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웨이 중장, 풍부한 군사적 경험과 지식을 두루 갖춘 분으로 이분 덕에 중공군 개입으로 절망에 빠진 대한민국이 다시 기운을 차리고 재북진할 수 있었죠. 물론 리지웨이도 군인이라 미 국방부의 방침을 거스를 수 없어 1951년 중반 이후로는 적극적인 북진을 꺼리고 국군의 북진 요구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은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그래도 이 분과 밴 플리트 장군의 여러 작전들로 인해 국군의 전력이 눈부시게 향상되었고 전쟁 중반부터 여러 성과들을 낼 수 있었답니다
군사 작전 지휘라는 게 참 어려운 게 마음 같아서는 임전무퇴를 외치고 싶지만, 현대전에서는 후퇴해야 할 때 안하면 병력을 모두 잃는다는 상황때문에 버틸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의 문제가 지휘관의 가장 큰 고민거리일 것 같네요. 1.4 후퇴 때는 후퇴했지만 반대로 한참 나중에 나올 지평리 전투와 용문산 전투에서는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기 때문에 중공군의 기세를 제대로 꺾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리지웨이 장군의 판단은 지휘관으로서 정말 대단하네요.
초기 미 8군 사령관 세분이 전부 출중한 전투 지휘관이였다는 것이 한국으로서는 커다란 행운이였죠. 월튼 워커는 맥아더 라인이 아니라서 정말 개고생만 하다가 가셔서 늘 기억에 남습니다. 리지웨이 장군은 까딱하면 한국을 포기할 타이밍에 오히려 반격을 전환하여 한국전 최대의 위기를 모면하고 전선을 현재 휴전선까지 올렸고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을 질적으로 체질 개선을 시켜 이후 2년간 전쟁을 국군 주도로 진행할 체력과 기틀을 완성하였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왜 지금 휴전선에 비해 38도선으로 잘리면 북한이 서울로 남침하고 도발하는 것이 훨씬 쉬워지는지 바로 알 수 있죠. 서부전선이 올라가지만 어차피 개성은 시내만 우리 땅이되고 개성 북쪽의 임진북예성남정맥이 북한 땅이라 방어가 거의 불가능하죠. 따라서 이쪽은 어차피 북한 남침시 한강하구-임진강하류 이북에서 남침을 약간 지연시키는 효과만 생길 뿐 유의한 이득이 없답니다. 이쪽은 지금처럼 바로 후퇴해 한강하구와 임진강 하류에서 방어선을 만들어 막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죠. 한편 중부, 중동부전선이 대폭 남하하는데 서울로 바로 내리꽂는 철원-연천-동두천 축선, 갈말-포천 축선, 김화-이동-일동 축선이 모두 북한에게 열려버립니다. 임진강 중류와 영평천, 한탄강 유역을 모두 북한이 먹어버리고 그 아래로 북한군이 상시 주둔하는 것인데 그 자체가 서울 방어에 엄청난 부담이 됩니다. (실제 전쟁에서도 강 너머로 교두보를 확보하면 적은 패배입니다) 그리고 높은 산들이 많은 화천을 북한이 가져 춘천 분지가 북한에게 감시당하는 형국이 되는데 이는 곧 서울을 북동쪽 방면에서 우회 공격하는 서울-가평-춘천 축선이 위협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 북한군들은 유엔군과 국군이 북쪽으로 깊숙히 진격해 중공군과 힘겹게 싸우던 때 유엔군 후방 곳곳에 게릴라처럼 자리하고 있었죠. 그래서 뒤에서 유엔군이 중공군과 싸우는 것을 방해하였고 이 북한군들을 묶기 위해 후방의 국군이 또 투입되었죠. 북한 영토에서 전면 철수하여 임진강라인으로 남하했을 때 잠수하던 북한군이 다시 고개를 들고 중공군과 본격 연합해 공세를 시작했죠
패튼 영화에서 패튼이 군인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입니다. 실제로는 독백같은 느낌이 듭니다. I don't want to get any messages saying we are holding our postions. We are not holding anything. Let the Hun do that! We are advancing constantly and we're not interested in holding anything except the enemy. 패튼의 성격상 수비는 안하고 바로 공격했을 겁니다. th-cam.com/video/PS5yfhPGaWE/w-d-xo.html
리지웨이 장군이 서울을 중요시하게 생각한 것은 추후 1951년 4월말 중공군의 5차공세 (=1차 춘계공세) 때에서 드러납니다. 캔자스선을 넘어 와이오밍선까지 진출한 유엔군을 중공군이 공세를 벌여 전선을 급격히 남쪽으로 밀어냈습니다. 이 때 리지웨이의 전략전술과 영국을 포함한 유엔군의 도움으로 서울을 다시 함락당하는 사태를 간신히 면하고 재북진할 수 있었답니다. 실제 정말로 송추, 고양동, 의정부 라인까지 공산군이 남하해서 서울이 3번째로 먹혀버릴 위기였죠. 리지웨이는 절대로 서울을 또다시 내줄 수 없다며 강력하게 저항했는데 만약 서울이 또 적에게 먹혀버리면 이젠 한강라인에서 전선이 고착화될 위험이 매우 크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국방TV 유튜브 관리자입니다. 먼저 역전다방을 애청해 주시는 구독자분께 감사드립니다. 채승병 박사님 답변 전해드립니다. 마켓가든 작전에서 제18공수군단은 작전 초기 미 제101공수사단을 잠시 지휘했으나,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영국군 제1공수군단에 곧 지휘권을 넘겼습니다. - 간단하게 설명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혼선을 빚어 죄송합니다. 2차대전사를 다룰 때 마켓 가든작전에 대해서는 더욱 주의해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울은 단순한 지역, 도시가 아닌 조선 500년왕조의 수도이자 대한민국이 수도로 삼고 출발한 곳이라 그 상징성은 매우 크며 서울이 곧 한국인들의 심장부가 되기 때문에 여기를 잃는 것은 다른 도시,시군을 잃는 것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큰 패배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답니다. 저 당시 리지웨이 중장이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한 것은 전략적인 차원에서 어쩔수 없었던 것이며 후퇴해 재정비하고 중공/북한군 전력을 떨어뜨린 후 재북진해 다시 수복할 생각이었죠. 한국인들만큼은 아니어도 절대 리지웨이도 서울의 상징성과 군사를 넘어선 중요성을 모르지 않았답니다. 실제 한국인들은 서울을 되찾지 않고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휴전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센먀락 북한한테 사과 받는 유일한 길은 휴전 끝내고 다시 전쟁 시작해서 무조건 항복 받는거다. 단 북한 정권은 계속 유지 시켜야 하고 북한을 대표할 정부가 있어야 사과하고 보상도 하지. 김정은 및 북한 지도부 처형하고 통일하는게 김정은한테 사과 받는것 보다 났지 않나
패튼 장군이 살아 계셔서 리지 웨이 대신 왔었다면 ( 계급 무시하고 가정함) 아마 패튼 영화에 나오는 다음 장면과 같았을 겁니다. 식당 군기부터 잡고 미군 병사들이 적보다 패튼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th-cam.com/video/vfanaH9DpDw/w-d-xo.htmlsi=SS0k27RVNiCuizvk 식사시간 [ 06:00 ~ 06:15] 줄서서 배식 받는 시간 감안하면 일찍 나와서 줄서서 배식 받자 마자 빨리 먹어야 하겠죠? 편안하게 먹는게 아니라 입안에 음식을 쑤셔 넣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아침 먹고서 체하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식사 끝나자 마자 뺑뺑이 돌렸을 테니까요. 아르덴 숲에 포위된 101 공수사단을 구하러 잠도 안자고 진군했듯이 식사 끝나자 마자 중공군을 그냥 밀어 부쳤을 겁니다.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1차대전 미 지상군의 실전 경험은 사실 경미한 수준에 불과, 맥아더-패튼-트루먼 등 당시 투입된 모든 미군 장교들 실전 경험은 지극 짧았던.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에 했지만 + 대규모 징병과 훈련 등 대서양 건널 준비 과정이 필요했고 + 선발대는 1918년 초, 이후 축차로 대서양 건너 파병. 즉 투입된 미군이 본격 전투 참여 시작한 것은 독일 항복 전 몇 개월에 불과. 맥아더 1차대전 전 실전 경험 하기 힘들었고 + 1차대전 때 훈장을 받았지만 미 지상군 전체가 제대로 된 실전 경험 미약했으며 + 전간기 때는 아예 실전 경험 없었음. ---------------------------------> 아버지 후광으로 필리핀에서 총독 비스무리 위세를 떨쳤던 것이 태평양 전쟁 직전 맥아더 상황. ---------------------------------> 막상 태평양 전쟁 발발하고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시작되자 마자 맥아더는 필리핀 탈출. 이 정도가 맥아더의 태평양전쟁 이전 전투 경력. 대한민국과 미국은 한국전쟁 특수 관계로 엮여서 냉철하게 맥아더를 보지 않았던 측면이 있습니다. 중공군 개입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멍 때렸던 것은 치명적 + 명 때리다 중공군에 당한 다음에 핵폭??? -------------------------------> 게다가 중공군 개입은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난 것 아니며, -------------------------------> 지속적으로 특정 조건, 즉 유엔군이 38선 넘어 북으로 진격할 경우 반드시 개입한다고 반복적으로 밝힌 상황에서, -------------------------------> 맥아더는 중공군에 대한 그 어떤 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공군에 사전 대비만 철저히 했다면 충분히 격퇴할, -------------------------------> 군사적-경제적-과학기술 능력 모두를 갖추었기에 맥아더의 멍때림으로 치명적 후폭풍. -------------------------------> 수학에서 유효숫자 개념, 이미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에서 오차 발생했다면 10째 100째 자리 정밀 계산은 할 필요도 없는 시간 낭비. -------------------------------> 중공의 개입 협박을 깡그리 무시하고 멍때린 자가 + 중공군에게 충격받고 핵폭 운운하다가 + 군통수권자에게 해임당했던 것. 맥아더를 해임한 미국 대통령과 정부의 판단이 더 합리적. 1949년 즉 한국전 발발 1년 전, 소련 최초 원폭 실험 성공. 즉 미국의 핵독점 이미 깨진 현실. 또한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만주 전체 + 북경-상해-남경 등 중국 핵심지역 점령 + 중국 해안선 사실상 거의 다 장악하고서도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 1949년 소련 핵무장 현실화 + 1949년 장개석이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축출. 저런 조건에서 압록강 다리 다 부수고 + 중공군의 만주 보급기지 거점 서너 곳 폭격하면 승리 가능하겠습니까? ---------------------------------------------->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고작 1년 전 대륙 통일 완수하고 아직도 잔당 반군 소탕 와중에 한국전을 빌미로 ----------------------------------------------> 미국과 장개석이 다시 대륙 회복에 나설 가능성을 차단 차원에서라고 판단해야 합리적. ----------------------------------------------> 즉 중공 입장에선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반도 전체가 미국 세력권으로 넘어가는 것 방치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영국 미국은 원래 상륙 작전은 기본입니다. 또한 상륙작전 설계 및 실행 주체는 명백히 해군. --------------------------------> 2차대전 북아프리카 횃불 상륙 + 시칠리 상륙 + 노르망디 상륙 + 남부 프랑스 엔빌 상륙, 1차대전 때 실패했지만 갈리폴리 등. --------------------------------> 영국은 지난 수 백년, 지구 차원에서 전쟁 수행했는데 그 모두는 기본적으로 상륙을 전제. 2차대전 미영 연합국이 벌인 상륙 작전의 주도 세력은 미영 해군력. --------------------------------> 미영의 지상군은 퍼날라지는 택배 배송품 수준의 수동적 역활이었으며, 실질적 상륙 작전 수행은 해군 + 압도적 공군의 엄호 한국전쟁 인천상륙 아닌 군산이건 어디건 일단 상륙만 하면 적에겐 치명타. ----------------------------------> 2차대전 노르망디 역시 반드시 거기여서 승리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건 상륙만 성공하면 독일군은 패배할 조건. ----------------------------------> 압도적 제공권으로 독일의 방어선 정보를 사실상 모두 획득했기에 독일이 A에 방어 집중하면 A 지역 피해 다른 B,C 선택하면 그만. ----------------------------------> 롬멜전사록에서 롬멜 역시 그런 점 밝힌, 미영은 상륙 지점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 독일은 모든 해안선을 철저히 방어할 역량 없음을 인정. ----------------------------------> 따라서 여러 선택지들 가운데 오로지 노르망디여서 성공했다고 착각해선 안되는. 즉 인천상륙 맥아더의 천재성으로 과감히 벌인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전쟁 역전했다는 것은 냉정하게 본다면 착각. --------------------------------> 맥아더 아닌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 인천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상륙전 했었어도, --------------------------------> 압도에 압도에 압도적인 해공군력으로 유엔군은 돌파구를 말들었다고 판단해야 합리적. --------------------------------> 사실 냉정하게 본다면 인천상륙 없이 낙동강에서 북괴군을 돌파 섬멸했을 때 적의 타격이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애초 영국 미국과 같이 지구 차원에서 군사력 투사 적을 공격하는 세력이 취하는 것. --------------------------------> 영불해협-지중해-대서양-북해를 건너야만 적을 공격할 수 있기에 필수적인 상륙. --------------------------------> 한반도와 같은 좁아 터진 국지전에서 신규 상륙 병력 투입도 아닌 + 기존 투입된 병력 빼서 상륙??? 문제도 큰 겁니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 당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마 킴멜? 제독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책성 해임. --------------------------------> 만일 니미츠가 선배여서 킴멜 제독 보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 임명되고 그 직후 진주만 기습 당했다면 니미츠도 문책 해임당했을 것. --------------------------------> 킴멜 제독 가족과 후손들이 21세기 최근도 명예 회복시켜달라는 청원도. ( 킴멜은 41년 2월 진주만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 미 태평양함대는 원래 미 서부 해안에 위치, 하지만 루즈벨트 명령으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 ) ( 일본 위협 대비한다면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미 본토에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한 루즈벨트 + 지중해에서 영국의 타란토 기습 성공 및 영국측의 진주만 역시 타란토와 유사하기에 일본 위협에 철저 대비하란 경고 무시했던 루즈벨트 + 태평양함대 이전에 반대하던 제독을 해임하고 과거 루즈벨트가 해군성에 근무할 때 부관이었던 킴멜을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않히고선 진주만 기습당하자 해임 + 루즈벨트 자신의 멍 때림은 책임 안지고. ) ---------------------------------> 맥아더 역시 필리핀에서 사실상 혼자 탈출한 책임을 물어, ---------------------------------> 진주만으로 해임된 태평양함대 사령관 처럼 해임시켰더라도 솔직히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던 위치. ---------------------------------> 필리핀 함락 당시 해임되어도 별 문제 없었던 맥아더가 ---------------------------------> 미 해군이 사실상 주도한 태평양전쟁의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일본 항복 받아낸 그 사실 자체가 보기에 따라선 넌센스. ---------------------------------> 냉정하게 본다면 태평양전쟁은 미 해군의 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미 지상군은 사실상 들러리 수준에 불과. ---------------------------------> 필리핀 상륙 따위는 하거나 말거나 태평양 전쟁 승패에 아무런 영향 없는, 보기에 따라선 미 육군과 맥아더 개인 위신 체면치레용 성격도. ---------------------------------> 필리핀 상륙은 미 육군 입장에선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는 육군의 역활 존재감 과시용. 맥아더는 자신의 능력으로 검증받은 제대로 된 실전 성과 탁월함??? 의문입니다. 1차대전이전 + 1차대전 + 전간기 + 필리핀함락 + 태평양전쟁수행, 원수가 되어야할 그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는. ----------------------------------> 그리고 맥아더 주연 패튼 조연 흑역사 잊지 말아야. ----------------------------------> 대공황 당시 생계 어려움을 겪던 1차대전 참전 용사들이 그 동안 지급되지 않았던 참전 보상금 지급 시위하자, ---------------------------------->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맥아더는 공산주의 시위라고 폄하하며 패튼 중령에게 무력 해산 지시. ----------------------------------> 1차대전 참전 동료들을 향해 맥아더와 패튼은 장갑차까지 동원하고 + 가족들도 함께 있던 시위대 텐트 불사르며 강경 진압 부상자 발생하기도.
맥아더에 비해 실전 경험 훨씬 많은 패튼, 그 패튼의 실전 경험, 1차대전-전간기-2차대전 다 통틀어 본다면 이렇습니다. 1차대전 전 경험 제외. ( 세계대전급 아니며 + 강대국 상대 실전 아니기에 )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넉넉하게 추정해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 4월경. 하지만 대규모 지상군 편성하고 대서양 건너 파병하는데 약 1년의 시간 필요. 준비 차원의 조사관들은 즉시 대서양 건넜지만 최초 소규모 선발부대는 18년 2월경 유럽에 도착 + 이후 축차적 대서양 횡단 병력 증강. 독일 항복은 1918년 11월, 대서양 건넌 미군이 유럽에서 부대 편제 제대로 갖추고 실전 투입은 독일 항복 얼마 전으로 6개월 내외로 판단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짧았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시칠리 전투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발생. 맥아더는 패튼과 같이 야전에서 직접 대규모 전투 지휘한 경험도 없다는 점에서 맥아더의 원수 계급은 냉정하게 본다면 극단적 계급 인플레.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사실상 전멸급 패배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당시 인구 5천만에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를 영국-캐나다 연연방군이 상대. 당시 독일 타이거 및 판터 전차 격파할 전차포 갖춘 전차는 영연방군 파이어플라이 정도.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2차대전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약 80%를 영국-캐나다군이 상대. 당시 미군은 실전 경험 사실상 전무했던 신병들로 구성되어, 독일 주력 상대 불가능해 영국군이 독일 주력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캐나다군이 독일 5호 판터 및 6호 타이거 전차를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 소개하죠. 1. th-cam.com/video/cNGGt1ORO-0/w-d-xo.html Sherman Firefly vs King Tiger | July 1944 | Tank Duel ----------------------> 44년 7월 18일, 파이어플라이 서부전선 최초 킹타이거 격파. 2. th-cam.com/video/V-jGdZ5XWNM/w-d-xo.html Sherman Firefly vs SS Panthers - Tank Battle At Normandy, France ------------------------------> 44년 7월 9일, 캐나다군 파이어플라이 판터 7대 격파. 3. th-cam.com/video/IrEtdMkFA00/w-d-xo.html Tank Battles of WW2 - The Firefly Ace that knocked out 5 Panthers with 5 rounds ------------------> 44년 7월 14일, 파이어플라이 1대가 5번 사격, 5대 판터 격파 노르망디 전역에서 미하일 비트만이 탄 타이거 역시 영국군 파이어플라이에게 격파당해 전사. 4. th-cam.com/video/R4LyLCOUkzI/w-d-xo.html Cromwell vs 2 Panther tanks | September 1944 | Tank Duel ----------------------> 노르망디 돌파 후 44년 9월 19일 네덜란드, 영 크롬웰 전차 판터 2대 격파. 파이어플라이와 같은 17파운드 포를 장비한 크롬웰도 판터 타이거 격파 가능. 크롬웰은 당시 전차 중에선 기동성 가장 좋아 최고 속도 시속 약 65km/h.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타이거와 첫 교전 후 대응으로 43년 무렵 MBT 개발 시작, 그 사이 과도기에 미 셔면에 17파운드 포를 장착한 파이어플라이 및 크롬웰 등으로 응급 조치하며 버틴 것.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때 미군은 타이거 판터 대비 측면에선 사실상 멍 때렸던. 영국은 종전까지 약 2천대 파이어플라이 생산했고, 노르망디 상륙 때는 파이어플라이 생산 초기여서 초기 생산분 약 350대를 투입했다고.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는 영국군이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미국과 영국의 전차 중에서 전차포로 독일 판터나 타이거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군 파이어플라어-크롬웰 정도. 파이어플라이 역시 약한 장갑 때문에 극심한 피해를 당했지만, 독일 타이거나 판터 역시도 파이어플라이에게 먼저 공격당하거나 매복에 걸리면 격파당했기도. 노르망디 전역은 이미 독일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한 이후에 벌어진 전투로, 탁 트인 들판에서 전차가 고속 기동하는 전투 아닌 보카쥬 지형에서의 매복성 전차 전투. 처음엔 공격하는 영국군 전차가 매복한 독일군 전차에게 당하는 위치였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독일군 전차도 영국군 매복이나 배후 침투에 당해 격파되었던. 독일의 그 어떤 전차라도 격파할 수 있는 전차포를 가진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원거리에서는 약한 장갑 때문에 독일 타이거에게 당할 위험이 컸지만, 보카쥬 지형에선 원거리 아닌 근접 전투도 많았기에 파이어플라이는 나름 역활을 한. 하지만 미군의 일반적인 셔면은 판터나 타이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일 패전 직전인 1945년 1월, 2대의 독일 판터가 21대의 미 셔먼과 교전했을 때 ----------------> 셔먼 9대 격파 + 셔먼 12대 포획. 만일 보통의 셔먼만 아닌 파이어플라이와 혼성 편성되었다면 판터의 저런 전과 불가능. 45년에도 저랬으니 실전 경험 없었던 44년 노르망디에선 더 취약했을 것. 2 SS Panthers vs. 21 US Shermans th-cam.com/video/86K0ncTkAkA/w-d-xo.html 1945년 ( 영 최초 MBT인 센츄리온의 직전 모델인 ) 실전 투입된 마지막 순항전차 코메트. th-cam.com/video/tRxU0B8cybY/w-d-xo.html Comet Tank vs Tiger Tank | April 1945 | Tank Duel ----------------------------> 45년 4월 종전 직전, 영 코메트(센츄리온 직전 모델) 타이거 격파 여기 영상의 코메트 모습은 현대 주력 전차 유사, 하지만 센츄리온으로 바로 대체된. 최초의 MBT인 센츄리온은 너무 늦게 투입되어 실전 경험 없었음. th-cam.com/video/0AnoySTfvFM/w-d-xo.html Centurion - Tiger Tank's Nemesis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독일 항복 직후인 5월 14일, 센츄리온 6대 영 항구에서 선적, 몇 일 후 안트워프 항에 하역. 최전선 소련군 점령지 경계까지 약 400마일 자력 기동 영국군 기갑부대 배속, 영 미 탱크들과 함께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 후 7월 귀환. ----------------------------------------------------------------------------------> 2차대전 종전 당시 미 퍼싱, 영 센츄리온 등장으로 이미 독일 전차의 질적 우위는 끝난 상태.
총선 결과 나왔군요. ------------------------------------------> 지역구 의석 수, 민주 161 > 국민의힘 90 ------------------------------------------> 비례 포함한 의석 수, 범야권 192 ( 민주-민주연합 175 + 조국혁신 12 등 ) > 범여권 108 지역구 부분, 민주당의 호남 의존도 28 / 161 < 국힘당의 영남 의존도 60 / 90 , 현 여권은 역대 모든 선거에서 최하 약 50%에서 현재 약 66% 사이의 영남 의존도를 보였습니다. --------------------------------------------------------------------------> 호남 지역구 총 의석수 28 < 영남 지역구 총 의석수 65, 호남-충청을 합한 의석 수 보다 영남이 더 많은 유리한 조건. --------------------------------------------------------------------------> 영남에서 당선된 민주당 포함한 야권, 냉정하게 본다면 영남권에 이주한 다른 지역 사람들 표심도 결정적 역활. 현여권은 지난 총선과 이번 총선 모두에서, 영남을 제외한 지역에선 불과 25~30석 정도만 지역구 의원 당선시킨 것. ---------------------------------------------------------------------------> 강원에서 6석 : 2석 우세 제외하면, 서울-경기-인천-충남-충북-대전-세종-대전-제주에서 압도당한 것. ---------------------------------------------------------------------------> 서울+인천+경기+충남북대전세종-제주 지역 합산해, 현 여권 지역구 당선 고작 24석 내외. ---------------------------------------------------------------------------> 서울-경기-인천, 수도권 총 의석수 122석 중 현 여권은 19석 당선. 이런 상태에서 제1당은 불가능. 수도권에서도 경부선호남선 철도와 고속도로가 지나는 서울 위성 지역은 거의 언제나 야권의 승리, 외지인 유입이 적은 경기도 외곽권에선 현여권의 승리. --------------------------------------------------------------------------> 영남권 공단 포함 인구 밀집 지역과 수도권 인구 밀집 지역의 표심은 냉정하게 본다면 인구 이동의 결과. --------------------------------------------------------------------------> 강원권은 수도권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외지인 인구 유입이 어려운 조건이라 현재의 보수 우세 성향이라고 판단해야. --------------------------------------------------------------------------> 제주는 4.3에 대한 현여권 태도로 민주당에 대한 지지 강화되었다고 판단해야.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연령대 인구 구성 역시 마찬가지로 냉정하게 봐야. --------------------------------------------> 유신두환 시절 초등고 시절을 보낸 이들이 이제 60대 진입 본격화, --------------------------------------------> 그들은 기본적으로 현여권과 그 전신들인 자유-공화-민정 후계 정당들에 거부감. 즉 앞으론 60대 연령대에서 현여권의 우세 보장 안되는. --------------------------------------------> 즉 현 상태 조건이 그대로 유지될 경우, 현여권은 10년 후면 사실상 우세한 인구 연령층이 아예 사라지는 상황을 마주할 수도. --------------------------------------------> 지극 냉정하게 본다면, --------------------------------------------> 현여권이 특정 지역 정서에만 의존하면서 + 과거의 고연령층 정서에만 의존 지속한다면, 세월과 함께 더욱 더 취약해질 것. 지난 약 40년 세월 대한민국 정치 지형은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 평민당 시절 현 야권은 호남과 서울을 제외하면 지역구 배출이 거의 없었고, 지역구 당선자 호남 의존도는 심각. --------------------------------------------> 하지만 세월을 거치면서 현 민주당은 호남 지역구 의존도를 20% 아래 수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낮추며 수도권-중부권에서 지지 기반을 넓혔습니다. --------------------------------------------> 그에 비한다면 현여권은 영남의 인구 우세라는 유리한 물리적 조건에 안주하며, 영남 지역구 의존이 2/3 거의 70% 수준 심각해진 것.
근 현대사에서 김일성이 최악의 빌런이지만.... 그 다음 빌런 이승만을 국부로 세우려 하는 세력이 있다는게 너무 역겹다! 맥아더 보다는 워커장군이 원수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솔까 인천 상륙작전 빼면 맥아더는 우리 나라에 너무나도 영국(?)같은 인물이다!
이번편 개인적으로 토전사 포함 레전드 회차로생각됩니다.
한국전쟁이다보니 텐션 자체도 타국 전쟁사와는 차원이 다른 출연진의 감정표현과 몰입감, 이 무거운 주제를 조심스레 다루려는 배려까지도 느껴집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아쉬울지경..
예비군으로서 다들 감사합니다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이들 미군 장군들은 어려운시기에 우리나라의 공산화를 막는데 크나큰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죠. 밴플리트 장군은 조종사인 아들이 북한상공에서 실종(사실상 전사) 되기도 했구요.
정말 6.25 전쟁을 힘쎈 미군이 와서 지키고 막앗다고 너무 쉽게 단순하게 생각들 하는 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도 그렇고..ㅠㅠ 이렇케 힘드셧을준 물랏네요ㅠㅠ...진짜 우리나라 지켜준것에 감사 해야 합니다
맥아더 장군님 아들도 실종(전사)했죠..ㅠㅠ
19:19 와 허준아재 교양력이 용수철처럼 폭발하시네
켠왕하면서 쌍욕박던 그 허열사가 이런고급진 표현을
그만큼 역사프로를 많이 하긴 했죸ㅋㅋㅋ
자리가 사람을 만들죠~!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 당사자는 허열사 표현 진짜 싫어하시던데 그래도 이 댓글은 재밌게 읽으셨을 듯
크으으 고급진 표헌
고맙습니다 ^^*
둘째를 재울때 최고의 선택! 역전다방 감사합니다. 1화부터 여기까지 1달 정도 걸렸네욬ㅋㅋㅋ 포아즈분들의 숨쉴틈 없는 입담과 시선들이 그 무엇보다 좋은 영상입니다. 앞으로도 잘부탁드려요 :)
리지웨이 중장, 풍부한 군사적 경험과 지식을 두루 갖춘 분으로 이분 덕에 중공군 개입으로 절망에 빠진 대한민국이 다시 기운을 차리고 재북진할 수 있었죠. 물론 리지웨이도 군인이라 미 국방부의 방침을 거스를 수 없어 1951년 중반 이후로는 적극적인 북진을 꺼리고 국군의 북진 요구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은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그래도 이 분과 밴 플리트 장군의 여러 작전들로 인해 국군의 전력이 눈부시게 향상되었고 전쟁 중반부터 여러 성과들을 낼 수 있었답니다
😅
유엔군 사령관 밴플리트 아들도 폭격임무 중 미귀환해서 실종 후 전사처리됐죠. 수색작전 기간을 늘리자는 참모들 건의도 거부한 밴플리트 장군 같은 미군 지휘관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쥬는 군인정신의 귀감입니다. 패튼 밑에서 유럽을 누비던 불독도 허망하게 가고...
심소령님...6.25에 대한 브리핑자신감...3차공세를 디테일하게 할수있으나 안끝난다는 말....진짜 멋지네요...
우리나라는..북진정신을..잊으면 정말 안될것같아요.....결과가 어떻게 되었던.....우리나라는 북진!!!
꼭 그때 그 현장에 있는 기분이네요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매주 기다리는 방송. 즐거운 수요일. 수요일이 되면 퇴근길이 기다려집니다.
매주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이번주도 재미있네요. 과학이론보다 지도에 진격상황과 기타 설명을해주는게. 밀덕분들에게 더 좋을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군사 작전 지휘라는 게 참 어려운 게 마음 같아서는 임전무퇴를 외치고 싶지만, 현대전에서는 후퇴해야 할 때 안하면 병력을 모두 잃는다는 상황때문에 버틸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의 문제가 지휘관의 가장 큰 고민거리일 것 같네요. 1.4 후퇴 때는 후퇴했지만 반대로 한참 나중에 나올 지평리 전투와 용문산 전투에서는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기 때문에 중공군의 기세를 제대로 꺾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리지웨이 장군의 판단은 지휘관으로서 정말 대단하네요.
초기 미 8군 사령관 세분이 전부 출중한 전투 지휘관이였다는 것이 한국으로서는 커다란 행운이였죠. 월튼 워커는 맥아더 라인이 아니라서 정말 개고생만 하다가 가셔서 늘 기억에 남습니다. 리지웨이 장군은 까딱하면 한국을 포기할 타이밍에 오히려 반격을 전환하여 한국전 최대의 위기를 모면하고 전선을 현재 휴전선까지 올렸고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을 질적으로 체질 개선을 시켜 이후 2년간 전쟁을 국군 주도로 진행할 체력과 기틀을 완성하였습니다.
아.. 부족해 ㅜㅜ 1주일을 기다려야 하다니 ㅜㅜ
월탱 유저입니다
불독을 몰며 이름이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존경합니다
14후퇴!
저희 할머니가 옛날얘기 해주셨을때 들었던 얘기인데 다음주 너무 기다려져요.
저희 아버지 47년생이시라 4살때? 가족들이 넘어오셨어요.
어릴때 할머니가 고향인 북한에서 피난나오셨던 얘기 들었을때 메모라도 녹음이라도 할껄...제가 어린 나이라 그생각는 못했어요.
역사는 기억 해야되요...
드디어 리지웨이 등장!
지도를 보시면 왜 지금 휴전선에 비해 38도선으로 잘리면 북한이 서울로 남침하고 도발하는 것이 훨씬 쉬워지는지 바로 알 수 있죠. 서부전선이 올라가지만 어차피 개성은 시내만 우리 땅이되고 개성 북쪽의 임진북예성남정맥이 북한 땅이라 방어가 거의 불가능하죠. 따라서 이쪽은 어차피 북한 남침시 한강하구-임진강하류 이북에서 남침을 약간 지연시키는 효과만 생길 뿐 유의한 이득이 없답니다. 이쪽은 지금처럼 바로 후퇴해 한강하구와 임진강 하류에서 방어선을 만들어 막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죠. 한편 중부, 중동부전선이 대폭 남하하는데 서울로 바로 내리꽂는 철원-연천-동두천 축선, 갈말-포천 축선, 김화-이동-일동 축선이 모두 북한에게 열려버립니다. 임진강 중류와 영평천, 한탄강 유역을 모두 북한이 먹어버리고 그 아래로 북한군이 상시 주둔하는 것인데 그 자체가 서울 방어에 엄청난 부담이 됩니다. (실제 전쟁에서도 강 너머로 교두보를 확보하면 적은 패배입니다) 그리고 높은 산들이 많은 화천을 북한이 가져 춘천 분지가 북한에게 감시당하는 형국이 되는데 이는 곧 서울을 북동쪽 방면에서 우회 공격하는 서울-가평-춘천 축선이 위협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휴 국군 장병들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ㅜㅜ
아~ 워커힐이 그 뜻이구나.... 와.... 처음 알았다.
저 북한군들은 유엔군과 국군이 북쪽으로 깊숙히 진격해 중공군과 힘겹게 싸우던 때 유엔군 후방 곳곳에 게릴라처럼 자리하고 있었죠. 그래서 뒤에서 유엔군이 중공군과 싸우는 것을 방해하였고 이 북한군들을 묶기 위해 후방의 국군이 또 투입되었죠. 북한 영토에서 전면 철수하여 임진강라인으로 남하했을 때 잠수하던 북한군이 다시 고개를 들고 중공군과 본격 연합해 공세를 시작했죠
송추! 남들은 유원지 놀러올때 우리 연대 산1부 능전 야지전개하고 우리 통신소대는 800고지 as992 둘러매고 999k 둘러매고 롱안테나치고 별보며 자던 기억이 가물가물 나네요!
슬슬 내가 일반적인 표면상 알고 있는 내용들이 다 채워가고 있네여, 가장 궁금 했던게 51~53년까지 무엇이 있는지 세밀한 내용이 너무 궁금해져요 ㅋㅋ
29:49 ㅋㅋㅋㅋㅋ 너무 귀여우심
샤를의 앙탈
화력더쿠 한국군의 진정한 아버지인 밴 플리트 장군 이야기 나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두근 두근
10분만 더 해주세요!!!!!!
심진핑!!!! 허준 천재~!
슬슬 625 다음 시리즈 생각할 시점이네요 우러전쟁 한번 제대로 집어주심이 어떨지 ㅋㅋ
한국전쟁 끝나면 2차세계대전 소련 독일 동부전선에 대해 방송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너무 흥미진진하네요. 역전다방 625편이 인천상륙작전부터 시작한게 좀 아쉽네요. 전쟁 배경과 초반패퇴, 지연전에서 낙동강방아선까지 좀 다뤄졌으면 좋았을 텐데요.
잼있어
패튼 영화에서 패튼이 군인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입니다. 실제로는 독백같은 느낌이 듭니다. I don't want to get any messages saying we are holding our postions. We are not holding anything.
Let the Hun do that! We are advancing constantly and we're not interested in holding anything except the enemy. 패튼의 성격상 수비는 안하고 바로 공격했을 겁니다. th-cam.com/video/PS5yfhPGaWE/w-d-xo.html
리지웨이 장군 82공수사단 출신이구나
하 재밌당 ㅡㅜㅜ 담화 빵링ㅇㅇㅇ
전황이 안 좋은 시기를 다루다보니 댓글창도 어지럽네요. 파로호 전투 때까지는 이럴라나...파로호 얘기만 나오면 발작하는 그 사람들 빼고...
가장 신기한건. 워커장군이 따르던 조지패튼 또한 교통사고로 사망. 부하인 워커장군또한 교통사고로 사망.햇지만 조지패튼이 워커장군을 가장 아꼇는데. 패튼의 명령을 잘이해하고 제3야전군 20군단장으로 맹활약을 펼쳐 유령사단이라고 불릴정도의 기동전의 달인이었음
6.25전쟁에서 1만명의 경찰관들이 전사하였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역전다방에서 경찰들 활동도 좀 소개해 주세요.
General Ridgeway의 전투복 차림: X-band 보다는 Suspender 란 표현이 더 좋을듯 합니다.
워커장군님 ㅜㅜ
존나 재밌네
리지웨이 장군이 서울을 중요시하게 생각한 것은 추후 1951년 4월말 중공군의 5차공세 (=1차 춘계공세) 때에서 드러납니다. 캔자스선을 넘어 와이오밍선까지 진출한 유엔군을 중공군이 공세를 벌여 전선을 급격히 남쪽으로 밀어냈습니다. 이 때 리지웨이의 전략전술과 영국을 포함한 유엔군의 도움으로 서울을 다시 함락당하는 사태를 간신히 면하고 재북진할 수 있었답니다. 실제 정말로 송추, 고양동, 의정부 라인까지 공산군이 남하해서 서울이 3번째로 먹혀버릴 위기였죠. 리지웨이는 절대로 서울을 또다시 내줄 수 없다며 강력하게 저항했는데 만약 서울이 또 적에게 먹혀버리면 이젠 한강라인에서 전선이 고착화될 위험이 매우 크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 또..
채승병 박사님 패리스코프시절부터 애청자이고 리지웨이를 무척 존경하는 사람이지만, 한마디 의문 을 듭니다. 리지웨이가 18공수군단장이 되서 활약한것은 발지전투와 바시티작전때였습니다. 마켓가든작전시 영국군 미군 공수부대의 총지휘관은 영국군 브라우닝 장군으로 알고있습니다. 확인바랍니다.
국방TV 유튜브 관리자입니다.
먼저 역전다방을 애청해 주시는 구독자분께 감사드립니다.
채승병 박사님 답변 전해드립니다.
마켓가든 작전에서 제18공수군단은 작전 초기 미 제101공수사단을 잠시 지휘했으나,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영국군 제1공수군단에 곧 지휘권을 넘겼습니다.
- 간단하게 설명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혼선을 빚어 죄송합니다.
2차대전사를 다룰 때 마켓 가든작전에 대해서는 더욱 주의해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4:39 아마 old iron sides 라는 부대가 있다보니 거기서 나온 언어유희 아닐까요 😂
서울은 단순한 지역, 도시가 아닌 조선 500년왕조의 수도이자 대한민국이 수도로 삼고 출발한 곳이라 그 상징성은 매우 크며 서울이 곧 한국인들의 심장부가 되기 때문에 여기를 잃는 것은 다른 도시,시군을 잃는 것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큰 패배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답니다. 저 당시 리지웨이 중장이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한 것은 전략적인 차원에서 어쩔수 없었던 것이며 후퇴해 재정비하고 중공/북한군 전력을 떨어뜨린 후 재북진해 다시 수복할 생각이었죠. 한국인들만큼은 아니어도 절대 리지웨이도 서울의 상징성과 군사를 넘어선 중요성을 모르지 않았답니다. 실제 한국인들은 서울을 되찾지 않고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휴전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djcjfisjsq그게 부족한 부분이죠 ㅜ 수도는 나라의 모든 기능이 집중된 근본이자 중심인 만큼 단순 위치, 면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도에서 차원이 다르죠
@@djcjfisjsq물론 수도가 중요하긴 하지만 정부와 같은 국가 수뇌부가 붕괴하는 것보다는 수도를 내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후퇴한다는 건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18:53 1951 -> 1950
13:45 상시 복장군기 위반인 맥아더와는 너무나도 비교되는군요;;
자막에 오타 발견! 낙동간 전선은 1951년 9월이 아니고 1950년 9월입니다.
매슈 B 리지웨이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2차 대전 나치 독일군 방어의 사자 발터 모델이 떠오르는데 저만 그런가요?
모델과 한번 싸워보고 그걸 흡수한거 같네요. 기적을 만들려고 했군요.
임진강방어선이 겨울이라 천연장애물로서의 기여도가 약해다 하더라도 강가에다 포탄을 쏟아부어서 물이 흐르게 할 수는 없었을까요
베트남전 한국군 활약상 소개해주세요
근데 의외인게 워커 장군님은 과거 2차대전 당시 공세에 유명한 패튼 장군의 제자인데..
공격이 아닌 방어 상황에 저렇게 효율적인 방어를 성공 하셨다는게 의외임
전범국 러시아, 중국, 북한에도 [진정성 있는 사과]와 보상을 요구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휴전이 무슨뜻인지 모름?
@@김정남-m9u가해자와 피해자가 엄연한데 지금 북중러 실드침?
@@센먀락아직 북한이랑 전쟁중인데 사과 받으려면 때려 잡아야 한다는 뜻인데
@@센먀락 북한한테 사과 받는 유일한 길은 휴전 끝내고 다시 전쟁 시작해서 무조건 항복 받는거다. 단 북한 정권은 계속 유지 시켜야 하고 북한을 대표할 정부가 있어야 사과하고 보상도 하지. 김정은 및 북한 지도부 처형하고 통일하는게 김정은한테 사과 받는것 보다 났지 않나
😂😂😂😂😂😂😂지랄하고인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공수낙하 후 윈터스가 가장 처음 만난 아군이 82사단이죠
원래 미군은 장군들이 최전선에 잘 나서기 때문에 전사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똥별 생각하면 안되죠.
일본식 표현을 지적 하셨는데, 초신 과 장진호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그럼 초신퓨 분들은 우리방식으로 불러줘야 하나요?
패튼장군도 워커장군처럼 허망,황망한 안타까운분들.. (What a hell of a way to die)이거 죽는 방법 치고 참 더럽군
허준님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2차 대전 영상이랑 비교해보면 확 차이가 납니다.
중국 북한... 유리하다고 깝치다가 피박 맞네..리지웨이 장군을 만나서 피떡 된 중국군이 얼마인가...
본인자랑만하던 그교수는 바꼇구나 아직 태평양쪽보는데 그분 참 정안가던데 다행이네
패튼 장군이 살아 계셔서 리지 웨이 대신 왔었다면 ( 계급 무시하고 가정함) 아마 패튼 영화에 나오는 다음 장면과 같았을 겁니다. 식당 군기부터 잡고 미군 병사들이 적보다 패튼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th-cam.com/video/vfanaH9DpDw/w-d-xo.htmlsi=SS0k27RVNiCuizvk 식사시간 [ 06:00 ~ 06:15] 줄서서 배식 받는 시간 감안하면 일찍 나와서 줄서서 배식 받자 마자 빨리 먹어야 하겠죠? 편안하게 먹는게 아니라 입안에 음식을 쑤셔 넣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아침 먹고서 체하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식사 끝나자 마자 뺑뺑이 돌렸을 테니까요. 아르덴 숲에 포위된 101 공수사단을 구하러 잠도 안자고 진군했듯이 식사 끝나자 마자 중공군을 그냥 밀어 부쳤을 겁니다.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1차대전 미 지상군의 실전 경험은 사실 경미한 수준에 불과, 맥아더-패튼-트루먼 등 당시 투입된 모든 미군 장교들 실전 경험은 지극 짧았던.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에 했지만 + 대규모 징병과 훈련 등 대서양 건널 준비 과정이 필요했고 + 선발대는 1918년 초, 이후 축차로 대서양 건너 파병.
즉 투입된 미군이 본격 전투 참여 시작한 것은 독일 항복 전 몇 개월에 불과.
맥아더 1차대전 전 실전 경험 하기 힘들었고 + 1차대전 때 훈장을 받았지만 미 지상군 전체가 제대로 된 실전 경험 미약했으며 + 전간기 때는 아예 실전 경험 없었음.
---------------------------------> 아버지 후광으로 필리핀에서 총독 비스무리 위세를 떨쳤던 것이 태평양 전쟁 직전 맥아더 상황.
---------------------------------> 막상 태평양 전쟁 발발하고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시작되자 마자 맥아더는 필리핀 탈출. 이 정도가 맥아더의 태평양전쟁 이전 전투 경력.
대한민국과 미국은 한국전쟁 특수 관계로 엮여서 냉철하게 맥아더를 보지 않았던 측면이 있습니다.
중공군 개입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멍 때렸던 것은 치명적 + 명 때리다 중공군에 당한 다음에 핵폭???
-------------------------------> 게다가 중공군 개입은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난 것 아니며,
-------------------------------> 지속적으로 특정 조건, 즉 유엔군이 38선 넘어 북으로 진격할 경우 반드시 개입한다고 반복적으로 밝힌 상황에서,
-------------------------------> 맥아더는 중공군에 대한 그 어떤 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공군에 사전 대비만 철저히 했다면 충분히 격퇴할,
-------------------------------> 군사적-경제적-과학기술 능력 모두를 갖추었기에 맥아더의 멍때림으로 치명적 후폭풍.
-------------------------------> 수학에서 유효숫자 개념, 이미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에서 오차 발생했다면 10째 100째 자리 정밀 계산은 할 필요도 없는 시간 낭비.
-------------------------------> 중공의 개입 협박을 깡그리 무시하고 멍때린 자가 + 중공군에게 충격받고 핵폭 운운하다가 + 군통수권자에게 해임당했던 것.
맥아더를 해임한 미국 대통령과 정부의 판단이 더 합리적.
1949년 즉 한국전 발발 1년 전, 소련 최초 원폭 실험 성공. 즉 미국의 핵독점 이미 깨진 현실.
또한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만주 전체 + 북경-상해-남경 등 중국 핵심지역 점령 + 중국 해안선 사실상 거의 다 장악하고서도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 1949년 소련 핵무장 현실화 + 1949년 장개석이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축출.
저런 조건에서 압록강 다리 다 부수고 + 중공군의 만주 보급기지 거점 서너 곳 폭격하면 승리 가능하겠습니까?
---------------------------------------------->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고작 1년 전 대륙 통일 완수하고 아직도 잔당 반군 소탕 와중에 한국전을 빌미로
----------------------------------------------> 미국과 장개석이 다시 대륙 회복에 나설 가능성을 차단 차원에서라고 판단해야 합리적.
----------------------------------------------> 즉 중공 입장에선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반도 전체가 미국 세력권으로 넘어가는 것 방치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영국 미국은 원래 상륙 작전은 기본입니다. 또한 상륙작전 설계 및 실행 주체는 명백히 해군.
--------------------------------> 2차대전 북아프리카 횃불 상륙 + 시칠리 상륙 + 노르망디 상륙 + 남부 프랑스 엔빌 상륙, 1차대전 때 실패했지만 갈리폴리 등.
--------------------------------> 영국은 지난 수 백년, 지구 차원에서 전쟁 수행했는데 그 모두는 기본적으로 상륙을 전제. 2차대전 미영 연합국이 벌인 상륙 작전의 주도 세력은 미영 해군력.
--------------------------------> 미영의 지상군은 퍼날라지는 택배 배송품 수준의 수동적 역활이었으며,
실질적 상륙 작전 수행은 해군 + 압도적 공군의 엄호 한국전쟁 인천상륙 아닌 군산이건 어디건 일단 상륙만 하면 적에겐 치명타.
----------------------------------> 2차대전 노르망디 역시 반드시 거기여서 승리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건 상륙만 성공하면 독일군은 패배할 조건.
----------------------------------> 압도적 제공권으로 독일의 방어선 정보를 사실상 모두 획득했기에 독일이 A에 방어 집중하면 A 지역 피해 다른 B,C 선택하면 그만.
----------------------------------> 롬멜전사록에서 롬멜 역시 그런 점 밝힌, 미영은 상륙 지점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 독일은 모든 해안선을 철저히 방어할 역량 없음을 인정.
----------------------------------> 따라서 여러 선택지들 가운데 오로지 노르망디여서 성공했다고 착각해선 안되는.
즉 인천상륙 맥아더의 천재성으로 과감히 벌인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전쟁 역전했다는 것은 냉정하게 본다면 착각.
--------------------------------> 맥아더 아닌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 인천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상륙전 했었어도,
--------------------------------> 압도에 압도에 압도적인 해공군력으로 유엔군은 돌파구를 말들었다고 판단해야 합리적.
--------------------------------> 사실 냉정하게 본다면 인천상륙 없이 낙동강에서 북괴군을 돌파 섬멸했을 때 적의 타격이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애초 영국 미국과 같이 지구 차원에서 군사력 투사 적을 공격하는 세력이 취하는 것.
--------------------------------> 영불해협-지중해-대서양-북해를 건너야만 적을 공격할 수 있기에 필수적인 상륙.
--------------------------------> 한반도와 같은 좁아 터진 국지전에서 신규 상륙 병력 투입도 아닌 + 기존 투입된 병력 빼서 상륙??? 문제도 큰 겁니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 당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마 킴멜? 제독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책성 해임.
--------------------------------> 만일 니미츠가 선배여서 킴멜 제독 보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 임명되고 그 직후 진주만 기습 당했다면 니미츠도 문책 해임당했을 것.
--------------------------------> 킴멜 제독 가족과 후손들이 21세기 최근도 명예 회복시켜달라는 청원도.
( 킴멜은 41년 2월 진주만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 미 태평양함대는 원래 미 서부 해안에 위치, 하지만 루즈벨트 명령으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 )
( 일본 위협 대비한다면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미 본토에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한 루즈벨트 + 지중해에서 영국의 타란토 기습 성공 및 영국측의 진주만 역시 타란토와 유사하기에 일본 위협에 철저 대비하란 경고 무시했던 루즈벨트 + 태평양함대 이전에 반대하던 제독을 해임하고 과거 루즈벨트가 해군성에 근무할 때 부관이었던 킴멜을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않히고선 진주만 기습당하자 해임 + 루즈벨트 자신의 멍 때림은 책임 안지고. )
---------------------------------> 맥아더 역시 필리핀에서 사실상 혼자 탈출한 책임을 물어,
---------------------------------> 진주만으로 해임된 태평양함대 사령관 처럼 해임시켰더라도 솔직히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던 위치.
---------------------------------> 필리핀 함락 당시 해임되어도 별 문제 없었던 맥아더가
---------------------------------> 미 해군이 사실상 주도한 태평양전쟁의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일본 항복 받아낸 그 사실 자체가 보기에 따라선 넌센스.
---------------------------------> 냉정하게 본다면 태평양전쟁은 미 해군의 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미 지상군은 사실상 들러리 수준에 불과.
---------------------------------> 필리핀 상륙 따위는 하거나 말거나 태평양 전쟁 승패에 아무런 영향 없는, 보기에 따라선 미 육군과 맥아더 개인 위신 체면치레용 성격도.
---------------------------------> 필리핀 상륙은 미 육군 입장에선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는 육군의 역활 존재감 과시용.
맥아더는 자신의 능력으로 검증받은 제대로 된 실전 성과 탁월함??? 의문입니다.
1차대전이전 + 1차대전 + 전간기 + 필리핀함락 + 태평양전쟁수행, 원수가 되어야할 그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는.
----------------------------------> 그리고 맥아더 주연 패튼 조연 흑역사 잊지 말아야.
----------------------------------> 대공황 당시 생계 어려움을 겪던 1차대전 참전 용사들이 그 동안 지급되지 않았던 참전 보상금 지급 시위하자,
---------------------------------->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맥아더는 공산주의 시위라고 폄하하며 패튼 중령에게 무력 해산 지시.
----------------------------------> 1차대전 참전 동료들을 향해 맥아더와 패튼은 장갑차까지 동원하고 + 가족들도 함께 있던 시위대 텐트 불사르며 강경 진압 부상자 발생하기도.
맥아더에 비해 실전 경험 훨씬 많은 패튼,
그 패튼의 실전 경험, 1차대전-전간기-2차대전 다 통틀어 본다면 이렇습니다. 1차대전 전 경험 제외. ( 세계대전급 아니며 + 강대국 상대 실전 아니기에 )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넉넉하게 추정해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 4월경.
하지만 대규모 지상군 편성하고 대서양 건너 파병하는데 약 1년의 시간 필요.
준비 차원의 조사관들은 즉시 대서양 건넜지만 최초 소규모 선발부대는 18년 2월경 유럽에 도착 + 이후 축차적 대서양 횡단 병력 증강.
독일 항복은 1918년 11월, 대서양 건넌 미군이 유럽에서 부대 편제 제대로 갖추고 실전 투입은 독일 항복 얼마 전으로 6개월 내외로 판단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짧았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시칠리 전투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발생.
맥아더는 패튼과 같이 야전에서 직접 대규모 전투 지휘한 경험도 없다는 점에서 맥아더의 원수 계급은 냉정하게 본다면 극단적 계급 인플레.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사실상 전멸급 패배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당시 인구 5천만에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를 영국-캐나다 연연방군이 상대. 당시 독일 타이거 및 판터 전차 격파할 전차포 갖춘 전차는 영연방군 파이어플라이 정도.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2차대전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약 80%를 영국-캐나다군이 상대.
당시 미군은 실전 경험 사실상 전무했던 신병들로 구성되어, 독일 주력 상대 불가능해 영국군이 독일 주력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캐나다군이 독일 5호 판터 및 6호 타이거 전차를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 소개하죠.
1. th-cam.com/video/cNGGt1ORO-0/w-d-xo.html
Sherman Firefly vs King Tiger | July 1944 | Tank Duel ----------------------> 44년 7월 18일, 파이어플라이 서부전선 최초 킹타이거 격파.
2. th-cam.com/video/V-jGdZ5XWNM/w-d-xo.html
Sherman Firefly vs SS Panthers - Tank Battle At Normandy, France ------------------------------> 44년 7월 9일, 캐나다군 파이어플라이 판터 7대 격파.
3. th-cam.com/video/IrEtdMkFA00/w-d-xo.html
Tank Battles of WW2 - The Firefly Ace that knocked out 5 Panthers with 5 rounds ------------------> 44년 7월 14일, 파이어플라이 1대가 5번 사격, 5대 판터 격파
노르망디 전역에서 미하일 비트만이 탄 타이거 역시 영국군 파이어플라이에게 격파당해 전사.
4. th-cam.com/video/R4LyLCOUkzI/w-d-xo.html
Cromwell vs 2 Panther tanks | September 1944 | Tank Duel ----------------------> 노르망디 돌파 후 44년 9월 19일 네덜란드, 영 크롬웰 전차 판터 2대 격파.
파이어플라이와 같은 17파운드 포를 장비한 크롬웰도 판터 타이거 격파 가능. 크롬웰은 당시 전차 중에선 기동성 가장 좋아 최고 속도 시속 약 65km/h.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타이거와 첫 교전 후 대응으로 43년 무렵 MBT 개발 시작,
그 사이 과도기에 미 셔면에 17파운드 포를 장착한 파이어플라이 및 크롬웰 등으로 응급 조치하며 버틴 것.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때 미군은 타이거 판터 대비 측면에선 사실상 멍 때렸던. 영국은 종전까지 약 2천대 파이어플라이 생산했고,
노르망디 상륙 때는 파이어플라이 생산 초기여서 초기 생산분 약 350대를 투입했다고.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는 영국군이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미국과 영국의 전차 중에서 전차포로 독일 판터나 타이거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군 파이어플라어-크롬웰 정도.
파이어플라이 역시 약한 장갑 때문에 극심한 피해를 당했지만, 독일 타이거나 판터 역시도 파이어플라이에게 먼저 공격당하거나 매복에 걸리면 격파당했기도.
노르망디 전역은 이미 독일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한 이후에 벌어진 전투로, 탁 트인 들판에서 전차가 고속 기동하는 전투 아닌 보카쥬 지형에서의 매복성 전차 전투.
처음엔 공격하는 영국군 전차가 매복한 독일군 전차에게 당하는 위치였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독일군 전차도 영국군 매복이나 배후 침투에 당해 격파되었던.
독일의 그 어떤 전차라도 격파할 수 있는 전차포를 가진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원거리에서는 약한 장갑 때문에 독일 타이거에게 당할 위험이 컸지만, 보카쥬 지형에선 원거리 아닌 근접 전투도 많았기에 파이어플라이는 나름 역활을 한.
하지만 미군의 일반적인 셔면은 판터나 타이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일 패전 직전인 1945년 1월, 2대의 독일 판터가 21대의 미 셔먼과 교전했을 때 ----------------> 셔먼 9대 격파 + 셔먼 12대 포획.
만일 보통의 셔먼만 아닌 파이어플라이와 혼성 편성되었다면 판터의 저런 전과 불가능. 45년에도 저랬으니 실전 경험 없었던 44년 노르망디에선 더 취약했을 것.
2 SS Panthers vs. 21 US Shermans
th-cam.com/video/86K0ncTkAkA/w-d-xo.html
1945년 ( 영 최초 MBT인 센츄리온의 직전 모델인 ) 실전 투입된 마지막 순항전차 코메트.
th-cam.com/video/tRxU0B8cybY/w-d-xo.html
Comet Tank vs Tiger Tank | April 1945 | Tank Duel ----------------------------> 45년 4월 종전 직전, 영 코메트(센츄리온 직전 모델) 타이거 격파
여기 영상의 코메트 모습은 현대 주력 전차 유사, 하지만 센츄리온으로 바로 대체된. 최초의 MBT인 센츄리온은 너무 늦게 투입되어 실전 경험 없었음.
th-cam.com/video/0AnoySTfvFM/w-d-xo.html Centurion - Tiger Tank's Nemesis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독일 항복 직후인 5월 14일, 센츄리온 6대 영 항구에서 선적, 몇 일 후 안트워프 항에 하역.
최전선 소련군 점령지 경계까지 약 400마일 자력 기동 영국군 기갑부대 배속, 영 미 탱크들과 함께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 후 7월 귀환.
----------------------------------------------------------------------------------> 2차대전 종전 당시 미 퍼싱, 영 센츄리온 등장으로 이미 독일 전차의 질적 우위는 끝난 상태.
왜 역전다방 보면서 클린스만이 떠오르는가!ㅎ
패튼이나 워커나 맹장도 차사고에는 장사없네
러일전쟁도 다뤄주시길 바랍니다 ^^
속초양양주문진순서같은데 .
김일성 빰맞은건 진짜인가요 ?
워커장군: 나는 중공군보다 국군차수리가더무섭습니다
무슨 소리?
우리는 대체 조국을 어찌 지켰는가...
진짜 피로 땅을 적셔서 지켜냈군요. ㅠㅠ
너무 슬프고 너무 감사합니다.
CHINA OUT!
N.KOREA OUT!
정말 감사합니다.
한국군은 625전쟁에서 미군이 제시한 방어라인을 열심히 연구해야 된다고 보이내요.
미국4성장군을 국군이 교통사고로 보내신거는 방송으로 말하지는 안네 .
아니 심진핑 뭔데 ㅋㅋㅋ
평양전투는 왜 생략??
82공수면 라이언일병 소속 사단인가??
101공수
한국장교들은 골프채를 들고다니려나 ᆢ 😅
심진핑 ㅋㅋㅋㅋㅋㅋㅋ
참모총장이 별네개 맥아더가 별다섯개
명령내릴수도없네
중꿔,선족이들 많은가요?
맥아더 가. 워커장군. 말만 들었어도. 남북통일 되었다
독소전 안하나?
욕해서 죄송합니다 다
심진핑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 총선이 바로 저모양. 1.4후퇴중. 곧 서울재수복할거다.
총선 결과 나왔군요.
------------------------------------------> 지역구 의석 수, 민주 161 > 국민의힘 90
------------------------------------------> 비례 포함한 의석 수, 범야권 192 ( 민주-민주연합 175 + 조국혁신 12 등 ) > 범여권 108
지역구 부분, 민주당의 호남 의존도 28 / 161 < 국힘당의 영남 의존도 60 / 90 , 현 여권은 역대 모든 선거에서 최하 약 50%에서 현재 약 66% 사이의 영남 의존도를 보였습니다.
--------------------------------------------------------------------------> 호남 지역구 총 의석수 28 < 영남 지역구 총 의석수 65, 호남-충청을 합한 의석 수 보다 영남이 더 많은 유리한 조건.
--------------------------------------------------------------------------> 영남에서 당선된 민주당 포함한 야권, 냉정하게 본다면 영남권에 이주한 다른 지역 사람들 표심도 결정적 역활.
현여권은 지난 총선과 이번 총선 모두에서, 영남을 제외한 지역에선 불과 25~30석 정도만 지역구 의원 당선시킨 것.
---------------------------------------------------------------------------> 강원에서 6석 : 2석 우세 제외하면, 서울-경기-인천-충남-충북-대전-세종-대전-제주에서 압도당한 것.
---------------------------------------------------------------------------> 서울+인천+경기+충남북대전세종-제주 지역 합산해, 현 여권 지역구 당선 고작 24석 내외.
---------------------------------------------------------------------------> 서울-경기-인천, 수도권 총 의석수 122석 중 현 여권은 19석 당선. 이런 상태에서 제1당은 불가능.
수도권에서도 경부선호남선 철도와 고속도로가 지나는 서울 위성 지역은 거의 언제나 야권의 승리, 외지인 유입이 적은 경기도 외곽권에선 현여권의 승리.
--------------------------------------------------------------------------> 영남권 공단 포함 인구 밀집 지역과 수도권 인구 밀집 지역의 표심은 냉정하게 본다면 인구 이동의 결과.
--------------------------------------------------------------------------> 강원권은 수도권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외지인 인구 유입이 어려운 조건이라 현재의 보수 우세 성향이라고 판단해야.
--------------------------------------------------------------------------> 제주는 4.3에 대한 현여권 태도로 민주당에 대한 지지 강화되었다고 판단해야.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연령대 인구 구성 역시 마찬가지로 냉정하게 봐야.
--------------------------------------------> 유신두환 시절 초등고 시절을 보낸 이들이 이제 60대 진입 본격화,
--------------------------------------------> 그들은 기본적으로 현여권과 그 전신들인 자유-공화-민정 후계 정당들에 거부감. 즉 앞으론 60대 연령대에서 현여권의 우세 보장 안되는.
--------------------------------------------> 즉 현 상태 조건이 그대로 유지될 경우, 현여권은 10년 후면 사실상 우세한 인구 연령층이 아예 사라지는 상황을 마주할 수도.
--------------------------------------------> 지극 냉정하게 본다면,
--------------------------------------------> 현여권이 특정 지역 정서에만 의존하면서 + 과거의 고연령층 정서에만 의존 지속한다면, 세월과 함께 더욱 더 취약해질 것.
지난 약 40년 세월 대한민국 정치 지형은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 평민당 시절 현 야권은 호남과 서울을 제외하면 지역구 배출이 거의 없었고, 지역구 당선자 호남 의존도는 심각.
--------------------------------------------> 하지만 세월을 거치면서 현 민주당은 호남 지역구 의존도를 20% 아래 수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낮추며 수도권-중부권에서 지지 기반을 넓혔습니다.
--------------------------------------------> 그에 비한다면 현여권은 영남의 인구 우세라는 유리한 물리적 조건에 안주하며, 영남 지역구 의존이 2/3 거의 70% 수준 심각해진 것.
왜 서부전선 핵심지역에 약한 국군을 배치했을까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군요
채팅창 관리좀 합시다 간첩 들어와서 분란일의키는데 관리 안하십니까?
간첩이면 죽여야지 댓글이 문제야
유튜브 구조상 못막음 ㅋㅋㅋㅋㅋㅋ
댓글창...
자칭 보수라고 하고.
, 친미 친일 부르짖는 놈들이 간첩 일 확률 100 프로 ...
님이 말하는 간첩의 기준은 뭔가요?
미군과 독일군(아군이됨)의 콜라보 였으면 중공 북한군을 바르고 통일됐을텐데 국군은 여전히 발목만 잡는데도(지금까지도)화한번안내는 미군에 존경
이상타
ㅋㅋㅋ
15:15 런승만 주제에 ㅋㅋㅋ
경상도 가해자.사법부 모두 응징해야한다.이들이 피해자와 입장이 바뀌였다면 그런뻔뻔한 삶을 살겠는가.지금이라도 처벌하거나 국민적 심판을 받아야한다.이런 가해자놈들은 이런범죄를 저지르고도 이것을 무용담처럼 자랑하고 다녔을것이다.
감.... 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당시 정보부대는 다 얼어죽었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대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분이군요.
현시점에서 판단하는건 어리석은 판단이죠.
영화랑 현실은 다름 ㅋ
이승만 절마는 지는 제일먼저 튄놈이
근 현대사에서 김일성이 최악의 빌런이지만.... 그 다음 빌런 이승만을 국부로 세우려 하는 세력이 있다는게 너무 역겹다!
맥아더 보다는 워커장군이 원수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솔까 인천 상륙작전 빼면 맥아더는 우리 나라에 너무나도 영국(?)같은 인물이다!
맥아더가 워커 교체하고. 싶어서 교통사고로. 낸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워커장군: 중공군보다 무서운 대한민국 차수리😂
솔직히 미 공수부대들중
가장 아이콘인 부대는
101스크림 이글 공수사단이 아니라,
82 올 아메리칸 공수사단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