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 92 026
김상 역사TV
South Korea
เข้าร่วมเมื่อ 5 มี.ค. 2020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삼한사의 재조명 (1,2,3)
วีดีโอ
93 동성왕의 출생연도 추정 2/2
มุมมอง 308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백제 동성왕의 출생연도 추적의 두번째 동영상입니다. 앞의 동영상에 이어집니다. 음향은 좋아졌으나 동영상 품질이 낮아 다음 녹화부터는 카메라를 바꿔볼 생각입니다. 삼한사의 재조명 3, 236쪽, 8.10. 백제본기 각 왕들의 생몰연도 추정. *해씨왕통* 근초고왕: 300~375 근구수왕: 325~384 침류왕: 345~385 진사왕: 348~392 아신왕: 365~405 전지왕: 385~420 구이신왕: 410~427 *부여씨왕통* 비유왕: 390~455 개로왕: 413~475 문주왕: 435~477 삼근왕: 464~478 ......
92 동성왕의 출생연도 추정 1/2
มุมมอง 302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백제 동성왕과 무령왕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동성왕의 출생연도를 추적합니다. 녹화분이 너무 길어 92와 93으로 나누었습니다. 유송에 의한 458년 11장군 책봉기록의 서열 3위 정로장군 이름에 대하여 글자가 '여훈'과 '여휘'의 2가지가 있는데 여훈(餘暈)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휘는 이전 4세기 후반에 그런 이름을 가진 자신들의 왕이 있었기 때문에 피해서 작명했을 것입니다.
91 일본서기 인용법
มุมมอง 175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전라도 천년사의 일본서기 인용방식을 놓고 많은 논란이 발생했는데 이는 전라도 천년사 집필진의 잘못입니다. 일본서기는 한국고대사 연구의 필수적인 시료로서 어떻게 인용하느냐가 관건인데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인용하시면 아무 문제가 안 생깁니다.
90 신묘년조 해석의 유효성 판별법
มุมมอง 185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에 대하여 수 많은 판독과 해석이 있는데 어느 것이 믿을만한지 유효성을 가리는 방법입니다. 3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는데 이 관문을 통과하면 그 해석은 주의 깊게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89. 5세기 이전 일본서기 기년 찾는 법(3) 백제사 유일의 여왕, 팔수왕비
มุมมอง 2833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구이신왕의 어머니인 팔수왕비 기록을 통해 일본서기 기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롤 보면 목(협,리)만치는 404년 5월 출생으로, 420년에 구이신왕이 즉위할 때는 16세, 475년 겨울에 백제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문주왕의 웅진천도를 도울 때는 71세였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번역본에 따라 大倭 목만치라고 했는데 다른 일본서기에는 大倭라는 구절이 없다고 합니다. 즉 이 大倭라는 구절은 8세기에는 없었다가 훗날 누군가에 의하여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88. 5세기 이전 일본서기 기년 찾는 법(2) 신공49년 찾기
มุมมอง 2973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전라도 천년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일본서기 기록인 신공황후 49년도를 삼국사기에서 찾는 법입니다. 전라도 천년사 나오기전에 여러번 다루었지만 중요하다고 보여 다시 다룹니다. 일본서기를 읽으려면 5세기 이전 기록의 사건 연도를 정확히 아는 것이 선결조건입니다. 이 과정에서 삼국사기 읽는 법도 알게 됩니다.
87. 4말5초 백제본기의 왜국기록 5개
มุมมอง 1.3K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한일고대사의 핵심은 백제-왜 관계입니다. 그러면 백제본기에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출현하는 왜국 기록 5개를 이해하는 것이 5세기 한반도와 일본열도 관계 연구의 시작입니다.
86 월지국과 목지국(2/2)
มุมมอง 596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세기 중반에 한반도 남부의 최대 세력자였던 진왕이 거쳐하며 통치했다는 소국이 삼국지는 마한의 월지국이고 후한서는 목지국입니다. 85. 월지국과 목지국(1) 1. 월지국 또는 목지국이 중요한 이유 2. 삼국지의 월지국과 후한서의 목지국 86. 월지국과 목지국(2) 3. 삼국지 동이전의 81개 삼한소국명 4. 삼국지 동이전의 정확성 검증 5.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건국서문 6. 삼국지에서 비류의 미추홀 찾기 7. 목지국사 집필계획
85 월지국과 목지국(1/2)
มุมมอง 603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세기 중반에 한반도 남부의 최대 세력자였던 진왕이 거쳐하며 통치했다는 소국이 삼국지는 마한의 월지국이고 후한서는 목지국입니다. 85. 월지국과 목지국(1) 1. 월지국 또는 목지국이 중요한 이유 2. 삼국지의 월지국과 후한서의 목지국 86. 월지국과 목지국(2) 3. 삼국지 동이전의 81개 삼한소국명 4. 삼국지 동이전의 정확성 검증 5.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건국서문 6. 삼국지에서 비류의 미추홀 찾기 7. 목지국사 집필계획
84. 고조선 1 동아시아 4대문명
มุมมอง 1.3K11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동아시아사는 황하문명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이와 구분되는 3개의 문명이 더 있어, 4개의 문명이 합쳐져서 설명됩니다. 삼국 중에 가장 많은 문명이 합쳐진 곳은 놀랍게도 가장 작은 국가였던, 메소포타미아 문명까지 더해진 신라입니다. 그 지리적 위치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83. 전라도 천년사 12B. 458년 개로왕의 11인 책봉요청
มุมมอง 60411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0대 안강천황이 죽고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시변압반황자)를 중심으로 한 11인 집단지도체제가 만들어진 해가 456년입니다. 그리고 개로왕에게 책봉대행을 부탁했으며, 457년에 개로왕이 이들의 청을 들어 유송에 11인 장군 책봉을 요구하게 됩니다. 11명 중에 7명이 461년에 정노장군 죄현왕 여곤에게 죽었으며, 3명이 살아남아 성을 바꾸고 여곤의 관료가 되었습니다. 이후는 함부로 부여씨 성을 쓰거나 황자를 칭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살아남아 왜국의 원로대신이 된 3명 중 1명은 477년 백제로 천도할 때 따라가 여곤과 함께 죽어 영산강유역에 묻혔으며, 2명은 왜국에 남아 여곤의 아들인 청령을 보좌하다 죽었습니다. 여곤의 시신은 죽음을 숨긴 채 왜국으로 우송되어 왜국에 묻혔습니다. 이때 후계자의 공립 ...
82. 전라도 천년사 12A. 458년 개로왕의 11인 책봉요청
มุมมอง 524ปีที่แล้ว
457년에 백제 개로왕이 유송에 사신을 보내 11명 장군의 책봉을 요청하여 11명이 458년에 책봉을 받은 송서 기록에 대한 해석입니다. 두 번으로 나누어 82번과 83번에 녹화하였으므로 둘이 연결됩니다. 서열 3위 정로장군 이름에 대하여 여훈과 여휘의 2가지가 있는데 여훈(餘暈)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81. 11 기리영 분쟁(246년) (2)신분고국과 伯濟國의 비교, 백제의 담로제 5
มุมมอง 802ปีที่แล้ว
81. 11 기리영 분쟁(246년) (2)신분고국과 伯濟國의 비교, 백제의 담로제 5
15. 신라의 왕호를 보면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으로 바뀌어 갑니다. 근데 이걸 두고 신라의 세력이 커 감에 따라 바뀐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말하는 거 같습니다. 근데 왜 혁거세만 거서간이고 남해는 차차웅인지, 왜 그 다음은 이사금인지, 금석문엔 매금인데 왜 마립간인지 설명을 못 합니다. 삼국사기에 신라 법흥왕의 성이 모(募)라고 나옵니다. 근데 당시 선비족 군주의 성이 모용(慕)씨인데 같은 겁니다. 근데 삼국사기 지증조에 대한 설명이 어디서 많이 본 것입니다. <지증>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로, 내물왕(奈勿王)의 증손이며 습보(習寶) 갈문왕의 아들이고 소지왕(炤知王)의 재종 동생이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鳥生夫人)으로 눌지왕(訥祗王)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연제부인(延帝夫人)으로 이찬 등흔(登欣)의 딸이다. 전 임금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당시의 나이는 64세였다. <내물> 내물 이사금(奈勿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로, 구도(仇道) 갈문왕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각간 말구(末仇)이다.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休禮夫人)이다. 왕비는 김씨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흘해왕(訖解王)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내물이 왕위를 이었다. 앞서 12번에 쓴 대로 또 거짓을 기록하고 있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눌지(재위 417~458), 내물의 맏아들로 추정되고 사촌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오릅니다. 392년 실성이 고구려에 볼모로 갔을 때 실성은 30대 초중반이고 눌지는 10대 초중반의 나이로 추정됩니다. 그럼 계산하기 좋게 이 때 눌지가 10세라고 하면, 392 - 10 = 382년생이고 417 - 382 = 35세에 즉위하고 458년 76세에 죽었습니다. 그럼 그 자식을 20세에 낳았다면 382 + 20 = 402년생이고 자비(재위 458~479)는 458년 56세에 즉위하고 77세에 죽었습니다. →눌지의 딸 그럼 또 그 자식을 20세에 낳았다면 402 + 20 = 422년생이고 소지(재위 479~500)는 자비의 맏아들이니 57세에 즉위하고 500년 78세에 죽었습니다. →내물의 증손 그럼 또 그 자식을 20세에 낳았다면 422 + 20 = 442년생인데 지증의 어머니가 눌지의 딸입니다. 보통 모자의 나이차를 20세로 보면, 눌지의 딸이 402년생이고 지증이 442년생이니 40년의 차가 납니다. 근데 지증조에 500년 즉위 때 나이가 64세라고 나옵니다. 그럼 지증(재위 500~514)은 436년생으로 저의 계산(442년생)과 6살 차이 밖에 안 납니다. 514년 78세에 죽어서 눌지(76), 자비(77), 소지(78) 모두 장수한 거 같습니다. 지증의 어머니(눌지의 딸)가 402년생, 지증이 내물의 증손으로 436년생이니 그 어머니가 34세에 지증을 낳았지만, 34세 이상은 노산이기에 여기에 -7를 하면 대략 20대 중후반에 지증을 낳았다고 보면 됩니다. 법흥(재위 514~540)은 지증의 맏아들로, 20세에 낳았다면 436 + 20 = 456년생이고 514년 58세에 즉위하고 84세에 죽었습니다. 30세에 낳았다면 436 + 30 = 466년생이고 514년 48세에 즉위하고 74세에 죽었습니다. 암튼 이 분도 장수했습니다. 이왕 나간 김에 진흥(재위 540~576)까지 가봅시다. 즉위 540년에 7세라고 나오니 533년생이고 576년 43세로 의외로 일찍 죽었습니다. 아마 비만으로 성인병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진흥> 법흥왕(法興王)의 동생인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다. 즉 삼촌조카 사이에 결혼해서 진흥을 낳은 겁니다. 이제 다시 돌아가서, 생물학적으로는 내물~진흥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근데 문제는 법흥의 성이 모(募)로 이건 내물도 모씨 성이란 걸 뜻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삼국사기를 보면 내물이 356년에 즉위할 때 고구려는 고국원왕으로 당시 고구려는 연나라 모용씨에게 한창 치고받힐 때입니다. 즉, <고국원> 25년(355) 겨울 12월, 임금이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볼모와 공물을 바치면서 그 어머니를 돌려보내 주도록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刁龕)에게 왕의 어머니 주씨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임금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다.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다" 왕도 아니고 낙랑공입니다. 356년 기사는 없지만 이 때 연나라 왕이 자기 동족인 모용씨를 신라의 왕으로 세웠으리라 추측됩니다. 그게 내물입니다. 즉 내물 이하는 선비족 모용씨인 것입니다. 이건 흘해 때에 신라는 또 망했다는 뜻입니다. 근데 이렇게 되면 12번에서 내물의 족보(?)가 엉망이 됩니다. 즉 이건 기록에 없지만 연왕 모용씨와 근초고왕 간의 합의라고 봐야 합니다. 연왕이 친족 모용씨를 신라의 왕위로 앉히되 백제는 신라와 동맹한 걸로 보여집니다. 실제로 백제는 고구려와 서로 싸우지만 신라와는 안 싸우고 사신을 보냅니다. <근초고> 21년(366) 봄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이 때 백제는 최전성기인 근초고왕 시기입니다. 당시 한반도 남부의 대왕은 근초고왕이고 북부는 연왕 모용씨가 대왕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이에 (이 때는 소국) 고구려가 껴있던 것이고, 고구려를 통해 신라의 왕을 모용씨로 앉힌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고구려를 강성대국으로 만든 이가 실질적으로 실성이었던 것일까요?
14. 이제 실성에 대한 썰을 풀겠습니다. <내물> 37년(392) 봄 정월,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임금은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고구려가 강성하니 아무나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근데 내물에게는 적어도 3명의 왕자가 있습니다. 눌지, 미사흔, 복호 입니다. 이들은 이 때 10대 초중반으로 여겨지는데, 담덕은 12세에 태자가 된 걸로 보아 (눌지가) 태자로서 뭔가 결격사항이 있던가 아니면 백제대왕의 인가가 안 내려왔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암튼 이들 대신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냈습니다. 이쯤 되면 그 이유는, 담덕이 실성이란 인물에 대해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요구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제 막 왕위에 오른 10대 후반의 담덕이 좌우 사람들에게 물었을 겁니다. 누가 신라에서 가장 인재인가? 라고 말입니다. 실성의 본명은 따로 있을 겁니다. 아버지가 이찬 벼슬인 걸로 보아 왕족 또는 고위 귀족이고, 30대 초중반까지 따로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벼슬은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벼슬은 하지 않았어도 귀족 자제로써 명성이 있기에 담덕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입니다. 즉 실성은 학문으로서 명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성은 고구려로 볼모로 가는 것이 결정된 순간, 고구려의 어린 새 임금을 분명 볼 것이라고 예상했을 겁니다. 그럼 빈 손으로 가면 안되니 뭔가 선물을 가져갔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삼한의 지도로 추측됩니다. 물론 고구려도 삼한전도가 있었을 테지만 보다 더 세밀한 것입니다. 이 지도를 담덕에게 받치고 처음 한 일이, <담덕> 원년(392)가을 7월, 임금의 병사가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다. 물론 지도만 갖고는 안되고, 백제 성들의 공략법, 전략전술 등을 알고 있어 실성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걸로 보여집니다. 만나본 후, 담덕이 실성에게 실제로 군사를 맡겨보니 10개의 성을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실성에게 군사를 맡겼다면 이것으로도 담덕의 인물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둘은 수어지교로 실성은 고구려의 軍師가 됩니다. 물론 이것은 신라 문무~신문 대에 기록에서 삭제되었습니다. 고구려 하면 원래 기마병인데 이상하게 담덕의 대에서만 수군이 나와 활약합니다. 이게 곧 실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신라에서 실성은 수군을 보아왔고 또 연구했을 겁니다. 10대 후반의 담덕이 무슨 수로 수군으로 백제의 성들을 공략할 수 있습니까? 실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는 고구려의 기마군을 보고 인상 깊었을 겁니다. 담덕의 만주공략을 실성 덕분이라고 하면 너무 억지인가요? 실성은 원래 학문에만 관심 있지 벼슬은 관심이 없었던 걸로 보여집니다. 근데 갑자기 고구려에 볼모로 가라는 내물의 명이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훗날 (눌지의 암살여부를 떠나) 이것을 원망했다고 삼국사기 눌지조에 나옵니다. 이쯤 되면 실성은 제갈량과 비할 수 있는 인물인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삼국사기에는 실성이 눌지에 대한 암살을 고구려에서 알던 어떤 남자한테 부탁한 걸로 나오고, 삼국유사에는 군사가 동원됩니다. 이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앞서 쓴 대로 장수왕이 뒤를 받혀주고 동생 복호가 움직였다면(즉 고구려의 군사를 동원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건 실성이 먼저 눌지를 원망하여 암살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눌지가 왕이 되려고 실성을 죽인 후 삼국사기에 나온 대로 그렇게 꾸며내 기록한 것입니다. 이 때 실성을 따르는 무리는 모두 숙청 당했고, 그 딸을 왕비로 삼아 평생 고통 속에 살게 끔 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실성은 눌지 형제를 살려주었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입니다. 암튼 내물이 죽은 직후(400년 겨울 10월) 고구려에서의 명성으로 실성은 왕위를 잇기 위해 돌아갑니다. 그게 401년 가을 7월입니다. 392년 봄 정월부터 401년 가을 7월까지 근 10년 동안 고구려에서 활약했습니다. 물론 담덕조에는 문무~신문 대에 지웠기에 401년 기사가 없습니다. 아마 성대한 군신 간의 송별회와 담덕의 실성에 대한 치하하는 말들이 기록돼 있었을 걸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신라로 돌아간 후, 실성은 왕위에 관심이 없거나 눌지에게 사양해서 즉위를 미뤘던 걸로 보여집니다(뒤늦게 즉위 402년 봄). 그리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백제가 아닌 왜와의 화친입니다. 고구려에서의 활약으로 보복 당할까 염려되어 한 일입니다.백제 아신왕은 이미 장수왕한테 굴복했기에 백제는 염려없고 왜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왜는 언제 어디서 바다 건너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실성에 대한 건 마칠까 합니다.
13. 실성에 대한 건 잠시 미루고, 12번의 부연설명(즉 추리)이 필요해 보입니다. 처음에 썼듯이 내물과 실성의 왕비가 (사실 여부를 떠나) 왜 하필 미추의 딸인지 의문이고, 눌지는 사촌(실성)을 죽였는데 어떻게 왕비가 그의 딸인지도 의문입니다. 혹 기록에만 그렇게 적은 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아들인 자비까지도 어머니가 실성의 딸이 됩니다. 당시에는 미추의 딸보다 고구려의 왕녀를 왕비로 맞아야 납득이 갈텐데 어찌 된 일인지 백제는 물론 신라도 고구려와는 혼인을 안 맺습니다. 근데 아니나 다를까 삼국사기에는 눌지부터 마립간의 칭호를 씁니다. 삼국유사에는 내물부터 마립간이라고 써서 나무위키에는 내물 마립간이라고 나옵니다. 뭔가 비밀이 있어 보입니다. 실성(402~417)이 담덕(391~413)과 친한 상태에서 담덕이 먼저 죽고, 실성은 사촌(눌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만약 담덕이 살아있었으면 눌지가 감히 실성을 헤칠 수 없을 겁니다. 이건 장수왕이 뒤에서 눌지를 사주했든가 아니면 눌지부터 마립간의 칭호를 쓰는 걸로 보아(삼국사기) 어떤 군사적 세력이 받쳐 주었던 걸로 보여집니다. <눌지> 2년(418) 임금의 동생 복호(卜好)가 고구려에서 나마 제상(堤上)과 함께 돌아왔다. 역시 장수왕이 뒤에서 봐주고 동생 복호가 움직였던 겁니다. 즉 눌지는 장수왕이 앉혀서 왕이 된 인물이고, 마립간은 고구려에서 내려준 칭호로 보입니다. 즉 백제대왕의 분봉(이사금?)을 버리고 고구려가 내려주는 칭호를 받고 그 臣民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내물~실성~눌지 이 삼대에서부터 고구려로 신민화 되어간 것입니다. 물론 신라 문무~신문 대에서 그 기록은 삭제됩니다. <내물> 37년(392) 봄 정월,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임금은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바로 이 때 담덕이 내물에게 마립간의 칭호를 주고 신라는 실성을 보낸 것입니다. 즉 백제에서 고구려로 돌아선 것입니다. 38년(393) 여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닷새 동안 풀지 않았다. 분노한 진사왕은 왜를 움직여 금성을 포위한 것입니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내물과 실성의 왕비는 바로 고구려의 왕녀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문무~신문 대에서 미추의 딸로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즉 눌지의 어머니도 역시 고구려의 왕녀입니다. 눌지의 왕비도 고구려의 왕녀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 비밀이 다 풀렸습니다.
12. 삼국사기에, 내물의 왕비는 미추의 딸이고 실성의 왕비도 미추의 딸입니다. 눌지의 어머니는 미추의 딸이고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왕비가 그 딸이라고 합니다.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 싶습니다. 먼저 내물이 재위 47년 차인데도 어째서 그 아들이 어리다고 쓴 것인지부터 보겠습니다. 내물 할아버지 - 구도 아버지 - 말구(미추와 형제) 왕비 - 미추 딸(즉 사촌) 아들 - 눌지, 미사흔, 복호 구도는 예전에 쓴 글 6번에 구태와 친족(형제?)으로 AD 2세기 말 사람이고 미추의 아버지입니다(저의 주장). 백제대왕 고이의 명으로 신라 첨해와 미추를 세운 후, 유례, 기림, 흘해, 내물까지 백제대왕이 분봉합니다. 근데 내물의 즉위년이 356년이니 백제의 최전성기인 근초고왕 시기입니다. 근데 내물의 전왕인 흘해가 재위 47년인데도 아들이 없어 내물이 즉위합니다. 이건 아들이 있었어도 내물이 즉위했다는 뜻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 하면 지엄하신 백제대왕의 명이기에 내물이 즉위한 것이고 기록은 그렇게 쓴 것입니다(첨해도 아들이 없었다 합니다). 그럼 계속 하겠습니다. 구도 - 185년 군주 임명(30세?) 20세는 너무 적어서 30세로 봅니다. 188년 모산성 방어(33세) 189년 백제군 격파(34세) 190년 부곡성주 좌천(35세) 200년 미추 출생(45세) 이 때 미추를 낳았다고 하면 미추는 200년생입니다. 50세 이후도 자식을 볼 수 있으나 최대로 잡은 것이 45세입니다. 근데 내물과 실성의 왕비가 미추의 딸이랍니다. 이건 약 150년 후입니다. 즉 연대가 맞지 않은 조작된 기록입니다. 적어도 미추는 200년생으로 262년 즉위하고 284년에 죽었습니다. 62세에 백제대왕의 명으로 즉위하고 장수하여 84세에 죽었다고 하면 납득은 갑니다. 하지만 구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45세 즉 245년에 딸(내물왕비)을 낳았다고 하면, 내물이 356년에 즉위했으니 356 - 245 = 111세로 대충 역산해 봐도 100년이 훌쩍 넘어갑니다. 그럼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물의 왕비는 미추의 딸이 아니거나 년도를 조작한 것입니다. 저는 전자에 가능성을 둡니다. 즉, "성은 김씨로, 구도(仇道) 갈문왕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각간 말구(末仇)이다.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休禮夫人)이다. 왕비는 김씨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이것이 전부 거짓인 겁니다. 내물은 성이 김씨인지는 모르겠으나 구도의 손자도 아니고 왕비도 미추의 딸이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인 말구의 나이가 그 형제인 미추와 비슷하니 말구의 아들인 내물(미추 딸과 사촌) 역시 위의 계산처럼 245년생에 356년에 즉위하면 111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실성도, "알지(閼智)의 후손으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리부인(伊利夫人)[이(伊)를 또는 기(企)라고도 한다.]은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알지의 후손도 아니고 왕비도 미추의 딸이 아닌 겁니다. 앞서 썼듯이 백제대왕 근초고왕의 명으로 내물이 신라의 왕위에 오릅니다. 근데 내물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백성들에게 베푼 것이니 그 정통성이 없음을 잘 말해 줍니다. 근데 후에 배신 때리고 고구려에 붙습니다. -근초고왕이 연로해 병이 든 정황을 알고서 한 일로 보여집니다.- 진사왕 말기 담덕의 백제공략을 보고 결정한 듯 싶습니다. 암튼 실성에 대해 계속 논해 보겠습니다.
11. 일본서기를 찾아보니 많은 책들이 시중에 나와있는데 미리보기로 훑어보니 한일고대사에 대한 제가 생각했던 것들이 이미 책으로 나와있습니다. 그 많은 책들의 요지는 하나입니다. 즉 한반도에서 삼국의 문화가 열도로 건너가서 일본이란 나라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란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즉 당시의 한반도는 왜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열도에는 오래 전부터 한반도, 중국, 동남아 등으로부터 사람들이 모여 원주민인 조몬인과 함께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는 중에 삼한 말기부터 야요이인(韓족)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건너가 이들에 의해 발전했습니다. 근데 이 한족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한족이 아니란 게 문제입니다. 이들은 남방 해양족으로 현재의 일본인에 더 가깝고, 현재의 우리는 북방 기마족에 더 가깝습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더 가깝다는 것이지 갑론을박이 아닙니다. 고국양 3년(386) 봄정월, 임금이 왕자 담덕(談德)을 태자로 삼음 보통 성년식을 하며 태자로 삼는다면 이 때 담덕의 나이는 15세로 추정합니다. 그럼 371년생이 되고 392년에 실성이 왔으니 21세에 둘이 만난 겁니다. 또 413년에 죽었으니 42세입니다. 이게 제가 추측한 나이지만, 알고보니 광개토대왕 능비에 나이가 나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조금 다른데, 능비에는 18세에 왕위에 오르고 39세에 죽었다고 나옵니다. 그럼 391년에 즉위했으니 391 - 18 = 373년생인데 나무위키에는 374년생이라고 나옵니다. 1년의 오차는 무시할 수 있지만 공식적인 것이니 374년생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392년에 30대 초중반의 실성과 18살의 담덕이 만납니다. 즉 392년 봄 정월 둘은 처음 대면하고 5월 고국양왕이 죽고 담덕이 바로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근데 이 해 가을 7월에 담덕이 가장 처음 한 일이 백제의 10개 성 공략입니다. 겨울 10월에는 관미성을 공략합니다. 삼국사기에 실성의 키는 7척5촌(184cm)이고 황남대총의 시신(금동관~신발)이 181cm이니 뼈가 세월 감에 따라 작아지는 걸 감안하면 생전 184cm가 맞겠습니다. 근데 담덕은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하고, 실성은 "184cm에 명석하고 사리에 통달하여 앞일을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다" 하니 둘은 너무 잘 맞았던 겁니다. 또 삼국사기에 "내물왕(奈勿王)이 돌아가셨는데 그 아들이 아직 어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합니다. 내물왕이 재위 47년이나 되는데 아들이 어리다는 이유는 말이 안됩니다. 즉 고구려에서 잘 나가는(?) 실성을 모셔와 왕위를 잇게 한 것입니다.
10. 먼저 실성(재위402~417)의 나이부터 보면, <신라> 흘해 28년(337) 봄2월, 백제에 사신 보냄(흘해 딸+비류 아들 계? 혼인) 35년(344) 봄2월, 왜에서 사신 보냄(흘해 딸 이미 출가하여 거절) 36년(345) 봄2월, 왜왕이 국서 보냄(국교 단절) <백제> 근초고 원년(346) 가을7월, 왜국에서 돌아와 백제왕 즉위 2년(347) 봄정월, 天地에 제사 지냄 21년(366) 봄3월, 신라에 사신 보냄(태자 근구수+내물 딸? 혼인) 23년(368) 봄3월, 신라에 좋은 말 2필 보냄 여기서 백제왕이 태자가 없을 때, 차기 왕통 계승자 1위 후보가 왜왕이라는 저의 주장(1번 참고)대로 라면, 흘해 35년에 왜에서 혼인을 위한 사신을 보낸 이가 바로 젊은 근초고왕입니다. 이 때 그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의 나이로 추정됩니다. 346년에 백제왕 즉위 시, 대략 20세로 추정하면 366년은 40세이고, 이 때 신라에 사신을 보낸 이유가 태자(근구수)의 혼인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때 근구수의 나이를 대략 20세 전후로 추정할 수 있고, 내물의 딸 역시 15~20세로 추정됩니다. 이 뜻은 내물의 나이가 366년에 적어도 40세란 뜻입니다. 그럼 재위47년(402)에 적어도 76세에 죽었단 뜻이 되고, 29세에 신라왕에 즉위한 겁니다. 근데 내물 45년(400) 겨울10월의 심상치 않은 기사로 이 때 죽은 것으로 추정합니다(74세 사망). 그럼 다시 돌아와, <신라> 내물 36년(391) 백잔+왜, 신라 격파해 (다시) 백제의 신민이 됨(내물 65세?) 37년(392) 고구려에 실성을 볼모로 보냄(구원 요청) 38년(393) 여름5월, 왜가 금성 포위함(백제 아신왕의 명령) 39년(394) 가을7월, 백제가 고구려 침략 41년(396)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잔 토벌함 45년(400) 겨울10월, 내물 사망(74세) 46년(401) 가을7월,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이 돌아옴 실성 원년(402) 봄3월, 왜국과 우호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보냄 16년(417) 여름5월, 사촌 눌지에 의해 살해됨 실성이 사촌 미사흔을 왜국에 혼인시킨게 아니라면, 이 때 실성은 태자를 (혼인성사 유무를 떠나) 왜국과 혼인시킨게 됩니다. 즉 이 때 실성은 적어도 40세란 뜻이 되고, 이 계산에 의하면 362년생이고 417년 55세에 살해됩니다. 근데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골의 주인공이 실성이라 가정하면 그 뼈 나이가 60세 전후라고 하니 362 - 5 = 357년생이 됩니다. 그럼 357년에 태어났고 392년(35세)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10대 후~20대 초반의 담덕과 만납니다. 이제 담덕의 참모 실성의 활약이 고구려에서 대백제 전에서 펼쳐지니 그 나이가 대략 30대 초중반인 것입니다.
9. 8번에서 백제는 韓과 辰을 이어받아 세운 나라라고 했습니다. 즉 한반도의 정통성은 백제란 뜻입니다. 근데 이 백제의 역사기록을 신라인이 전부 말살했습니다. 백제 멸망 후, 신라의 문무왕 혹은 신문왕 대로 추정합니다. 말살 이유는 이제까지 1번에서부터 쓴 내용이고 앞으로도 쓸 내용들입니다. 진한을 잔이라고 약칭해 부른 것을 한국인만 알 수 있지 일본인은 절대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을 파헤치면 진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이번 광개토대왕 비문 해석을 위해 참고로 실성 이사금조를 봤는데, 이 분 뭐지? 하는 감이 확 왔습니다. 가히 제갈공명 급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그렇게 무패였던 이유가 바로 실성이 옆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차차 논해 보겠습니다.
8. 부연설명이 필요해서 다시 썰을 풀어볼까 합니다. 7번의 비문 해석은 기존 학자들의 해석을 안 본 채로 나름 해석했는데, 나무위키에서 최근의 해석동향이 저의 해석과 일치해서 놀라웠고 한편으론 역사의 진실을 향해 맞게 가는 것 같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광개토대왕 비문 해석은 예전부터 조금 알고 있었고 역사유튜버 청화수님과 아하스페르츠 선생님, 김상 선생님의 해석을 관심있게 본 터였습니다. 하지만 주어를 광개토대왕으로 잡으면 바로 뒷 문장과의 연결이 맞지않아 저는 "이건 아니다"란 결론입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전체 문맥을 따져보고 백제란 나라의 위상을 생각해서 나온 해석이 바로 이것입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倭偕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해석> 백잔과 신라는 과거 조공을 해온 속민이었다. 근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 건너와 백잔이 왜와 함께 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이에 6년(396년)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셨다. - 渡海가 맞는 이유는, 삼국사기(실성, 눌지)에 당시 왜의 침략에 대마도가 나오고 동쪽 변경을 침범하는 등 이것들은 전부 바다를 통한 것들입니다. - 破百殘倭偕新羅 이것의 문법적 해석이 맞는건가 의구심이 들어서 구글 번역기로 돌려보니 맞아 보입니다. - 討伐殘國, 討伐□殘國, 討倭殘國 등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거 같은데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殘이란 글자에 주목해주세요. 백제는 韓과 辰을 이어받아 세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지국이 한성(위례성)으로 추정하는 바입니다. 근데 당시 광개토대왕을 위시한 고구려인들이 백제를 백잔이라고 칭한 이유는, 기존의 통설인 멸칭이 아니라 단순히 辰韓을 줄여서 부른 말을 한자로 殘을 쓴 것 뿐입니다. 적국이기에 이왕 쓰는 한자를 좋은 의미의 한자가 아닌 殘을 쓴 것입니다. 당시 이미 망했어도 韓은 여전히 쓰였고 辰 역시 쓰였습니다. 마한, 모한, 진사왕이 그 예입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이 직접 쓴 말인지 아니면 고구려인들이 포괄적으로 쓴 말인지는 모르지만, 진한을 줄여서 잔으로 약칭한 것입니다. 그럼 百殘은 뭔가? 황해도, 경기도의 한성백제와 충청도, 전북의 마한(진)을 합쳐 부른 것이 백잔입니다. 그럼 殘國은 뭔가? 앞서 설명했다시피 충청도, 전북의 마한(진)만을 부른 것이 잔국입니다. 그럼 倭殘國은 뭔가? 역시 마찬가지로 왜와 충청도, 전북의 마한(진)을 합쳐 부른 것입니다. 따라서 비문의 문맥상 해석은 백잔국도 맞고 왜잔국도 맞는 것입니다. 저는 왜잔국보다 백잔국을 택합니다. 이 뒷 문장이 백잔국의 수십여개 성들이고, 당시 열도로 쳐들어 갔으리라곤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문 속에 백제왕을 殘主라고 쓴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즉 진왕, 한왕을 잔주라고 쓴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 사이라도 멸칭을 쓰는걸 꺼리는데 하물며 적국일지언정 나라의 호칭을 멸칭을 씁니까? 아니 大고구려가요??
웬만해서는 scale700님의 댓글에 답변을 안 달려고 하는데 신묘년조 정도는 반드시 알야하므로 댓글을 답니다. 다음 90번 동영상(90 신묘년조 해석의 유효성 판별법)을 보시기 바랍니다. 백가지도 넘는다는 남북한, 중국, 일본의 신묘년조 해석들 중에 이를 통과한 것만 추려서 공부하시면 됩니다.
@@TV-kz2xm 예 벌써 봤습니다. 그 정도로 알 수준은 아니라서요. 아직 선생님 책 1권도 다 못 읽었습니다. 1,2,3권 전부 읽으면 생각이 또 바뀌겠지요.^^
198년 백제건국때 고구려 발기세력 연노부 3만과 구태부여 3만이 합쳐져서 강력한 병권을 가진 국가가 처음으로 대백제가 탄생하고 이때부터 왜와 마한(대륙 래이마한)이 복속하였다고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비류왕때 부터 서하태수로 풍야부를 임명합니다 서하는 산서성 대동시에모용수황제가 점령한 고조선지역 이기도 하고 후연의 관할이기도 합니다 근초고왕은 택도없는소리 한성십제소속 아닌가요! 서하를 대나라 탁발씨들이 점령하면서 동성왕때 세차려 이곳 서하에서 전쟁이 벌어 짐니다 비유왕은 물론이고 구태백제때 부터 대륙에 소국이 래이마한의 관할하에 있었읍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근에 문화인류학 콘텐츠를 주제로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의 채널에서 다양한 주제를 쉽게 풀어내고 시청자와 소통하는 방식에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 채널은 아직 구독자가 잘 늘지 않고 있어서,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채널을 한 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조언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유익한 콘텐츠 감사합니다 :)
7.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가장 논란이 있는 신묘년 기사를 풀어 봤습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每 破百殘倭偕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해석>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속민으로 조공해왔다. 근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매양 건너 옴으로써 백잔이 왜와 함께 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6년(396년) 왕께서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셨다. - 渡每를 渡海로 해도 상관없습니다. - 破百殘□□新羅에서 □□를 왜해(倭偕)로 넣어 "왜와 함께"란 뜻입니다. - 전체 문맥상 광개토대왕의 백제 토벌 이유를 쓴 것입니다. 백제 단독으로는 말 안 듣는 신라를 못 쳐서 왜와 함께 신라를 파했던 겁니다. 근데 백제가 옛부터 고구려한테 조공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백제는 한반도 남부의 맹주였습니다. 신라의 원군요청을 명분으로 백제를 침공한 것입니다. 혹시 일제가 왜해(倭偕)를 일부러 지워버린 것일까요?
th-cam.com/video/Pb3fHjJ_KHo/w-d-xo.html 90 신묘년조 해석의 유효성 판별법.
☘ 습수/열수/산수 중에 산수가 조선수로 조선의 명칭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 조선수는 무경총요에 나오는 조선하로 무경총요에 그 위치가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조선하는 현재의 조하입니다. 따라서 열수는 현재의 백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습수가 현재 없습니다. 왜냐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흠정고금도서집성/방여휘편/산천전]에 보면은 "진나라 영가 3년(309)에 말라버린 소요수가 또 양평현을 지나 대량수로 들어갔다. 사마선 왕이 요동을 평정하고 공손연을 이 강가에서 참수하였다."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요수가 <기주협우갈석도>에 대요수인 현재의 백하와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기주협우갈석도에는 현재의 조하가 나오지 않는데, 기주협우갈석도를 그릴 당시에는 작은 지류라고 생각되어 생략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와 관련된 상세한 분석을 제 블로그에 글로 써놓았으니 김상선생님이 와서 한번 참고삼아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유튜브 아이콘 따라가시면 블로그를 찾으실 수 있습니다. 링크거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고조선에 대한 정의가 안되어있네요
좋은 질문입니다. 고조선이 BC 2세기 초에 요서의 위만조선과 대동강의 준왕조선으로 분리되는데 앞으로 할 예정입니다. 위만조선은 낙랑국으로, 준왕조선은 마한으로 이어지다, 낙랑국은 고구려에, 마한은 백제(목지국)에 흡수됩니다. 단군의 사당은 고조선-> 준왕조선->마한으로 이어집니다.
그쪽에 바다가 있는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바다였던 지역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융기또는 퇴적했다는 증거를 수집할수 있으면 100% 확실한 것으로 될듯합니다. 울산반구대암각화가 그려진 바위가까운곳도 2천년이전의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지금은 다 육지로 변한곳이 아닌가... 바다였던곳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육지로 크게 변했읍니다.
서라벌국(신라)이 5대 파사이사금 때 경주까지 내려온 후 먼저 온 석씨를 정복하고 더 이상 남하하지 않은 이유가 바다에 막혀서 임이 확실합니다. 파사이사금이란 시호는 서역(아주 먼 곳)에서 온 신라왕이라는 뜻인데, 이런 시호를 받은 또 한 사람이 343년에 북쪽에서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내려온 17대 파사매금(내물이사금)입니다. 둘이 왕궁인 월성을 쌓은 것도 같습니다. 초축(파사이사금)과 재축(파사매금)인데 현재 남아있는 재축 자리에서 최근에 더 오래된 건물자리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초축의 흔적입니다.
경주에 바다가 있었냐는 의문 거의 풀려갑니다 이번에 경주 월성 근처에서 3세기때 만들어진 마을 유적이 나왔는데 굴껍데기와 조개껍데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경주 앞에 분명 바다 또는 바다라 생각되는것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김해평야가 과거 바다였고 이름도 김해바다로 불리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나 아직 김해바다 지도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경주 남쪽 지명은 6세기부터 등장하여 5세기 이전에 바다일 수 밖에 없고, 이는 신라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라가 동해안의 포항 부근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은 2세기 중반 아달라이사금 때입니다. 그 이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바다는 모두 김해바다입니다. 4세기까지 바다였다가, 5세기에 경주와 부산 사이 바다가 점차 메워져, 6세기에 모두 육지로 전환되어 신라의 기마군단이 활동하게 되자, 해상군단 위주의 국가였던 가야가 멸망하였습니다. 5세기 초에 광개토왕의 군대가 임나가야(신라본기의 왜)까지 온 적을 보면 당시에도 이미 상당부분 메워지고 있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4세기까지는 왜(가야)가 우세하였고, 5세기에 왜(가야)와 신라가 비슷해지다가, 6세기에 신라 우세로 바뀐 것입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도 일치하여, 1~3세기 전반에 두 지역 유물수준이 비슷, 3세기후반~4세기에 가야지역 유물이 우세, 5세기에 둘이 비슷해지다 후반에 역전이 발생하고, 6세기에 신라지역 유물수준이 확연히 우세합니다.
@@TV-kz2xm 삼한사의 재조명 1-2권은 여러번 정독하고있어서 교수님의 말씀 너무나 잘알고있습니다 꼭 3권도 읽어보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언제가 교수님의 주장들이 역사의 통설이 되기를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6. 유명한 기리영 전투가 246년에 있었습니다. 삼국지 한전에 의하면 이 당시 魏의 공격으로 韓(辰)이 멸망했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5번에 쓴 요지랑 시기적 상황이 맞아 떨어집니다. 근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조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10년(서기 243) 봄 정월, 큰 제단을 만들어 하늘과 땅과 산과 하천에 제사를 지냈다. 이 때 辰을 이어받고 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국사료는 한과 진을 혼동하여 기록한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저의 입장은 최근 글을 쓰면서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즉 韓→辰). 근데 중국사료에서 韓의 멸망은 한반도 남부 전체의 韓(辰)이 아니라 馬韓을 의미하며, 그것도 경기도 북부의 신분고국 중심의 소국연합체로 보입니다. 고이왕조에, 구수왕(仇首王)이 재위 21년에 죽고 맏아들 사반(沙伴)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보지 못하므로.. 이 뜻은, 정황상 구수왕이 재위 21년(234)에 고이집단에 의해 죽고 어린 사반을 허수아비 진왕으로 앉혔다가 9년 후인 243년에 백제를 건국한 것입니다. 이 때 사반은 진왕이었던 고귀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신분고국으로 모셨는데, 3년 후인 246년에 기리영 전투가 발생하면서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중국사료에 한(진)이 멸망했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이 참에 이것도 쓰겠습니다. 신라본기 아달라조에, 19년(서기 172) 봄 정월, 구도(仇道)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5번 글에서 구태(仇台)는 AD 2세기말이라고 했죠? 시기가 완전히 겹치는 것으로 보아 구태와 구도는 친족(형제?) 사이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떤 모종의 이유로 구태집단과 결별하고 신라로 간 것입니다. 이 구도는 미추 이사금(262~284)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즉 백제의 구태 아들인 고이왕(234~286)이 262년에 친척(사촌?)인 미추를 신라왕으로 분봉한 것입니다(3번 글 마지막 부분). 백제에서 열도까지 한 나라였다!
5. 未年八月日十大王年寽(?)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荨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矣 미년(479년) 8월10일 대왕년에, xx왕(동성왕)이 오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가 (동성왕의) 장수를 염원하다. 귀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2인 등을 파견해 좋은 구리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듦 xx왕이 백제왕이 되기 전, 아직 열도에 있을 때 장수기원의 명목으로 동경을 선물했다는 것은, 18살의 사마가 xx왕에게 잘 보이려고 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마는 xx왕이 백제의 삼근왕 다음으로 차기 백제왕이 되리라는 걸 알았다는 뜻입니다. 혹 사마가 삼근왕을 암살한 것은 아닐까요? 암살한 후 다음 백제왕이 되는 1순위의 xx왕을 맞아들였다는 추측입니다. 뭔가 정치적 내막이 있어 보입니다. 근데 長奉로 해석하면 문맥이 안 맞습니다. 백제에 있는 사마가 열도에 있는 형(생물학적 사촌)을 오래 섬기길 바란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長寿로 해석했습니다. 다음으로 2번의 내용을 좀 더 부연설명해 보겠습니다. 韓(야요이인 BC ?→기씨집단 BC 2세기말) → 辰(위씨집단 BC 2세기초→우비류집단 BC 1세기초→해온조집단) → 百濟(구태(부여씨)집단 AD 2세기말) 이것에 대한 저의 입장은, 韓에서 辰까지의 내용은 예전에 쓴 그대로 입니다. 근데 비류온조집단이 BC 1세기에 진을 기습하여 찬탈한 것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개루이며, 따로 AD 2세기말에 구태가 황해도에서 크게 말갈집단을 형성한 후 3세기초 그 아들 혹은 손자인 고이가 진을 찬탈해 세운 것이 백제라고 봅니다. 즉 백제는 부여계통으로 보면 비류온조가 시조인 것이 맞기 때문에 비류온조를 시조로 적은 것이고, 백제라는 건국명을 처음 고이왕이 썼기 때문에 그 아버지인 구태도 시조로 모신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구태 - AD 2세기말 황해도 말갈집단의 수장, 부여씨 고이 - 재위 234~286년, 목지국 한성에서 辰을 이어받고 백제 건국, 구태의 아들 혹은 손자로 辰의 실질적 마지막 왕인 구수왕 이후로 백제본기에 나옴. 중국사료에 나오는 구태는 부여왕 위구태와 혼동한 것으로 보이며, 요동태수 공손도의 사위 역시 위구태인 것입니다. 요동태수와 부여는 한반도 중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 유의해 주세요. 또 삼국지 한전에 백제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 요 몇일 전 1번의 참고자료로 무령왕의 인물화상경을 알게 됐는데요, 알고보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일본 와카야마현 스다하치만 신사에 보관돼 있던 게 발견된 거라고 합니다. 근데 명문의 해석이 아직까지도 분분합니다. 이에 비록 과문하지만 제가 한번 해석해 보겠습니다. ㉮ 기존에는 이렇습니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寽(?)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奉(?)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荨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 최근 우리 사학계의 연구결과로서 이렇습니다. 未年八月日十大王年寽(?)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荨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矣 제가 살펴보니 솔직히 헷갈려서 어렵긴 합니다. 먼저 계미년인지 미년인지 이게 관건인가 합니다. 근데 기존의 명문 전체 해석을 봤을 때, 저는 사마왕이라고 하지않고 사마라고 한 것이 제일 의문이었습니다. 이 뜻은, 사마가 백제왕이 되기 전에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501년에 백제왕 즉위니 계미년(503)은 아닌 것입니다. 그럼 ㉯의 미년은 479년이라고 하니 이 해는 공교롭게도 동성왕이 즉위한 해입니다. 동성왕이 443년생으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동성 - 443년생~479년 12월? 백제왕 즉위(36살, 8월 거울제작) 사마 - 461년생~479년 18살 <해석> 미년(479년) 8월10일 대왕년에, xx왕(동성왕)이 오시사카궁(오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가 (동성왕의) 장수를(혹은 오래 섬기길) 염원하다. 귀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2인 등을 파견해 좋은 구리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이에 따르면 백제에 있는 사마가 왜왕으로 있는 형에게 장수를 기원하며 보낸 선물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동성왕은 백제왕 즉위 전, 479년 8월에 오사카궁에 있었던 걸로 보이며, 귀중비직과 금주리 등을 왜로 파견해 거울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와카야마현은 오사카 바로 근처입니다.
3. 먼저 1, 2의 부연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만약 동성이 아닌 무령이라면? 무령이 당시 열도에 있었다면? 武 - 무령 461년생~478년 작위받음(왜왕)~501년 백제왕 즉위~523년 (62세 백제에서 사망) 이에 따르면 무령이 열도에서 왜왕 작위를 받은 나이가 17살입니다. 501년에 백제에서 백제왕으로 즉위했으니 478년에 왜왕 작위를 받고 501년 40세까지 열도에 살았다고 봐야 합니다. 즉 477년 16살에 부형이 갑자기 죽으니 사춘기의 어린 왕이 피눈물을 흘리며 중국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세번째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의문 1과 2는 2번 글에서 나름 해명했음). 백제의 개로는 왜 백제왕의 작위만 받았고, 왜왕 무는 왜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의 육국 작위를 요구한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백제와 왜의 관계 즉 한일고대사의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입니다. 아시는 바대로 당시 백제는 한강 이북 즉 황해도, 평안도, 요동의 고구려와 대치 상태에서 함경도의 옥저, 강원도의 동예가 있어 절충 역할을 했습니다. 한강 이남에는 경기도, 충청도, 전북의 마한 땅의 백제, 전남의 침미다례(新彌多離), 경북의 신라, 경남의 가라가 있었습니다. 근데 우리는 고구려의 영토를 말할 때 옥저와 동예까지 모두 포함하여 고구려라 말합니다. 고구려가 이들을 완전병합 했는지 아니면 자치를 하게 끔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辰을 이어받은 백제의 영토는 한강 이남 전부였던 것입니다. 이게 역사의 진실이고 그래서 개로왕은 백제왕의 작위만 받은 것입니다. 즉 백제 대왕은 전부 한 나라 백제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럼 왜왕은 뭐냐? 고구려를 주적으로 둔 당시에 백제왕과 태자 등이 전사하거나 죽었을 때 등의 위급상황에 동생 혹은 아들인 왜왕이 대신 전시상황을 지휘하려고 한 계책이었던 것입니다. 비록 형식상, 명목상의 육국 칠국 제군사 왜왕이지만 중국황제의 인정하에 한반도 남부 전체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비밀이 또 하나 있습니다. 즉 백제 대왕이 이들 모든 왕들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던 겁니다! 원래의 구삼국사 기록이라면 이런 모든 기록들이 있었지만, 백제멸망 후 신라왕이 백제왕의 위상을 잇고 나서 기록의 축소, 삭제를 하고 신라 위주로 편집했습니다. 백제 대왕의 신라왕 임명권은 박→석→김이 좋은 예로 들 수 있고, 일본서기는 그걸 숨길려고 날조한 것입니다. 이로써 삼국 초기를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백제에서 열도까지 한 나라였다! 여기까지 하고 추후 다시 쓰겠습니다.
11:00 웅략 22년 7월조 기사가 좀 잘못 됐는데 아마 일본서기 편찬할 때의 오류인가 봅니다. 단파국(丹波國)에 여사군(餘社郡)은 없고 같은 발음인 여사군(与謝郡)은 단파국의 옆에 있는 단고국(丹後國)에 있습니다. 근데 관천(管川)은 한자가 통천(筒川)이고 단고국에 있는 与謝郡의 촌락입니다. 즉 丹後國, 与謝郡, 筒川이 맞는 것이죠. 고대일본의 행정구역인 오기칠도는 xx국, xx군, xx촌의 이름과 숫자까지 알 수 있는데, 오기칠도가 5세기에도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군요. 13:50 웅략조에 469년 하리마국(播磨)의 아야시노 오마로(文石小麻呂), 474년 이세국(伊勢)의 아사케노 이라쓰코(朝日郎)를 군사적으로 토벌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아마 이 때의 군사들을 썼을 겁니다. 여기에도 오기칠도가 쓰였다는 걸 알 수 있구요, 오마로,이라쓰코는 숙녜(스쿠네)와 같이 작위로 보여집니다.
2. 이어서 씁니다. 백제왕 대신 기존의 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 으로 해도 문맥은 비슷하여 "백제왕세자는 혈통이 고귀하니 왜왕에 임명한다(즉 왜왕이다)"란 뜻입니다. 오히려 이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몇가지 의문점들이 생깁니다. 첫째, 어째서 백제 따로 왜 따로 중국에 국서를 보내 작위를 요구했냐 입니다. 위치상 백제는 북위, 왜는 유송에 보냈고 내용은 결국 고구려를 칠테니 도와달라 입니다. 양동작전인 것이죠. 북위나 유송 한곳만 도와줘도 감사한 거죠. 둘째, 왜는 어째서 백제의 작위를 요구했냐 입니다. 어차피 왜왕이 곧 백제로 가서 백제왕으로 즉위하니 이참에 한꺼번에 요구한 것입니다. 주면 고맙고 안 줘도 그만인 거죠. 결국 중국이 군사원조를 거부하니 이제 사신을 안 보냅니다. 보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암튼 저번엔 왜왕 무가 누구인가가 주제였지만, 지금은 백제의 실재적 위상에 대해서 써보겠습니다. 韓(야요이인 BC ?→기씨집단 BC 2세기말) → 辰(위씨집단 BC 2세기초→우비류집단 BC 1세기초→해온조집단) → 百濟(구태(부여씨)집단 AD 2세기말) 보시는 바대로 백제의 왕통은 찬탈로 얼룩져 복잡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진을 이어받아 부여씨집단까지 오면서 정통성을 유지했습니다. 즉 중국의 황제와 같이 백제왕은 대왕으로서 다른 소국의 왕들의 임명권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번 글에 예로 든 것 말고도 결정적인 이유 하나 더 있습니다. 찾아보면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흑치상지의 묘지석에 흑치씨가 된 이유가 적혀 있는데, 원래 흑치상지의 조상은 백제왕족이었다고 합니다. 근데 백제왕의 명으로 흑치국을 받았고 그래서 흑치씨로 성을 삼은 것이었습니다. 근데 흑치국은 삼국지 왜전에 나오고, 일본의 귀족 여인들은 이빨을 검게 물들였다고 들었습니다. 즉 흑치상지의 조상은 백제 땅에서 멀리 일본 어디인가에 있는 흑치국에 가서 분봉을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즉 백제의 대왕이 명해서 열도에 있는 흑치국을 분봉했다는 것은, 백제에서 열도까지 한 나라였다는 뜻입니다! 왜왕 무의 국서에, "동으로는 모인(毛人)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중이(衆夷)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海北) 95국을 평정하였다"고 나옵니다. 이건 백제의 어느 왕 시기에 열도를 정복한 것입니다. 제 생각으론 근초고왕 3년에서 20년까지 공백인 걸로 보아 이 때 열도를 정복했다고 보입니다. 모인은 혼슈(츄고쿠 지방)의 조몬인이고, 중이는 큐슈의 여러 야요이인의 소국들과 오스트로네시안의 소국들로 보이고, 해북은 대마도를 기준하여 해북이니 곧 삼한(미가라)을 말함입니다. 마한50여국 + 변진한24국 + 나머지 침미다례(新彌多離) 해서 95국 입니다. 근초고왕이 빠른 시일 내에 이들을 어떻게 정복했냐구요? 당시 이들은 목책을 두르고 산 신석기 말기인들이었습니다. 불화살로 공격해 들어가면 쉽게 정복가능 합니다. 물론 처음엔 항복을 권유했겠지요. 항복거절 시 몰살한다고 협박도 했겠지요. 몰살의 범위는 다양하겠지만.. 이 방법은 비류집단이 한성을 공략할 때 써먹었던 방법과 같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목책의 시대는 가고 토성의 시대가 왔던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광개토대왕이 백제 토벌할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글이 길어져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삼국사기에 백제의 기록이 의도적으로 축소, 삭제된 것을 복원할 수 있을까요? 완전복원은 못 하더라도 조금이나마 말이지요.
1. 요즘 왜5왕, 동성왕, 곤지 등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무위키와 선생님의 고견을 참고하였습니다. 먼저 왜왕 무가 중국황실에 국서를 보낸 해가 478년입니다. 근데 나무위키 왜5왕을 보면 제와 흥이 죽은 해가 477년이라고 합니다. 이 제와 흥이 무의 부형이라고 국서에 나오니 백제와 왜의 기록에 477년에 죽은 왕이 있는지 보면, 곤지와 문주가 딱 477년에 죽었습니다. 근데 사서에 문주는 개로의 아들(삼국사기)로 나오고 동생(일본서기)이라고도 나옵니다. 동생이라고 하면 나이가 맞지 않으니 개로의 아들로 봐야 합니다. 즉 개로가 즉위할 때(455) 문주가 도와서 상좌평이 되었다고 하니 문주는 적어도 435년생 전후로 봐야 합니다. 또 곤지와 문주는 삼촌조카 사이니 적어도 20살 전후의 나이차가 나야 합니다. 그럼 곤지와 문주를 부형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이 동성과 무령 두명입니다. 근데 왜왕의 작위를 받은 478년에 동성은 열도에 있었음은 분명하고 무령은 백제에 있었다고 하면, 동성이 바로 왜왕 무가 됩니다. 그럼 이를 바탕으로 이들의 행적을 보면 이렇습니다. 濟 - 곤지 415년생~451년 열도에서 작위받음(왜왕)~458년 백제에서 작위받음(좌현왕)~461년 일본행~477년 백제행 (62세 백제에서 사망) 興 - 문주 왜왕세자 435년생?~462년 작위받음(왜왕)~475년 백제왕 즉위~477년 (42세? 백제에서 사망) 武 - 동성 443년생~478년 작위받음(왜왕)~479년 백제왕 즉위~501년 (58세 백제에서 사망)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백제와 왜의 관계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저의 결론은 백제왕은 대왕이고 백제가 본국이며, 왜왕은 백제왕의 동생 혹은 아들로 임명되는 후왕의 분국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위에 설명한 것입니다. 글로 쓰자면 방대해지는데, 위의 행적이 사실이라면 곤지가 451년에 열도에 있었고(당시 36살) 거기서 왜왕 작위를 받았으며 백제왕의 명으로 백제와 왜로 오고가고 했습니다. 문주는 462년 당시 27살로 왜왕 작위를 받았고 이 당시 개로 1년~13년까지 기록이 없습니다. 동성은 478년 당시 35살로 왜왕 작위를 받았고 부형을 모두 갑자기 잃어 피눈물로 중국황제에게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근데 이들이 죽을 무렵은 모두 백제에 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증거는 무령왕의 인물화상경에 나오는 48자의 명문입니다. kibaek.tistory.com/704 또 칠지도의 명문입니다.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承(マ)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之後世 (傳永後世 후세에 영원히 전하라)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왕은 대대로 혈통이 고귀하니 왜왕이다. 뜻을 받들어 후세에 그것을 전하라. 글이 길어져 내일 쯤에 계속 쓰겠습니다.
요즘 예전에 방송했던 역사스페셜의 삼국 초기시대에 관한 것을 집중적으로 보고있습니다. 1600년이나 지났음에도 김해 가야인의 수많은 인골이 출토됐습니다. 근데 그 이빨을 보고 당시 사람들이 딱딱한 것을 먹어서 이빨들이 상했다고 진단하더군요. 아.. 이게 우리 사학계의 수준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풍납토성 방송분 등 다른 걸 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그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건강한 이빨도 부식되기 마련인데 딱딱한 걸 먹어서 그렇게 이빨이 상했다라고요? 기절초풍하지요. 그 당시 사람들은요, 단지 문화수준만 낮다 뿐이지 우리랑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뭐 삼한시대에 할 얘기야 정말 끝도 없이 할 수 있지만,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만 말하겠습니다. 20세기 사학은 한반도에 말갈인이 남하한 걸 밝혔다면, 21세기 사학은 한반도 남부는 야요이인이 선주민인 것을 밝히고 그걸 인정해야 할 시기라는 겁니다. 이걸 21세기에도 못하면 백년은 또 지나고 다음 세대들이 해야 합니다. 풍납토성 방송분을 보면서, 아 오랜 시간에 걸쳐 야요이인들이 만든 것이라는 걸 딱 느꼈습니다. 그리고 거긴 바로 한왕, 진왕이 살고 통치하던 목지국이란 것도요. 저는 선생님께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이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은 날조되었다고요. 온조니 비류니 북에서 남하하여 내려온 건 통일신라 혹은 고려 초기에 날조해 만든 것이고, 진실은 야요이인의 목지국사 그 자체라는 것을요. 그들이 북에서 내려왔다면 북방유물이 나와야 하는데 그딴건 없고 죄다 초기백제식이라는 유물뿐입니다. 저는 앞으로 이걸 기본으로 삼고 글을 쓸 겁니다. 진실을 밝힐 그 날까지.. 김연자가 부른 이 노래가 모든 걸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꼭 김연자가 불러야 합니다. th-cam.com/video/MxfQ3zigAvA/w-d-xo.html
감사합니다
이렇게 정리까지 해주시고 더 이해하기 쉽네요 교수님 책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제에 이어 설명을 계속하겠습니다. 위씨조선이 멸망한 때는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라고 합니다. 이 때 위씨집단을 포함한 많은 조선유민들이 남하해 기씨집단(한왕)의 韓으로 흡수 내지 무력으로 찬탈해 辰왕을 칭했다고 한 것이 어제의 설명이었습니다. 준왕부터 시작해 위씨집단의 진왕 찬탈까지 약 100여년의 간격인데, 한왕 시기 100여년이 초기 삼한시대, 진왕 시기 100여년이 후기 삼한시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근데 우거왕 시대(BC 140~130 전후)에 辰의 역계경이 무리를 이끌고 남하해 경상도에 辰을 형성, 그곳의 토착민(선주민)인 반도왜인(야요이인)과 함께 흩어져 삽니다. 이 때 목지국의 韓왕(기씨집단)이 "동쪽에 땅을 떼어주었다"고 삼국지 한전에 나옵니다. 즉 한왕으로선 북방 고조선에 대한 방어를 위해 이들의 의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다 BC~AD로 넘어가는 시기에 수로왕(AD 42~199?)이 나옵니다. 수로왕의 전설을 보면, 뇌질청예(수로왕)는 얼굴은 어머니를 닮아 희고 길쭉하고, 동생인 뇌질주일은 아버지를 닮아 얼굴이 둥굴고 붉었다 합니다. 즉 전자는 야요이인의 전형이고 후자는 조몬인의 전형인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이들이 야요이인과 조몬인의 결합으로 자생적으로 왕이 나온 부족이고, 다른 나머지 경남의 부족국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경북에서 辰의 무리들이 내려와 이들을 흡수 내지 무력으로 찬탈한 것이 3세기 삼국지 한전에 보이는 변진으로 보입니다. 이 때 특히 구야국은 구야韓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곳에 감시자 역할을 하는 구야진지렴을 두었습니다. PS) 원이름은 狗邪國인데 훗날 狗를 피해 가야로 바꿨다고 본다. 알 탄생설화와 키 9척 등은 모두 미화하여 기록한 것으로 이런 것들은 버려야 한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면 산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반도왜인(야요이인)들이 어디서 왔을까 생각 중에 어젯밤에 삼한사의 재조명1 칠지도의 설명에 이어 읽었더니 마침 월주신라 장에서 저와 같은 생각을 보게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는 춘추시대 吳나 越의 백성들이 바다 건너 온게 아닌가 싶었지요. 역시 제 생각이 맞았더군요. 그럼 다시 숲을 보자면, BC 194 준왕이 내려와 한왕이라 칭할 때 중국사서에는 "한땅에 내려가 그 땅을 접수하고 한왕이라 칭했다"고 하는걸 봐서 이미 한반도 남부에는 韓이라는 정치집단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 한은 반도왜인이 그 정치집단이라는 건 지난번에 설명드린 바이고, 그 영역은 우리가 알고있는 마한입니다. BC 194 한나라 여후 때 연왕 노관 흉노로 망명, 위만집단 기씨조선 찬탈, 준왕집단 남하(예족 1차 남하) BC 193(?) 준왕집단 목지국 접수, 韓왕 칭왕 (3대 후) BC 108 한무제 때 위씨조선 1차 공격했으나 실패(육5만+수7천 軍), 2차 공격 성공(내분), 위씨조선 멸망(86년 만에), 위씨집단 남하(예족 2차 남하) BC 107~106(?) 위씨집단의 공격으로 준왕집단 멸망, 위씨집단의 목지국 계승=辰왕 자처 그럼 辰은 뭔가? 삼국지 한전에 위씨조선 우거왕(위만의 손자) 때 재상 역계경이 동쪽 辰으로 망명했다고 하는걸 봐서, 원래 진은 고조선의 동쪽 즉 옥저(함경도)에 위치했다고 봐야 합니다. 근데 모세처럼 역계경이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이주, 후에 변진한이라 불리는 경상도에 온 것으로 추정되고, 이때 이곳에는 선주민인 반도왜인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섞여 살다가 더이상 내려가지 않은 곳이 왜와 접경한다는 독로국입니다. 즉 한반도 남부엔 韓이 훨씬 먼저 있었고 그 후에 辰이 내려온 것입니다. 기씨집단(한왕)이 약 100여년 동안 韓을 다스렸고, 그 후 위씨집단(진왕)이 약 100여년 삼한을 다스리는 와중에 (한성)백제와 신라가 들어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왕과 진왕은 역사적으로 분리해서 말해야 합니다.
정말 존경합니다. 교수님의 역사강의는 너무 흥미진진해요. 감사합니다.
저도 꼭 구매해서 볼게요! 늘 감사합니다
곤지가 일본에 도왜했을때 '기이.....'는 부사로 '이윽고'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곤지 도왜후 얼마되지 않아 5아들을 두었다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 웅략이 동성왕을 백제왕으로 보낼 때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동성왕이 443년생이면 나이 30살이 넘은 때입니다.
"머리를..." 은 웅략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없고 일본서기 집필진이 만든 구절입니다. 곤지가 백제에서 왜국으로 간 것이 아니고, 본래 왜국(목지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461년에 제1인자이던 우현왕 여기가 유송에 사신을 보내 왜왕 책봉을 받아 공립을 대신하려 하자 제2인자이던 곤지가 놀라 백제로 간 것입니다. 5명의 아들 이야기는 무령왕이 탄생할 때 곤지의 상태를 언급한 것인데 415년 생으로 46세이던 곤지가 왕비를 데리러 백제로 가기 전에 이미 5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해석해야 합리적입니다. 46살 이전에 5명의 아들을 둘 가능성과 46살 이후에 5명의 아들을 둘 가능성을 중에 어느 쪽이 높겠습니까? 동성왕이 백제로 천도하고 즉위하여 두 백제를 통합할 때 36살이었습니다.
@@TV-kz2xm 곤지 415년 출생으로 보는것은 웅략 = 곤지 로 보시는 것에 근거한 것인데, 글쎄요.. 비유왕 구이신 개로왕 내지 곤지가 모두 형제뻘이 되어 버리는 것이 되는 ...
@@jorbajung6109 th-cam.com/video/yUgbfYoJ7-Q/w-d-xo.html
"곤지 415년 출생으로 보는것은 웅략 = 곤지 로 보시는 것에 근거한 것인데, 글쎄요.." => 10.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탄생 배경 th-cam.com/video/yUgbfYoJ7-Q/w-d-xo.html
"비유왕 구이신 개로왕 내지 곤지가 모두 형제뻘이 되어 버리는 것이 되는 ..." => 89. 5세기 이전 일본서기 기년 찾는 법(3) 백제사 유일의 여왕, 팔수왕비 th-cam.com/video/Xl_TwDtDlUM/w-d-xo.html
영상 잘 봤습니다. 도서 2종 구매하겠습니다. 영상 중에 교수님께서 블로그를 통해 자료가 게재되었다고 하셨는데, 혹시 블로그 주소를 알 수 있을런지요?
blog.naver.com/roh_mp3
제가 작년 처음으로 선생님의 유튜브를 본게 이거였네요. 오늘 다시 보니 정말 명강의 싶니다! 전방후원분에 대해 알고싶어서 찾아 왔었습니다.
1:10 삼한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에 한반도 남부의 언어 중 신라어는 향가가 있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번역한 것들입니다. 風只 吹留如久爲都 郞前希 吹莫遣 바람이 불려구 해도 낭군 앞에 불지않고 浪只 打ㅁ如久爲都 郞前ㅁ 打莫遣 물결이 칠려구 해도 낭군 앞에 치지않고 早早 敀良來良 更逢叱那 抱遣見遣 빨랑빨랑 돌아와라 다시 만나 안겨보고 此好 너무좋아 郞耶 執音乎手乙 忍麽 等尸理良奴 낭군아 잡힌 손을 차마 물리라노(물리라고 하니) 善化公主主隱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비밀히 집 놔두고 薯童房乙 서동에게 夜矣夘乙抱遣去如 밤에 몰래 안겨가요 紫布岩乎邊希 자줏빛 베람 끝에 執音乎手母牛放敎遣 잡힌 손, 어미소 풀어놓고 吾肸不喩慚肸伊賜等 나를 안 부끄러이 여기시면 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 꽃을 꺾어드림요 東京明期月良 서라벌 밝은 달아 夜入伊遊行如可 밤드리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러서 누워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 어찌 넷이라나 二兮隐吾下於叱古 둘은 내것이고 二兮隐誰支下焉古 둘은 뉘 것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隐 본래 내것이요마는 奪叱良乙何如為理古 빼앗긴걸 어이 할꼬 고구려는 당연히 말갈어(고한국어)를 썼고, 백제(辰, 韓)는 좀 다르다고 봅니다. 즉 원래는 왕족이나 백성들이나 모두 반도일본어(고일본어)를 썼는데 백제의 왕통이 말갈인으로 바뀌면서 그땐 왕족은 말갈어, 백성은 여전히 반도일본어를 썼을 거라고 봅니다. 이들이 대거 열도로 이주함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 나오는 왜선 100척이 그 전후부터 열도로 이주하는 단계라는걸 보여준다고 봅니다. 이 말갈계 백제의 왕족들이 열도로 건너가 왜왕이 되면, 왕족은 고한국어, 열도의 백성들은 고일본어를 썼다는건 당연하구요, 이게 일본 전국시대(조선 중기)까지도 계속 됩니다. 그 증거로, 지방의 다이묘들은 천황을 직접 못 만나고 중간에 천황의 신하(고위 귀족)만 만나 소통했습니다. 마치 왜 여왕 비미호를 못 만나고 그 남동생을 통해 소통한 것과 같습니다.
일본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으로 공주에 있던 진왕응신(부여계)이 오사카부근으로 피난 천도하면서 제대로 역사가 시작되고 부여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다시 반도로 돌아왔어도 계속 부여계왕이 반도백제의 지방정부노릇을 하다가 반도백제가 망했어도 열도는 지금까지 부여계혈통을 이은 왕이라고 보면 됩니다. 신라초기기록에 나오는 "왜선 100척"기록은 신라남쪽(부산지역)에 있었던 임나가야를 "왜"로 부르는 말일뿐 열도의 구주지역에서 건너온 열도왜인들이 아닙니다. 이 임나가야가 적극적으로 열도의 구주로 진출하여 구주에 여러 분국들을 거느리고 "신공왕후", 비미호 라는 사람도 부산기장여자입니다. 그래서 "기장족희"라고 합니다. 김상님의 저서 1,2,3을 보시고 제대로 이해하여야 진실된 역사를 압니다. 말갈계는 일본에 진출한적이 없읍니다. 말갈계는 고이왕때 한성백제를 장악하고 근초고왕떄 최성기를 이루고 구이신왕을 끝으로 끝나며 비유왕서부터는 부여계입니다. 말갈계백제는 한강유역인 경기도 황해도지역에서만 활약했을뿐 충청이남으로 내려간적이 없읍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삼한사의 재조명1 중간까지 읽었습니다. 칠지도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구글 검색해보니 칠지도의 명문을 한일 역사학계 전부 오역을 하더군요. 약 1600년 전인가요? 아마도 칠지도를 만든 이들이 기절초풍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가 본 칠지도에 대한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1. 일본서기 신공황후조에 칠지도, 칠자경과 여러가지 보물들의 존재가 나오는데, 이것들은 원래 천황가에서 말하는 삼종신기(칼, 거울, 옥)가 되는 물건들입니다. 원평합전 때 삼종신기 중 칼만 유실됐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이 칠지도이고, 나머지 칠자경과 곡옥만 천황가에서 쓰고있는 것이지요. 2. 그럼 칠지도의 명문 중 중요한 뒷면을 해석하겠습니다.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이게 아니라,,,ㅡㅡ;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マ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之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왕은 대대로 기생성음하니 왜왕이다. 뜻을 받들어 후세에 그것을 전하라. 기생성음은 한마디로 "지극히 존귀한"의 뜻이고, 그것이란 "백제왕이 곧 왜왕이니 이 칼이 그 증표"라는 뜻입니다. 아마 七子鏡의 명문도 이런 뜻일 것입니다. 3. 백제는 辰(韓)이고 그 왕족과 백성은 반도왜인(야요이인)인데 열도로 이주하여 왜왕이 되는 과정의 역사가 결사팔대로 추측됩니다. 4. 어떤 불순한 무리들이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갖고 일본서기를 만든 걸로 추측됩니다. 5. 삼국사기 백제본기도 사실기록의 첨가, 삭제 등 상당히 의심이 갑니다.
천황을 섬기다니.....이해가 안되네요....
김상님의 저서를 읽지 않으셨군요. 천황을 섬기는게 전혀 아닙니다. 님은 잘못알아 추측하고 조작된 역사를 믿는듯합니다. 본인이 볼떄는 김상님의 역사추적과 서술이 가장 합리적이고 진실된 역사에 접근했다고 봅니다. 김상님의 삼국초중기역사서술은 현 토잔왜들인 소위 강단사학자들이 추앙하는 조작된 임나일본부설을 기본으로 하는 식민친일사대적인 역사서술이 아닙니다.
선입견은 물론이고 무슨 내용을 말씀하시는지 저희 맥락을 이해못하신거같네요 ㅋㅋㅋ
소중한 강의 감사합니다
scale7007님에게 1) 한반도 남부의 마한은 준왕의 천도 이후 백년 쯤 지난 BC 2~BC1 전환기에 위만조선 멸망 후 요서에서 조선유민들이 대동강유역으로 몰려오자 이에 밀려 한반도 중남부로 남하한 집단이며, 辰은 BC1세기에 요동의 진국에서 한반도 중남부로 남하한 집단입니다. 마한인은 요하문명언어, 변진한인은 황하문명언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고조선의 요수, 패수, 열수를 다룰 때 할 것입니다. 2) 목지국(미추국)은 비류가 금강유역인 미추홀에 세운 백제입니다. 지난 번 월지국과 목지국 녹화에서 설명했습니다. 목지국은 7세기 후반에 나당연합군에게 망합니다. 목지국 30명 진왕들의 업적을 살펴보는 "목지국 7백년사"를 집필 중입니다. 3) 한반도 중남부로 남하한 마한은 목지국에게 AD 9년에 망합니다. 목지국은 멸망시킨 마한을 수십개로 나누어 소국체제로 운영하는데 이것이 담로제입니다. 4) 요서에서 백가제해하여 한반도의 아산만에 상륙한 비류집단의 목지국과 온조집단의 위례국이 분립한 것은 AD 9년의 마한 멸망 직후로 큰 세력인 비류집단이 금강유역에 남고 작은 세력인 온조집단이 한강유역으로 북상하였습니다. 5) 한강유역으로 북상한 온조집단은 2세기 개루왕 때 멸망하고 초고왕 때부터 목지국의 담로국이 됩니다. 이 담로국이 3세기 구수왕 때 대방군 설치로 밀려온 말갈인들에게 다시 멸망하고 말갈국가가 건국되니 고이왕의 출현입니다. 이후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이 말갈국가는 우씨와 해씨가 왕통을 이어가다 4세기 근초고왕 때 자립하려다 고구려와 전쟁합니다. 그러다 고구려의 반격을 받고 약해져 5세기 구이신왕 때 다시 목지국 잔존세력에게 멸망하는데 이것이 비유왕의 부여씨 왕통의 출현입니다. 그러다 개로왕 때 다시 고구려에게 멸망하고 왜국에서 천도해 돌아온 목지국세력이 왕권을 장악하니 동성왕의 출현입니다. 동성왕이 두 백제를 통합한 최초의 왕입니다. 나중에 동성왕의 출생연도 추정(443년 경 출생, 36세 무렵 즉위)에서 할 것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바쁘신데 굳이 답글 안 쓰셔도 됩니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저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라고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음.. 전남 영산강 유역에는 세계의 고인돌 분량의 2/3인가요? 지금 기억이 가물한데.. 암튼 이 많은 고인돌을 만든 주인공이 요서, 요동에서 넘어온 사람들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남해 해안가, 강가의 패총과 항아리 무덤, 움집들이 과연 그들이 만든 것들일까요? 저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들은 한반도 남부에 살던 선주민들이 만든 것이지 중국이나 만주의 이주민들이 만든게 아닙니다. 저는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제발 제 글 좀 안 지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참 삼국지 한전에 아주 중요한 한문 문장을 한국 사학계는 물론 선생님도 오역하고 계시던데 기회되면 언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저는 선생님의 팬입니다. 항상 감사드리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scale7007 하하, 생각해보니 구지 안 달아도 되는 댓글을 달았군요. 앞으로 참고하겠습니다. 저는 답글을 안 지우기 때문에 scale7007의 댓글을 지운 적이 없습니다. 원전의 오역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평생 원전만 본 사람들의 오역을 발견하는 것처럼 저도 오역을 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오역한 곳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4. 그럼 삼한 70여개 국의 존재를 삼국사기는 왜 삭제시켰는가? 답은 뻔하죠. 민족통일기에 말갈이 주류인데 거기에 왜인이 껴선 안되기 때문에 삭제시킨 겁니다. 삼한시대의 진왕의 존재는 무엇인가? 진왕은 중국의 황제와 같은 존재로 역시 고대중국의 봉건제와 비슷한 국가시스템을 썼습니다. 진왕에게 있어 백제와 신라는 무엇인가? 북방에서 말갈인들이 내려와 의탁하고 땅을 받은 것이 백제와 신라입니다. 대신 해마다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풍경은 일본서기에 나옵니다. 백제는 원래 일개 狗多羅국이었지만 힘을 길러 진(한)을 멸망시키고 백제를 이어받았으나 왜인들은 여전히 이 백제를 쿠다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삼서의 존재가 있는데 이 책들은 어디에 있는가? 정창원에 잘 모셔져 있습니다.
3. 중국 사서에 보이는 한예는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을 中華라고 하듯이 韓을 中과 같이 지역적인 개념으로 썼고 예는 華夏와 같이 종족의 개념으로 쓴 것입니다. 두번째는, 韓은 가라 즉 반도 왜인(야요이인)의 대명사로 썼고, 예는 예족으로 종족의 개념으로 쓴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건 한과 예는 같은 개념도 아닐 뿐더러 韓은 한반도 남부에 사는 왜인이고 예는 한반도 북부에 사는 예족인 것입니다. 이 예족이 곧 말갈인이고 더 북방의 맥족과 합쳐져 고구려는 예맥인의 나라입니다. 즉 중국 사서의 사관이 이 한예를 쓴 이유가 곧 한반도 전체 다시 말해 남부인과 북부인을 포괄해서 쓴 단어였던 것입니다. 근데 한반도 남부의 辰 혹은 韓이 있는데 고조선의 준왕 집단이 내려와 한왕을 칭했다고 합니다. 그 거처는 목지국으로 지금의 충북 청주 혹은 한강 근방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한씨의 본이 청주이기 때문에 그리 추측한 것이고, 이게 아니라면 한강 근방에 목지국이 있는데 이곳으로 배타고 준왕 집단이 쳐들어온 걸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비류온조 집단이 임진강 근처 우휴모탁국에 있다가 남쪽으로 사냥간다는 이유로 그리 머지않은 목지국의 마한을 멸했다고 하는 삼국사기 온조기가 이해가 가지만, 충북 혹은 전북에 위치한 목지국이라 함은 너무 멀어 말이 안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보면 충북 청주는 아니고 한강 근방에 목지국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또 훗날 삼국이 그렇게 한강을 차지할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2. 근데 한반도 남부와 규슈는 빙하기까지는 연결돼 있었고, 당시는 고아시아인이라는 인종이 원주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도 알 수 있는게, 1만년 전의 열도에는 조몬인이 있었고 이 조몬인은 한반도 남부 해안가에도 살고 있었다고 고고학 유물로 증명되었습니다. 즉 한반도와 열도의 고아시아인은 바로 조몬인이고 이들이 열도는 물론 한반도의 원주민들인 것입니다. 근데 어디인가에서 야요이인들이 나타나 이들과 동화된 것이 삼한인들로 보여집니다. 다시 말해 조몬인이 한반도 남부의 원주민이고 야요이인이 선주민으로 삼한시대까지 번영하다 북에서 말갈인들이 내려와 지금의 한국인이 형성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야요이인은 소위 말하는 반도 왜인들이고 이들은 고일본어를 썼을 것이고, 말갈인은 당연히 고한국어를 썼겠지요. 광개토왕 비문에 보이는 사방이 온통 왜인 천지다 하는 것이 바로 이들 선주민을 말함이고, 백제와 신라의 왕족은 말갈어 즉 고한국어를 썼지만 대다수의 백성들은 고일본어를 썼던 야요이인인 것입니다. 이 시각을 가지고 삼한시대와 초기 삼국시대를 봐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1. 삼국지 한전에는 삼한 70여개 국이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삼국과 가야의 기록 조금만 있을 뿐입니다. 근데 고조선의 강역은 요서, 요동, 평안도를 아우르지만 한강 이남은 辰이라는 정체불명의 정치집단이 있다고 합니다. 이 진이 후의 韓과 동일한 집단으로 보이는데, 뜻은 나라 한이요, 일본어 독음은 가라입니다. 근데 BC~AD 당시의 왜는 한자가 아직 널리 퍼지기 전의 시대이고 극소수 귀족집단 만이 알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의 정치집단을 가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말인 즉슨 교역하며 한이라고 소개하면 당연히 그들 말로 칸이라고 불렀을 텐데 가라라고 하는 독특한 말로 불렀던 것이지요. 이건 분명 당사자 즉 한반도 남부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네 말로 자신들의 정치집단의 이름을 한자 韓을 이용하여 가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즉 韓은 반도 왜인들 즉 한반도 남부의 선주민들이 곧 삼한의 주민이라는 뜻이고 이들은 일본 사학계에서 말하는 야요이인들인 것입니다.
선생님, 삼한사의 재조명 1,2,3권 구해서 지금 1권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역시 제가 생각했던 거랑 맞아서 재미있게 읽고 있지요. 근데 이 역사의 숨은 비밀이 너무 민감한 내용이라 공개적으로 쓰기엔 쉽지 않습니다.
historywriter@hanmail.net 으로 메일 주시지오.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덕에 진정한 역사에 눈이 틔였습니다 항상 소중한 강의 감사합니다 책도 잘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교수님...감사합니다
중국의교수가 강릉단오에 왔다가 강릉 단양 한양 한강 태백산 등의 지명이 중국에 있는지명과 같고. 치우천왕. 곰숭배. 묘족비석글등. 여러가지 풍습이.중국묘족의 풍속과 비슷하여. 강원도. 경상도 동해안으로 신라땅까지. 중국교수가 주장한 이 내용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혹시 위군군사가. 묘족과는. 관계가 없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 중국식 지명("강릉 단양 한양 한강 태백산")은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에 모든 관직과 풍습을 중국식으로 고치며 함께 고친 것이라서 우리 고유의 지명이 아니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삼국사기가 지금처럼 된 것도 그 원본이 통일신라시기에 손을 보았기 때문으로(원본의 2/3 이상을 삭제함)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 고유의 지명은 동북3성에만 있고 북경 남쪽으로는 거의 없습니다. 묘족은 고구려 유민과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고구려후예라면 고구려에 걸맞는 기록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245년에 내려와 변한지역을 정복하고 새로운 지배층이 된 위군은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이들이 체격이 크고 법률이 엄격하고 도포 폭이 넓다고 하고 있는데 묘족이 아니라 내몽골출신 오환선비계 유목민족 군단입니다.
지금껏 본 역사 강의 중 가장 논리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