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영상은 '불교의 무아와 연기설'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설명하였습니다. 불교는 동양 철학의 큰 핵심 중 하나로 꼭 다뤄야 하지만, 내용이 방대하고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가급적 쉽게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불교(석가모니)의 '무아'를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브라만교와의 비교를 방법론으로 삼았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카스트 제도'를 중심으로 최대한 친근한 설명을 시도했습니다. '비교'를 방법론으로 채택하니 브라만교의 특징인 아트만과 윤회를 대조적으로 설명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윤회나 사후세계를 '철저히' 부정했다"(2:28)는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제가 영상에서 '윤회를 부정했다'고 표현한 것은 윤회의 주체가 없다는 무아(연기)의 깨달음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열반적정, 그 결과로 윤회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기 때문에 "부정한다"는 결과론적 서술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술에 거시적인 안목이 없었음을 인정합니다.
여러 댓글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해 주신 부분이 '아트만의 부정'이 아닌 '윤회의 부정'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윤회를 부정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는 공통적인 비판에 대해 저 또한 공감합니다. 윤회를 부정한 것이 아닌 '아트만'과 같은 윤회의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논했으며, 법을 깨쳐 더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이미 지은 업이 모두 소멸되면 윤회의 바퀴가 멈추게 된다고 논했습니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 교재 편찬위원회, 2011 참고) "불교는 단지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어느 날 끝없는 지복을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요소-영혼과 같은-가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유일한 종교이다"(A.Bareau) "불교는 영혼, 자아 또는 아트만과 같은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류 사상사에 우뚝 서 있다"(라훌라)는 말과 같죠. 윤회와 관련해서는 "윤회의 주체인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과보와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Vallee-Poussin)는 주장도 있으나, 많은 분들이 우려해 주신 것처럼 "윤회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업도 있고 과보도 있고 윤회 역시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합니다. (호진, 2015) 철학의 좋은 점은 다양한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점, 부족한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 시청하며 부족한 점을 댓글로 채워주시면, 제가 놓친 점을 채워나갈 수 있어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댓글 의견은 모두 확인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기탄 없는 의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표현을 보면 오해가 아닌거 같네요.그냥 그렇게 알고있는듯.그리고 동국대의 업이 없어지면 윤회가 없어진다는 말도 틀린 말입니다.업은 아라한이 아닌한 끊임없이 생깁니다.아라한이 되도 이전의 무수한 업은 너무 많이 있습니다.업이 아니라 갈애가 없어져야 아라한이 되고 아라한이 죽으면 윤회가 멈춥니다.그게 열반입니다.수다원 이상의 성자가 되는 과정도 점점 갈애가 없어지는 과정입니다.갈애가 완전히 소멸되야 아라한이 됩니다.12연기에서도 애,취,유,생,노사 이렇게 나오죠.애,취즉 갈애가 있으면 태어남이 있게 됩니다.반대로 갈애가 없으면 태어남도 없습니다.우리나라 불교대학인 동국대가 이정도 수준인줄 몰랐네요.수준 미달입니다.
물리법칙이, 정보가, 생각이, 언어가 그렇게 교차되는 밀도지점이라고 생각하면 자아라는것이 독립개체로 보기 힘들지만, 그 모든것들의 반응체로써 주체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존재적 나약함은 인정할 수 있어도, 주체적 개체성을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윤회가 극단적으로 계층제를 정당화 한다며 무아는 극단적으로 염세주의를 정당화할 수있는것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고요 극단을 선호하는 사고 체계 내에서 중도의 지점은 매우 어렵게만 느껴지는군요
윤회의 개념도 재미있는것 같습니다. 단절적 의식으로 논하자면, 의식적 윤회는 유효하지 않아 보이나, 생물 진화적 관점에서는 그 유효성이 없지 않다라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윤희 안에서 선악의 개념을 걷어 내야겠지만, 생존의 방식면에서 선악을 논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선악의 개념을 진화론에 섞어 낸다면 윤회의 개념이 실제적이지 않다라고 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불교의 근본교리들을 들으면서 느낀것은 인간이 커다란 진리를 정립하여 만든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과학의 내용과도 비슷하고 너무나 세련된 논리라는 것… 모든 삼라만상은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고 집착하여 괴로움에 빠지지말고 만물의 변함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그 자체를 직시하라.
안녕하세요~ 구독자 입니다. 늘 좋은 영상을 제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29 에서 언급하신 "석가모니는 윤회나 사후 세계를 철저히 부정했습니다" 에서 그가 윤회를 부정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언급하신 '연기'의 주요 인자가 관계,조건,원인, 결과 등으로 설명하셨는데 맞는 말씀이지만 12연기 체계를 보면 연기 사이클 자체가 '윤회'의 원인,조건,결과 등을 설명하고 있지요. 무명에서 생연노사로 이어지는 윤회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해탈'도 언급하셨는데 해탈이 즉 윤회(=괴로움)로 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하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 '나, 자아, 아트만' 이러한 단어는 철저히 객관화 되고 단순히 일반화 되어지기 어렵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삼법인 중 '제행무상'에서 보듯이 확정적인 나,자아 등은 애초 부터 없었지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이치(삼법인)를 체험하고 경험한 자에게 그러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다양한 지적, 영적 수준과 경험치에 따른 존재들이 공생하고 있습니다. 해서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경험한바 없는 존재들은 확정적이고 고정된 '나'를 추구하기에 괴로움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결국 불교의 '무아'란 그 단어가 내포하는 확정적 그 무엇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이름 지어진 그 모든 것은 고정된 형상이나 고형화된 구체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을 떠돌고 변하며 흐르는 유체와도 같기에 '무아' "나란 없다"가 아니고 굳이 표현하자면 '비아' "내가 아니다"가 되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조금더 말장난을 하자면 없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변화하는 무엇인가는 분명 있기에 '유아' 도 괜찮을 듯 하구요 단, 불교에서는 우리가 확정해 버리는 '나'로 말미암아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즉 확정적 '나'는 없음으로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그러면 집착에서 비롯된 '갈애' 끝없는 욕망이 식고 그 탐함이 줄어든 만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참고로 한 말씀 더 드리자면 ' 윤회가 있다고 치자, 그러면 무엇이 윤회하는 것인가?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이 확정적 의식이나 영혼, 혼령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정체화 되어있지 않은 정보 덩어리로 인식합니다. 그 실체는 우리가 생명활동을 영위하면서 일으킨 모든 '의도'와 '반응' 들 물론 여기엔 수많은 감정들이 개입되어 있겠지요 (갈애나 증오 같은) 그 의도와 반응의 정신작용은 단순한 육체적 습관처럼 습관화 되어 매우 강력한 경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 방향을 가진 힘이 계속 작용하게 되는데 그것을 바로 '식'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온' 색수상핵식의 바로 그 '식'이지요. '업식', '업력' 이런 표현들 만히 들어보셨을 텐데 여기서 '업'이 바로 '습관' 이지요. 결국 이 미스테리한 '경향성'이란 바로 작용이 시작된 '습관의 힘' 이렇게 생각하면 좀 쉽게 다가올 듯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 '식'이라는 정보저장 장치에 강렬한 우리의 모든 습관적 경향성을 각인하고 있습니다. 결국 누군지도 모르는 이 경향성이라는 것이 조건과 인연이 맞으면 잠시 "이게 나구나 "하고 한평생 또 살다가 다시 경향성, 그 자체로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손교수님, 감사드립니다. 상당수의 불자들도 잘 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 듯합니다. 불교는 윤회를 벗어나 극락에 가는 게 목적이라는... 자아가 없는 데 누가 극락에 가는 건가요??? 제대로 잡아주시는 분들이 있어야 중생들도 온전해지겠지요. 무아의 경지에 이르르면 해탈을 거쳐 열반에 드는 것인데.
결국 나는 누구인가? 내가 주어가 아닌 우주(우주 또는 무아))가 주어가 되어야 본질의 답을 찾을수 있을것같아요 나는 무아에서 시작한 의식덩어리임을 알야야, 나를 부정하고 본래로 돌아갈수 있습니다. 사람은 가짐을 타고나서 이런저런 상과 생각을가진 나의 형상을 나라고 알고 있어, 본래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나를 부정하고 나라는 상이 없어야 일체의 번뇌망상이 없는 뚝 끊어진 그자리 무아의 경지에 이릅니다. 좋은영상 감사드려요
불교 학자들은 싯다르타가 윤회를 부정했다고 단언하는 경향이 있는데 근본(초기)불교 경전에도 윤회나 사후세계는 석가모니에 의해 자주 언급되기에 경전을 보는 분들은 학자들의 주장과 괴리감을 느끼고 불교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12연기에도 태어남(생), 늙음과 죽음(노사)이 포함되어 있고 12연기 중의 하나의 과정을 끊지 않으면 연기의 순환은 계속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합니다. 나(아트만)이 실체가 아니듯 윤회 역시 실체가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정불변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12연기에 포함된 태어남과 죽음 역시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마찬가지로 윤회와 사후세계 역시 실체가 아닙니다. 해탈이란 윤회할 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 그럼으로 윤회가 끊어지는 것이죠. 실체하던 윤회가 끊기는 것이 아니고 애초에 실체가 아님을 봄으로써 윤회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사실 윤회를 별로 믿지 않는 현대인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을지 모르지만 윤회와 카스트라는 절대적인 세계관에서 살면서 그로 인해 괴로움을 겪었던 고대 인도인들에게는 윤회를 끊고 해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겠지요 브라만교(현 힌두교)도 브라만과의 합일을 통해 윤회를 끊는 것이 최종목표였죠. 근본적으로 초기경전에 윤회와 사후세계에 대한 언급이 많지만 석가모니가 나를 부정했듯이 윤회를 부정했다고 보는 것이 석가모니와 초기불교의 취지에 좀 더 맞다고 보고 싯다르타가 제법무아를 주장했지만 초기경전에서도 가상의 존재로서의 '나'는 계속 언급하고 사용하듯 윤회도 그렇게 보아야 전체적인 바른 불교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안하고 초기경전에 나온다고 윤회와 무아를 양립시키려고 하면 업이 윤회하느니 식이 윤회하느니 하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이상한 주장이 나오게 되는거죠.
윤회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지 윤회의 부정으로 착각한것 같네요.아라한처럼 윤회의 본질을 알고 수행하면 윤회를 벗어날수 있으니 당연히 윤회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정확한 수행에 따라 윤회를 끊을수 있죠. 윤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범부의 시각으로 설명한것이고 윤회가 없다는것은 성인의 경지라고 이해하면 좋을거 같네요
모든 중생들의 스승이 부처님이시니 석가모니부처님이 맞습니다. 불교를 믿든 안믿든.. 불교는 나의 불성을 발현하는 부처님의 성품 내얘기이기 믿어야겠지요. 믿지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팔만대장경이 있는데 중생들이 공부할 생각을 안하네요. 수준에 따른 모든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이니 이행도 수행도 있고 난행도 수행도 있으니 영원한 행복과 대자유를 위해 신해행증하시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초기불교 깨달음의 과위는 윤회의 횟수에 의해 결정됩니다. 일곱번미만이만 예류자(Stream winner) , 그리고 일래자(Once retunner), 불환자(Never retunner),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 아라한(Noble one)입니다. 철학하시는 분들이 불교 다루기를 꺼리는 이유가 이런 곳에 있습니다. 가령 부처님이 보리수나무아래서 깨닫기 전에 다른 차원의 존재를 보고 자기의 전생을을 봤다는 내용을 신화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말 사실을 말한 것인가? 선정에 들어가서 색계4선 무색계4선 그리고 구차제정까지의 수련방법은 과학적으로 검증이 가능한가? 경에 기술한 대로 천신이 찿아오고 천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들은 허구인가? 사실의 기술인가? 같은 문제는 상당히 난감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분들이나 불교학자분들은 이런 내용을 다 빼버리고 설명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결국 서양의 인식론과 비슷하게 불교를 설명하게 됩니다. 과학적 환원주의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지금의 시대는 티벳사자의 서에 나오는 내용도 말이 안되고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약에 빠져 헛것을 본것이나 동일한 정신작용의 산물로 평가를 하게 됩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임사체험의 사례, 4선정에서 자기의 전생을 본 사람들이나 환생의 문제는 아직 비과학의 영역이고 미신이라 치부되기 일 쑤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한다면 부처님은 경에서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하는 분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 당시에도 단멸론자(유물론자), 영원론자(상멸론자), 회의주의자(알수없다)들이 찿아옵니다. 죽어서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 했을 겁니다. 오온(색수상행식)이 죽어서 해체되면 끝이니 살아생전 쾌락을 즐기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 했을 겁니다. 불교의 반논리학(중관사상), 유식사상, 인식론은 철학하는 분들이면 반드시 다루어 보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나 위와같은 윤회와 삼계의 내용들이 있어서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더 깊이 들어가다보면 12지연기의 삼세양중인과설에 대한 논의, 중음신에 대한 논의와, 식(대승에선는 아뢰야식)의 윤회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5분철학에서 불교를 다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에요. 불교를 하나의 철학으로 다루는 입장에서는 윤회라든가, 기타 신화적인 부분들이 다루기 불편하죠. 어떻게 보면 (불교)철학을 이야기 한다면 비철학적인 부분은 빼는게 옳을지도 모르구요. 종교로서의 불교 입장과는 일치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불교철학이 서양에서는 중관학 위주로 발전하는지도 모르죠. 중관학은 논리학의 측면으로 다룰 수 있으니까요. 물론 티벳 불교 영향이기도 할거구요.
혼자 있고 싶은 맘에 달팽이처럼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다보면 그곳엔 모두가 있어 우리는 균사체처럼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 차단막은 내려지지 않으며 아무리 숨어도 언제나 니 옆엔 누군가가 한숨을 쉬고 누군가는 울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너의 삶에 완벽한 고요의 순간이란 절대 오지 않는다는 연기의 법칙
석가모니는 무아윤회를 가르쳤어요. 아트만 없는 윤회. 윤회에서 벗어나는 게 해탈. 해탈 mukti, moksha 이라는 말(당연히 브라만교에 있지요)이 본래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말이에요.그리고 석가모니는 삼라만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연기를 말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사람들이 확대해서 말한 것이지요. 중생의 삶이 연기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지면서 계속 윤회한다고 가르쳤어요. 아트만이 없으니 윤회란 없다는 논리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석가모니는 내가 아니라 나의 업을 이어받는 상속자가 태어난다고 했어요. 근본불교, 초기불교 경전 니까야에 분명히 나옵니다.
이게 자꾸 떠서 다른거 하며 대충 들었는데, 좋은 말이더군요. NPC처럼 살지 않기 위해 생각좀 하라는 얘기로 알고.. 그런데 모든게 연결되어 있다는건 대충 알겠는데, 마치 양희은의 깊은산속옹달샘 노래처럼. 서로 죽고 죽이는 다 이유 있는 그런 삶이 감정덩어리의 촉감을 위한 삶이라면 이 생은 이 지구의 감정더미들은 핵폭발로 사라져도 되겠구나 삶에 큰 의미는 없겠구나 공생을 힘들게 하는 이기적 감정덩어리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면 말이죠 허무한 생각도 드네요. 댓글 타고 들어가 본 마르크스 철학 강의 댓글들중 교조적이라며 지가 더 교조적인 감정덩어리도 보이고 그러고보니 완전히 이성적 존재란 열반에 들어야 가능한 듯 한데 아름답게 감정을 조절하면 그것도 이 짧은 생에 아름다운 경험이 아닐까 윤회로 환생해도 이전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할텐데 아쉽기도 하네요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환생시 그 일에 천재가 될거란 막연한 기대도 드네요.
근본불교도 윤회와 사후세계를 인정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본불교 또는 원시불교 초기불교 등은 빨리삼장인 니까야를 근본으로 하는데 다만, 힌두교의 윤회와 다르게 환생개념이 아닌 업에 의해 조건 지어진 윤회입니다. 즉, 고정된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업이 상속되는 개념입니다. 비유하면 우유에서 요구르트가 되지만 우유와 요구르트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우없인 요구르트가 나올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힌두교의 윤회와 다르지만 근본불교도 분명히 윤회를 인정합니다. 맛지마니까야(중아함경) 갈애 멸진의 긴 경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붓다는 상견常見도 단견斷見도 부정했습니다. 브라만교의 아트만을 부정한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으리라는 상견을 부정한 것이고요. 그렇다고 일체가 무상하기 때문에 연기 작용만이 있다고 말한다면 불교는 그 역시 부정합니다. 대승에서는 선형적 연기가 깨집니다. 그것은 뉴턴역학 까지만(불교식으로 말하면 현상계) 해당됩니다. 더욱 본질로 파고들면 이것과 저것의 연기성이 깨지기도 하며(굳이 불교가 아니라도 전자의 도약이나 쌍둥이 입자의 얽힘과 같은 경우로 충분히 입증), 이원화된 사물의 근거도 부정됩니다(선종제일공안 염화미소). 귀류논증파와 유식학파를 지나면 이와 같은 주장이 계속 펼쳐지므로(금강경과 반야심경), 초기불교 이후의 불교가 힌두교와 같이 윤회를 인정한다,라고 불교 철학을 단순화 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물론 이상한 종파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밀교와 방편화 된 신앙은 제외하고 대승의 주류인 선종과 교종을 중심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오히려 대승에서는 열반마저도 부정됩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기 때문입니다.
유익하고 너무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불교의 철학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연기설에 대해 궁금한 게 있는데, 모든 것이 인과관계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태초에 발생한 원인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단순한 고민일 수도 있겠지만, 인과관계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관계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충족시킬 수 없는 근거라고 생각됩니다. 연기설, 무아사상을 만들어서 무아지경에 오르고 싶어하는 이유 또한 궁금합니다. 스스로를 독립체라 정의내리는 좌뇌가 비활성화되고 우뇌가 활성화 되었을 때, 우주와 하나되는(연기설과 같은) 느낌이 든다는 책을 읽고 그 감정을 체험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 우뇌뿐인 감정이 정말 인간의 최종 목표에 근접해지는 수단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불교와 아트만의 관계가 더욱 혼란스러워 집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주체, 착한 일을 하면 내세에 복을 받고 악행을 하면 내세에 벌을 받는 개별 단위로서 나, 혹은 아트만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모든 것을 윤회가 아닌 연기로써 파악하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으로써 나 혹은 아트만은 없다고 정의하는 것도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불교에는 본생담(본생경)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경전이 되어 버립니다. 본생담은 부처의 수많은 전생들이 오랫동안 덕업을 쌓았기 때문에 결국 부처로 탄생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었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최소한 윤회의 단위가 되는 나 혹은 아트만의 개념을 상정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본생경은 초기불교 팔리어 경전 자타카부터 존재합니다. 여기서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처가 윤회의 주체인 아트만을 부정했다면 본생경은 불교에 있을 수가 없는 경전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대승불교에서 전생, 현생, 내생을 말하는 것조차 부처의 가르침을 위배하는 것이 됩니다. 한발 물러서, 힌두교는 윤회이고 불교는 연기라고 인정하여도 전생과 내생, 덕업의 결과와 악업의 결과를 말함에 있어서 연기가 윤회와 대동소이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차이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사상가들은 왜 내가 경험하고 고착화된 것들을 파괴하는가? ㅋㅋ 너무 좋다 양자얽힘을 철학으로 설명하시는 건가요? 아님 철학을 양자얽힘으로 설명하시는 건가요? 기대만땅입니다 다음엔 동서양의 차이를 이야기해보시는 건 어떠실지요 예전 다큐로본 “동과서”가 있는데 상당히 흥미 롭더라고요. 명사로보는 서양과 동사로보는 동양 같은 주제로 이야기 하더군요 .
욕망을 제어하므로 내삶을 살수있다 욕망을 따르고 채워가는 나는 없다 매일 남의 생명으로 내생명을 유지하며 이세상은 연기적 관계이다 주장함 잡아먹히면서 과연 이런 주장에 동의할까 어림턱도 없는 소리 불교는 소박하게 고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결말이 기다리고있음
인도 불교는 아시아로만 전파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서양으로도 전파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 때 인도 문화, 페르시아 문화, 그리스 문화가 상호교류하였습니다. 아라비아숫자는 원래 인도 문화였습니다. 인격신의 중세 가톨릭에 반기를 든 반기독교 사상(예컨대 스피노자)에도 불교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밀린다팡하(milindapañha)》는 ‘밀린다의 질문’이라는 뜻이고, 한역은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서북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의 국왕 밀린다(milinda)와 인도의 비구 나가세나(ⓟnāgasena, 那先)가 불교에 대해 문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적 사유와 불교적 사유의 대비라는 점에서 중요시되고, 불교의 실천을 상좌부의 입장에서 밝히고 있다. 내용은 밀린다와 나가세나의 전생 이야기를 하는 부분, 두 사람이 3일간 대화하면서 서로 스승과 제자가 되는 부분, 밀린다가 불교 교리에서 어려운 문제들을 질문하고 나가세나가 답하는 부분, 그리고 수행자가 지켜야 할 규칙을 비유로 밝히는 부분, 이렇게 네 부분으로 되어있다. 불교 신자가 아닌 왕이 그리스적 사유 방법으로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에게도 친밀감을 주고, 나가세나는 여러 가지 질문에 풍부한 비유로 명쾌하게 답하고 있다. 영혼, 개체의 구조, 윤회의 주체와 과보, 내세, 불교의 인식론과 심리학, 그리고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행론 등 다방면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100.daum.net/encyclopedia/view/189XX76000153 불교경전 요약 밀린다팡하 나선비구경, Milindapanha
안녕하세요.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이 채널로 철학을 접하며 삶의 이해가 깊어지는 애청자입니당😋 개인적으로 이번 영상을 보고 느낀점은 '썸넬을 비롯 소개되는 이미지들이 아주 흥미롭고 잠깐잠깐 흐르는 음악까지 아주 찰떡이라 내용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도움이된다'감사합니다.💕라는 점과 중간 중간 박사님 얼굴이^^ 갑자기 나와서^^ (아름다우셔서^^) 집중이 안되고^^ 흐름이 잠깐 멈칫하고 그랬어요^^ 박사님 얼굴 작게^^ 내용이나 흐름에 걸리지 않게 영상 제작해 주심 어떨까요?😂 댓글로 영상 내용에 대한 여러가지 다른 의견들을 보며 모두가 맞다고 생각했어요.^^ 예전같으면 나를 고집하고 나와 다른 많은 것에 '맞지않다'라고 했을테지만^^ 지금은 모두가 그들은 그들대로 옳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상에 관해 기탄없이 댓글 달라는 멘트보고 몇자 적었어요^^ 영상 제작 깊이 감사 드리고 앞으로도 기대 많이하고 응원합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근기에 따라 설해졌지요 모든 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자신을 과대평가 하지 않기 바랍니다.경험상 논리로 접근하기 보단 수행을 하면서 점차로 깊은 이해에 도달하리라 봅니다.참고로 말씀드리면, 반야심경의 경우 지극히 기상 맑아 지혜로운 상태-見性의 상태가 아니고는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의문점. 무아가 되서 열반에 든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열반에 든 주체는 내가 아니고 남임가요? 열반에 들어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는 것은 열반에 들어도 의식이 있었다는 건데 왜 내가 없다고 말하는지 이해할수가 없어요. 그리고. 어떤분 말로는 석가모니는 오온(생각감정오감)이 내가 아니다 라는 의미로 제법무아를 설명하셨지 실제로 내가 없다란 말씀은 경전 어디에도 없다 하셨는데 전 이 말이 더 철학적으로 더 자명함에 가까운것 같네요.
커다란 착각을 하시네요. 열반에 든 주체는 없어요. 중생의 가장 큰 맹점이 자아(주체)를 놓지 못하는 겁니다. 초기불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에서 죽으면 어떡하나? 하고 바들바들 떠는 사람들에게 우리종교를 믿으면 천당이나 극락에 간다고 꼬드깁니다. 그런 불안한 마음을 버리면 곧 해탈 열반입니다. 열반에 들어 무한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 어떤 느낌도 없습니다. 왠지 불안하시죠? 불안하다면 자아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겁니다. 놓아 버리세요.
1. 식이 윤회하는 상태에서 무아를 깨닫고 윤회를 벗어나면 진리를 깨닫는다 2. 일관성있는 형식체계에서 참이지만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 엄밀하진 않지만 1과2의 유사성(진리는 참거짓으로 판단하는 형식체계보다 더 큰체계)보면 시대는 달라도 사람이 생각하는건 비슷한거 같네요 더 일찍 깨달은 부처가 더 대단하긴하지만
손미애박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자아라고 일컬어지는 게 저는 이 시대의 우리 말로 따져보면 자아라기보다는 "자기의 영혼" 이라고 번역을 하는게 맞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자아라는 개념이 원래 중국문자의 개념이고 그것도 굉장히 오래 전에 사용된 개념인데 현대의 한국의 개념 자아와 불교 경전의 자아를 동일하게 간주하면 여러가지 혼동되는 점이 있지 않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원체 우리말 중 추상적인 개념들은 모두 한자화한 명사를 사용하여 "자기의 영혼"도 이게 우리말이라고 해야 맞는 것인지 헤깔리네요. 정말로 자아는 없나봅니다. ㅎㅎ
부처님은 윤회와 업보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르고 저지른 살생엔 과보가 없다고 하셨기 때문에 불교의 인과율은 물리세계의 인과율과 다릅니다. 맛지마니까야에 나온 부처님 말씀: 바라문 학도여,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읜다.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내려놓는다. 양심적이고 동정심이 있으며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여 머문다. 그는 이런 업을 짓고 완성하여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에 생겨난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에 태어나지 않고 만일 인간으로 온다면 어떤 곳에 태어나더라도 그의 수명은 길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실제 물리적으로도 세상은 텅 비어 있죠. 그리고 부처님이 윤회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제가 몰랐군요. 자아가 있으면 계속 태어난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내가 여기 태어난 이유는 무아를 깨달아 윤회의 고리를 끊어 이 세상에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라는게 불교의 가르침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는 철학이 아니라 엄연히 종교입니다. 불교를 부정하면 불교신자들 눈돌아갑니다. 비밀을 이야기 하면 기득권이 권익을 얻을수가 없으니 욕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와서야 신비주의적 색채를 최대한 지우면서(그럼에도 윤회, 영혼, 사후세계는 포기못함. 왜 포기못할까?) 과학적인 척 이야기 하는데 종교입니다. 혹세무민 많이 했습니다. 정도전이 괜히 불교를 팼을까요. 지금와서 아닌척 하는것 뿐입니다. 불교도 결국 사후의 이야기는 형이상학적 이야기고 보이는것도 증명하는것도 아닌 그냥 믿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은 믿어야 하는겁니다. 전 싯타르타 좋아하고 그의 깨달음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100% 신뢰하지 않으며(애초에 불경이 그가 죽은 후 꽤나 시간이 지난후에나 적혔는데 그게 진짜 그의 말인지 첨삭 됐는지 어찌 알 일) 그 후에 각종 무언가들이 섞인 불교는 믿지 않음.
부처님이 윤회나 사후세계를 철저히 부정했다는 주장은 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윤회(생사윤회)를 기본적인 교리로 삼고 있으며, 이는 중생이 무명의 상태에서 생사를 반복한다는 개념입니다. 부처님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 즉 열반을 가르치셨습니다. 윤회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부처님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부처님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논의한 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도윤회'의 개념은 사후에 중생이 업에 따라 다양한 상태로 다시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러한 논의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현실에서 고통을 벗어나는 실천과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윤회나 사후 세계에 대한 가르침은 결국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따라서 "철저히 부정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처님은 윤회의 법칙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수행을 강조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올바릅니다.
잘 보았습니다. 다만 부처님은 윤회를 재해석한 것이지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아트만이 윤회한다는 바라문교와 대비하여, 물질, 느낌, 이미지, 행위, 갈애로 인해 일어나는 자아에 대한 무아윤회 찰나윤회를 말씀하시고 전생에 대해서도 니까야 도처에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자아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윤회가 아니라 성품의 상속이 이루어지는 윤회이지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jean1334 '나'라고 할만 것으로서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엇이 윤회의 주체라고 말할 수도 없죠. 그렇다고 윤회라는 현상 자체가 없는 것도 아니죠. 그래서 말씀하신대로 무아윤회라고 하는 것인데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은거 같습니다. 근데 윗 분이 말씀하신 '성품(종자)의 상속'이라는 개념은 유식이나 설일체유부적인 이해인거 같습니다만..
저는 불교의 무아 힌두교 아트만, 종교적 구분은 있지만 실질적의미가 있나 싶어요 자아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세계가 만들어지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세계가 만들어지는데 일체유심조가 아닐까합니다 동시성이론도 범아일여가 되면 그또한 동시성이 발현되지않을까요 개념없이 떠든건 아닌가 하지만 이거 항상 궁금했어요
빅뱅이 발생할 즈음에 나는 여기 저기 흩어진 먼지와 가스였다. 백년 안에 나는 시체가 되고, 백억년 후에 그 시체는 먼지와 가스가 되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을 것이다. 만물은 먼지와 가스다. 잡초, 바퀴벌레, 강아지와 나는 평등하다. 내 빤쓰는 지가 나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무덤에 들어갈 시체가 존엄하다면 그 시체가 두르고 있는 빤쓰도 존엄한거다. 나는 딱 내가 입고있는 빤쓰만큼만 존엄하다.
5분 뚝딱 철학 너무 재밌어요~ 그런데 불교에서 윤회를 부정하면 그 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만큼 윤회가 중요한 핵심 신념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붓다가 윤회를 부정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생각해보니, 불교를 다룬 책들이 경전 위주로 스님들에 의해 많이 쓰여진 것 같은데, 철학 하시는 분들의 눈으로 본 사상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younghan6259 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럼 결국 윤회라는 것은 브라만의 절대적인 진리라는거군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같은. 부처가 윤회를 부정했다는 것은 윤회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생각해도 될까요? 열반을 이야기 했으니까요.
@@siriusa1207 초기불교 경전에서 부처님이 직접설한경전에서 윤회는 나옵니다 많은곳에서 윤회를 얘기합니다 다만 절대 변하지 않는 내가 있어서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것이 아니라 사성제와 12연기의 진리를 체득함으로서 열반으로 나아가면 다시는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 했습니다 열반을 성취 못한 일반범부는 계속해서 태어나고 늙고죽고하는 윤회를 반복한다고 초기불교경전 여러곳에 나와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침은 열반을 통한 윤회의 사슬을 끝는게 목표입니다
다발과 무더기를 한순간의 감정상태 같은 조합들로만 보는게 아니라 모든 시간대의 변화들까지 합쳐서 한 무더기로 본다면 어떤 조합도 좋기만 한 조합, 나쁘기만 한 조합은 없을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네요... 어쩌면 그런 무더기들을 자아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에 대해서 무아로 가게 해야 진정한 자아로 가는것이기 때문에 싯다르타는 무아를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영상은 '불교의 무아와 연기설'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설명하였습니다. 불교는 동양 철학의 큰 핵심 중 하나로 꼭 다뤄야 하지만, 내용이 방대하고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가급적 쉽게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불교(석가모니)의 '무아'를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브라만교와의 비교를 방법론으로 삼았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카스트 제도'를 중심으로 최대한 친근한 설명을 시도했습니다.
'비교'를 방법론으로 채택하니 브라만교의 특징인 아트만과 윤회를 대조적으로 설명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윤회나 사후세계를 '철저히' 부정했다"(2:28)는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제가 영상에서 '윤회를 부정했다'고 표현한 것은 윤회의 주체가 없다는 무아(연기)의 깨달음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열반적정, 그 결과로 윤회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기 때문에 "부정한다"는 결과론적 서술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술에 거시적인 안목이 없었음을 인정합니다.
여러 댓글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해 주신 부분이 '아트만의 부정'이 아닌 '윤회의 부정'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윤회를 부정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는 공통적인 비판에 대해 저 또한 공감합니다.
윤회를 부정한 것이 아닌 '아트만'과 같은 윤회의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논했으며, 법을 깨쳐 더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이미 지은 업이 모두 소멸되면 윤회의 바퀴가 멈추게 된다고 논했습니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 교재 편찬위원회, 2011 참고)
"불교는 단지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어느 날 끝없는 지복을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요소-영혼과 같은-가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유일한 종교이다"(A.Bareau)
"불교는 영혼, 자아 또는 아트만과 같은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류 사상사에 우뚝 서 있다"(라훌라)는 말과 같죠.
윤회와 관련해서는 "윤회의 주체인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과보와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Vallee-Poussin)는 주장도 있으나, 많은 분들이 우려해 주신 것처럼 "윤회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업도 있고 과보도 있고 윤회 역시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합니다. (호진, 2015)
철학의 좋은 점은 다양한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점, 부족한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 시청하며 부족한 점을 댓글로 채워주시면, 제가 놓친 점을 채워나갈 수 있어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댓글 의견은 모두 확인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기탄 없는 의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게 아니라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영상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표현을 보면 오해가 아닌거 같네요.그냥 그렇게 알고있는듯.그리고 동국대의 업이 없어지면 윤회가 없어진다는 말도 틀린 말입니다.업은 아라한이 아닌한 끊임없이 생깁니다.아라한이 되도 이전의 무수한 업은 너무 많이 있습니다.업이 아니라 갈애가 없어져야 아라한이 되고 아라한이 죽으면 윤회가 멈춥니다.그게 열반입니다.수다원 이상의 성자가 되는 과정도 점점 갈애가 없어지는 과정입니다.갈애가 완전히 소멸되야 아라한이 됩니다.12연기에서도 애,취,유,생,노사 이렇게 나오죠.애,취즉 갈애가 있으면 태어남이 있게 됩니다.반대로 갈애가 없으면 태어남도 없습니다.우리나라 불교대학인 동국대가 이정도 수준인줄 몰랐네요.수준 미달입니다.
추가설명 감사합니다. 불교를 신앙이 아닌 철학,교양으로 접하는 분들께 좋은 컨텐츠가 될듯합니다
물리법칙이, 정보가, 생각이, 언어가 그렇게 교차되는 밀도지점이라고 생각하면 자아라는것이 독립개체로 보기 힘들지만, 그 모든것들의 반응체로써 주체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존재적 나약함은 인정할 수 있어도, 주체적 개체성을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윤회가 극단적으로 계층제를 정당화 한다며
무아는 극단적으로 염세주의를 정당화할 수있는것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고요
극단을 선호하는 사고 체계 내에서
중도의 지점은 매우 어렵게만 느껴지는군요
윤회의 개념도 재미있는것 같습니다. 단절적 의식으로 논하자면, 의식적 윤회는 유효하지 않아 보이나, 생물 진화적 관점에서는 그 유효성이 없지 않다라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윤희 안에서 선악의 개념을 걷어 내야겠지만, 생존의 방식면에서 선악을 논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선악의 개념을 진화론에 섞어 낸다면 윤회의 개념이 실제적이지 않다라고 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불교의 근본교리들을 들으면서 느낀것은 인간이 커다란 진리를 정립하여 만든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과학의 내용과도 비슷하고 너무나 세련된 논리라는 것… 모든 삼라만상은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고 집착하여 괴로움에 빠지지말고 만물의 변함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그 자체를 직시하라.
드디어 기다리던 싯다르타 의 철학!!
동양철학 시작할때 가장 기대했던 불교철학입니다. 많은 서양 철학자들이 불교를 극찬했습니다.
손미애박사는 불교의 핵심을 정확하게 알고 설명하시네요 고맙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불교의 핵심을 보여 주셔서 감사 합니다. 또 기대합니다.
양자역학을 알면 부처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불교이론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양자역학을 공부하고 불교가 쉬워졌어요
이해가 쏙쏙쏙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참 잘 정리된 영상입니다
감사합니다
구독 꾹~
계속 시청할 예정입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 입니다. 늘 좋은 영상을 제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29 에서 언급하신 "석가모니는 윤회나 사후 세계를 철저히 부정했습니다"
에서 그가 윤회를 부정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언급하신 '연기'의 주요 인자가 관계,조건,원인, 결과 등으로 설명하셨는데 맞는 말씀이지만 12연기 체계를 보면 연기 사이클 자체가 '윤회'의 원인,조건,결과 등을 설명하고 있지요.
무명에서 생연노사로 이어지는 윤회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해탈'도 언급하셨는데 해탈이 즉 윤회(=괴로움)로 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하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 '나, 자아, 아트만' 이러한 단어는 철저히 객관화 되고 단순히 일반화 되어지기 어렵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삼법인 중 '제행무상'에서 보듯이 확정적인 나,자아 등은 애초 부터 없었지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이치(삼법인)를 체험하고 경험한 자에게 그러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다양한 지적, 영적 수준과 경험치에 따른 존재들이 공생하고 있습니다.
해서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경험한바 없는 존재들은 확정적이고 고정된 '나'를 추구하기에 괴로움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결국 불교의 '무아'란 그 단어가 내포하는 확정적 그 무엇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이름 지어진 그 모든 것은 고정된 형상이나 고형화된 구체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을 떠돌고 변하며 흐르는 유체와도 같기에
'무아' "나란 없다"가 아니고 굳이 표현하자면 '비아' "내가 아니다"가 되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조금더 말장난을 하자면 없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변화하는 무엇인가는 분명 있기에 '유아' 도 괜찮을 듯 하구요
단, 불교에서는 우리가 확정해 버리는 '나'로 말미암아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즉 확정적 '나'는 없음으로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그러면 집착에서 비롯된 '갈애' 끝없는 욕망이 식고 그 탐함이 줄어든 만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참고로 한 말씀 더 드리자면 ' 윤회가 있다고 치자, 그러면 무엇이 윤회하는 것인가?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이 확정적 의식이나 영혼, 혼령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정체화 되어있지 않은 정보 덩어리로 인식합니다.
그 실체는 우리가 생명활동을 영위하면서 일으킨 모든 '의도'와 '반응' 들 물론 여기엔 수많은 감정들이 개입되어 있겠지요 (갈애나 증오 같은)
그 의도와 반응의 정신작용은 단순한 육체적 습관처럼 습관화 되어 매우 강력한 경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 방향을 가진 힘이 계속 작용하게 되는데 그것을 바로 '식'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온' 색수상핵식의 바로 그 '식'이지요.
'업식', '업력' 이런 표현들 만히 들어보셨을 텐데 여기서 '업'이 바로 '습관' 이지요.
결국 이 미스테리한 '경향성'이란 바로 작용이 시작된 '습관의 힘' 이렇게 생각하면 좀 쉽게 다가올 듯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 '식'이라는 정보저장 장치에 강렬한 우리의 모든 습관적 경향성을 각인하고 있습니다.
결국 누군지도 모르는 이 경향성이라는 것이 조건과 인연이 맞으면 잠시 "이게 나구나 "하고 한평생 또 살다가 다시 경향성, 그 자체로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항상 잘 시청하고 있어요.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
선생님 저는 이런 양자역학 + 철학 시리즈가 너무 좋습니다.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많이 해주세요!!!
손교수님, 감사드립니다. 상당수의 불자들도 잘 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 듯합니다. 불교는 윤회를 벗어나 극락에 가는 게 목적이라는... 자아가 없는 데 누가 극락에 가는 건가요??? 제대로 잡아주시는 분들이 있어야 중생들도 온전해지겠지요. 무아의 경지에 이르르면 해탈을 거쳐 열반에 드는 것인데.
내용도 좋고 목소리도 너무 좋으십니다!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귀한 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분은 저 시대에 저걸 어떻게 이해했을까 지금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제서야 조금씩은 밝혀지고 있던 것들을
결국 나는 누구인가? 내가 주어가 아닌 우주(우주 또는 무아))가 주어가 되어야 본질의 답을 찾을수 있을것같아요
나는 무아에서 시작한 의식덩어리임을 알야야, 나를 부정하고 본래로 돌아갈수 있습니다. 사람은 가짐을 타고나서 이런저런 상과 생각을가진 나의 형상을 나라고 알고 있어, 본래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나를 부정하고 나라는 상이 없어야 일체의 번뇌망상이 없는 뚝 끊어진 그자리 무아의 경지에 이릅니다. 좋은영상 감사드려요
그대는 내가없어진 뚝끊어진 그자리를 내세우는데 그대는 뚝귾어진생각에 붇잡혀있군요 달가르킨손을 잊어야 평상심이 되는것을~~~.
불교 학자들은 싯다르타가 윤회를 부정했다고 단언하는 경향이 있는데 근본(초기)불교 경전에도 윤회나 사후세계는 석가모니에 의해 자주 언급되기에 경전을 보는 분들은 학자들의 주장과 괴리감을 느끼고 불교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12연기에도 태어남(생), 늙음과 죽음(노사)이 포함되어 있고 12연기 중의 하나의 과정을 끊지 않으면 연기의 순환은 계속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합니다.
나(아트만)이 실체가 아니듯 윤회 역시 실체가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정불변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12연기에 포함된 태어남과 죽음 역시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마찬가지로 윤회와 사후세계 역시 실체가 아닙니다.
해탈이란 윤회할 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 그럼으로 윤회가 끊어지는 것이죠.
실체하던 윤회가 끊기는 것이 아니고 애초에 실체가 아님을 봄으로써 윤회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사실 윤회를 별로 믿지 않는 현대인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을지 모르지만
윤회와 카스트라는 절대적인 세계관에서 살면서 그로 인해 괴로움을 겪었던 고대 인도인들에게는 윤회를 끊고 해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겠지요
브라만교(현 힌두교)도 브라만과의 합일을 통해 윤회를 끊는 것이 최종목표였죠.
근본적으로 초기경전에 윤회와 사후세계에 대한 언급이 많지만
석가모니가 나를 부정했듯이 윤회를 부정했다고 보는 것이 석가모니와 초기불교의 취지에 좀 더 맞다고 보고
싯다르타가 제법무아를 주장했지만 초기경전에서도 가상의 존재로서의 '나'는 계속 언급하고 사용하듯 윤회도 그렇게 보아야 전체적인 바른 불교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안하고 초기경전에 나온다고 윤회와 무아를 양립시키려고 하면 업이 윤회하느니 식이 윤회하느니 하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이상한 주장이 나오게 되는거죠.
손미애박사는 불교의 핵심을 정확하게 알고 설명하시네요 마치 깨달음을 얻은 선사처럼. 기대하겠습니다.
윤회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지 윤회의 부정으로 착각한것 같네요.아라한처럼 윤회의 본질을 알고 수행하면 윤회를 벗어날수 있으니 당연히 윤회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정확한 수행에 따라 윤회를 끊을수 있죠.
윤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범부의 시각으로 설명한것이고 윤회가 없다는것은 성인의 경지라고 이해하면 좋을거 같네요
모든 중생들의 스승이 부처님이시니 석가모니부처님이 맞습니다.
불교를 믿든 안믿든..
불교는 나의 불성을 발현하는 부처님의 성품 내얘기이기 믿어야겠지요. 믿지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팔만대장경이 있는데 중생들이 공부할 생각을 안하네요. 수준에 따른 모든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이니 이행도 수행도 있고 난행도 수행도 있으니 영원한 행복과 대자유를 위해 신해행증하시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원효스님은 이런 걸 바랐던 건 아니지 않을까요?
새로운분도 잘 설명해주기고 점점 더 심오하고 넓게 진리의 영역의 접근과 그 소개에대한 기대가 커집니다
명쾌한 강의 감사드립니다
설명을 쉽게 잘 해주십니다
목소리도 안정감이 있어요
초기불교 깨달음의 과위는 윤회의 횟수에 의해 결정됩니다. 일곱번미만이만 예류자(Stream winner) , 그리고 일래자(Once retunner), 불환자(Never retunner),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 아라한(Noble one)입니다. 철학하시는 분들이 불교 다루기를 꺼리는 이유가 이런 곳에 있습니다.
가령 부처님이 보리수나무아래서 깨닫기 전에 다른 차원의 존재를 보고 자기의 전생을을 봤다는 내용을 신화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말 사실을 말한 것인가? 선정에 들어가서 색계4선 무색계4선 그리고 구차제정까지의 수련방법은 과학적으로 검증이 가능한가? 경에 기술한 대로 천신이 찿아오고 천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들은 허구인가? 사실의 기술인가? 같은 문제는 상당히 난감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분들이나 불교학자분들은 이런 내용을 다 빼버리고 설명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결국 서양의 인식론과 비슷하게 불교를 설명하게 됩니다. 과학적 환원주의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지금의 시대는 티벳사자의 서에 나오는 내용도 말이 안되고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약에 빠져 헛것을 본것이나 동일한 정신작용의 산물로 평가를 하게 됩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임사체험의 사례, 4선정에서 자기의 전생을 본 사람들이나 환생의 문제는 아직 비과학의 영역이고 미신이라 치부되기 일 쑤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한다면 부처님은 경에서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하는 분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 당시에도 단멸론자(유물론자), 영원론자(상멸론자), 회의주의자(알수없다)들이 찿아옵니다.
죽어서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 했을 겁니다. 오온(색수상행식)이 죽어서 해체되면 끝이니 살아생전 쾌락을 즐기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 했을 겁니다.
불교의 반논리학(중관사상), 유식사상, 인식론은 철학하는 분들이면 반드시 다루어 보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나 위와같은 윤회와 삼계의 내용들이 있어서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더 깊이 들어가다보면 12지연기의 삼세양중인과설에 대한 논의, 중음신에 대한 논의와, 식(대승에선는 아뢰야식)의 윤회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5분철학에서 불교를 다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에요. 불교를 하나의 철학으로 다루는 입장에서는 윤회라든가, 기타 신화적인 부분들이 다루기 불편하죠. 어떻게 보면 (불교)철학을 이야기 한다면 비철학적인 부분은 빼는게 옳을지도 모르구요. 종교로서의 불교 입장과는 일치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불교철학이 서양에서는 중관학 위주로 발전하는지도 모르죠. 중관학은 논리학의 측면으로 다룰 수 있으니까요. 물론 티벳 불교 영향이기도 할거구요.
크! 너무 좋은 콘텐츠와 설명 감사합니다!
멋집니다!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혼자 있고 싶은 맘에 달팽이처럼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다보면
그곳엔 모두가 있어 우리는 균사체처럼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
차단막은 내려지지 않으며 아무리 숨어도 언제나 니 옆엔 누군가가 한숨을 쉬고 누군가는 울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너의 삶에 완벽한 고요의 순간이란 절대 오지 않는다는 연기의 법칙
윤회,아트만 이런것들은 곁가지. 석가의 깨달음은 緣起에서 출발합니다.그 결정체가 無我이고요..
손박사님이 불교를 신앙으로 안보고 궁극적인 가르침으로 본다는 증거가 글속에 담겨있습니다.앞으로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깨달음을 얻은 선사와 동급 수준입니다.
석가모니는 무아윤회를 가르쳤어요. 아트만 없는 윤회. 윤회에서 벗어나는 게 해탈. 해탈 mukti, moksha 이라는 말(당연히 브라만교에 있지요)이 본래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말이에요.그리고 석가모니는 삼라만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연기를 말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사람들이 확대해서 말한 것이지요. 중생의 삶이 연기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지면서 계속 윤회한다고 가르쳤어요. 아트만이 없으니 윤회란 없다는 논리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석가모니는 내가 아니라 나의 업을 이어받는 상속자가 태어난다고 했어요. 근본불교, 초기불교 경전 니까야에 분명히 나옵니다.
@@혜진박-i1v 그럼 초기불교 근본붉교 경전은 무엇이 있나요?
@@혜진박-i1v 그럴 줄 알았어요. 제 글에 댓글 달 게 아니라 이 영상에서 근본불교라고 말하는 걸 지적했어야죠.
@@혜진박-i1v 그래도 연대로 보면 니까야 쪽이 가장 오래됬다고 보입니다.더 오래된 것은 아직 없르니 니까야를 인정하는 것이겠죠.그에비해 대승의 경전들은 그냥 후대의 소설책에 가깝죠.신뢰성이 더 떨어지죠.
@@혜진박-i1v 책으로 언제 쓰여졌는지는 모르지만 부처님 사후 제자들에 의해 노래처럼 계속 암송된 것으로 아는데요.서양에서도 대승경전은 별로 안쳐주자나요.
@@혜진박-i1v 암송된 거면 조금씩 다를 수는 있겠죠.근데 그런 경전에도 대승같은 판타지 같은 내용은 안나오는데요.그러니 서양에서도 안쳐주는 거죠.
태풍 모습 같은 그림이 흥미롭네요
영상 잘보았읍니다
이것이 진짜 불교다
감사합니다 🙏
석가모니는 감각은 살고 죽을수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사가 없다고했다. 손을 벽에다 갖다대면 벽에서 생기는감각인가 손에서 생기는감각인가.
이게 자꾸 떠서 다른거 하며 대충 들었는데, 좋은 말이더군요.
NPC처럼 살지 않기 위해 생각좀 하라는 얘기로 알고..
그런데 모든게 연결되어 있다는건 대충 알겠는데,
마치 양희은의 깊은산속옹달샘 노래처럼.
서로 죽고 죽이는 다 이유 있는 그런 삶이 감정덩어리의 촉감을 위한 삶이라면
이 생은 이 지구의 감정더미들은 핵폭발로 사라져도 되겠구나
삶에 큰 의미는 없겠구나
공생을 힘들게 하는 이기적 감정덩어리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면 말이죠
허무한 생각도 드네요.
댓글 타고 들어가 본 마르크스 철학 강의 댓글들중 교조적이라며 지가 더 교조적인 감정덩어리도 보이고
그러고보니 완전히 이성적 존재란 열반에 들어야 가능한 듯 한데
아름답게 감정을 조절하면 그것도 이 짧은 생에 아름다운 경험이 아닐까
윤회로 환생해도 이전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할텐데 아쉽기도 하네요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환생시 그 일에 천재가 될거란 막연한 기대도 드네요.
다시태어나는게 아니군요
이제 맘대로 하고 살아야겄네요
아주 유익하고 훌륭한 영상입니다. 바야흐로 21세기는 영성 개화의 시대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소 궁금했던 내용인데 정리가 잘 되어 있네요.
근본불교도 윤회와 사후세계를 인정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본불교 또는 원시불교 초기불교 등은 빨리삼장인 니까야를 근본으로 하는데 다만, 힌두교의 윤회와 다르게 환생개념이 아닌 업에 의해 조건 지어진 윤회입니다. 즉, 고정된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업이 상속되는 개념입니다. 비유하면 우유에서 요구르트가 되지만 우유와 요구르트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우없인 요구르트가 나올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힌두교의 윤회와 다르지만 근본불교도 분명히 윤회를 인정합니다. 맛지마니까야(중아함경) 갈애 멸진의 긴 경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설의 현상학과 불교의 유사성도 다루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후설의 현상학은 말 그대로 불교 유식학을 도용한 것이지요. 니체 이후 근대 철학자들은 이미 불교를 다 접했습니다.
성인, 성현은 깨달음의 뜻-(생명은 다르지 않다)을 전하려고 했지만
당시 시대를 지배하는 자들에 의해 각색되어 가르침과는 다른방향, 지배의 정당화로 갔다는게 안타깝네요
대표적으로 악법도 법이다
붓다는 상견常見도 단견斷見도 부정했습니다. 브라만교의 아트만을 부정한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으리라는 상견을 부정한 것이고요. 그렇다고 일체가 무상하기 때문에 연기 작용만이 있다고 말한다면 불교는 그 역시 부정합니다. 대승에서는 선형적 연기가 깨집니다. 그것은 뉴턴역학 까지만(불교식으로 말하면 현상계) 해당됩니다. 더욱 본질로 파고들면 이것과 저것의 연기성이 깨지기도 하며(굳이 불교가 아니라도 전자의 도약이나 쌍둥이 입자의 얽힘과 같은 경우로 충분히 입증), 이원화된 사물의 근거도 부정됩니다(선종제일공안 염화미소). 귀류논증파와 유식학파를 지나면 이와 같은 주장이 계속 펼쳐지므로(금강경과 반야심경), 초기불교 이후의 불교가 힌두교와 같이 윤회를 인정한다,라고 불교 철학을 단순화 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물론 이상한 종파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밀교와 방편화 된 신앙은 제외하고 대승의 주류인 선종과 교종을 중심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오히려 대승에서는 열반마저도 부정됩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기 때문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있으리라는 상견이지요..단견은 그반대ㅋ
@@성본성본 앗 실수로 거꾸로 적었네요ㅋㅋ 감사합니다 정정했습니다 :)
맞습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와따시다!
열반이란 사리분별 없는 상태.
감사합니다..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입니다
나는 있는 것이고 그 나가 세상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는다면 굳이 부처가 세상에 나서서 인간을 행곡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서양 철학이란것이 부처님말씀을 배치마킹한것 같습니다.
그옛날 부처님께선 이 모든걸 깨달으셨다는게 놀라울 뿐입니다.
유익하고 너무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불교의 철학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연기설에 대해 궁금한 게 있는데, 모든 것이 인과관계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태초에 발생한 원인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단순한 고민일 수도 있겠지만, 인과관계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관계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충족시킬 수 없는 근거라고 생각됩니다. 연기설, 무아사상을 만들어서 무아지경에 오르고 싶어하는 이유 또한 궁금합니다. 스스로를 독립체라 정의내리는 좌뇌가 비활성화되고 우뇌가 활성화 되었을 때, 우주와 하나되는(연기설과 같은) 느낌이 든다는 책을 읽고 그 감정을 체험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 우뇌뿐인 감정이 정말 인간의 최종 목표에 근접해지는 수단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불교를 이렇게 쉽게
깔끔하게 가르쳐주시니 감사합니다ㆍ
ㅎ ㅎ...관심폭발이네요.
부처님은 윤회를 부정했다는 학설도 강력하니 힘내세요.^^
그러면 불교와 아트만의 관계가 더욱 혼란스러워 집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주체, 착한 일을 하면 내세에 복을 받고 악행을 하면 내세에 벌을 받는 개별 단위로서 나, 혹은 아트만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모든 것을 윤회가 아닌 연기로써 파악하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으로써 나 혹은 아트만은 없다고 정의하는 것도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불교에는 본생담(본생경)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경전이 되어 버립니다. 본생담은 부처의 수많은 전생들이 오랫동안 덕업을 쌓았기 때문에 결국 부처로 탄생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었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최소한 윤회의 단위가 되는 나 혹은 아트만의 개념을 상정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본생경은 초기불교 팔리어 경전 자타카부터 존재합니다. 여기서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처가 윤회의 주체인 아트만을 부정했다면 본생경은 불교에 있을 수가 없는 경전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대승불교에서 전생, 현생, 내생을 말하는 것조차 부처의 가르침을 위배하는 것이 됩니다. 한발 물러서, 힌두교는 윤회이고 불교는 연기라고 인정하여도 전생과 내생, 덕업의 결과와 악업의 결과를 말함에 있어서 연기가 윤회와 대동소이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차이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당신을 힘깨나 쓰는 검사라 합시다.
당신이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되는 것 ...이것이 불교의 윤회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도둑질을 해도 도둑놈이 되지 않고 "검사"로 있는 것 ... 이것이 힌두교의 윤회입니다.
어떤 교설이 맞겠습니까?
부처, 고타마 싯다르타, 석가는 원래 불교에서 윤회도 자아도 없다고 봤군요. 쇼펜하우어는 사람 행동의 반복을 사람 성향이랑 연결지어 생각한 게 불교 뿐 아니라 인도철학 저서를 많이 참고한 탓...
사상가들은 왜 내가 경험하고 고착화된 것들을 파괴하는가? ㅋㅋ 너무 좋다
양자얽힘을 철학으로 설명하시는 건가요? 아님 철학을 양자얽힘으로 설명하시는 건가요? 기대만땅입니다
다음엔 동서양의 차이를 이야기해보시는 건 어떠실지요 예전 다큐로본 “동과서”가 있는데 상당히 흥미 롭더라고요. 명사로보는 서양과 동사로보는 동양 같은 주제로 이야기 하더군요 .
불교 사상에 관심이 많았는데,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강사님께서 불교를 다룬 다른 영상은 어디서 더 볼 수 있을까요?
브라만교 우파니샤드 불교 해석 최고 👍 💕 😍 😘
욕망을 제어하므로 내삶을 살수있다 욕망을 따르고 채워가는 나는 없다 매일 남의 생명으로 내생명을 유지하며 이세상은 연기적 관계이다 주장함 잡아먹히면서 과연 이런 주장에 동의할까 어림턱도 없는 소리 불교는 소박하게 고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결말이 기다리고있음
몇가지 질문드립니다. 서양철학은 논리학인데 동양철학은 논리학이 아니잖아요. 공자맹자등을 보면 논리와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서양에서 동양철학을 어떻게 보나요? 그리고 유교를 종교로 보아야 할지 명확한 답을 알고 싶은데 쉽게 설명한 글이 있을까요??
서양철학을 논리학이라고 한다면 유가철학은 윤리학 내지는 정치철학이라고 봐야죠. 내세를 믿고 구원을 얻고 복을 빈다는 측면에서 유교는 종교가 아니죠. 그런거에 관심이 없으니까요. 제사를 지낸다고 무언가를 믿는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인과관계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아왔는데 그렇다면 이런 텅 빈 세상마저 생겨난 이유가 있을 터이니 인생은 아무 이유없이 살다 가는 것 같다가도 아무 이유없이 세상에 던져지는 것 자체가 인과에서 벗어난 것이라 나름의 이유를 찾고자 합니다
인도 불교는 아시아로만 전파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서양으로도 전파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 때 인도 문화, 페르시아 문화, 그리스 문화가 상호교류하였습니다. 아라비아숫자는 원래 인도 문화였습니다. 인격신의 중세 가톨릭에 반기를 든 반기독교 사상(예컨대 스피노자)에도 불교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쇼펜하우어도 불교 사상을 좋아했고 헤르만 헤세는 불교를 주제로 소설을 쓰기도 했죠. 서양 근대 사상에 불교와 유교 등 동양 사상이 영향을 많이 줬다고 알고 있습니다.
《밀린다팡하(milindapañha)》는 ‘밀린다의 질문’이라는 뜻이고, 한역은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서북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의 국왕 밀린다(milinda)와 인도의 비구 나가세나(ⓟnāgasena, 那先)가 불교에 대해 문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적 사유와 불교적 사유의 대비라는 점에서 중요시되고, 불교의 실천을 상좌부의 입장에서 밝히고 있다.
내용은 밀린다와 나가세나의 전생 이야기를 하는 부분, 두 사람이 3일간 대화하면서 서로 스승과 제자가 되는 부분, 밀린다가 불교 교리에서 어려운 문제들을 질문하고 나가세나가 답하는 부분, 그리고 수행자가 지켜야 할 규칙을 비유로 밝히는 부분, 이렇게 네 부분으로 되어있다.
불교 신자가 아닌 왕이 그리스적 사유 방법으로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에게도 친밀감을 주고, 나가세나는 여러 가지 질문에 풍부한 비유로 명쾌하게 답하고 있다. 영혼, 개체의 구조, 윤회의 주체와 과보, 내세, 불교의 인식론과 심리학, 그리고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행론 등 다방면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100.daum.net/encyclopedia/view/189XX76000153
불교경전 요약
밀린다팡하
나선비구경, Milindapanha
@@leesyunecombi2789 밀린다왕문경이라는 표제의 서적을 말씀하시는거군요
부처님은 네팔 출신 입니다. 태어난곳이요.
부처님이 불교를 창시 했다기보다는,
수행자 공동체가 모여서, 수행을하다보니,
부처님의 제자들이 교단을 이루게되었습니다.
교단을 만들어서 교주가 되겠다는 욕망은,
없으신걸로 보입니다.
부처님은 고통과, 고통의 소멸을 이야기하셨고, 그 방법론이
사성제와 팔정도 입니다.
사정제 안에 연기법이 들어있습니다.
연기설과 쇼펜하우어의 충분근거율과 관계가 있을까요?
손미애박사님 반갑습니다
윤회 를 계속하다면
맨 처음 시작 , 첫번째 생은
어떤 조건이 주어져야 태어나는겁니까?
안녕하세요.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이 채널로 철학을 접하며 삶의 이해가 깊어지는 애청자입니당😋
개인적으로 이번 영상을 보고 느낀점은 '썸넬을 비롯 소개되는 이미지들이 아주 흥미롭고 잠깐잠깐 흐르는 음악까지 아주 찰떡이라 내용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도움이된다'감사합니다.💕라는 점과 중간 중간 박사님 얼굴이^^ 갑자기 나와서^^ (아름다우셔서^^) 집중이 안되고^^ 흐름이 잠깐 멈칫하고 그랬어요^^ 박사님 얼굴 작게^^ 내용이나 흐름에 걸리지 않게 영상 제작해 주심 어떨까요?😂
댓글로 영상 내용에 대한 여러가지 다른 의견들을 보며 모두가 맞다고 생각했어요.^^
예전같으면 나를 고집하고 나와 다른 많은 것에 '맞지않다'라고 했을테지만^^
지금은 모두가 그들은 그들대로 옳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상에 관해 기탄없이 댓글 달라는 멘트보고 몇자 적었어요^^
영상 제작 깊이 감사 드리고 앞으로도 기대 많이하고 응원합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근기에 따라 설해졌지요
모든 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자신을 과대평가 하지 않기 바랍니다.경험상 논리로 접근하기 보단 수행을 하면서 점차로 깊은 이해에 도달하리라 봅니다.참고로 말씀드리면, 반야심경의 경우
지극히 기상 맑아
지혜로운 상태-見性의 상태가 아니고는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의문점.
무아가 되서 열반에 든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열반에 든 주체는 내가 아니고 남임가요? 열반에 들어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는 것은 열반에 들어도 의식이 있었다는 건데 왜 내가 없다고 말하는지 이해할수가 없어요. 그리고. 어떤분 말로는 석가모니는 오온(생각감정오감)이 내가 아니다 라는 의미로 제법무아를 설명하셨지 실제로 내가 없다란 말씀은 경전 어디에도 없다 하셨는데 전 이 말이 더 철학적으로 더 자명함에 가까운것 같네요.
석가모니 유훈이 자등명법등명이라죠. 전해내려오는 석가모니 가르침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신남님처럼 스스로 판단해서 자명한 걸 취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솔직히 불교 이론이 모순점이 많습니다. 무아를 그렇게 천명한 사람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니..
커다란 착각을 하시네요.
열반에 든 주체는 없어요. 중생의 가장 큰 맹점이 자아(주체)를 놓지 못하는 겁니다. 초기불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에서
죽으면 어떡하나? 하고 바들바들 떠는 사람들에게 우리종교를 믿으면 천당이나 극락에 간다고 꼬드깁니다.
그런 불안한 마음을 버리면 곧 해탈 열반입니다.
열반에 들어 무한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 어떤 느낌도 없습니다. 왠지 불안하시죠? 불안하다면 자아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겁니다. 놓아 버리세요.
주자철학은 불교철학의 개념이나 용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바꾼 것 아닌가요?
적을 쳐부수기 위해 적의 개념을 가져왔죠. 하지만ㅁ 용어나 개념을 그대로 가져온건 아니구요, 큰 아이디어를 가져온거죠.
잘봤습니다
딕션이 어색하게 들려요. 예컨대 "삼" 등에 나오는 모음은 타,파,하 와 같이 뒤에 있는 모음이 높은 pitch를 갖는게 일반적인데 모음의 음높이가 낮은것이 정형적이지 않은 딕션이에요. 혹시 너무 긴장했거나 대본을 강박적으로 읽고있는건 아닌가요?
1. 식이 윤회하는 상태에서 무아를 깨닫고 윤회를 벗어나면 진리를 깨닫는다 2. 일관성있는 형식체계에서 참이지만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 엄밀하진 않지만 1과2의 유사성(진리는 참거짓으로 판단하는 형식체계보다 더 큰체계)보면 시대는 달라도 사람이 생각하는건 비슷한거 같네요 더 일찍 깨달은 부처가 더 대단하긴하지만
초기불교가 윤회를 부정한다고요?
정확한 말인가요?
초기경전에도 윤회를 설한 부분이 나옵니다.
손미애박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자아라고 일컬어지는 게 저는 이 시대의 우리 말로 따져보면 자아라기보다는 "자기의 영혼" 이라고 번역을 하는게 맞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자아라는 개념이 원래 중국문자의 개념이고 그것도 굉장히 오래 전에 사용된 개념인데 현대의 한국의 개념 자아와 불교 경전의 자아를 동일하게 간주하면 여러가지 혼동되는 점이 있지 않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원체 우리말 중 추상적인 개념들은 모두 한자화한 명사를 사용하여 "자기의 영혼"도 이게 우리말이라고 해야 맞는 것인지 헤깔리네요. 정말로 자아는 없나봅니다. ㅎㅎ
근본불교 시기 부처께서 인도브란만교의 믿음인 윤회를 부정하였다는 근거자료 좀 더 알고 싶 습니다.
현대 한국불교는 대체로 윤회를 인정하고 부처 생존 당시 삼세에 관한 비유법이 많은 이유, 티벳의 달라리라마 환생에 대한 입장등을 알고싶네요. 감사합니다.
부처님은 윤회와 업보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르고 저지른 살생엔 과보가 없다고 하셨기 때문에 불교의 인과율은 물리세계의 인과율과 다릅니다.
맛지마니까야에 나온 부처님 말씀:
바라문 학도여,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읜다.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내려놓는다. 양심적이고 동정심이 있으며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여 머문다. 그는 이런 업을 짓고 완성하여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에 생겨난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에 태어나지 않고 만일 인간으로 온다면 어떤 곳에 태어나더라도 그의 수명은 길다.
5:38
양자역학에 따르면 실제 물리적으로도 세상은 텅 비어 있죠.
그리고 부처님이 윤회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제가 몰랐군요. 자아가 있으면 계속 태어난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내가 여기 태어난 이유는 무아를 깨달아 윤회의 고리를 끊어 이 세상에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라는게 불교의 가르침으로 알고 있습니다.
썸내일에 그림은 인드라망이죠?
인드라망 인연으로 연결되어있고 결국은 모두가 하나의그물인 서로 다른게없다는것이죠
채널장 와이프 분이신가요?
설명이 귀에 박히지 않고 자꾸 팅겨나가요
불교는 철학이 아니라 엄연히 종교입니다. 불교를 부정하면 불교신자들 눈돌아갑니다. 비밀을 이야기 하면 기득권이 권익을 얻을수가 없으니 욕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와서야 신비주의적 색채를 최대한 지우면서(그럼에도 윤회, 영혼, 사후세계는 포기못함. 왜 포기못할까?) 과학적인 척 이야기 하는데 종교입니다. 혹세무민 많이 했습니다. 정도전이 괜히 불교를 팼을까요. 지금와서 아닌척 하는것 뿐입니다. 불교도 결국 사후의 이야기는 형이상학적 이야기고 보이는것도 증명하는것도 아닌 그냥 믿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은 믿어야 하는겁니다.
전 싯타르타 좋아하고 그의 깨달음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100% 신뢰하지 않으며(애초에 불경이 그가 죽은 후 꽤나 시간이 지난후에나 적혔는데 그게 진짜 그의 말인지 첨삭 됐는지 어찌 알 일) 그 후에 각종 무언가들이 섞인 불교는 믿지 않음.
이번 영상은 다른 영상들보다 유독 댓글창이 시끄럽네요. 불교 신자들인가?
무더기를 말할 때 색의 무더기는 꼭 빼놓으시네요. 흄의 말과 비교할 때 아귀가 안 맞아서 인가요. 오온의 색도 분명히 무더기인데요.
부처님이 윤회나 사후세계를 철저히 부정했다는 주장은
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윤회(생사윤회)를 기본적인 교리로 삼고 있으며,
이는 중생이 무명의 상태에서 생사를 반복한다는 개념입니다.
부처님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 즉 열반을 가르치셨습니다.
윤회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부처님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부처님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논의한 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도윤회'의 개념은 사후에 중생이 업에 따라 다양한 상태로 다시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러한 논의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현실에서 고통을 벗어나는 실천과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윤회나 사후 세계에 대한 가르침은 결국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따라서 "철저히 부정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처님은 윤회의 법칙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수행을 강조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올바릅니다.
윤회가 없다고 석가모니가 말했다면 죽으면 모든 괴로움이 다 사라지는데 뭐하러 힘들게 탐진치 버립니까....그냥 마음대로 살다가 하고싶은대로 하고 죽으면 끝인데요
한번 깊이 생각해보시고 동영상 올리시길...
부정 침묵 3:45
잘 보았습니다. 다만 부처님은 윤회를 재해석한 것이지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아트만이 윤회한다는 바라문교와 대비하여, 물질, 느낌, 이미지, 행위, 갈애로 인해 일어나는 자아에 대한 무아윤회 찰나윤회를 말씀하시고 전생에 대해서도 니까야 도처에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자아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윤회가 아니라 성품의 상속이 이루어지는 윤회이지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네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불교의 인과론적 시각을 좋아합니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 그러니 지금 억울할 것도 없고 즐거울 것도 없다. 다만 그것(현상)일 뿐이다.
무아윤회 논쟁이라고, 한국학계에서 논쟁이 한동안 있었는데요. 불교학계나 인도철학계의 원론적 입장은 말씀하신대로 무아윤회가 맞습니다. 다만 칸트철학 전공 교수인 김진 교수나 노장철학 전공 교수인 정세근 교수가 무아윤회는 모순이라고 주장합니다. 손미애 선생님은 정세근 교수의 입장을 따라간 거 같네요.
@@jean1334 '나'라고 할만 것으로서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엇이 윤회의 주체라고 말할 수도 없죠. 그렇다고 윤회라는 현상 자체가 없는 것도 아니죠. 그래서 말씀하신대로 무아윤회라고 하는 것인데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은거 같습니다. 근데 윗 분이 말씀하신 '성품(종자)의 상속'이라는 개념은 유식이나 설일체유부적인 이해인거 같습니다만..
@@0017shin 비아를 얘기 하시는 인도불교철학 교수님도 계십니다 :)
@@gkgkgk-b7s 설일체유부는 초기 부파불교의 한 갈래 아닌가요? 거긴 제가 잘 몰라요 ㅎ 어쨋든 제가 아는 불교학자 중에 무아윤회가 모순이라 주장하는 분은 단 한분도 없네요. 호진스님은 그냥 문제제기의 차원이었던거고..
인도불교철학은 중국화된 불교철학인 화엄과 선불교로서 꽃피운 것이 아닌가요?
혹시 평소에 사투리 쓰시나요? 제 친구랑 발음이 너무 똑같아요 😆 ㅋㅋㅋ
철학 너무좋다
수시로..페이퍼를보고,이어가는,어색한모습만없었으면,더편하게''시청했을듯하네요ㅡ목소리가좋으시니.
음성만으로''전달해도..괜찮을듯하고ㅡ
경청시..집중이잘될듯합니다.
철학이라 할 수 없지만 ‘손자병법’을 다뤄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는 불교의 무아 힌두교 아트만, 종교적 구분은 있지만 실질적의미가 있나 싶어요 자아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세계가 만들어지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세계가 만들어지는데 일체유심조가 아닐까합니다 동시성이론도 범아일여가 되면 그또한 동시성이 발현되지않을까요 개념없이 떠든건 아닌가 하지만 이거 항상 궁금했어요
불교는 알면알수록 아름답습니다. 상식적이구요.. 저는 인류의 구원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8:32 '그' 등장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명제가 이성의 결과라면 그 명제도 패러독스에 걸리기 때문에...
😅😊😊😅😊
근본불교에서는 해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네팔에서 시작되어 인도에서 활동 함. 조선도공이 일본가서 일본 도자기 전세계로~~~ 와 비슷
빅뱅이 발생할 즈음에 나는 여기 저기 흩어진 먼지와 가스였다. 백년 안에 나는 시체가 되고, 백억년 후에 그 시체는 먼지와 가스가 되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을 것이다. 만물은 먼지와 가스다. 잡초, 바퀴벌레, 강아지와 나는 평등하다. 내 빤쓰는 지가 나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무덤에 들어갈 시체가 존엄하다면 그 시체가 두르고 있는 빤쓰도 존엄한거다. 나는 딱 내가 입고있는 빤쓰만큼만 존엄하다.
5분 뚝딱 철학 너무 재밌어요~ 그런데 불교에서 윤회를 부정하면 그 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만큼 윤회가 중요한 핵심 신념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붓다가 윤회를 부정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생각해보니, 불교를 다룬 책들이 경전 위주로 스님들에 의해 많이 쓰여진 것 같은데, 철학 하시는 분들의 눈으로 본 사상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불교 안에 힌두교사상이 스며든거예요
그래서 인도에선 불교와 힌두교차이가 거의없어져 힌두교로 빨려들어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져버렸다고 하죠
@@younghan6259 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럼 결국 윤회라는 것은 브라만의 절대적인 진리라는거군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같은. 부처가 윤회를 부정했다는 것은 윤회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생각해도 될까요? 열반을 이야기 했으니까요.
@@siriusa1207
윤회와아트만는 힌두교것이죠
부처님은 아트만 즉 참나를 부정하고 무아를 설하셨어요
그런데 불교가 윤회와참나를 말하고 있어요
불교는 다른 사상 이론 신관을 포용하고 융합시키는걸 잘하것같아요
한국전통신앙인 산신.칠성을 모신 사당이 절에 있잖아요
@@siriusa1207 초기불교 경전에서 부처님이
직접설한경전에서 윤회는 나옵니다
많은곳에서 윤회를 얘기합니다
다만 절대 변하지 않는 내가 있어서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것이
아니라 사성제와 12연기의 진리를
체득함으로서 열반으로 나아가면
다시는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
했습니다
열반을 성취 못한 일반범부는
계속해서 태어나고 늙고죽고하는
윤회를 반복한다고 초기불교경전
여러곳에 나와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침은
열반을 통한 윤회의 사슬을
끝는게 목표입니다
윤회를 부정했다기보다 연기를 강조했지요 순환의 의미가 같으니 착각하는것.
동양 재밌다….오오
현재 불교는 윤회를 믿고 예전 불교는 부정한다면 언제 왜 그렇게 바뀐건지ㄷㄷ
다발과 무더기를 한순간의 감정상태 같은 조합들로만 보는게 아니라 모든 시간대의 변화들까지 합쳐서 한 무더기로 본다면
어떤 조합도 좋기만 한 조합, 나쁘기만 한 조합은 없을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네요...
어쩌면 그런 무더기들을 자아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에 대해서 무아로 가게 해야 진정한 자아로 가는것이기 때문에
싯다르타는 무아를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없다라기보다는 깨달음에 대한 중요한 요소가 아니니 거기 너무 매여서 본질적인 깨달음에 방해되지마라는거아닌지
종교가 각 나라로 전파되고 시대에 따라 본질이 왜곡되기도 하는군요.
일체개고…무상과 무아를 깨닭지 못하고 일체가 영생에 집착하여 온갖 고통에 빠져 있다..
내가 죽으면 끝이라는건가? 허긴 육신이 사라졌는데 볼수도 느낄 수도 없는데 무슨 생각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