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흑역사랄게 따로 있나 500년 조선이 군대가 개판이라 일본에 힘한번 못쓰고 강제 해산 당하고 45년까지 일제치하 6.25가 일어나기 5년간 제대로된 군대를 만들시간도 없는데 무슨 군대 조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우신조지요,,, 4강에 둘러싸여 있는 지금도 군인들에 대한 인식이 대우가 그다지 좋지 못한게 개탄스러울뿐
개인적으로 놀랬던 부분은 12:12 부분에 나오는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회고 내용입니다. 그는 한국군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과는 다르게 아예 한국군에겐 아예 무기도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추워서 죽을 것 같은데 나이가 많은 노인 이승만은 전혀 추위를 안 느끼는 것 같아 이상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군우리 전투 이야기인 것 같군요. 한국군 전사록을 보면.... 중공군을 두려워했던 것은 그 이후에도.... 쭉~~~ 우리는 백마고지 전투 등의 멋진 승리의 역사 만 배우겠지만요. 그 이후의 전투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이유에는 병력들의 전투 경험이나 장교들의 숙련도 문제를 떠나 그 이전의 패배를 통해서 무언가를 학습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크다고 봅니다. 오늘날 미군들에게는 소부대전투기술에 대한 한국전쟁 당시의 전투노하우를 축적해놨지만, 우리 한국군에게는 소부대전투 기술과 같은 서적은 거의 없죠. 확실한 것은 작전상의 후퇴와 무질서한 퇴주는 다르겠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른 유엔군 부대들은 끝까지 버티거나 아니면 후퇴하더라도 어느정도 버티다가 후퇴하는데 국군은 안 싸우고 바로 후퇴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엔군 부대들까지 중공군에게 포위되버리는 일이 계속 반복됩니다. 중공군은 일주일짜리 군대이기 때문에 일단 버티면 공세의 추진력을 잃고 물러나는데 말입니다. 결국 용문산 전투에서 국군은 처음으로 그것을 극복하게 됩니다. 국군의 복수 용문산 전투 (th-cam.com/video/9DD1eS-xzb8/w-d-xo.html)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문제는 역사 교과서에는 우리의 승리만 주장하고 패배에 대한 사실을 잘 지적을 하지 않다는 겁니다. 자존심 상해도 패배도 우리의 역사입니다. 반드시 배우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승리만 가르치는 역사는 역사가 아닙니다. 영화에서도 이야기가 거의 우리의 승리만 그리고 있습니다. 패배를 이야기하는 영화는 얼마 없지요.
리지웨이 장군이 권총까지 직접 쏴가며 도망치는 국군을 저지한 일은 리지웨이 회고록과 중국 측 전사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육군 3스타가 권총까지 쏘며 저지했는데도 국군병사들은 도망쳤고 리지웨이는 그냥 서울을 포기하고 미군까지 후퇴시킵니다. 이후에도 국군이 뚫린 지역을 미군이 막는 일은 굉장히 여러번 벌어집니다. 이 컨텐츠에 자세히 나오지만 사실 북한땅에서 그렇게 속절없이 후퇴한 것도 국군이 가장 먼저 뚫려서 미군이 포위당했기 때문입니다. 07:52에 터키군이 도망치는 국군을 중공군으로 알고 포로로 잡고 기뻐하는 것은 정말 코메디같지만 전사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본 컨텐츠는 리지웨이의 회고록과 중국 측 사료에 기반한 컨텐츠입니다. 당시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권총을 허공에 쏘며 후퇴하는 국군을 막아세운 사실은 놀라운 내용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혹시나 리지웨이가 실망해서 한국을 포기할까봐 낙심하지마라고 위로하는 대통령 이승만의 행동입니다.
감사합니다. 국군은 1948년에 정부수립이 되어 이제 태어난지 2년이 된 군대였습니다. 반면 중공군은 일본군과 수년간 싸웠고 국공내전까지 경험한 군대였습니다. 다만 중공군을 만나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한 것이 미군에겐 불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용문산 전투에서 이 수치를 씻어내게 됩니다. (th-cam.com/video/9DD1eS-xzb8/w-d-xo.html)
세계 10위 경제권이 될 때까지 기초적으로 할 수 있는 전쟁 수행능력 확보를 아직도 제대로 안 했다는 게 이상하지 6주 당한 프랑스조차 자체적으로 아프리카 반군하고 전쟁하고 그러는데 ㅋㅋㅋㅋ 이러니까 미국이 한국같은 동맹국보면 분담금 더 내놓으라고 협박하지 본인 스스로 할 의욕도 없는 주제 자기들한테 의지하니까 (중국한테 조공 받치던 조선조차 이렇게까지 굴욕적인 군사적 관계까진 안 갔지)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선제타격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지... 결정권은 본인들한테 없는데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터키의 터키여단 5,000명 그들은 국군이 후퇴한 빈 자리에 투입되었는데 터키군이 포로인줄 알고 사로잡은 병사들이 한국군이었다는 것은 아마 구독자 여러분들도 몰랐던 사실일 것입니다. 영상에서는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터키군에게 무작정 달려오는 바람에 중공군으로 오해받아 사살당한 국군병사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국군의 흑역사였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왜 형제의 나라라면 몽골의 유럽정벌시 터키쪽에 칸국을 세웁니다.그래서 형제의 나라라는겁니다.....고대 치우천황시대...아니 그 이전부터 일겁니다.몽골로이드들의 부족연방체로 살아왔습니다.5부족 연맹이라 하죠?...실제로 지금도 몽골.중앙 아시아.베트남.우리 한민족들의 아기들은 푸른 반점이 있습니다.제가 직접 두눈으로 확인했습니다.지금의 터키는 모르겠습니다.
이 컨텐츠에 묘사된대로 리지웨이 장군은 1951년 1.4후퇴 당시 한국에 온 지 일주일도 안됐을 때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도망치는 국군을 봤고 또 미 8군 사령관인 자신이 직접 권총을 빼들고 소리질러도 쳐다도 안보고 패주하는 국군의 충격적인 상황을 목격합니다. 영상에도 나오지만 리지웨이는 나중엔 그냥 도망가라고 내버려 둡니다. 그런데 더욱 비참한 것은 이승만의 태도였습니다. 이승만은 리지웨이가 혹시라도 한국을 포기할까봐 리지웨이를 달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리지웨이는 이미 마음속으로 서울을 포기합니다. 그 어떤 곳에서도 이렇게 리얼하게 한국의 상황을 다루는 컨텐츠는 보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4:40 중공군의 국군에 대한 평가도 비슷했죠. 다만 감투 정신 만큼은 매우 뛰어 났다고 인정했습니다. 결국 한국군의 아부지,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이 무려 3천명이나 되는 초급 장교단을 1년간 미 본토에서 빡세게 훈련시키고 육성해서 양성하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한국군도 비로소 단독으로 중공군과 교전할 수 있었죠. 거의 1년이 필요 했습니다.
저는 80년대 중반 전두환 시기에 특전사에서 전역.. 시세말로 개고생은 다 맛보았죠 당시 국군의 날 행사에도 참가하였구요 야외 훈련이 아닌 대간첩작전,특수작전 실내 교육에서는 성공적인 사례보다는 실패한 작전,개망신 당한 대 간첩(무장공비) 작전들을 연구.교육 받았답니다. 즉 실패한 작전,개망신 당한 작전에서 재발 방지책을 찾는거죠 당시 사령관,여단장,대대장의 개념이 깨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인들은 모르는 개망신,개수작 같은 실패 사례가 부지기수입니다. 대학졸업이라고 행정병 보직으로 그러한 교육자료 준비하며 군에 입대 전에도 내가 배운 반공 교육에 의문 투성이임이 늘 느꼈지만 그런 작전.교육위해 장교들과 준비 하다보면 당시 반공교육.국뽕찬 작전들이 얼마나 거짓투성이였는지 새삼 느끼고 배운 계기였답니다. 역사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역사에 관심 많아서 지금도 역사관련 매체에서 늘 배우는 자세입니다. 이번 영상의 주 내용처럼 6.26당시 우리 국군들의 형편없던 수준과 정신력.전투력과 지휘 능력의 실상들을 어릴때부터 6.25에 참전하였거나 직접 겪은 주변 어른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으면서 성장 하였습니다. 참고로 제가 태어난 지역은 1.4후퇴 당시에도 인민군.중공군에게 잠간 점령 당하였던 지역이라, 동네 어른들께서 직접 겪은 무수히 많은 사례.경험담을 들을수 있었답니다. 당시 우리 국군들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과 작전들은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의심 할 수 밖에 없었고 전투력이나 정신 수준은 글로 표현하기엔 부끄럽습니다. 참고로 당시 저의 어머님은 부상당한 군인을 목숨걸고 숨겨서 치료하여 원대 복귀시키기도 하였네요.
저당시 한국군을 지휘한 장교, 부사관급들이 민간인에서 급하게 징집한 애들이 대부분이였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베테랑들은 진작에 죽거나 부상중이였고 그 유명한 현리전투도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후 그 장교진들이 전투하면서 베테랑이 되면서 그나마 상황이 나아지긴 했습니다만 그떄는 이미 전장이 고지전으로 변해버린 뒤 미군도 무작정으로 징집하면서 규모 늘린 한국군 상태를 제대로 체크 안한 점도 문제이긴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군사동맹의 기본은 믿음입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2차~3차 공세를 지나면서 미군 지휘부는 극도로 국군을 불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디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입니다. 현재와 같이 서로 신뢰하는 동맹이 되기까지는 이렇게 말도 안되는 흑역사가 있었던 셈입니다.
훈련이 잘됀부대와 그렇지 못한 부대는 공격할때보다는 후퇴할때 그구분이 확실해집니다. 도망가느냐? 후퇴 하느냐? 당시 한국군은 군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수준, 병사들의 훈련도 않돼잇고 부사관이나 장교도 그자질 자체가 없엇으며 장성들도 자격이 없는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30대에 사단장하던 시절이엇습니다.현재 한국군으로따지면 잘해야 중대장이나 할사람들이 사단장 하던시절. 이런군대로는 전투를 할수 없습니다. 장재스가 자신의 휘하 장성들에게 니들이 일본군에 잇엇다면 대대장도 못할것이다 라고한적잇는데 그보다도 한참 떨어지는게 당시의 한국군 상황이었죠. 당시 상황이 급박해서 였겟지만 조금만이라도 이성이 잇었다면 맥아더는 한국군은 2선으로빼서 병사부터 장성들까지 훈련부터 시켜서 적정수준이됀후에 전선에 투입해야했어요.
우리군의 무능함 때문에 타국 군인들도 위험했습니다. 군 14년 장교 출신으로써 죄송하고 민망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 다시는 우리 땅에서 타국 군인들이 고생하고 위험하고 피 흘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중공군에게 계속 패배하고 도망을 쳐서 타국 군인들이 우리 땅에서 우리 대신 싸워준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까지 갑니다. 이런 말을 댓글에서 하면 그렇지만 그래도 말하자면 정말 쪽팔립니다~!
리지웨이 장군이 권총까지 직접 쏴가며 도망치는 국군을 저지한 일은 리지웨이 회고록과 중국 측 전사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더욱 비참했던 일은 이승만은 혹시라도 리지웨이가 실망하여 한국을 포기할까봐 그를 노심초사하며 달랬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추운날에 도망치는 국군을 수용소에 몰아넣고 연설을 했습니다. 도망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1950.12~1951.1 기간에 벌어졌던 진실이었습니다.
@@o.oo.o3029 14년간 장교했다는 양반이 유재흥 같은 일부 등신 놈들로 인해 6.25전쟁 판도가 어렵게 됐다지만 그 외에 목숨 받쳐 싸운 선배들의 숭고한 희생을 별 볼일 없는 일로 만드네 중공군에 국군이 도망만 갔다고? 파로호 전투는 un군이 세운 전공이냐? 간부였다는 놈이 정훈시간에 쳐잤냐? 현리 전투가 바로 댁같은 사람들이 지휘관을 자리차고 있어서 발생한 치욕적인 전투야 그건 아냐?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때 승공이라는 교과서 교육에서 교련 선생의 625전쟁때 한국군인들이 총도 없고 실탄도 없고 식량도 없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패전할수 밖에 없었다는 교육을 받고 한 학생이 중공군이 참전할때에는 미군이 한국군인들에게 총 실탄 포탄 그리고 군량미 겨울용 동계군복군화등도 모두 공급해 주었는대 무슨 한국군인들의 무기가 없고 군량미 보급이 않되고 겨울용군복이 공급이 않되 중공군에게 대패 하였다는 말도 않되는 전쟁사 교육을 하느냐고 따젓다가 그 교련 선생에게 욕만 실컷 얻어 먹었다. 미군의 지원으로 압록강까지 갔던 군인들이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는 사진만 가지고 국군을 칭찬만 하였고 한국군이 중공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으면 도망치기에 바빠 미군까지 다 내팽게치고 한국군만 살겠다고 마구 도망을처 한국군과 합동 작전을 벌이던 미군이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대 이런 한국군의 어이 없는 도망질에 대하여 배워본 역사가 없어요. 지금이라도 한국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625전쟁의 전쟁사에 대한 교육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중공군의 인해 전술때문에 패전했다는 것 북한군의 무기가 많고 탱크가 많아 625전쟁때 파죽지세로 밀렸다는 것 모두가 가짜 전쟁사 교육이다 라고 말 하니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한국군과 함께 싸웠던 미군 유엔군이 그 당시 형편이 없었던 한국군인들을 욕하는 모든 문서들은 반드시 공개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네요. 중고등학교 다닐때 님은 통찰력이 있으셨네요. 말씀하신 것이 옳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미 업로드 되었던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에 대한 컨텐츠에 나옵니다. th-cam.com/video/agvNMsb64yI/w-d-xo.html 밴 플리트는 중공군만 보면 도망치는 국군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국군은 무기가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군의 문제는 훈련부족, 그리고 지휘관들의 능력 부족입니다!" 그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흉내내어 4년제 정규 육사를 만드는데 일조했고 전선 후방에 강력한 훈련을 하는 훈련소를 만들어 자신이 직접 커리큘럼을 짜서 국군을 맹훈련시키게 됩니다. 후에 이들은 백마고지 전투, 베티고지 전투에서 승리의 주역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학교에서 거의 가르치질 않습니다. 밴 플리트 영상 꼭 보시길 바랍니다.
평화 대기 기간에 군대가 넋을놓고 그저 인권이나 따지고 휴대폰가지고 게임이나 인터넷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유사시나 전쟁 발발시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될것이고… 또다시 타국에 우리땅을 지켜달라고 울며 넋두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유투브 등의 영상물에 자뻑에 도취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3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구독자들이 알기 쉽두록 녹여넣은 것이 이 컨텐츠입니다. 아마 이런 얘기를 하는 컨텐츠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역사적 사실입니다. 중국인 저자인 왕수쩡이 지은 한국전쟁과 리지웨이 회고록을 참조했습니다. 국군이 중공군을 보자마자 후퇴했기에 미 2사단이 위기에 빠졌고 이를 때우기 위해 나섰던 터키군마저 위험에 빠졌습니다.
국군이 1.4후퇴때까지 죽죽 밀리고 도주할수 밖에 없었던것은 그나마 전쟁 전 육성된 고참병들이 중공군의 2차 대공세 때 대부분 전사, 포로가 되어 버렸고 지휘계통이 완전히 붕괴된데다가 계속되는 중공군의 추격으로 인해 재편성, 재훈련 시간을 갖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수백킬로 진격했다가 쫒겨서 다시 수백킬로를 바로 도망쳐 내려와야 했는데 멀쩡할 수가 없었죠. 일단 제대가 와해되어 각자 도생하는 군대를 붙잡아 세워서 방어하라고 한들 그게 가능할 수가 없었죠. 1951년 5월 국군 6사의 용문산 대첩도 이전 사창리에서 굴욕적인 대패를 겪고 나서 장도영 사단장 이하로 절치부심 약 한달간의 재정비와 빡센 훈련, 무기와 장비의 재보급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였습니다.
조선 국뽕국사가 '중공군 인해전술' 이라는 한마디로 덮어버린, 패주 국면의 뜨악한 진실이군요. 터키군이 몰려드는 한국군 패잔병들을 중공군인줄 알고 포획하고는 승전 보고를 한 장면은 현리전투 이상의 임팩트네요. 위험 지역으로 긴급 투입됐던 그들이 그 '승전 보고' 이후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해집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군이 빠진 빈 자리를 메우러 들어갔던 터키여단은 워커장군의 미 제8군이 철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며 버티다가 1950년 12월 1일 평양까지 철수했다고 합니다. 이 청천강 전투가 6.25전쟁 참전기간 중 터키여단이 가장 큰 인명피해를 봤던 전투였습니다.
예전 미국 장성이 영국 다큐에서 증언한것이 기억납니다. "힌국군들은 마치 변절자traitor같았다. 우리 부대 배속된 카튜사 병사들은 언제나 믿음직스러웠던 동료였지만 한국인들 왜 자기나라 부대로 가면 그렇게 병신같아 지는지 모르겠다" 그 장성은 나름의 분석도 내놓앟지요. "힌국군 장교들이 가장 문제인데 그도 그럴것이 한국이 일본 식민지를 거치는 동안 그 누구도 책임감있는 리더로서 제대로 훈련 받지 못했다". 정말 냉철한 분석 같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이 군대와 같은 조직을 책임지고 이끄는 교육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그나마 백선엽 같은 소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국군이 식민지후 유엔 신생국된게 48년이고 국방경비대라는게 만들어지고 농민 징집병 국군된게 채 2년인데 이해해줘야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51년 52년 부터는 사단별로 미군의 체계적인 훈련받은 뒤로는 그전의 패주하는 국군이 아닌 월남전 때 보여준 끈기 있고 용ㅇ맹한 모습의 효시를 보여주는 국군이 됨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채널에서는 말씀하신 그 부분도 놓치지 않고 다뤘습니다. th-cam.com/video/bO-nNOmw2S8/w-d-xo.html (중공군만 만나면 도망? 국군은 사실 너무 억울하다) 위 컨텐츠에서 국군의 억울함을 다뤘습니다. 핵심은 낙동강 방어전 이후 북진할 때 국군은 무려 20만명이나 대규모 징집이 이뤄집니다. 그런데 훈련은 고작 2주도 받지 못했습니다. 중공군에게 밀렸던 이유는 바로 이 원인이 컸습니다. 또한 6.25전쟁 초반 그 부족한 무기조차도 1949년 7월부터 국군에게 보급되었습니다.
베트남군과 다름이 없었던 오합지졸 이었네요. 우크라 군도 크름반도 먹힐땐 오합지졸 이었지만 미군의 훈련을 받고 미군 전술을 받아들인 최근엔 러시아군을 상대로 아주 훌륭하게 전사로 변했습니다. 70년간 미군의 무기와 미군식 훈련을 받은 현재의 한국군은 정말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군대 입니다. 우크라 러시아 전쟁을 보고 느낀 것 입니다.
어떤 군대던지 처음부터 잘 싸울 수는 없는 법이죠. 물론 독일군같은 경우는 예외입니다. 이 컨텐츠에서 나온 것은 모두 사실입니다. 리지웨이 회고와 중국측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이 컨텐츠에 등장하는 리지웨이는 워커장군 사망 후 미 8군 사령관이 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부임하자마자 중공군 3차공세가 터진 것입니다. 그래도 3스타에 미 8군 사령관이면 사실상 한미 지상군 전체를 컨트롤 하는 장군입니다. 더구나 남의 나라 장군이죠. 그가 도망치는 국군 가운데 뛰어들어 권총까지 쏘며 저지한 사실은 좀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무시한 채 좀비처럼 도망친 국군은 더 놀랍습니다. 이런 것은 어디에서도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2차대전과 6.25전쟁은 의외로 연결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8군 사령관 워커장군, 릿지웨이, 밴 플리트, 나중에 UN군 총사령관이 되는 클라크 장군 등이 모두 독일군과 싸웠죠. 맥아더만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웠지만 그외에는 독일의 장군들과 한번씩 붙어본 장군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무식한 단순 돌격이 아니었습니다. 적이 가장 약한 곳에 순간적인 집중력을 높였던 전술이었습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아군은 적고 적은 엄청나게 많다고 느끼게 만드는 전술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야간을 이용했고 우회 포위기동을 통해 후방이 이미 차단되었다는 공포감을 선사했습니다. 국군이 이후에도 계속 중공군에게 패배한 이유는 바로 이 공포감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인해전술은 적에 대한 심리적 타격까지도 포함된 가공할 전술이었습니다.
그나마 그 장교들도 보병전투는 전무 후무했음,,전부 헌병이나 병참등 후방행정업무만 했음,,일본은 조선인장교 들을 일선 지휘관을 시키지 않았음, 혹시라도 총을 꺼꾸로 돌릴까보아,,,태평양전쟁의 어수선한틈을타 반란을 일으킬까봐 제일 걱정 했다고 함,,,조선인 출신의 보병 장성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고함,
리지웨이 장군이 도망치는 국군 병사들을 저지하기 위해 총까지 쏘는데도 국군병사들이 좀비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사실은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그 상황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이 리지웨이가 전쟁을 포기할까봐 걱정하며 달래는 모습은 희극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리지웨이 자신의 회고록 뿐 아니라 중국측 사료에도 나오는 역사적 진실입니다.
소련군이었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죠. 실제 독소전 당시 소련군은 아예 등 뒤에서 기관총을 거치해놓고 기다렸습니다. 국군이 이렇게 싸우지도 않고 후퇴했던 1951년 1월, 이 당시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에 온지 열흘도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권총까지 뽑아들고 도망치는 국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맘대로 도망치게 놔둬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화풀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승만 대통령은 혹시 리지웨이가 전쟁을 포기할까봐 그를 달랬다는 점입니다.
중공군 상대로 유엔군과 미군테 민폐만 끼쳤었던 국군..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요...이승만 대통령이 미군 장군테 화기좀 많이 지원해달라니까 미군 장군이 화를 내며 지금 국군은 무기가 필요한게 아니라 지휘관이 필요하다고...아무튼 장도영 장군님의 첫 승리가 무엇보다 값지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밴플리트 장군 최종회를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밴 플리트도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똑같은 말을 했죠. 국군에겐 장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유능한 지휘관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밴 플리트는 훈련 뿐 아니라 미국을 모방해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됩니다.
만물상자 tv님 안녕하세요 혹시 전에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하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20년 전 화천 15사단에 있었습니다. 그땐 2년이었죠~ ㅋ 전쟁 역사가 너무너무 재미있는데 이게 우리의 역사라니 정말 너무나 뼈아프고 가슴 서리게 느껴집니다. 이승만 대통령, 얼마나 다급했으면 리지웨이 중장에게 그렇게 말을 했을까, 우리 군인들 얼마나 무서웠을까... 정말 무엇보다 국방이 강력해야 나라를 지킬 평화도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는 말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장교는 복무한 적 없습니다. 군 복무와는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철저한 사료조사와 평소 즐겨 읽는 책이 모두 전쟁역사 관련한 내용입니다. 리지웨이가 총까지 쏴가며 도망치는 국군을 저지했던 시기는 1950년 12월 말에서 1월 초입니다. 이 때는 워커장군이 죽고 그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한국에 온 지 1주일도 안되었을 때였습니다. 내용을 잘 보시면 리지웨이가 성질이 단단히 난 나머지 이승만에게 통보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58) 쉽게 말해 너가 와서 한번 꼬라지를 봐라! 이거였습니다. 때문에 이승만은 리지웨이를 달랠 수 밖엔 없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그 시기가 한국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미군 지휘부는 한국을 포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th-cam.com/video/tvU6IlUfELA/w-d-xo.html 이 컨텐츠는 지평리 전투 이야깁니다. 이 컨텐츠에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순서상으로는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지평리 전투 이후에 비로서 중공군도 한풀 꺾이고 한국의 운명도 바뀌게 됩니다.
아주 예리하시네요. 3차공세. 즉 우리가 통한의 1.4후퇴라고 배웠던 바로 그 공세입니다. 3차공세 때 서울을 다시 빼앗긴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바로 이 공세 직전 미군은 국군과 나란히 방어하지 않고 뒤에서 백업하는 형태로 전략을 바꿉니다. 사료상에는 2가지 원인 때문이라고 나옵니다. 첫째는 미군 지휘부가 2차공세 때 하도 당해서 아예 국군을 전면에 세우고 자기네들은 뒤에서 막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바로 이승만과 국군지휘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국내 민간인 노무자를 대대적으로 동원해서 서부전선 임진강 부근에 엄청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미군에게 중공군을 막을거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데 단 1일을 못버텼습니다. 그래서 리지웨이가 저렇게 열이 받은 것입니다.
전면에 세운 이유가.. 하도 제대로 못싸워서 최전방에서 죽을 각오라 싸우라고 제일 선봉에 총알받이로 배치한것임.. 뒤에 배치하면 전선이 밀릴때 제대로 서포트 못해주고 중요한 보급로 뚫릴께 뻔하니.. 최전방에서 밀려도 뒤에는 든든한 아군전선 라인이 있기 때문에 반 총알받이겸.. 자국군이 최전방에서 용감히 싸우라고 보낸듯... 자꾸 후방에만 배치하면 당나라 군대나 마찬가지였을듯... 저 같아도 도망치기만 하는 부대를 최 후방에 배치보다는 전선 라인 구축하고 도망치는 부대 꼼짝못하게... 최전방에서 싸우라고 보냈을듯... 죽어도 최전방에서 싸우다 죽으라고.....
대부분이 밭에서 일하던 논민들 공부하던 학생들로 구성되고 전쟁경험을 겪은군인들이라해야 극 소수인데 어떻게 대부분이 장기간 전쟁시련을거친 중공에서 미리파견된 세개조선독립사와 중공군에게 견딜수있을까 ? 패전당하고 밀리는것은 당연한일이지 수치가 아니다 ! 😮 하지만 지금은 강력한 국산무기와 군인들로 변화됬다 ! 😮😮😮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중공군에게 만만히 보여 당하기만 했던 국군의 문제점을 장비 부족이 아니라 훈련 부족 및 지휘관 미달로 보고 훈련 커리큘럼을 직접 짜고 한국 최초 4년제 육사를 설립하게 도운 밴 플리트의 공도 국군의 기초를 놓는데 중요했습니다. (th-cam.com/video/agvNMsb64yI/w-d-xo.html)
군인이 패전당하고 밀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아이고 이분 나라의 군대를 말아 먹내요. 그럼 그런 쓰레기 같은 군인들이 왜 필요 합니까. 625때 인민군에게도 패전하고 북한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한국군이 중공군 소리만 들어도 무조건 도망가기에 바빳다는 중공군 보고서나 미군 보고서를 보면 한국군인들은 군인들이 아니라 그냥 인간쓰레기들이었겠지요. 얼마나 한국군이 한심 하였으면 중공군이 오로지 한국군만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을까요. 한국군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만 공개하지 말고 미군들이 625전쟁때 남겼다는 형편이 없었던 한국군인들을 비난하는 문서등도 공개가 되어야 합니다
@rxz1600 // 현재 님의 정신적인 문제가 있듯이 당시 우리 국군들도 장교들의 지휘능력 부재와 사병들의 투지.정신력이 문제였습니다. 훈련부족.장비부족.경험부족등은 눈가리고 아웅이였죠. 중공군의 인해전술? 과대포장 회피성 용어입니다 중공군이 참전하던 시기에 병력면에서도 유엔군과 국군의 숫자가 더 많았음이 기록으로 밝혀졌어요 다만 중공군은 병력을 때와 시기.장소로 집중하는 작전을 펼쳤기에 인해전술이라는 회피용어로 정당화 한 면이 강합니다. 궁금하시면 6.25 당일부터 서울이 함락시까지 옹진반도.개성을 담당하여 지키던 국군1사단(당시사단장 백선엽)이 지휘부들이 행한 작태들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 당시 대대장.중대장들의 회고록.증언들을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6사단 청성부대는 6.25전쟁 기간 중 김종오 장군이 사단장을 맡았습니다. 김종오 장군은 춘천전투에서 북한군을 3일간 저지해내며 6.25전쟁 초반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후 장도영 장군이 6사단장을 맡게 되는데 장도영 장군의 6사단은 중공군에게 대패를 당하며 미군들에게도 욕을 먹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나 의외로 설욕의 기회는 빨리 왔습니다. 바로 용문산, 파로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대승을 거두며 6.25전쟁 기간 중 국군 최대의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th-cam.com/video/9DD1eS-xzb8/w-d-xo.html (국군 6사단과 용문산, 파로호 전투)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디아-t1x 이 컨텐츠에서는 중공군 2차공세 당시 미 8군이 포위가 되버린 상황이 측면을 방어하던 국군 2군이 후퇴해버렸기 때문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워커장군은 포위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터키군까지 투입합니다만 터키군이 포로로 잡았다고 좋아했던 병사들은 모두 중공군으로 오해해서 잡았던 도망치는 국군들이었습니다.
6.25당시 군사령관 유재훙장군 부하들 다 버리고 혼자 후퇴 유엔군 사령관왈: 당신 부하들은 다 어디에 있소 유재홍왈: 모르겠 소 유엔군사령관왈:당신은 다른 직업을 찼아아 겠소 이런 인간이 나 군생활 당시 내무실에 직속상관 관등성명 란에 대통령:박정희 국방부장관:유재홍 이였지 지금도 저와 비슷한 장군이 우리군에 있으니 전작권 회수도 못하고 있지 않을까
격하게 공감합니다. 국군은 중공군만 보면 도망쳤습니다. 터키군은 도망치는 한국군을 중공군으로 알고 포로로 잡고 기뻐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한국군의 구멍을 터키군이 틀어막다가 생긴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채널에서 다뤘습니다. 차이점은 국군은 바로 도망, 터키여단은 버티다가 후퇴. 중공군을 보면 싸우지 않고 무기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이 국군의 진짜 문제였습니다.
이 컨텐츠에 묘사된 것은 팩트입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보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무너진 미군도 따지고보면 측면이 뚫려서였는데 이 측면엔 국군이 있었습니다. 워커장군이 측면구멍을 막기 위해 터키군을 보냈는데 그 터키군이 중공군인줄 알고 잡은 사람들이 도망가다 잡힌 한국군이었다는 사실도 팩트입니다. 또한 1.4후퇴 당시 즉 중공군 3차공세 때도 가장 먼저 도망친 것은 국군이었고 포위를 우려한 다른 유엔군까지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6.25 전쟁 초반에 북한군이 잘 나갔던 이유가 바로 말씀하신 중공군 출신 한인 병사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6만명 정도였는데 김일성의 요구로 6.25전쟁 직전 북한으로 보내졌습니다. 북한군 3, 4사단 105 류경수 탱크 여단이 바로 그들이었는데 국군 뿐 아니라 미군도 거침없이 격파하며 내려온 주역들이었습니다. 세계최강 미군은 왜 한달이 넘도록 (1950년 7~8월) 북한군에게 밀렸던 것일까? th-cam.com/video/V1CZYn3MFlc/w-d-xo.html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거짓말 이다 라고 말 합니다. 중공군의 90%는 한족등이고 만주 조선족은 5%도 안됬을 것 이다 라고 말 합니다. 이것도 한국군의 패전을 중공군의 인해전술 특히 만주 조선족출신 군인들에게 뒤집어 쒸웠던 한국의 625전쟁사 날조교육이 그 잘못된 정보의 원인이다 라고 말 합니다
무기는 대등했나? 아울러 훈련정도와 정신상태는 어떠했나? 지금에와서 우리가 좋은 무기와 치밀한 훈련 지휘관들의 작전 능력을 돈을 들여 수시로 실전훈련을 지속적으로 해야하느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군처럼 정신무장만 강요해서는 살육당할 것이고 비웃음만 살 수밖에없다 상대와의 전투시 대응하는 적절한 또는 우월한 무기와 훈련으로 준비된 군대가 평화시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거기에 지휘관의 작전능력이 융합되어야 한다
평화로운 국군?? ㅋㅋ 그건 아닙니다. 1948년부터 이미 남한 전역이 남로당의 무장 폭동으로 전국이 불바다였고 그거 진압하러 뛰어 댕겼기 때문에 실전 경험은 있었는데 대부분 게릴라 소탕전이였지 정규군과의 싸움은 아니였죠. 그래도 한 1년 빡세게 고생한 뒤부터는 단독으로 중공군 때려 잡을 정도로 전력이 강화되긴합니다. 미군도 한 6개월 걸렸죠.
이 컨텐츠는 정확한 사료에 기반한 내용입니다. 끝까지 버티려고 터키군까지 투입했던 워커장군. 그러나 터키군이 잡은 것은 중공군이 아닌 도망치던 국군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 국군의 흑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때의 국군은 훈련도 못받고 대량으로 징집된 인원들이었기에...
맥아더가 그렇게 하려고 했었죠. 그는 그의 인생 마지막 경력인 6.25전쟁을 누구보다도 이기고 싶었습니다. 중공을 아주 박살을 내놓고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하고 1951년에 한반도에서 자유선거를 치르려고 했었습니다. 트루먼 정부가 끝내 못하게 했죠. 맥아더의 캐릭터와 그가 해임당한 진짜 이유 (th-cam.com/video/z4_VHkGt-eM/w-d-xo.html) 미국이 2차대전 처럼 6.25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이유 (th-cam.com/video/GMssQvvL5rc/w-d-xo.html) 를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리지웨이 장군은 워커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새롭게 미 8군 사령관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1951년 1월, 그가 중장 계급인 별 3개 번호판을 달고 달리던 지프차에서 내려 후퇴하는 국군을 총까지 쏘며 저지했던 일화는 그의 회고록에 나오는 사실입니다. 그가 도망치는 국군의 행렬을 보며 했던 말인 10:55 을 보면 "그들에게는 질서도 무기도 지휘관도 없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시 국군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매우 잘 보여줍니다.
팩트를 말씀드리면 중장비는 모두 버렸습니다. 현리전투와 밴 플리트 장군의 극약처방 (th-cam.com/video/lZgrkNCw8GE/w-d-xo.html) 과 용문산 전투 (th-cam.com/video/9DD1eS-xzb8/w-d-xo.html) 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리전투에서는 국군 3군단이 버린 대포와 탄약, 유류 등을 미 공군이 다 파괴해버렸고 용문산 전투는 승리하긴 했지만 승리하기 전에 6사단이 155밀리 포를 모두 버리는 바람에 중공군이 모두 가져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FULL HD로 설정하여 큰 화면으로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10:56, 리지웨이 중장의 목격담 부분을 보시면 국군이 그렇게 된 이유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질서와 무기는 패주 중이니 없을 수 있겠지만
이들을 통제할 지휘관도 없었다는 점은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정부에서 이 방송을 지원해야한다...쓰잘데 없는 오합지졸 시민단체보다 100배는 좋은 곳이므로 지원받아야한다.
@@김상범-f7u 절대공감 합니다
ㅋㅋ 목숨걸고싸우라~ >> 도망안치고 싸운사람들 폐지줍게함ㅋ
우리 안에 LOOSER DNA가 있나봐요. 식민지배... 625... 극소수만이 피흘리며 죽어가거 절대 다수는 저렇게 이리 저리 도망치다 죽고... 진실은 쓰고 거짓 (국뽕 영화)은 달다란 말이...
역사는 명암이 당연합니다 어둡고 부끄러운 부분을 가감없이 마주한다면 미래에는 더나은 결과를 낼수있을것 입니다 비단 국가만이 아니라 개인 조직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용기있는 영상 잘봤습니다
유익한 도움이 되어 감사드립니다.!!🙏🙆♂️🙋♂️💕💕
아니 흑역사랄게 따로 있나 500년 조선이 군대가 개판이라 일본에 힘한번 못쓰고 강제 해산 당하고 45년까지 일제치하 6.25가 일어나기 5년간 제대로된 군대를 만들시간도 없는데 무슨 군대 조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우신조지요,,, 4강에 둘러싸여 있는 지금도 군인들에 대한 인식이 대우가 그다지 좋지 못한게 개탄스러울뿐
항상 좋은 양질의 영상 감사합니다. 정주행 잘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용기를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성과 성찰 없이는 반복될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놀랬던 부분은 12:12 부분에 나오는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회고 내용입니다.
그는 한국군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과는 다르게 아예 한국군에겐 아예 무기도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추워서 죽을 것 같은데 나이가 많은 노인 이승만은
전혀 추위를 안 느끼는 것 같아 이상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린 우리가 이긴것만 후세에 주구장창 얘기한다.
진실을 알아야 대처할수있다.
맞습니다.. 예전 한국군도 까고.. 현재 한국군도 까서 계몽을 시켜야 합니다. 물론 화력적인 면에서 야포니 자주포 구축해놓는거는 잘하고 있음...
@@junok1321 지상군 화력만 잔뜩 올려봐야 먼소용이냐 현대전은 해공군력이 핵심인데 중국전함의 총배수량은 미해군에 근접했더만 한국은 쓸만한 군함이 고작 12척이니ㅋㅋ
군우리 전투 이야기인 것 같군요. 한국군 전사록을 보면.... 중공군을 두려워했던 것은 그 이후에도.... 쭉~~~ 우리는 백마고지 전투 등의 멋진 승리의 역사 만 배우겠지만요. 그 이후의 전투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이유에는 병력들의 전투 경험이나 장교들의 숙련도 문제를 떠나 그 이전의 패배를 통해서 무언가를 학습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크다고 봅니다. 오늘날 미군들에게는 소부대전투기술에 대한 한국전쟁 당시의 전투노하우를 축적해놨지만, 우리 한국군에게는 소부대전투 기술과 같은 서적은 거의 없죠. 확실한 것은 작전상의 후퇴와 무질서한 퇴주는 다르겠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른 유엔군 부대들은 끝까지 버티거나 아니면 후퇴하더라도 어느정도 버티다가 후퇴하는데 국군은 안 싸우고 바로 후퇴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엔군 부대들까지 중공군에게 포위되버리는 일이 계속 반복됩니다.
중공군은 일주일짜리 군대이기 때문에 일단 버티면 공세의 추진력을 잃고 물러나는데 말입니다.
결국 용문산 전투에서 국군은 처음으로 그것을 극복하게 됩니다. 국군의 복수 용문산 전투 (th-cam.com/video/9DD1eS-xzb8/w-d-xo.html)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문제는 역사 교과서에는 우리의 승리만 주장하고 패배에 대한 사실을 잘 지적을 하지 않다는 겁니다. 자존심 상해도 패배도 우리의 역사입니다. 반드시 배우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승리만 가르치는 역사는 역사가 아닙니다.
영화에서도 이야기가 거의 우리의 승리만 그리고 있습니다. 패배를 이야기하는 영화는 얼마 없지요.
리지웨이 장군이 권총까지 직접 쏴가며 도망치는 국군을 저지한 일은
리지웨이 회고록과 중국 측 전사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육군 3스타가 권총까지 쏘며
저지했는데도 국군병사들은 도망쳤고 리지웨이는 그냥 서울을 포기하고 미군까지 후퇴시킵니다.
이후에도 국군이 뚫린 지역을 미군이 막는 일은 굉장히 여러번 벌어집니다.
이 컨텐츠에 자세히 나오지만 사실 북한땅에서 그렇게 속절없이 후퇴한 것도 국군이 가장 먼저 뚫려서 미군이 포위당했기 때문입니다.
07:52에 터키군이 도망치는 국군을 중공군으로 알고 포로로 잡고 기뻐하는 것은 정말 코메디같지만 전사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그러니까 더 쪽팔리지요! ㅠ ㅠ
훈련이 안된 한국군의
민낮은 그옛날 오합지졸로 임진왜란 용인전투 병자호란 쌍령전투
전통을 이어받아 현리전투 가평전투동 오합지졸로 외해 됐는데 지금도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심히 우려 되네요!
그렇군요... 베트남전의 월남군이 우리 국군의 모습이었다니 부끄럽네요.
본 컨텐츠는 리지웨이의 회고록과 중국 측 사료에 기반한 컨텐츠입니다.
당시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권총을 허공에 쏘며 후퇴하는 국군을 막아세운 사실은 놀라운 내용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혹시나 리지웨이가 실망해서 한국을 포기할까봐 낙심하지마라고 위로하는 대통령 이승만의 행동입니다.
구독자 1만명 달성 축하드립니다! 항상 좋은 영상을 볼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승승장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응원의 말씀 큰 힘이 됩니다.
감사드립니다.
세밀한 분석과 평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6.25 전쟁 중공군 참전 초반 상황을 잘 몰랐던 분들도 영상을 몇번 보신다면
중공군 공세 초반 상황이 잘 이해되실 것입니다.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 역사의 일부입니다.
감사합니다. 국군은 1948년에 정부수립이 되어 이제 태어난지 2년이 된 군대였습니다.
반면 중공군은 일본군과 수년간 싸웠고 국공내전까지 경험한 군대였습니다. 다만 중공군을 만나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한 것이 미군에겐 불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용문산 전투에서 이 수치를 씻어내게 됩니다. (th-cam.com/video/9DD1eS-xzb8/w-d-xo.html)
늘 유익한 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서 좋은 영상 보면서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진짜 한국전쟁 때 한국군의 흑역사를 안다면 왜 한국군이 미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지 또 미군이 아직도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어 매우 씁쓸합니다!!
그기 언제적 얘긴데 아직도 미군의존이 당연하단 건지?
@@이정환-x7p 한국군이 잘 할 수 있다는 걸 언제 보여줬나???
베트남전 ..
@@xingpark6956전작권이 미국에게 시험봐서 가져와야하는 권리냐?정신차려! 국가의 기본권인거 몰라?
세계 10위 경제권이 될 때까지 기초적으로 할 수 있는 전쟁 수행능력 확보를 아직도 제대로 안 했다는 게 이상하지 6주 당한 프랑스조차 자체적으로 아프리카 반군하고 전쟁하고 그러는데 ㅋㅋㅋㅋ
이러니까 미국이 한국같은 동맹국보면 분담금 더 내놓으라고 협박하지 본인 스스로 할 의욕도 없는 주제 자기들한테 의지하니까 (중국한테 조공 받치던 조선조차 이렇게까지 굴욕적인 군사적 관계까진 안 갔지)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선제타격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지... 결정권은 본인들한테 없는데
미군 아니었으면
진짜 끝장날뻔 했군...
그때의 기억을 잊지말자고
아직도 6.25때 쓰던 수통을 사용하고
있나보구나....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터키의 터키여단 5,000명
그들은 국군이 후퇴한 빈 자리에 투입되었는데 터키군이 포로인줄 알고 사로잡은 병사들이 한국군이었다는 것은
아마 구독자 여러분들도 몰랐던 사실일 것입니다.
영상에서는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터키군에게 무작정 달려오는 바람에 중공군으로 오해받아 사살당한 국군병사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국군의 흑역사였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왜 형제의 나라라면 몽골의 유럽정벌시 터키쪽에 칸국을 세웁니다.그래서 형제의 나라라는겁니다.....고대 치우천황시대...아니 그 이전부터 일겁니다.몽골로이드들의 부족연방체로 살아왔습니다.5부족 연맹이라 하죠?...실제로 지금도 몽골.중앙 아시아.베트남.우리 한민족들의 아기들은 푸른 반점이 있습니다.제가 직접 두눈으로 확인했습니다.지금의 터키는 모르겠습니다.
이내용을 전국민이 알아야 합니다
내용 너무나 고맙습니다
이 컨텐츠에 묘사된대로 리지웨이 장군은 1951년 1.4후퇴 당시 한국에 온 지 일주일도 안됐을 때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도망치는 국군을 봤고 또 미 8군 사령관인 자신이 직접 권총을 빼들고 소리질러도
쳐다도 안보고 패주하는 국군의 충격적인 상황을 목격합니다.
영상에도 나오지만 리지웨이는 나중엔 그냥 도망가라고 내버려 둡니다.
그런데 더욱 비참한 것은 이승만의 태도였습니다.
이승만은 리지웨이가 혹시라도 한국을 포기할까봐 리지웨이를 달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리지웨이는 이미 마음속으로 서울을 포기합니다.
그 어떤 곳에서도 이렇게 리얼하게 한국의 상황을 다루는 컨텐츠는 보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4:40 중공군의 국군에 대한 평가도 비슷했죠. 다만 감투 정신 만큼은 매우 뛰어 났다고 인정했습니다. 결국 한국군의 아부지,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이 무려 3천명이나 되는 초급 장교단을 1년간 미 본토에서 빡세게 훈련시키고 육성해서 양성하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한국군도 비로소 단독으로 중공군과 교전할 수 있었죠. 거의 1년이 필요 했습니다.
저는 80년대 중반 전두환 시기에 특전사에서 전역..
시세말로 개고생은 다 맛보았죠
당시 국군의 날 행사에도 참가하였구요
야외 훈련이 아닌 대간첩작전,특수작전 실내 교육에서는
성공적인 사례보다는 실패한 작전,개망신 당한
대 간첩(무장공비) 작전들을 연구.교육 받았답니다.
즉 실패한 작전,개망신 당한 작전에서 재발 방지책을 찾는거죠
당시 사령관,여단장,대대장의 개념이 깨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인들은 모르는 개망신,개수작 같은 실패 사례가 부지기수입니다.
대학졸업이라고 행정병 보직으로 그러한 교육자료 준비하며
군에 입대 전에도 내가 배운 반공 교육에 의문 투성이임이 늘 느꼈지만
그런 작전.교육위해 장교들과 준비 하다보면
당시 반공교육.국뽕찬 작전들이 얼마나 거짓투성이였는지
새삼 느끼고 배운 계기였답니다.
역사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역사에 관심 많아서
지금도 역사관련 매체에서 늘 배우는 자세입니다.
이번 영상의 주 내용처럼 6.26당시 우리 국군들의
형편없던 수준과 정신력.전투력과 지휘 능력의 실상들을
어릴때부터 6.25에 참전하였거나 직접 겪은 주변 어른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으면서 성장 하였습니다.
참고로 제가 태어난 지역은 1.4후퇴 당시에도 인민군.중공군에게
잠간 점령 당하였던 지역이라, 동네 어른들께서 직접 겪은
무수히 많은 사례.경험담을 들을수 있었답니다.
당시 우리 국군들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과 작전들은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의심 할 수 밖에 없었고
전투력이나 정신 수준은 글로 표현하기엔 부끄럽습니다.
참고로 당시 저의 어머님은 부상당한 군인을
목숨걸고 숨겨서 치료하여 원대 복귀시키기도 하였네요.
51년 봄의 현리 전투 참패 이후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의 특별 지시로 한국군은 부대 단위로 미군 교관들이 교육하는 훈련과정에 참가하고 그 이후에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나름 잘 싸우게 됩니다.
그래서 밴 플리트 장군은 국군의 아버지라고까지 불리게 됩니다.
6.25당시 중공은 전쟁에 능숙했고 한국군은 군대편제도 갖춘지 얼마 안되 무기도없고 훈련도 미숙한 농민군비슷한 오합지졸상태였던것 같다
그건아님 2차대전당시 유럽과 태평양에서 싸우던 정예 미군들도 거진다 퇴역해서 초병들이 UN군으로 참전했습니다. 거기다 터키군은 첫전투였는데 대승까지함
@@김정민-c1h1d 이미 6.25전부터 남북한 군끼리 짜잘짜잘 하게 교전은 여러차례 있었고 전방에 있던 부대들은 그런 교전을 수차례 경험한 베테랑들이였어 무슨 농민군 타령하고 자빠졌냐 그 부대들이 개전초기에 육탄방어 하면서 시간 끌었다 빠가사리야
저당시 한국군을 지휘한 장교, 부사관급들이 민간인에서 급하게 징집한 애들이 대부분이였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베테랑들은 진작에 죽거나 부상중이였고 그 유명한 현리전투도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후 그 장교진들이 전투하면서 베테랑이 되면서 그나마 상황이 나아지긴 했습니다만 그떄는 이미 전장이 고지전으로 변해버린 뒤
미군도 무작정으로 징집하면서 규모 늘린 한국군 상태를 제대로 체크 안한 점도 문제이긴했습니다.
이 시기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 사이인데 다 죽어가던 북한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면서 북한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국군의 규모가 갑자기 커지면서 대부분 급하게 징집된 인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었습니다.
625 영화들 보면 한국군에서 징집된 병사가 전투에서 살아남고 속성 진급해서 중사 상사 중위 대위 달고있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죠.
@@만물상자TV전쟁의신 연합군은 2차대전 경험이 있어서 아마도.. 캐나다 군만해도 한국전 참전용사의 3분의 1정도가 2차 대전 참전 용사였거든요. 아무튼 연합군 멋있습니다.
@@PurpleCat9794 그건아님 2차대전 유럽전선과 태평양전선 참전한 베테랑 미군들은 점수제 같은걸로 평가받고 순서대로 거진다 퇴역해서 6.25당시에 미군도 초병들이 많았다던데
당시 한국군 문제 많았습니다. 비리 부정부패, 지휘관에 대한 불신, 총체적 난국.
헌신해서 싸워봤자 개죽음일 뿐이라는 분위기.
이런 문제점들이 차츰 개선되면서 현재의 강군이 된 거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군사동맹의 기본은 믿음입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2차~3차 공세를 지나면서 미군 지휘부는 극도로 국군을 불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디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입니다.
현재와 같이 서로 신뢰하는 동맹이 되기까지는 이렇게 말도 안되는 흑역사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때 7사단이 완전 박살 났습니다 ㆍ수백명만 겨우 살았습니다 ㆍ내 아버지 말씀 이었음 ㆍ
훈련이 잘됀부대와 그렇지 못한 부대는 공격할때보다는 후퇴할때 그구분이 확실해집니다.
도망가느냐? 후퇴 하느냐?
당시 한국군은 군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수준, 병사들의 훈련도 않돼잇고 부사관이나 장교도 그자질 자체가 없엇으며 장성들도 자격이 없는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30대에 사단장하던 시절이엇습니다.현재 한국군으로따지면 잘해야 중대장이나 할사람들이 사단장 하던시절.
이런군대로는 전투를 할수 없습니다. 장재스가 자신의 휘하 장성들에게 니들이 일본군에 잇엇다면 대대장도 못할것이다 라고한적잇는데
그보다도 한참 떨어지는게 당시의 한국군 상황이었죠. 당시 상황이 급박해서 였겟지만 조금만이라도 이성이 잇었다면 맥아더는 한국군은 2선으로빼서 병사부터 장성들까지 훈련부터 시켜서 적정수준이됀후에 전선에 투입해야했어요.
우리군의 무능함 때문에 타국 군인들도 위험했습니다. 군 14년 장교 출신으로써 죄송하고 민망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 다시는 우리 땅에서 타국 군인들이 고생하고 위험하고 피 흘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중공군에게 계속 패배하고 도망을 쳐서 타국 군인들이 우리 땅에서 우리 대신 싸워준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까지 갑니다. 이런 말을 댓글에서 하면 그렇지만 그래도 말하자면 정말 쪽팔립니다~!
리지웨이 장군이 권총까지 직접 쏴가며 도망치는 국군을 저지한 일은
리지웨이 회고록과 중국 측 전사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더욱 비참했던 일은 이승만은 혹시라도 리지웨이가 실망하여 한국을 포기할까봐 그를 노심초사하며 달랬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추운날에 도망치는 국군을 수용소에 몰아넣고 연설을 했습니다. 도망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1950.12~1951.1 기간에 벌어졌던 진실이었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이런 사건은 6.25 전쟁 교과서에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o.oo.o3029
맞습니다.
진짜 맞는 말씀 이십니다.ㅎ
ㅆㅂㄹ 이 내용을 지금에서야 알았네요.
학교에서나 어디에서도 이런 내용을 사실대로 알려주는 자가 없었네요.
@@o.oo.o3029 14년간 장교했다는 양반이 유재흥 같은 일부 등신 놈들로 인해 6.25전쟁 판도가 어렵게 됐다지만 그 외에 목숨 받쳐 싸운 선배들의 숭고한 희생을 별 볼일 없는 일로 만드네 중공군에 국군이 도망만 갔다고? 파로호 전투는 un군이 세운 전공이냐? 간부였다는 놈이 정훈시간에 쳐잤냐? 현리 전투가 바로 댁같은 사람들이 지휘관을 자리차고 있어서 발생한 치욕적인 전투야 그건 아냐?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때 승공이라는 교과서 교육에서 교련 선생의 625전쟁때 한국군인들이 총도 없고 실탄도 없고 식량도 없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패전할수 밖에 없었다는 교육을 받고 한 학생이 중공군이 참전할때에는 미군이 한국군인들에게 총 실탄 포탄 그리고 군량미 겨울용 동계군복군화등도 모두 공급해 주었는대 무슨 한국군인들의 무기가 없고 군량미 보급이 않되고 겨울용군복이 공급이 않되 중공군에게 대패 하였다는 말도 않되는 전쟁사 교육을 하느냐고 따젓다가 그 교련 선생에게 욕만 실컷 얻어 먹었다. 미군의 지원으로 압록강까지 갔던 군인들이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는 사진만 가지고 국군을 칭찬만 하였고 한국군이 중공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으면 도망치기에 바빠 미군까지 다 내팽게치고 한국군만 살겠다고 마구 도망을처 한국군과 합동 작전을 벌이던 미군이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대 이런 한국군의 어이 없는 도망질에 대하여 배워본 역사가 없어요. 지금이라도 한국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625전쟁의 전쟁사에 대한 교육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중공군의 인해 전술때문에 패전했다는 것 북한군의 무기가 많고 탱크가 많아 625전쟁때 파죽지세로 밀렸다는 것 모두가 가짜 전쟁사 교육이다 라고 말 하니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한국군과 함께 싸웠던 미군 유엔군이 그 당시 형편이 없었던 한국군인들을 욕하는 모든 문서들은 반드시 공개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네요.
중고등학교 다닐때 님은 통찰력이 있으셨네요. 말씀하신 것이 옳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미 업로드 되었던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에 대한 컨텐츠에 나옵니다. th-cam.com/video/agvNMsb64yI/w-d-xo.html
밴 플리트는 중공군만 보면 도망치는 국군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국군은 무기가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군의 문제는 훈련부족, 그리고 지휘관들의 능력 부족입니다!"
그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흉내내어 4년제 정규 육사를 만드는데 일조했고 전선 후방에 강력한 훈련을 하는 훈련소를 만들어
자신이 직접 커리큘럼을 짜서 국군을 맹훈련시키게 됩니다. 후에 이들은 백마고지 전투, 베티고지 전투에서 승리의 주역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학교에서 거의 가르치질 않습니다. 밴 플리트 영상 꼭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이거 다른 포털사이트에서 똑같이 말했다가 욕처먹음ㅋㅋ원래 흑역사는 철저하게 감추고 자랑스러운 역사만 강조하는게 민족적 특성이라 ㅋㅋ 한국 국뽕영화에 찌든것들이다그럼
평화 대기 기간에 군대가 넋을놓고 그저 인권이나 따지고 휴대폰가지고 게임이나 인터넷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유사시나 전쟁 발발시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될것이고…
또다시 타국에 우리땅을 지켜달라고 울며 넋두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유투브 등의 영상물에 자뻑에 도취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속사정은 처음 듣네요ㅠㅠ
아군이 후퇴만한다면 도우러온 연합군은 무슨의지로 지켜주려할까요 ㅠ이런 기록은 어디에서 찾을수있나요?
3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구독자들이 알기 쉽두록 녹여넣은 것이 이 컨텐츠입니다.
아마 이런 얘기를 하는 컨텐츠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역사적 사실입니다.
중국인 저자인 왕수쩡이 지은 한국전쟁과 리지웨이 회고록을 참조했습니다.
국군이 중공군을 보자마자 후퇴했기에 미 2사단이 위기에 빠졌고 이를 때우기 위해 나섰던 터키군마저 위험에 빠졌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방대한 자료와 지식나눔에 감사합니다👍 구독하여 챙겨 볼께요~
지휘관 부재나 멍청한 지휘관들은 함정에 빠진곳으로 후퇴시키는경우가 많았다 기가막힌 노릇이었다
이 컨텐츠는 리지웨이 장군의 회고도 참고했습니다.
그가 얘기한 부분을 보면 후퇴하는 국군은 질서도 무기도 지휘관도 없었다라는 말이 있고 컨텐츠에서도 그것을 언급했습니다.
이미 국군 지휘관들이 부하들을 다 버리고 다 도망친 상황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 아니었으면 우리는 끝났다
한국군은 용문산 전투 전까지는 중공군한테 답 없었음........
부족한 우리 모습을 외면하면 안된다.
지피지기 이면 백전불퇴이다.
국군이 1.4후퇴때까지 죽죽 밀리고 도주할수 밖에 없었던것은 그나마 전쟁 전 육성된 고참병들이 중공군의 2차 대공세 때 대부분 전사, 포로가 되어 버렸고 지휘계통이 완전히 붕괴된데다가 계속되는 중공군의 추격으로 인해 재편성, 재훈련 시간을 갖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수백킬로 진격했다가 쫒겨서 다시 수백킬로를 바로 도망쳐 내려와야 했는데 멀쩡할 수가 없었죠. 일단 제대가 와해되어 각자 도생하는 군대를 붙잡아 세워서 방어하라고 한들 그게 가능할 수가 없었죠. 1951년 5월 국군 6사의 용문산 대첩도 이전 사창리에서 굴욕적인 대패를 겪고 나서 장도영 사단장 이하로 절치부심 약 한달간의 재정비와 빡센 훈련, 무기와 장비의 재보급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였습니다.
조선 국뽕국사가 '중공군 인해전술' 이라는 한마디로 덮어버린, 패주 국면의 뜨악한 진실이군요.
터키군이 몰려드는 한국군 패잔병들을 중공군인줄 알고 포획하고는 승전 보고를 한 장면은 현리전투 이상의 임팩트네요.
위험 지역으로 긴급 투입됐던 그들이 그 '승전 보고' 이후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해집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군이 빠진 빈 자리를 메우러 들어갔던 터키여단은
워커장군의 미 제8군이 철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며 버티다가 1950년 12월 1일 평양까지 철수했다고 합니다.
이 청천강 전투가 6.25전쟁 참전기간 중 터키여단이 가장 큰 인명피해를 봤던 전투였습니다.
@@만물상자TV전쟁의신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예전 미국 장성이 영국 다큐에서 증언한것이 기억납니다. "힌국군들은 마치 변절자traitor같았다. 우리 부대 배속된 카튜사 병사들은 언제나 믿음직스러웠던 동료였지만 한국인들 왜 자기나라 부대로 가면 그렇게 병신같아 지는지 모르겠다" 그 장성은 나름의 분석도 내놓앟지요. "힌국군 장교들이 가장 문제인데 그도 그럴것이 한국이 일본 식민지를 거치는 동안 그 누구도 책임감있는 리더로서 제대로 훈련 받지 못했다". 정말 냉철한 분석 같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이 군대와 같은 조직을 책임지고 이끄는 교육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그나마 백선엽 같은 소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변절자
이당시 한국군은 정말 당나라 군대였네요~ 이러니 전쟁초기 나라를 전부 뺏겼고 이는 정치인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리지웨이 장군은 1950년 12월말에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습니다.
그가 오자마자 충격적인 한국군의 집단 패주를 목격했고 권총까지 쏘며 저지했던 사실은 그 동안 어디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입니다.
급조된 군대 경험부족한 지휘관 중공군에 대한 정보부재 중공군의 전술에 대한 무지 등이 결합된 안타까운 사건. 지피지기
당시 국군이 식민지후 유엔 신생국된게 48년이고 국방경비대라는게 만들어지고 농민 징집병 국군된게 채 2년인데 이해해줘야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51년 52년 부터는 사단별로 미군의 체계적인 훈련받은 뒤로는 그전의 패주하는 국군이 아닌 월남전 때 보여준 끈기 있고 용ㅇ맹한 모습의 효시를 보여주는 국군이 됨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채널에서는 말씀하신 그 부분도 놓치지 않고 다뤘습니다.
th-cam.com/video/bO-nNOmw2S8/w-d-xo.html (중공군만 만나면 도망? 국군은 사실 너무 억울하다)
위 컨텐츠에서 국군의 억울함을 다뤘습니다. 핵심은 낙동강 방어전 이후 북진할 때 국군은 무려 20만명이나
대규모 징집이 이뤄집니다. 그런데 훈련은 고작 2주도 받지 못했습니다.
중공군에게 밀렸던 이유는 바로 이 원인이 컸습니다.
또한 6.25전쟁 초반 그 부족한 무기조차도 1949년 7월부터 국군에게 보급되었습니다.
베트남전쟁도 미국이 보급다책임지고 포병지원하고 공군지원에 월급까지다대줘서 잘싸운거지 만약 한국군 단독으로 베트콩 만났으면 중월전쟁에서 쫓겨나버린 중공군꼬라지 났다고봅니다
베트남군과 다름이 없었던 오합지졸 이었네요. 우크라 군도 크름반도 먹힐땐 오합지졸 이었지만 미군의 훈련을 받고 미군 전술을 받아들인 최근엔 러시아군을 상대로 아주 훌륭하게 전사로 변했습니다. 70년간 미군의 무기와 미군식 훈련을 받은 현재의 한국군은 정말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군대 입니다. 우크라 러시아 전쟁을 보고 느낀 것 입니다.
어떤 군대던지 처음부터 잘 싸울 수는 없는 법이죠. 물론 독일군같은 경우는 예외입니다.
이 컨텐츠에서 나온 것은 모두 사실입니다. 리지웨이 회고와 중국측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이 컨텐츠에 등장하는 리지웨이는 워커장군 사망 후 미 8군 사령관이 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부임하자마자 중공군 3차공세가 터진 것입니다.
그래도 3스타에 미 8군 사령관이면 사실상 한미 지상군 전체를 컨트롤 하는 장군입니다. 더구나 남의 나라 장군이죠.
그가 도망치는 국군 가운데 뛰어들어 권총까지 쏘며 저지한 사실은 좀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무시한 채 좀비처럼 도망친 국군은 더 놀랍습니다.
이런 것은 어디에서도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어이없네..2014년 크림반도 돈바스전쟁으로 우크라이나군은 끊임없이 러시아군과 전투를수행하던 베테랑군인들이고 한국군은 70년간 실전경험이 없는 군대인데 이걸 비교한다고?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정말 필요한 시리즈이고 좋은 공부가 되는 영상들인데 이상한 정치병 환자, 반미 공산당들, 그도 아니면 이상한 자기비하에 빠진자들이 기어들어와서 분위기를 흐리고 있네요... 안타깝습니다.
감사합니다.
구독자 여러분은 지금 6.25관련 전문서적 3권 이상의 액기스를 가장 이해하기 쉽게 눈으로 보며 흡수하고 계십니다.
동서고금의 확실한 진리.... 많이 안해보면 잘 못한다..
교육이 되어야하는데 45년도에 광복하고 48년도에 정부수립하고 , 무슨시간이있었겠어요. 왜 친일파경찰이나 군인들을 그냥쎴겠어요. 저때 국방부장관이나 육군참모총장이라는사람들 일본군만주군에서 소위중위하던사람들이랍디다.
친일파 대부분 남쪽에...
저때당시에는 북한군한태도밀렸죠 물론우리나라가못살아서그런것도있는죠 그래서미군한태의존할수밖에없었죠 통일을코앞에둔상황에서 한국군이제대로싸웠다면 통일했을것같내요
10년동안 국공내전으로 단련된 중공군을 제외하고 UN군도 베테랑 병사가 많지않았어요 2차대전끝나고 정예 미군들은 거진다 퇴역하고 초병들이 참전했습니다.
너무 부끄럽내요ㅠㅠ.
네~ 그렇죠.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리지웨이 장군이 권총까지 빼들고 도망가는 국군병사들을 막았던 것은 전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혹시라도 리지웨이가 한국에 실망해서 싸우지 않을까봐 달랬던 사실은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복무기간 단축되어 훈련소빼고 자대생활 1년4개월만에 병장제대하는 지금과, 저때 오합지졸 후퇴한 한국군 병사전투력 비교하면, 크게 다르지 않거나 실전경험상 더 못할것 같은 걱정이 있네요. 개인폰 통화 폭주할듯,
저때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지..
어찌보면 중국 과의 수천년 전쟁의 역사 동안 가장 우리나라 가 중국 에게 힘없이 밀려서 가장 위험한 시대.
리지웨이 장군이 battle of Bulge 랑 Ruhr 전투당시 몬티 휘하에서 발터 모델을 상대로 싸웠네요. 이렇게 몬티랑 발터모델이 한국하고도 연관이(?) 되네요.
2차대전과 6.25전쟁은 의외로 연결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8군 사령관 워커장군, 릿지웨이, 밴 플리트, 나중에 UN군 총사령관이 되는 클라크 장군 등이 모두 독일군과 싸웠죠.
맥아더만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웠지만 그외에는 독일의 장군들과 한번씩 붙어본 장군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저당시 유엔군과 국군 총 병력은 50만이 넘었고 중공군 1차투입은 23만. 북한군 패잔병 일부로 병력숫자도 아군이 훨씬 많았습니다. 다만 전술적으로 중공군에 밀린것이죠.
그렇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무식한 단순 돌격이 아니었습니다.
적이 가장 약한 곳에 순간적인 집중력을 높였던 전술이었습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아군은 적고 적은 엄청나게 많다고 느끼게 만드는 전술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야간을 이용했고 우회 포위기동을 통해 후방이 이미 차단되었다는 공포감을 선사했습니다.
국군이 이후에도 계속 중공군에게 패배한 이유는 바로 이 공포감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인해전술은 적에 대한 심리적 타격까지도 포함된 가공할 전술이었습니다.
본인에 허접함을 직시해야 발전 할수 있지 않을까요? 국군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더 개판입니다
@@ssang72 네 그럴거라고 추측합니다.
걍 미국이 개입안했으면 한반도는 중국인들로 바글바글대서 티베트처럼 중국땅이 되버릴게 100퍼
만주군,일본군 30대 초급 장교, 하사관급들이 사단을 지휘하니 ㅋㅋ 전술 전략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였다는 할아버지의 증언. 중대도 지휘 못해본 장교들이 사단을 지휘하니 예비대의 개념도 없는 장군들도 있었다고... 병사들은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도 않고. 무기도 엄청 취약했음. 사단이라고 부르는게 민망할 수준이였을 지도.
그나마 그 장교들도 보병전투는 전무 후무했음,,전부 헌병이나 병참등 후방행정업무만 했음,,일본은 조선인장교 들을 일선 지휘관을 시키지 않았음, 혹시라도 총을 꺼꾸로 돌릴까보아,,,태평양전쟁의 어수선한틈을타 반란을 일으킬까봐 제일 걱정 했다고 함,,,조선인 출신의 보병 장성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고함,
월남군과 다를바 없었네요 내나라 내땅 빼앗기는데 미군들이 더 필사적으로 사수하려고 하는데
맞읍니다.지금의 군대 보세요.인원 없다고 전통적인 전투 사단들을 없에 버리고 복부기한 줄이고 그 짦은 복무기한중 훈련은 좆도 않하고..그저 겉만 번드르르한 패션군대.
전쟁은 먹는것이 최고로 중요 하다
훈련안된병사는 어려울때 못싸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말이 생각 나네요 ㅜㅜ
리지웨이 장군이 도망치는 국군 병사들을 저지하기 위해 총까지 쏘는데도
국군병사들이 좀비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사실은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그 상황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이 리지웨이가 전쟁을 포기할까봐 걱정하며 달래는 모습은 희극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리지웨이 자신의 회고록 뿐 아니라 중국측 사료에도 나오는 역사적 진실입니다.
국군이 제대로된 군대가 되기전에 한국전이 터져서 그렇지
현실을 파악 직시하고 평화만이 곧 손실이 적은 경제성장입니다.
전쟁 쌍방 희생으로 침통한 고통을 겪지만 반대로 무기장사군들은 고소합니다.
전쟁 치른 멍청이들은 너죽고 나죽고 부모형제가 다죽고 난다음 이긴들 뭔득이 있는데요.
전쟁 ❌평화⭕
11:57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도망치는 한국군을 모두 잡아 수용소로 쳐놓으라고 했다지만 아마 쏘련군이나 북한군이었다면 그들은 독전대를 동원하여 도망치는 아군에게 기관총을 갈겼을 것이다.
소련군이었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죠.
실제 독소전 당시 소련군은 아예 등 뒤에서 기관총을 거치해놓고 기다렸습니다.
국군이 이렇게 싸우지도 않고 후퇴했던 1951년 1월, 이 당시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에 온지 열흘도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권총까지 뽑아들고 도망치는 국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맘대로 도망치게 놔둬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화풀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승만 대통령은 혹시 리지웨이가 전쟁을 포기할까봐 그를 달랬다는 점입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웨이도 똑같았어요 장진호 전투당시 춥다고 병사들이 불피우면 미군에 노출된다며 그자리에서 즉각 총살 한다고 엄포를해놔서 수십만명이 영하 40도 한파에 그대로 얼어죽음
현재 우리 현역들이 문제다. 전에비해 너무 편한것만 쫓아가니.
나라 지키는데 편하게 해줘야지 그렇게 치면 니들도 문제임 왜 내무반 쓰냐? 실전과 같이 참호 파서 2년동안 생활해야지 ㅋㅋ
아니 선진국이라며? 왜 선진국 군인들이 그지같이 살아야 한다는 겨? 밖에서 귀하게 곱게 자란 애들 그지같은 곳애 던져두고 애국심 운운하면 사기가 넘치겠네ㅋㅋㅋㅋ
때에따라선후퇴도전략에도움이되죠! 적이지치면참호를깊게파고방아쇠를!
자존심이 상 하지만 이야기에 존중 합니다.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 컨텐츠에 나온 것은 모두 실화입니다.
하지만 국군은 결국 중공군 공포증을 극복했고 미군도 인정하면서 6.25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자주국방이 정말 쉬운게 아니에요
우리 외세 침략을 생각해보세요
청 러 일 그전에 왜란
중공군 상대로 유엔군과 미군테 민폐만 끼쳤었던 국군..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요...이승만 대통령이 미군 장군테 화기좀 많이 지원해달라니까 미군 장군이 화를 내며 지금 국군은 무기가 필요한게 아니라 지휘관이 필요하다고...아무튼 장도영 장군님의 첫 승리가 무엇보다 값지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밴플리트 장군 최종회를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밴 플리트도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똑같은 말을 했죠.
국군에겐 장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유능한 지휘관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밴 플리트는 훈련 뿐 아니라 미국을 모방해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됩니다.
만물상자 tv님 안녕하세요 혹시 전에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하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20년 전 화천 15사단에 있었습니다. 그땐 2년이었죠~ ㅋ 전쟁 역사가 너무너무 재미있는데 이게 우리의 역사라니 정말 너무나 뼈아프고 가슴 서리게 느껴집니다. 이승만 대통령, 얼마나 다급했으면 리지웨이 중장에게 그렇게 말을 했을까, 우리 군인들 얼마나 무서웠을까... 정말 무엇보다 국방이 강력해야 나라를 지킬 평화도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는 말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장교는 복무한 적 없습니다. 군 복무와는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철저한 사료조사와 평소 즐겨 읽는 책이 모두 전쟁역사 관련한 내용입니다.
리지웨이가 총까지 쏴가며 도망치는 국군을 저지했던 시기는 1950년 12월 말에서 1월 초입니다.
이 때는 워커장군이 죽고 그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한국에 온 지 1주일도 안되었을 때였습니다.
내용을 잘 보시면 리지웨이가 성질이 단단히 난 나머지 이승만에게 통보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58)
쉽게 말해 너가 와서 한번 꼬라지를 봐라! 이거였습니다.
때문에 이승만은 리지웨이를 달랠 수 밖엔 없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그 시기가 한국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미군 지휘부는 한국을 포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th-cam.com/video/tvU6IlUfELA/w-d-xo.html 이 컨텐츠는 지평리 전투 이야깁니다. 이 컨텐츠에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순서상으로는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지평리 전투 이후에 비로서 중공군도 한풀 꺾이고 한국의 운명도 바뀌게 됩니다.
한국군을 앞장 세우고 미군이 뒤에 섰다니 미군이 앞에 서고 한국군이 뒤에 서야는 거 아닌지 한국군을 너무 과대평가한듯 지금도 실제 전쟁 나면 실전을 치룰 수 있을까 싶네요 열에 여덟 아홉은 도망가지 않을지 ㅎㅎ
아주 예리하시네요. 3차공세. 즉 우리가 통한의 1.4후퇴라고 배웠던 바로 그 공세입니다.
3차공세 때 서울을 다시 빼앗긴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바로 이 공세 직전 미군은 국군과 나란히 방어하지 않고 뒤에서 백업하는 형태로 전략을 바꿉니다.
사료상에는 2가지 원인 때문이라고 나옵니다. 첫째는 미군 지휘부가 2차공세 때 하도 당해서 아예 국군을 전면에 세우고 자기네들은 뒤에서 막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바로 이승만과 국군지휘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국내 민간인 노무자를 대대적으로 동원해서 서부전선 임진강 부근에 엄청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미군에게 중공군을 막을거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데 단 1일을 못버텼습니다. 그래서 리지웨이가 저렇게 열이 받은 것입니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아예 버리는 돌로 전방에 세운겁니다.
전면에 세운 이유가.. 하도 제대로 못싸워서 최전방에서 죽을 각오라 싸우라고 제일 선봉에 총알받이로 배치한것임.. 뒤에 배치하면 전선이 밀릴때 제대로 서포트 못해주고 중요한 보급로 뚫릴께 뻔하니.. 최전방에서 밀려도 뒤에는 든든한 아군전선 라인이 있기 때문에 반 총알받이겸.. 자국군이 최전방에서 용감히 싸우라고 보낸듯... 자꾸 후방에만 배치하면 당나라 군대나 마찬가지였을듯... 저 같아도 도망치기만 하는 부대를 최 후방에 배치보다는 전선 라인 구축하고 도망치는 부대 꼼짝못하게... 최전방에서 싸우라고 보냈을듯... 죽어도 최전방에서 싸우다 죽으라고.....
중공군은 국공내전으로 완전 전쟁의 경험자들 인데 잘하겠죠
저건 빙산의 일각...
목소리 오지네요
t-34 맨손으로 때려잡던 정신은 어디가고..
그들은 이미 상당수 전사했습니다.
이 당시는 대규모 징집 신병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이 밭에서 일하던 논민들 공부하던 학생들로 구성되고 전쟁경험을 겪은군인들이라해야 극 소수인데 어떻게 대부분이 장기간 전쟁시련을거친 중공에서 미리파견된 세개조선독립사와 중공군에게 견딜수있을까 ? 패전당하고 밀리는것은 당연한일이지 수치가 아니다 ! 😮 하지만 지금은 강력한 국산무기와 군인들로 변화됬다 ! 😮😮😮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중공군에게 만만히 보여 당하기만 했던 국군의 문제점을 장비 부족이 아니라 훈련 부족 및 지휘관 미달로 보고
훈련 커리큘럼을 직접 짜고 한국 최초 4년제 육사를 설립하게 도운 밴 플리트의 공도
국군의 기초를 놓는데 중요했습니다. (th-cam.com/video/agvNMsb64yI/w-d-xo.html)
군인이 패전당하고 밀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아이고 이분 나라의 군대를 말아 먹내요. 그럼 그런 쓰레기 같은 군인들이 왜 필요 합니까. 625때 인민군에게도 패전하고 북한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한국군이 중공군 소리만 들어도 무조건 도망가기에 바빳다는 중공군 보고서나 미군 보고서를 보면 한국군인들은 군인들이 아니라 그냥 인간쓰레기들이었겠지요. 얼마나 한국군이 한심 하였으면 중공군이 오로지 한국군만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을까요. 한국군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만 공개하지 말고 미군들이 625전쟁때 남겼다는 형편이 없었던 한국군인들을 비난하는 문서등도 공개가 되어야 합니다
저 생각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것이 없다는것이 포인트
@rxz1600 // 현재 님의 정신적인 문제가 있듯이
당시 우리 국군들도 장교들의 지휘능력 부재와
사병들의 투지.정신력이 문제였습니다.
훈련부족.장비부족.경험부족등은 눈가리고 아웅이였죠.
중공군의 인해전술? 과대포장 회피성 용어입니다
중공군이 참전하던 시기에 병력면에서도
유엔군과 국군의 숫자가 더 많았음이 기록으로 밝혀졌어요
다만 중공군은 병력을 때와 시기.장소로 집중하는 작전을 펼쳤기에
인해전술이라는 회피용어로 정당화 한 면이 강합니다.
궁금하시면 6.25 당일부터 서울이 함락시까지
옹진반도.개성을 담당하여 지키던 국군1사단(당시사단장 백선엽)이
지휘부들이 행한 작태들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
당시 대대장.중대장들의 회고록.증언들을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6사단은개전초기 대쳬로 잘하던데 지휘부에인사이동이 어떻게 교체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6사단 청성부대는 6.25전쟁 기간 중 김종오 장군이 사단장을 맡았습니다.
김종오 장군은 춘천전투에서 북한군을 3일간 저지해내며 6.25전쟁 초반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후 장도영 장군이 6사단장을 맡게 되는데 장도영 장군의 6사단은
중공군에게 대패를 당하며 미군들에게도 욕을 먹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나 의외로 설욕의 기회는 빨리 왔습니다.
바로 용문산, 파로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대승을 거두며 6.25전쟁 기간 중 국군 최대의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th-cam.com/video/9DD1eS-xzb8/w-d-xo.html (국군 6사단과 용문산, 파로호 전투)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다른분 영상보다가 운산에서 7 연대 패퇴부분을 보았네요 . 퇴로와보급이 끊어진 고립,,,, 훌륭한 지휘관과부대였는데요
@@이디아-t1x 이 컨텐츠에서는 중공군 2차공세 당시 미 8군이 포위가 되버린 상황이
측면을 방어하던 국군 2군이 후퇴해버렸기 때문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워커장군은 포위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터키군까지 투입합니다만 터키군이 포로로 잡았다고
좋아했던 병사들은 모두 중공군으로 오해해서 잡았던 도망치는 국군들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한심하기에 그지없구나
6.25당시 군사령관 유재훙장군 부하들 다 버리고 혼자 후퇴 유엔군 사령관왈: 당신 부하들은 다 어디에 있소
유재홍왈: 모르겠 소
유엔군사령관왈:당신은 다른 직업을 찼아아 겠소 이런 인간이 나 군생활 당시 내무실에 직속상관 관등성명 란에
대통령:박정희
국방부장관:유재홍 이였지 지금도 저와 비슷한 장군이 우리군에 있으니 전작권 회수도 못하고 있지 않을까
스탈린의 설계가 아닌,
모택동의 요구대로
7~8월에
중국이 일찍 참전했으면,
맥아더와 유엔군 구경도
못해보고,
낙동강방어선 무너지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었을것임!
역사 참?
혹시 현리전투 패배의 진짜 원흉이자 만악의 근원인 알몬드에 대해서 다뤄줄수가 있나요?
이 컨텐츠의 배경은 현리전투(51년 5월) 보다 훨씬 이전의 상황 즉 중공군 참전 직후부터 3개월 간 입니다.
말씀주신 제안 감사드립니다.
남 탓해봐야 무슨 소용이죠?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전쟁 있었습니다. 이런 내용도 반성하고 다시는 저런 모습을 보이지 말자는 교훈을 얻으면 된다 봅니다.
격하게 공감합니다. 국군은 중공군만 보면 도망쳤습니다.
터키군은 도망치는 한국군을 중공군으로 알고 포로로 잡고 기뻐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한국군의 구멍을 터키군이 틀어막다가 생긴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채널에서 다뤘습니다.
차이점은 국군은 바로 도망, 터키여단은 버티다가 후퇴. 중공군을 보면 싸우지 않고 무기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이 국군의 진짜 문제였습니다.
요새 국뽕 오진데... 제가 볼때는 많이 부족합니다.. 기초적인 보병 지원 화기 또는 사단 정찰 자산 뭐가 있나요? 그 흔한 드론정찰기도 없는거 같은데... ㅋㅋ 사단 똥별들은 여군 탐하기 바쁘고... 제대로된 군인이 있을까?? 참 걱정이네요
상감령전투(저격능선전투)도 객관적인 사실 중심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주세요. 중공군은 대승이라 하고, 한국군은 정신승리라 포장하고 있고... 뭐가 맞는지 몰겠습니다 ㅋ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정확한 자료 조사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독립한지 얼마 안되서 전쟁이 났으니...ㅉㅉ
지휘관부터 자질부족 흠
한국군이 싸움을 못해서 순식간에 중공군이 남하할수 있었던 것
이 컨텐츠에 묘사된 것은 팩트입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보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무너진 미군도 따지고보면 측면이 뚫려서였는데 이 측면엔 국군이 있었습니다.
워커장군이 측면구멍을 막기 위해 터키군을 보냈는데 그 터키군이 중공군인줄 알고 잡은 사람들이
도망가다 잡힌 한국군이었다는 사실도 팩트입니다.
또한 1.4후퇴 당시 즉 중공군 3차공세 때도 가장 먼저 도망친 것은 국군이었고
포위를 우려한 다른 유엔군까지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글링이 때거지로 와봐라 다 도망가지
36년만에 꽁짜로 광복하고 5년만에 전쟁났는데 군대다웠겠나요.
네놈은 공짜로 태어난 주제에
당시 꽹과리 치고 총알받이로 내려오던 중공군이 거의 만주조선족이였다는거..
6.25 전쟁 초반에 북한군이 잘 나갔던 이유가 바로 말씀하신 중공군 출신 한인 병사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6만명 정도였는데 김일성의 요구로 6.25전쟁 직전 북한으로 보내졌습니다.
북한군 3, 4사단 105 류경수 탱크 여단이 바로 그들이었는데 국군 뿐 아니라 미군도 거침없이 격파하며 내려온 주역들이었습니다.
세계최강 미군은 왜 한달이 넘도록 (1950년 7~8월) 북한군에게 밀렸던 것일까? th-cam.com/video/V1CZYn3MFlc/w-d-xo.html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족은,중국이 만든단어이고 엄연히 말하면 조선인 조선민족,한민족이야!좋은것만 한민족이고 나쁜건 외국인이냐😅😅
@@独来独往-q6u나라 버린놈들이 뭔 한민족이야 ㅋㅋ 조선족이지
그것도 거짓말 이다 라고 말 합니다. 중공군의 90%는 한족등이고 만주 조선족은 5%도 안됬을 것 이다 라고 말 합니다. 이것도 한국군의 패전을 중공군의 인해전술 특히 만주 조선족출신 군인들에게 뒤집어 쒸웠던 한국의 625전쟁사 날조교육이 그 잘못된 정보의 원인이다 라고 말 합니다
@@jindlecarry 박정희. 백선엽이 이런 인간들도 다 나라를 버렸던 놈들인데...
무기는 대등했나?
아울러 훈련정도와 정신상태는 어떠했나?
지금에와서 우리가 좋은 무기와 치밀한 훈련 지휘관들의 작전 능력을 돈을 들여 수시로 실전훈련을 지속적으로 해야하느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군처럼 정신무장만 강요해서는 살육당할 것이고 비웃음만 살 수밖에없다
상대와의 전투시 대응하는 적절한 또는 우월한 무기와 훈련으로 준비된 군대가
평화시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거기에 지휘관의 작전능력이 융합되어야 한다
그런 치욕을 ㅉㅉㅉ
그래놓고 반대로 지금까지
교육 시켰구마
팽덕회의 함화전술과 화전양면...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저 당시의 한국전이나
도진개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진창에서 서로 머리칼 붙잡고 싸우는 그런 개때 싸움...........
누가 이기든
절대로 결과는 정의가 승리하지 않는 그런 지저분한 싸움이 되지 않을까요?
러우전은 일반의 생각 이상으로 첨단 전쟁입니다. 쌍방의 전술 수준이 장난 아닙니다. 이거 연구 안하면 한국군도 장차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msm 유사언론 폐기물들이 무슨 야삽 돌격이니 고기분쇄기니 개드립 선동질을 해대니 한국인 대다수는 바보가 됐죠.
@@유사인류조센진 아 감사합니다. 보니까 포격도 다 drone으로 line of fire 계산해서 하더라고요. anti-tank weapons도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화가 치밀어오른다.
그 어떤 채널에서도 이런 내용까지 다루진 않을 것입니다.
10:49에 나오는 리지웨이 장군의 회고 내용이 충격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정치산자 대한민국
현리전투 패전 군단장 유홍준이, 사단장 최석, 김종오...
유재홍 이자는 만고의 역적이며 한국군의 수치이고 부하를 적에게 내주고 탈북해 찾아온 장교도 만나지 못한 졸장중의 졸장이였지만 후에 국군참모총장등 고관직을 두루거친 독재자 빨기의 달인이였죠...
개자식!
승리역사만 배울점이 있는건 아니군요
유재홍 개섁끼
국공 내전으로 정예병사만 있던 중공군 vs 평화롭던 국군.
상대가 안되지.
당연한거임. 제데로 전투를 해본게 낙동강 방어전뿐인데 북진한것도 맥아더 장군의 허리가르기 작전덕에 예봉이 꺽여서이지.
이후 고지전을 치루면서 국군이 상장 하려나?
국군 성장통으루다루는 이야기도 해주세요
평화로운 국군?? ㅋㅋ 그건 아닙니다. 1948년부터 이미 남한 전역이 남로당의 무장 폭동으로 전국이 불바다였고 그거 진압하러 뛰어 댕겼기 때문에 실전 경험은 있었는데 대부분 게릴라 소탕전이였지 정규군과의 싸움은 아니였죠. 그래도 한 1년 빡세게 고생한 뒤부터는 단독으로 중공군 때려 잡을 정도로 전력이 강화되긴합니다. 미군도 한 6개월 걸렸죠.
오합지졸이 따로 없엇내 ㅋㅋㅋㅋ
미국형님 고맙습니다 ㅠㅠ
이 컨텐츠는 정확한 사료에 기반한 내용입니다.
끝까지 버티려고 터키군까지 투입했던 워커장군.
그러나 터키군이 잡은 것은 중공군이 아닌 도망치던 국군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 국군의 흑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때의 국군은 훈련도 못받고 대량으로 징집된 인원들이었기에...
지금전쟁나도비슷할듯
2차중공군 대!공세를 격었으면...핵을 압록강.신의주쪽에 2~3개 터트렸으면..어땠을까! ... 중국에 경고! ㅡㅡ
맥아더가 그렇게 하려고 했었죠. 그는 그의 인생 마지막 경력인 6.25전쟁을 누구보다도 이기고 싶었습니다.
중공을 아주 박살을 내놓고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하고 1951년에 한반도에서 자유선거를 치르려고 했었습니다.
트루먼 정부가 끝내 못하게 했죠. 맥아더의 캐릭터와 그가 해임당한 진짜 이유 (th-cam.com/video/z4_VHkGt-eM/w-d-xo.html)
미국이 2차대전 처럼 6.25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이유 (th-cam.com/video/GMssQvvL5rc/w-d-xo.html) 를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등신 같은게 미국만 핵이 있고 쏘련은 핵이없는걸로알았나?
그렇게 되면 당시쏘련의 핵이 한반도를 초토화시키겠지
그 당시 쏘련은 아직 핵을 못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 했는데 영국 스파이가 오 정보(핵이 있다는)를 미국측 에 줘서 오판 했슴
5.16후 미국 방문한 김종필 에게 트루먼 전대통령이 통일 못 시켜 줘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알려준 일화
진짜 무능한걸 넘어서 군인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한국군이다
리지웨이 장군은 워커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새롭게 미 8군 사령관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1951년 1월, 그가 중장 계급인 별 3개 번호판을 달고 달리던 지프차에서 내려
후퇴하는 국군을 총까지 쏘며 저지했던 일화는 그의 회고록에 나오는 사실입니다.
그가 도망치는 국군의 행렬을 보며 했던 말인 10:55 을 보면
"그들에게는 질서도 무기도 지휘관도 없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시 국군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매우 잘 보여줍니다.
전진.북두칠성.오뚜기.
대체 후퇴하는 한국군의 손에 무기가 안보여^^*
왜?
다버린건가? 아니면 당초 무기가 없었나?
팩트를 말씀드리면 중장비는 모두 버렸습니다.
현리전투와 밴 플리트 장군의 극약처방 (th-cam.com/video/lZgrkNCw8GE/w-d-xo.html) 과 용문산 전투 (th-cam.com/video/9DD1eS-xzb8/w-d-xo.html) 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리전투에서는 국군 3군단이 버린 대포와 탄약, 유류 등을 미 공군이 다 파괴해버렸고 용문산 전투는 승리하긴 했지만 승리하기 전에 6사단이
155밀리 포를 모두 버리는 바람에 중공군이 모두 가져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