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패널 분 소련이 미국의 랜드리스 법안에 의하여 무기 공여를 받았는데요 공짜가 아니고 2차 대전 끝나고 자그마치 2006년 까지 61년에 걸쳐 다 갚았다고 합니다. 현금은 아니고 구리나 백금 같은 現物(현물)로 갚았지만 떼어먹지는 않았습니다. 글구 전쟁사는 역시 김용한교수가 진짜로 레전드입니다. 임용한 교수님을 모셔 오세요.
미국의 원조는 소련보다 영국에 훨씬 집중 되었음. 대략 3배의 원조를 받았지만 그런 영국이 잘 싸웠나 생각해 볼 일. 미국의 원조로 소련의 저항을 과소평가하면 안됨. 그리고 미국의 원조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부터 안정화 되었고 그 전에는 보급선과 양이 상당히 불안정적이었음.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은 미국의 시혜-자비만이 아닌 엄격한 기브앤테이크. 2차대전 초 미국이 보관중이던 1차대전 때 구식 구축함 약 50척 인수받는 댓가로 영국은 전세계 요충지 해외 기지들의 미군 사용 허가 99년과 교환했으며 약 80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20년 정도 남았지만 연장될 것이 분명합니다. 대표적인 곳은 인도양의 디에고 가르샤, 대서양 한복판 어센션 등으로 미국과 영국이 함께 사용 중. ---------------------------------------------------> 2차대전 영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넘긴 과학기술과 해외 기지 사용권, 사실 미국의 운수대통 성격도.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원자핵 변환을 통해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에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핵임계질량은 핵무기 개발의 핵심 중 핵심. 영국이 구한 임계질량은 약 10~20kg 수준, 그 상태에서도 핵폭탄 전체 무게는 b29에 겨우 탑재할 수준. 만일 임계질량 수치가 당시 폭격기 탑재 불가능한 수치였다면, 세계대전 상황에서 그런 곳에 자원 투입할 국가 지구촌에 없음. 따라서 핵임계질량 확인은 기초 중의 기초, 독일은 임계질량 구할 능력은 있었지만 멍 때렸고 영국은 최악의 위기 속에서 임계질량 확인에 나섰던.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 본격 핵무기 개발에 나섰고 충부한 자원과 인력으로 완성시킨.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니지-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th-cam.com/video/p-9w2J5s0xU/w-d-xo.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th-cam.com/video/34oR2D1GVU4/w-d-xo.html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나때는 말이야.그까짓거,그딴거. 라고 입에달고사는 30~90스윗들 특히 딸바보들이 나라를 좀먹고 있는중. 남자의 희생으로 안위를 보장받으며 호의호식 사리사욕을 취하면서 여자라는 성을 무기로 배려받는걸 권리로 만드는 사회. 지들 딸은 남자를 부하로 두고 명령하며 군림하는 장교는 되고 병사는 안된다는 유사국가. 징집,예비군 민방위도 남자는 의무불이행 형사처벌. 여자는 장교전역후 예비군조차 의무가 아닌 유사국가. 여자한테는 의무가 없는걸, 여자한테는 의무를 강제해서는 안된다고, 그걸 차별이 아니라고 판결하는 헌법재판소 판과들. 50~60 스윗과 여자라는 판사들. 군대 자체를 교대하면됨. 오직 여군으로. 징집도 3년부터. 월급은 시대반영 1만원 부터. 어차피 한려페미들 세금으로 먹여살리니 돈줄 필요없음. 이건 지금 한려들이 남혐을 하기위해 하는 말하는 사실이니, 그대로 한려에게 적용하면됨. 진정한 평등이 무엇인지. 주제와 분수를 알게끔.
정말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이런거 너무 좋아요 내용도 알차고 2부가 기다려집니다 두근두근
연구원님 소주 한잔 드시고 해야 긴장 덜 하실듯 ㆍ자막로 봐야됨
패널들이 설명과 비유를 찰떡 같이
하네요. 재미있어요 2부도 기대할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 편 보고싶었는데 😁
잘보았습니다 ❤
역시 정곡을 잘 짚어주시는 허준님! 감사합니다.
9:42 로버트 태프트 비유도 잘못됐네. 소방호스는 재사용이 가능한 물품이고 껌은 1회용이잖아 ...
독소전쟁은 채승병 박사가 나와야 하는데...
사실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쿠르스크 전투는 다른 곳에서 많이 다루어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A집단군의 코카서스 진출 작전인 청색작전 같이 다른 곳에서 잘 안다룬 작전도 다루어 주었으면 합니다
그래도 미국 및 서구권 전장에 비하면 중요도는 더 높은데도 대중적으론 훨씬 덜 알려짐.
@@gimgankoomg4168 2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독소전이랑 북아프리카 전선이죠... 서부 전선은 엘랑스 때매 얼마 안되어수 끝나버렸으니....
패널들의 전문적인 지식과 설명이 쏙쏙 들어 옵니다.
허준님은 항상 옳고요.
딱 한분 아쉽네요.
남보람 박사님 좀 데려와요.
ㅇㅈ..
독소전쟁의 승패 이상이죠. 사실 독소전쟁이 2차대전의 70퍼 이상 비중이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같은 분기점은 2차대전의 승패를 갈랐음. 애초에 미소를 한꺼번에 적대한 독일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지만 그것이 현상적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임.
윤상용 연구원님 말씀만 조금 천천히 해주시면 아주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아미 다 아는 얘기라고 생각하시고 빨리빨리 얘기하시는거 같네요. 저는 오히려 이 속도가 좋습니다.
민채 아나 목소리가 제일 잘 들린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시가전의 교과서 👏👏😁
랜드리스 16:55 흐루쇼프
두분이부활해주소서
스탈린그라드 2부 다음주에 기대된다
오 이런거 계속 해주세요 출연자들도 설명이 안정적이네요
드디어 독소전 하나요
아 짧다 ㅠㅠ
윤상용 연구원님 말씀 좀 천천히 해주세요. 너무 빨라서 무슨 소린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ㅜ
😅0.75배속 재생으로 추천드려용^^
늙어서 그래
못알아듣는이가 잘못?
오호 스탈린그라드는 모 참치
말소리가 잘 안들려요
나 한국인인데 저 오른쪽에 앉은 사람 말 못알아듣겠어요
여기 패널 분 소련이 미국의 랜드리스 법안에 의하여 무기 공여를 받았는데요 공짜가 아니고 2차 대전 끝나고 자그마치 2006년 까지 61년에 걸쳐 다 갚았다고 합니다. 현금은 아니고 구리나 백금 같은 現物(현물)로 갚았지만 떼어먹지는 않았습니다.
글구 전쟁사는 역시 김용한교수가 진짜로 레전드입니다. 임용한 교수님을 모셔 오세요.
미친놈과의 싸움에선 같이 미칠 수밖에는 없내요 전멸전쟁으로 나오는 나치에 인해공격으로 버티는 소련. 참담한 역사내요
소련군 형벌부대 무슨역할을 했을까
주로 슈투르모빅(IL-2) 공격기 후방사수, T-34 전차 조종수 같이 생존률이 떨어지는 기피보직과 보병대는 공세전 위력정찰등의 용도로 활용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독소전쟁 소련군으로 애국심으로 자원입대한 10대 '소녀병사'로 종군한 참전자들의 구술 녹취록.
미국의 원조는 소련보다 영국에 훨씬 집중 되었음. 대략 3배의 원조를 받았지만 그런 영국이 잘 싸웠나 생각해 볼 일. 미국의 원조로 소련의 저항을 과소평가하면 안됨. 그리고 미국의 원조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부터 안정화 되었고 그 전에는 보급선과 양이 상당히 불안정적이었음.
대신영국은 자국해상은 안전하게 틀어막았잖아요?
원폭 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독일 아닌 영국.
독일 폭격을 피해 캐나다로 이전, 영국 단독으로 자원과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이미 진행중이던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하며 최종적으로 미-영-캐 공동 맨허튼 프로젝트.
티저드 미션, 1940년 8월 경 프랑스 항복 및 영국 항공전 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처칠이 헨리 티저드가 이끄는 영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 2차대전 내내 지속.
티저드 미션을 통해 미국에 제공된 과학기술 목록은
핵임계질량-레이더-마그네트론-근접신관-제트엔진-소나-암호해독...페니실린 등.
핵무기 개발이 실제 가능하다는 최초의 확증인 핵임계질량 수치를 제공받은 이후 미국도 원폭 개발에 본격 참여.
핵임계질량 수치가 전달된 초기, 정보를 받았던 미국은 무시했으나 호주 출신의 영국팀 올리펀트가 유력한 미국 과학자들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 경고하며 결국 미국측도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 전환.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은 미국의 시혜-자비만이 아닌 엄격한 기브앤테이크.
2차대전 초 미국이 보관중이던 1차대전 때 구식 구축함 약 50척 인수받는 댓가로 영국은 전세계 요충지
해외 기지들의 미군 사용 허가 99년과 교환했으며 약 80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20년 정도 남았지만 연장될 것이 분명합니다.
대표적인 곳은 인도양의 디에고 가르샤, 대서양 한복판 어센션 등으로 미국과 영국이 함께 사용 중.
---------------------------------------------------> 2차대전 영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넘긴 과학기술과 해외 기지 사용권, 사실 미국의 운수대통 성격도.
핵무기 개발 과정 정리하면
1. 1932년 중성자 발견, 영 채드윅
1920년대 원자핵 변환을 통해 최초 인공 원소 변환했던 영 러더포드, 원소 변환의 원인으로서 중성자 예측.
중성자는 전하 0 + 전자 보다 훨씬 무거운 조건 때문에 원자핵의 강력한 양전하 반발을 극복하고 핵을 부수는 망치 역활.
채드윅은 영-캐 팀 단장으로 맨허튼 프로젝트 참여.
2. 1938년 원자핵 분열 발견, 독 오토한과 마이트너
중성자가 핵을 부수는 망치 방아쇠 역활을 한다는 최초의 확인.
3. 1940년 7월경 영국 핵무기 개발 검토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 1941년 7월 무렵 핵무기 가능하다는 모드 위원회 첫 보고서
독일의 원자핵 분열 소식에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 우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황이 지극 불리했지만, 1940년 7월경 핵무기가 실제 가능한지 조사 위한 모드 위원회 출범.
1년 뒤인 1941년 7월경 모드 위원회의 첫 보고서에, 핵무기 생산은 가능하다는 결론. 영국 핵무기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 시작.
4. 1941년 8월 티저드 미션으로 미국에 모드 위원회 보고서 제공. 미국이 비로서 핵무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파악.
핵임계질량이 미국에 전달되었지만 정보 받은 전문가들은 무시, 호주 출신의 영국 핵무기 개발팀 과학자 올리펀트는 미국의 유력
과학자들을 방문해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 결국 미국 과학계가 대통령에게 건의해 미국 역시 핵무기 개발 시작.
5. 1942년 10월경, 미국이 핵개발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
6. 1943년 8월 쾨벡에서 미영은 핵무기 프로그램 통합 결정 + 핵무기 정보 공유 비밀 협정 체결.
7. 1944년 미영 하이드 파크 협정으로 핵정보 공유 확인.
8. 1945년 7월 최초 원폭 실험 성공
9. 1946년 8월 미국 맥마흔 법, 핵기술과 정보의 해외 유출 금지. 영국과의 핵협정 미국이 깨트림.
미국이 영국과의 핵협정을 파기하자 영국은 전후 파산 상태에서 독자 핵개발 시작. 1952년 원폭, 1957년 수폭 실험 성공.
핵임계질량은 핵무기 개발의 핵심 중 핵심.
영국이 구한 임계질량은 약 10~20kg 수준, 그 상태에서도 핵폭탄 전체 무게는 b29에 겨우 탑재할 수준.
만일 임계질량 수치가 당시 폭격기 탑재 불가능한 수치였다면, 세계대전 상황에서 그런 곳에 자원 투입할 국가 지구촌에 없음.
따라서 핵임계질량 확인은 기초 중의 기초, 독일은 임계질량 구할 능력은 있었지만 멍 때렸고 영국은 최악의 위기 속에서 임계질량 확인에 나섰던.
최종 정리하면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영국은 핵무기 개발 직전 동일 출발선.
독일은 초기 전격전의 대성공으로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영국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혹이나 독일이 핵무장 먼저 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기에 가장 먼저 핵무기 개발에 뛰어 든.
미국은 티저드 미션으로 영국이 제공한 핵임계질량 등의 정보를 접한 이후 본격 핵무기 개발에 나섰고 충부한 자원과 인력으로 완성시킨.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니지-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th-cam.com/video/p-9w2J5s0xU/w-d-xo.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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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th-cam.com/video/34oR2D1GVU4/w-d-xo.html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진짜 궁금한게 소련군 보급상황이면 생화학무기에 대비한 화생방 보호장구가 없었을거같은데 도시에 생화학 폭격을 안퍼부은이유가 뭐임 굳이 인도적인 이유는 아니었을거같은데 일본도 충칭을 폭격할때 병균이 담긴 도자기들을 떨어뜨려서 전염병을 창궐시켰던거로 아는데 젤 쉬운방법을 왜안썼는지 이해가안감
대한민국도 악의적인 병역거부, 기피자들은 지뢰매설. 지뢰제거에 써먹어야함
아 진짜 이 방송은 패널들 문제만 해결되면 최곤데 그게 해결이 안되네 고구마가 가니 따발총이 왔네
정신병 환자를 지도자로 둔 두 국가의 환장 콜라보.
못뱄어요
우리도 남 여 차별 없이 군대 징병 하자 남자만 강제 징병 당해서 죽어야 하냐?
나때는 말이야.그까짓거,그딴거.
라고 입에달고사는 30~90스윗들 특히 딸바보들이 나라를 좀먹고 있는중.
남자의 희생으로 안위를 보장받으며 호의호식 사리사욕을 취하면서 여자라는 성을 무기로 배려받는걸 권리로 만드는 사회.
지들 딸은 남자를 부하로 두고 명령하며 군림하는 장교는 되고 병사는 안된다는 유사국가.
징집,예비군 민방위도 남자는 의무불이행 형사처벌.
여자는 장교전역후 예비군조차 의무가 아닌 유사국가.
여자한테는 의무가 없는걸, 여자한테는 의무를 강제해서는 안된다고, 그걸 차별이 아니라고 판결하는 헌법재판소 판과들.
50~60 스윗과 여자라는 판사들.
군대 자체를 교대하면됨.
오직 여군으로.
징집도 3년부터.
월급은 시대반영 1만원 부터.
어차피 한려페미들 세금으로 먹여살리니 돈줄 필요없음.
이건 지금 한려들이 남혐을 하기위해 하는 말하는 사실이니, 그대로 한려에게 적용하면됨.
진정한 평등이 무엇인지.
주제와 분수를 알게끔.
역사적으로 여성이 전쟁에 참여하면 할수록 여성의 사회진출이 비례해서 증가함 1차대전 이후 영국 4차 선거법 개정 등의 사례로 알 수 있음 이때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이 부여됨
야, 나도 전문가 하겠다.ㅋㅋㅋ
대본 보면서 약간 더듬더듬 말하고...
얼굴만 약간 붉게 하면 다 전문가구만.
차라리 대본 주고 말 잘하는 아나운서를 쓰지 왜 저런 사람을 데려와서 고생을 시키는지...ㅠㅠ
아고, 이 방송은 갈수록 퀄리티가 떨어지니, 원...쯔쯔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