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영 목사가 서재에서 전하는 말씀 100 기독교적인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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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เผยแพร่เมื่อ 8 ก.พ. 2025
- 100. 기독교 적인 겸손
안식일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떤 영향력 있는 바리새인 가정 식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예수께서 초청 되였던 이 식사가 아침식사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태인들도 한국 사람들처럼, 아침식사에 큰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태인들이 안식일에 먹는 식사는, 아주 풍성했다고 합니다. 물론 안식일의 음식은 모두 전날 준비된 것이어서, 더운 음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요리는 물론, 불을 피우는 것조차도,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지도자나 랍비를, 가정으로 초청하여 식사도 대접하고 말씀을 듣는 것은, 어린이들의 교육을 귀하게 생각하던 유태인들에게는, 더 없이 중요한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어떤 가정에서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하였다고 하는 것은, 비록 그 초청한 집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지도자격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집이라 하더라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눅 14 장을 보면, 저희가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노라고 했습니다. 이 설명으로 보아, 그들은 예수의 실수라도 찾아내어, 그를 어렵게 만들자는 것이었으니, 그날의 초청은 그 의도가, 순수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예수께서는 그 초청에 응하여,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초청된 이들과 주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초청되어 온 손님들이, 서로 상석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웃지 못할 광경을 보게 됩니다. 이를 지켜보던 예수께서는 높은 자리보다는 낮은 자리에 앉도록 애쓰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 딸이나 제자들이었다면 몰라도, 다 같이 초청되어 온 처지에,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투철한 사명감이 없었다면,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장면을 복음서에서 읽을 때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많은 일을 서두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생이란 어차피, 어릴 때 생각하던 것처럼, 그렇게 늦장을 부리면서 살 수 있는, 여유 있는 여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누가의 이야기에서 윗자리라고 하는 것은, 주인이 앉는 자리에서 가까운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인의 바로 왼쪽/오른쪽 자리가, 상석이 되는 셈입니다. 여기에서 유래되었는지는 몰라도, 서양 사람들도 식탁에서 앉는 자리에 대하여 대단히 신경을 씁니다. 서양 사람들 가정에 초청되어, 식사라도 같이 하게 되면, 손님이 앉는 자리를 주인이 일일이 지정하여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자리를 정하여 줄 때까지, 손님은 기다립니다.
예수께서는 그 자리에서 같이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어디에 초대를 받게 되거든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인이 와서
윗자리로 올라와 앉으라고 할 것이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시려는 말씀의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스스로 작은 자가 됨으로 겸손을 실천하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또 존경이나 경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복음 13장 30절에도,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천재적인 과학자라고 들 이야기하는 아인슈타인은,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겸손은 기독교에서 가장 높이 보는 미덕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그저, ‘예’ 라고 답하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이것은 기독교 적인 겸손은 아닙니다. 아닌 것을 볼 때에는 아니라고 대답할 줄 알고, 옳지 못한 것을 볼 때는 분노할 줄도 아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가르치는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어서, 내가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이미 겸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위대한 사람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어떤 강연회 석상에서 사회자가 초청된 연사를 소개하면서, 있는 찬사를 다 늘어놓으며 연사를 큰 사람으로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있던 연사가 우쭐한 생각에 옆에 앉아 있는 자기 부인에게, 이 세상에 정말로 큰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말을 건넵니다. 그랬더니 부인이, 그 수는 자기 남편이 생각하는 것보다 한사람 적은 수일 거라고 귓속말로 되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자니 Second Violinist로 일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그 교향악단에서 정말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소련이 예상치 않게 붕괴를 하고, 냉전의 시대는 종식을 고하고, 미국은 국제무대에서 상대가 없는 초강대국으로 그 자리를 굳혀버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도 앞장을 서서, 이 지구상의 일들이 마치 자기들의 일인 냥,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미국사람들이 어디를 가더라도 환대를 받을 것 같은데, 오히려 미국사람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사람들은 세계 각처에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미국의 지성인들 중에는, 이 사실에 대하여 심한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된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난 2001년에 있었던 9/11 테러가 있은 지 4개월 후인 2002년 1월에, 미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조사에 참여했던 80 %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정중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미국 사회의 문제점이라는 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서 9/11테러는 미국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등이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일등을 일등으로 지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손님을 초청한 주인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집으로 초청할 때에는, 친구나 친척이나 영향력 있는 이웃을 부르는 것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절름발이나 장님이나 병든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하십ㄴ니다. 이런 사람들을 초청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이들이 받은 것을 되돌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친구나 친척을 초청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선을 행할 때 무엇을 바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기야 어떤 사람이 무엇을 바라면서 선한 일을 한다면, 이것은 처음부터 아예 선행이라고 할 수 가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남에게 좋은 일을 했을 때에 보상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언제인가 예수께서는 사람에게서 보상을 받는 것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보상받는 쪽을 택하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가난한 자와 병든 자, 과부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는 단순히 이런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말씀을 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거두어 보내라 던지, 음식을 나누어 먹으라 던지,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우리들의 식탁에 그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성서 적인 유태교의 자선에 대한 가르침은, 가난한 자에게 내 것을 조금 던져 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교의 자선도 내가 갖은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 있는 이슬람교도라면 라마단 기간 중에, 그 나누어 주는 것을 생활에서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선은, 그들을 내 식탁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외된 사람들을 손님으로, 내 식탁에 불러 다가, 같은 자리에서 접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적인 사랑의 표현이고 실천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적인 사랑은 부엌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에는, 또 하나의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불러서 같은 식탁에 앉은 사람은 나와 동등하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세리와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고, 맹렬히 비난을 받던 시대를 살았던 분입니다. 그 때에 그는 가정을 열고 그들을 자기들의 식탁에 초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구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 발자국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같은 신자들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는 것도,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만은 아닙니다. 이는 너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은, ‘Up-Side-Down Kingdom’ 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이 표현을 아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바라보는 세상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100화 너무 축하드립니다 🎉🎉
인생에 도움이 되는 말씀이십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100화 축하드려요🎉
100화 축하드려요
100화 축하드립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자리,상석에 앉기를 원하며 자신을 나타내고 드러내기를 좋아하는것 같습니다!
나는 항상 말석에 앉기를 좋아하는데...내가 겸손해서라기 보다 더이상 더 낮은자리가 없다보니 그것이 너무
편하고 좋습니다! 참으로 겸손한자가 되기를 원하며..주신 말씀 감사드립니다!
100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100화 너무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