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인물의 스토리만 다룬 것이 아니라 사상에 대해서도 알기 쉽게 정리해 주셔서 정말 유익한 영상이라 생각됩니다. 불교전공자로서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근래에는 소승이란 단어는 쓰지 않습니다. 대승불교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폄하하려는 단어이기 때문이지요. 언급하신 설일체유부는 부파불교에 속합니다. 이 정도의 정리를 하시는 분이라면 알고서도 구독자의 이해를 더 쉽게 하고자 쓰셨을지도 모르지만 한 마디 남겨 봅니다.^^; 앞으로도 많은 영상 부탁드립니다. 화이팅
밧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은 일을 일상 생활 중 너무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나는 실상을 볼 수 없고 내가 실상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닌 허상인 것을 어떻게 해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내가 옳다는 생각도 상대가 틀리다는 생각도 세상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모두 벗어 버리고 싶습니다
무착, 세친이 마음에 집중한 것은 현실적 수행이 힘들어서 빗나간 것입니다. 물론 인생살이에 있어서, 수행에 있어서 마음상태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도 정확히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그무엇의 대단함이 있느냥 너무 집착이 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의식이란, 인식이란, 사유란, 무의식이란 그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체가 없는데 과도하게 집착하면 아니 되지요. 허상도, 실체없음도 적당히 적정선에서는 필요합니다. 마치 특별한 형태가 없는 공기와 물이지만 필요할때는 필요한 만큼 필요 하니까요. 한마디로 마음, 의식, 인식, 사유, 무의식들은 동물의 뇌구조의 생리적 기능작용입니다. 이 기능작용의 현상일 뿐입니다. 이래서 여기에 그무슨 실체가 있는것은 아니고 또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합니다. 없으면 가히 절대적으로 아니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 의식, 인식, 사유, 무의식 입니다. 이래서 이것을 과거에는 분별심이라 했습니다. 즉 정신세계가 분별하는데서 이런 마음, 의식, 인식, 사유, 등등이 나타난다고 본것입니다. 이래서 실체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실체가 없는것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이 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바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것을 가지고 대단한 가치가 있는것 같이 매달리게 되겠지요. 이 얼마나 바보스럽고 수준낮은 짓이 되겠습니까? 이래서 바로 무착, 세친 및 이하 이를 따르는 분들은 그 수준이 낮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분들의 파악분석과 논리가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맞습니다. 다만 그 수준이 낮다는 지적입니다. 다시한번 지적이지만 실체가 없는 마음, 의식, 인식, 무의식, 사유에 너무 과하게 집착하면 아니됩니다. 적절히 적당히 관심을 가지고 활용을 해야 합니다. 다시한번 얘기지만 불교에 핵심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즉 마음에 있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중요는 하지만 불교에 핵심은 아닙니다. 오직 불교에 핵심은 바로 모두 아시다시피 영원히 고통의 삶을 벗어나는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이 삶은 바로 계율 철저히 잘 지키고 두타행 열심히 잘 하며 모든 것에 분별과 차별심 없이 보살행하며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이렇습니다.
@@legible1325 님,,, 계율은 누구나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율이란 곧 법인데 법을 안지키면 곧 범법행이지요. 법법자가 갈곳은 오직 감옥과 지옥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타행,,, 현제 우리 한국에 스님들 두타행 한치도 아니합니다. 이러면 절대 아라한급에는 못이릅니다. 현재 한국에 대부분의 스님들은 지식면에서는 대부분 아라한의 경지에 다 이르렀습니다. 이유는 현대문명의 발달발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한글전용화에 따른 그어려운 중국한자 경전이 한글로 많이도 편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에 있어서는 수행자의 행이 전혀 없습니다. 모두모두 초호화궁전 절간 지어놓고 고급 승복을 입고 고급 음식을 먹으며 시자를 많이도 거느리며 일명 궁전같은 선방에 앉아 엉뚱한 짓거리나 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수행의 삶인줄 아십니까? 여기에다가 온갖 천도재니, 49재니, 영가천도재니, 등등 하며 귀신 불러내는 짓거리만 잘도하고 있습니다. 과거 석가모니부처님 시대에는 이런 짓거리한 일이 없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두타행없는 현재에 우리나라 스님들 모두 수다원에도 못이르러 있습니다. 이래서 그 유명한 성철스님도 임종시에 자신은 지옥간다 했습니다. 왜냐고요. 누구나 임종에 이르게 되면 저승사자가 대리려 옵니다. 갈준비 하라고 미리 일러주려 몇일전에 미리옵니다. 바로 이 저승사자를 보고 성철스님은 실토를 한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님들 임종이 가까와오면 오줌똥 질질싸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면 100% 지옥행입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에 스님들의 현실입니다. 이유는 바로 두타행수행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렇습니다.
@@이흥우-x8e 세존도 호화스러운 생활에 질려 6년간의 고행을 했고 고행 또한 부질없음을 알고 중도의 길을 택했지요 계율 또한 부처 생존에도 지속적으로 변경이 이루어졌어요 모든게 영원하지 않은데 계율도 영원해야합니까 고행과 계율에 대한 집착도 진리를 보는 눈을 흐리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중도 상태에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legible1325 님,,, 세존당시에는 미처 계율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제자들이 많다보니 그냥 둘수없는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계율을 정하고 세워야 함의 필요성을 깨친 것입니다. 솔직히 혼자 산중에서 수행하는데 무슨 계율의 필요성을 느꼈겠습니까? 여러 사람이 모여들고 같이 생활하다 보니 여기에는 지옥종자 사람도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로소 많은 문제가 생겨서 계율의 필요성을 느낀겁니다. 그리고 중동와 집착도 구분할줄 알아야 합니다. 중도를 잘 견지해야 할 일도 있고 무섭게 집착(집중)을 해야할 일도 있습니다. 다 똑같지 않습니다. 이걸 구분할줄 알아야 합니다. 이걸 잘 구분하여 수행삶을 잘 사는것을 불교에서는 지혜라고 합니다. 중도라고 해서 아무거나 두리뭉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이니게 일처리와 수행을 하면 참으로 지혜롭지 못하지요. 님도 아실것으로 압니다. 조계종은 선불교로서 화두참선 열심히 하지요. 여기서 이 화두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두리뭉실 하면 됩니까? 분심에 분심을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분심을 일으켜가며 화두에 집중해야 하지요. 이렇게 아니하면 절대 견성에 못이르지요. 바로 이 무시무시한 분심집중이 무서운 집착입니다. 또 삼매 얘기도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정말 이 삼매는 무시무시한 집착, 애착, 갈애 입니다. 이와같이 중도를 견지해야할 일과 무시무시한 집착을 해야할 일을 잘 구분하여 인생도 살아야 되고 수행도 잘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구분하여 나가야할 것을 잘 구분하여 인생도 살고 수행도 잘 해 나가는 것을 불교에서는 지혜라 합니다. 바로 이런 지혜의 중요성을 특별히 잘 강조한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심경 입니다. 이렇습니다.
@@이흥우-x8e 말씀 조리있게 잘 말씀하시는군요 부처의 교단에 그런 지옥종자가 들어올때가 벌써 2천년전입니다. 그말은 2천년이 지난 현대의 계율은 시대에 맞는 융통성이 있어야되는 것이고, 절대적이지 못한 세속적 규제를 지옥에 간다고 절대적인 지침으로 말씀하신다면 그건 지혜가 아니겠지요 집착과 집중을 동일시 한다면 제가 할말은 없지만 님의 언어가 집착이 집중이라면 집착도 필요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는 집착은 무엇인가에 빠져서 내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 그것이 집착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일처리를 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 둘 중 하나가 무조건 옳다는 양극단에 빠지는 것이 집착이지요
의식ㆍ마음을 오로지 허상이라고 한다면 혼침이나 무기에 빠질 수 있기에 적절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의식ㆍ마음을 오로지 실체라고 한다면 거기에 집착해 괴로움에 빠지기에 그 것 역시 적절치 않습니다. 불교의 3법인에 제행무상은 이러한 의식ㆍ마음을 일으키는 작용은 항상 그대로가 아니라 시시때때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시시각각 변하는 의식, 마음을 알아채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죠.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이유도 그렇고 지금 한국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측면이 있고..결국은 그놈의 인과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행위 도덕 윤리적 측면으로 확장되면 카르마 업론으로 연결되는데 불교는 그 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인과론의 전제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옛날 인도인들도 그걸 어렴풋이 느꼈기에 인과론 윤회론을 버리지못한 것일 거고 현대인은 그 인과론을 물리적 과학적 인과론으로 대체했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라만상이 인연생기일 뿐이라는 걸 직시하는 게 여실지견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인연생기 인과론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물리적 인과론(인연생기)와 행위의 인과론(카르마 업론)을 구분한 유식론의 설명방식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인도는 힌두교가 발흥하기 시작하는 굽따왕조 시절 이었으니까요 힌두교의 핵심은 카르마 윤회의 주체인 아트만 자아인데 이게 깨지면 윤회도 없고 그 윤회에 기반한 바르나 카스트도 설 자리를 잃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아트만 자아를 깨뜨리기 위해 봄부터 불타는 무아론을 설파했고 용수는 공이론을 세친은 유식설을 설파한 게 아닌가..? 합니다??
한없이 부족하지만 정성스런 글에 반응하여 저도 글을 남깁니다. 인과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라 인과론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관론이 있든 없든 인과론을 인정하든 부정하든 부처의 가르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는데 인관론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물을 그릇에 따르면 그릇 모양에 따라 담겨지는 모양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물이라는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고 그릇 모양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입니다.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방법은 말 밖에 없고 말은 그릇입니다. 인과론이란 그릇에 담아서 보여주면 인관론이 전부인 줄 알고 유식론이란 그릇에 담아서 보여주면 유식론이 전부인 줄 알뿐입니다. 깨달음은 보여주고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을 어떻게 해서 이루든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만의 방법이고 자신만의 성취입니다. 그것이 나와 다르다고 깨달음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그것이 나와 같다고 하여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변화이고 벗어남이고 자유로움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수행을 강조했고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쳤을 뿐입니다. 불교의 발전사는 깨달음을 담은그릇들을 보여주는 것이고 깨달음을 담고자 노력한 그릇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이유는, 불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현대적인 해석입니다. 일설에 일컫기를 "망해야 불교다" "망하는 것이 불교다" 라고 합니다. (金성철 불교학자) 성공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거죠. 크게 공감이 갑니다. 그래서 불교를 신봉하는 이는 머리조차 다 밀고, 옷조차 다 버리고, 소유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나체로 다니는 이도 있습니다.(자이나 공의파) 물론 이슬람이 쳐들어와서 불교 승려를 다 죽여서 망했지만, 불교 승려는 불상생 계율 때문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심지어 목숨조차 버립니다.(부처의 본생담) desire(탐욕과 욕망)가 횡행하는 세계에서 불교가 사라질 수 밖에 없죠. 그런데도 불교가 소멸되지 않고, 아시아 남부와 아시아 동부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현금에는 미국과 유럽으로 전파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왜 불교가 망하지 않을까? 망해야 정상인데 말이죠. 망하는 것이 불교인데 말이죠. 저는 그래서 일부 정치승들이 망치고 있는 한국 불교를 볼 때에도 그냥 정상이라고 봅니다. 그 정치승들이 주기적으로 도박을 할 때에도 정상이라고 봤지요. 그것이 불교의 민낯이기 때문입니다. (인과론 같은 무슨 거룩한 학설은 잘 모르겠습니다.) 파벌짓기와 이권과 숨겨둔 여자궁둥이 어루만지기와 돈 세기에 밤 새는 줄 모르고 바빠서, 난장판이 된 한국 불교계에서, 인과론 같은 거룩한 학설을 이해하는 sramana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추성-w6y 불교는 인과론 카르마를 전제로하고 그 인과의 사슬을 끊고 카르마의 연소를 불식시는 것을 목샤로합니다 이는 천주교 기독교가 원죄를 전제로 상정하고나서 구원을 설파는 논리와 같다고 저는 생각납니다 달리 말해 원죄가 없다면 구원을 구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인과론과 카르마가 그렇게 타이트 하지 않은 것 이라면 열반 해탈 목샤도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는 말씀을 드린 거라고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acaciaa1530 저의 글이 어려웠나요? 저의 글의 요지는 nirvana is budhism itself 입니다. 번역하면 망하는 것이 불교라는 거에요. 불교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가장 훌륭한 핵심 정수를 논술 했는데, 불교를 비난한 것으로 들으셨다니, 역시 어려웠나 봅니다. 글이 짧은 저의 탓입니다. 하긴 저도 金성철 불교학자의 저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일평생 불교 연구의 핵심 정수가 담긴 문장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크게 탄복했지요. 저도 울퉁불퉁 sramana로 살아왔는데, 그 전엔 저런 문장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답니다. 원효의 화쟁사상에서 연원한 한국 통불교의 진수를 보는 듯 해서 크게 기뻤답니다. 참고로 金성철 불교학자는 수많은 한국스님들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이론을 가르쳐주는 뛰어난 교학자 이세요. 불교계의 보물단지 金성철 불교학자를 유투브에 소개시켜 주신 中峰 조현 종교전문 기자에게 감사드립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대기설법이라고도 하지요. 현시대에 잘 맞는 설명에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유구한 불교사에서 불세출의 뛰어난 스승님들의 사상과 경전을 이렇듯 이해하기 쉽게 해주셔서 좋습니다. 앞으로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해탈에 이르겠나이다 성불합시다~
공부 많이 하셨네요.
불교 공부하시는 분들께 아주
유익한 방송입니다.
감사합니다.~~
단순히 인물의 스토리만 다룬 것이 아니라 사상에 대해서도 알기 쉽게 정리해 주셔서
정말 유익한 영상이라 생각됩니다.
불교전공자로서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근래에는 소승이란 단어는 쓰지 않습니다. 대승불교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폄하하려는 단어이기 때문이지요. 언급하신 설일체유부는 부파불교에 속합니다.
이 정도의 정리를 하시는 분이라면 알고서도 구독자의 이해를 더 쉽게 하고자 쓰셨을지도 모르지만 한 마디 남겨 봅니다.^^; 앞으로도 많은 영상 부탁드립니다. 화이팅
정말.. 이런유튜브가 200만이 아닌게 의아하다…
달라이라마존자께서 용수스님과 세친스님,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에 대해 법문해 주실 때 잘 몰라서 궁금했던 부분들을 영상으로
쉽게 이해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채널을 알게되어 영광입니다
0.75배속으로 천천히 들으며 공부하는중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잘 만드셨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와 ...내가 그토록 보고싶던. 세친보살이 나왔네요 잘보겠습니다
당대 최고 역경승
구마라즙 스님과
그의 뛰어난 4대제자 중
가장 천재인 승조스님
관련 영상도 부탁드립니다.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점점 좋아지는 영상과 목소리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공부하는데 많은 도우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불교를 학문적으로 이해 하는데 도움이 돼긴 하지만 극히 일부입니다 불교는 체험입니다 .. 스스로 체험하고 자각해야 합니다.
이론없이 수행만 해서 뭘하나
교는부처님말씀 선은 부처님마음 정혜쌍수가 되어야
정말 좋은영상 매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학인스님들 꼭 봤으면 좋겠어요
어렵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군요 나의 무지부터 인정합니다
ㄱ❤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지금뿐 ㆍ지금 여기. 분리는없다 허공이다. 감사합니다
데카르트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유가유식 - 나는 인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존재에 대한 집착에 머물러있다는 점에서 초기 불교 팔게송과 피안도품에도 미치지 못하는 열화된 사상이죠
밧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은 일을 일상 생활 중 너무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나는 실상을 볼 수 없고 내가 실상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닌 허상인 것을 어떻게 해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내가 옳다는 생각도 상대가 틀리다는 생각도 세상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모두 벗어 버리고 싶습니다
이 지구상에 인간만이 이런 심오한글을 남겨놓을 수 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라하지요 그 마음씀의 뇌를 가진 인간이 있기에 현재세상은 바뀌어 가는거라 생각이드네요~!
복잡미묘한 현세상~!!!!!
불교 위대함이란 이런것 입니다
결국 인류 규명해야할 논리들을불교는 2천년전에 모두 애기해놨죠
세친의 구사론을 옛날엔 9넌간 공부했죠
그래도 터득이 안됐죠
지금은 세상이 개화되어서 3시간이면. 됩니다
사람이 나는것이 아니고 의식이 나는도다,,,,,내가보는것이아니고 의식이 본다,,,,
팔식이 곧 팔자라는 겁니다. 인연과 업보가 쌓인 상태. 그 팔자를 바꾸고 이겨내는 것이 바로 구식 소위 아마라식이라는 불계의 생명입니다. 불교는 과거의 업으로 불행해하는 인간을 부처의 생명으로 변환시켜 극복하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것은 내의식의 반영 즉 거울이다가 맞군요 ㅋㅋ
저 미륵은 누구인가요? 궁금하네요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대세지보살 나무인로왕보살 불보살님
옴 제세제야 도미니 도제 삿다야 훔바탁 ~중생이 마군에 시달리지 않기를
무착, 세친이 마음에 집중한 것은 현실적 수행이 힘들어서 빗나간 것입니다. 물론 인생살이에 있어서, 수행에 있어서 마음상태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도 정확히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그무엇의 대단함이 있느냥 너무 집착이 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의식이란, 인식이란, 사유란, 무의식이란 그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체가 없는데 과도하게 집착하면 아니 되지요. 허상도, 실체없음도 적당히 적정선에서는 필요합니다. 마치 특별한 형태가 없는 공기와 물이지만 필요할때는 필요한 만큼 필요 하니까요. 한마디로 마음, 의식, 인식, 사유, 무의식들은 동물의 뇌구조의 생리적 기능작용입니다. 이 기능작용의 현상일 뿐입니다. 이래서 여기에 그무슨 실체가 있는것은 아니고 또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합니다. 없으면 가히 절대적으로 아니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 의식, 인식, 사유, 무의식 입니다. 이래서 이것을 과거에는 분별심이라 했습니다. 즉 정신세계가 분별하는데서 이런 마음, 의식, 인식, 사유, 등등이 나타난다고 본것입니다. 이래서 실체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실체가 없는것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이 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바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것을 가지고 대단한 가치가 있는것 같이 매달리게 되겠지요. 이 얼마나 바보스럽고 수준낮은 짓이 되겠습니까? 이래서 바로 무착, 세친 및 이하 이를 따르는 분들은 그 수준이 낮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분들의 파악분석과 논리가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맞습니다. 다만 그 수준이 낮다는 지적입니다. 다시한번 지적이지만 실체가 없는 마음, 의식, 인식, 무의식, 사유에 너무 과하게 집착하면 아니됩니다. 적절히 적당히 관심을 가지고 활용을 해야 합니다. 다시한번 얘기지만 불교에 핵심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즉 마음에 있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중요는 하지만 불교에 핵심은 아닙니다. 오직 불교에 핵심은 바로 모두 아시다시피 영원히 고통의 삶을 벗어나는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이 삶은 바로 계율 철저히 잘 지키고 두타행 열심히 잘 하며 모든 것에 분별과 차별심 없이 보살행하며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이렇습니다.
계율과 두타행에 집착하는것도 문제겠지요
@@legible1325 님,,, 계율은 누구나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율이란 곧 법인데 법을 안지키면 곧 범법행이지요. 법법자가 갈곳은 오직 감옥과 지옥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타행,,, 현제 우리 한국에 스님들 두타행 한치도 아니합니다. 이러면 절대 아라한급에는 못이릅니다. 현재 한국에 대부분의 스님들은 지식면에서는 대부분 아라한의 경지에 다 이르렀습니다. 이유는 현대문명의 발달발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한글전용화에 따른 그어려운 중국한자 경전이 한글로 많이도 편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에 있어서는 수행자의 행이 전혀 없습니다. 모두모두 초호화궁전 절간 지어놓고 고급 승복을 입고 고급 음식을 먹으며 시자를 많이도 거느리며 일명 궁전같은 선방에 앉아 엉뚱한 짓거리나 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수행의 삶인줄 아십니까? 여기에다가 온갖 천도재니, 49재니, 영가천도재니, 등등 하며 귀신 불러내는 짓거리만 잘도하고 있습니다. 과거 석가모니부처님 시대에는 이런 짓거리한 일이 없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두타행없는 현재에 우리나라 스님들 모두 수다원에도 못이르러 있습니다. 이래서 그 유명한 성철스님도 임종시에 자신은 지옥간다 했습니다. 왜냐고요. 누구나 임종에 이르게 되면 저승사자가 대리려 옵니다. 갈준비 하라고 미리 일러주려 몇일전에 미리옵니다. 바로 이 저승사자를 보고 성철스님은 실토를 한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님들 임종이 가까와오면 오줌똥 질질싸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면 100% 지옥행입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에 스님들의 현실입니다. 이유는 바로 두타행수행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렇습니다.
@@이흥우-x8e 세존도 호화스러운 생활에 질려 6년간의 고행을 했고 고행 또한 부질없음을 알고 중도의 길을 택했지요 계율 또한 부처 생존에도 지속적으로 변경이 이루어졌어요 모든게 영원하지 않은데 계율도 영원해야합니까 고행과 계율에 대한 집착도 진리를 보는 눈을 흐리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중도 상태에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legible1325 님,,, 세존당시에는 미처 계율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제자들이 많다보니 그냥 둘수없는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계율을 정하고 세워야 함의 필요성을 깨친 것입니다. 솔직히 혼자 산중에서 수행하는데 무슨 계율의 필요성을 느꼈겠습니까? 여러 사람이 모여들고 같이 생활하다 보니 여기에는 지옥종자 사람도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로소 많은 문제가 생겨서 계율의 필요성을 느낀겁니다. 그리고 중동와 집착도 구분할줄 알아야 합니다. 중도를 잘 견지해야 할 일도 있고 무섭게 집착(집중)을 해야할 일도 있습니다. 다 똑같지 않습니다. 이걸 구분할줄 알아야 합니다. 이걸 잘 구분하여 수행삶을 잘 사는것을 불교에서는 지혜라고 합니다. 중도라고 해서 아무거나 두리뭉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이니게 일처리와 수행을 하면 참으로 지혜롭지 못하지요. 님도 아실것으로 압니다. 조계종은 선불교로서 화두참선 열심히 하지요. 여기서 이 화두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두리뭉실 하면 됩니까? 분심에 분심을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분심을 일으켜가며 화두에 집중해야 하지요. 이렇게 아니하면 절대 견성에 못이르지요. 바로 이 무시무시한 분심집중이 무서운 집착입니다. 또 삼매 얘기도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정말 이 삼매는 무시무시한 집착, 애착, 갈애 입니다. 이와같이 중도를 견지해야할 일과 무시무시한 집착을 해야할 일을 잘 구분하여 인생도 살아야 되고 수행도 잘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구분하여 나가야할 것을 잘 구분하여 인생도 살고 수행도 잘 해 나가는 것을 불교에서는 지혜라 합니다. 바로 이런 지혜의 중요성을 특별히 잘 강조한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심경 입니다. 이렇습니다.
@@이흥우-x8e 말씀 조리있게 잘 말씀하시는군요 부처의 교단에 그런 지옥종자가 들어올때가 벌써 2천년전입니다. 그말은 2천년이 지난 현대의 계율은 시대에 맞는 융통성이 있어야되는 것이고, 절대적이지 못한 세속적 규제를 지옥에 간다고 절대적인 지침으로 말씀하신다면 그건 지혜가 아니겠지요
집착과 집중을 동일시 한다면 제가 할말은 없지만 님의 언어가 집착이 집중이라면 집착도 필요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는 집착은 무엇인가에 빠져서 내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 그것이 집착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일처리를 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 둘 중 하나가 무조건 옳다는 양극단에 빠지는 것이 집착이지요
계피차,생강차 맛있고 몸에도좋고,한잔하세요
세친은 학자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바라문 출신이지요...
여래 재세 시 였다면
그는 데바닷다의 추종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07:00
의식, 마음은 실체인가요?
의식ㆍ마음을 오로지 허상이라고 한다면 혼침이나 무기에 빠질 수 있기에 적절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의식ㆍ마음을 오로지 실체라고 한다면 거기에 집착해 괴로움에 빠지기에 그 것 역시 적절치 않습니다.
불교의 3법인에 제행무상은 이러한 의식ㆍ마음을 일으키는 작용은 항상 그대로가 아니라 시시때때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시시각각 변하는 의식, 마음을 알아채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죠.
@@99-zc8pt님,,, 님께서 잘 설명 하셨네요.
因緣和合物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이유도 그렇고 지금 한국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측면이 있고..결국은 그놈의 인과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행위 도덕 윤리적 측면으로 확장되면 카르마 업론으로 연결되는데 불교는 그 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인과론의 전제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옛날 인도인들도 그걸 어렴풋이 느꼈기에 인과론 윤회론을 버리지못한 것일 거고 현대인은 그 인과론을 물리적 과학적 인과론으로 대체했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라만상이 인연생기일 뿐이라는 걸 직시하는 게 여실지견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인연생기 인과론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물리적 인과론(인연생기)와 행위의 인과론(카르마 업론)을 구분한 유식론의 설명방식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인도는 힌두교가 발흥하기 시작하는 굽따왕조 시절 이었으니까요 힌두교의 핵심은 카르마 윤회의 주체인 아트만 자아인데 이게 깨지면 윤회도 없고 그 윤회에 기반한 바르나 카스트도 설 자리를 잃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아트만 자아를 깨뜨리기 위해 봄부터 불타는 무아론을 설파했고 용수는 공이론을 세친은 유식설을 설파한 게 아닌가..? 합니다??
한없이 부족하지만 정성스런 글에 반응하여 저도 글을 남깁니다.
인과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라 인과론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관론이 있든 없든 인과론을 인정하든 부정하든 부처의 가르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는데 인관론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물을 그릇에 따르면 그릇 모양에 따라 담겨지는 모양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물이라는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고 그릇 모양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입니다.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방법은 말 밖에 없고 말은 그릇입니다. 인과론이란 그릇에 담아서 보여주면 인관론이 전부인 줄 알고 유식론이란 그릇에 담아서 보여주면 유식론이 전부인 줄 알뿐입니다. 깨달음은 보여주고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을 어떻게 해서 이루든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만의 방법이고 자신만의 성취입니다. 그것이 나와 다르다고 깨달음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그것이 나와 같다고 하여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변화이고 벗어남이고 자유로움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수행을 강조했고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쳤을 뿐입니다. 불교의 발전사는 깨달음을 담은그릇들을 보여주는 것이고 깨달음을 담고자 노력한 그릇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이유는, 불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현대적인 해석입니다. 일설에 일컫기를 "망해야 불교다" "망하는 것이 불교다" 라고 합니다. (金성철 불교학자) 성공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거죠. 크게 공감이 갑니다. 그래서 불교를 신봉하는 이는 머리조차 다 밀고, 옷조차 다 버리고, 소유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나체로 다니는 이도 있습니다.(자이나 공의파) 물론 이슬람이 쳐들어와서 불교 승려를 다 죽여서 망했지만, 불교 승려는 불상생 계율 때문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심지어 목숨조차 버립니다.(부처의 본생담) desire(탐욕과 욕망)가 횡행하는 세계에서 불교가 사라질 수 밖에 없죠. 그런데도 불교가 소멸되지 않고, 아시아 남부와 아시아 동부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현금에는 미국과 유럽으로 전파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왜 불교가 망하지 않을까? 망해야 정상인데 말이죠. 망하는 것이 불교인데 말이죠. 저는 그래서 일부 정치승들이 망치고 있는 한국 불교를 볼 때에도 그냥 정상이라고 봅니다. 그 정치승들이 주기적으로 도박을 할 때에도 정상이라고 봤지요. 그것이 불교의 민낯이기 때문입니다. (인과론 같은 무슨 거룩한 학설은 잘 모르겠습니다.) 파벌짓기와 이권과 숨겨둔 여자궁둥이 어루만지기와 돈 세기에 밤 새는 줄 모르고 바빠서, 난장판이 된 한국 불교계에서, 인과론 같은 거룩한 학설을 이해하는 sramana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추성-w6y 불교는 인과론 카르마를 전제로하고 그 인과의 사슬을 끊고 카르마의 연소를 불식시는 것을 목샤로합니다 이는 천주교 기독교가 원죄를 전제로 상정하고나서 구원을 설파는 논리와 같다고 저는 생각납니다 달리 말해 원죄가 없다면 구원을 구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인과론과 카르마가 그렇게 타이트 하지 않은 것 이라면 열반 해탈 목샤도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는 말씀을 드린 거라고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shaft_jb 그래도 천주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가 정치질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생각합니다
@@acaciaa1530 저의 글이 어려웠나요? 저의 글의 요지는 nirvana is budhism itself 입니다. 번역하면 망하는 것이 불교라는 거에요. 불교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가장 훌륭한 핵심 정수를 논술 했는데, 불교를 비난한 것으로 들으셨다니, 역시 어려웠나 봅니다. 글이 짧은 저의 탓입니다. 하긴 저도 金성철 불교학자의 저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일평생 불교 연구의 핵심 정수가 담긴 문장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크게 탄복했지요. 저도 울퉁불퉁 sramana로 살아왔는데, 그 전엔 저런 문장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답니다. 원효의 화쟁사상에서 연원한 한국 통불교의 진수를 보는 듯 해서 크게 기뻤답니다. 참고로 金성철 불교학자는 수많은 한국스님들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이론을 가르쳐주는 뛰어난 교학자 이세요. 불교계의 보물단지 金성철 불교학자를 유투브에 소개시켜 주신 中峰 조현 종교전문 기자에게 감사드립니다.
바수반두(세친)
봤수반도
8:20 결국 내 의식만 남는다? 그건 힌두교의 가르침.
용수와 세친이 힌두교성자에서 불교로 전향하였다고 하는데, 간첩이었네요.
부처님은 제법무아를 가르치셨습니다.
대승의 방대한 경전보다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한마디 가르침이 백천만배 훌륭함.
ㅐㅔㅒㅣ9
인식은 다르더라도 있는것은 있다
다르다고 없다고 주장하는 찐따들도 많다
용수는 法空無我
세친은 唯識 輪廻하는 有我
輪廻의 본질은 無明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破無明이다.
法界眞我는 性本空無生이다. 輪廻假我는 妄心分別有이다.
佛은 衆生의 如來藏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조력자이다.
아주 좋은방송 입니다
삼장법사
부처님은 색수상행식만 가르치셨을 뿐..말나와 아뢰아는 가르치신 바 없는데..대승은 시작부터 석가모니부처님의 법과는 멀었구나..대승은 부처님의 법이 아니구나..
열승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깨달아야죠 ㅉㅉ
말한 것만 보면 그 수준을 그러니 소승이라한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책이나 유틉 강의 보시면,
이미 초기경전에 아뢰야식에 대해 붓다께서 여러번
언급하신 부분이 나옵니다. 이 아뢰야식 때문에
중생들이 해탈을 못한다고 말이죠.
초기불교, 남방불교 하신다면 니까야를 제대로
읽어보셔야 합니다.
@@addshjkgyu 초기경전 어디에 아뢰야식이 나옵니까?
성철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지 마시고
근거를 대면서 말씀하셔야죠.
헛튼소리다 모두
그래서 요즘 스님들이 화투장에 꽃과 돈냄새에 세상과 함께 하시나보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