠오르고 하라는대로 행동을 할 뿐
물론 요즘에 주로 가지고있는 생각이라 언제든 바뀔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나중에 일이 잘풀려도 일이 잘 안풀려도 결국은 주변 상황과 제 상황을 조금은 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충코님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ㅎㅎ 궁금하네요
내가 파악하는 세상 외의 세상을 알기 위해
파악할 수 조차 없는 우연들로 아슬아슬하게 이루어진 세상을 가정한다면,
그 세상을 파악하는 의미가 없다.
뒤집어보고자 했던 신앙보다 더 신앙에 가깝다.
바리온, 렙톤 등이 갑자기 처음본 놈들로 바뀌거나, 물리량이 생기거나 사라지거나, 극단적으로는 세상이 보이드로 채워지거나 하는 등의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즉 현대의 과학이 기반으로 하는 뇌터의 방법론과 같은 시간 불변성이 어긋날 수 있으며 그러한 경우의 수는 무수히 많다.
이게 주장같은데, 여기서 어떤 부분이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반박하는 증거인가요?
오늘날 물리학이 관측에 기반하고, 또 관측한 내용이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게 기반인 것은 과학 배운 사람들은 다 동의할테고, 나도 현대 과학의 예측과 달리 세상이 말그대로 '격변'할 수 있다는 데에는 매우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왜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인지는 모르겠네요.
아무나 설명좀.
현대 과학은 모든것이 확률로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100%라는건 환상입니다.
상관주의는 세계를 알 수 없으니까 세계에 대해서 아야기 하지 말자리는 이야기를 하는데, 메아야수는 세계를 알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느껴지는데 오히려 더 상관주의 같네요
메이야수 이론 자체가 기존 상관주의를 비판하고 더 확장된 상관주의로 나아간 이론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아요
너무 멀어요.. 그냥 자기에게 일어나는 생각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관찰하는게 빠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해 보세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해 보세요. 그러나 그런다고 해도 생각은 일어날 겁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생각은 곧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해 보세요. 그러면 생각의 배경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 생각의 배경이 바로 생각을 일으키는 범인인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처럼 바보같은 말도 없는 겁니다. 생각은 그 배경에 의해서 저절로 자동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그 어떤 신통방통한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아인슈타인의 모든 생각도 마찬가지였고요. 즉..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 곧 생각의 배경.. 그것인 겁니다.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른다고 할 지라도..
만약 우리가 통속의 뇌가 아니라면? 어떤 미친과학자가 없다면?? 실시간으로 인생을 조지고있다면???
요컨대 시뮬레이션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거네요. 그 무한하고 절대적인 우연성 중에 시뮬레이션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
물리적 실재는 궁극적으로 정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우주는 정보의 배열과 해석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주를 시뮬레이션이라고 표현 해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메이야수는 정보의 입출력만 가능한 생화학 기계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우주에 대한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비판하는군요
꼭 영원히 존재해선 안될 존재,악,악도 아닌 선도 아닌것,꼭 영원히 존재하지 말아야할 존재이자 악도 아닌 선도 아닌것의 핵심직업,핵심학문분야에 대해서?(개인기준)
혹시 책 가장 젊은 날의 철학 전자책으로는 발간 안하시나요?해외 살아서 전자책으로 바로 보고싶어서요
다음달 정도에는 아마 출간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습니다ㅠ
늘 감사합니다 😊
게임의 조건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이 게임의 조건 너머의 실재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에 말해야하는거 아닌가.
인간이 언어적인 매개 없이 사물과 세계 속에서 관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생존,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조건들인데, 마치 신선처럼 "세계는 이런 거야" 라는 선언에 그치는 관상용 철학하는 유튜버들 보면 왜 철학을 하나 싶다.
결국 마지막에 자기 책 광고에 넣어서 돈버는 것이 그들의 철학함 아닌가. 영상 마지막에 자기 고백처럼, 영상은 세계와 관계 맺는 게임의 규칙 너머를 이야기 하지만, 당사자는 철저히 이 세상에 (균열을 내기보다) 게임의 규칙(자본, 미디어)을 수행하고 있지 않나.
구체적 작동 방식, 또는 대상,물질 을 명시해 놓은 게 아니라서 맞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고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도 있고 개인적 초점이 자꾸 나가버리네요 ㅋㅋ;;어떻게 이해를 해야할 지 너무 어렵네요 근데 이성이라는 것도 인과적 관계가 아니라 갑자기 뿅 나타난 걸 수도 있는건가요? 이성을 통한 생각도 뿅하고 나타나고 그 결과를 말하기까지 논리를 축적한 것도 뿅하고 나타나고 그럼 무언가를 설명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있는 행동인지 의문이긴 하네요 '뿅 나타나고 아니면 뿅 나타나지 않다고 말하는 그 경계가 어딘지 궁금하네요 아니면 이성은 우연적 법칙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인지 ;;
이 영상과는 상관없지만 충코님은 '중요한건 아무것도없다.'라는 생각이 드신적이있나요
마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요
요즘 문득 아무것도 중요하지않다라는 생각이드네요
예컨데 이 우주에서 인류가사라지는게 정말 안좋은일인가?
그래도 그만아닌가?
이런생각이드네요
딱히 반박할길이없어 고민중입니다
내용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그 자체로는 재미있게 봤는데, 현재의 내용 구성으로는 시뮬레이션인지 아닌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네요.
1. 시뮬레이션 세계론은 가상현실이 있는데, 그것이 극도로 발전하면, 현실과 구분이 어렵다라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네요. (호접지몽 비슷하게)
2. 근거로는 빛이나 전기 속도가 제한되어 있고, 이중슬릿 실험을 통해 관측시와 아닌때의 차이, 기본적으로 양자화되어 있는 것 자체(디지털) 등을 간접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
--> 지금 이야기는 증거는 아니고, 그냥 상관주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지, 어떠한 반박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보이네요만??
영화 매트릭스 영화가 너무 대단한 통찰같은 느낌이네요
모든것을 다 부정할수 있는데, 왜 수학은 진리라고 생각하는지는 설명은 없을까요? 우리가 상관주의로 세상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그 관계는 매번 달라진다고 봅니다. 공부를 할수록,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일수록 세상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낼거니까요. 흄이 지적한대로 칸트의 지성의 포착과, 이성의 연역과 귀납의 연결이 언제까지 통용될지는 알 수 없긴합니다만, 감성의 틀이 완전히 바뀐다고 한들 그 후에 우리가 그 틀에 적응할수 있을지, 없을지. 있다면 어떻게 다시 감성과 지성 이성을 구축할지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면 좀더 설득력있었을것 같습니다.
시뮬레이션이라하니깐 자꾸 게임으로 착각하는 바보들잇다니깐;;;;; 이세상은 진짜같은데 막상보면 실체가없는 거대 시뮬레이터인거같은데...그렇다고 게임은아니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트럭에 치이고 이세계로가는것을 절대적 우연성으로 볼수도 있겠네요
진실은 그 누구도 모른다는거........
실재성에 대한 제 얄팍한 사변은 만약에 우주의 수명이 인간기준 무한대라면
지금 우리가 있는 물질계가 전체 우주수명중 0.1% 정도의 시간동안만 존재했다면
우주수명중 50%를 지낸 다른 물리력계의 우주 존재가 생각한다면 찰나의 순간 인간이 인식하는 우주가 존재했다고 회상하지 않을까 하는것이다.
현 물질계가 존재했다는것도 사실이지만 너무 짧아 게임이 온오프 됐다는 정도의 시뮬레이션 세계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개소리 늘어놔봐요.
영상 흥미롭게 봤습니다! 의문점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메이야수가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인식하기 불가능해보였던 세계의 속성을 밝힙니다. 그러면서 메이야수는 상관주의자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 신앙적인 세계관에 빠질 수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세계의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특성을 지닌다고 규명하면서 수학과 같은 이성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또다른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두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메이야수의 절대적 우연성 개념에 의하면 아직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되지 못한 시뮬레이션의 존재 유무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메이야수가 시뮬레이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신앙적 사고관에 불과합니다. 둘째는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개념은 세계의 특성이 될 수 있지만 단일한 특성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세계의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특성이 부여되는 순간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기 때문에 세계의 다른 특성은 탐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문점이 메이야수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을까요?
나도. 상관주의 이상은 무리무리.
철학은 죽지 않았구나
단순한걸 복잡하게 생각하시넹...
1번 가정이 틀렸으면 끝남.
1. "인류는 현실적인 (미세세계까지 포함한 물리엔진 구현) 시뮬레이션을 특정 목적을 위해 돌릴 정도로 발전하거나 그 전에 멸망한다"
+) 6:03 참... 이미 예전에 부쳐가 했던 질답을 괴상하게 철학자들이 변형시켰네.
(아니면 그걸 잘못 이해했거나)
개념의 인식 (시간, 숫자)들이 자연 그대로의 것임? 아닝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거임?
당연히 만든거임. 시간이란 개념도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만든 '기준'에 불과함. 심지어 숫자도 마찬가지. 간단한 예로 -1, i개의 사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수적으로 두 사과는 각각 동일한 개이지만, 현실에서는 완벽히 동일한 사과가 존재할 확률은 0 에 수렴함.
또 과학적으로 우리는 만유인력을 중력이라 표현하지만 그 실체를 설명할 수 조차 없음ㅋ 그저 편리를 위한 개념일 뿐이지 진리가 아님.
그래서 온갖 철학자들이 똑같은 결론에 다다름. '내가 안다는건 내가 무지하다는 것 뿐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등등...
심지어 과학자들도 과학에 100%는 없다고 단언함.
확률도 마찬가지. 세상의 모든건 필연적임. 과거가 확정되어 있기에 우연이라는 확률이 부정되죠.
확률은 우리가 인과관계를 명확히 파악, 계산하기 힘들기에 사용하는 개념임. 왜 뉴턴이 물리 계산할 때 모든 조건을 통제할까요? 모르니 넣을 수도 없고, 계산도 불가능해지니까. 그럼 그 불확실한 결과는 확률이 되어 버리죠.
'모든게 100%/절대적이지 아니니까 모든지 일어날 수 있다.'...? 진짜 자폐적 사고네. 여기서 절대적이지 않다는건, '[우리]가 절대적으로 알 수 없다.'일 뿐이지, [세계]에서 절대적으로 일어날 일은 일어남. 그걸 필연성이라고 하구요.
모든걸 알고 모든걸 계산 가능한 전지적인 라플라스의 악마가 존재한다면 그 악마는 확률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듯이 말이죠.
내가 바람?을 일으켰는데 달이 쪼개진다라는 개소리도 '니들 어짜피 모르잖아? 그러니 난 사기쳐야지!' 하는 것과 마찬가지임. 왜냐? 논리적인 해석이 불가능하니까.
논리적이지 않은 소리를 우린 뭐라하죠?
맞죠. 바로 개소리라고 함.
뭐... 이 모든 걸 개소리로 들을지 말지는 님들에게 달렸지만ㅋㅋ
6:23 ... 이건 니체도 말한거지만... 내 존재 이유가 무의미 하기에 그 존재 의미를 내 맘대로 정할 수 있다를 이렇게 판타지적으로 해석할 줄이야...
그리고 과학자, 철학자들이 시뮬래이션을 믿는 이유는 종교, 사후세계 믿는 이유랑 똑같음. 부정하면 인류가 필연적으로 멸망하다는 것이니까 사후세계 믿듯이 이러는 것 뿐임.
과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연성이 없다는 건 큰 논리적 궤변이네요.
형 머리 아포..
😊
뇌를 쓰는 즐거운 시간!!!!
@@chungco_phil ㅎㅎㅎ 저 지금 열심을 다 했네요.
😅
감사 합니다.
피드백 됩니다 👍
양자역학 관찰하면 나타나는것처럼
게임도 0ㅣ로 존재하다 시작하면 나타남
이 영상을 아인슈타인이 좋아합니다
실제 세계여도 고차원에서 3차원으로 투영한 정보 홀로그램이라면 이 현실 세계를 시뮬레이션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이분 화이트헤드 가지고 쓰시는 분이죠? 김범준 교수님 영상은 시뮬레이션이 99라고 썸네일에 나와있던데..
11:20 흄의 악마다...
아니 데카르트의 악마인가?
운영자에 의해서 패치가 될수 있는 시뮬레이션이라 하면 맞는거같은디...
잘 모르겠당...
살아가는데 너무 불안한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철학인거 같아요
무엇하나 확신 할 수 없고 나의 작은 행동이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킬지까지 다 생각해야하는 철학같아보여서 개인적으로는 너무 난해하게 느껴지네요 ㅠㅠ
무한 츠쿠요미
무한보다 더 큰 무한이란 소리에서 더 듣기가 어렵네요. 무한을 이해하지 못한거죠. 이런식의 과학적 수학적 오류가 너무 많이 보이네요.
저도 유한성 이후라는 책을 흥미롭게 봤는데, 상관주의를 더 엄밀하게 규정하고 비판하는 점은 흥미롭게 봤어요... 선조성이라는 개념도 생각해볼만 하구요. 하지만 일단 메이야수 자체도 우연성을 절대화시킴으로서 세계관을 세우고 있는데 전 그 논리 전개 과정이 느슨하다고 느꼈네요... 과학, 수학에 대한 견해도 좀 억지스러워서...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일 순 있지만 시뮬레이션 밖의 세상 그리고 그 밖의 세상으로 가면 결국 시뮬레이션이 아니라는 말이군요.
이 '세상'이 '누군가' 만든 시뮬레이션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우리가 궁금한 건 '세상'이지, '누군가'가 시뮬레이션인지 아닌지는 중요치가 않은데요. 그래서 영상을 본 시간이 아까워집니다.
나도 이댓글을 읽은시간이 아까움
세계라는 단어의 범위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듯 하네요
알 수 없는곳에 말을 삼가하자는 상관주의가 그곳을 비합리적 신앙으로 채우는 문제를 책임질 필요는 없다.
"절대적 우연성"이 비합리적 신앙이 아니라는걸 증명하지 못하면 상관주의를 넘어서는 철학이 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것에 침묵하자는것은 말에대해 부정적인것이지 실체에 대해 부정적인게 아니다.
결국 말을 안하면 그냥 비어 있는것을 말로 채우는 우를 범하게 되는걸 경계하는것일뿐이다.
'나'와 '세계'라는 객체는 말로 만들어진 사고이기에 그 단어를 가지고 방식을 설명하고 과학과 수학을 논해본들 그 말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비트켄슈타인은 말하지 말자고 했을까? 아니겠지 말을 명확히 해봐야 실체를 담을 그릇이 안된다는것이니 신중하자는것이지.
말이 생각이고 생각이 말이니 그 말과 생각의 한계는 명확하다라는걸 말하고 싶은거다.
한계가 자명한 것이라고 해서 인간의 생각이 의미없다거나 과학 수학이 쓸모 없다는뜻은 또 아니다.
불가의 아뢰야식 처럼 우주는 저 밑바닥에서부터 의식이 생겨난것이니 저 밑바닥을 논할 필요도 능력도 안된다는것이고
그냥 수학, 과학으로 핵폭탄 만들고 전쟁하고 멸종하는 수준의 의식을 행할 뿐이다.
좀 더 진보적이라면 화성갈끄니까 하거나 외계생명체와 전쟁하는 수준이라는것이지
말이야말로 비합리적 신앙의 실체라는것이다.
바벨탑을 쌓던 인간들을 흩어버린 방법이 그들의 말을 잃어버리게 한것이니
말이야 말로 신이고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것이다.
말과 글이야 말로 합리성, 이성의 표본이면서도 비합리적, 비이성적이라는건 무슨 뜻일까?
바벨탑을 쌓는 우주의 법칙에는 이성적이지만 비이성적인 양면성이 있다는것이다.
인간의 이성에는 합리적이고 우주의 이성에는 비합리적인 그런 양태말이다.
동쪽으로 가면 서쪽에서 멀어지고 서쪽으로 가면 동쪽으로 멀어지지만 동쪽과 서쪽은 그저 말이고 실체는 없는것이니까
그래서 이게 어떻게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건데?
시뮬레이션 = 한 규칙에 의해 펼쳐지는 게임 같은 것. 이 구도로 주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반박할 여지가 생기니까.
오히려 시뮬레이션보다 큰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걸까요? 수 많은 시뮬레이션 중인 다중우주 속에서 우리가 시뮬레이션인 확률이 거의 100퍼에 가깝다라는게 주장인거고 대답이 총체가 시뮬레이션 다중우주인거고 절대적 우연성은 이 총체를 규정짓는 경계가 없다고 말하는거니까. 사실 이렇게 생각하면 시뮬레이션 우주론도 비슷한 결인 것 같기도요
@@chungco_phil몬소린지ㅎ
시뮬레이션을 시뮬레이팅 하는 시뮬레이터
시뮬레이션이 아닌것 처럼 보이는 시뮬레이션 이라면?
절대적 우연성이라는 것은, 필연성을 부정하는 것인가요?
만일 메이야수가 필연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과학같은 만만한 샌드백을 물어뜯지 말고 a=a 라는 논리적 필연성도 부정할수 있는지가 궁금하네요.
메이야수가 이를 부정할수 없다면, 절대적 우연성은 궤변에 불과합니다. 당장 이 간단한 필연성조차 부정할수 없을테니까요.
메이야수가 누군지 모르지만, a=a는 논리학의 공리입니다. 공리는 절대적으로 맞다는 전제를 필요로 하는 거라서 이것 자체가 필연성이 전혀 없는 우연성의 끝판왕입니다. 이 절대적 우연성의 공리에서 수학과 기하학, 논리학의 필연성이 확보되는 거니까 a=a는 오히러 우연성이 절대성보다 앞선다는 방증이 되겠죠
@@봉진조-s2l공리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물론 이것은 공리로도 사용됩니다. 하지만 수학적 공리와는 다르게 논리학은 그저 참이라고 가정하는 단순한 일종의 게임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공리를 떠나서, 필연성이라는 단어를 소통함에 있어 의미가 왜곡된것 같습니다만
설령 a=a 공리가 우연적으로 설정된 거라고 합시다. 하지만 우리는 물리법칙이 변할수도 있다는걸 상상하는 것은 가능해도, a=a가 거짓이 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단 저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니 저는 철학적으로 정의된 필연성이라는 단어에 부합하고있는 a=a 에 대해 필연성의 권한을 부여한것입니다
아니요.. a=b 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소스를 넣는다면 모든 것들이 그 공리로 작동합니다. 단지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다. 가령 1=2가 같다고 치면 1+1은 무조건 2가 아니겠죠.. 4가 되겠죠.. 이런 일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고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양자역학 확률적인 세상이 그렇습니다.
철학적으로 비유하자면 "나"라는 자아라는 것은 유일한 A입니다. 절대 b일 수도 c일 수도 없는 a=a라는 무적논리죠.. 그런데 과연 "나"란 자아가 오로지 나일 수 밖에 없을까요? 데카르트의 코키토는 유일무일한 것일까요? 단지 그렇게 나=나, 이렇게 설정되어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봉진조-s2l제 견해가 올바르다면 우리가 공리라는 개념을 정식으로 도입하기 이전부터, 동일률은 법칙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져왔습니다.
그러니 제 견해가 올바르다면 이것을 단순히 공리의 일종으로 취급하는건 조금 앞뒤가 뒤바뀐 느낌이 듭니다
동일성은 객체가 자기자신과 동일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만일 이를 부정한다면 나는 나와 같지않다. 가 됩니다 어떤식으로 이를 부정할수읶는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 기호와 1,2 에 대해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사실저도 수학에 대해 그리 엄밀하게 아는편은 아니지만 1과 2는 정의상 같을수가 없는 개념입니다
1과 2를 다르게 정의하면 그리될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님과 제가 공유하고있는 1,2라는 개념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간 이 채널에서 소개된 사상들이 다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것만큼은 좀 아닌듯
양자역학과 결이 비슷하네요
시간 아끼려고 댓글 부터 읽고 보니 영상을 보기 싫어져서 다시 나가게 되네
겁나 어렵네
개쉬운데.. 예시 까지 들어주는데 이해못하면 능지이슈
내가 싼똥에 남아 있는 시금치 조차도 시뮬레이션이라면 꼭 그렇게 시뮬레이션을 짜야 했냐?
엔트로피...
의지가 아니라 의식 아닐까요?
현대철학으로 올 수록 난해해져가네요.
제 이성이 허락하는 범위는 니체 헤겔 까지인가봐요… ㅠ
저는 헤겔의 생각이 더 난해한 것 같기도 합니다...ㅎㅎ
헤겔 주석서말고 원문보고 그런 말씀하시는건지?? ㅋ
전공자들도 혀를 내두르는게 헤겔인데?
이 채널에 유난히 멍청한 댓글이 많이 달리는 이유가 뭘까.. 고찰 중.. 이 또한 시뮬레이션..?
그게 의심스러우면. 몰래카메라 찍으면 되잖아
트루먼이 몰래카메라를 설치한들 그 설치하는 과정마저도 외부에서 알고 대처할 수 있죠
@유튜브용계정-f4p 당연히 나 자신도 속일 정도로 함정을 파야함
시뮬레이션이면 어쩔건데 니들이?
조물주 등판 두둥
철학은! 너의 생각일 뿐이다!
철학이 밥먹여주지 않는다!
과학이 진리다!
과학은! 세상을 알려주는 진리다!
이런 말이 궤변이라는겁니다.
현혹되면 세상이 거꾸로 보입니다.
시물레이션이라고 믿으면 그렇게 사는거고 아니라고 믿으면 그렇게 사는거고
시뮬레이션 우주론 비판 하려고 대문보고 들어왔는데 주제가 철학이었네요. 결국 이해 못하고 그냥 나갑니다.
비반을 하는 것은 자유겠지요 아니 어쩌면 보인 지혜의 확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이상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실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토론이 아니라 그냥 스쳐지나갑니디ㅡ
행복하세요
뭔소린지 참... 전혀 납득안됨
영상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의
해석은 와 닿지 않네요.
비트겐슈타인의 저 말은 영원한건 없다~ 이 뜻을 내포한 말 같습니다.
영원한건 없으니 인생에 정답이 있는것 처럼 말하지 말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빡침에 산물이 아닐까하는 생각 입니다.ㅋㅋㅋㅋㅋ
영상 너무 잘 봤습니다! 충코님 책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다만 제가 문외한이라 분별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네요.
언뜻 들으면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적 우연성‘은 애초에 상관주의가 비롯한 출발점의 동어반복으로까지 느껴지는데... 둘의 분기점이 정확히 어디일까요?
“어차피 (우연성조차) 알 수 없으니 그걸 알려고 하기보다는 눈앞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나름의 기준(예컨대 순전히 실용적인 기준)에 따라 그저 받아들이고 말자.” vs “알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근원 자체가 절대적 우연성이니 그 사실만큼을 끝까지 진리로서 안고 가야 된다.“ 같은 ’태도‘의 차이라고 봐야 할까요?
영상 말미에서 수학에 대한 메이야수의 입장을 보면 또 정작 메이야수는 세계의 실체가 존재하다고 보는 것 같기도 한데 ㅠㅠ 이건 우연히 그렇게 설정되어 있는(그래서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진리 체계(?)를 말하는 거겠죠?
좀 더 찾아보면서 알았는데 애초에 ‘상관주의’가 실재를 전제하지 않는 거 같군요... 평소에 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상관주의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했는데, 이게 그렇게 간단히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가 아니었네요.
시뮬레이션 우주론은 유신론과 다를게없음 ㅋㅋ 그냥 바보들끼리 그럴듯하다고 히히덕거리는거임
결국 말장난
이건 그냥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시각에 대한 얘기지, 애초에 내용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는 기존의 과학적 추론에 대해 실질적 근거를 통해 반박을 해낸 것이 아닌데; 대체 뭐가 증거라는 거에요? 증거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죠. 제목이 너무 어그로성이네요
수학적 엄밀성이 과학적 엄밀성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1인으로서, "실질적" 증거보다 시뮬레이션이라는 총체 자체를 반박하는 이 노선이 저한테는 더 강력한 증거처럼 보이는데요?
@@chungco_phil 과학적 엄밀성이 애초에 수학을 전제로 하는데 무슨 궤변을 하십니까?
@이창현-e5v 과학이 수학을 기반으로 한다고 해서 과학이 반드시 수학만큼 엄밀하겠어요?
만약 어떤 이론적 믿음으로 그렇게 생각할 순 있다고 쳐도, 무슨 자신이랑 다른 생각한다고 바로 궤변이라고 그렇게 내려치기를 합니까.
고대부터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흔하게 생각하던 논리를 왜 궤변 취급하는지
@@chungco_phil 철학가의 뇌에서 나온 사상을 왜 '증거'로 올려치기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졌는데, 수학적 엄밀성이니 과학적 엄밀성이 나오는 것 자체가 궤변이라는 거죠. 그 위대한 고대 학자들의 생각을 궤변 취급 하는게 아니구요 ^^
다른 회원분들도 '증거'가 이 영상에 나와있는지 댓글 좀 달아주세요. 도대체 그런 게 어디에 있죠?
철학 = 니 생각
종교 = 거짓
과학 = 진리
마법 = 안알려줘
돈 = 행복
사람 = 스트레스
뭔가 소재 다 떨어져서 억지로 만들어낸 사상같음
구독자수가 여타 유튜버들보다 낮은이유가 있습니다. 참 어렵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골자는 나 같은데...!
나 는 그저 감각체계일뿐 관념의 나는 존재하지 않지 안나?
🎉
무한은 하나다?
그리고,
하나는 무한이다?
ㅇㅈ~ 😂
14:49
칸토어의 언어로는;
(수정; 칸토어가 아니라 또 다른 ‘무한’을 그려낸 수학자인데. 이름을 까먹음… ㅋㅋㅋ)
(수정2; ‘칸토어’와 ‘힐베르트’이다.)
무한 < 초한
Infinite. < Transfinite.
무한이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유한한 시공간 속‘의 ’인간들의 사고 방식‘으로 해석하는 ’무한대 중 하나‘이며,
그 위에는 ’초한‘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또 다른 더 거대한 ’무한^무한‘을 자체적으로 새로운 단어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제가 관측하는 면의 세상의 모습은, 마지막은 결국 ’역설•페러독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부처‘의 ’무한‘의 ’순환‘의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무한과 하나의 순환이 바로 인생이다.“라는 자체적인 동양 철학의 기초 구조를 만들었죠.
’하나‘만 옳은 것도 아니며,
’진리‘는 모른다.만 옳은 것도 아니며,
두가지 다 옳을 수도 틀릴 수도,
그리고, 순환된다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것을,
’그‘는 어떻게 2천년도 전의 그 오프라인 시공간에서, 인류의 속도 자체도 느렸을텐대, 깨달음에 도달 할 수 있었을까요?
참으로 신기한 세상 입니다.
18:13
세상은 ‘나’의 ‘세상’이 아닌,
‘무한대의 우리’의 ‘세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러므로, 모든 선구자들은 ‘그 사실•현실’을 깨닫고, 본인들이 가장 잘 하는 색깔으로, 본인들의 ‘유’의 ‘생명’은 비록 자연으로 돌아갈 지언정, 그들의 ‘무 또는 파동’의 ‘비관측적 에너지’를 ‘기록물’이라는 ‘생각의 전달’을 언어적으로 남겨놓지 않습니까.
결국 모두는 ‘본인’들의 ‘삶’의 ’영원‘이라는 ‘무한대 중 한 사람{의(to = 하나’의 과정으로 가는 것이며;
이과들은 철저하게 ‘나’라는 ‘1인칭 자아’를 버리고, ’3인칭의 관찰자 기준‘이라는 명확한 ’무한 중 하나의 유한대 시공간‘의 모든 사람들의 동일한 ’자연 법칙‘을 찾는 사람들이다.
’나‘는 1인칭인가? 3인칭인가?
나는 ‘둘 다’ 이다.
{의(t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