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지도를 보면, 아제르바이잔에서 옆구리에 붙은 아르메니아를 먼저 둘러보고 조지아로 북상하는 게 순서인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해묵은 분쟁 때문에 여행 코스가 꼬였다. 아르메니아로 바로 들어가질 못하고 조지아 남부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들어가 관광하고, 다시 조지아로 와서 남은 지역을 마저 보아야만 한다. 분쟁의 불씨는 구소련 시절, 아르메니아인이 대다수인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 준 게 원인이라 한다. 소련 붕괴 후 각자 떨어져 독립하다 보니, 옛 영토를 찾는 과정에서 다툼이 생겼다. 세 차례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처음 두 번은 아르메니아가 구소련 군인 출신이 많아서 이겼고, 마지막 2020년에 일어난 전쟁은 터키의 원조를 받은 아제르바이잔이 이겼다고. 아르메니아는 5,000여 군인이 죽고 나고르노-카라바흐 땅 20%를 뺏겼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 국경을 넘어가니 가이드와 버스가 모두 현지인으로 바뀌었다. 조지아는 1년 기한의 관광객은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어 입국 절차는 간편하지만 짐을 끌고 한참을 걸어서 통과해야 하는 점이 좀 아쉽다. 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려 한 손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턱이 있는 길을 따라 가방을 끌려니 꽤 고역이었다. 조지아 입경 후 바로 점심을 먹었는데, 곁들여 나온 하우스 와인은 5,000년의 포도 재배 역사를 가진 나라답게 아주 훌륭했다. 나처럼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좋아할 만큼, 독하지 않고 달콤해서 맛있었다. 그 식당은 자체 와이너리를 가지고 있어 와인 제조시설을 견학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어서, 국경에서 가까운 카자베지 요새 마을로 향했다. 꼭대기에 성채가 보이는 언덕을 굽이굽이 오르니, 산 아래 드넓은 평원 너머 만년설 덮인 코카서스산맥이 아스라이 떠 있다. 알프스처럼 드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풍경이 인상적이다. 이곳은 다게스탄족의 약탈에 대비하여 만든 일종의 산성이다.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벽과 후대에 지은 집들이 어우러지고, 교회 첨탑과 빨간 지붕 사이로 산 아래 녹색의 들판이 그림엽서처럼 펼쳐져 있다. 요새 마을 중심에는 관청과 문화시설도 있고, 24시간 요청만 있으면 언제든지 결혼식을 올려준다는 웨딩홀도 있다. 극장을 지나쳐 올라가면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20만 조지아 군인들을 추모하는 벽이 나오고, 이 마을 출신의 유명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1862-1918)의 두상도 보인다. 그는 러시아 민요에다 가사를 붙인 노래 '백만 송이 장미' 사연의 주인공이라 한다. 이 요새 마을 극장에서 공연하던 프랑스 여배우에게 반해 그림과 집까지 팔아 장미를 선물한 끝에 몇 달간 동거하였으나, 여자는 결국 돈 많은 남자를 따라 떠나버렸다고. 다음은 시그나기 지역의 보드베 교회를 찾았다. 이곳에는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가 잠들어 있다. 포도나무 가지를 머리카락으로 엮어 만든 십자가를 들고 므츠케타를 시작으로 이 나라 곳곳에 기독교를 전하다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사람들이 그녀의 관을 므츠케타로 옮기려 하였으나 아무도 관을 들 수가 없어, 이를 하나님의 계시라 여겨 이곳에 묻고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어서, 12세기에 수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학교였다는 이칼토 수도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에는 와인을 담그던 항아리를 대강 옆으로 눕혀 놓았다. 붉고 배가 불룩한 초벌구이 항아린데, 물고기가 숨을 쉬듯 주둥이를 동그랗게 벌리고들 있다. 와인을 담글 때는 포도를 송이째 이 항아리에 넣고 땅에 묻는단다. 수도원이나 교회마다 와인을 담그는 전통이 있고, 와인은 신이 준 음료라고 여기기 때문에 많이 마신다고 한다. 조지아는 손님이 오면 고기와 빵과 술을 내어 환대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양고기나 닭고기를 굽고 한 상 가득 차려 내는데, 이때도 반드시 와인이 나온다고. 와인을 마실 때는 축복의 건배사를 한다. 술이 센 사람은 와인 찌꺼기를 증류하여 만든 짜짜라는 독주를 마시기도. 우리 소주처럼 투명한데 도수가 소주의 두 배인 50도를 넘는다고 한다. 수도 트빌리시 외곽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아르메니아 국경으로 향했다. 스탬프 하나 찍어주고 질문도 없이 바로 통과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여행에까지 동행할 조지아 버스 운전기사가 무슨 서류를 안 갖고 와서 그것 때문에 장시간 지체했는데, 국경 초소에 화장실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자연환경은 좋은데, 관광 인프라가 부족한 듯하다.
노아 방주가 다다른 땅,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로 넘어오니, 또 현지 가이드가 바뀐다. 한국에 유학하여 우리 말이 유창한 30대 여성이다. 자기 외모 중에 아제르바이잔이나 조지아인과도 구별되는 뭔가를 느끼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그러고 보니 별나게 우뚝한 코가 눈에 띈다. 두 눈 사이에서 출발한 산맥이 일차 융기했다가 웅장하게 내려오는데, 유난히 크고 이지적으로 보인다. 이곳 여성들은 이런 코를 싫어하여 가끔 낮추는 성형수술도 한다고. 아르메니아는 노아의 방주가 정착한 성서 속의 나라다. 기원전 2세기에 이미 통일 국가를 만들고, 301년에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나라지만, 역사상 이름깨나 있었던 제국치고 이 나라를 짓밟지 않은 제국이 없었다고 한다. 20세기 초에는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100만 이상의 인종청소를 당한 비운의 민족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고유의 문자와 종교, 풍습을 잊지 않았고, 유대인 뺨치는 명석한 두뇌로 세계에 퍼져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니 대견하다. 조지아 접경에서 고산 협곡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개양귀비꽃이 산야에 붉게 피어있는 계곡마을에서 점심을 먹은 후, 아그파트 수도원을 찾았다. 9세기에 비잔틴과 아르메니아 고유 양식을 버무려서 지은 독특한 건축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곳은 신학뿐 아니라 이 나라의 언어, 문학, 예술, 의학이 연구되고 전승되는, 일종의 종합대학교였다고 한다. 데베드 협곡으로 향하는, 탁 트인 전망이 압권이다.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붙은 벽에 기대어 도톰하게 흙을 쌓아 올린 방은 일종의 서고였단다. 양피지에 기록된 아르메니아의 기록물을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고, 습도와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 흙으로 덮은 거라고. 돌에다 십자가를 새긴 '하츠가르'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데, 아르메니아 전역에 5만 개나 된다고 한다. 얼핏 보면 돌비석처럼 생겼는데, 문양이 비슷하지만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수도원 앞에 쪼르륵 늘어선 디딤돌을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데, 실은 수도사들의 무덤. 우리로 치면 봉분을 밟고 다니는 건데, 오히려 밟으면서 기억하라고 그렇게 만든 거란다. 수도인 예레반 근교에서 하룻밤을 자고, 곧바로 아라라트산부터 찾았다. 아라라트산은 해발 5,137m나 되어 그런지 예레반 일대 어디서나 만년설 덮인 봉우리가 보이는데,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포도나무와 밀이 심어진 광대한 평원을 지나 1시간 정도 달리니, 비로소 거인의 웅자가 드러난다. 의외로 부끄럼을 많이 타서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는데, 운 좋게도 오늘은 얼굴을 내밀어 환히 웃고 있다. 대홍수 끝에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트산에 닿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어떤 흔적이 남아있느냐고 물어보니, 그건 아니란다. 성서상으로는 기원전 24세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저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지만, 스스로 노아의 후손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아라라트산은 그들의 영혼과 삶, 그리고 정체성이 담긴 성산이다. 이들이 아라라트산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은 우리가 백두산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한 듯하다. 유대인에게 통곡의 벽이 있다면, 아르메니아인에게는 아라라트산이 있다. 현지 가이드도, 한국에서 공부할 때 꿈에서도 보이는 것이 이 산이었다고. 그런데 한때 터키 동부까지 차지했던 아르메니아의 영토가 점점 쪼그라들다가 20세기 초 레닌이 터키와 조약을 맺으면서 아라라트산을 선물로 넘겨주어 지금 이 산 자체는 터키 영토라고 한다. 그래서 정상으로 올라갈 수는 없고, 산 아래서 바라볼 수밖에 없단다. 산 아래는 공동경비구역이 설치되어 터키군과 러시아군이 지키고 있다. 아라라트산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코르비랍 수도원 언덕. 이곳에 올라 이번 코카서스 여행의 백미인 아라라트산을 실컷 가슴에 담았다. 코르비랍은 '깊은 지하감옥'이란 뜻인데, 성 그레고리가 13년간 갇혀있었던 곳이다. 그는 이적을 행하여 왕비의 병을 치료하고 왕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하게 만든 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첫 수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 수도원 언덕 정상에는 깃발 하나가 펄럭이고 있는데, 이곳이 예수의 12사도 중 성 바로톨로메오와 성 타데오가 만난 지점이라 한다. 둘은 각자 따로 이스라엘에서 출발했다가 이곳에서 만나 선교활동을 했다고. 성 바로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에서 산 채 껍질이 벗겨져 순교했다는 전승이 있는데, 로마 교황청의 공식 문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서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예레반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아자트 계곡에 들렀다. 가르니 신전 아래 협곡인데, 초입부터 예사롭지 않은 주상절리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한탄강과 무등산에서 보았던 주상절리는 어린애 수준이다. 연필 같은 6각 기둥들이 하늘에서 쏟아질 듯 매달려 있다. 다시 보면, 거대한 꿀벌 집이 걸려있는 것 같기도 하고,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같기도 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돌들의 합창과 웅장한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흘러내리다가 물과 만나 급격히 식으면서 생긴 결정체라는데, 아마 이 일대가 예전에는 완전히 물속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반사막 같은 고산지대를 지나 게르하드 동굴사원에 도착했다. 원래는 이교도들이 만든 신전이었는데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교회로 바꾸었다가 이슬람이 지배할 때는 모스크가 되기도 했단다. 신앙이 무엇인데, 장물아비 짓도 서슴지 않는 것인지. 내부 천장이 웅장한데, 돌을 쌓아서 만든 것이 아니고 통바위를 깎아 아치도 만들고 기둥도 만들었다. 동굴 안팎에는 신전 증축 때 기부한 가문의 문장이 큼지막히 새겨져 있다. 이곳은 암벽을 뚫어 만든 기도방이 특히 유명한데, 소박하지만 분위기가 자못 경건하다. 간절하게 기도 중인 신자도 보인다. 예수를 처형할 때 찌른 창을 보관하다가 에치미아진 성당으로 옮겼다고도 한다. 다음은 게르하드 사원에서 멀지 않은 가르니 신전에 들렀다. 얼핏 보기엔 그리스와 로마 신전을 연상시키는 건물이어서 조금 생뚱맞았다. 도대체 이 외진 곳에 왜 이런 건물이 있을까? 이 신전은 기원전 1세기에 로마 네로 황제의 후원을 받아 건립했다 하며,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에서 숭배되던 태양신 미트라를 모셨다고 한다. 원래 미트라가 모셔져 있었을 내부는 지금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휑뎅그렁했다. 이곳은 신전 겸 요새가 있었던 곳으로, 고구려 환도산성과 같은 역할을 했었던 듯하다. 전시에는 왕족과 군사들이 몽땅 이곳에 들어와서 농성하던 곳. 이 요새 안에는 로마의 목욕탕과 똑같은 유적이 남아있고, 주변에 제법 큰 규모의 왕실 건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복원을 엉망으로 하여 유네스코 유산에는 아직 등재되지 못했단다. 예레반으로 돌아와 다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시내 관광을 시작했다. 예레반은 "보았다!"라는 뜻으로, 노아가 오랜 항해 끝에 땅을 발견하고 외친 말이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노아는 이후 예레반으로 이동해 살았으므로 당연히 아르메니아인은 노아의 후손이며, 심지어는 태초의 에덴동산이 이 지역이라고 믿는 이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6~7천 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았고, 기원전 9세기부터 국가 형태를 갖추어 독일과 프랑스보다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자부심이 있다는 것이다. 아르메니아 300만 인구 중 100만이 이 도시에 살아 교통 체증이 심하지만, 시가지랑 도로가 잘 정비되고 깨끗한 편이었다. 예레반의 랜드마크인 공화국 광장과 춤추는 분수, 캐스케이드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자 인파로 붐비는 명소. 해가 떨어진 후, 공화국 광장의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과 춤추는 분수는 아주 낭만적이다. 경제가 녹녹지 않지만, 해외 이주자들의 송금이 이런 분위기에 일조한다고 한다. 캐스케이드는 아르메니아의 소련연방 가입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성한 일종의 문화공간이자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 물이 흐르지는 않지만, 계단식 폭포 형상을 하고 있다. 러시아인 건축가 타마지안이 설계했고, 공사자금이 부족해 중단되어 있던 것을 해외 교포들 성금으로 완공되었다고. 입구에 타마지안의 석상이 서 있는데, 도면을 펼쳐놓고 고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높다란 언덕 전체를 5개의 층으로 나누어 층마다 독특한 조형물과 분수, 정원으로 장식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뛰어난 예술 감각과 열정이 집약된 모습이다. 여기서도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 구름 위에 수호신처럼 아라라트산이 떠서 지켜보고 있다. 하룻밤을 더 자고 나서, 예레반에서 멀지 않은 에치미아진으로 달렸다. 아르메니아의 고대 수도로 303년에 세계 최초의 기독교회가 세워졌던 곳. 성 그레고리가 왕에게 세례를 준 성지이며,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정교와도 계보가 다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대주교가 머무는 곳이다. 유럽의 교회 건축과 예술의 발달에 미친 영향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음은 물론이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의 정문 아치 위에는 조그맣게 사람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16세기에 새겨넣은 페르시아 왕인데, 페르시아 침략으로 성당이 파괴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꾀를 낸 것이란다. 대성당 보물실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로마 병사가 찔렀다는 창과 노아의 방주 조각을 바탕으로 만든 십자가가 보관되어 있다는데, 수리 중이라 보지 못했다. 이곳 성당은 너무 화려하고 장엄하여, 차라리 소박하고 텅 빈 공간에 경건함이 가득했던 작은 수도원들이 그리워진다. 다음은, 에치미아진 대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벌판 한가운데, 기둥만 앙상한 즈바노츠 성당으로 갔다. 7세기에 성 그레고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성당으로, 눈 덮인 아라라트산이 벽화처럼 돌기둥 사이에 걸려있다. 10세기에 지진으로 무너져 육중한 돌기둥과 아치 일부만 남아있고, 돌무더기 잔해가 사방에 널렸는데도 폐허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오히려 신선하다. 장중하면서도 개방된 공간이 주는 시원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너무 좋다. 즈바노츠는 '천상의 천사들'이란 뜻이라는데, 이름만큼 아름답고 독특하다. 원래 아치형 기둥을 세운 후 둥근 모양으로 쌓아 올린 3층 건물이었다는데, 기둥 양식이 그리스-로마, 아랍의 영향을 두루 받은 아르메니아풍이다. 대주교와 성직자들 주거지, 대관식을 하던 방, 목욕탕, 와이너리까지 갖춘 것으로 보아, 한때는 중요한 곳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예레반 주변 관광을 마치고 다시 조지아 국경 쪽으로 올라가다가, 이 나라의 최대 휴양지라는 세반 호수에 도착했다. 넓이가 서울의 7배나 되는 청정호수다. 내륙국인 아르메니아는 이 호수를 바다라고 부르며, 국민 휴양지로 애용한다고. 중국 사천성 구채구 쪽에 가니 웬만한 호수를 모두 바다라고 부르던데, 바다를 구경하지 못하는 내륙지역에서는 넓은 물이면 바다라고 하나 보다. 호숫가에는 원래 섬이었다가 양수발전소 때문에 수위가 내려가서 육지와 연결된, 고색창연한 세바나반크 수도원이 있다. 오늘은 날씨가 유난히 화창하여 수도원 옆 언덕에서 조망하는 그림 같은 풍경이 심장을 멎게 한다. 반짝이는 윤슬 위로 갈매기 떼 낮게 나는 옥빛 호수와 뜨거운 햇살을 알맞게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 낡은 수도원 옆에 야생화가 만발한 경치가 영락없는 천국이다. 살아 천국이 여기 있거늘, 무엇 하러 죽어 천국을 찾을까 싶다. 아르메니아는 해외에서 유랑하는 900만을 빼면, 300만 인구에 경상도 크기만 한 작은 나라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지만 강대국의 무수한 외침을 당해 응어리진 한이 우리 한민족에 못지않은 듯하다. 역경 속에서도 도전적이며 똑똑하여 컬러TV, MRI, ATM 같은 문명의 이기를 발명하였다고 한다. 이 놀라운 민족에 안식이 찾아들기를 기원한다.
장엄한 대자연의 비경, 조지아 남 코카서스를 떠나 다시 조지아 국경을 넘었다. 아르메니아와 함께 와인이 맛있는 나라, 발 닿는 곳마다 유서 깊은 기독교 유적이 가득한 나라다. 기독교국 아니랄까 펄럭이는 국기에도 십자가가 한가득하고, 심지어는 지천으로 핀 야생 개양귀비꽃 속에도 검은 십자가 문양이 또렷하다. 북부는 알프스 뺨치는 산악지대지만 남부는 비옥한 대평원이 펼쳐져, 수도 트빌리시로 가는 동안 수많은 소 떼와 포도밭을 볼 수 있었다. 트빌리시에 입성하자 쿠라강변의 절벽 위에 우뚝 선 교회와 동상이 보인다. 교회는 5세기에 지어진 메테키 성모교회, 동상은 수도를 므츠케타에서 이곳으로 옮긴 조지아 왕 조르가살리라고 한다. 동상 옆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니, 우아하고 멋있는 현대식 건물과 오래된 요새와 교회가 즐비하다. 이 도시에는 수많은 온천이 있는데, 트빌리시라는 이름 자체가 '따뜻한 곳'이란다. 조르가살리 왕이 사냥 중 쏘아 맞힌 꿩이 온천에 떨어져 백숙이 된 것을 매가 물어왔다고. 다음 날, 시내 관광에 나섰다. 먼저 케이블카를 타고 나리칼라 요새에 올랐다. 4세기 사산조 페르시아가 처음 짓고 몽골이 중수했다는 고대 성채로, 낡은 외투를 걸치고도 용자를 뽐낸다. 13세기 초 호라즘을 병탄했던 칭기즈칸은 제베와 수부타이에게 2만 군사를 주어 이 지역을 정찰하도록 했다. 당시 코카서스 최강의 군대를 자랑하던 조지아는 4만의 조지아 기사단과 3만의 튀르크 기병을 동원, 쿠라강 인근 평원에서 몽골군과 격돌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100여 년간 코카서스 초원지대는 몽골군이 말에게 풀을 뜯기며 재충전하던 지역이었다. 성채에서 내려다보면, 고대와 현대의 두 얼굴이 공존하는 수도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 나라 전체 인구 350만 중 150만이 이 도시에 몰려 산다고 한다. 도시는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화장하지 않은 여인의 민낯을 보는 듯한 순수함도 느껴진다. 성채 한쪽에는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조지아의 어머니상'이 서 있다.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데, 적에게는 칼을 친구에게는 포도주를 준다는 뜻이라고. 다음은, 지붕을 황금으로 장식한 성 삼위 사메바 교회를 찾았다. 러시아 정교회에 필적할 교회를 갖자는 국민의 여망에 따라 성금을 모아 세웠다고 한다. 이 나라의 교회는 대부분 고색창연한데, 이 교회는 세운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건물과 종탑, 십자가, 벽화, 카펫 모두 삐까번쩍하고 규모도 엄청났다. 이곳에도 성녀 니노의 머리카락으로 묶은 포도나무 십자가 형상이 있어서, 이 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 수 있다. 이어서, 쿠라강변의 대표적인 조지아 정교회 성당이라는 시오니 성당을 둘러보았다. 6세기경에 건립된 후 조지아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는데, 외세가 침략할 때마다 파괴와 재건을 거듭했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4세기 초 성녀 니노의 꿈속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조지아에 가서 기독교를 전파하라"는 계시를 받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묶은 포도나무 십자가를 가지고 카파도키아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성당 안에는 니노의 포도나무 십자가가 보존되어 있다. 이 성당 뒤편에는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카페거리와 스탈린이 수학하다 사상 문제로 퇴학당했다는 신학교가 있다. 카페거리 한복판에는 독특한 조지아의 축배 문화인 타마다를 처음 제안한 사람의 동상이 있다. 타마다는 술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돌아가며 덕담과 사회의 안녕을 기원하는 말이라고 한다. 잠시 자유시간을 주어 자유광장(구 레닌광장) 주변을 걸어 다녔는데, 곳곳에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국기를 나란히 걸어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트빌리시를 떠나 코카서스산맥을 향해 북상했다. 대평원은 어디로 가고 길이 점점 험하고 가팔라졌다. 버스가 높은 산 중턱을 곡예하듯 타넘는다. 한참 버스가 멈춰서 움직이지 않길래 뭔가 싶어 내다보니, 여름이 가까워 산 위로 방목을 떠나는 양 떼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멀리 거대한 진발리 호수가 보이나 했더니, 언덕 위에 우뚝 선 낡은 요새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나누리 성채란다. 13세기에 아라그비 백작 가문이 지은 성인데, 교회와 수도원이 함께 들어서 있다. 18세기에는 샨스세 공작 가문이 쳐들어와 이곳을 차지했으나, 몇 년 후 농민반란으로 쫓겨나고, 다시 아라그비 가문과 연관이 있는 세력에게 넘어갔다가 그마저 농민반란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숙적관계였던 두 가문 모두에게 비참한 최후를 안긴 셈이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성채 사이로 노랑나비 한 마리가 무심히 날아간다.
피곤하여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장대한 코카서스산맥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용이 또아리를 튼 듯한 산길을 버스가 힘겹게 올라간다. 창밖을 내다보면 천 길 협곡이라 오금이 저린다. 어느 전망대에 잠시 내려주어 나가보니, 꼭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마음이 절로 경건해진다. 그런데 갑자기 살벌한 구름 폭풍이 몰아쳐서 버스에 타고 말았다. 이 산길 여기저기 사고로 숨진 이들의 묘비가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걱정된다.
그런데 고산지대는 날씨 변덕이 심한지, 금세 구름 폭풍이 잦아들고 설산 봉우리에 해가 쨍쨍하다. 흰 구름 그림자가 쉬어가듯 내려앉고, 외로운 코카서스가 우릴 향해 환호한다. 이 산맥에는 4,000m 넘는 산이 즐비하고, 5,000m 넘는 산도 여러 개란다. 높은 산이 하도 많아 이름 없는 산도 많고, 3,000m 아래는 그냥 언덕이라 부른다고. 눈 돌리면 산이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등산이란 걸 모르고 서른만 넘어서면 운동 자체를 안 한다는데, 그 무슨 조화를 부려 장수한다는 건지.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해발 2,000m 구다우리 마을에서 하룻밤 숙박했다. 5월인데도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곳이다. 다음 날, 흰 눈 덮인 산맥을 넘어 조지아 최북단 스테판츠민다 마을까지 왔다. 웅대한 설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풍경이 이채롭다. 트레킹을 즐기려는 외국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러시아행 트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다. 산 너머 러시아로 들어가려는 아르메니아 화물트럭이 많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4륜구동차로 갈아타고 해발 2,200m 산 중턱에 세워진 게르게티 교회에 올랐다. 14세기에 세워진 이 교회는 전쟁이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이 나라의 보물을 대피시키던 장소였다고. 고산지대라 나무도 별로 없는 황량한 땅이지만, 왠지 기도발이 있을 듯한 곳이다. 교회 언덕에 서면, 만년설 덮인 카즈베기산과 코카서스산맥의 장엄한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숨이 멎을 듯 웅장한 경관이 아라라트산과 함께 가히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신앙인이 아니라도 오래된 수도원과 어우러진 풍경에 경외감을 느끼고, 자연 앞에 겸손한 순례자가 된다. 산 아랫마을에서 국민시인이 나왔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카즈베기산이란다. 5,047m 높이의 카즈베기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프로메테우스가 이 산의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고 있다는 그리스 신화의 무대로, 조지아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카즈베기도 아라라트만큼이나 부끄럼을 타는지, 흰 구름 면사포를 둘러쓰고 수줍어한다. 코카서스산맥 줄기를 돌아 나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간간이 목초지와 민가가 보인다. 산자락마다 가파른 언덕 위의 완사면에 제법 넓은 방목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가슴팍까지 쌓인다고. 살기 힘들어 다들 도시로 떠나고 연로한 사람들만 남아 목축을 하며 산다고 한다. 빈집이 늘어나는 우리 시골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쿠라강과 아라그비강이 합류하는 므츠케타까지 왔다. 트빌리시에서 북서쪽으로 16km 떨어진 곳. 한강의 두물머리 같은 풍경이다. 5세기에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길 때까지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조지아의 종교적 성지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5,000년 전 청동기 시대에 이미 마을이 생겨났다고 하며, 노아의 후손 므츠케토스가 자리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단다. 아라그비강을 건너 언덕 정상에 보이는 즈바리 수도원으로 향한다. 즈바리는 ‘십자가상의 성당’이라는 뜻으로 조지아 최고의 성소라고 한다. 성녀 니노가 므츠케타에서 가장 높은 이 언덕에서 기도한 뒤 십자가를 세웠고, 그 뒤 6세기에 그 자리에 수도원이 들어섰다고. 언덕으로 올라오자 꽤 넓은 초원이 펼쳐지고 벼랑 끝에 수도원이 서 있다. 첨탑 끝에 걸린 저녁노을이 아름답다. 니노는 3세기 말 카파도키아의 공주로 태어났으나 전쟁으로 나라와 왕실이 피폐해지자 포도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십자가를 들고 고국을 떠나 이 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언덕 아래 옛 수도 므츠케타에는 조지아 최초의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이 있다. 이곳은 조지아 정교회 대주교가 거주하는 곳이며, 334년 조지아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처음 세운 교회라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11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규모가 상당히 크고 석조와 벽돌로 된 방벽과 포좌도 설치되어, 이 나라의 다른 교회들처럼 유사시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된 것 같다. 이곳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당시 입고 있던 옷을 보관하고 있다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다. 므츠케타 출신 엘리아가 로마 군인에게서 산 예수의 옷을 가지고 귀국하였고, 여동생 시도니아가 그 옷을 만지다 죽었으나 예수의 옷을 놓지 않아서 이곳에 함께 매장했다고. 그 자리에 돋아난 삼나무를 베어 초기 교회의 기둥을 세웠다는 전승이 있다고 한다. 조지아의 허리를 관통하며 흑해로 버스를 달린다. 밀밭과 과수원, 양 떼와 소 떼가 풀을 뜯는 광대한 초원이 펼쳐지길래 물어보니, 이곳이 스탈린의 고향 고리란다. 독립 후에 스탈린의 동상은 제거되었지만, 아직 그의 고향에는 생가와 박물관이 남아있다고. 그는 이곳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퇴학당했고, 뒤에 최악의 독재자로 변신했다. 이처럼 넓고 기름진 땅에서 독재자가 웬 말인지? 일부 노년층 중에 구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지만, 아르메니아와 마찬가지로 조지아도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란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인 항구도시 바투미에 도착했다. 황금양털을 구하러 원정대를 파견했다는 그리스 신화의 콜키스 왕국이 있었던 지역이다. 로마제국 지배를 받던 시절의 요새 한 곳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터키 리제로 넘어와서 귀국 비행기를 탔다. 흑해의 넘실대는 검은 파도 너머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우크라이나를 생각하니, 가볍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코카서스 지역은 정세가 불안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걱정했던 것만큼 위험한 곳은 아니었다. 모두 평화를 사랑하는 평범한 이웃들이었고, 여행 내내 형형색색 산야를 수놓은 야생화 군락을 보며 행복했다. 천혜의 복 받은 땅이지만, 그 땅을 탐낸 강대국들에 치이면서 힘든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 진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이 지역에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여행을 떠나기 전 휘감고 조여오던 갖은 상념은 이국의 태양 아래 씻은 듯 사라진 지 오래다. 역마살 떠도는 것도 팔자인 듯하다.
유익한 정보 고맙습니다 아주 많이 도움이 됐어요
색 다른 여행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
조지아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지도를 보면, 아제르바이잔에서 옆구리에 붙은 아르메니아를 먼저 둘러보고 조지아로 북상하는 게 순서인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해묵은 분쟁 때문에 여행 코스가 꼬였다. 아르메니아로 바로 들어가질 못하고 조지아 남부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들어가 관광하고, 다시 조지아로 와서 남은 지역을 마저 보아야만 한다.
분쟁의 불씨는 구소련 시절, 아르메니아인이 대다수인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 준 게 원인이라 한다. 소련 붕괴 후 각자 떨어져 독립하다 보니, 옛 영토를 찾는 과정에서 다툼이 생겼다. 세 차례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처음 두 번은 아르메니아가 구소련 군인 출신이 많아서 이겼고, 마지막 2020년에 일어난 전쟁은 터키의 원조를 받은 아제르바이잔이 이겼다고. 아르메니아는 5,000여 군인이 죽고 나고르노-카라바흐 땅 20%를 뺏겼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 국경을 넘어가니 가이드와 버스가 모두 현지인으로 바뀌었다. 조지아는 1년 기한의 관광객은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어 입국 절차는 간편하지만 짐을 끌고 한참을 걸어서 통과해야 하는 점이 좀 아쉽다. 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려 한 손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턱이 있는 길을 따라 가방을 끌려니 꽤 고역이었다.
조지아 입경 후 바로 점심을 먹었는데, 곁들여 나온 하우스 와인은 5,000년의 포도 재배 역사를 가진 나라답게 아주 훌륭했다. 나처럼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좋아할 만큼, 독하지 않고 달콤해서 맛있었다. 그 식당은 자체 와이너리를 가지고 있어 와인 제조시설을 견학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어서, 국경에서 가까운 카자베지 요새 마을로 향했다. 꼭대기에 성채가 보이는 언덕을 굽이굽이 오르니, 산 아래 드넓은 평원 너머 만년설 덮인 코카서스산맥이 아스라이 떠 있다. 알프스처럼 드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풍경이 인상적이다. 이곳은 다게스탄족의 약탈에 대비하여 만든 일종의 산성이다.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벽과 후대에 지은 집들이 어우러지고, 교회 첨탑과 빨간 지붕 사이로 산 아래 녹색의 들판이 그림엽서처럼 펼쳐져 있다.
요새 마을 중심에는 관청과 문화시설도 있고, 24시간 요청만 있으면 언제든지 결혼식을 올려준다는 웨딩홀도 있다. 극장을 지나쳐 올라가면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20만 조지아 군인들을 추모하는 벽이 나오고, 이 마을 출신의 유명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1862-1918)의 두상도 보인다. 그는 러시아 민요에다 가사를 붙인 노래 '백만 송이 장미' 사연의 주인공이라 한다. 이 요새 마을 극장에서 공연하던 프랑스 여배우에게 반해 그림과 집까지 팔아 장미를 선물한 끝에 몇 달간 동거하였으나, 여자는 결국 돈 많은 남자를 따라 떠나버렸다고.
다음은 시그나기 지역의 보드베 교회를 찾았다. 이곳에는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가 잠들어 있다. 포도나무 가지를 머리카락으로 엮어 만든 십자가를 들고 므츠케타를 시작으로 이 나라 곳곳에 기독교를 전하다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사람들이 그녀의 관을 므츠케타로 옮기려 하였으나 아무도 관을 들 수가 없어, 이를 하나님의 계시라 여겨 이곳에 묻고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어서, 12세기에 수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학교였다는 이칼토 수도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에는 와인을 담그던 항아리를 대강 옆으로 눕혀 놓았다. 붉고 배가 불룩한 초벌구이 항아린데, 물고기가 숨을 쉬듯 주둥이를 동그랗게 벌리고들 있다. 와인을 담글 때는 포도를 송이째 이 항아리에 넣고 땅에 묻는단다. 수도원이나 교회마다 와인을 담그는 전통이 있고, 와인은 신이 준 음료라고 여기기 때문에 많이 마신다고 한다.
조지아는 손님이 오면 고기와 빵과 술을 내어 환대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양고기나 닭고기를 굽고 한 상 가득 차려 내는데, 이때도 반드시 와인이 나온다고. 와인을 마실 때는 축복의 건배사를 한다. 술이 센 사람은 와인 찌꺼기를 증류하여 만든 짜짜라는 독주를 마시기도. 우리 소주처럼 투명한데 도수가 소주의 두 배인 50도를 넘는다고 한다.
수도 트빌리시 외곽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아르메니아 국경으로 향했다. 스탬프 하나 찍어주고 질문도 없이 바로 통과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여행에까지 동행할 조지아 버스 운전기사가 무슨 서류를 안 갖고 와서 그것 때문에 장시간 지체했는데, 국경 초소에 화장실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자연환경은 좋은데, 관광 인프라가 부족한 듯하다.
노아 방주가 다다른 땅,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로 넘어오니, 또 현지 가이드가 바뀐다. 한국에 유학하여 우리 말이 유창한 30대 여성이다. 자기 외모 중에 아제르바이잔이나 조지아인과도 구별되는 뭔가를 느끼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그러고 보니 별나게 우뚝한 코가 눈에 띈다. 두 눈 사이에서 출발한 산맥이 일차 융기했다가 웅장하게 내려오는데, 유난히 크고 이지적으로 보인다. 이곳 여성들은 이런 코를 싫어하여 가끔 낮추는 성형수술도 한다고.
아르메니아는 노아의 방주가 정착한 성서 속의 나라다. 기원전 2세기에 이미 통일 국가를 만들고, 301년에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나라지만, 역사상 이름깨나 있었던 제국치고 이 나라를 짓밟지 않은 제국이 없었다고 한다. 20세기 초에는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100만 이상의 인종청소를 당한 비운의 민족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고유의 문자와 종교, 풍습을 잊지 않았고, 유대인 뺨치는 명석한 두뇌로 세계에 퍼져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니 대견하다.
조지아 접경에서 고산 협곡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개양귀비꽃이 산야에 붉게 피어있는 계곡마을에서 점심을 먹은 후, 아그파트 수도원을 찾았다. 9세기에 비잔틴과 아르메니아 고유 양식을 버무려서 지은 독특한 건축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곳은 신학뿐 아니라 이 나라의 언어, 문학, 예술, 의학이 연구되고 전승되는, 일종의 종합대학교였다고 한다. 데베드 협곡으로 향하는, 탁 트인 전망이 압권이다.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붙은 벽에 기대어 도톰하게 흙을 쌓아 올린 방은 일종의 서고였단다. 양피지에 기록된 아르메니아의 기록물을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고, 습도와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 흙으로 덮은 거라고. 돌에다 십자가를 새긴 '하츠가르'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데, 아르메니아 전역에 5만 개나 된다고 한다. 얼핏 보면 돌비석처럼 생겼는데, 문양이 비슷하지만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수도원 앞에 쪼르륵 늘어선 디딤돌을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데, 실은 수도사들의 무덤. 우리로 치면 봉분을 밟고 다니는 건데, 오히려 밟으면서 기억하라고 그렇게 만든 거란다.
수도인 예레반 근교에서 하룻밤을 자고, 곧바로 아라라트산부터 찾았다. 아라라트산은 해발 5,137m나 되어 그런지 예레반 일대 어디서나 만년설 덮인 봉우리가 보이는데,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포도나무와 밀이 심어진 광대한 평원을 지나 1시간 정도 달리니, 비로소 거인의 웅자가 드러난다. 의외로 부끄럼을 많이 타서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는데, 운 좋게도 오늘은 얼굴을 내밀어 환히 웃고 있다.
대홍수 끝에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트산에 닿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어떤 흔적이 남아있느냐고 물어보니, 그건 아니란다. 성서상으로는 기원전 24세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저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지만, 스스로 노아의 후손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아라라트산은 그들의 영혼과 삶, 그리고 정체성이 담긴 성산이다. 이들이 아라라트산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은 우리가 백두산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한 듯하다.
유대인에게 통곡의 벽이 있다면, 아르메니아인에게는 아라라트산이 있다. 현지 가이드도, 한국에서 공부할 때 꿈에서도 보이는 것이 이 산이었다고. 그런데 한때 터키 동부까지 차지했던 아르메니아의 영토가 점점 쪼그라들다가 20세기 초 레닌이 터키와 조약을 맺으면서 아라라트산을 선물로 넘겨주어 지금 이 산 자체는 터키 영토라고 한다. 그래서 정상으로 올라갈 수는 없고, 산 아래서 바라볼 수밖에 없단다. 산 아래는 공동경비구역이 설치되어 터키군과 러시아군이 지키고 있다.
아라라트산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코르비랍 수도원 언덕. 이곳에 올라 이번 코카서스 여행의 백미인 아라라트산을 실컷 가슴에 담았다. 코르비랍은 '깊은 지하감옥'이란 뜻인데, 성 그레고리가 13년간 갇혀있었던 곳이다. 그는 이적을 행하여 왕비의 병을 치료하고 왕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하게 만든 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첫 수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 수도원 언덕 정상에는 깃발 하나가 펄럭이고 있는데, 이곳이 예수의 12사도 중 성 바로톨로메오와 성 타데오가 만난 지점이라 한다. 둘은 각자 따로 이스라엘에서 출발했다가 이곳에서 만나 선교활동을 했다고. 성 바로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에서 산 채 껍질이 벗겨져 순교했다는 전승이 있는데, 로마 교황청의 공식 문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서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예레반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아자트 계곡에 들렀다. 가르니 신전 아래 협곡인데, 초입부터 예사롭지 않은 주상절리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한탄강과 무등산에서 보았던 주상절리는 어린애 수준이다. 연필 같은 6각 기둥들이 하늘에서 쏟아질 듯 매달려 있다. 다시 보면, 거대한 꿀벌 집이 걸려있는 것 같기도 하고,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같기도 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돌들의 합창과 웅장한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흘러내리다가 물과 만나 급격히 식으면서 생긴 결정체라는데, 아마 이 일대가 예전에는 완전히 물속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반사막 같은 고산지대를 지나 게르하드 동굴사원에 도착했다. 원래는 이교도들이 만든 신전이었는데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교회로 바꾸었다가 이슬람이 지배할 때는 모스크가 되기도 했단다. 신앙이 무엇인데, 장물아비 짓도 서슴지 않는 것인지. 내부 천장이 웅장한데, 돌을 쌓아서 만든 것이 아니고 통바위를 깎아 아치도 만들고 기둥도 만들었다. 동굴 안팎에는 신전 증축 때 기부한 가문의 문장이 큼지막히 새겨져 있다. 이곳은 암벽을 뚫어 만든 기도방이 특히 유명한데, 소박하지만 분위기가 자못 경건하다. 간절하게 기도 중인 신자도 보인다. 예수를 처형할 때 찌른 창을 보관하다가 에치미아진 성당으로 옮겼다고도 한다.
다음은 게르하드 사원에서 멀지 않은 가르니 신전에 들렀다. 얼핏 보기엔 그리스와 로마 신전을 연상시키는 건물이어서 조금 생뚱맞았다. 도대체 이 외진 곳에 왜 이런 건물이 있을까? 이 신전은 기원전 1세기에 로마 네로 황제의 후원을 받아 건립했다 하며,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에서 숭배되던 태양신 미트라를 모셨다고 한다. 원래 미트라가 모셔져 있었을 내부는 지금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휑뎅그렁했다.
이곳은 신전 겸 요새가 있었던 곳으로, 고구려 환도산성과 같은 역할을 했었던 듯하다. 전시에는 왕족과 군사들이 몽땅 이곳에 들어와서 농성하던 곳. 이 요새 안에는 로마의 목욕탕과 똑같은 유적이 남아있고, 주변에 제법 큰 규모의 왕실 건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복원을 엉망으로 하여 유네스코 유산에는 아직 등재되지 못했단다.
예레반으로 돌아와 다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시내 관광을 시작했다. 예레반은 "보았다!"라는 뜻으로, 노아가 오랜 항해 끝에 땅을 발견하고 외친 말이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노아는 이후 예레반으로 이동해 살았으므로 당연히 아르메니아인은 노아의 후손이며, 심지어는 태초의 에덴동산이 이 지역이라고 믿는 이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6~7천 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았고, 기원전 9세기부터 국가 형태를 갖추어 독일과 프랑스보다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자부심이 있다는 것이다.
아르메니아 300만 인구 중 100만이 이 도시에 살아 교통 체증이 심하지만, 시가지랑 도로가 잘 정비되고 깨끗한 편이었다. 예레반의 랜드마크인 공화국 광장과 춤추는 분수, 캐스케이드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자 인파로 붐비는 명소. 해가 떨어진 후, 공화국 광장의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과 춤추는 분수는 아주 낭만적이다. 경제가 녹녹지 않지만, 해외 이주자들의 송금이 이런 분위기에 일조한다고 한다.
캐스케이드는 아르메니아의 소련연방 가입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성한 일종의 문화공간이자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 물이 흐르지는 않지만, 계단식 폭포 형상을 하고 있다. 러시아인 건축가 타마지안이 설계했고, 공사자금이 부족해 중단되어 있던 것을 해외 교포들 성금으로 완공되었다고. 입구에 타마지안의 석상이 서 있는데, 도면을 펼쳐놓고 고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높다란 언덕 전체를 5개의 층으로 나누어 층마다 독특한 조형물과 분수, 정원으로 장식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뛰어난 예술 감각과 열정이 집약된 모습이다. 여기서도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 구름 위에 수호신처럼 아라라트산이 떠서 지켜보고 있다.
하룻밤을 더 자고 나서, 예레반에서 멀지 않은 에치미아진으로 달렸다. 아르메니아의 고대 수도로 303년에 세계 최초의 기독교회가 세워졌던 곳. 성 그레고리가 왕에게 세례를 준 성지이며,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정교와도 계보가 다른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대주교가 머무는 곳이다. 유럽의 교회 건축과 예술의 발달에 미친 영향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음은 물론이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의 정문 아치 위에는 조그맣게 사람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16세기에 새겨넣은 페르시아 왕인데, 페르시아 침략으로 성당이 파괴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꾀를 낸 것이란다. 대성당 보물실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로마 병사가 찔렀다는 창과 노아의 방주 조각을 바탕으로 만든 십자가가 보관되어 있다는데, 수리 중이라 보지 못했다. 이곳 성당은 너무 화려하고 장엄하여, 차라리 소박하고 텅 빈 공간에 경건함이 가득했던 작은 수도원들이 그리워진다.
다음은, 에치미아진 대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벌판 한가운데, 기둥만 앙상한 즈바노츠 성당으로 갔다. 7세기에 성 그레고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성당으로, 눈 덮인 아라라트산이 벽화처럼 돌기둥 사이에 걸려있다. 10세기에 지진으로 무너져 육중한 돌기둥과 아치 일부만 남아있고, 돌무더기 잔해가 사방에 널렸는데도 폐허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오히려 신선하다. 장중하면서도 개방된 공간이 주는 시원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너무 좋다.
즈바노츠는 '천상의 천사들'이란 뜻이라는데, 이름만큼 아름답고 독특하다. 원래 아치형 기둥을 세운 후 둥근 모양으로 쌓아 올린 3층 건물이었다는데, 기둥 양식이 그리스-로마, 아랍의 영향을 두루 받은 아르메니아풍이다. 대주교와 성직자들 주거지, 대관식을 하던 방, 목욕탕, 와이너리까지 갖춘 것으로 보아, 한때는 중요한 곳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예레반 주변 관광을 마치고 다시 조지아 국경 쪽으로 올라가다가, 이 나라의 최대 휴양지라는 세반 호수에 도착했다. 넓이가 서울의 7배나 되는 청정호수다. 내륙국인 아르메니아는 이 호수를 바다라고 부르며, 국민 휴양지로 애용한다고. 중국 사천성 구채구 쪽에 가니 웬만한 호수를 모두 바다라고 부르던데, 바다를 구경하지 못하는 내륙지역에서는 넓은 물이면 바다라고 하나 보다. 호숫가에는 원래 섬이었다가 양수발전소 때문에 수위가 내려가서 육지와 연결된, 고색창연한 세바나반크 수도원이 있다.
오늘은 날씨가 유난히 화창하여 수도원 옆 언덕에서 조망하는 그림 같은 풍경이 심장을 멎게 한다. 반짝이는 윤슬 위로 갈매기 떼 낮게 나는 옥빛 호수와 뜨거운 햇살을 알맞게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 낡은 수도원 옆에 야생화가 만발한 경치가 영락없는 천국이다. 살아 천국이 여기 있거늘, 무엇 하러 죽어 천국을 찾을까 싶다.
아르메니아는 해외에서 유랑하는 900만을 빼면, 300만 인구에 경상도 크기만 한 작은 나라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지만 강대국의 무수한 외침을 당해 응어리진 한이 우리 한민족에 못지않은 듯하다. 역경 속에서도 도전적이며 똑똑하여 컬러TV, MRI, ATM 같은 문명의 이기를 발명하였다고 한다. 이 놀라운 민족에 안식이 찾아들기를 기원한다.
장엄한 대자연의 비경, 조지아
남 코카서스를 떠나 다시 조지아 국경을 넘었다. 아르메니아와 함께 와인이 맛있는 나라, 발 닿는 곳마다 유서 깊은 기독교 유적이 가득한 나라다. 기독교국 아니랄까 펄럭이는 국기에도 십자가가 한가득하고, 심지어는 지천으로 핀 야생 개양귀비꽃 속에도 검은 십자가 문양이 또렷하다. 북부는 알프스 뺨치는 산악지대지만 남부는 비옥한 대평원이 펼쳐져, 수도 트빌리시로 가는 동안 수많은 소 떼와 포도밭을 볼 수 있었다.
트빌리시에 입성하자 쿠라강변의 절벽 위에 우뚝 선 교회와 동상이 보인다. 교회는 5세기에 지어진 메테키 성모교회, 동상은 수도를 므츠케타에서 이곳으로 옮긴 조지아 왕 조르가살리라고 한다. 동상 옆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니, 우아하고 멋있는 현대식 건물과 오래된 요새와 교회가 즐비하다. 이 도시에는 수많은 온천이 있는데, 트빌리시라는 이름 자체가 '따뜻한 곳'이란다. 조르가살리 왕이 사냥 중 쏘아 맞힌 꿩이 온천에 떨어져 백숙이 된 것을 매가 물어왔다고.
다음 날, 시내 관광에 나섰다. 먼저 케이블카를 타고 나리칼라 요새에 올랐다. 4세기 사산조 페르시아가 처음 짓고 몽골이 중수했다는 고대 성채로, 낡은 외투를 걸치고도 용자를 뽐낸다. 13세기 초 호라즘을 병탄했던 칭기즈칸은 제베와 수부타이에게 2만 군사를 주어 이 지역을 정찰하도록 했다. 당시 코카서스 최강의 군대를 자랑하던 조지아는 4만의 조지아 기사단과 3만의 튀르크 기병을 동원, 쿠라강 인근 평원에서 몽골군과 격돌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100여 년간 코카서스 초원지대는 몽골군이 말에게 풀을 뜯기며 재충전하던 지역이었다.
성채에서 내려다보면, 고대와 현대의 두 얼굴이 공존하는 수도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 나라 전체 인구 350만 중 150만이 이 도시에 몰려 산다고 한다. 도시는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화장하지 않은 여인의 민낯을 보는 듯한 순수함도 느껴진다. 성채 한쪽에는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조지아의 어머니상'이 서 있다.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데, 적에게는 칼을 친구에게는 포도주를 준다는 뜻이라고.
다음은, 지붕을 황금으로 장식한 성 삼위 사메바 교회를 찾았다. 러시아 정교회에 필적할 교회를 갖자는 국민의 여망에 따라 성금을 모아 세웠다고 한다. 이 나라의 교회는 대부분 고색창연한데, 이 교회는 세운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건물과 종탑, 십자가, 벽화, 카펫 모두 삐까번쩍하고 규모도 엄청났다. 이곳에도 성녀 니노의 머리카락으로 묶은 포도나무 십자가 형상이 있어서, 이 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 수 있다.
이어서, 쿠라강변의 대표적인 조지아 정교회 성당이라는 시오니 성당을 둘러보았다. 6세기경에 건립된 후 조지아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는데, 외세가 침략할 때마다 파괴와 재건을 거듭했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4세기 초 성녀 니노의 꿈속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조지아에 가서 기독교를 전파하라"는 계시를 받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묶은 포도나무 십자가를 가지고 카파도키아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성당 안에는 니노의 포도나무 십자가가 보존되어 있다.
이 성당 뒤편에는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카페거리와 스탈린이 수학하다 사상 문제로 퇴학당했다는 신학교가 있다. 카페거리 한복판에는 독특한 조지아의 축배 문화인 타마다를 처음 제안한 사람의 동상이 있다. 타마다는 술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돌아가며 덕담과 사회의 안녕을 기원하는 말이라고 한다. 잠시 자유시간을 주어 자유광장(구 레닌광장) 주변을 걸어 다녔는데, 곳곳에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국기를 나란히 걸어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트빌리시를 떠나 코카서스산맥을 향해 북상했다. 대평원은 어디로 가고 길이 점점 험하고 가팔라졌다. 버스가 높은 산 중턱을 곡예하듯 타넘는다. 한참 버스가 멈춰서 움직이지 않길래 뭔가 싶어 내다보니, 여름이 가까워 산 위로 방목을 떠나는 양 떼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멀리 거대한 진발리 호수가 보이나 했더니, 언덕 위에 우뚝 선 낡은 요새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나누리 성채란다. 13세기에 아라그비 백작 가문이 지은 성인데, 교회와 수도원이 함께 들어서 있다. 18세기에는 샨스세 공작 가문이 쳐들어와 이곳을 차지했으나, 몇 년 후 농민반란으로 쫓겨나고, 다시 아라그비 가문과 연관이 있는 세력에게 넘어갔다가 그마저 농민반란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숙적관계였던 두 가문 모두에게 비참한 최후를 안긴 셈이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성채 사이로 노랑나비 한 마리가 무심히 날아간다.
피곤하여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장대한 코카서스산맥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용이 또아리를 튼 듯한 산길을 버스가 힘겹게 올라간다. 창밖을 내다보면 천 길 협곡이라 오금이 저린다. 어느 전망대에 잠시 내려주어 나가보니, 꼭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마음이 절로 경건해진다. 그런데 갑자기 살벌한 구름 폭풍이 몰아쳐서 버스에 타고 말았다. 이 산길 여기저기 사고로 숨진 이들의 묘비가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걱정된다.
그런데 고산지대는 날씨 변덕이 심한지, 금세 구름 폭풍이 잦아들고 설산 봉우리에 해가 쨍쨍하다. 흰 구름 그림자가 쉬어가듯 내려앉고, 외로운 코카서스가 우릴 향해 환호한다. 이 산맥에는 4,000m 넘는 산이 즐비하고, 5,000m 넘는 산도 여러 개란다. 높은 산이 하도 많아 이름 없는 산도 많고, 3,000m 아래는 그냥 언덕이라 부른다고. 눈 돌리면 산이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등산이란 걸 모르고 서른만 넘어서면 운동 자체를 안 한다는데, 그 무슨 조화를 부려 장수한다는 건지.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해발 2,000m 구다우리 마을에서 하룻밤 숙박했다. 5월인데도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곳이다.
다음 날, 흰 눈 덮인 산맥을 넘어 조지아 최북단 스테판츠민다 마을까지 왔다. 웅대한 설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풍경이 이채롭다. 트레킹을 즐기려는 외국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러시아행 트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다. 산 너머 러시아로 들어가려는 아르메니아 화물트럭이 많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4륜구동차로 갈아타고 해발 2,200m 산 중턱에 세워진 게르게티 교회에 올랐다. 14세기에 세워진 이 교회는 전쟁이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이 나라의 보물을 대피시키던 장소였다고. 고산지대라 나무도 별로 없는 황량한 땅이지만, 왠지 기도발이 있을 듯한 곳이다.
교회 언덕에 서면, 만년설 덮인 카즈베기산과 코카서스산맥의 장엄한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숨이 멎을 듯 웅장한 경관이 아라라트산과 함께 가히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신앙인이 아니라도 오래된 수도원과 어우러진 풍경에 경외감을 느끼고, 자연 앞에 겸손한 순례자가 된다. 산 아랫마을에서 국민시인이 나왔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카즈베기산이란다. 5,047m 높이의 카즈베기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프로메테우스가 이 산의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고 있다는 그리스 신화의 무대로, 조지아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카즈베기도 아라라트만큼이나 부끄럼을 타는지, 흰 구름 면사포를 둘러쓰고 수줍어한다.
코카서스산맥 줄기를 돌아 나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간간이 목초지와 민가가 보인다. 산자락마다 가파른 언덕 위의 완사면에 제법 넓은 방목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가슴팍까지 쌓인다고. 살기 힘들어 다들 도시로 떠나고 연로한 사람들만 남아 목축을 하며 산다고 한다. 빈집이 늘어나는 우리 시골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쿠라강과 아라그비강이 합류하는 므츠케타까지 왔다. 트빌리시에서 북서쪽으로 16km 떨어진 곳. 한강의 두물머리 같은 풍경이다. 5세기에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길 때까지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조지아의 종교적 성지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5,000년 전 청동기 시대에 이미 마을이 생겨났다고 하며, 노아의 후손 므츠케토스가 자리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단다.
아라그비강을 건너 언덕 정상에 보이는 즈바리 수도원으로 향한다. 즈바리는 ‘십자가상의 성당’이라는 뜻으로 조지아 최고의 성소라고 한다. 성녀 니노가 므츠케타에서 가장 높은 이 언덕에서 기도한 뒤 십자가를 세웠고, 그 뒤 6세기에 그 자리에 수도원이 들어섰다고. 언덕으로 올라오자 꽤 넓은 초원이 펼쳐지고 벼랑 끝에 수도원이 서 있다. 첨탑 끝에 걸린 저녁노을이 아름답다. 니노는 3세기 말 카파도키아의 공주로 태어났으나 전쟁으로 나라와 왕실이 피폐해지자 포도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십자가를 들고 고국을 떠나 이 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언덕 아래 옛 수도 므츠케타에는 조지아 최초의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이 있다. 이곳은 조지아 정교회 대주교가 거주하는 곳이며, 334년 조지아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처음 세운 교회라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11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규모가 상당히 크고 석조와 벽돌로 된 방벽과 포좌도 설치되어, 이 나라의 다른 교회들처럼 유사시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된 것 같다. 이곳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당시 입고 있던 옷을 보관하고 있다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다. 므츠케타 출신 엘리아가 로마 군인에게서 산 예수의 옷을 가지고 귀국하였고, 여동생 시도니아가 그 옷을 만지다 죽었으나 예수의 옷을 놓지 않아서 이곳에 함께 매장했다고. 그 자리에 돋아난 삼나무를 베어 초기 교회의 기둥을 세웠다는 전승이 있다고 한다.
조지아의 허리를 관통하며 흑해로 버스를 달린다. 밀밭과 과수원, 양 떼와 소 떼가 풀을 뜯는 광대한 초원이 펼쳐지길래 물어보니, 이곳이 스탈린의 고향 고리란다. 독립 후에 스탈린의 동상은 제거되었지만, 아직 그의 고향에는 생가와 박물관이 남아있다고. 그는 이곳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퇴학당했고, 뒤에 최악의 독재자로 변신했다. 이처럼 넓고 기름진 땅에서 독재자가 웬 말인지? 일부 노년층 중에 구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지만, 아르메니아와 마찬가지로 조지아도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란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인 항구도시 바투미에 도착했다. 황금양털을 구하러 원정대를 파견했다는 그리스 신화의 콜키스 왕국이 있었던 지역이다. 로마제국 지배를 받던 시절의 요새 한 곳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터키 리제로 넘어와서 귀국 비행기를 탔다. 흑해의 넘실대는 검은 파도 너머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우크라이나를 생각하니, 가볍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코카서스 지역은 정세가 불안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걱정했던 것만큼 위험한 곳은 아니었다. 모두 평화를 사랑하는 평범한 이웃들이었고, 여행 내내 형형색색 산야를 수놓은 야생화 군락을 보며 행복했다. 천혜의 복 받은 땅이지만, 그 땅을 탐낸 강대국들에 치이면서 힘든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 진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이 지역에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여행을 떠나기 전 휘감고 조여오던 갖은 상념은 이국의 태양 아래 씻은 듯 사라진 지 오래다. 역마살 떠도는 것도 팔자인 듯하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