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위인들은 현대 들어서 많은 추악한 점이 발견되었죠 대표적으로 간디의 경우 이상성욕, 황희의 경우 측근 비리 등등.. 하지만 이순신 통제공은 정말 그 어느곳에서도 한점 부끄럼 없이, 심지어 개인 일기장에서조차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신, 정말 세계 그 어느 명장과 비교해도 손색없으신 정말 위인중의 위인입니다. 그분의 행적을 알면 알수록 내가 지금 역사서를 읽고있는지 신화를 읽고있는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모두 여유되시면 한번 이순신 통제공을 한번 깊이 알아보세요. 정말 소설같은 말도 안되는 전율이 그대들을 휘감으리라 단언합니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사실은 없다. 한산도 전투에서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웠지만 그 이유는 진형이 아니다. 단순히 조수의 흐름이 강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배를 진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한산도가 마지막이다. 그 후의 싸움은 이순신이 모두 패하고 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외국인은 이순신 등 모른다. 관심도 없다. 한국인은 날조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 한국인의 망상과 다른 사실은 날조가 아니다. 사실은 증거를 바탕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망상에 증거는 없다.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3개월 정도의 한산도 해전까지이며, 그 후는 모두 패주하고 있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전혀 없고, 준공한 증거도 없다.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은 것도 토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사실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전한 예이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미역을 먹은 것은 와키자카의 부하이며, 와키자카 본인이 아니다. 와키자카가 이순신을 라이벌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와키자카와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증거는 없다. 일본 측에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거북선은 결함선이기 때문에 준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이런 장수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당시 조정의 행태가 현재 한국의 상황과 별다를 바 없네요. 치열한 세계경쟁에서 살아남을 생각은 않고 집구석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정적을 제거할까에 혈안이 되어 있는 현정부와 여당의 행태를 보면 심히 이 나라의 안위가 걱정이 됩니다. 역사의식을 고취해서 부디 정쟁이 아니라 국민이 바라고 원하고 또 국가가 경쟁력을 가지고 국위를 높여가야 하는 것이 작금의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 생각됩니다!!!
외국인은 이순신 등 모른다. 관심도 없다. 한국인은 날조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 한국인의 망상과 다른 사실은 날조가 아니다. 사실은 증거를 바탕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망상에 증거는 없다.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3개월 정도의 한산도 해전까지이며, 그 후는 모두 패주하고 있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전혀 없고, 준공한 증거도 없다.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은 것도 토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사실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전한 예이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미역을 먹은 것은 와키자카의 부하이며, 와키자카 본인이 아니다. 와키자카가 이순신을 라이벌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와키자카와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증거는 없다. 일본 측에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거북선은 결함선이기 때문에 준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으랏차차-m9z 최초의 한글 사전은 일본이 편찬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철기와 청동기는 조선보다 먼저 중국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토기는 일본의 아오모리가 최초로, 수천년 후에 한반도에 전해졌다. 불교와 한자는 일본의 속국인 백제를 경유하여 중국 대륙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지만, 그들은 조선이 만든 것은 아니다. 덧붙여 한반도의 백제왕족은 신라에 의해 전원 죽었으므로, 백제는 일본인의 조상의 일부이지만, 현재의 한국인의 조상은 아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한국인의 조상이 일본에 문화적 영향을 준 사실은 전혀 없다.
관료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죠, 단 선조는 절대 인정을 안 했습니다. 왜냐 이 밴댕이 소갈머리는 이순신에게 항상 열등감을 느끼며 경계 했기 때문이죠. 솔직히 백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가서 중국까지 넘어 갈려고 했는데 명나라에서 거부해서 못 넘어간 못난 왕이 볼 때는 이순신의 업적과 칭송은 듣기 싫었던 거죠.
세종대왕 다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님~~~ 세계 해군들의 교과서가 되고있는 이순신 장군님의 전략과 전술... 그보다 더, 그가 장군으로서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 병사들을 귀히 여겄는지는 난중일기에 기록되었다... 잠들기전 항상 일기를 쓰셨는데, 그 중에는 그 날,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한명의 해군 부하들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했다...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않되는 그 분의 지략과, 과학적 전술과, 그리고... 사랑의 마음이다...
일본인은 괴수가 실존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고질라 영화를 즐길 수 있지만, 한국인은과 픽션과 역사적 사실을 구별할 수 없는 것 같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3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처음 2개월 정도의 한산도 해전까지이다. 그 후는 모두 패주하고 있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나 난중일기 등에서도 분명하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timesun630 이순신의 경력은 한국인에 의해 날조되고 있다. 이순신이 23전 23승이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이용해 일본군과 싸웠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거짓말이다.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일본군의 무장이 완료되지 않은 한산도 전투까지 2개월뿐이며, 그 후 6년간은 모두 패전이었다. 이는 조선의 정식 역사기록인 선조실록과 이순신의 기록인 난중일기에 의해 분명하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말도,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도, 와키자카의 후손이 미역을 먹는다고 하는 것도,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고 하는 것도, 모두 한국인 가 만든 거짓말이다. 만약 그들이 진실이라면, 일본어의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지만, 전혀 없는 것이다. 당신은 와키자카가 한국어를 말했다고 주장하는가? 실로 바보 같은 이야기이다.
@@timesun630 이순신이 패한 싸움과 그것이 기록된 문서를 제시한다. 한국인은 스스로 확인하십시오. 1.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2.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3.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4.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달고 명국으로부터 인질을 받은 뒤 철퇴하려고 한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명사 등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그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으로 넘어가기전에는 일본은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았다.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소 고대국가가 형성됐다.일본역사는 백제가야 역사이고 한민족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했으며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조선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환빠라고 조롱하며 부정하는것은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전한 예이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미역을 먹은 것은 와키자카의 부하이며, 와키자카 본인이 아니다. 와키자카가 이순신을 라이벌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와키자카와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증거는 없다. 일본 측에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거북선은 결함선이기 때문에 준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그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으로 넘어가기전에는 일본은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았다.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소 고대국가가 형성됐다.일본역사는 백제가야 역사이고 한민족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했으며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조선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환빠라고 조롱하며 부정하는것은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전한 예이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미역을 먹은 것은 와키자카의 부하이며, 와키자카 본인이 아니다. 와키자카가 이순신을 라이벌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와키자카와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증거는 없다. 일본 측에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거북선은 결함선이기 때문에 준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수시아-n6g 내가 쓰는 내용은 선조실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조선의 정식 역사이다. 일본이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한 것, 민중이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한 것, 선조가 왕궁에서 도망친 것, 민중이 선조 한 줄에 돌을 던진 것, 민중이 왕궁 이나 중요한 건물에 방화한 것, 이순신이 출격 명령에 반해 병사에게 떨어진 것 등이 그려져 있다. 한편, 거북선의 출격 기록은 없다. 또 중국의 명사도 중요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이 시작된 이래 7년(명국에서는) 10만 장병을 상실하고 백만 병량을 노비하더라도 중조(명국)와 속국(조선)에 승산 는 없고, 단지 칸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사망하기에 이르러 난연은 종식했다.」라고 쓰고 있다. 즉, 현재 한국인이 가진 이순신의 이미지는 대부분이 날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은 괴수가 실존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고질라 영화를 즐길 수 있지만, 한국인은과 픽션과 역사적 사실을 구별할 수 없는 것 같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3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처음 2개월 정도의 한산도 해전까지이다. 그 후는 모두 패주하고 있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나 난중일기 등에서도 분명하다.
@@asahn2110 ‘김기현 창립 축하’ 단체 “광화문광장 세종·이순신에 문제의식 못 느끼면 우파 아냐” “이순신은 대한민국 사람 아냐 동상, 박물관·기념관에 있어야” ‘광화문 세종·이순신 동상 이전’ 주장 비판에 “개돼지들에겐 어려운 얘기” “세종이란 인물 부정한 건 아냐 공화국 광장엔 공화국 인물 둬야” 이미 대한민국 보수 우파가 먼저 이순신 장군님을 부관참시 하고 있습니다 꺼억~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그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으로 넘어가기전에는 일본은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았다.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소 고대국가가 형성됐다.일본역사는 백제가야 역사이고 한민족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했으며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조선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환빠라고 조롱하며 부정하는것은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뭘봐-n9c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은 쓰지 않는다. 역사는 가능한 한 많은 증거를 모아 비교 검토하여 신뢰성을 높여가는 것이지만, 조선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중국 역대 왕조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자랑할만한 역사가 없다. 그 때문에 증거를 검토하는 과정을 한국인은 모르는 것이다. 자신에게 편리한 망상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인은 노벨상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거북선이 일본군과의 싸움에 출동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현대의 해석에 따르면 거북선은 설계 불량이었다. 밀폐 구조 때문에 대포를 쏘자 선내에 검은 연기가 충만해 병사가 질식했다. 가로 폭에 대해 세로가 짧기 때문에 고무 보트처럼 속도가 느렸다. 확실히 거북이었다. 고속의 일본선에 옆에서 충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갑판이 바늘처럼 보이기 때문에 돛을 칠 수 없다. 인력만으로는 장거리 항행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순신이 일본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처음 2~3전뿐이다. 일본군의 배가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살로 방화하는 작전이 유효했다. 그러나 일본이 무장해 배와 곶에 대포를 장비하면 조선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후의 이순신은 연전 연패였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인의 망상은 의미가 없다.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전한 예이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미역을 먹은 것은 와키자카의 부하이며, 와키자카 본인이 아니다. 와키자카가 이순신을 라이벌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와키자카와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증거는 없다. 일본 측에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거북선은 결함선이기 때문에 준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우리는 왜 충무공을 기리는 축제나 행사를 국가적 차원으로 펼치지 않을까요? 후손들이 신격으로 숭배할 수 있도록 기념일을 정해서 공휴일로 해야죕 됩니다 한글날과 세종날도 확대승격합시다 위정자들이 깨닫지 못하면 그들보다 현명한 국민들이 뜻을 세우면됩니다 국민들의올바른행동이 모이면 위대한 힘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ㅋ 아직도 조선시대에 살고 있구만. 현시점에서의 복잡한 동맹관계를 생각해볼때 아니냐? 그럼 중국을 믿을래? 차라리 미국끼고 일본하고 중국 견제하는게 낫지 않을까? 일본을 좋아하는게 아니라고!!! 곰곰히 생각해봐라. 니 생각은 뭔데? 러중일북 사이에 낀 이상황에서 어떤게 나은지??? 현실과 동떨어진 원론적인 얘기할거면 꺼져라.
와키자카는 일본의 제1선봉대장으로 사기가 대단하며 힘 또한 강하며 불멸의 이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도도다카도라도 일본의 장수며 명량에서 볼수있다. 고니시는 성격이 날카롭다. 영화에서 그는 자기의 공을 가로챌생각인가 라고 말하며 와키자카와 친구사이가 먼 인물이다.
한반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불세출의 성웅 이순신장군님 감사합니다. 당신과 조선수군의 노고로 인해서 현재 제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도 패배하고나서 그 기록과 이순신을 연구하여 세계강국으로 성장하는데 거름으로 썼다는 것을 보면 무시할 수 없는 민족입니다. 우리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불세출의 영웅이자 하늘이 내리신 이순신 장군.
그의 나라를 향한 충성심과 백성을 생각하는 애민정신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것이다.
당신 덕분에 제가 이렇게 좋은 세상을 살고 있네요.. 늘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박정희는요??
@@레니-j2r whRk
@@레니-j2r 더 감사
그대 지킨 나라
족같이 변해 무슨 말을 하리오
우리역사에 가장 위대한 이순신 장군님.
언제나 죽음의 사지를 뚫고 사생결단을
감행한 투지.천재적인 적진 상황 파악 과 적중.저절로 감동적인 것이 머리숙여
집니다.
대한민국 대한국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 ❤ ⬆ 👍
조선 수군 (대한민국 해군) 분들 ❤ ⬆ 👍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 👍
감사합니다. 이순신 장군님 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합니다
멋찌십니다‥
23.(♡
정말 존경합니다. 제일 손꼽는 위인은 이순신 장군입니다... 너무 감사하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성웅 이순신장군님 꿈에서 봬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존경합니다 장군님, 덕분에 우리민족이 존재합니다.
로또 타임이네요
기억을 해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후손들은 고생 안했으면 좋겠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을게요
12척의 배로 300척의 배를 침몰시킨 영웅 ㅋㅋㅋㅋ
민족의 성웅이라 추앙받고 대대손손 업적을 기리고 있지만, 개인으로서는 인간으로서는 한없이 힘든 삶을 사셨던 분이네요.
이순신 장군 감사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빈틈이 없을까 성웅대단하신분
그냥 눈물이나네요 이순신장군님
정말 사랑합니다
다른 위인들은 현대 들어서 많은 추악한 점이 발견되었죠 대표적으로 간디의 경우 이상성욕, 황희의 경우 측근 비리 등등..
하지만 이순신 통제공은 정말 그 어느곳에서도 한점 부끄럼 없이, 심지어 개인 일기장에서조차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신, 정말 세계 그 어느 명장과 비교해도 손색없으신 정말 위인중의 위인입니다.
그분의 행적을 알면 알수록 내가 지금 역사서를 읽고있는지 신화를 읽고있는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모두 여유되시면 한번 이순신 통제공을 한번 깊이 알아보세요. 정말 소설같은 말도 안되는 전율이 그대들을 휘감으리라 단언합니다.
정말 맞는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인은 세계에서 아무도 흥미가 없는 한글로 국내에서만 거짓말을 증폭시켜 왔지만, 자동 번역이 발달한 현재 한국인의 거짓말은 세계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다.
왜 한국인은 거짓말을 하는가? 대답하십시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사실은 없다. 한산도 전투에서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웠지만 그 이유는 진형이 아니다. 단순히 조수의 흐름이 강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배를 진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한산도가 마지막이다. 그 후의 싸움은 이순신이 모두 패하고 있다.
충무공,수군통제사
@@hiroono1 뭐야 너 여기에도 있었냐? 그럼 왜 도요토미가 죽을 장장 6년동안 선조를 잡지 못하고 니네나라 일본으로 빤쓰런했는지 설명하시오!
이순신장군님은진짜 하늘이 보내준 인물이다 그러지않고서야 이럴수가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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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일본사람델번
대한민국의 절대적 영웅 이순신 장군님!!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일본인은꺼져라
남의나라침략해서
임진왜란일으켰다가
바다에서참패한
니조상들의부끄러운과거를
어떻게든은폐하고
깎아내리려고발악하지마라
애초에 이순신 장군님은 급이 달랐음~전투 시작하면 적을 괴멸시키고 적장을 잡을 계획까지 세워두심~적당히 이기는게 없음!
2부작 영상 합본으로 업로드 해주셨네요 예전에 본 영상인데
다시 보니 좋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7
정복자 징기스칸보다 침략자들에 맞서 임금에게 버림받았을 지언정 적과 끝까지 싸워 백성을 지킨 이순신장군이 진짜 영웅이다! 이분과 징기스칸을 비교하지 말라!
외국인은 이순신 등 모른다. 관심도 없다.
한국인은 날조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 한국인의 망상과 다른 사실은 날조가 아니다. 사실은 증거를 바탕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망상에 증거는 없다.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3개월 정도의 한산도 해전까지이며, 그 후는 모두 패주하고 있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전혀 없고, 준공한 증거도 없다.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은 것도 토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사실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대한민국의영원한 영웅이신충무공
이순신장군님의업적과정신을되새기어
대한민국의 젋은이들과국민들모두가
다시힌번더정신을되새기어 현재의어려운난관들을지혜롭고슬기롭게
타파해나가야합니다~~
이순신장군님~만세입니다~!!!👊🚤🚢🙌
통제사 이순신 장군님은 진짜 하늘이 낸 사람이다. 그날에 있어 이순신 장군님이 못 막았다면 조선은 우리의 민족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면 이순신 장군님은 정말 하늘이 우리 민족 나라를 구해주라 내주신 분 같다. 내가 제일로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님 만세!!
더욱발전되고 일본이랑 같이 황금시대를 맞이 하지않앗을까요..?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전한 예이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미역을 먹은 것은 와키자카의 부하이며, 와키자카 본인이 아니다. 와키자카가 이순신을 라이벌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와키자카와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증거는 없다. 일본 측에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거북선은 결함선이기 때문에 준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agua3156 그렇게 이루어진 황금시대를 살 바에는 그냥 지금의 헬조선으로 살고싶네요
@@-agua3156 요즘 20대 경상도 가축들 생각들 안락사 시켰음 좋겠다
지구 역사상, 인류 역사상 최고의 수군 사령관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님 존경합니다
정치인들도 이순신 장군님을 스승으로 정치해라!
이런 장수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당시 조정의 행태가 현재 한국의 상황과 별다를 바 없네요.
치열한 세계경쟁에서 살아남을 생각은 않고 집구석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정적을 제거할까에 혈안이 되어 있는 현정부와 여당의 행태를 보면 심히 이 나라의 안위가 걱정이 됩니다.
역사의식을 고취해서 부디 정쟁이 아니라 국민이 바라고 원하고 또 국가가 경쟁력을 가지고 국위를 높여가야 하는 것이 작금의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 생각됩니다!!!
외국인은 이순신 등 모른다. 관심도 없다.
한국인은 날조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 한국인의 망상과 다른 사실은 날조가 아니다. 사실은 증거를 바탕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망상에 증거는 없다.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3개월 정도의 한산도 해전까지이며, 그 후는 모두 패주하고 있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전혀 없고, 준공한 증거도 없다.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은 것도 토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사실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전무후무한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님 항상 진심으로 존경합니다.하늘에서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세종대왕도, 정조대왕도 등 따습고 배불리 먹었다. 그외
에도 나라를 지키고 영웅들이 무수히 많다. 이순신장군이야
말로 별지원도 없이 외롭고 배고
픔, 모략, 무능한 임금, 시기와
질투속에서도 나라를 지켰고
난중일기라는 위대한 기록을
남겼으니 가히 영웅이다.
대한민국 5000년 역사이래 유일무이한 영웅입니다
한국인의 정신적 표상 이순신 장군. 최악의 조건에서 최상을 지향하는 그의 깊은 고뇌의 시간들에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도(세종), 이순신은 대한민국 올 타임 레전드
감사합니다.대한민국을끝까지
포기하지않으시고 지켜내주신
우리나라모든선조님들~~~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전한 예이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미역을 먹은 것은 와키자카의 부하이며, 와키자카 본인이 아니다. 와키자카가 이순신을 라이벌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와키자카와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증거는 없다. 일본 측에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거북선은 결함선이기 때문에 준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hiroono1일본인이 왜 여기와서 부채질?
@@으랏차차-m9z 최초의 한글 사전은 일본이 편찬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철기와 청동기는 조선보다 먼저 중국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토기는 일본의 아오모리가 최초로, 수천년 후에 한반도에 전해졌다. 불교와 한자는 일본의 속국인 백제를 경유하여 중국 대륙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지만, 그들은 조선이 만든 것은 아니다. 덧붙여 한반도의 백제왕족은 신라에 의해 전원 죽었으므로, 백제는 일본인의 조상의 일부이지만, 현재의 한국인의 조상은 아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한국인의 조상이 일본에 문화적 영향을 준 사실은 전혀 없다.
@@Oimk 삼한 - 고려 - 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으로 역사를 계승 했죠. 혹시 초등학교 졸업을 못하셔서 국사라는 과목을 배운적이 없으신가요 보네요.
조선 장수로서 진짜 ㅈ같은게 적군도 이순신을 인정하는데 군주와 관료들한테는 인정 못받고 바다에서 전사하심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그쪽에서는
부디 평안하시길🙏
관료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죠, 단 선조는 절대 인정을 안 했습니다. 왜냐 이 밴댕이 소갈머리는 이순신에게 항상 열등감을 느끼며 경계 했기 때문이죠. 솔직히 백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가서 중국까지 넘어 갈려고 했는데 명나라에서 거부해서 못 넘어간 못난 왕이 볼 때는 이순신의 업적과 칭송은 듣기 싫었던 거죠.
@@seromekim7798 꺼져
@@seromekim7798 너는 누구냐
일본인인가 니말이 사실로 보이는데 좀더 자료를 찾아봐야겟다
암튼 긴글 매우 잘봣다
감탄함
우리같으면 상상도 못할듯. 적군의 장수를 연구해서 훗날 본인들 전쟁전술로 쓰다니...무서운 나라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유다.
모방 말고는 할줄 모르는 족속들임
무서운 넘들입니다. 우리가 일본 장수를 존경한다. 디질일이지요~~~
이순신 장군은 한마디로 순수한 애국 충정의 천재
상대방 일본 장수마저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이순신.. 명나라 진린이란 장수는 이순신에 매력에 빠져 자기나라에 데리고 갈려고 사정사정했다지요
이순신장군님 덕분에 일본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감사합니다......ㅠ
세종대왕 다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님~~~
세계 해군들의 교과서가 되고있는 이순신 장군님의 전략과 전술...
그보다 더, 그가 장군으로서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 병사들을 귀히 여겄는지는 난중일기에 기록되었다...
잠들기전 항상 일기를 쓰셨는데, 그 중에는 그 날,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한명의 해군 부하들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했다...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않되는 그 분의 지략과, 과학적 전술과, 그리고... 사랑의 마음이다...
일본인은 괴수가 실존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고질라 영화를 즐길 수 있지만, 한국인은과 픽션과 역사적 사실을 구별할 수 없는 것 같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3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처음 2개월 정도의 한산도 해전까지이다. 그 후는 모두 패주하고 있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나 난중일기 등에서도 분명하다.
난 이순신이 최고라고 생각함
세종 이순신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음..사실상 우리 한글도 임진왜란때 조선이 먹혔다면 지속되기 힘들었을거라...
@@Haggerty21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hiroono1 일뽕ㅎㅇ
불멸 충무공 이순신 장군....우리는 절대 잊으면 안되고 임진 정유 7년전쟁을 잊었기에 결국 식민지가 되었다 절대로 다시 이와같은 잘못을 절대로 겪으면 안된다 절대로.....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진짜 날조 심하다 정호야 ~~~ 어떤 게 날조인지를 판단은 누가 어떻게 하는데 정호야 ㅋㅋㅋㅋ 수많은 일본 자료를 무시하면서 니가 사랑하는 일본을 바보만들지 마라 일본도 다 뇌가 있어서 만든 자료다 소수 날조 자료만 수집하니 날조지 당연히 정호야 ㅋㅋ
@@hiroono1 그대는 이순신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더 공부해라
@@timesun630 이순신의 경력은 한국인에 의해 날조되고 있다. 이순신이 23전 23승이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이용해 일본군과 싸웠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거짓말이다. 이순신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일본군의 무장이 완료되지 않은 한산도 전투까지 2개월뿐이며, 그 후 6년간은 모두 패전이었다. 이는 조선의 정식 역사기록인 선조실록과 이순신의 기록인 난중일기에 의해 분명하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말도,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도, 와키자카의 후손이 미역을 먹는다고 하는 것도,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고 하는 것도, 모두 한국인 가 만든 거짓말이다. 만약 그들이 진실이라면, 일본어의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지만, 전혀 없는 것이다. 당신은 와키자카가 한국어를 말했다고 주장하는가? 실로 바보 같은 이야기이다.
@@timesun630 이순신이 패한 싸움과 그것이 기록된 문서를 제시한다. 한국인은 스스로 확인하십시오.
1.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2.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3.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4.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달고 명국으로부터 인질을 받은 뒤 철퇴하려고 한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명사 등
진심 영상 만드신 감독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정말고생하신게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그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으로 넘어가기전에는 일본은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았다.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소 고대국가가 형성됐다.일본역사는 백제가야 역사이고 한민족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했으며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조선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환빠라고 조롱하며 부정하는것은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kim7798 정진석이 요즘 많이 이슈가 되고있죠?
친일 대대로 세뇌되어 자라온 애들은
답도 없다라는 역사학자의 말이 떠오르네요.
결론은 나가 뒈,..지시라는 얘깁니다.
@@seromekim7798 꺼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문무겸비, 용맹과 지략, 덕망을 모두 가진 현장(賢將) 그자체죠.
일찌기 과거에서 처음으로 급제했을 당시 이경록과 둘이서 무쌍을 찍어서 여진족을 무찌른 기록 있음.
황당하게도 그 일 때문에 이일이 이순신을 죽이려고 발악했다는 것.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전한 예이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미역을 먹은 것은 와키자카의 부하이며, 와키자카 본인이 아니다. 와키자카가 이순신을 라이벌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와키자카와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증거는 없다. 일본 측에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거북선은 결함선이기 때문에 준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이순신 장군만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그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으로 넘어가기전에는 일본은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았다.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소 고대국가가 형성됐다.일본역사는 백제가야 역사이고 한민족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했으며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조선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환빠라고 조롱하며 부정하는것은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kim7798 이러고 있는 너의 삶이 내가 더 창피하다 부끄러운 인생을 살고 있구나
@@seromekim7798 어쩌라고?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전한 예이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미역을 먹은 것은 와키자카의 부하이며, 와키자카 본인이 아니다. 와키자카가 이순신을 라이벌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와키자카와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증거는 없다. 일본 측에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거북선은 결함선이기 때문에 준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이나라 누가 지켜 준 지도 모르고 아직도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동인 서인 이렇게 분열 되어서야 우째 살라는지 사방 천지지에 늑대들인데 국민 여러분 온고이지고하시고 정신 차리십시다
충무공!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존경하는 인물 입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고생한다 ㅋㅋㅋㅋㅋㅋ
@@user-sq7xm6ep8y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답하십시오.
@@hiroono1 당신은 뭔데 당신이야말로 역사 날조를 퍼트리고 다니냐 다른건 몰라도 한국말 써가면서 이순신장군은 건들지 마라 무슨 한국에 억화심정있나 조선족이세요??
@@수시아-n6g 내가 쓰는 내용은 선조실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조선의 정식 역사이다. 일본이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한 것, 민중이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한 것, 선조가 왕궁에서 도망친 것, 민중이 선조 한 줄에 돌을 던진 것, 민중이 왕궁 이나 중요한 건물에 방화한 것, 이순신이 출격 명령에 반해 병사에게 떨어진 것 등이 그려져 있다. 한편, 거북선의 출격 기록은 없다.
또 중국의 명사도 중요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이 시작된 이래 7년(명국에서는) 10만 장병을 상실하고 백만 병량을 노비하더라도 중조(명국)와 속국(조선)에 승산 는 없고, 단지 칸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사망하기에 이르러 난연은 종식했다.」라고 쓰고 있다.
즉, 현재 한국인이 가진 이순신의 이미지는 대부분이 날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적의 장수였지만
존경받을부분을 수용하는 정신.. 👍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오타니에게 열광하고 있다.
세계의 역사적영웅들은 그냥 정복영웅들이지만
충무공께서는 천재적 전략전술 뿐만아니라
백성들을 자기몸과같이 사랑한 오히려
영웅이란 말보다 성인이란말이 더어울리는
세계의 영웅과 성인이 합쳐진 진정한 성웅이란
말이 어울리는 세계의 영웅중에 최고의
영웅이십니다!!
일본인은 괴수가 실존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고질라 영화를 즐길 수 있지만, 한국인은과 픽션과 역사적 사실을 구별할 수 없는 것 같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3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처음 2개월 정도의 한산도 해전까지이다. 그 후는 모두 패주하고 있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나 난중일기 등에서도 분명하다.
하늘에서 보내주신 이순신 장군님의 일생을 보면 눈물이 나옴. 그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적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의 임금과 조정 대신들 이였다.
바다에서 보내주셧을수도 용황님께서...
ㅓ
ㅗ
미국에서 거 북선 발견 ,ㅡ 검 색
@정원 오
어메이징 그레이스,ㅡ 검 색
친 일 파,미국, 왜 넘 따까리 여기까지 왔나??
여야 한편 증거? ,ㅡ 다 음 검 색
새 마을 비서관 이병화 박사 유세 증언 연해주,ㅡ 다 음 검 색
이순신장군님의
인재가 지금은 알수가없네 일본하고 전투해야 알수있으니...
지구 역사상 전무 후무 제독 이순신 장군
국가 지원만 있었더라면 아니 모함과 백의종군 무능한 선조 질투만 없었더라면
칠년 전쟁은 없었다
뽕 그만드셔요.육지에서 개털렸는데 혼자서? 영웅판타지 그만보세요
@@sssu663
육지에서개털린게
이순신이냐?
국뽕도문제지만
너처럼자기나라비하하는
사람도문제다
아니면일본인인가?
멍미 육지가 그러니더욱 해상 지원을끈어야되지 식량 보급 진심 모름 알고나 달고나 드시거 하세요
@@sssu663 육지에서 털리고도 버틴게 수군덕분인데… 거기다가 명나라 지원군까지.
성웅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편히 쉬세요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너무 곧아 어리석다고 해야 하나요?
이런 경우는 이성계와 박정희의 유동성이 일부만 있었어도 어차피 지원도 받지 못하는 수군인데
조정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을 건데~
@@파랑도-v3i본인 말에 앞뒤가 마치 않은 것은 알고 있는지. 엉뚱한 지시 안 듣다가 강등 고문당했는데..
@@파랑도-v3i 뭐래니 이 돌머리는?
댓글에 이상한 사람이 좀 많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감히 비하할 수도, 비하해서도 안 되는 분이거늘...
한국 보수 입장에서는 한일병합을 400년 늦춘 민족의 반역자일뿐입니다. 이순신만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세계 2위 국가 인데 이순신 때문에 그걸 못했다는게 뉴라이트 쪽의 정론입니다.
그런 넘들은 돌로 때려죽여야.. 감히 성웅을..
한국사람들이아니라서 그런거에요
비참한 전쟁보다 굴종의 평화가 낫다는 민주당의 이모 정치인을 이순신 감독이 보셨다면 바로 참수를 명하셨을듯
@@asahn2110 ‘김기현 창립 축하’ 단체 “광화문광장 세종·이순신에 문제의식 못 느끼면 우파 아냐”
“이순신은 대한민국 사람 아냐
동상, 박물관·기념관에 있어야”
‘광화문 세종·이순신 동상 이전’ 주장 비판에 “개돼지들에겐 어려운 얘기”
“세종이란 인물 부정한 건 아냐
공화국 광장엔 공화국 인물 둬야”
이미 대한민국 보수 우파가 먼저 이순신 장군님을 부관참시 하고 있습니다 꺼억~
일본은 임진왜란 정유재란때 30만 군사를 보냈지만 이순신과의 해전에서만 10만이 사망하였고, 우리 수군은 200명이 사망하였음.
한산대첩때 왜는 9천명 사망 우리 수군은 3명 사망!!!
머가리 ㄱㅊ?혹시 생각이라는거 하시나요?
이순신장군님이 니친구냐
뭐 이순신?
@@yalro4576 왜 이름부르면 안됨?ㅋㅋㅋ이런걸 믿는 지능으로 나대시면 곤란해요^^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더 신기해요. 배 한척도 안 부서지는 것고 신기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그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으로 넘어가기전에는 일본은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았다.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소 고대국가가 형성됐다.일본역사는 백제가야 역사이고 한민족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했으며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조선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환빠라고 조롱하며 부정하는것은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볼 때 마다 눈물이 납니다 무능한 임금 운룡 같은 신하 조선의 역사가 한스럽네요 그 한스러운 사농공사!!!!!
사농공상
충무공 직계 가문은 국가적으로 보전해야함. 일제강점기에도 3대에 걸쳐 항일운동에 뛰어든 역사적 국가적으로 위기때마다 충무공의 정신으로 목숨바친 한반도의 수호가문임.
지금은 이상해졌음~
거의 난장판 집안~~
하늘의 명령으로 난세에 나라를
구원하러 왔다가 끝나자 하늘로 돌아간 성웅 이순신
의심많은 선조~
훌륭한 장수를 모함하고~~
조선의 위기가 있을때 나타나셔서 위기를 구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거늘 어찌 신이 아닐수가 있습니까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이런 애들은 과연 살 자격이 있는지 궁금하다
@@뭘봐-n9c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은 쓰지 않는다.
역사는 가능한 한 많은 증거를 모아 비교 검토하여 신뢰성을 높여가는 것이지만, 조선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중국 역대 왕조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자랑할만한 역사가 없다. 그 때문에 증거를 검토하는 과정을 한국인은 모르는 것이다. 자신에게 편리한 망상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인은 노벨상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거북선이 일본군과의 싸움에 출동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현대의 해석에 따르면 거북선은 설계 불량이었다. 밀폐 구조 때문에 대포를 쏘자 선내에 검은 연기가 충만해 병사가 질식했다. 가로 폭에 대해 세로가 짧기 때문에 고무 보트처럼 속도가 느렸다. 확실히 거북이었다. 고속의 일본선에 옆에서 충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갑판이 바늘처럼 보이기 때문에 돛을 칠 수 없다. 인력만으로는 장거리 항행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순신이 일본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처음 2~3전뿐이다. 일본군의 배가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살로 방화하는 작전이 유효했다. 그러나 일본이 무장해 배와 곶에 대포를 장비하면 조선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후의 이순신은 연전 연패였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인의 망상은 의미가 없다.
@@hiroono1 부모님 건강하시냐
@@디디밥 일본놈이라서 ㅂㄷㅂㄷ되는듯..ㅋㅋㅋ
우리나라 최고의 수호자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 23전23승 이건 그누구도 할수없다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전한 예이다. 덧붙여 와키자카가 미역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미역을 먹은 것은 와키자카의 부하이며, 와키자카 본인이 아니다. 와키자카가 이순신을 라이벌로 인정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와키자카와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증거는 없다. 일본 측에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거북선은 결함선이기 때문에 준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하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후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
나의 전생
홀로 백성과 함께 나라를 구하다
장군님의 학익진 전법에 속수무책 당했지 지금도 사과할 줄 모르는 저런놈들
감사합니다 이순신 장군님
임진왜란을 막기위해 하늘에서 내려보내주신 한민족의 수호자..
그럼머함 어차피 일제감정기 오는디 ㅋㅋ 어차피일본속국인데 뭐
@@쑥-e1r 결과적으로 그렇게됐지만 어쨌든 손놓고 약탈당하고 죽임당하는거 보다는 끝까지 싸워봐야죠. 님은 그럼 도둑들어오면 그냥 고대로 내어주실건가요?
@@수툭 막을거면 다신 침략못하게 막든가 ㅋㅋ 그냥 일본보다 못함 우리나라는
ㅋㅋㅋㅋㅋ 머지 이 패배자는. 안말릴테니 평생 그렇게 패배감에 쩔어 살아라^^. 임란 이후 실제 일본이 공식적으로 쳐들어 온적이 없었고, 한일합병은 이순신장군이 돌아가시고 300년뒤에 일인데 그것까지도 막았어야 했다고?ㅋㅋㅋㅋ
너 초딩아니면 중딩이지?
@@수툭 ㄴㄴ 그냥 팩트임 내가
전설이며 레전드
불패의 영웅이라고 할게 아니라, 단 한번도 져서는 안되는 비운의 장수라고 해야겠지!
위기의우리나라를 구한 전라도분들과 이순신장군님 존경합니다.
한국역사에 길이길이남을 인물들은 호위호식으로 나라를 위태롭게 한 왕들이 아니라 위험에 처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친 인물들을 발굴하여 역사에 써야합니다.
최고의 인물!!!
이 순 신 장군 존경합니다!
나레이션 중간중간에 연도를 틀리게 말합니다 ㅠㅠ 1592년4월 임란시작을 1590년으로 발음합니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
세계에 부끄러운게 우리는 맨날 이순신만 내세우고 그외는 아무도 없는거같다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조선을 침략해서
우리 민족을 죽인 죄에 대해 반성은 안하고
오히려 기념을 하다니
모두 바다에 수장되어 없어져야 할 놈들..
임진왜란 전쟁통에 그 많은 군량미와 전쟁 준비를 어떻게 했을까 궁금했는데 호남의 넓은 옥토와 호남인이 뒷받침해 주었구나!
성우님.최고
일본을 미워하는 것 보다 우리를 더 미워하고 더 강해지자!
자유민주주의대한민국.국민나도너도할것없이이순신장군정신을본받읍시다.부국강정을위해서
부국강병
국민들은 되는데 정치인 들은 과연 될까요
시간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을 우리에 !!!!!!!
가슴아프게
4월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입니다!
징비록에서 이순신을 가리켜 무너지는 하늘을 홀로 한손으로 막아낸 사람이라고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이건 어디서 나온 이야기지
@@뭉달-i1c 선조실록이다. 조선의 정식 역사서이다. 한국인이 교육받은 내용과는 다르겠지만, 이곳이 역사의 진실이다.
@@hiroono1 흠
@@hiroono1 이순신에게 질투한 선조가 명나라진린제독 진린에게 하소연한말을두고 실록에나온말이라고요? 실록과 어록을 구분좀하시길...
임진왜란은 1592년에 일어났는데 해설자는 자꾸 1590년이라고 하네요.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7:37, 11:55)
국민 여러분! 다시 한번 정확히 들어보십시오. 😵💫🧐
저도 그렇게 들려서 잘못들었나 여러번 들어봐도 그렇게들리네요
중세 근대를 통틀어 훌륭한 전과를 올린 수 많은 제독과 장군들이 위인과 영웅으로 불리며 칭송받고 있지만 중앙정부의 지지없이 몇몇 전투는 제대로 된 함대도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룬 사람은 과거에도 없지만 앞으로도 없을것이다.
Thank you so very much.
신기해요 전투그림이 남아 있는것이
세계사 해전사령관들 중 원탑일 듯
1.28.00 더 이상 뮬러 설곳이 없다. 나는 명량의 급류에 모든 것을 걸었다. 아 성웅 이순신장군님!!!
나라를 지키는건 말로 평화를 외치는게 아님을
과거로갈수있다면 유일하게 만나보고싶은분
자꾸만 눈물이 나요
광화문에 늠름하게 서있을 자격이 있습니다
? 자격? 평가한다는것 자체가 😢
난세영웅
이순신~~~~짱
세계 海戰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불멸의 이순신.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 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항상 침략에만 몰두해있는 일본 게다짝 크레이지들..쓴글보니 완전 제맘대로 날조했네 잘알지도못하면 말이나말지 흠칫뽕😡
@@hiroono1
일본놈아애쓴다
남의나라침략했다가
바다에서참패한니조상들의
부끄러운과거
은폐날조하느라애쓴다
English subtitles please!
와카자카 야스히로? 일본에서 대단한 영웅이었지만 이순신 앞에서는 태풍 속에 먼지 하나 정도였다.
우리민족 영웅중에 남바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긴칼을 옆에 차고 수루의 홀로 앉아~~~👈
우리는 왜 충무공을 기리는 축제나 행사를 국가적 차원으로 펼치지 않을까요?
후손들이 신격으로 숭배할 수 있도록 기념일을 정해서 공휴일로 해야죕
됩니다
한글날과 세종날도 확대승격합시다
위정자들이 깨닫지 못하면 그들보다 현명한 국민들이 뜻을 세우면됩니다
국민들의올바른행동이 모이면 위대한 힘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세종날은 있습니다. 이름이 다를뿐.. 스승의날
도고제독이 존경하는사람이 이순신이라고한건아는데 그때만해도 이순신관련자료 일본에 많았다는뜻이네 일제강점기때 거의다감춘듯...
대한민국의 슈퍼스타. 아이들 역사교육을 이순신 장군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저~ 고조선부터 시작할게 아니라..
1.51.00 결코 그냥 보낼수는 없다!!! 아 성웅 이순신장군님 고맙습니다!!!
이순신장군ㆍ영웅이세요ㆍ나라를ㆍ위해열심히싸우셨어요
이순신장군이바다를ㆍ지켜내시고ㆍ일본군과의전투에서ㆍ밀렸으면은ㆍ조선은ㆍ다일본에ㆍ넘어갔어요ㆍ조선ㆍ수군이일본ㆍ수군을ㆍ압섰어요😅😊❤
😂😊🎉❤😮
❤😂🎉
😊😮❤😂😊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수고하세요 🖐🖐🖐👍👍👍🎊🎊🎊🎊🎊🎊🎊💘
이순신 : 왜는 간사하기 짝이 없어 신의를 지킨적이 없다.
그들은 또다시 재침공 할것이다.
우리는 왜 일본과 동맹이자, 일본군과 훈련을 하는 지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죠.
애초에 왜 한국군이 항일한 역사가 거의없는지도요.
한중러일 여기서 일본을 저버린다면 한국은 생존할 수 있을까요? 변절된 반일감정은 버리고 자유민주주의 진영으로 미국과 같은 우방국과 상호방위국으로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이 중국 역대 왕조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2030가성비일반인 일본에 굽신거릴 필요도 없구요 나라상황이 참 안타깝네요
ㅋ 아직도 조선시대에 살고 있구만. 현시점에서의 복잡한 동맹관계를 생각해볼때 아니냐? 그럼 중국을 믿을래? 차라리 미국끼고 일본하고 중국 견제하는게 낫지 않을까? 일본을 좋아하는게 아니라고!!! 곰곰히 생각해봐라. 니 생각은 뭔데? 러중일북 사이에 낀 이상황에서 어떤게 나은지??? 현실과 동떨어진 원론적인 얘기할거면 꺼져라.
몇백년전 이야기를…
역사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것인데
시대마다 국익에따라 변하는게 외교인데 언제까지 임진왜란 타령할거요
추억의 프로그램
와키자카는 일본의 제1선봉대장으로 사기가 대단하며 힘 또한 강하며 불멸의 이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도도다카도라도 일본의 장수며 명량에서 볼수있다. 고니시는 성격이 날카롭다. 영화에서 그는 자기의 공을 가로챌생각인가 라고 말하며 와키자카와 친구사이가 먼 인물이다.
그의 일대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정말 하늘이 조선 한 번 구원하라고 보낸 신이나 다름없음 조선시대 때 나라를 구한 성웅 그리고 대한제국 때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투사분들.. 우리는 영원히 그들을 숭고한 희생과 정신을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이순신은 위대한 인물이지만 고작 100원짜리 동전에
한반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불세출의 성웅 이순신장군님 감사합니다.
당신과 조선수군의 노고로 인해서 현재 제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도 패배하고나서 그 기록과 이순신을 연구하여 세계강국으로 성장하는데 거름으로 썼다는 것을 보면 무시할 수 없는 민족입니다.
우리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밴댕이 속보다 좁은 run조와 역적 원균 콜라보가 아주 개판을 쳐놓은거지
그때 국운이 다한 이씨 왕조는 끝났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