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랑서려운 이순신장군님 그당시 위급한 시기에 몇명안되는 병사를데리고 어찌 그 많은적군을 괴멸시킬수있는 자신감과 계락으로 나라를 구하시니 오늘날 대한민국이 장군님의 나라임니다. 후손들이 영원히 대한민국을 잘 지킬수있게 힘을주십시요. 우리의 장군님 이순신 장군님 영원하리라 감사함니다.
한가지 더 이야기에 올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 일본 도고 제독의 평가인데, 일본 수군 장군이지만, 이순신 장군을 평가하는 솔직함과, 진솔함을 추구하는 자세만은 높이 사고, 본 받아야 할 것이라 봅니다. 국가 대표 선수가 부정 비리로 선발 구성 되었을때에 진솔한 외국팀에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부정과 비리가 외부의 적 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토록 후손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라 생각 됩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이순신이 도망 쳤다고? 진짜 미친 친일파구나. 조정에서 그어떤 도움없이 실제 임진왜란동안 수군을 키워서 제해권을 지켜 왜군의 군과 식량의 보급을 늦췄기에 조선이 국지전을 펼치고 명의 원군과 함께 차례로 국토를 수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칠천량해전 이후 모든 수군을 파하고 육군과 함류하라는 선조의 미친 소리까지 마다하며 겨우 구한 13척의 함대로 133척을 물리치며 다시 조선 수군이 남해 제해권을 찾아 전쟁의 흐름을 유리하게 끌고 왔는데 이순신이 도망쳤다고.... 진짜 정신병자구만.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당시 풍신수길은 이순신을 잡기 위해 요시라를 통해 부산포에 왜군이 오고 있으니 이순신에게 빨리 공격하라는 전보를 선조에게 보냈고 이순신은 부산까지 진군하려면 거친 외해로 돌아 갈경우 당시 내해에서 최적화된 평저선인 판옥선은 외해의 강한 조류에 밀려 격꾼들이 피로와 해류에 난파될 수 있어서 내해를 끼고 가야 했는데 내해에 길목에는 이미 왜성을 만들어 장기농성 중인 왜군이 매복을 하여 단순히 수군만 출전할 경우 당하기 쉬우니 육지 조선군과 반드시 협력해야 한다고 장계를 올렸지만 병신같은 선조가 계속 뭣도 모르고 출전만 강요하다 결국 이순신을 파옥하고 만거야. 이순신이 왜 도망을 치냐고 이 등신같은 인간아~~~~~
이순신 장군님~ 힘든 고난속에서 우리나라를 지키기위해 얼마나 힘들게 애쓰셨는지 아니 목숨을 거셨는지 알거 같습니다. 그렇게 지켜오신 우리 후손이 이땅 위에서 일본 중국 미국등 여러 열강들중에 휘들리지 않고 국력을 키워 자주국방력으로 우리나라를 수호하는 후손이 되도록 노력해야하는데 이젠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같은 민족이니 통일되어 국력을 강화해 외세에 절대 굴하지 않고 우뚝 설수 있도록 우리 후손들이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님께 올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순신 - 문재인 원균 - 윤석열 부하 장수. 병사. 함선. 무기. 식량 모두 그대로고 다만 수장만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바뀌자 마자 무패의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함..... 문재인에서 윤석열로 바뀌자 마자 나라가 망해감.. 수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꺠닫게 해주는 사례....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조선선비들은 문과출신 이순신을 띄우기 뮈해 개무식한 무관인 원균을 악역으로 등판시키는 막장 드라마를 쓴다. 이순신 단독 전공은 1차출정뿐이다. 나머지기 전부 삼도 수군연합함대 전공이다. 전장에서 제일 추악한 놈이 남의 전공을 훔치는 놈이다. 이순신은 자의든 타의든 남의 전공을 훔쳐 자신의 전공으로 만든 자다. 문과출신인 이순신은 권력핵심에,있는 동기동창들의 빽으로 선조와 조정의 총애를 받아 어느 정도 외풍을 막으나 발간 무관 나부랭이인 원균은 외풍을 막을 빽이 없었음, 원균 역시 이순신과 같은 입장이었음. 조선수군은 일수군과 정면으로 붙으면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다같이 알고 있었음. 그래서 이순신도 군령을 위반하면서까지 결전을 회피했음. 원균도 거의 반년을 버티며 일군 전초진지인 가덕도등을 치면서 기회를 보고 있었지만 가덕도조차 까딱도 안해. 전초진지가 까딱도 안하는데 본진은 어떻겠냐고.., 하지만 무대책으로 패전하던 권율은 수군을 족친다. 결국 빳다맞고 나가 패한다. 조정에서는 독전대가 내려와 있었다. 다음에는 빳다가 아닌 군령위반으로 참수당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게 등신임, 삼도수군은 나가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임란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일수군은 임란때의 수송선이 아닌 전투함으로 변모해있었고 화력도 압도하고 있었다. 일종의 호위함대가 만들어진거다. 일수군은 부산포전투로 조선수군의 작전 능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둔중하고 느린 판옥선으로는 튀어봐야 벼룩이란거지. 외해에서 기진맥진해 정박한(부산포전투하고 유사한 상황임) 삼도수군을 섬멸해 버린다. 이순신과 윈균은 각자 다른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운 사람이고 전사했다. 고로 공적을 인정받는게 당연하나 캐무능한 권율이 거기 끼이는게 불법이란다. 가히 절대 문관 우위의 나라 이씨조선나라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조선선비들은 정략적으로 선조와 광해군을 격하시키고 만만한 무장인 원균을 악역으로 등판시켜 드라마를 쓴다. 결국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다.
초딩은 디비자라. 선조는 똑똑해서 왕으로 추대된 사람이고 연산군이 말아먹은 조선을 추스린다. 그 과정에 유학이 깊어 같은 유학자들을 대거 입각시키나 걸마들이 파벌로 노나진거다. 조선시대 유명한 유학자 대부분이 이 시기에 있었다. 전부 모지리들이기는 하지만. 한번도 경연에 빠지지 않은 왕이란다. 한국애들은 배운 놈이나 못배운 놈이나 사고방식이 단세포적인게 문제야.
일본이 이순신을 추앙하는게 제국주의의 영향이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메이지유신때 다시 천황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있었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도쿠가와가를 평가절하 하고 도요토미를 신격화하였습니다. 근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게 패한 게 신은 인간에게 질수 없으니 그래서 이순신도 신적으로 묘사했고 제사도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이 이순신을 위대하고 생각하기 보다는 결국 자기 입맛대로 이용한 결과인거죠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흑노예처럼 매매됐고 자식 또한 노예가 되었다. 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으로 넘어가기전에는 일본은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았다.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소 고대국가가 형성됐다.일본역사는 백제가야 역사이고 한민족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거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환빠라고 조롱하며 부정하는데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순신이 없는 대한민국은 없다. 그런데도 이순신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다. 일본해군학교에서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연구를 했다는데, 우리는 이렇게 훌륭한 우리의 조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지도, 교육하지도 않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 및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재조명과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전쟁의 신은 이순신 아닐까요?? 나폴레옹 알렉산더 칭기즈칸 수부타이 중국의 한신이나 제갈량 아무리 찾아봐도 이순신만큼 열악한 조건에서 열악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육상을 초토화하던 적군사를 해상에서 궤멸시킨 사례를 찾아볼수가 없네요..그것도 한두번이래야 운빨로 치부할수 있지 23판을 전승으로 꺽어버렸으니...전세계에 이런 장군 또 있습니까?
@@Ochotona 수부타이는 세계최강 칭기즈칸의 전폭적인 믿음과 지원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싸웠죠..거기다 몇번 패하기도 했고..지금으로 치면 미국의 참모총장으로써 주변국을 쓸어버린거고 그에비하면 이순신은 우크라이나의 일개장군으로 동료장군의 모함에 젤렌스키대통령의 질투에 파면까지 당하면서도 남은 무기 모으고 모아서 러시아군사들을 개박살내고 우크라이나를 지켜낸거랑 같죠
원균 집안이 대대적으로 무인집안으로 조선시대에서 알아주 던 집안이었습니다. 결과로 보면 어쨌든 전란에서 목숨바쳐 싸워 전사한 장군으로 선조에게 공신훈장을 받았고, 심지어 이순신과 권율 장군보다 품계가 높았으니 조선시대에서는 가문에 크나큰 영광이었겠죠. 그래서 원주 원씨가 그렇게 이순신과 권율보다 사후 하사 받은 품계가 더 높다고 추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수군에 비해 25배 많음 이정도면 계획이란게 있을수 없음...실제로 전투 시작쯤에 일본쪽이 순조류 였기때문에 좁은 수로로 너무 많이 들어와 자기 배들끼리 많이 부딪쳤다고 기록이 있을정도임 이쯤되면 당시 일본군의 심리상태가 어떻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을일...늑대 30마리 있는 우리안에 고기 한덩어리 던진꼴...역조류를 맞으며 대장선이 제일 선두에 있었고 최소 2시간에서 최고4시간을 좀비저글링때 같았을 왜군을 혼자서 막고 계셨던것... 전투 후반가량에 그걸 다막고 대충 혼자서 정리하고 계시니 그때서야 김응함 안위가 다가와 장군님 "아유 오케이"..했던것.. 영화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고 완전 개싸움이였을거라 예상되는 이전투... 조선수군 사망2명 부상 3명 일본수군 31척 침몰 100여척 반파 3천에서 3만명 사망 추정... 이순신 징군님도 대단하시지만 대장선에 같이 계셨던 우리 조상님들.. 거의 공수부대+ 해병대 + UDT급이 아니셨을지....ㄷㄷㄷ
바친게 아니라 칠천량해전 이후에 해당 지역이 위험해져서 도망갔다고 보는게 더 합리적입니다 창고를 지켜야 되는 관리들마저 없어졌으니까요 일본군들이 지척에 있는데 거길 돌아다니시면서 수습했던 것입니다 모두가 포기하고 절망하는 가운데 놀랍게도 나라를 구하려 했던 마지막사람이 있었던 것이지요
@@windyryu5527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국민들이 피흘려 싸워서 세운 나라입니다. 반공이 국가의 기본 이념인 것입니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지지리도 없는 이 거지 나라에서 지금 당장 기아로 굶어죽고 있는 모든 국민을 먹고 살게 하기 위해 압축적 경제 개발을 하는 것도 역시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사건건 모든 국정 수행을 반대하면서 오직 자신들의 권력 찬탈만 추구하는 무능한 정치꾼들의 선동을 막는 과정에서 독재 비슷한 것이 생길 수 밖에 없는 다급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독재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세력을 얻은 소위 민주화 세력은 그 성격이 변질되었고 결국은 이상하게도 친북친중 공산주의자들과 한 몸이 되어 공산 독재체제의 옹호론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과연 그들을 진정한 민주화 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북한 중공을 찬양하고 무조건 복종하려는 그들은 공산주의자와 대체 무엇이 다릅니까? 자금의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그런 무리들이 대한민국에 섞여있으면서 이제는 그 세를 크게 불린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런 무리들은 과연 대한민국에 어울릴까요 아니면 대한민국을 압살하려고 전쟁까지 일으켜 인명을 살상한 북한에 더 잘 어울릴까요? 공산주의 빨치산의 국가반역적 반란들을 영광스러운 투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자들은 과연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을 충실히 따르는 자들일까요? 지금의 대한민국은 단순한 정당간의 대결이 아니라 북한 공산군의 2중대인 남한 공산당과 싸우는 제 2의 625전쟁 중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누구나 알고 있는 성웅이지만, 당시에는 기존 부패 세력에 끼지 못하였기에 감옥까지 가셨고 백의종군도 하셨죠... 지금도 기득권 패거리를 벗어난 참신한 인물은 그들이 똘똘뭉쳐서 죽기이기에 바쁘죠. 반복되는 창피한 역사입니다. 국민들은 뭣도 모르고 편들고... 이순신 장군님 존경하고 가슴이 아픔니다
이순신의 진격명령을 받았는데도 전력차가 너무 나서 무서워서 부하 군함들이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투 초반에는 이순신 대장선 혼자서 싸웠고, 그걸 지켜보던 부하 군함들이 죄책감과 더불어서 용기를 얻어서 결국 뒷따라서 같이 싸웠습니다. 목숨을 건 이순신의 솔선수범 아니었으면, 명량에서 조선수군은 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서해로 그대로 일본 수군은 진격해서 한양으로 곧바로 가고 조선은 끝장났을 것입니다.
이순신은 명량을 등지고 진도해협에서 도도의 33척의 쾌속함대와 교전하다 나포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어목표인 명량의 전라 우수영을 팽개치고 명량을 넘어 보름에 걸쳐 목포로 군산으로 명군진영인 충청도로 튀었고 이후 이순신은 토끼고 일수군이 전남해역을 장악해서 통행이 불가하다는 각종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갔는 역사적인 팩트가 있음. 도도군은 목포 앞바다 즉 신안군까지 점령하고 더 추격도 하지 않고 대기하다(이미 전술 목표를 달성했음) 명군에 밀려 전남해안으로 퇴각하는 고니시군과 같이 순천왜성으로 퇴각한다. 일군이 퇴각한 후 떨레떨레 폐허가 된 전라 우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허위장계를 올리나 조정은 이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이순신은 완도에 거점을 마련하나 또다시 명수군이 증원올때까지 거의 1년을 또 숨죽이고 숨어지낸다. 명수군이 증원 오고 노량에서 조명연합수군은 시마즈군의 화력에 밀려 패해 포위망을 풀고 퇴각하고(시마즈군은 노량해협이 얕아 시마즈가 탄 기함도 좌초당하는 고전을 하지민 화력으로 밀어 무사는 하나도 안죽고 졸개50정도의 피해로 이순신, 등자룡포함 다수의 조명수군 지휘관들을 사살하고 진린도 죽다살아나는 등 조명연합수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함) 다음날 고니시군은 아무런 저항도 피해도 없이 순천에서 퇴각해서 남해 외해를 지나 유유히 거제로 가서 일본으로 돌아간다. 국사 전부 판타지 소설임. 세계사 팩트 이순신이 조선을 구한게 아니라 명군이 일군을 몰아내어 조선을 구했음. 한국지도층이(지식인 포함) 거짓말 대장이란건 세계적인 팩트임. 농사꾼출신인 도도는 2.5만석의 조무래기 번주로 3천을 출병시키나 전공을 인정받아 8만석으로 승급하고 도쿠가와치하에서 사후 20만석을 봉인받아 잘먹고 잘산다. 일본측 자료를 보면 한국사 전부 개구라 판타지라는 팩트도 알 수 있음, 매우 신중하고 사려깊은 자로 알려져 있고 상하 신망이 두텁다고 함. 히데요시파도 도쿠가와파도 인정하는 인물임.
@@mondle7946 이순신은 재란 때 전투를 회피하며 군령을 위반힌다. 전 조선수군 장졸은 일수군 주력과 붙으면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었지만 조정과 개무식한 권율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니들 수군은 잘싸운다고 오만가지 포상이란 포상은 다받고 왜 정작 필요한때 역할을 하지 않는데라는 불만이 팽배했다는거지. 군령위반, 임란때의 허위전과보고 등 무려 3가지 대역죄 다음의 어마무시한 죄에 걸려 이순신은 보직해임 당하고 예비인 원균이 등판하나 원균도 부산포에서 일수군 전력을 목도한 사람이고 당연히 참모들의 판단에 따라 그 역시 거의 반년을 결전을 회피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일군 전초진지인 가덕도 등을 쳐보지만 까딱도 안하고 피해만 는다. 임란때와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는거다, 전초진지도 까딱없는데 본진은 어떻겠냐고.., 캐무능한 권율은 무대책 일방 패전으로 지 모가지가 날라갈까 두려워 수군을 족친다. 니들 잘난척 다해놓고 왜 정작 전투는 안하는데였음. 헌데 잘난 척은 원균이 아닌 이순신이 다했다. 4년간 통제사로 앉아 있었는 애는 이순신이야. 원균은 소방수로 투입된 대타였다. 권율은 문과출신에다 권력핵심에 동기동창들이 포진해 있는 이순신에게는 하대하지 않으나 무관인 원균은 빳다를 친다. 그래도 지금으로 치면 사단장이나 함대사령관인데..., 이미 조정에서는 독전대가 내려와 있었고 다음은 빳다가 아닌 군령위반으로 참수당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게 등신임. 하지만 일수군은 이미 조선 수군의 직전 능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판옥선은 거제 외해로 나가면 개병신되고 거북선이라는건 옆구르기 안하면 다행인 등신배야. 물리 기본이란다. 나는 중학교때 다배웠다. 무게 중심이 높아지면 불안정해진다는 물리 기본. 평저선은 오리배하고 같다. 오리배 타봤냐들? 조그만 파고에도 배가 통채로 뒤뚱뒤뚱해. 판옥선은 외해로 나가 측면파도 맞으면 쥐약이야. 넘들은 고대부터 침저선을 쓴 이유가 있단다. 고대 그리스도 개무식한 바이킹도... 평저선은 강에서나 쓰는거다. 일군은 조선함대를 외해로 끌어내고 이리저리 끌려다녀 기진맥진해진 조선함대는 부산포처럼 겨우 거제 내해로 퇴각해서 정박해서 밥해먹었다. 부산포 전투때도 동일했다. 수군은 배멀미로 죽네사네하고 있었고(평저선이라 본격 파도 맞으면 롤링핏칭으로 탄 애들은 디져) 격꾼은 손이 터져 더 이상 전투가 불가했는데 (배는 조질나게 크고 무거운데 노 수는 적어. 차로 치면 그랜저에 아반테 엔진 단 격이야 그러니 격꾼은 디져 나가 ) 당시에는 일군도 당황해서 추격은 하지 않아 이순신이고 뭐고 살아 남은거다. 조선수군따위가 부산포까지 올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 허나 칠천량에서는 일수군도 임란때의 수송선이 아닌 전투함으로 변모했고 부산포 경험으로 이미 조선 수군의 능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튀어봐야 벼룩이라는거지. 둔중하고 느린 조선함선으로는 기진맥진해서 거제내해 어디서 정박해서 밥해 먹고 있을 것이란 것을..., 이미 지상군도 배치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분명히 올거라고.., 일수군은 조용히 추격해서 섬멸해 버린다. 내가 원균이래도 군령위반으로 참수 당하는 불명예를 안느니 차라리 나가 싸우다 죽자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어. 이는 삼도 수군 장졸 전부 마잔가지 입장이었다. 이게 역사적인 팩트다. 함대는 국력의 바로메타다. 그래서 태평양전 야마모토가 아무리 지 잘나도 미해군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던거다. 미해군이 준비가 안된 초전에 멏 번 승전하지만 미해군이 싸울 준비를 하고 나오면서 상대가 안되었던거다. 조선수군의 이순신도 마잔가지란다. 이순신은 신이 아니다. 그냥 조선 무장중에는 그나마 조금 유능한 무장일 뿐이었음. 수군 전력을 잘 유지하고 있었고 결전을 회피하면서 튀는 시점 판단을 잘했음. 잘튀는 것도 능력이다. 나는 이순신 원균이 포상 받는건 불만이 없어. 헌데 캐무능한 권율이 거기 끼이는건 못참아. 더구나 천수를 다누린 놈이.., 가히 문관의 나라 조선나라임.
한국 초딩들은 시스템에 대해 무지해. 게임만 할 줄 알지..;, 조선선비들은 전부 소설가들이라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1도 없다. 함대는 국가 시스템으로 구축되는거다. 국가가 돈이 없으면 시작도 못하는거다. 거기에 바다 경험이 있는 인적 자산이 있어야 해. 돈도 없고 인적 자산도 없어. 헌데, 어떻게 막강한 함대가 구축이 되나? 전부 반지원정대 판타지라는거다. 이 시스템 문제는 누구 하나가 잘 났다고 해결되는게 이냐. 국가 시스템이 구축이 되어 있이야 잘난 놈도 냐오는거다. 이순신 판타지는 그냥 맨땅에 헷띵하는 소설에 불과하고 주인공 총은 총알도 안떨어지고 총 맞아도 안죽고 주인공이 쏘는 총은 다 맞는 엉화 시나리오에 불과해. 그러면 왜 한국인들은 배운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 이 소설에 열광할까? 체면때문이란다. 이순신 소설이 체면을 (국사에 민족 자존심이라고 포장하는) 살려주고 있거든. 이거시 팩트란다. 한국인에게는 조질나게 불편한 ...,
영웅 이순신 장군. 스스로 개발한 무기나전선.. 모든겄들이 시대를 앞서간 해안을 가지신 영웅.... 못난 나랏님을 만나 고뇌를 반복하시며 스스로 생을 마감할 자리를 찿을수 밖에 없었던 영웅 마지막전투에서 목숨을 버리지 안으셨다면 아마도 못난임금과 더 못난 궁궐안 대신들에 의해 욕되게 돌아 가셨을 않타까운 영웅.
제목 625 한국전쟁 72 주년 기념행사 6.25 전쟁 72주년 기념행사가 오전 열시에 인천시 수봉공원 위치한 참전 인천 지구 전적비 앞에서 개최되었다 박남춘 인천시장과 함께 많은 6.25 전쟁 참전 퇴역 노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이곳에 참석한 노병은 전원이 625 한국전쟁 참전 국가유공자 로서 그날의 동족 간의 전쟁을 다시는 되돌리기 싶지 않다는 염원을 가지고 이곳에 참석하였으며 기념식장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6 25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의 국기가 나란히 단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계양 되어 있었다 날씨는 약간에 비구름이 하늘을 낮게 덮었지만 기념행사를 진행하기에는 별무리 없는 날씨였습니다 식순에 의거하여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묵념 헌화 등으로 기념식은 조촐하지만 엄숙하게 거행되었습니다. 기념식 이 끝나고 일부 참전 노병께서 35만 원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서 우리 모두 국회로 가자 하면서 국가가 있어야 민주화도 있는 것이지 국가 없는 민주화가 존재할 수 있는 냐 ? 하면서 나라를 지킨 625 참전용사는 월 35만 원의 수당을 받는데 5 18 민주화 유공자들은 우리보다 몇 배를 더 받고 보훈병원 특혜 자녀 학교 진학 등 많은 특혜를 받고 있다고 하면서 특히 국회의원 한번하면 평생연금을 월 일백만원씩 평생 탄다고 하면서 정부에 대한 큰 불만을 표출하였습니다 노병들의 주장이 전혀 틀린것은 것은 아닙니다 민주화 유공자 이전에 국가를 지킨 유공자가 우선순위가 먼저 아닐까요? 참전 노병들의 나이가 전부 구순을 넘긴것을 생각할 때 노병을 요구를 정부는 각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기념식이 끝나고 노병들은 다음 기념식을 하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 이동했으며 기념식후에는 사전 예약된식당에 모여 식사와 함께 보훈처에서 준비한 기념품을 전달받고 기념행사 일정을 모두 끝냈습니다 한편 두 번째로 진행된 전적비 행사에는 박남춘 인천시장 외 월남전참전 회장 무공훈장수훈자회 전몰장병 미망인 협회 518유공자회 고엽제협회 재향군인회 등 많은 지역단체장이 모여서 기념식이 다시한번 엄숙희 거행되었습 여기까지 6 25 참전 72주년 인천 지구 기념 ㅇㅅㅇ식 행사 소식이었습니당ㅇㅇㅊㅇㆍ ㅇ
세계적인 단 한명 셩웅이순신장군이야말로 어느 세계명장보다도 더뛰어난 장군이 아닐수없다 그열악한 열세에도불구하고23전 전승을 한다는것은 있을수 없는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은 짐략이 아닌 외세 침략당한 입장에서 방어로인한 전승을 했다는데 그의미가 가장큰것이다 또한 열악한 열세에서 승리했다는것이다 세계의 최고의 대장군이 아니던가
내 고향은 경남 남해 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 하신 곳은 이락포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묻힌 곳은 충렬사라고 합니다(나중에 아산으로 옮겨 가심) 명량에서 승리를 거두어 나라를 지키시고 후손을 보존케 하셔서 지금의 우리를 존재케 하신 걸 생각 하면 가슴이 벅차 오르지만 항상 눈물이 먼저 납니다 어릴적 이락포를 가 보거나 충렬사엘 가서 가묘 앞에 섰을 때 장군님의 죽음이 머리와 가슴에 가득 차 너무 슬펐던게 지금도 그대롭니다 희생 하신 분 들 터 위에 오늘의 내가 있기에 애국심으로 뜨겁습니다
@정원 오 쉽게 말해서 조선이 간신배와 덜떨어진 왕이 나라를 말아먹고 오랑캐에게 유린당할테하니 그전에 태어나서 준비하고 나라를 구하라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하늘나라로 오고.. 뭐 이런뜻입니다. 꼬아서 글쓴것도 없는거 같은데 요즘 휴대폰사용으로 인해 글의 맥락을 요즘 젊은이들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참으로 걱정입니다...
아무리 좋은 무기도 아무리 뛰어난 군사도 그것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강점을 극대화하여 활용할 수 있는 전략과 실행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갖춘 지도자가 없었다면 쓸모없는 것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이처럼 뛰어난 지략과 성품을 가진 이순신 장군이 있다는 것은 크고 굳센 자랑이며 긍지이다. 그 분의 훌륭함을 깊이 연구하고 본받는 지금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충무공이 풀려나자마자 했던일이 흩어진 병기와 물자였음;;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자 소식을 듣던 모든관리들이 버리고 내팽개치고간 물자와 병기를 돌면서 수습하고 다녔는데 더 황당했던것은 몇시간뒤에 일본군이 따라오고 있었다는거;; 타이밍도 참 기가막힘 사람의 몸으로 하늘에서 왔다고밖에 해석이 안됨;;
이 명량 해전은 아무리 뛰어난 무기와 군사를 가지고 있어도 전쟁 지도자의 탁월한 지략과 전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죠. 이 명량 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은 아무리 많은 무기와 뛰어난 군사가 있어도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패한 장수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맞 습니다 .헌데 평택 송탄 도원동 소재 원균장군 묘지가 있습니다 또한 저수지도 있습니다 그정도도 과분하게 후손들은 생각 할지언대 하오나 선조 실록에 1등 공신으로 올려 져있기때문 후손 원주 원씨가 주변에 사는 데 누군가 정치인중 퍙택시에서는 일부 몰지작한 사람들이 임진란때 전사한 원균충신이라며 묘지부지 설정을 넓히기 위하야 추진 위원회를 발족한다는등 문제가 있어 여러역사 학자들을 초청 쎄미나등을 열어 지료 수집등 하려다 일부 학자들의 거부 반응으로 현재는 평택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뒷걸음 치는듯 합니다. 평택시청 지자체 댠체장이 동요 될까 평택시민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 사료됩니다 충남 아산 음봉 애 모신 성웅 이순신 장군 묘지는재가 몇번 가보았으나 초라하여 보이고 너무 조용하고 음지 그늘이 지는듯 보이며 쓸쓸한 기분이들 던데요 국가 정부에서 좀 거대하게 장군님 묘지 부근에 저수지에 잉어도 키우고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만 저승에서도 백성의 누를 끼치지 않으시려고 하시는지 넘 소박힌 묘지로 보입니다 하오나 현충사 영웅이순신 자제분등 묘지는 양지 바르고 높은 곳에 장손 차남등이 모셔져 있 고 저수지 설치잉어도 놀고 하는데 후손 지제분들을 위해 이순신 장군님울 영원히 받들기 위해 고 박정희 대통령깨서 잘지어 놓아 수시로 관광 버스 내왕 사람들이 많고 전국민 모두 참배 하기도 좋게 마련 되어 있습니다
전투 초반에만 그랬고요. 나중은 아닙니다. 이순신의 진격명령을 받았는데도 전력차가 너무 나서 무서워서 부하 군함들이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반에는 이순신 대장선 혼자서 싸웠고, 그걸 지켜보던 부하 군함들이 죄책감과 더불어서 용기를 얻어서 결국 뒷따라서 같이 싸웠습니다. 목숨을 건 이순신의 솔선수범 아니었으면, 명량에서 조선수군은 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흑노예처럼 매매됐고 자식 또한 노예가 되었다. 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으로 넘어가기전에는 일본은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았다.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소 고대국가가 형성됐다.일본역사는 백제가야 역사이고 한민족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거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환빠라고 조롱하며 부정하는데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당시 판옥선과 일본군함의 높이차이때문에 일본군이 쉽게 백병전을 못한 이유도 있었고, 왜군의 승선인원은 한척당 70~80명 판옥선은 150~200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래서 혼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고 사상자가 적게나왔다고 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류를 적절히 활용한 이순신장군의 전략이 모두 딱딱 들어맞은 해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원 오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두께 16mm 짜리 쇠사슬이 1m 당 5kg 쯤 합니다. 근데 영상에서 전문가입네 하시는 분이 450m에 4.5톤 정도 한다고 인터뷰 하는 것부터가 코메디죠. 지름 엄지손가락 정도 굵기의 쇠사슬로 배수량 100톤 되는 세키부네 10대 무게와 울독목 조류 운동량이 만드는 장력을 유지한다는 말이 터무니 없지요. 현대 최신 권양기도 울독목에서 조류 타고 내려가는 세키부네 1대 조차 못 버티고 기둥 뽑힐 겁니다.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연아, 손흥민 같은 천재 선수들이 바로 이순신 장군의 DNA 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은 당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을 구한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만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런 인물을 다시 볼 수 있을련지... 암튼 대한민국 화이팅입니다.
이순신! 이름만 들어도 눈뭏이 납니다. 이순신을 알아갈수록 존경할 수 밖에 없고 더욱 감동입니다.
우리나라는. 영웅만다. 너무자랑스럽다
이순신은 천재였다. 이런 천재가 우리편이었으니 다행이지 적군이었다면 한국은 흔적도없을듯.... 감사합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님!
그래
근데 해군졌어도 이미 일본은 한양까지 다 수복했는데 풍신수길이 죽어서 돌아간거죠...어쨋든 이순신장군님이 우리편이라서 너무다행
저때 일본에 복속되어야 했음...무능한 조선 왕놈들에게 비참하게 지배당하다가 지금은 반쪼가리 나라 😢
@@Sangguke 바다에서 보급로 차단으로 물러간거임.
@@moonp3890 그랬다면, 당신의 지붕위에 리틀보이가 떨어졌을 수도....
우리의 자랑서려운 이순신장군님 그당시 위급한 시기에 몇명안되는 병사를데리고 어찌 그 많은적군을 괴멸시킬수있는 자신감과 계락으로 나라를 구하시니 오늘날 대한민국이 장군님의 나라임니다. 후손들이 영원히 대한민국을 잘 지킬수있게 힘을주십시요. 우리의 장군님 이순신 장군님 영원하리라 감사함니다.
이순신 23전승 이순신 아니면 조선은 일본 영토가되었을 것이다
남해안 터지면 일본은 마포 광진나루 까지 일본의 보급선이 신병 군수 물자 조달이 가능 했을거다
가장못난왕 선조는중국 으로 도망가고 백성은 일폰믜 종노릇 수백년 해야했다
해남인으로서 울돌목 명량대첩에서 전사한 할아버님 두분을 추모합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늘그래-m4t 함께 추모 드립니다
함께 추모 드립니다
조선에 이순신 장군이 계셔서 지금의 한국이 있네요! 이런 방송으로 충무공의 애국심과 애민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민족의 불세 영웅 정신을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자랑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한가지 더 이야기에 올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 일본 도고 제독의 평가인데, 일본 수군 장군이지만, 이순신 장군을 평가하는 솔직함과, 진솔함을 추구하는 자세만은 높이 사고, 본 받아야 할 것이라 봅니다. 국가 대표 선수가 부정 비리로 선발 구성 되었을때에 진솔한 외국팀에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부정과 비리가 외부의 적 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토록 후손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라 생각 됩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windyryu5527 불화살, 대포, 소총 보다 월등, 바다 줄 로 묶어놓코ㅡ
지휘자로서의 신중함과 냉철함 뒤에 느껴지는 고독함과 외로움이 느무 애잔해 눈물 나더이다
그려?
그러게요. 완전 동감입니다. 그 무거운 책임감과 고독함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가슴이 아리네요.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이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한국인 이라는게 자랑스럽습니다.
한국인은 1명만 남아도 국가를향한 애국심으로 싸웁니다.
그게 대한국인 이라 생각합니다.
👍👍👍👍👍👍👍
영상감사합니다🙏
🇰🇷민족의영웅
이순신장군감사합니다👍👍✌✌🙏🙏🙏
이순신 정말 대단한 위인이다.. 그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디고 결국 승리로 이끈 그의 능력은 상상도 못하겠다. 너무 위대하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
알면 알수록 이순신장군은 인간의 멘탈을 벗어난 신과 같은 분이십니다.
선조와 조정신료들의 시기와 질투, 보급과 군사들을 자급자족해야 했고 꾾임없는 왜군들과의 싸움도 대비해야하는 극한의 상황들을 어떻게 견뎌내고 승리하셨는지ㅡ
심지어 명량때는 고문당하시고 어머님 을 잃고 아들도 잃고 본인도 얼마나 몸과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생각만해도 눈물이나고 가슴이 아픕니다
13척으로 정말 대단합니다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약드실 시간입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원래 우리나라 전함은12척 입니다.
단 1척 이었어요
그분 께서도 얼마나 힘들고 무섭고 두려우셨을까요
그러나 그분은 해 내셨습니다
그 분을 생각하면
먹먹하고 감격 스럽고 또
가슴이 벅차 눈물이 납니다
그분 들이 계셨기에 우리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거지요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왜 사냐? 어휴 공기도 아깝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이순신이 도망 쳤다고? 진짜 미친 친일파구나. 조정에서 그어떤 도움없이 실제 임진왜란동안 수군을 키워서 제해권을 지켜 왜군의 군과 식량의 보급을 늦췄기에 조선이 국지전을 펼치고 명의 원군과 함께 차례로 국토를 수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칠천량해전 이후 모든 수군을 파하고 육군과 함류하라는 선조의 미친 소리까지 마다하며 겨우 구한 13척의 함대로 133척을 물리치며 다시 조선 수군이 남해 제해권을 찾아 전쟁의 흐름을 유리하게 끌고 왔는데 이순신이 도망쳤다고.... 진짜 정신병자구만.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당시 풍신수길은 이순신을 잡기 위해 요시라를 통해 부산포에 왜군이 오고 있으니 이순신에게 빨리 공격하라는 전보를 선조에게 보냈고 이순신은 부산까지 진군하려면 거친 외해로 돌아 갈경우 당시 내해에서 최적화된 평저선인 판옥선은 외해의 강한 조류에 밀려 격꾼들이 피로와 해류에 난파될 수 있어서 내해를 끼고 가야 했는데 내해에 길목에는 이미 왜성을 만들어 장기농성 중인 왜군이 매복을 하여 단순히 수군만 출전할 경우 당하기 쉬우니 육지 조선군과 반드시 협력해야 한다고 장계를 올렸지만 병신같은 선조가 계속 뭣도 모르고 출전만 강요하다 결국 이순신을 파옥하고 만거야. 이순신이 왜 도망을 치냐고 이 등신같은 인간아~~~~~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약먹고자라. 정신챙기고.
명량해전 후에 이순신 장군은 목포앞 주변 섬에서 6개월 머물면서 해전에서 다친 몸을 치료합니다
133척의 강적을 맞서면서 두려움 으로 간장 등 내장이 다쳤을 것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님께
감사드립니다 💗🙏💗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정말 존경합니다 이순신 장군님
한심한 선조 임금 때문에 더 피눈물 흘려야만 했던
난세에 영웅 이순신 장군님 없어다면 오늘날
대한민국 도 없을것 입니다 장군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한심한 임금이 어디 선조 뿐이겟소.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근대부터 현대까지, 한심한 왕, 대통령이 수두룩. 지대로 됏던 왕과 대통령은 합쳐서 10명이나 돼나?
군대망친 소대가리와 동격인 선조죠.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선조는 조선 역사에 몇 안되는 명군이었고 애초에 모든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함
@@gracemir2한심한 왕은 알겠는데 대통령은 누굴까? 써결이는 아니지?
이순신 장군님~
힘든 고난속에서 우리나라를 지키기위해 얼마나 힘들게 애쓰셨는지 아니 목숨을 거셨는지 알거 같습니다.
그렇게 지켜오신 우리 후손이 이땅 위에서
일본 중국 미국등 여러 열강들중에 휘들리지 않고 국력을 키워 자주국방력으로 우리나라를 수호하는 후손이 되도록 노력해야하는데 이젠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같은 민족이니 통일되어 국력을 강화해
외세에 절대 굴하지 않고 우뚝 설수 있도록 우리 후손들이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님께
올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니 누고? 너 이거해석 못하겠다
그래서 이땅에 이재명이 필요한거 아니겠냐?
이순신 - 문재인
원균 - 윤석열
부하 장수. 병사. 함선. 무기. 식량 모두 그대로고 다만 수장만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바뀌자 마자 무패의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함.....
문재인에서 윤석열로 바뀌자 마자 나라가 망해감..
수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꺠닫게 해주는 사례....
여기서 명나라 군대가 다 했다고 주장하는놈이나 이순신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이재명 이야기하는놈이나 둘다 자강두천임
@@79and84 우린 지금 사람다운 사람이 필요하지 법이고
당헌이고 헌법 약속 규칙 예의등등 안 지키고 엉망으로
만들고 자기만의 욕심만 채우려는 전과 4범은 필요없다
자유사랑 애국국민은 반드시
정신차려야 합니다
잊지맙시다 잊지맙시다
어떻게 이런 신화적 존재가 있을수 있는가ㅜ 모든 것이 완벽한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웅이시여..
하늘에서 내려주신분이라고밖에...편히쉬십시요.이순신장군님덕분에 저희가있습니다.감사합니다.임금만 잘 만났더라도....ㅜㅜ
오늘 다시 우리역사를 알아가는 소중한 시간 갖게됨에 KBS 역사스페셜팀에 감사드립니다.
나라가 힘들고 위태로웠던 험난한 시기에 무력한 군주 선조하의 백성을 구하신 구국충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 무한한 존경심과 감사의 마음 표합니다. ❤ 💚💜💙🙏🙏
KBS 역사스페셜, 힘찬 지지와 응원 보냅니다. 파이팅!!! 힘내자 대한민국. 😇👍👏
30:4 30:50😊 30:5 30:59
와~. 진짜 제대로 잘 만들었네요. 최근들어 처음으로 KBS 칭찬해 주고 싶네요. 정확한 분석과 고증으로 그동안의 모든 의문이 풀렸네요.
철쇠 논란이 많은데 내생각에는 치밀한 전략가인 이순신장군이 미리 철쇠를 박아두었을것이라 생각한다. 저 철쇠로 가두어 놓았기 때문에 물길이 역류로 바뀔때 승리할수 있었다.세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해군제독 이순신. 존경하고 사랑한다👍
난중일기에 ᆢ이전투를 실로 천운이었다고. 적으셨읍니다. ᆢ철쇄설은 후대에 가능성을 두고서 언급됬을뿐 ᆢ 많은 사학자나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가능성이 없다는 것으로. 평가된다고합니다 ᆢ 그무게와 장력을 버틸수있는 쇠사슬을. 그길이만큼 제조할수가 없거니와 ᆢ 적선이 계속 걸려있었다면 ᆢ그무게가. 어마어마한데 과연 그전체를 버텨낼만한 회전목이. 있을수도없다하니 ᆢ 워낙 기적같은 승리라서 후대상상력이 더해진듯 ㆍ그리 중요한 전술이었다면. 꼼꼼한 이순신장군의 성격상 일기에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ᆢ
위대한 성웅 이순신!
이분이 이 나라에 계셨다는게 우리민족의 최대의 축복이 아닐까. 장군이시여. 다시 환생하시어 이 어지러운 나라를 살리옵소서.
ㅋㅋ 환생 ㅎㅎ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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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고하는자 죽고 !!!
죽기를 각오한자,
살길도 있다 !!!
자신의 목숨보다도 나라와 백성을위해, 당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영원한 불멸의 영웅 !!!
자랑스런 충무공 이순신 !!!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
사랑합니다 !!!!!
이순신장군 일대기 영화 “명량” “한산” 모든걸 알고 봐도 무한감동~~또 감동~~ 가슴이 뜨거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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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해도엉마엉마하다일본배들우리배는챔도안돼는데.진짜씩씩한다이순신장군이름잊어버리면안돼다
그배이름는거복선
일본놈하고우리조선이왜싸움을해는지그이유가알고싶어요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자세한 명랑대첩 과 이순신 장군에 관한 역사공부 잘하고갑니다🙏🙏🙏
원균같은 작자들을 반드시 솎아내어야 국운이 융성한다 !!! 이것은 오늘날에도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조선선비들은 문과출신 이순신을 띄우기 뮈해 개무식한 무관인 원균을 악역으로 등판시키는 막장 드라마를 쓴다.
이순신 단독 전공은 1차출정뿐이다.
나머지기 전부 삼도 수군연합함대 전공이다.
전장에서 제일 추악한 놈이 남의 전공을 훔치는 놈이다.
이순신은 자의든 타의든 남의 전공을 훔쳐 자신의 전공으로 만든 자다.
문과출신인 이순신은 권력핵심에,있는 동기동창들의 빽으로 선조와 조정의 총애를 받아 어느 정도 외풍을 막으나 발간 무관 나부랭이인 원균은 외풍을 막을 빽이 없었음,
원균 역시 이순신과 같은 입장이었음.
조선수군은 일수군과 정면으로 붙으면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다같이 알고 있었음.
그래서 이순신도 군령을 위반하면서까지 결전을 회피했음.
원균도 거의 반년을 버티며 일군 전초진지인 가덕도등을 치면서 기회를 보고 있었지만 가덕도조차 까딱도 안해.
전초진지가 까딱도 안하는데 본진은 어떻겠냐고..,
하지만 무대책으로 패전하던 권율은 수군을 족친다.
결국 빳다맞고 나가 패한다.
조정에서는 독전대가 내려와 있었다.
다음에는 빳다가 아닌 군령위반으로 참수당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게 등신임,
삼도수군은 나가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임란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일수군은 임란때의 수송선이 아닌 전투함으로 변모해있었고 화력도 압도하고 있었다.
일종의 호위함대가 만들어진거다.
일수군은 부산포전투로 조선수군의 작전 능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둔중하고 느린 판옥선으로는 튀어봐야 벼룩이란거지.
외해에서 기진맥진해 정박한(부산포전투하고 유사한 상황임) 삼도수군을 섬멸해 버린다.
이순신과 윈균은 각자 다른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운 사람이고 전사했다.
고로 공적을 인정받는게 당연하나 캐무능한 권율이 거기 끼이는게 불법이란다.
가히 절대 문관 우위의 나라 이씨조선나라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조선선비들은 정략적으로 선조와 광해군을 격하시키고 만만한 무장인 원균을 악역으로 등판시켜 드라마를 쓴다.
결국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다.
모지리 선조도 양아치지...
초딩은 디비자라.
선조는 똑똑해서 왕으로 추대된 사람이고 연산군이 말아먹은 조선을 추스린다.
그 과정에 유학이 깊어 같은 유학자들을 대거 입각시키나 걸마들이 파벌로 노나진거다.
조선시대 유명한 유학자 대부분이 이 시기에 있었다.
전부 모지리들이기는 하지만.
한번도 경연에 빠지지 않은 왕이란다.
한국애들은 배운 놈이나 못배운 놈이나 사고방식이 단세포적인게 문제야.
같은 임진왜란의 귀한 사료를 일본에서는 박물관에 제대로 보관전시하고, 우리나라는 시골 오랜된 집 나무 궤짝에 보관하는데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욕보이는 못난 후손들입니다...
일본이 이순신을 추앙하는게 제국주의의 영향이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메이지유신때 다시 천황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있었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도쿠가와가를 평가절하 하고 도요토미를 신격화하였습니다. 근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게 패한 게 신은 인간에게 질수 없으니 그래서 이순신도 신적으로 묘사했고 제사도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이 이순신을 위대하고 생각하기 보다는 결국 자기 입맛대로 이용한 결과인거죠
정말 눈물겹다 자랑스러운 우리의조상 이순신장군님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흑노예처럼 매매됐고 자식 또한 노예가 되었다. 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으로 넘어가기전에는 일본은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았다.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소 고대국가가 형성됐다.일본역사는 백제가야 역사이고 한민족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거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환빠라고 조롱하며 부정하는데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kim7798 이순신 장군이 자랑스럽다는데 갑자기 조선을 까내리네 이분 ㅋ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순신이 없는 대한민국은 없다.
그런데도 이순신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다.
일본해군학교에서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연구를 했다는데,
우리는 이렇게 훌륭한 우리의 조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지도, 교육하지도 않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 및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재조명과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존경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
조선 대한민국 역사에
영원토록 남으실
위대한 한국인
솔직히 전쟁의 신은 이순신 아닐까요?? 나폴레옹 알렉산더 칭기즈칸 수부타이 중국의 한신이나 제갈량 아무리 찾아봐도 이순신만큼 열악한 조건에서 열악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육상을 초토화하던 적군사를 해상에서 궤멸시킨 사례를 찾아볼수가 없네요..그것도 한두번이래야 운빨로 치부할수 있지 23판을 전승으로 꺽어버렸으니...전세계에 이런 장군 또 있습니까?
@@Ochotona 수부타이는 세계최강 칭기즈칸의 전폭적인 믿음과 지원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싸웠죠..거기다 몇번 패하기도 했고..지금으로 치면 미국의 참모총장으로써 주변국을 쓸어버린거고 그에비하면 이순신은 우크라이나의 일개장군으로 동료장군의 모함에 젤렌스키대통령의 질투에 파면까지 당하면서도 남은 무기 모으고 모아서 러시아군사들을 개박살내고 우크라이나를 지켜낸거랑 같죠
@@Ochotona 우왕 수부타이가 대회전 70회라구용? 아무리 그래도 수부타이 나라 못 구함...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도망자는 원균이공. 이순신이 무너지면 조선이 없어지는거라. 이길 수 있는 전투만 출진한거죠. 원희룡이 원균의 자손이죠???
@@K9999-b4y 대구신천지조선족 화났노 ^^
ㄷㅇ,
100번봐도 볼때마다 정말 놀랍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당연 MSG 좀 더했지
아주어렸을때 부터 가장존경했던 이순신장군은 이직도저의 영웅이십니다
니가 아직도 어려서그래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너가 일본의 종이되서 노동하고 있었더라면 지금 그렇게 말할수있겠냐~~
@@김도환-x1x 대구신천지조선족 ^^
@@고구려백제중국사들 핏줄보니 단란주점에서 태어난 씨앗같네?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13:00 일본 역사서에서 저렇게 신나게 상세하게 기록할 정도로 대참패를 한 원균.
근데 아직도 원균을 두둔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갈 뿐.
원균 집안이 대대적으로 무인집안으로 조선시대에서 알아주 던 집안이었습니다. 결과로 보면 어쨌든 전란에서 목숨바쳐 싸워 전사한 장군으로 선조에게 공신훈장을 받았고, 심지어 이순신과 권율 장군보다 품계가 높았으니 조선시대에서는 가문에 크나큰 영광이었겠죠. 그래서 원주 원씨가 그렇게 이순신과 권율보다 사후 하사 받은 품계가 더 높다고 추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mondle7946조 체면 때문 에 원균을 공신으로 올렸다고 하던디요...그원균 후손 이전 국힘당 의원은 지금 감방에 있고 원균은 이완용
조선수군에 비해 25배 많음 이정도면 계획이란게 있을수 없음...실제로 전투 시작쯤에 일본쪽이 순조류 였기때문에 좁은 수로로 너무 많이 들어와 자기 배들끼리 많이 부딪쳤다고 기록이 있을정도임 이쯤되면 당시 일본군의 심리상태가 어떻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을일...늑대 30마리 있는 우리안에 고기 한덩어리 던진꼴...역조류를 맞으며 대장선이 제일 선두에 있었고 최소 2시간에서 최고4시간을 좀비저글링때 같았을 왜군을 혼자서 막고 계셨던것... 전투 후반가량에 그걸 다막고 대충 혼자서 정리하고 계시니 그때서야 김응함 안위가 다가와 장군님 "아유 오케이"..했던것..
영화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고 완전 개싸움이였을거라 예상되는 이전투... 조선수군 사망2명 부상 3명
일본수군 31척 침몰 100여척 반파 3천에서 3만명 사망 추정... 이순신 징군님도 대단하시지만 대장선에 같이 계셨던 우리 조상님들.. 거의 공수부대+ 해병대 + UDT급이 아니셨을지....ㄷㄷㄷ
@@고구려백제중국사들 고구려백제가 왜 중국사고 전라가 왜 일본넘들이죠? 아이디가 황당해서요.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넌 정신병원 에 갈 필요가 있어보이는데?? ㅋㅋ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니는 뭐하는 넘인데 이순신 비하질 하고 다니냐? 조상중에 이순신한테 맴매 맞은분 계시냐? 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명량해전때 울돌목에서 후퇴한걸 말하는건가?
이순신장군이 배 12척으로 울돌목을막아 밀물썰물 시간계산해서 싸운거고 12척으로 133척과 싸워서 30~60척가량을 격파하고 물때바뀌고 충남까지 후퇴한거야
그래서 일본이 중국으로 해상으로가는길 포기한거고 1년이 채되지않아 노량해전때 이순신장군이 끝까지 쫒아요~
도망친게아니고 전술이지요
뭐 머리없이 그냥 싸우나요 전쟁을?
내주변에 해병대 특전사 나온 사람치고 똑바로 된 인간들 못봤다
백성들이 식량과 무기를 약탈하지 않고 이순신이 오자 스스로 바치고 군에 다시 모였다는 사실이 정말 눈물겹다. 기적이자 성인이다.
바친게 아니라 칠천량해전 이후에 해당 지역이 위험해져서 도망갔다고 보는게 더 합리적입니다 창고를 지켜야 되는 관리들마저 없어졌으니까요
일본군들이 지척에 있는데 거길 돌아다니시면서 수습했던 것입니다 모두가 포기하고 절망하는 가운데 놀랍게도 나라를 구하려 했던 마지막사람이 있었던 것이지요
한사람에 대한 신뢰없이는 있을 수 없는 얘기죠
이씨 조선 시대 양반 상놈, 노론소론, 남인 북인, 민족이 나뉘고, 분열 하여 서로 싸우고, 죽이는 짓 거리를 하니, 무슨 힘이 있을까요?
지금도 그 짓거리를 하는 민족입니다.
심각하다고, 걱정 됩니다.
@@windyryu5527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국민들이 피흘려 싸워서 세운 나라입니다.
반공이 국가의 기본 이념인 것입니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지지리도 없는 이 거지 나라에서 지금 당장 기아로 굶어죽고 있는 모든 국민을 먹고 살게 하기 위해 압축적 경제 개발을 하는 것도 역시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사건건 모든 국정 수행을 반대하면서 오직 자신들의 권력 찬탈만 추구하는 무능한 정치꾼들의 선동을 막는 과정에서 독재 비슷한 것이 생길 수 밖에 없는 다급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독재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세력을 얻은 소위 민주화 세력은 그 성격이 변질되었고 결국은 이상하게도 친북친중 공산주의자들과 한 몸이 되어 공산 독재체제의 옹호론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과연 그들을 진정한 민주화 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북한 중공을 찬양하고 무조건 복종하려는 그들은 공산주의자와 대체 무엇이 다릅니까?
자금의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그런 무리들이 대한민국에 섞여있으면서 이제는 그 세를 크게 불린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런 무리들은 과연 대한민국에 어울릴까요 아니면 대한민국을 압살하려고 전쟁까지 일으켜 인명을 살상한 북한에 더 잘 어울릴까요?
공산주의 빨치산의 국가반역적 반란들을 영광스러운 투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자들은 과연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을 충실히 따르는 자들일까요?
지금의 대한민국은 단순한 정당간의 대결이 아니라 북한 공산군의 2중대인 남한 공산당과 싸우는 제 2의 625전쟁 중이나 다름없습니다.
@@windyryu5527 삼국시대 통일이 너무 빨리 이루진게 문제였음
이순신장군님 만세 만세 만세
KBS 정말 훌륭한 기획 감사합니다 ~~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실제 내입장에서 333척을 대적할 생각하니까...어휴 오금이 지리네요. 정말 어떤심정으로 싸우셨을지ㅠ 영웅 맞습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대구신천지조선족 ^^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우리나라에만 자료가 있으면 구라일수도 있는데 일본 중국에도 고증자료가 있음에도 못믿는건 그냥 의심병일수도 있습니다. 가까운 정신과의원을 찾으세요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지가 보는 역사는 맞는역사고 다른사람이 보는 역사는 거짓이고 소설임?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아~정말 위대한 이순신 장군님.
이순신
그저 눈물겹게 고맙고 고마울따름
그런데 친일 후손은 아직도 우리를 혼란케 하고 ..
너무 재밌고 유익합니다
세계 최고의 장군님!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우리국민 대다수가 인정하는 장수를 깎이내리네~무슨 안좋은감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 혹시 와키자카 자손은 아닌지요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내 보기엔 니가 병같은데? 병원 가봐라
사실입니다.
해전의 신이라 불리기도 하지요.
요즘은 영국에도 알려져 인정것
같았습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응 과도한 국뽕은 중국처럼 다른나라 까내리면서 자기나라 자랑스러워하는거임. 니 논리대로하면 아무도 자기나라 자랑스러워하면 안됨ㅋ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 순신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그의 전술 지휘 지략 진법 지형을 고려한 전투. 멋지다 너무 멋저서 가슴 뭉클하다!!!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을 존경합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충무이순신님장군님
하늘 에서 내려 주신분 입니다
세계사 이런 전쟁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 승리 입니다
멸공 충효 일체유심조 🐢🌹
너무멋있따ㅠㅠ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무슨 생각일까? 신기할따름~~
친일이 판치는 요즘
멋진 이순신 장군이 꼭 필요할때입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이 사람 북한 사람이에요? 난 아이디 보고 조선족인줄 알았는데 헐 대박
북한에선 역사 안 가르친다든데 뭐지??
맞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대한해군 최고 👍 앞으로 일취월장 하는 2023 입니다
형형색색의 갑옷을 입은 조선군을 보니, 뭔가 뭉클하네요
이순신 장군은 누구나 알고 있는 성웅이지만, 당시에는 기존 부패 세력에 끼지 못하였기에 감옥까지 가셨고 백의종군도 하셨죠... 지금도 기득권 패거리를 벗어난 참신한 인물은 그들이 똘똘뭉쳐서 죽기이기에 바쁘죠. 반복되는 창피한 역사입니다. 국민들은 뭣도 모르고 편들고... 이순신 장군님 존경하고 가슴이 아픔니다
😊
지금도 정치인들은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음이 슬픈 현실이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하신 분.. 이순신.
전세계에서가 아닐까 감히 말해봅니다...
100원으로 있기엔 작은듯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두분으로... 세종대왕
기억만 해줘도 충분하다....
후손들은 고생 안했으면 좋겠다....
진짜...감사하고 존경....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몇십년 몇백년 몇천년 후에도 기려질 위대하고도 실로 기적같은 업적입니다
몇 만년이 흘러도요.. 뵙고 큰 절 올리고 싶은 분
이순신장군이 특출날 수 밖에 없는게 원래 문과도전하셧던분이라 머리도 명석한데 무과합격할만큼 무력도 검증된 그야말로 문무겸비의 장군!
문과 시험 낙방 한 이유가 집안이 빨간줄 그어져 있어서요? 할아버지 숙청 당함 (역모) 이순신 장군 아버님도 조정 벼슬 했던걸로 스스로 낙향 한분 류성룡 대감이 이순신 집안 누명 벗겨주고 시험 응시 한게 무과 시험요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뭔 소리세요???????????????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어이가 없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방위는 나왔나?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전생에 이완용임
50년전 초등생때 소풍을 갔을적에 녹슨 쇠 망루가
우수영과 진도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도루막대에 쇠줄을
양쪽에서 감아 왜선을 유인 수장시켰다고
말씀하신게 지금도 생생합니다
영화 명랑 에서는 그런내용이
없는게 고증이 안되여 아쉬워습니다
이런 영상에 영어 자막이 있으면 전세계에 널리 알려질텐데요
영국에서 임진왜란 다큐멘터리 만든거 이미 있음 ㅋㅋ
@정원 오 아저씨 이제 유튜브로 한국 아는 사람 많아요..
자막만 달면 잘 보는데
이순신의 진격명령을 받았는데도 전력차가 너무 나서 무서워서 부하 군함들이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투 초반에는 이순신 대장선 혼자서 싸웠고, 그걸 지켜보던 부하 군함들이 죄책감과 더불어서 용기를 얻어서 결국 뒷따라서 같이 싸웠습니다. 목숨을 건 이순신의 솔선수범 아니었으면, 명량에서 조선수군은 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서해로 그대로 일본 수군은 진격해서 한양으로 곧바로 가고 조선은 끝장났을 것입니다.
이순신은 명량을 등지고 진도해협에서 도도의 33척의 쾌속함대와 교전하다 나포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어목표인 명량의 전라 우수영을 팽개치고 명량을 넘어 보름에 걸쳐 목포로 군산으로 명군진영인 충청도로 튀었고 이후 이순신은 토끼고 일수군이 전남해역을 장악해서 통행이 불가하다는 각종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갔는 역사적인 팩트가 있음.
도도군은 목포 앞바다 즉 신안군까지 점령하고 더 추격도 하지 않고 대기하다(이미 전술 목표를 달성했음) 명군에 밀려 전남해안으로 퇴각하는 고니시군과 같이 순천왜성으로 퇴각한다.
일군이 퇴각한 후 떨레떨레 폐허가 된 전라 우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허위장계를 올리나 조정은 이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이순신은 완도에 거점을 마련하나 또다시 명수군이 증원올때까지 거의 1년을 또 숨죽이고 숨어지낸다.
명수군이 증원 오고 노량에서 조명연합수군은 시마즈군의 화력에 밀려 패해 포위망을 풀고 퇴각하고(시마즈군은 노량해협이 얕아 시마즈가 탄 기함도 좌초당하는 고전을 하지민 화력으로 밀어 무사는 하나도 안죽고 졸개50정도의 피해로 이순신, 등자룡포함 다수의 조명수군 지휘관들을 사살하고 진린도 죽다살아나는 등 조명연합수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함) 다음날 고니시군은 아무런 저항도 피해도 없이 순천에서 퇴각해서 남해 외해를 지나 유유히 거제로 가서 일본으로 돌아간다.
국사 전부 판타지 소설임.
세계사 팩트
이순신이 조선을 구한게 아니라
명군이 일군을 몰아내어 조선을 구했음.
한국지도층이(지식인 포함) 거짓말 대장이란건 세계적인 팩트임.
농사꾼출신인 도도는 2.5만석의 조무래기 번주로 3천을 출병시키나 전공을 인정받아 8만석으로 승급하고 도쿠가와치하에서 사후 20만석을 봉인받아 잘먹고 잘산다.
일본측 자료를 보면 한국사 전부 개구라 판타지라는 팩트도 알 수 있음,
매우 신중하고 사려깊은 자로 알려져 있고 상하 신망이 두텁다고 함.
히데요시파도 도쿠가와파도 인정하는 인물임.
명군이 신속하게 요동기병을 출병시키지 않았으면 조선나라는 또 개박살 났음.
이순신 원균이 포상받은건 이해하지만 캐무능한 권율이 포상받은건 이해불가임.
가히 절대 문관우위의 나라 조선나라임.
직전 해전이 칠천량 해전이어서 더욱 그런 것 도 있습니다. 명량해전 이후에는 이순신 휘하 장군들이 전투에서 머뭇거리거나 무서워서 도망친 장수가 없다고 했으니, 칠천량에서 무모하게 싸워서 완전 박살이 났으니 다시 한 번 경험을 하는 것을 두려워 했겠죠.
@@mondle7946 이순신은 재란 때 전투를 회피하며 군령을 위반힌다.
전 조선수군 장졸은 일수군 주력과 붙으면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었지만 조정과 개무식한 권율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니들 수군은 잘싸운다고 오만가지 포상이란 포상은 다받고 왜 정작 필요한때 역할을 하지 않는데라는 불만이 팽배했다는거지.
군령위반, 임란때의 허위전과보고 등 무려 3가지 대역죄 다음의 어마무시한 죄에 걸려 이순신은 보직해임 당하고 예비인 원균이 등판하나 원균도 부산포에서 일수군 전력을 목도한 사람이고 당연히 참모들의 판단에 따라 그 역시 거의 반년을 결전을 회피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일군 전초진지인 가덕도 등을 쳐보지만 까딱도 안하고 피해만 는다.
임란때와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는거다,
전초진지도 까딱없는데 본진은 어떻겠냐고..,
캐무능한 권율은 무대책 일방 패전으로 지 모가지가 날라갈까 두려워 수군을 족친다.
니들 잘난척 다해놓고 왜 정작 전투는 안하는데였음.
헌데 잘난 척은 원균이 아닌 이순신이 다했다.
4년간 통제사로 앉아 있었는 애는 이순신이야. 원균은 소방수로 투입된 대타였다.
권율은 문과출신에다 권력핵심에 동기동창들이 포진해 있는 이순신에게는 하대하지 않으나 무관인 원균은 빳다를 친다.
그래도 지금으로 치면 사단장이나 함대사령관인데...,
이미 조정에서는 독전대가 내려와 있었고 다음은 빳다가 아닌 군령위반으로 참수당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게 등신임.
하지만 일수군은 이미 조선 수군의 직전 능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판옥선은 거제 외해로 나가면 개병신되고 거북선이라는건 옆구르기 안하면 다행인 등신배야.
물리 기본이란다.
나는 중학교때 다배웠다.
무게 중심이 높아지면 불안정해진다는 물리 기본.
평저선은 오리배하고 같다.
오리배 타봤냐들?
조그만 파고에도 배가 통채로 뒤뚱뒤뚱해.
판옥선은 외해로 나가 측면파도 맞으면 쥐약이야.
넘들은 고대부터 침저선을 쓴 이유가 있단다.
고대 그리스도 개무식한 바이킹도...
평저선은 강에서나 쓰는거다.
일군은 조선함대를 외해로 끌어내고 이리저리 끌려다녀 기진맥진해진 조선함대는 부산포처럼 겨우 거제 내해로 퇴각해서 정박해서 밥해먹었다.
부산포 전투때도 동일했다.
수군은 배멀미로 죽네사네하고 있었고(평저선이라 본격 파도 맞으면 롤링핏칭으로 탄 애들은 디져) 격꾼은 손이 터져 더 이상 전투가 불가했는데 (배는 조질나게 크고 무거운데 노 수는 적어. 차로 치면 그랜저에 아반테 엔진 단 격이야 그러니 격꾼은 디져 나가 ) 당시에는 일군도 당황해서 추격은 하지 않아 이순신이고 뭐고 살아 남은거다.
조선수군따위가 부산포까지 올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
허나 칠천량에서는 일수군도 임란때의 수송선이 아닌 전투함으로 변모했고 부산포 경험으로 이미 조선 수군의 능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튀어봐야 벼룩이라는거지.
둔중하고 느린 조선함선으로는 기진맥진해서 거제내해 어디서 정박해서 밥해 먹고 있을 것이란 것을...,
이미 지상군도 배치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분명히 올거라고..,
일수군은 조용히 추격해서 섬멸해 버린다.
내가 원균이래도 군령위반으로 참수 당하는 불명예를 안느니 차라리 나가 싸우다 죽자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어.
이는 삼도 수군 장졸 전부 마잔가지 입장이었다.
이게 역사적인 팩트다.
함대는 국력의 바로메타다.
그래서 태평양전 야마모토가 아무리 지 잘나도 미해군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던거다.
미해군이 준비가 안된 초전에 멏 번 승전하지만 미해군이 싸울 준비를 하고 나오면서 상대가 안되었던거다.
조선수군의 이순신도 마잔가지란다.
이순신은 신이 아니다.
그냥 조선 무장중에는 그나마 조금 유능한 무장일 뿐이었음.
수군 전력을 잘 유지하고 있었고 결전을 회피하면서 튀는 시점 판단을 잘했음.
잘튀는 것도 능력이다.
나는 이순신 원균이 포상 받는건 불만이 없어.
헌데 캐무능한 권율이 거기 끼이는건 못참아.
더구나 천수를 다누린 놈이..,
가히 문관의 나라 조선나라임.
한국 초딩들은 시스템에 대해 무지해.
게임만 할 줄 알지..;,
조선선비들은 전부 소설가들이라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1도 없다.
함대는 국가 시스템으로 구축되는거다.
국가가 돈이 없으면 시작도 못하는거다.
거기에 바다 경험이 있는 인적 자산이 있어야 해.
돈도 없고 인적 자산도 없어.
헌데, 어떻게 막강한 함대가 구축이 되나?
전부 반지원정대 판타지라는거다.
이 시스템 문제는 누구 하나가 잘 났다고 해결되는게 이냐.
국가 시스템이 구축이 되어 있이야 잘난 놈도 냐오는거다.
이순신 판타지는 그냥 맨땅에 헷띵하는 소설에 불과하고
주인공 총은 총알도 안떨어지고 총 맞아도 안죽고 주인공이 쏘는 총은 다 맞는 엉화 시나리오에 불과해.
그러면 왜 한국인들은 배운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 이 소설에 열광할까?
체면때문이란다.
이순신 소설이 체면을 (국사에 민족 자존심이라고 포장하는) 살려주고 있거든.
이거시 팩트란다.
한국인에게는 조질나게 불편한 ...,
충무공이순신의 업적을
반드시 본받자 뛰어난
전략가의 빛나는계책들이
전쟁을승리로만들어으니
이순신장군의 끈임없는연구
야말로 어찌높이평가안할수
있으랴
영웅 이순신 장군.
스스로 개발한 무기나전선..
모든겄들이 시대를 앞서간
해안을 가지신 영웅....
못난 나랏님을 만나 고뇌를 반복하시며 스스로 생을 마감할
자리를 찿을수 밖에 없었던 영웅 마지막전투에서 목숨을 버리지 안으셨다면 아마도
못난임금과 더 못난 궁궐안 대신들에 의해 욕되게 돌아 가셨을 않타까운 영웅.
제목 625 한국전쟁 72 주년 기념행사
6.25 전쟁 72주년 기념행사가 오전 열시에 인천시 수봉공원 위치한 참전 인천 지구 전적비 앞에서 개최되었다
박남춘 인천시장과 함께 많은 6.25 전쟁
참전 퇴역 노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이곳에 참석한 노병은 전원이 625 한국전쟁 참전 국가유공자 로서 그날의 동족 간의 전쟁을 다시는 되돌리기 싶지 않다는 염원을 가지고 이곳에 참석하였으며
기념식장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6 25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의 국기가 나란히 단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계양 되어 있었다
날씨는 약간에 비구름이 하늘을 낮게 덮었지만 기념행사를 진행하기에는 별무리 없는 날씨였습니다
식순에 의거하여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묵념 헌화 등으로 기념식은 조촐하지만 엄숙하게 거행되었습니다.
기념식 이 끝나고 일부 참전 노병께서 35만 원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서 우리 모두 국회로 가자 하면서 국가가 있어야 민주화도 있는 것이지 국가 없는 민주화가 존재할 수 있는 냐 ?
하면서 나라를 지킨 625 참전용사는 월 35만 원의 수당을 받는데 5 18 민주화 유공자들은 우리보다 몇 배를 더 받고 보훈병원 특혜 자녀 학교 진학 등 많은 특혜를 받고 있다고 하면서
특히 국회의원 한번하면 평생연금을 월 일백만원씩 평생 탄다고 하면서 정부에 대한 큰 불만을 표출하였습니다
노병들의 주장이 전혀 틀린것은 것은 아닙니다
민주화 유공자 이전에 국가를 지킨 유공자가 우선순위가 먼저 아닐까요?
참전 노병들의 나이가 전부 구순을 넘긴것을 생각할 때 노병을 요구를 정부는 각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기념식이 끝나고 노병들은 다음 기념식을 하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 이동했으며 기념식후에는 사전 예약된식당에 모여 식사와 함께 보훈처에서 준비한 기념품을 전달받고 기념행사 일정을 모두 끝냈습니다
한편 두 번째로 진행된 전적비 행사에는 박남춘 인천시장 외 월남전참전 회장 무공훈장수훈자회 전몰장병 미망인 협회 518유공자회 고엽제협회 재향군인회 등 많은 지역단체장이 모여서 기념식이 다시한번 엄숙희 거행되었습
여기까지 6 25 참전 72주년 인천 지구 기념 ㅇㅅㅇ식 행사 소식이었습니당ㅇㅇㅊㅇㆍ ㅇ
성웅...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일본인ㅋ ㅋㅋ
글씨를 도대체 몇개나 틀리게 쓴거야 한국사람 맞냐
자살위장한거라구함. 이장했을때. 돌아가신걸로. 추정함.
많이 배우고 갑니다!!!
역사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9개월만에 조회수를 이만큼이나 기록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닌데 그만큼 이순신의 위상이 어느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성웅 이순신 탄생일을 국가적인 차원으로 진행해야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냥 신이다
온갖 모함과 모된 고초 어떤 역경이 닥쳐도 모든 승리를 이끌어낸 인간이라면 할수 없는 일을 해내신 그분은 그냥 신이다
우리에게 이런승리가 없었으먼~잊지도말고 우리나라 잘 지켜야지 😂😅😊
ㅡㅡ
😊
😊
😊
저렇게 이겨놓으니 조선왕이 질투해서 버림받는 말도안되는 나라~ 정말 답이 없었나요~ 이순신장군님이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요
세계적인 단 한명 셩웅이순신장군이야말로
어느 세계명장보다도 더뛰어난
장군이 아닐수없다 그열악한 열세에도불구하고23전 전승을
한다는것은 있을수 없는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은 짐략이
아닌 외세 침략당한 입장에서
방어로인한 전승을 했다는데
그의미가 가장큰것이다
또한 열악한 열세에서 승리했다는것이다 세계의 최고의 대장군이 아니던가
대한민국의 영웅
이순신장군 만만세..!!
내 고향은 경남 남해 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 하신 곳은 이락포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묻힌 곳은 충렬사라고 합니다(나중에 아산으로 옮겨 가심)
명량에서 승리를 거두어 나라를 지키시고 후손을 보존케 하셔서 지금의 우리를 존재케 하신 걸 생각 하면 가슴이 벅차 오르지만
항상 눈물이 먼저 납니다
어릴적 이락포를 가 보거나 충렬사엘 가서 가묘 앞에 섰을 때 장군님의 죽음이 머리와 가슴에 가득 차 너무 슬펐던게 지금도 그대롭니다
희생 하신 분 들 터 위에 오늘의 내가 있기에 애국심으로 뜨겁습니다
몇달전에 충렬사 방문했어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ㅡ 당시 장군과 수군들 남도 백성들 남녀할것없이 열악한 상황에서 지략으로 적을 물리치고 아깝게 가신게ㅠㅠ 우리가 꼭 부강해져서 다시는 일본이 깝치지 못하게 해야하는데요.
이순신 장군이 말했다
"저 충무공을 세종대왕과 비교하는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이재명과는 비교하지말아 주십시오 저 충무공이 다시 태어난다해도 이재명을 넘어설수는 없습니다"
@@79and84
좋은 말씀 인데요
좀 적당히 하시죠
과유불급이라고...
@@sig-pj9hl 깨달아라!
@@79and84 이순신장군은 500년도 전에 사신분이 무슨 이재명을 안다고 비교하지 말라고 ㅋㅋㅋㅋ 아저씨 정신 온전하세요? 하긴 이재명이 장군이 됐으면 그것도 잘했을것같긴 해요.
이순신 장군은 우리 겨레를 위기에서 구해내라는 하늘의 사명으로 탄생한 신인이 였다. 종전과 함께 다시 하늘로 돌아간 걸 보면...
이순신 장군이 말했다
"저 충무공을 세종대왕과 비교하는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이재명과는 비교하지말아 주십시오 저 충무공이 다시 태어난다해도 이재명을 넘어설수는 없습니다"
@정원 오 쉽게 말해서 조선이 간신배와 덜떨어진 왕이 나라를 말아먹고 오랑캐에게 유린당할테하니 그전에 태어나서 준비하고 나라를 구하라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하늘나라로 오고.. 뭐 이런뜻입니다. 꼬아서 글쓴것도 없는거 같은데 요즘 휴대폰사용으로 인해 글의 맥락을 요즘 젊은이들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참으로 걱정입니다...
!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아무리 좋은 무기도 아무리 뛰어난 군사도
그것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강점을 극대화하여 활용할 수 있는 전략과
실행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갖춘 지도자가 없었다면
쓸모없는 것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이처럼 뛰어난 지략과 성품을 가진
이순신 장군이 있다는 것은
크고 굳센 자랑이며 긍지이다.
그 분의 훌륭함을 깊이 연구하고 본받는
지금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원균 장군 덕분에, 원씨 집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욕먹는 집안이 되었다.
지금 나도 역사에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빨갱이 선동짓, 북한간첩질은 한국역사에서 영원히 반역자놈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너는?
그반대 원균이 있잔우
무심하게용맹하지만
닭대가리라
칠전량에서
조선수군참패한
졸장
이순신장군님 감사합니다
이순신 장군 후손 이라는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으데 이씨 입니까?
이충무공이 풀려나자마자 했던일이 흩어진 병기와 물자였음;;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자 소식을 듣던 모든관리들이 버리고 내팽개치고간 물자와 병기를 돌면서 수습하고 다녔는데
더 황당했던것은 몇시간뒤에 일본군이 따라오고 있었다는거;; 타이밍도 참 기가막힘
사람의 몸으로 하늘에서 왔다고밖에 해석이 안됨;;
다함께 선조에게 진심 어린 욕 한마디씩 부탁 드립니다~~ 이순신장군께서 선조와 간신배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 세우셨어야 하는데....
선조 이 쓸모없는 인간아! 왜 태어나서 우리 장군님을 괴롭혔냐! 넌 안 태어나는게 애국이였는데
현대 해전의 함포가 있었군요. 와우 !!!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이순신 장군은 건들지말자..제발
이 명량 해전은 아무리 뛰어난 무기와 군사를 가지고 있어도 전쟁 지도자의 탁월한 지략과 전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죠.
이 명량 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은 아무리 많은 무기와 뛰어난 군사가 있어도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패한 장수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맞 습니다 .헌데 평택 송탄 도원동 소재 원균장군 묘지가 있습니다 또한 저수지도 있습니다 그정도도 과분하게 후손들은 생각 할지언대 하오나 선조 실록에 1등 공신으로 올려 져있기때문 후손 원주 원씨가 주변에 사는 데 누군가 정치인중 퍙택시에서는 일부 몰지작한 사람들이 임진란때 전사한 원균충신이라며 묘지부지 설정을 넓히기 위하야 추진 위원회를 발족한다는등 문제가 있어 여러역사 학자들을 초청 쎄미나등을 열어 지료 수집등 하려다 일부 학자들의 거부 반응으로 현재는 평택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뒷걸음 치는듯 합니다. 평택시청 지자체 댠체장이 동요 될까 평택시민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 사료됩니다
충남 아산 음봉 애 모신 성웅 이순신 장군 묘지는재가 몇번 가보았으나 초라하여 보이고 너무 조용하고 음지 그늘이 지는듯 보이며 쓸쓸한 기분이들 던데요 국가 정부에서 좀 거대하게 장군님 묘지 부근에 저수지에 잉어도 키우고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만 저승에서도 백성의 누를 끼치지 않으시려고 하시는지 넘 소박힌 묘지로 보입니다 하오나 현충사 영웅이순신 자제분등 묘지는 양지 바르고 높은 곳에 장손 차남등이 모셔져
있 고 저수지 설치잉어도 놀고 하는데 후손 지제분들을 위해 이순신 장군님울 영원히 받들기 위해 고 박정희 대통령깨서 잘지어 놓아 수시로 관광 버스 내왕 사람들이 많고 전국민 모두 참배 하기도 좋게 마련 되어 있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충무공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님인듯!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순신은 해군사관학교 교육자료. 훌륭한 해군역사. 그자체가. 됩니다!!!!!!!
이순신 정말 멋져
영상감사합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 대한민국이 존재하는한 영원히 국민들의 가슴에 새겨질것 입니다
육전가면 개털릴거같으니깐 도박해서 성공ㅋ
순신무력 장보고, 궁예보다 한참 못미침.
이름부터 사대이름ㅋ
@@리중사-i2v 역사 공부 안했으면 아가리라도 닫는게....
@@리중사-i2v 육전을 한번 찾아봐
와 진짜 똑똑하다 바닷속에 긴 쇠줄을 넣을생각을 하다니... 얼마나 지독하게 고민했을까 박수
캬 미래에서 m16 100정과 5.56미리 총알
10만발 가져다 주지 않았을까 ㅋ
진짜 믿기힘든 전적 최고이십니다 장군님
이순신의 무적함대가 다시 일어서는 계기...명량대첩
이순신 혼자 싸운건 아니지만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길수없는 전투
역사 이야기을 들으니 눈물이나고 가슴이 메이네요 나는여자인데도 이러니 이순신은 오직했을까
11:53 일본 집에서 책장에 이순신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너무 좋아요~
실제로는 13대가 아닌 대장함선 혼자 싸웠다는게 지론이더라구요.
전투 초반에만 그랬고요. 나중은 아닙니다. 이순신의 진격명령을 받았는데도 전력차가 너무 나서 무서워서 부하 군함들이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반에는 이순신 대장선 혼자서 싸웠고, 그걸 지켜보던 부하 군함들이 죄책감과 더불어서 용기를 얻어서 결국 뒷따라서 같이 싸웠습니다. 목숨을 건 이순신의 솔선수범 아니었으면, 명량에서 조선수군은 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순신 기함이 존나게 크고 무장도 쩔어서 가능했던 일임
@@user-hy7gq5sd6k 그게아니라 좁은협수로에 물살도강해서 적의 전함이 한번에들어오지못했기에 버틴거죠 사실상 어찌됏든1척으로 아무리적은수의 적이라도 버티기힘들었을껀데 그걸 버텨낸 이순신장군님
진짜 대단하시죠 80%를 버티고 계셧으니 ㄷㄷㄷ 말로 다 못하죠
@@이순신박사 그럼 수백척이 횡대로 다가오겠냐? ㅋㅋ 대장선이 존나게 크고 수백명이 타는 배였는데 뭔 수로 ㅈ만한 일본배로 파괴한다는 거임 ㅋ
@@user-hy7gq5sd6k 존나게커도 바다가넖었으면 졌어 ㅋㅋㅋㅋㅋ크기가중요한게아님
잘시청하고갑니다
이순신장군은 저승에서도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주고 계실것같네요😢
에너지회사다니나요? 님을보니 저도 에너지넘치고 파이팅하며 살고싶네요
성웅이순신장군님.해설잘들었읍니다당시조정에편협한간신들우국충정에불타는충무공그리고장병들.결코잊어서는않되겠죠.조국에영웅들우러러봅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흑노예처럼 매매됐고 자식 또한 노예가 되었다. 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으로 넘어가기전에는 일본은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았다.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소 고대국가가 형성됐다.일본역사는 백제가야 역사이고 한민족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거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환빠라고 조롱하며 부정하는데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당시 판옥선과 일본군함의 높이차이때문에 일본군이 쉽게 백병전을 못한 이유도 있었고, 왜군의 승선인원은 한척당 70~80명 판옥선은 150~200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래서 혼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고 사상자가 적게나왔다고 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류를 적절히 활용한 이순신장군의 전략이 모두 딱딱 들어맞은 해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도 전국시대에서 승자였던 다들 전투라면 나름 한가닥 했었지만 하필 상대가 인류해전사 GOT급 제독이었으니...
덕수이씨는 자랑스러운 가문입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너같은 찌질이 배신자 같은종자 보다 백배 천배나 더 훌륭하신 나라를위해 생명을 바치신분이시다
그주둥이 다물라 ~
14:36 칠천량해전 설명하시는 목소리에서 기가막힘과 분노가 느껴진다.
300미터 거리를 쇠사슬 설치 한다..그 무게..재련기술..이동수단은..
그냠 이순신 장군님이 해전으로 승전 ..
@정원 오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두께 16mm 짜리 쇠사슬이 1m 당 5kg 쯤 합니다. 근데 영상에서 전문가입네 하시는 분이 450m에 4.5톤 정도 한다고 인터뷰 하는 것부터가 코메디죠. 지름 엄지손가락 정도 굵기의 쇠사슬로 배수량 100톤 되는 세키부네 10대 무게와 울독목 조류 운동량이 만드는 장력을 유지한다는 말이 터무니 없지요. 현대 최신 권양기도 울독목에서 조류 타고 내려가는 세키부네 1대 조차 못 버티고 기둥 뽑힐 겁니다.
쇠사슬사용은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게 정론이라네요ᆢ전문가들이 ᆢ 그제련기술및 무게 ᆢ 단단히 잡아당겨도 결국은 활처럼 휘어지고ᆢ그배들의 무게 등ᆢ 하나의 설 이라고 하던데요 ᆢ워낙 믿지못할 승리라서
기술도 부족하거니와 그만한 양의 철을 구하기도 힘듭니다
거북선 지붕에 철판도 부족해서
실제론 그냥 나무였을거라고 하는판에
영웅님
위대한 대한민국에 당신의 영민함과 용기를 주소서.
타임머신이 있다면 저때로 돌아가서 실제 명량해전 보고싶다.
안됩니다.방관죄입니다.전쟁에 참여하셔야죸ㅋ.극장에서 보십시요
@@동철주-g9p 참천하고는 싶은데 참전하면 시공간이 흐트러져서 안됩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펀드 만들었으니 펀드 구입하면 됩니다.
1구좌 1억 입니다.
출발년도는 2025년 입니다
@@jmc9678 생각보다 저렴하네요~^^구매할께요.
@정원 오 형님은 아마 전생에 거북선 조타수 였을듯합니다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연아, 손흥민 같은 천재 선수들이 바로 이순신 장군의 DNA 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은 당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을 구한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만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한명의 천재가 수천만명을 구하고 먹여살리는 시스템은 결코 좋은게 아님 아직도 수많은 조선인 후손들이 그 천재감투를 쓰려고 서로를 괴롭힌다 이 미개한 문화가 얼마나 한심한지 깨달았으면 한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23전 23승 했는데 천재가 아니야?
게다가 한산도해전과 명랑해전에서 보여준 지략은 일반인들이면 할 수 있겠니? 세계 삼대 제독과 해전에서 이순신의 이름이 있다. 천재 맞거든.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천재도 도망칠 수 있죠.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전라도 전역이 초토화 되었다는 뇌피셜은 어디서 나왔냐? 당시 이순신이 북쪽 어디로 내뺐는데? 명랑해전 후 왜군이 전라도 어딜 초토화 시켰는지 정확히 대봐?
@@고구려백제중국사들 그건 원균 때문이야. 그 놈이 칠천량에서 조선군을 궤멸시키는 바람에 전라도가 초토화된 거지. 이순신을 도망자라 표현한 문건이 전세계 어디에 있는진 몰라도 있으면 한번 가져와 봐라. 너 같은 중증 관심종자의 뇌피셜 찌끄레기 말고.
이순신 장군님 만세!!!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이순신이 과대평가 된 건 맞지만 명장인 건 변하지 않는다ㅋ 군대는 다녀옴?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수군의 역활은 보급차단인데 명량해전으로 인해 보급이 원할하지 않았다는건 분명한 사실아님? 작전상후퇴해서 일본의 승리고 도망자라는건 뭔 논리임? 미드웨이해전도 항모격침후 미군은 후퇴했는데 그럼 일본의 승리고 도망자 미군임?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응 보급이 존나게 원할하게 되어서 겨우 월동준비하려고 충청 전라 점령 지역 버리고 경상도로 후퇴했쥬? 그리고 전라도는 이미 고니시 유키나가가 침범했었고 일본 침략 목표가 전라도만 차지하는거였음? 보급 원할해서 한양까진 졸라게 잘갔나?ㅋㅋ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일본놈 ? 자신있으면 본인이 한국인인걸 까봐? 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치사하게 명나라 군들은 왜군들과 싸우지 않고 멀리에서 구경만 하였지 활도 1방도 못쏘면서 !!
교맙고 고맙습니다.❤🎉
이래서 지도자를 잘만나야한다,(칠천량 원균의패전),
내가 살고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