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의문의 해씨 왕들. 그들은 누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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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18 ก.พ. 2021
  • 고구려 의문의 해씨 왕들. 그들은 누구였나?

ความคิดเห็น • 199

  • @user-patyokt
    @user-patyokt 3 ปีที่แล้ว +39

    백제의 경우도 초고왕계가 부여씨 고이왕계가 우씨혈통이라는 가설처럼 고구려도 비슷했을듯싶습니다. 신라도 초기에 박석김씨가 번갈아가며 왕노릇한것 처럼요.. 고대국가는 중앙집권화가 아닌 호족들간의 연합체의 성격이 강해서 흥미있는 가설일듯 싶네요.

  • @magicmd7
    @magicmd7 3 ปีที่แล้ว +55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대씨와 걸씨가 큰 세력인데
    발해 대씨 (클대) 걸씨 (커씨?) 크다는 뜻
    고구려 해씨 고씨 높다는 뜻
    이렇게 크다 높다로 뜻이 유사하고
    발음도 해,대 계열 걸,고 계열이 유사하며
    대의 뜻이 크다이므로 걸 고 계열과 훈 독으로 관련이 있으므로 해씨와 고씨의 관계는 결국 같은 말을 다르게 부르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 @deeps7816
    @deeps7816 3 ปีที่แล้ว +48

    남아있는 몇줄 역사기록에서. 이런 추론을 설득력있게 설을 풀어주니 너무 재밌어요.
    암기가 아닌 왜 그럴까?
    생각하게 하고
    궁금하게 만드는 역사이야기 좋아요

  • @nwkim1507
    @nwkim1507 3 ปีที่แล้ว +10

    참 흥미로운 주제 였습니다.해씨 와 고씨 그리고 태조왕 명칭등...

  • @user-dz7dp8vu1d
    @user-dz7dp8vu1d 3 ปีที่แล้ว +2

    아주좋아요 재미있게 잘 보고있습니다

  • @user-cf7lf5jw7l
    @user-cf7lf5jw7l 3 ปีที่แล้ว +1

    진짜 알면알수록 놀라운 역사 ㅎㅎ 시간 가는지 모르고 봤네요 좋은 영상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user-dp4fw8id2f
    @user-dp4fw8id2f 3 ปีที่แล้ว +23

    청화수님 한국사에 대해 더 많이 다뤄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특히 청화수님 채널은 미스테리하고 베일에 가려진 역사의 진실을 파헤쳐나가는 식으로 특별히 짱이라서..^^ 이 영상 같은 고대사가 너무 재밌어요~

  • @TV-fh8zu
    @TV-fh8zu 3 ปีที่แล้ว +4

    좋은 방송 감사합니다.늘 잘 보고 있습니다.~

  • @user-ci3nr9qe2e
    @user-ci3nr9qe2e 3 ปีที่แล้ว +9

    청화수님 좋은 방송 감사합니다

  • @adfontes4006
    @adfontes4006 3 ปีที่แล้ว +27

    오늘 영상 마지막에, 다양한 테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시면서,
    꼭 역사가 아니어도 좋다고 하시며,
    내가 꼭 역사만 하는 사람도 아니라 하시었는데,
    그 말씀 들으니 대단하시네요.
    꼭 역사만 하시는 분이 아니신데,
    청화수님의 역사 이야기는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치우침이 없으면서 깊이가 있는 영상입니다.
    좋은 영상, 잘 들었습니다.

  • @dltmdwls
    @dltmdwls 3 ปีที่แล้ว +20

    혹시 성과 씨를 다르게 사용했던 관습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예를 들어 고대 중국에서는 성은 혈족, 씨는 지역 의 의미를 가졌다고 하는데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성과 씨를 나누어 사용하여서 고와 해의 분리( 분리 비스무레한) 일이 일어난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추모왕이 부여에 살던 시절에는 해모수와의 혈연을 나타내기 위해 해라는 성을 계속 사용하다, 탈 부여 후 고(구)려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지역을 뜻하는 고를 함께 (혹은 고를 더 비중있게) 사용하여 온것이 아닐까요?? 부여에서 나은 예 부인을 통하여 나은 자식들은 본래 부여에 본 터가 있어서 예를 사용 (혹은 주력으로) 하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 @user-jp4mn6xq6v
    @user-jp4mn6xq6v 3 ปีที่แล้ว +1

    선 좋아요 후 감상 입니댜

  • @8moonlight6
    @8moonlight6 3 ปีที่แล้ว +9

    백제 귀족성씨중 해씨가 있고 그 백제 귀족 또한 고구려의 남하세력중 하나였을건데 저는 2번째 가설에 관심이 가네요

  • @user-xh9nj7vv7z
    @user-xh9nj7vv7z 3 ปีที่แล้ว +3

    매번 잘 듣고 보고 갑니다 기분좋은 하루 즐겁게 잘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

  • @user-lx2dl1mj2d
    @user-lx2dl1mj2d 3 ปีที่แล้ว +1

    영상 감사합니다

  • @user-xp4vn3np9w
    @user-xp4vn3np9w 3 ปีที่แล้ว +15

    고구려 초기 얘기는 진짜 신기하고 흥미진진하네요 유리왕 자식들이나 호동 왕자 얘기도 다뤄주실 수 있나요? 이 얘기들에는 또 어떤 가설이 나올지 궁금해요!!

  • @hawkeyesong1299
    @hawkeyesong1299 3 ปีที่แล้ว +35

    추모왕 : 나 아버지(해모수)에게 서운한거 많음. 앞으로 성씨를 '고'로 바꿀거임.
    유류왕: 아버지(추모왕) 마음은 알지만 그렇다고 성씨를 바꾸는 것은 좀... 저는그냥 '해'로 갈게요.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실 추모왕이 아버지(해모수)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을만 하기는해서...

    • @keisk9248
      @keisk9248 2 ปีที่แล้ว

      @@MrBolja2 걸걸 = 대 는 같은 뜻 일껄요?
      걸걸이 우리말로 대라고 했나? 그런 자료를 본적이 있네요.

    • @dsom76
      @dsom76 3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keisk9248 대조영 아버지가 대 사리(관직) 걸걸중상으로 부르더라구요. 대중상을 걸걸중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게 한 건가..

  • @minminararara5165
    @minminararara5165 2 ปีที่แล้ว +1

    정말 흥미로운 주제였네요~ 이런거 많이 해주세요~

  • @user-bm1qv6wr5k
    @user-bm1qv6wr5k 3 ปีที่แล้ว +10

    뭔가 태조대왕부터 부여계 냄새가 솔솔~ 여튼 넘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근데 청화수님은 역사가 제일 재미있어요 다른 주제는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ㅎㅎ

  • @user-vv1kh1dw6c
    @user-vv1kh1dw6c 3 ปีที่แล้ว +19

    새로운 가설을 알게 되는군요.

  • @user-su3dg1zi3h
    @user-su3dg1zi3h 3 ปีที่แล้ว +12

    한국사 공부할때 고구려 5부족에 왕족 계루부 말고, 소노부에도 종묘 있다고 배워서, 태조왕(업적- 계루부 왕위 세습 으로 배움) 전에 소노부에서 왕 몇 번 해먹었겠구나 생각은 했었는데, 잘 봤습니다!

  • @user-co3vi6jo5n
    @user-co3vi6jo5n 3 ปีที่แล้ว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 @1shot2end68
    @1shot2end68 3 ปีที่แล้ว

    진짜 재밌네요!

  • @victorygreat4763
    @victorygreat4763 2 ปีที่แล้ว +13

    3.유리왕이 해모수 고조선의 계승을 만방에 알리고 고조선 후손들의 지지와 단합과 전통성 권위.상징성등을 위해 해씨를 유지했고 다커서 왔기에 굳이 성씨에 대해선 고주몽이나 주위 사람들 모두 별로 신경 안썻을듯 하네요.3번이 가장 타당할듯 하네요.

  • @marksol1450
    @marksol1450 3 ปีที่แล้ว +6

    전에 연개소문 규염객전 할때 보니 병법에 대해서도 조예가 있으신것 같은데 연재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 @Eden_Hong
    @Eden_Hong 3 ปีที่แล้ว +13

    제 개인적인 가설입니다.
    유류가 해씨를 유지한 이유는 당시 강력했던 국가인 부여로부터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당시 이제 갓 졸본부여->고려가 된 신흥국가의 입장에서 창업을 한 추모는 부여와는 다른 새로운 라인을 상징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강력한 이웃국가인 부여와의 마찰은 껄끄러운 문제였겠죠. 그래서 부여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성씨인 "해"씨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여가 쇠퇴해진 이후에는 굳이 해씨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 고씨를 대표 성씨로 삼았지만, 해씨는 자신들의 '근본'으로 기억할 필요는 있었겠다 싶습니다.
    사실 저는 고=해 설을 지지하는 사람이지만 문득 생각이 들어 적어봅니다. 해=음, 고=뜻에서 오는 일종의 한자를 빌린 문자체계였다 생각하거든요.

  • @qmwn
    @qmwn 3 ปีที่แล้ว +15

    이번편도 진짜 흥미진진. 사실이라면 예씨...진짜 대단한 사람이네요.

  • @PeterHPang
    @PeterHPang 3 ปีที่แล้ว +26

    참 좋은 영상 고맙습니다. 여건이 되면 이슬람 역사를 정리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영상은 '아메리카로 간 바이킹' 시리즈 였습니다.

  • @user-qt8ii3zi9t
    @user-qt8ii3zi9t 2 ปีที่แล้ว +5

    원포인트레슨을 통해 외워서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알수있도록 알려드리고 싶어 영상올렸습니다.

  • @hyeoksimonoh
    @hyeoksimonoh 3 ปีที่แล้ว +6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말했듯이 단군왕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위서魏書(북위北魏의 역사서)에 나옵니다.
    '위서에 전하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그 때가 요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삼국지 위서(조위曺魏의 역사서)는 있지만 일연이 읽었다는 그 위서는 현존하지 않습니다. 그 사료가 사실이라면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가 어떻게 단군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걸까.
    단군왕검에 관해 선비족과 한민족은 역사를 공유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예전 어느 게시글에 당나라 때 편찬한 북사北史에 북위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는 구절이 있다는 내용...
    선비족은 고구려와 동종동류同種同類...같은 종족이라고 표현했고 서로 말이 통했다고 합니다.
    원문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중국 사료들을 검색하려고 해도 찾기가 어렵더군요. 하여튼 고구려도 백제도 선비족을 받아들여 기마부대를 편성했을 겁니다.
    여담으로 후한말기 원소는 오환족과 친하게 지내 그들의 도움으로 공손찬을 제압했습니다. 오환족은 중원의 군벌들 하나 정도는 몰락시킬만큼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조조도 그걸 알고 오환을 누르고 중원으로 강제이주시켰고, 조조의 아들 조비도 오환족을 용병이 아닌 정규군으로 편입시켰습니다.
    관구검과 함께 고구려 동천왕의 허를 찔렀던 위나라 장수 구루돈이 바로 오환족의 선우였습니다.
    승전기념비(관구검기공비)에 구루돈을 비롯해 선우들 몇 명이 적혀있는 걸 보면 고구려가 만만치 않는 강국이라 오환족도 각오하고 대병력을 동원했을 것.
    상서대전尙書大典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보다 더 앞서 나와 중국 사료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더군요.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무짤렀을 때 바다 동쪽의 모든 오랑캐들은 부여에 속해 있으며 모든 길은 부여로 통한다'
    상나라(은나라)는 기원전 1046년에 멸망한 나라...그 시기에 바다(?) 동쪽 지역은 모두 부여에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상나라의 멸망년도는 추정한 것으로 정확하지 않고 기원전1112년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는 7백년 역사를 지닌 걸로 알고 있는데 상서대전의 기록대로라면 기원전 11세기경에 부여라는 나라가 이미 존재했다고..??
    혹시 고조선을 부여라고 오인한 것 아닐까요.
    해동海東의 바다는 현재 황해가 아니라 고대의 발해 또는 동해라고 불리웠던 거야택(대야택)을 말하는 듯...
    송나라 때까지 하남과 산동반도 사이에는 수백리 넘는 큰 호수, 거대한 습지와 갈대숲도 존재했습니다.
    한족들의 토지개간으로 마른 땅이 되어버려 옛날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상고시대에 황하 일대는 아열대기후였으니 오늘날 장강 일대와 조금 비슷했을 겁니다.
    한서의 고제본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 '북맥과 연나라 사람이 기병들을 이끌고 한나라를 도왔다'
    맥족은 종주국 부여의 속민屬民이었으니 부용국으로서 연나라와 손잡고 초한전쟁에 개입했을 것.
    부여 입장에서 호전적인 항우보다 무력이 약한 유방을 도와야 상당한 몫을 챙길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한나라가 진나라의 영토인 운중을 빈 땅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말 그대로 빈 땅으로 그냥 버렸거나(완충지대?) 부여 또는 흉노, 오환, 선비 등 북방민족들에게 땅을 떼어 주었다는 사실을 완곡하게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오대십국시대 야율덕광(거란족)은 석경당(사타족)을 도와 후당後唐을 멸하고 후진後晉의 황제로 만들어주는 대가로 연운16주를 할양받았습니다.
    그후 북송北宋이 연운16주를 수복하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합니다. 요나라는 비옥한 땅을 얻은 덕분에 단순한 유목제국이 아니라 한족의 노동력도 활용하는 반농반목半農半牧의 강대국이 되었죠.
    한나라에서 부여왕이 죽을 때마다 장례식을 위해 옥갑玉匣을 미리 준비해 부여와 가까운 현토군에 보관시켜 선물(조공품?하사품?)로 보냈습니다.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했을 때 당시 연나라 영토인 현토군의 창고에 옥갑이 온전하게 보관되었다고 하죠.
    한나라 입장에서 신흥강국 고구려의 기세를 누르려면 기존의 강대국 부여가 견제해줄 필요가 있다고 보고 서로 왕래하며 우호관계를 유지했을 것. 한족 역사가들도 부여를 불패의 강국이라는 의미로 표현했습니다.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부여는 매우 풍성하고 부유했고 선대부터 파괴된 적이 없었다'
    신나라 때 왕망의 신하들이 부여와 예맥이 예전처럼 다시 일어서면 근심거리가 된다고 언급했고, 고구려 유리왕은 부여가 고구려보다 더 큰 나라라고 부여를 고구려의 상국으로 인정했습니다.
    동부여의 대소가 화친조약을 위해 인질교환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유리왕의 태자 도절은 부여가 두려워 인질로 가는 걸 거부했죠.
    그러자 대소가 화를 내며 5만 군대를 집결해 고구려 땅으로 진군시켰습니다.
    당시 부여는 예전같은 전성기가 지났고 북부여, 졸본부여, 서부여, 동부여 등 여러 나라로 갈라졌지만 동부여 자체병력으로 5만을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습니다.
    아래는 부여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서 올린 겁니다.
    ▩부여와 여러나라
    기타 조회 수 2426 추천 수 208 2004.08.14 15:47:36
    ▩조약돌 *.153.157.167 www.histopia.net/zbxe/7956
    ― 중국 기록이 인정하는 부여의 열국(列國) 지배
    오늘, 이종호 박사의 글인「“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을 읽었다. 나는 흉노가 친 동호(퉁구스)가 예맥/부여였다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으나(『삼국지』「부여전」과『삼국사기』「고구려본기」,『삼국유사』에는 부여가 유목국가가 아닌 반농반목半農半牧 국가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가 인용한 기록은 연구할 가치가 있어서 이곳에 소개한다. 복생(伏生 : 한(漢)나라 문제 때 활동했던 진(秦)나라의 학자. 분서갱유로 사라진『상서(尙書)』-『서경(書經)』이라고도 부름 - 를 되살렸다)이 쓴『상서』의 기록을 읽어보자.
    “해동의 모든 이족(夷族)들은 의 족속이다.”―『상서대서』
    부여는 동부여와 북부여, 졸본부여, 고구려, 백제를 낳은 나라다. 그리고 예(濊)는 노인들이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하였고(『후한서』「예전」)”, 서기 245년(정시 6년)에는 강원도로 가지 않고 요령성에 남아있던 예족이 “우리는 고구려에 속한다.”고 선언하여 위나라의 관리인 유무와 궁준의 공격을 받았다.
    심지어 고구려와 대립하던 동옥저도 - 제 3자인 중국 사관(史官)들의 증언에 따르면 - “언어는 고구려와 비슷하나 약간의 차이가 있(『삼국지』「동옥저전」)”으며, “음식과 거처와 의복과 예절은 고구려와 비슷(『삼국지』)”하여 고구려와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후한서』와『삼국지』는『상서』(『상서대서』)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보증을 서 주는 셈이다.
    이들이 “같은 종족”이라고 여기고 같은 문화를 지니고 있었던 까닭은 고구려족, 예족, 옥저족, 부여족이 원래는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고구려와 백제는 스스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 ‘같은 문화권’은 부여(서기 2세기의 동부여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던 부여를 가리킨다)일 가능성이 높다. 즉 서기전 1세기에 열국시대가 시작되기 전에는 부여가 이들을 모두 품어안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설명하면『상서』와『삼국지』에 나오는 부여의 위상이 너무 다르지 않느냐고 물어보시겠지만, 복생의 기록(설령 서주시대에 쓰여진『상서』에 실려있던 기록이 아니라, 전국시대 말기의 상황을 적은 것이라 하더라도 참고할 가치는 있다)은 서기전 3세기의 강성했던 부여제국을 다룬 것이고, 진수의 기록은 서기 2세기 ~ 서기 3세기의 허약해진 동부여와 북부여를 다룬 것이므로, 나는 두 기록에 나오는 부여의 위상이 다른 점은 부여가 강한 나라에서 약한 나라로 굴러떨어진 과정을 설명할 근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상서』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참고 : 복생은 진(秦)나라와 전한(前漢)시대를 거쳐 살았던 사람이고『후한서』/『삼국지』를 정리한 사람들은 서진 초기에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후자가 전자의 기록을 참고할 순 있어도 전자가 후자를 참고할 수는 없다.

  • @JH11001
    @JH11001 3 ปีที่แล้ว +1

    우왕 감사합니다!!!

  • @waterbird-p4r
    @waterbird-p4r 3 ปีที่แล้ว +1

    2000년전에는 한문을 우리말 음차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아. 해(풀해- 풀-> 불) 와 고가 뜻이 통했을 수도요. 3번째 가설을 믿고싶어짐 ㅎ

  • @houseofchieftains
    @houseofchieftains ปีที่แล้ว

    고려 태조대왕과 소수림왕 사이에는 거의 300년이 흐른뒤인데 그때는 나라가 안착이되고 과거의 자기 할배들은 모두 아름답게 보일것입니다 소수림대왕은 그래 우리할배중에 2대왕 유리대왕도 정복군주로 대단한분이셨제 할정도로 300년이 흐른 당시에는 해 와 고 분리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지 않을까 싶네요
    청화수님의 채널은 상상력을 자극하여 언제나 신선합니다 감사합니다

  • @hyunetting7726
    @hyunetting7726 3 ปีที่แล้ว +10

    안녕하세요 청화수님 언제나 라디오처럼 늘 즐겨듣는 애청자 입니다! 제가 오늘 삼국지 관련 글 중 흥미로운 의견을 봐서 고견 여쭙고자 댓글 남겨봅니다!(혹시나..주제로 다뤄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ㅎㅎ) 제갈량 북벌중 마속의 가정방어 실패 후 퇴각중 제갈량이 퇴각을 지휘하느랴 최후에 적은병사와 함께 성에 남게 되었는데 성위에서 거문고를 뜯고 성문을 열어 놓아 사마의가 제갈량의 함정이라 생각하고 퇴각한 일에 대한 의견인데 이는 사마의가 사실 빈 성임을 알고도 후퇴를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위나라에서 아직 완벽히 혁명준비가 끝나지 못한 상황에서 위나라의 큰 적인 제갈량이 제거 된다면 본인이 병권을 통제 하지 못하고 평소 사마의를 시기질투 하던 세력들에 의해 팽 당할수 있어 일부러 위나라의 골칫덩이 제갈량을 살려두어 본인이 계속 병권의 실세를 유지 하려 했다는 설인데요 이에 대한 고견이 궁금합니다 . 혹여 위 설이 어느정도 사실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혹시 제갈량은 사마의의 그 의도까지 한 수 앞서 생각 했을까요?!

  • @happinessg1062
    @happinessg1062 3 ปีที่แล้ว +18

    모든의문이 6대왕이름이 태조왕이라는데서 출발하는군요

  • @user-rc2tl7qi9b
    @user-rc2tl7qi9b ปีที่แล้ว

    유익한영상이네요.몰랐던 내용을 알고갑니다.

  • @Mikoon3326
    @Mikoon3326 3 ปีที่แล้ว +11

    아...이 주제에 대해서 몇개월 전에 흥미롭게 본 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주몽 생존 당시에는 '해' 씨와 '고' 씨라는 성 자체가 없었다는 썰도 있지만....
    1)주몽의 원래 성은 해씨다라는 썰,
    2)당시 만주 벌판을 의미하는 '고' OR '해' 라는 의미하는 한자가 없어서 음차로 대용한것 뿐, 사실 둘 다 똑같은 성씨다는 썰,
    (영상에 나온 마지막 썰과 비슷하긴 합니다...)
    3)모본왕에서 태조왕의 성이 바뀐 이유는 '고' 구려의 국호에 연관되었거나 태조왕의 쿠테타에 대한 당위성이라는 썰...
    (어디선가 본 글에는 고구려의 '태조' 라는 명칭은 고려,조선의 '성종'과 같은 의미로 봐야한다는 썰도 봤습니다..)
    4)초기 신라처럼 특정 가문의 영향력에 따라 바뀌었다는 썰...

  • @stan_ms
    @stan_ms 3 ปีที่แล้ว +12

    역시 화수형!

  • @user-di2no3kn4b
    @user-di2no3kn4b 2 ปีที่แล้ว +3

    와 소름돋네... 고구려가 부족연맹국가라는 특징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유리가 온 직후에 주몽이 바로 죽었다는게 의심스러워서 권력투쟁으로 인한 암살이나 사망일거 같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었는데 ㅋㅋ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군여.
    저는 주몽+소서노 세력이 맘에 안든 부족끼리 연합해서 한바탕 싸웠고, 주몽+소서노 세력이 패배해서 주몽은 죽고 소서노는 도망쳤다 라고 생각합니다. 유리왕 이후 수도까지 국내성으로 옮겼으니 더 가능성이 있는 듯 해요
    다만 한 가지 맘에 걸리는 것은 유리가 온 시점과 주몽이 죽은 시점 사이가 너무 짧다는 것 입니다. 이미 예전부터 준비 된 쿠데타 였거나 아니면 초기 고구려가 그만큼 허술했거나 유리가 온 시점이 꾸며진 역사거나 인 듯 합니다. 왕위 정통성은 이후에 이야기 지어내면 그만이니까요.
    여기서 또 한 가지 더 생각이 드는 것은 일련의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가 허수아비 왕이 아니었다는 것 입니다. 이걸로 볼 때 유리는 이미 왕이 되기 전에 제법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거나 아니면 무언가 재주가 있었거나 모종의 거래를 했거나 인 듯 합니다.
    이상 제 뇌피셜 이었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생각하는건 마지막에 고=해 설과 비슷한 맥락인데 고대 국가에서 성씨가 과연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만큼의 가치를 가졌을까 입니다. 근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 기준으로 판단하면 이상한 점들이 많은데 고대는 더 그럴 것 같네요.

  • @euhounful
    @euhounful 3 ปีที่แล้ว +7

    해씨의 부여를 고씨가 차지하고 해추모를 고추모로 왜곡하고 부여도 고부여로 만들어 고구려가 되었다.. 일리는 없겠지만

  • @user-dp4fw8id2f
    @user-dp4fw8id2f 3 ปีที่แล้ว +36

    항상 유익하고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가야 중에서 가장 교과서에 다뤄지지 않는 소가야라든가.. 그런 가야국들에 대한 영상, 아니면 옥저/동예에 대한 영상, 삼국시대 이전의 마한 변한, 목지국 이런 교과서에 잘 안 실리는 스윽 지나칠 만한 역사에 대한 영상도 준비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ㅁ^

  • @user-ds9ct7qp2m
    @user-ds9ct7qp2m 3 ปีที่แล้ว +17

    추모왕도 해모수 아들로 해씨라고 합니다. 이게 맞는지 모르지만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1-5대까지는 해씨고 6대부터 고씨라고 합니다. 6대 태조왕 고씨집안이 5대모본왕을 암살하고 쿠테타를 일으켜서 역성혁명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추모의 성을 해씨에서 고씨로 바꾸었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당시에는 기록자체가 없기때문에 후에 역사서를 쓰면서 태조대왕에게 유리하게 바꾸었다고 합니다.

    • @user-sk2oq2gl5z
      @user-sk2oq2gl5z ปีที่แล้ว

      국통맥을 밝힙니다.첫 민족국가 고조선을 세운것은 高俊 왕검단군이고.2대는 고부루단군이다.이는 자주사학자이규만씨가 .잃어버린 천도문명에서 밝혔다. 후고조선은 고구려가 조상신으로 모신 고등의자손 22대 고색불루단군이고.47대가 고열가단군이다.단군조선을이은 북부여즉고구려가고리국인데.북부여를 세운 것은44세단군 고구물의 현손 고달 해모수이다.광개토대왕비문에 따르면.고해모수부터광개토대왕까지가17대이다.고해모수.고진왕.고법왕.고모수왕 .고주몽왐으로 이어진다.52대단군이다.발해.대진국이자 고려는 보장왕이 당에서돌아와,678년대중상으로 건국하고.2대가 고왕 대조영입니다. 개벽사출간 /신명난인류최고 한밝달문명국사, 졸저. 참고 바랍니다.다사.

    • @ttt99970
      @ttt99970 ปีที่แล้ว +1

      근데 그러면 중국쪽 사서나 다른 사서의 그런 역성혁명을 암시하는 서술이 조금이나마 있지 않을까요

    • @mokpochonnom
      @mokpochonnom 2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그렇죠 역사는 무조건 비교검증이 필요하죠

  • @user-bm1qv6wr5k
    @user-bm1qv6wr5k 3 ปีที่แล้ว +7

    앗 7분전... 오예~

  • @user-xf2vn3ek5q
    @user-xf2vn3ek5q 3 ปีที่แล้ว +3

    1대에서 5대까지의 역사를 20대 장수왕의 입장에서 왕권이 확립된 그 후대에서까지 나누는 것보다는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 국가에 이롭다고 판단했을거같아요 그냥 제생각입니다

  • @user-ev5lk7nv9c
    @user-ev5lk7nv9c 3 ปีที่แล้ว +5

    뿌려두신 떡밥들 좀 회수해주세요 너무 궁금한게 많아요 ㅠㅠ

  • @seungheelee9646
    @seungheelee9646 3 ปีที่แล้ว +8

    좌원대첩의 영웅 명림답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 @user-tf1jp6em9t
    @user-tf1jp6em9t 3 ปีที่แล้ว +7

    완벽하게 보존된 삼국시대 삼국중 어느곳의 역사서 하나라도 존재하면 이런 논란들도 다 정리할수 있을텐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 @user-cu3zt8kq2k
    @user-cu3zt8kq2k 3 ปีที่แล้ว +2

    시간 나실때 훈족도 자세히 알려주세요ㅎ 길게요;;

  • @kna716
    @kna716 2 ปีที่แล้ว +2

    해씨가 유입세력이고 고씨가 토착세력인데 주몽이 고씨들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건국하고 본인의 성도 고씨로바꿨는데 나중에 온 유리의 세력이 고씨보다 세서 그대로 해씨로 쓰다가 시간이지나 고씨들이 강해져서 다시 고씨나라로 만든거 아닐까요..?ㅎㅎ
    고대한국사 이야기들어보면 상상력이 풍부해지는것같아요ㅋㅋ 이러진않았을까 저러진않았을까 하고 상상해보는데 그게 너무 재밌네요ㅎㅎ

  • @user-cy4lz9jb3n
    @user-cy4lz9jb3n 3 ปีที่แล้ว

    와..

  • @hackneyed8
    @hackneyed8 3 ปีที่แล้ว +3

    좋은 방송 감사합니다 !

  • @user-pr4be5pz9i
    @user-pr4be5pz9i 3 ปีที่แล้ว +46

    고조선, 부여는 해씨왕조.

    • @keisk9248
      @keisk9248 3 ปีที่แล้ว +7

      @@user-gs2sh5hp1g 지금의 시선에서 보면 헷갈릴 수 있어요. 고대시대에는 나라지만 딱 고조선만 있고 그게 멸망하고 새로 생기고 그런것이 아니라 소국들이 모인 연합체? 라고 하면 이해가 가실까요. 마치 지금의 미국 같다고 보면되요. 무슨 주 무슨 주 끼리 모여 미연방(미국) 이 되었잖아요 ㅎㅎ 고조선도 그처럼 여러 소규모 국가가 모인 연방체라고 보면 되고요. 연방 대통령이 단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조선이라는 나라안에 부여, 고구려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었습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후 누가 정통 단군을 이어받아서 고조선 땅을 수복(정복) 하냐의 전쟁이죠. 마치 한나라 멸망 후 위촉오가 한나라의 정통을 주장하며 전쟁을 벌이듯이요. 결국에는 거기서 승자가 고구려가 되어서 마지막에 부여까지 멸망 시키는 거구요. 그 이전에 읍루, 동호, 거란 등등 모두 고조선 공동체 안에 있던 소규모 집단 혹은 국가들이었죠. 이들을 다물로써 정벌하러 다닌거죠. 그리고 고구려도 연방체로 볼 수 있죠. 주위 소규모 집단을 복속 시킨거져. 후에 시간이 흐르면서 고구려인으로 동화되거나 섞이는 집단도 있었을꺼고. 거란, 여진 처럼 끝까지 섞이지 않는 집단도 있게되죠.

  • @masik7993
    @masik7993 3 ปีที่แล้ว +3

    재밌는 가설이넹
    처음 들을 때부터 어떤 맥락이 될 지는 알았는데
    딱히 별다른 경우도 없을듯

  • @amicogen
    @amicogen 3 ปีที่แล้ว +2

    고구려 태조왕과 그형제에 대해 알려주세요. 100살이 넘게 산게 맞는지 아니면 자료가 부족해서 여러명이 섞인건지.

  • @stephen6161
    @stephen6161 3 ปีที่แล้ว +1

    가설2에 한 표! ^^

  • @user-le5fd5rv2g
    @user-le5fd5rv2g 3 ปีที่แล้ว +2

    예씨부인이 해씨 해모수의 계통으로 그때 모계나 부계성을 혼성으로 사용하기도 한것 아닌가?

  • @jhdoh
    @jhdoh 3 ปีที่แล้ว +1

    주몽이 원래 해모수의 아들이라 해씨였는데 고씨로 바꾸었지만 19년 동안 버림받았던 2대왕이 아버지에 대해 적잖이 앙심을 품고 있어 왕위 물려받은 후 우린 원래 해씨였으니 그냥 나는 해씨로 하련다. (재회 5개월 후 주몽의 젊은 나이 사망, 왕권 승계도 좀 수상하네요. 다른 배다른 아들들도 있었을텐데. 소서노와 예씨부인의 알력다툼도 충분히 예상되는 것이었고요) 그러나 6대 태조때 어린나이에 다른 세력이 쿠테타를 일으키며 옹립되자 쿠테타 세력이 명분을 내세우고자 시조의 유지인 고씨로 한다. 이후 자손들은 계속 고씨성을 써왔고 아랫대에 와서는 이러니 저러니해도 다 우리 조상이니 칭송, 만약 다른 성씨 다른 세력이었다면 굳이 2대 3대 왕을 칭송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 @interstellar125
    @interstellar125 3 ปีที่แล้ว +2

    태조 때 역성혁명을 하고는 정통성을 세우려고 추모왕의 성씨를 고씨로 바꿨을 경우가 가장 가능성이 높고 그런 유사 사례도 있으므로.

  • @user-jh6wk8fk1h
    @user-jh6wk8fk1h 3 ปีที่แล้ว +1

    해씨와 고씨 두가지 성을 가지고 있었던건 아닐까요?
    그러다 쿠대타로 기존 대외로 쓰인 해씨를 쓰고 가긴 뭐하니 고씨로 해서 새롭게 시작겠다는 의미로 태조를 쓴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 @user-tf9md2oq5t
    @user-tf9md2oq5t 2 ปีที่แล้ว +2

    동명왕이 유리 만나6개월만에 죽어서 부여 해씨 한테 잘보여야 유리가 나라 다스리는뎨 도움이되니 해씨사용했고,태조대왕은 부여하고 영토전쟁 함으로써 성씨가 고씨로 함 ㅡ맞나?

  • @user-rd3mr3gt5w
    @user-rd3mr3gt5w 3 ปีที่แล้ว +18

    인생은 고해의 연속

  • @user-qs8vd1du3h
    @user-qs8vd1du3h 3 ปีที่แล้ว +4

    유리의 엄마가 서방이 성 바꾼 걸 모르고 아들을 냥 해유리로 불러,그에 익은 유리가 냥
    해로 간?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

  • @latrendista
    @latrendista 3 ปีที่แล้ว +2

    나중에 고구려 평양, 고려 서경 관련한 얘기들도 함 다뤄보시는 건 어떨까요? 북한평양이다 다른 곳이다 말이 많은 것들이니

  • @pc475
    @pc475 3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

  • @asaris5327
    @asaris5327 3 ปีที่แล้ว +2

    일반적으로 태조대왕 때 해씨에서 고씨로 왕실이 바뀌었다고 보죠.

  • @user-tu9rf4nq5i
    @user-tu9rf4nq5i 2 ปีที่แล้ว +2

    모계 기준으로 한 번 풀어 볼 수는 없을까요?

  • @user-jj4lk4xh2g
    @user-jj4lk4xh2g 3 ปีที่แล้ว +1

    주몽은 금마왕의 서자 였고 왕위 경쟁에서 대소에게 밀려나 졸본으로 와서 고구려를 세웠지요.
    거기에 가공의 인물 해모수가 등장 하지요. 해모수는 북부여의 역대 왕이죠.
    자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해모수의 핏줄이라고 주장하며 전설을 만든거죠.

  • @user-zu2dz7di3e
    @user-zu2dz7di3e 3 ปีที่แล้ว +3

    혹시 당시에는 高 자와 解 자가 같은 음을 가진 글자는 아니었을까요? 고구려의 시조의 이름을 말하는 글자는 주몽(朱蒙)으로 중해(衆解), 추모(鄒牟)등 다양합니다. 이름은 하나일텐데 글자가 여럿이란 것은 결국 해당 글자의 당시 발음이 모두 같아서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고(高) 자와 해(解)자 또한 뜻이나 글자의 의미가 있어 쓰인게 아니라 같은 소리이기 때문에 혼용한 것은 아닐까.....막연히 생각해봅니다.

  • @proworldcon
    @proworldcon 3 ปีที่แล้ว +1

    해씨중의 종파의 하나로 고씨를 만들어서 나온거고.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해씨가문에서 양자로 대려왔을수도 있는거 아닐까요.

  • @heypraise
    @heypraise 2 ปีที่แล้ว +1

    후대에 해부여 혹은 예부여는 독자적으로 있다가 고구려에 항복합니다 동예이기도 한데요 그 이후 항복하지 않던 해부여 일족은 위백제로 흡수되어 왜백제까지도 합류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 @cube6808
    @cube6808 3 ปีที่แล้ว +2

    성씨의 개념을 오늘날의 성씨개념이 아닌 애초의 성과 씨가다른 개념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요? 성은 큰 집단, 씨는 그 성내에 같은 혈통내지 같은 뭔가를 공유하는 소수집단... 그러면 해씨든 고씨든 하나가 성이고 해와 고는 그 성내에 씨로서 존재하는 소집단으로 해서 서로 왕권을 주고받았다. 대신 모본왕에서 태조대왕으로 교체된건 좀 과격한 방법이 동원되었는데....후손이 보기엔 어차피 같은 집안이니 ... 대충...그렇게 파악해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신라초기 왕실도 박,석,김이 한 성씨라는 가설이 있더군요. 박이라는 성내에 박,석,김이라는 씨가 왕실로서 존재했다는건데... 물론 김씨나 석씨는 외부이주민이 들어와 주류성씨로 받아들여져 일족이 되었다는 보강 가설도 있긴하더군요. 암튼 기록이 너무 부실하니 작은 기록으로 유추를 해야하는데 청화수님의 탁월한 분석력에 감탄합니다.

  • @nikobellic8368
    @nikobellic8368 3 ปีที่แล้ว +3

    해씨가 정통인듯

  • @user-gn2nm3no9t
    @user-gn2nm3no9t 2 ปีที่แล้ว +1

    해씨 가문의 유리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온조, 비류 등을 몰아내고 왕권을 차지하고 나서 기록에는 "내가 원래 동명왕의 아들이었는데..." 이렇게 적은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요임금이 순임금한테 쫒겨났지만 기록에서는 선위를 한 걸로 나오는 것처럼

  • @user-mr3vz7mh4s
    @user-mr3vz7mh4s 3 ปีที่แล้ว +1

    해씨는 브라운

  • @ongochian
    @ongochian 3 ปีที่แล้ว +2

    인류학에서는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해안선을 따라 이동합니다

  • @alarcon7943
    @alarcon7943 3 ปีที่แล้ว +3

    모본왕하고 태조대왕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모본왕의 중원 공격했다는 얘기하고 태조대왕이 요서지역에 성을 쌓았다는 얘기 좀 해주세요ㅎㅎ
    이 얘기들이 사실인지 궁금합니다ㅎㅎ

  • @user-ou4jy6xe3x
    @user-ou4jy6xe3x 3 ปีที่แล้ว

    역시 첫번째가 상식적으로 맞네요. 성을 고씨로 바꿨으나,기록에는 해씨로 한거죠.왜,연예인도 예명뒤에 꼭 본명을 적어 주잖아요?

  • @user-mt5lf9gz1l
    @user-mt5lf9gz1l 3 ปีที่แล้ว +7

    해씨? 해씨는 백제 8성 귀족중에 하나 아닌가요?

  • @riversideu
    @riversideu ปีที่แล้ว +1

    충격적 가설이 사실은 상식적 가설이라고 봅니다. 제가 최강 호족이고, 왕위를 찬탈했더라도 왕권중심사회에서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했을거라고 봅니다.

  • @user-lz5xo6km8l
    @user-lz5xo6km8l 3 ปีที่แล้ว +14

    ??? : 안녕하세요 로O컬입니다.
    고씨 = 해씨 입니다.
    키보드에서 "해"를 한/영 변환해서 쳐보시면 "Go"가 나옵니다.
    고로 Go씨와 해씨는 같은 성씨입니다.

  • @seoulforest275
    @seoulforest275 3 ปีที่แล้ว +10

    신라 박석김 3성씨도 사실은 같은 성이었다는 설도 있죠. 당시엔 성(姓)과 씨(氏)가 서로 다른 개념이었으니

  • @qidhj2au2nu62
    @qidhj2au2nu62 3 ปีที่แล้ว +2

    6대 태조대왕이 실제로 나라를 세웠다고 선포한 사람이고 앞선 1~5대 선왕을 왕으로 추대한 후 해씨 성을 고씨로 바꿨고, 조금더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추모왕이 고씨로 성을 이미 바꿨었던 거라고 구라 쳤을 확률은 없나요?

  • @user-pf1cq9pt3k
    @user-pf1cq9pt3k 3 ปีที่แล้ว +6

    고려시대 기록 고씨는 원래 해씨다라는 말이 존재

  • @user-kt5bo3dg3w
    @user-kt5bo3dg3w 3 ปีที่แล้ว

    갠적으로 원래 해씨였는데 . 해씨- 부여의 후손 상징이니 좀더 독자성을 위해 고씨 고구려 이름을 따서 바꾸고
    시조 만 다르기기록

  • @jaewonlee7669
    @jaewonlee7669 3 ปีที่แล้ว +11

    우리나라는 과거 모계 사회였어요 그래서 추모가 예씨 부인과 결혼 할때는 해씨 였다가 홀본에 와서 새로 결혼 하면서 고씨로 바뀐게 아닐까요? 해씨인 유리명왕도 고씨인 태조대왕도 모두 추모의 자손인것은 틀림없지만 모계가 누구이냐에 따라 사용하는 성씨가 다른것은 아닐까요?

    • @user-eg9np8ek3g
      @user-eg9np8ek3g 4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모계사회란건 페미들의 허구적 상상

  • @unite1003
    @unite1003 3 ปีที่แล้ว +1

    주몽 태생이 해모수의 혼외자~~~!!! 부여 하백의 딸과 해모수간 하룻밤 외도로 생긴 아이~~!!!! 그러고 보니 저 부여 해부류 저 왕이 사건의 주범 같은데~~

  • @user-bw4xt7rh6i
    @user-bw4xt7rh6i 3 ปีที่แล้ว +5

    청화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 계속 듣고있었는데 그냥 소개만하고 마무리하셔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ㅎㅎ 여기에 태조대왕의 비상식적인 재위기간까지 따져본다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ㅎㅎ

    • @user-bw4xt7rh6i
      @user-bw4xt7rh6i 3 ปีที่แล้ว +1

      또 제 생각을 추가해보자면 광개토대왕 비문에 해씨 왕들을 치켜세운 부분은 백제와의 관계도 한몫했을거 같아요. 소서노와 온조가 백제를 세웠기 때문에 고씨와 해씨의 갈등 여부와 상관없이 어쩔수없이 유리쪽을 인정해줄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부여 고구려 백제의 관계는 볼수록 흥미진진한것 같습니다 ㅎㅎ

  • @user-vb8sf6mu2v
    @user-vb8sf6mu2v 3 ปีที่แล้ว

    너무 옛날이라 전설이나 신화의 영역이 되버려서 알수가 없는듯

  • @user-xp4vn3np9w
    @user-xp4vn3np9w 3 ปีที่แล้ว +7

    맞다 전에 태조대왕이 아버지도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어머니 부여태후가 섭정한 거를 보면 태조왕이 사실 왕의 외손자여서 성이 바뀐 게 아니었냐(즉 아버지가 고씨/어머니 부여태후=왕실은 해씨)는 설도 봤었는데 그 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잘 보고 갑니다ㅎㅎ

  •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3 ปีที่แล้ว +2

    그렇다면 추모왕은 유류에게 제거당했을수도 있겠어요.

  • @heonnivan
    @heonnivan 3 ปีที่แล้ว +2

    해의 호흡

  • @user-sk2oq2gl5z
    @user-sk2oq2gl5z 2 ปีที่แล้ว +1

    단군조선제22대 단군은 고주몽고구려건국성제가 어머니 유화신과 함께 조상신으로 모신 고등의 자손인 고색불루단군이다. 그후단군조선은 47대 고열가단군까지 고씨조선이었다. 우리는 천손족이라 .고씨.해씨(

    • @user-sk2oq2gl5z
      @user-sk2oq2gl5z 2 ปีที่แล้ว +1

      태양).대씨(큼)는같은 성씨로 다룬다.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왕은 큰아들은 해부루왕이고. 두째는 고리국왕 고진왕이다 .그아들이 고법왕이고.아들고모수왕과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났다. 해모수왕부터17대가 굉개토대제이다. 고구려

    • @user-sk2oq2gl5z
      @user-sk2oq2gl5z 2 ปีที่แล้ว

      려제2대고유리왕은 고주몽과 동부여 해금와왕 딸인 해례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씨왕이다.고모수왕은 bc1세기 베링해를지나 테오티와칸에서 멱사적인 고대 멕시코(맥이고)를 처음 건국했다.다사.

  • @paul-ek9zg
    @paul-ek9zg 3 ปีที่แล้ว +1

    화이팅입니다^^

  • @user-hu2kh9bn5e
    @user-hu2kh9bn5e 3 ปีที่แล้ว +3

    듣고보니 드는 생각은
    가설2에서 흘러오다가 나름 역사의식 있는 소수림왕때부터 반성,통합의 의미로 해씨 라인을 리스펙하는 기록을 남긴 게 아닐까?? 라는....
    소수림왕은 불교도 받아들이고 고구려의 체제를 정비한 왕으로도 우리가 배우니까

  • @user-vn9ev2rh3j
    @user-vn9ev2rh3j 3 ปีที่แล้ว +1

    한집안인데 그 누가 누구 시해하고 이런건 인조반정 중종반정 이런개념일수도

  • @TheFrograin
    @TheFrograin 3 ปีที่แล้ว +3

    유리왕의 경우 부여에 남겨 놓았던 아들로 고구려 건국 전에 동명왕의 성이 해씨 였고 고구려 건국후 성을 고씨로 하였으니 비류 온조 외에 다른아들이 있었거나 그후대에 성씨를 바꾼 사람이 존재 했을수도 있다는 생각도 괜찮은 추론인것 같습니다.

    • @user-rj2sw3mt4i
      @user-rj2sw3mt4i ปีที่แล้ว

      동명왕은 부여시조에요
      고구려시조(추모)가 아니고

  • @user-je1so1zb9s
    @user-je1so1zb9s 3 ปีที่แล้ว +2

    백제의 초대 온조도 해씨인게 맞지.... 주몽의 아들이니까....

  • @user-pu8vq2uy1y
    @user-pu8vq2uy1y 3 ปีที่แล้ว +1

    유류왕은 추모왕 아들인데 고씨로 바꾸기전에 생긴아들이라 아버지가 고씨로바꾼지모르고 계속 해씨를 쓴거고 태조대왕은 추모왕의 성씨를 받아쓴거였지않을까요??

  • @user-if2xq6yf1v
    @user-if2xq6yf1v 3 ปีที่แล้ว +3

    가설2가 설득력 있네요

  • @GgG-vi5iq
    @GgG-vi5iq 3 ปีที่แล้ว +2

    Case는 훨씬 다양할수있죠. 더군다나 오기까지 염두해두신다면..
    2대가 고씨인데 해씨로 오기되었다. 그리고 3대부터 2대의 친아들이아니라 진짜로 해씨로 갔다.
    이런것 등등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