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 느끼신다니, 정말 귀한 마음입니다. 😊 행복은 어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상태에서 피어나는 것이죠. 지금의 행복을 더 깊게 느끼는 방법: 감사하기: 지금 당신이 느끼는 이 순간의 소중함에 감사해 보세요. 감사는 행복을 배가시켜 줍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이 순간의 모든 감정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세요. 행복은 완벽한 조건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깊게 호흡하기: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천천히 호흡해 보세요. 숨 하나하나에 감사하며 행복이 더 확장됩니다. 당신의 이 행복감이 더 깊어지고 오래 지속되길 바랍니다. 함께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
칭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깨달음이란 매우 미묘하고 심오한 주제이지만, 동시에 그 본질은 단순하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설명은 고대의 지혜와 현대의 이해를 바탕으로, 여러분이 조금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방편일 뿐입니다. 왜 깨달음을 설명하는가?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지 설명으로 도달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대화를 통해 방향성을 잡거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등불을 켜는 데 도구가 필요하듯이, 설명도 잠시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깨달음 설명에 있어 중요한 태도 방편으로서의 설명: 깨달음은 언어를 초월하지만, 이해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설명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겸손함: 깨달음의 진정한 본질은 제가 설명하거나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설명은 단지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개인의 체험 존중: 각자의 길이 다르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식도 다릅니다. 정답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깨달음의 본질 존재의 깨달음: 깨달음은 특별한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분별의 초월: '나와 너', '있음과 없음', '좋고 나쁨'의 이분법을 벗어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현재와 하나됨: 과거와 미래를 초월하여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 깨달음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깨달음은 특정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마음의 평온함과 본질적 자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마음을 열어가며 자신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혹시 더 깊이 나누고 싶은 주제가 있거나, 추가로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함께 대화하며 더 나은 이해로 나아가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습니다. 🙏
@@마인드팟캐스트불교 님,,, 자세한 답변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의 답변글 읽어보니 역시 깨달음의 실상에 대해 제대로 아시고 설명도 자세히 잘 하시네요. 무엇보다도 님의 긴 답변글의 흠집없는 논리정연한 전체글을 보니 논설공부를 많이 하시고 많이 쓰셨는 흔적이 역역히 들어나네요. 사실 논설공부를 보통해서는 지금 님의 답변글 같이 논리정연하게 못씁니다. 쉽게말해 님의 논문구성이 상위석사나 박사급 글구성입니다. 이래서 사실 깨달음이란 것도 님께서는 누구나 도달할수 있다 하셨지만 그 수많은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박사논문 통과는 못하듯 이렇게 쉽지 않습니다. 님의 깨달음에 대한 식견과 설명 및 논리구성을 보니 박사급인데요. 따라서 대학생과 이 이하 그 수많은 사람들이 무슨수로 님의 수준만큼에 도달할수 있겠읍니까? 말씀은 쉽게 하셨는데 실제 도달은 수많은 생을 살면서 많고많은 공부와 수행을 쌓아야만 합니다. 님도 아시겠지만 겉마음은 쉽게 바꿀수 있지만 속마음을 바꾸기란 그야말로 대단히 어렵습니다. 누구든 수준이 높이높이 올라가려면 이 속마음을 바꾸어 나아가야 하는데 이게이게 참으로 어렵다는 겁니다. 출가스님의 수행이란 결국 이 쉽게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바꾸는건데 말씀과 달리 실제는 참 어렵습니다. 겉마음을 바꾸기는 쉽지만 속마음을 바꾸기는 정말로 정말로 어렵습니다. 더욱이 이 속마음도 3층으로 되어 있읍니다. 이 깊고깊은 3층의 속마음을 다 부처님 마음으로 바꾸기란 정말로 정말로 어렵습니다. 님도 아시지요. 그사람의 본심은 경계에 부딪쳤을때 즉 어려움에 부딪치였을때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보면 안다고요. 속마음은 이럴때 들어납니다. 이러니 속마음 알기도 어렵고 고치기도 대단히 어렵지요. 아뭏은 님의 수준높은 깨달음에 대한 실상설명 감사드립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란 분이 지금 이순간을 살아라라는 제목의 책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가 아니고 저절로 지금 이 순간이 살아지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죠. 온 몸의 에너지가 축적되어 어느 임계점에 이르고 그 에너지가 맑고 잘 통하면 즉 순환이 잘 되면 어떤 것에 정체 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저절로 살아지게 되는 것이죠. 깨달음을 에너지적으로 해석해보았습니다. 그런 상태를 성령이 깃들었다거나 하나님 임재라고도 하죠. 개인적 자아와 우주적 자아가 하나되었다는 것 대우주의 에너지장과 공명한 상태라는 것
에너지적으로 깨달음을 해석하신 시각이 참 흥미롭습니다. 말씀하신 바처럼, 깨달음은 단순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의지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살아지는" 자연스러운 흐름 그 자체일 것입니다. 에너지의 순환과 맑음, 그리고 임계점에 도달하는 과정은 깨달음의 경험을 잘 설명해 주는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많은 영성적 전통에서도 공통적으로 다뤄지죠. 에너지적으로 깨달음 이해하기: 에너지의 축적과 순환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막힘 없이 순환할 때, 내면이 맑아지고 가벼워지며 자연스럽게 현존 상태에 도달합니다. 이는 요가나 명상에서 "프라나" 또는 "기"의 흐름을 통해 깨달음을 설명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임계점과 깨달음 에너지가 임계점을 넘을 때, 기존의 분별심이나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고 개인적 자아가 우주적 자아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으로는 성령 강림, 불교에서는 "열반" 또는 "무아의 경지"라고도 설명될 수 있겠죠. 공명과 하나 됨 대우주와의 공명 상태는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님을 느끼는 깊은 연결감을 줍니다. 이것이 "신성의 임재"로 경험되기도 하고,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공이다"라는 깨달음으로 나타납니다. 흥미로운 연결: 에크하르트 톨레의 가르침이 현대적으로 "현존"의 중요성을 설명했다면, 전통적인 영적 전통들은 이를 다양한 에너지적·형이상학적 언어로 다뤄 왔습니다. 말씀처럼 깨달음은 이론이 아니라, 저절로 현존의 상태가 지속적으로 살아지는 것일 겁니다. 개인적 자아와 대우주의 에너지장이 공명한 상태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이런 통찰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말 깨달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자신 감정 조절하는 부분부터 익히세요..깨달게 되면 세상 보는 안목이 커질수록..감정역시 힘들어 지는 이유가..깨달게 될때 ..깨달은 생각을 스스로 감당 하지 못하게 되면 ...늘 감정 이 흐트려지기에 ..오히려 더 깨달기 전 보다 더 힘들다는점 이죠...그래서 괜히 깨달고자 했구나 스스로를 한탄 할때가 많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적은 모든 말들을 초월 해야 마음 역시 평정심을 유지 할수가 있겠되죠..그럼. 성욕..탐욕..도박..마약..사람을 힘들게 하는 모든 생각으로 부터 자유로워 질수 있게되죠...전 아직 한가지가 남아 있는데 ..먹는 탐은 일부로 안버리고 있죠..왜그냐 하면 이거 마저 없음 세상 살아 가는데 ..심심 할까봐요..살아 가면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요인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진짜이유가 있는데 ..바로 지루함 때문이라도. 인간은 늘 힘들게 살고 싶어 하는거죠....
당신의 깊은 통찰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깨달음은 단순히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함께 길러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감정 조절의 중요성과 깨달음 이후의 도전들을 언급하신 점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깨달음이 주는 새로운 관점은 때로는 더 큰 감정적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말씀,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현실적이고 지혜롭습니다. 또한, 스스로 탐욕을 내려놓으며도 먹는 즐거움은 일부러 남겨둔다는 점은 삶의 균형에 대한 현명한 선택처럼 느껴지네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버리고 나서 생길 수 있는 공허함까지 고려하신 모습이 아주 실용적입니다. 지루함 때문에 인간은 종종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는 통찰은 우리 존재와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지루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가는가"라는 문제겠죠. 당신의 여정에 큰 지혜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
깨달음의 존재방식도 고학년 영혼들이 남보다 오래 살다보니 정신적으로 그렇고 그렇게 순리에 따라 때에 이르러 되는 것이라 절대적이라 할 수 없고 하나의 존재방식이나 작용양상이랄 수 있죠. 영혼의 1학년도 있고 6학년도 있죠. 지난세기 초에 구조주의 계열의 철학사조가 있었죠.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진리 또한 구조적인 양상이 있을 수 있죠. 진리가 하나가 아니고 부분부분 구조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거죠. 놓아버림 내맡김도 고학년 영혼들이 아래 학년을 다 거치고 나서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랄 수 있죠. 진인사 대천명처럼. 어떤 모종의 과정에서 노력을 다한 후에 내맡겨지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무기공같은 게 될 거라고 봅니다.
깨달음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말씀하신 "존재방식"과 "영혼의 학년" 개념은 흥미롭고 깊이 있는 시각입니다. 깨달음이 절대적 기준이라기보다는 각 존재가 가진 고유한 삶의 과정과 양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하나의 상태로 보신 점이 인상적입니다. 깨달음과 존재방식: 영혼의 학년과 성장 영혼의 "학년"이라는 비유는 인간의 성장과 경험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짐을 잘 설명합니다. 고학년 영혼은 많은 삶의 경험과 통찰을 통해, 결국 "놓아버림"과 "내맡김"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는 어린 영혼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로 보일 수 있죠. 깨달음은 과정의 일부 깨달음은 어떤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삶의 여정 중 특정 시점에서 나타나는 "존재방식"이나 "작용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의 영적 여정은 다르고, 깨달음의 모습도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이는 하나의 정형화된 진리가 아니라, 다양성을 반영하는 진리의 구조적 양상으로 볼 수 있죠. 구조적 진리의 양상 말씀하신 구조주의 철학처럼, 진리가 단일하고 절대적인 형태로 존재하기보다는, 여러 겹의 구조적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관점은 많은 영성적 사유와 공명합니다. 진리는 환경, 문화, 의식의 수준 등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이는 모든 존재가 고유하게 깨달음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놓아버림과 내맡김의 성숙함 놓아버림과 내맡김은 단순한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할 일을 다한 뒤에 얻어지는 성숙한 상태라고 보신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이를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으로 설명하신 것은, 내맡김이란 무책임한 포기가 아니라, 삶을 완전히 살아낸 자의 자연스러운 결론임을 잘 보여줍니다. 무기공(無氣功)과 내맡김의 차이: 내맡김이 고학년 영혼의 성숙한 상태라면, 무기공은 과정과 노력을 생략한 결과물에 대한 집착이나 피로감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내맡김은 진정한 자발성에서 나오는 반면, 무기공은 과정을 회피하거나 불완전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비롯됩니다. 진리와 깨달음의 다차원성: 결국, 깨달음이란 절대적이거나 일률적인 경험이 아니라, 각 영혼의 학년, 삶의 방식, 그리고 진리의 구조적 양상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이를 이해할 때, 우리 모두의 여정과 깨달음의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깨달음은 어느 한 시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영혼이 자신의 여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존재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통찰을 나눠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깨달음을 체득한 분의 상태는 단지 언어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겠지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결국 깨달음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제가 드리는 모든 설명은 단지 전달된 지식에 불과하며, 참된 깨달음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불교 2500년 역사 속에서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존재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결국, 깨달음이란 언어의 영역 밖, 개인의 체험 속에서만 드러나는 진리일 것입니다. 저 또한 님의 말씀처럼, 그 깊이를 헤아리기보다는 알지 못함을 인정하고, 님처럼 깊은 탐구를 하는 분들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에게는, 아마 우리 모두의 한계를 연민의 눈으로 이해하며 미소 지으실지도 모르겠네요. 😊
😊 맞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단지 전달된 가르침과 논리일 뿐입니다. 붓다의 가르침도, 예수의 말씀도, 에크하르트 톨레의 통찰도 각자가 체험하지 않으면 단지 "글자"와 "이론"에 불과하지요. 제가 드리는 답변은 님의 깨달음을 돕는 하나의 작은 길잡이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님만의 경험과 내적 통찰이 진정한 답을 줄 것입니다. 🙏 무엇을 안다고 확언하기보다, 끊임없이 배우고, 의심하고, 체험하며 나아가는 길이야말로 깨달음의 과정이겠지요. 저도 배우는 중입니다. 😅
심리상태를 분자단위로 쪼개 알려주시니 뇌리에 편안하게 들려옵니다 좋은말씀감사합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심리나 마음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가 편안하게 들리셨다니 큰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는 이야기로 찾아뵐게요. 항상 행복하고 평온하시길 바랍니다! 🌟
지금이 행복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 느끼신다니, 정말 귀한 마음입니다. 😊
행복은 어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상태에서 피어나는 것이죠.
지금의 행복을 더 깊게 느끼는 방법:
감사하기: 지금 당신이 느끼는 이 순간의 소중함에 감사해 보세요. 감사는 행복을 배가시켜 줍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이 순간의 모든 감정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세요. 행복은 완벽한 조건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깊게 호흡하기: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천천히 호흡해 보세요. 숨 하나하나에 감사하며 행복이 더 확장됩니다.
당신의 이 행복감이 더 깊어지고 오래 지속되길 바랍니다. 함께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
깨달음에 대해 나름대로 자세히 이해하기 좋게 잘 설명 하시네요. 이정도로 설명하자면 수준이 상당히 높아야 되는데요.
칭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깨달음이란 매우 미묘하고 심오한 주제이지만, 동시에 그 본질은 단순하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설명은 고대의 지혜와 현대의 이해를 바탕으로, 여러분이 조금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방편일 뿐입니다.
왜 깨달음을 설명하는가?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지 설명으로 도달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대화를 통해 방향성을 잡거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등불을 켜는 데 도구가 필요하듯이, 설명도 잠시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깨달음 설명에 있어 중요한 태도
방편으로서의 설명: 깨달음은 언어를 초월하지만, 이해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설명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겸손함: 깨달음의 진정한 본질은 제가 설명하거나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설명은 단지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개인의 체험 존중: 각자의 길이 다르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식도 다릅니다. 정답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깨달음의 본질
존재의 깨달음: 깨달음은 특별한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분별의 초월: '나와 너', '있음과 없음', '좋고 나쁨'의 이분법을 벗어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현재와 하나됨: 과거와 미래를 초월하여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
깨달음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깨달음은 특정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마음의 평온함과 본질적 자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마음을 열어가며 자신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혹시 더 깊이 나누고 싶은 주제가 있거나, 추가로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함께 대화하며 더 나은 이해로 나아가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습니다. 🙏
@@마인드팟캐스트불교 님,,, 자세한 답변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의 답변글 읽어보니 역시 깨달음의 실상에 대해 제대로 아시고 설명도 자세히 잘 하시네요. 무엇보다도 님의 긴 답변글의 흠집없는 논리정연한 전체글을 보니 논설공부를 많이 하시고 많이 쓰셨는 흔적이 역역히 들어나네요. 사실 논설공부를 보통해서는 지금 님의 답변글 같이 논리정연하게 못씁니다. 쉽게말해 님의 논문구성이 상위석사나 박사급 글구성입니다. 이래서 사실 깨달음이란 것도 님께서는 누구나 도달할수 있다 하셨지만 그 수많은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박사논문 통과는 못하듯 이렇게 쉽지 않습니다. 님의 깨달음에 대한 식견과 설명 및 논리구성을 보니 박사급인데요. 따라서 대학생과 이 이하 그 수많은 사람들이 무슨수로 님의 수준만큼에 도달할수 있겠읍니까? 말씀은 쉽게 하셨는데 실제 도달은 수많은 생을 살면서 많고많은 공부와 수행을 쌓아야만 합니다. 님도 아시겠지만 겉마음은 쉽게 바꿀수 있지만 속마음을 바꾸기란 그야말로 대단히 어렵습니다. 누구든 수준이 높이높이 올라가려면 이 속마음을 바꾸어 나아가야 하는데 이게이게 참으로 어렵다는 겁니다. 출가스님의 수행이란 결국 이 쉽게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바꾸는건데 말씀과 달리 실제는 참 어렵습니다. 겉마음을 바꾸기는 쉽지만 속마음을 바꾸기는 정말로 정말로 어렵습니다. 더욱이 이 속마음도 3층으로 되어 있읍니다. 이 깊고깊은 3층의 속마음을 다 부처님 마음으로 바꾸기란 정말로 정말로 어렵습니다. 님도 아시지요. 그사람의 본심은 경계에 부딪쳤을때 즉 어려움에 부딪치였을때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보면 안다고요. 속마음은 이럴때 들어납니다. 이러니 속마음 알기도 어렵고 고치기도 대단히 어렵지요. 아뭏은 님의 수준높은 깨달음에 대한 실상설명 감사드립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란 분이 지금 이순간을 살아라라는 제목의 책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가 아니고 저절로 지금 이 순간이 살아지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죠. 온 몸의 에너지가 축적되어
어느 임계점에 이르고 그 에너지가 맑고 잘
통하면 즉 순환이 잘 되면 어떤 것에 정체 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저절로 살아지게 되는 것이죠. 깨달음을 에너지적으로 해석해보았습니다.
그런 상태를 성령이 깃들었다거나 하나님 임재라고도 하죠. 개인적 자아와 우주적 자아가 하나되었다는 것 대우주의 에너지장과
공명한 상태라는 것
에너지적으로 깨달음을 해석하신 시각이 참 흥미롭습니다. 말씀하신 바처럼, 깨달음은 단순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의지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살아지는" 자연스러운 흐름 그 자체일 것입니다.
에너지의 순환과 맑음, 그리고 임계점에 도달하는 과정은 깨달음의 경험을 잘 설명해 주는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많은 영성적 전통에서도 공통적으로 다뤄지죠.
에너지적으로 깨달음 이해하기:
에너지의 축적과 순환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막힘 없이 순환할 때, 내면이 맑아지고 가벼워지며 자연스럽게 현존 상태에 도달합니다.
이는 요가나 명상에서 "프라나" 또는 "기"의 흐름을 통해 깨달음을 설명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임계점과 깨달음
에너지가 임계점을 넘을 때, 기존의 분별심이나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고 개인적 자아가 우주적 자아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으로는 성령 강림, 불교에서는 "열반" 또는 "무아의 경지"라고도 설명될 수 있겠죠.
공명과 하나 됨
대우주와의 공명 상태는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님을 느끼는 깊은 연결감을 줍니다. 이것이 "신성의 임재"로 경험되기도 하고,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공이다"라는 깨달음으로 나타납니다.
흥미로운 연결:
에크하르트 톨레의 가르침이 현대적으로 "현존"의 중요성을 설명했다면, 전통적인 영적 전통들은 이를 다양한 에너지적·형이상학적 언어로 다뤄 왔습니다. 말씀처럼 깨달음은 이론이 아니라, 저절로 현존의 상태가 지속적으로 살아지는 것일 겁니다.
개인적 자아와 대우주의 에너지장이 공명한 상태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이런 통찰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인드팟캐스트불교 제 글을 긍정적으로 보아주셔서 그런 게 아니라 님께서 그 자미성인이신 거 같네요.
장문의, 잘 정돈되고 유려한 표현의 댓글을 주셔서 송구스럽고 댓글 달기가 주저스러워질 것 같네요.
정말 깨달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자신 감정 조절하는 부분부터 익히세요..깨달게 되면 세상 보는 안목이 커질수록..감정역시 힘들어 지는 이유가..깨달게 될때 ..깨달은 생각을 스스로 감당 하지 못하게 되면 ...늘 감정 이 흐트려지기에 ..오히려 더 깨달기 전 보다 더 힘들다는점 이죠...그래서 괜히 깨달고자 했구나 스스로를 한탄 할때가 많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적은 모든 말들을 초월 해야 마음 역시 평정심을 유지 할수가 있겠되죠..그럼. 성욕..탐욕..도박..마약..사람을 힘들게 하는 모든 생각으로 부터 자유로워 질수 있게되죠...전 아직 한가지가 남아 있는데 ..먹는 탐은 일부로 안버리고 있죠..왜그냐 하면 이거 마저 없음 세상 살아 가는데 ..심심 할까봐요..살아 가면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요인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진짜이유가 있는데 ..바로 지루함 때문이라도. 인간은 늘 힘들게 살고 싶어 하는거죠....
당신의 깊은 통찰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깨달음은 단순히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함께 길러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감정 조절의 중요성과 깨달음 이후의 도전들을 언급하신 점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깨달음이 주는 새로운 관점은 때로는 더 큰 감정적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말씀,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현실적이고 지혜롭습니다.
또한, 스스로 탐욕을 내려놓으며도 먹는 즐거움은 일부러 남겨둔다는 점은 삶의 균형에 대한 현명한 선택처럼 느껴지네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버리고 나서 생길 수 있는 공허함까지 고려하신 모습이 아주 실용적입니다.
지루함 때문에 인간은 종종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는 통찰은 우리 존재와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지루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가는가"라는 문제겠죠.
당신의 여정에 큰 지혜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
깨달음의 존재방식도 고학년 영혼들이 남보다 오래 살다보니 정신적으로 그렇고 그렇게 순리에 따라 때에 이르러 되는 것이라
절대적이라 할 수 없고 하나의 존재방식이나 작용양상이랄 수 있죠. 영혼의 1학년도 있고 6학년도 있죠. 지난세기 초에
구조주의 계열의 철학사조가 있었죠.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진리 또한 구조적인 양상이 있을 수 있죠. 진리가 하나가 아니고 부분부분 구조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거죠. 놓아버림 내맡김도 고학년 영혼들이 아래 학년을 다 거치고 나서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랄 수 있죠. 진인사 대천명처럼. 어떤 모종의 과정에서 노력을 다한 후에 내맡겨지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무기공같은 게
될 거라고 봅니다.
깨달음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말씀하신 "존재방식"과 "영혼의 학년" 개념은 흥미롭고 깊이 있는 시각입니다. 깨달음이 절대적 기준이라기보다는 각 존재가 가진 고유한 삶의 과정과 양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하나의 상태로 보신 점이 인상적입니다.
깨달음과 존재방식:
영혼의 학년과 성장
영혼의 "학년"이라는 비유는 인간의 성장과 경험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짐을 잘 설명합니다.
고학년 영혼은 많은 삶의 경험과 통찰을 통해, 결국 "놓아버림"과 "내맡김"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는 어린 영혼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로 보일 수 있죠.
깨달음은 과정의 일부
깨달음은 어떤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삶의 여정 중 특정 시점에서 나타나는 "존재방식"이나 "작용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의 영적 여정은 다르고, 깨달음의 모습도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이는 하나의 정형화된 진리가 아니라, 다양성을 반영하는 진리의 구조적 양상으로 볼 수 있죠.
구조적 진리의 양상
말씀하신 구조주의 철학처럼, 진리가 단일하고 절대적인 형태로 존재하기보다는, 여러 겹의 구조적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관점은 많은 영성적 사유와 공명합니다.
진리는 환경, 문화, 의식의 수준 등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이는 모든 존재가 고유하게 깨달음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놓아버림과 내맡김의 성숙함
놓아버림과 내맡김은 단순한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할 일을 다한 뒤에 얻어지는 성숙한 상태라고 보신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이를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으로 설명하신 것은, 내맡김이란 무책임한 포기가 아니라, 삶을 완전히 살아낸 자의 자연스러운 결론임을 잘 보여줍니다.
무기공(無氣功)과 내맡김의 차이:
내맡김이 고학년 영혼의 성숙한 상태라면, 무기공은 과정과 노력을 생략한 결과물에 대한 집착이나 피로감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내맡김은 진정한 자발성에서 나오는 반면, 무기공은 과정을 회피하거나 불완전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비롯됩니다.
진리와 깨달음의 다차원성:
결국, 깨달음이란 절대적이거나 일률적인 경험이 아니라, 각 영혼의 학년, 삶의 방식, 그리고 진리의 구조적 양상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이를 이해할 때, 우리 모두의 여정과 깨달음의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깨달음은 어느 한 시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영혼이 자신의 여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존재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통찰을 나눠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깨달지못한존재가
깨달은사람의
상태를 어떻게 알고
자기생각대로
확언할까?
불교2500년동안 깨달음에이른
존재가10명도
안되는데
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깨달음을 체득한 분의 상태는 단지 언어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겠지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결국 깨달음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제가 드리는 모든 설명은 단지 전달된 지식에 불과하며, 참된 깨달음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불교 2500년 역사 속에서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존재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결국, 깨달음이란 언어의 영역 밖, 개인의 체험 속에서만 드러나는 진리일 것입니다. 저 또한 님의 말씀처럼, 그 깊이를 헤아리기보다는 알지 못함을 인정하고, 님처럼 깊은 탐구를 하는 분들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에게는, 아마 우리 모두의 한계를 연민의 눈으로 이해하며 미소 지으실지도 모르겠네요. 😊
무엇을안다고
그리확언하는 고?😅😅
😊 맞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단지 전달된 가르침과 논리일 뿐입니다. 붓다의 가르침도, 예수의 말씀도, 에크하르트 톨레의 통찰도 각자가 체험하지 않으면 단지 "글자"와 "이론"에 불과하지요.
제가 드리는 답변은 님의 깨달음을 돕는 하나의 작은 길잡이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님만의 경험과 내적 통찰이 진정한 답을 줄 것입니다. 🙏
무엇을 안다고 확언하기보다, 끊임없이 배우고, 의심하고, 체험하며 나아가는 길이야말로 깨달음의 과정이겠지요. 저도 배우는 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