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 이야기하시듯 광해군은 아무리 아버지가 자기를 견제해도 선정을 펼치는 명군이 된 사례도 있는 만큼 본인이 자처한 면도 있지만 알면 알수록 비운의 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뭐 하나 운 좋게 잘 되었다 싶은 부분이 딱 하나뿐입니다. 의인왕후가 불임이라 의인왕후의 후원을 받은 거. 의인왕후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후궁 소생 왕자들이 언감생심 왕이 되려고 생각도 못했겠죠. 기록을 보면 중전과의 의무 합궁일도 있고 해서 선조와 부부관계는 분명히 있었는데... 1. 태어난 순서: 광해군이 똑같이 공빈 김씨 소생 아들이었어도 태어난 순서만 임해군과 뒤바뀌어 있었어도 광해군의 인생이 많이 달랐을 겁니다. 선조의 할아버지, 중종 시대 때 중전 소생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이 장남이라며 왕으로 세우려고 안달했던 경빈 박씨 사례를 보십시오. 이건 경빈 박씨가 주제를 모르고 날뛴 측면도 있긴 하지만 유교사회에서는 장남이라는 타이틀이 이 정도로 강해요. 명나라 만력제가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인정해 주지 않은 핑계도 그가 장남이 아니라는 거였죠. 만력제 스스로도 장남보단 총애하던 후궁 소생 왕자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서... 2. 하필이면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시대: 선조는 성격이 찌질해서 그렇지 인재 등용, 양위 파동을 통한 왕권 강화 등을 놓고볼 때 머리가 나쁜 사람도 정치력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어요. 임진왜란 이전 선조의 치세는 평타는 쳤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선조는 임진왜란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명군은 아니어도 후대에 찌질이 중의 찌질이 왕으로 까이는 것은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왕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너무나도 쉽게 나라를 버리려고 하고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며 이 와중에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끈 광해군이 정치 라이벌이 되어 버린 거죠. 물론 세자 책봉을 미루고 미루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상황 때문에 세자 책봉한 거라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세자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임진왜란과 그로 인한 피난, 그리고 환도 반대하는 선조의 박대만 아니었다면(-_-;;;) 전 의인왕후가 더 오래 살았을 거라 확신합니다. 한마디로 영창대군(적자)가 태어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거라는 거죠. 광해군과 신성군을 제외한 선조의 아들들은 다 막장들이었으니 신성군의 병사는 임진왜란과는 별개로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고 볼 때 신성군이 죽고 없고 적자도 없으면 선조도 결국 광해군을 세자로 삼지 않을 수 없었을 거에요. 3. 선조보다 먼저 사망해 버린 의인왕후: 위에 2번 항목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의인왕후만 선조보다 오래 살았어도 광해군의 인생이 아주 많이 변했을 겁니다. 일단 적자가 없으니 견제할 대상이 없고 의인왕후와 광해군은 친모자지간처럼 돈독했어요. 그리고 의인왕후는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선조보다 오래 살아 광해군 시절 대비로 궁궐을 지켰다면 인조반정의 명분인 폐모살제와 무리한 궁궐 증축으로 인한 민생 파탄, 사대 배신 중 폐모살제는 우선 일어날 수가 없었고 무리한 궁궐 공사도 현명한 의인왕후가 광해군에게 조언해 주며 다잡아주었을 겁니다. 4. 인목대비 소생 왕자 탄생: 다 떠나서 1~3번 항목이 실제 일어났지만 인목대비만 아들을 못 낳았더라면 광해군의 인생이 매우 달라졌을 겁니다. 딸만 낳았거나 아이를 못 낳았거나... 실제 영창대군이 태어나기 전 정명공주는 광해군이 매우 귀여워했다죠. 아버지에게 보여주기식을 위해서라도 그랬겠죠. 장렬왕후를 떠올려 보시면 되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조는 초야 이후 그녀를 거의 찾지 않았죠. 그래서 아이를 못 낳았어요.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효종 시절에는 효종이 대비로 극진히 모셨죠. 신하와 백성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라도요. 물론 효종도 전 왕비 소생 적자이지만 소현세자 사후 종법 해석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장남을 보위에 올려야 하는데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취약한 정통성을 지녔는데 효종에게 어머니가 다른 대군 동생은 크게 부담이 되죠. 효종도 한성격하는데다 카리스마 있는 왕이었으니 장렬왕후 소생 대군이 있었다면 피바람이 불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숙종의 3번째 중전 인원왕후 사례도 보십시오. 경종이 세자 책봉 되어 있는 상태에서 희빈 장씨 사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장희빈은 후궁으로 강등되었으니 엄연히 경종은 후궁 소생 왕자입니다. 이런 가운데 인원왕후가 적자를 낳았다면? 피바람이 불었죠. 경종과 영조 그 둘의 강한 성격을 볼 때;;; 훗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도... 정순왕후가 아들을 낳았다면 장성한 정조와 정순왕후 소생 아들. 피바람이 불었겠죠. 하지만 다행히도 아이를 못 낳아 정순왕후는 정조 재위 기간 중 대비로 예우 받으며 편히 살다 갔죠. 이 중 한가지만 실제 역사와 달랐더라면... 세자 시절 광해군과 임금 시절 광해군은 완전 다른 사람 같다고 평가되죠.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명군이 될 거라 기대를 모았었는데...
정말 광해군스토리만 봐도 한편의 영화와도 같구나. 영화로 나오긴했지만 이런 비하인드스토리는 처음 알게 되었다. 예나지금이나 기득권층의 권력싸움..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는거 같다. 작금의 기득권층의 모습은 조선왕조시대와 다를바가 없구나. 그와중에 힘들었던 백성들은 현재 국민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joyk.9820 그건 우리입장에서 좋게 본거죠 청입장에서는 조선군이 죽기살기로 싸우면서 뺨을 세게 갈겼는데 뭐라고 생각할까요? 항복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항복하고 조선군들이 청나라 군사 머리를 몰래 가지고 있거나 주변 여진 여자들을 겁탈해서 양반 수백명을 학살까지 했는데 과연 그렇게 좋은 이미지만 있었을까요? 그리고 양대호란은 청의 내부사정에 의한 요인이 훨씬 컸습니다 특히 정묘호란은요
@@joyk.9820 아직도 광해군 밀지설을 믿는 분들이 있으시네ㅋㅋㅋㅋ 사르후 전투 과정만 봐도 적당히 싸우다 항복하고 살아돌아온 게 아니라 후금군에게 포위당해 섬멸 직전까지 가서 항복했던 것인데, 항복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서인정권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이 매우 유력합니다. 광해군을 까기 위해 서인정권이 광해군이 밀지를 써서 후금에 보냈다느니 강홍립에게 적당히 싸우라고 했다느니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죠. 광해군을 까기 위한 거짓선전을 믿고 광해군을 옹호해선 안 되는 겁니다. 차라리 후금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북방 방어선을 구축하고 사르후 전투 이후에 강홍립과 연락하며 후금의 내부사정을 정탐한 이야기, 사르후 전투 이후에 명나라의 요구에 소극적으로 응했다는 근거들을 들면 모를까.. 광해군 밀지설 같은 신빙성 낮은 근거는 ㄴㄴ요. 그리고 중립외교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게 막상 광해군이 폐위됐을 때 명나라에선 우리한테 잘하던 광해군 왜 폐위시켰냐는 거였죠
@@inhukj7875 그건 결과를 다 아는 한참 미래인 지금 관점에서 사안을 보니깐 그런거지 당시엔 명나라는 재조지은+소중화로 대표되는 조선의 상국이었다니깐. 그리고 후금(=청나라)은 못배워처먹은 오랑캐 집단으로 인식했고. 지금 관점으로 역사를 보면 안된다니깐. 당시 관점으로 봐야지 니나 나나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웃어른에게 공손해야 한다는건 상식이자 당연한거지? 저 당시엔 명나라를 부모를 섬기듯 해야 한다는게 상식이던 시절이다.
선조는 저 쫌생이 같은 성격 때문에 지금도 욕을 먹는다 쫌생이인데는 다 이유가 있지만 그래도 보다보면 답답하다 정치를 못하는 왕도 아니였는데 선조가 저 쫌생이 같은 성격대신 뭔가 지원자 같은 느낌으로 밀어주고 국정운영을 가르쳤으면 폭군까진 안가지 않았으려나 어차피 역사에 if는 없다만 항상 볼때마다 선조 광해군은 뭔가 아쉽다
사람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 대사는 돈발히는사람과 아녀자와 논하지 말라 현대사도 여자문제로 잠룡이 도롱뇽이된 전충남지사 정적을 제거할땐 뿌리까지 없애라 명의 입장에선 군신유의를 안한거고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조선의 광해군 반면 국제정세는 밝았네 광해군의 판단이 흐렷으면 누루하치한테 조선 먹힐뻔 했네
30:18 강홍립이 단 두 번의 전투에서 쉽게 투항하다니. 알만한 사람들이 은근히 말 이상하게 하네. 본래 조선을 엄호해주도록 되어있던 명군이 연합작전 과정에서 사전에 전멸 당했고 조선도 그 이후의 기습으로 말그대로 순식간에 박살이 났는데... 항복하던 시점에서 13000병력 중 7000이상을 잃고서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에 빠져있었구만. 거기서 어떻게 싸우란거냐.
@Blind 왕실 위엄이 아니라 원래 동아시아 왕조들의 공통적인 모습임. 삼국지 조조도 장수와의 싸움에서 맏아들 조앙의 말을 빌려타고 도망가며 아들을 총알받이로 써먹엇잖아. 동아시아 국가들중 독특한 형태인 일본 빼고는 다 그런식임. 왕이 사로잡히거나 뒤지면 그냥 그 왕조가 끝나는거지.
@@kk-di2qh 왕권강화을 강화하려면 명분이 필요함 그저 니들 다 쌩까고 내멋대로 하고싶어 빼액!! 이러다간 귀족이고 백성이고 전부 등돌려서 진정한 폭군이 되는거임 힘없는 왕이 자기편으로 만들고 명분챙기는데 제일 좋은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표방하는거임 왕이 백성챙기는 개혁을 하겠다는데 제아무리 귀족나부랭이들이라도 그걸 무턱대고 반대만을 할수는 없는거죠 결론 = 힘없는 왕이 권력강화를 위해서 제일 좋은 방법은 평민or비주류세력들을 끌어들이는것
광해군이랑 인조의 분기점이 엄청나게 중요한게 인조이후의 왕들.. 마지막 고종 순종 포함 모든 왕들이 인조의 직계 후손임.. 한마디로 인조는 조선의 중시조임.. 즉 광해군이 쫓겨나지 안았으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음.. 우리가 알고 있던 숙종 영조 정조 전부 태어나지 않고 전부 다른 세상의 완전 다른 왕들이 집권 했을듯.. 광해군의 후손으로 이어진 조선의 왕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개화파 받아들여 영국과 미국의 협조로 일단 청을 내쫒고 문무정비하여 일본대신 러시아 북해함대 조지고 일본 쳐들어가 일본 식민지 삼은 다음에 청나라를 조져서 난징대학살 벌인 다음에 뻬이징 대학살도 벌인 다음 석유재해권을 위해 인도차이나조지고 중동 조지구 대한제국을 견제하는 미국 진주만을 폭격했겠지
I am so glad to learn more about korean monarch and history. It’s really educational and fascinating as well as sad thinking about all the political power and fight to maintain it even with selfish reasons. Most of them are Sad history but also learning experience.
지지기반이 너무 없었던 왕 사실 백성들의 어려움도 알고 후금이 떠오르는 태양임을 알고 싸움을 걸지 않은걸 보면 외교적 센스도 있었는데 기득권층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한게 안타까운듯 어느정도 달래면서 권력 밸런스를 좀만 더 잘 잡았다면 광해군은 명군으로 남았을거같은데 안타까운 왕
@@Rowingmin 옥사(국문)로 인해 희생(고문으로 옥사하거나 처형당한)된 피해자 순위 1. 선조 임금 : 기축옥사 (약 1천여명 희생) 1589년 ~ 1591년까지 3년간 옥사가 이어짐 2. 수양대군 : 제2차 단종복위운동 (최소 300여명 이상 희생) 1457년 3. 수양대군 : 계유정란 (107명 희생) 1453년 4. 수양대군 : 제1차 단종복위운동 (70여명 이상 희생) 1456년 5. 인조 : 이괄의 난 (인조정권의 등청 요구에 거부한 죄목으로 옥에 갇힌 중북인사들 40여명 그냥 처형 + 이괄의 난때 좌의정 윤방이 죽인 도성 백성만 200여명) 1624년 6. 인조 : 인조반정 (100여명 희생) 1623년 광해군때 옥사는 희생자 규모 면에서나 옥사의 양상 면에서나 위에서 열거한 6대 옥사에 비하면 아주 양반입니다. 광해군 때 옥사의 빈도 4차례로 중종 임금 때 14차례의 옥사 빈도에 비해서도 낮습니다. 광해군이 숙종처럼 함부로 중신들을 처형하거나 사약을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광해군이 수양대군처럼 술자리에서 말실수했다고 변방에서 고생한 장군을 처형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안위만 걱정한 나머지 쿠데타 의심병으로 평안도 군사들 훈련을 감시했던 인조와는 달리 광해군은 오히려 호란을 대비해야 한다며 군사 훈련을 장려했죠.
인조보다 못했을까?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음 그리고 광해군이 폭군이라는 거에 의견이 분분하다는 소리는 먼 개소리야 역사학자들도 광해군이 폭군인 걸 부정안하는데 그 인조보다 딸려서 15년만에 자신의 지지세력이었던 서인과 북인 둘다 자신이 컨트롤못하고 백성들에게 온갖 조롱과 욕처먹으면서 반정당함
광해의 폭정이라기 보다는 광해가 무리한 왕권강화책으로 무리하게 궁궐을 지어 민심을 잃고 주위를 살피지 못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지만 무엇보다 이런한 판단의 착오는 선조가 뿌린 인목대비와 영창의 존재 그리고 당시 썩은 기득권이 것이 대동법을 통한 본인 재산의 납세에 대한 양반들의 반감과 대명사대에 찌든 소중화가 부른 참사라서 아쉽다.명군이 될 자질을 타고 낫고 전란때 훌륭하게 분조를 잘 이끌어 백성의 높은 신임을 받았음에도 선조의 아들에 대한 열등감에 찌든 행위가 광해가 판단을 흐리게 한 원인이라 가슴이 아푸다. 더구나 인조가 반정해서 조선은 더 비정상의 나라로 전락했으니 어찌 안따깝지 않을까.
@@jglee8665 헛소리자제좀 ㅋㅋㅋ 대동법은 신하들이 그리고 촌구석 늙은 유생들 조차 제발 좀 실행하자고 상소올리고 난리쳐서 겨우 실행시킨건데 ㅋㅋ 무슨 신하들.기득권이 반대해?ㅋㅋㅋ 드라마.영화로 역사배웠냐?ㅋㅋㅋ 그리고 인목대비도 선조가 사망한 그날 옥쇄를 광해에게 주고 깨끗하게 물려나는데?
중립외교에 대해서 반대를 했다고 하는데 이를 획일적으로 보면 안되고 어떤 시각에서 반대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꼭 사대주의가 아니더라도 설마 명나라가 쉽게 무너질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하는 시기이라 그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명나라는 대국인데 어떻게 청이 명을 무너뜨릴수 있는지를 상상하기가 어렵죠. 그리고 실제로도 청이 순수한 자력으로 산해관을 넘은 것이 아니고 명나라 내부적으로 이자성의 난에 붕괴되었고 명나라 장수들이 청에 투항하여 명나라는 청의 침입이전에 이미 자멸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야 할 점이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후금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틈만나면 조선의 국경을 넘어와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강간하고, 물건을 노략질해갔으니깐요. 지금 우리 국민들이 이웃국가인 북한, 중국, 일본이 만행을 저지를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이 커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립외교로 후금과도 친하게 지내겠다고 하니 반발이 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조선이 망국으로 접어든 가장 큰 사건. 재조선 왜구 대사 대조규개를 필두로 한 왜군들과 조정 내 괴뢰내각이 입맞추어 벌인 갑오왜란. 야음을 틈타 왜군이 침전을 습격 고종과 민왕후를 사로잡았지요. 선조 몽진 때 왜구들이 크게 깨우치고 배운 거랍니다. 임금을 잡아야 조선을 먹겠구나
근데 이 영상과 달리 광해군 이 양반은 내치에선 아주 빵점임. 광해군은 궁궐병에 걸려서 나라가 폐허가 된 상황에서 지가 살아야할 궁궐 짓는다고 얼마없던 백성들의 민가를 헐어서 궁궐을 만드는데 세금낭비함. 더 큰 문제는 그 궁궐에 청기와를 사용함. 이게 왜 문제가 되냐고 생각하겠지만 청기와를 만드는데 사용된 유약의 재료가 바로 화약을 만드는데 사용된 염초였음. 그것도 명나라가 공짜로 준 염초를 화약도 아닌 지 궁궐 짓는데 탕진함. 그리고 광해군은 오성과 한음, 그리고 이원익 같은 충신들을 무슨 스탈린 마냥 죄다 숙청함.(이게 인조반정의 불씨임. 이유? 광해군이 능양군, 즉 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을 모함으로 죽이면서 능양군이 각성하고 광해군 몰아내려고 반정 일으킴.) 그리고 그 빈 자리를 이이첨 같은 북인들이 차지하는데 문제는 이놈들도 서인급 부패 정치집단에 서인들 못지않게 명나라 후빨하는 친명파임. 그 결과는 실리외교를 펼쳤다는 광해군과 달리 조정에는 친명파들이 득세하게 되고 그 결과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부름. 더 충격인 사실은 광해군이 김새기 라는 상궁에게 의존하며 그녀가 전횡을 일쌈는걸 방치 했다는 거임. 그러다가 인조반정때 김자점과 내통한 김개시한테 통수 당함. 추가로 대동법 반대도, 대동법 전국 환산도 막은 사람이 바로 광해군 본인임. 광해군이 성군이라면 왜 기득권 눈치 보면서 경기도 지역에만 대동법을 실행함?! 결국 광해군도 별반 다를게 없었음. 광해군이 얼마나 내치를 못했으면 유배를 갈때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며 조롱함. “돈아비야, 돈아비야 그 많은 돈 두고 어디 가느냐?” 말 그대로 광해군의 매관매직과 축재, 그리고 과도한 궁궐 건설을 비꼰 아주 어울린 노래 였다.
광해군은 훌륭한 왕 이였다. 그는 친중 사대주의를 버리고 시대를 앞서는 개혁정치를 하는 한편 어릴적부터 고단한 민초들의 삶을 이해하는 젊고 국제 정서에 깨어있는 유능한 왕 이였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외로운 사람이였다. 소히 후궁의 아들 이라는 핸디캡 과 비주류 였고, 그에게 충성된 신하만 있었다면 병자호란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었다면 친했던 광해군을 지지했을것 같다.
그 시대의 광해군은 폭군이 될 수 밖에 없었네요.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고,명석하지만,지혜가 있었으면 올은 판단을 할 수 있었을 것을~~~~~ 1대 다수이니~~~~~ 왕이라도 말은 반대파의 "쿠테타"를 일으키게 하는데~~~ "개혁"은 배울점이 있으나,그 당시 궁궐 재건 비용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잠깐 잊으신듯~~~~~ ♧오늘도 역사로부터 배움니다♧
초반부터 기득 세력과 다른 행보는 좋지 않아 보입니다, 그들 없이 논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강해 질 때까지는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한편으로 다른 노선을 간다면 다른 확고한 세력과 같이 가야 하지만 그에게는 큰 구심 점이 없기에, 측위 전과 초반의 행동은 무리한 개혁이였다 고 보입니다
광해군 입장에선 얼마나 억울하고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왜란때만 광해군을 이용해 먹은 아버지 선조가 얼마나 미웠을까? 이해가 간다. 선조 인조는 무능한 왕 그 자체. 기득권들이 내 놓지 않으려 기를 쓰는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상황인 듯. 그래서 왕까지 끌어 내려는 것도. 개혁을 원치않는 것도.
단 두번의 전투 끝에 투항을 한게 아니라 진짜 궤멸 직전까지 가서 투항한거지... 광해군 밀지설도 설일 뿐이고 전면전에서 그냥 학살당하는 수준으로 궤멸당한게 사실인데 뭐.... 사르후 전투 그 벌판에서 조선군 절반이 전사한거면 말 그대로 전근대 전투에선 전멸이나 다름없는걸.... 이걸 뭐 의도적인 투항이라고 하는건 곡해가 아닐까? 광해군이 솔직히 정치 썩 잘한것도 아니고, 세자시절이랑 전반기에는 의지가 있었지만 중후반부 부터는 ptsd걸린 환자느낌인데.
본질은 백성의 삶!! 세자 시절 영특했던 광해군이 나락으로 떨어짐에 안타까움 크지만 그는 폭군 맞습니다..폐모살제를 떠나서 수많은 백성들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지금 대한민국 광해군 시절 보다 인구는 다섯 배 국력은 수십 배도 넘을 것입니다... 1990년부터 시작된 경복궁 복원공사 30년째지만 25% 진행 상황입니다....그는 전후복구 아닌 백성들 삶 외면하고 오직 궁궐 공사에만 몰두합니다. 창덕궁, 창경궁, 종묘 재건, 경희궁 신축, 정동 행궁 증축, 인경궁, 자수궁 신축 시작!! 경희궁(1,500칸)은 태조 때 지은 경복궁(4,00칸)의 4배 크기, 인경궁(5,000칸)은 10배 크기입니다.....지금 대한민국 국력으로도 이것 다 지으면 나라 거덜 납니다. 공역은 끝날 기약 없고 백성들의 골수까지 다 뽑아내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심한얘기도 엄청납니다. 1,000명 밖에 안된 오합지졸 인조 반정군에 수도를 내주고 궁궐까지 내주고 그를 위해 싸워주는이 한명 없었습니다....유배 갈때도 슬피우는 백성 하나 없었습니다.....당시 민심이었습니다...서인에게 억울하게 쫓겨났다면 그러지 않습니다... 그를 중립외교 잘했다고 뛰운 사람은 조선사 편수회에 있었던 일본인이었습니다..일본의 조선지배 정당성을 위한 명분 만들기 일환으로...당시 후금의 세력이 커질때 전방의 장수들이 궁궐공사 그만하고 전쟁 대비해야 한다고 장계를 올리지만 그는 궁궐공사만 합니다..재정이 거덜 났습니다.....
찌질한 선조 이순신 질투하고 지 아들까지 질투하고 입지 어렵게 만들어서 반정의 빌미를 마련한게 선조였네. 왕이면 왕답게 대인배처럼 인정하고 태종처럼 아들 입지 탄탄하게 만들어 줬으면 총명한 광해가 어떤 업적을 쌓았을지 모르는데 정말 암군이다
근데 결국왕이란게 혈통을 중시여겼기에 광해군은 왕이 되는거 자체가 리스크가 너무 컸죠 근데 광해군도 자기 나름대로 너무 막나갔음 근데 선조는...어휴 갮
@@룰루하잉-x3s 막나간정도가아니라 선넘었음
광해가 총명해요? ㅎ 요즘 유행하는 역사 왜곡의 피해.
무능하고 무책임한 선조
광해군은 부모 잘못만난 탓
저런 부모 둘까 무섭다
선조가 이순신장군을 파격의파격 승진시켜준거 하나는 잘했음
물론 유성룡이 천거한거지만...!!
광해군 나름 전쟁영웅이고 임진왜란 당시 제1차 평양성 전투에서 총 군사지휘관으로써 참전도 했는데 어찌보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 중 하나인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게 참 안타까움..
적어도 후금 심기를 안 건드린 것만 봐도 나름 높은 점수준다.
정작 그런 왕을 폐위시키고 후금 신경 긁어놓고 호란 두 번이나 자초한 등신과는 다르다고 본다.
자초한게아니라 광해가 무슨짓을했어도 전쟁은 필연이였음.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식량/물자난에 빠져서 조선을 약탈해야지만 전쟁을 지속할수있었기때문에 최종적으론 물자삥 요구했을거고 광해라해도 전쟁없이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자진해서 속국으로 들어갈리가없음
유선생의 알고리즘으로 계속 보고 있는데, 보면 볼수록 자료를 찾아보면 볼수록 조선의 왕조의 기록과 역사 놀랍다. 학생때는 단지 암기뿐이었는데 나이들어 과거를 들여다 보니 인간들이 보인다. 조선시대의 기록문화는 실로 대단했다.
많은 분들 이야기하시듯 광해군은 아무리 아버지가 자기를 견제해도 선정을 펼치는 명군이 된 사례도 있는 만큼 본인이 자처한 면도 있지만 알면 알수록 비운의 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뭐 하나 운 좋게 잘 되었다 싶은 부분이 딱 하나뿐입니다. 의인왕후가 불임이라 의인왕후의 후원을 받은 거. 의인왕후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후궁 소생 왕자들이 언감생심 왕이 되려고 생각도 못했겠죠. 기록을 보면 중전과의 의무 합궁일도 있고 해서 선조와 부부관계는 분명히 있었는데...
1. 태어난 순서: 광해군이 똑같이 공빈 김씨 소생 아들이었어도 태어난 순서만 임해군과 뒤바뀌어 있었어도 광해군의 인생이 많이 달랐을 겁니다.
선조의 할아버지, 중종 시대 때 중전 소생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이 장남이라며 왕으로 세우려고 안달했던 경빈 박씨 사례를 보십시오. 이건 경빈 박씨가 주제를 모르고 날뛴 측면도 있긴 하지만 유교사회에서는 장남이라는 타이틀이 이 정도로 강해요. 명나라 만력제가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인정해 주지 않은 핑계도 그가 장남이 아니라는 거였죠. 만력제 스스로도 장남보단 총애하던 후궁 소생 왕자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서...
2. 하필이면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시대: 선조는 성격이 찌질해서 그렇지 인재 등용, 양위 파동을 통한 왕권 강화 등을 놓고볼 때 머리가 나쁜 사람도 정치력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어요. 임진왜란 이전 선조의 치세는 평타는 쳤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선조는 임진왜란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명군은 아니어도 후대에 찌질이 중의 찌질이 왕으로 까이는 것은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왕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너무나도 쉽게 나라를 버리려고 하고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며 이 와중에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끈 광해군이 정치 라이벌이 되어 버린 거죠. 물론 세자 책봉을 미루고 미루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상황 때문에 세자 책봉한 거라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세자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임진왜란과 그로 인한 피난, 그리고 환도 반대하는 선조의 박대만 아니었다면(-_-;;;) 전 의인왕후가 더 오래 살았을 거라 확신합니다. 한마디로 영창대군(적자)가 태어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거라는 거죠. 광해군과 신성군을 제외한 선조의 아들들은 다 막장들이었으니 신성군의 병사는 임진왜란과는 별개로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고 볼 때 신성군이 죽고 없고 적자도 없으면 선조도 결국 광해군을 세자로 삼지 않을 수 없었을 거에요.
3. 선조보다 먼저 사망해 버린 의인왕후: 위에 2번 항목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의인왕후만 선조보다 오래 살았어도 광해군의 인생이 아주 많이 변했을 겁니다. 일단 적자가 없으니 견제할 대상이 없고 의인왕후와 광해군은 친모자지간처럼 돈독했어요. 그리고 의인왕후는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선조보다 오래 살아 광해군 시절 대비로 궁궐을 지켰다면 인조반정의 명분인 폐모살제와 무리한 궁궐 증축으로 인한 민생 파탄, 사대 배신 중 폐모살제는 우선 일어날 수가 없었고 무리한 궁궐 공사도 현명한 의인왕후가 광해군에게 조언해 주며 다잡아주었을 겁니다.
4. 인목대비 소생 왕자 탄생: 다 떠나서 1~3번 항목이 실제 일어났지만 인목대비만 아들을 못 낳았더라면 광해군의 인생이 매우 달라졌을 겁니다. 딸만 낳았거나 아이를 못 낳았거나... 실제 영창대군이 태어나기 전 정명공주는 광해군이 매우 귀여워했다죠. 아버지에게 보여주기식을 위해서라도 그랬겠죠.
장렬왕후를 떠올려 보시면 되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조는 초야 이후 그녀를 거의 찾지 않았죠. 그래서 아이를 못 낳았어요.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효종 시절에는 효종이 대비로 극진히 모셨죠. 신하와 백성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라도요. 물론 효종도 전 왕비 소생 적자이지만 소현세자 사후 종법 해석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장남을 보위에 올려야 하는데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취약한 정통성을 지녔는데 효종에게 어머니가 다른 대군 동생은 크게 부담이 되죠. 효종도 한성격하는데다 카리스마 있는 왕이었으니 장렬왕후 소생 대군이 있었다면 피바람이 불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숙종의 3번째 중전 인원왕후 사례도 보십시오. 경종이 세자 책봉 되어 있는 상태에서 희빈 장씨 사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장희빈은 후궁으로 강등되었으니 엄연히 경종은 후궁 소생 왕자입니다. 이런 가운데 인원왕후가 적자를 낳았다면? 피바람이 불었죠. 경종과 영조 그 둘의 강한 성격을 볼 때;;;
훗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도... 정순왕후가 아들을 낳았다면 장성한 정조와 정순왕후 소생 아들. 피바람이 불었겠죠. 하지만 다행히도 아이를 못 낳아 정순왕후는 정조 재위 기간 중 대비로 예우 받으며 편히 살다 갔죠.
이 중 한가지만 실제 역사와 달랐더라면... 세자 시절 광해군과 임금 시절 광해군은 완전 다른 사람 같다고 평가되죠.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명군이 될 거라 기대를 모았었는데...
이런결과로 후대에 길이길이 남겨진다는건 너무 가혹한거 같네요.
그분의 업적이 이리 많은데도....
군으로 강등된 2명의 왕... 연산군에 비해 그는 너무나 큰 공적이 있기에 좀 안타까울뿐입니다
연산군도 12년 기간 중 10년은 잘 했어요....
@@ireneoh37 ㅈㄹ ㅋㅋ
@@user-yn7jp1yc1s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입니다. 연산군도 재위 10년 갑자사화 때부터 개막장테크 탄거지 그 전엔 그럭저럭 왕노릇 했습니다.
응 차라리 연산군이 나아
@@user-yn7jp1yc1s 사실인데요 연산군도 12년 재위동안 10년은 잘했어요 ㅋㅋ
나도 안좋은 기억이 너무 많아서 지금도 사는게 힘든데 수십년을 왕 자리를 놓고 불안하게 살았으니 정신병 걸릴만도 하지 하지만 왕이니만큼 그 과거를 용서할 수 없었을까 싶기도 하다 광해군은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세자였고 수많은 신하들의 기대를 받던 왕이었는데 말이다
그때 당시 숭정제도 저런 의심병돌아서 유일하게 최전방 막을수 있는 장수를 베버림 이러한 결과를 볼 때 인간의도리를 무시하고 정치적 야욕을 따르면 어떠한 가혹이 따르는지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로 느낌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자들이 자기 뱃속만 채우려들면 나라가 망하는건 똑같은 이치
가여웠던 우리의 역사. 오늘날까지 연명해온것만도 기적같네요.
정말 광해군스토리만 봐도 한편의 영화와도 같구나. 영화로 나오긴했지만 이런 비하인드스토리는 처음 알게 되었다. 예나지금이나 기득권층의 권력싸움..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는거 같다. 작금의 기득권층의 모습은 조선왕조시대와 다를바가 없구나. 그와중에 힘들었던 백성들은 현재 국민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결론: 자식에게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 필수요소이다
못난 애비들이 잘난 아들에게 샘을 낸다.
역사 공부 감사합니다
나는 광해군 만 생각 하면 마음이
찡하고 아프다.
결과는 부친인 선조 의 변덕스럽고 표리부동 한 성격때문에 결국은
왕위 를 찬탈 당한것이다.
그런일만 없었다면
병자호란이나 정묘호란 은 일어나질 않았을것이다.
유능하고 명석한 임금 이였는데
안타까운 일이였다.
광해군
참 안타까운 임금이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쩜이리 세상은
변함이 없는지
무능하고 나라 밖 정세에도 어두운 정치관료들... 현재 싸움질만 하고 있는 국회의원들과 오버랩된다.
재앙이로소
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yt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っy
옳은 말씀입니다. 본인들 밥그릇만 생각하고 ....맨날 집안싸움 하느라고 나라는 신경안쓰고 한심들 하지요.
여러분 광해군은 결코 연산군 같은 폭군은 아닙니다
연산군도 제위 기간 80%는 나름 괜찮은 왕이었음.
솔직히 폭군이든 아니든 백성들에게만 잘하면 되는듯
@@assetfuture5590 연산군 백성한테도 개좃같이 했음
@@yongwoonlee1663 ㅇㅈ
광해와 연산군은 다르네요
광해는 연산과는 대조할수 없음이예요 임진왜란을 격었고 다만 지지세력이 없고 개똥이를 너무신뢰해서 이런결과가있지않나 지금도 권력형태를 보면옛날과 별반 다를것이 없음이요
해설자해주시는 아나운서 목소리가 참좋아 듣기좋아요 감사함다
누구보다 피난을 즐겼던 인조! 죽기는 진짜 싫었던 모양!
웃기기까지 하네요 인조 겁쟁이에 비겁해보여요
그할아버지에 그손자 ㅋㅋ 백성버리고 도망가는 ㅋㅋ
난 광해군이 훌륭한 왕이었다고 생각한다. 중립외교는 그 당시 사람 치고 너무나 획기적인 외교 정책이었다. 광해군이 폐위된 상황을 잘 몰랐는데 많이 배웠다. 역모 사건 잘 대비를 하지 왜... ㅠㅠㅠ
궁녀 말만 믿고 대비를 안했어... ㅠ
원래 광해군같은 획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충신이 있을수 없었고 신하라는 사람들이 기득권에 눈이먼 사람뿐었으니 어찌하리요.
@@shhshshaga9202 인조반정나서 정묘호란, 병자호란때 청에 끌려가고 죽은사람은 그 수십배 이상이에요
@@joyk.9820 그건 우리입장에서 좋게 본거죠 청입장에서는 조선군이 죽기살기로 싸우면서 뺨을 세게 갈겼는데 뭐라고 생각할까요? 항복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항복하고 조선군들이 청나라 군사 머리를 몰래 가지고 있거나 주변 여진 여자들을 겁탈해서 양반 수백명을 학살까지 했는데 과연 그렇게 좋은 이미지만 있었을까요? 그리고 양대호란은 청의 내부사정에 의한 요인이 훨씬 컸습니다 특히 정묘호란은요
@@joyk.9820 아직도 광해군 밀지설을 믿는 분들이 있으시네ㅋㅋㅋㅋ 사르후 전투 과정만 봐도 적당히 싸우다 항복하고 살아돌아온 게 아니라 후금군에게 포위당해 섬멸 직전까지 가서 항복했던 것인데, 항복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서인정권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이 매우 유력합니다. 광해군을 까기 위해 서인정권이 광해군이 밀지를 써서 후금에 보냈다느니 강홍립에게 적당히 싸우라고 했다느니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죠. 광해군을 까기 위한 거짓선전을 믿고 광해군을 옹호해선 안 되는 겁니다. 차라리 후금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북방 방어선을 구축하고 사르후 전투 이후에 강홍립과 연락하며 후금의 내부사정을 정탐한 이야기, 사르후 전투 이후에 명나라의 요구에 소극적으로 응했다는 근거들을 들면 모를까.. 광해군 밀지설 같은 신빙성 낮은 근거는 ㄴㄴ요. 그리고 중립외교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게 막상 광해군이 폐위됐을 때 명나라에선 우리한테 잘하던 광해군 왜 폐위시켰냐는 거였죠
임란이 끝나고는 폭군이 된건 사실
근데 그게 과연 사실일까 하는건 의문
패악이 하늘에 닿았던 조선 양반들이 전쟁통에 실록도 왜곡시키지 않았다고 확신하기 힘듬
그래서 반정을 했는데
더욱더 시대 역행하는 인조
허수아비니까요..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친명배금 사상이자 소중화론이 상식인 사회였으니 그걸 감안해야지 지금도 다르지 않잖아 중국몽 어쩌구 하며 중국은 숭배하면서 자국 젊은이 몇천명 죽어가며 빨갱이 김씨왕조 몰아낸 미국은 개취급 하는거랑 비슷하지.
@@invitebyte3278 그걸 감안해서
반정을 했는데 시대를 역행 했죠 반정 주체가 친명배청 이니까요
@@inhukj7875 그건 결과를 다 아는 한참 미래인 지금 관점에서 사안을 보니깐 그런거지 당시엔 명나라는 재조지은+소중화로 대표되는 조선의 상국이었다니깐. 그리고 후금(=청나라)은 못배워처먹은 오랑캐 집단으로 인식했고.
지금 관점으로 역사를 보면 안된다니깐. 당시 관점으로 봐야지 니나 나나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웃어른에게 공손해야 한다는건 상식이자 당연한거지? 저 당시엔 명나라를 부모를 섬기듯 해야 한다는게 상식이던 시절이다.
@@invitebyte3278 그러니까 시대를 역행 했다고요 뒤엎으면 새롭게 개혁 되거나 뒤쳐 지는데 인조반정은 뒤쳐져버려서 역행했다고요
칠칠치 못한 아비가 자식에게 어떤 해악이 되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선조는 이씨조선 최악의 왕이었다.
인조 역시 만만치 않았다는 ㅎㅎ
허긴 그 임금도 머리를 찧었으니.
인조가 원탑
@young sun 뭔소리임 고종은 대원군 내려오고나서부터 지가 권력행사할수있었음
그런데 병신같이 민썅년이한테 휘둘려서 허수아비로 내려앉았는데 한계는 개뿔
저런 고난과 역경 속에서 왕이 되었으니 나라도 왕위에 오르면 자신의 반대 세력을 전부 처단 하겠다,자신의 형제 도 사실은 살다보면 별거 아니다
45:04 음악이 말하는거 같네
권력무상이다 죽음에 이르러 모든걸 내려놓으니 이렇게 편안한것을 왜이리 집착하며 살았을까
찰리채플린에 말이생각나네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보면 비극이다 왕의 삶도 편안한거같지만 가까이서보면 피터지고 살얼음판걷는 비극이다
선조는 저 쫌생이 같은 성격 때문에 지금도 욕을 먹는다 쫌생이인데는 다 이유가 있지만 그래도 보다보면 답답하다
정치를 못하는 왕도 아니였는데 선조가 저 쫌생이 같은 성격대신 뭔가 지원자 같은 느낌으로 밀어주고 국정운영을 가르쳤으면 폭군까진 안가지 않았으려나
어차피 역사에 if는 없다만 항상 볼때마다 선조 광해군은 뭔가 아쉽다
애초에 선조는 신성군을 밀었으니 그렇지
그런 성격땜에....왜난때 안먹힌거임 명나라로 빤스런~~~~
사람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
대사는 돈발히는사람과 아녀자와 논하지 말라 현대사도 여자문제로 잠룡이 도롱뇽이된
전충남지사
정적을 제거할땐 뿌리까지 없애라
명의 입장에선 군신유의를 안한거고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조선의 광해군 반면 국제정세는 밝았네
광해군의 판단이 흐렷으면 누루하치한테 조선 먹힐뻔 했네
30:18
강홍립이 단 두 번의 전투에서 쉽게 투항하다니. 알만한 사람들이 은근히 말 이상하게 하네. 본래 조선을 엄호해주도록 되어있던 명군이 연합작전 과정에서 사전에 전멸 당했고 조선도 그 이후의 기습으로 말그대로 순식간에 박살이 났는데...
항복하던 시점에서 13000병력 중 7000이상을 잃고서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에 빠져있었구만. 거기서 어떻게 싸우란거냐.
주자학에 빠져 사리분별을 모르던 신하들이 광해군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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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상궁 김개시에게 눈칫밥 먹은 궁궐병 환자 광해. ㅉㅉㅉ
역사공부똑바로하세요 잘한것도 잇지만 광해는 폭군이엇습니다
전쟁까지 하면서 튄것도아니고 이리저리 뛰다닌놈이고 살아남아서 왕까지올라왔는대 산전수전 다본 정신력으로 왕에올라서야 정신병이왔다 ? 정신병이 온걸까? 정신병이어야만 하는걸까 ?
@Blind 왕실 위엄이 아니라 원래 동아시아 왕조들의 공통적인 모습임. 삼국지 조조도 장수와의 싸움에서 맏아들 조앙의 말을 빌려타고 도망가며 아들을 총알받이로 써먹엇잖아. 동아시아 국가들중 독특한 형태인 일본 빼고는 다 그런식임. 왕이 사로잡히거나 뒤지면 그냥 그 왕조가 끝나는거지.
지금도 아프리카나 동남아 후진국들 보면 자국에서는 젊은 시절 산전수전 겪으며 전쟁영웅, 독립투사였지만 미친 독재자가 된 사례는 수두룩합니다. 옆나라 모택동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이란 미친짓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골로 보낸걸 모름?
이자식은친일파민족반역자에후손토착왜구이런쓰래기
선조가 한짓 생각하면 정신병 걸릴 만하지않음?
@@invitebyte3278 일본은 더심해요 . 이에야스만해도 노부나가 명으로 친아들 할복시키는데요... 히데요시도 아들 할복시켜서 정권 망하게 하는데 ㅋㅋㅋ 일본놈들 제정신이 아님
광해군이나 사도세자나 참..애비들이 문제구나
소현세자도 애비 잘못만났지...!!!
조선 삼대 맴찢러
광해
사도
소현
광해는 자기 실정인데 뭔 선조탓ㅋㅋ
추가 인조도
@@김유정-f1z
안녕하세요 오지환입니다
맴찢러가 무슨뜻이죠?
전쟁영웅의 비참한 최후
ꯞ
폭군이라고 역사남겟으나 인조방정야말로 최악의 역적의난이였지 청나라 침략 사건 만든 인조방정 비교하면 누가 나을까?
rud123 ghdwls 방정아니고 반정
아젠장.. 오타 지적 ㄳ...
@@rucixghdwls3044 청나라는 세종이 임금이었어도 조선에 쳐들어왔어 ㅋㅋㅋ 그리고 그당시 세계 최강을 기마병. 동아시아 최고의 화력으로 성력까지 까부시는 홍이포는 세종할아비 태조도 못막어 ㅋㅋㅋ
@@노미현-l6y 이게 맞음 왕이 누구였건 후금의 침략은 정해진 수순이었음
역사가 알려주죠
국방력을 소흘히하면 주변국가에서 가만 놔두질 않는다라는 것을
왕이 누구 였냐가 문제가아니라
조선이란 나라를 운영해나가는 인간들 자체가 전쟁에 대해서 비상식적으로 대처하고 대비했다는거죠
전쟁영웅은 자기밥그릇 챙기는 기득권자들에게는 위협일뿐임
세계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죠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잡아먹는다"
토사구팽
이상하게 한국사를 볼 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생각은 안하고 '개혁군주with백성 VS 귀족기득권'이란 식의 왜곡된 구도로 해석하는 사람들 꼭 있더라고요. 영국 명예혁명 때처럼 왕권 강화하려는 폭군과 나라를 위해 이를 견제하려는 신하들의 구도가 대부분이었는데.
@@kk-di2qh 왕권강화을 강화하려면 명분이 필요함 그저 니들 다 쌩까고 내멋대로 하고싶어 빼액!!
이러다간 귀족이고 백성이고 전부 등돌려서 진정한 폭군이 되는거임
힘없는 왕이 자기편으로 만들고 명분챙기는데 제일 좋은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표방하는거임
왕이 백성챙기는 개혁을 하겠다는데 제아무리 귀족나부랭이들이라도 그걸 무턱대고 반대만을 할수는 없는거죠
결론 = 힘없는 왕이 권력강화를 위해서 제일 좋은 방법은 평민or비주류세력들을 끌어들이는것
근데선조마치아둔하면서교활한왕이있었을까 이괴물만든좃선지배층이란것들도 참어지간하다
@@khd5031 결국 카이사르가 민중파를 자처하거나 현대 정치인들이 서민타령하는 것처럼 명분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문제는 후대인들이 사회 기득권은 만악의 근원이며 개혁군주와 민중이 힘을 합쳐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식의 뻔한 도식을 아무데나 들이댄다는 말입니다.
그냥 신하들이 주도권잡을려고 꼬투리잡아 역모일으키고 지들 말 잘들을 허수아비 왕 세운고지
광해는 나쁘지않은 왕이었다
이 다큐 음악 너무 좋아
음악감독님 센스가 돋보이네요!
Hyo님, 17:30 바이올린 곡 아시면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고맙습니다.
광해군이랑 인조의 분기점이 엄청나게 중요한게 인조이후의 왕들.. 마지막 고종 순종 포함 모든 왕들이 인조의 직계 후손임.. 한마디로 인조는 조선의 중시조임.. 즉 광해군이 쫓겨나지 안았으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음.. 우리가 알고 있던 숙종 영조 정조 전부 태어나지 않고 전부 다른 세상의 완전 다른 왕들이 집권 했을듯.. 광해군의 후손으로 이어진 조선의 왕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조 사후부터 말아먹은거지.
@@choanny1874 그니까요😭 정조대왕님 최고♡
네멍청한 선조 직계들 그중에 정조 빼고는 다 등신 핫바지들 제일멍청한 선조 인조 조선은 두 임금이 말아먹은거죠
쿠팡
개화파 받아들여 영국과 미국의 협조로 일단 청을 내쫒고 문무정비하여 일본대신 러시아 북해함대 조지고 일본 쳐들어가 일본 식민지 삼은 다음에 청나라를 조져서 난징대학살 벌인 다음에 뻬이징 대학살도 벌인 다음 석유재해권을 위해 인도차이나조지고 중동 조지구 대한제국을 견제하는 미국 진주만을 폭격했겠지
I am so glad to learn more about korean monarch and history. It’s really educational and fascinating as well as sad thinking about all the political power and fight to maintain it even with selfish reasons. Most of them are Sad history but also learning experience.
Whisch drama is this?
Who a u
광해군.전하는~역사의영웅이로다
세상 찌질이 선조 ㅉㅉ 어떻게 지 아들 한테도 질투를 하냐
선조만 그런게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왕들이 그러합니다
자기아들 죽인 왕이 한둘이 아닙니다
인조도 소현세자를 미워했고 영조도 사도세자를 미워한것처럼요
왕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란 그냥 부자지간으로 볼 수 없습니다
@@최웅열-p7t 영조는 사도세자를 미워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죠
태어나자마자 돌 때 세자 책봉 될 정도
오히려 그런 관심이 미치게 했을 거라는 설이 있을 정도
@@inhukj7875 전 세자책봉 할 때의 5살이전 얘기를 말하는게아니라 대리청정이후를 말씀드린겁니다 그리고 대리청정 전에도 영조는 자신과 전혀 반대의 사도세자의 성격과 행동을 알게되면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최웅열-p7t 그건 나중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성장하지 못해서 그런 거고 자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데
님은 왕이 아들을 미워하는 것이 이 것과 동급이라고 예시를 든 거잖아요
엄연히 다른 예시죠
@@최웅열-p7t 말장난은 님이 하는거죠 못마땅하다는 만족을 못 시켰다는 건데 그게 다 밉다는 거냐고요
그러면 세상에 모든 부모는 자식이 원하는 대로 안 되면 다 밉다는거냐고요
그렇게 되면 모든 왕일 것도 없이 모든 부모는 자식을 미워한다고 하지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외교 천재 광해군
다큐 개꿀 들으면서 자면 잠이 솔솔
폭군 아니네!!~~~
좋은일도 많이 했구만.....
생모도 일찍 여의고, 하늘이 돕지않아.....불운한 왕 이네요. 동정 ~~♡
역사는ㅁ 승자의 글이 대부분임 인조는 광해군보다 ㅜ매우 무능한 왕이었다
무능한건맞는데 광해보단 유능함
@@enelu2256 개개인의 유능함은 광해도 유능하긴 함, 정신상태가 맛가서 그렇지
@@enelu2256 槍裏やりりり裏りりりりらや。。りりりや拉わ。。。りりり。槍りりり割り割りを割りりりり裏ゎゃわや裏、」」やや「よ、や、や」や、やや、ゆやゆ」」」ーーや、ゆやわゆ、ゆ、わ、や、やや、やをや。や、わやp
.
@@enelu2256 인조보고 유능하단 새키는 대가리에 뭐가 든 창의력이면 이딴 개소릴 짓거리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nelu2256 뭔 개솔,
Which drama is these?. Name pls
광해군 정말 외로웠겠다... ㅠㅠ
근데 광해가 폐위되고 많은 백성들이 환호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죠.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는 후금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의 북한, 중국과 비슷했다고 봅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싫어하는 후금과 친하게 지내려 한 광해의 모습에 당시 민심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고 볼 수 있죠.
광해는 정당한 임금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인조가 쿠테타로 집권했고,
광해가 묘호를 못얻었으면, 인조는 더욱더 묘호를 받으면 않된다.
지금이라도 광해를 정당한 임금으로 대접해야 한다.
선조와 인조 무능한 왕. 아들에게 왕권을 잃을까 조바심낸 찌질한 왕. 외국에게 침략당한 한심한 왕.
초반에 백성을 생각했던 왕이긴 했네요 그대로 쭉 정치했으면 좋았을걸~ 광해군 좋은 자질은 갖고 있었긴 하네요
전쟁을 최전선에서 지휘했던 광해군만이 전쟁의 참상을 알았던거지 차라리 선조때 신하들이 광해군때 있었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듯
참상을 알아서 광해가 한 게 뭔데..
@@연남생-w2d 광해가 중립외교했잖아
@@그건좀그런데 중립외교노선은 선조때부턴데..? 그리고 중립도 힘있는 ㅅㄲ들이 하는거지 화약만들 염초로 기와 굽던 나라에서 중립은 무슨;;
@@그건좀그런데 그리고 전쟁의 참상을 알았으면 지 애비처럼 복구나 할 것이지 무모한 건축으로 재정을 날려먹을 생각을 하겠냐고....
@@연남생-w2d 뭔 선조때부터임 선조때 여진이랑 허구한 날 싸우고있었는데
폭군은 인조반정일으킨 세력이 만든 누명일뿐이고, 광해군은 중립외교로 조선을 지킨 성군이였음.
오히려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국치를 일으킨 조선 3대 최악의 왕이 되었죠.
중립외교는 선조때부터 하던거니까 그럼 선조가 성군이겠네 ㅋㅋㅋ
중립외교는 개풀 ㅉㅉ 중립이라는건 내가 힘이있어 아무도 건들지 못할때나 중립인거야 ㅉㅉ 광해군은 중립외교가 아니라 전쟁에 참전하진 않고 국경수비에 집중해 침략하는것만 막겠다고 한거란다 ㅉㅉ
인조를 부관참시 해야한다 광해군은 왕으로 복원하고 인조는 병자호란 으로 백성50만명 희생 시킨왕 당연 부관참시 하고 군으로 강등하는것이 마땅 해야한다
지지기반이 너무 없었던 왕 사실 백성들의 어려움도 알고 후금이 떠오르는 태양임을 알고 싸움을 걸지 않은걸 보면 외교적 센스도 있었는데 기득권층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한게 안타까운듯 어느정도 달래면서 권력 밸런스를 좀만 더 잘 잡았다면 광해군은 명군으로 남았을거같은데 안타까운 왕
팩트) 조선후기 지지기반이 가장탄탄했던왕
북인 서인 백성 가리지않고 어마어마한 지지를 받았으나 치세기간내 조선에서 가장많은 옥사를 일으켜 자기 지지기반 마저도 숙청해버린 정치 바보
@@ohilyeojoh-a 광해때 옥사 몇명했어요? 다른 왕들때 옥사는 몇명했어요? 팩트를 서두에 두실거면 정확하게 숫자도 기입해주시면 다른사람이 볼때 더 팩트로 생각할것같네요
@@ohilyeojoh-a 왜 저렇게 변한지알아요?
도적사건인줄알고 잡은게 사실알고보니 영창대군하고 연결되어있다던 역모사건이였고
몇십년간 고통받던것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엄청난 살육의 현장으로...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보는 왕입니다
@@Rowingmin 옥사(국문)로 인해 희생(고문으로 옥사하거나 처형당한)된 피해자 순위
1. 선조 임금 : 기축옥사 (약 1천여명 희생) 1589년 ~ 1591년까지 3년간 옥사가 이어짐
2. 수양대군 : 제2차 단종복위운동 (최소 300여명 이상 희생) 1457년
3. 수양대군 : 계유정란 (107명 희생) 1453년
4. 수양대군 : 제1차 단종복위운동 (70여명 이상 희생) 1456년
5. 인조 : 이괄의 난 (인조정권의 등청 요구에 거부한 죄목으로 옥에 갇힌 중북인사들 40여명 그냥 처형 + 이괄의 난때 좌의정 윤방이 죽인 도성 백성만 200여명) 1624년
6. 인조 : 인조반정 (100여명 희생) 1623년
광해군때 옥사는 희생자 규모 면에서나 옥사의 양상 면에서나 위에서 열거한 6대 옥사에 비하면 아주 양반입니다. 광해군 때 옥사의 빈도 4차례로 중종 임금 때 14차례의 옥사 빈도에 비해서도 낮습니다. 광해군이 숙종처럼 함부로 중신들을 처형하거나 사약을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광해군이 수양대군처럼 술자리에서 말실수했다고 변방에서 고생한 장군을 처형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안위만 걱정한 나머지 쿠데타 의심병으로 평안도 군사들 훈련을 감시했던 인조와는 달리 광해군은 오히려 호란을 대비해야 한다며 군사 훈련을 장려했죠.
우리 선대에 광해군 사부 한분이 계셨는데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덕있는 분”이었다는 말씀이 전해 내려옵니다~너무 안타까운 .....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다. 700명의 반란군과 궁궐의 장수들이 내응해서 궁궐이 장악당했다. 너무 안일했다. 궁성만 지켜냈더라도 되었을 것을.
광해군 보다 못한 왕도 묘호가 있는데... 지금이라도 묘호를
사실상 광해군을 기점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은 결정된거지.
세조.선조.인조.고종도 존중을 받는데 그에 비해 광해는 조선을
끝까지 지킨 주군임을 제대로 밝혀야 합니다
선조나인조아뭉푼이나뇌물현이나
무능의 극치 선조 인조 고종을 존중하는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 욕허지 않을까요
나 죽어서 선조 만나면 귀빵맹이 한대 날릴꺼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인조놈도 한대 귀싸대기좀..
@@bokheechun4686 제가 900년동안 조질겁니다
난 60대 역사을 들으니 참종아요 감사합니다
혼란한 세상을 바로보고 싶으면 역사를 돌이켜 보고 배우면 된다.
죽은자는 말이없는법..!!! 반정세력의 명분일뿐...ㅉㅉㅉ
우리 역사를 말아먹은
인조반정무리 역적들 모함하다
뇌물때매 불의가 의로 변하는 세상
1차 광해군이 말아먹음
2차 인조가 말아먹음
@@재앙-l7v 광해군이 왜 말아먹음?
정확한 팩트좀.
@@킹두한TV-m4f 1. 대동법 반대
2. 북인만 세력화시켜 선조보다 훨씬 붕당심화시키고 이이첨같은 쓰레기를 집권자로 만들어줌
3. 궁궐공사한답시고 염초토 싹다 써서 조총수 양성해놓고 조총을 못써먹게함(국방붕괴)
4. 그 궁궐공사를 위해 매관매직 공명첩 발행했음
5. 후금 태자 홍타이지 죽일라고 주변에 뇌물먹였다가 걸려서 홍타이지가 조선을 절대 가만두지않음(정묘, 병자호란 단초제공)
6. 이모든걸 종합해서 조선은 재정파탄, 수탈, 민심파탄 3종세트
@@재앙-l7v 엥? 광해군때 대동법 시행 아님? 허준 통해서 책 편찬해낸것도 광해군이고...
홍타이지가 광해군이랑 친했다는 걸로 알고 있는대. 내가 아는 거랑 정 반대로 알고 있으시네요... 누가 정확히 맞는 건지 아시는 분은 댓글좀
선조랑 인조 둘이서 조선 명줄 50년은 까먹었을듯
200년
맞습니다 나라. 가 위기때. 그런찌질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니ᆢ
최고 문제의 임금
선조아니면 조선100년가고 끝났는데
23:58 예전에 광해군상황보라며 중국이 부상하고있다고 바람잡던 분 아니신가..
분명 폭군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데.
솔직히 쓰레기짓은 인조가 더 많이 했지.
친절한 금자씨의 브금(조영옥 - 구슬이야기)을 쓰다니😄😄 광해군의 심리를 잘 표현한 듯요ㅇㅇ
이런 다큐는 kbs가 👍 뉴스.드라마.예능👎
임금이 무능했다기보다는 신하가 국정에는 관심이없고 당파싸움에 삐리리하고 있으니 나라가 이모양 어었겠지
앵커분 처음에는 너무 젊어 보여서 안어울린다~생각 했는데 세월이 계속 흐르니 프로그램과 잘 어울리십니다 ㅋㅋ
조선임금 중 전쟁터에 직접 나가본 임금
태조, 정종, 광해군, 인조 딱 4명 뿐
인조는 마빡맞기만했지 무슨 전쟁을 아노?
@@ireneoh37 정종은 왕세자 신분으로 왜구토벌한적도 있어요
광해군은 폭군이절대아니다..앞서간왕이였는데..아쉽다..
멀앞서가 ㅋㅋ
@@이야호-r8n 조선을 일본과 중국의 침약을 지켜낸사람임 인조반정 아니었으면 병자호란도 없었음
왜란때문에 죽어가는 백성들한테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 싹다 중건시키다가 명한테 궁궐집착증 있냐고 조롱 받은 광해군이 앞서나간 왕? 대동법도 광해군은 떨떠름하게 생각한게 정설인데?
광해군이 폭군인지 아닌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무리 못해도 인조보다 못했을까?
조선의 국운이 기운건 이 시점부터인건 명확하다.
인조보다 못했을까?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음
그리고 광해군이 폭군이라는 거에 의견이 분분하다는 소리는 먼 개소리야 역사학자들도 광해군이 폭군인 걸 부정안하는데
그 인조보다 딸려서 15년만에 자신의 지지세력이었던 서인과 북인 둘다 자신이 컨트롤못하고 백성들에게 온갖 조롱과 욕처먹으면서 반정당함
선조의 아둔함으로 광해가 왕이되기전 왕권을 강화해주지 못했으니 총명했던 세자도 신하들에게 휘둘릴수밖에.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라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왕임은 분명하다
인조반정 = 쓰레기들의난..
반정이 쓰레기는 아니라 해도 주체가 한 짓거리를 보면 맞는 말인 듯
결국 광해의 폭정이 인조반정을 불러일으켰지
광해의 폭정이라기 보다는 광해가 무리한 왕권강화책으로 무리하게 궁궐을 지어 민심을 잃고 주위를 살피지 못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지만 무엇보다 이런한 판단의 착오는 선조가 뿌린 인목대비와 영창의 존재 그리고 당시 썩은 기득권이 것이 대동법을 통한 본인 재산의 납세에 대한 양반들의 반감과 대명사대에 찌든 소중화가 부른 참사라서 아쉽다.명군이 될 자질을 타고 낫고 전란때 훌륭하게 분조를 잘 이끌어 백성의 높은 신임을 받았음에도 선조의 아들에 대한 열등감에 찌든 행위가 광해가 판단을 흐리게 한 원인이라 가슴이 아푸다.
더구나 인조가 반정해서 조선은 더 비정상의 나라로 전락했으니 어찌 안따깝지 않을까.
@@jglee8665 헛소리자제좀 ㅋㅋㅋ 대동법은 신하들이 그리고 촌구석 늙은 유생들 조차 제발 좀 실행하자고 상소올리고 난리쳐서 겨우 실행시킨건데 ㅋㅋ 무슨 신하들.기득권이 반대해?ㅋㅋㅋ
드라마.영화로 역사배웠냐?ㅋㅋㅋ
그리고 인목대비도 선조가 사망한 그날 옥쇄를 광해에게 주고 깨끗하게 물려나는데?
@@컴퓨터-m6x어떤놈이 헛소리하는가보니 제인이네ㅋㅋ
사람은 믿음의대상이아니다 사랑의 대상이다
중립외교에 대해서 반대를 했다고 하는데 이를 획일적으로 보면 안되고 어떤 시각에서 반대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꼭 사대주의가 아니더라도 설마 명나라가 쉽게 무너질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하는 시기이라 그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명나라는 대국인데 어떻게 청이 명을 무너뜨릴수 있는지를 상상하기가 어렵죠. 그리고 실제로도 청이 순수한 자력으로 산해관을 넘은 것이 아니고 명나라 내부적으로 이자성의 난에 붕괴되었고 명나라 장수들이 청에 투항하여 명나라는 청의 침입이전에 이미 자멸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야 할 점이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후금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틈만나면 조선의 국경을 넘어와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강간하고, 물건을 노략질해갔으니깐요. 지금 우리 국민들이 이웃국가인 북한, 중국, 일본이 만행을 저지를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이 커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립외교로 후금과도 친하게 지내겠다고 하니 반발이 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중종반정은 연산이 워낙 개또라이라서 명분에 힘이라도 실리는데 인조반정은 진짜 말그대로 정치적 권력만이 목적이라 최악의 사건이었음. 인조는 힘없는 꼭두각시가 될수밖에 없었다는..
팩트)광해는 옥사와 궁궐에 미쳐버렸고 폐모살제라는 좋은 구실까지도 스스로만들어줌 인조는 왕위에 오른후 얼마지나지않아 스스로 실권을 잡았고 치세 중반부부터는 자기가 정국을 이끌었음
광해는 정인홍 곽재우등 의병장들을 독려하고 친히 격문을 뿌리며 분조를이끈 위대한 왕재다. 나는 광해군보다 광해대왕이라고 부른다
공감합니다
광해군은 폭군이 아닙니다. 자신의 반정세력을 적출하는것이 당연한건데 폭군이라뇨. 광해군은 왕으로 추존되어야 마땅한 인물입니다
? 일당전제화 체제 상태였는대?
광해군이 자기 친형 신성군 죽이고, 영창대군 죽이고 인목왕후 폐비시킨건 사실임
광해군이 인조반정 이후 폐주가 되어 쫓겨날때 백성들이 환호성 질렀는데 ㅋㅋㅋ
조선의 암군과 그옆에 기생하던 암덩어리들이 조선 최고의 성군을 몰아낸 희대의 사건이지 반정이라는 탈을 쓴 쿠데타사건이다
인간의 욕심과 탐욕 모든것 그것을 버릴때 신과같은
조상신이 된다
14:00 선조가 분조 안 했으면 이 한반도... 이미 일본 거임...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께서 계셔서 그나마 지금 이 한반도 있는 거임...
조선이 망국으로 접어든 가장 큰 사건. 재조선 왜구 대사 대조규개를 필두로 한 왜군들과 조정 내 괴뢰내각이 입맞추어 벌인 갑오왜란. 야음을 틈타 왜군이 침전을 습격 고종과 민왕후를 사로잡았지요. 선조 몽진 때 왜구들이 크게 깨우치고 배운 거랍니다. 임금을 잡아야 조선을 먹겠구나
선조가 품행이나 론공행상은 개좆같이 했지만 분조 몽진은 잘한 선택이었규
분조 한게 나중에 선조가 세자를 견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그 정도 했으면 세자로 인정해야 하는데 계속 견재... 그 때는 좋았는데 후폭풍이
너무 잘 봤습니다. 전에는 이렇게 역사 고증을 깊이 있게 했다면, 요즘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은 너무 깊이가 얕은 것 같아요. 예전과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세요.
광해는 불안한 왕권다툼에서 패한것이다.
그래서 승자들에의해 쓰여진 역사는 왜곡될수밖어 없다.
근데 이 영상과 달리 광해군 이 양반은 내치에선 아주 빵점임. 광해군은 궁궐병에 걸려서 나라가 폐허가 된 상황에서 지가 살아야할 궁궐 짓는다고 얼마없던 백성들의 민가를 헐어서 궁궐을 만드는데 세금낭비함. 더 큰 문제는 그 궁궐에 청기와를 사용함. 이게 왜 문제가 되냐고 생각하겠지만 청기와를 만드는데 사용된 유약의 재료가 바로 화약을 만드는데 사용된 염초였음. 그것도 명나라가 공짜로 준 염초를 화약도 아닌 지 궁궐 짓는데 탕진함. 그리고 광해군은 오성과 한음, 그리고 이원익 같은 충신들을 무슨 스탈린 마냥 죄다 숙청함.(이게 인조반정의 불씨임. 이유? 광해군이 능양군, 즉 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을 모함으로 죽이면서 능양군이 각성하고 광해군 몰아내려고 반정 일으킴.) 그리고 그 빈 자리를 이이첨 같은 북인들이 차지하는데 문제는 이놈들도 서인급 부패 정치집단에 서인들 못지않게 명나라 후빨하는 친명파임. 그 결과는 실리외교를 펼쳤다는 광해군과 달리 조정에는 친명파들이 득세하게 되고 그 결과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부름. 더 충격인 사실은 광해군이 김새기 라는 상궁에게 의존하며 그녀가 전횡을 일쌈는걸 방치 했다는 거임. 그러다가 인조반정때 김자점과 내통한 김개시한테 통수 당함. 추가로 대동법 반대도, 대동법 전국 환산도 막은 사람이 바로 광해군 본인임. 광해군이 성군이라면 왜 기득권 눈치 보면서 경기도 지역에만 대동법을 실행함?! 결국 광해군도 별반 다를게 없었음. 광해군이 얼마나 내치를 못했으면 유배를 갈때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며 조롱함. “돈아비야, 돈아비야 그 많은 돈 두고 어디 가느냐?” 말 그대로 광해군의 매관매직과 축재, 그리고 과도한 궁궐 건설을 비꼰 아주 어울린 노래 였다.
영화광해군은??
애초에 세조가 반정으로 왕위찬탈만 안했으면..저런 왕들도 안나왔는데
세조 다음 왕들이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이니까요 단종 다음에 왕들은 모두 단종의 직계후손들이 됬어야 했습니다
25:23 석판에 받아드리던 ---> 받아들이던 이 맞을텐데...
광해군은 훌륭한 왕 이였다.
그는 친중 사대주의를 버리고 시대를 앞서는 개혁정치를 하는 한편 어릴적부터 고단한 민초들의 삶을 이해하는 젊고 국제 정서에 깨어있는 유능한 왕 이였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외로운 사람이였다.
소히 후궁의 아들 이라는 핸디캡 과 비주류 였고,
그에게 충성된 신하만 있었다면 병자호란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었다면 친했던 광해군을 지지했을것 같다.
공부좀해라
0:28 이거 인트로 매일 보러 옴... 짧은 영상에 광해의 쫓기고 쫓기는 삶이 담긴 거 같음 ㅋㅋ 노래도 광해군 그 자체
그 시대의 광해군은 폭군이 될 수 밖에 없었네요.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고,명석하지만,지혜가 있었으면 올은 판단을 할 수 있었을 것을~~~~~
1대 다수이니~~~~~
왕이라도 말은 반대파의 "쿠테타"를 일으키게 하는데~~~
"개혁"은 배울점이 있으나,그 당시 궁궐 재건 비용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잠깐 잊으신듯~~~~~
♧오늘도 역사로부터 배움니다♧
초반부터 기득 세력과 다른 행보는 좋지 않아 보입니다, 그들 없이 논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강해 질 때까지는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한편으로 다른 노선을 간다면 다른 확고한 세력과 같이 가야 하지만 그에게는 큰 구심 점이 없기에, 측위 전과 초반의 행동은 무리한 개혁이였다 고 보입니다
광해군 입장에선 얼마나 억울하고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왜란때만 광해군을 이용해 먹은 아버지 선조가 얼마나 미웠을까? 이해가 간다. 선조 인조는 무능한 왕 그 자체. 기득권들이 내 놓지 않으려 기를 쓰는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상황인 듯. 그래서 왕까지 끌어 내려는 것도. 개혁을 원치않는 것도.
20:47 이덕일 박사님
인조가 정당성없이 보위에 오르니 마땅히 그 이유를 만든게 광해군을 폭군으로 만들고 조종칭호도 못 받게 한거지. 그래야 지 보위찬탈이 정당성을 내세울수있으니
굿
선조가 찌질한 건 맞는데, 광해군보다 저평가 될 임금은 절대 아님. 대중매체에서 이상하게 광해군을 과대평가해서 광해군 이미지가 좋아졌는데, 이 또한 변할거라 생각. 조선사 제대로 파보신분은 저와 비슷한 생각일거라 생각함.
전쟁 중 화약에 쓸 염초 빼돌려서 궁궐공사에 쓰던 분이....그리고 조도사를 파견해서 백성들 세금을 있는대로 다 빨아먹고 궁궐공사에 심취한 분이 선조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 건 말도 안된다고 봅니다.
어디 대한민국 문화교육관련 높으신분중 한분이 광해귀신이라도 씌였나 이렇게 역사왜곡하고 그걸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대중들보면 진짜 답답하긴함
선조는 임란 한번으로 그냥 이미지가 굳어져버린게 크죠...
반대로 광해는 중립외교햇다는 교과서 내용때문에 나머지 폭정이 그냥 묻혀버린..
인조반정이 없었으면 청나라의 침입으로 백성들이 파탄에 빠지지도 않을텐데 서인 일파의 권력 욕심이 재앙을 가져왔다
권신들이 왕권을 농락한 사건으로 희생된 비운의 왕 광해군
단 두번의 전투 끝에 투항을 한게 아니라 진짜 궤멸 직전까지 가서 투항한거지... 광해군 밀지설도 설일 뿐이고 전면전에서 그냥 학살당하는 수준으로 궤멸당한게 사실인데 뭐.... 사르후 전투 그 벌판에서 조선군 절반이 전사한거면 말 그대로 전근대 전투에선 전멸이나 다름없는걸.... 이걸 뭐 의도적인 투항이라고 하는건 곡해가 아닐까?
광해군이 솔직히 정치 썩 잘한것도 아니고, 세자시절이랑 전반기에는 의지가 있었지만 중후반부 부터는 ptsd걸린 환자느낌인데.
본질은 백성의 삶!! 세자 시절 영특했던 광해군이 나락으로 떨어짐에 안타까움 크지만 그는 폭군 맞습니다..폐모살제를 떠나서 수많은 백성들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지금 대한민국 광해군 시절 보다 인구는 다섯 배 국력은 수십 배도 넘을 것입니다...
1990년부터 시작된 경복궁 복원공사 30년째지만 25% 진행 상황입니다....그는 전후복구 아닌 백성들 삶 외면하고 오직 궁궐 공사에만 몰두합니다. 창덕궁, 창경궁, 종묘 재건, 경희궁 신축, 정동 행궁 증축, 인경궁, 자수궁 신축 시작!! 경희궁(1,500칸)은 태조 때 지은 경복궁(4,00칸)의 4배 크기, 인경궁(5,000칸)은 10배 크기입니다.....지금 대한민국 국력으로도 이것 다 지으면 나라 거덜 납니다. 공역은 끝날 기약 없고 백성들의 골수까지 다 뽑아내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심한얘기도 엄청납니다.
1,000명 밖에 안된 오합지졸 인조 반정군에 수도를 내주고 궁궐까지 내주고 그를 위해 싸워주는이 한명 없었습니다....유배 갈때도 슬피우는 백성 하나 없었습니다.....당시 민심이었습니다...서인에게 억울하게 쫓겨났다면 그러지 않습니다...
그를 중립외교 잘했다고 뛰운 사람은 조선사 편수회에 있었던 일본인이었습니다..일본의 조선지배 정당성을 위한 명분 만들기 일환으로...당시 후금의 세력이 커질때 전방의 장수들이 궁궐공사 그만하고 전쟁 대비해야 한다고 장계를 올리지만 그는 궁궐공사만 합니다..재정이 거덜 났습니다.....
하...안타까운 비운의 왕이로다.
좋은 정책을 펼쳤고 임진왜란때 영웅이었지만
상궁의 말에 휘둘리고, 신하와 백성들 까지 등돌린걸 보니 인조반정이 실패했었어도, 광해군의 끝이 그렇게 좋았을것 같지 않다.
반정자체가 성공한 쿠테타 이니 알수 없죠 박정희도 쿠테타 성공해서 지금도 나라경제를 살려놨다고 물고 빠는 인간들 많은거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