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오토는 『성스러운 것의 의미』에서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 속에는 실재에 대한 감각, 객관적 현존에 대한 느낌, ‘저 밖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대한 지각이 있는 거 같으며, 이 감각은 현재의 심리학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실존하는 존재들을 본래 우리에게 알려주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감각들보다도 더 깊고 넓은 것이다.” 오토는 신적인 특성이나 신적 대상을 가르키는 라틴어 명사 ‘누멘’(numen)으로부터 차용하여 인간의 평균적 경험을 압도하는,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하고, 초월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신비롭고 경외스러운 종교적 체험의 근거로써 ‘누멘적인 것’(누미노제, das numinöse)을 상정하고 이에 대한 직접적인 소여로서의 느낌을 ’누멘적인 감각’(sensus numinis)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종교의 기초를 누미노제적인 체험에 두게 되면 합리와 윤리로 무장한 근대정신의 무지막지한 난타를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게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제 어릴 때 외가에서 달빛 어스름한 밤중에 홀로 깨어서 대청마루에 놓아둔 요강에 무릎 꾾고 앉아 오줌을 누면서 보았던, 밤하늘을 배경으로 큰 대나무들이 바람에 잎들이 쓸리는 소리를 내며 캄캄한 실루엣으로 장중하게 흔들리던 모습은 어린 마음에 원시적인 공포와 외경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러한 누미노제적 감정과 현상에 대한 루돌프 오토의 연구는 물론 기독교 역사의 맥락에 서 있기는 하지만 전통 종교의 형해화 된 교리보다 종교적 체험의 중요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종교의 보편적 성격을 추출해내고 있기 때문에 고전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이데거는 현대인의 공간 이해에 스며 있는 데카르트적 공간, 즉 연장의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 등방적이고 균일한 기하학적 공간성의 이해를 비판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공간의 공간성에 대한 이해로서 세계-내-존재에 기반하여 거리없앰과 방향잡음으로 나타나는 현상학적이고 실존적인 공간론을 제안했는데, 루돌프 오토의 연장선상에서 성(聖)과 속(俗)이란 대비되는 개념을 통해 종교연구를 심화시킨 엘리아데의 ‘거룩한 공간‘에 대한 묘사를 보면 이러한 하이데거의 도구연관적 공간론이 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공간은 균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공간 내부의 단절과 균열을 경험 한다. 공간의 일부는 다른 부분과 질적으로 같지 않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출애굽기 3장 5절)라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하였다. 그러니까 거룩한 공간, 강력하고 뜻 있는 공간이 있으며, 거룩하지 않고, 따라서 구조나 일관성도 없으며, 형태를 갖추지 못한 공간이 있는 것이다....세속적인 경험에 있어서 공간은 균질적이고 중성적인 성격을 띤다. 그 더미의 다양한 부분들을 질적으로 상호 구별하는 어떤 단절도 없다. 기하학적인 공간은 어떤 방향으로나 절단되고 한정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고유한 구조로부터는, 어떤 질적 차이도, 따라서 어떤 방향성도 부여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를 중심으로 공간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러나 체험적 공간성이 단지 의식의 심리적 주관의 반영만은 아닌 것은, 모든 체험에는 항상 주관과 객관이 동시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인데, 생태학적 심리학을 제창한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깁슨(J.J Gibson)이 제시한 ’어포던스‘(Affordance) 개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물과 신체 또는 환경과 유기체 사이에는 그 물리적인 고유한 관계에 순응하여 사용 (uses), 동작 (actions), 기능 (functions)이 수반하기 때문에 잠재적인 객관적 실재성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에는 주관적인 의식의 유무와는 별개의 객관성이 담보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떨어져 죽을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절벽 끝이라고 해도 독수리의 신체는 절벽과 그런 의미 관계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우리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종교적 공간‘을 두 군데서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독실한 크리스천인 친구가 하도 졸라대서 대형교회에 따라가서 보았는데, 그 거룩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망아(忘我)의 기쁨은, 불경스럽게도 거룩한 룸싸롱에서 남자들이 알코올에 취해서 느끼는 망아의 기쁨과 매우 유사해보였습니다. 윈시부족이 거룩한 공간으로의 일탈의 방법으로 약물을 사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성스러움’과 관련하여 『벽암록』 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무제가 달마스님에게 물었다."무엇이 근본이 되는 가장 성스런 진리입니까?" "텅 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廓然無聖)." 달마의 ‘확연무성’이란 말이 확 와닿습니다. 우리 인간은 종교의 기초로서 누멘적인 정서적 쇼크를 필요로 할까요? 일상적 감각을 뛰어넘는 초월적 경험, 그것이 자율신경계의 극적인 긴장이든 아니면 극적인 이완이든, 즉 인간 내면을 정화시키는 힘으로써 일상을 완전히 초월한 특수한 종교적 감정이나 인식이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종교적 체험은 사회적 압력에 쓸려 가는 비본래적인 일상성의 굴레를 벗어나 본래적인 자기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일상적인 관심으로부터 유리된 궁극적인 관심은 본래적인 자기와 비본래적인 자기를 분열시킵니다. 동학(東學)의 해월 최시형은 종래의 유교의 제사법의 구조였던 향벽설위(向壁設位)를 향아설위(向我設位)로 바꾸는 혁명적인 시도를 하였는데, 이는 벽 너머에 있는 성스러운 세계를 벽 안쪽에 있는 세속적인 세계 안으로 넣어버린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聖)과 속(俗)의 어정쩡한 타협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속이제(眞俗二諦)의 논리에 철저할 때만 성스러움이 세속적인 세계 안에서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어 들이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 상황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추구하되 하나님과 함께 다른것도 구하려 한다면 그는 하나님을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오로지 하나님만 구한다면, 그는 하나님만을 발견할 뿐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을 통해 그대 자신의 이익이나 축복을 구한다면 진정 그대는 하나님을 전혀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해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아버지를 예배하나니" 지당하신 말씀이다. 만일 그대가 어떤 선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하나님을 찾고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이시니까!" "당신은 왜 진리를 구하고 있습니까?" "진리이니까!" "당신은 왜 의를 구하고 있습니까?" "의이니까!" 이런 사람들이 정말로 옳은 사람이다.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이유를 갖는다. 예를 들어 아무에게라도 "당신은 왜 먹습니까?"하고 물어보라. 그러면 "힘을 얻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듣게 될것이다. "당신은 왜 잡니까?" "마찬가지 이유 때문에."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이와 같다. 그렇지만 만일 그대가 어떤 선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하나님이시니까" 당신은 왜 진리를 사랑하십니까?" "그냥 진리이니까." "당신은 왜 정의를 사랑하십니까?" "그냥 정의이니까!" "당신은 왜 선을 사랑하십니까?" "그냥 선이니까!" "그러면 당신은 왜 살아가십니까?" "글쎄, 잘 모르겠지만, 사는 게 그냥 좋으니까!"]
죽음 그 거룩한 일 친구의 부친이 별세하여 조문을 다녀왔다. 아흔이 넘은 고령이시라 가실 때가 되었다고 모두 생각했다. 크게 놀라울 일도 슬퍼할 분위기도 아닌 담담한 모습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보낸지 십일년이 되었다. 떠나는 분도 보내는 사람도 마음속에 미련이 없어야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혼자 쓸쓸히 세상을 떠나게 했다. 가게를 개업한지 일주일만에 떠나셨으므로 경황없는 이별이 되었다. 유언도, 잘 떠나시라 인사도 서로 하지못한 채 각자 고독한 삶 안에서 세상을 떠나고 또 살아갔다. 그것이 언제나 마음에 끼어 있다. 내 친구도 아버지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아침을 드시다가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운명하신 듯 했고, 친구는 후쿠오카를 여행중이었다. Hodie mihi, cras tibi(호디에 미히 끄라스 띠비)라는 성서의 말씀이 있다. 이뜻은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말이다. 한 세대가 이울고 나면 다음 세대인 내차례인 것이다. 죽음은 누구나 맞아야 할 마지막 순간이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숙명의 순간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받았다. 누구든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어떻게 보면 삶은 이미 죽음을 선고 받은 일상이다. 로마의 문호 호라시우스는 'Carpe diem, memento mori(까르페 디엠, 메멘또 모리)'라했는데, 이말의 뜻은 '오늘을 즐겨라, 죽음을 기억하며'이다. 그 또한 숙명적인 인간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죽음을 기억한 채 그렇게 날뛸듯이 즐거워한다는게 무슨 신이나는 일이겠는가? 호라시우스의 이 말은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비수같은 말이다. 어제는 박충일 선생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분의 말씀은 일상의 거룩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 거룩한 삶인가! 여기에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하기오스(거룩한) 오 데우스(하느님)'라는 말씀은 가톨릭 사순절 전례서 안에 나오는 말로서, 거룩함은 신에게 해당하는 듯한 말씀이다. 인간은 부족하고 비참한 존재인데, 어찌해서 거룩하다고 할까. 더나아가 죽음의 마지막 순간이 거룩해져 보일까? 우리가 조금 알 수 있는 것은 삶안에서 보고 또 느끼며 알게된 것들이다. 온전히 진실되고 순수해지는 순간은 내 의지가 없는 순간인, 탄생과 죽음의 그 순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왔고 또 그렇게 갈것이다. 그 사이에 각자 조금 다르게 있다가 떠나는 차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엄격한 숙명적인 시작과 죽음은 우리의 의지와 선택과는 무관하고 그래서 순수함 그 자체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러한 순간을 우리는 거룩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의 숙명은, 너무 이상하리만큼 지금의 우리 생각과는 동떨어져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내 생각대로 움직이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일생이 그 마지막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낯선 일이다. 친구의 부친상 조문을 다녀와서 곰곰히 생각해본다. 오늘은 사람의 일생이 낯설고 또 새롭다. 부친의 명복을 빌고,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친구의 빈 가슴 속에 조용히 깃드는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 *
성스러움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이번 강의는 거장들이 총등장하는군요. 바디우가 《존재와 사건》에서 다루듯 순수다수 존재론을 전개하기 위해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의 신존재 증명을 통한 것처럼 즉, 일자화의 언어적 한계에 부닥치면서도 통제를 벗어나 있는 시적 전회나 신적 일자화라는 일자를 다시금 일자화 시키는 반복이 아닌 엄밀한 통제와 규칙이 있는 이성의 언어를 통해서도 비이성•비논리가 되는것, 모순이라는 틈이 발견됨을 환기시킨다. 수학적 사고로 다다르는 신성이라니.... 칸토어는 치밀한 사유끝에 마주한 것이 성스러움임에 놀라고 경악스러워 신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루돌프 오토는 『성스러운 것의 의미』에서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 속에는 실재에 대한 감각, 객관적 현존에 대한 느낌, ‘저 밖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대한 지각이 있는 거 같으며, 이 감각은 현재의 심리학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실존하는 존재들을 본래 우리에게 알려주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감각들보다도 더 깊고 넓은 것이다.” 오토는 신적인 특성이나 신적 대상을 가르키는 라틴어 명사 ‘누멘’(numen)으로부터 차용하여 인간의 평균적 경험을 압도하는,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하고, 초월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신비롭고 경외스러운 종교적 체험의 근거로써 ‘누멘적인 것’(누미노제, das numinöse)을 상정하고 이에 대한 직접적인 소여로서의 느낌을 ’누멘적인 감각’(sensus numinis)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종교의 기초를 누미노제적인 체험에 두게 되면 합리와 윤리로 무장한 근대정신의 무지막지한 난타를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게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제 어릴 때 외가에서 달빛 어스름한 밤중에 홀로 깨어서 대청마루에 놓아둔 요강에 무릎 꾾고 앉아 오줌을 누면서 보았던, 밤하늘을 배경으로 큰 대나무들이 바람에 잎들이 쓸리는 소리를 내며 캄캄한 실루엣으로 장중하게 흔들리던 모습은 어린 마음에 원시적인 공포와 외경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러한 누미노제적 감정과 현상에 대한 루돌프 오토의 연구는 물론 기독교 역사의 맥락에 서 있기는 하지만 전통 종교의 형해화 된 교리보다 종교적 체험의 중요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종교의 보편적 성격을 추출해내고 있기 때문에 고전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이데거는 현대인의 공간 이해에 스며 있는 데카르트적 공간, 즉 연장의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 등방적이고 균일한 기하학적 공간성의 이해를 비판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공간의 공간성에 대한 이해로서 세계-내-존재에 기반하여 거리없앰과 방향잡음으로 나타나는 현상학적이고 실존적인 공간론을 제안했는데, 루돌프 오토의 연장선상에서 성(聖)과 속(俗)이란 대비되는 개념을 통해 종교연구를 심화시킨 엘리아데의 ‘거룩한 공간‘에 대한 묘사를 보면 이러한 하이데거의 도구연관적 공간론이 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공간은 균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공간 내부의 단절과 균열을 경험 한다. 공간의 일부는 다른 부분과 질적으로 같지 않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출애굽기 3장 5절)라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하였다. 그러니까 거룩한 공간, 강력하고 뜻 있는 공간이 있으며, 거룩하지 않고, 따라서 구조나 일관성도 없으며, 형태를 갖추지 못한 공간이 있는 것이다....세속적인 경험에 있어서 공간은 균질적이고 중성적인 성격을 띤다. 그 더미의 다양한 부분들을 질적으로 상호 구별하는 어떤 단절도 없다. 기하학적인 공간은 어떤 방향으로나 절단되고 한정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고유한 구조로부터는, 어떤 질적 차이도, 따라서 어떤 방향성도 부여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를 중심으로 공간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러나 체험적 공간성이 단지 의식의 심리적 주관의 반영만은 아닌 것은, 모든 체험에는 항상 주관과 객관이 동시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인데, 생태학적 심리학을 제창한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깁슨(J.J Gibson)이 제시한 ’어포던스‘(Affordance) 개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물과 신체 또는 환경과 유기체 사이에는 그 물리적인 고유한 관계에 순응하여 사용 (uses), 동작 (actions), 기능 (functions)이 수반하기 때문에 잠재적인 객관적 실재성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에는 주관적인 의식의 유무와는 별개의 객관성이 담보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떨어져 죽을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절벽 끝이라고 해도 독수리의 신체는 절벽과 그런 의미 관계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우리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종교적 공간‘을 두 군데서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독실한 크리스천인 친구가 하도 졸라대서 대형교회에 따라가서 보았는데, 그 거룩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망아(忘我)의 기쁨은, 불경스럽게도 거룩한 룸싸롱에서 남자들이 알코올에 취해서 느끼는 망아의 기쁨과 매우 유사해보였습니다. 윈시부족이 거룩한 공간으로의 일탈의 방법으로 약물을 사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성스러움’과 관련하여 『벽암록』 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무제가 달마스님에게 물었다."무엇이 근본이 되는 가장 성스런 진리입니까?" "텅 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廓然無聖)." 달마의 ‘확연무성’이란 말이 확 와닿습니다. 우리 인간은 종교의 기초로서 누멘적인 정서적 쇼크를 필요로 할까요? 일상적 감각을 뛰어넘는 초월적 경험, 그것이 자율신경계의 극적인 긴장이든 아니면 극적인 이완이든, 즉 인간 내면을 정화시키는 힘으로써 일상을 완전히 초월한 특수한 종교적 감정이나 인식이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종교적 체험은 사회적 압력에 쓸려 가는 비본래적인 일상성의 굴레를 벗어나 본래적인 자기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일상적인 관심으로부터 유리된 궁극적인 관심은 본래적인 자기와 비본래적인 자기를 분열시킵니다. 동학(東學)의 해월 최시형은 종래의 유교의 제사법의 구조였던 향벽설위(向壁設位)를 향아설위(向我設位)로 바꾸는 혁명적인 시도를 하였는데, 이는 벽 너머에 있는 성스러운 세계를 벽 안쪽에 있는 세속적인 세계 안으로 넣어버린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聖)과 속(俗)의 어정쩡한 타협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속이제(眞俗二諦)의 논리에 철저할 때만 성스러움이 세속적인 세계 안에서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어 들이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 상황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추구하되 하나님과 함께 다른것도 구하려 한다면 그는 하나님을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오로지 하나님만 구한다면, 그는 하나님만을 발견할 뿐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을 통해 그대 자신의 이익이나 축복을 구한다면 진정 그대는 하나님을 전혀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해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아버지를 예배하나니" 지당하신 말씀이다. 만일 그대가 어떤 선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하나님을 찾고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이시니까!" "당신은 왜 진리를 구하고 있습니까?" "진리이니까!" "당신은 왜 의를 구하고 있습니까?" "의이니까!" 이런 사람들이 정말로 옳은 사람이다.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이유를 갖는다. 예를 들어 아무에게라도 "당신은 왜 먹습니까?"하고 물어보라. 그러면 "힘을 얻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듣게 될것이다. "당신은 왜 잡니까?" "마찬가지 이유 때문에."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이와 같다. 그렇지만 만일 그대가 어떤 선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하나님이시니까" 당신은 왜 진리를 사랑하십니까?" "그냥 진리이니까." "당신은 왜 정의를 사랑하십니까?" "그냥 정의이니까!" "당신은 왜 선을 사랑하십니까?" "그냥 선이니까!" "그러면 당신은 왜 살아가십니까?" "글쎄, 잘 모르겠지만, 사는 게 그냥 좋으니까!"]
오랜만에 또 뵙네요. 방갑습니다. 무향님^^ 언제나 존재의 숲을 자신만의 글로 비춰주시네요. 엄지척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오랜만에 또 뵙네요. 방갑습니다.^^ 추운 겨울 즐겁고 건강하게 잘 건너가시길요!
감기조심하시고 성탄 잘 맞으시길 빌어요.😊
후기 하이데거에서 노자의 그릇이야기, 가슴 뭉클했습니다. 통섭한 전개에 감탄합니다.
임제의현의 이야기, 모든것이 다 타고 난 후 다가오는 은은한 기쁨 같은 말씀들은 너무 너무 감동스럽군요. ❤
잘들었습니다
성스러움 ㅡ결국 인간인식의 가식 가면일지도~~
우담바라여
입가에 떨군 미소
합장으로 피었는가
ㅡㅡ합장하고 있는 젊은 비구니의 붉은 입술을 보고
방갑습니다. 얍얍님^^ 평안한 밤 맞이하셔요!
😮
추천합니다 🎉
방갑습니다. 병곤님^^ 평안한 밤 맞이하셔요!
죽음 그 거룩한 일
친구의 부친이 별세하여 조문을 다녀왔다. 아흔이 넘은 고령이시라 가실 때가 되었다고 모두 생각했다. 크게 놀라울 일도 슬퍼할 분위기도 아닌 담담한 모습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보낸지 십일년이 되었다. 떠나는 분도 보내는 사람도 마음속에 미련이 없어야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혼자 쓸쓸히 세상을 떠나게 했다. 가게를 개업한지 일주일만에 떠나셨으므로 경황없는 이별이 되었다. 유언도, 잘 떠나시라 인사도 서로 하지못한 채 각자 고독한 삶 안에서 세상을 떠나고 또 살아갔다. 그것이 언제나 마음에 끼어 있다.
내 친구도 아버지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아침을 드시다가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운명하신 듯 했고, 친구는 후쿠오카를 여행중이었다.
Hodie mihi, cras tibi(호디에 미히 끄라스 띠비)라는 성서의 말씀이 있다. 이뜻은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말이다. 한 세대가 이울고 나면 다음 세대인 내차례인 것이다.
죽음은 누구나 맞아야 할 마지막 순간이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숙명의 순간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받았다. 누구든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어떻게 보면 삶은 이미 죽음을 선고 받은 일상이다.
로마의 문호 호라시우스는 'Carpe diem, memento mori(까르페 디엠, 메멘또 모리)'라했는데, 이말의 뜻은 '오늘을 즐겨라, 죽음을 기억하며'이다. 그 또한 숙명적인 인간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죽음을 기억한 채 그렇게 날뛸듯이 즐거워한다는게 무슨 신이나는 일이겠는가? 호라시우스의 이 말은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비수같은 말이다.
어제는 박충일 선생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분의 말씀은 일상의 거룩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 거룩한 삶인가! 여기에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하기오스(거룩한) 오 데우스(하느님)'라는 말씀은 가톨릭 사순절 전례서 안에 나오는 말로서, 거룩함은 신에게 해당하는 듯한 말씀이다. 인간은 부족하고 비참한 존재인데, 어찌해서 거룩하다고 할까. 더나아가 죽음의 마지막 순간이 거룩해져 보일까? 우리가 조금 알 수 있는 것은 삶안에서 보고 또 느끼며 알게된 것들이다. 온전히 진실되고 순수해지는 순간은 내 의지가 없는 순간인, 탄생과 죽음의 그 순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왔고 또 그렇게 갈것이다. 그 사이에 각자 조금 다르게 있다가 떠나는 차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엄격한 숙명적인 시작과 죽음은 우리의 의지와 선택과는 무관하고 그래서 순수함 그 자체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러한 순간을 우리는 거룩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의 숙명은, 너무 이상하리만큼 지금의 우리 생각과는 동떨어져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내 생각대로 움직이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일생이 그 마지막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낯선 일이다.
친구의 부친상 조문을 다녀와서 곰곰히 생각해본다. 오늘은 사람의 일생이 낯설고 또 새롭다. 부친의 명복을 빌고,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친구의 빈 가슴 속에 조용히 깃드는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 *
성스러움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이번 강의는 거장들이 총등장하는군요.
바디우가 《존재와 사건》에서 다루듯 순수다수 존재론을 전개하기 위해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의 신존재 증명을 통한 것처럼 즉, 일자화의 언어적 한계에 부닥치면서도 통제를 벗어나 있는 시적 전회나 신적 일자화라는 일자를 다시금 일자화 시키는 반복이 아닌 엄밀한 통제와 규칙이 있는 이성의 언어를 통해서도 비이성•비논리가 되는것, 모순이라는 틈이 발견됨을 환기시킨다.
수학적 사고로 다다르는 신성이라니....
칸토어는 치밀한 사유끝에 마주한 것이 성스러움임에 놀라고 경악스러워 신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역시 엄지척입니다. 민석님^^ 평안한 저녁밤 맞이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